Intro. 기억. 엘레멘탈 가드(Elemental Guard) 구름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여름이면서도 무덥지 않고 선선하던 오후. 그 이변적인 기후는 새로운 인연을 위해 하늘이 내려준 배려였을까. Intro. 기억. 광장 계단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이 보인다.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넘어지면서도 즐겁고 행복한 표정을 지우지 않는 꼬마아이들. 손을 맞잡고 웃고 떠드는 연인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말없이 한적함을 만끽하며 손목시계를 보았다. 12 : 16. 약속시간이 2시였으니 10분은 족히 기다린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슬슬 속이 끓는다. 기다리는 것은 싫다고 입이 닳도록 그렇게나 말했건만 개무시를 했단 말인가. 20분까지만 기다려보다가 나타나지 않으면 월요일에 매장시켜버려야겠다. 이 아까운 주말에 기껏 엘레멘탈 가드를 플레이할 시간을 줄이고 줄여가며 시간을 냈더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진윤. 속을 억누르며 억지로 시선을 사람들에게 고정시켰다. 사아―. -……. 언뜻, 위쪽에서 상쾌한 바람이 불어온 것 같기도 하다. 계단의 위에는 못마땅한 듯 뾰로통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는 내 또래의 소녀가 있었다. 허리까지 닿는 깨끗한 흑색 생머리가 신비스럽고 인상적인 소녀다. 마치, 새벽을 가둬놓은 것 같다. 목이 서서히 아파옴에도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빼어난 미녀인 이유도 있지만, 다른 결정적인 요인은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묘한 마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분명 그러한 것 같다. 그 이외의 이유는, 없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던 소녀는 내 빤한 시선을 느꼈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고 얼굴을 붉혔다. 아마 인상 쓰고 있던 것을 누군가에게 보여서 부끄러운 모양이다. 나도 민망하고 또한 이유 없이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은 실례일 듯싶어서, 그녀의 뒤쪽에 솟아있는 시계탑을 보는 척 하다가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조금 무리했던지 목이 뻐근하다. -저……. 맑은 미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애니메이션에서 듣던 어느 여성 캐릭터의 목소리와 비슷하달까. 대번에 방금 보았던 소녀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미인은 목소리도 예쁘다는 편견 때문일까, 아니면 소녀가 이런 음성을 갖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져서일까. 생각한대로 뒤쪽 1미터 떨어진 곳엔 작은 미소를 띄우고 있는 소녀가 서있었다. 앞으로 가지런히 모인 손이 가늘고 희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뚝뚝한 물음에 그녀는 머뭇머뭇 입술을 뗀다. -저, 혹시 짧은 스포츠머리에 불량하게 생긴 남자한명 못 보셨나요? 키는 저보다 한 뼘 정도 더 큰데……. 이 말을 듣고 나니 어찌된 연유에서인지 진윤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뭐, 잠시였을 뿐이다. 눈매가 조금 째지긴 했지만 불량하게 생기지는 않았으니 그는 아니다. 거기다, 여자가 진윤을 찾을 일도 없으니 결코 그일 수는 없다. -못 봤는데요. 고개를 약하게 저어보이자 소녀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다가 생긋 웃어보였다. 일순간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아, 미소가, 대단히 잘 어울리는 소녀다. -야아~! 거기서! 이번엔 네가 술래잖아! -메롱이다! 잡으면 해주지! -나빠!! 아까부터 뒤편에서 술래잡기를 하던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야외에서 떠드는 것이야 뭐라 할 게 못되어서 가만히 무시했다. 소녀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괘념치 않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 툭. -아? 뒤를 돌아본 채로 정신없이 도망오던 남자아이가, 소녀의 다리에 툭 부딪히고도 열심히 뛰어 내려간다. 부딪힌 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쪽은 그러하지 못했다. 소녀의 몸은 허리를 숙였을 때 부딪히는 바람에 앞쪽으로 기울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직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꺄악! 하지만 이내 자신의 처지를 이해했는지 눈을 꽉 감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몸을 돌려 소녀의 몸을 받았다. 가까운 거리였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멀었다면 소녀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품안 깊숙이 안겨오는 여인의 육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았다가 향긋한 향수냄새가 풍겨오자 정신이 약간 몽롱해졌다. 가슴에서 소녀의 맥동이 느껴진다. 많이 놀랐는지 그녀의 심박은 많이 빠르다. 나는 가만히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어내고 내 어깨에 얼굴을 파두고 있는 소녀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아……. 귀 가까이에 입을 다고 물어서인지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소녀의 몸이 한차례 바르르 떨렸다. 내 등을 강하게 끌어안고 몇 초간 심호흡을 하던 소녀는 팔에 주었던 힘을 슥 빼내며 한발자국 멀어졌다. 약간의 아쉬움이 느껴진다. 솔직히 미인에게 안겨있는 것은 마다하고 싶지는 않다. 평생은 싫지만 몇 분은 괜찮은데. 그녀는 홍조를 띄운 얼굴을 나와 마주하며 탐스러움 앵두 빛 입술을 연다. -전 괜찮은데 그쪽은……. 제가 몸무게가 있어서 말이에요……. 말하기 힘든지 홍조를 더욱 짙게 물들이며 흐리게 웃는 소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무겁지 않던걸요. 여자를 꼬드기기 위한 입 발린 소리라 해도 분명히 소녀는 가벼웠다. 깃털 같은 무게, 는 당연히 무리지만, 키가 170정도 됨직 함에도 은현과 비교했을 때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 녀석, 시도때도 없이 나를 안아제껴서 대체적인 무게는 몸이 외우고 있는 까닭이다. 내 준비된 듯한 대답에 소녀는 미약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도 이런 작업적인 성향의 문장들은 물마시듯 들어왔을 테니, 나도 그런 부류라고 오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분명 거짓하나 보태지 않은 진심을 말했을 뿐이다. 거기다 여자친구는 없지만 따로 수작 걸고 싶은 마음도 없다. 때가 되면 알아서 되던지 할 텐데, 굳이 성가신 일을 사서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진심을 거짓으로 몰아붙이는 듯한 소녀의 태도에 같이 기분이 상해서 눈매를 가늘게 뜨고 냉담하게 물었다. -다치신 곳은 없지요? -아, 예. 구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소녀는 곧 얼굴을 펴고 예의 생긋 웃으며 상체를 조금 숙였다. 아까처럼 큰 동작이 아닌 것은 그녀도 몸을 사리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도 순간 흠칫해서 반사적으로 뒤편을 보게 되었으니.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에 퉁명스러웠던 마음도 어느정도 수그러들었다. 그러자 계속해서 이곳이 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비록, 무사히 종결되었다고는 하나 유혈사고가 있을 뻔한 장소였다.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자리를 지키기엔 기분이 영 찜찜했다. -저 때문에 다치시진 않으셨나요? 소녀가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나는 순간 뇌리를 장악하는 장난기에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으으……. 그러고 보니 허리가 좀……. -엣? 어, 어떡해……. 마, 많이 아프시나요……? 한쪽 눈을 찌푸리며 허리를 짚자 소녀는 울상을 되었다. 나는 그 적극적인 반응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나아진 듯도 하네요. 미인을 안아서 그런가? -장난이…… 심해요. 눈매를 가늘게 하고 볼을 북 부풀리는 소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다친 곳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몸 하나는 튼튼하니까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몸조심하세요. 말했듯이 이곳에 머무른다는 것은 영 내키지가 않았기에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바이바이 해보였다. 손목시계의 액정엔 벌써 ‘12 : 20’이란 글귀가 적혀있다. 진윤은 내일 손봐주기로 하고 지금은 이대로 귀가해 엘레멘탈 가드에나 접속해야겠다. 그렇게 몸을 돌려 작별을 고하는 날 소녀가 멈춰 세운다. -저기, 변변찮은 사례도 못했는데…….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뭔가를 원해서 구한 게 아니니까요. 바랐다면 진작 요구했을 테죠. 웃으며 말하자 소녀가 말똥히 쳐다본다. -가볍다는 말, 진심이셨네요. -물론이죠. 사탕발림이라고 생각하셨죠? 정곡을 찌르는 말에 소녀가 움찔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수작 거는 줄 알았어요. 그런 일을 많이 겪어서……. 오해해서 미안해요. -뭐, 괜찮아요. 충분히 이해가 되니까요. 이만 가볼게요. -자, 잠깐만요. -……? 다급히 말을 거는 소녀를 의아스럽게 쳐다보았다. 무슨 할 말이 더 남아 있는 것일까? -고마워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천만에요. -아, 저, 제 이름은 진유나라고 해요. 갑자기 자기소개를 하는 유나란 이름의 소녀를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 허나 그것도 잠시, 나는 작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류현, 한류현이 제 이름입니다. 구름한점 없이 맑을 날. 여름이면서도 시원한 오후. 여름답지 않은 그 이변적인 기후는 새로운 인연을 위해 하늘이 내려준 배려였을까. 나와 진유나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 어느 순간 눈을 떴다. 익히 보아오던 아이보리 빛의 천장이 눈에 한가득 들어온다. 열려진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이끌려 늘어진 커튼이 사뿐히 하늘거렸다. 한낮인 듯 창밖으로 높게 펼쳐진 하늘은 환하게 개어있다. 따스한, 늦봄의 날씨……. “꿈이었나…….” 상체를 일으켜 고개를 숙여보며 작게 뇌까렸다. 그리고 손을 가슴 앞으로 끌어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허리를 잡았을 때의 감촉,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꿈이면서 꿈이 아닌 현실, 이란 건가. 분명 꿈속에서의 감촉이 남아있을 일은 없으니까. 가끔, 유나와 처음 만났던 때를 꿈꾸곤 한다. 무척이나 행복한 꿈이지만… 때로는 가슴 한구석이 찡하게 아려오는 꿈이기도 하다.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으니까. 그저 환상 같은 꿈일 뿐이니까. 멀어지는 과거와의 거리 사이에서 그녀도 잊혀질까 두려워서……. 쓸쓸함을 느끼며 눈을 감자 어둠의 장막이 짙게 드리운다. 그리고 들려오는 아련한 목소리. -류현아 뭐하니? 네 생각을 하고 있었어. -으응~ 같이 놀러 갈래?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반드시. “오빠~! 일어나요! 같이 놀러가기로 약속해 놓고선!” 문득 은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육성은 점점 가까워지는지 커지고 또렷해진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디지털시계엔 ‘PM 12 : 13’이란 숫자가 떠올라 있었다. 순식간에 일요일이 와버렸다. 동생과 놀이공원에 놀러가기로 한날이. 지난주 이때에 약속했었는데…….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람이 시간을 쫒아야 한다. 그래, 사람이 말이다……. “그만 자고 빨리 준비해요! 모처럼의 휴일을 잠으로 보낼 생각이에요?”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앙칼지게 소리 지르는 은현을 보며 흐릿한 미소를 띄웠다. 이런 때가 되면 유난히 부산을 떠는 은현이다. 녀석은 내가 일어나있는 것을 보고는 작은 탄성을 뱉어냈다. “아? 일어났으면 준비하고 있었어야죠.” “아아, 미안. 워낙에 행복한 꿈을 꿔서 일어나기가 싫었어.”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어색하게 웃자 은현은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또… 유나언니 만나는 꿈이었나요? 오빠는 유나언니만 나오면 좋은가보군요. 이미 언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은현은 내가 행복한 꿈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어떠한 종류인지를 알고 있었다. “비록 유나는 없지만 내 기억 속에는 남아 있으니까.” 쓸쓸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두다가 은현에게로 던지니, 녀석이 가라앉은 눈으로 날 응시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날 가볍게 보듬는다. 아무래도 은현에게 있어 나란 존재는 곰돌이 인형 대용으로 여겨지고 있는 게 아닐까. “오빠.” 내 귀에 대고 숨을 내쉬는 은현. “응?” “내가 여자친구 해줄까요? 유나언니 대신으로.” 은현은 팔을 풀고 얼굴을 마주하며 말했다. 간간히 들어오던 말이어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말만이라도 고맙다.” 나는 은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대답했다. 녀석이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빠를 아끼는 만큼 위로상의 말일 뿐이다. 만일 진심이라면 문제가 있지만. “옷 입게 나가있어라. 설마하니 이 오빠의 나체를 보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왜아니겠어요? 눈 크게 뜨고 구경해줄게요.” 이 물음에 녀석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가락까지 동원해 눈을 크게 뜬다. 그게 과장된 행동임을 알지만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부탁드려요, 은현님. 나가있어 주시면 천년만년 그 하해와도 같은 은혜 뼛속 깊이 새겨두겠나이다.” “네에~. 빨리 입고 나와요. 와~ 데이트다, 데이트~.” “야, 그거 좀 와전시켜서 해석한 거 같은데.” “그럼 둘이서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는 걸 뭐라고 해요?” “친남매가 놀러 다니는 걸 남들은 데이트라고는 하지 않는다. 평범하게 그냥 나들이라고 해라.” “와~ 데이트다, 데이트~.” “…….” 오빠의 말을 가볍게 삼켜버리는 은현. 사소한 것에 고집부리는 성격은 평생가도 고쳐지지 않을 듯하다. 은현이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서면서 문을 닫아주었기에 곧장 옷을 갈아입을 수가 있었다. 아무리 한 가족이라고 해도 일정한 선을 존재하기에 은현을 내보낸 것이다. 10분 동안 모든 외출 준비를 마치고 은현과 함께 현관에 섰다. 신발을 신는 것으로 완전한 마무리를 짓자 은현은 팔짱을 꼭 끼며 배시시 웃는다. 귀여운 녀석. 은현과 결혼할 남자는 평생의 복을 다 얻는 거다. 나는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하루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영광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돌발적인 말인데도 순간의 임기응변으로 수줍게 미소 지으며 잘 받아넘기는 은현. 역시 그 오빠의 그 여동생이라니까. “물론이에요.” “어디로 모실까요, 레이디?” “일단은 영화관이 좋을 듯싶은데요, 기사님.” “당장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어머, 감사드려요.” 오늘은 일요일. 너무도 한가로운 일요일이다. 날씨도 시간도. 모두 그때와 똑같다. 그날 이후로, 내 마음속 시계의 톱니바퀴가 고장 나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다. Level 1. 길드 워(Guild War). 하늘은 맑았다. 뜨거운 일륜이 작열하고 하얀 조각배가 천상의 바다를 항해한다. “흐아암……. 졸리잖아…….” 4교시 수업이 끝날 즈음 되어서 창밖을 내다보고 너무도 화창하고 따스한 봄 날씨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껴 허벅지를 꼬집었다. 이제 곧 점심시간인데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강인한 집념에서 나오는 자해다. 하지만 식욕, 성욕등을 모두 압도하는 수면욕 앞에서 내 의지는 힘없는 갈대에 불과했다. 가뜩이나 새벽까지 엘-가를 플레이하느라 지쳤는데 참고 참았던 잠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니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눈을 스르륵 감으며 책상 위에 팔을 두르고 털썩 엎드려버렸다. 가장 걸리지 않는 자리인 데다가 시간도 시간이니 선생님께서도 묵인해 주시겠지. 1분단 창가 쪽 제일 끝자리여서 망설임 없이 수면을 즐길 수가 있었다. ……. 그 뒤로 얼마나 잤을까. 귓속으로 조금씩 파고드는 소음에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여느 때와는 달리 완전한 수면을 한 것인지, 축 늘어지던 몸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눈이 약간 따끔거리고 머리가 조금 띵한 것만 제외하면 활동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부스스 상체를 일으켜 왼쪽 손목에 차여있는 손목시계로 눈을 돌렸다. 1시 5분이다. 12시 20분부터 점심시간이니 대략 한 시간은 잔셈이다. 뭐, 그래도 급식은 하지 않아 식당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으니 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으나, 생각보다 오래 자게 된 것은 놀라운 것이었다. 느낌상으로는 20분도 안잔 것 같았는데……. 가방을 뒤져 3교시 쉬는 시간에 편의점(혹은 매점)에서 사두었던 햄버거와 음료수를 꺼낸 뒤 창가에 걸터앉아 포장을 뜯었다. 날 깨워주지도 않은 의리 없는 친구놈들이 식사를 마치고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리고 햇살에 부딪히며 반짝이는 유리가… 너무 지저분하다. 저 얼룩 좀 봐. 얼마나 청소를 안했으면 이렇게……. 우에, 밥 맛 떨어져. 기껏 폼 잡으면서 식사를 하려 했더니만 기분만 잡쳐 도로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내 옆자리를 보며 햄버거를 한 입 배어먹었다. 내겐 짝이 없다. 반의 수가 43명이기에 자리가 하나 남게 된 것이다. 내가 43번이어서 홀로 앉기는 하지만 별로 상관은 없다.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도 아닌데다가, 옆자리에 누가 앉으면 성가실 뿐이어서 말이다. 때문에 친구 놈들이 가끔 잔답시고 오는 것도 모조리 쳐내고 있다. 나는 독고다이로 사는 것이 좋걸랑. 외로이 보이는 분위기 있는 사나이. 이 얼마나 멋진 컨셉(Consept)인가! 그러나 내일이면 이런 독고다이인생도 막을 내린다. 전학생이 온단다. 그리고 자연히 자리가 빈 내 옆자리에 앉게 될 터였다. 쩝, 이왕이면 마음이 통하는 남학생이면 좋겠지만……. 그것은 나만의 바람이겠지? 내가 다니는 ‘미르 고등학교’는 지어진지 3년도 채 안된 신설 고등학교다. 엘레멘탈 가드를 제작한 미르트사에서 지원을 하여 지은 몇 학교의 하나로서, 시설이 거의 자동화가 이루어져있는 학교다. 어떤 것이 자동화 되었는지는 차차 알게 될 것이니 생략하도록 하고, 미르트의 손길이 닿아있는 곳이어서 미르 고등학교 내의 대부분의 학생이 엘-가를 하는 실정이다. 직접적인 홍보는 하지 않지만 무연 중에 압박을 팍팍해대고 있으므로 할 수밖에 없다. 뭐, 안 그래도 재미있으니 대부분 하지. 선생님들(엘-가를 하는 선생님들을 제외한)은 이런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지만 그들이 어쩔 텐가. 미르트에 대들었다간 후원이 끊길지도 모르는데. 미르트의 후원이 학교 재정의 반을 차지하는 만큼 학교 측에선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는 거다. 클클, 고지식한 선생님들에겐 너무 고소하다. 아무튼 미르 고등학교는 무조건 남녀합반 남녀짝꿍제다. 무조건 남녀가 짝이 되어야 한단다. 만약 전학생이 여자라면 여자가 부족한 반으로 가게 되고, 남자라면 남자가 부족한 반으로 가게 된다. 모두 짝이 맞춰져 있는 상태에서 전학을 오면 돌려치기로 아무데나 처넣는다. 짜증나고 화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로 내일 우리 반으로 전학 오는 학생의 성별은 여자라는 결론이 추론된다. 이변이 생기지 않는 이상 무조건 여학생이다. 1학년도 나 혼자 않고, 2학년 초인 지금도 혼자 앉았기에 남들처럼 여자와 같이 앉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상당히 꺼려지는 일이었다. 철판을 겹겹으로 까는 철판신공 12성을 발휘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 간편하게 식사를 마치고 쓰레기를 버리고 온 뒤 다시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에는 수다를 떠는 남학생들도 있었지만, 여학생들이 지배적으로 많았다. 가까이에 있는 여학생무리의 대화로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웅성거리던 소음에서 잡음이 필터링 되며 그들의 대화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멋있지 않았니?” 한 여학생(학기 초여서 이름을 모르겠다)이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여학생이 말을 이어받았다. “멋있었어. 엘-가 홈페이지에서 다운수가 벌써 2천만이 넘어갔던걸.” “와, 대단하다.” 흠, 어떤 놈인지 정말 대단하네. 인기가 참 좋아 보이는군. 나도 유명하지만 있지만 그건 악명이지. PK로 위명을 떨쳤으니까. “어떻게 생겼을까? 앞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겠더라. 얼굴형으로 봐서는 어느 정도 생긴 것 같던데.” 단발머리가 단정한 여학생이 손가락을 입에 대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울컥하여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젠장. 장발로 얼굴을 가리는 것의 원류(이런 게 있다면)는 나란 말이다! 어떤 놈들이야?! 말아먹을 것들!! “헬 마스터에 이젠 드래곤 헌터라니, 너무 멋있어.” ……. 내 이야기잖아? 어… 분명 그린 드래곤의 레어에는 나밖에 없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운영자가 얼싸 좋다 따라와서는 하이딩(Hiding)하여 레코딩(Recording : 기록. 엘-가는 동영상과 스크린 샷으로 저장이 가능하다)한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다른 유저? 대체 내가 드래곤 잡는다는 것은 어떻게 안거지? 며칠 전에 중앙 산맥에 거주하는 스페셜(Special)급 몹인 그린 드래곤을 잡았다. 세븐 드래곤(Seven Dragon) 중 가장 약골인 데다가 힘을 일부 봉인하는 봉인석을 사용했음에도 가상시간으로 10시간(게임시간이다. 현실시간의 10배로 증폭된다)동안 격전을 치른 몹(Mob)이었다. 그때까지 엘리트(Elite)급과 스페셜급의 능력차가 그렇게 큰지 몰랐기에 의기충천한 모습으로 갔다가 큰 낭패를 당할 뻔 했었다. 게임오버를 감수하고 노력한 결과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엘리트 아이템을 얻고 그동안 모아놓은 퍼센트가 있어 레벨이 395에서 396으로 업 되었지만, 현재로는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몹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지금처럼 드래곤 헌터라고 불리게 되었다. 헬 마스터는 엘-가가 상용화가 된지 3년 뒤부터 게임에 식상함을 느껴 지속적으로 PK(Player Kill)만 하고 다님으로서 얻게 된 칭호다. 덕분에 많은 레벨 업과 부를 쌓을 수 있었지. 4개월 전에 PK는 그만두었지만 헬 마스터라는 칭호는 여전히 따라붙고 있는 형국이다. 싫지만은 않은 것이어서 따라붙는 것은 상관없으나, 드래곤 헌터와 혼동될까봐 걱정스럽기는 하다. 각설하고. 난 누구에게도 내가 드래곤을 잡으러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일절. 그럼 세간에 떠도는 내 동영상이라는 것은 뭐라 설명해야할까.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면 내게 들키지 않을 수가 없다. 내겐 기척을 잡아내는 능력이 있으니 말이다. 그럼 결국엔 모든 것을 숨기고 다닐 수 있는 운영자라는 소리인데……. 얼마나 건수가 없었으면 몰카(?)까지 한다니? 한심스러운 작자들 같으니라고. 최근 유저들의 관심을 끌만한 건수가 터지지 않아 조용한 나날을 보내던 미르트이니 당연히 의심순위의 1순위를 꿰찰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헬 브레스(Hell Breath)로 드래곤을 소멸시키는 거 정말 장관이더라.” 헬 브레스. 엘리트 스킬중 하나인 ‘헬 스킬 북(Hell Skill Book)'에서 오의(奧義)라 할 수 있는 최종기다. 파괴력만을 보면 전 스킬 최강의 위력을 지닌다. 다만 캐스팅이 길다는 단점이 있다. 나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큭큭! 내가 좀 멋진 놈이지. 아, 하늘이여! 왜 절 이렇게 잘난 놈으로 태어나게 하셨나이까! 머리도 좋고(좋기는 좋다), 생긴 것도 잘생기고(글쎄), 운동신경도 좋은데다가(가장 장점), 예술까지(증명되지 않음)!!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엔터테이너(Entertainer)로 만드시면 세상이 불공평해 하지 않습니까! 절 죽여주시옵소서! 세상에 평등을……! 퍽! “어헉!” 이럴 수가! 날 정말 죽일 속셈이더냐, 하늘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그렇게나 재수 없었냐!? 그럼 말로 하란 말이다! 때마침 뒤통수를 얻어맞고 책상위로 쓰러지니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물을 찔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으면 하늘의 분노라고 여겨, 종교를 무교에서 기독교로 바꾼 뒤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 작정이었다. “…….” 다행히 하늘의 분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뒤에 이죽거리며 서있는 네 명을 보아하니. 내 시야엔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있었다. 위에서 말한 바 네 명이었는데,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후후,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날 쳐? 늬들은 뒤졌어. 반 학생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되고 삽시간에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이죽거리는 놈들을 죽 둘러본 뒤, 가장 가까이 있는 남학생에게 말했다. “내 옥체에 위해를 가한 버러지가… 너냐?” 쿡쿡. 나 지금 빡 돌았으니까 섣부른 대답은 해주지 말기 바란다. 심사가 뒤틀리는 대답일시엔 가차 없이 응징이다. 넥타이에 꽂혀있는 넥타이핀의 색이 빨강인 것으로 보아 3학년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내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맞을 이유가 없는 이상, 날 때린 이가 노인일지라도 주먹을 내지를 것이다. 내 성격상 그런 것은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가까이에 있는 놈이 눈을 부라리며 손을 번쩍 들었고, 나는 그 행동으로 내 뒤통수를 때린 놈이 누군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이 다음은… 당연히 복수다! “이유는 5분 뒤에 듣도록 하지.” 그 후 5분 동안 무자비한 구타가 이루어졌다. 나 왕년에 날리던 몸이다. 지금은 4개월 전에 있었던 한 사건과 여동생 은현의 눈물 어린 부탁으로 조용히 지내고 있다지만(PK도 같이 그만뒀다) 가끔은 성격이 나올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내 예전 성격은 스스로가 혀를 찰 정도로 더러웠거든. 조용히 지내는 지금은 폭주라는 것으로 명명하였지. 그렇지만 난 죽지 않았다. 너희 같은 버러지 같은 놈들이 만만하게 볼 정도로 허술해지지 않았단 말이다! 그간 조용히 지냈다고 좀 얕잡아보는 모양인데, 오늘 다시 내 이름 석자를 뇌리에 박아주마. 아버지께서 과거(현재는 어머니와 같은 회사에 다니시는 평범한 회사원이시다)에 권투장을 운영하셨는지라 당신의 아들인 나도 자연히 그것을 배우게 되었고, 갖은 고난과 학대 속에서 꿋꿋이 일어선 잡초 같은 인생을 산 나다. 그런 노력의 결정체는 강인한 육체였으며 손놀림과 잔머리도 옵션으로 따라붙었다.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중학교 때는 강제전학을 3번이나 했을 정도다) 아버지와 대련을 빙자한 구타를 받으며 겉으로는 멀쩡하나 속은 엉망으로 망가지는 구타법도 몸으로 익혔다. 지금 그 구타법을 사용하면서 놈들과 몸으로 대화하는 중이다. 오늘 내일 엄청난 근육통을 호소하게 될 것이다. 장담컨대 삼일 동안은 거동이 힘들리라본다. 나도 아버지께 얻어맞은 뒤 기다시피 학교에 왔으니까. 그때 친구놈들이 꾀병 부린다고 손가락질 해 아버지를 원망했었지. 뭐, 맷집좋으면 금방 회복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 이놈들도 같은 이유로 날 원망할 것이다. 후후, 그러나 실컷 원망하라지. 인과응보(因果應報), 종과득과(種瓜得瓜), 복인복과(福因福果)라는 것임을 알려주었을 뿐이니까. 누가 치래? 때리기 시작한지 5분이 경과되자 손을 거두고 쓰레기통 옆에 처박혀 신음하는 네놈을 향해 말했다. “날 친 이유를 물어보지. 3초주겠으니 대답해라. 1초경과 시, 일인당 다섯 대씩이다.” 그리고 손을 들어 초를 샜다. 하나, 둘, 세……. “진윤이 불러!……요.” 교묘히 말을 붙여 존대한다. 어체는 따질 것이 못되기에 그냥 넘어가기는 하겠으나, 동문서답을 하는 것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누가 여기에 온 이유를 물었냐? 대갈통을 불쌍해서 한대씩만 갈겨주고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흐흐, 이런 상황에서 한번 해보고 싶었어. “날 때린 이유가 뭐냐고 물었어.” “……그, 그냥!……요.” 오호, 그냥이란다. 멀쩡히 있는 사람을 ‘그냥’ 때렸다는 거냐? 눈이 자꾸 뒤집히려 하는데 어떻게 하지? 이대로 이성을 잃고 잠시 후에 찾아 봐? 빡이 돌다 못해 꼭지가 열릴 지경이다. 안되겠다, 너희도 그냥이라는 이유로 맞아봐라. 기분 진짜 망가진다. 이를 빠드득 갈면서 놈들을 복날 개 패듯 늘씬하게 두들겼다. 그 뒤로 골병이 든 놈들은 며칠간 등교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쯧쯧, 곧 대입고사 볼 인간들이 그래서야 쓰나. 나는 폭력을 휘둘렀다는 증거의(증인은 많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 꼬우면 진단서 끊어오라고 해!) 불충분으로 인해 처벌받지 아니하고 조용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방과 후 내게 처참하게 깨진 적이 있는 미르고의 짱, ‘진윤’을 찾았다. 3학년이라 층을 올라가야 한다는 점이 짜증나도 하는 수 없었다. 진윤이 날 부른다는 것은 무언가 일이 있기 때문일 터이고, 나도 태도를 확실하게 해야 하니 올라가야만 했다. 사내끼리는 주먹이 우정이라는 말이 있다. 누가 한 말이냐 하면, 바로 이 천재 ‘한류현’님께서 하신 성언(聖言)이시다. 난 성현(?)의 기질이 있거든. 아무튼 내가 고1 중반 때쯤 진윤과 만나 주먹을 섞었다. 아, 글쎄 내가 너무 설친다잖아. 열 받아서 깨끗이 밟아줬지. 그 뒤로 나와 불타는(매일 치고 박고 싸웠다) 우정을 나눈 진윤이다. 녀석이 날 필요로 할 때면 귀찮아도 도와주었다. 그로인해 이제는 나이를 무시한 절친한 친구사이가 되어버렸다. 다른 말로 말해 선배대접 받기는 글러먹은 거지, 뭐. 그가 날 부를 때는 언제나 자기혼자로는 힘들다싶은 싸움이 있을 때였다. 지금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뿐인 동생인 은현의 부탁과 ‘그녀’의 부재로 조용히 살려고 하니, 제대로 내 입장을 밝혀 학원계에서 은퇴할 생각이다. 진윤이 섭섭해 할 테지만 난 친구보단 가족을 더 중요시한다. 점심에 친근한 대화를 했던 놈들에게 말을 넣어두었으니 지금쯤 제 교실에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일사천리로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엘-가나 해야겠다. 실력이나 더 키워 또 드래곤이나 잡으러 가야지. “오랜만이야, 진윤.” 3학년 3반에 도착하여 문 앞에 서니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그리고 저편으로 보이는 흑색 스포츠머리의 진윤을 보며 손을 들어 흔들었다. 의자에 앉아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그는 날 보고 얼굴을 피며 내 쪽으로 뛰어왔다. “오오, 한류현! 이게 얼마만이냐?” 4개월 하고도 6일 째다. 피식 웃으며 팔을 벌리는 그를 마주 안아 등을 마구 쳐주었다. 반갑다!! 진윤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호쾌하게 웃어젖혔다. “하하하!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있었구나! 뭐하고 지냈냐? 난 학원 평정하느라 바빠서 널 못 만났다만.” “공부와 엘레멘탈 가드 하느라 바빠서 말이지. 그건 그렇고 날 찾은 용건이 뭐야?” 어깨에서 그의 손을 내리게 하며 근처 책상에 걸터앉았다. 아무도 없어서 책상에 눕는다 해도 태클이 들어올 거라는 염려를 할 필요는 없었다. 진윤은 내 옆에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알면서 묻냐. 당연히 전쟁 때문이지.” 말 끝났군. 난 안해. 진윤이 말하는 전쟁이란 학교 일진간의 싸움이다. 진윤에게 빠지겠다고 말하러 온 이상, 그의 말은 내 결심을 더욱 굳게 만드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말했다. “이제 손 때기로 했어. 은현이가 싸우는 나는 싫단다. 오빠로서 동생에게 미움 받는 게 얼마나 서러운 건지는 알거라 믿어.” “동생이라……. 좋은 명분이구나.” 그는 애상에 잠겨 눈을 감고 침묵했다. 나도 그에게 따로 해줄 위로의 말 따위는 없었기에 입을 오므렸다. 그에게도 여동생이 있었다. 나도 그 여동생을 알고 있다. 나와 같은 나이로서 진윤의 집에 놀러갈 때마다 마주쳤었거든. 아름다운 소녀였었지……. 그리고 진윤의 말로는 날 좋아했다지만… 이제 모두 잡히지 않는 바람 같은 과거일 뿐이다. 진윤과 함께 길을 건너다 맹렬히 달려오는 승용차에 그 대신 몸을 희생했으니 말이다. “…….” 난 잔인한 놈이다. 그의 아픈 과거를 끌어내어 내 변명거리로서 이용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도 그렇듯이 내게도 은현은 소중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진윤은 날 쉽사리 놔주지 않을 것이었다. 그냥 무시하고 빠져버리는 수도 있지만, 이는 내가 그에게 주먹동료로서 하는 마지막 예의다. 깨끗하게 청산하려거든 대화가 필수적인 요소였다. “…붙잡지 않으마. 대신… 반드시 네 가족은 네가 지켜라. 네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마음에 공감한다. 그는 친동생의 죽음을 지척에서 목격한 이다. 자신이 구하지 못하고 오히려 구해졌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찢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이토록 가슴이 아픈데 그라면 더할 것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물론이지.” 내 대답에 진윤은 익살스럽게 웃으며 주먹을 내밀었고, 나는 그 주먹에 내 주먹을 마주 대며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외쳤다. “바위, 가위, 보!!” 나 보, 진윤 주먹. 캬캬, 이겼다! 그는 굳게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이를 갈았다. “남자는 비가와도 눈이 와도 일편단심 주먹이야아!!” “개구리 배터지는 소리하고 앉아있네. 댁은 평생 주먹만 내. 그러니 유나에게 매일 졌지.” “쳇. 그래도 유나는 웃으면서 져주기라도 했다고. 네놈은 그런 선량도 없잖아!” “바랄 걸 바래야지. 난 유나에게도 져주지 않았어.” “썩을 놈…….” 진윤과 내가 하는 놀이는 언제나 유나와 함께 하던 것이다. 난 두 남매에겐 무패를 했더랬지. 진윤은 앞 상황과 같이 언제나 주먹만을 고수했고, 유나는 ‘보, 주먹, 가위’의 패턴이었으니까. 후, 또 그때가 그리워진다. 나와 진윤은 이런 놀이를 하면서 유나를 떠올린다. 그나 나나 유나는 한 가족으로 여겼으니(실제로도 진윤은 유나와 가족. 우리집 측에서는 유나를 며느리로까지 생각)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하늘을 보며 유나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태곳적 새벽의 어둠을 간직한 듯한 탁함이 하나 없는 깨끗한 검은 머릿결. 창세의 날 어둠 속에 피어나는 빛같이 새하얀 피부와 아름다운 면목. 내가 사랑하던 유일한 여인이 노랗게 노을져가는 천공에 그려졌다. “아, 맞다! 네가 그런 말을 하는 바람에 깜빡했는데 말이지.” 가만히 감상에 빠져있는데 진윤의 목소리가 맴돌아 그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괜히 나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가 얻어맞고 바닥을 뒹굴었다. 닭살 돋게 뭐하는 짓이야. 진윤은 실실 쪼개며 다시 내 옆 책상에 앉아 말했다. “내가 말한 전쟁이란 엘-가의 길드전이다. 네가 전에 말한 바, 너 상당한 고렙(레벨)이라며. 몇 주 전에 잡았던 화성고 자식들이 엘-가에서도 이긴다면 완전히 승복하겠다고 하더군. 길드전 신청은 끝난 상태고, 네가 오늘 용병으로 와주었으면 한다. 길드전 할 때는 사망해도 그 길드 측의 명성과 자금만 줄어드니 임시 길드원으로 받아 놓으마. 오늘 저녁 10시에 시작하니까, 그때까지 오기만 하면 돼. 안되겠냐?” 그럴 리가 있나. 그런 류의 싸움이라면 언제든지 참가하도록 하지. 나는 고개를 저어보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도록 하지.” “고맙다. 트렌에서 나한테 메시지 보내라. 바로 달려갈게!” “알았어. 보낸 뒤 5분 내로 안 튀어오면 길드전이고 뭐고 삐쳐서 돌아갈 테니 현명한 움직임을 바란다.” “큭큭! 3분. 아니 1분 내로 가주지!” 나는 그에게 씩 웃어 보이며 일어섰다. 서로의 용건이 끝났으니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할 것도 없는데 미쳤다고 남정네 둘이서 궁상떨랴. 한시바삐 귀가하여 엘-가에 접속하는 것이 이런저런 수지타산에서 이득이다. “갈게.” “야, 잠깐.” 걸음을 옮기는 날 진윤이 앞에서 강하게 끌어 앉았다. 분노에 앞서 어쩐지 서글픔이 먼저 느껴졌다. “이제 유나는 잊어라. 네 인생은 아직 창창하잖냐. 망자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짓이야. 유나도 네가 이런 식으로 힘들어하는 것은 바라지 않을 거다.” “…….” 그의 말에 난 대답할 수 없었다. 열리려하던 입술도 자석이 되었던지 도로 달라붙었다. 결국 입만 몇 번 달싹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유나를 잊으라고? 내가 정말 유나를 잊을 수가 있을까? 언제나 밝으면서도 수줍음을 타던 그녀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사랑해 마지않던 그녀를 어찌……. 눈동자가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진윤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유연하게 일그러져만 간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영혼의 마음……. 울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를 생각하며 울지 않기로 뼛속 깊이 다짐했는데……. 내 다짐은 이렇게 깨져버릴 정도로 나약한 것이었나…….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진윤에게는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그가 내 이 모습을 보면 오늘 하루는 술독에 빠져서 살 것이 너무도 당연했기 때문이다. 유나의 죽음을 싸움으로서 잊으려고 애쓰는 그에게 더 이상의 슬픔이 주기 싫다는 것이 내 마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먼저 돌리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 상태로 말하게 되면 눈물에 잠겨 쉰 목소리가 나올 것이 불 보듯 훤하기에 입을 다물고 문으로 향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진윤의 모습은 보지 못해 모르겠지만, 잘 가라는 웃음 섞인 말로 보건데 손을 흔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 눈에선 끊임없이 낙루가 흐르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아무래도 집에 가거든 은현이 붙잡고 통곡해야겠다. 은현이라면 이해해 주겠지. 난 앞으로 내게 닥칠 장난 같은 일들은 상상도 못하고 눈물을 닦으며 학교 복도를 거닐었다. 감정을 다스리며 집으로 돌아오니, 은현이 거실 소파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오고 체격에 맞지 않아 한쪽 어깨가 드러나는 큰 박스티에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을 본 나는 겹겹이 겹치는 황당함에 벙찐 표정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 은현이 입고 있는 옷이 바로 내가 집에서 자주 입는 평상복이었기 때문이다. 쟤는 왜 남의 옷을 입고 자는 거냐?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일세. 쯧, 벗겨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은현. 이제껏 말해왔듯이 내 친동생으로서 나와는 한 살 차이인 17세의 소녀다. 단아한 생김새와 어울리는 다소곳한 성격의 소유자로서(화나면 짐짓 무섭다) 나를 잘 따른다. 가끔 나와 마찰을 빚을 때도 있지만 종래에는 눈물을 보임으로서 내 사과를 받아내기도 한다. 뭐, 그러나저러나 하나뿐인 귀여운 동생이므로 내가 한 수 접는 것뿐이다. 다른 여자라면 어림도 없는 소리다. 은현은 잠의 바다에 깊게 잠수를 했던지 몸을 뒤척이면서도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고사리 같은 옥수를 잠자는 아기처럼 움찔움찔하는데, 그것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한다. 큭큭! 이대로는 붙잡고 하소연할 분위기가 아니잖아. 오면서 떨리던 마음이 안정되어 이젠 슬프지는 않는다지만, 통곡하려해도 이건 웃음밖에 안나오니 더욱 무리야. 그냥 진윤 붙잡고 울어버릴 것을 실수한 건가? 쩝. 내일 진윤 앞에서 ‘유나야! 유나야!’ 하고 부르짖으며 울어버려? 히죽 웃으며 가방을 내 방에다 던져놓고 거실로 돌아와 은현을 안아들었다. 어깻죽지로 흘러내린 옷을 잘 여며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속옷을 입지 않은 채여서 민망한 꼴 볼까 두려워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그나저나 정말 잘도 잔다. 섬세한 녀석이라 이정도면 깨어날 만도 할 텐데 말이야. 많이 피곤했었나봐. 새액 새액 숨을 쉬며 내 쪽으로 머리를 파묻는 어린애 같은 행동에 살풋이 미소를 지으며 발을 옮겼다. 은현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재밌는 꿈을 꾸고 있는지 웃음꽃이 얼굴 전체에 만연하게 피어있었다. 나는 은현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 잘 자라고 말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내 방으로 와 극히 사소한 곤경에 빠지고야 말았다. “…….” 갈아입을 옷이 없잖아!? 어흐흐흑! 은현이 이 자식, 왜 남의 옷을 입고 난리야!! 나보다 옷도 많으면서 왜 하필 내 옷이냐고오!! 내게는 반바지가 세 개 있으나, 현재 두개는 불의의 사고(은현이 커피 쏟고, 음료수 쏟음. 어, 그럼 오늘의 행동은 의도적이었단 말인가!)로 인하여 세탁기 안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다. 그런고로 남은 것이라고는 은현이 입고 있는 것뿐이 없는데, 여동생이니 확 벗겨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정말 환장하고도 경악스러우며 심각한 지능 감퇴의 혼란함으로 인해 앞날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다. 긴 바지? 외출할 때 입으면 족하다. 갑갑해서 싫어. 크으, 나도 은현이 옷 뺏어 입을까? 흠, 현재는 괜찮을 성 싶은 것이지만 시간이 경과되고 나면 문제가 심각해질 우려가 있다. 잠에서 깨어난 은현이 자신의 옷을 입은 날 보고 경악하여 울면서 경찰에 신고한다. 다음 날 신문 제 1면에 ‘동생의 옷을 입고 성적 쾌락을 느끼는 오빠 등장!’이라고 적혀서 발간. “흑흑! 오빠가 날 속였어! 오빠가 그런 것을 좋아할 줄이야! 이젠 오빠도 아니야! 이 짐승!” 나는 찍소리도 못한 채 경찰서 구치장에 감금되어 버리고, 이내 교도소의 변태 전용 독방으로 감금된다. 주변엔 남성의 나체 사진들로 도배를 해놓아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입히다 못해 완전 뒤집어 엎어버려, 남성만 사랑하는 놈으로 탈바꿈 시켜 여자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참회시키는 그런 독방이다. 그리고 면회 오는 은현. 내게 은현은 한 뭉치의 서류를 내민다. 석방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서명운동인 줄로 아는 나는 크게 감동한다. “드디어 많은 이가 나의 무고함을 알아주어 이런 것도 보내주는구나!” 감동하던 나는 서류뭉치 앞에 커다랗게 적혀있는 문구를 보고 크게 놀란다. 사형 탄원서! 수많은 여성단체에서 보내온 서명들이 책 10권은 채울 듯이 가득하다. 그리고 만민의 요구에 따라 나는 형장의 이슬 속에 사라져간다. “…….” 안돼! 안돼! 그럴 수는 없어! 나는 변태가 아냐! 나는 절규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은현아, 이 못난 오빠를 제발 용서해주렴! 다시는 네 옷을 입는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테니 탄원서만큼은 물려줘! 큭! 이렇게 된 이상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다. 있는 대로 살아야하는 거라면 갈아입는 번거로움 없이 교복입고 있으리! 교복 상의만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침대위에 올려놓은 마운트 고글(Mount Goggle)을 들었다. 반투명한 유리가 붙어있는 잠수경모양의 앞부분과 귀와 뒷골을 감싸는 형태의 마운트 고글. 귀 부분의 안쪽에는 이어폰이 있고, 이음새를 조절할 수 있어 자기 머리 크기에 알맞도록 조절이 가능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또한 오른쪽 귀부분의 바깥쪽의 위에는 마운트 고글을 실행시키는 활성화 버튼이 있다. 옆면엔 엄지손가락 길이만한 정사각형의 유리면이 있어 사용자의 지문을 인식하고, 그 양옆으로 마이크같이 구멍이 뚫려있는 곳에선 음성인식을 한다. 그것들이 비밀번호의 역할을 도맡아서 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마운트 고글을 씌우고 본인이 접속절차를 밟으면 타인이 본인의 모습으로 접속이 가능하기도 하다. 나도 예전에 은현이가 해줘서 은현의 캐릭터로 접속하여 플레이 했었는데, 다른 이의 모습으로 플레이를 하게 되니 너무 재미있더군. 나중에 또 해달라고 부탁해 봐야지. 마운트 고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바로 가정용과 넷 룸(Net Room)용. 가정용은 위에 설명한 것과 같고, 휴대가 간편하다. 설치 방법은 전화선 코드에서 멀티로 내어진 마운트 고글 전용 콘센트에 고글의 코드를 연결시키기만 하면 된다. 넷 룸용은 유저가 들어가야 하는 머신이어서 부피가 크기 때문에 이동이 불가능하나, 대신 사용 유저에게 최적의 안락감을 제공한다. 집에서는 침대에 누워서 해도 어디 한군데 결리기 마련인데(장시간 한 자세를 유지하다보면 그렇게 된다), 넷 룸용 머신은 그런 후유증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이중 홍채 인식(홍채의 모양과 색, 망막 모세혈관의 형태소 등을 분석해 사람을 인식하는 기술이다. 아기 때 한번 그 패턴이 완성되면 오랜 기간 동안 변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유전적으로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도 서로 다른 홍채를 갖고 있다고 한다)까지 해야 한다.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것이니만큼 해킹이 이루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뭐, 해킹하려거든 살인내야한다. 손 잘라내고 눈 뽑아내는데 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살인을 한다 해도 그 사람의 음성으로 음성변조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아, 또 불가능한 이유가 있구나. 죽으면 눈이 풀리니까. 이득도 못보고 철창행이구만. 협박하여 접속하는 방법도 있지만 미친 짓이라 당장에 말해주고 싶다. 접속하면 현실과는 단절되는데, 그 상태에서 본래 주인이 가만히 있겠는가? 당장 피 본다. 마운트 고글을 착용하고 오른쪽 귀부분의 활성화 버튼을 눌렀다. 검은색으로 반투명하던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며 뇌를 안정시켜주는 푸른빛이 새어나온다. 눈부시지 않은 빛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눈부시면 어느 미친놈이 눈 버리려고 마운트 고글을 쓰겠나. [안녕하세요. 접속하실 게임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유명한 여자 성우의 맑은 목소리가 귀로 스며들었다. 마운트 고글은 미르트에서 제작하여 초기엔 엘-가만 접속이 가능했으나, 1년의 베타테스트를 마치고 상용화 하면서 가상현실시스템을 공개했기에(기본적인 것들이다. 게임 제작 기술은 전혀 공개하지 않았다) 이제는 이런 류의 온라인 게임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에 접속하는 갈림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다른 회사들도 모두 이 접속기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하나면 될 것을 굳이 여러 접속기 만들어서 돈 낭비를 부추기지 말자는 의견이 그들의 공통적인 견해였기 때문이다. 마운트 고글이 10만 원대를 호가하거든(정액 요금도 10만원). “엘레멘탈 가드.” 여기서부터는 각 게임으로 들어가게 된다. 당연히 각 회사에 맞춰 가이드의 목소리도 변한다. 잠시 후 배경음악이 낮게 깔리며 다른 여성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늘도 저희 엘레멘탈 가드에 접속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 미르트는 언제나 쾌적한 게임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중략. 설명이 좀 길다). 아이디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접속을 원하는 유저분의 음성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자동으로 종료됩니다.] 음성 인식은 최대 3번까지 반복된다. 그때까지 확인이 안 되면 종료된다. 단 한번에 성공하기 위해선 진지하게, 그리고 또박또박 말해야만 했다. 나는 물론 대부분의 유저가 가장 귀찮아하는 절차다. 거기다 목소리가 쉬게 되면 당분간은 접속이 불가능하니 얼마나 화딱지 붙겠는가. “카르마(Karma).” [―확인되었습니다. 지문을 확인합니다. 일치하지 않을 경우 종료됩니다.] 툭하면 종료구만. 지겹다, 정말. 투덜거리면서도 지문을 하나하나 인식시켰다. 엄지, 검지, 중지……. 다섯 손가락을 모두 인식시키고 나니 곧 초록빛 광원이 강해지며 가이드가 확인 멘트를 보낸다. [―확인되었습니다. 엘레멘탈 가드로 접속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눈을 감았다. 어두운 세계가 덮쳐온다. 그리고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하며 풍경이 바뀌었다. 엘-가에는 두개의 대륙이 있다. 판타지가 배경인 ‘바크트리아’ 대륙과, 아직 오픈이 되지 않은 무협이 배경인 ‘진’대륙이 그것이다. 미르트의 말로는 진은 오픈이 힘들 거라는데, 나중에라도 오픈이 되고나면 바다를 넘어가거나 그곳에서 새로 시작할 생각이다. 한 사람당 하나의 캐릭터만 허용되기 때문에 카르마라는 또 다른 나와 헤어지는 건 아쉽지만 진명에서도 놀고 싶거든. 잃는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듯이, 헤어짐은 곧 만남을 뜻하니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을 테지. 바크트리아엔 국가라는 개념이 없다. 대신 길드(Guild)라는 것이 있어 수많은 세력다툼이 이루어진다. 각각의 길드들은 대도시일수록 강한 길드들이 모이게 되고, 자기들의 구역으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다 쓴다. 구역이 클수록 돈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돈 많은 유저들은 자신만의 집을 만들 수 있는데, 그 집에서 살면서 자신이 속해있는 구역을 차지한 길드에게 어느 정도의 세금을 내게 되니 당연하다. 그러니 길드 구역이 넓을수록 돈이 더 많이 들어오는 것이다. 유저들은 길드에 가입하면 성장에 용이하기에 되도록이면 길드에 들려고 한다. 명성이 높은 길드일수록 많은 이득이 돌아오게 되므로 대부분의 유저들은 큰 길드에 들고 싶어 하나, 큰 길드에서 초보들을 받을 리가 없잖나. 자연히 큰 길드엔 높은 레벨들이 모이게 된다. 그래서 한번 유명해진 길드는 특별한 일, 범례로 노매너 길드로 찍히거나, 길드전에서 완전히 대패해 버리는 것 등등의 일이 없는 이상 계속 강해지며 부를 쌓는다. 또한 길드에 한번 가입하면 길드 마스터의 동의가 없는 이상 탈퇴가 불가능하다. 길드가입선물을 받고 바로 탈퇴하여 튀어버리는 유저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길드에 들지 아니하고 이곳저곳 방랑하는 떠돌이들도 있는데, 내가 그런 류다. 어딘가에 속하게 되면 이런저런 제약이 많이 가해져 짜증나기 때문이다. 개인플레이가 힘들어질 텐데 무엇하러 들리오. 뭐, 덕분에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극소수지만, 차라리 이게 나았다.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내게 부탁이 많아질 테고 그러면 자연히 귀찮아지니 말이다. 눈 안에 들어오는 주변은 거목이 무성한 숲이었다. 내가 서있는 곳은 공터로서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새벽까지 사냥하다가 종료시켰던 ‘거울의 숲(Mirror Forest)'이다. 표면으로는 A급이나, 숲 속은 S급에 준하는 난이도의 사냥터. 사냥터에는 유저들이 매긴 각각의 등급이 있다. 미르트에선 그저 제작만하고 운영만하니, 이런 것을 정하는 것은 유저들의 몫이었다. 그로인해 오차가 생긴 사냥터도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 거울의 숲이다. 내가 직접 확인한 등급이니 확실하다. 오늘 트렌에 가게 되거든 바로 소문이나 내야겠다. A급으로 잘못 인식하고 숲 깊숙이까지 왔다가 그대로 게임 오버되는 유저들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거울의 숲의 내부는 음습한 곳이었다. 내가 있는 곳은 공터여서 빛을 받아 초록색 잔디가 무성하지만, 공터주변은 거목들이 경주하는 빛들을 차단하기 때문에 습기를 먹은 암갈색 나뭇잎과 나무들이 무성했다. 그것 때문에 공기가 무거운 것 같은 느낌도 받게 된다. 한번 오면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은 장소였다. 게다가 뭔 몹들이 그리 떼를 지어 다니던지, 종래에는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마나가 고갈되어 도망치기도 했을 정도였다. 음침하고 기괴스러워 차라리 드래곤의 영역이 났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뭐, 그만큼 경험치도 많이 얻어(드래곤 잡은 이후부터 여기로 와 머물렀다) 레벨이 397로 올라갔으니 후회까지는 하지 않는다. 다만 오기 싫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 “그럼 트렌으로 가볼까.” 거울의 숲은 대륙의 북단에 위치한다. 트렌은 대륙 중앙에 있고 대륙 10대 대도시 중 하나다. 거리가 제법 멀기에(기술을 사용해도 게임시간으로 30시간은 달려야 했다) 가까운 도시로 가 워프게이트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현실 시각(RT : Real Time)이 6시 정도쯤이니 내가 사용하려는 방법을 따른다면 늦어봐야 7시일 것이다. 이럴 땐 워프마법이나 스크롤이 절실해진다. 게이트는 공개해놓고 어째서 다른 것은 알리지 않는 것일까? 워프게이트는 미르트에서 유일하게 유저들에게 공개한 마법이동수단이다. 덕분에 도시간의 이동이 수월해져서 플레이하기가 상당히 편해졌다. 예전에 도시 옮겨가기 싫어서 주변만 돌았던 걸 생각하면 치가 떨려. 아마 게이트를 유지하는 세 개의 길드는 돈 꽤나 만졌을 거야. 그럼 그 돈으로 워프게이트 암호 해독해서 실용적인 것들도 제작하란 말이다! 워프 스크롤이라도 만들면 대박이거늘……!! 게으른 마법계열 클래스의 유저들을 향해 불만을 토로하며(만드는 게 어렵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다)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앞머리가 코 밑까지 오는 만큼 걸으면서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묶어두고, 암적색 누더기 로브를 벗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 상태로 다녔다간 바로 헬 마스터(혹은 드래곤 헌터)라는 것을 들통 날것이 분분하기에 한 행동이다. 그리고 가방을 어깨에 걸친 뒤에 발걸음을 옮겼다. 진윤의 길드는 제법 강한 길드인 모양이었다. 트렌으로 오라는 것을 보면 말이다. 다른 도시에서 트렌까지 마중 나오는 총 맞은 짓을 하지 않는 이상, 트렌에 있는 길드임은 명명백백(明明白白)하지. 그리고 오늘 진윤의 길드와 전쟁을 벌이는 화성고 놈들도 만만치 않은 강 길드일 것이다. 쩝. 되도록이면 엘리트 스킬인 ‘헬 스킬(Hell Skill)'은 사용하지 말아야겠다. 진윤녀석이 알면 내일 날 죽이려 들 것이기에. 그놈에게는 평생 비밀이다! 내가 헬 마스터인 것을 아는 사람은 적다. 넷 룸을 운영하는 ‘신화청’ 형과 은현, 그리고 친구들 중에서도 조성호, 박찬석, 김학진이 전부다. 게다가 그들 또한 나와의 약속으로 비밀을 지키고 있다. 여럿이 알게 되면 자연히 귀찮은 일만 일어나기 때문에. 매일 듀얼(Duel : 결투)신청에 여기저기서 도움 요청에……. 그들에게 알렸을 때부터 그런 일이 빈번했는데 많은 이가 알아봐라. 유저 공포증에 걸려 게임을 접어야 하는(물론 그럴 일은 없다. 적당히 변장하고 다니면 된다)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이쪽에서 거부라고. 걷는 동안 몹들과 단 한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농간인지 우연인지 참……. 만나면 잘근잘근 밟아놓으려 했더니만 이놈들이 내 기도에 쫄았나? 평소엔 나오지 말라 해도 계속 밀려나오더니, 지금은 몹들의 털끝 하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의 마지막 사냥이 될 것이기에 마음 단단히 먹었는데 그걸 무참히 깨부수다니! 크오오! 좀 나와라! 나와라아!! “꺄아악!” “……!!” 마침 들려오는 비명소리! 그래, 비명! 드디어 나오는 구나……? 응? 비, 비명? 소프라노 톤의 비명을 지르며 등장하는 놈이 여기에 있었던가? 대부분이 ‘크오오옷!’하며 달려 나오던데……. 의아한 마음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란 없이 습한 바람만 불어왔다. 흠, 잘못 들은 것이었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찝찝한 심사로 다시 걸음을 옮기려고 할 찰나였다. “꺄아아악!!” 우 방향 100미터 지점! 엘-가 죽돌이로 출시 된지 6년 동안 플레이하다 버그 신고했다고 얻게 된 ‘절대감각(Absolute Sensation)’이라는 능력으로서(엘리트 아이템이나 능력치라도 올려줄 줄 알았더니 이런 것을 줘서 황당했다), 지금은 소리만 듣고서도 그 위치를 알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 상태다. 나와 같이 베타시절부터 플레이 해온 화청 형은 흉내도 못내는 나만의 전매품이지. 청각의 특성상 방향까지는 맞추는 것이 가능하나, 나처럼 어느 정도 정확한 위치까지 맞추는 것은 힘들다. 그건 비단 형에게만 한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내가 이상한 놈일 것이다. 지금까지 버그 신고해서 얻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므로. 그래도 편리한 능력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사냥터에서 진가를 발휘하거든. 근처에 트랩이나 몹들이 있으면 기막히게 잡아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큰 비명이 있다면 구하러 가는 것도 용이하고. 처음엔 왜 이런 것을 줬나하고 화가 났지만 지금은 매우 유용하여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그럼 위치도 알았으니 가보실까! 비명소리는 곧 위험의 자기 표출이니 주변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 몹들이 있을 것이다! 기다려라, 내가 간다! 유니크(Unique) 섀도우 스킬(Shadow Skill) 레벨 파이브(Level Five) 섀도우 모션(Shadow Motion)!! 스킬들에는 모두 캐스팅이 존재한다. 마나가 그 기술의 필요량까지 소모되는 시간으로 기술들마다 다르다. 같은 마나를 소모하는 스킬들임에도 그 기술의 고유 캐스팅 속도에 따라 속도가 변한다. 특히 매직스킬들은 살상력이 좋은 대신 캐스팅이 길다. 소모되는 마나도 많은데다가 교유 캐스팅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라는 스킬의 필요마나가 100마나이고 고유 캐스팅 속도가 10Mana/s(1초당 10마나)라면, 그 스킬의 최종 캐스팅 속도는 10초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속도는 ’덱스(DEXterous)'가 높아짐에 따라 빨라진다. 그리고 스킬은 보편적으로 ‘스킬 북(Skill Book)'을 통해 획득이 가능하고, 각 스킬 북은 10개의 스킬은 가지고 있다. 스킬 레벨 10이 그 스킬 북의 극의(極意)라 할 수 있다. 각 스킬은 ‘숙련도’라는 것이 스킬 경험치로 작용해 숙련될수록 위력이 강해진다. 숙련도는 그 기술을 사용할 때마다 오르게 되며, 최대량까지 오르면 다음 레벨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각 스킬의 필요 숙련도는 스킬 레벨이 높아질수록 커지게 되고 획득양이 줄어든다. 레벨 1에서 10의 숙련도를 얻는다면 레벨 2에선 10보다 적게 얻는 것이다(레벨 1은 1000의 숙련도가 필요하고, 레벨 2는 2000, 레벨 3은 3000……, 이런 식으로 최대 숙련도도 정해진다) 내가 사용한 것은 소드스킬 종류이고, 덱스도 높으므로 캐스팅이 금방 끝났다. 쩌엉! 그림자로 보이게 할 정도로 스피드를 증가시켜주는 것이, 바로 섀도우 모션(Shadow Motion)이다. 몸이 빠르게 튕겨져 나갔다. 세상이 내 뒤로 후퇴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기마찰 같은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시전자에겐 통하지 않으므로 무리 없이 달려 나갈 수가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잔가지들을 모조리 잘라내며 얼마를 달리니, 초록빛 잔디가 무성한 공터가 보였다. 그리고 득실거리는 몹도. 아마 저들이 둘러싸고 있는 곳의 중앙에 유저가 있을 테지. 이번엔 어쩐지 몹들이 배로 몰려다니는 것 같다. 몹몰이하다 포진 당했나? 흠. 나로선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고맙다고 생각해야겠군. 많이 잡을 수 있으니까. 화끈하게 뛰어놀 수 있겠는데? 몹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기척을 숨긴 채 마나를 끌어올렸다. 한꺼번에 싸잡아서 잡기엔 다른 유저도 휘말릴 위험이 있어 무리고, 일단 한 곳을 파해 시켜 속으로 들어간 다음 유저를 구해 나와서 큰 기술로 쓸어야겠다. 마침 공터여서 진한 그림자가 생겨있으니까 그게 좋겠는걸. 유니크(Unique) 섀도우 스킬(Shadow Skill) 레벨 포(Level Four) 섀도우 홀드(Shadow Hold)!! “크르릉?!” 가로 세로 5미터 안으로 술수가 걸린 놈들이 당황하여 울부짖었다. 대부분이 미노타우로스(유니크급)였다. 쓰읍. 그레이트 미노타우로스(엘리트급)가 없는 게 아쉽군. 그럼 1차 어택이다! 유니크(Unique) 섀도우 스킬(Shadow Skill) 레벨 원(Level One) 크로우(Claw)!! 지잉―! 양손의 손가락을 검은 기류가 휘감았다. 그것이 갈고리 모양이 되자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움직임이 불가능한 이상 저놈들은 베이직급의 몹만도 못하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내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몹들은 머리에 구멍이 난 채 피분수를 만들어내며 절명했다. 포위망은 두껍지 않아 내가 금방 가운데로 진입할 수 있었고, 주변의 몹들은 움찔하며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지능이 뛰어나 내가 강한 것을 알아챈 것이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쓰러지는 동료들을 보고 위기의식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포위의 중앙엔 간편한 여행복을 입은 여성유저가 쓰러져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멍청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앞섶은 세로로 길게 찢겨져 하얀 가슴이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상태였다. 트롤(유니크급)의 손톱에 찢긴 듯한데, 난 속으로 그 녀석에게 쌍수를 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구해주는 입장에서 이정도의 대가는 있어야 의욕이 생겨! 저런 것엔 익숙하거든(자랑이다……)! “누, 누구……. 앗!” 지금 내가 누군지 말하는 것에 앞서 저 몹들의 처리가 급선무라고. 여자의 말을 끊기 위해 번쩍 안아들었다. 수준급의 미모에 눈을 동그랗게 뜨니 귀여워 보인다. 그리고… 벌어진 상의 사이로 보이는 봉긋한 가슴이 내 가슴을 두방망이질 쳤다. 오오, 나이스 갤러리!! 스크린 샷 저장이다! 저장 후 자꾸 올라가려는 입가를 파르르 떨고 나서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꽉 잡아요.” “예…….” 여자는 자신이 무슨 형색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옷을 꼬옥 붙잡았다. 때문에 민망함에 내가 시선을 거두어야만 했다. 좋은 광경이긴 하지만 이렇게 무감각하면 흥분이 가라앉잖아 나는 그 상태에서 높이 점프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몹들이 쪽수에서 강하다 믿고 동시에 덮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 따위는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에 당하지 않았다. “크와악!” 서로 부닥친 몹들이 화가 났는지 괴성을 토해내며 포효했다. 평지에서 볼 때는 그나마 적게 보였는데, 지면에서 15미터 정도 떠서 보게 되니 정말 많다. 세볼 필요도 없이 50마리는 족히 넘어보였다. 평소 나와 마주친 몹들이 최대 수가 20마리였으니 이정도면 정말 많은 수였다. 공중에 떠있는 상태에서 섀도우 모션을 시전하니 허공을 미끄러지듯 달려 나갔다. 이정도면 난다는 표현이 정확할까? 주위에 거목이 거치적거렸지만 사이사이를 교묘하게 빠져나가며 몹들의 무리에서 벗어났다. 일단은 이 여자를 안전한 곳으로 내려놓고 다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작은 공터에 다다라서 내 앞섶을 꽉 잡고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꾹 감고 있는 여자에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요.” “왜, 왜요?” 여자는 당혹한 얼굴로 날 올려보았다. 혹여나 다시 그 지옥으로 가겠냐는 의문 섞인 눈빛이다. 나는 여자를 내려주고 웃어보였다. “잡아야죠. 그렇게 몰려있는 것을 보면 잡고 싶어 미치겠거든요.” “예……? 죽고 싶어 미친 게 아니구요?” 음. 그렇게도 해석이 되는구나. 몰랐어. 여자의 기가 막힌다는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가방에서 암적색 로브를 꺼내 입혀주었다. 가슴이 훤히 보이는 상태인데 그냥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자는 내가 로브를 입혀주자 고개를 갸웃하더니, 중요한 사실을 알았는지 얼굴을 확 붉히며 가슴을 가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흐흐흐. 이미 볼 장 다 봤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크흐흐흐……. “구해준 대가라고 생각해요.” 내 웃음 섞인 말에 그녀는 귀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 웃음이 더욱 짙어진다. 글쎄다.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유나 생각이 나서 끌리는 것일 수도 있다. 유나도 수줍음을 잘 타서 언제나 얼굴을 붉히기가 일쑤였으니까……. 나는 주저앉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쭈그려 앉았다. “꼼짝 말고 있어요. 위험하면 바로 소리 지르고요. 당장 달려올게요.” “……알았어요…….” 여자는 날 힐끔 보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대답에 흐뭇해하며 일어섰다. “자, 잠깐만요.” 기술을 펼치려하는데 여자가 고개를 돌리며 날 멈춰 세웠다. 난 왜 불렀냐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여자는 머뭇머뭇하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녀의 말에 어느 과거가 떠올랐다. 유나와 처음 대면하던 날이었다. 같이 서울랜드나 놀러가자는 진윤의 말에 따라 광장에서 기다리다가 계단에서 구르는 그녀를 구해놓고 인사를 받았었지. 잠깐만요, 고마워요.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대사다. 비록 생김새는 크게 다르지만, 난 저 여성에게 큰 호감을 느꼈다. 유나의 한 부분이나마 볼 수 있다는 점에 대한 호감이었다. “천만에요.” 유나에게 대답할 때 했던 말을 그대로하고 나서 몸을 날렸다. 내 얼굴엔 웃음꽃이 만연하게 피어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진한 행복감이다.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곧장 여자를 구했던 공터로 향했다. 몹들이 있는 곳에 당도했을 때, 녀석들은 흩어지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눈에 괴성을 지르며 도로 몰려들었다. 녀석들. 그렇게나 열렬하게 날 반겨주니 감동의 눈물이 눈앞을 가리는구나. “여어! 안녕!” “크오오오!!” 동료들을 부르는 것인지 몹들은 크게 포효했고 그 수는 부쩍부쩍 늘어갔다. 나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게 되자 몸을 사리며 일단 지켜보았다. 그리고 몹의 수가 70마리를 육박하게 되었을 때 엄청나게 심각한 고찰을 해야만 했다. 도망이냐, 응전이냐. 상대하기엔 너무 많은 수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저거 죽이면 경험치가 얼만데……. 잠깐의 가치탐구 해보고 용단을 내렸다. 튀는 건 수월하게 할 수 있으니 하는데 까지 해보자는 쪽으로. “기회를 놓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지금까지 천을 칭칭 감아 봉인시켜두고 필요할 때만 쓰던 드래곤 슬레이어. 천을 빼내기 쉽도록 가드부분까지 풀어헤쳤다. 나중에 다시 감아야 할 텐데 모조리 풀어서 일거리를 늘릴 필요까지는 없지. 드래곤 슬레이어는 엘리트 아이템이다. 전에 그린 드래곤이 나의 위대함을 알고 상납한 아이템(사실은 드래곤 죽이면 얻게 되는 퀘스트 아이템이다. 다만 운이 좋아서 단번에 드롭된 것 뿐)! 날이 한쪽만 있고 비늘이 거꾸로 된 듯한 역린의 묵색 검신을 가지고 있는 드래곤 슬레이어는 공격력과 내구력이 발군이었다. 수리할 필요가 없는 것과 진배없다. 그리고 가장 매력적인 옵션은 드래곤 슬레이어를 통해 기술을 사용하면 위력이 증폭되는 것에 있다. 나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얻은 이후 좋은 아이템에 의지하지 않으려고 사용하지 않고 보통의 철검을 사용했다. 헌데 이 녀석이 손에 착 달라붙는 손잡이하며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는 등의 예쁜 짓만 골라서 하니 앞으로 계속해서 철검을 사용해야할지 고민이 된다. 그래도 좋은 아이템은 써야 약인 법이다. 자멸시킬 수도 있다지만, 내게는 소용없는 말이지. 나 같은 천재 유저에게 들어온 것이 안전장치 풀린 수류탄일지라도 내게는 유용한 무기로 둔갑하게 된다, 이 말씀! 가장자리를 헤집고 다니면서 몹들을 한군데로 몰았다. 내가 의도한 것을 착실하게 따라주어서 기쁘더군. 한군데로 모인 몹들은 서로의 몸집에 부딪히며 우왕좌왕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실소를 머금었다. 과하면 독인 법이지. 그러기에 몸집만 뒤룩뒤룩 크라고 했냐. 서로의 큰 몸집에 걸려 휘청이는 꼴이라니, 참으로 우습군. “모두 사이좋게 저승길에 올라라!” 나는 잠깐 여유가 생긴 틈을 놓치지 않고 두 눈을 빛냈다. 마나가 소모되고 있었다. 엘리트(Elite) 헬 스킬(Hell Skill) 레벨 나인(Level Nine) 헬 파이어(Hell Fire)!! 캐스팅이 끝남과 동시에 뱀의 혀처럼 홍염이 넘실거리며 붉게 달구어진 드래곤 슬레이어를 대지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잦아드는 정적. 폭풍전야(暴風前夜)가 바로 이것이다! 휘이오오―. 폭풍전야는 개뿔. 적막한 바람만 나뭇잎 몇 장을 동반한 채 불어왔다. “어…. 이게 아닌데…….” 일이 이상하게 꼬이고 있었다. 곧 반향이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주변은 조용하기만 하고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갈 뿐이었다. 아니, 이게 뭐란 말인가! 멋지게 폼 재고 있었더니만! 나는 당혹감에 드래곤 슬레이어를 쥐고 있는 손을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분명 스킬은 제대로 발동했는데 이게 무슨 경우야?! 어억! 쪽팔려! 몹들도 잔뜩 긴장했다가 아무런 이변이 없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직면된 죽음 앞의 공포에서 벗어나니 그놈들도 어지간히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공격의사 없이 날 빤히 쳐다보며 혀를 찼다. 쯧쯧거리는 소리가 정말로 들려온다. 이럴 수가! 날 동정하고 있어! 한심스럽다고 여기고 있어! 살다 살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다. 몹들에게 동정 받는 처지라니……. 난 인생 다 살았어! 엘-가의 인공지의 한계는 예측 불허다. 제작사인 미르트에서 자만심하나 섞지 않고 사실대로 진술한 사항이다. 혹자는 초 인공지능 ‘오버AI(Over Artificial Intelligence)’, 즉 사람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할 정도의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프로그래밍 상 가격인하가 전무해야할 상점 NPC(Non-Player Character)들이 흥정을 하는 등의 사례도 있고, NPC가 유저에게 반하는 등의 어이없는 일들도 빈번히 발생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유저를 동정하는 몹들도 있으니 말 끝난 거다. 파괴본능이 우선시되도록 만들어진 놈들이 저런 행동을 하다니, 세상이 망할 징조였다. “…….” 원판이 워낙 험악해서 정확한 표정변화는 모르겠다만(끔찍하게 생긴 것에서 웃어봐야 끔찍한 게 어디가나), 한없이 불쌍하다는 인상을 짓던 몹들이 일제히 적의를 발로(發露)하며 각자의 무기를 들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당연했다. 몹들은 일정치 이상 역정(逆情)이 나면 버서크(Berserk) 현상이 일어나 배로 광폭해지게 된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저들로서는 절대 도주가 요망되는 상황이다. 나도 유저이기에 일단 몸을 피하고 봐야했다. “하하……. 심기가 어지러운 모양이군. 그럼 불청객은 이만 가보겠네. 즐거웠다네.” 이럴 땐 손자병법에 의거하여 삼십육계주위상책(三十六計走爲上策)이 최선의 방법이다. 도망은 결코 아니다. 작전상 후퇴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검집에 꽂아 넣고 냅다 뛰었다. 기술이 사용될 때와 시전 된 이후 얼마간은 딜레이로 인해 스킬 사용 불가기에, 그저 하반신 지탱물에 의존해야만 했다. 물론 딜레이가 없어 연계가 가능한 것들도 있긴 하지만 내가 사용한 것은 엘리트 스킬의 고 레벨 스킬이기에 당연히 딜레이가 존재했다. 작전상 후퇴를 하면서 힐끔 뒤를 보았더니, 몹들은 예상 밖의 내 행동에 움직임을 멈춘 채로 가만히 있었다. 흐흐흐. 평생 그 자리에 서 있어라. 망부석처럼 영원히! 전력을 다해 발을 내딛었다. 기민하게 나무사이를 헤쳐 나가며 놈들에게서 멀어졌다. 그때였다. 쿠르릉! “어?” 지진이라도 나는 것처럼 대지가 진동했고, 그 때문에 몸의 균형이 깨져 정면의 나무를 들이받아 버렸다. 유저의 특권으로 큰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부은 것 마냥 욱신거리는 이마는 그야말로 개 쪽과 마찬가지였다. 크읍! 뒤로 엎어져도 이마가 깨진다더니 딱 그 꼴이구만! 아우, 쓰라려……. 대체 이 무슨 현상이야? 청천벽력(靑天霹靂)이 따로 없잖아! 쩌적! 콰앙!! “커헉!!” 돌이 반쪽 되는 소리와 함께 귀청을 따갑게 하는 폭음(爆音)이 뒤를 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몹들이 있던 장소는 적색으로 작열하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후끈한 열기가 여기까지 전해져 왔다. 건조한 대기가 볼을 스쳐 지나가고 난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높이 점프했다. 나무를 딛고 뛰어올라 나무 머리에 안착하고 나서 목격되는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화염의 검! 하늘을 꿰뚫을 기세로 솟아오르는 검신(檢身) 모양으로 된 화염의 불기둥이었다. 결코 잊지 못할 대 장관이었다. 나는 이 놀라운 관경을 멍하게 지켜보았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증폭력이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냥 불바다로 이루어져야할 기술이 최종기인 헬 브레스와 맞먹는 위력이라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난 온 몸을 달구는 희열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하하하! 보았느냐, 내 힘을! 내가 작전상 후퇴라고 했지? 이것은 일찌감치 나에 의해 안배된 결과다! 아, 난 왜이리 천재인 걸까.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정확한 계산! 난 너무 잘났어(꼴값을 떨어라……)! 내가 만약 저곳에서 좀 더 시간을 지체했다면 나까지 휩쓸렸을 것이다. 적당히 빠진 것은 잘한 짓이었다. 내가 시전자라지만 직접적인 것에만 보호를 받을 뿐, 간접적인 것에까지 미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게 가능하면 유저들은 상대에게 달라붙어 스킬을 남발할 것이다. 위세 좋던 불기둥은 점차적으로 힘을 잃어가며 사그라져 갔다. 나는 그 장면을 레코딩하여 저장했다. 빠르게 축소되어가던 불기둥은 이내 실낱같은 일섬이 되었고, 그것 또한 중간 중간 사라지듯 끊겨가며 완전 소멸되었다. 붉게 물들어있던 화창한 하늘도 파란색을 되찾았다. 꿈같은 순간이었다. 이후 똑같이 해보았지만 같은 현상은 나오지 않았다. 우연이었던 모양이다. 저장시간 최대 3분(메일 용량 상 이정도가 한계다. 엘-가는 시대에 맞지 않는 기술이 집대성된 게임이다. 21세기에 이런 게임이 나온 것이 기적이다)까지 저장을 마치고 레코딩 상태를 해제시켰다. 나중에 홈페이지에 올려야겠다. 목격자들이 많겠지만 나처럼 좋은 각도와 위치에서 찍은 것은 없을 거야. 낄낄! 이제 한달 무료다! 10만원 굳혔다! 매달 미르트에선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수많은 레코드 샷(Record Shot)과 스크린 샷(Screen Shot)에서 가장 인기가 좋고 품질이 좋은 것 세 개를 선정하여 한달 무료 이용의 혜택을 준다. 이정도의 멋진 작품이 있을 리가 없으므로 난 다음달 무료 이용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만약 안 뽑히면 게시판에 도배신공을 펼쳐버릴 테다! 답답하고 칙칙한 숲 속은 꺼려지지만 일단은 지면으로 내려섰다. 태양광선이 가려졌다. 이제는 익숙해지는 것 같아 두렵다. 어두운 곳을 좋아하면 자폐증 증세(혹은 정신병)가 있다는 것이라던데 말이다. 잠깐 방향을 맞춰보고 그 여자가 있는 공터로 달려갔다. “어?”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왔더니만 여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계속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간 거지? 꼼짝 말고 있으라 했더니 게임 오버되려고 작심을 한 거야? 유나와 같은 느낌의 여자여서 헤어지기 싫었는데……. 그리고 또 위험에 빠지면 어쩌나하고 마음 속 깊숙이에서 불안이 싹튼다. 마법 계열의 유저인 것 같던데 게임 오버되려면 어쩌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기척을 잡기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어느 것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몹들을 잡으러 갈 때 자리를 뜬 것 같았다. 쳇.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너무 후회스러운걸. 그냥 몹들 잡지 말 것을……. 제기랄 놈들! 너희만 아니었어도 그녀와 헤어지지 않아도 되었을 거잖아! 크아, 열 받아! “말없이 가버리다니……. 인사라도 해주고가면 덧나나?” 조금 섭섭하기도 하다. 기껏 구해놓았더니만 휑하니 사라져버리는 것은 무슨 심보란 말인가.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건져 놓은 게 있어 망정이지 그것마저 없었으면 울화가 치밀었을지도. 조심스레 공터를 둘러보다 여자가 주저앉았던 곳으로 향해갔다. 발목까지 오는 잔디가 보기 좋게 눌려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높여있는 주먹만한 돌과, 바로 밑에 모서리가 잡혀있는 종이 한 장. 여자가 남겨놓은 메시지였다. 흐흐, 그럼 그렇지. 유나와 비슷한 성격임에 이런 것을 남기지 않을 리가 없지! 아, 더욱 마음이가는 아가씨네 그려. 돌을 치우고 종이를 펴들었다. 또박또박 깨끗한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말없이 가버려서 죄송해요. 제 동생이 불러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시간상 길게 말하지 못하는 점도 죄송하네요……. 정말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시에는 꼼짝없이 사망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게 되니 기쁘네요. 감사의 선물은……. 아시리라 믿어요. 그리고 다음에 만났을 때 제가 인사드릴게요. 로브는 그때까지 제가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언제나 입고 있을 테니 금방 알아보실 거예요.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쁘네요. 베일에 가려있던 헬 마스터의 모습과 품성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암적색 로브를 주신 게 실수셨답니다. 핏빛 로브는 아무나 가지고 다니지 않는데다, 제가 관심이 많아 확실하게 구분을 할 수 있거든요. 물론 정체는 비밀로 해드릴게요. 원하시지 않는 것 같아서요. 우……. 계속 메시지가 와요. 이만 가봐야겠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by. 라미안. (제 아이디에요) “…….” 어지간히도 급했었나봐. 글씨는 그렇지 않지만 문장은 다급하게 작성한 티가 팍팍 났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는 것일까? 아니, 오늘 처음만난 내가 그런 것까지 깊게 관여할 필요는 없는 거겠지. 그나저나 그 유저가 가져간 내 로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정체는 비밀로 해준다고 했으니 넘어간다 하더라도 말이지……. 말이 암적색 로브지(원래는 은빛이었다지) 그래보여도 유니크 아이템이다. 내가 험하게 굴리는 바람에 지금은 누더기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지만 기능까지 저하된 것은 아니다. 레어급 스킬의 6~8레벨 마법공격에 대한 방어에, 미스릴 실로 짜여 가볍고 물리방어력도 뛰어나며(그런 게 이리도 쉽게 걸레짝이 되다니 의문투성이다) 속도증가, 체온유지 등의 옵션 기능들도 있다. 미관과 센스는 엉망이라지만 실용성만큼은 끝내준다. 왜, 색이 암적색이잖아. 참 불가사의란 말이야. 핏물이 들어 빨았더니 빠지기는커녕 아예 변색되다니. 아무튼 라미안이란 유저는 땡잡은 거야! 만약 이대로 날라버린다면 보복을 가할 것이다. 그건 내게도 중요한 물건이기에. 유나가 선물해준 물건이란 말이야! 그럼에도 왜 그리 거칠게 사용했냐면… 쓰다보니 그리되었다. 물론 흠집 낸 놈들은 내손에 명을 달리했다. “하루빨리 되찾아 와야겠는걸.” 현자의 로브(Robe Of Sage). 유나가 PK하던 나를 걱정하여 자신의 것을 내게 손수 입혀준 것이다. 당시 너무 감동 먹어서 주변을 인식하지 못하고 껴안아버려 쑥스러웠었지. 숲과 낭만의 도시 ‘몽티프’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금은 아까워서 필요한 때만 입고 언제나 깨끗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라미안에게 입혀주었지만……. 아련하게 떠오르는 지난 과거에 씁쓸히 웃었다. 서로 좋아해놓고 결국 고백도 못한 채 영영 헤어져 버리다니……. 용기를 내지 못한 내게 화가 나고, 말 한마디 없이 떠나버린 그녀가 밉다. “보고 싶어…….” 기분이 울적해진다. 오늘따라 왜 이리 유나가 그리운 걸까. 그녀의 웃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시선을 위로 던졌다. 공터 위의 하늘은 맑았다. 그리고 그 하늘엔 한 마리 새와 같은 모양의 흰색구름이 외로이 흘러가고 있었다. 거울의 숲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이자, 나와 유나의 추억이 있는 장소인 몽티프. 몽티프는 숲과 낭만의 도시답게 도시가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 운치가 있는 곳이다. 또한 많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주요 NPC들이 선남선녀인 엘프(Elf)들이어서 관광지로서의 이름도 대단하다. 몽티프에 들어선 나는 곧장 몽티프의 외각에 위치한 워프 룸(Warp Room)을 찾아갔다. 한국인의 불치병인 ‘빨리빨리병’이 도져 후딱 트렌으로 가보자는 심사에서다. “제법 오랜만이네, 이곳도. 유나와 데이트 차 왔다간 게 10개월 전이니 근 1년 만이군. 가상시간으로는 10년만이 되는 건가?” 거리를 걸으며 애틋함이 묻어나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나 이때나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부러 도시의 중앙을 가로질러가며 살풋이 웃었다. 도시의 중앙에는 거대한 세계수, ‘유그드라실’이 있는데, 엘-가의 배경 스토리에서는 이 세계수에서 세상이 탄생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 날 세계수는 세 개의 열매를 맺는데 첫 번째 열매는 이른 아침 산기슭에 떨어져 요정이 탄생했고, 두 번째 열매는 정오에 지상으로 굴러 떨어져 인간이 생겨났으며, 세 번째 열매는 고요한 한밤중에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악마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저 배경 스토리일 뿐이니 전혀 게임과는 관계가 없다. 어느 순진한 놈들은 정말 그런 거야? 라고도 묻는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할 거 아냐. 아무튼 그런 애틋한(?) 전설이 있는 세계수 앞에서 유나는 내게 로브를 주었었다. 나뭇잎 사이로 유성처럼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분위기를 잡는 우리를 보며 주변의 유저들은 축복을 해주었더랬지. 내가 헬 마스터인 것도 모르고……. 정말 아이러니하고 어이없는 상황이었어. 세계수의 앞에서 그 웅장한 모습을 올려다 본 뒤 발걸음을 워프 룸 쪽으로 돌렸다. 워프 룸은 지칭어 그대로 워프를 주임으로 하는 방이다. 한데 말이 방이지 웬만한 건물 1층 정도의 크기다. 다만 방이 나눠지는 것 없이 모두 하나로 뚫려있기에 방처럼 보여 워프 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워프 룸에 도착한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벌판 같은 공간이 날 반겼다. 그리고 그 안은 많은 유저들로 바글바글했고, 마법진 위에 올라선 유저들은 속속 사라졌다. “어서오세요. 저희 워프 룸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현관의 왼편에서 종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NPC인 줄로 착각했는데, 제대로 보니 유저였다. 돈이 없는 유저들은 이런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벌기도 하기에 유저가 카운터를 보는 것은 제법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세였다. “이용요금은 1만 렌스이며, 좌표스크롤을 받으시거든 게이트 관리자님께 가셔서 이동하실 도시 명을 적어주세요. 그전에 돈을 지불하는 것은 잊지 마세요.” 방긋방긋 영업용 웃음을 짓는 유저는 제법 귀엽고 발랄한 유저였다. 무겁던 내 마음도 다시 그녀의 생명력에 기운을 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것에 보답하고자 5만 렌스를 그녀에게 건네며 웃어보였다. “좋은 미소네요.” “아, 아니……. 이, 이건…….” 유저는 곤란한 듯 말을 더듬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녀로서는 4만 렌스라는 거금이 팁으로 들어오는 것과도 매한가지니 당황스럽기도 할 것이다. “좌표스크롤이나 주세요. 그 돈은 돌려받지 않겠습니다.” “예, 예…….” 얼떨떨해 하는 여자에게서 좌표스크롤을 건네받은 뒤 손을 흔들어주며 게이트를 관리하는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좌표스크롤을 주면서 말했다. “트렌으로 가고 싶습니다.” “트렌 말입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마법사는 오른손을 들어 검지만 펴들었다. 그 후 워프게이트를 위해 개발된 ‘라이트(Write)'마법을 사용해 마법문자로 좌표스크롤에 ’트렌(Tren)'이라 기재했다. 워프 게이트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 좌표스크롤이 반드시 필요하다. 스크롤이 마법진과 반응하여 적혀진 장소로 이동되는 것이다. 라이트마법은 코드(Code)를 작성하는 것으로서 이 게이트를 개발한 길드에서 길드마스터에게 선택받은 이들만 배울 수 있는 스킬이다. 물론 남에게 알려준다거나 할 수는 없다. 길드마스터가 그저 주입식으로 넣어버리고(이것은 미르트의 도움도 있었다) 제거하는, 길드마스터의 직권 같은 마법이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언제나 좋은 시간 보내시길.”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야말로 좋은 시간 되십시오.” 나는 마법사에게 꾸벅 인사하고 몸을 돌려 마법진 위에 올라갔다. 200명은 넉넉히 들어올 정도의 크기라 아무 곳에나 서도 이동에 무리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곧 비탄에 잠겨야만 했다. “마법사 양반! 워프가 안돼!” 누군가가 외쳤고, 나는 고개를 늘어뜨렸다. 오늘 일진 정말 왜 이러냐……. 마법사는 다급히 뛰어와 마법진을 살폈다. 주변은 불평불만으로 아우성을 쳤다. 나도 그 소란을 이루는 요소가 되어 궁시렁 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 무슨 날이야? 하는 일마나 죄다 엉망이야? 후, 미치겠다. 이놈의 게이트는 내가 올라가자마자 왜 고장이 난다니. 내가 그렇게 싫은가? 내가 이용하려하니 거부라도 하는 듯 가동이 중지되어버린 워프 게이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속으로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문제점을 찾아 신속히 복구하겠으니, 불편하시더라도 몇 시간 뒤 다시 와주시기 바랍니다!” 마법사는 좌중을 향해 크게 외쳤다. 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갖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서로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고함을 지를 뿐이었다. 나는 묵묵히 그의 옆을 지나치다가 멈춰 서서 스크롤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그가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릴 주워들을 수가 있었다. “마나 스톤의 마나가 어떻게 다 증발해 버렸지? 가득 채운 것이 어제 저녁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엘-가에는 저녁이 없으므로 현실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중얼거린 말일 것이다. 워프 게이트는 한 번 풀로 채우면 일주일(가상시간 70일)은 간다했으니, 이번 경우는 매우 드문, 아니 있을 수가 없는 경우였다. 한 순간에 마나가 증발해버린 것은 어디서도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거기다 마나 스톤이라잖아. 그게 흔한 아이템인가. 없어서 못쓰는 고가의 아이템인데……. 마나 스톤(Mana Stone). 그것은 마나 집결력이 강해 매직 계열 유저들에겐 최고의 아이템으로서 인정받는 아이템이다. 주먹만한 크기의 마나 스톤이라도 들고 있다면, 마나 회복속도가 배로 빨라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마나가 고갈되었을 경우 마나 스톤에 저장된 것으로도 스킬 시연이 가능하기에 긴급용으로도 쓰인다. 허나 이런 아이템이 그냥 나돌아 다닐 리가 있겠는가. 희소성이 강해서 주먹만한 마나 스톤도 100만 렌스를 호가해버린다. 나도 구해보려고 백방으로 뛰어보았지만 판매자가 없어 결국 구하지 못한 물품이다. 그럼에도 마나 증발이라니! 마나 스톤보다 더욱 마나 집결력이 강한 아이템이 다가오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절대 없다. “죄송합니다! 20시간 후에 다시 와주십시오! 저장 마나량이 모두 고갈되어서 더 이상의 운영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신속히 채워놓을 테니 그때까지 다른 일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20시간 뒤에 오실 때 좌표스크롤을 보이시면 전액 환불해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잠시간 말이 없던 마법사가 다시 외쳤다. 유저들은 ‘20시간’이라는 말에 얼굴이 새빨개졌다가, 전액 환불이라는 부분에서 히쭉 웃었다. 물론 나도 귀가 솔깃해졌다. 4만 렌스는 그 유저에게 마음이 내켜 주는 대가이니 아깝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는 금액들은 아쉬웠던 탓이다. “다음엔 이런 일 없도록 하시오!” “크흠! 내 다시 오리다.” “…….”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쉴 새 없이 변화시킬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환불해준다니 인심 써 봐준다는 척 하기는……. 한심스러운 작자들 같으니라고. 그러려거든 나처럼 점잖게 궁상을 떨던가 하지. 한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후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몽티프에서 20시간동안 할 짓이라고는 궁상떨고, 주접떨고 하는 것뿐이 없었다. 몽티프의 근교에는 내게 맞는 사냥터가 없으므로 레벨 업 작업은 제외하고. 지금 시각이 ‘PM 6 : 30’이고 늦더라도 9시까지는 트렌에 도착하게 될 테니 급한 마음도 없었다. 이대로 로그아웃 해서 은현이 깨운 뒤 식사나 해야겠다. 20시간보단 2시간이 절대로 적으니 은현이랑 놀면서 시간이나 때우고 다시 접속해야지. 그렇게 다짐한 나는 바로 로그아웃을 시행했다. “로그아웃.” [접속을 끊으시겠습니까?] “종료.” [엘레멘탈 가드를 종료합니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시야가 어두워졌다. “…….” 그로부터 2시간 뒤 다시 엘-가에 접속하여 트렌에 도착한 나는 썩 기분이 좋지 못했다. 첫째는 몽티프에서 겪은 일 때문이었다. 워프 룸에서 리스(Restart) 된 나는 먼저 주변을 살펴보았다. 워프 게이트는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었다. 카운터로가 약간의 소동을 겪으며(5만 렌스를 도로 주려는 유저 때문. 받을 것만 챙겼다) 이용료를 환불받고 마법진에 올라섰다. 그리고 경악에 찬 마법사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마나가 반으로 줄어들었어!” 난 뭐라 할 말이 없어졌다. 한번도 아니고 두 번 일어난 경우다. 그것도 내가 올라갔을 때. 이 일련의 사태에서 내가 뭘 안다고 나댈 수가 있겠는가. 의심의 소지가 있을지 몰라 당장 좌표스크롤을 찢어 트렌으로 워프했다. 그 후 거대한 분수대가 있는 중앙광장에(트렌의 리스장이다) 도착해서 근처 아무 벤치에나 앉아 계속 앉아있는 중이다. 그게 VT(Virtual Time : 가상시간) 20분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RT(Real Time : 현실시간)로 2시간 전에 있었던 일이 그 두 번째 이유이며 지금 내 심란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로그아웃을 한 나는 사두었던 카레를 전자레인지에 넣어 데우면서 은현을 깨웠다. 그런 뒤에 멍한 모습으로 일어난 은현을 끌어 화장실에 넣어버리고 식탁을 차렸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을 때 정신을 차린 은현이 의자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했고, 나는 녀석에게 핀잔을 주고나서 식사 끝나거든 옷 갈아입으라고 말한 뒤 조용하게 식사했다. 그러던 도중 칠칠맞게 얼굴에 카레를 묻히고도 모르는 은현에게 다가가 닦아주었다. 은현의 마음을 일찌감치 알았더라면 이런 행동은 절대로 안했을 것이었다. “오빠.” 은현은 숟가락을 내리며 날 응시했다. “나는 오빠와 내가 친남매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언제나와 같이 내게는 존댓말로 말하는 은현을 보며 안색을 굳혔다. 종종 듣는 말이었지만 도저히 녀석의 말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그런 말을 하는 이유도 듣지 못했었다.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주는데 어떻게 듣겠는가.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은현을 바라보았다. 이제 대답 같은 것은 바라지 않았다. 다만 가족이기를 거부하는 듯한 은현의 언사에 화가 날 뿐이었다. 그때 한참 말이 없던 은현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나는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고, 잠시 후 지독히 후회해야만 했다. “그러면 내가 오빠를 사랑하는 것이 용서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말을 듣고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당장 따귀를 날릴 뻔했다.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발언이다. 그리고 내 신뢰를 모조리 깨트리는 것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여동생의 범위를 넘어선 애교를 보아오면서 혹시나 했지만, ‘친남매인데……’라는 생각으로 애써 혹시나 하는 생각을 부정했다. 내 동생만큼은 정상적인 사랑을 하길 빌었고, 또한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데…….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며 반도 채 못한 식사를 물렸다. 이 이상 먹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너무도 귀엽던 은현이 이때만큼은 역겹게까지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동생이었다. 참아야했다. 애처롭게 날 보는 은현에게 파르르 떨리는 손을 꽉 쥐며 말문을 열었다. “하하, 입맛이 없어서 먼저 일어날게. 식사 다하거든 네가 치워라.” “오빠…….” 젠장!! 울고 싶은 기분이다. 유나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은현은 날 왜 더 괴롭게 하는가. 상처부위가 소금으로 저며지는 듯한 쓰라림이 가슴을 헤집었다. 유나를 떠나보낼 때 느낀 이래 최초였다. 기름 창고에 불붙은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있는 것처럼 이성이 위태위태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어찌될지 몰라 그대로 아파트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까이에 있는 벽에 주먹을 때리며 이를 악물었다. 살갗이 찢겨져 피가 흐름에도 계속 벽을 가격했다. 이대로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 때문에 계속해서 주먹을 날렸다. 피땀 흘려 쌓아두었던 탑이 허무하게 무너져버리는 것을 바로 앞에서 대책 없이 보는 기분이었다. 더욱 벽을 강하게 내리쳤다. 쿵쿵거리는 소리에 나온 안면 있는 이웃들이 날 뜯어말리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손이 깨질 때까지 혹사시켰을 것이었다. 약간의 응급조치를 받고 한참을 밖에서 서성이다가 흥분이 가라앉자 집으로 돌아갔다. 내 잘못이었다. 내가 은현에게 너무 친근하게 굴어서 생긴 일이었다. 은현을 탓할 만한 게 못되었다. 현관문을 여니 앞에는 쭈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은현이 있었다. 일순간 흠칫했지만 씁쓸한 마음으로 붕대가 감긴 손으로 은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제부터라도 무너진 탑은 다시 복구시키면 되었다. 다시는 무너지지 않게 하나하나 차근차근. 하지만 뭐가 불만인지 은현은 내 손을 거칠게 쳐내고 울면서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빤 바보에요!” 녀석의 눈물을 보게 되니 나까지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다. 이 세상에서 여자가 은현밖에 없더라도, 난 절대 은현을 동생이상으로는 보지 않을 것이다. 설사 은현이 내 친동생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후, 은현이 날 그런 마음으로 보고 있을 줄은……. 그저 가까운 친오빠정도로만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없이 푸르른 엘-가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녀석은 지금쯤 자기 방에서 울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로하거나 내 다짐을 번복할 생각 따윈 없다. 자기 목에 칼을 대고 ‘날 사랑해줘요!’라고 외친다 하더라도 무시할 것이다. 그녀석의 잘못된 사랑관은 반드시 고쳐야만 하니까. 그리고 이 일은 부모님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함구해야겠다. 특히 ‘열혈주부’로 통하는 어머니께는 더더욱. 은현은 물론 그런 자식을 난 당신까지 저세상으로 가실 분이니까. 음… 솔직히 그건 장담 못하겠다. 같은 여자라고 달래줄지도……. 만약 주체가 나였다면 난 골백번은 죽었을 테지. 하아, 어렵다 어려워. 먼 나라 이야기일 줄로만 여겼더니 바로 코앞에서 도사리고 있었다니……. 실감도 안 나고 믿고 싶지도 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대로 근심하고 있어봐야 나오는 것은 한숨밖에 없었다. 그 문제는 평생 덮어두기로 했다. 은현에겐 평상시와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나는 곧장 진윤에게 도착했으니 1분 내로 튀어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전에 1분 내로 온다 했으니 원하는 대로 해줘야하는 거 아니겠는가? 설마 언제 그랬냐고 했냐는 둥의 구차한 발뺌은 하지 않겠지. 엉뚱하게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메시지가 송신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메시지가 도착하면 반투명한 창이 떠 곧장 알려주므로 메시지 도착 여부는 반드시 알게 된다. 수신거부가 있지만 내가 언제 메시지를 보낼지 모르는 이상 진윤은 그런 미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장담할 수 있다. 추측하건데 진윤은 내 메시지를 받자마자 죽어라 뛰어오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참 멍청한 인간이다. 메시지는 움직이면서도 송신이 가능한데 말이다. 혹시나 이 인간 정말 못 받은 거 아냐? “여어, 류현!! 일찍 왔구나!!” 다행히 못 받은 것은 아니었나 보군. 진윤은 멀리서 먼지를 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난 그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정말 바보였다, 진윤은. 그는 바로 앞까지 도착해서 벤치에 나까지 끌어 앉히고 난 뒤 나를 보았다. “야! 나 안 늦었지?” “그래, 안 늦었다.” 진윤이 여기에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46초……. 어디서 메시지를 받고 온 건지 심히 궁금하다. 혹시……. “펍(Pub)에서 계속 죽치고 있던 거 아냐?” “세상을 살다보면 알아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야 살기가 수월해진단다.” “말이 많은 것으로 보아 내 말이 맞네.” “……눈치 빠른 놈.” 학교에서 아무리 늦게 집으로 갔다 해도 6시면 도착했을 텐데……. 헉! 그럼 VT 30시간 동안 펍에서 있었단 말이야? 무식한 인간! 더불어 엄청난 철판! 30시간 동안 펍에서 물만 마셨단 말이더냐!? “왜 이러셔. 오늘은 미안해서 코코아 시켜먹었지. 리필이 되니 참 좋더군.” “……자랑이냐?” 정말 존경스러운 인간이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짠돌이로 불리는 화청 형과 견주어도 꿇릴게 없을 정도다. 아무리 아껴야 잘 사는 법이라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지 않은가! 코코아 리필 30시간 때우기 작전. 오오, 보통 철판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화청 형이라도 커피정도는 시켰을 것이다. 커피의 반값도 안 되는 코코아……. 무서운 놈……. 어째서 내 주변에는 이런 류의 사람들이 산재해 있는 걸까. 화청 형에다가 성호, 학진, 진윤… 벌써 4명이다. 후…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이러니 내가 그들 따라 구두쇠가 될 수밖에 없다. 내 낭비벽을 없애준 그들을 고맙게 생각해야하는지 밉게 생각해야하는지 참……. 쓰는 재미도 솔솔 했는데 말이야. 진윤은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가늘게 뜨며 겔겔 하고 웃었다. 그의 추태에 할 말을 잃고 모르는 사람인 척 몸을 돌려 앉아버렸다. 당분간 날 아는 척 하지마라. 주변 유저들의 미친놈 보는 듯한 시선들 좀 봐.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는 너야말로 철판 제왕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이대로 자리를 뜨려는 날 진윤이 낚아채며 씩 웃었다. “길드가입하고 가야지, 어딜 그냥 가려고 하시나.” 용의주도한 놈……. “길드전 끝나거든 반드시 탈퇴 동의해라. 안 그러면 안 할 거니 그리 알아.” “걱정 붙들어 매셔. 내 길드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진윤은 옷 속에서 길드스톤(Guild Stone)을 꺼냈다. 길드스톤은 길드를 창설할 때 필요한 아이템이며, 길드 마스터의 증표이자 권능이다. 길드스톤을 들고 길드 입회소로 가 NPC에게 길드명과 마크를 알려주고 길드톤을 내밀면, NPC가 길드스톤에 그것들은 그려 넣게 된다. 그럼 길드는 완성된다. 그후 길드 마스터가 길드스톤을 들고 다니면서 유저들을 가입시키기만 하면 된다. 길드 마스터를 변경할 때도 이 길드스톤을 넘기며 서로 동의하면 변경이 가능하다. 남이 훔쳐갈 경우엔 그저 돌에 불과하게 된다. 마크가 새겨진 길드스톤은 길드 마스터 이외에는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길드 스톤이 파괴되면 길드도 같이 해체된다는 것 정도? 관수 못하는 길드마스터 탓이니 논할 것은 못된다. 진윤은 길드스톤을 내밀었다. 나는 그 위에 내 손을 겹치며 말했다. “길드가입을 신청합니다.” “허락합니다.” 길드스톤에 빛무리가 일더니 내 손으로 뻗어왔다. 그 후 건틀렛 형상을 이루며 허공에 빛으로 그려진 사자머리 모양의 길드 마크가 손등 부분으로 스며들었다. 길드가입 선물이었다. 진윤의 길드는 장갑이 그것인 모양이었다. 빛이 사라지자 형상을 갖춘 건틀렛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빛색조 가죽의 손등부분에 금색판이 붙어있고, 그 가운데 있는 세 개의 보석 중 가장 큰 보석에 사자모습이 새겨져있는 제법 세련된 모습이었다. 길드 가입은 처음해보는 것이라 신기하게 건틀렛을 요리조리 살폈다. 진윤은 길드스톤을 갈무리한 뒤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임시지만 가입을 축하한다.” “그래.” “그럼 RT 10시까지 이곳으로 와라. 나는 길드로 돌아가 준비해 둬야겠다. 너도 할 거 있으면 미리 준비해둬.” 준비라……. 언제나 이런 행장으로 다녔는데 굳이 준비할 필요는 없겠지. 게다가 사베티움(10대 도시 중 가장 큰 도시다. 바크트리아 남부에 위치해 있다)에 있는 화청 형의 저택까지 언제 다녀 오냐. 워프 게이트 쓰면 간단하겠지만 돈 아깝고 귀찮다. 이대로도 충분하단 말씀이지. 나는 엘-가에서 화청 형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화청 형은 돈이 꽤나 많아(5대 갑부에 든다더군. 말만 들어서 모르겠다), 배경에 맞춘 중세풍의 커다란 저택에서 살기에 방이 많이 남기 때문이다. 나도 독립이 가능하나 집은 살라고 있는 것! 많은 방 중 하나 쓰는 건데 뭐. 또한 집세에 해당하는 대가도 지불했고. 화청 형과 결혼할 미연누나가 이것만큼은 못마땅해 하지만 내게 피해는 안 오니 패스. 나는 몸을 돌리려는 진윤을 불러 세웠다. 아직 얘기 안 끝났어. “만약 유나가 널 남자로서 사랑했다면 어떻게 할래?” “메야? 그런 건 왜 물어?” 진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쓸데없는 것을 묻는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의 대답이 필요했다. 은현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일종의 호기심이랄까. 네가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해서 말이야. 말해봐. 넌 어떻게 할래?” “으음…….” 그는 내 진지한 모습을 보고 턱을 쓰다듬으며 고뇌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동생으로만 봐야지. 혈육을 여자로 보는 건 말이 안돼. 남들은 어찌되었건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야. 왜, 은현이가 너 좋아한데?” 눈치는 화나도록 빠르네. 내심 속이 찔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냐. 그냥 유나라면 어찌될까 궁금해서. 유나가 조금 예뻤냐.” “흐흐. 유나만한 미인도 드물었지. 그렇다고 나를 패륜아로 매도하려 들지 마라. 난 근친상간과는 거리가 먼 놈이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유나가 날 좋아할 이유는 없어. 널 죽도록 사랑했거든. 모든 사랑이 네게 향해서 남에게 사랑을 나눠줄 여력이 없었지, 그 녀석. 심지어 네가 보고 싶다고 앓아누웠던 적도 있어.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아냐? 예전에 내가 너 우리 집에 몇 번 부른 적 있지? 그거 때문에 부른 거였다. 네가 오자마자 씻은 듯이 나아 넌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그, 그러냐?”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나도 나름대로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니……. 유나의 태도로 보아 그저 친한 친구로 여기는 줄로 알았는데……. 그녀는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내가 고백하기까지 기다렸던 걸까? 아니면, 유나도 알아채지 못한 걸까? “언젠가 유나가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 ‘류현은 날 친구 이상으로 보지 않는가봐. 나는 그가 너무 좋은데…….’ 라고. 그거 듣고 정말 미치겠더구나. 네놈과 유나 사이에 낀 내가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아냐? 학교에선 친구놈의 신세한탄에 집에서는 동생놈의 신세한탄. 솔로인 내겐 염장을 지르는 것이었다!” 진윤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린 건지 눈을 사납게 치켜뜨며 내 목을 붙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난 그저 하하 웃을 뿐 손을 쳐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으므로. 한참을 흔들어대던 그는 손을 풀고 주먹을 내밀었다. “솔로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오늘 하루 화끈하게 뛰어보자.” 나도 주먹을 마주대주고 씨익 웃었다. “화성고 똘마니 자식들이 다시는 대 미르 고등학교를 핫바지로 보지 못하게 만들어주자고.” 우린 동시에 말없는 웃음을 지으며 손 모양을 바꾸었다. 진윤은 가위였고, 나는 주먹이었다. 나는 대소하면서 그에게 비수를 날렸다. “푸하하하! 사람이 한 우물만 파야지, 그렇게 줏대가 없어서야 쓰나! 내가 보 낼 줄 알았냐? 카하하! 넌 절대 날 못 이겨! 네 말대로 남자는 주먹이야, 주먹!!” 푸욱~ 푸욱~. 오오, 푹푹 찔리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리는 구나. 이 얼마나 경쾌무비한 효과음이란 말인가! 진윤은 충격을 먹었는지 어두운 기운을 머리에 쓴 채 몸을 홱 돌려 왔던 길을 말없이 되돌아갔다. 삐쳤나 보군. 사내자식이 겨우 이런 걸로 삐치냐. 말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주인 잃은 강아지마냥 터벅터벅 걸어가는 진윤의 뒷모습은 매우 처량해 보였다. “그나저나…….” 동생으로만 봐야지, 라……. 진윤은 나와 같은 생각이군. 그럼 망설일 게 없겠지. 한번 동생은 영원한 동생인 법이야. 은현이 상처받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대해야겠는걸. 나는 눈을 감고 벤치에 깊숙이 기댔다. 근심이 사라지고 나니 무지 편하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시간 등을 기대고 있다가 벤치에서 일어나 동문으로 향했다. 남은 시간동안 오랜만에 초보자의 숲으로 가 초보자들이나 도와야겠다. 나쁜 짓을 하면 착한 짓도 해야 죄가 상쇄되는 법이지. 시끌시끌한 트렌의 대로에 푸근한 미풍이 맴돌았다. 이윽고 약속한 10시가 되었다. 도시 안에서 전투를 치르기엔 너무 소란스러울 것 같아 북문으로 나와서 대치중인 미르고와 화성고. 호기심과 재미에 이끌려 나온 유저들이 이 주변을 빙글 감싸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는데, 그 중 하나가 벌어지는 차에 유저들이 모이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내겐 구경꾼들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화성고 놈들을 죽 살펴보고 인상을 쓰며 진윤에게 말했다. “여자들이랑 싸웠냐?”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아무리 싸움꾼이로서니 여자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를 놈으로 보이냐!” “그럼 저 유저들은 대체 뭐냐.” 강하게 부정하는 진윤을 보며 손가락으로 화성고 놈들의 귀퉁이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호리호리한 몸매가 확연히 드러나는 타이트한 옷을(간편한 복장인데 찢어지지 않으려나 몰라) 입고 가만히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일단의 여자들이 있었다. 모두가 눈 바로 밑까지 오는 투구로 얼굴의 윗부분을 가리고 있어서 생김새까지는 확인을 못하겠다. 이번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었던지, 진윤도 당황하여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는 제스처였다. 나는 이에 탄식하여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리 측엔 여자들이 있는 이유를 아는 이가 없으니 저쪽에다 직접 물어야하나? “거기 여자들! 당신들은 뭐야?” “…….”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침묵한다. 냉담한 반응에 무시당한 것 같아 입가가 씰룩였다. 내 경우엔 여자라고해서 게임오버 시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죄 없는 여자에게 어찌 강제력을 행사하겠나. 하지만 저들이 우리에게 피해를 준다고 판단될 시엔 말이 틀려진다. 내 손에 얄짤없이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우리 측에 몇 명이나 있을까. 대부분이 여자들을 게임오버 시키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었다. 이때 만에 하나 저 여성들까지 길드전에 합세하면 우리 쪽의 패배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잠깐의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진윤에게 조용히 물었다. “길드마스터만 죽이면 끝나는 거냐?” 이대로는 속전속결이 상책이었다. 길게 끌게 되면 우리에게만 손해가 쏟아지고 만다. 화성고 측은 여자들만 제외하면 이쪽과 쪽수가 딱 맞아 떨어졌다. 30대 30으로 싸우기로 미리 약속을 했었다고 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대저 저 여자들은 뭔가. 구경꾼이라고 하기엔 칼같이 살벌한 분위기가 너무도 걸린다. 굳은 얼굴로 있는 내게 진윤이 속삭이듯 작게 대답했다. “길드마스터만 죽이면 끝나. 아무래도 저 여성 유저들의 존재가 걸리니까 빨리 끝내버리자.” 화성고는 필사적이다. 이번 길드전에서도 지면 화성고는 우리 밑으로 들어오는 것이니까. 아마 최정예로만 구성하여 왔겠지. 우리도 다른 이유로 필사적이 되었다. 저 여자들의 존재 때문에. 전투 중에 난입하게 되면 우리 쪽만 피해를 입게 된다. 진윤은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아든 뒤 바닥에 꽂고는 외쳤다. “강진혁! 여자들은 왜 데리고 온 것이냐! 설마 저들이 싸우는 것은 아니겠지? 그럼 실망이로군! 명색이 학교의 짱이라는 놈이 여자들에게나 기대는 천하의 약골자식이었다니 말이야!” 와, 진윤. 너 언제부터 입에다 기름칠을 하고 다녔니? 말이 술술 나오네그려. 세상의 색에 물들어버렸구나. 진윤의 ‘정말 실망이야!’ 이라는 말에 화성고 측에서 한 유저가 걸어 나왔다. 진윤보다 큰 덩치에 근육도 탄탄하게 다져져있는 유저였다. 진윤의 키가 180정도 되니까 저놈은 190정도 되려나? 뭐, 모습이 저렇다고 해서 힘도 같이 좋으라는 법은 없다. 모습으로 모든 것을 판가름 하려하는 것은 엘-가에선 좋지 못한 버릇이다. 유저들의 모습은 가상현실기기 전문점에서 바디 스캔(Body Scan)하여 정해지는 것이므로, 꼬마의 모습(그냥 모습일 뿐이다. 어린이가 즐기기엔 폭력적이고 과격한 효과들이 많으므로 15세 이하 이용불가 판정을 받았다)으로 괴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그 유저를 정하는 게 아닌 것이다. 강진혁이라는 놈도 모습만 저러할 뿐 힘은 비리비리한 마법계열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저런 거구가 마법 쓰는 것을 상상해보니 엄청 어울리지 않는다. 진혁은 치아가 드러나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검을 진윤과 같이 바닥에 꽂고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 그럴 리가 없잖은가! 이들은 그저 구경꾼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마라! 친분이 있는 길드여서 같이 왔을 뿐이지!” “남자라면 그래야지! 결자해지(結者解之)!! 자신이 벌인 일은 자신이 처리해야 하는 법이다!!” 진혁은 힐끗 옆을 보고 소리쳤다. 진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팔자에도 없는 사자성어까지 써대며 진혁의 부정을 일찌감치 봉쇄하려 했다. 나도 멋으로만 귀가 달린게 아니므로 진혁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안심이 되지 않는다. 여자들의 분위기는 구경꾼과는 거리가 멀 정도로 무거웠다. 적을 앞에 두고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와도 같이 날카로운 기도를 풍기고 있는 것이다. 저절로 관심이 가게 만드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 아, 그랬던 것인가? 강진혁, 머리 돌아가는 것만큼은 진윤을 압도하는군. 대단한 술수야. 이거 우연찮은 발견인 걸? 알아채지 못하다가 그냥 당할 뻔 했어. 지금에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지만 말이야. 바닥에 꽂아두었던 검을 뽑아들며 ‘명예(名譽)와 금(金)을 걸고! 길드 워 스타트!’이라고 외치는 진윤과 강진혁을 번갈아 보고 실소했다. “우와아아아!! 싸우자!!” “우리는 이긴다!!” 시끄러운 환호성이 귀속을 가득 메웠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이라 귀가 따가웠지만, 인상을 쓰지 않고 오히려 입에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자자, 열심히 해보자고, 모두들. 서로의 진형을 향해 달려가는 길드원들의 뒤를 따라 같이 달려가는 진윤을 잡아챘다. 어찌하다보니 망토를 잡게 되어 진윤의 목을 졸라버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내 앞으로 세운 뒤 손을 풀었다. “케엑! 싸우기도 전에 목 졸려 죽을 뻔했잖아!” “이대로 당하느니 목 졸려 죽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 “무슨 소리야? 당하다니?” 전혀 눈치 채지 못했군. 그게 아니면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여 앞뒤 재보지도 않은 건가? 이래저래 한심스러운 인간이다. 나는 내가 알아낸 사실들을 모조리 그에게 말했다. 한 발 늦은 감도 있지만 이제라도 조심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어쩌면 내 예상이 틀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혁의 말과는 모순 되는 모습의 여자들을 볼 때 대부분이 들어맞는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사안이었다. 진윤은 내 설명을 듣고는 크게 놀라며 여자들이 서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군……. 확실히 네 말이 맞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인데? 저놈에게 이정도의 머리가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가 아닐 수도 있어. 다른 이가 내놓은 책략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알려줘서 고맙다. 정말 당할 뻔했었어. 지금 전투중인 놈들에게도 말해두어야겠군. 그럼 여자들은 네가 맡아라. 너만 믿으마.” “길드 마스터는 내가 접수하려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내가 맡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싸워라.” “좋아! 시작이다!” 대화를 마친 나와 진윤은 동시에 앞으로 신형을 튕겼다. 그러다가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에서 방향을 틀었다. 진윤은 진혁이 있는 곳으로 나는 여자들이 서있는 곳으로. 챙! 채쟁! 채앵! 여자들은 내가 방향을 선회하여 자신들에게 달려오자 일제히 검을 뽑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찔리는 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야, 하하! “무슨 짓이냐!! 크윽!” “네 상대는 나다, 진혁!!” 진혁이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진윤의 당당한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훗, 짱은 짱끼리 싸워야지, 나같은 조무래기를 상대해서 쓰나. 카하하핫!! 나는 검을 강하게 내지르며 여자들을 뒤로 밀어냈다. 15명에 달하는 수여서 벅찬 감도 있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 처음에는 방어전으로 나오던 그들이 태도를 바꿔 살초를 뿌려대자 더욱 힘겨워졌다. “작작하고 사라지라고! 이런 얄팍한 수 따위 쓰지 말고!” 가까이에 있는 여성의 멱살을 낚아채 관중이 있는 곳으로 휙 던져버렸다. 자, 한명 처리했군. 이제 14명 남은 건가. 오른손을 털어내고 주변을 쓰윽 둘러보았다. 어찌하다가 여성의 가슴을 스치는 바람에 물컹한 감촉이 남아있는 탓이다. 의도하지 않게(정말?) 부딪혀버렸거든. “어째서 우리를 공격하는 건가요?” 스컬(Skull : 머리의 두개골부분)에 꼬리털이 달린 투구를 쓰고 암적색의 누더기 로브를 입고 있는 유저가 스태프의 끝을 내게 겨누며 물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에다가 눈에 익은 로브였다. 고개를 갸웃하며 가늘게 뜬 눈으로 누더기 로브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누더기 로브……. 분명히 어디선가 많이 봐오던 것인데……. 그래도 뭐, 암적색 로브를 입고 있는 사람도 어느 정도 되니까 신경 쓰지는 말자. 웃차! 다리를 베어오는 검을 점프해서 피해낸 뒤, 공격해온 여자 둘을 스턴(Stun : 기절. 순간적으로 강한 힘으로 빠르게 연타하면 정신을 잃는다. 물론 많은 경험이 있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체력만 달게 하는데 그치기 때문)시켜버리고 로브의 유저에게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미인계를 쓰니까요. 우리 쪽 늑대들의 시선이 계속 당신들의 몸매에 머무르거든요.” “용케 아셨군요. 절대 알아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처음에는 당신들의 분위기로 보아 전투에 참가할 거라고 여겼는데 잘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다짜고짜 죽일듯한 분위기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관심’이라는 것에 미치게 되더군요. 우연찮은 소득이었죠.” 연속적으로 공격해오는 여성들을 몰아내며 하나 둘씩 기절시켰다. 다행히 강한 유저들이 없어서 어렵지는 않았다. 아마 쭉쭉빵빵의 미녀들만 데려오느라 레벨까지 따지지는 않았나보다. 나로서는 눈도 만족하고 쉽게 대처할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지. “옷도 몸매가 드러나는 옷으로 입고 있고, 관심을 끌기 위해 위험한 분위기까지 풍기니 확실한 게 아닐까 싶은데요.” “대단하시네요. 저희가 진심으로 당신을 속이려 해도 속일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과찬이십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빙글 웃어보였다. 벌써 7명이나 스턴상태에 빠져있으므로 유저들은 함부로 내게 달려들지 못했다. 레벨차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내게는 저들의 평균 레벨은 150으로 측정된다. 내가 397로 트리플 마스터(Triple Master)이니 엄청난 차이인 거지. 내 부드러운(느끼한) 웃음에 로브의 유저도 응답하는 듯 빙긋 웃으며(코와 입은 보인다) 팔을 들어 공격하려는 유저들을 제지했다. 그리고 손을 내리는 그녀의 옆으로 한 여성이 슨다. “강하시군요.” “……?” 긴가민가하는 로브의 유저와는 달리 분명 귀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왠지모르게 가슴이 조금씩 떨려왔다. 사랑하는 이를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만나는 듯한 느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기쁨이 교차했다. 기다리던 것을 만나게 되는 느낌. 눈시울이 붉어진다. “다음번엔 전력투구하겠습니다.” 그녀는 차갑게 내뱉고는 검을 회수했다.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전력투구……. 300레벨이면 높은 것이지만 날 상대하기엔 한없이 부족한데. 로브의 여자는 투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천천히 벗었다. 그러자 주변의 유저들도 전부 투구에 손을 가져가 벗은 뒤 한손으로 들었다. 하나같이 미녀들이다. 이내 로브의 여자도 투구를 벗었고, 투구 속에 감춰두었던 머리카락이 밑으로 사뿐히 흘러내렸다. 검은색의 찰랑이는 머리카락. 얼굴을 가리고 있던 투구를 밑으로 내려 두 손으로 받쳤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떠버렸다. 아, 아니……. 당신은……. “라미안?” “예?” 그녀는 당황하여 되물었다. 이 앞머리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확실히 거울의 숲에서는 머리를 묶었으니까. 나는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고, 그녀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확 붉히며 가슴을 가렸다.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지만 솔직히 씁쓸하다. 사락. 그때 옆에 서있던 유저도 투구를 벗었다. 라미안과 같은 검은색의 머릿결이 흘러내린다. 새하얀 피부와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숨이 막힐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분명 절세의 미녀였지만 나는 다른 의미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세상과 단절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정신이 아찔해진다. 믿고 싶으면서도 믿고 싶지 않은 존재가 내 앞에 서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작게 읊조렸다. “유……나?” 눈물이 흘러내렸다. “…….” 활화산 같이 뜨거운 열기를 내며 격전을 치르는 한쪽과는 달리 이곳은 남극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싸늘하고 조용했다. 나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유나와 닮은 여성만을 바라보았다. 잊지 못할 그녀였다. 결코 헤어지기 싫었던 그녀였다. 너무 사랑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넌 날 알아보지 못하는 거야? 어째서 그런 차가운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 거야……. 어째서……. 왜……. “유나…….” “제 이름은 유나가 아닙니다. 유세영. 그것이 제 이름입니다만.” 그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닮아있는 여자였지만 유나가 아니었다. 유나는 언제나 따뜻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저…… 닮은 여자일 뿐이었다. “그렇군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다, 유나는. 여기에 서있을 일은 어디에도 없었다. 많이 실망스럽다. 하지만 유나의 모습이나마 다시 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비록 따스한 미소와 맑은 영혼의 향은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눈물을 닦아내고 유세영이란 소녀에게 웃어보였다. “처음 뵙게 된 분 앞에서 추태를 보였군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짤막히 대답하는 세영. 저 차가운 얼굴만 아니라면 유나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유나와 닮았네요…….” 말끝을 흐리며 중얼거리자 세영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너무 미미한 변화인데다 금방 표정을 바꿔서 변했는지 안변했는지도 헷갈리는 지경이다. “저, 저기. 로브 받으세요…….” 쓸쓸하게 고개를 떨구고 바닥을 응시하는데 시야에 라미안이 내밀었을 암적색 로브가 보인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나와 시선이 마주친 뒤 움찔 몸을 떨고 고개를 살짝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어났다. 만약 세영이라는 유저와 라미안을 한대 섞으면 어떻게 될까? 유나와 똑같은 여자가 나오지 않을까? 로브를 가방에 넣으며 힐끗 세영을 관찰했다. 그녀는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라미안에게 묻는다. “이 사람이 언니가 말한 그 유저?” “으응.” 나에 대해서 말한 건가? 아니면 그냥 도움 받았다고만? 세영은 라미안의 말에 다시 나를 보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깊어 보이고 진실되어 보였다. 마치 내 모든 것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이름이?” “카르마입니다.” 세영의 축약된 질문에 홀린 듯 대답하고 흠칫 놀랐다. 아무리 유나와 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몸에 밴 습관을 허물어트리는 것은 힘들다. 지난 6년간 엘-가를 플레이 해오면서 나는 ‘카르마’라는 아이디를 몇 명에게만 알렸었다. 수는 고작해야 열명 안팎이다. 그리고 그 외에는 무조건 필명으로 활동했다. 그럼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본래 아이디를 말하다니……. 스스로도 이해가 안가는 행동이어서 놀랄 수뿐이 없었다. 내가 짐짓 굳어있든 말든 세영의 말은 이어졌다. “카르마님. 제 언니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니, 좋아하시나요?”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과도 같은 질문이란 말인가. 좋아하냐니? 갑자기 그런 것은 왜 묻는 거야? 솔직히 라미안에게 끌리기는 한다. 그리고 세영에게도 마찬가지다. 둘은 보고 있자면 유나가 계속 떠오르기 때문이다. 누가 좋고 싫고를 말하기엔 곤란하다. 나는 유나의 반반을 가진 둘 다 좋으므로. 하지만 반드시 둘 중 한명을 고르라고 하면 나는……. 콰앙! 굉음이 솟았다. 전투중인 곳에서 상당히 멀리까지 왔음에도 병장기가 부딪히는 쇳소리와 폭음은 계속해서 들려온다. 나는 가만히 세영을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군요.” “어째서죠? 그렇다 아니다로만 답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게 안되거든. 이상형을 반반으로 나눠 놓았는데 덥석 선택할 수 있겠어? 나는 유나라는 여인상이 있어 그쪽이 낯설지 않지만 그쪽들은 날 오늘 처음 만난 거잖아. 게다가 라미안이 날 좋아하는지 않는지도 모르는데 좋아한다고 대다했다가 그게 아니면 바로 실연의 고통이라고.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감정이 드나요?” “예. 지연 언니는 당신에게 반했다고 했거든요.” “세, 세영아!” 라미안이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히며 세영의 팔을 잡아 당겼다. 나는 나대로 당황했다. 지금을 제외하면 내가 라미안과 만난 시간은 10분을 넘지 못한다. 그 10분 안에 상대의 무엇을 알고 반했다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도 유나와 처음 만났을 땐 그저 예쁜 소녀구나라고만 여겼었다. 그 후 차차 그녀를 알게 되어 푹 빠지게 되었고 말이다. 한눈에 반한다는 것은 모험이다. 만약 내가 여자, 담배, 술, 도박 등만 밝히는 놈이면 어쩌려고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일까? 라미안은 울먹거리며 세영의 팔을 당겼다. 또한 날 힐끗힐끗 보면서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이미 이쪽에선 전투의 기미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되어버렸다. 세영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눈을 빛내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낭만 쫒는 여자들만 잔뜩 모인 듯싶다. 세영은 라미안의 행동엔 아랑곳 않고 날 직시하며 재차 말했다. “카르마님은 언니가 싫으신 건가요?” “전 라미안보…….” “우와아아아!! 이겼다!!” 함성이 메아리쳤다. 나와 일동의 시선이 함성이 터져 나오는 곳으로 향했다. 진윤이 검을 높게 들고 승리를 자축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진혁은 게임오버 되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진혁의 길드원들은 단 8명만이 남아 모조리 포박당해 있는 상태였다. 실로 대승(大勝)이다. 머뭇머뭇하던 라미안은, 저편의 상황을 확인하고는 급히 주변에 이것저것 지시하더니 날 보며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거참, 신기한 아가씨네. 붉혔다 폈다, 붉혔다 폈다……. 라미안은 세영의 옷깃을 꼬옥 잡으며 배시시 웃었다. “다음에 다시 뵐게요. 친구등록 했으니까 나중에 메시지 보낼게요.” 아, 친구등록. 나도 라미안을 보고 ‘친구등록’이라고 읊조렸다. 친구등록을 해야만 그 사람에게 메시지가 보내지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해놓아야 했다. 등록을 마친 뒤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라미안은 활짝 웃으며 다른 이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재접속한 것이다. 트렌의 근처이니 중앙광장에서 접속되었을 것이다. 도시 밖의 1km 안에서 로그아웃을 했다가 재접속을 하면 도시의 리스장에서 리스가 되도록 되어 있다. 그 밖에 필드에서 로그아웃 시에는 그곳에서 접속이 되고, 던젼 같은 밀폐공간에서 로그아웃을 할 경우에는 던젼 입구에서 접속이 된다. 거울의 숲은 필드기에, 처음에 접속했을 때 내가 그곳에서 접속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여자는 왜 사라지지 않는 거야? 나는 여전히 서있는 세영을 의아하게 여겨 눈을 말똥하게 뜨고 말했다. “재접속 안하시나요?” “그 말…… 진심인가요?” “…….” “진심이셨군요. 언니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세영은 날 차갑게 쏘아보고는 몸을 돌린 뒤 사라졌다.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세영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완전히 삭막한 어투다. 기운이 쑥 빠지는 기분이었다. 세영에게 미움 받으니 유나에게 미움 받는 듯하다. 함성에 의해 묻혀버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세영은 내가 한 말을 들었었나 봐. 후우……. 이렇게 한숨쉬는 사이 진윤이 내 쪽으로 뛰어온다. 우오오오~ 하고 함성을 지르며 오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승리가 기쁜가 보다.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함성에 묻혀버려 사그라진 말을 떠올렸다. ‘전 라미안 보다 당신을 택하고 싶습니다.’ 유저들 사이로 승리를 축하하는 축가가 길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Level 2. 전학생. “끄응…….”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최대 주량을 넘겨서 생긴 결과였다. 진윤 이놈 자식. 그만 마신다니까 계속 퍼붓고 지랄이야……. 이슬이 다섯 병중 세병을 내가 마신 거잖아! 우욱! 혈압이 오르니 속이 메슥거려! 책상을 끌어안다시피 하여 엎드려 있으면서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당장이라도 쏟을 듯한 기세에 내 앞자리에 앉아 있던 찬석은 일찌감치 대피해 있는 형국이었다. 심한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양호실에라도 가서 약이라도 타오면 덧나냐! 저놈은 친구도 아니야! 우우욱! 고혈압은 만병의 근원! 참자! 어제 저녁 승리를 경축하는 의미에서 나와 진윤은 집에서 몰래 빠져나와 물레방앗간(?)……, 아니 떡방앗간(?)……. 거기 이름이 뭐였더라? 무슨 방앗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고. 가끔 가던 호프집에서 오프라인(Off Line)으로 만나기로 했다. 다른 놈들은 집 탈출 도중 모조리 잡혀 감금되었기에 나와 진윤 단 둘, 아니 셋이서만 모이게 되었다. 은현에게 발각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글쎄 이 녀석이 엘-가를 종료시키고 보니 내 옆에서 자고 있지 뭐야.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다가 숨을 넘겨 딸꾹질을 했더랬지. 내 뛰어난 임기응변의 승리였어! 까딱하면 주무시고계실 부모님까지 깨울 뻔했으니까. 좌우간 은현은 자길 데려가지 않으면 부모님께 이르겠다고 협박을 하여 결국 셋이 되어버린 것이다. 울면서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갈 때는 언제고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생각해보면 상당히 둔한 것 같단 말이지. 호프집은 미성년자 출입금지였지만 나에겐 든든한 백(Back)이 있었다. 19세가 된 데에다가 겉보기나이 61세 환갑의 할아버지…는 많이 오버고, 23세로 보이는 진윤이 말이야! 나야 좀 동안이어서 아주 작정을 하여 머리에 힘주고 나이 들어 보이려고 노력한 결과 민증 까는 일없이 무사통과 되었다. 물론 앞서서 민증을 보인 진윤 덕이었다. 은현은 진윤의 여자친구인데 워낙 동안이라 이렇다고 빡빡 우겨 통과시켰다. 아무래도 10분 동안 계속 우기는 우리에게 질려서 들여보낸 것 같다. 이리하야 은현에겐 음료수나 줘버리고 진윤과 나는 대작에 나섰다. 맥주는 통달(?)했기에 눈에 차지도 않았고 마침 소주가 있다기에 그것을 따 마셨더랬다. 진 사람이 술값을 내기로 해서 죽어라 마시기를 어언 삼십분. 이쯤에 와서 진윤놈이 내게 계속 술을 퍼주더군. 아무래도 승패를 떠나서 날 괴롭히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어. 결국엔 내가 이기게 되었고, 진윤이나 나나 술에는 비교적 약한 편이라 해롱대는 상황에 내기에서 진 그가 계산을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은현과 나는 많은 대화를 거쳤다. 취한 상황이었지만 내용은 확실히 기억한다. 물론 화면 없는 라디오다. 무슨 행동은 했는지 모르겠거든. 계속해서 걸었다는 것 밖에. 아무튼 이 진솔한 대화에서 나는 은현을 잘 타일렀다. 친남매끼리 관계를 가지면 안 된다. 그건 고래로부터 전해 내려온 불변의 진리다. 지금 네가 내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친근함이다. 등으로. 하지만 어찌하다 알코올이 들어간 은현은 한마디도지지 않았었지. 옛날 영국의 왕실에서는 근친이 아니면 취급을 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가능하다. 영국은 너무 머니 일본 가서 촌수 조작하자. 그리고 지금 내가 오빠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 맞다. 오빠와 영원히 함께 있고 싶다. 등으로 대답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오라버니 된 도리로서 동생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다. 문화, 경제, 세계를 두루 뻗어가며 이것저것 예를 들어 근친상간의 부당성을 설명했다. 근친상간은 국가에 심각한 성문란을 일으킨다. 근친을 사랑하는 한국의 모든 이들이 들고 일어설 수도 있다. 이는 오또(Otto) 복권을 긁은 이들에게 심각한 정신 공백을 느끼게 하여 1년 동안 1등이 아무도 나오지 않아 10조원에 달하는 돈을 기록시키게 만든다. 그리하여 돈에 눈이 먼 놈이자 미국의 꼴통 대통령 조지 부탄가스인지 뭔지 하는 놈이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데 명분은 만들 수도 있다. 이 어찌 장대한 카오스 이론이 아닐 수가 있겠는가! 너 하나로 전 세계가 파멸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성문화도 문화 맞고, 오또 복권도 돈이니 경제 맞으며, 전쟁도 국가문제니 세계 맞다. 틀린 말이 전혀 없음에도 은현은 개의치 않아했었지. 세상이 망해도 난 오빠하나면 족하다. 모두가 죽으면 우리 둘이 아담과 이브가 되면 그만이다. 낙원 꾸려서 잘 먹고 잘 살아보자. 오빠의 애라면 백이고 천이고 만이고 낳아 기를 수 있다. 네가 무슨 인간 생산 공장이냐. 거기다 전쟁이 나면 나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차라리 바퀴벌레가 박멸되었다는 것을 믿겠다. 음. 녀석이 날 그렇게 보고 있을 줄은 몰랐었다. 솔직히 충격이었지. 이왕 말할 거면 ‘오빠는 장수할 거예요.’라고 말해주면 오죽 좋아? 얘가 술이 들어가더니 사람이 돌변했어. 평소엔 언사가 조심스러웠었는데 말이다. 그러던 도중 집에 도착하여 1차 토론을 마치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 잤다. 그 후 아침에 일어나니 은현은 밤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모르더라. 일부러 생색하지 않는 것인지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물어보기엔 너무 낯 뜨거운 말들도 많아 차마 말은 못하고 그냥 학교로 오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방금 전과 변함없이……. “아우, 머리아파. 술과 담배가 인류 최대의 적이다!” “그러기에 뭔 술을 그리 마셔?” “몰라, 자식아.” 창턱에 앉아 혀를 차는 찬석에게 중지를 내밀어주고 머리를 흔들었다. 꼴 같지도 않은 걱정하고 있어, 짜증나게. “얌마, 걱정은 무슨 걱정이냐. 네놈 염장 지르려고 하는 거야.” “정녕 죽고 싶어 환장한 거냐?”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모두 류현님을 걱정하여 한 말이었습죠, 헤헤!” 가시 돋힌 내 말에 찬석은 간사하게 웃으며 손을 싹싹 문질렀다. 실로 파리 같은 놈이 아닐 수 없었다. 크윽, 왜 내 주변엔 이런 놈들이 허다한 거냐! 내 인덕이 그렇게나 모자란다는 것인가! “말세야. 이놈이 인덕 타령을 할 줄이야. 사막에서 삽질하여 물 찾는 격이지. 애초에 없던 것이 나올 리가 없잖나, 친구.” 언제 왔는지 내 옆에 앉은 성호놈이 속을 긁어댔다. 또다시 속이 끓는다. 거기다 등까지 두드리니……. 내가 지금 채한 줄 아냐? 나를 포함한 학진, 성호, 찬석은 초등학교 때부터 같이해온 절친한 친우 사이다. 흔히들 말하는 죽마고우(竹馬故友)인 것이다. 우리들 세계의 말로는 ‘부(띵)친구’라고도 한다. 찬석과 성호 녀석은 베타테스트 때부터 한 나와는 달리, 테스터 심사에서 떨어져 상용화 이후부터 플레이했다. 내가 베타테스트를 하게 되었을 때 부러움과 시기를 동시에 보내기도 했으나, 내가 돈을 많이 벌어놓은 덕에 많은 도움을 받아 남들과는 달리 쉽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은연중에 우리들 중에선 내가 형님의 자리에 서 있는 상태다. 그것을 부정하는 성호는 언제나 자신이 최고라고 말하지만 종래엔 나와 찬석과 학진에게 얻어맞고 입을 다문다. 언제나 같은 패턴이었기에 놈의 뇌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인지 심히 궁금하기까지 하다. 나는 으르렁거리며 성호의 멱살을 잡았다. “속 울렁거리는데 등을 치면 어쩌자는 거냐! 네놈에게 쏟아주랴?” “달갑지 않은 말이군. 이거나 받아.” 성호는 내게 하얀 알약을 내밀었고, 나는 놈의 멱살을 잡았던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BB탄 같은 모양과 크기였다. 은근슬쩍 이것의 용도가 궁금해진다. 혹시 변비약이 아닐까 몰라. 성호의 아버지는 개인 병원을 운영하고 계신다. 규모가 상당히 크고 시설도 좋아 외부지역에서도 인정해주는 곳이다. 의사의 아들인 관계로 성호는 병원을 가끔 출입하는데, 그때마다 몇 개의 의약품을 슬쩍해오기도 한다. 모두 정체는 알 수 없는 것들이어서 복용 전에 먼저 의심부터 하게 된다. 나는 손바닥에 올려진 약을 보고 성호에게 설명할 것을 요구했다. “수면제다. 약효가 약한 거지. 3시간 정도일걸?” “이걸 왜 나한테 줘?” “먹고 한숨 자라고.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 아니냐. 뒷일은 우리에게 맞기고 어여 먹어.” “흐흐흐……. 어서 먹어.” 어쩐지 뒷맛이 구려. 정말 변비약 아냐? 찬석놈이 왜 저리 오한이 들도록 웃어?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실실 쪼개는 찬석과 성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성호는 별 결 의심한다며 실망스러워 했으나, 놈의 저력을 아는 나로서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성호가 비타민제라고 나한테 준걸 학진이 덥석 먹어버렸다가 학교 화장실을 점령했던 사건이 있었다. 집에도 못가고 하루 종일 화장실에서 살았더랬지. 그날 당직이시던 선생님이 저녁 내내 학교를 맴도는 ‘뿌지직’이라는 소리에 달달 떨었다는 소문이 있고, 다음날에서야 화장실에서 해방된 녀석에겐 천국의 냄새가 나더군. 가히 살인적인 향취였어. 녀석 주변 3미터 이내로 남녀를 불문하고 황홀함에 취하여 혼절했으니까. 얼마나 향기로웠으면 기절까지 하겠어. 결국 출석에 걸리는 일없이 교장선생님께서 교권으로 조퇴를 시켰지. 나도 잘못하면 그 녀석처럼 될지 모르는데 함부로 복용할 마음이 생기겠냐! “정말 수면제 맞아! 아니면 내가 학진이 먹은 거 박스로 먹어주마!” “수면제 아니면 정말 죽는다. 내가 손수 먹여줄 것이니 그리 알아.” “알았어, 알았어.” 속이 울렁이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내게는 수면제라는 아이템은 엘리트급의 아이템이었다. 성호가 말하는 것으로 보아 수면제임은 확실할 것이다. 그 변비약의 효과는 이미 입증되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의 속셈을 모르는 상황에서 부주의하게 행동하는 것은 불로 날아드는 나방과도 같은 것! 놈들의 속셈을 캐내기 위해 약을 입에 넣고 치아와 입술사이에 넣었다. 그리고 잠이 오는 척 몸을 엎드렸다. “으으음…….” 몇 분간은 조용했다. 연기가 들통 난 줄 알았을 정도로. 1분만 더 기다리다가 아무 반응이 없으면 먹으려 하는데 뒤에서 그들의 대화가 들렸다. “잔다! 사인펜 꺼내!” “조용히 말해! 깨어나면 끝장이야!” 오호, 이것들 봐라. “키히히! 오늘 오는 전학 오는 얘, 여학생 확실하겠지?” “그래! 전학생이 낙서된 이놈의 얼굴을 보고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아, 30분 뒤가 설레어져!” 음, 오늘 전학생이 오지. 깜빡하고 있었네. 성호가 오기 전에 확인한 시간이 7시 50분이었으니까 지금은 8시 정도 되었겠군. “수성으로 할까, 유성으로 할까?” “두말하면 잔소리! 당근 유성!” 스윽 몸을 일으키고 약을 뱉어 손에 쥐었다. 찬석과 성호는 내 뒤편에 쭈그리고 앉아있어서 내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쓰윽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유성 펜 있는데 줄까?” “오, 심이 굵은 거면 좋겠네, 류……현…….” “역시 네가 빠지면 재미가 없지. 함께 놈의 얼굴에 낙서……를…….” “후후후. 계속해.” 그들은 웃는 얼굴 그대로 날 보더니 그 상태에서 굳었다. 내 미소가 짙어졌다. “딱 걸렸어.” 찬석과 성호는 이날 나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했다. 놈들의 속셈이 뭔지를 알게 되어 그에 따른 응분의 응징을 가하고 난 뒤 오늘도 한건 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책상 위에 엎드렸다. 찬석과 성호는 오늘 고개를 절대로 들지 못할 것이었다. 양 볼에다가 유석 매직으로 소용돌이 모양의 태양을 그려 주었으므로. 내일 고개 들고 다니려면 기름에다가 박박 문질러야 하겠지. 훗, 다 자업자득이라니까. 만약 내 얼굴에 티끌만한 낙서라도 있으면 그 300배로 갚아준다고 했으니, 간이 배 밖으로 탈출하지 않은 이상에야 얌전히 있을 것이다. 전학생은 누가 오게 되든지 간에 언젠간 알게 될 것이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선생님들께 나 무지 아프다고 말해줘.” 주변의 친구들에게 부탁을 해두고 약을 삼켰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약효가 나는 것인지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잠시 뒤 내 눈에는 짙은 밤이 내렸다. 아! 점심시간에 깨어달라는 말을 전하지 않았네! 우글우글. 이 시끄러운 소음들은 뭐냐……. 잘 자고 있는데 감히 어떤 놈들이……. 귀가 앵앵거릴 정도의 소란이 심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깊은 잠에 빠져 즐거운 꿈(유나와 만나 데이트 하는 꿈)을 꾸고 있던 내게는 화가 나는 일이었다. 잘 자고 있는 중에 깨워지는 것 만한 곤욕도 없다는데 맞는 말이다. 잠이 쏟아짐에도 자지 못하는 심정은 정말이지 찢어지는 것이었으니. “야아~, 정말 끝내준다.” “얼굴도 무표정해! 꺄~! 인형 같아! 너무 예쁘다!” “저런 여성과 한번만이라도 사귀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결혼까지 하게 되면 복에 겨워 죽을지도.” 주변은 이런 말들로 가득했다. 몸을 뒤척이고 귀를 틀어막아 봐도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이미 잠은 달아난 것 같다. 나는 몰려와서 행패를 부리는 학생들에게 한소리 할 겸, 인상을 잔뜩 쓴 채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기가 질려 찍소리도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 켁!? 뭔 인간들이 이렇게 많아? 거기다 전부 내 주변……? 서, 설마!! 세상에! 내가 이렇게나 인기가 좋았단 말인가! 모두가 내가 걱정되어 온 나의 팬들인 거야! 그렇고 말고! 그렇지 않고서야 바글바글 모일 이유가 없잖아(그들의 말은 이미 걸려졌다). 아니면 아직도 꿈? 슬쩍 주변을 살펴봤는데 암만 봐도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듯싶었다. 이렇게나 인기 있는 것은 현실에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또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유나가 아직도 내 곁에 앉아있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나의 인기를 질투하여 삐쳤는지 무표정하지만 말이다. 유나는 날 보고 약간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긴, 꿈이어도 내 인기가 이정도일 줄은 몰랐을 거다. 그러나 이내 도로 질투를 하는 것이던지 무표정하게 날 보았다. 나는 토라진 그녀를 달래기 위해 손을 뻗어 눈같이 하얗고 약간 붉게 생기가 도는 볼을 쓰다듬었다. 감동을 하는 것인지 유나의 보석같이 투명한 검은 눈망울이 사르르 진동했다. 주변의 내 팬들은 이 아름다운 장면에 숨을 죽인 채 응시하는 중이었다. “유나.” “제 이름은 유나가 아니…….” 난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을 검지로 막았다. 부정하지 않아도 돼. 여긴 내 꿈이니까. 이제 서로의 마음에 충실해져도 되잖아. 꿈이라는 게 아쉽지만 이걸로 만족해야겠지. 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꿈에서 내가 뭔 짓을 한들 욕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유나에게 입을 맞춰주면 배경이 침실로 바뀌어서 이후에는……. 흐흐흐! 아싸, 좋구나! 나는 머리를 천천히 그녀에게 가져갔다. 볼을 쓰다듬던 손으로는 머리를 받쳤다. 유나의 숨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그리고 그녀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전혀 꿇릴 것 없이 딥 키스(Deep Kiss)를 할 생각이었다. “무슨 짓이죠?” 거리가 10센티미터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유나가 말했다. 날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도저히 유나라고는 생각 못할 태도였다. “어제도 말했다시피 전 유나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유세영이 제 이름입니다만.” 쿠웅!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환상이 와장창 깨지고, 그제야 현실을 인식하여 주변을 살피게 되었다. 여학생들은 아쉽다는 얼굴이었고 남학생들은 안도와 분노가 뒤섞인 얼굴들하고 있었다. 이 많은 눈앞에서 난 무엇을 하려했단 말이던가! 끄악! 내가 미쳤던 게야! “유세영…….” “실망입니다.” “난 꿈인 줄 알고…….” “변명은 듣고 싶지 않군요.” “…….” “사랑이라……. 우습습니다.” 세영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여 교실을 나갔다. 학생들은 세영이 나갈 수 있게 길을 내주고 그 뒤를 우르르 쫒아갔다. 파도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엘-가를 플레이하는 사람만 해도 전 세계를 통틀어 1억 명이 넘어간다. 거기서 만난 한명이다. 그 한명이 같은 도시에 같은 학교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참 세상 좁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 모양이다. 대체 이건 신이 날 우롱하는 처사인가, 아니면 내 운명인가? 난 운명론자가 아니지만 잠깐 스쳐가던 인연이 이렇게 엮이니 조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태진이었다면 대뜸 ‘이건 하늘이 태초에 만들어놓은 운명입니다! 당신과 전 떨어질 수 없는… 어쩌고저쩌고, 세상이 붕괴되는 그때까지 영원히 함께하는… 어쩌고저쩌고.’ 라고 끝없는 주저리를 늘어놓을 것이 분명하다. 워낙 운명론에 충실한 녀석인지라. 아니,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니 넘어가고. 어째서 세영이 전학생인 거지? 아무리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심해저 같은 것이 사람 인생이라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잖아. 누굴 피 말려 죽일 일 있어? 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냐고……. 혹시 이번 해에 들어오면서 마가 낀 건가(유나는 연초에 사고를 당했다. 현재는 5월 중순이다)? 이거 굿이라도 한탕 뛰어야하는 거 아냐? 세영에게 수작 걸지 말라며 알짱거리는 남학생들을 가볍게 손봐주고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시간. 내 앞에 있는 찬석은 식사를 할 생각이 없는 건지 못하는 건지 책상에 엎드려있다. 4분단에 앉아있는 성호도 같은 모습이었다. 나 또한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고 매점까지 가기도 귀찮아서, 바람이나 쐬며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할 요량으로 교실을 나서 옥상으로 향했다. 하아, 세영, 유나, 세영, 유나……. 미르고에선 옥상을 개방하고 있다. 추락사할 위협이 있어 높은 철망까지 쳐놓았다. 덕분에 공차고 놀아도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옥상에는 언제부턴가 방문자들이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학교 주먹패들이 모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담배피고 싸우고 하는 일이 다반사니 험한 꼴 당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기피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야 내 휴식처여서 아무 거리낌 없이 들락거린다. 근간에는 교실에서 잠만 자느라 잘 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위에 몰려있는 놈들도 태클을 걸어오지는 않는다. 맞지 않으려면 알아서 기어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으니까. 6층에서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에 도달했을 때, 위에서 일단의 무리가 ‘헤~’한 얼굴을 하고 내려왔다. 내가 아는 얼굴들도 몇몇 끼여 있었다. 그들은 날 보더니 아는 채를 해오며 옥상에 천사가 강림했다는 어이없는 말을 늘어놓고 사라졌다. 엘-가에 중독된 건가? 헛소리를 다하네. 유유히 사라지는 그들에게 비웃음을 날려주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문 앞으로 보이는 풍광에 침묵했다. “…….” 하하, 정말이로군……. 세영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어떻게 그 많은 인파에서 벗어난 거지? 햇볕에 노출된 세영은 고고한 자태로 서있었다. 후광까지 잔잔하게 비추는 듯했다. 너무도 신비로운 모습이다. 그들이 천사라 칭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차마 범법할 수 없는 극상의 미를 뿜어내는 세영. 유나와 다를 것이 그 아무것도 없었다. 저 무표정한 얼굴은 제외하고. 만약 진윤이 세영을 보게 되면 무슨 생각을 할까? 나중에 우연을 가장하여 마주치게 해볼까? 방금 전에 마주친 그들이 어째서 군말 없이 내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나도 세영의 사색을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우르르 쫒아가던 학생들도 이 때문에 떨어진 모양이다 세영과는 이제 할 말이 없었다. 교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선 궁색하게 변명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몸을 돌려 계단으로 발을 디뎠다. “잠깐.”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세영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철조망 쪽에서 내쪽으로 걸어와 물었다. “언니를 좋아하십니까?” 그녀의 딱딱한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반문했다. “그건 왜 묻습니까?” “혼자 행복해하는 언니가 안쓰러워 그렇습니다.” “내가 무슨 대답을 하길 원하나요?” “언니를 좋아한다는 대답.” 뭐라 대답을 하려고 입을 달싹이다가 다물었다. 라미안. 솔직히 말해서 귀여운 여성이다. 지켜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여성이다. 길드전 당시의 나였으면 그녀에게 내 모든 것을 주고, 또한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었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있다. 하지만 유나를 닮은 세영을 보면 확실한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당신은 날 어떻게 생각하나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예상은 했었다. 어제 만났을 때부터 가시 돋친 태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을 보였으니까. 그러나 예상을 했음에도 막상 당사자의 입을 통해 확인을 하게 되니 서글퍼졌다. 마치 유나가 날 향해 싫다고 말하는 것으로 느껴졌기에……. 허나 나는 나 싫다는 사람에게까지 웃어줄 정도로 헌신적이지 못하다. 설사 그것이 유나라 할지라도. “예. 지연, 그녀를 좋아합니다.” 매달리기 싫다. 라미안과 세영 중에 세영을 더 좋아하지만 라미안도 충분히 좋아한다. 세영의 존재로 라미안에게 관심이 덜 가게 된 것 뿐이다. 이제 세영이 날 어떻게 보는지 확실히 알게 된 이상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라미안에게 간다. 계단을 거침없이 내려갔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세영은 류현의 질문에 냉소하며 대답했다. 그러나……. ‘당신을 좋아하게 된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본심이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류현은 잠시 세영을 바라보고는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예. 지연, 그녀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는 왔던 길을 망설임 없이 되돌아갔다. “…….” 류현이 있던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세영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붙잡아 외치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나만을 바라봐 달라고……. 그러나 세영은 앞으로 뻗은 손을 꾹 쥐며 가슴으로 끌어당길 뿐이었다. 그녀는 류현을 보면서 헤어지기 싫다는 마음에 사로잡혔다. 절대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친숙한 느낌이었다. 오래전부터 만나오고 매우 친한 사람처럼. “류현… 류현…….” 세영은 그의 이름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어떻게 그녀가 류현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출석부를 본 적도 없었고 누구에게서 들은 적도 없었다. 그녀조차도 알지 못한 이름이 입에서 맴돌자 흠칫 놀라며 입을 오므렸다. 그렇지만 귀에 익은 이름이었고 그리운 이름이었다.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좋아해요…….” 세영은 슬픈 얼굴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보다는 언니가…….’ 자신보다는 지연이 류현과 어울린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수줍음을 잘 타는 지연이 처음으로 진심어린 사랑을 하게 된 남자였다. 그리고 류현은 그런 지연을 감싸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지연과 잘 어울리는 그런 이를 빼앗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똑같이 그에게 반한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그다. 함께 있고픈.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기엔 자신의 욕심이 너무도 크다.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괴로워할 필요는 없겠지요.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 이때만큼 괴로운 적도 없었다. 답답하고 애가 탔다. 세영은 4개월 전에 3층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부분적인 기억 상실에 걸렸다. 그동안의 대인관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자신의 이름 또한 잊어버렸다. 그녀의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기억상실과 약간 다친 것 외에는 없는 그녀에게 기적이라고 입을 모으며 기뻐했으나, 그들이 누군지 모르던 세영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이후 세영은 2개월 동안 통원 치료를 받고 퇴원하여 얼마간의 휴식을 취한 뒤에 미르고등학교로 편입되게 되었다. 그녀의 가족이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에 있어서 쉽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 이외 나머지의 적응은 그녀 몫이었다. 세영의 미모는 확실히 빼어났다. 휴식기동안 그녀를 노리는 남자들이 득실거렸다. 또한 그녀가 대인 관계에 대해서 전혀 기억하는 것이 없는 것을 이용해 과거에 연인이었다고 하며 접근하는 이도 있었다. 세영은 그것을 믿다가 순결에 위협을 당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차갑게 굴었다. 결코 그들의 말은 믿지 않게 되어버렸다. 주변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다보니 차가운 모습이 자연스레 웃는 얼굴을 대신하게 되었고, 냉랭한 어투로 말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세영은 주변으로 자신의 마음을 일체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세영을 두근거리게 하는 이가 나타났다. 바로 류현이었다. 한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접근한 이들 중엔 그보다 잘생기고 능력 좋은 이들이 많았음에도 거들떠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세영은 류현이 자신의 과거와 깊게 관련된 사람이라고 여겼다. 만약 기억을 잃지만 않았다면 그와의 관계가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기에 세영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이 괴롭게 느껴졌다. “아아…….” 눈물을 닦아낸 그녀는 목에 걸어 옷 속에 감춰 둔 펜던트(Pendant)를 꺼내 조심스레 쥐었다. 사고를 당한 이후부터 언제나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그녀만의 보물이었다. 병원에 실려 왔을 때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했다. 그만큼 세영은 이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고, 언제나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지금의 세영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 펜던트엔 숨겨진 과거가 있음을. 류현과 유나가 관련된 과거가……. Level 3. 결투 대회. 듀얼 랠리(Duel Rally). 벌써 여름방학 시즌이다. 완연한 여름날씨에 나와 은현은 짧은 옷차림으로 에어컨을 틀고 거실에 앉아 수박을 배어먹는 중이다. 지난겨울에 사놓은 최신식 에어컨으로서 전력 ‘소비량’ 1등급의 엄청난 전력을 먹어치우는 괴물이다. 아마 지금쯤 계량기가 팽팽 돌고 있을 테지. “최신형인데 그럴 리가 없잖아요, 오빠.” “웃겨보려고 한 말이니 신경 쓰지 말자.” “누구를요?” “나도 몰라. 헛소리한 것이니 신경 쓰지 말자.” “재미없어요.” “그럼 사와.” “유치 개그…….” “어, 그래.” “허무 개그…….” 그동안 은현과 내 관계는 보통 남매로 되돌아왔다. 그래봐야 남들보단 상대적으로 더 가까운 사이기는 하다. 심각한 사이에서 탈피한 대신 애교가 늘었으므로. 뭐, 이제는 상관도 안하지만 말이다. 날 오빠이상으로는 보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기는 한데……. 제엔장! 지금 그것보단 할 게 너무 없다! 할 거라고는 옛날 개그뿐이 없어! 아악! 엘-가! 엘-가! 오늘 하루 미르트에서 서버 점검을 한답시고 접속을 막아버렸다. 아마 이번 상반기 듀얼 대회를 위해 서버 안정화 작업에 착수한 듯싶다. 지난겨울에 엄청난 숫자의 유저들이 구경을 오는 바람에 일부 지역이 다운되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지난 6년 동안엔 단 한번도 없었던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가상현실 시스템은 엄청난 트래픽이 쌓이기 때문에 각 지역을 분할하여 각각 다른 서버가 관리한다. 그리고 서버들은 서로 링크되어 필요한 정보만을 교환하기에 거품 없는 정보이동이 가능했다. 서버의 사양은 극비(국가 단위로 이 서버들을 미르트로부터 수입했단다. NASA에서 특히 많은 서버를 원했다더군)라기에 알 수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엘-가가 15세 이용가가 된 것은 내가 고등학교 진학 직후였다) 미르트 본사로 견학 갔다가 내 귀로 직접 들은 것들이니 확실하다. 은현은 내가 엘-가를 못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오빠는 접속할 수 있잖아요.” 물론이다. 은현의 말대로 아무리 서버를 닫았다한들 내 경우엔 접속을 할 수도 있다. 일명 개구멍. 히든 도어(Hidden Door)를 알고 있으니까. 모든 온라인 게임은 운영자들이 출입할 수 있는 히든 도어라는 비밀 문이 존재한다. 그 비밀 루트를 통해 접속하여 게임이 제대로 설정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서버는 유저들의 접근 루트만을 차단했을 뿐 정상가동 되고 있기에, 운영자들은 문제없이 게임 내에서 활개치고 다닐 수 있다. 나는 어찌하다가 히든 도어 접속법을 알게 되었는데, 예전에 좋다고 접속했다가 바로 발각되어 잔소리만 잔뜩 듣고 강제종료 당했다. 그리고 한번만 더 접속할 시엔 계정을 블록(Block) 시키겠다는 협박어린 경고까지 들어 절대 이용하지 않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은현은 그것을 알면서도 운을 띄워보는 것이다. 이 오빠를 괴롭히려고! “그렇게 생각하면 슬퍼요. 난 단지 오빠가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흑흑…….” “알았어. 네 맘 이해해. 그러니 울먹거리면서 열심히 수박을 먹는 짓은 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슬픈 것과 맛있는 것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해요!” “수박씨나 떼고 말해.” 검은색의 굵은 점을 여기저기 찍고 있는 은현에게 다가가 얼굴을 닦아주었다. “오빠.” 은현은 먹던 수박을 내려놓고 날 바라보았다. “난 우리가 친남매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또냐!” 아악! 언제나 제자리걸음이야! 이게 정삭적인 친남매 관계냐고! 어떤 놈이 보통 남매사이라고 했어? 죽여 버리겠어! 나라고? 내가 언제? 증거 있어?! “위에를 참고하세요.” 은현은 방글방글 웃으며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난 의문에 휩싸였다. “무슨 의미야?” “모르겠어요.” “더위 먹은 거냐?” “오빠도 이상한 짓 했잖아요.” “내가 널 망쳐버렸구나. 쯧쯧, 불쌍한 것.” “날 망쳤으니 평생 책임지세요.” “내가 미쳤냐?” 콧방귀를 뀌어주고 주방으로 가 수박이 놓인 쟁반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은현은 아직 다 먹지 않았다고 칭얼댔지만, 더위 먹은 인간은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괜히 관여했다가 짜증에 휘말릴 위험도 있다. 입안의 단내를 없애기 위해 물 한 컵을 마신 뒤, 가볍게 세면을 하고 소파에 앉아 TV의 채널을 돌렸다. 지금까지 은현 때문에 드라마라는 가장 싫어하는 장르를 보며 정신이 혹사당했으므로 환기가 필요했던 탓이다. 도저히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을 감동적이라고 보는 은현과 어머니가 이해되지 않는다. 자로고 화끈한 액션이 난무하고 피가 낭자해야만 제 맛이거늘……. 게임 전문 채널 GBS(Game Broadcast System)로 채널 전환을 마쳤을 때 세면을 마친 은현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이번 엘-가의 여름방학 이벤트 광고화면을 보고는 말문을 열었다. “1주일 뒤에 듀얼 대회가 열리네요. 나도 참가해 볼까요?” 나는 은현의 거침없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황당한 시선으로 은현을 보았다. 기가 막힐 노릇이로군. 네가 참가하겠다고? 몇 대 맞으면 픽 쓰러질 것 같은 네가? “프리스트면서 도전할 걸 도전해야지. 의료진에나 지원해라. 돈벌기엔 좋을 거다.” “프리스트라고 공격 스킬 없는 줄 알아요?” 은현은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프리스트라는 클래스를 그저 이동 병원으로 비하시키는 내 언사에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가지고 어콜라이트(Acolyte)에서 프리스트까지 키워놓았더니만 무시를 당하게 되니 그럴 만도 했다. 엘-가에는 초기직업이 없다. 유저들의 자유도가 높아서 그들끼리 알아서 정하라며 미르트에서 그런 설정까지는 손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귀찮아서 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 어찌되었건 유저들은 그들끼리 클래스를 설정하였고, 그 틀을 기준으로 유저들의 클래스를 판가름한다. 클래스가 선택되는 것은 베이스 스킬(Base Skill : 기초 기술)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정해진다. 만약 베이스 스킬을 검 계열로 정했다면 소드맨(Swordman) 등이 되고, 활 계열이면 아처(Archer) 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익히는 스킬들의 속성과 계열에 따라 클래스가 갈린다. 예를 들어 베이스 스킬을 마법 계열의 성(聖)속성으로 정했다 치자. 그럼 그 유저의 초기 클래스는 어콜라이트(Acolyte)가 된다. 그리고 마법 계열 성 속성 쪽으로 계속해서 배워나가다 보면 종래에는 세인트(Saint)로 전직할 수 있다. 어콜라이트(Acolyte), 클레릭(Cleric), 프리스트(Priest), 비숍(Bishop), 세인트(Saint)의 순이니. 프리스트 클래스 전까지 암(喑)속성을 배우면 암흑 쪽 성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다크(Dark)등이 붙는다. 또한 클레릭 클래스에서 계열을 바꾸게 되면 다시 클래스가 변환된다. 권(拳) 계열 쪽의 스킬을 익히면 몽크(Monk), 검(劍) 계열 쪽의 스킬을 익히게 되면 패러딘(Paladin)등으로. 뭐, 그래봐야 구분하는 이름들일 뿐이니 신경 쓸 필요는 없지. 마법기사(Magic Knight)가 마법은 쓰지 않고 검만 쓴다면 검사로 착각이 가능하니깐 말이야. 하기 나름인 거야. 아, 도움 되는 것이 있기는 하구나. 속성간의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으로 인한 스테이터스(Status)의 변화. 속성에는 화(火), 수(水), 풍(風), 지(地), 성(聖), 암(喑), 무(蕪)가 있고, 각 속성 간에는 상생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상극하는 것도 있다. 계열 쪽으로도 마찬가지다. 상생되는 것은 서로 화합되어 기술의 위력을 보통 이상으로 끌어올려주고 능력치를 가중, 보정시켜준다. 많은 이득이 있기에 유저들은 되도록 한쪽 속성으로만 스킬을 익히거나 상생되는 것들로 익히려한다. 상극되는 것은 서로에게 충돌하기에 위력을 현저히 줄여버린다. 다행히 능력치를 줄여버리거나 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지만, 가중시켜주거나 보정시켜주는 역할도 못한다. 거기다 이런 식으로 성장을 하려하면 남들 10레벨 올릴 시간으로 3레벨도 못 올리기에 유저들은 속성이 상극되는 것은 무조건 피하고 본다. 상극으로 배우는 유저는 전무하다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나는 이 방법을 사용했다. 엘-가를 처음 시작했을 때 난 검에서 계열 변환 없이 상극의 속성들로 된 스킬들을 익혀버렸다. 일부러 배우고 싶어서 배웠느냐? 그건 아니다. 베타테스트 시절, 초반에 할 때는 아이템과 돈이 매우 궁했기에 얻는대로 익혔었다. 그때는 속성의 상생이고 상극이고 개념이 없었던 때라서 나처럼 배우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다가 그런 상생, 상극작용이 알려지면서 캐릭터를 삭제하고 처음부터 다시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또 하나의 나라는 점에서 정을 느껴 삭제하지 않고 계속해서 키워왔다. 회고해보면 어렸을 때(벌써 6년 전이니 12살 때다)는 참 순진했었다. 엘-가에서의 내가 삭제되면 죽는 거라고 여겼으니까. 뭐, 그런 순진함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겠지. 처음엔 키우면서 여러 번 좌절했다. 레벨은 레벨대로 오르질 않고 스킬은 스킬대로 스프링 작용을 하며 튕겨버려 위력이 현저하게 줄어버렸으니까. 레어 스킬이 베이직 스킬의 위력으로 나왔으니 말 다한 거다. 이때 주변에선 미친 짓이라 하며 다시 키우라고 권고했지만 무시했다. 한번 뽑은 칼 무라도 자르고 집어넣자는 의중에서였다. 막말로 하면 그들 말대로 미친 짓이었고, 좋은 쪽으로 말하면 모험이었다. 그러다가 섀도우 스킬 북(Shadow Skill Book)을 얻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소위 기연(奇緣)이라고도 한다. 수, 풍, 지, 성의 순으로 스킬을 익혔는데 거기다 암 속성을 끼어들게 하니 두 쌍의 대립 속성이 형성되었다. 풍과 지, 성과 암이었다. 한 상대의 적끼리는 아군이 되는 법이다. 그런고로 대립과 대립은 상생되게 되어있다. 그 대립 성질끼리 엄청난 상생작용을 하며 스킬 위력과 가중치, 보정치를 크게 증가시켜버렸다. 경악을 할 정도의 변화였다. 약하디 약하던 기술의 위력은 그 스킬의 속성을 다른 속성이 상쇄시키고 보정시켜 보통을 웃도는 위력으로 오르게 되었고, 가중치와 보정치는 남들의 2배에 달하여 내가 엄청난 성장을 이루도록 도와주었다. 지금은 상생되는 속성의 스킬들만 익히는 정석된 방법으로 성장한 동급 레벨보다 능력치가 높다. 그리고 계속해서 차이가 날 것이었다. 아마 내가 발견한 스프린터(Splinter)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 아닐까 싶다. 당연히 남들에겐 비밀로 하고 있다. 천상천하유야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강자는 나 하나로 족하다. 푸하하핫! 여기서 만약 계열까지 바꾸게 되면 어떻게 될까? 속성사이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면 운영자에 준하게 되어 데미 갓(Demi God)으로 성장되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하지만 속성만으로도 이가 빠득빠득 갈리는데 그거까지 다해버리면 어찌될지를 생각하니 당장 기가 질려버린다. 지독한 노가다의 무한 반복이 이루어질 텐데 그걸 질려서 어떻게 하냐? 뼈를 깎고 자신의 피를 마시며 노력하지 않고서야 될 수 없다. 나로서도 무리다. 이런 사실을 알았음에도 새로 키우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나는 웃으면서 은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네가 다치는 모습은 보기 싫어서 그래.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아는 사람이 다치는 꼴은 볼만한 것이 못되거든. 더구나 넌 소중한 내 동생이니까 말이야.” “오빠…….” 은현이 감동받은 얼굴로 날 올려다보았다. 나는 웃어주려다가 이어지는 말에 인상을 팍 구겼다. “난 우리가 친남매가…….” 무시하자, 무시해. 아주 입에 붙었구만. 이제는 화도 안 난다. 적응이 되어버렸어. “앗! 오빠예요!” 은현은 내가 무시하는 모습에 아무 말도 안하다가 TV화면을 보고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화면엔 내가 그린 드래곤을 날려버리는 장면이 방송되고 있었다. 확실히 내가 벌인 일임에도 볼 때마다 감탄이 흐르는 장면이었다. 각도, 조명, 배우(?), 화면! 어느 것 하나 꿀리는 것이 없는 발군의 레코드 샷(Record Shot)이다. 작정하고 찍은 것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운영자가 직접 찍은 것이라고 했으니 당연한 귀결이다. 만약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면 당장 본사로 쳐들어가 사장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을 것이다. 용케 내 성향을 알아서 한달 무료이용권을 주더라. 덕분에 이번 달은 예전 거울의 숲에서 찍은 것으로 무료이용중이다. 다음달은 이것으로 무료! 돈 굳힌 거지. 지금 방송되는 것은 본디 10시간짜리였다. 내가 드래곤을 잡은 게 10시간 이었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10시간짜리를 그대로 내보낼 수 없어 방송용으로 자르고 자르다보니 비중이 제일 크고 화려한 헬 브레스 날리는 장면만 남게 된 것이다. 드래곤이 비명을 내지르며 소멸하고 나자, 화면은 바뀌어 유저들이 보낸 여러 베스트 레코드 샷들이 나왔다. 그러다가 제일 마지막으로 ‘엘레멘탈 가드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찍었던 것이 방송되었다. 쩝, 내가 게시판에 올린 본래 제목은 ‘화염의 검’이었는데……. 화면을 보던 은현은 심각한 얼굴을 하면서 양손으로 턱을 괸 후에 물었다. “거울의 숲 쪽이라던데 왜 저런 현상이 일어난 걸까요?” 지금까지 은현은 물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기에 녀석은 모르고 있다. 일부러 말 안하려고 한 게 아니라 한동안 잊고 있어서였다. 말하기가 귀찮기도 하고 말이다. 이왕 말나온 거 이참에 해줘야할까? 난 웃으면서 시선은 TV로 고정시킨 채로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했으니까 그런 것이겠지.” “누가요? 그리고 유저인지 어떻게 알아요?” “내가 한 짓이거든.” “정말요?” 은현은 못 믿겠다는 듯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덧붙였다. “이래서 저렇고, 저래서 이렇게 된 거야.” 내 장황한 설명에 은현은 방긋 웃으며 답했다. “아하! 이래서 저렇고, 저래서 이리된 거군요?” “어. 그렇게 된 거야.” “그렇게 되긴 뭐가 그렇게 되요! 제대로 설명 못해요? 이리 저리, 저리 이리만 말하면 뭐가 되요?” 은현아, 네가 요즘 오빠알기를 물같이 아는 구나. 내 말이 곧 법이니라. “그냥 알려하지 마라. 설명하기 귀찮다. “싫어요. 말해줘요.” 그럼에도 팔을 붙잡고 흔드는 은현을 향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나중에 말해주마.” 그제야 녀석은 내 팔을 꼬옥 앉으며 배실배실 웃었다. 그리고 말을 덧붙인다. “나중에도 말 안 해주면 콱 깨물어 버릴 거예요.” 그냥 죽여. 나 같은 놈을 뭣 하러 살려 놓냐? 귀찮을 정도로 한가한 한여름의 오후다. 결투 대회, 듀얼 랠리(Duel Rally). 상반기 하반기를 나누어 방학시즌마다 개최되고, 엘-가의 지존을 가리는 자리이다. 3일 동안(TV 방송을 위해 RT와 VT의 흐름을 맞추었다. 즉, 실시간 방송이 가능해진다) 이어지며 우승을 거머쥔 유저에겐 6개월 무료이용권과 부상을 내린다. 대부분이 무료이용권보다 부상을 노리고 참가한다. 여기서 우승한 유저는 주변으로부터 엘-가 최고의 유저라고 칭송받는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만 그렇지 은거 고수들을 총집합 시키면 고양이 앞의 쥐다. 나한테도 지는 놈들이 허다한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PK 유저라고 욕하면서도 날 엘-가 최고수라고 인정하는 유저들이 많다. 나보다 강한 사람이 몇 명 있어서 내키지는 않지만). 뭐, 대신 우승을 하면 유저들에게 매일 듀얼 신청을 받게 되거나 암살의 위험이 있어서 힘들기는 할 터다. 어쨌든 그를 이기면 자신이 최고라고 떵떵거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듀얼 랠리에선 저주아이템이나 허락되지 않은 암기 등을 사용하는 등의 부정을 쓰는 것 외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량을 펼쳐야만 우승할 수 있다…… 라는데, 자신보다 한참이나 약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상대가 기분 상하지 않을 정도로 적절히 대처해주면서 하면 될 텐데 말이다. 쓸데없이 나대면서 경쟁자들에게 본래 실력을 노출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듀얼 랠리에서 우승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출전을 했어야 우승을 하든 말든 할 게 아닌가. 참가 신청 서류 넣어놓으면 휴가 지낸답시고 시골로 끌고 가는데 어떻게 참가를 해! 현금 60만원(6개월분이므로)의 가치가 있는데 미쳤다고 내가 포기 할까보냐. 탈락되든 말든 일단 참가하고 봐야 성미가 풀린다. 작년 겨울의 듀얼 랠리엔 출전을 하긴 했지만 도중에 기권했었다. 16강까지 들어놓고 마지막 하루 남은 시점에서 시골에 간다지 뭐야. 예전엔 이벤트 전에 출발해서 아예 참가가 불가능 했는데 그때는 며칠 늦게 휴가가 내려졌더란다(부모님께서는 같은 회사에 다니신다). 하루만 더 늦게 휴가를 주면 발바닥에 털이 나냐? 기껏 16강까지 들어놓으니까 말이야. 열 받기도 하고 포기하기엔 16강까지 진출한 것이 너무 아까워서 마운트 고글 들고 가려했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심안(心眼)을 가진 어머니. 도저히 그분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일찌감치 내 속셈을 읽고 조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라며 압수해버려 시도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번 여름에는 휴가가 며칠 더 늦어져 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은현은 내가 다치면 치료한답시고 의료진에 지원했다. 감동받아서 꼬옥 안아줬다지. 동생하나는 잘 둔 것 같아서 뿌듯하다. 가끔 하는 친남매 어쩌고 하는 말만 제외하면. 내가 출전하게 되니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도 대회에 참가하여 일명 걸러내기 작업이라고 불리는 2차 예선을 통과했다. 하나같이 오래 전부터 플레이해온 고수들이니 탈락되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개중엔 전부터 계속 출전해오던 이들이 있는가하면, 내 우승을 막겠다는 일념하나로 이번에 참가한 이들도 있었다. 다름 아닌 화청 형과 조성호! 남 잘되는 꼴은 결코 눈뜨고 지켜보지 않는 인간들이다. 기회가 닿으면 정신개조를 해줘야지. 미연누나가 잘할 거야. 둘은 나와 만나게 되거든 자폭을 해서라도 탈락하게 만들겠다고 칼을 갈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다만, 바보인 것은 확실하다. 자폭은 금지되어있는데 그걸 쓰면 어쩌자는 건가? 같이 죽더라도 난 반칙 승으로 올라가게 되고 그들은 탈락된다. 바꿔 말하면 그들이 하는 짓은 일명 ‘개짓거리’라고 할 수 있겠다. 남들은 내가 우승하게 되면 자신들에게 돌아갈 이익을 알고 가만히 있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이러니 머리 나쁜 사람은 평생 고생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려나? 뭐, 자기네들이 하겠다는데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나는 나대로 가고 그들은 그들대로 가면 되는 일이니까. 가만히 당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대회 기간에는 대회 전용도시를 따로 마련하게 되어있다. 구경하러 오는 인원을 수용할만한 크기의 도시가 없기 때문이다. 가장 큰 도시인 ‘사베티움’ 마저도 최대 40만 명이 한계다. 도시는 트렌의 북쪽으로 있는 거대 평야인 ‘폭풍의 언덕’에, 대회 시작 일주일 전 서버 안정화 작업을 함과 동시에 ‘페스티벌(Festival)’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만들어진다. 최대 수용인원 70만 명의 엄청난 크기의 도시다. 도시의 안에는 유저들의 편의를 위해 수많은 여관들과 상점들이 있고, 거리에는 축제분위기가 형성되어 상인들이 노점을 만들어 먹거리와 잡다한 물품들은 판매한다. 간혹 좋은 무구들도 파는 경우가 있기에 유저들은 어떠한 노점이라도 반드시 구경하고 지나친다. 페스티벌의 중앙에는 두개의 콜로세움이 세워져있다. 천 명가량의 인원을 반으로 나누워 결투를 하기 위함이다. 각 콜로세움에서 우승한 사람이 한곳으로 모여 마지막 결승전을 치르게 된다. 콜로세움의 외부는 타원형의 모습으로 원주(원기둥)가 아치를 끼고 늘어서 있으며, 내부에는 약 30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으로 설치되어 있고, 그 위로는 선수대기실이 존재한다. 콜로세움의 중앙에는 한 변이 70미터정도 되는 정사각형의 비무장이 있다. 비무장의 네 개 모서리엔 하나씩의 오벨리스크(Obelisk)가 솟아 경기가 시작되면 결계를 쳐 스킬들의 여파가 관중석으로까지 흘러나가는 것을 막아준다. 스킬의 여파로 인해 게임오버 되는 유저들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일단 대회가 시작되면, 비무장의 모습을 가장 먼 자리의 관중석에서도 확실하게 볼 수 있을만한 크기의 스크린(Screen)이 비무장의 상공에 형성되어 그날 일정이 모두 끝날 때까지 유지된다. 그리고 듀얼 랠리는 엘-가 최고의 이벤트이니만큼 GBS를 통해 전 세계로 실시간 방송되도록 되어있다. GBS 뿐만 아니라 다른 방송사에서도 며칠간은 이쪽으로 카메라를 돌릴 것이었다. 게임계에선 거의 축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고, 세계적으로도 엘-가의 유명도는 대단한 것이니까. 하긴, 가상현실 시스템으로 생활반경에도 영향을 미쳤으니 당연하다. 가상현실 시스템은 무한한 가능성과 끝없는 미래를 가지고 있어서 게임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응용이 가능하니 말이다. 그런 가상현실 세계의 신이나 마찬가지인 미르트인데, 그들의 최고 이벤트를 무시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나 마찬가지가 되니 관심이 쏠리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미르트에서 특별히 만든 아이템인 캠코더(Camcorder)와 카메라를 들고 쉴 새 없이 앵글을 돌리는 각 방송국의 기자들. 나는 선수대기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엘레멘탈 가드를 하는 유저로서 뿌듯함을 느꼈다. 모국(母國)이 칭찬받으면 그 국민인 나도 즐거워지지 않는가. 반대로 욕먹으면 내가 이 나라에서 살아야 하나라는 회의감도 느껴지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지금은 욕먹는 쪽이 아니니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같은 선수대기실에서 창밖을 보는 이들의 얼굴에도 흐뭇함이 서려있었다. 그들의 국적이야 어찌되었든(모두 한국인이긴 하다) 엘레멘탈 가드의 세계는 제 2의 모국이나 다름없으니까. 지금은 한창 개회식이 거행 중이었다. 비무장의 위에는 엘레멘탈 가드의 운영자들이 전신을 가리는 망토를 휘날리며 기립하여 있고, 바로 앞쪽에선 현 미르트의 사장자리에 있는 ‘유강현’사장의 개회사가 시작되려는 차였다. “여러분의 참석을 진심으로 환영하면서, 엘레멘탈 가드를 대표하여 마음으로부터의 따뜻한 인사를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저는 특별한 감회 속에 여러분을 맞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듀얼 랠리 역사상 최대규모의 유저 분들을 맞이하여 제12차 엘레멘탈 가드 듀얼 랠리의 큰 경사가 열리게 된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족한 제가 노벨상 수상자로서 여러분을 맞게 된 것입니다. 저의 이러한 수상의 영광은 엘레멘탈 가드를 하시는 유저 여러분의 성원의 덕으로 생각하고 깊이 감사드립니다.” 말을 잠시 멈춘 유강현사장은 허리를 깊게 숙여보였다. 수많은 유저들이 열광하며 뜨거운 박수와 함성을 보내주었다. 가상현실 시스템의 개발자인 유강현사장은 이번에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내주었다는 점을 치하해 노벨물리학상의 주인이 되었다. 이것은 게임이기 이전에 같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운 경사였다. “전 엘레멘탈 가드가 그저 게임에 그치지 않고 여러분의 따뜻한 안식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가상현실 시스템으로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시간의 혜택을 고루 누리고 삶의 질이 향상되는 시대를 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다시 한번 여기 모이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면서, 앞으로도 더욱 적극적인 성원을 부탁해 마지않습니다. (중략) 여러분의 페어플레이 정신과 매너플레이가 모두의 마음속에 길이 남았으면 합니다. 내실 있는 과정과 큰 성과를 기대하면서, 엘레멘탈 가드의 무궁한 발전과 유저 분들 모두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유강현사장은 말을 마치고나서 인사를 한 뒤에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자리를 엘-가의 최고 운영자 ‘로그(LOEG : Lord Of Elemental Guard)'가 메우면서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검을 꺼내 높게 들어보였다. “이로서 엘레멘탈 가드 듀얼 랠리의 시작을 선언합니다!” “우와아아아아아!!” 비로소 6개월간 기다려온 듀얼 랠리의 서막이 올랐다. 개회식이 끝나자 하늘 위로 많은 폭죽이 솟아올랐다. 언제나 한결같은 푸른 하늘이기에,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과는 달리 하얀 연기가 구름층을 형성했다. 그리고 은하수를 대신하여 흩날리는 각양각생의 색종이들과 어울려 밝은 이미지를 한껏 창출하였다. 예전 듀얼 랠리 때보다 좀더 세심한 관심을 기울인 듯싶다. 관중석을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메워버린 유저들 사이로 거대한 함성이 승천하는 용처럼 하늘을 찔렀고, 그럴수록 콜로세움의 열기는 뜨거워져만 갔다. 나는 대기실 창턱에 기대어 관중석을 둘러보고 나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요번 듀얼 랠리의 열기는 상상을 초월하네.” “겨울 때는 더할 거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듀얼 랠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테니까.” 화청 형이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말했다. 제법 폼이 있는 모습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 중에서는 나와 가장 친한 사람이다. 의형제라 여겨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또 미드 넷 룸(Myth Net Room)의 사장으로 자신이 하는 거라고는 하나 없는 무성실한 인간이다. 일거리는 모조리 주변으로 돌려버리고 하루 종일 게임만 하다 배고프면 라면 먹고, 졸리면 잠깐 자는 전형적인 폐인의 표상이기도 하다. 아마 지금 형을 보면 눈이 퀭하게 들어가 있을 것이다. 3일 밤을 내리 새웠으니까. 하락된 레벨을 복구해야 한다나? 형의 현재 레벨은 315로서 트리플 마스터의 세이지(Sage)이다. 형도 은현과 마찬가지로 계열 변환 없이 매직 계열만 죽어라 파서 세이지까지 된 유저다. 본래는 350이었는데, 얼마 전에 미연누나에게 까불었다가 맞아죽는 바람에 10%인 35가 하락되어 315가 되고만 것이다. 클래스 트리는(Class Tree)는 메지션(Magician), 메이지(Mage), 위저드(Wizard), 워록(Warlock), 세이지(Sage)의 순으로서 지금은 빛 좋은 개살구, 속빈 강정 격의 세이지다. 레벨다운 되면서 스킬레벨이 역행해버렸거든. “미연누나, 화청 형이 개 폼 잡네요.” 나는 킥 웃으면서 미연누나에게 말했다. 나 죽인다는 사람에게 잘 대해줄 필요는 없는 일이다. 나와 반목 있는 이들은 모조리 적이다! 우하하하! 미연 누나는 368레벨이다. 퀸 오브 윈터. 이지적이나 차가운 모습을 지녀 겨울의 여왕이라고도 불리는 트리플 마스터 레벨의 미녀 세이지다. 물론 엘-가 내에서만 적용되는 이야기다. 현실에서는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는 누나거든. 그것으로 인해 화청 형이 미연누나에게 반해버린 것이지. 현 나이는 23세로서 화청 형과 미래를 기약한 사이다. 1년 전만 해도 화청 형과 같이 290레벨로 동급이었었는데 화청 형은 언제나 엄청난 괴롭힘에 시달렸다. 미연누나 딴에는 가벼운 애정표현이라지만 레벨차이가 확연히 벌어진 지금은 가벼운 애정표현이 어느 정도일지 예상도 안 된다. 웃는 얼굴로 화청 형을 살해할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그게 내가 바라마지 않는 결과였다. 저인간은 다시 죽어봐야 날 우습게 못 본다. 누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외동딸이어서 혈육이 없는 누나는 날 친동생처럼 여기고 있기에 나에겐 언제나 웃음을 지어주는 사람이었다. 누나는 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형에게로 다가갔다. 반대로 주춤주춤 뒷걸음질치는 형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갔다. “화청씨! 재수 없어요!” 그렇게 외친 미연누나는 들고 있던 스태프의 끝으로 화청 형의 복부를 찍어버렸다. “크헉!” 형은 배를 움켜쥐고 무릎을 꿇었다. 부릅떠진 눈으로 보아 상당한 고통을 받았음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음, 쬐끔 미안한 감이 없잖아 든다. 미연 누나는 스태프의 끝을 형의 옷에 슥슥 문지르고는 허리에 찼다. 난 시선을 의자에 앉아 무기를 점검하다가 갑작스런 상황에 떨리는 눈으로 응시하는 성호에게로 돌렸다. 후훗, 네 녀석도 내게 반기를 든 놈이지. “조성호?” 녀석은 움찔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네 우승은 정해진 것이다! 류현, 만세! 만세! 만세!” “그래, 그래. 네가 뭘 아는구나.” 크크크, 이런 식이지. 아~ 난 왜 이리 리더십이 좋은 것일까? 사람을 너무 잘 다루는 것 같아. 만세 삼창을 부른 성호는 내게 잘 보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성호도 미연누나와 잘 아는 사이기에 자신이 어찌될지를 알아버린 것이다. 역시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첫째로 눈치가 빨라야하고, 둘째로 지가 알아서 기는 수밖에는 없다. 주변에서 각자의 일을 하던 이들은 성호의 비참한 결말에 질렸다는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각각의 선수대기실에는 10명의 유저들이 들어가 있다. 듀얼 랠리에 참가자격을 얻은 1024명에서 반반씩 나눠 콜로세움의 선수대기실로 대기시키는데, 그 콜로세움의 선수대기실도 10명씩 나눠서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현재 여기 7번 선수대기실은 나, 화청 형, 미연누나, 조성호, 박찬석, 김학진, 김태진, 최은주, 유지연 누나, 유세영이 사용 중이다. 다른 몇몇은 다른 선수대기실로 흩어졌다. 은현은 의료진이라 관계자 대기실에서 대기중이고. 김태진은 학교에서 인간 바이러스라 불릴 정도로 만나는 사람 족족 망가트리는 것이 취미인 녀석이다. 흔히 말하는 ‘변태’인 것이다. 정작 당사자는 절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들어줄 필요 따윈 없었다. 이미 여러 사람(특히 찬석과 성호. 이들도 고등학교 초에는 얌전했었다) 망가져서 충분히 증명이 되었건만 어디서 발뺌을 하려들어. 더구나 주제에 은현을 좋아하는데 은현의 여린 성격도 이놈 앞에서만큼은 견고해져 버린다. 싫어한다는 분위기가 뚝뚝 떨어질 정도다. 그럼에도 눈칫밥이 없는 태진은 심한 망상을 하여 은현이 자신을 좋아하는 줄로 착각한다. 유독 자신에게만 차갑게 구는 것은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나? 절대 성립되지 않는 말이지. ‘정말’ 싫어하거든. 오죽하면 내가 태진과 함께 있을 때는 나까지 노려보겠는가. 은주는 찬석의 여자친구다. 같은 반인데 지금은 찬석과의 사이가 위태위태한 상황이다. 냉전기인 것이다. 결정적인 일(?)이 터지지 않는 이상 이대로 깨지는 것은 기정사실화 되어있다. 태진의 개입으로 이리 되어버렸다. 찬석의 깔끔하던 성격이 태진으로 인해 두루뭉술해져 버렸으니까. 이래저래 태진이 죽일 놈이었다. 유지연은 세영의 언니로서, 좋아하는 사람에겐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이다. 바로 라미안이다. 예전에 세영과의 마찰을 빚은 후에 여자로서 보게 된 지연 누나. 지금은 나와 연인사이가 되어 있다.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겠다며 길드 마스터의 자리도 버리고 길드에서 탈퇴했다. 세영까지 같이 탈퇴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또한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옥상에서의 일 이후에 나는 곧장 지연누나에게 고백했다. 누나는 대학생이었기에 게임 내에서. 트렌의 중앙광장에서 크게 외쳤기에 많은 유저들의 눈이 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고백했다. 지연 누나는 주변을 의식해서인지 내 말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인지 귀 끝까지 발갛게 물들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 그 후로 연인 사이가 되었다. 유세영. 그녀는 언제나 차가운 모습을 잃지 않았다. 눈보라 날리는 그녀의 태도는 사람들의 접근을 자연스럽게 막았다. 지연누나 말로는 가족들 말고는 말을 잘 틔지 않는다던데 사실이었다. 지금은 우리 반의 활기찬 분위기에 녹아 그럭저럭 입을 떼고 있지만. 아, 그리고 다짐한대로 우연을 가장하여 진윤과 대면하게 만들었었다. 그때 진윤의 표정은 뭐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가관이었다. 사진기만 있었더라면 당장 찍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못내 아쉽다. 아무튼 진윤도 세영이 유나인줄 알고 눈물을 펑펑 쏟다가 당장에 껴안으려던 걸 따귀 맞고 내쳐졌다. 내가 팔을 잡아 만류했음에도 안으려다가 그렇게 되었었지, 불쌍하게도. 세영이 가고 나서 유나에게 따귀 맞은 것 같아 더 아프다고 엉엉 울어대는 그의 마음은 나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류현아. 너 나가봐야 할 것 같아.” 화청 형까지 내게 갖은 아양(살심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다)을 다 떨고 있을 때, 옆에서 창밖을 내다보던 지연 누나는 내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는 눈을 말똥히 뜨고 누나를 보았다. 뭔 말이래? 내 경우엔 대부분의 경기가 오후로 몰려있어서 지금 나갈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지연누나가 하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제 차례는 아직 멀었어요.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 “제대로 알고 있어. 근데…….” 누나는 나와 시선을 마주하기 힘든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내리고서는 창밖으로 팔을 뻗었다. 나를 비롯한 일동은 의아함에 창문으로 매달려 비무장을 살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신나게 외치는 모습이 먼저 투영되었고, 이쪽의 맞은편 입구에서 금빛 망토를 펄럭이며 걸어 나오는 유저가 2차적으로 들어왔다. 듀얼 대회의 3연속 우승자이자, 세간에서 레드 크로스(Red Cross)라는 외호로 불리는 ‘샤프(Sharp)'였다. 아, 샤프란 이름도 시원스럽고 날카로운 인상이어서 엘-가 내에서 불려지는 이름이다. 또한 그가 펼치는 검식 또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날카롭다 해서 붙여진 것이다. 본래 아이디는 밝혀지지 않아 모르겠고. 샤프가 모습을 드러낼 때, 성대가 파열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최고조에 이른 관중들의 환호 때문에 콜로세움이 부르르 떨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러나 그가 비무장에 올라 오른손을 번쩍 들자 뜨거운 함성은 일제히 끊겼다. 사전에 예행연습이 있었나하고 의심마저 드는 광경이었다. 정말 한거 아닐까? 그리고 샤프의 얼굴이 클로즈 업 되어있던 스크린에 몇 줄의 글귀가 적혀졌다. 라운드(Round) 1. 라이트(Right) 섀도우 나이트(Shadow Knight). 다크니스(Darkness). “…….” 나는 입을 다물고 스크린만 주시했다. 스크린에 뜬 명칭은 내가 참가 신청 서류를 작성할 때 적은 내 가명이었던 것이다. 대회의 시작은 언제나 전 대회 우승자의 경기로서 시작된다. 일종의 친선경기 비슷한 것이어서 패배를 하더라도 변하는 것은 없다. 대회 시작 전에 우승자의 활약을 보여줌으로서 흥을 돋우기 위해서인데 불이익이 있으면 누가 하겠는가. 대신……. 상대는 기분 더럽게 된다. 이기게 되면 여세를 몰아 즐거운 마음으로 경기에 임할 수 있다. 그러나 져봐라. 아무리 상대가 우승자여서 실력의 차이로 인해 졌다손 치더라도 기분 잡치게 되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더구나 졌다는 심적 부담감이 은연중에 들게 되어 마음을 어지럽히기에, 제대로 된 실력 발휘도 어렵게 된다. 이는 우승자 쪽도 마찬가지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승자가 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유명한 유저가 상대로 지목된다면 달라질 터이나 나 같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유저일 경우엔 그렇지 못하다. 만약 내가 헬 마스터, 드래곤 헌터라는 것을 알면 무슨 표정들을 지을지 심히 궁금하기도 하다. 어찌되었든, 지게 되면 심리상에 많은 불이익을 얻게 되므로 참가자들의 대부분은 추첨에서 자신이 뽑혀 첫 경기에 나가지 않기만을 기원한다. 뭐, 나야 질 이유가 하등 없기에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범인들과 난 다르거든. 나보다 약한 상대에게 비위를 맞춰주고 싶은 마음은 없어. 내가 비무장에 완전히 올랐을 때, 비무장의 정중앙에 있던 사회자가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듀얼 랠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할 경기! 그 안에 적혀질 한명의 선수 섀도우 나이트 다크니스입니다! 처음으로 출전하는 선수로군요! 선전을 기대합니다!” 사회자가 내 소개를 하자 나는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해보였다. 관객들은 박수를 쳐줌으로서 내 인사에 보답해주었다. 지난 대회에 출전을 한 경험이 있긴 했지만 굳이 알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16강 진출이라고 해도 ‘기권’이라는 쓰라린 기억이 있음으로 해서 결정한 사안이었다. 내 대회 기록에 기권이 남는 것은 용서가 안 된다. 더구나……. 무명의 유저가 듀얼 랠리 우승, 이라는 원대한 꿈이 날아가 버리는데 그걸 왜 알려? 이름 꽤나 날리는 유저들이 무명의 유저에게 줄줄이 나가 떨어져가 봐라. 그들의 수치심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 주가는 폭등하는 것이고 말이다. 경기가 끝난 뒤엔 영웅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때 16강이란 전적은 그것을 방해하는 기록일 뿐이잖아. “그리고 듀얼 랠리의 3연속 우승자인 레드 크로스 샤프!! 날카로운 인상답게 검 또한 오싹할 정도로 날카로운 사나이입니다! 1:1 듀얼 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다고 칭해지는 유저이기도 합니다! (주절주절) 과연 이번 첫 경기를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 궁금하군요! 모두의 기대에 부흥하는 경기를 치러주시기 바랍니다!” 온갖 미사여구가 다 들러붙은 샤프의 소개까지 끝난 뒤에 사회자는 관람석 쪽에 마련된 단상으로 이동하여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그곳이 앞으로 사회자가 있어야할 자리였다. 사회자는 NPC가 맡았다. 선글라스를 쓰고 검은색 턱시도를 입은, 제비같이 생긴 이였다. NPC로 정한 것은 그래야만 모든 기술을 막힘없이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저에게 정보를 주입하는 것은, 설사 사회자가 엘-가를 잠깐 하는 것일지라도 미르트의 운영방침에 어긋나니 NPC에게 모든 정보를 불어넣어 사회를 보게 하는 것이다. 사회자는 시합 시작 전에 몸을 풀 약간의 시간을 주었다. 바로 경기를 시작해도 상관없는데 말이야. 그래도 모처럼 주어진 시간이니 필요한 쪽으로 사용해야겠지. 난 왼쪽 허리에 걸려있는 롱소드를 가볍게 꺼냈다. 반갑다고 인사하는 듯 맑은 금속성의 성랑(城廊)이 길게 울렸다. 참가신청 서류를 내면서 사용 무기란에 보통의 장검과 드래곤 슬레이어를 같이 등록시켰기에 내 허리에는 두 자루의 검이 걸려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등록시킨 것으로, 검집 채로 천을 감아 허리에 장비시켜둔 상태였다. 그냥 장비하기엔 당장에 정체가 발각되어 경기는 고사하고 도망자 신세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드래곤을 잡았던 부침개를 부쳤던 간에, 유저들은 날 PK하려고 안달들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호락호락 당할 나도 아니지만 시끄러운 상황은 일단 피하고 봐야했다. 장검은 예전의 것은 이가 빠지고 자잘한 실금이 많이 들어서 있어 새로 장만한 아이템이다. 솜씨 좋은 스미스(smith)계열의 유저가 만들었는지 제법 좋은 검이었다. 내가 빠른 검세 변화를 위해 손을 바꿔가면서 가벼운 검무를 펼치는 와중에 샤프가 다가왔다. 주어진 시간이 다 된 줄 알고 검을 회수하며 사회자를 보니 여전히 참가자 명단만 살피고 있었다. 뭐야, 인사라도 하러오는 거야? 내 의문이 섞인 시선을 읽었는지 샤프는 무감각한 얼굴로 척 손을 내밀었다. “보기완 다르게 움직임이 깨끗하군. 다크니스라고 했던가?” 보기완 다르게라. 나보다 레벨이 낮은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도 오랜만이군. 새삼 기분이 나쁜 걸. 샤프의 적색 건틀릿이 착용되어있는 손을 보았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초면부터 반말에 악수를 청하면서 장갑도 벗지 않는 매너 없는 싹수머리가. 슬쩍 그의 얼굴을 보고 무시해버렸다. 샤프는 내가 다시 검을 움직이는 것에만 열중하니 무안한 듯 손을 거두며 말했다. “이거 실수를 했군. 내 사과 하겠네. 미안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손을 다시 내밀지는 않았다. 자신이 실수를 한 것은 인정하겠으나 그걸 아무런 지적도 없이 무시해버린 내게 기분이 상했으리라. 뭐, 악수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용건이 뭐지?” 내 말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흥, 먼저 반말로 시작한 주제에 존칭이라도 하길 바란 거야? 어림도 없는 소리지. 거언미 래언미도 몰라?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운 법이라고. 지식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만하네. “연장자를 존중할 수는 없나?”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그쪽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동안이어서 어려보이는 것이라면 당신은 내게 존대를 할 텐가? 거기다 나이가 많다손 쳐도 초면부터 반말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 웃기는군. 당신이 언제부터 날 알았다고 무시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매너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쓰레기였나? 그렇다면 번지수가 틀렸어. 난 쓰레기를 치우는 빗자루이긴 해도 쓰레기를 담는 통은 아니니 말이야. 뭣하면 쓸어줄까?” 빗자루 질을 하는 시늉을 해보이며 그를 향해 이죽거렸다. 샤프는 눈가만 파르르 떨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열 명중에 일곱, 여덟은 성을 낼법한 독설임에도 그는 참아낸 것이다. 인내심만큼은 인정해줄만한 것이었다. 뭐, 이정도도 인내하지 못했다면 정말 쓰레기로 여겨 손속을 두지 않고 밟아버릴 생각이었다. 그런 것은 미리미리 치워버려야 주변이 깨끗해지는 법이지. 샤프는 주먹을 꽉 쥐며 화를 억눌렀다. 졸지에 멀쩡한 인간이 쓰레기로 전락했는데 화가 나지 않으면 그게 인간이냐. 고래심줄보다 질긴 무신경이거나 욕에 무감각한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해. “시간 다 되었습니다. 선수 분들은 비무장에 그려진 원에 서주시기 바랍니다.” 때마침 사회자가 준비하라고 알려왔다. 샤프는 당장에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려 내 맞은편 원으로 걸어갔다. 이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쩝. 지금 시작을 외치면 당장 뒤통수를 까버리고 승리할 수 있을텐데……. 아쉽다. 원 위에 서서 이쪽을 매섭게 노려보는 샤프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사회자는 흥분한 듯 마이크를 든 반대쪽 손을 휘두르며 크게 외쳤다. “자, 이제 대회의 시작입니다! 듀얼 랠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할 이 듀얼의 승리는 누구의 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인가! 준비는 되셨습니까?!” “되었소.” “됐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파이트(Fight)!!" 사회자의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PVSP(Player VerSus Player) 존(Zone)이 형성되었다. 비무장 각 모서리의 오벨리스크에서도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PVSP 존은 듀얼을 할 당시에 형성된다. 이것은 유저가 사망하더라도 아무런 피해가 없도록 하는 일종의 보험이다. 유저들이 PK를 배척하고 PVSP를 선호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오벨리스크는 비무장 주변에 무형, 무색의 절대 결계를 쳐 유저가 사용하는 기술의 직접적인 여파가 관람석으로까지 번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작은 것까지 모조리 막아버리면 느끼는 재미가 떨어지니, 열기나 바람 같은 약한 파편들은 그대로 전해지게 해두었다. 선택적 방어 결계인 것이다. 샤프는 흥분지수가 꽤나 높았는지, 양 허리에 차여있는 두 자루의 검을 쾌속으로 출수하여 맹렬한 기세로 달려왔다. 지면을 박차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었다. 이건 거의 미끄러지는 수준이다. 저 인간 무늬만 엠페러 나이트(Emperor Knight)고 실상은 섀도우 마스터(Shadow Master) 아냐? 엠페러 나이트는 소드맨(Swordman)에서 성 속성 검 계열로 노멀 스킬을 배우고, 익스퍼트(Expert), 레어(Rare), 유니크 스킬(Unique Skill) 모두(엘리트 스킬은 클래스를 정하는 데에서 제외된다)를 암, 성 속성을 제외한 물리계열 쪽의 스킬로만 익히면 도달이 가능한 마스터 클래스다. 클래스 트리는 베이직 스킬을 검 쪽으로 익혀 소드맨이 된 뒤에, 성 속성 검 계열 노멀 스킬을 배워 나이트 에런트(Knight Errant)로 전직한다. 그런 뒤에 성, 암 속성을 제외한 물리계열 쪽의 스킬들을 등급 순으로 차례대로 익혀 나이트(Knight), 로열 나이트(Royal Knight), 엠페러 나이트(Emperor Knight)의 순으로 전직하는 것이다. 만약 나이트 에런트에서 익스퍼트 스킬을 암 속성 물리계열이나 흑마법으로 익히면 다크 나이트(Dark Knight)가 되고, 성 속성 물리계열이나 백마법을 익히면 템플 나이트(Temple Knight)가 된다. 섀도우 마스터는 씨프(Thief)에서 암살 쪽으로 쭉 스킬을 배워나가다 보면 도달하는 마스터 클래스로서, 섀도우 마스터의 이전 단계가 내가 가명의 외호(外號)로 사용 중인 섀도우 나이트다. 암살자 쪽 스킬들은 민첩성(AGIility) 보정치가 높아서 움직임이 발군인 클래스이기도 하다. 그러니 샤프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섀도우 마스터라 여겨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나야 능력치가 높아서 클래스 속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말이지. “합!” 삽시간에 내 앞까지 다다른 샤프는 기합성을 터트리며 우(右)검을 횡으로 그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의 동태(動態)다. 타깃은 내 목이었다. 감각이 그러하다고 경고해주고 있었다. 빠르게, 그리고 침착하게 검을 올려 샤프의 검 끝을 왼쪽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그가 쌍검이었다는 사실은 빨리 인식하지 못했다. 샤프는 우 검에 실린 힘을 유연하게 흘려버리며 좌(左) 검을 내뻗어왔다. 가슴에 찡한 느낌이 들었다. “큭!” 가까스로 상체를 비틀어서 비껴나가게 해 큰 타격은 면할 수 있었지만 허리부근의 옷깃이 베이는 것은 모면하지 못했다. 거기다 약간의 쓰라림이 느껴지니 얕게 베이기까지 한 것 같다.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후회하고 상대를 살피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거리를 늘려 시간을 벌려했다 하면 샤프가 당장 빈자리로 따라 들어와 검을 날리는 탓이다. 기술을 사용할 틈도 없었다. 나도 못하니 샤프도 못하는 것일 테지만 일방적인 공격을 하는 그가 배로 유리하다. 이대로 가다간 변변찮은 공격도 못해본 채 패배할 심산이 컸다. 대회의 정식 경기와는 거리가 멀지만 사람에겐 기분이라는 게 있다. 이딴 싹수없는 놈에게 지는 것은 내가 용납 못해! 그는 찌르는 자세에서 좌 검을 들고 있는 손목을 살짝 비틀었다. 검의 서슬이 선회하며 내 팔을 베어왔다. 쾌검이었다. 손속을 두지 않는군.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냐? ―라고 불평을 하기엔 찔리는 게 너무 많았다. 이쪽부터 봐주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손속을 두길 바라라는 것은 상당히 염치없는 짓이었다. 그렇다만 상황이 변하면 마음도 변하는 법이다. 살살하라고 소리를 질러버리고 싶었으나 여유가 없었다. 잠깐이라도 호흡이 끊겼다간 사지에서 하나는 헌납해야할 판국이다. 샤프는 내 행동반경을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내가 몸을 피하는 즉시 검세를 변화시켜 방어하기 어려운 쪽으로 검을 내질러왔다. 검이 두 자루이니 방어하고 역공을 취하는 것도 어려웠다. 절대감각이 없었더라면 진작 패배했을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검은 날카롭고 또한 정확했다.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검기(劍技)였다. 결투에 있어서만큼은 그를 따라갈 자가 없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샤프가 결투의 귀재인 것만큼은 여부없는 사실이다. 3년 연속 듀얼 랠리 우승이라는 전적도 충분히 납득되었다. 그는 수많은 듀얼 경험을 통해 일대일 듀얼에선 날 능가했다. 쓰읍, 규칙과 수많은 유저들이 없었다면 상대하지 못할 것도 없을 텐데 말이다. “별 볼일 없는 허풍쟁이였나? 우습군.” 숨 하나 흩트리지 않고 말하는 샤프. 이가 갈리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샤프는 몰라도 내겐 여유는 곧 죽음으로 직결되어버린다. 으아, 열 받아! 헬 마스터의 칭호가 운다, 울어! 나도 검 한 자루만 더 있었으면 쉽게 싸울 수 있을 텐데!! 검 한 자루만 더……. 아. 문든 한 가지가 떠올랐다. 만일을 대비하여 등록시켜둔 드래곤 슬레이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미소가 번졌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것을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다. 천으로 감은 채 이용하면 검이 아닌 몽둥이로 둔갑한다. 벨트에서 통째로 빼내면 될 터였다. 그렇지만……. 숨 돌릴 시간도 촉박한데 그럴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냐! 좀 천천히 좀 공격하라고!! 목을 찔러오는 좌 검을 고개를 뒤로 젖혀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나갔다. 그리고 전신을 일도양단할 기세도 뇌전(雷電)처럼 떨어지는 우측의 검을 위로 튕겨낸 뒤 빠르게 후퇴했다. 가슴 앞에서 지면과 수평 된 은빛의 검광이 잔영을 남기며 흩어졌다. 앞섶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 순간의 번뜩임! 이거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샤프에게 역공을 취했다. 팔을 큰 각도로 휘둘러 허리부분이 노출되도록 했다. 모험이었다. 조금의 오차라도 생겼다간 샤프의 검에 의해 잘려나가는 것은 드래곤 슬레이어가 연결된 벨트가 아니라 내 허리가 될 것이었다. 단 1초의 시간이다. 그 안에 모든 동작을 끝마쳐야했다. 두 번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샤프는 내가 빈틈을 보이자 당장 가격해왔다. 도박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의 검이 뻗어온다.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만 갔다. 1초가 한 시간이 된 듯한 기분이다. 마침내 허리에 걸리는 예리함! 스팟! 이대로 허리가 끊어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있는 힘껏 몸을 돌려 샤프의 검이 벨트를 스치도록 만들었다. 날에 베였는지 오른쪽 허리에 화끈한 통증이 엄습하면서 뭔가가 끊어지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전율케 했다. 통증에 의한 짜릿함인지, 혹은 성공했다는 희열에서 오는 쾌감인지 분간이 서질 않는 순간이다.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제 저놈이 당할 차례라는 것! 지면으로 흘러내리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잡아챈 뒤에 하체를 이단분리 시켜버릴 위세로 꽂히는 샤프의 검을 드래곤 슬레이어로 받아쳤다. 그리고 상체를 숙인 채 일순 경직되어 있는 샤프에게 발을 질러 가슴통을 올려쳤다. “커윽!” 그의 몸이 붕 떴다가 지면을 긁었다. 옅은 먼지가 흐드러지게 퍼져나갔다. 이대로 끝나면 천추의 한이 없겠다만, 킥 한방에 뻗어버릴 상대가 아님을 알기에 즉시 스킬을 캐스팅했다. 샤프 같은 상대는 정면공격을 감행하기 보단 기습적인 공격이 효과적인 법이지. 유니크(Unique) 섀도우 스킬(Shadow Skill) 레벨 식스(Level Six) 섀도우 점프(Shadow Jump)!! 섀도우 점프는 상대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는 기술이다. 딜레이도 없고 상대의 사각지대, 즉 뒤에서 나타나므로 많은 응용 공격을 할 수 있어 일대일에서는 진가를 발휘한다. 섀도우 스킬 북(Shadow Skill Book)에 담겨진 대부분의 기술들은 기습적인 것들이다. 때문에 섀도우 스킬은 살수 전용 스킬이라고도 불린다. 유니크 스킬이어서 희소성이 강하나, 일단 배우고 나면 살수건 뭐건 간에 두고두고 우려먹을 수 있다. 뭐, 강한 빛으로 그림자를 흐려버리면 대부분이 무효화되는 단점이 있기는 한데……. 그래도 속력이 빠른 만큼 상대가 대처하는 시간이 줄어드니 미리 빛을 만들어 놓지 않는 이상 회피하기는 힘들다. 2초간의 캐스팅이 끝나고 땅이 꺼지는 듯한 기분과 함께 눈앞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깜빡였다는 것이 옳은가? 곧 시계에 샤프의 등이 들어왔다. 약간의 지체라도 했다간 베어버리는 게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어 즉시 검을 내뻗었다. 채챙! 억! 네가 인간이냐! 머리 뒤에도 눈이 달린 거야 뭐야, 대체?! 샤프는 양팔을 뒤로 넘겨 검을 막아냈다. 막는 게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아니, 승리로 점철될 거라 여겨 아예 생각자체를 안했다. “빌어먹을!” 욕지거리가 넘어온다. 이런 괴물 같은 놈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내 검을 내리누르며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나와 그는 동시에 뒤로 몸을 피했다. 흠칫하여 눈을 크게 떴다. 망할! 공격할 줄 알았더니만! 인상을 팍 구기며 뒤꿈치가 지면을 밟는 즉시 앞으로 몸을 튕겼다. 샤프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 낭패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고 바닥에 다리가 닿자마자 쏟아져 들어왔다. 그 후 격돌! 채재재챙! 차앙! 빠르다! 감탄부터 터진다. 스피드에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지금 그 자부심이 깨어져 나갔다. 나와 맞먹는 공격 속도를 가진 이가 눈앞에 자리 잡고 있기에. 어쩌면 나보다 더 빠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난타전이 벌어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내질러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검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금속성과 불꽃이 피었고, 드래곤 슬레이어를 휘두를 때는 흰 천 조각이 눈송이처럼 휘날렸다. 묵빛의 검집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물리고는 싶지만 여기서 조금이라도 피했다간 곧장 내 몸은 넝마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제 와서 물리기는 싫다. 끝장을 보고 싶어졌다. PK이후 지금처럼 즐거웠던 적이 있었던가? 대답은 ‘없다’였다. 이제껏 샤프 같은 상대는 만나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검예를 나눠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샤프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웃는다. 그래그래, 즐기자고. 이후 얼마동안 난타전을 벌였을까, 어느새 샤프와의 대결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검격을 교환하다보니 이렇다할 타격을 입은 것도 아님에도 체력이 엄청나게 줄어버렸다. 샤프나 나나 제대로 된 일격만 있다면 그대로 게임오버가 될 수위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드래곤 슬레이어는 가까스로 걸레가 된 천 조각에 가려져 묵색의 몽둥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몇 분만 더 검을 나누었다간 당장에 모습을 보일지도 몰랐다. 검집이 있다지만 그것도 묵색에 용 문양까지 그려져 있거든. 아무튼 그런 일이 발생하면 6개월 무료이용과는 작별이다. 솔직히 무료이용 때문에 참가했는데 그걸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기회를 잡아야 한다. 그래야만 소동 없이 듀얼을 끝마칠 수 있어! 이를 악물며 방법을 강구해보았다. 이대로 빠진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난투전은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방어책이었기에 잠깐이라도 검을 망설였다가는 즉시 낭패를 보게 될 확률이 컸다. 제길……. 그냥 눈 한번 딱 감고 드래곤 슬레이어를 써버릴까? 쓰기만 하면 내 승리는 당연시 된다. 거기다 우승까지 따 놓은 당상이다. 구미가 당기는 사안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어떤 무기인가. 드래곤도 잡는다 해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 단단하기로 유명한 드래곤 스케일(Dragon Scale)도 베어버리는 예기를 지닌 것이 드래곤 슬레이어다. 보통 검들 정도야 몇 번 부딪혔다하면 잘려나가게 만드는 엘리트 아이템인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냐. 나보고 이 한번의 듀얼을 위해 미래를 포기하라는 말이더냐! 져주는 한이 있어도 절대 포기 못해……, 라고는 해도 그냥 져주기에는 내 승부욕이 가만히 있질 않는 걸 어쩌니. 간만에 만난 호적수다. 평소였다면 이득 없는 승부 따위에 이렇게나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지금의 결투는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었다. 내가 더욱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만들어주는 대결이라 할 수 있었다. 엘-가에선 직접 실력을 갈고 닦아야만 진정한 고수로 등극할 수 있게 된다. 무조건 좋은 스킬을 익히고 레벨만 높다 하더라도 제어할 능력이 없으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요, 돼지발에 금반지로 전락하고 만다. 유저들이 일단 길드에 들고 보자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혼자서 플레이하기엔 제대로 된 실력을 쌓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길드에 들면 길드의 비전을 전수받아 격식 있는 실력을 얻을 수 있는데, 혼자 놀며 시간만 버릴 필요는 없는 거잖아. 나야 워낙 잘난 놈이라서 혼자 여기까지 왔지만 말이다. 내가 게임을 좀 잘해야지. 실력은 경험과 비례한다. 수많은 전투경험과 지식이 있다면 자신의 역량은 저절로 좋아진다. 내가 남들보다 강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달래 PK하고 다녔는지 알아? 뭐, 그냥 플레이하자니 식상함도 느껴 달래자는 이유도 있지만 왈가왈부할 것은 못되니 넘어가도록 하자. 아무튼 PK를 하고 다닌 이후로 실력에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나보다 한참은 약한 이들이었고, 비슷하다 싶은 유저들은 죄다 내가 아는 이들이었다. 아무리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다지만 아는 사람을 게임오버(듀얼이라 할지라도) 시켜가며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 생각해보니 나보다 강했던 사람이 딱 두 명이 있었다. 한명은 이겼지만 나머지 한명은 갭의 차이가 너무나 커서 어떻게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정말, 기가 막힌 유저였지. 그러다가 만난 이가 바로 샤프다. 강한 유저에 목말라 있던 내겐 오아시스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대로 끝내기엔 많이 아쉽다. 그렇기에 그와의 승부에 집착하는 것이다. 아마 샤프도 나와 같은 이유겠지. 세 번의 듀얼 랠리를 치루면서 자신을 꺾은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가가가각! 서로에게 일격을 가하다 막혀버려 잠깐의 공백이 생겼다. 블레이드끼리 맞물려 쇠붙이가 갈리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이젠 기(氣)대결로 양상이 뒤바뀌었다. 여기서 밀리는 쪽이 패배의 잔을 들어야한다.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승수! 나는 X자로 교차시킨 검을 꾹 쥐고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샤프의 발이 뒤로 조금씩 밀려나갔다. 샤프가 이를 으득거리며 씹어뱉듯이 외쳤다. “크윽! 대단한 힘이군! 대체 레벨이 몇인 건가!” 흐흐흐. 심리전에선 내가 우위를 점하고 있군. 나보다 레벨이 낮아서 내 레벨을 측정하지 못하니, 어지간히 심적 부담이 드는 모양이다. 그다지 신경 쓸 것은 못되는 것임에도. 레벨 높다고 변하는 게 있나? 전부 본인 하기 나름인 것을. 여하튼 심리상의 대결에서만 고지를 차지했을 뿐이다. 실상으로는 언제든지 뒤집힐 수도 있다. 심리전은 그저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그의 말은 무시해버리고 스킬을 캐스팅했다. 이러는 시간에 한번이라도 더 기술사용하고 만다. 어차피 마나는 쓴 것도 없어 거의 풀에 가까우니 전혀 꺼릴게 없으니 문제없다. 사아아아―. 큰 스킬을 사용하려고 긴 캐스팅을 하는데 갑작스레 작은 미풍이 불어왔다. 자연적인 바람은 아니다. 이것은……. 마나의 공명(共鳴). 가까이 있는 유저들이 많은 양의 마나를 소비하면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순간적으로 대기에 마나가 충만해지면 이루어진다. 그가 나만큼이나 큰 스킬을 사용한다고 생각할 때도 미풍은 점점 강해지며 파도쳤다. 그 후 강풍이 되고 돌풍이 되어, 곧 먼지를 머금은 회오리로 변모했다. 비무장의 작은 석편(石片)들과 함께 급상승 하는 바람의 소용돌이 중앙. 그곳에서 나와 샤프가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펄럭이며 기술을 캐스팅한다. “……!!” 순간 나와 샤프의 눈이 커졌다. 캐스팅 종료! 필살이다!!! 유니크(Unique) 섀도우 스킬(Shadow Skill) 레벨 텐(Level Ten) 랩 데토네이션(Wrap Detonation)!! 내가 힘차게 외치자 샤프도 만만치 않은 음량으로 소리질렀다. “유니크(Unique) 익스티닉션 스킬(Extinction Skill) 레벨 텐(Level Ten) 배니시(Vanish)!!” 유니크 스킬의 마스터 스킬이 격돌했다. “대단한 실력이군, 저 소년. 눈여겨 볼 필요가 있겠어.” 52번 선수대기실에서 흰색 코트를 입은 은발의 훤칠한 미남이 조금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흑안이 닿아있는 곳은 샤프와 난타전을 벌이는 다크니스, 류현이었다. 스크린에 확대되어 보이는 류현과 샤프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은발 사내의 얼굴에도 동일한 미소가 그려졌다. 오랜만에 보는 카마인의 미소군. 그만큼 만족할만한 상대인가? 이거 나도 겨뤄보고 싶은걸. 은발 사내는 킥킥 웃으며 코트 주머니에 검은색 가죽장갑이 장착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손을 꺼냈을 때 그의 손에는 손가락 길이만한 얇은 막대기 비슷한 것이 들려있었다. 20세 이상의 유저에게만 판매되고 그 이하 나이의 유저가 가졌을 경우 소멸되는, 어덜트 아이템(Adult Item)의 하나인 ‘담배’였다. 엘-가엔 담배 같은 성인 아이템들도 유통되고 있다. 초기에는 없었는데, 엘-가를 플레이하는 많은 흡연애호가들이 홈페이지 게시판에 도배신공을 펼쳐가며 철야농성(?)을 벌인 결과 획득하게 된 쾌거였다. 대신 미르트에서 흡연을 하게 되면 한 개비 당 얼마동안 능력치를 하락되도록 핸디캡을 먹였다. 흡연하지 말라는 말과도 동일했다. 그러나 흡연애를 넘어서 한시라도 못 피면 금단현상이 발생되는 폐인들에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던 것인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흡연을 하여 미르트의 엘-가 유저 금연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정말이지 대단한 집념들이었다. 그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하는데 가늘고 흰 손마디가 나타나 담배를 낚아채갔다. “카마인과 대등한 검력(劍力)이라니 놀랍네.” 검은색 단발머리에 앳된 면목을 지닌 귀여운 여성이었다. 몸집도 작고 얼굴이 동안이어서 소녀로 여기는 이도 있겠으나, 그녀의 손에 잡힌 담배가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도 20세가 넘어선 어엿한 성인이었다. 그녀는 담배를 부러트려 던져버린 후에 곧장 은발사내의 코트에서 담배 갑을 꺼내 구겨버렸다. 연속으로 이루어진 동작이라 은발사내는 제대로 된 반응을 하지 못했다. “제니온. 담배피우지 말랬지?” “어허헉! 리엘, 네가 그럴 수 있는 거냐! 그게 얼마짜린데?!!” ……담배는 무척 비싸다. 제니온은 경악하여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핏발이 선 눈은 처참하게 일그러진 채 바닥을 뒹구는 담배 갑으로 향해 있었다. 부러진 것이라도 피워보겠다는 강인한 집념마저 엿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밟아 비벼 걸레짝을 만들어놓는 리엘의 발을 보고선, 제니온은 처절한 절규를 터트리며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삶의 의욕이 없어진 듯하다. 참고로 모든 선수대기실은 관람석에서 5층 높이에 있음을 알아두자. 리엘은 제니온이 게임오버를 당할지도 모름에도 아무 감흥 없는 눈초리로 창밖을 힐끔 보았다. 그리고 뭘 봤는지 눈을 상큼하게 치켜뜨며 제니온처럼 창 밑으로 뛰어내렸다. 용케 멀쩡히 살아있는 제니온이 장갑 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장면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대책 없는 꼴초였다, 제니온은. “아악! 리엘! 그것만은 봐줘! 끄악! 안돼에!!” 밑에서 제니온이 또다시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든 말든 스크린을 응시하던 안경을 쓴 학자풍의 남자가 입을 연다.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검이 노리는 곳이 어디인지를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안경의 가운데를 중지로 밀어 깊숙하게 쓰는 모션을 취하는 그. 누가 보면 유식해 보이는 자태에 박수라도 쳐줄만했다. 하지만……. 미친놈이 아닐까 의심이 간다.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청자의식적인 언사였다. 아무도 없는 선수대기실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여 대화하듯 말하다니……. 혹, 자폐증이라도 있는 것일까? “야! 또 혼자 꼴값 떨지 말고 담배나 줘……. 하하! 농담이거 알잖아, 리엘! 데미스는 금연가인데 담배가 있을 리가 있나!” 밑에서 제니온의 외침이 들려왔다. 데미스는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고 창밖으로 걸터앉았다. 그리고 음충맞게 웃으며 품을 뒤져 담배 세 갑을 꺼냈다. 그가 금연가이기에 리엘의 사각지대에 있다고 여겨 제니온이 맡겨 둔 것이었다. “제게 맡겨 두신 물건은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는 얄밉게 웃어보이고는 그것들을 떨어트렸다. 리엘에게 진땀나도록 항변을 하던 제니온이 화들짝 놀라며 급히 벽 쪽으로 붙어 발을 굴린다. 고개를 치켜들고 단 한 개비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팔을 뻗는 제니온. 타다다닥! 이건 본능인가, 의지인가. 데미스가 세 갑 중 하나의 포장을 뜯어놓아 산산이 흩어져 떨어지던 일말의 한 개비까지 놓치지 않고 모조리 받아낸 그는 신이 나서 외쳤다. “잡았어! 잡았다고! 내가 모두 잡았어!” 제니온은 어린애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두 손에 올려진 담배들을 보란 듯이 리엘에게 내밀었다. 그의 얼굴은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 방긋 웃고 있었다. “역시 바보에겐 맞는 것보다 즉효약은 없나보군요.” 밑으로 뛰어내린 데미스가 고개를 저은 한참 뒤에 중얼거렸다. 이해가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스크린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 “리엘! 나 멋지지 않았냐? 네 낭군님께선 못하시는 게 없나보다! 다음번엔 더욱 멋있을 묘기를 보여줄게!” 자랑스러운 듯 말하는 제니온에게 리엘도 마주 웃어주며 응구했다. “그럴 필요 없어, 제니온.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내가 좋은 구경시켜줄게.” 귀가 솔깃해지는 말이었는지라 제니온이 감탄을 연발한다. “오옷! 네가 드디어 남자를 이해해주는 구나! 뭔데? 무슨 구경? 혹시 스트립쇼?!” 제니온은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인지 콧김을 내뿜으며 눈을 부릅떴다. 리엘은 몸을 배배꼬더니, 수줍게 웃으며 제니온의 귀에 속삭였다. 그의 흥분도가 정도를 넘어서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뭐냐면 말이야…….” 리엘은 제니온의 귀에 숨을 훅 불어넣고 자신의 치마를 들쳤다. 제니온은 ‘굿! 굿! 굿!’을 부르짖으며 리엘의 매끈한 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엘은 제니온에게 찰싹 달라붙어 자신의 허벅다리 바깥쪽에 손을 뻗었다. “말해봐! 말해봐! 오늘 밤에 너희 집으로 갈까?!” “아니! 우리 집 대신 지옥에나 가버려!” “흐갸갸악!” 그 즉시 리엘은 레이피어(Rapier)를 뽑아 휘둘렀고, 제니온은 질겁하여 도주했다. 죽어라 도망가느냐 방방 뛰면서도 그의 손에서는 단 하나의 담배도 떨어지지 않았다. 담배에 대한 집념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종이었다. 그때 닭 쫒던 개 지붕보는 모습으로 그들을 보던 데미스의 입이 열렸다. “카마인이 만연한 웃음을 짓는 것은 오랜만이로군요. 우리와 대무를 할 때도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되었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인간은 왜 이리 뒷북만 쳐대는 지 모르겠다. 돌이 아버지에게 굴러 떨어지는 걸 보다가 아버지가 비명횡사하고 나자, ‘아부지~ 돌 굴러 가유~’ 했다던 아들의 환생이 아닐까 싶다. 리엘도 도주하는 제니온을 잡으러 자리를 떴기에 주변에 텅 비어있었다. 그나마 있는 이들이라고는 저 앞쪽 관람석에서 멍하게 듀얼을 지켜보는 유저들뿐이 없었는데, 관람석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서 그들이 데미스의 말을 들었을 리는 만무했다. 즉, 또다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데미스다. “…….” 썰렁한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날리는 착시도 일어났다. 그 가운데에 서있는 데미스는 안경을 고쳐 쓰고 스크린을 주시했다. 말없이 스크린을 보는 데미스의 눈이, 어느 순간 빛나듯 반짝였다. 입가도 삐뚜름하게 말려 올라갔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본 듯하다. 그리고 어떤 말이 있을 법한 상황인데……. 그러나 그는 신비로운 모습을 유지하려는 것인지 그 자리에서 조용히 몸을 돌려 제니온들이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과연 과묵한 이는 멋있었다. 다섯 발자국 정도 걸었을까, 그의 입이 열렸다. “다크니스라……. 이번 듀얼 랠리엔 파란이 예고되는군요.” 어, 이건…… 방금 전 그 상황에서 말했어야 어울림직한 것인데……. 데미스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노려보며 고함을 지르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으아아악!’하고 비명이 나오기만 하면 끝나는 모션이다. 허나 차마 유저들이 있는 곳에서 비명까지 지르기는 뭣한지 소리 없는 외침을 해보이고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담담하게 발을 옮긴다. 잠시 후. 담담하다 못해 무표정하기까지 한 얼굴로 갑작스레 데미스가 외쳤다. “으아악! 젠장입니다! 내게 걸린 저주 좀 풀어달란 말입니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두려워해야하는 게 가당키나 합니까!!??” 이정도면 막가는 수준이다. 말로는 저주라는데 언제나 풀릴 수 있을 것인지……. 살펴본 바 잘난 척을 좋아하는 데미스로서는, 이 저주만큼은 다시는 걸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대체 어디서 누구한테 얻어왔는지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는 저주다. 지나가던 여성 유저에게 작업 들어가다 얻어먹은 게 아닐까 싶다. 생긴 것도 제비같이 생겼으니까. 데미스는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더니 다시 갈 길을 갔다. “크윽! 퀸 오브 윈터(Queen Of Winter)!! 반드시 보복할 것입니다!!!” 잘 가다가 헛소리하는 것은 여전했다. “후아, 죽겠다……. 정말 힘든 상대였어.” 방금 전의 듀얼에서 간신히 이기고 온 학진의 말이었다. 물론 엄살 섞인 푸념이다. 저놈이 힘들었을 정도면 난 과로사 했게? 격한 움직임을 하면 체력은 깎이지만 피곤하다거나 몸이 무거워지는 등의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좀더 사실적인 게임 환경을 조성하려면 넣을 필요성도 있겠으나, 유저들은 그것만큼은 꺼리는 실정이었다. 한창 몹들과 전투 중에 피곤해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봐라. 당장 게임오버 당한다. 애써 성장시켜놓은 걸 잃게 되는데 어느 누가 원하겠어? 학진은 전에 팰러딘이 된 기념으로 내가 선물해준 미스릴 검……의 검집을 쓸어내리며 의자에 선수대기실 중앙에 있는 의자에 깊숙이 앉았다. 미스릴 검이 얼마인데 그걸 그냥 주냐? 1렌스를 받더라도 대가를 받고 넘겨야 함이야. 그렇다고 꼭 1렌스 받는다는 게 아니라 그냥 줄 수는 없다는 거다. 녀석은 팰러딘이다. 295레벨의 더블 마스터(Double Master)로, 이제 조금만 더 노력하여 유니크 스킬만 익힌다면 마스터 클래스인 ‘프로비던스 나이트(Providence Knight)'가 될 수 있다. 솔직히 빠른 성장이었다. 아무리 주변에 나 같은 고레벨이 많아 성장이 용이했다 하더라도 3년 만에 트리플 마스터에 가까운 레벨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6년 동안 397레벨에 그쳐있는데 무슨……. 뭐, 죽어라 레벨 업에만 시간을 투자했다면 420까지는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저놈의 성과에 비하면 한없이 뒤쳐진다. 나는 상극 속성 때문에 성장 속도가 떨어지기는 했다만,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장해도 3년이라는 시간동안 저 정도의 성과면 상상을 불허하는 속도다. 대체 버그를 쓰는 건지 스프린터(Splinter)를 알아낸 건지…….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냐?” 학진은 내가 빤히 바라보자 얼굴을 만져보고 말했다. 난 가만히 고개를 저어주었고, 녀석은 ‘별 싱거운 녀석 다보겠네’라고 말하며 미스릴 검을 꺼내 블레이드를 손질했다. 손질이라 해봤자 천으로 닦거나 날을 갈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검신에 손을 대서 마나만 흡수시키면 끝이다. 보통의 철검들은 날이 금방 상해서 일정한 주기로 대장간이나 스미스(Smith) 계열의 유저들에게서 수리를 받아야한다. 안 그러면 아이템의 내구력이 약해져 부러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예 못쓰는 지경까지 가버리는 것이다. 엘리트 아이템이야 워낙 대단한 것들이라 수리할 필요는 없고. 있다 해도 내구력이 워낙 좋아 티가 안 나는 것일지도. 어찌됐든 따로 수리할 필요 없이 아이템의 주인이 자가 수리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미스릴이나 오리하르콘 같은 최상급 제련아이템으로 제조한 아이템들이 그것이다. 미스릴 같은 것들은 동일 광물과 붙으려는 경향이 강해 마나를 주입하여 에너지만 공급해준다면, 금가거나 날이 나간 것은 수리할 수 있다. 설사 부러졌다 하더라도 말이다. 한번 구해놓으면 영구적인 사용이 가능하니 검을 쓰는, 아니 대부분의 유저들이라면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 만한 아이템이 미스릴같은 광석으로 만든 물품들이다. 거기다 항마(降魔)의 기능까지 있는데다가 경도 또한 대단하다보니 작은 귀걸이라도 고가에 거래되는 실정이다. 마나스톤보다 더욱 희소성이 높은 것이다. 내게도 미스릴 검이 한 자루 있기는 한데 어디다 처박아두었는지 몰라 못쓰고 있다. 지난 번에 듀얼 랠리를 대비하여 사베티움에 있는 화청 형의 저택으로 가지러 갔다가, 찾다찾다 못 찾아서 결국 빈손으로 돌아온 경우도 있었지. 내방엔 별에 별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있는지라……. 어쩌면 화청 형이 슬쩍해갔을지도 모르겠다. 음. 생각해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가정이다. 내가 미스릴 검을 들고 왔을 때부터 침을 흘리던 사람이니까. 아무리 뒤져도 없던데 정말 형한테 가있는 거 아냐? 흐음, 아무래도 상관없으려나? 어차피 듀얼 랠리 끝나거든 미연누나에게 주려던 아이템이니까. 만약 형이 범인이라면 보나마나 미연누나한테 뺏겼을 테지.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어서 생각을 털어내고 창가에 걸터앉아 스크린을 보았다. 이번 듀얼을 치를 선수들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이 결투만 끝나면 오늘 일정의 마지막 경기가 시작된다. 라운드(Round) 255. 레프트(Left). 열혈청년(熱血靑年). 장비(張飛). 라운드(Round) 255. 라이트(Right) 루인 마스터(Ruin Master). 나이트메어(Nightmare). “헉…….” 저 이름은……. 당연히 모르는 이름이다. 처음 보는 이름들인데 안다고 말하면 그게 미친놈이지. 심각한 정신착란증세에 시달리고 있거나, 어디서 개꿈 꾸고 와서 ‘저 사람은!!’이라고 소리 지르는 놈들은 무시해 버리라고. 이름이 떠있던 스크린의 화면이 바뀌며 나이트메어라는 유저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름은 오른쪽 상단으로 이동했다. 그의 눈은 계속해서 웃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상당히 유들유들하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나이트메어라는 명칭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나마 흑색 로브와 주먹만한 해골이 달려있는 해골지팡이가 이름에 상응하는 느낌을 줄 뿐이었다. 대충 네크로맨서 쪽 클래스인 것 같다. 화면은 다시 바뀌어 장비라는 유저를 비추었다. 장비는 열혈청년이란 외호답게 머리부터가 타오르는 불꽃같이 선홍색의 삐죽 머리였다. 이마에는 한문으로 ‘열혈(熱血)’이라고 적어놓은 흰색 천을 두르고 있었고, 특히 귀 옆으로 자라난 빨간 구렛나루가 압권이었다. 제법도 아니고 대단히 강렬한 인상을 주는 유저다. 옷도 다홍색의 도복(道服)이었는데 무기가 없고 손과 발에 흰 붕대가 감겨져있는 것으로 보아 격투계열 클래스인 모양이다. 모습을 요목조목 살피는데 장비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 업(Close Up)되었다. “어?” 그의 얼굴을 살피다가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누군가의 얼굴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은 처음 접하는 것이긴 하지만, 얼굴만큼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앞서 말한바, 정신착란이나 개꿈 꾸고 삽질하는 것은 아니다. 기시감(旣視感 : 데쟈뷰라고도 한다)이라고 하기엔 확실히 본 얼굴이었다. 으음……. 저 불꽃머리만 아니라면 기억이 날만도 한데……. “왜 그래?”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내 오른팔에 팔짱을 끼고 있던 지연누나가 물어왔다. 누나의 얼굴은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와 관련된 것이라면 작은 일에도 걱정을 하는 지연누나다. 손을 뻗어 누나의 볼을 쓰다듬으며 웃어보였다. “왠지 저 붉은 머리 남자를 본 것 같기는 한데 기억이 나질 않아서요. 큰 문제는 아니니까 정하지 말아요.” “응……. 그래도 조심해야해. 알겠지? 첫 시합 때와 같은 일이 발생하면 정말 화낼 거니까.”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요.” 장담은 못하지만 말야……. 일부러 뒷말은 빼고 누나에게 웃어보였다. 지연누나도 이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미소 지으며 내 볼에 살짝 입을 맞추고 얼굴을 붉혔다. 현실에선 키스까지 해보았지만 언제나 새로운 느낌이어서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주변의 찢어죽일 듯한 남정네들(화청 형, 찬석 제외)의 시선은 밟아버리고 볼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을 만끽하며 생각에 잠겼다. 지연누나가 말한 첫 시합 때와 같은 일이란 것은, 샤프와의 대결의 끝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기에 샤프와 나는 무슨 한이 있어도 준결승까지 갈 것이다. 그때 다시 만나게 되면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다. 그렇기에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때 일어난 일, 정말 빌어먹을 경우였다. 크로스 카운터(Cross Counter)가 웬 말이냐. 거의 다 이겨놓았는데, 쓰읍……. “유니크(Unique) 섀도우 스킬(Shadow Skill) 레벨 텐(Level Ten) 랩 데토네이션(Wrap Detonation)!!” “유니크(Unique) 익스티닉션 스킬(Extinction Skill) 레벨 텐(Level Ten) 배니시(Vanish)!!” 처음으로 읊는 기술 명이었다. 이 기술 대결이 승패를 좌우할 것이기에 서로 상대에게 해주는 예의였다. 자신이 뭔 스킬에 죽었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때로는 듣는 게 안 듣는 것만 못할 때가 있지만, 고수들이 베이스 스킬에 당해 체력을 몽땅 날려먹는 일은 없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뭐, 죽으면 개 쪽밖에 더 당하냐. 콰앙!! 골이 찡하게 울리는 폭음이 터졌다. 비무장의 바닥에 거미줄 같이 무수한 선이 그려지며 석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지면이 기압에 짓눌려 가라앉았다. 랩 데토네이션은 목표를 그림자로 감싸 그 안쪽을 폭파시켜 상대를 피떡으로 만들어 놓는 잔인한 기술이다. 자리를 옮겨 피하거나, 강력한 방어 결계를 쳐 폭발을 견뎌내는 것 외에는 살아남는 방법이 없다. 강한 빛으로 그림자를 죽이는 방법도 있으나 대부분의 유저들이 빛을 만든 후에 싸우는 일은 드무니 그 방법들뿐이 없는 것이다. 샤프가 외친 ‘배니시’야 내가 익힌 게 아니어서 모르겠다. 사회자가 피를 토할 듯 죽어라 외쳐대고 있는 소리는 들리지만, 정작 내용은 대기를 가르는 바람과 폭음으로 인해 하나도 못 알아듣겠거든. “준결승전에서 다시 만나세.” 꿈틀거리는 그림자 위에서 샤프가 말했다. 결승전은 다른 콜로세움에서 우승한 사람과 하기에, 여기서 샤프와 내가 해야 하는 마지막 경기는 준결승전이었다. 각 콜로세움에서 단 한명만이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중에 탈락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물론이네.” 슈라락! 먼저 발동된 것은 내가 펼친 랩 데토네이션이었다. 그림자에서 새까만 방울들이 하나둘씩 솟아오르더니, 이내 작은 돌가루들과 그 위에 있는 샤프를 아가리를 벌려 통째로 삼켜버린 검은색의 그림자. 모골이 송연해지는 섬뜩한 장면에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익힌 기술이긴 하지만 아무리 사용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시커먼 색부터 마음에 안 든다. 지름이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암흑의 원구 속에서 뼈가 뒤틀리고 부러지는 잔인한 음향이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털이란 털은 모조리 곤두서는 듯한 서늘한 느낌이 든다. 언제 들어봐도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 키이잉―. “흡……?!” 수만 개의 바늘이 몸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세포 하나하나까지 뚫리는……. 대기가 공명한다. 바람의 현에서 쉴 새 없이 울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머리 속을 간질이는 기묘한 공명음에 묘해지는 정신. 그것은 바람의 소리……. 사멸을 알리는 바람의 소리였다. “……!!” 쓰라림이 발끝부터 타고 올라온다. 몸이, 대기에 흩어지듯 투명해지며 사라지고 있었다. 숨겨지는 것이 아닌 완전한 ‘증발’이다. 소멸. 그것이 배니쉬가 내포하고 있는 뜻이었다. 소멸은 발을 타고 허리에 다다라 목까지 차올랐다. 샤프가 있었던 곳에는 시커먼 그림자대신, 영롱한 색의 빛의 구들이 비누방울처럼 공중으로 와해하고 있었다. 유저가 죽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 더블 KO(Knock Down)인가……. 영 달갑지 않는 결말이야……. 씁쓸한 끝이다. 결국 승부를 가르지 못했다. “…….” 아니다. 내가 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샤프에겐 절대감각이 없다. 그럼에도 나와 대등한 결투를 벌이고 무승부로까지 만들었으니 그가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게 절대감각이 없었다면 난 일찌감치 누웠을 것이다. 내 자신에게 하는 채찍질이다. 자위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헬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서 진거야. 내 실력을 감춘 거라고.’ ‘드래곤 슬레이어라면 일격에 보내버릴 수 있었어. 많이 봐준 거야.’ 하지만 무슨 소용이지? 헬 스킬? 드래곤 슬레이어? 그것들은 정체를 들켰을 때를 대비한 보험일 뿐이다. 여기서 사용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그러니 결국 같은 상태에서 대결한다면 나는 이변이 생기지 않는 이상에야 지게 되어있었다. 나는 이번 듀얼은 내가 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좌절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내겐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앞에 놓여진 도랑을 건너뛰기 위한 한보의 물러섬. 전진은 멈춰지지 않는다. 다음번엔 패배란 없다. “…….”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니 입맛이 쓰다. 죽을 각오로 맞부딪힌 게 잘한 짓인가? 내 경우엔 처음으로 게임 오버되는 것이었다. 위험한 상황이 되면 언제나 몸을 피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약하든 강하든, 적든 많든. 쓸데없는 오기 부려 손해 보는 것은 절대 사절인지라. 나는 엘-가를 해오면서 그런 손해 보는 짓은 해오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달아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현명한 방법이다. 비록 상대가 비웃을 지라도 살고 봐야 후일을 기약하고 칼을 갈든가 할 거 아니냐. 괜히 죽어서 레벨다운으로 가능성마저 잃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번엔 큰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손해 보는 게 너무 많았다. 일단 처음으로 게임오버를 겪음으로서 기분을 망쳤고, 그 죽는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여 버렸다. 더불어 무승부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듀얼 랠리에 영 흥취가 느껴지지 않아 짜증이 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 제자리걸음이라는 것과, 다른 선수들에게 죄다 노출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아, 이렇게 생각하니까 진짜 열 받는다. 내가 왜 그랬지? 적당히 하고 내려왔으면 될 것을 죽을 동 살 동 끝장을 보려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군. 결국 얻은 거라고는 하나도 없잖은가. 이긴다고 해서 다음 경기 진출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젠장맞을! 결승전이 아니더라도 샤프와 만나게 되면 반드시 필승이다. 더 이상의 무승부는 없어! 그때가 되면 내가 잃은 것을 모두 돌려받으리라! 반드시……!! 꼭! 기어이!!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사기를 불태웠다. 오오옷! 굳세어라, 한류현! “류현아?” 너무 불타올랐나 보다. 지연누나는 움찔하여 두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난 머쓱해져서 겸연쩍게 웃어보였다. “하하……. 아무 것도 아니니 계속 구경해요.” “아니긴 뭐가 아니냐. 좋아죽으려고 하는구만. 저 능글맞은 웃음 봐라.” 스크린은 안 보고 이쪽만 계속 보고 있던 태진이 툭 내뱉었다. 많이 컸다, 김태진. 내가 하는 일에 태클을 다 걸고. 근래 들어서 정신교육을 안했더니 네가 살판났구나. 오늘 날도 날이니 한번 맞아봐라. “저 등신……. 맞으려면 뭔 짓을 못하냐. 그냥 죽여!” “밟아버려, 류현!!” 찬석과 학진이 동시에 외쳤다. 그들의 성원에 힘입은 나는 지연누나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드래곤 슬레이어를 들었다. 물론 아는 사람들만 알아볼 뿐 모르는 사람은 고개를 갸웃했다. 천으로 감아뒀으니 당연하다. 기분도 꿀꿀하던 차에 잘 걸렸다, 태진아. 콜로세움 내에선 죽어도 하락되는 게 없으니 한번 죽어봐. 듀얼 랠리가 시작되면 콜로세움 안에서 죽더라도 불이익은 당하지 않는다. 관람석은 그렇지 않지만 선수대기실에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듀얼 후에 죽게 되면 체력이 ‘1’인 상태로 자신이 속해있는 대기실로 재접속되는데, 그 상태에선 살짝 맞아도 저세상 감이니 미르트에서 레벨 하락을 막아놓은 것이다. 아예 공격자체를 불가능하게 해놓는 수도 있지만 공격은 유저들 의사여서 ‘가상현실게임 유저보호법’에 접촉된다나. 나야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머니 그냥 그렇다고만 알아둬야지 어쩌겠어. 그럼 일대일 면담을 시작 하자꾸나, 김태진. “으악!!” 태진은 내가 달려들자 기겁을 하여 도주했다. 그러나 독안에 든 쥐다. 찬석과 학진이 문을 막고, 다른 이들이 은근슬쩍 창문 앞에 서서 탈출구를 모조리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폭력을 쓰는 것을 싫어하는 지연누나도 아무 말 없이 창문을 막아섰다. 세영은 감흥 없이 창밖만 보고 있지만, 그 앞에 서있으니 막은 것과 다름없지. 쯧쯧. 평소 행실이 얼마나 지저분했으면 이렇게 같은 편이 돼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냐? 녀석의 기구한 인생에 대해 2초간의 묵념을 마친 뒤 손바닥에 침을 뱉고 몽둥이를 들었다. 아, 참고로 말하면 오늘은 복날 중에서도 중복(中伏)이다. 그리고 태진은 보신탕이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한다. 오늘 녀석의 뱃속으로 들어갔을 견(犬)들을 기하는 마음으로……. “죽어 자식아!!” “끄아아아!!” 더해서 오늘 수없이 살해될 많은 견들을 기하는 마음으로……. “더도 말고 두 번만 살해되어라!!” “아아악!!” 마지막으로 말복 때 사라질 수많은 견들의 영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앞으로도 대들면 죽어!!” “꺼어억!!” 들리는가, 이 숨넘어가는 소리가! 이마를 가격당한 태진은 눈을 뒤집으며 뒤로 넘어갔다. 빛으로 화하지는 않는다. 스턴(Stun)이었다. 쩝. 상대 기절시키는 게 몸에 완전히 익어버렸다. 때리는 족족 기절이니 이거 좋아해야하는 건지, 슬퍼해야하는 건지……. 이런 때는 기절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말이다. 이대로 더 때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기절한 놈 패면 변태소리 들을까봐 참는다. 운 좋은 거야, 너. 얼마나 팼던지 뜨뜻하게 달구어지기까지 한 드래곤 슬레이어를 허리에 차고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각자 할일 해.” “네 몫은 거기서 끝난 거냐? 아직 게임오버도 되지 않았는데 그냥 끝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피를 봐야하는 법! 학진! 가자!” “좋지!” 이것들아, 나 아직 칼 안 뽑았어. 찬석과 학진이 몇 마디 주고받더니 검을 끌러 손에 쥐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질린 얼굴로 두 녀석을 번갈아 보았다. 지독한 놈들……. “기절한 놈을 패려고?” “얼씨구.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기절한 놈을 패냐 그랬냐? 학교에서 죽도록 때려 기절한 태진을 계단에서 굴려버린 게 누구였더라?” “흐, 흠…….” 찬석의 입에서 불미스런 과거이야기가 나오려하자 나는 화제를 돌리려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건이 일어날 당시 같은 자리에 있어 전말을 알고 있는 성호와 은주는 그때의 상황이 떠오르는지 키득 웃으면서 고개를 저어 보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다른 이들은 매우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특히 내 이야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것 같은 지연누나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을 보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죽도록 때려서 계단에서 굴리다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누나와 눈을 마주하기가 힘들어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런 것에는 집요한 지연누나.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고정시키더니 억지로 눈을 맞추게 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절대 말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누나라 할지라도 내 일말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라 어쩔 수가 없다. 목격했던 이들이 그나마 친구들에 국한되어 있어서 망정이었지, 하마터면 전교에 소문이 퍼졌을 터다. 만약이라도 그 일이 발설될 시엔 장소와 상대를 막론하고 끝까지 따라붙어 괴롭힐 것이리라. “쟤 왜 저래?” “킥킥! 그런 일이 있어요. 말하면 날 죽이려 할 테니 설명은 못하겠네요. 킥킥킥!” 화청 형의 물음에 성호가 웃음을 참는 듯 킥킥거리며 대답했다. 누나의 손바닥에서 전해져오는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얼굴이 뜨거워진다. 내 얼굴을 잡고 있는 지연누나도 말해보라고 재촉했지만, 나는 입을 앙다문 채로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절대 말 못한다. “어? 푸훗…….” “응? 큭큭…….” 그 뒤 얼마나 고개를 저었을까, 말할 것을 계속 종용하던 지연누나와 다른 몇몇이 갑작스레 탄성을 내지르고는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돌변한 상황에 눈을 번쩍 뜨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지연 누나는 내 얼굴을 잡고 있던 손으로 입을 막으며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었고, 화청 형과 미연누나, 심지어 세영마저도 가까스로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서, 설마…… 아니겠지? 그래, 아닐 거야……. 애써 생각하고 있던 것을 부정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날 버린 듯싶다……. “풋! 체육복입고 계단 내려가는데 태진이가 바지를 벗겨버렸다는 게 사실이야?” “푸하하하하! 정말 장관이었겠다!!” “꺄하하하! 창피해서 어쩌니, 우리 류현이!!” “…….” 벼락에 맞아버릴 때의 기분이 이러할까? 일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번져버리는가. 왜……. 왜!!! 대답대신 사건을 알고 있는 이들을 싸늘히 노려보았다. 죽일 것들……. 세치 혀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몰라? 너희가 정녕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나는 아니다.” “나도 아냐.” “Me Too.” “역시 또한.” 찬석, 은주, 학진, 성호의 순으로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부정한다. 속이 배로 끓기 시작했다. 너희들 중에 범인이 없으면 대체 누구라는 거냐? 지금 그 말들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응? 같지도 않는 소리들을 지껄이는 네 명을 싸잡아서 보내버리려고 검을 꺼내는데 화청 형이 웃음을 삼키며 말한다. “큭큭! 걔네들 전부 아니다. 범인은 저쪽에서 맞고 있던 녀석이지. 메시지로 보내던데?” 모두의 시선이 구석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기절해있는 있는 태진에게로 향했다. 나는 사실의 진위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지연누나를 보았고, 누나는 입을 가리고 고개를 끄덕여 보임으로서 사실임을 증명했다. “김태진…….” 너란 놈은 정말……. 이가 갈린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모두 검을 내게 넘겨!! 오늘 개한마리 확실하게 잡는다!!” 빌어먹을 자식! 여기 있는 검들이 모두 부러질 때까지 네가 몇 번이나 죽을 수 있는지 실험해주마!! 그들은 군말 없이 무기를 건네주며 쿡 웃었다. 보고 있자니 머리가 홱 돌아갈 지경이다. 먼저 내 장검을 들었다. 그리고 냅다 태진의 하반신만을 팼다. 특히 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맞을 때마다 태진의 몸이 요동쳤지만 발로 배를 꾹 누르고 계속 다졌다. 정말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눈에 뵈는 게 없다. 그러던 도중 일은 터졌다. 점점 강해지는 속도에 맞춰 검집이 헐렁이는가 싶더니 허공으로 휙 날아올랐다. 깜짝 놀라 비상하는 검집을 올려보다 밑을 내려다보았을 때는 이미 검날은 태진의……. 크흑, 불쌍해!! 내가 태진의 상태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앗……. 쟤 어쩌니?” “불쌍해라…….” 미연누나와 지연누나가 이런 말을 한 것과. “야, 미안하다. 오늘은 이정도만 해둘게.” 내게서 때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것. 그리고. “저놈 이제 성인되어서 피눈물 쏟게 생겼군.” “저곳은 백날 재접속해도 소생이 안 된다지, 아마? 운영자에게 직접 부탁해야 하려나?” “그네들이 해줄지 의문이다.” 이라는 성호와 찬석의 대화 정도랄까……. 태진아. 정말 미안하다. 널 엘-가에서 남자임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렸구나……. 흑흑, 불쌍한 자식. Level 4. 대망의 결승전. 듀얼 랠리의 둘째 날이 밝았다. 이번 듀얼 랠리엔 무명의 고수들이 제법 많이 출전했다. 또한 출전유저들의 수준도 전 대회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았다. 대회가 끝나거든 나오는 통계의 평균레벨이 심히 궁금할 따름이었다. 지난겨울 때는 260레벨 정도였었는데 이번엔 얼마나 될지……. 그럼 여기서 의문이 든다. 어째서 조용히 게임을 즐기던 무명고수들이 한꺼번에 몰리게 된 것일까. 그저 심심해서? 재밌을 것 같아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심심해서라면 몇몇만 출전해야 옳다. 단체로 짜고서 참가하지 않는 이상 우르르 몰려올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나와 대치중인 실버나이트(Silver Knight) ‘레인’을 합하면, 350레벨 이상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벌써 20명에 육박한다. 유저들에게 알려진 350대 이상의 유저가 56명임을 감안할 때, 20명은 실로 대단한 수였다. 거기다 몇몇을 제외하면 모두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몇몇 정체를 숨기고 참가한 이름 있는 고수들은 유저들이 당장 알아보았기에. 모습을 바꾸면 간단하겠지만, 아쉽게도 엘-가엔 모습을 바꿔주는 스킬이나 아이템은 없다. 한 유저가 게임 내 룰을 어겼을 경우 그를 목격한 유저들은 미르트에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신고를 하게 되니, 룰을 어긴 유저가 모습을 바꾸게 되면 제재를 가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앞머리로 얼굴을 감추고 다니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모습만 바꿀 수 있다면 당장 바꿨다. 미르트에는 아니지만 유저들 사이에선 블랙리스트에 올라있거든. 이제 PK는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안하지만, 전처럼 본격적으로 했다간 유저들이 완전히 들고 있어날지도 모른다. 아무튼, 추측컨대 많은 고수들이 듀얼 랠리에 참가한 것은 우승 상품 때문일 것이다. 상품이 뭐기에 그러냐고 물으면 나도 대답 못한다. 알아야 대답을 할 게 아니냐. 미르트에서 이례적으로 상품이 뭔지 밝히질 않았는데 내가 무슨 재간이 있다고 알 수 있겠는가. 만약 미르트에서 유저들을 더 많이 모이게 할 생각으로 상품을 비밀로 한 것이라면, 그들은 성공한 것이다. 뭐, 그리고 그래봐야 나와는 관계없다. 6개월 치 무료만 보고 출전했는데 그런 상품이 뭐가 필요하랴. 주면 더 좋고, 안줘도 별반 문제없으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지. 다른 이들은 나와는 반대된 생각들인 것 같지만 말이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클수록 실망도 커지기 마련. 미르트에서 비밀로 할 정도니 엄청 대단한 아이템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아, 실망하면 그들이 하는 것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구나. 실컷 실망하라지. 나는 6개월 동안 무료로 이용하는 것을 상상하다가 동상처럼 우직하게 서있는 레인을 보았다. 왜 가만히 서있기만 할까? 그는 전신을 가리는 은빛 찬란한 풀 플레이트 메일(Full Plate Mail)을 입고 있었다. 눈까지 가리는 투구와 망토 또한 흰색 실크여서 은색으로 일색이다. 저 인간도 은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야? 어찌 보면 결벽증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색이다. 그러나 그게 마음에 안 든다. 너무 깨끗하면 거부감이 느껴지니. 검을 바닥으로 늘어뜨리고 있는 그에게 짜증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이봐.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난 무방비의 상대에게 검을 휘둘러가면서 이기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 긍지이자 자존심이다. 이제 말을 거는 걸 보니 준비는 다 된 것인가?” “아, 뭐, 그렇기는 하지.” 준비야 예전에 되었다. 시작한지가 언젠데 이제껏 준비하나 하지 않았겠어. 잠간 딴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바로 공격해 왔어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그쪽에선 좋은 기회였을 텐데 왜 버린 거지? 레인은 내 대답을 듣고서야 검을 가슴으로 끌어당겨 파이팅 자세를 취하고 말했다. “결투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말할 게 있다.” “뭔데?” “내게 사과하기 바란다. 상대를 앞에 두고 잡생각을 가지는 것은 상대에 대한 모독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하?” 그의 말에 황당해져서 코웃음을 쳤다. 실로 기가 막힌 소리였다. 사과를 하라고? 웃기고 있네. 내가 왜 그래야만 하는데? 난 이런 족속들을 싫어한다. 그렇게 아니꼬웠으면 공격하지 왜 가만히 있었단 말인가? 기사도정신? 개나 주라지.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건 바보천치나 하는 짓이다. 어이도 없고 짜증도 나서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그를 향해 말했다. “하하……. 내가 사과를 해야 할 정도로 잘못한 것은 없다고 보는데?” “그럼 상대를 앞에 두고 무시하는 행위가 잘하는 짓이라는 건가?” “사과를 해야 할 정도로 잘못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빈틈을 보인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내가 아닌가? 내가 당하겠다고 빈틈을 내보였는데 미쳤다고 그에 대한 사과를 하냐? 그쪽은 때려달라고 얼굴 내민 다음에 ‘아이고 미안합니다’하고 사과하나보지? 거참 신기한 인간이네.” 나는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춘 뒤에 숨을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무시한다고 여겼다면 실력행사를 했으면 되는 거 아냐? 내가 그쪽을 더 이상 무시하지 않게 말이야. 그럼에도 당신은 공격하지 않았어. 실상은 두려웠던 거겠지. 저놈이 저렇게 있다가 갑자기 공격해서 당하면 어쩌나하고. 당신이 긍지 어쩌고 하는 것은 두려움을 그럴싸하게 포장해 숨긴 것이고, 사과를 바라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기 위한 자위에 불과해. 그렇지 않아?” 그렇게 긍정을 요구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말을 마치고 비웃음을 흘렸다. 상대 속을 박박 긁을 때는 비웃음이란 필요불가결의 요소거든. 그리고 만약 여기서 레인이 정도를 지나친 흥분을 하면 내 말은 들어맞은 것이다.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흥분하며 언성을 높이려는 성향이 있으니까. 나야 워낙 잘난지라 심리전에서 밀리는 일이 없어 언성을 높이는 것은 극히 드물다. 밀린다 해도 무작정 화내기보단 침착하게 대응해 페이스를 내 쪽으로 돌리지. 몇 년 동안 싸움꾼으로 살면서 터득한 노하우랄까. 아니나 다를까, 레인은 동요하여 시뻘게진 얼굴로 이를 갈더니 언성을 높였다. “이익! 닥쳐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구나! 그렇게 죽고 싶더냐!?” “아하! 네놈은 뚫린 입이어서 상소리를 지껄이시는군? 그렇게 잘났으면 말로만 하지 말고 덤비지 그래? 나 죽어보는 게 소원이니 능력껏 죽여보라고. 말로만 ‘세계챔피언!’ 하지 말고 말이야.” 나는 웃는 얼굴로 손가락을 까닥여 덤벼보라는 제스처를 해보였다. 이에 이윽고 폭발한 레인은 검을 꼬나 쥐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크아아! 죽어라!!” “글쎄 입으로만 사람 죽이지 말라니까?” 흥분하면 마음만이 앞서 몸이 재빨리 반응하지 못한다. 놀리듯 빙글 비웃어주고 코앞까지 당도해 검을 내리긋는 레인의 옆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내 그림자를 벤 레인은 흠칫해서 경직되었고, 나는 옆에서 그의 발을 걸어 넘어트렸다. 레인은 기우뚱하더니 압사한 개구리처럼 꼴사납게 널브러졌다. 비무장 바닥엔 레인이 넘어진 가장자리를 따라 금이 쩍하고 가버렸다. “푸하하! 꼴좋다! 그러기에 왜 멀쩡한 사람 짜증나게 해?” “…….” 내가 광소함에도 그는 충격을 받은 것인지 엎어진 채로 침묵했다. 얼마나 쪽팔릴까. 기세 좋게 덤벼들다 꼴사납게 넘어졌으니 말이야. 유저들 웃는 것 좀 봐. 이제 레인은 웃음거리가 되어 두고두고 놀림 받을 것이다. 벌써부터 콜로세움이 웃음의 도가니로 변모했는데 그의 미래야 뻔하다. 만약 그가 명예와 자존심을 중요시 여긴다면 게임 접을지도. 부끄러워서 고개나 들겠나. 거리를 벌려두고 레인이 일어서기만을 기다렸다. 일어나거든 똑같이 말해줄 것이다. 사과하라고. 상대를 앞에 두고 개인적 사정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 것은 상대에 대한 모독이나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자기 입으로 말했으니 번복할 수 없겠지. 나처럼 싫다고 하면 나랑 같은 놈인 주제에 훈계했냐고 으름장을 늘어놔야겠다. “레인 선수! 어서 일어나주십시오! 듀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10초 안으로 듀얼에 임하지 않는다면 기권 처리하겠습니다!” 사회자가 경고한다. 기권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솔직히 낯 뜨거운 전적임에야 틀림없는 사실. 나도 그것 때문에 예전 듀얼 랠리의 전적을 버리고 새로이 시작했잖은가. “우우―! 저게 저러고도 트리플 마스터냐!” “…….” 트리플 마스터의 얼굴은 특수 고무로 만들어지는 줄 아니? 당장에 이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꾹 삼키고 레인만을 바라보았다. 괜히 나서서 나까지 나쁜 말 듣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 자, 여기서부터 연재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안되겠더군요. 이렇게 해야지.. 결승전 챕터 끝날때까지 다음부분 연재 안합니다!! 관객들은 레인에게 계속해서 고렙 주제에 싸움을 기피한다며 입을 모아 야유했다. 반대로 내게는 상대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훗, 나와 반목 있는 자의 말로다. 그러기에 왜 사람 성질을 건드리나. 난 뭐든지 그냥 끝내는 성격이 아니라고. 사회자가 ‘8’까지 카운트를 셌을 때 레인이 딱딱한 움직임으로 부스스 일어났다. 그의 흉갑(胸甲)에 붙은 자잘한 돌가루들이 아래로 떨어진다. 나는 비죽 입술을 비틀며 빈정거렸다. “결투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말할 게 있다. 상대를 앞에 두고 개인적 사정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 것은 상대에 대한 모독이나 마찬가지니까. 안 그래?” 날 등진 상태에서 어깨를 움찔거리는 레인. 킥, 찔리는 모양이지? 레인은 입을 굳게 닫았는지 대답하지 않고 몸만 돌려 손잡이를 강하게 쥐었다. 손이 부들거리니 그게 꽉 쥐었다는 단적인 증거다. 나는 비소를 흘리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제는 아예 침묵이라 이거지? 뭐, 긍정하기에도 뭐하고 부정하기에도 뭐하니 가장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네. 그러기에 왜 무덤을 파니, 쯧쯧. 이윤보다 손해가 더 커서 입맛이 엄청나게 쓰겠어. 레인은 재차 들어가는 도발에 걸려들지 않았다. 다만,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며 필승을 다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봐야 이기지도 못할 텐데 괜한 수고를 하는 것이다. 이미지 또한 크게 실추되었는데 무슨 좋은 모습을 보이겠다고 저러는지 원. 나야 내 승리를 확신하기에 이렇듯 여유로워 레인을 가지고 놀 수 있지만서도. 콜로세움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관중들도 힘껏 보내던 야유를 멈추고 가만히 구경하는 훌륭한 관람매너를 보여주었다. 그나마 정신이 제대로 박힌 유저들만 온 모양이다. 경기 중에 시끄럽게 굴어 선수의 정신을 흐트러트리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아는 듯싶으니까. 눈이 투구에 가려서 날 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쪽으로 시선을 주는 것 같던 레인. 탐색이라도 마쳤던지 검을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지면을 박차며 타다닥 달려온다. 그네들과 마찬가지로 미끄러지는 수준은 못되었다. 역시나 샤프 그 인간이 이상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주제도 모르고 휙휙 날아다닐 수는 없어. 나는 묵묵히 그의 커져가는 형상만 구경하다가 검을 빼들었다. 롱소드가 채앵하고 부드럽게 뽑혀져 나왔다. 그리고 슬쩍 팔을 들자 레인의 공격이 허무하게 막혀버린다. 가슴팍을 발로 가격해 멀찍이 밀어내고 즉각 캐스팅을 시작했다. 유니크(Unique) 섀도우 스킬(Shadow Skill) 레벨 원(Level One) 크로우(Claw)!! “섀도우 스킬의 레벨 원인 크로우입니다!” 역시 사회자답게 단번에 내가 사용하려는 기술을 간파하고 외쳐댄다. 거참, 이래선 기습의 의미가 없잖아. 지잉! 열개의 손가락에 검은색의 기운이 갈고리 모양을 갖췄다. 롱소드를 검집에 꽂아 넣고 몸을 튕겼다. 주춤거리다 균형을 잡고 신중히 디펜스하려는 레인의 옆을 돌아 등 뒤로 파고들었다. 흐흐, 스피드엔 나도 자신 있다고. “큭!” 채 등을 돌리지 못하는 레인에게 팔을 찔렀다. 은빛 망토와 갑옷이 초로같이 뚫리며 뾰족한 갈고리가 들어가는 것이 허용된다. 등 깊숙이 갈고리가 파고들자 레인은 허리를 뒤로 꺾으며 비틀거렸다. 얼굴은 보나마나 작은 고통에 의해 일그러졌을 것이다. “웃차!” 발을 허리에 대고 밀자 갈고리는 쉽게 빠져 나왔고, 레인의 몸은 그 반대방향으로 기울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무리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한들 내가 만족할만한 상대가 되기엔 많이 부족하다. 그렇게 10분 정도 흡족할 만큼 농락하다가, 정신을 못 차리고 비무장에 드러누워 빌빌거리는 레인에게 섀도우 홀드를 걸고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거봐라. 결국엔 입만 살았잖아.” “크윽! 죽여 버린다, 개새…….” “어허, 입이 더럽군! 귀를 오염시키려하는 주둥이가 이거지?” 말허리를 자르고 일어서서 레인의 입을 발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더 이상 구겨질게 없다고 생각했던 그의 인상이 더욱 험악해진다. 나는 혀를 끌끌 차며 롱소드를 그의 머리에 겨누었다. 항복할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내가 친히 나서 게임오버 시켜줘야지 어쩌겠는가. 아, 이런 세심한 것까지 신경써주고……. 난 너무 착하다니깐. “그럼 선수대기실에서 관람석으로 이동해.” 듀얼에서 패한다면 더 이상 선수대기실에 남아있을 수 없다. 죽는 시점에서 선수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래도 선수들에게 예의 차린답시고 비무장 가까이로 관람석을 제공해준다. 지연누나와 태진, 학진, 찬석, 은주는 전날과 오늘에 걸쳐 탈락되어서 지루하다는 얼굴로 하품을 해대며 그곳에 앉아있었다. 하긴, 하품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박진감 없고 지루한 듀얼이었으니. 유저들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라도 한시 빨리 듀얼을 끝마쳐야겠다. 나는 싱긋 웃어주는 것을 잊지 않고 검을 레인의 머리에 박아 넣었다. 절명이어서 곧장 그의 몸체가 곧장 작은 빛들로 화했고, 사회자는 내 승리를 알리기 위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섀도우 나이트 다크니스의 승리입니다! 첫 출전이면서도 대단하군요! 대회 초부터 훌륭한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우와아아! 사회자의 말에 맞춰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러대는 유저들이었으니, 내 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당연한 현상이다. 역시 내가 잘난 것은 부정하려야 할 수가 없는 하늘의 뜻인가 보다. 그렇게 하나의 듀얼이 끝마쳐지고, 경기 대전표에 맞춰 다음 차례들의 선수들이 자웅(雌雄)을 가렸다. 나는 선수대기실로 이동해 그것을 느긋하게 구경했다. 350레벨의 엘레멘탈 로드(Elemental Lord)인 아쿠아 로드(Aqua Lord) 렌듀크와, 동급의 블러드 마스터(Blood Master)인 바하브의 듀얼이었다. 비록 스크린엔 다른 이름으로 떴지만 둘 다 350레벨대의 트리플 마스터로 이름이 알려져 있어서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었다. 엘레멘탈 로드는 정령마법 계통의 마스터 클래스라고 보면 되고 블러드 마스터는 네크로맨시 계통의 마스터 클래스라고 보면 된다. “파이트(Fight)!” 둘의 듀얼은 온갖 화려한 이펙트의 극치였다. 여기저기 난무하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의(엘레멘탈 매직은 정령의 계급에 의해 정해진다. 유니크의 정령마법이라면 정령왕이 주체가 된다. 이렇게 엘레멘탈 스킬의 밸런스가 조절된다)폭포를 방불케 하는 공격과, 이를 상쇄하고 반격하는 바하브의 핏빛 마법들. 마법사 아니랄까봐 눈과 귀를 만족시켜주는 훌륭한 듀얼을 한다. 우열은 빠르게 갈렸다. 워낙에 마나소모가 큰 스킬들만 오고가다보니 마나가 버티질 못했고, 결국엔 간만의 차이로 렌듀크가 진출티켓을 거머쥐었다. 이다음의 듀얼은 샤프와 무명의 유저였다. 이름 또한 언노운(Unknown) 무명(無名)이어서 황당스럽기 짝이 없었다. 무명이라는 유저는 360레벨의 세이지였다. 그러나 상대를 잘못 만났다. 상대는 샤프, 특히나 마법사들의 천적이 되어버린 샤프인 것이다. 샤프가 마법사의 천적이라 불리는 이유, 그것은 빠른 기동력 때문이다. 순식간에 상대의 사이로 파고들어 캐스팅할 시간을 주지 않으니 마법사가 당해낼 재간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듀얼 파이트 직후엔 그나마 거리가 있어 스킬을 사용할 시간이 있기는 하지만, 그 잠깐의 시간동안 캐스팅되는 스킬에 무슨 위력이 있겠는가. 거기다 회피해야하는 시간까지 마련해 놓아야하니 시간은 더욱 촉박하다. 고작 캐스팅을 해봐야 익스퍼트 스킬 이하의 것이니 하나마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샤프가 일부러 마법에 맞고자하는 마음이 없는 이상, 모조리 방어해낼 테니까. 나도 그것을 생각하여 초반에 기술을 쓰지 않은 것이고 말이다. 여하튼 마법사들은 그와의 듀얼에서 두 번 정도의 마법을 쓰는 게 고작이었다. 나 이후로 농간적으로 마법사들만 줄기차게 상대해온 샤프였으니 마법사의 천적이란 말이 붙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번 듀얼도 앞서 해왔던 것처럼 3분 안에 끝날 것이다. 그리고 관중들은 환호하겠지. 그럼 지피지기만 백전백승이란 옛 성현의 말씀을 따라! 자, 철저히 분석해주지! 데이터 듀얼(Data Duel)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지도해주마! 음하하핫!! 나는 샤프의 움직임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을 부릅떴다. 숙명의 라이벌…… 까지는 아니지만 반드시 뛰어넘어야할 상대가 샤프다. ‘그자’에게 한발자국이라도 다가가기 위해선 반드시. 데스티니 블레이드(Destiny Blade). 내게 처음으로 패배의 쓴 잔을 들게 한 유저. 전율이 느껴질 정도의 대단한 실력을 가진 명실상부 엘-가 넘버 원(Number One)이다. 랭크 1의 자리에 있는 것이 결코 이상하지 않다. 전신을 가리는 흑색 로브로 자신을 완벽하게 은폐시키고 있어서, 아무도 그자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거기다 목소리도 중성적이어서 남성이다, 여성이다라는 이야기가 분분했던 때도 있었다. 뭐, 그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최강의 위력을 자랑하는 ‘카오스 스킬(Chaos Skill)'을 소유한 데스티니 블레이다. 내가 드래곤 슬레이어를 획득한 이상 확실한 우열을 예측하기는 힘들 터이나, 예전 PK당시의 난 졌다. 그것도 완패했다. 화가 나기 이전에 허무함이 먼저 엄습할 정도로 찰나의 시간에 깨져버렸다. ‘그녀’를 만나서 실력이 껑충 뛰었음에도 단 1분도 안되어서 뻗어버리는 게 말이나 될법한 소리인가. 그만큼 데스티니 블레이드는 3차원적인 강함의 결정판이었고, 내게 게임오버의 두려움이 뭔지를 알게 해준 유일무이의 유저다. 지금의 내가 있도록 초석을 깔아주었던 그녀에게서 조차 느끼지 못한 죽음의 공포를 그를 통해 알아버린 것이다. 뭐, 바빴던 것인지 죽일 가치를 못 느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날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강해져라, 헬 마스터’라는 말만을 남기고 홀연히 잠적했다. 가슴 한가득 치욕을 안겨주고 나서. 당연지사 처절하게 깨졌다는 것에 화가 난다. 살려둔 것에는 도리어 감사하고 있다. 게임이어도 내 목숨은 귀하게 여긴다고. 그놈 이기려고 별에 별 짓을 다 한걸 떠올리면 저절로 이가 갈린다. 드래곤 슬레이어도 하늘이 내 뼈를 깎는 노력에 탄복하여 내려준 게 아닐까 싶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되리만치 나는 가시밭길을 걷는 역경을 밟았으니까. 사회자로부터 파이트가 외쳐지자 샤프는 곧바로 무명에게 짓쳐 들어갔다. 무명은 그 자리에서 즉시 스킬을 캐스팅한다. 스크린에 비춰진 무명의 평범하고 나이 있어 보이는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초반부터 포기한 것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일까? 결국은 질 테지만 좋은 태도다. 아니, 그래도 만에 하나 이외의 변수 때문에 샤프가 지게 된다면? 그러면 이 자식은 나한테 죽어. 캐스팅이 끝났는지 묵묵히 지팡이를 들고 있던 무명이, 이제는 하얗게 빛나는 수정지팡이를 높이 들어올렸다. 샤프는 무명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여전히 달리면서 검을 고쳐 잡았다. 무명은 지팡이를 가볍게 흔들면서 눈을 반짝였다. “서몬즈(Summons)!” 그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수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바닥으로 이어져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갔다. 모양이 마치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뱀의 형상과 비슷하다. 몸통이 굵직한 게 꼭 바람의 동굴(Wind Cave)에서 보았던 자이언트 스네이크(Giant Snake) 같다. 역시나 빛이 사그라지고 남은 것은 굵기 20센티미터, 길이 10미터 가량 되는 자이언트 스네이크 한 마리. 거, 몸통에 기름이 좔좔 흐르고 토실토실 살찐 것이 먹음직스럽다. 요즘 몸이 허해진 것 같은데 보양식품으로……. “…….” 아이씨,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자이언트 스네이크. 별다른 능력은 없지만 힘이 센 놈이다. 하지만 지능이 현저히 낮고, 움직임도 둔해서 덩치 값을 못하는 게 바로 저놈이다. 거의 눈뜬장님 격. 뭐, 그래도 한번 목표물을 잡으면 강한 힘으로 조여 으스러트리는 게 취미인 녀석이라 약간의 주의는 필요하다. 바위까지는 무리더라도 나무 같은 것은 자작개비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니까. 하지만 썩 위험한 몹은 아닌지라 노말급에 책정된 자이언트 스네이크다. 그리고 놀랍게도 무명은 소환사였다. 소환사가 듀얼 랠리에 출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무명이 소환사일 줄은 예상조차 못했다. 아니 소환사라니, 저게 어딜 봐서 소환사야? 얼룩진 회색 맨틀(Mantle : 망토)에, 자루가 닳아빠져 반들반들한 크리스탈 스태프(Crystal Staff). 마법사보다 더 마법사 같이 보였으면 보였지, 결코 소환사의 모습이라 할 수는 없었다. 클래스를 속이려한 것일까? 소환사의 경우, 여타 마법사 클래스와는 달리 인트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그 클래스에겐 인트는 그저 마나량과 마나회복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소환을 하는 만큼, 소환수가 어느 것이냐에 따라 당사자의 수준이 판가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환사는 소환성공확률을 위한 럭(LUKey) 수치와, 제어를 위한 멘(MENtality : 정신력) 수치가 절대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럴진대 정작 필요한 럭과 멘은 무시하고 인트만 올려주는 아이템을 장비하고 있다니……. 이해되지 않는 유저였다. 샤프도 그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주춤하며 발을 멈췄다. 듀얼의 결과엔 큰 변동이 없을 테지만 계획 수정은 불가피한 탓이다. 돌격해서 치고 박고하는 간단한 방법이라 해도 그것이 제 3의 존재에 의해 수틀려버렸으니 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샤프로서는. 무명의 레벨로 볼 때 그는 분명 소환 계통 마스터 클래스인 서몬 로드(Summon Lord)다. 운만 좋으면 엘리트 몹까지 소환 가능하다. 뭐, 제어를 못한다면 자승자박하는 꼴이 되겠지만 위력만큼은 눈감고 그냥 넘어가줄만한 수준이 못된다. 반드시 소환되리라는 법은 없어도, 가령 엘리트 몹이 소환되었다 치면 과연 샤프가 상대할 수 있을까? 그에 걸 맞는 엘리트 스킬이 없는 이상 샤프의 패배다. 나도 헬 스킬을 얻고 난 뒤에야 엘리트 몹들과 대적했으니까. 지금은 레벨이 높아져서 손쉽게 상대가 가능해졌지만 말이다. 아무튼 몹은 그리 가능성이 없으니 넘어간다 치더라도, 현재 직면된 가장 큰 문제는 소환 후 소환사의 서포트(Support)라는 것이다. 서몬 로드의 클래스 트리는, 메이지에서 노말 서몬 스킬을 배워 소서러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서몬 스킬만 익혀나가며 서모너, 서몬 테이머(Summon Tamer), 서몬 로드로 전직하는 것이다. 아, 참고로 소서러 이후엔 하나의 분기점이 있는데, 그 길이 네크로맨서 계통이다. 맥이 일통하니 만큼 그쪽 클래스도 소환에 능통하다. 오리지널 소환사보다얀 약한 것들만 불러낼 테지만 말이다. 여하튼 소환사도 메이지의 절차를 밟으니 기초적인 마법들은 사용할 수 있었다. 이때 소환수와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데 마법지원까지 있다고 해봐라. 아무리 약한 마법이라 해도 자칫 급소에 얻어맞으면 그대로 바이바이다. 거기다 무명은 레벨만큼이나 경험도 풍부해 날카로움도 겸비하고 있을 터다. 뭐, 지금은 딜레이가 있어서 즉시 마법을 뿌려댈 수는 없을 테지만. 리캐스팅(Recasting) 시간까지 포함해 최대 1분 안에 몹을 처리하기만 한다면 샤프의 승리다. 고작 자이언트 스네이크 따위에 당할 샤프가 아니니, 곧 듀얼은 끝날 것이다. 리캐스팅(Recasting) 시간까지 포함해 최대 1분 안에 몹을 처리하기만 한다면 샤프의 승리로 점철된다. 고작 자이언트 스네이크 따위에 당할 샤프가 아니니, 곧 듀얼은 끝날 것이다. 그래, 곧 끝나야하는데……. “저 인간 뭐하는 거야, 지금?” 생각과는 달리, 얼굴이 하얗게 죽어선 머뭇거리는 샤프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무엇 때문에 저러는 건지 영 알 수가 없다. 혹, 자이언트 스네이크 때문에 저러는 것일까? 에이, 설마. 설마 하는 마음에 떠올렸던 생각을 부정하는 사이 이윽고 자이언트 스네이크가 움직였다. -캬아아―!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섬뜩하게 솟은 이를 위시하여 샤프에게 공박해 들어가는 자이언트 스네이크. 침인지 독인지 판단이 안서는 걸쭉한 액체를 튀기며 짓쳐가는 모습은 제법 기세등등한 것이었다. 샤프를 만만하게 보는 것 같은데……. 쯧, 가소로운 것 같으니. 샤프가 그런 어설픈 공격에 당해줄 리가 없잖―. “…….” 정말이지 할말을 잃게 만든다. 정말, 내가 생각했던 게 맞는 것일까? “킥…….” 정말인가 보다. 이거, 마구 비웃어줘야 하는데 도리어 당황스럽네. 저런 허무한 약점이 잇을 줄 어느 누가 알았겠어? 반격은커녕 대책없이 도망만 다니는 샤프. 스크린에 클로즈업되어 자세히 보이는 샤프의 눈은, 혐오스러운 것을 증오하는 경멸의 빛이 그득했다. 은현이 바퀴벌레를 볼 때 딱 저 얼굴이었던 것 같은데……. “흐흐, 데이터다, 데이터! 넌 끝이야! 흐흐흐……!!” 눈을 가늘게 찢고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저놈 미쳤다.” “내버려둬요. 한두 번 봐온 것도 아니고. 정신 나간 놈과는 상종하지 않는 게 최선책이에요.” “그렇군.” 옆쪽 창턱에 기대 함께 구경하고 있는 화청 형과 성호의 혀 차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지만 구태여 무시했다. 괜히 신경 써서 기껏 고양된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겠지. 자자, 그러니 듀얼에나 집중하자고. 처음엔 의외의 상황에도 침묵하던 관중석에서 이내 술렁임이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곧 차분해질 거라는 그들의 믿음을 깨고 변변찮은 견제조차 하지 않는 샤프의 태도가 이상하게 보였기 때문이리라. 몇몇은 나처럼 눈치 챘을 수도 있으나, 아직도 많은 유저들은 샤프가 무명을 농락하고 있는 거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분명 그러함이다. 샤프의 입장에선 자이언트 스네이크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거리를 일부러 벌려놓고 있지만 유저들이 보기엔 놀리는 것으로 밖에 더 보이겠는가? 듀얼랠리 3연속 우승자라는 칭호까지 가진 이가, 고작해야 노말에 그친 몹을 무서워할 이유가 하등 없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들로서는. 뭐, 샤프가 움츠러든 이유는 그 노말급 몹이 하필이면 ‘뱀’ 종이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아니면 파충류이기 때문이거나. 무명은 샤프가 자신을 우롱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인지 시뻘게진 얼굴로 이를 갈았다. 턱에 경련이 이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분명하지. 그럼에도 차분함을 유지하는 것은 샤프가 자신을 도발하고 있음이라 착각했기 때문일까? 쩝. 역시 유명한 놈이 뭔 짓을 한들 상대는 위축되는구만. 나도 정체 폭로하고 바닥이나 데굴데굴 굴러봐? 과연 어떠한 반응들을 보일지 궁금하네. 샤프가 도발을 빙자한 도망을 치는 순간에도 시간은 바람처럼 흘러만 갔다. 그때까지도 샤프는 단 한번의 공격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와 반대로 비교적 여유롭게 있으면서도 긴장을 풀지 않고 리캐스팅에 돌입하는 무명. 마법인가? 주먹을 꾹 쥐었다. 마법이라면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눈이 뒤집혀(실상은 무덤덤하게 보인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샤프에게 마법지원은 큰 핀치였다. 마법이 이마에라도 적중될 시엔 그도 얄짤없이……. “빌어먹을! 머저리자식!!” 욕지거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런 쓸데없는 약점 따위 진작 버려놓을 것이지 뭐가 좋다고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거냐! 고작해야 뱀인데 도망이나 다니고, 잘났다! 울컥하는 마음에 창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고함쳤다. “자식아! 지면 대회 끝나고 각오해둬!!” 지옥 끝이라도 쫒아가 반드시 PK해버릴 것이니까! 관람석에서의 수군거림 때문에 꽤 소음이 심했지만 내 외침이 워낙에 우렁찼는지라 그것들을 억누르고 콜로세움 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때문에 유저들의 가시 돋친 시선이 내게 꽂혔다. 여전히 상체를 내밀고 있는 상태였기에 금방 들켜버렸다. 이미 화청 형과 성호는 벽에 찰싹 붙어 연신 씨근덕거리고 있고 말이다. 분명 내 욕을 하는 중일 거다. 뻔하지. 하지만 미연누나가 스태프를 들어보이자 즉시 입을 닫아버리는 두 사람. 공감할 수는 있어도 너무 비굴하잖아, 인간들아. 샤프는 물론 무명도 두리번거리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무명은 무시해버리고 샤프에게 악을 보태어 외쳤다. “준결승에서 만나자고 한 사람이 누구냐, 샤프!!” 재차 터지는 일갈에 샤프가 피식 웃는다. 그리고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이고 시선을 거두었다. 그가 한눈을 팔든 말든 자이언트 스네이크는 기다려주지 않고 착실하게 덮쳐갔기 때문이었다. 기다려주는 미덕과 매너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자식이다. 아, 몹한테 이런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짓인가? 여하튼 무명도 듀얼에 신경을 쏟았고 유저들도 별일이 없자 내게 보내던 관심을 끊었다. 그들은 듀얼을 보러 온 거지 날 보러 온게 아닌 것이다. 거기다 샤프의 차례일지니 한 장면이라도 놓치는 것은 싫었을 터다. 그러니 날 따갑게 노려본 거겠지. 쩝, 거 방해해서 미안했수다.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이며 밖으로 내밀었던 상체를 끌어당겼다. 문득 인식해보니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더라. 당장 떨어진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형색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흥분했었다는 증거일까. 이후로 샤프는 퍽 적극적이 되었다. 도망 다니는 건 여전했지만 간간히 공격을 시도하는 등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물론 그때마다 눈을 감고 검을 휘둘러 그리 위협적이지는 못했으나 그게 어딘가. 실로 장족의 발전이 아닌가. 도망만 다니는 것보단 몇 배는 나은 거다. 거기다 도발효과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죽인다!!” 무명의 입장에선 그게 치욕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샤프가 입에 걸고 있는 희미한 웃음은 확실히 비웃음으로 밖에 안보였고, 눈을 감고 싸우는 짓은 서슴없이 해대고 있으니까. 네까지건 눈 감도고 상대할 수 있다라고 해석될 여지가 분분했다. “앗! 샤프선수! 도발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무명선수가 걸려들지 의문이로군요!” 저렇게 노골적으로 밝히면 걸릴 사람도 안 걸리겠다만, 도발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아니면 유저들이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체 하는 것이던가. 어찌되었든 샤프에게 피해만 안가면 되니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거참. 내가 적을 응원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다니……. 아무리 샤프가 못나서 이런다지만 실로 기상천외한 경험해보는 구만, 요번 듀얼 대회에선. 그래도 별수 없었다. 샤프는 나에 의해 패배를 겪어야했다. 그것만이 내 자존심을 지키는 작용을 할 수 있었다. 나 외에 다른 유저에게 지는 것은 결코 눈뜨고 구경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샤프가 조금씩 자이언트 스네이크를 압박해가자 무명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갖은 인상을 섰다. 안 그래도 늙어 보이는(3~40대 정도로 예상된다) 면면인데 주름까지 잔뜩 잡히니 더욱 늙어 보인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고 확신이 선 모양이었다. 아~ 불쌍하여라. 샤프를 조금만 만만하게 보았다면 그의 약점을 금세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샤프를 과대평과 했어, 무명씨. 내가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 그는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수정이 희게 빛나기 시작했다. 계속 서있더니 드디어 캐스팅이 끝난 모양이다. 이거, 어떠한 놈이 소환될지 은근히 기대되는걸. 베이직 스킬 주제에 캐스팅 시간이 비약적으로 길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하여 무명이 하려는 것은 명백한 소환! 시간도 넉넉했었으니 자신이 가진바 최고의 스킬을 캐스팅했을 터다. 과연 무엇이 나올까나? 무명이 빛을 떨구려는 듯 지팡이를 까닥이자, 뒤로 밀리던 자이언트 스네이크가 사라졌다. 동시에 감겨있던 샤프의 눈이 번쩍 뜨여지고 창백하던 얼굴은 혈색을 되찾는다. 그리고 자이언트 스네이크가 있던 자리를 가득 메우는 거대한 빛의 형상. 사람의 형태와도 비슷했다. 키가 5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니, 응당 사람은 아닐 테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뱀’이 아니라는 점인데……. 나 참, 무명을 바보라고 욕해야하나, 아니면 샤프가 이기도록 도와줘서 고맙다고 감사를 해야 하나?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것은 육중한 바위 몸체를 가진 스톤 골렘(Stone Golem)이었다. 전신의 색이 붉은색인걸 보니, 엘리멘탈 골렘(Elemental Golem) 중에서도 화염과 혼합되어 만들어진 파이어 골렘(Fire Golem)! “멍청이!” ―라는 소리가 절로 터졌다. 파이어 골렘은 유니크 몹이다. 엘리트 몹인 아이언 골렘(Iron Golem)을 공제하면 여타 골렘 사이에선 가장 난폭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골렘 중에서 행동이 가장 굼뜨기로 정평이 나있기도 했다. 자이언트 스네이크때는 걱정이 들었지만 이젠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일말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저딴 걸로 샤프를 잡겠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뱀들의 왕 바실리스크(Basilisk)라도 나와 샤프가 곤욕스러워하길 내심 바랐는데(변태냐?)……. 확실히, 무리겠지? 소환되는 몹은 정해진 게 아니라 비슷한 수준에서 랜덤(Random)이니까. 이냥저냥 샤프가 이기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 아, 드디어 써서 올립니다. 월요일날 야자시간에 쓰다가 공책을 빼앗겨 버리는 바람에 여태껏 타이핑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선생님들 눈도 좋지.) 아, 그리고 몇몇분들이 설정좀 공개하라고 하시더군요. 설정... 반드시 해야할까요? 엄청난 분량, 무질서한 정리... 그거 정리해서 올리려면 솔직히 막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설정만으로도 책 한권을 뽑을 수 있으니 말 다했죠 -_-; 문제는 나도 뭔 설정을 해놨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지만.. 언제한번 죽 훑어봐야하는데 시간도 없군요, 에휴. 그럼 나중에...(나중이 언제가 될지 저도 장담못합니다. 같은 불상사가 이루어질수도 있으니..) 자이언트 스네이크가 사라진 직후부터 샤프의 위세는 급변했다. 파이어 골렘 건너편의 무명을 가소롭게 쳐다보나 했더니 벼락같이 지면을 박차는 샤프. 우리는 이런 걸 두고 기사회생(起死回生)이라고 한다. 우오옷! 무찔러버렷! 파이어 골렘은 샤프가 기세 좋게 쳐들어오자 오른쪽 어깨를 들썩였다. 굵직한 바위 팔이 따라 움직인다. 그 후, 다가오는 샤프를 향해 내리꽂히는 거대한 주먹! 쿠웅! 육중한 타격음과 함께 지축이 진동하고 비무장 위로 뿌연 먼지가 낮게 깔렸다. 그러나 놈의 주먹은 샤프를 잡아내지 못했다. 그의 등 뒤를 스쳐 애꿎은 비무장만 박살내버렸다. 파이어 골렘의 동체시력 가지고는 샤프의 움직임을 감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행동부터가 굼뜬 몹일진데 그가 잡힐까보냐. 샤프는 속전속결하려는지, 부스스 팔을 회수하는 파이어 골렘의 다리사이를 지나 무명에게 검을 내질렀다. 대책 없이 칼침을 맞아야할 위기에 놓인 무명. 그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가고 눈에는 공포의 빛이 진득하니 스쳐지나갔다. 섬뜩하게 미소하며 무명의 옆으로 파고든 샤프는, 즉시 그의 몸뚱이를 쳐올렸다. 너무도 부드럽게, 차가운 은광이 무명의 복부에서부터 등 뒤로까지 반원을 그리며 이어졌다. 베었다기보다는 ‘절단’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었다. 무명의 눈이 부릅떠졌다. 나는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역시 샤프라고 해야 할까? 깔끔한 일격이었다. 무명의 몸이 슥 어긋나며 미끄러졌고, 이내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그가 죽자 소환되어 있던 파이어 골렘도 강제 역소환되었다. 골렘의 특성상 입이 없고 고통을 못 느끼기에 망정이지, 자이언트 스네이크였다면 소환사와의 교감이 끊기면서 생기는 충격에 찢어지는 비명을 터트렸을 것이다. “샤프선수 승! 뛰어난 실력을 겸비하고 있군요!! 역시 유력한 우승후보다운 면모입니다!” 한심함도 겸비하고 있고 말이야. 내가 경각심일 일깨워주지 않았다면 저놈은 졌어, 쳇. 마이크로 인해 확성되어 울리는 사회자의 말을 듣고 입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좀 어린애식 질투하기 같지만 실상이 그렇잖은가. 나 아니었으면 샤프는 여부없이 졌다고. 샤프는 퇴장하면서 고개를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이쪽에 닿았다. 날 보는 것 같은데……. 창 가까이에 서서 퉁명스레 마주봐주자, 샤프가 훗하고 웃어 보인다. 내 몸이 제꺽 굳어버리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아~ 재수 없어라. 일정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128강(옆 콜로세움까지 합하면 256강) 진출 자격을 둔 듀얼이 모두 끝나고 64강을 위한 듀얼이 시작되었다. 내 차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거의 끝 쪽에 있어 지루하게 대기실만 지켜야했다. 수차례의 듀얼이 지나가고 463번째 듀얼. 이번엔 성호와 세영이 비무장에 서게 되었다. 세영이 비무장에 오르자 콜로세움은 완전히 쾌락… 은 아니고 열광의 도가니로 변모했다. 거의 난장판을 방불케 하니 세영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누님! 저 좀 봐줘요!” “꺅~ 언니! 전 언니 거예요!” “우리 누님 나왔네! 최강 누님 나왔네! 누님이 가는 길을 막을 이 누가 있으리오~.” 대체 출처가 궁금한 ‘누나 사랑해요!’, ‘넌 내거야!’, ‘절 괴롭혀주세요!’ 등등의 현수막을 들고 즉석에서 작곡된 ‘누님만세곡’을 열창하는 관중들. 무한 파도타기까지 해대니 이야말로 구제불능이어라. 아, 일단의 무리가 기쁨에 겨워 혼절까지 한다. 이미 대회 운영진의 통제를 벗어난 듯싶다. 이번 대회에서 최고 관심사로 샛별처럼 떠오른 게 세영이다. 초반에는 그저 박수만 나왔었는데, 어제의 듀얼에서 이름 있는 트리플 마스터를 하나 잡고 나니 그녀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격상했다. 즉석에서 팬클럽이 만들어지고 주제가도 지어졌다. 손쓸틈도 없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 팬클럽을 필두로 전 유저가 세영의 추종자가 되었으니……. 실로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영도 나처럼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것일까. 그래도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하여 어설픈 변장만으론 미모를 감출수가 없었던지, 세영이 예사롭지 않은 미모를 가졌음을 많은 이가 알아차리게 되었지만 말이다. 얼굴만 못 알아보면 되니 크게 상관은 없는 일이다. 그나저나 성호녀석…, 불쌍해서 어쩐다니. 싸워보지도 못하고 포기할 상황에 처해버렸으니……. 콜로세움이 무너질 듯한 응원에도 무덤덤하게 서있는 세영과, 잔뜩 위축된 성호를 번갈아 살폈다. 듀얼결과를 예상하나마나 성호는 기권할 생각일 터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무기에 조금이라도 손이 닿았다간 놈은 끝장이니까. 전번 세영의 상대는 제법 깡다구가 있는 유저였는지 그녀에게 검을 겨누었었다. 물론 처절하게 깨졌으나 그 유저의 수난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관람석으로 이동한 그를 주변 유저들이 달려들어 늘씬하게 두들긴 것이다. 원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유저가 무더기로 밟아대서 누가 죽였는지 알 수도 없었다. 지금은 몰매 맞은 유저가 접속을 안 하고 있는지라 조용하지만 말이다. 그 유저, 단번에 블랙리스트에 오를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어쩌면 척살 1호인 날 앞지를지도! 아무튼 승패를 떠나 세영앞에서 일말의 투지라도 불살랐다가는 기가 막힌 경험을 겪게 될 테니 별 수 있을까. 기권이 약이었다. 잠시간 세영을 마주보던 성호는 침울한 표정으로 힘없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비무장으로 내려온 사회자에게 몇 마디 말을 전했다. 성호에게 귀를 기울이던 사회자는 녀석이 몸을 돌려 처량히 사라지자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 “칸 선수 기권!” 뭐, 당연한거다. 방해 없이 듀얼을 한다 해도 성호가 세영을 이길 수 없으니, 차라리 탈 없는 기권이 나았다. 세영보다 하수인데다가, 더욱이 ‘미녀=Treasure(보물)'라고 생각하는 녀석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면 곤란하다. 어쨌든 ‘리슈아(본래 아이디는 류시아)선수 승!’을 외치는 사회자 덕에 콜로세움은 다시 한번 들썩였다. 얼마나 시끄러웠던지, 옆쪽 콜로세움에서 놀고 있던 반 친구들이 저녁에 전화로 ‘헬 마스터나 데스티니 블레이드라도 출전했냐?’라고 물어오더라. 대답하기 거북해서 전화기 코드를 뽑아버렸다지. 세영이 대기실로 들어올 즈음되어 경기장은 적막에 휩싸이게 되었다. 원래가 이런 분위기였다지만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군데가 빈 듯이 허전한 느낌이랄까? 마찬가지로 화청 형과 미연누나도 허허로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시끌시끌하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니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다. “수고했어, 세영아.” “어서와라.” 미연누나와 화청 형이 대기실로 들어오는 세영을 반겼다. 세영은 담담하게 고개를 숙여보이고 회답했다. “수고까지는 아닙니다. 움직인 거라곤 내려갔다 올라온 게 전부니까요.” “아, 그, 그래…….” 세영의 냉담한 어조에 머쓱해하는 두 사람. 화청형이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야. 쟤 우리 싫어하나봐. 너무 싸늘하잖아.] 나는 창문 앞으로 서는 세영을 힐끗 흘겨보고 답신했다. [원래 저런 애니까 오해하지 마.] [……성격문제냐?] [……성격문제야.] [역시 우리 미연이 같이 완벽한 여자는 어디에도 없어.] [……나가 죽어라 인간아. 어떻게 하면 그쪽으로 생각이 옮겨가냐.] 저인간은 평생가도 미연누나 치마폭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딴에는 휘어잡고 살 거라는데……, 꿈이 너무 크잖아. 심심함을 달래려고 지연누나와 메시지로 두런두런 대화하면서 내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역시 흥취없는 듀얼 구경보다는 지연누나의 따뜻한 한마디를 듣는 게 더욱 보람있었다. 지연누나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히죽거리는 내 모습에, 저놈이 기어이 미쳐버렸다고 화청 형이 장탄식을 토해냈다. 도외시해버리고 메시지 보내는 것에만 열중했다. --------------------------------------------------------------------------- 이거.. 많이 쓴것 같은데 달랑 3장 썼더군요 -_-; 나참.. *수정된 부분 포함 심심함을 달래려고 지연누나와 메시지로 두런두런 대화하면서 내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역시 흥취없는 듀얼 구경보다는 지연누나의 따뜻한 한마디를 듣는 게 더욱 보람있었다. 지연누나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히죽거리는 내 모습에, 저놈이 기어이 미쳐버렸다고 화청 형이 장탄식을 토해냈다. 도외시해버리고 메시지 보내는 것에만 열중했다. [세영이는 뭐해? 얘가 메시지를 보내도 대답을 안 해주네.] 누나의 말에 슬쩍 세영을 훔쳐보았다. 무표정하게, 어찌 보면 지루해보이기도 한 얼굴로 턱을 괸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선을 느낀것인지 고개를 살짝 틀어 날 물끄러미 쳐다보는 세영. 어색하게 웃어 보인 후 재빨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그냥 있네요. 약간 감긴 눈으로 듀얼 구경하는 거보니 지루하나본데요?] [그러니? 많이 심심한가 보네. 그러면 나랑 대화나 하지……. 아, 그러고 보니까 이 다음이 네 차례네? 너 475라운드라고 했잖아.] [에, 벌써요?] 시간이 그렇게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내 차례가 와버린 모양이다. [누나 몫까지 열심히 뛰고 올게요.] [으응. 열심히 응원해줄게!] [하하. 말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인데요? 여기에 미녀의 행운의 키스까지 받으면 금상첨화일 텐데. 어디 해줄 사람 없을까나?] [……이번 주 일요일 날 만나거든 해줄게. 너무 짓궂어, 너.] 지연누나의 답신에 슬그머니 미소했다. 필요한건 당장이지만 모아서 받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 목표가 있으니 의욕도 생기고, 그때가 되면 우승 기념이라는 명목까지 더해지게 될 테니 더욱 의미 깊을지도 모르지. 거기다 게임보단 현실에서 받는 게 좀 더 현실감 있잖아. 누나에게 세영과 대화 나누라고 메시지를 보내며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냐?” 화청 형이 무성의하게 묻는다. 발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형의 말때문인지 세영과 미연누나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짤막한 일성으로 회답해주었다. “듀얼뜨러.” “그럼 언질이라도 주고가든가. 쥐새끼마냥 말도 없이 슬금슬금 나가려하냐.” 꼭 비유를 해도 자기 같은 것만 한다. 뚱한 표정으로 말을 뱉어냈다. “금방 돌아올 건데 굳이 해줄 필요가 있어?” “오호라~. 그럼 너는, 수업시간에 금방 다녀온답시고 말도 없이 화장실 가는 모양이구나? 아무리 그대로 기본 예의는 지켜라, 좀.” “…….” 정말이지 가끔씩 말문을 막히게 하는 날카로운 지적을 하는 형이다. 무안해서 한숨을 푹 내쉬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 금방 이기고 올 테니까 근사한 환영 멘트 준비해둬. 그렇게 말해놓고 싫다고 말하면 언어도단인거 알지? 서로 간에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자고, 우리.” 뭐, 손해 보는 것은 사절이이서 말이다. “다, 당연히 알지! 이 형님께서 성대하게 환영해줄 테니 기대해라!” 가슴을 탕탕 치며 거만한 포즈를 취하는 형이 왜 이리 딱하게 보이는 것일까. 바보스러울 만치 쉽게 말려드네그려. 쯧쯧, 단순하기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는 사이 미연누나와 세영이 다가왔다. 누나는 내 뺨에 살짝 입을 맞춰주고 미소 지었다. 아! 이, 이게 바로 내가 바랐던 미인에게 받는 행운의 키스?! 의욕 백퍼센트 충전이다! 내 반드시 지연누나에겐 입으로 받아버리리! “힘내서 우승해야지. 그래서 이 누나를 기쁘게 해주렴.” 마치 친자식을 대하듯 부드러운 미소로 부드럽게 말한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화청 형이 눈물을 글썽이며 미연누나의 허리를 잡고 늘어졌다. 상당히, 꼴사나운 추태였다. 남자망신을 시키는 것 같아 나까지 얼굴이 붉어진다. “미, 미연! 나에게도 안 해줬으면서 어째서 저 녀석에겐……!” “흥, 화청씨는 매일 저한테서 모닝키스 받아가잖아요.” 참고로 말해두자면 미연누나와 화청 형은 아파트 내에서 바로 옆집 사는 이웃사이다. 때문에 어른들 간에 친목도 있어 쉽게 혼담이 오고갔다한다. 결혼하기로 당사자들끼리도 약속을 했으니 이젠 국수 먹을 일만 남은 셈. 코웃음을 치는 미연누나에게 화청 형이 상처받은 얼굴로 항의했다. “그것과 이건은 엄연히 다르다고 미연! 사람에겐 의욕이란 게 있어!” 아, 진짜 처절하다, 인간 신화청. 당신한테는 모닝키스도 과분해. 미연누나는 심히 짜증난다는 표정을 짓고 허리를 감은 화청 형의 팔을 거칠게 떼어냈다. “시끄러워요! 모닝키스도 안 해줄까보다.” “허, 허헉!” 충격 받았는지, 주저앉은 모습으로 누나에게 손을 뻗은 채 덜컥 굳어버리는 화청 형이다. 그는 그렇게 멍청하니 얼어 있다가 괜히 분노해서 내게 달려들었다. “우우우! 이 자식! 결판을 내자! 강한 자만이 미인을 얻는 법! 네게 향하는 미연의 연모의 정을 받아오리라! 사내답게 칼을 뽑아라!” 참으로 유치찬란한 대사다. 저 인간 어쩌다가 이토록 망가져버렸지? 달려드는 형을 몇 대 때려서 기절시켜놓고 쓴웃음을 지으며 미연누나에게 말했다. “엄청 고생하겠어요. 그냥 이런 남자 차버리고 다른 남자 찾는 건 어때요? 누나정도면 재벌 2세도 낚을 수 있을 텐데.” “어쩔 수 있니. 이런 만큼 내가 보살펴줘야지. 그나저나 늦겠다. 어서 내려가 봐. 지금 진행 중인 듀얼 거의 끝나가는 것 같으니까.” “알겠어요.” “다녀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세영이 나지막하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가만히 세영의 눈을 직시하다가 살며시 웃어주었다. 다녀와, 인가? 내가 이길 것을 확신하는 것 같은 말이었다. 상당히 두터운 신뢰감을 준다. 둘의 힘내라는 응원을 뒤로하고 대기실을 나섰다. --------------------------------------------------------------------- 듀얼 상대는 당사자들에게 메시지로 라운드, 즉 차례만 알려줄뿐 다른 것은 일체 알려주지 않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상대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서로간에 말이 오고가지 않는 이상 모르는 상태에서 상대와 대면하게 되지요. 순간순간의 임기응변으로 싸우게 하기 위한 미르트의 수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상대를 알면 그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될 테니까요. 그나저나.. 이놈의 글은 더럽게 안써지는군요. 정말 육두문자 내뱉게 만드네요. 듀얼랠리여서 그런지 아직까지 슬럼프여서 그런지 참... 빨리 쓰는게 모두에게 좋은 방책일텐데.. 쩝.. *또다시 수정된 부분 포함. (미리미리 좀 하란 말야!!) 대기실에서 나와 고요함이 깔린 복도를 걸었다. 내 발걸음에 맞춰 뚜벅거리는 소리가 복도 안에 공명했다. 생각 없이 그것들을 들어가며 습관대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프린터를 풀기 위해선 작은 단서라도 있어야하기에 언제나 주변을 관심 있게 둘러보다보니 생겨버린 버릇이었다. 각 대기실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조금, 갑갑하게도 보였다. 이따금 활짝 열려있는 대기실도 보였지만, 그 대기실엔 아무도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만이 유저를 대신하여 노닐고 있을 뿐이었다. 그 안에 있던 유저 전원이 탈락된 모양이다. 콜로세움의 크기만큼이나 복도도 길어서 B계단, 즉 중앙계단에 도착했을 때는 1분 가량이 경과된 직후였다. 이것도 반뿐이 오지 못한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우측(Right)에 정해져서 더 걸어가야만 했다. 우리 대기실은 좌측 입구와 가까워서 좌측(Left)이 되길 빌었었는데……, 쳇. 투덜거리며 몸 상태를 체크해보고 계단에 발을 내딛었다. “으아악! 리, 리엘! 그것만은 제발 봐주라! 하이퀄리티의 시가렛이란 말이야! 보통 담배의 두 배를 호가하는 가격―, 아악!! 내 자식 같은 담배들이!!” 갑자기 계단 바로 앞쪽에 위치한 대기실에서 비탄에 찬 절규가 터져 나왔다. 일대에 작은 소요가 일어난다. 복도를 타며 외침이 길게 울린 것이다. 가히 동정심마저 들 정도의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절망과 좌절이 젖어든 경악 같다, 랄까. 문이 조금 열려진 대기실에서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긴, 방음이 확실한 곳인데 대화소리가 그냥 들려 올리는 없는 것이다. “닥치고 듀얼이나 치르고 와버려! 이놈의 담배! 정말 지긋지긋해! 이 많은 담배들을 대체 어디다 숨겨놓는 거야?” “우우우! 그게 마지막이었던 말이야! 흐윽! 삶의 의욕을 잃었어! 지면 네가 책임져!” “간만에 듣기 좋은 소리! 그럼 이 여세를 몰아 상쾌한 기분으로 이기고 돌아와~. 데미스와 카마인이 마음으로 힘찬 응원을 해줄 거야!” “사, 상쾌한 기분일리가 없잖아, 바보야!” “누가 바보라는 거야, 멍청이!?” “아아―, 대학 내에서 담배저장소라고 불리는 놈인데 그 말을 믿는 것이냐, 리엘. 그놈 옷 뒤져보면 또 나올 거다.” “시, 쉿! 쉿! 조용해!” 필사적으로 담배를 갈구하던 목소리. 당황했는지 가늘게 떨리고 있다. 그런데……. 바로 직전에 들었던 음성은… 샤프 목소리와도 비슷한 것도 싶은데. 착각일까? 약간의 의혹이 들었지만 어쨌든 재밌게 돌아가는 상황에 한 계단 내려간 상태에서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가 괴로워하는 것이 상당한 재미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 으음, 아무래도 나, SM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다. 태진이 꼴 날까봐 은근히 두렵네. 심각한 고찰을 하고 있을 때도 말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니온군. 잠깐 검사가 있겠어요. 착한 어린이답게 코트를 벗어주시겠어요?” “누가 어린이라는 거냐, 꼬마!! 어린이는 너잖아! 키도 작은 주제에! 에게게~, 달랑 내 가슴팍뿐이 안 오네!” “이익! 사람 아픈 곳을 찌르지 말란 말이야! 내가 크고 싶지 않아서 안 큰 줄 알아?!” “편식하면 나쁜 어린이~.” “너 죽어!!” 점점 시끄러워진다. 재밌기는 하지만 좀 더 수준 있게 떠들면 안 되는 거냐? 듣자하니 나이 있는 사람들 같은데 유치하게도 노는구만. 방음처리가 확실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많은 유저의 눈이 이쪽으로 쏠렸을 것이다. 그만큼 저 대기실에서 나오는 소음은 일정수준을 크게 넘어서고 있었다. “제니온, 리엘. 너무 시끄러운 것 같군요. 사랑싸움은 침대 위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사랑싸움은 침대 위에서라……. 상당한 위력이었다. 누군지 얼굴을 보고 싶을 정도였다. 대기실 안의 여자는 당황한 듯 크게 소리 질렀다. “무, 무슨 사랑싸움이라는 거야! 이런 놈을 좋아할 리가 없잖아!” 목소리도 떨어가며 악을 쓰는 것치고는 설득력이 없는 것 같은데.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이라고들 하지. 여자와 말장난을 하고 있는 남자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탄식하며 말한다. “오~, 리엘양. 얼굴을 붉히고 말까지 더듬어가면서 외치는 말에는 그리 설득력이 없답니다.” “익!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려! 꼴도 보기 싫어!” 괜히 찔리니까 언성을 높인다. 목소리 크면 다되는 줄로 아는 모양인데, 그건 큰 착각이다. 노련한 언변가 앞에서는 고함은 곧 독이 되기 때문이다. 나 당황했으니까 알아서 들볶아주시오, 라는 말로밖에 해석이 더 되냐. 궁지에 몰린 사람이 자주 하는 행동패턴이니 확실히 당황하긴 했나보다. 이쯤에서 상대 속을 뒤집히게 만드는 몇 마디만 해주면 끝이다. “흠. 저쪽의 듀얼도 끝나가는 듯싶으니 명을 따르도록 하겠나이다, 여ㆍ왕ㆍ님!” 오오, 좋은 자세다, 남자! 이대로 몇 마디 더 내뱉어서 회생불가를 만들어버려! “나가! 나가, 이 인간아! 눈앞에서 사라져버려! 너 같은 남자 정말 싫어!” 와장창! 쾅! 무언가 심각하게 부서지는 음향이다. 말로 밀리니까 무력행사로 이어지는 것인가. 확실히 말과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기야 하다. “으, 으악! 난봉꾼 리엘 부활인가!!” 그럼에도 폭력에 굴하지 않고 할 말은 다하는 남자. 제 목숨 깎아가며 하는 투철한 개김 정신만큼은 높게 사줄만했다. 그러던 도중 남자가 놀란 듯이 말했다. “엇? 듀얼 벌써 끝난 거야? 이런! 이러다가 듀얼에 늦겠군! 그럼 네 낭군님께서 다녀오시마!” “올 필요 없어! 그냥 뼈를 묻어버렷! 계단에서 내려가다 발 헛디뎌서 구르고! 비무장 올라가다 미끄러져서 코를 박아버리고! 누군가가 던진 짱돌에 맞아 뻗어버려!” 아예 저주의식이라도 행하지 그러냐. “나 같이 착한 사람에겐 원하지 않은 행운도 따라다니는 법! 리엘 네 말이 이루어질 확률은 극히 낫지. 그럼 다녀오마! 응원까지는 바라지 않겠지만 되도록 저주도 하지 말아줘! 그건 사양할게!” 외침과 동시에 대기실문이 벌컥 열리며 흰색 코트를 입고 훤칠하게 생긴 남자하나가 뛰쳐나왔다. 지금까지 내게 즐거움을 제공해주었던 그 남자였다. 그는 문 앞에 서서 펑퍼짐한 코트 소매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는 궐련 끝에 불을 붙였다. 없다고 해놓고선 잘만 빨아댄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인 담배를 보는 그의 얼굴엔 열렬한 애정이 가득했다. 여자 없이는 살아가도 담배 없인 하루도 살아가지 못할 인간상이었다. 솔직히 그래보였다. 흐뭇하게 웃으며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남자. 내 시선은 그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천천히 밑으로 깔려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남자의 몸이 아래로 쑥 꺼진다. 쿠당탕! “으악!” 불현듯 여자가 외쳤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계단에서 내려가다 발 헛디뎌서 구르고! 그는 정말 여자의 말대로 발을 헛디뎌 계단을 굴러버린 것이다. 여자가 얼마나 한에 사무쳐서 저주를 걸었는지를 짐작케 해주었다. 이건 거의 언령 수준이지 않은가. 아무런 준비과정 없이 말만으로 일을 성사시켰으니 말이다. “하하, 이런! 담배가 부러졌군…….” 남자는 넉살좋게 웃으며 소매에서 새로운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부러진 담배를 아깝게 쳐다보다가 눈을 크게 뜨고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는 그. 듀얼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리라. 전 사람의 경기가 끝났다고 했으니. 나도 이렇게 멍청히 서 있다가 부전패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계단을 밟지 아니하고 통째로 뛰어 내려갔다. 현실이면서 현실이 아닌 곳이라 이런 터무니없는 일들도 가능한 것이다. 당연히 아파트 계단에서 이 짓 했다간 대번에 병원방문하게 되니 게임과 현실은 반드시 구분해두도록 하자. 나는 순식간에 1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 그가 이번 듀얼 차례라면…… 내 상대는 그 남자가 되는 거잖아? 왜 여태껏 생각해내질 못했을까? ---------------------------------------------------------------------------- 이번 챕터... 5화 내로 끝내버립니다!! “너였냐, 내 상대가? 이거 영광이로군. 우승후보와 자웅을 가릴 수 있다니 말이야. 한번쯤 싸워보고 싶었다고.” 난 썩 만나고 싶지는 않았어. 비무장에 오르는 날 보며 제니온이란 꼴초가 내뱉은 말이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초면부터 반말을 얼마나 해대는지 이젠 신물이 올라올 지경이다. 내가 만만하게 보여서 저러는 것일까, 아니면 어려 보여서 우선 하대부터 하고보는 것일까. 내가 약간 동안이기는 해도 말부터 까는 건 그리 좋지 못한 습관이데. 샤프때와 마찬가지로 잠깐 동안만 시선을 주다가 모른 체했다. 제니온은 별 반응도 없는 상대에게 저 혼자 호들갑을 떤 것이 뻘쭘하게 느껴지는지 제 머리만 긁어댔다. “어이. 그렇게 쌀쌀맞은 태도하지 말라고. 얼마나 근사한 듀얼을 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이런식으로 초를 치면 곤란해. 어쨌건 난 네 상ㆍ대잖은가.” 하아, 별 꼴 같지도 않는 꼴초자식이 상대 운운한다. 한 끼 식사. 아니 한 끼 식사가 뭐냐, 식후 디저트감도 안되는 녀석 따윈 인정해주고 싶지 않다. 샤프만큼이 되면 모를까. 나도 내 실력에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그에 걸맞은 유저가 아니면 거들떠보고 싶지 않다.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냐. 투정이라도 부리나?” 이어지는 제니온의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투정이라니. 나를 당신과 동급으로 격하시키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마음에 들어하던 사람이 반말해서 기분이 상한게 결코~ 아니니까. “글쎄? 과연 투정일까, 아닐까?” 비웃으며 설의하자 제니온의 눈언저리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능청스러운 웃음으로 받아 넘겼다. “아무래도 투정이 아닐까싶은데. 투정하는 이유를 물어도 될지?” “일일이 답해줄 의무는 없다고 보는데. 대답을 요구하는 저의가 뭔지 물어도 될지?” “이런 한방 먹었군. 꼬맹이가 상당해!” “나이 먹은 게 자랑은 아닐 텐데. 그만큼 땅에 묻힐 날이 가까워진다는 것을 단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니까. 나이 운운하며 밑 사람을 깔보는 언사는 그에 대한 위안이라 여겨도 될까? 더구나 머리는 비고 나이만 곧 처먹은 당신이 할 말이 아니라고는 생각 안 해봤지? 하긴, 제 행동을 반성해볼 머리도 없는 작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랐군. 담배 뺏겼다고 질질 짜는 인간에게 말이다.” 어깨를 으쓱이며 한심스럽다는 듯이 말하자, 그는 매사가 귀찮다는 얼굴로 귀를 후비다 탄성을 내질렀다. 계단에서도 생각했지만 신경전의 다단계 포인트를 알고 있는 그였다. “아? 무슨 말 했냐? 어디서 개가 짖던데. 넌 못 들었어?” 하지만 호박씨 까기는 극성으로 연마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표정관리가 이루어지질 않고 있었다. 신경전에서 언행일치는 필요불가결의 요소다. 막 걷기 시작한 주제에 하늘을 나는 이와 대적하려하다니, 학습이 부족하군. 좀 더 배우고 오너라. 호박씨 까기는 경지에 오른 나다. 잘한다고 자부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이거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숭을 떨며, 안면 근육을 씰룩이는 언밸런스한 모습을 한 제니온을 보고 실소했다. 말과 행동은 시큰둥했어도 제니온은 이미 동요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굼벵이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었다. 싸움판을 구르며 익힌 실전파 고수를 이기기엔 몇 년은 이르다. 이쪽세계는 나이보단 경험에서 우열이 결정되기에 무엇보다 얼마만큼이나 말발이 강하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역시 말발 10단 다크니스로군요! 지금까지의 패턴을 고수하며 상대방의 속을 긁어냅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반격하는 제니온 선수! 파이트가 외쳐지지도 않은 초반부터 치열한 신경전의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과연 이 듀얼의 끝은 어디일까요! 무력사태없는 평화종전이 이루어질 것인가! 그럼 시작합니다, 파이트(Fight)!” 나는 팔을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고 붕붕 휘두르며 침을 튀기는 사회자를 경이롭게 쳐다보았다. 사회자, 당신! 뭔가를 아는 것 같은데? “이봐, 사회자! 쓸데없는 말 말고 해설이나 제대로 해!” “킥! 왜 잘못 없는 사회자를 거들먹거리시나. 정확한 해설이구만 뭐가 불만이야?” “또 뉘 집 개가 짖네. 어제가 복날이었는데 용케 도망쳐 나왔군.” 킥킥 웃으며 비꼬자 전과 같은 방법으로 딴청을 부리는 제니온이다. 이쯤에서 저 수를 못 쓰게 해버리던가 해야지 안 되겠군.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을 살폈다. “응? 어느 쓰레기장 개~ 새끼가 지껄이나. 쓰레기를 처먹었는지 아가리한번 쌍스럽네.”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치명적인 반격에 제니온은 일약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같은 말이어도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한글의 특성상 쌍자음이 들어가는 어휘는 공격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왜, 외국인들도 다른 말은 못 알아들어도 욕만큼은 알아듣는다하지 않는가. 예는 차마 못 들겠으니 생략하고. 아무튼 이게 다 언어학적 근거를 토대로 나도는 말이다. 수업시간에 잠깐 배운 것을 이토록이나 뛰어나게 확장시키는 내 응용력엔 선생님들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놈이 죽여 달라고 고사를 치르는구나!’ 내지는 ‘깡이 대단한데?!’등의 말을 하면서. 이거 선생님 앞에서 자랑했다간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정학당할 우려가 있으니, 때와 장소는 반드시 가려야한다. “한 가지만, 묻자. 결코 악의가 아니니까, 오해는 마라. 너, 정말 몇 살이야?” 제니온은 기가막힌지 문장 중간을 끊어 말하며 질문을 해왔다. 나는 감흥 없이 대꾸했다. “347 곱하기 468, 나누기 12 해서 나온 수에서 9185를 뺀 수가 내 나이다.” 여기에 나온 수는 전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한 것들이다. 때문에 내가 뭔 수를 말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답이 뭔지 내 알바도 아니고. 진땅 고생해보라고 말했을 뿐이다. 내 바람대로 제니온은 골똘히 생각하는 것에 빠졌다. 훗! 풀면 천재라고 말해드리지. 수 초간 닫혀있던 그의 입이 이윽고 열렸다. 그의 이마엔 푸르스름한 힘줄이 불거져 있었다. -------------------------------------------------------------------- 캐릭터와의 대화. 류현 : 작가! 나 할 말 있어! 작가 : 오오, 류현 학생! 적극적이군요. 좋은 자세입니다. 류현 : (뭐 잘못먹었냐는 듯이 쳐다본다) 이놈이 생전에 안하던 공부를 다하더니 머리가 맛이갔나.. 아무튼 하나만 물을게. 결승전은 언제 치르게 되는 거냐? 지금 그게 제일 궁금해. 작가 : 훗, 어리석은 류현아, 내가 그걸 말해줄 거라 생각하는 거냐? 바랄걸 바래야지. 류현 : 그럼 지연누나와만이라도 빨리 만나게 해줘! 받아야할 게 있단 말이다! 작가 : 자식, 굶주렸구나? 류현 : ...굶주리게 만든 작자가 누군게 그딴 말을 해? 한류현! 18세! 혈기왕성한 나이의 청춘아! 이제 주체 할 수 없다 이거다! 작가 : (심히 궁금하다는 눈으로 쳐다봐준다) 뭘? 뭘 주체 못해? 류현 : .....애들은 몰라도 돼. 이때 갑자기 난입하는 세영. 세영 : 나한테 풀어도 상관없는데.. *대화가 점점 18금으로 흘러가기에 작가 임의대로 대담 종료. ??? : 죽어, 이 자식아! 어디서 웃흥한 것들을!! 작가 : (머리에 짱돌을 박은 채 쓰러진다) 사, 살려줘....! “4348살이 말이나 될법한 소리냐?!! 허우대는 말짱하게 생겨서는 속은 썩었잖아!” 기분 나쁘다며 미간을 구기는 제니온. 나는 다른 의미에서 눈을 찌푸렸다. 몇 초 만에 그걸 푼 거냐? 저거 순 괴물딱지였잖아? “그거 맞는 답이냐?” 내 진실을 요구하는 물음에 콧잔등까지 구겨대는 그다. 다림질해도 펴질 것 같지가 않다. “맞는 답이다!!” “야, 나도 내가 무슨 숫자를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풀었다는 걸 믿으라는 소리냐? 알고 보니 구라스킬을 레벨 텐까지 마스터하셨구만!” 찔러죽일 듯이 쏘아보자, 제니온의 얼굴이 한순간에 슥 펴지며 기가 차다는 표정이 되었다.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편리한 계산을 위해 계산기능이 추가된 지가 언젠데 그딴 망언을 내뱉는 것인지 모르겠다. 기억 상에는 베타테스트 때 패치 된 것으로 남아있으니…… 벌써 6년이 다되어가는군.” “…….” 음……. 그랬던가? 요즘 계산기 쓸 일이 있었어야지. 메뉴윈도우를 띄워 뒤적거리다보니 커뮤니티 메뉴에서 ‘계산기’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처박혀있고, 최근 몇 개월간 큰 거래는 하지 않아 암산으로 모든 것을 마쳤기에 사용하지 않은 것이었다. 마지막 사용일이 5개월도 더 전으로 적혀있었으니 잊는 것도 당연했다. 절대 내 기억력 탓이 아니라는 말이다. 약간 머쓱해졌지만, 저놈에게 사과하는 것은 내키지 않아 아예 배 째라는 식으로 고개를 빳빳이 치켜세웠다. “그래서 어쩌라고?” “정말 후안무치(厚顔無恥)가 따로 없군……. 너의 뻔뻔스러움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래, 그건 밥 한 끼 더 먹은 내가 이해하고 넘어가고. 그럼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나이가 몇이야?” 아니꼽게 쳐다보는 제니온에게 귀를 후비며 성의 없이 답해주었다. “내년이면 본격적으로 대학 준비해야하는 나이.” 그러자 가소롭다는 표정과, 뒤이어 경외심어린 얼굴이 되는 그. “젖살도 안 빠진 애송이잖아? 대체 어떤 식으로 그 짧은 인생을 살아왔기에 그 지경이 되었다니?” “훗! 내가 왕년에 입에 기름칠 좀 하고 살았지.” “걸레질이 아니고?” “사람을 뭐로 보고 그딴 망발을! 이래서 무식한 것들과는 상종하기 싫다니깐.” “너 엄청나게 어드밴쳐틱한 삶을 살았구나?” 그의 짧은 경탄에 우쭐해져서(이런 거에 우쭐해지냐) 잠깐 과거를 회고해보았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평정하여 골목대장, 중학교 때 패싸움에 몰려다니면서 애들 몇 잡은 적도 있었고, 에, 또……, 병원신세 져본 게 손가락 수를 넘어서는데다가……. “…….” 와, 나 용케 살아있었구나. “마음대로 생각해. 그럼 피차 이상의 대화는 시간낭비니 현재에 충실해지는 것이 어떨는지? 듀ㆍ얼 중이잖아? 이미 파이트는 외쳐졌고 유저들은 지루한 말싸움보단 박진감 있는 결투를 원하는 것 같은데.” 이쯤에서 대화를 끊어버리는 게 좋은 방편이었다. 그리고 곧장 섀도우 모션을 남모르게 캐스팅했다. 선수를 뺏어 뒤통수를 날려버려야지. 듀얼은 15분 리미트(Limit)이니, 신경전으로 시간을 허비하다 정작 듀얼 시간이 바듯해 무승부가 될 수도 있었다. 거기에다가 연장전이나 재경기를 취급하지 않는 듀얼 랠리일지니 무승부는 쌍방 탈락으로 직결되어버린다. 또한 누가 듀얼 내내 우위를 점했나에서 내려지는 판정승도 기대할 수 없었다. 기권, 장외, 게임오버 이 세경우만 철저하게 허용하는 대회가 듀얼 대회인 것이다(승자가 부정행위를 했다는 게 들통 나도, 패자가 진출하는 일도 없다). 제니온은 내 냉소에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안 그래도 너와는 결판을 내고 싶었으니까. 사설이 너무 길었던 것 같군.” “오호라, 갱생의 여지가 있는데? 그럼 박터지게 싸워보자고. 나도 네 머리가 박살나는 장면을 내심 기대하고 있는 중이니. 아, 그전에 한 가지 단언해두도록 하지.” 손가락 세 개를 펼치고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제니온의 안색이 대번에 어두워진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녹여버리는 뇌살적인 미소에 깊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뭐랄까, 딴 거 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삼분. 딱 삼분이 네가 비무장에 서있을 시간이다. 그 이후엔 관중석 신세나 져버려.” 내 진가야 대회 초장부터 들통났으니 이제 와서 숨겨봐야 쓸데없는 짓거리일 뿐이다. 가진바 모든 것을 동원해 찍소리도 못하도록 만들어주마. 물론 드래곤 슬레이어와 헬 스킬은 제외하고. 그거 썼다간 지금까지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게 되거든. 제니온은 긴장한 형색으로 쓰게 말했다.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가능하리라 보는가!?” 뭐, 큰소리치는 것은 허장성세이리라. 그는 크게 웃으며 일갈을 터트렸다. 그러나 조금도 위험해보이지 않았다. 단순한 허세일 뿐이다.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제니온은 아닌 척 내숭떠는 게 어수룩하다고. 마치 곧게 뻗은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서서 호기롭게 외쳐대는 것은 영 매치가 안 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런 건 무시해버리고, 검지손가락을 가볍게 흔들며 하트를 동반한 상큼한 윙크를 날려주었다. 즉시 제니온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때려주고 싶은 표정 따위는 짓지 말고……. 그럼 한번 시험해봐.” 부드러운 동작으로 발검하여, 지면과 수평되도록 비스듬하게 들었다. 그 뒤 교묘하게 검을 비틀자, 은빛 검신에 부딪혀 만들어진 하얀 반사광이 그의 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윽― 하고 신음하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제니온.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캐스팅 해두었던 섀도우 모션을 발동시켰다. 유니크(Unique) 섀도우 스킬(Shadow Skill) 레벨 파이브(Level Five) 섀도우 모션(Shadow Motion)!! 발 밑으로 검은 기류가 휘몰아치고 몸이 반뼘 정도 떠올랐다. 검을 왼손으로 옮겨 쥐고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 그리고 대기를 힘차게 박찼다. 섀도우 모션을 시전하면 발이 닿는 곳마다 고밀도로 대기가 압축된 뒤 떼는 즉시 폭발하는데, 이때 나오는 힘은 터지는 다이너마이트 하나와 비등하다. 때문에 몸체가 폭발력으로 엄청난 가속을 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이다. 물론 이는 직접적인 것이어서 시전자에게 조금의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폭탄 터지는 걸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간 기술 쓰자마자 하반신이 날아가버릴 테니가. 뭐, 시전자만 보호를 받는 것이어서 그의 뒤쪽에 있다간 곧장 고기조각이(되기 전에 빛으로 사라진다)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쩌엉―! 대기가 폭렬하며 육신이 튕겨졌다. 실로 벼락같은 속도라는 게 이것을 두고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지그재그로 허공을 밟으며 제니온의 코앞까지 접근했다. 그의 면면은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멀리서 볼 때는 그럭저럭 하다고 판단했는데 가까이서 보게 되니 반듯한 마스크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얼굴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더불어 검도 뽑지 않은 무방비의 상태. 나는 망설임 없이 제니온의 상판을 오른손으로 움켜쥐고 비무장 바닥에 강렬히 메다꽂았다. 콰과각! “욱!” 아, 의도하지 않은 힘이 들어가 버렸다. 그래도, 결코 악의가~ 아니었으니 신경 꺼야지. 그의 뒷골이 타일을 박살내고 깊숙하게 박혀 들어갔다. 폭발적인 기세로 메케한 먼지가 흐드러지며 무수한 돌조각이 튀어 오른다. 내게도 몇 개 날아왔지만, 그렇다할 타격은 없어 무시해버리고 동작을 이어 제니온의 머리 측면에 검을 꽂아 넣었다. 그의 왼쪽 볼에 가느다란 상흔이 그어졌다. “흥. 3초만에 죽은 목숨이군. 하지만 말한 게 있으니, 그 하찮은 목숨 2분 57초만 연명시켜주마.” 섀도우 모션을 해제하고 냉정학 말하자 신음하며 씹어뱉듯이 말하는 그. “으윽……. 비겁한 자식……! 야비한 수를 쓰다니!” “허접이나 할 소리인데, 그건. 이 바닥에선 흔히 일어나는 일이잖아. 그걸 걸고 넘어가려하냐. 실력으로 안 되니 그딴 소리나 지껄이지. 거기다 대회 규칙에 접촉되는 것도 아니니 꺼릴 것도 없어. “매너도 없는 자식…….” “어? 초면부터 반말 찍찍해대는 놈이 입에 담을 소리가 아니잖아. 흐음, 일단 열이나 식히고 와라.” 이를 가는 그에게 웃어주며 멱살을 쥐고 비무장 중앙으로 내팽개쳐주었다. 나에 의해 짐짝으로 전락한 제니온. 관중들이 폭소하며 열광한다. “으하하하! 통쾌하구나!” “화끈하다, 다크니스! 더 작살내버려!” “재수없는 면상 묵사발을 만들어줘라!” “덮쳐라!” “…….” 누구야, 방금 전에 외친 놈은? 내 취향은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사람을 뭐로 보고……. 처치해버리겠어! 수많은 환희 속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고함에 이마를 짓눌렀다. 골치아픈 인간들이 너무 많이 산재해있었다. 제 얼굴에 자신이 없으니까 작살내라고 하지. 나봐. 꿇릴게 없으니까 평정심이 유지되잖아(인간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비무장에 드러누워 먼지를 쓸던 제니온이 몸을 일으켰다. 힘에 겨운지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우선적으로 투영되었다. 등을 보인 상태여서 표정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일부러 기척을 크게 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허리에 양손을 얹으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두둑거리는 뼈의 마찰음을 토해는 제니온의 허리. 뿐만 아니라 팔이나 다리 등지에서도 시원한 비명을 질러대니 정도 이상의 타격을 받았음은 쉽게 알수 있었다. 제니온은 몸을 돌려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굉장한 일격이었어. 하마터면 스턴까지 갈 뻔했는걸. 짧은 시간에 급소공격을 하다니, 경탄을 금할 길이 없군. 아찔했어.” 제니온은 죽을 뻔한 고비에서 벗어난 사람답지 않게 생글거리며, 눈과 귀 사이의 들어간 부분을 검지로 가볍게 두드렸다. 확실히 엄지로 짓눌렀던 기억이 남아있기는 하다. 간단한 공격이라고 반드시 크리티컬 히트(Critical Hit)로 줘버리는 게 익숙해져서 말이다. 골이 울려서 몸을 가눌 수가 없을 텐데 저토록 태연한걸 보니 방어력은 좋은 모양이다. “비겁하다는 말은 취소하겠다. 열 받아서 한 말일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경황이 없어서 판단이 흐려졌거든. 기회를 살렸으니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지.” “너야말로 신경 쓰지 마. 개소리로 치부해버렸거든.” “그런가. 하하하! 카마인이 즐거워했을 만하겠어.” “카마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그 시간에 이길 방책이나 강구하는 게 어때? 말장난보단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 “이기고 지는 것은 연연하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것은 강자와 검을 섞는 것, 그뿐이다. 자, 그럼, 남은 시간 내에 나를 쓰러트릴 수 있을지 시험해주마. 그리고 받은 것은…….” 순간 그 주변의 대기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눈, 날카로운 기도. 제니온은 진지한 음성으로 맹세하듯 개구했다. “반드시 돌려주마.” 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어서 정작 두렵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실실 쪼개며 기지개를 쭈욱 폈다. 뭘 그런 수고를 해주려하나. “별로 받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내가 주면 몰라도. 이런걸면 마다하지 않고 펑펑 베풀어줄 선량도 있어.” “…….” 대답은 없었다. 만약 대답이라는 카테고리 내에 ‘행동’까지 포함된다면, 그가 사브르를 뽑아드는 것이 대답이 되겠지만. 어찌되었든 그도 필승의 각오를 다진 강렬한 눈빛이었기에, 안색을 굳히고 진지한 태도로 듀얼에 임했다. 이것이 검을 쓰는 사람으로서 해주는 최소한의 예의인 것이다. 제니온은 스킬을 캐스팅 중인지 미동하지 않았고, 나는 그의 실력을 가늠해보기 위해 별다른 방비를 해두지 않았다. 다만 시간 창을 띄워 시간을 재보았다. 아까 시간을 확인했을때 이후로 1분 50초가 지나 2분에 꾸준히 다가서고 있는 초수. 1분짜리 시한부 인생 제니온, 이라고 말하고 싶다. 대략 3초 동안 서 있은 후, 그가 곧추세운 사브르에서 백금색의 오러(Aura)가 솟구쳤다. 도검류(刀劍類) 사용 클래스라면 예외 없이 익히는 오러 블레이드(Aura Blade). 솟아난 오러는 1미터쯤의 완만하게 구부러진 사브르의 검신과 연결되어 반곡선형이었다. 오러 블레이드는 지속시간 리미트가 없고, 자의 혹은 시전자의 마나가 고갈될 때까지 해제 되지 않는 기술이어서 나도 별수 없이 시전해야했다. 예기가 보강되니 만큼 내 불쌍한 롱소드가 부서질 우려가 있는 탓이다. “간다.” 내 검에 선홍색 오러가 덧씌워지는 것을 확인하고 메마른 일성을 뱉어내는 제니온.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카운트 60초. 다섯 수 양보해줄 테니 전력투구하여 날 쓰러트려봐!” 타앗!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니온은 돌풍이 되어 휘몰아닥쳤다. 쏜살같이 짖쳐온 그는 말그대로 벼락같이 허벅지를 베어왔다. 내 스피드를 원천봉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타격점을 미리 예상하고 있는 내게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55초. 카앙! 경쾌한 쇳소리가 주변을 배회한다. 목 언저리에 허점이 드러난 그를 무의식중에 베어낼 뻔하다가 가까스로 멈춰 섰다. 제니온은 안광을 번뜩이며 곧장 팔을 비틀었고, 꼬리처럼 늘어지는 오러의 빛이 허공을 어지러이 수놓았다. 뒤로 몸을 빼는 것으로 가슴을 올려치는 오러 블레이드를 피해냈다. 하지만 오러가 씌워지며 검신의 길이가 1.2미터까지 늘어나 있었기에, 앞섶이 잘려나가는 것은 모면치 못했다. 샤프에게 당해 너덜너덜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이런식으로 가다간 대회 끝날 때 즈음되어 알몸으로 싸워야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일정 끝나거든 새로 하나 장만하던지 해야지, 원. 50초. 내가 뒤로 물러서자 사기충천된 제니온은 더 매서운 살초를 뿌려댔다. 치사하게 ‘거기’를 베어오는 걸 엉거주춤 막아내고 뒤로 핸드스프링 해 자리를 피했다. 파공성이 울리고 다리가 놓여있던 곳에 상애색의 반원이 그려지고 있었다. 두 번 더 핸드스프링하여 거리를 벌리고 이죽였다. “마지막 한번 남았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게 좋을 거야. 물론 스킬은 사양하지. 하이레벨이면 방어하기가 벅차거든.” 이 네 번의 수로 제니온의 실력은 확실하게 파악했다. 레인과 비교하여 레벨은 동급이나 실력은 그가 우월하나, 샤프와는 상당한 갭이 있었다. 그것인즉슨, 나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45초. 가볍게 손을 까닥이는 ‘Come on' 제스쳐를 취했다. 일종의 도발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제니온은 묵묵히 검을 악쥐고 차분히 심호흡했다. 강렬해지는 오러 빛……. “이중 오러인가.” 더블 오러 블레이드(Double Aura Blade). 오러 블레이드가 지속형이어서 가능한 기술이었다. 기존의 오러에 신규오러를 겹쳐 쓰는 것으로서, 익스퍼트 스킬 주제에 유니크급에 유박하는 위력을 내게하는 일종의 스프린터다. 그리고 이 스킬을 발견한 유저는……. 데스티니 블레이드, 그자였지. 나와 사투를 벌이던 당시 더블 캐스팅, 스킬 파워 업 등, 가지가지 해대던 데스티니 블레이드를 떠올려보고 싱겁게 웃었다. 그자식이 이것저것 잡다한 것은 많이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언젠가 어느 유저가 다중으로 오러를 깔면 더욱 강해지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제시했었다. 때문에 실험이 이루어졌는데, 이 실험에서 이중 오러 이상은 불가능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우선 마나소비가 굉장해서 비효율적이고, 그 지언에 아이템이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니크 아이템이라던 미스릴 검조차 무한 리페어 했음에도 채 5초를 못 버티고 바스러지는 판국에 소용될 리가 만무했다. 오러는 마나를 뭉쳐 형상화하는 것이다. 무형의 기운이 뭉쳐져 파괴력을 가질 정도이니 기압력은 얼마나 강하겠는가. 더불어 용적면이 늘어나면 모를까 같은 범위에 누적되니, 강해진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아이템이 파괴되는 것이다. 더블 오러도 좋은 위력만큼이나 무기에 부하를 주는 단점을 지닌 것이다. 40초. 한층 더 짙어져 핏빛을 띄는 오러에 둘러진 롱소르들 늘어트리며 여러군데 허점을 드러냈다. 이를 본 제니온의 만면에 얼핏 불안이 스쳤다. 내가 허점을 보이는 게 연막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번마저 공격에 실패하면 바로 반격 당할지도 모른다에서 기인한 초조함은 이해하는데……, 난 더욱 과감성있는 공겨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을 뿐이다. 오해는 좋지 않아. ‘오해는 오해를 싣고’도 몰라? 제니온은 인상을 쓰고 날 훑어보다가 마음을 굳힌 듯 직선으로 돌격해왔다. 나는 느릿한 동작으로 검을 들며 공격을 기다렸다. 35초. 금세 내 코앞까지 당도한 제니온은 허술한 찌르기를 시도해왔다. 파워, 스피드, 어빌리티 모든 면에서 하나를 충족되지 않고 공격의 의미조차 없는 단순한 찌르기였다. 이정도면 거의 자포자기 수준이었다. 나는 혀를 내둘렀다. 어리석은 자식. 마지막을 허망이 버리다니……. 슬쩍 피해서 재정비할 틈을 주지 않고 목을 베어버릴까 하다가 생각을 고쳤다. 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거라도 살려두자는 생각 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비웃음을 흘리며 검을 가볍게 맞대었다. 그러나 몰랐다. 이게 제니온이 노린 것이었다는 걸……. 검이 맞닿자 제니온의 눈에서 휘황한 빛이 폭사되며 위세가 급변했다. 내 검을 휘감으며 올라오는 그의 사브르. 핏빛과 금빛이 복잡하게 어우러지며 주황색의 빛 무리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금빛 오러가 내 머리를 향해 맹렬히 뻗어왔다. ----------------------------------------------------------------------------- 캐릭터와의 대화. 한류현 : 어이, 작가. 인간이 그렇게 살면 안돼. 작가 : 또 뭐가 불만이냐. 매일 태클만 걸어대. 한류현 : 인간아, 글을 쓰는 거냐 마는 거냐? 작가 : 당연히 쓰고야 있지. 한류현 : 그런데 글을 왜그리 안올려대? 작가 : (찔끔한다)내, 내가 좀 바빠서... 한류현 : 웃기네. 작가 : 나 새 컴퓨터 하나 장만했잖아. 그거 정리하느라 늦은거야. 그리고 전체적인 글 수정도 했고... 이것으로 4번째 전체수정이네. 한류현 : 그럴싸한 변명.... 확실하게 변명을 생각해뒀군, 작가! 작가 : 하하! 내가 좀 철저해! 한류현 : 집어치워라. 작가 : 아앗! 저기 유나다! 한류현 : (화들짝 놀란다) 어, 어디?! 작가 : 속았지롱~ 한류현 : 죽인다.... 이후 작가는 사망했다. 검이 맞닿자 제니온의 눈에선 형형한 빛이 폭사되고, 급변하는 기세. 내 검을 코일모양으로 휘감으며 올라오는 그의 사브르. 핏빛과 금빛이 복잡하게 어우러지며 주황색의 빛 무리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금빛 오러는 내 이마를 향해 흉흉한 기세로 맹렬히 뻗어왔다. 제법 머리 썼군…….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내가 방심해서 걸려든 것이니 이래저래 욕할 것이 못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렸다는 것에 화가 나는 것까지 참아내기엔 무리가 따랐다. 쓰게 욕지거리를 씹어 삼키며 온몸을 팽팽히 긴장시켰다. 사력을 다해 움직였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가하며 허리를 뒤로 꺾었다. 삐끗해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핏! 오른쪽 볼에 금광의 오러가 스치고 화끈한 통증이 밀려왔다. 뒤로 넘어져서 등짝에는 바닥으로부터의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전해져오고 있었다. “미, 미라클(Miracle)!” 아픔이 느껴진다는 것은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 볼에 느껴지는 통증이 이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었다. 제니온은 널브러져 있는 나를 향해 사정 볼 거 없이 검을 찍어 내리려했다.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굴렸다. 옆쪽에 검이 박혀 들어가는 장면이 눈에 걸렸다. 오러가 있어서 돌에 검이 박혀버린 것이다. 역시 대단한 오러……. “…….” 아, 지금 이런 시시콜콜한 감상을 내뱉을 만큼 한가로운 상황이 아니로군. 재차 등이 바닥과 접촉하자마자 제니온의 발을 걷어찼다. 발목에 묵직한 느낌이 걸리며 이어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넘어졌다는 것을 따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40초. 재빨리 일어나 검을 위시하여 제니온에게 달려들었다. 다행히 검을 놓치지 않아서 오러는 소멸되지 않은 상태였다. 제니온은 뒤로 한바퀴 굴러 일어섰고, 곧장 내 공격을 받아냈다. 나는 교차된 그의 사브르를 짓누르며 이를 드러냈다. “방금 전엔 섬뜩했다. 기분 더러워질 정도로.” “그거 잘된 일이로군. 그대로 죽어줬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밀리는 상황에서도 제니온은 여유로움을 보이며 빙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저것은 가식에 의한 것임을. 식은땀을 흘려가며 여유롭다고 해봤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 목숨은 꽤 질겨서 쉽사리 끊이지 않거든. 속된 말로 바퀴벌레 생명력이랄까? 아무튼 다섯 번의 기회는 끝났어. 각오해둬. 당한 것에 몇 갑절 더해서 갚아줄 테니까.” “사양하고 싶은데.” “네놈에게 선택권은 없어. 내가 하면 하는 거다. 너는 그저 당해주기만하면 돼.” 한번 검이 맞물리자 이후부터는 내가 주도하여 제니온을 내몰았다. 하마터면 같잖은 놈에게 죽을 뻔했다는 생각에 분노하여, 그를 향해 퍼부어지는 공격은 이제껏까지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나 열받았다, 라는 걸 그대로 표명하고 있었다. 제니온은 힘에 부치는 듯 희게 표백된 얼굴로 대책 없이 방어에만 급급했다. 가히 폭풍과도 견줄만한 공격이 몰아쳐대니 그의 수준으로 당해낼 재간이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이 상태가 얼마간 지속된다면, 제니온이 장외패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금빛과 핏빛의 무수한 곡선들이 꼬리를 남기며 춤을 췄다. 때로는 잔잔히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게, 때로는 광폭한 파도처럼 격렬하게. 35초. 난투극까지는 아니지만 빠른 속도로 빛무리가 뒤섞였다. 물론 현재 내 경우에선 손속을 둔 상태였다. 그가 간신히 방어할 정도로만. 때문에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그의 흰색 코트엔 베여터진 흔적들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더불어 얼굴에도. 말해두지만, 내 옷을 자른 것과 얼굴에 상처 낸 것에 화가나 이러는 게 결코 아니다. 공격하다보니 이런 형국이 일어난 것뿐이다. 원래가 나는 도량이 넓은 사람이다. “…….” 뭐, 완전히 복수하고픈 마음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고……. 30초. 짬을 내어 시간을 확인하니 그리 남아있지 않았다. 장난은 이쯤에서 접어야할 듯싶다. 쳇, 아직까지 받을 걸 흡족할 만큼 돌려주지 못했는데 말이다. 많이 아쉬웠으나, 이대로 듀얼을 지속한다는 것도 성가신 일이어서 오래 생각하지는 않았다. 약속한바, 시간을 충실하게 지켜줘야지 어쩌겠는가. 내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는 만큼, 남을 기다리게 한다는 것은 아니 될 말이었다. 제니온은 눈을 노려 시야를 어지럽히고, 즉시 진각을 밟으며 등 뒤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는 기겁하여 창황히 자리에서 벗어나려했다. 그러나 끝끝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제니온. “Freeze.” 입술을 비틀며 일성을 뱉어냈다. 내 오러는 제니온의 목 언저리를 약하게 파고든 상태였다. 이를 보고 오러를 하나 해제시켰다. 승기를 완벽하게 잡은 상태에서의 더블 오러 블레이드는 객쩍은 마나낭비일 뿐이었다. 오러빛이 선홍색으로 옅어지는 걸 확인하고 제니온에게 권고했다. “선택의 기회를 주마. 죽을래, 항복할래? 다른 의견은 수용하지 않겠어. 5초의 여유를 줄 테니 빨리 대답하도록 해. 그리고 5초 후에도 대답이 없으면 주저 없이 베어버릴 거니까, 빠른 대답이 신상에 이로울 거야.” 제니온은 이를 갈면서도 오러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생각은 그게 아니던지, 고개를 앞으로 한 채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곧장 회답해왔다. “항복!” 그러면서 사브르를 멀찌기 던져버리는데……. 이에 얼이 나가는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진심이냐?” “내 목숨가지고 장난칠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두말하면 잔소리다. 겪어봐서 아는데, 죽을 때 기분 더러워. 다시 살 수 있는 게임이라 한들 죽는 건 영 유쾌하지가 못하거든. 변태가 아니고서야 그걸 즐길 이유 따위는 없지. 따라서 항복이야.” 그리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의 현실적인 대답에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대기실에서 여자를 놀려대며 즐거워했던 걸 떠올리며 비웃었다. “흐흐…… 대신 여자 괴롭히길 좋아하는 변태자식이었지.” “무슨 근거……로 그딴 말을!!” 갈리는 목소리로 외치며 고개를 홱 돌리려던 그는, 아직까지도 건재한 오러를 인식하고 동작을 멈췄다. 자칫했으며 제 멱을 제가 따는 광경이 연출되었을 텐데…… 아깝다! 제니온이 강하게 부정하는 것을 한귀로 흘려버리며 손을 들어 사회자를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관중석 단상에서 내려온 사회자는 날 의아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월등히 우세한 형세에서 자신을 부른 게 이상하게 여겨지는 모양이다. 뭐, 기권은 항시 불리한 측에서 해왔으니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나는 턱짓으로 제니온을 가리켰다. “항복하겠답니다.” “…….” 사회자는 제니온을 멀거니 보다가 그의 앞에 서서 확인작업에 착수했다. “항복입니까?” “별 수 없잖아. 무슨 좋은 방안이라도 있으면 말해달라고, 잘나신 사회자나리.” 도전적으로 빈정거리는 제니온. 그런 반응도 이해가 되었다. 어쨌든 기권하는 자의 입장에선 기권이란 입맛이 쓰게 만드는데, 사회자가 더 쓴 사약까지 부어대니 욱 할만도 했다. 하지만 사회자도 제법 성깔이 있는지, 제니온을 가소롭다는 듯이 응시하며 지지 않고 대답했다. “군말 않고 죽으면 됩니다.” “…….” 깨끗하게 들어가는 크리티컬 히트. 사회자의 한판승이었다. 제니온은 힘 있는 말에 할말을 잃고 사회자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러기에 뭘 믿고 사회자한테 도전을 하냐? 좌우지간 사회자는 기권 확인을 하고 마이크를 굳게 잡았다. “제니온선수 기권, 다크니스 선수의 승리입니다! 과연 다크니스선수의 연승행보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에게 기대를 해봅니다!” 제니온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살기를 무마시키는 사회자다. 나는 옅은 미소를 그리며 제니온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그와 듀얼에서 마주칠 일은 다시는 없을 터다. 내게 작별인사를 받은 제니온은 사회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나를 노려보았다. 승자다운 넓은 도량으로 이해해주고, 양손의 중지만 슬쩍 펴주었다. 훗, 주제를 알아야 사는 게 편해지는 법이지. 시비 걸어봐야 득 될 거 하나도 없다고. “……아?” 너덜너덜한 코트를 펄럭이며 몸을 세차게 돌리는 제니온을 보다가, 문득 가슴이 저리는 느낌에 왼쪽 편 상공으로 주의를 돌렸다. 웬 축구공만한 잿빛 석괴(石塊, 돌덩이)가 무서운 서슬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것의 궤도 끝에는, 암울한 어두운 낯빛을 띠고 서있는 제니온이 있었다. 하나둘씩 유저들의 사이에서 비명이 터졌건만 정작 위험상황에 처해있는 제니온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눈치였다. 그저 유저들의 갑작스런 비명에 의아해하고 있을 뿐. 이후에 일어날 일은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되는 것이었다. 나는 머릿속에 잠시 뒤에 일어날 처참한 광경에, 고개를 저으며 허공을 가리켰다. “위에 조심―.” 경고해주려 했으나 말을 마칠 수는 없었다. 말하는 도중에 그의 머리가 수박 터지듯 박살나버렸기에! 콰득! 제니온의 머리를 터트린 석괴는 비무장바닥 깊숙이에 박히고서야 잠잠해졌다. 더불어 비처럼 쏟아지는 무수한 잔해들도 작은 광구로 변화해 스러져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니온의 머리를 이루고 있었던 것들이다. 그리고 머리의 통제를 잃고 쓰러져 서서히 사라져가는 육체. 그는 대관절 허무한 죽음을 맞이해버린 것이다. “하하…….” 나는 빛으로 사라져가는 제니온을 보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여자의 저주 아닌 저주로 인하여 터무니없는 최후를 맞이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비무장에 오르기 전에 들었던 관중들의 폭소소리는 그가 이유 없이 넘어져서 그런 게 아닐까? 계단에선 그래도 우연일거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허나 이제는 입증되었다, 일련의 사건들이 우연하게 일어난 게 아님을. 이제는 소름이 돋고 털이 곤두설 지경이었다. 나라고해서 제니온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당장이라도 원한을 사서 게임오버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제니온을 대체하여 비무장 바닥에 떨어져있는 석괴를 보다가, 간지러운 느낌에 그가 있던 대기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흠칫 몸을 떨었다. 제니온에게 저주를 내린 그 여자가…… 싸늘하게 미소하며 그가 죽은 자리를 쏘아보고 있었던 까닭이다. 나는 다짐했다. 앞으로 여자를 화나게 하는 일은 되도록 삼가겠다고……. ------------------------------------------------------------------------------- 캐릭터와의 대화. 한류현 : 어, 작가 오랜만. 작가 : 응, 너도 오랜만. 한은현 : 앗! 작가오빠 살아있었네? 죽은 줄 알았는데. 작가 : 오옷! 오늘은 은현이 특별 게스트인 거냐! 의욕충만이다! 한류현 : 가자. 저런 정신나간 인간 일일이 상대해주다간 바보바이러스가 옮을 수도 있어. 한은현 : 오빠! 너무해요! 그래도 불철주야로 뛰며 우리 이야기를 써주는 작가오빠잖아요! 고맙다는 말을 커녕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에요? 너무해! 작가 : (감동~ 감동~) 으흑.. 역시 너뿐이 없다, 은현아.. 내가 너라는 캐릭터를 가장 아끼는 거 알지? 한은현 : (팔을 벅벅 긁는다) 가요, 오빠. 역시 오빠 말은 틀리는 게 없어요. 한류현 : 거봐. 내가 바로 옆에서 저인간 봐온것만 몇년이야. 틀릴게 없지. 작가 : 쌍으로 나를 물먹여도 유분수지!! 제기랄 X놈들! 한류현 : 어이, 왜 X는 X로 표현을 하는데? 그거 남녀차별이다. 작가 : 너도 X를 X라고 말하네. 어이없는 자식. 한류현 : 이건 누군가의 농간이 틀림없어.. 작가 : 흠흠, 아무튼. 이제 내 컴퓨터에도 통신이 된다! 단 5일 동안 포맷과 컴퓨터 조립을 이렇게나 많이 하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류현 : 오, 축하해, 작가. 이제 그 재수없는 면상 날마나 보게될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억장이 무너져버리는군. 안보이던 날이 좋았는데. 유세영 : 나는 너무 보고 싶었는걸.. 작가 : 허억! 세영아! 사랑해! 아이러브유! 유세영 : (류현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래야 너와 만나는 이야기가 나올테니까... 작가 : (배신감에 치를 떤다) 너희 둘은 쫑이야! 쫑! 류현은 이제 혼자간다!! 유지연 : 미, 미워, 작가! 나와 류현을 갈라놓으려 하다니! 사라져버려! 작가 : (이젠 화를 낼 기력조차 없다) 끼리끼리 잘먹고 잘 살아라... 작가가 술독에 빠진 날, 이나 시행하련다.. 에휴, 내가 저 X놈들을 어떻게 먹여 살렸는데.. 흑흑~ 이 배신감, 이 좌절감.. 은현아! 수면제 왕창 가지고 와라!! 한은현 : (상표가 없는 통에서 하얀 알약 10개를 꼭 쥐어준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는 작가. 달라고 정말 주냐!) 여기. 작가 : (심각한 허무함에 약을 삼키고 비통하게 외친다) 한은현! 이 나쁜 계집애! 그리고 잠시 후. 작가는 졸음은 커녕 배가 뚫리려는 고통을 받는다. 작가 : 서, 설마 그 약은... 조성호 : 어? 그게 왜 은현이 너한테 가있냐? 그거 학진이 먹이려고 특별히 가져온 초강력 설사약인데. 작가 : (너무도 경악스러워 소리도 못지른다가 간신히 외친다) 한은현! 네가 그런식으로 내 뒤통수를 깔 줄이---- 으윽! 한계점 돌파! 외부로 나오려 하고 있습니다! 한류현 : 야! 애들데리고 튀어! 묻으면 삼년이 재수 옴붙는다!! 쿠르르릉----- 작가 : 크오오오오오오~~~~~~~ 글이 너무 더러워지고 있음으로 임의대로 대담 종료. 한류현 : 젠장! 묻었다!! ...... “에구, 삭신이야……. 갈수록 쑤시는 정도가 심해지는구만…….” 뼈마디마디에서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를 듣고 쓴웃음 지었다. 마운트고글은 벗어서 침대 맡에 내려놓았다. 오늘의 경기가 모두 끝난 뒤, 다짐한바 쇼핑까지 하고 로그아웃을 했더니 밖에는 어스름한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하늘 끝자락이 붉게 물들어 있는 걸 보니 완전하게 해가 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도 곧 있으면 어둠에 먹힐 터였다.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가뭇하던 사물들이 제 빛깔을 되찾아갔다. 은현은 지금도 엘-가드에 접속해있었다. 의료진인 연유로 운영진과 모여서 내일을 대비해 몇 가지 의논을 한 뒤 해산한다고 했다. 게다가 제 학교 친구들과 만났으니 밤새 놀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체력이 없는 유저들 치료하는 것 외엔 할 게 없어서 이틀간 쌓인 분이 많을 테니 말이다. 캄캄한 거실에도 불을 밝히고 뻐꾸기시계를 보았다. 7시가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짐작은 했지만 막상 확인을 하고나니 새삼 현실 시간의 흐름을 절감할 수 있었다. 대회전에는 열 시간을 플레이한들 현실에선 한 시간 지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리량으로 따지면 게임에서 보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지금도 게임접속시간이 길기는 해도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천양지차(天壤之差)다. 원래였다면 백 시간이 될 것이 열 시간으로 줄어버렸으니 새삼 현실과 가상세계간의 괴리를 느낀 것이다. 하품을 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밥상을 차리기 귀찮아 대충 토스트를 만들고 접시에 담아 거실 소파 깊숙이에 몸을 묻었다. 토스트 한 조각을 입에 물고 TV를 켰다. 대부분의 채널에서 오늘 듀얼의 주요장면을 방송하고 있었다. 하이라이트로 편집한 것이어서 금방 끝이 났지만, 게임이 사회의 일각을 차지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미르트에 의한 변화였으니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줘야 할까? 게임전문채널 GBS로 채널을 돌리고 두 번째 토스트를 입에 넣었다. 게임전문답게 듀얼 랠리를 집중적으로 방송하고 있었다. 시간상(앞서서는 듀얼 랠리 생중계방송이었다. 지금은 추려져서 방송되는 것이다) 많은 부분이 편집되기는 했어도 다른 채널만큼은 아니었다. 더해서 현지에서 풀타임으로 봤던 것들이었으니 궁금한 것도 없었다. 다만 더 재밌었던 듀얼이 편집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하릴없이 화면을 보다가 토스트가 떨어지자 TV를 끄고 일어났다. 띵― 동. 띵― 동. 접시를 주방에 가져다놓고 게임에 접속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현관에서 초인종이 두어 번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올 사람이 없을 텐데. 의아한 마음을 안고 현관에 다가서 중앙에 붙어있는 스크린을 들여다보았다. 화상에는 낯익은 남자가 코를 후비며 서있는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왜왔어?” 내 물음에 그는 반가운 기색으로 크게 미소했다. “야아~ 처남! 반갑―.” 철컥. “흐응, 흥~. 어서가서 엘-가드나 해야지~.” 망설임 없이 문을 잠가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흥얼거리며 방으로 향했다. 쾅쾅쾅! “농담이다, 농담! 문 좀 열어봐!” 세찬 노크소리에 힐끔 고개를 돌렸다. 현관문이 두드리는 소리에 맞춰 들썩이고 있었다. 저러다 문 부서지겠군……. 아무도 없는 척 무시하려다가 계속되는 부르짖음에 하는 수없이 재차 문을 열었다. 죽어라 문을 두드려대던 그는 넉살좋은 웃음을 흘렸다. 나는 용건을 감흥 없이 물었고, 그제야 시원스러운 웃음을 지우는 그. “빌어먹을. 두 번 농담하면 죽이려들겠는걸.” “지금도 그러니까 용건이나 말하고 사라져.” 차갑게 대꾸해주고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의 이름은 ‘신상우’로 옆집에 사는 형이다. 올해 23세가 되었음에도 변변찮은 직업을 가지지 못한 전형적인 백수였다. 매일 아주머니께 구박받으면서도 엘-가드 하기에 바빠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전형적인 게임폐인이기도 하고. 화청형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동격인 셈이다. 가끔가다 현 거래를 통해 돈냄새를 맡아가며 근근이 생을 연명하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였다. 고정수입도 아니고 언젠가 아이템도 바닥이 날 테니까. 상우 형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참에 지출이나 줄여볼 심산으로 듀얼 랠리에 참가했는데 첫날 나이트메어에 의해 좌절되어버렸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더니만 ‘장비’가 다름아닌 상우 형이었던 것이다. 나는 게임에서 보았던 적색 잔디머리를 떠올려보고, 바로 얌전하게 가라앉아있는 검정색 바가지머리를 응시했다. 역시나 이미지가 딴판이었다. 그러니까 첫째 날, 긴가민가하는 내게 은현이 메시지를 보내왔었다. ‘상우 오빠 아닌가요, 저 빨간 머리 유저?’ 녀석도 자신 없어 했지만 덕분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하게 생김새와 하는 짓이 딱 그였기 때문이다. 상우형이 쾌활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말이다. 그리고 상우 형도 용케 날 알아봐서 내가 다크니스임을 아는 상태였다. 그는 투덜거리다가 고개를 살짝 들어 내 뒤편 넘어다보았다. “이웃끼리 용건이 어딨어. 그냥 심심해서 놀러온 거다. 그나저나 은현이는 없냐?” 그냥 놀러오긴…… 개뿔이다! 그러는 인간이 은현이를 찾아? 나는 입을 히죽 찢으며 현관 맞은편에 보이는 욕실 문을 가리켰다. 문은 닫혀있다. “목욕하고 있어.” “뭐라, 목욕?! 그것도 좋지! 그럼 나도 목욕을 해볼까나?” 호기롭게 외치는 그의 앞을 막아서고 가늘게 째려보았다. “그러면서 왜 기어들어와?” “그야 너희 집에서 목욕하려고 그렇지. 아~ 미소녀와 살을 맞대고 하는 목욕이라……. 낙원이다!!” “…….”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인간이 돌았나? 미소녀와 살을 맞대고, 뭐? 콱 그냥!! “개소리 작작하는 게 신변에 좋을 거라 충고해주지.” “에이, 너무한다. 목욕한번 하는 거 가지고 뭐그리 인색하게 구냐. 좀생이 같으니라고.” 이상 말을 들어주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속만 긁어대는 두더지같은 인간과는 얼굴을 맞대기조차 싫다. 이제부터 형 대접, 이웃 대접은 꿈도 꾸지 마라. 오늘 이시간부로 댁과 나는 생판모르는 철저한 남이니까. 어디 가서 나 안다는 소리 꺼내지도 마! “어, 어? 사람을 밀어? 지금 날 축객하는 거냐? 감히 네가?” 내가 등을 떠밀자 그가 낮은 육성으로 뱉어낸 말이었다. 실로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감히, 라니? 여기가 누구집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꼴값 떨지 말고 할 짓 없으면 발 닦고 엘-가드나 해버려. 남의 집 앞에서 그만 꼬장부리고.” 굳은 얼굴로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자 간사한 얼굴이 되어 해실거리는 상우 형. 솟구치는 짜증에 인상을 쓰며 팔에 힘을 더 보태 그를 밀쳐냈다. 그리고 그때 뒤편에서……. “으아앙!” 이라는 요상한 신음이 들려왔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리였으므로 밀치던 나와 몸을 비틀던 상우 형은 단번에 굳어버렸다. 뭐, 뭐야, 이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절정에 치닿은 듯한 신음소리는?! 잠시 멍하게 서있던 상우 형은 뒤돌아서서 알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이해한다는 얼굴로, 이어서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며 소곤소곤 말한다. “그렇군……. 그래서 날 집안에 들이려하지 않은 것이었어……. 괜찮아, 괜찮아. 나도 네 나이 때에는 푹 심취했었으니까. 남자라는 생물이 다 그런 거 아니겠냐. 그래도 너무 많이 보지는 말아라. 중독 되면 골치 아파져. 그리고 말이다……. 그거 좋은, 거냐? 풀(Full)짜리에 고화질? 그러면 같이 보면서 심층적인 탐구를 해보자. 이 형님께서 지구력이 좋아지는 법에 대해 특별 무료 강연을 해주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좀 그만 지껄여!” “왜 말이 안돼? 텅 빈 집에서 여자 신음소리라니? 자연적으로 그것밖에 생각이 더 되냐! 그게 아니라면 은현이가 낸 소리겠어……?” 언성을 높이던 상우 형은 마지막에 가서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서로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던 우리 둘은, 반사적으로 집안으로 눈길을 던졌다. 나는 은현의 방으로, 상우 형은 닫혀있는 욕실 문으로. 정적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 캐릭터와의 대화. 한은현 : 오늘은 제가 오빠를 대신해서 나왔답니다. 앞으로 엘레멘탈 가드를 이끌어 갈 주인공이 되는 게 제 꿈이에요. 작가 : 하하! 내가 꼭 그렇게 만들어주마!! 한은현 : 하지만 오빠가 주인공이 되어야하기에 전 그 꿈을 포기할래요. 작가 : 아? 괜찮아 괜찮아. 그까짓 놈 내 손길 몇번이면 버려지는 캐릭터니깐. 자자, 그럼 내일부터 네가 이글의 주인공이다! 한류현 : 죽고싶은 거냐? 작가 : ....은현이가 대신 나왔는데 네가 왜 있어? 한류현 : 내가 꼭 저렇게 말하라고 시켰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했다 이거지? 정녕 단매에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작가 : ...하하! 농담이다, 농담! 두번 농담하면 죽이려 들겠구만! 이미 네가 주인공인데 널 죽이면 이 이야기도 끝나! 한은현 : 흑흑.. 전 진심이었는데.. 믿었는데... 작가오빠 미워!! 작가 : 어, 어헉!! 으, 은현아!! 내가 잘못했어! 돌아와!!! 내가 히로인으로 넣어줄--- 빠악!! 한류현 : 거기까지. 다시한번 글을 오염시키려하면 결판을 낸다. 히로인을 친동생으로 하는 정신나간 작가가 어딨어, 세상에? 작가 : 훗! 그것이야말로 남자의 로오~~ 망!! 할렘을 꿈꾸는 이로서 그정도는 우습다! 한류현 : 훗, 가소롭군. 만약 네 친여동생이 널 사랑한다해도 그런말이 나올까? (실제로 작가에겐 동생이 없습니다.) 작가 : ...근친은 취소하마... 너무 와닿는다.. 한류현 : 바로 그 자세지. 그건 그렇고.... 말 나온 김에 묻는데... 이글 진짜 히로인은 누구인 거냐? 히로인인 즉슨 주인공의 여자이니 궁금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고. 작가 : 훗, 네 충고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대답해주마. 히로인은... 한류현 : 히로인은? 작가 : 바로.... 한류현 : 바로? 작가 : (수줍은 듯 양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몸을 배배 꼬며,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바로 저예용, 류현사마~~ 한류현 :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농담...이겠지? 그게 사실이면 바로 살인 날 줄 알아라... 작가 : 훗, 나를 이미지화한 캐릭터를 넣어서 네 곁에 두면 그게 히로인이다. 음하하핫! 언제나와 같이 글이 이상하게 흐르고 있으므로 임의대로 대담 종료. 한류현 : 나 주인공 안해. .....하지마. “커, 컥!” 숨이 막히는지 가슴을 두드리는 상우 형. 그리고 벌게진 얼굴을 펑 터트리며 코밑으로 흘리는 두개의 혈선……. 쌍코피, 이려나? “…….” 대체 무슨 상상을 한거냐, 짐승 같은 인간아! 은현이는 왜 결부시켜가지고!! “꺼져!!” 터질 듯한 분노감에 이를 갈며 개 한 마리를 밖으로 쫒아내고 문을 잠갔다. 감히 누구 면전이라고 은현일 떠올리며 코피를 흘려? 살인 안낸 것이 대견스럽게 느껴진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이라고, 스스로 절제한 내 자신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남이 상상하는 것에까지 화를 내고프지는 않다. 무슨 상상을 한들 어쨌든 그건 개개인의 자유이니까. 나도 그와 다를 게 없는 놈 일진데, 상우 형에게 뭐라고 하는 것은 모순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겉으로 표현될 시엔 말이 틀려진다. 만약 상우 형이 음흉하게 웃거나 코피만 흘리지 않았더라면, 나도 조용히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보였다. 그것도 매우 직설적으로. 은현은 내 동생이고 나는 은현의 오빠다. 남이 은현에 대해 음탕한 태도를 보이는데, 가족 된 도리로서 어찌 참을 수가 있겠는가. 늘씬하게 두들기지 않은 것만 해도 많이 참아준 것이다. 쾅쾅쾅! 문이 재차 들썩였다. “야, 야! 미안! 미안해!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봐! 엘-가드 계정 만료되었는데 5만원이 부족해서 재등록을 못하고 있거든? 이번 주 내로 갚을 테니까 계전 살리게 5만원만 빌려주라! 어제 꼬드긴 여자와 오늘밤 11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이대로는 늦어버려! 제발 빌려줘!” 아하, 용건은 저것이었군. 하긴, 이유 없이 우리 집에 올 사람이 아니니까, 상우 형은. 저래보여도 허우대는 준수한 상우 형이다. 썩 잘생겼다고는 못하겠지만 호감 가는 용모를 가졌음에는 분명했다. 지워지지 않은 큰 웃음이, 그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호감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작업 성공률을 높여주는 그만의 매력 포인트이니 여자를 꼬드겼다는 말도 십분 이해되었다. 상우 형은 호쾌한 성격에서 우러나오는 여유로움의 대가다.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서두르지 않고 느긋함을 유지했었다. 헌데 지금은 안달복달하고 있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헌팅한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얘기일까? 뭐, 아무렴 어떠랴. 나와는 상관도 없는 일인 것을. 관여하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이라면 적극 협조할 마음도 있다만, 상우 형이 잘되는 꼴은 눈꼴 시려서 못 본다. 뿐만아니라 눈 밖에 난 그에게 돈을 빌려주고픈 마음도 없었다. “없어!” “야! 다 알고 왔어! 진짜 그러기냐?” 알긴 뭘 알아? “아씨! 정 급하면 일단 센 아르바이트라도 하던가!” “지금해서 8만원 주는 데가 어디 있다고!?” “왜 또 3만원이 추가되는데?” “어, 세보니까 2만원뿐이 없다. 오천원짜리 잘못 셌나봐!” 댁은 인간도 아냐. 기가막힌 대답에 현관문을 노려보다가 짜증 섞인 음색으로 소리 질렀다. “시체 닦아! 돈 궁할 때마다 잘하던 짓이었으면서. 일당 20~25만원이라며? 그거면 충분하겠네.” 이 말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쿵쾅거리는 소리가 문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진정으로 진력이 나버렸다. 그렇게 말했다고 이 밤중에 진짜로 가냐. 담력도 좋으시지. 발소리가 완연하게 사라지고, 나는 엘-가드에 접속하기 앞서 은현의 방에 들렀다. 집에서 나 외에 소리를 낼 사람이라고는 은현밖에 없으니까. 닫혀있는 문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주먹을 가볍게 쥐어다. 똑똑―. “들어와요, 오빠.” 문을 가볍게 노크하자 재깍 돌아오는 맑은 육성. 나인 줄 어떻게 알았을꼬? “…….” 어떻게 알긴? 집에 나하고 은현, 이렇게 둘뿐이 더 있어? 자신은 아니니 나라고 생각하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그나저나 은현이 녀석, 밤새 접속해있을 것처럼 말해놓고선 어째서 일어나 있는 거야? 궁금증을 품안에 안고 문을 열자 침대에 걸터앉아 기지개를 켜는 은현이 보였다. 옆에는 파워가 꺼진 마운트 고글이 놓여있었다. 은현은 나직한 신음을 하고 개운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응~. 누구랑 대화한 거예요? 들어보니 상우 오빠였던 것 같은데. 맞아요?” 나는 문 옆에 있는 책상 의자에 앉아 방을 죽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저분한 것을 싫어하는 녀석답게 방은 깨끗이 정리되어있었다. 뭐, 내 방도 은현이 매일 치워줘서 언제나 정돈이 되어있지만. “맞아.” “상우 오빠 말하는 게 다급하던데 무슨 대화를 한거에요?” “별거 아냐. 여자 만난답시고 돈 빌려달라고 하더라. 나도 모자라는데 줄 게 어디 있겠어? 간단하게 거절했지. 그건 그렇고 일찍 로그아웃 했네? 오랫동안 할 줄 알았는데.” 어렸을 적, 벚꽃이 흐드러지던 날 은현과 같이 찍은 사진이 들어있는 손바닥만한 액자를 들여다보았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찍은 사진이어서 색이 많이 바래있었다. 두장 인화하여 둘이 나눠가졌었는데, 지금 은현이 가지고 있는 사진은 본래 내 것이었다.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녀석의 것이 없어져 울고불고하기에 넘겨준 것이다. 부모님께서 선물한 테디 베어 인형 다음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은현의 보물이다. 은현도 내가 들고 있는 액자에 눈길을 주며 왼쪽 어깨에 흘러내린 티셔츠를 추슬렀다. 체구에 맞는 옷 놔두고 저런 것만 입어대는 은현이 통 이해되지 않는다. “저녁 먹고 8시에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전 식사를 거스르지 말아야 신체 리듬이 유지되거든요. 그래서 그러니 볶음밥 만들어줘요.” 듣자하니 어이없는 말에 액자를 내려놓고 은현을 흘겨보았다. “내가 식모냐?” “네!” “…….” 방긋 웃으며 즉각 말하는 당당한 대답은 내게서 할 말을 앗아갔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일어났다. 식모라고 못을 박는데 어쩌겠는가, 힘없는 내가 한 수 접고 들어가야지. 하지만 대가없이 하기엔 너무 억울해서 조건을 붙였다. “알았다, 알았어. 만들어주마. 그 대신 좀 있다 네 친구들 만날 때 나도 데려가. 안 그러면 나도 안 해줘.” 마침 심심하던 차에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성호들도 저녁식사를 하러 갔고, 나는 토스트를 먹음으로서 시간이 많이 남아버려 혼자 플레이할 상황에 처해있던 것이다. 그리고…… 요즘 은현과 그리 놀아주지 못했으니 이참에 같이 있어주는 것도 괜찮을 성 싶어. 녀석도 말은 안했지만 많이 섭섭해 하는 것 같고……. 은현은 밝게 미소하며 내 팔을 잡고 끌었다. “걱정 말아요. 이미 같이 간다고 말해뒀으니까요. 음, 오랜만에 오빠랑 놀 수 있겠네요. 그럼 빨리 식사하고 접속해요, 우리!” “…….” 벌써 말해뒀단다, 무서운 녀석……. 내가 이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는 것일까? 아무래도 나는 은현의 손바닥에서 놀고 있는 듯한데……. 주방으로 나와 은현의 도움을 받아(심부름 한번 했다) 볶음밥을 만들면서, 이제껏 묻지 못한 것을 은현에게 물었다. 뭐랄까, 묻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종류라서 돌려 말하기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혹시 말야, 은현아. 뭐냐, 그…… 가슴 깊이서부터 우러나오는……, 에 또, 즐겁기도 한 듯한…….” 머뭇머뭇 늘어지는 질문에 은현은 답답하다는 얼굴로 퉁명스레 말했다. “나도 다 아는 나이니까 돌려말하지 않아도 되요. 쾌감 섞인 신음소리 말하는 거죠? 내가 낸 소리 맞아요. 기지개를 켜다가 너무 시원해서 나온 거거든요. 오빠가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머니까 그만해요. 나도 부끄러우니까…….” 은현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다 아는 나이라고는 했지만, 제 입으로 말하기엔 부끄러운 것이 인지상정이니 무리도 아니었다. 나도 딱히 대답할 거리를 못 찾아 멋쩍게 프라이팬만 들볶았다. 그렇게 구수한 냄새와 타는 소리만이 나는 와중에, 은현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궁금한 게 있어요. 풀짜리에 고화질은 뭘 뜻하는 거예요? 그리고 중독 되면 골치 아파진다뇨?” “…….” 나는 못들은 척 입을 굳게 닫고 침묵했다. 다 아는 나이라며? ------------------------------------------------------------------------------- 캐릭터와의 대화. 진유나 : 안녕하세요, 여러분. 유나라고 해요. 작가 : (깜짝 놀란다) 아, 아닛? 넌 죽은 걸로 되있잖아! 어떻게 나온 거야?! 진유나 : 아... 류현과 만나고 싶어서요... 음... 작가님 설정에 따르면 사랑과 영혼, 이 될까요? 작가 : 마, 맙소사.. 이제는 유령에게까지 손을 뻗는 류현이란 말인가!! 진유나 : (희미하게 웃는다) 그런가요? 흠, 류현이는 어디있어요? 작가 : 그, 그런 녀석 모른다! 나에게 오면 널 당장 살려주지!! 진유나 : (음흉하게 웃는 작가를 보며 몸을 사린다) 시, 싫어요... 그런 거 싫어요... 작가 : (너무도 여린 모습에 몹쓸짓을 했음을 자각하고 낙루한다) 흐, 흐윽! 미안하다, 유나야!! 네가 히로인인 것을!! 한류현 : (무대 뒤에 숨어있다가 나타나면서) 딱걸렸다, 작가. 훗, 유나가 히로인이라 이거지? 좋아 좋아.. 그런데.. 무슨 수로 내가 유나와 만나? 작가 경악했다가 옷차림을 바꿔입는 은현을 보고 할 말을 잃는다. 작가 : 이, 이런 얍삽한 자식! 저런 걸로 날 속이다니!! 한류현 : 머리가 좋다고 해줘. 그럼 말해봐. 무슨 수로 마나게 해줄건데? 작가 : 이익! 말해줄 거라 생각하는 거냐?! 그건 소설 기밀이다!! 한류현 : 쩝,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그럼 다음번에는 그것도 파헤쳐주지. 작가 : 다시는 안 당해!! 한류현 : 댁은 당하게 되어 있어. 하도 멍청해서. 작가 : 훗! 네놈보다얀 똑똑하다고 자부한다!! 한류현 : 그런 인간이 내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지. 김태진만도 못한 인간... 작가 : 허, 허헉! 그런 최악의 욕을....!! 살기 싫다!! 작가 충격먹고 자살함. 듀얼 랠리 마지막 날 4강전 첫 듀얼. 전체 8강전의 테이프를 내가 제일 먼저 끊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다크니스씨. 기량이 대단하시던데……. 좀 봐주면서 해줘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활기차게 말하며 윙크를 보내는 20대 중반의 여성을 무뚝뚝한 태도로 쳐다보았다. 뭐랄까, 대회 내내 평대어만 듣다가 처음으로 경어를 들으니 어쩐지 거부감이 느껴졌다. 더불어 애교 섞인 콧소리도 거부감을 느끼는데 일조하고. 닭살 돋게 뭐하는 짓이야? 여성의 이름은 팬텀 스트라이커(Phantom Striker), 류미엘. 370레벨의 유명한 트리플 마스터로서, 클래스 스트라이커의 활쟁이다. 류미엘이 쓰는 석궁(石弓)의 코드네임은 그녀의 외호에 사용된 팬텀 스트라이커. 따로 손에 들고 할 필요 없이 팔등에 장비하고 손바닥으로 이어진 레버만 당기면 화살이 발사되는 형식의 유니크 아이템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유니크라고 할 수 있겠는가? 팬텀 스트라이커는 화살이 필요 없는 것이다. 마나의 화살, 증 사용자의 마나가 화살로 만들어져 사용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형상화된 화살이 흰색 반투명하여 잘 보이지가 않는다는 것은, 팬텀 스트라이커 최고의 메리트로 작용한다. 그러나 좋은 것은 그만큼의 단점도 있기 마련(엘리트 아이템은 별다른 단점은 없으나, 굳이 따진다면 주인을 성가시게 만든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뭐니뭐니해도 엘리트이니 유저들이 서로 가지려고 혈안이 되어있기에). 마나 애로우 하나를 만드는데 소비되는 마나가 상당했다. 때문에 팬텀 스트라이커를 지닌 유저는, 반드시 다른 활을 주력으로 사용한다. 보통은 통상의 정석 궁을 사용하다 비상시에만 그것을 쓰는 것이다(팬텀 스트라이커는 활대가 안으로 접혀져 휴대가 간편하다).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은주에게 왜 많이 사용하지 않느냐고 물었다가 들은 대답이니 확실하다. 그런데도 초반부터 사용할 들다니……. 작정을 하셨군. “어머? 그런 뜨거운 눈길은 싫어요. 아무리 제가 미인이고 매력적이라지만 여기는 공석이잖아요? 다크니스씨가 원하는 것은 해드리지 못한답니다.” 내 빤한 시선에 양 볼을 감싸고 도리질치는 류미엘. 착각은 자유라지만…… 저 정도면 가히 망상이다. 그것도 속히 통원치료가 필요한 중증의. 나는 피식 웃고 그녀를 비꼬았다. “절 우습게보시는군요. 전 생기다만 여자는 취급하지 않습니다만? 자신에 대한 자각 좀 하시길.” 아, 말은 했지만 좀 어폐가 있다. 류미엘이 생기다만 외모라면 미인 소리듣기 위해선 어떤 생김새여야만 하는 거야? “생기다 말았다니요? 저 같은 미녀도 드물어요.” 썩 드물지는 않을 듯한 외모인데……. 그나저나 속도 좋군. 비꼰답시고 여자들이 민감해할 부분을 건드렸는데 저리도 태연하다니 말이야. 내가 작게 감탄하는 와중에도 류미엘의 말은 이어졌다. “취향이 특이하신건가요, 눈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건가요? 아니면 동성에게만 호감을 느끼는 것?” 그녀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역 도발을 해왔다. 그러나 시시콜콜한 것에 당할 나도 아니다. “글쎄요. 제게는 그쪽보다 아름다운 여성이 있거든요. 그러니 당신이 눈에 찰 턱이 없죠.” “……그 여성이 누군데요?” 류미엘의 얼굴빛이 약간 어두워졌다. 역시 반응하는군. 하긴 무리도 아니지. 남과 비교당해 격하되는 것 만한 비참함도 없으니까. 나는 생각하듯 눈을 감고 열정적으로 대답했다. 이쯤에서 저 아가씨의 콧대를 꺾어놓은 심산이었다. “고귀하고 우아하고 순수하며, 남을 헐뜯지 않고 모든 일에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빛깔이 지지 않는 녹보석 같이 청아한 여성입니다. 당신이 비친 거울 반대편을 보는 듯하군요. 자, 그럼 대화는 이쯤에서 접고 슬슬 본격적인 듀얼에 임하도록 하죠.” 제 눈에 안경이라 해도 류미엘을 지연누나와 비할 수는 없었다. 암, 물론이고말고. 저 여자와 비교하는 자체가 지연누나에겐 욕인 게다. 한순간에 잡스러운 여자 취급당한 류미엘은 욱한 얼굴에서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했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비웃음을 그녀에게 퍼부었다. 어차피 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한 여자, 욕을 먹든 칭찬을 듣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조, 좋아요. 사설이 흑, 길었던 것 가, 같아요, 흑…….” “…….” 류미엘은 울 듯한 얼굴을 하고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울먹이면서 표독스럽게 노려보는데……. 별것도 아닌데 그렇게나 서러운가? 본 것과는 달리 상당히 여린 성격이로군. 재미있는 여자, 가 그녀에 대한 내 감상이었다. 류미엘의 가는 손가락이 팬텀 스트라이커의 활대 중앙에 있는 버튼을 누른다. 철컥하는 음향과 함께 접혀있던 활대가 펴지고 그것을 내게 겨누는 류미엘. 그리고 예고도 없이 당기는 레버. 선수필승, 이라는 것인가? 좋은 자세다. 큐웅―. 대기를 관통하며 귀를 간질이는 기묘한 소리를 이끌고 미간으로 쇄도해오는 마나 애로우를 직시했다. 언뜻 보면 깨져서 만들어진 날카로운 유리파편 같은 형상이었다. 투명하고, 피를 보고 싶어 하는 살의가 담긴 것이. 그래봐야 별 볼일은 없다. 남들은 몰라도 심안(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끼게 하는 절대감각이니 틀린 말이 아니다)을 가진 내게는, 당하는 게 오히려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위력도 실리지 않고 잘 보이지 않는 것 외에 특별한 것이 없는, 그저 보통 수준에 불과한 화살에 맞아 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내겐. 멋모르고 이것에 당해왔던 유저들만 불쌍한 따름이지. 피할까 하다가, 이왕 4강까지 온 거 확실하게 하자는 취지에서 검으로 화살의 샤프트(Shaft : 화살대. 화살의 중간부분)를 올려쳤다. ---------------------------------------------------------------------- 몰래 올리는 글. 잡담 없음. 그럼 안녕히주무세요 류미엘의 가는 손가락이 팬텀 스트라이커의 활대 중앙에 있는 버튼을 누른다. 철컥하는 음향과 함께 접혀있던 활대가 펴지고 그것을 내게 겨누며 예고 없이 당기는 레버. 선수필승, 이라는 것인가? 좋은 자세다. 큐웅―. 대기를 관통하며 귀를 간질이는 기묘한 소리를 이끌고 미간으로 쇄도해오는 팬텀 애로우를 직시했다. 언뜻 보면 깨져서 만들어진 날카로운 유리파편 같은 형상이었다. 투명하고, 피를 보고 싶어 하는 살의가 담긴 것이. 별 볼일은 없군……. 남들은 몰라도 심안(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끼게 하는 절대감각이니 틀린 말이 아니다)을 가진 내게는, 당하는 게 오히려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위력도 실리지 않고 잘 보이지 않는 것 외에 특별한 것이 없는, 그저 보통 수준에 불과한 화살에 맞아 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내겐. 멋모르고 이것에 당해왔던 유저들만 불쌍한 따름이지. 피할까 하다가, 이왕 4강까지 온 거 확실하게 하자는 취지에서 검으로 화살의 샤프트(Shaft : 화살대. 화살의 중간부분)를 올려쳤다. 마치 눈 녹듯 대기 중으로 스며들며 소멸되는 마나 애로우.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을 훔쳐내고 자신만만해하던 류미엘의 면면이, 멍한 표정으로 탈바꿈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기습적이고, 또한 자신하던 공격이 손쉽게 막혀버렸으니까. 하지만 우연이라고 미루어 예상했는지, 설마하는 얼굴로 재차 투명한 화살들을 날려대는 그녀. 하나, 둘, 셋, 넷……. 일곱 개로군. “흥.” 비웃듯 코웃음을 치고 지척까지 날아온 팬텀 애로우들을 동시에 소멸시켰다. 이제는 류미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어, 어떻게?” “대답할 의무는 없군요.” “너무하시네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인데……. 말하면 입이라도 닳나요?” “그럴 것 같은데요.” 냉큼 답해주자 그녀는 대답 듣는 것을 포기한 듯 어깨를 늘어트리며 한숨쉬었다. 굳었던 얼굴도 부드럽게 펴져 있었다. “네네, 알겠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남자네요, 다크니스씨는. 분위기 쇄신이나 해보려 했더니 기회를 안줘.” “이봐요. 실컷 공격해놓고 분위기 쇄신이라니? 내가 그냥 넘어가주기를 바라는 겁니까? 저얼대~ 그렇게는 안 돼지. 반드시 제게 날아온 화살 수만큼 돌려드리겠습니다.” 이를 드러내며 조금 웃어주고 표정을 지웠다. 흠칫하여 활의 레버를 굳게 쥐는 류미엘. 나는 그녀를 무심히 쳐다보다가 어느 순간 몸을 날렸다. 블링크(Blink)에 버금가는 섀도우 모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25미터쯤은 자력만으로도 단시간 돌파가 가능했다. 이게 전부 높은 스테이터스의 산물. 큐규귱―. 류미엘이 공포에 젖어 화살을 미친 듯이 날려댔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제대로 조준된 것이 없었다. 무분별하게 쏘고 있는 것이다. 정면이나 근처로 날아오는 것들만 막아내고 나머지는 없는 셈 치며 계속해서 달렸다. 어차피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다 결계에 막혀 소멸될 것들, 굳이 신경 써서 피곤해질 필요가 있을까? 삽시간에 류미엘에게 파고들어 그녀의 옆구리에 팔꿈치를 꽂았다. 둔중한 격타음이 터진다. 그리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류미엘의 몸이 공중을 배회하다 바닥을 쓸었다. 손맛이 느껴지는 확실하게 들어간 클린 히트(Clean Hit)였으니 당분간 숨쉬기가 거북할 것이다. 덧붙여 시야가 흐려지고 움직임도 둔해지는 효과도 있을 터. 잠깐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호재였다. 고통이 그득한 얼굴을 한 채 신음하며 몸을 일으키는 류미엘. 나는 재차 달려들었다. 이번엔 박투가 아닌 진검. 힘겨운 모습으로 반쯤 일어나 숨을 몰아쉬는 류미엘을 가차 없이 베었다. 망설여봐야 내게 득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류미엘은 이를 악물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가 그길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재킷의 앞섶만이 베여 속에 껴입은 검은색 타이즈의 일부가 비치고 있었다. 검이 조금만 더 들어갔다면 좋은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시선으로 찢긴 부분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당혹하게 가슴을 가리고 웅크리는 류미엘을 보고서 잡념을 지웠다. 하지만 도무지 싸울 맛이 나지를 않는다. 저래서야 너무 쉽잖아. “…….” 아니, 어쩌면……. 검을 회수하고 빈 ‘왼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항복하라고 해서 쉽게 할 여자가 아닌 듯싶으니까……. “승산이 없어 보이는데 그만 항복하는 게 어떨는지요?” 싱글벙글하며 권하자, 류미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멍하게 응시한다. “신사적, 이시네요. 너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것 같지만. 적에게 주는 배려라니?” 고개를 갸웃하는 류미엘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해주었다. 훗, 날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오늘 이 시간에 처음 만난 것이니 당연한 이치인가? 그래도 뭐, 나도 생각은 하고 사는 사람이어서 말이지. 그녀는 수줍게 미소하며 손을 마주잡았다. 그 미소는, 스크린으로 본다면 누구든 부끄러워하는 것이라고 착각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나 나는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순간 류미엘의 얼굴에 드러난 뱀의 기질을…….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내숭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방심하게 만들어 일격을 날리려 했을 테지. 순진한 척 살살 눈웃음치면서 말이야. 류미엘은 손을 잡자마자 내게 팬텀스트라이커를 겨누었다. 허나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지라 반응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활이 장비된 오른팔의 손목을 잡고 비틀며 위로 치켜 올렸다. 희끄무레한 형상의 팬텀 애로우는 방향이 수정되어 하늘 속으로 쏘아졌다. 이로서 류미엘의 본성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내가 구태여 왼손을 내민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일부러 약한 척을 하는 것 같아 보이기에, 행여나 그런 것은 아닐까 알아보자는 취지에서 시행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팬텀 스트라이커가 장착된 오른팔이 전제되어야했다. 오른손을 내민다면 류미엘이 공격하기를 꺼려하게 될 테니까. 속내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한 행동이니 반드시 왼손이어야만 했다. 나는 히죽거리며 류미엘더러 들으라고 말했다. “말했다시피 난 당신 같은 여자에겐 관심 없거든.” 내게 양 손이 잡힌 류미엘은 독기가 가득 담긴 가시 돋친 시선으로 날 노려보다가 쓰게 묻는다. “……유도한 건가요?” “유도한 거지요, 뱀 아가씨.” 빙긋 웃어주자, 이 뱀 아가씨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내 손을 뿌리치려고 팔을 비틀었다가 결국엔 체념하여 어깨를 늘어트리는 류미엘. 내게 힘으로 도전하는 것이 멍청한 짓이었다. 검사인 나와 활쟁이인 류미엘의 힘이 똑같을 리가 만무했다. 아처계통은 힘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아 다른 스테이터스만(특히 AGI, DEX, LUK) 집중적으로 교정되니 말이다. 류미엘은 교활하게 교태한 눈웃음을 지으며 살살 꼬리를 쳐왔다. “이건 진심이거든요? 다크니스씨가 마음에 드는데……. 어때요, 나와 놀아보는 것은? 여자로서 최고의 서비스를 해드릴 수 있는데요.” 색기가 넘치시는구만. 바짝붙어 색적으로 숨을 헐떡이는 류미엘에게, 홀린 것처럼 헤벌쭉한 미소를 보내며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천국을 보게 해줄게요, 다크니스씨.” 귓불을 깨물고 볼을 가볍게 핥는 류미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놀라서인지 류미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더불어 등 뒤로 솟는 은색 기둥. “난 지옥을 보여드리지. 교활한 여자는 사절이야.” 심장에 검을 박아 넣어주고 무릎으로 복부를 가격해 멀찍이 날려 보냈다. 뱀 아가씨의 육신이 붕 떴다가 바닥에 틀어박힘과 동시에 빛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그리고 덩그러니 남는 롱소드 한 자루. 묵묵히 걸어가 검을 회수했다. 승리를 알리는 격양된 듯한 사회자의 외침과, 잇따르는 관중들의 함성이 귀를 찔렀다. 나는 손을 들었다 내리는 것으로 무덤덤하게 인사해주고 비무장을 내려오다가, 문득 지연누나들이 앉아있는 곳에 시선이 닿게 되었다. 신이 나서 떠들고 있는 찬석과 은주, 학진. 뭐 씹은 얼굴로 앉아있는 화청 형과 성호, 태진. 자랑스러움과 따뜻함이 깃든 눈길을 보내주는 미연누나와 지연누나.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 위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세영.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마음도 변해.’ 만약…… 내가 8강전에서 세영과 싸우게 되었다면 류미엘에게 했던 것처럼 독하게 대할 수 있을까? 어쩌면 세영은 그것을 알고 날 배려해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8강전 3번째 듀얼. -기권하겠습니다. 내 앞에 선 세영으로부터 나온 일성이었다. 이 한마디의 파급은 대단했다. 콜로세움 전체가 크게 술렁였고, 심지어 사회자까지도 믿지 못하겠다는 형색으로 몇 번을 확인해보고 권고했다. 결승전을 목전에 두고 기권하는 거은 듀얼 랠리 역사상 미증유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영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나도 매한가지였다. 내가 했던 16강에서의 기권은 합당한 이유가 있기라도 했지만(세 번째 날에 기권한 것은 내가 최초였다), 8강까지 들어놓고 기권하는 세영은 대체 뭐란 말인가? -기권하겠습니다. 세영은 머뭇거리는 사회자를 재촉하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녀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처럼 보였다. 기권에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어쩐지 무시당하는 것 같아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처음 인사할 때 이후로 단 한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는 세영이었기 때문에. -유세영. 내 부름에, 그녀는 그제야 나와 눈을 마주했다. -어째서 기권 따위를? 나를 무시하는 거냐? -그렇게 보였다면 미안. 단지 너와 검을 맞대기 싫었을 뿐 별다른 의미는 없어. 나는 세영에게 다가가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예전 첫 만남 때의 그녀의 태도와 대사가 떠올랐다. -다음번엔 전력투구하겠다고 말한 걸로 기억하는데. 세영은 침묵한 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심하게도 보이는 미안(美顔)이었지만, 어쩐지 그 무표정에서 서글픔이 엿보였던 것은 왜일까? 착시였을까?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마음도 변해. 그 길로 그녀는 빙글 몸을 돌려 비무장을 내려갔다. 그래…… 세영은 그렇게 말했고, 나는 대답하지 못한 채로 멀어지는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 현재 연재중인 곳. http://Ujoa.com http://www.bookbox21.com http://3dragon.net 링크 주소 : http://3dragon.net/ezboard/ezboard.cgi?db=k070 (링크시 어디에서 링크해가는지 밝혀주세요. 그리고 펌은 금지합니다.) --------------------------------------------------------------------------- 오랜만에 올리는 글. 하아, 어제 하루 꿀꿀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오늘도 마찬가지.. 학교 보충 땡땡이 치고 집으로 돌아와 GTA3 바이스시티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했으나 실패.. 민간인들만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며 광소를 하는 등의 미친짓을 서슴없이 시행함. MSN으로 요도님과 이야기하면서 기분이 풀림. 집필 시작. 날림. 글발 하나도 안받음. 3시간동안 쓴 분량이 달랑 저것. 나가 죽어야지.. 글쓰는 속도가 왜이리 느려졌을까나... --------------------------------------------------------------------------- 캐릭터와의 대화. 작가 : 억지로 활기찬 하루가 되어보자! 김태진 : 그러던지. 작가 : 어헉?! 네가 왜 나와?! 김태진 : 왜긴, 한번 나와보고 싶어서 나왔지. 작가 : 너, 넌 사절이야, 자식아!! 김태진 : 내가 본편 주인공이잖아. 작가 : 누구마음대로?! 김태진 : 모두~ 다~ 내 마음대로~ 이 세상은 나의 것~ 이 세상의 모든 여자는 나를 연모하지~ 잘난 놈은 너무 힘들다네~ 한류현 : (태진의 뒷덜미를 잡고 절벽 아래에 던져버린다. 그런데 절벽은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그건.. 모종의 협약이 있었음을 알아두자) 쓰레기 뭉치가 있었군. 깨끗하게 처리했어, 작가. 작가 : (흐뭇한 표정으로) 간만에 좋은 짓 한번 했구나. 잘했어, 라이코스~! 한류현 : 즐. 작가 : 허헉! 그, 그런 고단수의 반격을?! 한류현 : 햏.... 작가 : ...너 대체... 나없는 동안 뭘 배우고 온거야? 한류현 : 첩첩산중의 뚫훍 산에서 자농으로 얻은 오이 3개를 깎으며 뷁을 익혔도다... 나 득햏하고 돌아왔어. 작가 : 차라리 김태진을 불러오리... 한류현 : 대략 정신이 멍해지시오? 작가 할말을 잃고 절벽 아래로 투신. 작가 : 이 소설의 종착점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니가 알리 내가 알리? “고대하고 또 고대해 마지않던 결전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미리 보는 최종결승전이라는 말이 나돌 만큼 수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아스가르드(Asgard) 콜로세움의 결승전! 이미 콜로세움 안은 초― 만원! 여느 때보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집니다! 과연 승리의 여신은 누구에게 입맞춰줄 것인가? 최종결승전, 그 명예의 진출권을 두고―, 파이트!!” 사회자의 흥분된 외침. 나와 샤프는 천천히 검을 빼들었다. 샤프는 예전처럼 쌍수검(雙手劍)이었고, 나는 롱 소드 한 자루만을 들었다. 그리고 힐트(Hilt : 손잡이)를 잡고 빙글빙글 돌리는 기예를 선보였다. 샤프가 의아스럽게 물어온다. “어째서 검을 하나만 드는 겐가?” “하나로도 충분하니까.” 무시성 짙은 발언에 샤프의 콧잔등이 구겨졌다. 나는 반응하지 않고 오로지 몸을 푸는 데에만 집중했다. 뭐, 정확히는 호박씨 까며 스킬 캐스팅하기다. 먼저 성질 건드린 쪽은 그쪽이었다는 것을 외면하면 안 되지. 그러니까 계단에서 무시를 왜 해? 뿌린 대로 걷는 법이라지. “그건 그렇고 뱀을 무서워하는 것 같더군.” 비웃음도 곁들어 묻자 단번에 샤프의 얼굴이 파랗게 죽는다. “징그러워서 그럴 뿐이라네.” “그거나 저거나.” 입을 손끝으로 가리고 간드러지게 웃었다. 샤프가 움찔, 하고 몸을 주춤거린다. 나는 더욱 의기양양해져서 호기롭게 외쳤다. “우후훗! 천하의 샤프가 고작 뱀에 움츠러들다니! 남자의 보양식품이거늘 그것을 마다한단 말인가! 당신은 남자가 아닌 게야!” 기고만장(氣高萬丈)! 아싸, 신난다야~! 히죽히죽 웃으며 남자 아니라는 둥, 설마 없는 것이냐는 둥, 여자가 있기는 하냐는 둥으로 비꼬자, 샤프는 시뻘게진 분노한 모습으로 고함쳤다. “그만! 듀얼이나 하세!” 그리고 곧장 단번에 간격을 좁혀 왔다. 그럼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재밌는 장난을 하나 해줘볼까? 나는 슬쩍 웃음을 띄우고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작은 암흑의 기류가 펼쳐진 손위로 모여든다. 그리고 탁한 색의 구슬모양으로 둥글게 뭉쳐 소용돌이치는 어둠의 기운을 바닥에 쑤셔 박는 동작을 취했다. 유니크(Unique) 섀도우 스킬(Shadow Skill) 레벨 에잇(Level Eight) 다크 랜스(Dark Lance)!! 암흑구는 소리 없이 비무장에 스며들었다. 샤프는 짐짓 놀라서 옆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다크 랜스는 그림자를 이용하는 기술. 자리를 피해봐야 그림자가 사라질 리는 없는 것이다. 그의 발밑에 깔린 그림자가 맥동한다. 마치 파동이 이는 수면처럼, 동심원으로 진동하며 격렬하게 파도를 친다. 샤프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혼란스러운지 굳은 얼굴로 계속해서 자리를 옮겨 다녔다. 으레 물결치는 그림자를 대동하고. “피하는 방법은 알아서 강구해봐.” 나는 광기의 미소를 띄우며 손가락을 가볍게 퉁겼다. 딱―. 소리에 응답하듯 그림자가 크게 꿈틀거렸다. “큭!” 고동치고 울렁이던 그림자는, 샤프가 아차하는 사이 하나의 창의 형상으로 변해 밑에서부터 솟아올랐다. 몸을 비틀어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는 그. 어깨 보호대가 움푹 패여 있다. 다크 랜스가 시전 될 때 그림자의 영역에서 벗어가기 때문에 피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휘청이는 그를 지켜보며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하지만, 다크 랜스는 하나씩 나눠서하면 최대 다섯 번까지 가능하거든. 딱―. 촤악, 하고 검은 쐐기 하나가 재차 솟구쳤다. 미리 그의 이동 루트를 생각해두었기에, 창은 쓰러지는 그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샤프는 악다구니를 악물고 공중에서 몸을 회정시켰다. 다크 랜스는 그의 왼쪽 귓불을 날려버리고 땅으로 꺼졌다. 정확히는 그림자와 동화되었다. 이쯤에서 기술을 해제시키고, 몸을 일으키는 샤프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이대로 끝내버릴 수도 있지만, 최대한 괴롭히고 익스펠 시키겠다는 게 내 계획이었다. “그런 수는 통하지 않는다. 가끔은 패턴을 바꿔보는 게 어때? 유저들도 멍청하―, 쩝, 아니다. 계속 진행하자고.” ‘유저들도 멍청하지. 저런 막무가내 수에 당하다니. 한심스럽군’이라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별로 남 얘기를 할 처지가 아닌 것 같아서 잠자코 있기로 했다. 나도 처음에는 흉흉한 기세에 눌려 반드시 막거나 피해야한다고만 생각했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었잖아? 샤프는 귓불이 사라진 왼쪽 귀에 손을 댔다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젖혔다.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오른발을 뒤로 빼고 검을 가슴 앞으로 당겼다. “내 수에 내가 당한 꼴이로군. 설마하니 이런 것으로 길을 방해할 줄은 몰랐어.” “당신 머리의 한계지.” “훗, 그런가. 그래도 학습능력은 뛰어나다네. 그럼 말은 이쯤에서 그치고 계속 가지.” “그러시던지.” “최선을 다하지!”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합을 지르며 샤프가 달려왔다. 나도 지면을 박찼다. 정면으로부터 좌검을 맞받아친다. 양자의 검이 문자그대로 불꽃을 튀겼다. 이어 어깻죽지를 베려는 우검을 뭉툭한 폼멜(Pommel : 손잡이의 끝부분)로 쳐내 미끄러트렸다. 우검은 궤도를 잃고 엉뚱한 곳으로 틀어져 휘청거렸다. 무릎, 발목, 팔꿈치, 가슴, 머리. 다양한 각도로 돌아오는 검을 하나도 빠짐없이 방어해냈다. 검으로 막기가 늦는다 싶으면, 그의 검배에 손을 대고 밀어 다른 곳으로 흘려보냈다. 높이가 낮은 공격은 검신을 발로 밟아 정지시켰다. 계속해서 자신의 공격이 허무하게 막혀버리자 샤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는 굳이 쌍수검이 아니더라도 그를 상대하는데 무리는 없었다. 처음에는 실력이 지지부진이었지만, 요 삼일 간 기회가 되는대로 유저들의 듀얼을 견문한 결과 한차례의 성장을 겪을 수가 있었다. 체감할 정도의 괄목할만한 발전이었다. 때문에 내가 샤프를 거반 가지고 놀다시피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그의 기분을 생각하여 대충대충 해주고 있다. 확실히 샤프도 예전보다 검술이 좋아졌기는 했어도 그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성장한 나를 본다면 분명 자괴감이 들 테니까. 또한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상대해줘야만 첫 듀얼 때 받은 수모를 몇 배로 갚아줄 수 있지 않겠는가. 목을 찌르는 척 하다가 발로 허벅지를 차 옆으로 밀어냈다. “어떻게 된 거야? 너무 싱겁잖아!” 억지로 만들어낸 지친 형색을 감추듯 호기롭게 외쳤다. 아닌 척 연기하는 것도 슬슬 지겨워진다. 샤프는 피곤한 기색으로 억지웃음을 지었다. “이제부터네!” “기대해보지!” 손목을 가볍게 뒤틀어서 블레이드의 각도를 변화시키며 그의 검을 비껴냈다. 미묘하게 칼날이 비껴난 것을 계산해, 옆으로 돌아 검을 휘둘렀다. 허리를 노리는 일격을 샤프가 종이 한 장 차이로 비껴냈다. 나는 거리를 벌리고 샤프에게 진심어린 감탄을 보냈다.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법 하는군.” “그렇게 말해주면 기쁘다네.” 제 3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와 내가 백중지세의 상태에 놓여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샤프에겐 나만큼의 여유도 없었다. 싸움에서 가지는 여유야말로 최대의 실력이다. 조급함은 생각할 시간을 앗아가고, 갈증을 느끼게 해 몸을 굳게 만든다. 물론 과한 여유는 독이 되나, 차분함을 유지한다면 본신의 힘을 백퍼센트 사용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도 많은 성장을 겪겠지. 그게 지금이 될지 먼 미래가 될지는 아무로 모르지만, 언제라도 좋으니까 깨달기만 해라. 나와 샤프는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합!” 샤프가 먼저 움직였다. 높게 점프한 뒤 그대로 내려앉으며 양손의 검을 힘껏 휘두른다. 체중까지 실리는 바람에 위력이 오른 공격이었다. 막아내기는 했지만 충격 전체를 흘려내지 못하여 뒤로 약간 밀려났다. 그는 몇 번을 그렇게 공격해왔다. 어느새 서로의 검에는 오러 블레이드가 자리 잡아 있었다. 나는 적색의 이중 오러를 검에 둘렀고, 샤프는 각각의 검에 바다색 오러를 한번씩만 씌웠다. 그 후 격돌! 뻗어 나오는 검기를 이기지 못하고 비무장에 자잘한 실금이 겹쳐졌다. 강하게 패인 곳은 발로 밟을 때마다 거칠게 박살이 나며 먼지를 흩뿌렸다. 그나 나나 여기저기 선을 그은 채, 필사의 각오로 듀얼에 임했다. 스텝에 엉켜 뭉게뭉게 피는 흙먼지. 나는 그 속을 용맹하게 돌진해 들어가다가 먼지를 마시고 성대하게 기침을 해댔다. 샤프도 심히 싫다는 모습이다. 아, 목이 칼칼하고 눈도 따갑다. 하지만 푸념을 차마 입 밖으론 늘어놓을 수가 없었다. 머리와 누더기가 된 옷에 먼지를 뒤집어 쓴 처참한 몰골로 콜록거리는 샤프가 있었기에. 검 대신 곡괭이를 들어주면 광산에서일하다가 잠깐 쉬러 나온 광부로 알게 생겼다. 어쨌든 잠깐 동안 호흡을 가다듬고 서로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오러가 수차례 아우러지면서 형형한 빛을 만들어냈다. 그러던 와중에 튀어 올라 발끝에 놓이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가까이에 있던 샤프의 정강이에 적중되었다. 물론 큰 타격을 주는 일격은 아니었지만,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둘러대는 샤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데에는 충분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검을 내질렀다. 그러나 실전경험이 풍부한 유저답게 금세 몸의 균형을 다잡고 눈에서 형형한 광채를 뿌리는 샤프. 두 개의 빛이 교차하였다. 그의 검을 받아내고 옆으로 흘리면서 공격의 흐름을 이었다. 검이 그의 가슴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샤프는 상체를 옆으로 젖혀 피해낸 뒤 쾌속으로 반격해왔다. 아래서 위로 올려치는 공격을 누르듯 막아내고, 뒤이어 눌려있는 검의 칼등을 타고 미끄러뜨리듯 검을 들어올렸다. 목표는 그의 굵다란 목! 카라랑―! 청음(淸音)이 울린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것인지 샤프는 가볍게 몸을 당겨 뒤로 빠지며 이것을 피해냈다. “후우―!” 누가먼저라 할 거 없이 다시 맞부딪혔다. 허벅다리로 날린 공격을, 검을 거꾸로 뒤집어 받아치는 그. 재빨리 베는 것을 찌르기로 변환해 내 허점을 노린다. 단전에 짓쳐오는 검을 어찌어찌 받아치고 몸을 낮춰 샤프의 다리를 걷어찼다. 허나 재빨리 발을 빼는 바람에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나는 단말마의 기합을 토해냈다. 빈틈을 살피던 샤프도 함께.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내 검과 농후한 살기를 띈 샤프의 쌍수검이 용솟음쳤다. 차앙―! 챙! 맑은 금속음과 함께 몇 번 검격이 교환된 후, 몇 보 떨어져서 조용히 대치하였다. 나는 샤프의 검을 보았다. 오러가 소멸한 채 좌측 검이 짧아져 있었다. 검신이 반 가까이 꺾여, 아니 부러져 있던 것이다. 나는 빙그레 웃고 검을 꾹 그러쥐었다. 부러진 검은 짐만 될 뿐이었다. 하물며 오러도 들어가지 않음에야 더욱 쓰레기로 전락한다. 샤프가 그것을 들고 싸울 리는 만무시리했다. “일부러 부러트린 것인가?” “일부러라니? 우연찮게 부러트린 거라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노린 것은 그가 아니라 검이었다. 샤프는 눈빛을 가라앉히고 부러진 검을 칼집에 갈무리했다. 버리지 않은 까닭은 급박한 상황에 때 아쉬운 대로 써보자는 생각에서겠지. 나 같아도 저리 할 것이다. “아무래도 조금 불리해진 것 같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샤프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왼손을 털었다. 그의 면면은 도무지 불리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은, 흡족해 하는 듯한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제 저 표정도 사라질 터다. 샤프가 준비자세를 취하고 예외 없이 돌진하는 나. 최고의 위력을 내어 검을 때렸다. 검과 검, 오러와 오러가 거칠게 부닥쳤다. 샤프의 몸이 조금 떠올랐다. 그리고 지면을 밟을 때, 힘에 밀렸는지 혹은 착지시에 웅덩이에 발을 빠뜨렸는지 샤프가 휘청거렸다. 이제는 막아내기도 회피하기도 불가능한 상태. 바닥을 차면서 몸을 수그렸다. 머리부터 샤프를 향해 돌진하는 형태다. 엉거주춤 검을 내젖는 샤프. 본래의 쌍수검이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왼손에 들린 검에 의해 목이 잘려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내지른 샤프의 검은 버릇대로 오른쪽, 즉 내 왼쪽만 휘저어대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적으로 상체를 튕겨 일으키며 비껴나갈 듯 유연하게 뻗은 일격이, 그의 가슴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샤프가 몸을 푹 꺾고 중얼거렸다. “역시 대단하군.” 샤프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운 채, 고개를 들어 동경하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묵묵히 핏빛의 오러가 물결치는 검을 빼냈다. 그의 몸 전체가 한차례 경련하고 비틀거린다. 하지만 팔이 처짐에도 검을 놓치지 않는 그야말로 검사가 본받아야할 진정한 표상이었다. 그를 경외심이 담긴 시선으로 응시했다. “언제고 다시 한번 겨뤄보고 싶은데……, 허락해 주겠나?” 아이같이 천진한 얼굴로 그가 말한다. 그러나 이미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있어서 썩 밝게 보이지는 않았다. “더 이상은 사양하지.” 나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이마에는 격렬한 동작에 의해 배어나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샤프 따위 만만하다고 단언했지만 실상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조금 더 강한 수준일 뿐이었다. 큰 격차는 없다. “그런가? 그거 유감이로군.” 즈응, 하고 그의 검에서 오러의 색이 옅어졌다. 샤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여 그대로 무릎을 꺾었다. 그리고, 비무장 한가운데에 몸을 뉘이고 서서히 빛으로 사라져간다. 내 눈과 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사회자의 힘찬 외침도, 관중들의 함성도, 친분 있는 이들의 메시지도. 그저…… 만족한 미소가 담긴 머리까지 완전하게 사라지는 샤프만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 이 이후의 내용은 나중에 회상신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럼!! 듀얼랠리 완결입니다!!!!!!!!!!! 음하하핫!! 아! 참고로 말하면 익스펠Expel 은 게임오버와 같은 의미로 엘레멘탈 가드에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Level 5. 생일. (1) Level 5. 생일. 카페의 2층 창가 쪽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는 특수유리여서 행인을 째려보던 흘겨보던 문제될 것은 없었다. 가운데에 서서 앙증맞은 손으로 부모님의 손을 맞잡고 가는 꼬마아이. 어디 놀러 가는지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학생들. 쩝. 보는 사람으로서 기쁘기는 하다만 부끄럽지도 않은 건가?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지루하게 창밖만 구경하다가 왼손에 차여있는 손목시계로 힐끔 시선을 돌렸다. 10시 41분. 시간을 확인하니 절로 한숨이 새어나온다. “하아……. 도대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벌써 약속시간에서 41분이나 경과되었다. 누나가 만나는 시간을 잘 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지……. 혹여나 정말 잘못 알고 있을지 모르니 전화라도 해볼까? 3일 뒤면 미르고등학교가 개학을 하는 관계로 오늘 신나게 놀아보자는 의미에서 지연누나와 데이트약속을 잡아두었었다. 누나는 대학생이어서 며칠 더 쉬지만 나는 그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개학을 하고나면 이제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만날 수 있을 테니, 남은 시간동안 실컷 만나둬야 다음 만날 때까지는 그리움을 참아낼 수 있다. 바지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근래 엘-가드를 무료이용하면서 남게 된 돈을 다 털어 새로 장만한 것이다. 내 피와 땀의 결정체이니 만큼 망가지거나 잃어버리게 되면 한강에서 투신자살할지도 모르는 일. 휴대폰의 배터리부분에는 지연누나와 함께 찍은 반명함 크기의 스티커사진을 붙여두었다. 누나가 내 뺨에 입을 맞춰주는 사진이다. 그때 듀얼 랠리 때의 약속도 있고 해서 당장 마우스 투 마우스(Mouth To Mouth)로 해버렸었지. 그 상태로 찍힌 것도 있기는 한데 누나가 부끄럽다며 모조리 뺏어갔다. 한 장이라도 주면 안 되나……. 누나와의 스티커사진의 아래에는 세영과 찍은 사진이 있다. 누나가 찍으라고 억지로 떠밀어서 찍은 것이기에 둘 다 표정이 딱딱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은현과 찍은 사진이, 또 은주와 미연누나와 화청 형과 성호와 찬석과 학진과……. “…….” 이게 휴대폰이야, 스티커사진첩이야? 이걸 누가 휴대폰으라고 봐? 멀리서보면 알록달록한 성냥갑으로 착각하기 딱 좋겠네. 디자인이 좋아서 산 것인데 이렇게 몽땅 다 가려지게 되니 화가 난다. 원래는 지연누나와 찍은 것만 붙여두었었는데 여기저기 자랑하며 돌리다보니 어느 샌가……. 그냥 확 뜯어버릴라! 회의적으로 사진으로 도배된 겉을 보다가 휴대폰을 열어 지연누나에게 전화를 걸고 귀에 대었다. 언제 컬러링(Coloring)을 해뒀는지 가수 ‘듀오(Duo)'의 간판음악이 귀속으로 스며들었다. 듀오는 요새 연신 폭발적인 인기 상승세를 타고 있는 여성 신인가수다. 데뷔 2주 만에 가요계 정상에 오를 만큼 타고난 뮤지션(Musician)이었다. 애니 음악이 아니면 취급을 하지 않는 나도 그녀의 노래엔 심취할 정도였다. 거기다 외모도 뛰어나다는 소문이 자자해 사진을 보았는데, 확실히 미인은 미인이더라. 물론 지연누나보단 못하지만 말이야. 나이는 20세로 지연누나와 동갑이고 다른 것들은…… 관심 없어서 안 봤다. 지연누나만 있으면 되는데 무엇 하러 다른 여자프로필까지 외워? 노래만 들으면 장땡이지. ‘화이트 데이’라는 노래가 중반쯤을 지났을 때, 노래가 끊기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지연누나였다. “누나에요? 저 류현이에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거두절미하고 용건부터 말했다. 기다리게 하기 싫어 20분 일찍 오는 바람에 1시간이나 기다렸으니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기다린다는 것은 내 체질에 맞지 않았다. [류현이구나…….] 누나의 목소리엔 어쩐지 힘이 들어있지 않았다. 생기발랄하던 예전의 목소리와는 많은 차이가 있는 음성이었다. 약속시간엔 언제나 나보다 일찍 오던 누나였으므로, 지금 늦게 되는 것은 힘이 없는 것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걱정스러움에 미간을 찡그리고 황급히 질문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프기라도 한거에요?” [으, 으응.] “예에? 어디가요?!” 기어들어가는 대답에 기겁을 한 나머지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카페 내의 사람들이 날 따가운 눈초리로 보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누나가 아프다는데 뭐가 눈에 들어오고, 뭐가 귀에 들리랴! [약속 못 지키게 되어서 미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구요!” 다시 한번 지르는 고함에 이젠 아주 씹어 먹을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 점점 살벌해지는 분위기에 못내 못 이겨 내가 마신 파르페 값을 지불하고 밖으로 뛰쳐나와 외쳤다. “어디가 아픈 거예요?! 약사가지고 갈 테니까…….” 말을 잇다가 목이 메어왔다. 목소리가 슬픔에 잠겨 흐려졌다. 좋아하는 이가 아파하는 것은 정말 싫었다. 유나가 죽고 나서 얼마나 눈물 흘렸던가. 그 뒤로 다시 사랑하게 된 여인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한번 잃었던 적이 있는 나로서는, 이런 발작적인 반응도 당연한 것이었다. 누나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오는 슬픔이다. 비록 누나가 조금 아프더라도, 순간적으로 전신을 타는 우울함은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끔 만들기엔 충분했다. 우는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잠겨서 나온 탓에 내가 운다는 사실을 알아챈 누나도 같이 훌쩍거렸다. [류, 류현아? 우는 거야? 왜, 왜 울어……? 울지 마……. 흐윽…….] “콜록, 콜록! 아, 안 울어요. 침을 잘못 삼키는 바람에 목이 메었던 것뿐이니까, 울지 말아요.” 순간 뜨끔하여 애써 태연한 척 핑계를 대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고 눈물을 흘리는 날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지만 누나가 보지 못하니 따지고 싶지 않다. 어차피 철판인생, 이 정도는 견뎌낼 수 있다, 이거야. “어디 아픈 거예요? 약사가지고 갈게요.” [괘, 괜찮아. 약은 벌써 먹었는걸. 깜빡 잠들었다가 지금 일어나서 네게 전화하려던 중이었어.] 그나마 약 먹고 잤다는 것에서 다행으로 여겨졌다. 안도하여 숨을 토해낸 뒤에 그래도 걱정이 가라앉지 않아 누나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오늘 하루 푹 쉬어요. 괜히 무리해서 더 아프지 말고요. 알았죠?”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헌데 아픈 곳이 어디에요? 몸살은 아닌 것 같은데…….” 걱정을 떠나서 매우 의문이었다. 몇 번이나 물었음에도 누나는 제대로 된 대답을 돌려버렸다. 이쯤 되면 궁금하게 되어있다. 대체 뭐기에 대답을 회피하는 거지? 누나는 내 질문에 얼마간 조용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여자잖아…….] ……? 그럼 누나가 여자지 남자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 혹시 그건가? 대충 감이 잡혔다. 솔직히 자기 입으로는 말하기가 부끄러울 것이다. 어찌되었든 남자는 그런 용어와는 조금 거리감이 있으니, 내게 말하기는 껄끄러웠겠지. 나는 남들이 듣지 못하게 입을 가리고 말했다. “생리통 말인가요?” [……응.] 누나는 부끄러운 것인지 들릴락 말락 한 음성으로 대답했고, 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고생이겠네요.” [몰라…….]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아픈데 사실을 숨겨봤자 무슨 소용이에요? 아니면 말하기 싫을 만큼 제가 싫어진 건가요?” [아, 아냐!!] 귀가 따끔해질 만큼 소리를 지르는 누나다. 나는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미소를 지었다. 누나가 날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내가 누나를 좋아하는 만큼 누나도 날 좋아하고 있으니까. 다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생각하고 있는 것에 못을 박기 위해서. 내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누나는 울먹거리며 화를 냈다. [나……. 나, 너 많이 좋아하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 “당연히 하지 않아요. 나도 누나가 나를 얼마나 위하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밑으로 시선을 깔며 발로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내 입에는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누나의 마음을 알게 되어 기쁜 한편, 이유 없이 우울해졌다. 구름이 잔뜩 낀 우중충한 날씨 때문일까? 알 수 없었다. 가만히 하늘 올려다보다가 다시금 들려오는 누나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한차례 흔들었다. 내겐 누나와 있으면서 슬퍼해야할 이유 따윈 없다. 웃자, 한류현! 네겐 웃는 것이 어울리니. 누나는 내 이름을 부르더니 잠깐 머뭇거리며 말했다. [류현아. 으음……. 우리 집에, 올래?] “예? 지금요?” 갑자기 왜 오라고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누나 집에 가본적은 몇 번 되지만 그것은 누나를 바래다주다가 들른 것뿐이었다. 지금처럼 초대받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응. 보고 싶기도 하고, 줄 것도 있어서.] “어떤 건데요?” [오거든 알려줄게.] 누나는 대답하기를 꺼려했다. 난 누나가 왜 이러나 싶어 오늘이 무슨 날인가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전혀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아직 백일선물을 주는 날은 몇 주 더 남은데다가 이렇다할 기념일도 없는데, 왜……. “나중에 만나서 주면 안 되는 건가요?” [지금 아니면 안 되는 거야. 그러니 빨리 와야 해! 알겠지?] “아, 예…….” 아무래도 오늘 무슨 날인 모양이다. 이거 도착한 뒤에 누나가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라고 물어오면 어쩌지? 대답 못하면 당장 울면서 삐쳐버릴 텐데……. 으악, 어떡해! 생각해 내야만해!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그러나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감조차 잡히지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일단 간다고 약속을 해놓고 전화를 끊은 뒤, 근처 액세서리 가게로 달려가 은색 커플링을 샀다. 순식간에 3만원이란 돈이 수중에 뿌려졌다. 아깝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누나를 위해 쓰는 돈인데 아깝다고 생각하면 일찌감치 연인 사이는 깨졌을 테지. 아무리 돈쓰는 일을 싫어하는(엘-가드에서도 점점 구두쇠화 되어가고 있다) 나일지라도 이런 쪽의 투자는 확실하게 한다, 이거다. 상가밀집지역 중에서도 가장 번화된 거리여서 근처엔 택시 정류소가 존재했다. 때문에 그곳으로 달려가 줄지어져 서있는 택시들 중 아무거나 잡아타고 외쳤다. “성북구 성북동!!” -------------------------------------------------------------------------- 흐흐흐... 오늘을 위해... 오늘을 위하여...!! 음하하핫!!!! Level 5. 생일. (2) 성북구 성북동. 지대가 높아질수록 집값이 폭등하는 희한한 동네다. 갑부들만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인데, 그중에서도 위쪽에 사는 이들은 갑부중의 갑부다. 세계에 내놓아도 꿀릴게 없는 이들인 것이다. 예전에 처음 와봤을 때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집들의 웅장함에 얼마나 기가 질렸던가. 그래도 지금은 몇 번 와봤다고 익숙해져서는 느긋하게 구경까지 하는 장족의 발전을 했지만 말이다. 누나의 집은 성북동에서도 가장 위쪽에 자리 잡아 있다. 한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 집이라는 것이다. 뭐, 부모님이 하시는 일은 누나가 말해주지 않아서 모르겠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다. 소문이 퍼지게 되면 자신이나 세영이 곤란해지게 된다나?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어서 발설하지 않고 있는 중이다. 알려질 시엔 재산보고 접근하는 이들이 많아질 테니까. 나야 누나의 집이 재산이 많던 적던 상관없으니 신경도 안 쓴다. 내 돈도 아닌데 무엇 하러 집착하랴. 난 그림의 떡에는 관심 없다. “도착했습니다, 손님.” 성북동에 오게 되니 날 무슨 재벌 집 아들로 여기는 듯, 택시기사 아저씨가 공손하게 말했다. 나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웃으면서 미터기에 적힌 숫자만큼의 돈을 지불하여 택시에서 내렸다. 누나의 집에 오는 것은 어렵지 않다. 택시타고 ‘성북동 제일 위, 담장이 높은 곳!’이라고만 말하면, 빙빙 도는 것 없이 바로 도착하게 된다. 누나네 집은 담장이 다른 집들과 비교될 만큼 높거든. 설명해준 바로는 도둑들이 많아 일부러 높인 거라는데 얼마나 많았으면 담장까지 높일까? 다른 집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누나네 집이야? 나중에라도 담을 넘으려는 도둑놈을 보게 되걸랑 칼질해버릴 거라 다짐하며 대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8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담장을 보고 피식 웃으며 초인종을 눌렀다. 담치기 하려면 땀 꽤나 쏟을 것 같다. 벨을 두 번 누른 뒤에 대답을 기다렸다. 오면서 거의 다 왔다고 연락을 했으니, 누나가 나올 것이었다. 분명히. [누구세요?] 그런데……. 누구야, 이건? 처음 듣는 목소리인 걸? 누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가정부 아주머니도 아니다. 그렇다고 지연누나의 어머님이라고 여기기에는 음색이 매우 젊었다. 또한 듣고 보니 언제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다. 흐음. 들어봤다고 느끼는 건 누나와 같이 밝은 분위기여서 그런가? 그래도 혹시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여 말했다. 만약 진짜로 어머님이라면 오늘 처음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것인지라, 어느 이성친구가 그러하듯이 자연스레 긴장하게 된 것이다. 드라마 보면서 남자들이 왜 맥을 못 차리나 했더니 이제야 알듯하다. “안녕하세요. 지연누나와 친한 동생인 한류현이라고 합니다. 지금 누나 있나요?” 다행히 목소리가 떨리거나 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스스로도 만족할만한 모습에 뿌듯해 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곧 말소리가 들려왔다. 헌데 어쩐지 장난기가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어머! 네가 류현이었구나? 지연이가 말을 하도 많이 하기에 궁금해서 만나보려 했는데 말야. 그런데 소개가 잘못된 거 아니니? 너와 지연이는 그저 친한 동생, 누나 사이에 불과했던 거야? 어머, 어쩐다니! 지연이가 매우 실망하겠다!] “…….” 이거, 오는 날짜를 잘못 맞춘 거 아닐까? 나 놀랐다는 듯 호들갑을 떨며 말하는 수다쟁이 여자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말하는 것으로 보면 분명 누나의 어머님은 틀림없이 아니다. 내겐 필요이상으로 말 많은 사람이 최악의 인간상으로 그려진다. 아무리 착하고 예쁘더라도 말 많으면 딱 질색이다. 말로만 잘났다고 떠드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입만 살아서 끝까지 나불거리는데 내 성격에서 어떻게 참아? 절대 불가능이지. 이마를 짚고 침묵하다가 입을 열어 또박또박 말했다. 바라는 것을 해줘야 들여보내줄 것 같은데,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어. 나는 유독 연인이란 말을 강조했다. “안녕하세요. 지연누나의 ‘연인’인 한류현이라고 합니다. 지금 누나 있나요?” [어머! 네가 류현이었구나? 지연이가 말을 하도 많이 하기에 궁금해서 만나보려 했는데 말야. 지연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들어와.] 천만다행으로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수다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철컹하고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와 귀로 향하던 손을 문 쪽으로 돌렸을 뿐이다. 안으로 들어서서 대문을 닫고 초록빛 잔디가 무성한 뜰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니 현관이 보인다. 나는 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누나! 저 왔어요!” ……. 내 외침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말 많던 여자의 목소리도 없었다. 설마 1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1분 사이에 벌어질 것이라면 진작 일어났을 테지. 지금 나랑 장난을……. 가만. 만약 그 목소리가 강도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면……? 헉!! 이때를 기점으로 이것저것 생각할 틈이 없었다. 잘 생각해보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여겼을 테지만……. 난 흥분으로 인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얼굴에 피가 몰리고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누나!!” 곧장 현관문을 뜯어낼 기세로 열어젖히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집안은 어두웠다. 열려있던 현관문까지 닫히고 나니 새벽이 내린 것처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눈앞이 가려지게 되어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마음이 초조해지고 조급해져만 갔다. 크윽! 누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어! 작은 생채기라도 있을 시엔 몇 백배로 돌려주마! “누나! 어디 있어요?! 누나아!!” 집 구조를 떠올리고 필사적으로 누나를 불렀다. 무작정 뛰어다니기엔 위험요소가 많아 조심해가며 그렇게 거실 쪽으로 다가갈 때였다. 감미로운 피아노의 선율이 어둠을 타고 전해져왔다. 듀오의 ‘탄생일’이란 노래의 첫 간주부분의 음률이었다. 내 조급한 마음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음률인지라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피아노는 저쪽이었지?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았지만 안 쓰던 머리 팽팽 돌려가며 가구의 위치를 되새겨보고 신발을 벗어 꽉 쥐었다. 신발 밑창의 딱딱한 촉감이 손바닥을 자극했다. 이대로 던져버릴 생각이다. 잡히는 게 이거밖에 없으니 이거라도 사용해야했다. 누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연누나는 피아노 연주를 못하기에. 유나는 잘했는데……. 나도 유나에게 배워 그럭저럭 하는 편이기도 하고 말이다. 뭐, 유나는 유나고 지연누나는 지연누나일 뿐이니 따질 것은 못되나? 성격이 같다고 해서 다른 것까지 같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오늘이 그대의 생일이에요. 설레지 않나요. 달콤한 케익을 가운데 놓고 그대의 생일을 축복해 줄게요. Happy Birthday To you.” 신발을 던지려고 상체를 뒤로 젖히려하는 차에 잔잔한 노랫소리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싱그러운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이 목소리…….” 방금 전에 들었던 여자의 것이었다. 또 듀오의 목소리와도 비슷하다. 대문에서도 어렴풋이 생각은 했지만 방송국에서 스케줄에 찌들리고 있을 사람이 한가하게 지연누나의 집에 있을 리가 없으므로 아닐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건 이리 들어도 저리 들어도 녹음된 것이 아닌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오는 육성이었다. 피아노도 조금씩 음이 튀는 것으로 보아 직접 연주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듀오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저 노래를 부르는 거지? 솔직히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연예인이어서 바쁠 텐데 여기서 한가로이 노래 부르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시선이 어둠을 가로질렀다. 칼처럼, 혹은 창의 끝처럼 날카롭게. 그리고. “뭐, 뭐야?” 날카로움에 베여버린 듯 공간의 틈새에서 음이 새어나온다. 조용히, 따스하게……. 목소리가 하나 둘씩 늘어나며 듀오의 노래와 겹쳐지자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 지연누나와 듀오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나? 의문의 눈길이 쉴 새 없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거실 여기저기서 어둠에 스며들 듯 주황색 빛무리를 흩뿌리며 촛불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홀로 있는 어둠을 달래듯 고요한 노래 소리와 함께 하나 둘씩 서서히. 그리고 촛불 하나마다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모두 귀에 익은 음성이었고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여자 남자 할 거 없이 모두가. 그들은 입을 모아 탄생일을 부른다. “아…….”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오늘의 날짜를 떠올려보았다. 팔월 달 스무 번째 날. 내 열일곱 번째 생일. 만으로 17세가 되는 날이었다. “…….” 설마, 이것이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이란 말인가? 정말로? 진짜? 생전 이런 감동적인 생일잔치는 처음 받아보는 것이어서 실감이 나질 않았다. 오늘이 정말 내 생일이 맞나 의심까지 해 휴대폰으로 날짜를 확인해보았지만, 바깥쪽 액정에는 틀림없이 ‘8월 20일’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짙은 감동의 타종소리가 심금을 울린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따뜻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턱에 도달해 바닥으로 사라지려하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간다. 내 감동은 배로 늘어난다. ‘Happy Birthday To you. 당신을 영원히 사랑해요.'라는 가사를 마지막으로 노래는 끝이 났다. 피아노의 선율도 점점 높은 음으로 올라가면서 빨라지고는 이내 음량이 작아지며 은은한 음의 꼬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모두가……. 모두가 양손으로 촛불을 든 채 미소를 짓고 있다. 그들은 몸을 일으키더니 내 주변으로 빙 둘러 섰다. 그리곤 말한다. “생일 축하해, 류현아.” 순백의 미소가 아름다운 지연누나……. “축하해.” 차갑지만, 그래도 약하게나마 웃어주며 축하해주는 세영……. “생일 축하해요, 오빠.” 하나뿐인 사랑스런 동생, 은현……. “정말 18세가 된 거네. 축하해.” 최근 찬석과 다시 사귀기 시작한 은주……. “나도 축하해 줘야 하나? 음, 일단 축하해.” 정체를 숨기려고 했는지 머리도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고, 알이 큰 안경을 쓰고 있는 여성, 듀오……. “자식. 행복하냐?” 익살맞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성호……. “이거 끝나거든 생일빵이다.” 재수 없는 자식, 학진……. “생일선물 기대해라. 내 찐~한 키스가 날아갈 테니.” 타락한 찬석……. 그리고. “형님에게 기도하여라.” 기분 잡치게 하는 웬 떨거지 한명. “얌마! 내가 왜 떨거지야?!” 무시하자. 저놈의 불평을 들어주며 기분을 잡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태진을 제외한 모두에게 진심어린 어조로 말했다. 놈이 듣고 ‘그려, 그려.’ 했지만 태진은 내 인사 대상 명단에서 제외되어 있었기에 뭐라 해도 상관없었다. “모두들, 정말 고마워요…….” 난 미소 지은 얼굴로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대화를 통해 듀오가 지연누나의 사촌이고, 본명이 ‘나혜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두가 놀라워 했을만한 것이었다. 특히 나혜은이라는 본명은 듀오의 열성팬(소위 빠돌이라고 한다)들에게는 최고의 정보였다. 듀오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방송에서 본명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름을 말하면서 다른 이들에겐 알리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고 말이다. 나는 이에 혀를 찼다. 나 같으면 아예 말 자체를 안 한다. 차라리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고, 다람쥐에게 도토리를 맡기고 말지. 남들은 믿을 수 있지만 김태진 저놈은 절대 믿을 게 못 되서 말이다. 분명 개학 후에 콧대를 높이고 튕겨보다가 돈 받고 정보를 팔 놈이다. 진언컨대, 듀오는 얼마 못가 연예계에 쫙 퍼진 자신의 이름을 보고 절망할 것이다. 듀오가 스케쥴은 어떻게 하고 여기에 와있냐는 내 질문에 웃으면서 답하길. “한 달 전부터 지연이가 조르고 졸라서 오늘은 비워두었어.” 이라고 한다. 여기에 있는 모두는 한 달 동안 날 용의주도하게 속여 온 것이다. 속았다는 것에 화도 나지만 낼 수는 없었다. 태진 놈이 와서 몇 번 찌르고 갔음에도 내가 알아채지 못했으니. 내가 바보지. 지연누나가 아프다고 한 것은 날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다. 원래 계획은 아프게 보여서 당장 뛰어오게 만드는 것이었단다. 뭐, 누나가 워낙 순진해서 거짓말을 잘 못하는 타입이기에, 말을 바꿔 선물을 준다는 명목으로 부르게 되었지만. 생일선물 주는 것은 사실이니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겠지. 그리고 해가 서쪽에서 뜨는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았다. 이 생일잔치의 전 기획을 태진이가 담당했단다. 놈이 이런 감동적인 축하잔치를 계획했다고 하니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오더라. 학교에서 아메바로 통하는 태진이 아니던가. 아메바도 생물이랍시고 진화하는 모양이다. 누나의 집을 알지 못하던 이들이 누나가 성북동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이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였다고 한다. 눈으로 보고 경악을 했다는군. 부유층이라는 것은 대충 알았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날 향해 도둑놈이라고 욕을 퍼부어댔더랬지. 상대 가치를 못 느껴 상큼하게 무시해 주었지만 말야. 그리고 이것도 비밀에 붙이기로 했다. 만약 소문이 날 경우 태진을 단체로 밟아 매장시켜버리기로 합의까지 봤다. 여기서 소문낼 사람은 태진 밖에 없으니까. 다른 이들이야 이미 신용이 증명된 상태였으니 말이다. 지금은 한창 파티를 즐기고 있다. 나는 진한 행복감을 만끽하며 와인을 들었다. 사두었던 커플링의 하나는 어디론가 사라져서 일체 함구했다. 아까 정신없이 뛰면서 흘린 것 같은데……. 어디 있는지 찾지를 못하겠다. 아깝기는 하지만 반지는 포기하기로 했다. 이 생일잔치의 대가라 생각했기에. 정말 태진을 제외한 모두에게 고마웠다. 오늘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그렇게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를 하고 있을 때 은현이 다가왔다. 은현은 와인을 마셨던지 발그레한 홍조를 띄우고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미약한 포도향이 알싸하게 풍겨져온다. 맥주한잔으로도 취하는 녀석이 술을 마시냐? 은현은 내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그리고 아무생각 없이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벽 쪽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를 가리켰다. “오빠. 피아노 연주 해줘요.” “…….” 피아노라……. 녀석의 말을 들으니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은현의 말에 대화를 멈춘 모두는, 시선을 이쪽으로 이동시켰다. 투영되는 내 친구들의 얼굴엔 당혹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와 피아노의 연관관계를 모르는 지연누나와 듀오, 세영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현도 술김에 한 말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해요…….” “됐어. 동생이 해달라는데 해줘야지.” 달아오른 이렇게 분위기가 식는 것은 원치 않았다. 나는 웃으며 은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몸을 일으켰다. 녀석은 내 의외의 행동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옷에 있는 먼지들을 털어내고 피아노 쪽으로 향하자 듀오가 다가왔다. “너 피아노도 연주할 줄 아니? 오~ 보기보다 섬세하다? 설마 ‘학교종이 땡땡땡’같은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난 비웃듯 피식 웃으면서 여전히 말이 많은 듀오를 살짝 쳐다보았다. 그녀는 얼굴 한가득 산뜻한 웃음을 지으며 내 이마를 검지로 살짝 쳤다. “만약 마음에 드는 연주를 한다면 이 시계 줄게.” 누가 음악종사자 아니랄까봐 이런 쪽으로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듀오다. 듀오는 손목에 차여있는 손목시계를 끌러 흔들어 보이며 윙크했다. 하지만 그녀가 알까? 내가 세계 피아노 연주대회 우승자와 일대일 레슨을 통해 피아노를 배웠다는 사실을. 그리고 유나도 괄목한 말한 성장을 했음을 말이다. 그러니 이제 저 시계는 내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듀오를 비웃으려는 의도로 작게 소성(笑聲)을 터트렸다. “하하, 후회할 텐데요?” “그야 두고 봐야 아는 것이지. 그럼 어서 연주해봐. 말만 그럴싸하게 하지 말고.” “킥! 나중에 후회하고 땅이나 치지 마세요.” 실소하며 자신 있게 피아노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 그렇지만 막상 피아노 앞에 앉고 나니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추억으로 간직된 과거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으로 펼쳐졌다. 유나와 웃으며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 현을 끊어먹었다고 꾸지람도 들었었다. 그리고 콘서트구경 갔다가 사람들이 유나를 알아봐 번외로 함께 했던 연주……. 결코 잊혀지지 않는 추억들이었다. 내게 있어 피아노는 유나와 날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였다. 그녀와 나란히 앉아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면 언제나 서로의 마음이 동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때론 기쁘고, 때론 슬픈……. 서로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못해 끙끙대던 나와 유나에게 유일한 통로가 되어주었던 고마운 존재가 피아노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유나는 죽었고, 나에게 피아노라는 것은 소리 내는 악기 이상의 가치는 없었다. 유나와 피아노를 치면서 느꼈던 즐거움도 물에 쓸리듯 사라졌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피아노는 절대 연주하지 않겠다고 단언한 상태였다. 내가 가만히 앉아서 피아노의 건반만 뚫어져라 보고 있자, 은주와 찬석이 옆으로 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어? 앞으로는 피아노치지 않겠다며?” 찬석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저어보였다. 부정인지 긍정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아니, 생각 없이 흔드는 것뿐이다. “유나에 대한 것은 정리한 거야?” 은주. 그녀는 유나와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비록 장래희망의 차이로 인해 유나와 같은 예술고가 아닌 인문계 고등학교로 왔다지만, 그래도 둘은 언제나 연락을 나눠왔었다. 나는 은주의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 내 모습으로 그녀를 정리했다고 말하는 것은 역설일 것이다. 나는 유나를 잊지 못한다.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이상 유나라는 여성의 모습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 내가 지워지게 하지 않겠어. “그녀는 잊지 못해. 내가 지금 피아노를 연주하려 하는 것은, 모두에게 약간이나마 보답을 해주고 싶기 때문이야. 다른 이유는 없어.” 쓸쓸히 말하고 건반을 차례대로 눌러보았다. 음이 울릴 때마다 내 추억의 호수에도 파문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잔잔하게, 그 뒤로 음이 높아질 때마다 계속해서 격렬해져간다. 손가락이 높은 도를 쳤을 때 내 두 손은 건반위에 가지런히 올라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흠칫 놀라 잠깐의 연주가 끝났지만,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유나, 듣고 있어? 네 앞에서 반드시 치고 싶었지만 결국 망설임에 밀려 포기했던 곡이야. 이제야 치게 되는 날 용서해줘……. 엘리제를 위하여……. 잔잔하고 슬프지만 밝은 선율이 울려 퍼졌다. 투명한 수정처럼 맑고, 처녀의 손처럼 부드러우며, 꿀처럼 달콤하게 대기와 뒤섞이는 음률. 나는 머릿속이 비어버린 듯한 상태에서 건반을 멈추지 않고 눌렀다.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단호한 연주. 단하나의 튀는 음도 허용하지 않고 혼신을 다해 연주했다. 몇 분을 연주했을까. 어느새 곡은 종반부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애잔함과 아쉬움을 남기며 끝을 고했다. 금세 연주는 끝이났다. “후우…….” 길게 숨을 토해냈다. 아직까지도 가슴이 크게 두근거린다.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다. 그만큼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어 연주했다는 것이리라. 그래도 다행이다. 실력이 줄어들지 않아서. 만약 조금이라도 음이 튀었다면 유나가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았겠지. 지금은 없어서 못하겠지만……. 피아노를 치고 나니 막혔던 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연주를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연주는 이번 한번이면 족했다. 앞으로 피아노 앞에 앉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유나가 있다면 달라지겠으나, 그녀가 살아 돌아올 일은 없을 테니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미소하며, 사람들이 있는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혜은누라를 향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듀오! 어땠어…….” 그러나 하던 말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려야했다. 수다는 딱 질색이야! “우와!! 너 대단하다! 이정도면 월드클래스야! 대체 언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거야? 아니, 그것보다 당장 방송국가자. 너 같은 인재를 썩히는 것은 음악계의 커다란 손실이야! 그리고 나랑 손잡아 볼 생각 없어? 넌 뒤에서 연주하고 나는 노래 부르고 말이야! 얼굴도 그 정도면 잘생긴 거니까 괜찮을 듯 보이는데. 어때? 대가가 영 시원찮다 싶으면 내가 밤마다 특별 서비스까지 해줄 테니까 같이 하―, 꺄악! 왜 꼬집어?! 아프잖아!” 그녀는 감동받은 표정으로 눈을 반짝거리며 호들갑을 떨어대다가, 지연누나에게 옆구리를 꼬집히고 높은 비명을 내질렀다. 지연누나는 빨개진 얼굴로 듀오를 쏘아보고 있는 상태였다. 아마 듀오의 말 중에 허용하지 못할 문장이 있어서 그러는 듯싶다. 나처럼 못들은 척 가만히 무시하면 될 터인데……. 여자들은 이런 부분에선 민감해지는 것일까?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될 말이 있지……. 류현인 그런 거 할 애 아니니까 이상 쓸데없는 소리 하면 가만 안 둬! 그리고 류현아. 너무 감동적이었어……. 왜 지금까지 연주하지 않았던 거야?” 지연누나는 듀오에게 엄포를 늘어놓고, 쓴웃음을 짓고 있는 내게 다가와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겉으로는 웃어주었지만 속으로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예전에 사랑하던 여자를 잊을 수 없어서,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누나는 웃는 낯으로 내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따뜻한 손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가 뺨에 머물렀다. “대답하기 곤란하면 하지 않아도 돼.” “미안해요.” “아냐.”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이마에 키스해주는 누나.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그 뒤 듀오가 지연누나의 엄포에도 아랑곳 않고 날 방송국으로 끌고 가려던 작은 해프닝이 끝나고, 다시 옹기종기 모여 정답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도중 세영의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세영이의 연주를 듣지 못했네! 세영이 얘도 피아노 엄청 잘 쳐. 류현이 너보다도 잘 칠걸, 아마?” 듀오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이미 세영의 실력은 입증된 것과 다름없었다. 가수가 되기 전까지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어서 피아노전공을 했다고 말했으니까. 음감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듀오였던 것이다. Level 5. 생일. (5) -end- 듀오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세영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당혹감이 스친다. 세영은 미간을 찡그린 채로 듀오에게 말했다. “듣지 마.” 이를 강하게 반대하는 듀오. “저얼대로 안돼! 널 방송국으로 끌고 갈 수 없으니 여기서라도 들어야지! 게다가 류현이도 연주했잖아? 그 감동을 다시 한번 느껴보자. 안되겠니?” “맞아요! 은현이는 너무너무 듣고 싶어요!” “한번 해봐, 세영아.” 듀오의 말에 모두가 맞장구를 친다가 일심단결 되어 ‘세, 영! 세, 영!’을 외치자,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언가 갈구하는 듯한 떨리는 눈동자로 날 조용히 응시하다가 피아노의 앞 의자에 앉는다. 나는 세영이 피아노를 친다는 것에 막연한 설렘을 느꼈다. 유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유나와 빼닮은 그녀였다. 유나에서 성격만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세영이 유나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그녀의 마지막을 확인하고 동해바다에 그녀의 가족과 함께 뼛가루를 뿌린 나다. 기적이라도 유나가 살아 돌아올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유나와 재회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또 지연누나와는 어떻게 해야 하고……. 아니다.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이루어질 확률이 제로에 가까운 일에 애써 매달릴 필요는 없는 거잖아. 고개를 젓고 방금 전 세영의 행동을 떠올렸다. 왜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본 것일까. 그것은 무언가를 강하게 갈구하는 눈이었다. 나도 유나를 그런 애달픈 눈으로 바라보았으니 충분히 알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리저리 생각해보아도 세영의 행동은 도저히 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질 않는 범주의 것이었다. 그저 눈빛을 해석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짓인가? 머리도 아프고 때마침 세영의 독주가 시작되기에, 잡생각을 떨쳐버린 뒤 그녀의 등을 응시했다. 왜소한 체구였다. 어쩐지 외로움이 엿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흐응…….” 그때 콧숨을 내쉬는 소리에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날 빤히 쳐다보는 듀오가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듀오는 고개를 돌려 세영의 뒷모습을 보더니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짜고 놀리기로 작정을 했는지 이해안가는 행동만 해댄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듀오를 보는 사이 맑은 선율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아한 목소리가 그 뒤를 잇는다. 세영이 부르는 노래였다. 피아노의 음과 동화되어 가슴에 와 닿는 그녀의 노랫소리는 청랑하고 선연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세영은 저편에 있지만 내 지척에서 노래하는 듯한 느낌이 인다. 다정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말아줘요.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예전처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무리네요. 시간을 놓쳐버린 내가 원망스러워요. 좀 더 용기를 냈었다면 당신과 나, 지금과는 다른 관계가 되었을 테죠. 헤어지기 싫어서 쫓아왔지만 당신과 곁에 있는 그 사람은, 순진하고 행복한 웃는 얼굴을 주고받는군요. 내 슬픔을 모르는 채. 계속, 수없이 마주쳐왔지만 언제나 서글퍼요. 같이 있어도 혼자 있는 것만 같아요. 알아요. 당신이 더 이상 날 바라보지 않는 다는 것을. 기회가 닿아 그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젠 아무것도 필요 없을 거예요. 당신은 모르고 있어요, 내 마음을. 사랑해요. 처음 마주쳤던 그 순간부터. 이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말할 수 없어 가슴만 아파와요. 이 마음 눈치 채지 못하는 당신은, 이젠 나와 다른 꿈을 꾸겠지요. 끊어질 듯 간결하게, 터질 듯 강렬하게 음이 몇 번이고 오고가자 세영의 연주는 끝이 났다. 슬픔의 여운이 남는 아름다운 곡이었다.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감동적인 곡이었다. 직접 작곡한 것이라면 그녀는 음악의 귀재다. 이것은 범인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있었다. 유나와 비견해도 전혀 꿀릴 것이 없는 실력이었다. 누군가를 향하여 호소하듯 강렬한 슬픔이 실린 노래. 그것은 듣는 이로 하여금 애틋한 애수를 불러일으킴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난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세영의 등을 바라보았다. 세영의 노래의 시점이 향해있는 곳은 다름 아닌 나였다.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은 지연누나를 뜻하는 것이었겠지. 듣다보니 언젠가 겪어본 것 같기도 하다는 느낌에 혹시나 과거를 돌아보니 그간의 내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가. 세영은 의자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며 수그렸다. 내 눈이 가늘어진다. 왜. 왜 지금에 와서 내게 간접적인 고백을 하는 거지? 후회하고 있는 거냐, 세영? 그날 옥상에서 했던 말을? 싫다고 말해놓고서……. 내게 좋아한다고 하는 이유가 뭐야? 그 말을 하기엔 이미 늦었어. 늦었다고……. “…….” 하지만……. 난 이 순간을 기다린 것일지도 모른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꼬리가 처진 눈으로 발코니 창문너머를 보았다. 하늘이 모든 것을 원점으로 회귀시키려는 듯 눈물을 흘린다. 잿빛의 구름 속에 세상을 가둬― 뒤틀린 시간을 남김없이 씻어내고 싶은지……. Level 6. 던젼 이벤트(Dungeon Event). (1) Level 6. 던젼 이벤트(Dungeon Event) 아침 햇살이 느껴진다. 두 눈을 감고 잠 속에 빠져 있어도 부드러운 아침 햇살은 혼탁한 의식을 깨우려 하고 있다. 감각이 점차 되돌아온다. 조용한 분위기. 동시에 은은한 빛깔마저 감도는 주변 색채. 공기는 상쾌했고 또한 부드러웠다……까지는 말 못하겠다. 정화가 많이 이루어졌다한들 도심에 그런 공기가 있을 일는 없었다. 아무튼 아침은 그렇게 나를 찾아왔다. 오늘 날씨는 아무래도 지금까지 겪어왔던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 같다. 눈을 떴다. 몸은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눕혀져 있다. 별 생각 없이 몸을 일으키고 시야를 정돈했다. 창 밖에서 밝은 아침햇살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럼 후딱 일어나서 학교나 가야겠다. 이번 여름방학동안은 내가 학생의 신분이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을 정도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버렸으니까. 나는 침대를 정돈한 뒤에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방문을 열었다. “일찍 일어났네?” “좋은 아침이에요, 오빠.” 거실로 나오니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내고 있는 은현이 보였다. 은현은 내게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하고 재차 머리를 닦는 것에 열중했다. 언제부터인가 은현은 모발관리에 온갖 정성을 쏟고 있었다. 글쎄, 내가 기억하기로는 유나를 좋아하게 된지 한달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을 것이다. 유나의 머리 같은 검은색 생머리가 좋다고 말했더니 그 다음날부터 저렇게 되었지 아마? 여자로서 느끼는 질투심이려나? 생각보다 재미있는 녀석이라니까. “오빠. 나 머리 하는 것 좀 도와줘요.” 화장실로 들어가려는 날 은현이 불러 세웠다. 녀석에게로 자연스럽게 옮겨지던 시선이 곧이어 텔레비전 위쪽에 걸려있는 뻐꾸기시계로 향했다. 8시. 9시까지 등교니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 2043년(지금은 2087년)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여려가지 정책들이 바뀌었다. 그중에 하나가 교육법재정인데, 이것으로 모든 학교의 등교시간은 9시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로 편중되어 있던 중요 교육도 대학교로 분산되어 2043년 이전의 입시전쟁이라는 것도 사라졌다. 대학도 필수 코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뭐, 그래도 수능시험 쳐서 입학하는 것은 여전하나 한곳에 집중되는 일은 드물어졌다. 모든 대학이 동등한 입지를 갖추었는데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잖은가. 엘리트들이 가는 대학이 따로 있으나 나와는 관계없으니 제외다. 성적도 안 되거니와 가까운 곳 아니면 안가. 미르고도 가까이에 있어서 지원한건데. 은현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만 한 뒤 도로 나왔다. 머리야 어제 감았으니 하루쯤 보내는 것은 괜찮겠지. 내가 다가가자 은현은 왼쪽 다리를 소파위에 올리고 비스듬하게 앉았다. 옆에 앉아 녀석의 등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주면 돼? 부채질이라도 해주련?” “자연풍이 좋기는 하지만 그러면 오빠가 힘들잖아요. 드라이어로 말려주기만 하면 되요.” “쳇. 부려먹는 주제에 인심 쓰는 척 하다니.” 은현의 머리를 약하게 쥐어박고 녀석이 해실거리며 넘겨준 드라이어를 작동시켰다. 위이잉 하고 모터가 돌아가며 뜨거운 바람이 새어나왔다. 은현의 긴 머리칼이 바람에 가볍게 하늘거리고 양 갈래로 흩어졌다. 머리를 다듬어주다가 무심결에 은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촉감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간질이며 미끄러져갔다. 묘한 느낌에 정신이 멍해진다. 허리까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파묻었다. 향긋한 과일향이 코끝을 스친다. 아마 유나도 같은 느낌에, 같은 향기였었지. 그녀도 은현처럼 머리를 관리했을까? 시간 나거든 진윤에게 물어봐야겠다. 나중에 이 질문에 대해 진윤이 답하길. 유나는 머리만 감고 말았다고 한다. 어찌 보면 내가 완벽한 남성상(?)이어서 남자들의 적(?)이 되었듯이 그녀도 여자들의 적이 아닐까 싶다. 따로 하는 것 없이 기본적인 것만으로 최상의 상태를 유지했다고 하니 말 끝난 거지. “뭐, 뭐하는 거예요?!” 본의 아니게 숨을 훅 불어넣자 은현이 앙칼지게 소리 지르면서 몸을 홱 돌렸다. 퍼뜩 정신을 차려 앞을 보니 울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는 은현이 있었다. 아아. 이러니 은현이 날 좋아한다고 했지. 내 행동에 문제가 있던 거야. 녀석 탓할게 못되는 걸. “아아, 미안. 누군가가 떠올라서.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미안하다. 그런데 너 머리 진짜 많이 길었다?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는 말을 돌리고 웃어보였다. 웃어야 돼. 이 상황을 타개해나가려면 웃는 얼굴로 당당해져야만해! 여기서 머뭇거렸다간 오해 살지도 몰라! 은현은 날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미소 짓고 몸을 돌렸다. ‘오빠가 내 몸을 탐할 리가 없지’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보이는)된 미소였다. 난 안도했지만 그 과정에서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드라이어를 다시 들었을 때 은현이 말했다. “오빠는 긴 생머리를 좋아했잖아요. 검은머리가 아니어서 많이 아쉽지만 말이에요. 지금은 오빠에게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지만, 습관은 호락호락 바뀌는 게 아닌가 봐요. 그동안의 패턴이 고정되어 정신을 차려보면 기계적으로 머리를 감고 있는 거 있죠.” 은현의 머리색은 검은색이 아니다. 선천적으로 짙은 갈색이었다. 눈동자고 갈색이고. 친가 외가 통틀어서 갈색 머리를 가진 이가 없으니 상당히 별종이라면 별종이다. 덕분에 친가에서 어머니를 의심하는 사태가 일어났었다. 의심이 얼마나 심했으면 종래에는 유전자검사까지 했겠는가. 결국엔 부모님 사이의 자식이 맞다는 것으로 판명되어 친가에서 사과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지만 말이다. 나는 은현의 말을 들으면서 드라이어를 빗으로 바꿔들었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빗질을 해주었다. 조금씩 엉켰던 부분이 곱게 펴지며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오빠. 유나언니 정말 좋아했죠?” “그래. 죽도록 좋아했지.” 그건 지금도 변함없고. 녀석의 질문에 가볍게 대꾸해주고 머리끈을 찾았다. “나, 유나언니 무척이나 질투했어요. 좋아하는 사람의 관심을 받았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지만, 당시의 난 사랑에 눈이 먼 사춘기 소녀였어요.” 문제라면 대상이 친오빠라는 점이다. “오빠가 나를 조금만 차갑게 대했다면 대상은 바뀌었을 테죠. 하지만 오빠는 언제나 웃어주었어요. 난 그걸 잘못 이해한 거예요, 바보같이. 좀더 생각이 깊었다면 오빠가 가족으로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네 잘못은 없단다, 은현아. 모두 이 못난 오라버니 탓이니 자책하지 말려무나. 그런데 이놈의 머리끈은 어디로 사라진 거야? “오빠가 정말 좋아요. 물론 친오빠로 말이죠. 하지만 여전히 이상형은 여전히 오빠에요. 오랫동안 바라보다보니 고정되었달 까요?” 쯧쯧. 어서 눈을 낮추거라. 이 세상에 네 오빠만큼 잘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단다. 레벨차이가 커도 너무 커. 괜히 날 이상형으로 잡았다가 눈에 차는 남자가 없어 평생을 독신으로 살지 말고 말이야. 오빠로서 네가 시집가는 모습은 반드시 봐야겠다. 간신히 소파 구석에 처박혀있는 검은색 머리끈을 찾아내어 머리를 가운데로 모아 포니테일 스타일로 올려 묶었다. 일 끝냈다는 흐뭇함에 손을 탁탁 털어낼 때 은현이 나와 마주되게 앉으며 생긋 웃었다. “만약 내가 나중에라도 남자친구 데리고 오면 반갑게 맞이해줄 거죠?” “내 마음에 든다면. 아니다싶으면 결사반대.” “에, 뭐예요! 사랑스런 동생이 선택한 남자인데 당연 무사통과 되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디서 콩깍지가 끼어서는 놈팡이 같은 놈을 데려올지 모르는데 내가 미쳤냐? 너도 내가 요상한 여자에게 반해 소개시켜주면 반대할 거면서.” “그건 동생으로서의 권리에요! 여우같은 여자는 내가 용납 못해!” “나도 오빠로서의 권리가 있다! 놈팡이 같은 놈은 내가 용납 못해!” 은현이 볼을 부욱 부풀리면서 인상을 쓰기에 나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 대꾸해주었다. 그리고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잠시간 정적. “풋!” “킥!”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웃을 터트렸다. 나는 손을 뻗어 은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녀석은 혀를 낼름 내밀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옷 갈아입고 나와. 현관에서 기다릴 테니까.” “네에―.” 은현은 그렇게 대답하고 자기 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나도 내 방으로 돌아와 교복으로 갈아입고 가방을 들었다. 연주 때문에 듀오에게서 받은 손목시계를 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듀오가 매일 차고 다녔던 것이어서 생일잔치가 끝나고 남자들끼리 혈투가 벌어졌지만, 선물 받은 것을 누구에게 줄 정도로 난 착하지 못하다. 당연히 전부 밟아버리고 사수했지. 현관으로 나와 신발을 신고 은현을 기다렸다. 학교는 다르지만 가는 방향이 같아서 언제나 함께 등교하기 때문이다. 잠시 뒤 세일러복을 입은 은현이 ‘와아’ 소리 지르며 달려와 검은색 구두를 신고 내게 팔짱을 껴왔다. 나는 피식 웃어주고 그 상태로 아파트를 나섰다. 여느 때보다 상쾌한 아침이다. Level 6. 던젼 이벤트(Dungeon Event). (2) 집으로 돌아온 나는 뜨겁게 달구어져 땀으로 코팅된 몸을 이끌고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샤워를 하는 지금도 온몸이 땀에 절어 끈적끈적한 것 같아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아침부터 날씨가 유난히 상쾌하다 싶어 좋아했더니만 이런 식으로 배신을 때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오늘 하루 서울시 전체가 찜통에라도 갇힌 듯 무지막지한 열기에 휩싸여버렸다. 그야말로 살인적인 폭염이다. 도대체 여름도 다 끝나가는 판국에 이런 날씨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해가 안 간다. 기후를 관리하는 신들이 노망이 든 건지 심히 궁금하다. 병원에나 찾아가 진찰이나 받아보지, 쯧. 길가에서 더위 먹은 강아지마냥 혀를 길게 빼고 비틀비틀 걸어가는 사람들을 비웃을만한 게 못된다. 불쾌지수가 200%인 만큼 조금이라도 비웃었다간 척추가 접혔다 펴지는 진귀한 경험을 겪을 수 있을 것이다. 척추가 접히는 느낌이 뭔지 궁금해 하는 사람에게 강력추천이다. 아, 그전에 상대가 터지는 울화를 못 이기고 쓰러지겠구나. 샤워를 끝마치고 옷을 입은 뒤에 거실로 나와 에어컨을 틀었다. 후끈하던 집안이 점차적으로 시원해져간다.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시원한 느낌이 등을 타고 전해져왔다. “후아―. 이제야 살 것 같네.” 한바탕 전쟁을 치른 것 같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지금쯤 집으로 기어오고 있을 은현을 떠올렸다. 체력이 좋은 나조차도 이럴진대 은현이 녀석 집에 올 수 있으려나 몰라. 오다가 쓰러지면 어쩌지? 마중이라도 나갈까? 철컥. 나갈까 말까 고민하는데 때마침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현관문이 느릿느릿 열린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녀석이 온 모양이었다. 잠시 뒤 생기라고는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은현이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선 은현은 힘겹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집에 무사히 왔다는 것이 자랑스러운지, 눈물을 글썽이며 두 주먹 불끈 쥐어 보이고 앞으로 털썩 쓰러졌다. “어헉! 은현아!!” 그를 본 나는 경악을 하여 현관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재빨리 무릎베개를 해주고 뺨을 약하게 쳐주자 은현이 눈을 살짝 떴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오빠……. 물…….” 이 말 못 알아들으면 인생 잘못 산거지. 곧장 주방으로 날아가 정수기에서 미지근한 물을 받아 소금을 탄 뒤 현관으로 돌아왔다. 컵을 옆에 두고 나서 은현을 반듯하게 뉘였다. 그리고 블라우스의 단추 두개를 풀어주고 상체를 비스듬하게 들어 입에 물 컵을 댔다. 컵을 기울이자 물이 자그맣게 벌려진 입속으로 흘러들어간다. 가끔 턱으로 흘러내리기도 했지만 그걸 일일이 따지고 앉아있을 정도로 한가하진 않았다. 찬물로 한 컵 더 가져와 그것마저 마시게 한 뒤에 은현을 소파위로 옮겼다. 그제야 은현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오빠.” 어느 정도 기운을 찾았는지 은현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물수건을 가져와 은현의 얼굴을 닦아주고 대답했다. “사람 좀 걱정시키지 마라.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헤에……. 미안해요.” “이젠 좀 괜찮아졌고?” “오빠 덕분에요.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서 폴짝폴짝 뛰어 보이는 은현. 난 피식 웃어주고 은현을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사베티움에 있을 테니까, 샤워하고 나서 바로 엘-가드에 접속해라. 애들 모아서 던젼이벤트에나 참가하자.” “네.” 은현이 화장실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하고 내 방으로 가 마운트 고글을 들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누워 엘-가드에 접속했다. 접속 절차를 마치고 나자 배경이 바뀌고 시야에 금색 가득한 사베티움의 정경이 들어온다. 사베티움은 일전에 말했듯이 바크트리아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다. 사막지대인 대륙 남단에 있음에도 크다는 이점이 있어 엄청난 수의 유저들이 몰린다. 워프게이트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사막을 걸어야 한다는 불편함 때문에 지금처럼 발전하진 못했지만, 개발된 이후에는 도시 간 이동이 원활해져 대륙에서 가장 발전한 무역도시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또한 사베티움 내의 대부분의 것들은 금색 돌로 이루어져 있어, 흡사 전설속의 황금도시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거기다 도시 주변에 현실세계의 피라미드 같은 유적지들도 만들어 놓아 몽티프와 같이 최고의 관광도시로 손꼽혔다. 워낙에 도시가 커 동, 서, 남, 북문과 중앙에 리스타트(Restart)지점이 있는데, 거기서 내가 접속된 곳은 남쪽 성문이었다. 어제 남문 근처 초보자 존에서(모든 도시의 일정 구역은 초보들의 사냥터로 지정되어있다. 그들은 레벨이 낮기 때문에 도시와 가까이에 있어야만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초보들을 돕다가 로그아웃 했기에 이곳으로 접속된 것이다. 나는 일자로 쭉 뻗은 대로를 보다가 몸을 성곽 쪽으로 돌렸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돌들 때문에 순간 눈 돌아갈 뻔했다. 오늘따라 너무 금처럼 보인다. 저거 뜯어다가 금이라고 속이고 팔아먹을까? 잠깐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한 뒤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시도했다가 돌이 빠지질 않아 포기했던 게 떠오른 까닭이다. 그때 유저들과 성문 양옆으로 서있는 네 명의 경비병 NPC가 비웃는 가운데 뽑으려고 용쓰다가 얼마나 얼굴이 팔렸던가. 생각하기 싫은 괴로운 과거였다. 한탕 해보겠다는 허황된 욕심을 버리고 성곽을 따라 시선을 죽 옮기다보니 한껏 열려있는 철문이 보였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도시마다 어째서 철문이 존재하는지 이유가 궁금하다. 몹들이야 따로 소환하지 않는 이상 도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니 놈들을 막겠다는 의중에서 만들어놓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현실성을 따져 만들었다는 게 유력하나, 닫는 것이 불가능한 성문을 경비병 NPC로 지키게 할 필요가 있을까? 뭐, 만든 사람이 이렇게 만들겠다는데 뭐라 가타부타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솔직히 녹슬어가는 성문은 도시 미관에는 그리 좋지 않다. 으음. 별로 상관없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군. 어차피 성문 보는 것은 하루에 몇 번 안 되잖아. 따로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나는 녹슨 철문을 힐끗 봐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사베티움의 중앙으로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유저들로 빼곡히 들어찬 대로를 걸으면서 역시 대륙 제 1의 도시 사베티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4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지만 상주인구가 그런 것은 아니기에 대로에는 유저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베티움 동쪽에 있는 소도시(小都市) ‘파뮬라(Pamula)’와는 비교자체가 되질 않는다. 유저들의 옷깃을 스치며 한참을 걸은 후에야 사베티움의 중앙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분수대 중앙에 물이 흘러나오는 항아리를 든 백색의 천사상이 중앙에 세워져 산뜻한 느낌을 주는 트렌과는 달리, 이곳은 지름 10미터의 원형 잔디 위에 망토를 휘날리며 검을 치켜 올린 유강현 사장의 동상만이 세워져 있어 삭막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지금처럼 바글바글 걸어 다니는 유저들이 없다면 말이다. 아시아에 밤이 내려도 사베티움의 유저 수는 별 변동이 없을 터다. 이쪽이 해가지면 지구 반대쪽에는 해가 떠 그쪽 유저들의 활동이 시작될 테니까. 한국 게임계 폐인들도 한몫하겠지. 학교에서 친구들과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해두었으니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지금이 RT 4시니까(학교는 3시에 끝난다), 5시까지 기다려보다가 아무도 오지 않으면 나 혼자서라도 던젼이벤트에 참가신청을 하러갈 것이다. 한시간을 기다리게 되면 여기선 무려 10시간이나 기다리는 것이라고. 잔디 주변으로 빙 둘러져있는 벤치에 자리가 남아있기에 그곳에 앉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사람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공기가 폐부에 들어온다. 여기저기서 노점을 열고 열심히 물건을 팔고 있는 캐러밴(Caravan)들을 보기도하고 대로를 활보하는 미녀 유저들의 늘씬한 몸매를 훔쳐보기도 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하다가 안 되면 스크린 샷 창을 열어 지금까지 찍어왔던 나이스 갤러리(?)들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보냈을 때 머리위로 음영이 드리웠다. 스크린 샷을 확인하던 나는 창을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유나……, 아니 세영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세영의 마음을 알고서도 평소처럼 세영을 대했다. 그녀도 아무런 말이 없었기에 나와 세영의 사이는 예전과 변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오늘 수업시간에도 몇 번이나 세영과 눈이 마주쳤다. 한 시간에 열 번은 족히 마주쳤을 것이다. 얼마나 의식되던지 한숨도 못 잤다. 그나마 어제 초보자들 돕고 일찍 잤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오다가 더위를 못 이기고 길가에서 쓰러졌을 터다. 나는 달아오르려는 듯 뜨거워지는 얼굴을 휙휙 돌리고서 옆에 앉는 세영에게 평소처럼 말했다. “빨리 왔네? 성북동이어서 좀 늦을 거라 생각했는데.” “택시.” 쳇, 저 차가운 태도는 여전하구만. 짤막히 대답하는 세영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굳이 짧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 세영에게는 그게 익숙할지 몰라도 듣는 사람으로서는 기분이 상하게 된다. “택시타고 간 거냐?” “기다리게 해서 미안.” “5시까지 모이기로 하지 않았어?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너, 기다리는 걸 싫어하잖아.” “……!” 세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지만 내게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세영의 말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누구에게도 내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몇몇은 눈치 챘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몇 개월 전에 만나게 된 이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세영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세영은 내가 빤히 쳐다보자 기분이 나쁜 듯 미간을 미약하게 찌푸렸다. 기분 나쁜 건 이쪽이라고! “왜?” “너……. 내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걸 어떻게 안거지?” ----------------------------------------------------------------------- 오늘은 여기까지 -ㅁ-;; Level 6. 던젼 이벤트(Dungeon Event). (3) “…….” 내 질문에 그녀는 한동안 말문을 닫고 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실로 무표정하게 회답한다. “그냥 그럴 것 같아서 말한 것뿐이야.” “지금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할 때는 언제고, 뭐? 그냥 그럴 것 같아서 말한 거라고?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기가 차서 점점 언성이 높아졌다. 꽉 쥐어서 하얗게 바랜 손이 내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세영은 그저 담담하게 사과할 뿐이다. “미안.” “뭐가 미안한데? 추정해서 말한 거? 내 요구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못하는 거?” “미안.” “너란 여자는 대체…….”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세영에게 화가 나다 못해 허탈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지금까지 이 남극의 빙산 같은 여자를 데리고 무슨 말을 했나에 대한 회의감이었다. 그래, 끝까지 가보자, 세영. 어디까지 날 알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주마. 나는 몸을 일으켜 세영의 앞쪽으로 섰다. “한 가지만 묻자. 너―.” “오빠아!” 뒤편에서 들려오는 은현의 목소리에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젠장, 하필이면 지금 오다니. 고개를 돌려 유저들 사이를 헤치며 달려오는 은현을 본 뒤 다시 세영을 보았다. “다음에 다시 말하지.” “그래…….” 세영은 고개를 살며시 숙이며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어쩐지 유나에게 한마디 한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묻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 오랫동안 봐왔던 사람들보다 나를 잘 아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가 있겠는가. “나 왔어요. 아, 세영 언니도 있네요. 안녕하세요.” 금방 도착한 은현은 벤치에 앉아있는 세영을 보고 방긋 웃는 얼굴로 꾸벅 허리를 숙여보였다. 은현이 세영과 만나게 된 것은, 세영이 전학을 오고나서 일주일 정도가 지난 뒤였다. 휴일이어서 지연누나를 소개시켜주려고 같이 나갔었는데 거기에 세영까지 와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은현은 유나와 똑같이 생긴 세영을 보고 얼이 나가버렸고, 눈시울을 붉히며 와락 끌어안아 모두를 당혹케 했다. 유나를 질투하면서도 누구보다 잘 따르던 은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영이 유나가 아님을 안 지금도 지연누나보다 세영을 더 좋아하는 눈치다. 딱 봐도 웃는 정도가 틀리지 않은가. 은현은 좋아하는 사람에겐 웃음이 헤프거든. 세영은 은현에게 마주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던 나는 은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하다가 이제 와? 샤워를 10분이 넘게 하냐?” “맞다! 오빠!” “왜, 왜?” 손뼉을 치면서 눈을 빛내는 은현에게 움찔하여 되물었다. 은현은 마치, 신데렐라 백마 탄 왕자님 기다리는 격으로 황홀한 표정을 짓더니 몸을 배배꼰다. “나, 너무너무 기분 좋았어요. 친구들 말에 망설이다가 한번 해봤는데 말랑말랑하고 부드럽던 거 있죠. 비누칠까지 하니 그게 미끌미끌 해지면서 손끝이 달아올랐어요. 마지막에는 하얀 액체가 나와서 바닥을 미끄럽게 만들었구요. 다음에 또 할 거예요.” “…….” 은현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나는 물론 무표정하던 세영조차도 얼굴을 물감이라도 뒤집어 쓴 양 새빨갛게 물들였다. 세영과 은현의 외모 때문에 근처에 슬쩍 모여 있던 남성 유저들은 이상한 상상을 했던 것인지 일제히 코를 움켜쥐고 고개를 돌려 쌩하니 달아났다. 아마 피가 난다면 손가락 사이로 코피가 한됫박은 쏟아졌으리라. 뜨거워진 볼을 손으로 감싸고 떨리는 음성으로 은현에게 소리쳤다. “너, 너 대체 화장실에서 뭘 한거야?!” 내 물음에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회답하는 은현. “곰돌이 인형 빨래했는데요?” “…….”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나와 세영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 녀석에게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작은 해프닝이 있은 지 얼마 안돼서 성호가 접속했다. 성호에게 다른 이들은 왜 안 오냐고 행적을 물었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전부 수영장으로 잠적했어.” 연락도 없이 수영장으로 내빼버린 친구들을 떠올리며 으르렁거렸다. 이런 쳐 죽일 년 놈들! 너희들이 날 따시킬 수 있는 거냐!? 내일 학교에서 전부 싸잡아 밟아주겠어!! 더 이상의 기다릴 필요성을 못 느껴, 은현, 세영, 성호 이 세 명만을 이끌고 이벤트 협회로 가기 위해 북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연누나의 경우엔 어제 오늘 대학 친구들과 함께 어디론가 놀러갔기에 접속하지 못했다. 쩝, 같이 가자고 할 때 따라갔어야 하는 건데 말이다(학교는 어쩌고?). 날씨도 더운데 잘 있으려나 몰라. 이벤트 끝내거든 바로 로그아웃해서 전화해 줘야지. 이런저런 잡담을 하면서 30분 정도를 걷자 소음이 폭발하는 3층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건물의 꼭대기에는 화려한 필체로 ‘이벤트 협회(Event Society)’라고 휘갈겨진 간판이 달려있다. 이벤트 협회란, 어느 이벤트가 시작되었을 때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참가신청을 하는 곳이다. 그로인해 이벤트 협회는 모든 도시에 만들어져있다. 자신이 있는 도시에 이벤트 빌딩이 없다면 다른 도시로 가야하는 번거로움이 생겨 대부분의 유저들이 참가하지 않으려하기 때문이다. 유저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추구하는 미르트로선 유저들의 불참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니 모든 도시에 만들어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뜨거운 열기가 확하고 불어왔다. Level 6. 던젼 이벤트(Dungeon Event). (4) “유저들 한번 오라지게 많네. 참가 신청하다가 내일 학교도 못가겠다.” 성호는 건물 안을 빼곡히 채운 유저들을 보고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입추의 여지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는 듯했다. 이건 팔 하나 움직일 틈도 없지 않은가. 까딱 잘못했다간, 근처 여성의 엉덩이 쳐 변태로 낙인찍히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듀얼 랠리 때는 원활한 통행이라도 가능했는데……. 듀얼 랠리 참가는 150레벨 이상만 참가하자는 유저들 간의 암묵적인 규칙이 있어 유저들이 한번에 몰리는 경우는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벤트는 모든 유저들에게 개방되어 있어 이렇듯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로 몰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아마 다른 도시들의 이벤트 협회들도 이곳과 별반 차이 없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을 터다. 여기에선 참가가 지연되니 사람이 없는 도시로 앞다투어 이동했을 테니까. 뭐, 천만다행이라면 듀얼 랠리처럼 따로 서류를 작성할 필요 없이 NPC 앞에서 자신의 아이디만 부르면 바로 등록되기에 진행 속도가 빠르다는 것일까. 여기 유저들도 얼마간 기다리다보면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 얼마간이 문제지만……. 정 안되겠다 싶으면 내일 다시 오면 되겠지. 각 이벤트에 신청하는 것은 3일 동안 가능하다. 그럼에도 유저들이 빨리 참가를 하려는 것은 이벤트 당첨자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랄까? 서둘러 이벤트를 끝내서 돌아와야지만 정해진 인원수 안에 들어 상품을 획득할 수 있음이니. 성호의 짜증 섞인 말에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세영이 입을 열었다. “치열하겠어.” 그녀의 말에 우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도 아니고 지독하게 치열할 것이라 장담한다. 홈페이지에 올라온 이벤트 관련 공지를 보면, 던젼 이벤트는 퀘스트 성격이 강한 이벤트였다. 지금까지의 이벤트 대부분도 같은 형식이었지만 이번 것은 대단위 어드벤처까지 첨가된 진짜배기 퀘스트였다. 직접 던젼으로 찾아가 정해진 물건을 들고나와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익스펠 될 가능성이 희박했던 예전 것들과는 달리 사망할 확률이 높았고, 당연히 죽게 되거든 레벨 하락도 감수해야만했다. 보통 던젼 탐험에 이벤트라는 명목만 붙인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그만큼 위험한 이벤트이나, 그것을 알면서도 많은 유저들이 참가하는 이유는 이벤트 상품 때문이다. 일단 기본 1000명이었던 상품 대상자가 50명으로 줄어버린 데다가 상품도 ‘올 스테이터스(All Status) 30포인트 증가와 유니크 스킬 북 한 권’이라는데 눈 돌아가지 않을 유저가 어디 있겠는가. 한두 번 죽더라도 이득이 더 많이 오니(능력치 면에선 두 번 죽으면 손해지만)도박을 해볼 만도 한 것이다. 압사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인지라 은현은 내 검은색 망토를 꽉 쥐며 등 뒤쪽으로 바짝 붙어왔다. 세영도 은근슬쩍 내 팔을 끌어안고 몸을 사렸다. 이런 유저 밀집지역에선 성추행도 일어날 수 있으니 당연하다. 그것을 알기에 눈을 가늘게 떠 흘겨보면서도 이렇다할 말은 하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지금처럼 질서만 잘 지킨다면 한 시간 안으로 우리 차례가 올 거야.” 은현의 물음에 세영이 대답했다. 난 세영의 팔을 보고나서 얼굴을 보았다. 그녀가 말한다. “잠시 동안만.” 쩝, 그러던지.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는 것으로 허락의 의사를 전했다. 그러자 가만히 이쪽을 보고 있던 성호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결과는. “내게는 계속 그러고 있어도 괜찮은데.” “…….”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판다했는지 대답조차 안한다. 보기 좋게 차이는 것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성호는 낙담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는 ‘왜 저놈만…….’을 무한 리바이벌(Revival)한다. 참으로 처량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 세영의 말대로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건물 안은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뒤쪽에는 유저들이 여전히 많았지만 상관없었다. 우리 용건만 끝내고 가면되는데 무엇하러 신경 쓰랴. 네 개의 접수처에서 1번 접수처가 비자 나는 일행과 함께 그리로 향했다. 창구 앞에 서자 무테안경을 쓰고 세미정장을 입고 있는 성숙한 이미지의 여성 NPC가 사무적으로 말한다. “아이디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저분의 정보와 동일하지 않을 경우 등록되지 않습니다.” “카르마.” 나는 시큰둥하게 아이디를 말했다. 그리고 NPC의 확인 멘트를 기다리는데, 이 NPC가 ‘등록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할 생각이 없는 건지 날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쩐지 뜨겁게 느껴지는 눈빛이어서 얼굴이 달아오른다. 뭐야, 내가 허위로 말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카르마가 분명 내 아이디가 맞다고. 혹, 발음을 잘못했나? 캐르마라든지 가르마라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게 첫눈에 반한 것?! 오, 맙소사! 시공을 초월하여 NPC마저도 내게 반하다니, 난 왜 이리 매력덩어리인가! 세상 남자들이 불공평해 하지 않은가! 하지만 NPC양. 이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입니다. 제겐 이미 ‘유지연’이라는 여인이 있어요! ‘괜찮아요. 전 극복할 수 있어요.’ 그래도 포기할 수 없으신 겁니까? 그럼 첩은 어떠실런지……. ‘상관없어요.’ 상관없다고요? 나만 있으면 된다구요? 오오, 순애보적인 사랑을 추구하시나 봅니다. 좋아요, NPC양. 지금 당장 지연누나에게 허락받고 양가 부모님께 인사 올리러 갑시다! 눈이 돌아버린 나는 NPC양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갑시다! 먼저 NPC양의 집으로!” 그러자 냉큼 안경을 빛내며 답하는 NPC양. “등록되었습니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어헉!” 이럴 수가! 나와 사랑의 밀담(?)을 나눌 때는 언제고 지금에 와서 한입으로 다른 말을 하는 겁니까! 이 나쁜 여자! 날 가지고 놀았던 거야!! “끝났으면 비켜라 좀. 혼자서 갖은 꼴값 다 떨고 있어. 부끄럽지도 않냐?” “오빠 바보 같아요.” “…….” 성호와 은현이 눈을 흘기며 핀잔을 준다. 세영은 말은 없었지만, 미친놈 보는 얼굴을 하여 그네들과 별반 차이 없는 모습이었다. 더욱 암담해져버렸다. 그래, 늬들 잘났다. 젠장……. Level 6. 던젼 이벤트(Dungeon Event). (5) 이벤트 신청을 모두 마치고 중앙광장으로 돌아온 우리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세영과 은현 때문에 남성 유저들이 계속해서 우리 앞에서 알짱거렸지만 일부러 무시해버렸다. 가까이 와서 찝쩍대지만 않는다면 그냥 놔둘 생각이다. “우리끼리만 가기엔 위험하지 않을까? 열사의 사성은 S급 던젼이잖아. 아무리 네가 헬(Hell)― 흠. 듀얼 랠리 챔피언이라고 해도 이 인원으로는 클리어가 힘들다고. 아니면 무슨 좋은 수라도 있냐?”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인원을 늘리자고 주장하는 것과 매한가지인 말을 하는 성호. 본래 계획이었다면 친구들과 모여서 10명이 함께 가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차질이 생겼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리고 나도 성호에게 녀석들이 수영장으로 날랐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인원보충은 생각해오던 것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성호 말대로 내가 아무리 강하다한들 네 명으로 S급 사냥터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낮으니까. “우리가 다른 파티에 참여하든지 유저를 받든지 해야겠지. 확실히 이 인원으로는 어려우니 까.” 나는 주변을 힐끔 힐끔 살피면서 조심스럽게(파티말로 말하고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잖은가) 말했다.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는 늑대들의 귀에 유저를 받는다는 말이 들어갈 시엔 성가신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까닭이다. 듣는 즉시 당장 자신들이 우리 파티에 들겠다고 난리를 치겠지. 미안하지만 기골 있는 유저가 아니라면 받지도 않는다고. 세영은 은현과 같이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임자 있는 여자인 척 하면서 말했다. “다른 파티로 해.”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뭐, 원한다면.” 나도 파티에 드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는 차에 세영과 은현의 말까지 들으니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성호도 좋을 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럼 이제 새로이 대두되는 문제는……. “인원이 모자란 좋은 파티를 어떻게 찾느냐는 건데…….” 고수들이 모여 있는 파티까지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그런 파티들이야 벌써 열사의 사성으로 떠났을 테고, 남은 것은 그럭저럭한 파티들이 대다수일 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볼을 긁적이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고 했지. 말로만 말고 직접 찾아보자.” 내 말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들어갈 만한 파티 찾아다니기를 어언 한 시간. 계속해서 광장을 배회하던 중, 중앙광장 귀퉁이에서 어느 순간 귀가 쫑긋 서게 되는 말을 듣게 되었다. 팔을 뻗어 일행의 걸음을 멈추게 한 뒤 귀를 기울였다. “미치겠네. 시간도 촉박한데 이것들은 대체 왜 안 오는 거야? 전화는 해봤어?” “케빈은 자고 있는지 받지를 않아. 프레드하고 앤드류는 오늘 야근 때문에 접속하지 못한다더군. 앨리사는 부모님 제재로 마운트 고글을 압수당했고.” “앨리사……. 그 녀석 어제 또 밤샜나. 앨리사도 폐인 다되어가는군.” “난리다, 난리. 이벤트에 늦게 참가하면 자동 탈락될까봐 꼭두새벽에 접속했더니만……. 이래선 할 수도 없잖아.” 막 왔는지 그들은 우리 쪽에서 5미터 지점에 있는 벤치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시대가 변화하면서 번역시스템도 좋아졌기에, 그들의 대화는 한국인인 나도 곧장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벤트는 한정된 인원에게만 상품이 주어진다. 더욱이 이번 이벤트는 50명이 한계였다. 저들이 외국에 산다면 지금은 시간차로 인해 잠을 청하고 있을 시간이니, 나중에 가서 이벤트 당첨자가 모두 차 참가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찍 접속한 것 같은데……. 불쌍하군. 인원 미달로 이도저도 못하게 생겼으니끼. 그들의 구성은 왼쪽으로부터 흰색 그레이트 해머(Great Hammer)를 바닥에 내려놓은 백발 남자, 헌터보우(Hunter Bow)의 활시위를 만지작거리는 금색 단발머리 여성, 과묵하게 입을 닫고 침묵하는 흑발의 소년, 골이 땡기는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는 밤색머리 사내와 옆에서 그의 등을 다독이는 수녀복의 여인, 그리고 우리를 보는 것인지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보라색머리의 소녀 이렇게 여섯이었다. 레벨은 대충 밤색머리 남자가 280대 레벨이고 나머지는 200~250대로 고만고만했다. 이정도면 참가해도 아무런 하자가 없는 파티였다.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의견을 물었다. “어때? 레벨도 저 정도면 적당하고 괜찮을 성 싶은데.” “괜찮네. 저런 파티가 남아 있다니 의외인걸. 야근 어쩌고 하는 거 보니 외국인인 모양이야.” “그렇겠지. 한국은 아직 해가지지 않았으니까. 그럼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는 거지?” 내 물음에 은현과 세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 쪽은 만장일치가 되었으니 이제 저쪽에서만 허락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몸을 돌려 다시 그들이 있는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보라색머리의 소녀가 자신들 파티의 한탄 섞인 대화는 안중에도 없는 듯 말똥말똥한 눈으로 날 바라보기만 한다. 아니면 세영인가? 아니,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파티 인원이 부족하시다고 들었습니다. 급하시다면 저희가 파티에 들 수 있을까요? 저희도 던젼이벤트에 참가하려는데 인원이 부족해서요.”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말했다. 인원 보충에 대해 열띤 대화를 하고 있던 다섯 명은 대화를 멈추고 일제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라색머리의 소녀도 세영이 아닌 날 보는 것으로 보아 계속해서 나만 주시했었나 보다. 소녀를 제외한 다섯 명은 말없이 우리를 판단하려는 듯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우리보다 레벨도 낮으면서 이쪽의 레벨을 판가름하려 들다니, 참 우스운 일이야. 뭐, 저쪽에서 우리 레벨을 알 턱이 없으니 우스운 게 아닌가? 상대의 레벨이 어느 정도인지 측정하는 것. 그것은 자신의 마나를 측정하고자하는 유저에게 흘려보냈을 때 그 유저의 반발력의 정도로서 측정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보다 레벨이 낮으면 이상하게 측정되는 단점이 있었다. 고수들은 파리들이 꼬이는 걸 막기 위해 항상 마나를 갈무리하고 다니는데 거기다 백날 측정해봐야 저렙으로 밖에 더 보이겠는가. 동급 레벨 이상의 유저가 측정하지 않는 이상에야 본래 레벨을 알기 힘든 것이다. 다른 한 가지 방법도 있기는 한데……. 이는 상대의 스테이터스를 직접 느끼는 것으로, 고레벨들만 쓸 수 있는 전용 방법이었다. 저 레벨들이 할 경우엔 마나로 하는 것만도 못한 측정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레벨들이 할 경우엔 상대가 자신보다 레벨이 높더라도 큰 편차로 측정되지는 않으니(약 10~15레벨 차이가 날 경우) 이를 애용하는 것이다. 우리 측은 250레벨인 은현을 제외하고 300레벨 이상이어서 저들로서는 은현 외엔 본래 레벨을 알아내기 힘들다. 저렇게 용을 써봐야 150레벨 이하로 밖에 보이지 않을 테지. 거기다 하나같이 장비가 허름하다는 것도 일조를 하는군. 역시나 다섯 명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고 리더인 듯 밤색머리 사내가 벤치에서 일어서 내 앞으로 섰다. “클래스 제네럴(General)인 세비치드라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클래스나 레벨이 어떻게 되시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제게는 한분만이 250대 레벨로 측정되어서 그렇습니다.” 세비치드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우리가 기분나빠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네럴은 소드맨에서 노멀 스킬을 병법서 종류로 배워 솔져(Soldier)로 전직한 뒤 물리 공격 스킬을 배워 코로널(Colonel), 브리가디어(Brigadier), 제네럴(General)의 순으로 될 수 있다. 이쪽 클래스는 지략가 타입이어서 지력(INTellect) 보정치가 높았다. 나는 그의 유연한 태도에 웃는 얼굴로 회답했다. “클래스 소드 마스터(Sword Master)인 카르마라고 합니다. 레벨은 300정도.” 원래는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 소드 엠페러(Sword Emperor)에다가 397레벨이지만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390대 레벨이라고 말했다간 태도가 급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말해야만 그들이나 우리나 서로 대하는데 어려움도 없고 여러모로 편하다. 내 말에 잠시 놀라던 세비치드는 측정이 이상하게 되었던 이유를 알았는지 곧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세영과 성호를 번갈아 보았다. “아아, 그렇군요. 그럼 이쪽 분들도……?” “소드 마스터 류시아.” “클래스 제노사이더(Genocider) 칸이라고 합니다.” “전 클래스 프리스트인 세이나라고 해요.” 세영은 소드마스터다. 유나는 세이지(Sage)였으니 세영을 유나라고 착각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아이디가 드라다. 유나는 여기서도 유나라는 아이디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세영을 유나와 닮았다고만 했을 뿐 유나라고 단정 짓지 못하는 것이다. 제노사이더는 소드맨(Swordman), 파이터(Fighter), 워리어(Warrior), 버서커(Berserker) 다음의 마스터 클래스다. 민첩성은 뒤쳐지지만 체력과 공격력, 방어력이 좋아 탱커(Tanker : 흔히 몸빵이라고도 한다)에 유리하다. 은현의 클래스야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 듣겠지. 세비치드는 세영과 은현의 외모를 앞에서도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차분한 성격과 흔들리지 않는 절제를 가지고 있는 사내였다. 뒤에서 헤까닥 한 해머를 든 유저와는 반대된다. 해머의 유저는 빼버리고 어쨌든 세영과 은현은 관심 밖이라는 거지? 어디하나 빠지는 게 없는 파티로군. 일행이 소개를 마치자 나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그럼 파티에 받아주실 건가요?” “물론입니다. 여러분 같이 레벨이 높으신 분들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저희에겐.” 세비치드는 흔쾌히 대답하며 자신의 일행을 불렀다. 그의 일행은 꼿꼿이 도열하여 자신을 소개했다. “클래스 화이트스미스(Whitesmith)인 로크마입니다.” 해머를 옆에 세워두고 포권을 해 보이는 로크마. 나도 포권을 하고 웃었다. 그러나 세영을 보고 침을 주륵 흘리는 그를 보고 곧장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생긴 것도 험악하게 생긴 주제에 어디다 감히 눈을……. 화이트스미스는 블랙스미스(Blacksmith)보다 질 좋은 아이템을 양산해낼 수 있는 클래스로서, 스미스 계열의 마스터 클래스인 골드스미스(Goldsmith)의 이전단계다. 이쪽 클래스 쪽은 스킬을 제조 같은 것으로만 배우기에 손재주(DEXterity) 보정치가 상당히 높다. 클래스 트리(Class Tree)는 챕맨(Chapman)에서 제조 스킬 북을 배워 나가 어프런티스(Apprentice), 블랙스미스, 화이트스미스, 골드스미스다. “클래스 이글(Eagle)인 네이라고 해요.” 그녀는 손을 가지런히 모아 배위에 살포시 올리고 허리를 숙였다. 가이드가 자주하는 인사랄까? 흠, 인사하는데 전혀 어색함 없이 부드럽게 연계되니 정말 가이드가 본 직업 아닐는지? 이글은 아처(Archer), 헌터(Hunter) 다음의 클래스다. 이대로 레어 스킬과 유니크 스킬을 배우면, 차례대로 스나이퍼(Sniper), 스트라이커(Striker)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궁수계열 쪽은 공격속도와 사정거리가 좋아서 공격유효범위가 작은 몹들을 상대할 때 좋다. 치고 빠지는 유격전(遊擊戰 : 흔히 게릴라전이라는 말을 사용한다)에 유리하니 말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찬석의 여자친구인 은주가 스트라이커다. “클래스 비숍(Bishop)인 주디스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세비치드의 연인인 듯 그의 옆에 서서 웃어 보이는 주디스라는 여인. 어깨에 닿을 듯한 감청색의 머리끝에 웨이브가 들어가서 그런지 동안으로 보였다. “안녕하세요. 클래스 엘레멘탈 리스트(Elemental List :정령술사)인 레네트에요. 만나 뵙게 되서 영광이네요.” “……?” 레네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영광이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누군가 존경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하는 것이 통상이다. 나로서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언사였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레네트는 모두의 의문 섞인 시선을 무시하면서 내게 웃어보였다. [헬 마스터, 드래곤 헌터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로 친구등록이 되는 것을 보니 확신까지 서네요.] Level 6. 던젼 이벤트(Dungeon Event). (6) -end- “헉…….” 눈앞에 뜬 메시지에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안 거지? 내 정체가 탄로날만한 것은 아예 없었을 텐데……. 아니면 그냥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비슷해서 찍은 것인가? [거짓말을 하신 것은 귀찮아질까봐 그러신 거죠? 저도 비밀에 붙여드릴게요.] 찍은 것은 아니로군……. 정말 내가 뭔지를 알고 있잖아? 눈치 채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일단 지연누나도 날 알아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쉽게 알아볼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거울의 숲에서는 암적색 로브 때문에 걸렸다손 치더라도, 지금은 전혀 추정될만한 단서가 없었다. 옷도 예전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새로 장만한 것이고 검은색 망토를 입고 있으니. 거기다 지금까지 일을 벌일 때는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지금도 그러하지 않은가. 날 따라하는 사람이 많음에도 날 한번에 알아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저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도 입만 벙긋벙긋 거릴 뿐. [어떻게 알았냐는 얼굴이시네요. 전 모니터링 요원이거든요. 그래서 알 수 있었죠. 아, 제가 모니터링 요원인거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같이 각자의 비밀을 하나씩 알고 있어야 입막음이 용이하잖아요.] “…….” 모니터링 요원…… 이라 이건가? 나는 무상함에 한결같이 파란 하늘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꽤 오래전에 엘-가드 홈페이지에서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게임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유저들이지, 게임을 제작한 회사가 아니다.』 상용화할 때 공지에 적어놓은 글이었다지, 아마. 미르트에선 그 글귀에 한치 어긋남이 없을 만큼 모든 정보를 유저들을 통해서만 얻고 있다.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은 모두 읽을 정도로 유저들의 정보에만 의존하는 실정이다(블랙 루트까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유저들에게 의존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그렇기에 엘-가드는 유저가 주체가 되어 잘잘못을 가리고 처리해나가는 시스템이었다. 크다싶은 것만 운영자들이 처리하지, 나머지는 모두 유저들의 몫인 것이다. 그만큼 엘-가드는 자유롭게 운영된다. 하지만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중재는 있어야 하는 법. 작은 일에 불려 다닐 정도로 운영자들은 한가하지 않았기에, 그들을 대신하자는 의미에서 정한 것이 모니터링 요원이다. 모니터링 요원은 직접 게임을 플레이해 나가면서 밸런스나 게임 환경을 검토하고 유저들 사이에서 작은 일들을 처리하는 일을 주로 수행했다. 엘-가드에 모니터링 요원이 몇 명 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고, 대부분이 평범한 유저로서 플레이하며 정체를 드러내는 일도 극도로 꺼렸다. 그냥 그런 유저가 있다는 것만 알려졌을 따름이다. 어쩌면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모니터링 요원이 있을지 모르는 일. 레네트가 진짜 모니터링 요원이라면 날 알아보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모니터링 요원도 결국엔 미르트의 직원이니 부탁해서 헬 마스터의 아이디 정도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 맞다. 확실히…….” 크으, 아이디도 바꿔서 말할 걸 그랬나? 늦었지만 후회가 막심하네. 이왕 속이는 거 듀얼 랠리 때처럼 아예 변신을 해버릴 것을……. 하아, 인생이 무상이로소이다. “저, 저기……. 뭐하세요?”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인생무상……’을 중얼거리는 내게 레네트가 물어왔다. 나 때문에 마지막 한명이 소개를 하고 있지 못하니 정신을 일깨워준 것이다. 멍청하게 풀린 눈으로 레네트를 바라보다가 히쭉 웃었다. “아아, 잠시 레네트양의 해맑은 미모에 심취해 하늘과 레네트양의 얼굴 중 어떤 것이 더 맑은지 비교 중이었습니다.” “에에……?” 내 느끼한 말에 모두의 안색이 푸르죽죽해진다. 어쩔 수가 없다고. 화제를 돌리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는. 누군 그렇게 말하고 싶어서 말하는 줄 알아? 나도 이런 것은 싫다고! 성호는 식용유를 한 그릇은 마신 사람처럼 오만상을 뒤집어쓴 얼굴로 나를 손가락질 했다. “이놈이 요즘에 버터를 주식으로 먹으니 이해해 주시길.” 그래, 나 버터 먹었다. 거기에 네놈이 보태준거 있냐? 한 조각이라도 대신 먹어주기를 했냐, 아니면 사주기라도 했냐? “삼가명복.” 분노가 타오르는 차에 세영이 작게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나에 대해서 참으로 잘 아는 그녀였다. 반드시 한번 시간 내서 단둘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일단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성호자식을 늘씬하게 두들긴 다음 힐링 포션(Healing Potion) 두개를 던져주었다. 훗. 오랜만에 몸 좀 풀었더니 개운하다. 찝찝하던 차에 잘 됐지. 나는 가뿐해진 기분으로 방긋 웃으며 흑발의 소년을 향해 말했다. “죄송합니다. 잠깐 불미스런 일이 생겼지만 깨끗하게 해결되었군요. 자, 그럼 거기 검은색머리 분, 소개해 주세요.” “……클래스 데스 나이트(Death Knight)인 다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크는 이 당황스러운 광경을 목도하고도 별 동요 없이 대답했다. 성호를 반 죽여 놓은 날 조금 떨리는 시선으로 보는 것 외에는 양호했다. 은현이나 세영은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다른 이들은 안절부절 못하며 쓰러진 성호를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으응? 저기, 혹시 안혁 아니니?” 그때 다크를 요목조목 살펴보던 은현이 약간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크도 은현의 말에 시선을 돌려 은현을 보다가 두 눈을 부릅뜨고 숨을 삼켰다. 으음, 한눈에 반한 거냐? 은현이 좀 예쁘기는 하다만, 국제연애는 반대다. 국제전화 요금이 얼만데! 한국에 살면 생각해볼 요량도 있으니까… 이민 와라! “어? 하, 한은현?! 하하! 아, 안녕?” 다크의 냉담했던 태도는 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풍선같이 점점 멀어져갔다. 그것을 목도한 나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아니, 저거 이중인격 아냐? 어떻게 성격이 단번에 변할 수가 있는 거냐? 은현은 다크가 더듬더듬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손뼉을 치고 말했다. “혁이 맞구나! 분위기가 달라서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 했어.” “하하, 분위기가 그게, 그러니까…….” “왜 그래? 그러고 보니 너, 매일 나만 보면 말 더듬더라? 내가 대하기 힘들어?” “그, 그게 아니라……. 아니, 저…….” 혁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손사래를 쳤다. 잠시간 일련의 상황을 떠올려본 나는 도출되는 결론에 음흉하게 웃었다. 큭큭큭, 은현을 좋아하는 녀석이로고! “서로 아는 사이냐?” 이미 둘의 사이는 간파해버렸지만 그렇게 물었다. 은현은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네. 같은 반 친구에요.” “흠, 그렇단 말이지? 어이, 다크. 아니, 안혁이라는 은현이 친구.” 나는 안혁을 불렀고, 녀석은 대번에 태도를 바꾼다. “뭡니까, 그 다짜고짜 반말하는 싸가지 없는 태도는?” 안혁은 찬바람 풀풀 날리는 모습으로 매섭게 노려보았다.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오호, 이놈 봐라. 제법 깡 있는 녀석일세. 나와 좀 비슷한 성격인데? 그래, 남자라면 개길 줄도 알아야지. 그렇다지만 상대는 가려가면서 해라. 방금 전에 누군가가 먼지 나게 맞는 거 못 봤냐? 나는 녀석의 배짱 두둑한 태도에 빙글빙글 웃다가 이쯤에서 카운터를 날릴 요량으로 입을 열었다. “나 은현이 친오빠 되는 사람이거든. 너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으니 말을 놓아도 상관없지. 혹시 복학했다는 요상한 변명은 늘어놓지 않겠지?” 안혁의 안색이 납빛으로 변색되어간다. 그러나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가다듬었는지, 녀석은 어색하게 웃으며 친한 척을 해왔다. 은현의 싸늘한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쯧쯧, 오빠를 제 보물같이 아끼는 앤데 그 면전을 옆에 두고 날 향해, ‘너 참 싸가지 없다’라고 외치다니……. 넌 끝났다, 자식아. “안녕하세요, 류현 형! 은현이에게 말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좋은 오빠분이라고…….” “응? 뭐라고? 싸가지 없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정말 좋은’이라고 하지? 거, 나는 성격이 10초 간격으로 바뀌는 다중인격자인가 보네.” “죄송해요, 형님……, 헉!” 심각하게 망가지는구나. 보는 내가 다 안쓰럽다. 형님이란 단어, 은현이 모를 리가 없다. 미래의 남편 될 사람이 날 부르는 칭호이니. 그게 아니라 그저 잘 보일 요량으로 불렀을 가능성도 있지만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안혁은 급히 입을 틀어막고 은현을 찾았다. 그리고 세영 저리가라 할 정도로 차가운 모습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은현을 보고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너 같은 애 정말 싫어!” 은현은 빽 하고 소리 지른 후 씩씩대며 몸을 돌려 서쪽 성문으로 뛰어갔다. 나는 배를 잡고 포복절도하다가 찔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멍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빙 둘러보았다. “석상과 반시체는 무시하고 우리 갈 길이나 가죠.” “예, 좋습니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세비치드가 답했다. 그후 우리는 일단은 몇 개 준비해둘 것이 있어, 구점과 대장간을 차례로 들르며 아이템을 정비했다. 각자에게 장비가 있으니 무기는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철저하게 준비해 독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구력이 저하된 아이템들을 모두 수리하고 힐링포션과 마나포션을 대량 구입해 각자 가방에 일정량을 나눠 갈무리했다. 성직자가 있더라도 전투시에는 경황없기 마련이고, 때문에 급할 때엔 직접 체력을 채워야하니 말이다. 특히 마나포션은 지속적인 스킬 시전을 위해선 필수적인 아이템이었으니 힐링포션보다 많은 양을 사두었다. 순식간에 한 시간을 채비로 날려버린 뒤(은현은 당연히 준비하기 전에 불렀다. 나머지는… 버렸다), 우리는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며 서쪽 성문으로 향했다. 열사의 사막은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 뒤 서문에서 주인 잃은 강아지마냥 불쌍한 몰골로 기다리고 있던 성호와 안혁에게도 포션을 나눠주고 본격적인 이벤트에 나섰다. 그리고 나중에 홈페이지 BBS에서 글이 올라오길, 사베티움의 중앙광장에 웬 노숙자 두 명이 동상놀이를 하고 있었다나 뭐라나. 생각하나마나 성호와 안혁이었겠지. 어쨌든 엄청나게 쪄대는 여름날의 한가로운 오후에 벌어진 작은 사건이었다. Level 7. 재회(再會). (1) Level 7. 재회(再會). 열사(熱砂)의 사성(死城). 사베티움에서 서쪽으로 열 시간 거리에 있는 폐성(閉城)이다. S급에서도 상위 난이도에 속하는 던젼으로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완전히 클리어를 못했다 한다. 8층에서 9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없는 까닭이었다. 성벽을 타거나 날아서 창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지만, 그랬다간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와이번이나 가고일이 튀어나와 가차 없이 공격해 사망하기 일쑤여서 통용되지 않고 있다. 결국은 내부를 통해 강행돌파 한 뒤, 9층으로 올라갈 방법을 모색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 근처는 벌써 유저들로 가득했다. 성의 위쪽부분에는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몹들이 하늘을 활공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간간히 마법을 날려보았지만, 그것들은 8층 정도에 있는 희뿌연 막에 가로막혀 파공음을 터트리고 곧장 소멸된다. “휴우―. 이거 난리도 아닌데?” 나는 뜨거운 열기가 아지랑이 피는 모래를 밟고 서서 성의 풍광을 살펴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오기는 왔지만 이젠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문제였다. 이건 몹들보다 유저들 때문에 클리어는 고사하고 진입 자체를 못하게 될 판국이 아닌가. “하아아…….” 금광(金光)의 모래 언덕 위에서 나와 같이 성을 바라보던 이들도 어깨를 늘어트린 채 일제히 탄식을 토해냈다. 그것만으로도 한순간에 이쪽은 어두컴컴한 장례식장 분위기가 조성되어버렸다.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세비치드가 밑을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저어보였다. 솔직히 늦은 것은 아니었다. 이벤트는 참가등록 이후 48시간 안으로만 완료하면 되었고, 지금까지 많아봐야 12시간 밖에 흐르지 않았으니 아직까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던 탓이다. 우리가 늦은 것이 아니라 단지 저들이 빨리 온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늦지 않아봐야 진입불가는 여전하다. 여기서 저 유저들이 어느 정도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거냐……. 아, 레네트. 모니터링 요원이니 뭔가 꼼수를 알고 있지 않을까? 난 희망이 섞인 눈길을 레네트에게 보냈으나, 레네트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제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마세요. 저도 이런 것은 모르니까.” 쳇, 안타까운 일이로군.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잖아. 아쉬운 대로 한번 가보자.” 주디스가 세비치드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다른 모두도 세비치드에게 시선을 모았다. 그가 은연중에 이 파티의 리더로서 인식되고 있는 탓이다. 세비치드는 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더니 고개를 까닥였다. 허락의 표시였다. 그것을 확인한 우리는 모래위로 발을 디뎌가며 성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데 성 안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도처에 널려있는 트랩들은 어떻게 제거할 거예요? 우리에겐 디텍터(Detector) 쪽의 클래스가 아무도 없잖아요?” 아까부터 고민하던 모습을 보이던 네이가 짧은 탄성을 내지르고 모두를 대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서로를 돌아본다. 거참, 그런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내게 절대감각이라는 것이 있는데 뭣 하러 걱정해? 트랩같은 것들은 기막히게 잡아낸다고. 나는 일행을 향해 몸을 돌리고 빙그레 웃어주었다.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세요.” “어떻게요? 카르마는 소드 마스터잖아요. 그쪽 클래스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클래스인데…….”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네이가 재차 물어왔고, 나는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러려니 생각해요.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트랩으로 인해 누군가가 다치거나 익스펠 될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이죠.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하면 제 몸을 날려 대신 막아드릴게요. 이제 된 건가요?” “그렇게 자신하신다면야……. 그럼 부탁드릴게요!” 네이는 우물쭈물한 태도를 보이다가 내 자신 있는 말에 힘을 얻었는지 활짝 웃어보였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 듯 날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호, 은현, 세영은 내가 무모한 짓이라도 하는 것 마냥 당장 내 옆으로 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그친다. “너 미친 거냐? 그런 걸 덥석덥석 말해버리면 어떡해? 그러다가 익스펠 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맞아요! 오빠가 내가 죽는 걸 보기 싫다고 했듯이, 나도 오빠가 죽는 모습을 보기 싫단 말예요! 가서 더 의논해 봐요. 모든 걸 오빠가 감당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하지 마.” 야,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하지 말라 하냐? 성호는 성난 표정으로, 은현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세영은 한대 칠 기세로……, 날 주시했다. 나는 그들을 떨떠름하게 봐주다가 입을 열었다. “오만 따위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내 입으로 내뱉은 말 정도는 책임질 수 있으니까. 설마 내가 누군지 잊은 건 아니겠지?” “…….” 셋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성호와 은현은 내 정체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세영도 내가 얼마 전에 말해줘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놀라라고 알려준 건데 아무 반응이 없어서 허탈하기도 했지. 뭐, 다른 사람들은 아직 세영이 모른다고 여기고 있어 그녀에겐 내 정체를 일체 함구하는 중이지만. 우리의 대화 때문에 멈춰서있던 세비치드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무리로 다가설수록 후끈한 열기가 전해져왔다. 다행히 땀이 흘러도 일정시간 뒤면 말끔히 사라지기에 찜찜하지는 않았다. 땀 냄새가 옷에 배면 세탁해야 할 텐데, 유저들이 그런 사소한 일을 하려고 엘-가드를 하는 게 아니니 땀은 나되 곧 사라지도록 설정해놓은 것이다. “이제부터 전쟁이네요.” 유저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가장 변두리에 서서 레네트가 쓰게 말했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여기다가 헬 브레스 갈기고 유유히 가고 싶다. 그러나 그 뒤는? 헬 브레스를 쓴 후라면 딜레이 때문에 스킬 발동도 안 되고, 공격했다는 패널티로 5분 동안 로그아웃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몰매 맞아 익스펠 되기 딱 좋다. 아무리 헬 브레스라고 해도 여기의 모든 유저들을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일행들이 도와주더라도 조약돌로 바위 깨기나 마찬가지여서 할만한 게 못 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아, 그렇다면……. 나는 퍼뜩 떠오른 기발한 생각에 얌팍스럽게 웃으면서 로크마를 흘겨보았다. 내 시선을 받은 그는 움찔하며 한보 뒤로 물러선다. 흐흐흐, 내 시계에 들어온 이상 이미 상황종료야. “로크마씨. 잠깐 귀 좀 빌리겠습니다.” 로크마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이게 한 다음(로크마는 키가 190Cm정도였다) 곧장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에게 말했다. 로크마는 내 말이 이어짐에 따라 구슬픈 표정을 짓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며 자신만 믿으라고 엄포를 놓았다. 내 음흉한 웃음이 더욱 짙어지는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냐고 물었지만 잠시 뒤면 알게 될 거라고 말을 돌려버리고 로크마의 행동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쾅! 쾅! 쾅! “이 미친놈아! 그게 무슨 짓…… 히익!!” “하얀 병원에서 환자가 탈출했다! 모두 달아나!! 커헉!!” 로크마가 솥뚜껑만한 해머로 바닥을 신나게 찍어 유저들을 위협하며 앞으로 진격해 나갔다. 예상외로 의욕이 넘치는 그를 보며 나는 조금 놀라야했다. 세영에게 키스 받는 게 그렇게나 좋은가? 고작해야 볼에다가 해줄 거라고 했는데. 뭐, 당사자의 동의는 전혀 받지 않고 혼자 결정한 일이지만 그건 나중에 가서 생각하자고. 정 안되면 은현에게 부탁하면 되겠지. 로크마가 해머를 휘두를 때마다 유저들은 해머에 맞아죽기 싫어 혼비백산했다. 뒤로 넘어지거나 유저들을 밀어내며 자리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참으로 착한 유저들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유저들이 있는 한 엘-가드의 미래는 밝으리, 흐흐흐……. “카르마님과는 절대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군요. 그 우직하던 로크마를 이렇게나 잘 다루시다니……. 저도 저 꼴 날까 두렵습니다.” “우린 이런 상황을 계속해서 봐왔다지요.” “그 마음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로크마의 뒤를 졸졸 따라가던 세비치드와 성호가 말했다. 성호는 담담했고 세비치드와 그의 일행이었던 사람들은 반 존경, 반 불신의 눈초리로 날 힐긋거렸다. 그래, 씹어라, 씹어~!! 나는 나대로 가면 되는 일이야! 이러나저러나 이제 우린 공범이라고! 캬하하핫!! 로크마가 일백 번은 바닥을 찍고 나자 성 입구 근처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빨리 온 것이다. 진작 이 수를 생각해 낼 것을……. 뭐, 지금이라도 생각해 냈으니 다행인거지. “아하, 이래서 성 주변에 유저들이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였던 거로구만. 입구가 턱 막혀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Level 7. 재회(再會). (2) 유저들의 숲을 헤치고 나와(그들은 로크마를 경멸의 눈초리로 노려볼 뿐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미녀들이 많으니 그냥 참고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입구를 보게 되니 어째서 유저의 수가 줄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검은 갑옷을 차려입고 흑마에 올라탄 13명의 어비스 나이트(Abyss Knight)가 길목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유저들이 몰려가서 뭇매(집단구타)를 놓지 못하고 주변만 알짱거리는 것을 보니 진입을 강제적으로 막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열한명의 유저가 그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어비스 나이트가 말에서 떨어질 때마다 그를 상대하고 있던 유저한명씩 전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던 도중 총 세 명의 유저가 익스펠 되었고, 남은 유저들은 어비스 나이트들에게 이를 갈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흐음. 시험이라도 치는 것인가? 그렇기엔 몹들의 체력이 받쳐주질 못할 텐데……? ‘다음!’을 동시다발적으로 외치는 몹들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빠지려는데, 뒤에서 뭔가가 등을 쿡쿡 찔러왔다. 뒤를 돌아보니 웃고 있는 로크마가……. 나는 한숨을 내쉬고 세영을 힐끗 보았다. “…….” 이거 정말 할만한 게 못되었다. 지금 전까지는 마냥 좋았지만 막상 닥치고 나니 심각한 번뇌에 시달려야만 했다. 내가 아무리 막가기로서니 세영에게 대놓고 ‘키스해 줘라!’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은가. “뭐야?” 세영은 내가 자꾸 자신을 힐끔거리기만 하자 짜증이 섞인 음색으로 물어왔다. 나는 몇 번 망설이다가 자꾸 뒤에서 재촉하는 로크마 때문에 하는 수없이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미안하다, 유세영! 로크마씨 볼에 키스 좀 해주라! 그걸 담보로 길 만들기를 해주기로 했어!” 내 말에 기가 막힌다는 듯이 보는 일행들. 구태여 그들의 시선을 깡그리 무시하고 세영만을 서글프게 보았다. 그녀는 날 가만히 응시하다가 손을 올렸다. 따귀 맞는 것과 욕먹는 것 정도는 감수하고 있었다. 따귀 정도의 대가면 솔직히 싸게 먹히는 편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왼쪽 뺨을 내밀었다. 볼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알았어.” “뭐?” 나는 귀와 눈을 의심해야했다. 세영이 일말의 화조차도 내지 않고 묵묵히 내 볼을 쓰다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 반사적인 반문에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날 보고 응대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그리고 로크마에게 다가가 볼에 입을 맞춰주는 세영. 로크마는 얼굴을 펑 터트리며 헤벌쭉 웃었고, 세영의 얼굴에 정신이 팔려있던 남성유저들은 일제히 이를 갈았다. 그러나 경기라도 일으키는 듯 바들바들 손을 떨며 병기를 반쯤 들어올린 유저들은, 세영이 잠깐 바라보자 흠칫하여 곧장 무기를 숨겼다. 나는 안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걱정에 휩싸였다. 세영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날 보는 눈빛만큼은 심상치 않았던 탓이다. 안타까움과 경멸감이 뒤섞인, 대충 그런 눈빛이었다. 언제한번 터트려도 단단히 터트릴 기세였다. 나, 그때가 되면 죽는 게 아닐까? 일이 그렇게 종결되고 나자 우리는 성 입구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었다. 익스펠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서일까? 모르는 일이다. 세영의 일은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여 관심을 끊은 뒤에 세비치드에게 말했다. “우리가 들어가죠?” “쉽게 결정을 내릴만한 게 못됩니다. 혹여나 누군가가 익스펠 된다면…….” 그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지만 그거 때문에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 고생하면서(고생한 것은 로크마지만) 기껏 왔는데, 고작 어비스 나이트에 가로막혀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죠. 그냥 가기엔 너무 군침이 넘어가는 상품이 기다리고 있는 걸요. 게다가 반드시 익스펠 되라는 법도 없잖아요. 안 그래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세비치드의 어깨를 가볍게 쳐주고 손을 번쩍 들었다. “우리가 하겠다!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이지?” 내 부르짖음에 어비스 나이트들은 이쪽으로 말머리를 돌리고 말했다. “그대의 파티가 결계내로 들어올 수 있게 허락되었소. 이제 안으로 들어오시오.” 몹들의 말에 따라 결계 안으로 들어선 나는, 주변에서 같이 따라 들어오려고 시도하다 무색의 막에 막혀 버둥거리는 유저들을 보았다. 유저들이 집단으로 달려들지 못한 게 이 결계 때문인 모양이다. 결계 밖에서 투명한 막을 무기로 내리찍으며 요란스럽게 떠드는 유저들은 무시해주고 어비스 나이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성 안으로 들어간 유저가 얼마나 되지?” “137명이오.” 어비스 나이트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고,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세비치드를 보았다. 그도 안도했는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약하게 끄덕였다. 가망이 있었다. 성 안까지 유저들로 득실거리지는 않는 것이니. 그리고 들어간 유저들도 쉽사리 13층까지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서둘러 올라가면 8층에서 올라갈 방법을 강구하느라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것으로 예상되는) 유저들과 마주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습니까?” 세비치드가 물었다. 몹이건 유저건 간에 존댓말 하는 그의 모습은 경이롭게 보였다. 참 예의 있는 사람이다. 나보고 저렇게 하라면 속이 뒤집혀서 못한다. 몹한테 무슨 존댓말이냐.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대일 대결을 해서 낙마시키기만 하면 되오.” 몹들은 다시금 입을 모아 동시에 대답했다. 1초의 오차도 없는 것이었다. 군대에서 발맞춰 행진할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하달까? “일대일……, 이란 말이지?” “그렇소. 도전하시겠소?” 어비스 나이트들의 대답에 나와 세비치드는, 은현과 주디스와 레네트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어비스 나이트는 듀라한 나이트(목 없는 기사)의 업그레이드 판으로, 유니크급에 책정되어 있는 몹이다. 220레벨인 레네트에겐 좀 버거운 상대겠지만 이기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보다 문제인 것은 비숍인 주디스와 프리스트인 은현이었다. 그들에게도 대 언데드(Undead) 용 스킬, 그러니까 턴 언데드(Turn Undead)나 홀리 레이(Holy Ray)등이 있지만 일대일이라면 사용할 시간이 촉박했다. 일단 매직 스킬이어서 캐스팅이 길고, 클래스 특성상 민첩성과 방어력이 어비스 나이트에 비할게 못되기 때문이다. 레벨이라도 높으면 걱정이라도 안 들겠다만, 둘 다 250대여서(은현은 유니크 스킬을 얻지 못해 아직까지 프리스트다) 익스펠 될 확률이 100%였기에 엄청나게 걱정된다. 게다가 주디스와 은현이 없으면 던젼 클리어는 물 건너가는 것이니 걱정은 더욱 가중되었다. 힐러(Healer)없이 S급 사냥터에서 사냥하는 것은 카스테라 백 개를 물 없이 먹는 것과 진배없으니 말이다. 카스테라 백 개를 생으로 먹는 일은 결코 할만한 것이 못되기에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어비스 나이트들에게 물었다. “만약 한사람이 둘 이상의 상대와 겨뤄 이기게 되면 어떻게 되나?” “…….” 어비스 나이트들은 내 질문이 갑작스러운 것이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나란히 도열하고 외친다. “상대한 수대로 유저가 통과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소. 대신 협공을 불가능하오. 오로지 일대일 대결이오.” 그렇게 말하고 킥킥 비웃는 몹들. 재수 없어서 웃지 말라고 화를 내려는 차에, 또 뭘 빼먹은 것인지 비웃음을 지우고 말을 덧붙인다. “아직 말 안했는데, 이 결계 안에서는 기술사용 불가요. 오로지 기본기로만 상대해야 하오. 덧붙여 말해서 우리는 이 결계 내에선 결코 죽지 않소.” 그들의 말은 우리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기가 차서 말까지 더듬으며 소리쳤다.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있소. 겁나면 일대일로만 하시오.” “이건 사기야!!”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을 것이다.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지 않은가! 우리는 기술사용도 불가능하고 몹들은 체력이 깎이지도 않는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이건 반드시 두서명은 장사 치르고 통과시켜주겠다는 말과 같다. 그래, 덤벼라 세상아! 아무리 나를 짓밟는다 할지언정 잡초같이 끈질기게 살아남으리라! “세비치드! 자기 애인의 몫은 세비치드가 알아서 맡아요! 나는 세이나(은현)하고 레네트양의 몫을 맞을 테니까!!” “주디스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 세비치드의 대답을 듣고 나서 왼쪽 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 몹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구태여 정공법을 쓰지 않아도 되겠지. 말에서 떨어뜨리기만 하면 통과라고 했으니까. “은현은 제가 맡겠습니다.” 공격하려고 준비하는데 안혁이 다가왔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돼.” 안혁에겐 어비스 나이트 둘을 붙이는 것은 위험했다. 실력이 안 되는데 둘을 상대할 수 있을 턱이 없다. 은현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줄은 몰라도 죽는 꼴은 못 본다. 한명이 아쉬운 순간에 네놈이 죽으면 어쩌자고. “어째서?!” “이유가 뭔 필요가 있겠냐. 안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라.” 못마땅한 듯 소리를 지르는 안혁에게 성의 없이 말을 툭 내뱉은 뒤, 보폭을 크게 밟으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어비스 나이트에게 선공을 날렸다. 놈의 옆쪽을 점한 뒤 빠르게 검을 출수하여 말의 목을 베어버리기 위해 아래로 그어 내렸다. 그러자 기마해있던 어비스 나이트가 검을 뻗어 내 검을 막아낸다. 나는 그대로 아귀의 힘을 풀어 검을 놓아버리고 가볍게 뛰어올라 검을 뻗고 있는 어비스 나이트의 손목을 두 손으로 잡아챘다. 차갑고 묵직한 느낌이 손바닥에 전해져오자마자 하중을 하체에 실어 놈을 바닥으로 매쳤다. 쿠웅―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모래가 사방으로 튄다. 내 부츠로도 모래가 튀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뒤쪽으로 피했다. 새카만 검신의 검이 대기를 찢는 파공성을 내며 지면을 긁었다. 히죽 비웃어주고 공격하느라 상체를 숙이고 있는 몹에게 몸을 날렸다. Level 7. 재회(再會). (3) 점프하여 말의 턱주가리를 올려 차고 오른발이 지면을 밟는 즉시 그것을 축으로 하여 몸을 한바퀴 회전시켰다. 그리고 회전력을 이용해 파괴력이 실린 왼발로 말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빠각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터지면서 말의 갈비부분이 움푹 함몰되었다. 곧 반탄력으로 인해 말은 힘이 가해진 방향으로 죽 밀려났고, 다른 어비스 나이트의 말의 몸퉁이를 들이받고 한데 뒤엉켜 모래바닥을 뒹굴었다. 기마 중이던 어비스 나이트 둘도 낙마한 것은 당연지사다. 거울의 숲에서 다수의 유니크 몹들을 상대로 버티던 나다. 그때처럼 스킬 남발은 불가능하나 이까짓 것들 세 마리 정도는 가볍게 잡는다 이거다! 푸하하!! 세비치드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눈동자로 날 응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니크 몹 셋이 단 20초도 안 되서 나가떨어졌잖은가. 아무리 낙마만이라 해도 일격에 넘어트린다는 것은 300대 레벨의 힘(STRength)으로는 불가능하니 믿을 수 없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나는 내게 적의를 드러내고 투기를 내뱉는 몹들을 보고 답답한 마음에 소리 질렀다. 저 인간들이 왜 구경만하고 앉아있어?! “잡생각 말고 싸우기나 해요! 일대일로 갈 게 다 나한테 오잖아!!” 일곱이 동시에 공격해오면 나로서도 벅차다. 일단 어비스 나이트들이 긴장하고 싸우니 낙마가 될 확률도 줄어든다. 거기다 놈들은 체력이 깎이는 일도 없어서 시종일관 최상의 상태로 날 몰아붙일 텐데, 그 상태에서 살수 있다고 하는 게 미친 소리였다. 기술사용이 되면 겁낼 필요 없이 나 혼자서 싹 쓸어버렸을 테지만, 안 되니 못한다. 있다가 없으면 제일 아쉬운 게 뭐냐고 물으면 단연코 ‘힘’이라고 답하리라. 내 일갈에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성호와 세영이었다. 내게 적응이 된 그들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은현은 현재로선 짐꾸러미일 뿐이었기에 발을 동동 굴리면서도 나서지 않았다. 굳이 나서서 싸울 필요도 없었다. 은현과 레네트의 몫은 이미 계산했으니 말이다. 주디스야 세비치드가 책임지기로 했으니 상관할 필요는 없겠지. 다른 이들도 곧 어비스 나이트와 맞대결을 했고, 레네트는 내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감사함을 표명한 뒤 사람들을 응원했다. “여러분 힘내세요!!” “우오오옷!!” 그녀의 힘찬 응원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일행들…… 중에서 성호만 기합을 내지르며 어비스 나이트를 몰아갔다. 저놈이 레네트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다. 쯧쯧, 국제연애는 돈 많이 든다던데……. 뭐, 내가 대신내주는 것도 아니니 가타부타할게 못되네. 내 쪽으로 다가오던 어비스 나이트들을 갈라 하나씩 잡고 대결하는 일행들을 보고 은현의 옆으로가 느긋하게 구경했다. 은현과 레네트와 주디스는 위태롭게 몹들과 싸우는 사람들을 보고 애가 타는지, 기도하는 식으로 가슴에 손을 모으고 걱정스러워 한다. 하지만 모두 나름대로 잘 싸우고 있었다. 로크마는 길이가 긴 해머의 이점을 살려 어비스 나이트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며 가끔 일격을 가하는 식이었다. 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 그 어비스 나이트가 모래를 삼키는 것은 금방일 것이다. 성호는 바스타드 소드를 무식하게 휘둘러 어비스 나이트가 저절로 피하게끔 만들었다. 몇 번 검을 마주 댈 때면, 어김없이 어비스 나이트의 몸이 찌르르 진동하며 좌우로 휘청거렸다. 그렇기에 몹은 막기보다는 피하는 것을 택하고 말았다. 그러나 공간이 한정된 곳에서 피하기만 하다보면 구석으로 몰리는 때가 있는 법. 성호의 승리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영은 날카로운 검술로 몹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카마인의 검술과도 비슷하다. 최소의 움직임으로 위협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은 말이다. 거기다 여성 특유의 ‘유(柔)’도 가지고 있어, 보고 있는 나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의 간담이 서늘한 검식을 펼쳤다. 검이 위로 올라갔다 싶으면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검의 진로를 돌려 아래서 위로 쳐올리니 진땀이 다 난다. 카마인도 저렇게는 못할 것이다. 만약 저기에 힘까지 보태어진다면, 누구도 세영을 검으로서 제압하지 못할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아, 물론 데스티니 블레이드는 빼고. 그 인간은 워낙에 괴물단지여서. 네이는 반대편의 몹과 계속해서 대치 상태였다. 활에 화살을 메기고 말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지만, 함부로 화살을 날리지는 못했다. 미스라도 날 시엔 쓰러지는 것은 몹이 아니라 네이가 될 터였다. 어비스 나이트도 네이와 다를 게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안혁은 시무룩한 얼굴로 의욕 없이 검을 휘두르며 꿍얼거렸다. 몇 분간 주의 깊게 살펴본바, ‘나쁜 형 같으니라고. 남 잘되는 꼴은 두 눈 뜨고 못 보지. 쳇, 쳇, 쳇.’이었다. 은현의 몫까지 자신이 처리해 잘 보이려 했지만 나 때문에 좌절되었으니 저러는 듯싶다. 자식이 내가 언제 방해했다고 저러는지 화가 나려 하네. 레벨도 딸리면서 무슨 유니크 몹 둘을 상대해? 쯧, 걱정해서 안 된다고 했더니……. 그냥 익스펠 되도록 내버려둘 것을 후회가 막심하네. 싸우는 이들 모두가 비교적 유리한 상황에 놓여있었으나, 세비치드만은 불리한 형세였다. 공격하자니 다른 하나가 훼방을 놓아 실패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아직 승산은 있었기에 걱정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몇 분 뒤. 은현이와 손장난을 치던 나는 고개를 돌려 병장기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터지는 전장을 보았다. 대결이 막바지에 다다랐는지 금방이라도 끝날 것 같은 이들이 많았다. 제일 먼저 어비스 나이트를 낙마시킨 것은 초지일관 우세에 있던 세영이었다. 모래위에 뻗은 몹을 잠깐 보던 세영은 검을 회수하여 우리가 있는 곳으로 느긋하게 걸어왔다. 우리들은 그녀에게 대단하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다음으로 통과한 사람은 성호였다. 확실이 몰아붙이기는 했지만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지는 못했다. 참다못한 어비스 나이트가 직접 말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얼마나 성호가 무식했으면 몹이 저런 결정을 내렸을까. 성호는 제 손으로 끝내지 못했다는 것에 울화가 치미는지 이를 까득 갈며 이쪽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그러나 레네트가 수줍게 웃으며 환영하자 곧장 얼굴을 피고 헤벌쭉 입을 찢는다. 가만히 보니 둘이 눈 맞았군. 솔직히 레네트가 많이 아깝기는 하지만 성호도 그럭저럭 생기고 여성에겐 매너도 좋으니 둘이 사귀어도 문제될 것은 없겠는 걸? 킬킬, 성호 네 녀석의 인생에도 꽃이 피는구나! 그런데 어쩐다니. 꽃 유지비가 엄청나게 비싸다는 단점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로크마는 해머를 휘둘러 어비스 나이트의 옆구리를 가격해 나가떨어지게 함으로서 통과, 네이도 화살을 말의 가슴과 허벅지 사이에 꽂음으로서 발광을 하게 만들어 어비스 나이트를 낙마시키는데 성공했다. 뒤이어 안혁도 통과했다. 대충대충 하는 듯 보이면서도 충분히 힘이 실린 검격을 날려 거저먹기로 250대 레벨이 된 게 아니라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녀석을 보는 내 눈이 한층 부드러워진다. 물론 은현은 신경도 안 쓰는 모습이었다. 안혁에게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인 듯. 세비치드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방어에 급급하여 변변찮은 공격도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대로라면 그가 익스펠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때문에 여유롭게 구경하던 나도 점차 초조해져 갔고, 보다 못해 결국 파티말로 윽박질러야만 했다. “몹보단 말의 다리를 노려요! 여기서 어비스 나이트와 맞대결은 불리하다고요!!” 다수를 상대할 때는 갖가지 편법을 모두 동원해야 승리할 수 있다. 안 그러면 당하는 것은 자신이 되고 만다. 내가 어비스 나이트보다 말을 우선적으로 노린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낙마시키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굳이 체력낭비, 시간낭비해가며 정면승부를 노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세비치드도 말을 노리기는 했지만 대부분 상체 쪽이었으니 막히는 것이 당연했다. 말을 베려거든 다리를 노렸어야함이 옳다. 그것이 어비스 나이트도 막기 힘들고, 또한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세비치드는 내 외침에 통과조건을 상기시켰는지 곧장 상체를 숙였다. 다른 어비스 나이트의 검이 그의 목 대신 애꿎은 대기를 베어낸다. 세비치드는 말의 옆으로 파고들어 오른발을 길게 뻗으며 검을 횡으로 크게 베었다. 수수깡 부러지는 음향이 물에 번지는 물감처럼 허공으로 퍼져나간다. 두 앞발이 잘려나간 말은 앞으로 꼬꾸라졌고, 위에 타고 있던 어비스 나이트도 앞쪽으로 내던져지며 투구 앞면부터 모래에 처박혔다. 그 통쾌한 장면을 보고 있나니 변비환자가 한 달 만에 쾌변을 한 뒤처럼 개운하기 그지없었다. “헉…….” 그때 방금 낙마했던 어비스 나이트가 말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말은 발이 도로 붙어서는, 그를 태우고 유유히 입구 쪽으로 빠지는 게 아니겠는가? 기가 막혀서 말이 다 안나오는 광경이었다. 지가 무슨 합체분리 로봇이라도 되는 줄 아나? 툭 빠지면 쏙 끼우게? 거참 부러운 놈일세. 세비치드는 합체하는 모습을 보고도 침착하게 롱소드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원을 돌 듯 발을 조심스럽게 옮겨가며 기회를 엿보았다. 어비스 나이트도 그를 신중하게 살피는 기색이었다. 단 한명도 익스펠 시키지 못했으니 세비치드라도 물어버리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느껴졌다. 세비치드와 어비스 나이트의 사이에 건드리면 깨질 듯한 얇은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이 감돈다. 그들 사이로 텁텁한 사막의 모래바람이 불어왔다. 나를 비롯한 모든 유저는 숨을 죽이고 이 일기토를 지켜보았다. 공교롭게도, 정말 우연찮게 이쪽이나 저쪽이나 리더끼리 남게 된 것이다. 다른 놈들에겐 없는 흑색 망토를 펄럭이며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몹이었으니 대장놈이지 뭐겠는가. “앗! 내 손수건!” 옆에서 은현이 앗하고 외마디 소리를 터트렸다. 무심코 보게 되니 흰색 손수건이 바람에 실려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은현은 급히 손을 뻗었지만 손가락 끝만 손수건에 살짝 닿았을 뿐 잡히지는 않았다. “…….” 바람이 그쳤다. 흔들리던 세비치드의 옷자락과 어비스 나이트의 망토가 잠잠해진다. 그리고 웃기게도 세비치드와 어비스 나이트 사이의 정중앙에 깃털같이 사뿐히 내려앉는 손수건. “……!!” 그것이 신호탄이었는지 아니면 타이밍이 맞아떨어진 것인지, 손수건이 지면에 안착하는 순간 세비치드와 어비스 나이트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뇌전같이 쏟아져나갔다. 나는 둘의 화산같이 폭발적인 기세를 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일격필살! 단 한번으로 끝난다! 츠칵! 둘은 순식간에 교차되었다. 그리고 교차되는 찰나, 빛이 번쩍이는 듯한 환상이 내 눈을 가린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살폈을 때는, 세비치드와 어비스 나이트의 자리가 뒤바뀌어 있었다. 어비스 나이트는 세비치드의 자리로, 세비치드는 어비스 나이트의 자리로. 둘은 서로를 등진 상태에서 검을 검집 속으로 거두었다. 검집 속으로 검신이 모습을 감추자 ‘핏’하는 소리와 동시에 말의 네 허벅지에서 피분수가 솟았고, 이내 분리되며 어비스 나이트와 바닥을 뒹굴었다. 세비치드의 왼쪽 어깨의 옷도 슥 날카롭게 찢겨나갔다. 만약 검이 좀더 깊게 들어왔다면 베여나가는 것은 옷이 아니라 그의 목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살아서 통과했기에 나는 신이 나서 외쳐댔다. “아싸!! 세비치드 참 잘했어요!!” “수고했어요, 브리안. 이것으로 전원 무사통과네요.” 주디스는 세비치드의 볼에 입맞춤을 해주고 미소 지었다. 브리안이란 이름은 세비치드의 본명인 듯싶다. 뭐, 지금에 와서 본명을 알아봤자 바뀔 것도 없으니 계속해서 세비치드라는 이름으로 불러야지. 우리를 알지 못하는 유저들도 세비치드를 향해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서 환호하지 않는 이들은 없을 듯 보였다. 하지만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이가 딱 한명 존재했다. 은현은 걸레로도 못쓸 정도로 사정없이 찢겨 모래에 파묻힌 제 손수건을 바라보며 슬프게 중얼거렸다. “흐흑…… 손수건……. 아끼던 건데…….” 에구, 불쌍한 것. 내가 나중에 박스채로 사다줄 테니 울지 마라. 손수건쯤이야 얼마든지 살 돈이 있단다. 도시에 가게 되거든 잡화점에 들려 똑같은 것으로 한가득 사주겠다는 말로서 은현을 위로해주고 사람들과 함께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어비스 나이트들은 우리가 다가오자 입구의 양 옆으로 흩어져 길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망토 걸친 어비스 나이트가 말을 걸어온다. “건투를 빌겠소. 우리에게서 단 한명도 죽지 않은 것은 그대들이 처음이니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하기 바라오. 그리고 부디 무사히 성에서 빠져나오기를 기원하겠소이다.” “물론입니다. 신경 써줘서 고맙군요.” 오오, 이 어찌 가슴 뭉클한 장면이 아닐 수 있겠는가. 검으로서 맺어진 유저와 몹의 사랑……이 아니라 끈끈한 우정. 몹이라도 검을 쓴답시고 자신을 제압한 상대에겐 예우를 갖추는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엘-가드를 하는 사람으로서 배우지 말아야함이 마땅하도다! 내겐 경험치와 아이템상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 몹일진데, 몇 대 맞으면 끽하는 놈과 우정 쌓고 앉아있으랴. 거기다 유니크 몹이라면 받는 경험치도 상당하니 친구보단 적으로 만들고 말지. 허나 세비치드는 나와 반대되는 생각이던지 빙그레 웃는 얼굴로 어비스 나이트와 악수를 나누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일행의 가장 뒤편에서 뒤따라가다가 슬쩍 몹들을 보고 중얼거렸다. “여성형이었으면 그나마 좋게 보았을 것을…….” “나 여자 맞소.” 망토 입은 놈이 내 중얼거림을 듣고 킬킬 웃음을 흘리면서 대꾸했다. 나도 놈과 같은 웃음을 터트리고 가운데 손가락을 쭉 내밀었다. “까봐, 자식아!!” Level 7. 재회(再會). (4) 7층까지 올라오는데 무려 8시간이나 날려먹었다. 보통 때였다면 4시간이면 올 것을 트랩 해체하느라 이렇게나 오래 걸려버린 것이다. 내게는 트랩을 발견하는 능력은 있어도 해체하는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트랩하나 잡고 낑낑대다보면 어느새 30분이 날아가니 당연한 결과였다. 더구나 그 중간 중간에 몹들과 맞닥뜨려 전투를 벌이느라 시간은 더욱 더 지체되었다. 디텍터(Detector)라도 있었으면 편할 것을……. 이 문제로 4층쯤에서 일행들과 의논 하에 디텍터 클래스가 있는 아무 파티와 협력하여 올라가기로 결정을 내렸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몹들이었을 뿐, 유저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시간만 날려먹은 꼴이니 정말 힘 빠지더라. 이렇게 가다간 13층 도달은 힘들었다. 8층의 비밀도 풀어야하는데 이제 24시간뿐이 남지 않았으니 다급해져만 간다. 24시간이면 많이 남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상으로는 상층으로 오를수록 트랩도 복잡해지고 몹들의 수도 늘어나니 시간은 배로 낭비가 되어 마지막엔 부족하게 될 터다. 그 때문에 일행들에게 미안하다. 일행들은 나 덕분에 무사했다고 위로해주고 있으나, 성 밖에서 디텍터 한명을 참가시켰다면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니 미안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날 더욱 분발하게끔 만들었다. 나는 바닥에서 트랩을 해체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비교적 수월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 짓도 계속하다보니 익숙해지는가 보다. 이번 트랩은 바닥을 밟을시 천장이 프레스기계처럼 내려앉는 것이었다. 던져본 돌멩이가 가루가 되어 나타났으니 유저가 살 확률은 희박했다. 위로 올라간 유저들이 있다면 여기서 제법 많은 이가 빛으로 화하여 날아갔을 것이다. 다시금 돌을 던져놓고 반응이 없자, 손가락으로 통로 깊숙이를 가리키며 일행들에게 가자는 제스쳐를 내보였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내 뒤를 따랐다. 여기선 내가 트랩을 찾아야했기에 발 빠른 대응을 위하여 앞장설 필요가 있었던 탓이다. 나는 걸음을 빨리하면서도 절대 뛰지는 않았다. 트랩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뛰게 되면, 덫 위를 깡충대는 토끼와 같은 꼴이 되고 말기에. 언제 발목을 물릴지 모르니 신중을 기해야한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폭이 5미터 정도 되는 일직선의 길이었다. 빛이 들어오질 않고 벽에 듬성듬성 박혀있는 횃불에만 의존해야하는 실정이었기에, 주디스가 빛의 구를 만들어 공중에 띄워놓아 일대는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덕택에 시야가 확보되어 내가 트랩을 쉽게 발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보폭을 크게 해 걸은 지 10여분이 지났다. 7층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계속해서 걸어 모퉁이를 돌때마다 중심부에 가까워지는 형식이었기에 우리는 몇 번의 모퉁이를 돌아야만 했다. “대체 언제 8층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요…….” 수많은 트랩과 몹들을 만나면서 힐(Heal)과 갖가지 보조마법 난사를 했던 은현이 지겨운지 늘어지는 음성으로 물었다. 전염성이 있어서 나까지 지겨워지는 기분이다. 처음의 뜨거웠던 분위기도 반복되는 전투에 많이 식어서 그리 의욕이 설질 않았다. 한시 바삐 9층으로 올라가야 원상태를 회복할 듯 보인다. “힘내” 세영이 나서서 은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를 본 로크마도 투정을 부렸다가 세비치드와 네이에게 얻어맞고 입을 꾹 다물었다. 김태진 같은 인간이 또 있었을 줄이야……. 세비치드! 네이! 잘하신 거예요! 네이와 세비치드에게 남몰래 윙크를 해주고 멈췄던 발을 움직였다. “어?” 그때 가슴에 감전된 듯이 찌르르 아리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살기(殺氣)……. 통로의 양쪽에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기척이 잡혔다. 지금까지 느껴왔던 것보다 배는 크게 느껴지는 것이라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이번엔……, 위험할지도 모르겠는데. 포션도 처음 때의 반밖에 남지를 않았고 모두들 거듭되는 전투에 지쳐있었다. 더욱이 문제인 것은 은현과 주디스의 마나가 바닥나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의 마나포션을 둘에게 몰아주고 있기는 하지만 13승까지 버틸지는 미지수였다. 뭐, 그래도 성호들끼리만 왔으면 진작에 마나가 딸려 여기까지 올라오지도 못했겠지만. 어쨌든 본격적으로 내가 나서야할 때가 온 것인가……. “문제가 생겼네요. 로그아웃 할까요, 아니면 돌파할까요?” “무슨 문제이기에 그러십니까?” 나는 침착하게 숨을 삼키고 모두에게 말했고, 세비치드는 설명이 결여된 내 말에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들으면 후회할 텐데……. 에라, 모르겠다. 그냥 말하자. “포위, 당했거든요.” “……!!” 이말 한마디에 일행들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세비치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야트막하게 중얼거렸다. “괜히 들었군요…….” 거봐. 후회할거라고 했잖아. 지금까지 오면서 포위당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많이 나와 바야 10마리 안팎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스케일이 컸다. 확실한 수는 알 수 없지만 대충 40마리 가량이었다. 뒤쪽까지 합하면 무려 80이다. 기술도 사용할 수 있고 이쪽 인원도 꽤 되니 전멸은 되지 않을 테지만, 도중에 몇 명 익스펠 되는 것은 각오해야 했다. “어떻게 하실래요? 접속 종료와 돌파 둘 중에서 골라보세요. 아, 다른 의견도 괜찮아요.” “……카르마님은 묘하게 여유로우시군요.” 어떻게 알아봤는지 주디스가 입을 열었다. 남들처럼 크게 긴장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그녀의 말대로 내겐 여유가 있었다. 헬 스킬과 드래곤 슬레이어가 있으니 말이다. 헬 스킬 써서 싹 쓸어버리고 가면 그만이었다. 그거 그냥 나둬서 뭐하냐. 세비치드들이 내가 헬 마스터임을 알아보고 공격해 와도 인원이 적으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6명 정도면 충분히 제압이 가능하니까. 그리고 그들이 공격해올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다만 문제라면 소문이 나서 귀찮아질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 모습을 바꾸지 못하니 그것은 절대 피해야지. 나는 주디스에게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그런가요? 뭐, 그리 긴장되진 않으니 여유롭기는 하겠네요.” “어째서죠?” “그건 이 뒤에 알 수 있을 거예요. 여러분의 대답 여하에 따라서 말이죠. 자, 그럼 어쩌실 거예요?” “…….” 그들은 턱을 괴고 심각하게 고찰했다. [야, 너 무슨 생각인거야? 설마 정체를 밝히려는 거야?] 그들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눈앞에 파란색의 메시지창이 떴다. 성호의 메시지였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놈도 오랫동안 날 봐오더니 내가 어떤 놈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언제 한번 킬러를 고용해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 시키던가 해야겠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나는 메시지를 작성해 성호에게 답신했다. [용케 알았네. 어떻게 알았냐?] 저들이 계속해서 가자고 하면 바로 헬 스킬을 사용할 생각이다. 어쩐지 믿음이 가는 사람들이어서 내 정체를 안다 해도 큰 문제는 없을 듯 여겨졌다. 내 예상이 틀리다면 난 그날로 게임 접어야하겠지만. 소문이 퍼지면 날마다 피바람이 불 텐데 짜증나서 어찌 하겠는가. [정말 밝힐 작정이냐? 아무리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아도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이잖아?] [그래도 어쩔 수 있나. 고생해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는 것이지. 13층은 오르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좋은 아이템 하나정도는 얻고 가련다. 소득이 하나도 없어!] [이런 진지하지 못한 놈…….]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나도 다 살았군…….] 진지함과는 거리가 먼 성호자식이 그렇게 말하니 기가 찰 따름이다. 진지함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녀석이 진지를 논하니, 이 어찌 세상이 막 돌아가려는 징조가 아니겠는가. 슬슬 관 만들어서 땅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온 듯하다. 70년 동안만 만들다가 들어가야지……. 내 답신에 ‘내가 뭐 어때서?!’하고 역정을 내는 성호를 가볍게 무시해버리고 세비치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오늘도 여기까지... 할깝쇼??;; Level 7. 재회(再會). (5) 얼마동안이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느낌상으로는 대충 3분은 기다린 것 같은데 말이다. 엄습하는 기다림의 지루함에 기지개를 쭉 펴면서 길게 하품했다. 하다가 안 되면 그냥 로그아웃 해버려야겠다. 이대로 기다리다가 개죽음당하기는 싫기에. 별것도 아닌데 세비치드들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이러니 내 인상이 미약하게 구겨질 수밖에 없지. 몹들도 밀려오는데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라니? 이제 80미터 남짓밖에 남질 않았는데……. 빨리 결정라고! 나는 이들의 결정을 독촉할 겸 넌지시 말을 걸었다. “결정은 하셨나요?” 세비치드는 턱을 괸 채로 날 보다가 결단을 내렸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으음. 여기까지 왔음에도 그냥 가기엔 아쉬움이 남는군요. 갈 수 있는 데까지 가겠습니다. 카르마님도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아아, 물론이죠.” 세비치드의 대답.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얼굴 한가득 웃어 보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드래곤 헌터로서 하는 인사다. 이 인사의 의미를 모르는 세비치드는 내가 무슨 의도로 손을 내밀었는지 의아해하다가 곧 손을 마주잡았다. 아마 잘해보자는 뜻으로 이해한 게 아닐까 싶다. 뭐, 아무렴 어때. 결국 알게 될 텐데. 악수하고 있는 그의 손을 슬그머니 내려다보고 웃음을 지웠다. 그리고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진지하게 그의 눈을 직시했다. “저에 대해 일체 함구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예? 무슨……?” 이런 반응은 예상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유 없이 나라는 존재를 비밀에 붙여 달라했는데, 그것을 단번에 이해하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나는 작게 미소를 띄운 채 입을 열었다. “남들에게 저의 존재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하실 수 있나요?” 세비치드의 얼굴이 점차적으로 굳어간다. 연한 플라스틱이 응고되는 것처럼 딱딱하게. 그는 내 말의 의중을 알아내기 위해 침묵하고 나만 지그시 응시했다. 하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던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카르마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전 누구에게도 카르마님에 대해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제 모든 것을 걸고서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의 강단 있는 대답은 나로 하여금 크게 미소 짓도록 만들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지만 지금까지 만나왔던 누구보다도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열려있는 태도 때문일까? 수용하고 관용할 수 있는 하해와도 같은 마음을 지닌 세비치드. 나도 그의 바다에 발을 담근 모양이다. “고마워요. 그럼 이제 몹들이나 처리하도록 하죠. 거의 다 온 것 같으니까요.” “어떻게 말입니까?” “보고만 계세요.” 그에게 짤막하게 대답해주고 나서 천에 쌓인 드래곤 슬레이어를 잡고 캐스팅을 시작했다. 세비치드는 몽둥이같이 생긴 막대기를 들고 가만히 서있는 날 의문의 눈길로 살펴본다. 스킬을 캐스팅할 때에는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말아야한다. 움직이거나 공격을 당할 시엔 캐스팅이 끊겨버리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여유가 없을 시에는 기술사용이 불가능했다. 캐스팅이 짧은 기술일 경우에는 바로 시전이 가능해서 움직이면서 캐스팅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실상은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캐스팅을 마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움직이면서 스킬을 캐스팅하는 것은 엘-가드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빈둥빈둥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이내 더 이상의 소모가 없어지자 캐스팅이 끝났음을 알고 드래곤 슬레이어를 우리가 여태껏 걸어왔던 곳으로 뻗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후퇴하기 위함이다. 앞쪽에는 또 어떤 트랩이 있을지 모르니 일단 해체시켜놓은 안전한 곳으로 튀어야하지 않겠는가? 한 시간은 해체된 채로 유지되니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테지. 엘리트(Elite) 헬 스킬(Hell Skill) 레벨 투(Level Two) 블레이즈 거스트(Blaze Gust)! 새하얗던 천이 먹물을 머금듯 까맣게 그을려져갔다. 그리고 이내 손잡이 부분만 남겨두고 회색의 재로 부스러졌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검신에 흐르는 열기를 못 이기고 타오르는 것이다. 나는 눈을 번뜩이고 빨갛게 달구어진 드래곤 슬레이어를 횡으로 베어 올렸다. 지옥의 불길 속에 승화되어 생성된 질풍들이 쏟아진다. 핏빛의 운무(雲霧). 죽음의 기운을 머금은 듯이 요사스런 빛깔을 띤 안개. 색소를 먹인 연기처럼 붉은 안개가 저 멀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10초 후. 콰과광!! 귀를 강타하는 폭음이 대단하다. 광대한 폭음이 귓전을 때리고 일대가 돌가루를 내리며 흔들렸다. 던젼의 일부가 뒤흔들릴 정도로 엘리트 스킬의 파괴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끼아아!!] 뒤이어 굶주림에 괴로워하는 지옥의 아귀가 외치는 것 같은 비명이 섬뜩하게 들려왔다. 은현과 레네트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울부짖음에 귀를 틀어막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는 분명 아비규환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 만들어지고 있을 터였다. 장거리 공격 기술을 사용한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성호와 세영이 나서서 각각 레네트와 은현을 달래주었다. 나도 토닥여주고는 싶지만 이번엔 앞쪽의 몹들을 말살할 차례기에 캐스팅을 준비하느라 그러하지 못했다. 다른 이들도 이만하면 은현과 레네트를 토닥여 줄만도 하건만, 지금은 드래곤 슬레이어를 보고 벙쪄있는 상태여서 그러하지 못했다. 쩝, 매정한 사람들 이로고. 얼마간 소리 없는 경악을 하던 그들은 일제히 비명 같은 외침을 내질렀다. 다섯 명이 동시에 악을 써대니, 그 바로 앞에 서있는 나로서는 귀청이 따가워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서, 설마 헬 마스터?!!” 입을 쩍 벌리고 사정없이 눈동자를 떨어대는 그들. 나는 히죽 웃으며 태연하게 대꾸해주었다. “아아, 되도록이면 드래곤 헌터(Dragon Hunter)라고 불러줘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정말 헬 마스터이신 겁니까?!” 글쎄 이 양반이 드래곤 헌터로 불러달라니까 자꾸 그러네. “드래곤 슬레이어를 저 이외에 가진 이가 있다고 여기신다면, 절 다른 사람으로 여겨도 좋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탁하건데 드래곤 헌터라고 불러요.” “이럴수가……. 정말 헬 마스터와 같이 플레이 하게 될 줄은…….” 로크마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멍청하게 중얼거린다. 아니, 정말 끝까지 이러기야? 날 물로 보는 거야, 핫바지로 보는 거야, 뭐야?! 아, 물로 보는 거나 핫바지로 보는 거나 뜻은 동일하구나. 아니, 아무튼!! 이건 날 우습게 보는 게 틀림없어! “드래곤 헌터로 불러달라……!” “꺄악! 헬 마스터님!! 너무너무 존경해요!!” “…….” 다리가 휘청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캐스팅이 끊길 뻔했다. 눈을 하트모양으로 하고 내게 달려드는 네이를 세영이 막아주지 않았다면 분명 끊겼을 것이다. 나는 세영의 팔 사이에서 버둥거리는 네이를 보고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더해서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황당함마저 느껴졌다.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처럼 발그레한 홍조를 띄우고 꺅꺅거리는데 이 어찌 통탄하지 않을 일일쏘냐.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난 극성팬 같은 태도라니……. 아무리 네이가 귀엽게 생긴 여인이라 할지라도 20대가 넘어간 이가 할만한 짓이 못된다. “하하, 카르마님이 헬, 아니 드래곤 헌터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거, 카운터로 크게 한방 먹고 말았는데요?” 네이를 애써 무시하는데 세비치드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면서 허무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태도에는 적의라고는 조금도 실려 있지 않았다. 비단 세비치드 뿐만이 아니라 여기서 그 누구도 살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니 날 나쁘게 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바라지는 않았지만서도 어째서 만족스러울 정도로 놀라지 않는 걸까? 솔직히 말해서 이정도면 기절초풍은 아닐지라도 아연실색까지는 해줘야하는 거 아냐? 얼굴색도 하나 안 바꾸고 입만 떡 벌리다니……. 이 사람들 분명 감정표출이 취약한 게 틀림없어. “대충 의심정도는 하고 있었어요. 앞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있고, 또한 의심스럽게 무기를 천으로 감아두었으니까요.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차에 카르마님이 정체를 밝히시니 ‘아, 그랬구나.’ 정도로만 느껴지는 게 당연하죠.” “……그랬나요?” “예, 그랬어요.” 나는 주디스의 단호한 대답에 풀이 죽었다. 내 변장술(얼굴가리고 옷 갈아입으면 다 변장이냐)이 이토록이나 허술했다니……. 정녕 닌자(?)의 변장술을 익혀야만 한단 말인가!! ‘얍!’하면 ‘펑’터지면서 샤샤삭 변장이 되도록?! “…….” 제길. 그런 기술이 있을 리가 없잖아. 있다면 내가 1억 렌스에 사갈 테니 아무나 팔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안판다고 한다면? 그럼 이쪽에서도 안 산다. 1억이 뉘집 개이름으로 착각하는 거냐? 1억 렌스면 큰 길드라도 반년동안 흥청망청 놀고먹을 수 있는 액수다. 그거면 유니크 스킬 북 다섯 권도 마련할 수 있다. 엘리트 스킬은 물건이 없어 가격 환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무튼 변장술이 엘리트 스킬일 일은 없으니 충분히 살돈이 되는 것이다. 이럴진대 안 팔겠다는 유저가 있다면, 그 유저는 머리가 돌다 못해 구멍이 뚫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그런 유저한테는 돈으로 사기 보단 PK해서 뺏고 말지.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블레이즈 거스트의 캐스팅이 끝났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검신에서 소용돌이치는 홍염을 바라보다가 전처럼 횡으로 베었다. 대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붉은 기운이 쭉 빠져나가 안개를 형성해 통로의 저편으로 비산했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바닥으로 늘어트렸다가 검집으로 회수했다. 곧 반향이 있을 것이다. 아까처럼 몹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있을지 모르니까 일찌감치 은현이나 달래줘야겠다. 그렇게 다짐하고 몸을 돌리는 순간, 파티원들의 진면목일지도 모르는 모습을 보고 안색을 딱 굳혔다. “네이! 좀 가만히 있어! 얘가 갑자기 왜이래?” “싫어, 싫어! 카르마님한테 갈 테야!!” “오옷! 터져라! 터져랏!!” 세영을 도와 발버둥치는 네이를 잡은 주디스와 그런 그녀에게 악을 쓰는 네이. 근처에서 콧김을 내뿜으며 폭발을 기다리는 로크마. 콰아앙! [끼아악!] 귀를 찢을 듯한 기세의 폭음과 진동. 뒤이어지는 몹들의 울부짖음. “으아앙! 무서워!!” “흑흑, 싫어!!” “레네트! 괜찮아요! 내가 있잖아요!” “은현아! 정신차려!” 생사의(?) 길을 함께 걷는 동지로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흐느끼는 은현과 레네트. 그 옆에서 소리만 냅다 지르는 성호와 안혁, 그리고 안절부절 못하고 입만 벙긋대는 세비치드. 나는 입을 꾹 닫고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누군가가 나더러 이 장면을 보고 감상문을 제출하라고 하면, 단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개판.』 다른 말이 필요 없다. 무질서하고 난잡한 것을 이르러 개판이라고 부르지 뭐라 부르겠나. 나는 개판을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정신없어라……. Level 7. 재회(再會). (6) 몇 십분 전에 있었던 일에서 7층의 몹들이 전부 몰려왔던 것인지, 가는 길엔 몇 개의 트랩을 제외하면 더 이상의 몹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리젠이 되어 마주칠 법도 하지만 유니크 몹은 리젠되는 시간이 상당히 길어 한참 뒤에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트랩도 그럭저럭 해체하기가 쉬운 것들이어서 많은 시간을 소요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때문에 예상했던 소모시간보다 30분을 앞당기는 기염을 토해낼 수 있었다. 훗. 다 이 잘나신 한류현님게서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느 누가 소드 엠페러가 트랩을 디텍터만큼이나 잘 해체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텐가? 모두가 내 뛰어난 학습능력과 감각이 이룩해낸 쾌거인 것이다. 여하튼 그간 여기까지 오면서 트랩 제거하는 것 이외에는 그리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지지 않아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했었다. 덕분에 단시간에 친밀도가 부쩍 상승하게 되어 말을 놓는 단계에까지 오게 되었다. 뭐, 세비치드와 주디스는 나에겐 여전히 경어체를 고수하고 있지만 말이다. 내가 대하기 어려워서냐고 물었더니 내게는 꼭 경어를 하고 싶을 뿐 대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나? 때문에 나도 그들에게는 경어를 쓰고 있는 형국이다. “흠. 누나는 예전에 헬 마스터, 그러니까 날 보고는 한눈에 반했다고?” 블레이즈 거스트에서 살아남은 몹의 잔당까지 남김없이 제거해버린 뒤, 거침없이 전진해 8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거의 다다라 내가 네이에게 던진 질문이다. 앞서가고 있어서 네이와 말하려면 몸을 돌려야 했기에 현재 나는 뒤로 걷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다가 트랩이라도 건드렸다간 그 자리에서 골로 갈 테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스릴 있어서 재미있다. 게다가 절대감각은 전방향의 것만을 경고해주는 것이 아니기에 걱정이 들지는 않는다. “으음…… 그렇지. 그런데 반했다는 것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네. 어떻게 해석하면 존경스럽다는 게 좋아하는 것으로 바뀌는 거야?” 네이는 내가 한창 PK하고 다닐 때 하도 말이 많아서 한번 동영상을 봤다가 푹 빠져들었다고 한다. 검은색의 머리를 우아하게(일말의 과장도 포함되지 않았다. 네이가 자기 입으로 이렇게 말했다. 정말이다. 좀 믿어!) 흩날리며 적(?)들을 잔인하게 익스펠 시켜버리는 장면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나? 정말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단히 희한한 취향임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여성 유저들은 내 무자비한 잔인함에 기겁하기 일쑤였는데 감격을 했다하니, 말문이 막혀버리더군. 그래도 취향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이니 논할게 못되어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날 좋아하겠다는데 뭣하러 말리겠는가? 다 너무 잘난 내 업보인 게지. 하여간 너무 잘난 것도 죄라니까. 나는 네이의 지적에 혀를 끌끌 차면서 검지를 좌우로 까닥였다. “존경이나 좋아함이나 상대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니 똑같아.” “그런 거야?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것 같은데……. 그럼 난 널 좋아하는 게 되는 거야?” “…….” 네이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땅을 파고 관까지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는 짓을 해버리고만 것이다. 자폭을 하다니, 내가 미쳤지……. 저런 집념의 여인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간 제명에 못산다. 방금 전에 발생한 망토 잡고 늘어지던 사건을 그새 잊고 있었다니 나도 참 바보로군, 쓰읍……. 잠깐 생각을 해보자. 나는 네이와 사귄다. 처음에는 다소곳하던 그녀는 나중에 가서 ‘여왕님’의 본색을 드러낸다. “…….” 부엌에서 화려하게 요리를 하는 네이. 그리고 그 발밑에 꿇어앉아 있는 나. 네이는 수상한 웃음을 띠고 있다. 그녀 눈에는 아수라 백작도 누님소리 나오게 할 정도의 광기가 감돌고 있다. ‘아앙~, 카르마. 조금만 더 기다려. 이제 곧 다 되니까.’ 프라이팬에 정체불명의 음식을 볶으며 화사하게 미소하는 그녀. 나는 옆에 꿇어 앉아 네이의 종아리에 얼굴을 비빈다. ‘아아, 네이님! 이렇게 더러운 저를 위해서 그 하얀 손을 더럽히시다니…….’ 눈물을 글썽이는 나. ‘후후, 괜찮아. 페트의 밥을 준비하는 건 주인의 일이야.’ 네이는 뒤집개를 까닥거리며 윙크했다. 나는 발발거리면서 벌렁 드러눕는다. ‘그래요! 저는 개에요! 당신의 충실한 페트에요~!’ 네이는 사랑스러운 눈길을 내게 보내며 정체불명의 음식을 담은 접시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우후후, 귀여운 내 강아지. 자, 다 됐어. 먹으렴.’ ‘예~!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뭔가 생김새는 영 아니올시다였지만 맛있는 냄새가 나기에 급히 손을 가져다대는 나. ‘어머? 안돼!’ 고기조각하나를 입에 가져다대는 나를 네이가 불러 세웠다.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개는 밥 먹을 때 손을 쓰지 않아.’ ‘아…….’ 충분히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자아, 어떻게 하면 좋은지……, 알겠지?’ ‘예, 예~. 우물우물.’ 코를 처박고 맛있게 먹는 나.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도리질 치다가, 날 꼭 껴안고 덮치는 네이. ‘아앙~ 카르마! 넌 정말로 귀여운 페트야!! 이리 와보렴. 내가 기분 좋게 해줄게.’ “…….” 아아…… 기절해버릴 것만 같아……. 실신해 버리는 걸 필사적으로 인내하며 고개를 크게 가로젓고 말을 바꿨다. “그걸 믿으면 어떡해? 존경과 좋아함은 전혀 다른 의미인 거야! 두 단어는 같아질 수 없어!” “아냐. 두 단어는 똑같아. 그러니 나 널 좋아해버릴래. 자, 이 누나의 품으로 와보려무나, 아가야.” 나는 땀을 흘리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내, 내겐 이미 여자가 있어!” “괜찮아. 사랑은 쟁취하는 거래. 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니? 그리고 네 과거는 용서할 자세가 되어있어, 나.” “…….” 이 여자가 지금 사람 과거 조작한다. 그거 정보관리법에 위배되는 거 몰라?! 타인의 정보를 함부로 조작하거나 인용하면 법에 접촉되는 거라고!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야! ‘사귀었던’이 아니라 ‘사귀고 있는’이라고! 멋대로 사람 과거 지어내지 마!” “흐응? 왜 흥분을 하고 그러니?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흥분한다던데. 너, 상당히 찔리는가봐?” “헉…….” 네이의 말에 눈앞에서 번개가 치는 착시가 일어났다. 궁지래……. 흥분이래……. 밀, 렸다……. 말싸움에서, 밀려버렸다. 오, 맙소사. 내가 말로 인해 흥분을 할 줄이야……. 아직 수련이 부족한 것인가! 이대로 깊은 산중 옹달샘으로 달려가 ‘물만 먹고 살지요~’를 해야 한단 말인가! 그게 아니면 빛도 없는 깊은 동굴 속으로 가 ‘난 쑥과 마늘 아니면 취급 안 해!’를 시행해야 한단 말인가! 으아아! 진짜 한번 해볼까? 쑥하고 마늘만 백일동안 먹어대면 정말 우화등선(羽化登仙)할 수 있으려나? “네이 누나. 같이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백일 동안 다정다감하게 먹여주는 놀이를 해볼까?” “뭐야 그건?” 네이는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이에 나대신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은현. “한국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에요. 곰이 동굴 속에서 마늘과 쑥만 먹어 인간여자가 된 후, 신과 결혼했다는 줄거리일걸요?” 인거면 인거지, ‘일걸요?’라는 가정은 어디서 기인한 거냐, 은현아? 혹시 단군신화 모르는 것이냐? 은현의 말에 네이는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흠칫 몸을 떨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뭐야?! 그럼 내가 곰이라는 거야? 카르마, 너 맞는다!! 당장 취소해! 취소해!!!” 어라. 뜻하지 않은 반전이로군. 길길이 날뛰는 네이를 보고 히죽 웃었다. 그럼, 그럼. 내가 누군데 말싸움에서 밀리겠어? 언제나 마찬가지로 고지를 점령하고 적군을 용맹하게 무찌르……. 이건 아니로군. “흥분 하네?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흥분한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괜스레 찔려서 그러는 거지? 낄낄! 곰곰곰곰곰!!” “아아악!! 너 잡히면 죽어!! 대체 누가 곰이라는 거야!? 나처럼 쫙 빠진 곰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그런 곰이 있을 리가 없잖은가. 다이어트한 곰이라니? 생각만 해도 웃기는군. 다이어트로 인해 홀쭉해진 곰이 허리에 앞다리를 얹고 섹시하게 윙크하는 모습을 떠올렸다가 폭소했다. “푸하하하!! 뭘 모르는군! 곰이라는 말엔 미련함도 내포된다고!” 나는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네이를 피해 냅다 도망치면서 외쳤다. 그러다 더이상 등 뒤에서 네이의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슬쩍 몸을 돌렸다. “…….” 네이는 충격 받았다는 얼굴로 굳어있었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주디스에게 달려가 가슴에 얼굴을 묻고 통곡한다. “우아앙! 카르마가 나보고 미련하대! 으아아앙!” “아니야. 네가 어딜 봐서 미련해보여? 카르마님이 농담한 거야.” 지, 진심입니다만? 주디스는 등을 토닥여주면서 네이를 위로했다. 네이는 훌쩍이면서 고개를 들어 주디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확답을 요구한다. “정말?” “그래. 그렇죠, 카르마님?” 왜 나한테 묻고 그러세요……. 난 선의의 거짓말도 못하는 순진무구한(?) 소년이라구요……. 내가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네이는 ‘아니잖아!’하면서 도로 대성통곡했고, 일행들은 날 따가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수긍하지 않으면 당장에 때려죽일 듯한 기세다. 이건, 자의가 아니다. 협박에 의해 마지못해 말하는 것이다. 난 거짓말을 못하는 순진한~ 청소년이니까. 아앗! 어디선가 돌무더기가 날아온다! “네이 누나. 누나 하나도 미련하지 않으니까 정신 차려. 에휴, 애도 아니고 유치하게 미련하다는 말에 우냐.” 한탄스러움에 탄식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자 차갑게 냉각되는 분위기. “으아앙!! 이제는 유치하기까지 하데!! 살기 싫어! 죽어버릴 거야!” “카르마님!” 주디스는 앙칼지게 소리치며 날 쏘아보았다. 독기어린 시선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제길! 하면 될 거 아니요, 하면! “네이 누나. 누나 너무너무 예쁘고, 착하고, 착실하니까 울지 좀 마. 에휴…….” “끝에 한숨이 붙었어! 우아앙! 저건 날 놀리는 거야!” “카르마님!” “네이 누나. 누나 너무너무 예쁘고, 착하고, 착실하니까…….” “말끝을 흐렸어! 거짓말을 하려니까 찔렸던 거야! 우아아앙!” “카르마님!” 뭔 말을 못해. 차라리 죽여라. Level 7. 재회(再會). (7) “계단이에요, 오빠!” 은현은 8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고는 호들갑을 떨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도 두 눈 멀쩡하게 있어서 볼 수 있으니 그만 좀 잡아당겨라. 몸이 흔들려서 트랩의 유무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잖아. 정신을 흩으러놓는 은현을 떼어내고 주변을 살폈다. 계단 외에 특별한 것은 없었다. 기관의 톱니바퀴 마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트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거기다 그렇다할 위험요소도 보이지 않으니 확실한 안전지대. 확인을 마친 나는 일행들에게 쾌활하게 ‘클리어(Clear)'를 외쳤고, 그들의 얼굴에는 그제야 환희가 떠올랐다. 목적지를 바로 앞에 두고 갈증을 느끼면서 트랩을 해체해야하는 절차가 사라졌으니 그럴 만도 하다. 트랩 해체는 내가 하는 것이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애간장이 더 타기 마련이지. “후아―.” 안혁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토해냈다. 하나하나의 행동에 전혀 어색함이 없는 것을 보니 평소에도 많이 해오던 행동이 아닐까싶다. 쳇, 겉멋만 든 녀석 같으니. 쪼오금~ 생겼다고 생색내긴. “…….” 그래도, 솔직히 말해서 멋지기는 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두 눈을 감고 우아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미소년(갸름한 얼굴형이어서 이렇게 보인다). 뒤로 신비로운 서광이 비치는 듯한 환상이 보이고, 그 빛에 의해 반짝이는 흑발……. 가히 한 폭의 그림이어라. 나도 한번 저렇게 해볼까? 안혁의 행동을 하나하나 떠올려가며 녀석보다 좀 더 도아하게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겨보았다. 그러자 머리위로 쏟아지는 찬란한 서광. 이야말로 천사가 따로 없음이었다. 오옷! 내게도 빛이 내렸어! 역시 나는 하늘도 알아주는 미소년이었던 거야!! “못 볼 걸 봤어…….” “눈이 썩어가고 있어!!” “내 눈알을 뽑아버리겠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기름이 흘러내리네. 차라리 식용유를 부어라, 부어.” “…….” 레네트, 로크마, 성호, 네이의 순으로 헛구역질을 하며 차례대로 무릎을 꿇었다. 다른 이들은 그들처럼 행동하지 않아서 그렇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식용유 한 사발은 마신 사람처럼 푸르죽죽한 얼굴이 당장이라도 쏟을 듯한 기세다. 나는 좌절하고 말았다. 어째서 이들은 진정한 미(美)를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설마 우리네 세상에서 미에 대한 의식이 하루아침에 뒤바뀌기라도 했단 말이더냐! “제길! 잘 먹고 잘살아라! 난 나대로 살다가련다!” “에이~ 남자가 그런 걸로 삐치냐, 유치하게.” 네이는 벽에 어깨를 기대고 허망한 모습으로 축 눌어져있는 내게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내 어깨가 흠칫 떨린다. “언니가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레네트의 조용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맞는 말이다. 삐치냐는 말은 네이가 할 소리가 아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느니 사니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네이가 아니었던가. 그래. 나도 똑같이 행동해주마. 은현에게 눈물을 흩뿌리며 팔을 크게 펼치고 달려갔다. 이대로 잡고 통곡해버리리. “우아앙! 나보고 유치하대! 죽어버릴 거야!” “저리가요! 아무리 친오빠라지만 닭살 돋아!” 은현은 심히 싫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세영의 뒤로 몸을 숨겼다. 헉……. 은현이 네가 이럴 수가 있는 거냐?! 둘도 없는 오빠를 위로해주기는커녕 내치다니! 그렇다면 타깃을 바꿔서! “우아앙! 나보고 유치하대요! 죽어버릴 거야!” 나는 주디스에게로 시선을 돌려 달려갔다. 그러자 슬쩍 내 시선을 외면해버리는 그녀. 나는 그 자리에서 팔을 뻗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럴 수가! 남녀차별이다, 이건! 요즘 사회에 성차별이 웬 말이냐! 남자도 위로받을 자격이 있단 말이다! 아아, 이때 지연누나라도 있었으면 당장 위로해 주었을 터인데……. 오오, 지연누나~ 보고 싶어요. 반짝이는 눈동자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지연누나의 모습을 떠올리고 양팔을 뻗어보았다. 잡힐 듯 말 듯한 환상이 눈앞에 아른거리니 갈증나서 미치겠다. 지연누나! 어째서 날 버리고 놀러간 것이란 말입니까! 돌아와요~. “내가 위로해 줄게. 이리로 오렴, 아가야.” “No!” 미안하지만 당신만큼은 이쪽에서 사절이야. 눈을 빛내며 은근하게 말하는 네이에게 한달음에 냉큼 대답했다. 네이는 차마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잠깐 멍하게 날 바라보다가 ‘쳇!’ 하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흥.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되었는데? 네이를 향해 콧방귀를 껴주고 눈앞에 있음에도 아직까지 오르지 않은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이윽고 8층에 도달했다. 감동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는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흑흑.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고군분투를 했던가. 장하다, 한류현! 넌 해냈다! 13층이 끝이지만 여기까지 오르고 나니 산 정상에 오른 등산가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강렬한 희열과 함께 꽃향기 비스무리한 향기로운 냄새가 코끝을 스치며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 “응?” 이게 무슨 냄새야? 이제는 미르트에서 쾌적한 환경 만든답시고 던젼에다 향수까지 뿌려대는 모양이지? “아! 이 향기!” 모두가 나처럼 진한 향기에 의아해하는 가운데 성호가 탄성을 터트렸다. 뭔가를 아는 듯한 녀석의 태도에 우리는 일제히 눈을 빛냈고, 시선을 받은 성호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내 평소 가스 냄새인데…….” “…….”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는 거, 알고 보니 순식간이더라. 참나, 네 내장기관이 향수공장인 줄 아냐? 암모니아와 메주냄새 공장이겠지. 착각은 자유라지만 너무 심한 착각이다. 제발 부탁인데 자각 좀 해라. 일동은 가차 없이 성호의 ‘개소리’를 묵살해버렸다. 정말이지 마음씨 고운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나 같으면……. 빡! “크허!” 대갈빡을 날려버릴 텐데 말이다. 아, 벌써 때렸으니 ‘날려버리는데’로 정정해야겠군. 내게 뒤통수를 가격당한 성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 후로 일어나지를 못한다. “앗! 기절했잖아?” 뭐시라? 기절? 다급히 옆으로가 성호를 살피고 경악하는 레네트. 나는 황당함에 입만 벙긋거리다 오른손을 경이롭게 내려다보았다. 단 한방에 기절하게 만드니 가히 무쇠주먹이로다. 본좌의 실력이 한 시간이 멀다하고 일취월장(日就月將)하니 스스로도 경외스럽구나. 내 이대로 득도하여 우둔한 중생들에게 진리를 전파하리……. “카르마 오빠! 어떻게 사람이 기절할 정도로 세게 칠 수가 있어? 야만인이야!” 레네트의 외침에 난 기겁했다. 헉! 야만인? 아니야! 아닌데……. “난 원시인인데…….” “…….” 휘이잉~. 훗, 이제는 말에도 힘이 실리는군. 모두 랭귀지 아이스 스톰(Language Ice Storm)에 당해 얼어붙은 것 봐. 이걸로 유저들도 잡을 수 있겠어. 나중에 마나가 부족할 때 종종 써먹어야겠다. 날 쏘아보던 레네트는 성호의 머리를 제 허벅지에 올리고 뺨을 살짝 치며 녀석을 깨웠다. “칸 오빠, 일어나. 오빠. 오, 빠…….” 털썩. 깨우기는커녕 도리어 제풀에 지쳐 쓰러지네. “아아…….” 털썩. 어이가 없어서 벙찐 형색으로 성호의 가슴위로 쓰러진 레네트를 보는 중에, 레네트의 근처에 있던 네이도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털썩. 그리고 다른 이들도 차례대로 냉기가 흐르는 돌바닥에 맥없이 드러눕는다. Level 7. 재회(再會). (8) “뭐야?”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저들이 무엇 때문에 쓰러지는 것이지? 지금 두 다리로 서있는 사람이라곤 나와 세영뿐이 없었다. 눈을 깜빡이며 세영과 쓰러진 이들을 번갈아보는 순간, 세영의 몸이 휘청하더니 균형을 잃고 쓰러져 한쪽 무릎을 꿇는다. “괜찮은 거……, 윽!” 완전하게 쓰러지지 않은 세영에게 다가가며 상태를 묻는 차에, 찡한 두통이 내 머릿속을 강타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세상이 뒤집혀 빙글빙글 도는 듯한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롤러코스터 타는 것과 비슷했지만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놀이기구를 탈 때의 짜릿한 쾌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아이고, 골이야…….” 몽몽한 상태에서 벗어나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눈을 뜨니 주변에는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너무도 보고 싶었고, 너무도 사랑했던 존재가 바로 눈앞에 서있었다. “유……, 나?” 난 그녀의 이름을 조그맣게 읊조렸다. 세일러복을 입고 있는 유나는 내게 살풋이 웃으며 다가와 볼을 쓰다듬는다. 그녀의 손으로부터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살아있는 사람의 체온. 맥동하는 생명의 기운. 눈을 감고 부드럽게 미끄러져가는 유나의 손길을 느꼈다. 가슴이 떨린다. 눈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보고 싶었어.” 아니. “너무나.” 거짓말이다. “이젠 헤어지지 말자.” “아니야!” 허리에 팔을 두르고 머리를 기대오는 유나를 거칠게 밀쳐냈다. 그리고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내질렀다. “거짓말이라고! 아무리 네가 살아있기를 간절히 바랐다하더라도 유나 넌 죽은 사람이야! 이렇듯 내 눈앞에 서있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사실로 보이는 이 모든 것이 허상이다. 유나가 살아있을 일은 없다. 수긍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지만, 분명 유나는 이승을 떠났다. 만약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면 난 그녀의 존재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가상의 세계다. 사람의 머리와 손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공간. 때문에 유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아무리 보고 싶었고 놓치고 싶지 않더라도, 눈앞에 서있는 저 여자는 그저 내 눈에만 유나로 보이는, 시스템에 의해 구성된 2진수의 환상일 따름이다. 단지 그뿐인 것을……, 어찌 유나라 칭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래. 이 모든 것은 환상이다. 지독한 환상. 두 번 다시 접하고 싶지 않은 개 같은 경우다! 차아앙! “커헉!” 보이는 것을 거부하자 유리가 깨지듯 시야가 와장창 깨져가고 전신이 뒤틀리는 고통이 잇따랐다. 다리가 휘청하여 바닥위로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대 상체를 받쳤다. 고개는 아래로 푹 꺾였고, 입에서는 걸쭉한 침이 채 굳지 않은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하아, 하아…….” 입술 끝에 침이 걸쳐 마치 하얀 실 한가닥을 물고 있는 형색으로 바닥과 이어진다. 머리를 세차가 흔들어보고 이마를 짚었다. 드림 브레이크(Dream Break). 틀림없이 그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것과 함께 있게 되는 행복한 환각. 그러나 꿈을 꾸는 사이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종래에는 사망하게끔 하는 악질적인 기술. 시전자보다 레벨이 높으면 걸리지 않는 것인데……, 시전자가 나보다 레벨이 높다는 말인가? 아니면 내가 이런 기술에 말려들 정도로 들떠있던 것……?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젠장.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이런 개같은 기술을 입구에 걸어놓은 작자가 누군지 반드시 알아내고 말 것이다. 침을 닦아내고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모두가 행복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있다. 빛의 구는 주디스가 쓰러지면서 와해되었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벽에 걸린 횃불만이 을씨년스러운 붉은 빛을 뿜으며 일정 범위를 밝힐 뿐이다. 빨려 들어갈듯 아름답지만 잡으면 고통을 주는 장미의 그것 같은 향긋한 향기가 여전히 코끝을 스친다. 더해서 횃불의 붉은 빛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악마가 고혹적인 자태로 유혹하는 것에 홀린 듯이 정신이 몽롱해진다. 찡하고 재차 두통이 몰려왔다. “큭……!” 머리가, 지끈거린다. 관자놀이를 짓누르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정신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다. 머리를 아무리 세차게 저어보아도, 죄이는 고통은 줄어들지를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차츰 뻣뻣하게 굳었던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류현…….” 머리맡에서 가냘픈 음색이 들려왔다. 배배꼬인 실뭉치처럼 뒤죽박죽 엉망진창인 머릿속을 정리하고 고개를 올렸다. Level 7. 재회(再會). (9) 발목을 완전하게 가리는 암회색의 부츠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매끈하고 흰 다리가 보인다. 갈색의 반바지, 허리에 차여있는 검과 2개의 단도, 잘록한 허리가 드러나는 검정색 에 타이즈에 갈색 재킷……. 마지막으로 보이는 멍하게 풀린 눈을 한 흑발의 미녀. 나처럼 멍청하게 기술에 걸리지 않았던 것일까? 세영은 내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나는 잠시 가느다란 손마디를 응시하다 맞잡았다. “끙차! 우윽!” 발을 바닥에 디디니 발끝부터 짓누르는 듯한 욱신거림이 전신을 관통했다. 몸 구석구석까지 쑤시지 않는 부위가 없었다. 정말 지독히도 당했다. 혹시나하여 상태 창을 열어 체력을 확인해보니, 체력임을 나타내는 녹색 게이지가 예전에 확인한 것보다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게이지 밑의 수치로는 ‘3200 / 6200’정도로, 지금도 계속해서 초마다 10씩 줄어드는 게 보였다. 그러나 점차 고통에 익숙해져감에 따라 줄어드는 양도 작아졌다. 이것으로 보면 환상을 보고 있을 때 체력이 얼마큼이나 깎인 것인지 짐작이 간다. 적어도 매초 50은 되었으리라 본다. 체력이 줄어든 게 멈추자 느껴지던 고통도 가셨다. 근육이 움찔거리니 완전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움직이는 데는 그리 지장을 주지 않았다. “고마워.” 흐리멍덩하게 풀린 눈동자로 날 보는 세영의 태도에 어쩐지 어색함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고 고마움을 표했다. 이러한 이상한 모습을 한두 번 봐온 것도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것이다. “류현…….” 잡고 있던 손을 놓자 세영이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자그맣게 내 이름을 부른다. 순간 막 보았던 유나의 얼굴이 세영의 얼굴에 겹쳐져 흠칫했다. 또다시 시야가 좌우로 흔들리며 흐릿해졌다. 시계를 바로잡으려고 눈을 감았다 뜨는데 가슴에 무언가 가볍게 닿았다. 그리고 볼을 부드러운 느낌이 자극해왔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세영이 날 안고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숨이 콱 막혀오며 미약한 두통이 일어났다. 나는 당혹하게 이름을 불렀다. “세, 세영?”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등을 감은 손에 힘을 주며 더욱 꽉 끌어안는다. “떠나지 않아…….” 머리안의 공간에서 거대한 종소리가 끝없이 메아리친다. 아찔해짐에 내가 아직도 드림 브레이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드림 브레이크를 겪었다 풀려났었던 유저들의 경험담처럼 틀림없이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현실일수밖에 없었다. 드림 브레이크에 걸리면 행복이외의 느낌은 느껴지지 않는다 했으니까. “그럼 뭐야!” 젠장! 그러면 세영은 설명이 안 되잖아! 세영이 드림 브레이크에 걸린 것도 아니…… 아? “설마……?” 세영도 기술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 완전히 걸린 게 아니라 나처럼 반쪽짜리로? 확실히, 그럴지도. 아니, 분명 그런 것이리라. 이러한 행동은 평소의 세영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별로 웃지도 않는데다가, 웃어봐야 금방 지워질 듯 야트막하게 웃는 게 전부가 아니었던가. 지금처럼 산뜻한 미소는 유나에게서만 목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세영이란 여자는, 생각없이 막무가내로 상대를 껴안는 짓을 할 이가 아니다. 예전에 지연누나가 이렇게 말했었다. 세영은 과거에 항상 밝게 행동했었다고. 짐작컨대, 드림 브레이크에 걸려 좋아하는 것과 만나게 되면서 예전의 모습이 잠시나마 되살아난 것이리라.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세영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는 생긋 미소 지었다. 동공이 풀려있지만 어딘가 반가운 기색이 담겨있는 눈동자였다. 왜일까. 어째서 세영이 내게 저런 눈을……. 유나……. 불현듯 유나가 떠오른다. 불식간에 밑으로 쳐져있던 팔이 파르르 떨리며 들어올려졌다. 움찔 몸을 떨었지만 팔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피아노 줄에 묶여 움직이는 마리오네트처럼 의지를 거부하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안돼.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팔은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고 세영의 등을 감싸려하고 있었다.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리고 볼에는 땀이 흘러내렸다. 내 안에서는 잡아라, 놓아라하는 의견이 수없이 충돌했다. 이 여자를 안고 싶다는 충동을 이성이 가까스로 억눌렀다. 커져가는 갈등에 입안은 텁텁해지며 바싹 메말라 수분을 요구했다. 유나, 유나가 눈앞에 있어! 잃지 않아! 잡을 것이다! 그녀는 유나가 아니야! 생김새는 같지만 전혀 다른 여자라고! 착각하지 마! “크윽…….” 팔의 위치는 그녀의 등에 닿을 듯 말 듯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나온다. “드림 브레이크에 걸리지 않으신 겁니까? 운이 좋으시군요.” “……!”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짙게 끼었던 먹구름이 걷히며 정신이 맑아졌다. 가슴 깊이서 충돌하던 갈등이 깨끗하게 사라지자 급히 팔을 회수해 세영의 어깨를 잡고 확 밀쳐냈다. 가슴은 내 심정을 대변해주듯 두근거리면서 들썩였다. “저런, 분위기 좋았는데 제가 망쳐버렸군요. 그래도 미안하지만 이쯤에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이미 50명 전부 예약되어있는 상태라서 말입니다.” 재차 들려오는 목소리. 세영을 비켜내고 눈이 닿아있는 저편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유들유들한 웃음을 짓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형색을 살폈다. 소매가 큰 흑색 로브에 오른손으로 들고 있는 해골지팡이. 그가 누군지를 머릿속에 금세 떠올리고 미간을 구기며 그 이름을 씹어 뱉었다. “루인 마스터 나이트메어…….” “호오. 이거 놀라운 일인데요. 제 이름을 알고 계시다니. 내가 그렇게 유명했나요?” 그의 얼굴에는 놀랍다는 기색이 스쳤다. 그것도 잠시,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다. 나는 이를 바득 갈면서 질문했다. “하나만 묻지. 드림 브레이크, 네놈이 걸어 놓았나?” “그렇다고 말해두지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당신이 걸어놓았단 말이지. 울컥하는 가슴을 억눌렀다. 뜨거웠던 머리가 차갑게 식어간다. “해제시켜.”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제겐 그럴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만?” 나는 싸늘하게 나이트메어를 노려보면서 입술을 비틀었다. 내 냉소적인 웃음에 그의 눈 꼬리가 사납게 올라갔지만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현명한 선택이다. 곧 죽을 시한부 생명에 약간이나마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니까. “이유가 없다고? 후회한다가 이유다. 후회하기 싫으면 해제시켜.” 내 따끔한 어드바이스에 그가 조소했다. “킥! 그쪽한테 후회할 일은 없습니다. 후회를 한다면 당신 뒤쪽의 미녀를 죽여야 한다는 것 정도?” 나이트메어 턱짓으로 내 뒤를 가리켰다. 멍한 모습으로 내 등에 얼굴을 묻고 있는 세영. 어쩐지 몸이 좀 무겁게 느껴진다 싶더니만 이런 이유가 있었군. 드림 브레이크 때문에 늘어진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만약 세영이 원인이었다면 드림 브레이크엔 완전한 면역이 된 것 같다. 역시, 나보다 레벨 낮은 놈의 기술에 걸릴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처음에 걸린 것은 이해가 안 되지만. “아아, 그래? 어쩔 수 없네, 그럼. 당사자가 하기 싫다고 하면 내가 직접 하는 수박에. 죽이면 스킬도 해제된다지, 아마?” “무슨. 150레벨이 330대 레벨을 PK할 수 있으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생각이 짧군요.” “생각이 짧은 것은 그쪽이라고 보는데. 그쪽 파티는 입구에서 몇 익스펠 당했을 거다. 그 유저들 레벨이 몇이었지?” “그야 당신과는 비교가 안되는 230대 레벨…….” 대답을 하던 나이트메어의 얼굴에 싸악 소리가 나며 핏기가 가셨다. 나는 치아가 드러나는 웃음을 머금고 오른쪽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천이 홀라당 타버리는 바람에 입고 있던 망토로 감아둔 드래곤 슬레이어를 향해. “이제야 알겠나? 230레벨이 나가떨어지는 판국에 150레벨이 살아서 여기까지 올 리가 없잖아? 뭐, 확실히 운이 좋기도 했지만.” 가볍게 답해주고 드래곤 슬레이어를 뽑아들었다. “심판의 시간이다.” Level 7. 재회(再會). (10) 나는 무표정하게 드래곤 슬레이어를 앞으로 곧추세웠다. 이것을 본 나이트메어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내가 세비치드들에게 바랐던 것이 바로 저 표정이다. 원래 저게 정상저인 반응이어야 하는데 말이야. 주디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생색내지 않은 것일 거다. 분명해. “헬 마스터?!” “칭호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자고. 지금 대두되는 것은 널 죽여 스킬을 파해 시키는 것이지, 노닥거리는 게 아니니까.” “하하……. 우리 지식인답게 대화로 합시다.” “나 원시인이야. 너나 지식인해.” “지금 당장 스킬을 해제시켜드리겠습니다!” “문답무용이라고 하면 답이 되려나?” 나는 씩 웃으면서 응대했다. 비굴하게 싹싹하던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져간다. 애초부터 살려둘 생각 따윈 없었다. 그냥 죽이기엔 솔직히 찝찝한 감이 있어서 명분이나 만들 요량으로 대화를 했을 뿐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지. 익스펠 시키면 자동적으로 기술이 해제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구태여 해제시켜라 말라를 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럼 일단 가볍게 레벨 1짜리 스킬로서 연극의 화려한 막을 올리자고. 용사연극의 막을 말이야. 사악한 악당을 무찌르는 정의의 용사! 캬, 끝내주는 주제구만! 나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치는 나이트메어에게 작은 미소를 보냈다. 엘리트(Elite) 헬 스킬(Hell Skill) 레벨 원(Level One) 헬 브래스트(Hell Blast)!! 화르륵! 캐스팅이 끝나자 드래곤 슬레이어의 표면을 짙은 화염이 소용돌이치며 끝까지 감겨 올라갔다. 헬 스킬은 위력이 뛰어난 대신에, 사용 시마다 무기의 내구력을 현격하게 저하시킨다. 보통 철검의 경우엔 헬 스킬을 다섯 번 정도 사용하면 파괴되고 만다. 이 경우 무기의 겉이 아닌 내부가 손상되는 것이어서 리페어(Repair)도 불가능하다. 미스릴제라면 반영구적으로 쓸 수도 있으나, 이것마저도 앞뒤 재보지 않고 중간에 마나주입 없이 혹사시키다보면 다시는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내구력이 다하면 무기가 반토막나는 게 아니라 산산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 브래스트의 경우엔 캐스팅도 비교적 짧고, 무기의 내부에서 시전되는 다른 것들과는 달리 표면에서 형성됨으로서 무기에 무리를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드래곤 슬레이어를 얻기 전 PK하면서 가장 애용하던 기술이다. 뭐, 드래곤 슬레이어를 얻은 지금은 어떠한 스킬이고 꺼릴 것이 없다. 솔직히 말해서 헬 스킬과 드래곤 슬레이어의 조합은 나도 사기라고 생각한다. 무기가 부서지기는커녕 도리어 스킬의 위력을 증폭시키는데 무슨 말을 하랴.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두개가 내손으로 굴러들어온 것을. 있으면 써야하는 게 예의인 법이다. “제기랄!” 나이트메어는 악을 쓰며 급히 캐스팅을 했다. 마법을 시현하게 되면 나만 손해라는 것을 알기에 드래곤 슬레이어를 싸고 있는 홍염을 그에게 날렸다. 일자로 쭉 뻗어가던 헬 브래스트는 어느 순간 형성된 반투명한 핏빛의 막에 막혀 밀고 당기는 대세를 이루었다. “소울 웹(Soul Web)인가?” 듀얼 랠리 때 본 적이 있다. 장비, 아니 옆집 사는 민식 형의 스킬들을 막아낸 기술이 아니었던가. 민식 형의 핫 스킬(Hot Skill)이 유니크 스킬보다 조금 딸려서 막힌 이유도 있지만 아무튼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낸 영혼의 방어막이다. 소울 스킬(Soul Skill)의 레벨 4짜리였지, 아마? 나는 피식 웃으며 나이트메어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 짧은 시간 내에 잘도 그 정도의 스킬을 캐스팅했군. 일단 죽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니 이정도면 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인가? 좋은 생각이지만, 유니크의 상급 레벨 방어막이 아니라면 헬 브래스트를 막아낼 수는 없다. 아무리 레벨 1이라도 헬 스킬을 엘리트니까. 예상대로 헬 브래스트는 적색의 영혼들을 삼켜가며 막의 두께를 차근차근 깨어나갔다. 그러다가 소울 웹이 사방으로 깨지자 곧장 나이트메어의 육체를 덮친다. 나이트메어도 320레벨이니 죽지는 않을 것이다. 급소들은 제외하고 다른 부위에 제대로 맞아도 체력이 남아 살터인데, 위력이 하락된 헬 브래스트를 맞고 죽는 것은 일진이 더럽다는 말로 밖에 표현이 안 된다. 헬 브래스트는 그를 스쳐 뒤의 바닥을 때리고 소진되었다. 바닥이 박살나는 게 아니라 그을린 자국만이 남는 것을 보니 확실히 위력이 떨어지긴 떨어진 모양이다. 한바탕의 불길이 지나간 자리엔 넝마가 된 나이트메어가 서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의 해골은 머리가 깨져있었고 흑색 로브는 여기저기 해어져 마치 걸레를 방불케 했다. 태워진 부분으로 보이는 거뭇한 피부는 화상을 입은 듯 붉은 기운이 엿보였다. 상당히 쓰라림이 잇따를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팡이를 들어 재차 캐스팅에 들어갔다. 그래, 죽는 것보단 차라리 아픈 것이 나은 법이다. 죽고 싶을 만큼의 아픔이라면 말이 틀려지지만, 엘-가드에선 드림 브레이크 이후의 고통이 가장 큰 것이니 저런 살고자하는 욕심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난 나이트메어를 살려둘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다. 나이트메어가 사용하려는 스킬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구경하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그에게 짓쳐 들어갔다. 나이트메어의 얼굴이 납빛으로 굳어갔다. 킥, 내가 똑같이 스킬로 대응할 줄 알았나? 무기가 있으니 당연히 공격해가는 게 순리 아니겠어?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약 15미터. 제법 되는 거리지만 아슬아슬하게 검이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이트메어의 스킬이 사용된다 하더라도 2초가량의 오차가 남는다. 단숨에 베어버릴 수 있다. 지면을 박찰 때마다 얕은 바람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나이트메어의 모습이 커져간다. 한번 발을 딛을 때마다 2미터씩 튕겨져 나갔다. 그렇게 3미터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 나이트메어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 같은 게 걸리는가 싶더니 깨진 해골지팡이가 휘둘러졌다. 키잉― 하고 얼핏 대기가 흔들린 것 같기도 하다. 잠깐이지만 어지러워지면서 시야가 흐릿해졌다 맑아진 것만 제외하면 아무런 반향도 오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거침없이 돌격해갔고, 그런 나를 보는 그의 얼굴엔 낭패감이 서렸다. 반대로 내 얼굴엔 회심의 미소가 그려진다. “사라져버려!” 지척까지 파고들어 드래곤 슬레이어로 십자가모양을 그리며 휘둘렀다. 나이트메어가 황급히 지팡이를 들어 막았지만, 종횡으로 그어진 두 차례의 섬광은 지팡이와 더불어 그를 가로와 세로로 정확히 사등분했다. “Good Bye.” 손에 베었다는 감각이 오자, 그의 결말을 예고하는 단어를 조용하게 내뱉고 드래곤 슬레이어를 검집에 꽂았다. 찰칵하고 가드가 맞물리는 소리가 퍼지는 순간, 나이트메어의 몸이 조금씩 어긋나더니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잘린 몸체가 바닥에 닿는 즉시 작은 빛의 구로 화하여 스러졌다. 일말의 빛까지 확인하고 몸을 돌려 세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런. 역시 헬 마스터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군요. 하마터면 한끝차이로 익스펠 되었을 뻔 했습니다.” 세영에게로 가는 내 발이 우뚝 멈췄다. Level 7. 재회(再會). (11) 피가 머리로 쏠린 듯 얼굴이 뜨거워지고 안면근육이 씰룩인다. 이를 빠드득 갈며 뒤로 돌아섰다.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붉은색의 투명한 형상에서 빈 공간 속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아직 살아있었나?” “물론입니다. 악인은 쉽사리 죽지 않는 법이지요, 하하핫!” 뭐가 그렇게 즐거운 것인지 허공에서 울리는 나이트메어의 목소리는 유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재수 옴붙은 작자가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생각하니 눈에서 불똥이 튄다. 분명 손에는 베는 감각이 전해져오고 빛으로 사라지는 것도 확인했건만 어찌하여 살아있단 말인가! “제가 좀 멀리까지 와있어서 당신의 구겨진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게 한탄스럽군요.” “어떻게 살아남은 것이냐!” “아? 당신은 그게 궁금하신가 보군요. 입은 아프지만 말하지 못할 것도 아니니 말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순간에 펼친 ‘홀루스네이션(hallucination : 환각)’에 당신이 걸려들었다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모르겠군요. 그 이후는 제겐 부끄러운 것이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상상이 되시겠지만 말입니다.” 머리가 띵해졌다. 어지러워진다 싶더니만 그게 스킬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라니……. 그의 기척은 8층엔 남아있지 않았다. 9층으로 튀어서 이쪽으로 사령(死靈)을 보내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는 영혼과 정신을 조종하는 ‘소울 스킬’을 가졌으니. “젠장!” 다잡은 걸 놓쳐버렸다는 현실이 나로 하여금 엄청난 분노에 휩싸이게끔 만들었다. 엄습해오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울컥하여 애꿎은 검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무게가 가벼운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검집이 바닥을 긁으며 터지는 쇳소리에 기분이 더욱 더러워졌다. “빌어먹을 개자식아! 당장 8층으로 내려와!!” 마음 같아선 직접 올라가 죽여 놓고 싶지만 모두가 드림 브레이크에 걸린 현 상황에서 자리를 비웠다간 어찌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느 순간 리젠된 몹들에 의해 일행들은 저항한번 못해보고 익스펠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일갈에 나이트메어는 놀란 기색이 담긴 음성으로 물었다. “응? 제가 9층에 있는 것은 어떻게 아신 겁니까? 천리안이라도 있으십니까?” “그 따위건 알 필요 없고 내려오기나 해!” “당신 같으면 목에 칼을 들이밀겠습니까?” “그래!!” “그러시군요. 하지만 전 당신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하하하!” 능글맞은 자식!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나 악력이 셌던지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체력이 조금씩 달아난다. 그렇게 분을 삭이고 있을 때 그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당신은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로군요. 드림 브레이크가 지속시간이 다해 몇 분전을 기점으로 끝났으니. 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유저들을 막는 일은 글렀으니 먼저 올라간 파티에나 합류하렵니다. 그럼 건투를 빌지요. 아하하하!!” 사람 속을 팍팍 긁어대는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불그스레한 형상도 함께 사라졌다. 울컥울컥하는 가슴을 짓누르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서서히 흥분이 가라앉는다. 어느 정도 감정이 다스려지자 바닥에 누워있는 검을 회수하여 세영에게 눈길을 주었다. 해제되었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기술의 여운이 남아있는지, 그녀는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 태연하게 서있었다. 나는 묵묵히 걸어 세영에게 다가갔다. 바로 앞까지 당도하자 세영이 갑작스레 다리를 휘청하며 중심을 잃고 내 쪽으로 쓰러진다. 옷자락을 붙잡고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사시나무 떨 듯 몸 전체를 바르르 떠는 세영. “아아…….”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드림 브레이크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아무리 적은 고통을 느낀다한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관통하는 고통은 분명 참아내기 힘든 범주의 그것이니까. 얼마간 세영을 부축해주다가 바닥에 앉히고 다른 이들에게로 향했다. 반쪽짜리가 아니라 완전하게 걸린 것이어서 그들은 좀처럼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깨어나려면 몇 분은 있어야할 것이다. 강제로 깨우기보단 자연적으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지금 깨우면 상당한 아픔을 느끼게 될 터이니. 각자의 품속에 있는 힐링 포션을 꺼내 체력을 보충시켜주고 근처에 앉아 그들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으윽…….” 그렇게 2분 정도가 지났을까, 일행들은 신음을 흘리며 깨어났다. 세영도 괜찮아졌는지 이쪽으로 다가와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인다음 다른 사람들의 상태를 살폈다. 나는 제일 먼저 깨어난 은현의 손을 잡아주었다. “오, 오빠……. 아파…….” 은현은 미간을 좁히며 내 손을 꼭 쥐었다. 녀석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마주잡은 손을 통해 떨림이 전해져오자 또다시 속이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반쯤 날아간 이성을 되찾고, 은현을 끌어당겨 보듬은 뒤에 등을 쓸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2분 뒤. 모두가 정신을 차리고 체력을 회복했다. 내겐 힐링포션 7개, 마나포션 4개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수량이 남아있었다. 모자르다 싶은 사람에게 몇 개를 얹어주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8층의 중앙은 사방이 뚫리고 간간히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이 세워져 하중을 받치는 식의 형태였다. 그리고 저 멀리에 좁아진 통로를 보니, 저곳에 9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냥 갈 생각도 없었지만, 몇 장사 치르는 것까지 추가하겠습니다. 딱 50명만.” 이를 빠득 갈고 어둠의 저편을 쏘아보았다. 나이트메어가 9층으로 튀었으니 비밀은 풀어졌을 것이다. 그러니 따로 9층으로 올라가는 방법을 찾는데 급급할 필요는 없었다. 가차 없이 밟아버릴 테다. 놈들이 자초한 일이다. 나는 시선을 돌려 세영의 얼굴을 직시하며 냉담히 말했다. “세영. 넌 내일 학교에서 나와 대화 좀 하자. 너와 나 사이에는 풀어야할 문제가 많이 남아있으니까.” “응…….” 고개를 푹 숙이는 세영을 무시하고 일행들에게 말했다. “체력회복 다 했으면 갑시다.” “저기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머리 좀 식히고 가는 게 어때?” 빨리 움직여 위로 올라간 놈들과 만나려하는 내게 로크마가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차갑게, 어찌 보면 잔인하게 보일만한 송곳니가 드러나는 미소를 그에게 선사했다. 내 주위로 싸늘한 기운이 맴돌고, 그 소름끼치는 기운에 모두가 흠칫 몸을 움츠린다. 흥분? 내가 지금 흥분 안하게 생겼어? 나조차 이가 갈리는 고통을 은현이 겪었다. 거기다 행복은커녕 최악의 환상을 보았다. 은현이 괜찮다고 할지라도 가만히 웃는 것으로 넘기기엔 내 성격이 용납 못해. 정말, 여기다 헬 브레스를 갈겨 모조리 부셔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것이다. 나하나 때문에 모두에게 이벤트를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보복을 가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 ‘예약된’ 50명 전부를 익스펠 시킬 때까지 성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왜 예약했다고 지껄이는 놈들 때문에 우리가 사나운 꼴을 당해야하는 것인가? 그런 이유 따위는 없다. [증빙자료 보내줄 테니까 미르트에 신고해. 나보단 모니터링요원인 네가 말하는 게 더 설득적이고 신뢰성 있을 테니까.] 싸늘하게 식어있는 분위기 속에 나는 레네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성호에게 부축 받고 있던 레네트는 메시지를 받았는지 눈을 크게 뜨고 날 응시했다. 그리고 곧 얼굴을 굳힌다. 그것을 본 나는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블록… 까지 시키려고? 꼭 그래야겠어, 카르마 오빠?] 레네트의 답신에 나는 피식 조소했다. 블록까지 시켜야겠냐고 했어? 유기한 블록도 약한 거라고 생각하거든, 나는. 내가 운영자였으면 그놈들이 다시는 엘-가드에 발을 딛지 못하도록 영구접속차단을 시켜버렸을 거다. [날 너그러운 놈으로 보지 마라. 나는 내게 칼을 들이민 사람을 용서해줄 정도로 도량이 넓지 않아. 당한 것은 뻥튀기해서 돌려주기가 내 철칙이거든. 설령 운영자가 용서하고 당사자들이 괜찮다고 해도 난 절대 그냥은 못 넘어가.] [하지만…….] [레네트 넌, 해결할 능력이 충분하면서도 가족이 아파하는 걸 두고만 볼래?]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익스펠에 블록은 심하잖아. 여기에 올 정도면 레벨도 상당할 테지. 거기에 익스펠 되서 레벨이 저하되면 실망도 클 텐데 그 정도면 되는 거 아냐?] [우스운 말을 하는구나, 레네트. 익스펠 된 이가 우리였다 해도 그런 말이 나올까? 아아, 됐다. 너랑 말다툼하려고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니니까, 나는. 네가 신고했으면 블록이 1분이 될게 30초가 될 터이니 아쉽기는 하지만, 내가해도 블록은 되니 큰 의미는 두지 않아. 쓸데없는 논쟁은 그만두자.] 홈페이지 게임 수칙에 이와 관련된 규약이 상기되어 있다. 『이벤트는 모든 유저가 동등한 위치에서 즐기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 한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므로, 만일 누군가가 이벤트를 방해를 할 시엔 신고하라. 원활한 이벤트 진행에 지장을 준다고 판단될 시엔 제재를 가하겠다.』 라고. 이 내용을 참작할 때 나이트메어가 한 짓은 분명한 신고감이고, 또한 블록감이다. 그러니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판에 내가 이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잖은가. 영구블록은 힘들더라도 차후의 모든 이벤트 참여불가에 1개월 접속차단까지는 가능하다. 말만 잘하면 블록 최대기간인 3개월로 늘릴 수도 있는 것이다. 미르트와 관련된 레네트라면 가능할 만도 하니 나로서는 솔직히 아쉬웠다. Level 7. 재회(再會). (12) 레네트는 나에게 한동안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서있는 방향도 반대여서 일행들은 내가 레네트와 메시지로 대화중이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예상컨대, 내가 로크마의 말을 수용해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침묵하는 것이라 여기고 있겠지.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나는 화가 삭혀지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더 끓는 지경인데. “알았어, 오빠. 내가 할게.”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들려온 갑작스러운 말에 레네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레네트는 포근하게 웃으며 날 보았고, 다른 이들은 뭔 말을 하나 싶어 나와 레네트를 번갈아 볼 따름이다. “오빠 말이 옳아. 죽는 게 우리였다면 말을 달라졌을 거야.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걸.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이젠 나와 친한 사람들이 죽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거기까지 말한 레네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은현을 바라보았다.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부러움이 깃든듯하고 촉촉이 젖어 처연하게도 보이는, 그런 바다색 눈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아 물어볼까도 했지만 굳게 침묵하고 레네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응, 시에나가 부러워. 그래서 질투도 나. 가족의 사랑이란 거, 이런거구나 하고. 오면서 말하지 않았지만 나, 가족이 없거든. 부모님과 언니 둘에 오빠 한명이 있었는데 여행가다가 찾아온 여객기 추락사고로 사별했어. 나는 몸이 약해 어렸을 때부터 외가에 맡겨져 있는 바람에 가족과의 접촉이 적어 이렇듯 살아있지만. 그래서 가끔은…… 현실이 게임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해. 그럼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테고, 나는 가족을 잃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야. 또 침대에 누워 하늘만 올려다보는 게 아니라 여기서처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을 테니까. 신고까지 해야겠냐고 내가 그랬지? 이 이유 때문이야. 여기서 누군가가 떠나가는 것은 싫은걸. 그게 누가되었든지 간에.” “레네트…….” 주디스가 레네트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고 조심스레 머리를 쓸어주었다. 레네트는 괜찮다는 말로 그녀를 안심시키려한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쩌라는 것인가. 현 상황과는 전혀 연관 없는 내용을 나열하는 저의가 뭐냐, 레네트? 내 동정심이라도 유발해 화를 누르게 하려는 속셈이기라도 한 것이냐? “어쩌라는 거지? 요점만 말해. 네 말을 들으면서 시간을 지체하고픈 마음은 없어.” “카르마!!” 레네트를 위로하던 주디스가 나무라듯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다른 이들의 따가운 눈총을 무시한 채 레네트만을 응시했다. 레네트는 주디스의 팔을 풀어내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안 사실이지만 오빠는 잔인해. 너무나…….” 그래. 난 잔인하다. 부정하고픈 생각은 일찌감치 버렸다. 사실이 그러하고 내 자신 또한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니까. 아니라고 변명할 거라면 애초부터 헬 마스터란 칭호를 거부했을 것이다. 헬 마스터는 내 잔인성을 완전하게 함축하는 이름이니 말이다. 나는 눈가가 투명하게 젖어가는 레네트를 향해 차갑게 응대했다. “지금이나마 알아서 다행이군.” “얌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인간이 왜 그리 뒤틀렸어? 레네트한테 사과해!” 성호가 으르렁거리며 내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와 멱살을 잡아채갔다. 배 아픈 사실이지만 성호의 키가 나보다 컸기에, 멱살을 쥐고 끌어당기니 뒤꿈치가 조금 떠올라야 했다. “인간이 썩었어, 넌! 레네트 입장에선 말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걸 별거 아닌 걸로 말하냐? 진짜 왜 그러냐?!” 한껏 가까워진 성호의 붉으락푸르락한 면상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나는 실소하며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는 성호에게 대답했다. “한두 번 봐온 것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야!!” “그것보다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지? 레네트의 보호자라도 돼?” “그, 그건……!” 성호는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말을 더듬으며 레네트를 돌아보았다. 성 입구에서 호감을 느꼈다 한들 단숨에 연인사이가 된 것은 아니니 당연했다. 멱살을 잡고 있는 성호의 손에 힘이 풀리며 느슨해지고 들려졌던 뒤꿈치가 다시 바닥에 닿는다. 나는 거친 동작으로 팔을 쳐내고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오빠! 오빠답지 않게 왜 그래요?”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와 성호를 밀어내고 한소리 늘어놓는 은현. 나는 녀석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화난 것일까? 미간을 찡그리고 있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작은 비웃음을 흘리며 은현에게 되물었다. “나다운 게 뭔데?” “그, 그건…….” 은현은 방금 전의 성호와 마찬가지로 주춤 몸을 움츠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본초 이게 나다운 것이다. 지금은 조용히 살고 있다지만 예전에는 싸움만 하고 다녔던 나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나답지 않다고 한다? 우스운 소리였다. “날 위협한 놈들을 살려둘 정도로 성인군자가 되지 못한다.” “그럼 만약에 오빠를 죽이려하면 절 죽일 건가요?” 손끝이 감전된 듯 살짝 꿈틀거렸다. 다른 이들은 일순 숨을 삼키며 입을 닫았다. 나는 잠깐이지만 눈과 입을 닫고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이대로 화를 낸다 해도 상관없었다. 녀석이 자초한 일이다. 난 그것에 충실히 답해줄 뿐이다. 딴에는 말문을 막을 절호의 질문이라 생각해고 말했을 테지만, 녀석의 질문은 한참이나 어긋난 것이었다. 어디서 그런 망발을 내뱉는 것인가. 은현의 입에서 ‘죽인다’라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만약이라는 가정이라고는 해도 가족에게 ‘죽어라, 죽여라’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언사다. 은현은 망설임 없는 내 대답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스태프로 배를 찔러왔다. 맞아줄 생각은 없어서 가뿐하게 스태프의 중간을 잡아 멈추게 만들었다. 공격이 실패했다는 것 때문인지 녀석은 더욱 울컥한 얼굴로 외쳤다. “이제 죽여 봐요! 공격했으니까 죽여보라고요!!” 대답하지 않고 스태프만 놓아주었다. 은현은 분한 모습으로 재차 공격을 감행하려 했으나 뒤에서 팔을 잡는 세영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은현은 발버둥치며 외쳤다. 녀석의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정신 차려. 네가 먼저 잘못한 일이니까.” 세영은 은현의 귀에 대고 작게 타일렀다. 가까운 거리여서 내게도 충분히 들려왔다. 은현은 발버둥을 수그리면서도 높은 톤으로 물었다. “어디가요?!” “너도 ‘그래’라는 대답에 화가 났지? 그럼 류현은 어땠겠어?” 세영의 말에 은현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행동을 되새겨보는 것인가? “……언니도 똑같아!!” 아니로군. 은현은 반항적으로 몸을 비틀어 세영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눈물짓는 모습으로 날 향해 소리치고 밑에 층으로 사라졌다. “오빠 미워!!” “으, 은현아!” 안혁이 다급히 녀석의 뒤를 쫒아갔다. 그러나 몇 분이 흐른 뒤에 허탈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은현은 로그아웃한 모양이었다. 안혁은 터덜터덜 걸어오다가 날 마주하고는 이를 갈아댔다. “왜 그랬죠?” “뭐가.” “왜 은현이에게 상처를 주느냔 말입니다! 누구보다 당신을 생각하는 아이에게! 은현은 당신을 걱정해서 한 말인데…… 그것도 몰라주고!! 당신이 그러고도 은현의 오빠야? 당신이 그러고도 가족이야?! 당신한테는 은현의 오빠란 자격이 과분―” 퍽! “컥!” 주먹으로 안혁의 얼굴을 가격하고 명치를 강하게 차버렸다. 그리고 바닥에 뻗어 신음하는 놈에게 고함쳤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면 네놈부터 죽여 버린다! 네가 은현과 나에 대해 뭘 알고 그딴 말을 지껄이는 거냐! 넌 내 관점에서 볼 때 타인일 뿐이다!! 네가 이쪽 가족문제에 끼어들 자격 따윈 어디에도 없어!! 알아들었어?!” 제기랄. 은현이 문제가 나오니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기습적으로 급소를 얻어맞아 정신을 못 차리는 안혁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대로 간다. 따라올 사람은 따라오고, 싫은 사람은 여기에 있든가 나 올라간 뒤에 올라와.” “함께 가겠습니다. 어찌되었건 저희 모두는 지금껏 같이해온 ‘동료’이지 않습니까. 카르마님 혼자 고생하시는 것은 눈뜨고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들을 용서하고 싶지는 않군요.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힘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결의가 굳은 세비치드의 말에 그의 얼굴을 직시했다. 한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화답했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니요. 당치도 않는 말이에요. 오히려 과분한 걸요. 고마워요, 세비치드.”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자 그가 마주잡아주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주디스와 다른 사람들. “따로 움직여봐야 먼저 올라간 유저들과 마찰이 생기는 것은 뻔한 일이야. 그들이 우리를 가만히 둘 이유가 없으니까. 어차피 대립해야 될 거라면, 모두 함께하는 게 차라리 낫겠지.” 그렇게 하여 파티는 재결성되었다. Level 7. 재회(再會). (13) 우리는 수월하게 상층부로 올라갈 수 있었다. 가는 길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탓이다. 트랩은 파해 되어있는 채였고, 몹은 눈에 밟히지 조차 않았다. 이것은 앞사람이 지나간 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시간을 낭비해 놈들과의 거리가 더욱 벌어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게끔 하면서, 그들의 실력에 대한 내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9층과 10층을 지나 11층에 도달해서도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진척속도가 매우 빠름을 암시한다. 시간 계산을 해보면 그들이 9층으로 들어선 기점부터 소요된 시간은 최대 두 시간이었다. 두 시간 만에 3층 돌파는 300레벨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디텍터뿐만이 아니라 파티멤버들의 레벨도 높고, 유저들 간의 밸런스도 극상이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추리해보면 파티 평균레벨이 350정도라는 결론이 도출되니 내가 은근히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혼자 게릴라전을 펼치면 문제없지만 전면전이라면 우리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뭐, 눈앞에 노이지 않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내가 디바이너(Diviner : 예언자)도 아니니 앞일은 모르는 것이지. 여기까지 오면서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나도 몰랐던 사이에 입가에는 냉소가 걸렸고, 주변으로는 무엇도 침범하지 못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예기가 스산하게 감돌았다. 이로 인해 일행들은 주눅이 들어 내게서 몇 보 떨어져 걷고 있는 상태였다. 아, 거기서 세영은 제외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나와 나란히 걷고 있거든. “아직도 화났어?” 어느 순간 세영이 물었고, 나는 멈칫했다. 뒤이어 몸이 녹아버릴 것 같은 분노감에 치를 떨며 고개를 돌려 세영쪽을 쏘아보았다. 그녀가 발을 멈추고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럭저럭 화는 풀린 모양이구나.” 나는 세영의 입이 재차 떨어짐과 동시에 검을 찔러 들어갔다. 검은 세영의 허리 옆을 스쳐 횃불의 빛이 도달하지 못해 음영이 짙어진 벽의 한 부분을 찔렀다. 검 끝이 뭉툭한 돌의 표면에 충돌하여 차가운 금속성을 터트리며 노란 불꽃을 튀긴다. 충돌력과 허공을 찌른 공허함이 동시에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찰나의 시간에 회피한 것이다, 빌어먹게도. 수긍하긴 싫지만 내 공격속도를 뛰어넘는 기동력이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나도 아니다. 검을 내던지고 몸을 기울여 세영에게 밀착시켰다. 따뜻한 온기와 비단 같은 부드러움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왼팔로 세영의 허리를 감싼 뒤에, 비어있는 오른손으로 그녀 허리 뒤쪽 벨트에 걸려있는 단도를 잽싸게 뽑았다. 그리고 낮게 점프해 세영을 축으로 회전하면서 단도를 투척했다. 단 2초 만에 연계된 동작이었다. 반성 때문에 휘청거리는 세영을 허리에 두른 팔로 받쳐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검을 던진 쪽을 뚫엊라 직시했다. 단도가 허공에 박힌 듯 고정되어있는 형상이 눈에 잡혔다. 검 주변으로 이어지는 어렴풋한 일렁임과 대기의 파동. 이마 앞까지 당도한 단도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고 있는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스타킹을 신고, 세일러복 비슷한 차림에 양 팔에는 카타르를 장착하고 있었다. 솔직한 의미에서 감탄했다. 피하기도 불가능했을 텐데 오히려 그걸 잡아내다니…….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음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손에 가려져서 잘은 보이지 않지만 얼핏 보이는 여성의 얼굴은 시멘트라도 바른 것처럼 회색으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러다 입술을 깨물고 거친 손동작으로 단도를 내던진다. 검은 땡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 위를 몇 번 튕기다가 잠잠해졌다. 나 같으면 역으로 던졌을 텐데……. 그쪽은 견제해서 좋고 이쪽은 따로 주우러갈 필요가 없어 수고를 덜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주워와.” 넵. 발발이 대령했사옵니다. 냉큼 물어오도록 하죠. 세영의 허리를 감고 있는 손을 풀어내고 앞에 떨어져있는 장검을 주웠다. “…….” 힐끗 왼팔을 보았다. 팔 전체에 아직도 야들야들한 느낌이 머물러있었다. 나는 반팔옷을 입고 세영은 허리가 드러나는 옷이어서 감촉이 다이렉트로 전해져온 것이다. 뽀얗고 녹을 듯 부드러운 살결에, 한 팔에 들어오는 잘록한 허리. 유나와 지연누나도 이러할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한가한 것에 집중할 때가 아니다. 나는 고적대가 지휘봉을 돌리는 것처럼 한손으로 검을 회전시키다가 손잡이를 잡고 검극을 여자에게 겨누었다. 퓨어 섀도우(Pure Shadow) 리아라. 모습을 확인했을 때부터 단박에 알아보았다. 리아라는 엘-가드에서 내게 잊혀지지 않는 몇 안 되는 유저 중의 하나니까. 햇빛의 그을린 듯 조금은 까무잡잡한 피부색에 엉덩이까지 닿는 회색 머리칼과 섬세한 외모, 잘빠진 몸매. 확실히 아름다운 그림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퓨어 섀도우는 그녀를 정확하게 함축하는 이름이라 생각한다. 나는 검면으로 어깨를 툭툭 치며 실웃음을 지었다. “세번째 만남이로군, 리아라.” 리아라의 얼굴에 얼핏 놀란 기색이 어른거린다. 그러나 곧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제 쪽에선 당신과 첫 번째 만남인 것 같습니다만.” 이런, 이런. 이쪽에선 기억해주고 있는데 못 알아봐주면 섭섭하다고. 아무리 모습을 바꿨고 잊어라 말했지만 말이다. 클래스 섀도우 그랜져(Shadow Grandeur)의 360레벨 리아라. 암살 계통 쪽에선 일인자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한 실력을 보유한 유저다. 아무리 내 능력치가 높다 한들 스피드 면으론 그녀에겐 뒤쳐질 것이라고 본다. 전문 클래스와 비전문 클래스의 차이랄까. 뭐, 정확히는 익힌 스킬의 차이지. 내가 리아라와 처음 만난 것은 PK를 한창 하고 있을 당시였다. 그때는 절대감각이 지금처럼 익숙해지지 못해서 그녀로부터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간신히 피하기는 했어도 불식간에 등 뒤로 나타나 공격을 퍼붓는 데에는 소름이 쫙 끼치더라. 뭐, 막판에 체력 차이로 내가 이겼지만 죽이지 않았다. 레벨 차를 극복하고 날 몰아붙이던 리아라의 실력은 탐나는 것이었으니. 내 마음에 불을 질러버렸던 것이다. 물론 반한 것은 아님을 알아두자. 두 번째 만남은 나에 의해 안배된 의도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리아라 만큼이나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던 나는 결단을 내리고 곧장 그녀에게 접촉했다. 실력증강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랴. 당시 나는 힘을 조종하는 게 아니라 휘둘렸기에, 리아라의 운용능력은 매우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빛깔만 좋은 개살구였지. 나는 모습을 바꾸고 마나도 최대한으로 감춰, 50레벨의 초보로 둔갑해 러브리(Lovely)라는 닭살스러운 이름으로 우연을 가장해 만났다. 우연적인 만남이라고 하기엔 좀 어색한 면이 있어서 처음의 그녀는 날 경계했었다. 대략 일주일은 그랬을 것이다. 결국엔 내가 그런 이유로 접근한 게 아님을 알고 경계를 풀었지만. 나중에 말하기를, 자신의 외양 때문에 접근한 줄 알았단다. 웃기는 소리여서 코웃음만 쳐주었었지. 유나밖에 눈에 차지 않던 시절인데 리아라를 안중에 둘 이유가 하등 없었다. 리아라는 길드 같은 곳에 들지 않은 유저여서 자유로운 플레이가 가능했다. 나도 피차 마찬가지였기에 언제나 그녀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스토커라 여겨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리아라에게 집착했다. 정도가 심해 나조차 실은 리아라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의심해본 것도 수십 번은 되었다. 뭐, 정작 당사자는 통달을 해 해탈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던지 얼렁뚱땅 웃는 것으로 넘기기 일쑤였지만. 그렇게 두 달 가량을 함께 사냥하고 다니면서 나는 그녀의 모든 행동 패턴을 익히고 배웠다. 리아라가 전투를 치를 때면 언제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봤기에 부담스러워 노하우를 알려준 게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상 배울게 없어지자 대륙 동단에 위치한 B급 사냥터 ‘죽음의 땅(Land Of Daeth)’에서 정체를 밝히고 일대 승부를 가렸다. 듀얼이 아닌 실전으로. 누구 한 명 죽을 때까지 계속 싸우기로 구두약속을 하고 말이다. 오랫동안 지속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경을 칠 정도로 증강된 내 실력에 리아라는 채 5분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드러눕게 되었다. 그리고 체념한 듯 눈을 감고 말하던 그녀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눈에 선연하다.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결과는 이래도 헬 마스터 당신과 함께하면서 언제나 즐거웠으니까요. 놀랍게도, 리아라는 내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그녀가 날 원망하지 않고 따뜻한 눈으로 웃어주었다는 것……. 나는 그것에 기묘해져서 차마 리아라를 죽이지 못했다. 다만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는 말만을 남기고 접속을 끊었다. 로그아웃 직전에 본 그녀는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듣지 않았다. 그녀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리고 대륙력 812년 9월 5일 현재(게임 내의 시간), 엇갈린 만남을 매듭지으라는 듯 얄궂은 운명의 장난에 의해 리아라와 재회하게 되었다. Level 7. 재회(再會). (14) 이것으로 3번째 만남이었다. 이번에는 살려두는 아량 따윈 없을 것이다. 리아라도 나이트메어와 한패거리일 테니.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아신 겁니까? 딱딱한 어조다. 예전에는 부드럽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시간이 흐르니 사람도 변하는 것인가? “완전하게 은닉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리아라는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운영자가아니라면 리아라의 기척을 제대로 잡아내는 유저는 없을 거라 단언할 수도 있다. 오죽하면 절대감각을 소유한 나임에도 5미터 내에 들어오고 나서야 그녀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었겠는가. 소름끼치도록 특출한 은둔술은 리아라의 실력을 단적으로 반증해주는 예다. 그녀는 번복할 수 없는 일류의 실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물론 나야 청출어람이 무엇인지 몸소 실천하여 리아라를 뛰어넘었지만 말이다. 그녀의 등장이후 일동 긴장하여 무기를 고쳐 잡을 때, 리아라가 거듭 물어왔다. “무슨 수로 제가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아아, 내게는 그것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 지금은 당신 덕분에 불신하는 중이지만 굳이 말해줄 것은 못되니 넘어가고. “몰라도 돼.” 친절한 설명대신 냉담하게 대답해주었다. 리아라의 눈이 꿈틀, 하고 씰룩인다. 나는. “잡담은 이쯤에서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라고 말하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리아라도 더불어 파이팅 자세를 취하고 눈빛을 가라앉혔다. 전투 전에 매번 하던 버릇적인 행동이었기에 나는 그녀가 싸울 생각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여기에 있던 이유, 나이트메어에게 연락받고 우리가 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인가? 흠, 네 실력이라면 은신한 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었을 테니 그럴 만도 하겠군.” “잡담은 끝내자고한 걸로 기억합니다만?” “쓸데없는 걸 기억하는 건 여전하네. 그럼 또 한판 붙어보자고. 이번엔 더 빨리 제압해 줄 테니까. 그리고 살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그때와 같이 죽음을 담보로 싸워.” “당신…… 헬 마스터?” 기억이 났는지 리아라가 날 위아래로 훑어본다. 그리고 조금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랬었네. 헬 마스터…….” 뭐, 충분히 들려왔다. 리아라는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중얼댔다. 늘어진 앞머리에 가려서 입과 턱 선만 보였다. 입에서는 음량이 작아져 웅얼거리는 걸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리아라가 웃음을 지우고 고개를 든다. 싸늘하게 노려보는 눈. 원한에 사무친 듯한 독기어린 시선이었다. 확실히 리아라는 변한 것 같다. 후웅―. 리아라의 발밑에 검은 기류가 모였다. 그러자 지면에서 살짝 떠오르는 몸. 섀도우 모션이군. 저런 것쯤 확인하는 건 일도 아니다. 어쨌든 내가 익힌 스킬이 아니던가. 자주 쓰던 기술이니만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쩌엉―! 순간적으로 대기가 뒤로 밀리며 폭발하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눈에 양 손목에 차여진 카타르의 예리한 끝을 내게 겨누고 거리를 좁혀오는 리아라의 형상이 잡힌다. 그저 정면으로 돌격해오는 것이라면 쉽게 대응할 수 있겠지만 리아라는 절대로 막기 쉬운 공격을 할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오른발이 지면을 사뿐히 밟는다. 하지만 사뿐히 밟은 것 치고 엄청나게 몸이 치솟으며 3미터 가량 떠오르는 리아라. 몸을 비틀어 천장에 발을 대고 몸을 웅크리던 그녀는 곧장 접었던 다리를 뻗으며 화살같이 날아왔다. 공격은 위에서 아래로 하는 게 더욱 힘이 있기에 효과적이다. 저렇게 몸 전체가 위에 있다면 중력과 체중으로 인해 가속이 붙어 공격력은 두세 배가량 뛰게 된다. 더해서 아래에 있는 사람은 그 강맹한 공격에 놀라 위축되기 마련. 그러나 상대가 예상하고 있을 시엔 도리어 독이 되는 공격이다. 빠르게 두발자국 앞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리아라가 허공을 밟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신예를 지니지 않은 이상 내가 있던 자리로 떨어지게 되어있다. 하물며 허공을 걷는다 한들 빠른 속도에서 방향을 틀었다간 충격은 고스란히 리아라에게 갈 것이다. 생각대로 리아라는 내가 있던 자리에 사뿐히 착지했고, 나는 즉시 검을 던졌다. 맞으면 더욱 좋겠지만 막히거나 빗나갈 터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저것은 리아라의 눈을 가리기 위한 기습일 뿐이니까. 진짜는 이것! 드래곤 슬레이어를 출수하고 돌격해 들어갔다. 째앵! “흡……!” 리아라는 팔을 교차시켜 검을 교묘한 각도로 튕겨냈다. 돌격해가던 나는 검이 역으로 날아오자 화들짝 놀라 급히 몸을 숙였고, 뒤이어 느껴지는 찌릿함에 오른쪽으로 몸을 굴렸다. 방금까지 머리가 놓여있던 곳에 작렬하는 리아라의 뒤꿈치. 예상치 못한 것이어서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그동안 가만히 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일까, 전보다 실력이 증진된 리아라였다. 자세를 잡고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냥 당하지는 않겠다는 거로군. 더 이상 날 위협할 수 없을 거라 여겼는데 이토록 성장해서 만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나는 리아라에게 진심어린 어조로 말했다. “강해졌어.” “네게서 받은 빚을 청산하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었어.” 곧장 날아오는 리아라의 대답에 킥 웃었다. 요는, 날 쓰러트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거지? “어디한번 빚을 청산할 수 있나 없나 확인해 보지.” 드래곤 슬레이어를 회수하고 캐스팅했다. 유니크(Unique) 섀도우 스킬(Shadow Skill) 레벨 나인(Level Nine) 리플렉션 소드(Reflection Sword)!! 손 안에 검은 기류가 휘몰아닥치며 한 자루 어둠의 검을 형성해갔다. 잡히지 않는 어둠이건만 손안에 가득히 들어차는 딱딱한 촉감. 그림자 검. 강한 빛 앞에선 약하지만 희미한 빛만이 있는 이곳에선 극대의 위력을 발휘하는 스킬이다. 리아라도 리플렉션 소드를 캐스팅해 두 손으로 잡고 눈을 감았다 떴다. 지난날을 회상해본 것일까. 죽음의 땅에서도 지금처럼 이 기술로 승부를 가렸었으니 말이다. 타앗! 예고도 없이 동시에 발을 내딛으며 맞부딪혔다. 리플렉션 소드끼리 격돌하자 맞물린 부분에서 지직거리며 강한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금속성과는 거리가 먼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 흐흐흑 ㅜ.ㅜ 내일 이걸로 대체 하려고 했는데 ㅠ.ㅠ;;; 님들 미워 ㅠㅍ)/ Level 7. 재회(再會). (15) 대세는 내 쪽으로 기울었다. 리아라는 민첩성만 높다뿐이지 힘은 약했기에 밀리는 게 당연했다. 섀도우 마스터면서 힘까지 나와 맞먹는다면 그게 버그 캐릭터다. 리아라는 몸과 함께 맞대고 있던 검을 비껴내며 허리를 베어왔다. 손목을 돌려 밑으로 검을 내리 깔고 흑색의 검을 쳐냈다. 다시금 스파크가 튄다. 쿡, 작은 웃음을 흘려보내고 강하게 리아라의 검을 쳐올렸다. 손목에 찡한 느낌이 올 정도의 강한 힘으로. 검을 쥐고 있는 리아라의 팔은 이것을 견뎌내지 못하고 부웅 떠올랐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앞으로 파고들어 배에 주먹을 꽂았다. 퍼억! “흑!” 상체가 깊숙이 숙여졌다. 쥐고 있던 검도 놓치고 바닥으로 쓰러지는 리아라. 리플렉션 소드는 그녀에게서 벗어남과 동시에 소멸되었다. 그것으로 승자는 결정되었다. 변함없이……. 나는 그녀의 가늘고 흰 목에 검을 가져갔다. 몸을 일으키던 리아라는 흠칫하며 고개를 젖혔다. “이러언~, 오히려 빚이 쌓여버렸군 그래?” 내 빈정거림에 눈을 지그시 감는 리아라. “……죽여.” “그전에 내 요구를 들어줘야하지 않겠어?” 승자가 원하는 것을 한 가지 들어주는 것은 약속한 일이었다. 문제라면 오래전의 이야기라는 것. 리아라가 지금 와서 들어줄지는 미지수였다. “……말해.” 들어줄 생각은 있나보다. “하나만 대답해. 위로 올라간 유저가 몇 명이나 되지?” “스무 명.” 짤막한 대답이었으나 이해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뭐, 상당히 적은 수만 살아남아서 올라간 모양이다. 성 입구에선 137명이라 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레벨 높고 파티 밸런스가 좋다고 해서 무조건 최강이라고 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아니, 아무튼. 살아남은 유저들! 목 깨끗이 닦고 기다려라! 지옥이 뭔지 확실하게 구경시켜주지. 드림 브레이크만큼의 고통을 반드시 겪게 해주마! 어깨를 으쓱하고 검을 슬쩍 치웠다. 안도할줄 알았는데 오히려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쏘아본다. 고개를 저어보이는 것으로 가시 돋친 시선을 무마시키고 리플렉션 소드를 완전히 해제시켰다. 그러자 그 즉시 카타르를 위시하여 달려드는 그녀. 도대체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승복할 줄 알던 여자였는데 이렇듯 기를 쓰고 죽이려드는 이유가 뭘까? 아니지, 저 모습은 죽으려드는 것인가? 수많은 허점이 드러난 리아라. 워낙 치명적인 급소들이 많이 노출되어있어, 어딜 공격해야 잘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고민마저 든다. 함정이라기엔 동작이 크고 위험천만한 도전이니, 이것은 날 죽여 달라는 표현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이대로 목을 쳐버릴까 허리를 벨까 고민하다가 손목만 잡아챘다. 워낙에 움직임이 커서 손목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양 손목을 잡고 안쪽으로 끌자 리아라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등을 세차게 부딪쳤다. 한번 크게 들썩이는 상체였으니 상상이상의 충격을 받았음은 자명한 일. 나는 그 위에 올라타 한손으로 손목을 모아잡고 머리 윗부분에서 짓눌렀다. 조금 원색적인 포즈여도 저항을 없애려면 이 방법이 확실했다. 역시나 포즈 때문인지 리아라가 얼굴을 붉히며 바짝 긴장한다. 내가 험한 짓이라도 할 거라 생각하는 걸까? 그런 거라면 우스운 생각이다. 그딴 짓을 해서 나만 손해 보게? 신고라도 당하면 나만 블록이었다. 거기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내가 얼굴 팔리는 짓을 할 리가 없잖은가. 특히 여자들이 있음에야. 약간 어이가 없어서 흥, 콧숨을 뱉어내고 드래곤 슬레이어를 꺼내 목에 들이밀었다. 리아라는 예리한 날이 살갗을 파고들자 숨을 삼키며 고개를 젖혔다. 아무리 게임이어도 죽는 것은 두려움을 수반하니 이해가 되는 행동이었다. 죽는 것에 익숙해지거나 쓸데없는 것이라 여긴다면 담담해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나는 얼굴을 가까이 마주대고 말했다. “기가 드세졌군. 패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다니.” “……죽이면 되잖아?” “죽는 걸 즐기나 봐? 죽여를 입에 달고 살게. 정 죽고 싶으면 자살을 하던가 하지 그래? 내가 따로 수고하지 않도록.” 입술을 비틀며 드래곤 슬레이어를 스윽 긋자 흠칫하는 그녀. 언밸런스의 극치여서 한숨이 다나온다. 죽여 달라 하면서 뭐야, 그 흠칫흠칫하는 태도는? 리아라는 떨리는 눈동자로 나와 억지로 시선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그런 거 못해. 네가 아니면, 안돼.” 당황스러운 대답에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 “어째서?” “……말해줄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이젠 반대로 빈정거리는 리아라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검을 비스듬하게 들었다. 이대로 팔을 내리기만하면 드래곤 슬레이어는 리아라의 목에 박히리라. “원하는 대로 해주지.” 어깨가 힘에 반응하여 꿈틀거렸다. “윽!” 리아라가 눈을 질끈 감는다. 그것을 본 순간, 파노라마처럼 빠른 속도로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기억들. 검극이 그녀의 목 언저리를 살짝 누르고 멈췄다. 검의 뒤를 쫒은 미약한 바람이 그녀의 회색 머리칼을 흔들었다. “…….” 제기랄……. 못 죽이겠다. 이를 악물었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도로 허리에 차고 몸을 일으켰다. “이벤트에서 빠지고 당장 로그아웃해.” “……?” 이에 모르겠다는 듯 크게 뜬 눈으로 날 응시하는 리아라.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다시 한번 말했다. “접속 끊으라고! 더 이상 보기 싫으니까!!” 그리고 휙 몸을 돌려, 말없이 지켜봐주던 일행들에게로 걸어갔다. 나는 이유 없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좋아하게 만들어 놓고선! 두근거리게 만들어 놓고선 어쩌라는 거야, 나쁜 자식아!!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그때 뒤편에서 리아라의 고함이 들려왔다. 정신이 멍해진다. 무시하고 지나치기엔 너무 지나친 무게를 지닌 것이었다. 천천히 몸을 돌려 한껏 어이없다는 투로 반문했다. 아니겠지, 내가 잘못 들은 걸 거야, 라고 위안하며. “뭐라고?” “좋아, 한다고…….” 리아라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해왔다. 로크마가 들고있는 해머에 얻어맞은 것 마냥 정신이 아득해진다. 나, 정말 해머에 맞아버린 게 아닐까? ------------------------------------------------------------------------------ 진짜 이게 다거든요....? 그러니 이제 자러....[퍽!] 억! 이거 놓으세요!! 아아악!! Level 7. 재회(再會). (16) “젠장…….” 복잡해지는 머리를 애써 추스르고 동요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려 냉소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아서. 일부러 이런 반응을 보였다. “누가 누굴 좋아해? 가소로운 말이네. 네가 뭣 때문에 나에게 관심을 가져? 내가 드래곤 헌터여서? 게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니까? 장난해?” 뒷짐을 쥐었다. 손이 땀에 절어 미끌미끌하고 바들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긴장한 탓일지도 몰라. 워낙에 당황스러운 말을 들어버렸으니까. “장난 아니야. 진심인걸…….” 또 한번 가슴이 철렁한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세영에게 닿았다. 어째서 반사적으로 세영을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단지 세영이었을 뿐이다. 누구라도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시선을 돌리다 우연찮게 잡힌 게 세영일 뿐이었다. 단지 그 이유밖에 없어……. 심호흡을 해보고 꾹 누른 음성을 리아라에게 던졌다. “그러면서 날 죽이려들어? 애정표현한번 대단하다. 어디 무서워서 가까이나 하겠냐.” “아니야, 그런 거. 오히려 내가 죽으려 했을 뿐……. 티내면 네가 일부러 공격을 기피할까봐 사력을 다해 공격했는걸.”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조용하게 질문했다. “언제부터…… 날 그렇게 바라본 거지?” “처음 만나고 한달 정도 흐른 다음부터. 처음엔 그저 호기심이었어. 이 남자는 내게 관심이 없는 걸까? 하고. 그 뒤로 계속 지켜보면서 네 밝은 모습에 끌렸던 것 같아. 당시에는 일종의 동료의식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게 아니었던 걸. 보고 있으면 가슴 설레고 괜히 부끄러워지고……. 그래서 들키지 않으려고 화도 내보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쌀쌀맞게 대했던 적이 있었다. 해실거리다가 어느 순간 화를 내는 일이 다반사였지. 그게 저러한 이유 때문이었다니…… 머리가 아파오는군. 축객하는 것 같아서 가슴 조린 게 몇 번이었는지 알아? 미간을 손끝으로 꾹 누르고 한숨을 쉬었다. 리아라의 말이 이어진다. “고백하려 했었어. 하지만, 어떤 여성의 곁에 서서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고 포기했지. 지금 생각해봐도 분명히 그 여자와 너는 잘 어울렸던 것 같아. 천년배필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내가 네 옆에 서는 것이 초라하게 느껴졌는걸. 바보 같은 말이지만, 그래도 옆에 있고 싶었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곁에서만이라도 지켜보고 싶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그것은 너와 싸우고 난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고.” 말을 마쳤는지 리아라는 고개를 숙였다. 리아라가 말한 여자는 유나일 것이다. 유나는 피아노레슨 때문에 엘-가드에 그리 많이 접속하지 못했으니 몽티프에서 만났을 때 본 것인가? 후, 골치 아파. 나는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고 눈을 찌푸렸다. “그것과 내게 익스펠 당해야하는 것과의 연관관계는?” “널 좋아하니까 잊지 못해. 네가 좋으니까 난 떠나지 못해. 그래서 죽으려 한거야. 잊으려고…….” “꼭 죽는 다고 잊혀지라는 법은 없어.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죽는 건 계기일 뿐이야. 잊기 위한 계기. 억지지만, 익스펠 당하거든 ‘아. 저 남자는 관심이 없어서 날 죽인거야. 그러니 호감 갖지 말자’, 라고 생각하며 떠날 생각이었거든. 그러니까…….” 리아라의 애처로운 눈길이 내게 닿았다. 이슬이 떨어져 파문이 이는 호수처럼, 잔잔하게 떨려오는 녹황색 눈동자는 말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슬픔은 싫다고. 더 이상 날 힘들게 하지 말라고.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애상감. 유나가 떠올랐다. 내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않을 그녀였다. 하지만 발치에서 쓸쓸하게 바라보기만 해왔다. 리아라의 마음,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어. 내가 저랬었으니까. 이루어지지 않아 답답함과 애가 타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아. 나는 어금니를 악물고 드래곤 슬레이어를 그러쥐었다. 팔이 저려온다. 바들바들 떨린다. [불쌍한 자식…….] 성호의 메시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놈의 말대로 나는 불쌍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정을 아는 이가 볼 때 처량해 보일지도 모르지. 언제나 누구보다 활기차고 뜨겁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사라지지 않는 쓸씀함. 성호는 나에게서 그 기색을 읽어내고 메시지를 보낸 것일 터다. 답장을 보내주지 않은 채 천천히 걸음을 떼어 리아라와의 거리를 좁혔다. 머리가 욱신거린다. 목에 뭔가가 걸렸는지 숨쉬기가 거북했다. 하체가 천근이 된 듯 좀처럼 말을 듣지 않고 한발 한발 발을 딛는 게 힘에 부쳤다.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는지를. “잠깐만 있어봐.” 어깨를 잡아 세워놓고 옆을 스쳐지나가는 세영이 눈에 비쳤다. 두통이 강해지고 육신이 축축 늘어지는 등 도저히 움직일 상황이 아니었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잠자코 세영의 행동을 지켜만 보았다. 주디스가 다가와 굳은 얼굴로 나를 향해 두 손을 모아 펼쳤다. “리커버리(Recovery).” 곱고 흰 두 손 안에 하얀 입자가 모여들어 하나의 구를 이루어갔다. 나는 몽롱해지는 정신을 추스리고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리커버리는 상태 회복스킬일진데 어째서 나에게……? 의문이 뒤섞인 눈길로 바라보자, 주디스는 조금 미소하고 빛을 밀어내는 듯한 동작으로 내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따뜻한 기운이 체내로 스며든다. 알딸딸한 기분과 더불어 두통, 그리고 가슴의 답답함이 아득해졌다. 리커버리 한방에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낯선 감각들. 나는 설마해서 주디스에게 물었다. “이거 혹시…….” 그녀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네, 독에 중독 되어있었어요. 카르마님의 행색이 이상해서 와봤는데 역시나더군요. 카르마님 본인도 몰랐던 것인가요?” 일약 멍청한 표정을 얼굴에 새겨 넣었다. 중독 때문이었단 말이야? 몸에 일어나던 모든 현상의 원인이? 하, 기가 차는군. 하마터면 영문도 모른 채 체력고갈로 인한 익스펠 위험에 처해있었단 말이잖아? 지금까지 내 상태가 어떤지를 알아내지 못했다니……. 확실히 정신적 혼란에 빠져 몸을 돌볼 경황이 없었던 모양이다. 상태가 한결 나아지자 주디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바닥으로 깔려있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세영을 올려다보며 대화를 나누는 리아라를 보았다. 독, 그녀가 건 것일까? 옆에 오도카니 서있던 주디스는 내가 리아라를 빤히 쳐다보는 의도를 알았는지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녀는 아닐 거예요. 혹시 두통, 호흡곤란, 몽롱함 등을 겪지 않았나요?” “맞는, 데요.” “그럼 5~6층 사이에서 걸린 거예요. 앤트 자이언트(Ant Giant)가 가진 독이죠. 몸에 서서히 퍼지다가 점점 빨라져서 마지막에는 그 효과를 불러와 사망하게끔 만들어요. 하마터면 익스펠 될 뻔한 고비에서 벗어난 거로군요.” “그렇나요…….” 설명을 듣고 이해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디스가 방긋 웃으며 등을 떠민다. 세영이 이쪽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무슨 대화를 한 건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꼭 대화내역을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에겐 그녀만의 사정이 있듯이, 나에게도 나만의 사정이 있으니까. 손끝에 손잡이가 걸려있다시피 한 드래곤 슬레이어를 고쳐 쥐고 리아라에게 다가가면서 입을 달싹였다. “결투를 신청합니다.” 무심한 어조로 결투를 신청하자 리아라의 눈이 돌연 휘둥그레졌다. 엉뚱하게도 결투신청을 하는 내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조금 머쓱해져서 간략한 설명을 덧붙였다. “좋은 적수를 잃고 싶지는 않아.” 그제야 리아라는 알았다는 얼굴로 ‘아……’하고 가벼운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곧 상심한 모습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유야 생각해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역시 그렇게 밖에 보지 않는구나…….” 작게 중얼거린 그녀는 애써 밝은 태도를 유지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감고 말했다. “결투를 받아들입니다.” 현실상에선 그저 말에 그칠 뿐이지만, 엘-가드 내에선 작은 힘을 지녔다. P.VS.P의 명령어인 것이다. 명령어가 인식되자 무형의 PVSP 지대가 양자간에 형성되고, 결투를 알리는 표식이 이마에 그려져 빛을 발했다. 시(市)자 비슷하게, 거꾸로 세워놓은 검의 모양을 형상화한 마크였다. 이 표식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유저가 사망할지라도 무언가 소실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터였다. 언저리가 찡그려질 정도로 눈을 꽉 감고 있는 리아라. 그녀의 주먹 쥔 손끝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저런 나약한 모습 따위 더 이상 보고 있고 싶지 않아. 어느 순간 팔과 더불에 드래곤 슬레이어가 흐릿한 잔영을 남기며 사라졌다. “읏!” 리아라의 신체가 크게 비틀거렸다. 가슴에는 묵빛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깊숙이 박혀있다. 이 순간, 드래곤 슬레이어가 어떠한 중무기보다 무겁고 내 소유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서서히 무너지는 리아라의 어깨를 잡고 다그쳤다. “눈을 떠서 날 봐!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해! 보지 않으면 변하는 것은 없다! 잊고 싶다고 말해놓고서 회피하려들면 어쩌자는 거야?!” 내 일갈에 리아라의 기다란 속눈썹이 작게 떨리고 눈꺼풀이 열린다. “고마워.”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빛으로 사라지는 리아라를 끌어안고 소성(小聲)으로 되뇌었다. 이 이후에 부디 행복하기를……. ------------------------------------------------------------------------- 캐릭터와의 대화. 한류현 : 흠. 이것도 오랜만인데? 작가 : 그래. 네놈 안만나서 꿈자리가 참으로 좋았다. 한류현 : 훗. 견원지간 사이에 어련하실까. 그래, 무슨 꿈 꿨는데? 작가 : (눈치를 살핀다) ...그냥 안말할래. 한류현 : (뭔가를 떠올린 눈치) 오호? 안말하겠다라? 역시 혈기왕성한 나이!! 작가 : 형기왕성한 나이기는 하지. 그런데 문제는... 한류현 : 문제는? 작가 : 안때릴거지? 한류현 : (새침하게 웃는다) 내가 매일 폭력쓰는 줄 알아? 나도 가려가면서 한다고. 오늘은 특별히 봐줄테니까 어서 이실직고하라! 작가 : (머뭇머뭇 입술을 뗀다)....렘이었어... 한류현 : (손을 귀에 댄다) 안들렸어. 뭐라고? 작가 : (기쁨에 겨워서) 할렘이었어!! 은현, 세영, 지연, 듀오, 리아라, 은주, 미연 몽땅 다나와서 비키니만 입고 내 수발을 들어주었어!! 한류현 : (말없이 옷속에서 야구배트 하나를 꺼낸다. 무슨수로 숨겨놓은 것일까?) 그냥은 못넘어가겠다, 야. 작가 : 허, 헉? 마, 말이 틀리잖아, 이건!!! 한류현 : 네 업보라고 생각해라... 감히 이자식이... 빠악! 작가 : 끄악! 빠악! 작가 : 어헉! 빠악! 빠악 빠악! 빠아--- 빠--- ------- 작가 맞아 죽음. Level 7. 재회(再會). (17) 샤미라 G. 카터. 20세. 윤기 나는 회색머리, 거의 은색이라고 봐도 무방한 두발을 지닌 그녀는 마운트 고글을 벗어 옆에 내려놓았다. 형광등에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와 약간 그을린 피부는 그녀의 발랄한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종전에 엘-가드에서 익스펠 된 샤미라는 리스타트보다 로그아웃을 택했다. 일단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샤미라의 바람대로 그는 마지막을 장식해주었다. 그에게라면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이 녹아 없어지리라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한 거라고는 그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았다는 것 하나밖에 없었다. 소용없는 짓을 한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여성의 말이 옳았다. 틀린 말이라고는 단 한글자도 없었다. 그녀는 작은 자책하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샤미라의 집은 소소하지만 결코 작다고는 말 못할 이층집이었다. 그녀는 몸매가 확연히 드러나는 흰 탱크탑과 허벅지에 달라붙는 검은 팬츠 차림으로 1층 거실로 내려왔다. 자신의 마음만큼이나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목을 축이기 위함이다. 거실로 내려오자 중앙에 있는 소파에 눌러앉아 시시덕거리며 넋을 잃고 만화 삼매경에 빠져있는 남동생이 보였다. 이제 18세임에도 애니메이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적갈색 머리의 동생 케니이건만 그녀가 한소리 할 처지는 아니었다. 케니가 만화광이라면 샤미라는 게임광이었으니 피장파장인 셈이다. 그 상태에서 잔소리를 늘어놔봐야 서로 열 받아서 얼굴만 붉히게 되니 일찌감치 입을 다무는 게 좋은 방편이었다. 막내 케니는 그녀의 기척을 읽고 고개를 돌렸다가 인상을 구겼다. “옷 입은 꼬락서니하고는……. 노출증 변태녀같으니!” 괜히 시비를 걸어온다. 샤미라는 성가신 일을 피하고 싶은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주방으로 들어가 주스를 꺼냈다. 그녀는 혼혈아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의. 때문에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 샤미라가 동양적인 미녀가 된 것이다. 거기다 케니와 그녀의 오빠 되는 사람은 서양적인 외양이어서 그녀는 나름대로 자신의 모습에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잘 따라 그러한 외양이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샤미라는 케니의 씨근거림을 한귀로 흘려보내며 주스를 들이켰다. 좀 전에 만났던 한 여성이 떠올랐다. 예전에 자신을 좌절케 만들었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분명 동일 인물이었건만 그 여성은 아니라고 부정했다. 가라앉은 눈매만 차치하면 그 여자와 닮아있었는데도. 하지만 어느 순간 샤미라는 예전에 봤던 여자와 그 여자의 분위기가 상반됨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말했었다. -죽는다 한들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죽어도 변하는 것은 없어요. -말했잖아요, 그건 계기라고 말이에요. -몇 개월 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으면서 그런 말은 억지에요. 기억을 잃어도 너무 좋아했던 이의 느낌은 잊지 못하는 게 사람입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제가 그 경우니까요. 비록 그가 과거와 관련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을 잃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느낌은 남아있다고 했다. 이젠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샤미라는 컵을 내려놓고 고개를 내저었다. 여자의 말대로, 자신이 변화한 것은 없었다. 그때 그대로, 변함없이. “누나!” “왜 부르니?” 무시하려했지만 자꾸 자신을 부르는 통에 샤미라는 귀찮다는 얼굴이 되었다. 케니는 퉁명스러운 억양으로 입을 열며 샤미라를 흘겨보았다. “엄마가 이번 주 금요일에 한국 간다고 했어. 아직 방학 시즌이어서 시간이 남아있으니까 미리 준비나 단단히 해둬. 나야 언제나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으니 넘어간다 치더라도 누나는 여자여서 그게 아니잖아. 그날 가서 준비한답시고 나대다가 비행기 놓치고 싶지 않으면 미리 가방 챙겨.” “아…… 정말이니?” “그래.” 돌연 샤미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케니는 제 말만 마치고 몸을 홱 돌려 만화삼매경 빠져들고 있었다. 샤미라는 기분이 좋았다. 실로 오래만의 한국방문이다. 1년은 족히 가보질 못했으니까. 가는 이유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두말할 나위 없이 어머니의 마지막 혈육이자 하나뿐인 여동생, 즉 이모 댁 방문이리라. 그리고 그녀가 설레어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세계의 중심은 미국에서 동아시아 쪽으로 옮겨간 지 오래였다. 10년도 더 전에 새로운 강국으로 대두된 중국과 5년 전부터 그 뒤를 바짝 쫒는 통일 한국. 세계열강의 비밀스런 사회적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한겨레 통일을 성사시킨 한반도는 요 몇 년간 전율적인 성장을 거듭해왔다. 이제는 5년만 지나면 중국을 넘어설 거라 많은 경제학자가 입을 모아 외친다. 이러한 한반도의 기적을 이룩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이가 미르트의 마스터 ‘유강현’ 사장. 그 유강현 사장이 샤미라의 이모부 되는 사람이다. 세계가 알아주는 유명인사인 그를 바로 앞에서 면식하는 것인데 어찌 기대되지 않을 것인가. 엘-가드의 창시자이니 만큼 더욱 설레는 것이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친지들 중에서 그녀와 유일하게 마음이 통하는 사촌과 만난다는 점이다. 1년 전쯤 헤어지는 순간에 얼마나 큰 아쉬움을 느꼈던가. 간간이 엘-가드에서 만나 담화도 나누고 하지만, 역시나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모조품은 진품이 될 수 없듯이, 가상현실은 가상일뿐 현실이 아니니 말이다. 또한 그때 못 본 나머지 사촌 여동생도 봐야하고. 샤미라는 케니에게 말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창문을 활짝 연다. 도심과는 떨어진 한적한 곳이어서 상쾌한 공기가 밀려왔다. 뜨겁게 타오르는 일륜(日輪)과 그것을 담은 아득히 멀고도 높은 청청한 창공. 쾌청하게 개어있는 하늘 속에는 솜 같은 구름들도 담겨있다. 샤미라는 창가에 기대어 한적하게 바람을 느끼며 작게 중얼거렸다. “가볼까? 한국에.” 샤미라 G. 카터. 퓨어 섀도우 리아라. 꽃내음을 품에 안은 싱그러운 미풍이 강해지고 있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 -------------------------------------------------------------------------- 요즘에 새로 쓰고 있는 소설의 문체를 도입해봤습니다. 엄청나게 날림이 되어버리는군요. 후... 그 글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던데.. 쩝.. 1인칭으로 가다가 갑자기 3인칭이 되어버려서 그런가? 에이 몰라. 갈대로 가라지~ *이번화 수정했습니다. Level 7. 재회(再會). (18) 어느덧 만나버렸다. 활시위가 당겨진다. “카악!!” 네이가 날린 화살이 상대의 어깨에 꿰뚫었다. 오른쪽 어깨가 관통당한 유저는 무수한 검상을 안은 처참한 몰골로 외마디의 비명을 남기고 빛으로 무너졌다. 네이가 사출한 화살이 상대의 어깨에 꿰뚫었다. 오른쪽 어깨가 관통당한 유저는 무수한 검상을 안은 처참한 몰골로 외마디의 비명을 남기고 빛으로 무너졌다. 보통 상황에선 어깨에 맞는 것만으로는 익스펠 되지 않지만, 지금은 워낙에 많은 공격을 받은 터라 체력이 현저히 저하되어있는 통에 일격만으로 사망한 것이다. “죽어!!” “즉결 처형!” 안혁의 등으로 짓쳐가는 세이버를 되받아쳐내고 전광과 같은 동작으로 상대의 배를 갈랐다. 상대편 유저는 번들거리는 금속제 갑옷을 입고 있는 상태였으나 오러 블레이드가 이중으로 깔려있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앞에서는 한낱 두부를 걸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옆구리를 베이면서 일순간 밸런스가 무너지는 유저. 안혁은 검을 내질러 그의 목을 쳐냈다. 유저가 빛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 안혁이 숨을 몰아쉬며 하는 감사의 인사를 어물쩍 받아넘기고 신나게 전장의 재재소소를 누비며 유저들을 농락했다. “뒈져라!” 광기에 젖어 안구가 붉게 충혈 된 클래스 벌쳐(Vulture)의 유저 하나가 기습을 감행해왔다. 제법 스피드가 붙어있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나는 생각 없이 휘두르는 공격에 당해줄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아!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뒈져라!” 광폭한 힘을 유연하게 받아내고 멱살을 쥐어 메쳤다. 그의 힘을 그대로 이용했는지라 별 힘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유저는 몸을 비틀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지그시 밟고 ‘해체’에 나섰다. 손가락 발가락을 마디마디를 뽑았다. 손목을 잘라내고 발목을 잘라냈다. 팔꿈치와 무릎도 절단했다. 팔뚝과 허벅다리를 낭자하여 다진 고기를 만들어놓고 마지막엔 머리를 밟아 터트린다. 시간이 촉박해도 반드시 이 과정에 다른 것을 더하면 더했지 빼지는 않았다. 그 후에도 내게 걸린 유저들에겐 예외란 없었다. 비위가 약한 레네트와 주디스가 헛구역질을 연발했지만 관여하지 않고 할일에만 충실해졌다. 이전 상황을 설명하자면, 우리는 리아라가 익스펠 된 이후 얼굴을 옷 등으로 감추고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어차피 반드시 마주쳐야할 이들이었고, 결판을 지어야할 이들이었다. 시간을 끌어봐야 짜증나는 것은 이쪽이었다. 일행들도 내 기분을 알아줘서 군말 없이 따라주었기에 이후 한 시간도 안 되어 12층 끄트머리에서 그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서론이고 뭐고 다 때려치운 채 우리 파티와 그들은 격돌했다. 도중에 어느 유저가 ‘리아라는 어떻게 했지?!’라고 물어온 것을 보면, 그녀는 이들에게 일체 함구했던 모양이다. 삼가 감사의 뜻을 표해주고……. 파티간의 레벨 차와 인원수가 현격했지만 우리 측은 조금의 밀림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압도적인 우세를 보여주는 개가를 올렸다. 나는 작정을 하고 있었다. 제일먼저 블레이즈 거스트로 3분의 2를 쓸어놓고 타깃을 돌려 마법사와 힐러들만 집중적으로 도륙했다. 흥분해서 실수할까 노심초사했는데 도리어 전보다 움직임이 좋아져 놀라기까지 했다. 블레이즈 거스트를 후려 맞고 정신을 못 차리던 그들. 그 이후의 처리는 일사천리였다. 부품 빠진 기계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고, 줄 없는 마리오네트로는 성공적으로 인형극을 마칠 수가 없다. 제대로 판단조차 못하는 유저 스무 명쯤 상대하는 것 쯤은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라면, 짜증날 정도로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둘러대는 인간들이 있었다는 것 정도일까? 레벨 수치만 높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이 펼치는 하나하나의 공격엔 상당한 위력이 서려있었다. 당연히 250레벨이 당해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그런 유저는 나와 세비치드가 전적으로 도맡아 초반부터 곤죽을 만들어 놓았다. 결과 우리 측의 피해는 전무(全無). 이 과정에서 나이트메어가 저세상으로 간 것은 당연지사의 일이다. 마지막까지 살려놓았다가 천천히 고문해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가 마법계통이었던 터라 하는 수없이 일차 도살 명단에 넣을 수뿐이 없었다. 나에트메어가 살아있으면 우리 파티는 득보다 실이 많게 되니까. 하지만 그냥 죽인다는 것은 성에 차지가 않아 가장 철저하게 익스펠시켰다. 드림 브레이크만큼의 고통은 확실히 주었다고 호언장담할 수도 있다. 퍼펙트소리 나올 만큼 깨끗하게 회를 떠주었으니까. 피부를 모조리 도려냈으니 전신에 고통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그때 피부가 벗겨진 끔찍한 몰골로 그가 쥐어짜듯 말했었다. -지, 지독한 놈……! 맞는 말을 뭐 그리 눈치봐가며 심각하게 했을까? 오늘 일은 반드시 기억해두겠다고 외치는 그의 입에 검을 틀어박고 답했었다. -평생 오늘 겪은 게 꿈에 나오는 악몽만 꿔라. 네 이름 따라 나이트메어가 매일 밤 찾아갈 테니까. 음, 그게 언령으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해도 희열이 느껴지는 걸! 마법사들을 처리한 뒤 나와 성호는 연계플레이를 해나가며 유저들을 도륙했다. 응당 싸우는 와중에도 상대의 얼굴을 여러 각도에서 찍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무료 촬영이니 불만은 갖지 말아줬으면 해. 그렇게 기하의 시간이 흐른 뒤 사태는 어느 정도 수습되었다. 그리고 우리를 반긴 것은 전쟁 후에나 볼법한 참혹한 풍광이었다. 기절한 유저들은 시체처럼 바닥을 뒹굴었고, 이 근방은 커다란 크레이터를 군데군데 박은 채 처절하게 바스러진 상태였다. 간신히 윤곽선만이 남아서, 이곳이 원통형이아니라 사각형의 통로였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었다. “이제 완전히 정리된 건가?” 휴, 하고 속에 쌓인 것들을 토해내듯 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처럼 사력을 다해 뛰어다닌 적도 드물 것이다. 이렇다할 공격을 받지 않았는데도 체력은 10퍼센트 이하로 뚝 떨어져 있었고 마나는 바닥이 나버렸다. 거울의 숲에서 몹들과 사투를 벌였던 때 이래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아마 세치비드들이 없었다면 진작에 익스펠 되었을 터다. 나는 스턴 된 유저들을 구석에 처박아두고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피곤한 기색은 역력했지만 후회하는 모습은 어디서도 엿보이지 않는다. 나는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고 장난스레 윙크했다. “복수 성공~!” “하하…….” 일행들이 어색한 미소로 답해왔다. 체력과 마나를 회복하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기절해 있던 유저들이 내 사나운 발길질에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유저는 전체 다섯 명. 기절이라 해봐야 몸만 못 움직이고 정신은 말짱하니, 옆에서 중얼중얼 욕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ㅇ다. 일부러 그들의 욕만 쉬지 않고 했댔으니 상당히 저기압이 되었을 터. “네, 네놈……! 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포박 당해있는 한 제노사이더를 거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오호? 다짜고짜라? 너희가 자초한 일이라는 것은 생각 안 해봤지?” “우리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러는 거지, 헬 마스터?!” 악다구니를 쓰는 데스 로드 클래스의 여성 유저를 싸늘하게 노려보다가 눈웃음 지었다. “댁들에게 원한은 없어.” “그러면서 무슨 이유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살기가 스산하게 내려앉는다. 여성의 멱살을 쥐어 잡고 가까이 끌어당겨 송곳니를 내비쳤다. “나이트메어 놈과 같이 있었다는 게 중죄거든. 원망하려거든 나 말고 그 놈을 원망해. 모든 것은 그가 발단이니까.” 사색이 되는 여자를 패대기치듯 던져놓고 일행들에게 모든 효과를 차단하라고 당부했다. 곧 지옥이 연출될 텐데 그것을 썩 보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세비치드들을 이번 일에 연루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까지 PK의 사슬에 묶이게 하는 것은 싫으니까. 모든 것은 내가 짊어진다. 내 말에 몇몇은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휘적휘적 걸어가 앉았다. 시각, 청각, 후각 효과를 모조리 오프(Off)시켰다면, 내가 뭔 짓을 해도 알 수 없을 것이리라. 하지만 세비치드, 세영, 안혁은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나는 세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가 비위가 좋으면 상관없지만 여자의 몸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구경하는 것은 무리였다. 남녀차별성 짙은 말이어도 여자는 확실히 비위가 약하니까. 세영은 내 심중을 눈치챈 것인지 한손을 허리에 얹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뭐, 그렇게 말한다면야……. 보면서 역겨워하든 안하든 그것은 세영의 사정이니 내가 이러쿵저러쿵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이어 세비치드와 안혁을 번갈아 살폈다. 세비치드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듯 작게 웃고 있었고, 안혁은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여기다 해줄 말은 존재치 않았다. 다만 드래곤 슬레이어를 굳게 쥘 뿐. 보든 말든 알아서 하라지. 시선을 돌렸다. 두려움이 진득히 배인 낯빛으로 사시나무 추위에 몸 떨 듯 벌벌 떠는 다섯 명의 유저들. 모든 소리를 차단시켰다.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사람 봐가며 사귀라고.” 유저들의 얼굴이 공포에 질려 새하얗게 죽어간다. 나는 잔혹하게 큰 웃음을 지으며 머리 위로 검을 번쩍 들어올렸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묵빛 검신에 지옥으로부터 뻗어 나온 사나운 핏빛의 기운이 가시덤불처럼 얽혀 들어가고 있었다. --------------------------------------------------------------------------- 너무 전개가 빠른가.. 흐음... Level 7. 재회(再會). (19) “아, 빛이다!” 어두운 복도 끝에서 새오나오는 빛을 발견하고 탄성을 뱉어내는 레네트. 횃불의 밝기와는 확연한 차이가나는 빛이 미약하게 열린 문의 틈새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오오, 드디어!” “올 때까지 왔으니 저곳이 종착점이겠지.” “휴, 이제 저곳만 통과하면 이 지긋지긋한 곳과도 작별이네. 지금까지 고생한 걸 생각하면……. 으으, 진력나!!” 한번만 더 발을 들여 놓으면 게임을 접어버리겠다고 호언하는 네이에게, 모두가 잔잔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벌레 씹은 표정 좀 짓지 마. 차라리 잘된 일인데 뭣하러 깊게 생각해? 혼자 심각하게 진지해지지 말고 웃어, 좀!” 밝은 분위기를 망쳐버리는 형색으로 얼굴을 굳히고 있는 날 성호가 다그쳤다. 나는 귀찮게 볼을 죽 잡아당겨 억지웃음을 짓게 만드는 성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놈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들떴던 분위기도 사그라진다. 나이트메어 일당을 전멸시킨 이후부터는 자력으로 트랩 해체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13층까지 이어질 거라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빠른 속도로 세 번째 트랩을 해체하고 나자 더 이상 해체해야할 트랩이 나타나지 않았다. 덧붙여 그 전까지만 해도 득실거리던 몹들도 완벽하게 종적을 감췄다. 이게 나타내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누군가가 벌써 지나갔다는 것이다. 리아라가 말했었다. 올라간 이는 스무명이 전부라고. 우리와 마주친 유저들도 딱 스무 명이었으니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또한 도주를 시도하던 유저들도 명일 달리했으니 몰래 빠져나갔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유저가 남아있다 함은……. “리아라보다 최소 한 시간은 빨리 등정했다는 것인데…….” 대체 누구일까? 처음 해체된 트랩을 발견 즉시 줄기차게 뛰어 올라왔으니 이쯤 되면 그들과 마주침이 옳았다. 하지만 기척이 잡히는 거라곤 일행들의 것이 전부다. 이외의 것이라고는 저 안쪽에서 느껴지는 있는 기척 하나뿐. 하나, 하나의 기척이라 봐야 이벤트 아이템을 주는 NPC일 테니 기대도 안 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누가 되었든지 간에 우리에겐 득이 되었잖아요. 나이트메어와의 관계 또한 없고 말이에요.” 세비치드와 바짝 붙어서 생긋 미소하는 주디스. 틀린 말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주디스의 말대로 어쨌든 그들 덕에 고생하지 않고 올라올 수 있었다. 그리고 리아라가 허언을 한 게 아니라면 그들과 나이트메어는 생판 모르는 남이 된다. 몰려다니는 게 안전으로 가는 길인데 굳이 흩어져서 등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즉, 이 두 집단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굳어있는 이유는 유저가 더 있다는 부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가까운 거리인데도 그들의 기척을 잡지 못해 열 받아 있는 것뿐이다. “…….” ……사실은, 이렇게 말하면 일행들이 죽이려 들까봐 일단 심각해지고 본 거다……. 네이가 묵묵히 서있는 내 등을 떠밀었다. “로그아웃하지 않았다면 아직 저 안에 있겠지. 일단 부딪혀보자.” 그래, 만나보면 되는 일가지고 생각만 하고 앉아있을 필요는 없겠지. 손목을 잡고 끄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들뜬 기분인 알겠다만, 거부감 느껴지게 홍조까지 띄울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역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픈 여자라니까. “들어가죠. 어느 유저들인지 얼굴 좀 보고 싶네요.” 일동은 나를 필두로 걸음을 옮겼다. 빛이 새어나오는 철문 앞에 섰다. 여기저기 녹슬고 거미줄과 먼지가 내려앉은, 세련미라고는 추호도 없는 밋밋하고 투박한 철문이다. 아치형의 여닫이문으로 중앙부에 손잡이가 달려있었다. 나와 세비치드는 각각의 손잡이를 하나씩 잡고 힘껏 당겼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그리고, 화악― 하며 강렬한 빛살이 쏟아졌다.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떴다.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눈부신 광휘에 쌓여있는 거대한 홀이었다. 가히 성역(聖域)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신성하고 따뜻한 곳이다. 이 밖과는 반대되는 장소여서 이질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 나는 시선을 옮기다가 짤막한 탄성을 발했다. 폭 3미터 가량의 적색 융단이 홀을 가로지르듯 깔려있었다. 그리고 융단이 끝나는 지점, 흰색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나이 지긋한 노인이 황금 옥좌에 위엄 있는 모습으로 앉아있다. 붉은 색조의 비단위에 금색 실로 용을 자수한 두꺼운 망토를 걸치고, 온갖 보석들로 장식된 왕관을 쓴 왕. “다른 손님들이 오셨군. 어서 오시오, 파레르몬의 시련을 이겨낸 자들이여.” 왕은 대전 앞에 서있는 ‘네 명’에게 뭐라고 말하다가 예의 온화한 미소를 품은 면면으로 우리를 반겼다. 그리고 그의 말에 반응하여 몸을 돌리는 네 명의 유저. 내 시선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죽 이동했다. 어깨가 풍성하고 허리가 잘록한 개량형 성직자복을 입고 있는 오렌지색 단발머리의 요염한 여성. 허리에 대거(Dagger) 세 자루가 걸려있는 평범한 여행복 차림의 청년. 안구만 한 크기의 카르보나도(Carbonado : 검은색 다이아몬드)가 박힌 서클릿을 쓰고 본 스태프(Bore Staff)를 든 간교한 뱁새눈의 중년남자. 마지막으로 발목까지 내려오고 갑갑할 만치 두꺼워 보이는 검정색 후드달린 망토로 전신을 감춘 유저. 그 한사람 한사람을 볼 때마다 내 눈은 비약적으로 켜져 갔다. 아, 아니! 저 인간들이 웬일로 사이좋게 옹기종기 뭉쳐서 다니는 거야? 지독한 개인플레이만을 지향하는 인간들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입이 있으면 설명해보라고! 세인트 마스터(Saint Master). 사일런스 워커(Silence Worker). 다크 스타(Dark Star). 그리고……. “데스티니 블레이드!!” --------------------------------------------------------------------- 너무 힘들군요. 글이 너무 안써집니다.. 짜증이 밀려와요.. 모니터에 주먹질한 게 댓번은 넘을 듯.. 키보드 내리친것도 다섯번은 넘어가고... 마우스 던진게 열번... 성격 망치는 첩경이군요... 에휴........... 짜증나아!!!! *다음주부터 기말고사가 시작됩니다. *때문에 앞으로 한주간은 글을 올릴 수가 업게되었습니다. *짬을 내서 조금씩 글을 쓰기는 할테지만 분량이 될지는 미지수로군요. *어쨌든 노력해보겠습니다. *이번 시험 잘쳐야 할텐데.. Level 7. 재회(再會). (20) *수정된 부분 포함되었습니다. “다른 손님들이 오셨군. 어서 오시오, 파레르몬의 시련을 이겨낸 자들이여.” 왕은 대전 앞에 서있는 ‘네 명’에게 뭐라고 말하다가 예의 온화한 미소를 품은 면면으로 우리를 반겼다. 그리고 그의 말에 반응하여 몸을 돌리는 네 명의 유저. 내 시선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죽 이동했다. 어깨가 풍성하고 허리가 잘록한 개량형 성직자복을 입고 있는 오렌지색 단발머리의 요염한 여성. 허리에 대거(Dagger) 세 자루가 걸려있는 평범한 여행복 차림의 청년. 안구만 한 크기의 카르보나도(Carbonado : 검은색 다이아몬드)가 박힌 서클릿을 쓰고 본 스태프(Bore Staff)를 든 간교한 뱁새눈의 중년남자. 마지막으로 발목까지 내려오고 갑갑할 만치 두꺼워 보이는 검정색 후드달린 망토로 전신을 감춘 유저. 그 한명 한명을 볼 때마다 뇌리에 무거운 쇳덩이가 놓이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아야했다. 아, 아니! 저 인간들이 웬일로 사이좋게 옹기종기 뭉쳐서 다니는 거야? 지독한 개인플레이만을 지향하는 인간들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입이 있으면 설명해보라고! “특히 데스티니 블레이드!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저런 사기꾼! 댁까지 능력치가 높아지면 내가 뒤따라갈 여지가 남아있지 않잖아. 아무리 아이템은 다다익선(多多益善), 스테이터스는 고고익선(高高益善?) 이라지만 네놈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강하다고! 그가 영원히 넘지 못할 까마득한 철벽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기를 쓰고 이를 악물어도 그는 더욱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복엽기 그는 폭격기. 어떻게 기는 것으로 뛰는 이를 능가할 수 있겠어! 게임의 세상은 강자를 주축으로 돌아간다. 강자가 원치 않아도 최상의 아이템과 동료들이 모이고 돈이 불어난다. 강한 만큼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못내는 몹을 상대할 수 있으니까. 몹은 강할수록 질 좋은 아이템을 드롭하니, 이러한 상황이 계속 반복되다보면 자연스레 더욱 더 강하게 되는 밑받침이 깔리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템을 노리는 이들이건, 떨어지는 콩고물하나라도 받아먹자고 벼르는 이들이건 간에 강한 유저들이 들끓게 된다. 아이템 스틸이나 PK같은 특벼한 일이 생겨 몰락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기는 하지만 데스티니 블레이드에겐 평생가도 그러한 일이 발생할 것 같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욕지거리가 넘어왔다. 나는 핏발선 눈으로 그의 옆에 있는 셋도 더불어 노려보았다. 데스티니 블레이드가 제아무리 강하다한들 단신으로 열사의 사성을 돌파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저들을 대동하고 상호협력 하에 차근차근 올라온 거겠지. 세인트에 디텍터계통 마스터 클래스 벌쳐(Vulture), 세이지, 소드 엠페러 조합인데 이상 무얼 더 가타부타 할 수 있겠는가? 작정하고 온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음이다. 다만 다른 점이라고는 인원수가 현저히 적다는 것 정도……. 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다. 자식들이 오려거든 다른 파티에나 들러붙을 것이지 왜 하필 데스티니 블레이드야? 세인트 마스터(Saint Master) 안젤라. 사일런트 워커(Silent Walker) 튜아미스. 다크 스타(Dark Star) 필로니드. 이들 전부가 쿼드루플 마스터로 엘-가드 공식랭킹 10위 안에 올라있는 유저들이다. 스테이터스 측정(마나 측정과는 다른 측젖법. 자신의 레벨과 10이상 차이가 날 경우엔 측정 자체가 불가능하다) 결과 400레벨 근처. 데스티니 블레이드 놈은 레벨 측정 불가! 안젤라는 엘-가드 내의 모드 성직자 길드를 통솔하는 총수여서 세인트 마스터라는 별호가 붙게 되었다. 특유의 요염 섹시한 자태로 인해, 현실상에서는 뱀이다 뭐다 가십거리화 되어 세간에 떠돌지만, 정작 당사자는 신경 쓰지 않는 상태. 어쨌든 중요한 것은 성직자계통 중에선 가장 레벨이 높다는 것이다. 튜아미스는 섀도우 그렌져와 견줄만큼 소리 없이 걷는다 하여 고요한 보행자, 즉 사일런트 워커라는 별호를 얻었다. 또한 던젼 탐사하는 데에서 만큼은 최고의 실력자로 인정되어 모든 디텍터계통 클래스 유저들에게 추앙받고 있다. 튜아미스는 용병 시스템을 채용한 레인져 길드를 운영하고 있었다. 길드 마스터인 그가 한번 움직이면 그날엔 길드원 전체가 일주일간 벌어들인 액수에 버금가는 자금이 굴러들어온다 하니, 그가 얼마나 비싼 인적자원인지 말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다크 스타. 서클릿 중앙에 박힌 카르보나도가 마치 검은 별 같다하여 붙여진 별호다. 필로니드는 나와 약간의 의 인연이 있는 남자다. 내가 PK를 하고 다닐 당시에 마주쳐 죽어나간 유저였으니까. 헬 윙(Hell Wing)에 의해 ‘터져’죽었었지 아마? 그때 죽지만 않았어도 지금쯤은 430레벨이 거뜬히 되고도 남음이 있을 텐데 말이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 셋 모두가 쟁쟁한 실력가라는 점이다. 데스티니 블레이드만으로도 버거워 미치겠는데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어 그들까지 합세할 경우, 우리 파티는 그야말로 얄짤 없이 몰살이다. 이벤트 종료가 눈앞인데 죽어버리면 일주일 간은 식음을 전폐할지도 모른다고! 더해서 데스티니 블레이드만 강해지게 되면 식음전폐 한주 추가 확정이다! 그러니까 부디……, 제발 날 알아봐주지 말아줬으면 해! 하지만 하늘은 절실한 바람일수록 이루어주지 않는 심술쟁이라 했던가……. “헬 마스터?” 튜아미스의 믿을 수 없다는 말. “저거 진짜 헬 마스터야?” 이건 안젤라. “귀찮게…….” 재수 없는 중성의 목소리로 열 뻗치게 지껄이는 작자가 데스티니 블레이드. “큭큭! 드래곤 슬레이어! 드래곤 헌터, 아니 헬 마스터가 확실하다! 드디어 과거의 복수를 실천한 기회가 온 것인가!” 마지막으로 필로니드의 확신에 찬 외침. “…….” 나는 두 손으로 꼬나 쥐고 있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황망하게 내려다보았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딱 그 꼴이다. 지금껏 충실하게 날 지켜온 드래곤 슬레이어가 이제는 되려 발을 붙들어 버리다니……. 던젼 이벤트 참가 이후부터 되는 일이 하나 없잖아, 이건! 올라오면서 죽을 뻔한 고비를 몇 번이고 넘기고, 같지도 않은 놈에 의해 정신 공격까지 받더니만, 이제는 꼼짝없이 익스펠 될지도 모르는 최대 핀치? 이 다음은 어떻게 전개될지 생각조차 하기 싫어진다. “야, 저 사람들 혹시…….” 성호가 살살 상대측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메시지 기능을 활용하지 않은 까닭은, 성호 저 녀석도 어지간히 당황했다는 걸 단적으로 가리키는 증거이리라. 그나마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나는 대화 모드를 파티 대화로 설정하고 답했다. 이 대답은 성호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라 일행들 전부에게도 속해 있었다. “세인트 마스터, 사일런트 워커, 다크 스타, 그리고 데스티니 블레이드. 대체 이 난국을 어떤 식으로 헤쳐 나가야만 되는 거냐…….” 성호는 헉 숨을 삼켰다. 다른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새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저들과 부닥치게 되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될지를. 성호는 심각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지, 지금 이 상황이 어째서 난국인지 설명 좀 해주라.” 그리고는 저러한 웃기지도 않는 말을 해오는 것이었다. 나는 수 초간 녀석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아니겠지 하고 한껏 어이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딱 봐도 싸울 태세잖아!” “그러니까 왜 싸우는데?” 뭐야, 이놈? 설마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야? 이런 둔한 자식 같으니! 너야말로 곰이다! “날 천년원수로 여기고 있는 유저가 있으니까!” “메야? 그럼 네 일이잖아! 거기에 왜 우리를 결부시켜? 난 또 더없이 심각하기에 뭔가 했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오늘 처음 본 세비치드들도 걱정스럽게 보는 판국에, 몇 년 동안 곁에서 봐오던 성호가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자기 한 몸 살아보겠다고 친구를 팔아먹으려 들어? 드래곤 슬레이어를 굳게 쥐고 으르렁거렸다. “썩을 것! 너부터 죽어봐!” 아닌 게 아니라 확실히 성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잘 생각해보면 저들과 트러블이 있는 이는 나밖에 없으니 혼자만 사라지면 되는 일인 것이다. 그것만이라면 눈 한번 딱 감고 익스펠 될 각오도 되어있다. 하지만 다크 스타의 개같이 물고 늘어지는 성격으로 미루어 보면 나 하나로 끝내지 않을 게 명백하다. 일행들까지 모조리 익스펠시킬 거라는데 헬 스킬과 드래곤 슬레이어 전부를 걸 수도 있다. ------------------------------------------------------------------ 이제 시험공부하러 갑니다~~~~~~~~~ 일주일 후에 뵈요~♡ [일부러 귀여운 척 한다] 흐흑!! 미안해요!! 저도 시험이 싫어요!!!!! 외전. 헬 마스터(Hell Master). 上 외전. 헬 마스터(Hell Master). 쿠웅―. 판 대륙서부의 케뮤 산맥 깊숙한 곳에 비밀스럽게 위치한 그린 드래곤의 레어. 거대한 동공의 끝자락에서 얕은 폭음이 새어나온다. 빨리 쫒아온다고 왔지만 조금 늦었던지 벌써 전투가 개시된 모양이다. 누군가가 그린 드래곤 스프린터(Sprinter)를 풀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여느 유저들처럼 호기심 때문에 시도했다가 포기할 거라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운영자의 눈과 귀에서 벗어나 이토록 훌륭하게 레어를 찾아올 줄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 미르트 본사내의 스프린터 관리자가 드래곤 스프린터중 하나가 깨졌다고 보고를 올릴 때 설마 했지만, 지금 와서 직접 이비(耳鼻)로 확인하게 되니 놀라움보단 알 수 없는 희열이 느껴졌다. 일곱 마리의 드래곤이 있다고 유저들에게 알리긴 했어도 드래곤을 보는 것은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서가 될 거라는 게 미르트의 공통적인 견해였다. 엘리멘탈 가드의 최고운영자인 나도 그 의견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쿼드루플 마스터(Quadruple Master : 400레벨 이상의 유저를 통틀어 칭함)의 수가 십 단위를 넘어가면 가능할 거라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러도 너무 이르다. 하물며 쿼드루플 마스터가 파티를 맺어 달려들어도 쓰러트리기가 힘들 드래곤을 단신으로 상대하겠다하니……. 처음엔 기가 막혀서 코웃음을 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누구일까 호기심이 동하는 것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감임을 뜻하는 증거. 비록 직원들 사이에서 냉소를 이끌어낸 유저라 해도, 드래곤 스프린터를 처음으로 깨낸 최초의 콜럼버스니 말이다. 최근 들어 자잘한 것들 외에 유저들의 귀추를 주목시킬 큰 이유가 없었으니 이 기회를 살려 드래곤의 모습을 터트리는 것도 게임의 재미를 돋울 좋은 방안일 것이다. 명분을 만들어준 고마운 유저가 드래곤을 쓰러트리는 장면은 기대할 수 없을 테니 이것만으로도 큰 성과를 얻는 셈이다. 운영자의 특권을 살려 기척까지 완전하게 감추는 운영자표 하이딩(Hiding)을 전신에 걸고 레어의 안으로 들어갔다. 같은 운영자가 아닌 이상 나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동공 내부로 발을 옮길 때마다 폭음의 음량은 커져만 갔다. ‘Hyper-3Dimension Sound’라는 뮤직 이펙트. 환경 시스템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기술이다. 보다 리얼리티 있는 가상공간을 구축하기 위해 미르트에서 자체 개발한 것들 중 하나였다. 뭐,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런 사항을 떠올리는 걸 보니, 또다시 도리 없는 직업병이 도지는 모양이다. 지금은 운영자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나 예전엔 시스템개발에 뛰어들어 개발자들과 함께 동거동락하던 프로그래머였으니까. 짧게 설명하자면 엘리멘탈 가드는 크게 세 가지 시스템으로 나뉜다. EGTES(Elemental Guard Three-E System). 엘리멘탈 시스템(Elemental System), 인바이론먼트 시스템(Environment System), 이모셔널 시스템(Emotional System)이 그것이다. 이 세 시스템은 실제적인 세계를 느끼도록 도와주며, 서로간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게임을 구성한다. 속성 체계는 기본적인 사물을 형성하고 환경 체계는 그 사물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감정 체계는 그것에 생명력을 넣는다. 이렇게 하여 하나의 객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개발자의 입장에선 중요한 사항이지만 일반인들에겐 그저 그런 내용일 뿐이니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 이러다간 늦겠는걸. 뛰어가기만 하다가 정작 중요한 장면을 놓칠 수도 있기에 곧장 워프를 시도했다. 워프게이트는 3개의 길드에 권한을 위임했지만, 워프마법은 유저들에게 공개하지 않아 운영자전용이 되어버린 스킬이다. 내년 이맘때쯤 세간에 퍼트리자는 안건이 간부회의에서 통과했으니, 이제 유저들도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질 것이다. 물론 마법 계통을 익힌 유저들만 익힐 수 있고 몇 가지의 제한을 두어 워프게이트와의 밸런스를 맞출 생각이다. 스킬 때문에 워프게이트를 사장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주변의 풍광이 더욱 거대한 공간으로 변모하자 신고식이라도 하는 듯 곧장 귀가 일순간 멍해지는 굉음이 터졌다. 눈에는 선홍색 광원이 쏟아져 들어온다. 뒤이어 전신을 감는 후끈한 열기. 사방이 불, 불, 불이다. 지옥을 연상시키는 뜨거운 업화(業火)의 바다.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은 혈투를(튀기는 것은 드래곤의 피뿐이다) 벌이는 녹색 육신의 그린 드래곤과, 얼굴을 덮어버리는 짙은 흑발에 밑단이 해어진 암적색 로브를 입고 있는 남성 유저. “……!” 보고 있나니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이 떠오른다. 헬 마스터(Hell Master) 카르마(Karma). PK계에선 가히 독보적인 자리에 등극해있는 유저. 엘리멘탈 가드를 플레이하는 유저들 중에 헬 마스터를 모르는 이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PK가 게임수칙을 어기는 것은 아니어서 미르트의 블랙리스트엔 올라있지 않으나, 확인한바 유저들 내에선 척살 1순위에 걸려있는 그. 그의 잔인성은 운영자들마저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을 정도로 대단했다. 더불어 워낙에 자기관리가 철저한 유저여서, 나로 하여금 직접 유저정보를 빼보게 하는데 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슨 일에선지 요 4개월간은 그에 대한 기록이 올라오지 않아 엽기를 좋아하는 직원들은 입맛을 다시는 상태다. 또한 나도 의아스럽게 여기고 있는 실정. 혹, 스프린터를 푸느라 조용했던 것일까, 아니면 마음을 새로 잡은 것일까? 여전히 바쁘기는 하지만 헬 마스터의 소식이 끊기니 일을 해도 한 것 같지가 않았다. 지난 수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의 PK소식을 귀에 달고 살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 때문인지 여기서 그와 조우하게 되니 반가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비록 그는 나와 만나 적이 없어 반응이 없을 테지만. 드래곤의 모습이 잘 잡히는 자리로 이동해, 파워 모드(무적 상태)로 상태를 세팅하고 레코딩을 시작했다. 안타깝지만 그 유명한 헬 마스터일지라도 이길 확률은 지극히 낮으니 드래곤이라도 열심히 찍어두는 게 이익이다. 그린 드래곤은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울부짖었다. -빌어먹을 인간! 죽여 버리겠다! 저런. 온화한 성격의 그린 드래곤이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나긋나긋하게 행동하는 그를 이토록이나 열 받게 하다니……. 헬 마스터에게로 향하는 경탄을 금할 길이 없다. 레코딩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1인칭 시점, 즉 촬영자의 눈으로 보이는 시야가 저장되기에 눈앞에 뜬 작은 화면은 내 시선을 따라 변화했다. 카르마는 드래곤과는 대조된 여유로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곧장 그가 있던 자리에 박히는 무수한 얼음 창(Icicle Lance). 얼음은 금세 녹았으나 주변의 불길은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되려 기세가 강렬해지는 듯도 했다. 그는 종횡무진 각처를 누벼가며 드래곤을 유린했다. 저토록 격렬히 움직이면 체력소모가 극심할 것임에도, 걱정이 없는지 시간이 지날 때마다 그의 입에는 유쾌함이 가득해졌다. 익스펠(Expel)을 눈앞에 두고 저런 행동이라…… 상당히 아이러닉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어느샌가 화면의 중앙엔 카르마가 자리 잡아 있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저러한 행동을 하는 것인지 의도가 궁금해진 탓도 있거니와, 묘한 기대감이 생겼기에.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그를 주시하다보니 문득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끔 그에게서 주먹만한 크기의 선홍빛 수정이 떨어졌던 것이다. 여태껏 발견하지 못한 것은 구슬이 주변 색과 동화되는 핏빛이어서 그런 듯싶다. 구슬의 존재를 알아채고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았을 때, 나는 다시금 카르마에게 경탄했다. 그의 철저한 준비성과 주도면밀한 계략은 나를 여러 번 놀라게 만들었다. 이만큼의 용의와 면밀함이라면 드래곤과 대적해도 손색이 없다. 이제, 승부를 가늠할 수가 없어졌다. 구슬의 정식명칭은 봉인석(封印石), 실 스톤(Seal Stone). 힘의 일부를 봉인시키는 아이템이다. 반년이 넘도록 보지 못했으니 바로 기억해내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워낙에 희소성이 강한 아이템이라 쉽게 마주칠 기회가 없는 것이다. 그게 운영자라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실 스톤이 대량 드롭 된다면 고급 몹을 잡는 것은 쉽사리 이루어져 게임밸런스를 깨뜨릴 수도 있기에 수량을 최소한으로 조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당 가격이 비싸다는 것과 상통한다. 더불어 까탈스러운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발동된다는 페널티가 있기에 그다지 사용되지 않는 가련한 아이템이 실 스톤이었다. ------------------------------------------------------------------------- 흐음... 1권에 들어갈 외전입니다. 아직 쓰고 있는 부분이에요 -ㅁ-; 이부분만 되면 1권분량은 완전히 땡이군요. 낄낄 ;ㅁ; [아... 듀얼 랠리 마지막 부분이 이상해!! 상받는 장면까지 다이렉트로 써버릴까?!] <-- 원래는 회상신으로 넣을 생각이었으나... 영 재미가 반감되기에...(더이상 반감될 것도 없지만 -_-;) *오늘 시험은 수학이었습니다. *과연 몇점이나 받았을까요? *50점만 받으면 잘 받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려... *무려... *95점이나 +ㅍ+!! [크오옷!] *불타오릅니다아~ *그렇다고 기념연참은 바라지 말아주세요 -_-;; *공부해야되요! *비축분은 스토리가 안붙어서 '불.가.능.' *던젼 이벤트를 끝내야 올릴거 아닙니까~! *끝내더라도 그 뒷 부분이 텅 비어서 또 밀리겠지만 -_-; 카르마가 어떤 방법으로 실 스톤을 얻었는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실 스톤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가 엄청난 자금을 동원했을 거라는 점이다. 실 스톤은 계륵(鷄肋)과도 같은 아이템이다. 먹자니 성가시고 버리자니 아까운 계륵. 확실히 자신이 쓰자니 나머지 구하는 게 귀찮고 팔자니 아쉬움이 남는 아이템이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카르마가 유저들에게 실 스톤을 구입한 것이라면, 그것은 파는 유저들은 그에게 본래 시가의 몇 배를 요구했을 것이다. 심적으로 충분히 흡족할 만큼의 가격으로. 물론 그의 명성에 걸맞은 PK가 있기는 하다. 허나 PK를 한다 해도 꼭 실 스톤이 드롭되리라는 법도 없으니 카르마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드롭하지 않으면 다시 하나를 구하는데 시간이 더욱 들어갈 테니, 출혈을 감내하고라도 실 스톤을 구매했을 터. 대략적으로 계산해보면 12개의 실 스톤 구매 가격은 5천만 렌스. 거래만 잘 이끈다면 상급의 유니크 스킬 북 두 권도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다. 또한 거대 길드도 3개월간은 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양이다. 그만큼의 자금이 개인으로부터 유통되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쥐새끼 같은! 드래곤이 태풍과도 같은 노호를 터트리며 두꺼운 꼬리로 레어의 벽면을 후려쳤다. 무너질 듯 공명하여 위태위태 뒤흔들리는 동굴. 단 한번의 공격만으로 석벽은 금이 쩍 가버렸다. 저대로 몇 번만 친다면 동굴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리라. 나는 드래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드래곤은 스페셜급이다. 그 정도나 되는 몹에겐 체력이란 무의미한 수치일 뿐이다. 당연히 한계치야 있기는 하지만, 동굴한번 무너진다고 죽거나하는 불상사가 일어날만큼 허약하지는 않다. 그린 드래곤은 자신의 생명력을 믿고 동귀어진 할 심산인 것이다. “무식한 놈……! 동귀어진이냐?!”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눈치 챈 카르마는 무겁게 외치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형형한 빛이 죽지 않은 카르마의 눈은, 빠르게 돌아가며 이 난국을 타개해나갈 방안을 찾고 있었다. 꿀꺽. 침이 넘어간다.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 미끈거리는 손을 강하게 쥐고 있다. 자각하고 주먹을 폈을 때는, 목이 타는 긴장감에 의한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아직 3개의 실 스톤이 자리를 잡지 못했다. 계속해서 봉인의 절차를 밟아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무턱대고 이행한다면 위험한 도박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대로 손놓고 있자니 드래곤 사냥은 고사하고 생매장당할 판국의 카르마. 어느 쪽으로 생각해봐도 카르마에겐 최악의 상황이었다. 도저히 나로서는, 최선책을 무엇으로 선택해야 좋을지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콰아앙! 한차례 더 벽을 후려치는 초록색의 꼬리. 균열이 천장까지 닿으려한다. 한술 더 떠서 작심을 했는지 마법까지 동원해 동굴을 무너트리려 하는 드래곤이다. “가만히 두고 볼 성 싶으냐!” 어느 순간 입술을 비틀며 비웃음을 그리는가 싶더니. 카르마의 몸이 갑작스럽게 빨라졌다. 운영자의 동체시력으로도 간신히 잡힐만한 쾌속의 스피드! 쩌어엉―! 섀도우 모션! 섀도우 스킬 북에 담긴 다섯 번째 스킬! 과연! 저 속력이라면 승산이 있다! 봉인만 성공하면 드래곤의 능력은 십이분지 일로 저하된다. 그렇게 된다면 벽을 부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한번 공격할 것이 열두 번으로 늘어나는 것이니 말이다. 어떻게 되던 간에 카르마에겐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포기를 하던지 봉인에 실패하던지 두 경우 모두 돌무더기에 묻혀 생매장되는 결과를 그에게 주는 것이다. 이제는 시간싸움이다. 누가 먼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미래가 결정지어진다. 카르마는 일부러 약올리듯 드래곤의 근처를 지나치며 실 스톤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것은 예상 밖의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섀도우 모션의 대기폭발력에 밀려 드래곤이 한순간 밸런스를 잃은 것이다. 주변에 본래 그대로의 여파를 주는 섀도우 모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정도면 임기응변이라기보다는 전투감각이 삼차원적으로 뛰어난 거라 봐야할까? 마법은 강제 해제되고 꼬리로 벽을 때리는 타이밍도 엉켜버렸다. 드래곤 스케일에 보호되는 드래곤인지라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밸런스가 무너짐으로 해서 얼마간의 시간은 마련한 셈이다. 다른 유저들 같았으면 간과하고 넘어갔을 사소한 현상들도 놓치지 않고 사용하는 카르마의 응용력엔 찬탄을 아끼지 못하겠다. -버러지가 감히!! 그린 드래곤의 안면은, 들끓는 분노에 의하여 레드 드래곤으로 보일 만큼 새빨개져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카르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일섬(一閃)이 되어 각처를 누비는 그. 이미 실 스톤은 시계에 숫자가 적혀있는 자리로 빠짐없이 위치해있는 상태! 순식간에 내 전방으로 나타나 등지어 서 호쾌하게 외쳤다. 봉인의 시동주문을! “하늘을 조각하는 어두운 밤의 별, 대지를 묶는 각인된 피의 약속. 암흑의 왕이 낳은 열두 개의 별의 자아내는 빛의 그 힘으로, 세상을 태우는 황혼의 검을 부여받아, 심연(深淵)을 가를지어다……. 실(Seal)―, 소울 디바이더(Soul Divider)!” 로브를 세차게 펄럭이며 오른쪽 팔을 번쩍 올려 꽉 쥐는 모션을 취한다. 드래곤의 가슴부위에서 열두 가닥으로 나눠진 녹색 빛이 방사형으로 흩어지며 각각의 실 스톤 속으로 스며든다. 그린 드래곤은 영혼이 베이는 충격에 공허한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며 격렬한 경련을 일으켰다. 마치, 강력한 번개에 직격당한 것처럼. 나는 무심코 박수를 치려다가 가까스로 동작을 멈췄다. 어쩌자고 여기서 큰소리를 내겠다는 것인가? 몰래 촬영하는 것이니만큼 카르마에게 발각되었다간 어떻게 될지 모르니 심열의 심열을 기울여야 했다. ------------------------------------------------------------------------------ 짧게나마 부랴부랴 써서 올립니다. 오늘 시험이 끝났습니다. 체육과, 정보 였죠. 몇점일까요? 네, 망했습니다. 수학보더니 두뇌활동이 정지해버렸습니다. 수학 본 다음날 부터 제대로 망치더군요. 캬, 이보다 경악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다음화에서 외전 마무리 짓겠습니다. *전투신 묘사를 실감나게 하고는 싶지만 실력부족으로... *외전 끝나면 바로 재회 부분도 마무리 짓겠습니다. *재회 챕터 끝나면 다른 여인네가 또 등장해버리는군요. *초안에서는 류현과 이어주었던 여인네입니다. *물론 류현과는 동갑입니다. *제가 동갑, 혹은 연상 취향이라 그런 여자들이 많이 나오는군요. *다음에 나오는 '그녀'는 완전하게 류현을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작은 호감을 느끼는 정도죠. 더불어 히로인 정리할때 가장 먼저 정리될 여자가 되겠군요. 히로인은 한명이면 족하기 땜시롱.. 므헤헤헤. *자, 슬슬 절단마공을 연성해볼까 합니다. *또한 연참신공을 연마중이니 극성하는 날을 기대해 주시길... (저번 폭참 이후 내공이 뚝 떨어진.. 뭐, 원래 분량이었으니 폭참까지는 아니지만...) 그럼, See you tomorrow!! “하늘을 조각하는 어두운 밤의 별, 대지를 묶는 각인된 피의 약속. 암흑의 왕이 낳은 열두 개의 별의 자아내는 빛의 그 힘으로, 세상을 태우는 황혼의 검을 부여받아, 심연(深淵)을 가를지어다……. 실(Seal)―, 소울 디바이더(Soul Divider)!” 로브를 세차게 펄럭이며 오른쪽 팔을 번쩍 올려 꽉 쥐는 모션을 취한다. 드래곤의 가슴부위에서 열두 가닥으로 나눠진 녹색 빛이 방사형으로 흩어지며 각각의 실 스톤 속으로 스며든다. 그린 드래곤은 영혼이 베이는 충격에 공허한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며 격렬한 경련을 일으켰다. 마치, 강력한 번개에 직격당한 것처럼. 나는 무심코 박수를 치려다가 가까스로 동작을 멈췄다. 어쩌자고 여기서 큰소리를 내겠다는 것인가? 몰래 촬영하는 것이니만큼, 카르마에게 발각되었다간 어떻게 될지 모르니 심혈의 심혈을 기울여야 함이다. -네놈, 무, 무슨 짓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드래곤. 그의 얼굴은 고통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카르마는 검을 오른손으로 고쳐 잡으며 예의 드래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잘나신 드래곤께서 당황한 모습이라니 진정 우습군! 날 너무 얕잡아 봤다고!” 카르마의 말이 옳다. 드래곤이 그를 너무 우습게 여겼기에 여기까지 밀려난 것이다. 본래 같았으면 단신으로의 드래곤 사냥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카르마의 그 의표를 찌르는 용의함이 보편적인 예측을 역전시켰다. 본신의 힘만으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변모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후로 몇 분간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다른 동작들도 없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한다. 스아아아―. 순간, 분위기가 심상찮게 변화했다. 대기가 호흡을 정지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한없이 무거워지고 싸늘한 적막감이 풍선처럼 부풀어 주변을 장악했다. 눈을 찡그리고 앞섶을 틀어쥐었다. 어쩐지 수중(水中)으로 들어온 것 마냥 갑갑함이 심장을 옭아매는 기분이다. 카르마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본신의 힘이 십이분지 일로 폭락된 기분, 끝내주지 않아?” 드래곤의 눈이 종이처럼 잔뜩 일그러진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쌍방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기(氣) 싸움의 양상을 이룩하는 둘. 세포 하나하나까지 울부짖게 만드는 살기가 줄기줄기 뻗쳐 허공에서 뒤얽히는 환상이 선연하다. 송곳 같은 눈길로 서로를 찌르기를 몇 초, 약속이라도 한 듯 둘은 동시에 태세를 갖췄다. 드래곤의 녹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뜩였다. 이어 주변에서 한기를 머금은 프리즈 애로우(Freeze Arrow) 열 대가 생성되고, 곡선의 흰색 꼬리를 남기며 카르마를 향해 쏟아진다. 그의 레어를 무너트린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 지 오래다. 벽을 때려야하는 횟수가 늘어나버렸고, 정작 중요한 요인은 그때 생기는 빈틈을 헬 마스터가 눈감고 간과할 리가 없는 탓이다. 까딱 잘못하면 드래곤 하트가 있어야 할 자리에 검이 틀어박힐 판국이니 드래곤으로서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킥.” 비웃듯 웃으며 카르마가 얼음화살들을 가볍게 피해냈다. 유효타는 커녕 그의 로브자락조차 스치는 것이 없었다. 저런 하급마법으로는 절대 카르마를 잡을 수 없다. 슬링(Sling)으로 표범을 잡는 게 쉬우면 쉬웠지, 프리즈 애로우같은 기본적인 마법에 당해줄 위인이 아닌 것이다. 드래곤의 취지만 좋았던 선제공격은 무위로 돌아가고 이번엔 카르마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기본적인 마법이라도 다연발이었으니 딜레이는 제법 있을 터. 대략 10초간 미동조차 하지않던 그의 검에 불꽃이 맺혔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같이, 폭풍에 밀려오는 파도같이 불길이 거세게 넘실거렸다. 헬 브래스트(Hell Blast). 바로 헬 스킬인 것을 보니, 그도 어느 정도의 부담감은 안고 있는 모양이다. 팔이 휘둘림과 동시에 화익조(火翼鳥)가 된 헬 브래스트는, 드래곤하트를 향한 힘찬 날갯짓을 해보였다. 콰앙! 절묘한 타이밍에 펼쳐진 매직 실드에 막혀 약해지는 듯도 싶었으나, 실드를 깨버리고 드래곤의 가슴을 갈퀴는 헬 브래스트. 허나 그 용맹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타격뿐이 전달되지 않을 듯, 드래곤은 무반응으로 태연하게 서있다. “칫!” 그로서는 유효타가 시원찮은 게 여간 아쉬운가 보다. 그 이후 10시간 동안, 스킬이 수십 번 오고갔다. 그나마 평평하던 바닥은, 그간 이루어진 격전의 흔적을 고스란히 반영하듯 울퉁불퉁한 크레이터(Crater)가 만들어져 있었다. 깨진 포션병의 잔해들도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 오러 블레이드와 헬 스킬에 당하여 육신 여기저기 치명상이 배어있는 드래곤. 만만찮게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헬 마스터 카르마. 그 둘은 잠시간 휴식을 가졌다. 암묵적으로 약속된 전력 재정비 시간이다. 그리고 리듬을 되찾는 즉시, 카르마가 먼저 캐스팅을 시작했다. 드래곤이 박투(搏鬪)를 해와도 피하면 그만이니 망설임도 없었다. 거대한 마나의 유동.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중압감. 폐가 얼어붙은 듯 호흡하기가 어려워진다. 카르마가 가진 스킬 중 이만한 양의 마나를 움질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 헬 스킬 북(Hell Skill Book)의 극의(極意), 헬 브레스! 드래곤,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까?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드래곤이 다급하게 날아올랐다. 뻗친 거대한 한 쌍의 날개가 여러 차례 홰를 치자 바닥에서 먼지구름이 무성히 번져오른다. 그 동작에 맞춰 무게감 있는 바람이 헬 브레스를 캐스팅 중인 카르마에게 몰아닥쳤다. 저대로는 카르마가 날아가 버려! 후우웅―! 칼날 같은 질풍이 카르마의 몸에 틀어박혔다. 그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바람에 베여 허공으로 흩날렸다. 눈에 보이는 살갗엔 무수한 자상이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처쯤은 카르마에게 관심밖인 듯 몸은 미동하지 않는다. 마치 석상이라고 착각될 만큼 일말의 동요도 없는 고고한 자태로 캐스팅에 열중할 뿐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캐스팅 시간이 짧아진다면 좋을 텐데! -벌레 같은 인간! 네놈의 요행도 이제 끝이다! 비상(飛上)한 드래곤의 자신에 찬 단언. 그의 주변으로도 마나가 폭풍친다. 그 바람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는 것은 그린 드래곤. 카르마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한 마나의 흐름! 캐스팅의 속도가 승자와 패자를 가른다. 카르마가 캐스팅을 좀 더 빨리 시작했으나 드래곤의 능력치는 그것을 충분히 커버할 만큼 뛰어나다.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 흐른다. 흐른다. 그리고 멎는다. 멈출 것 같지 않고 멈춰서도 안 되는 시간이, 지금 이 순간 멈춰버렸다. 이것은 착각일까, 아니면 거짓 없이 몇 초간 시간의 흐름이 끊겨버린 것일까? 어떠한 계산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원이 정지해있을 것 같던 레어의 안에서 살의를 불태우는 드래곤과 카르마만을 바라본다. 드래곤의 양익이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가슴 앞쪽으로 모아졌다. 주둥이는 찢어질 듯 크게 벌려지고 섬뜩한 녹색이 기운이 입안에서 부풀었다. 당장 터진다 해도 이상해보이지 않을 만큼 단단히 응축된 사멸(死滅)의 힘. 나는 그것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드래곤에게만 주어진 권능이자 그 자체만으로도 죽음을 뜻하는 브레스. 그린 드래곤이니 염소 가스를 뿜어내는 크롤린 브레스(Chlorine Breath)일 터! 카르마의 미스릴 검은 홍염으로 이루어진 뱀의 형상이 빈틈없이 휘감고 있었다. 승천하기 위해 마지막 허물을 벗으려 몸을 비트는 이무기처럼, 끊임없이 타오른다. 저것이 바로 지옥의 숨결, 헬 브레스가 형상화된 모습. 과연 드래곤의 숨결과 지옥의 숨결 중 어떤 것이 더 강할 것인가. 멈춰있던 시간이 이어진다. 캐스팅이 동시에 끝났다. 예전에 테스트 했었을 때 드래곤 브레스의 위력은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가장 강한 레드 드래곤의 경우엔 소도시의 반을 일격으로 격파하는 파괴력을 보여주었다. 비록 그동안의 타격으로 많이 지쳐있다지만 그로인해서 브레스의 위력이 반감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육체에 무리를 준다 하더라도 힘이 줄어드는 일 따위는 없는 것이다. 카르마의 능력치와 동화된 헬 브레스 또한 브레스에 비등한 파괴력을 가졌으니, 두개의 포스(Force)가 격돌했을 시에 어떻게 될 거라고 확답을 내리기가 힘들다. 그러니 이제 남은 일은 직접 눈으로 확인 하는 것 뿐. 입을 꾹 닫고 목을 뒤로 젖히는 드래곤. 입의 사이사이로 녹색의 독무(毒霧)가 새어나와 허공으로 흩어진다. 카르마는 팔을 등 뒤로 돌리며 상체를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찌를 때에 파괴력을 더하기 위한 자세. 다시 한번 세상이 멈췄다. 드래곤과 카르마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다. 살의(殺意)가 느껴지지 않는 눈. 그러나 단지 본심을 표면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각자 속으로는 필살(必殺)의 구호를 아로새기고 있을 터다. 어느 누구 하나는 반드시 사라져야 막을 내리는 혈투이니까! 드래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동시에 카르마의 미스릴 검도 드래곤을 겨누며 내뻗쳤다. 콰아아―! 한꺼번에 폭사되어 얽히는 휘황한 빛무리. 강렬한 스파크를 튀기며 맞부딪힌 부분은 노란색으로 아우러져 밀고 당기는 대세를 이루었다. 그렇게 1분이 흘렀을까, 멍하게 힘이 약해지는 두개의 브레스를 보는 중에 카르마의 자신에 찬 외침이 귀를 때렸다. 그것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어떻게 들으면 오만으로 똘똘 뭉친 듯도 한 일성이었다. “이만 사라져!” 새빨간 빛이 카르마의 검으로부터 밀려올라와 크롤린 브레스를 삼켜버렸다. 카르마는 자신에게 주어진 1분의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재차 헬 브레스를 준비한 것이다. 융통성 없이 자신의 브레스만 믿고 멀뚱멀뚱 구경하고 있던 드래곤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는 행동이다. 옛말에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였다. 마지막까지 값진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 카르마와 오만함에 지배되어 상대를 얕잡아본 드래곤 중, 누가 더 승리에 가까운지는 짐작가능한 일이다. 10시간이라는 대 전투였다는 게 무색할 만치 단 1분이라는 사이에 승자는 가려졌다. -카아아악!! 지옥에 먹혀가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대는 드래곤을 보고 카르마에게 짧은 경의를 표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일구어낸 남자. 그야말로 엘리멘탈 가드의 진정한 최강자가 아닐까? “끝까지 버티네. 좀 죽지 그래? 어차피 다시 부활하게 될 놈이 사는 것에 연연하냐!” 업화에 물어 뜯겨 메케한 검은 연기를 내며 타들어가는 드래곤을 보고 그가 질렸다는 듯이 말한다. 나는 그의 못마땅하다는 얼굴에 그저 쓴웃음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카르마의 말엔 분명 어폐가 존재한다. 본인이야말로 죽기 싫어 아등바등 하면서, 다시 산다고 남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있으니. 드래곤뿐만이 아니라 유저도 죽으면 다시 부활하지 않는가?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심. 못 본 사이에도 변한 게 없는, 역시 카르마다운 발언이라고 해야 할까? 드래곤이 있는 장소는 연옥으로 탈바꿈되었다. 온통 시뻘건 불길이 휘몰아치며 사방에 죽음의 손길을 내뻗는다. 그것에 닿은 것들은 남김없이 재로 변모해 어지러이 흩날렸다. 불을 끄려고 갖은 애를 다 쓰던 드래곤은, 이제 통성을 내지를 기력조차 잃었는지 몸뚱이만 간신히 붙은 상태에서 고개를 떨군다. 완전한 포기를 뜻하는 동작. 목표의 약한 모습에 자신을 얻은 듯 불길은 더욱 사납고 거세게 드래곤을 집어삼켰다. 드래곤의 거대한 형체가 허무한 한줌의 재로 변함과 동시에 불길도 사그라졌다. 한쪽 귀퉁이에 빼곡한 들어찬 균열을 제외하면 일련의 상황이 환상으로만 느껴질 지경이다. 그만큼 격전 뒤에 찾아온 허전함은 컸다. 속으로 끊임없는 찬사를 보낸다. 한동안은 술자리의 안주거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오늘 이 자리에서 본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동료들에게 말하리라. 그리고 모든 이에게 보여주리라, 최초로 드래곤을 무릎 꿇린 용사의 모습을! 그린 드래곤이 사라진 자리에는 몇 개의 아이템이 떨어져 있었다. 무겁게 느껴지는 묵색의 검 한자루와 장정의 상체만한 넓이의 녹색 비늘 다섯 장, 팔뚝만한 길이의 날카로운 하얀색 어금니 네 개, 그리고 모서리마다 쇠를 씌운 검은 책 한권이 전부였다. “어라? 이거 드래곤 슬레이어아냐?” 묵색 검을 보고 반색하는 카르마. 설마하는 마음에 검을 확대하여 유심히 살펴본다. “흡!”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경악을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검을 들며 찢어져라 헤벌쭉 웃고 있는 카르마를 눈을 부릅떠 바라본다. 검집을 휘감으며 양각으로 조각된 드래곤의 형상. 그것이 뜻하는 것은 틀림없는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증거. 더불어 무연 중에 흘러나와 상대를 위축시키는 드래곤 슬레이어 특유의 위압감은, 그 검이 엘리트 아이템임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단 두 자루뿐인 용살검(龍殺劍), 드래곤 슬레이어(Dragon Slayer). 첫판부터 드롭된 게 경악스럽기는 하지만, 카르마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주인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 검을 들고 방정맞게 웃어젖히던 그는 어느 순간 웃음을 멈추고 잔뜩 인상을 썼다. “……뭐야, 이 기분 나쁜 시선은?” 그가 싸늘한 눈초리로 내가 있는 곳을 노려본다. 나는 짐짓 위축되어 한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설마 운영자의 기척을 잡아냈다는 말인가! “휴우, 드래곤 이놈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나? 잊지도 않은 것에 민감히 반응하다니.” 몸이 난자당하는 날카로운 시선에 어깨를 떨다가, 이어지는 카르마의 푸념에 바닥으로 주저앉아버렸다. 팽팽히 당겨진 긴장이 한순간에 풀려 이루어진 현상이다. 나는 이러한 반응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한순간 비친 그의 눈은 결코 이세상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건조하고 섬뜩한, 칠흑의 심연같은 눈동자였기 때문이다. 차마 눈을 맞대고 보기가 두려운……. 드래곤 슬레이어를 붕붕 휘둘러보다가 사라지는 흡족한 얼굴로 사라지는 카르마. 로그아웃이었다. 나는 일섬으로 솟아 종적을 감추는 그를 멍청하게만 바라보았다. 비록 찰나였지만 볼 수 있었던 그 사탄의 눈동자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겨질 것 같다. ------------------------------------------------------------------------------ 어제 올리려했는데 그랬다간 스토리가 끊겨버리더군요. 그래서 오늘 마저 마무리 짓고 포함해 올립니다. 약간의 스크롤이 있을것으로 예상... 내일은 모의고사를 보는군요. 딱 300점만 나왔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뭐, 400점 나오면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그럼 내일 뵈요 -ㅁ-)/ Level 7. 재회(再會). (21) 하지만 다크 스타의 개같이 물고 늘어지는 성격으로 미루어 보면 나 하나로 끝내지 않을 게 명백하다. 일행들까지 모조리 익스펠시킬 거라는데 헬 스킬과 드래곤 슬레이어 전부를 걸 수도 있다. 절박한 심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인데 네 녀석은 대체……. 이를 갈며 검을 가슴 앞으로 내새우자 뒷걸음질치는 성호. “멈춰라! 이곳은 싸움이 금지된 성역. 만일 경고를 무시하고 무기를 맞대는 일이 벌어질 경우엔 짐이 직접 나서 중한 벌을 내릴 것이니라!” 안 들렸다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왕의 노성에 귀가 번쩍 뜨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맞는 말이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무엇이냐 물으면 서슴없이 저 문장을 읊어줄 테다! 일동은 서로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동시에 얼굴을 활짝 폈다. 나는 성호를 지나쳐 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벌을 내리겠다고 하셨는데, 그 중한 벌이 무엇인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강제이동이니라. 금기를 어긴 자에게 ‘약속의 증표’는 허락되지 않는다.” 약속의 증표라는 것은 앞뒤 전황을 따져볼 때 이벤트 클리어 아이템이 아닐까 싶다. 아니, 여하튼 그것은 지금 이순간만큼은 중요한 게 아니니까 넘어가고. 나는 왕의 친절한 설명에 악당이 지을만한 음흉한 웃음을 머금었다. 앞쪽에 서있는 네 명이 흠칫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딴 거 다 제쳐두더라도 강제이동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못하겠다. 말이 강제이동이지, 이것이 뜻하는 바는 성안에서 퇴장 당한다는 것이다. 정상까지 올라온 유저들에겐 이러한 처사는 그야말로 독약이다. 결승 테이프를 눈앞에 두고 발이 꼬여 넘어지는 바람에 1등을 놓쳐버리는 상황과 다를 바가 없는 거다. 당해보지 않았어도 찢어지는 심정이 됨은 짐작이 가능하다. 이거 잘만 이용하면 손 안대고 코풀 수 있겠는걸? 밖에서 했다간 오해받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웃음을 짓다가 다크스타를 향해 중지를 내밀었다. “우후후후훗! 덤벼봐, 개허접! 예전에 얻어맞은 부위가 상당히 쑤셔오지 않아?” 약았다고 욕하지 마라. 불리한 상황에선 모래를 뿌리는 얍삽한 수도 서슴없이 쓸 수 있는 나다. 괜히 예의 차리다가 죽어서 땅치고 후회하는 것은 절대사절이라서 말이지. 주어진 것은 쓸모가 없더라도 일단 이용하고 봐야하는 거 아니겠어?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다크스타는 다혈질의 표상이다. 어떤 유저라도 조금만 건드렸다 하면 짜증내기 일쑤고 심하면 눈까지 뒤집었다. 그러니 특히나 원수인 내가 도발하는 거라면 더욱 확실한 효과가 보장되는 셈이다. 생각대로 참을성 없는 다크스타는 대번에 스팀받은 얼굴이 되었다. 이쯤 되니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는지 궁금증마저 인다. 저 정도의 화통이라면, 화병으로 진즉에 숨이 넘어 갔을 텐데 말이다. 뭐, 지금까지 살수 있었던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는 걸까? “저, 저 종간아 놈이!” “오, 그 표정 좋아! 짐승같이 살면서도 익힐 건 다 익혔나본데?” 우웃! 여기까지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는군! 다크스타의 얼굴은 그야말로 ‘빨간색’이었다. 만약에 머리가 화산 같은 구조로 이루어졌다면 당장 터져버렸을 터다. 이는 상당히 아쉬운 것이었다. 엘-가드에 고혈압에 의한 체력하락이 이루어진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만약 게임이 현실이었다면 다크스타는 즉시 뇌동맥 파열에 의한 뇌출혈로 파란만장한 삶의 줄기가 꺾였을 게 분명하니. 괴성을 내지르며 두 팔로 스태프를 움켜쥐고 번쩍 들어올리는 그. 그때 데스티니 블레이드가 팔을 뻗어 다크 스타의 다음동작을 막는다. “원점으로 귀의할 생각인가. 지금까지의 노력을 헛되이 날려먹을 거냐고 묻는 것이다.” 억양 없이 일정한 음성은, 어찌 들으면 앞의 상대를 비웃는 듯도 했다. “막지 마라!” 다크 스타는 그를 노려보며 노성을 토해냈다. 그러나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데스티니 블레이드. 급기야 자신을 밀치고 나가려는 다크 스타의 팔을 강하게 쳐낸다. 잠시 뻣뻣한 동작으로 자신의 손을 보던 다크 스타. 이내 그 손으로 안면을 감싸더니 큭큭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그래, 네 놈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가진 거라곤 비천한 잡기뿐이 없는 놈이 잘난 척 고고하게 행동하는 것부터 모든 것이! 좋게 좋게 넘어가려했더니 이젠 머리끝까지 기어올라?” 데스티니 블레이드는 작게 한숨쉬고 다크 스타의 말을 맞받아쳤다. “비단 그대만이 아니었지. 본인 또한 그 개같은 성질머리에 짜증이 치밀었으니까.” 분열인가? 점입가경이로군. 그래도 뭐, 이쪽은 이득이니 상관은 없으려나. “헬 마스터. 마지막 기회다. 다음번에 만났을 때는 내가 귀찮아하지 않을 만큼 강해져 있어라. 기다려주는 것도 이젠 질렸어.” “칫…….” 이쪽으로 고개를 작게 틀어 말하는 놈을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분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이다. 전보다얀 버티는 시간이 길어졌을 테지만 단지 버티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엔 내 패배로 귀결지어진다. 나는 질 싸움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눈뜨고 도전할 정도로 멍청이가 아니다. 분수를 모르고 도전하는 건 용기가 아니라 오만일 뿐이다. 그래. 그쯤은 알고 있어. 실력조차 가늠하지 못한다면 드래곤 헌터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다닐 자격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겠지. 나는 데스티니 블레이드가 무슨 생각으로 다크 스타를 가로막았음과, 내게 기회를 주겠다고 말한 것인지 그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던젼 이벤트를 포기할 생각인 거다. 날 기다리겠다는 명목으로. 멍청이. 당신은 바보다. 그렇게 해주면 누가 고마워 할 줄로 착각하는 거냐? 나같으면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라도 그냥은 못 돌아가지. 그러니까 당신도 어쩔 수 없는 바보일 뿐이야. 그래도 이왕 주어진 기회, 효과적으로 이용해 보이겠다. 그리고 다음번에 다시금 마주칠 때는, 반드시 오늘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어줄 거라 가슴 깊이 다짐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클레이모어를 발검하여 다크스타의 목줄기를 향해 겨누었다. “하던 이야기는 마저 끝내겠다. 그대와의 계약은 오늘부로 파기되었음을 알린다. 앞으로 나와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비는 게 좋을 것이다. 그대의 길드는 적대길드로 간주하여 무차별 사냥을 감행할 것이며, ‘심판자’들이 직접 나서 그대를 추격할 것이니 각오하기를. 이의 없는가?” 냉막하게 말한 그는 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갈기갈기 찢었다. 계약서일까? 모르긴 몰라도, 이번 이벤트가 끝난 이후엔 뭔가 엄청난 일이 발생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종이가 찢긴 것이 다크 스타에겐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지 하얗게 표백된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받았다. “네, 네놈 진심인가?! 그것은 유니온(Union) 협정서다! 동맹이 깨진다면 상위권 길드들의 표적이 될 텐데?!” “말이 많군. 미안하지만 혼자만으로도 탑 랭크(Top Rank)의 길드 하나쯤은 도맡아 박살낼 수 있으니 그런 시답잖은 걱정일랑 하지 말도록.” “미친 자식!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가!” 데스티니 블레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일 것이다. 그게 아니면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일지도. 중요한 건 그가 변함없이 다크 스타에게 검을 겨누고 있다는 점이다. 마음을 굳힌 듯 동작 또한 일관되어있는 데스티니 블레이드. 다크 스타는 도움을 청하려는지 안젤라와 튜아미스를 돌아보았다. 튜아미스가 대표로 나서서 감흥 없이 말했다. “아아, 그의 길드와 대적하는 것은 정녕 미친 짓이거든. 너무 위험부담이 커. 다른 길드들도 이해해 줄 거고 말이야. 아마 재협정을 요구할 테지. 거기에서 다크 스타 당신네의 길드는 열외 되겠군.”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튜아미스 덕에 다크 스타는 참담하게 죽은 낯으로 무너져 내렸다. 완전한 몰락이다. 튜아미스와 안젤라 또한 묵은 원한이 있는지 데스티니 블레이드의 뒤쪽으로 가 보좌하듯 서있던 것이었다.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 입 밖으로 나온 말도 수습할 수 없다. 더욱이 주변으로 무겁게 내려앉은 대기는 그의 변명을 용납하지 않았다. 넌 끝이다. 히쭉 입을 찢었다. 꼭지가 헤까닥 돌아버린 다크 스타라면,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말리는 이에게까지 화를 낼게 분명하고, 또한 내가 의도한대로 되었다. 데스티니 블레이드는 의외였지만, 내가 유도한 것은 다크 스타 외에 +a의 강제 퇴장이었던 것이다. 다크 스타는 당장 죽진 않을 터다. 공겨을 하는 즉시 성밖으로 전이될 테니까. 뭐, 그 이후엔 볶아지든 튀겨지든 내 알바가 아니다. 전부 그가 자초한 일이 아닌가. 다 자업자득인 게다. 물론 나야 청렴결백, 순진무구의 죄 없는 유저다. “육시랄 놈! 끝까지 재수 없게 나오는구나!” “재수 밥 말아 처먹은 그대에겐 듣고 싶지 않은 말이군.”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머리가 뭉툭한 아크 완드(Arch Wand)를 휘두르는 다크 스타. 데스티니 블레이드는 그것을 절단하며 그의 가슴으로 클레이모어를 찔러 들어간다. “발칙한 것들! 내 친히 충고했거늘 금기를 어기려든단 말이더냐!” 국왕NPC가 왕좌에서 벌떡 일어나 로열 오브(Orb : 머리에 수정이 달린 짧은 스태프)를 든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휘황한 빛이 수정주변에 나선형으로 휘감기고 한차례 점멸했다. 홀을 가득 메우는 강렬한 광원에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 뒤 몇 십초가 지나자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오…….” 방금 전의 빛이 환상이라고 여겨질 만큼 태연하게 앉아 흰 수염을 쓸어내리는 왕. 융단 위에서 대치하고 있어야할 다크 스타와 데스티니 블레이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분명 헛것을 보았다고 단정 지었을 것이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되는걸…….” 머쓱한 모습으로 볼을 긁적이다가, 힐끔 날 보더니 중얼거리는 튜아미스. 나는 그에게 상큼한 미소를 던져주었다. 당신이 현실을 좀 아는데? 언제나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지. 사실 남들이 말하는 것만큼 나는 악랄하지 않다고. 아니, 어딜 봐서 나같은 꽃소년이 잔인한 행각을 일삼는다고 여겨진단 말인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암암!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콧대를 세우는 나. 안젤라가 슬슬 눈치를 보며 튜아미스의 말을 받았다. “소문보다 더 악독한 작자잖아.” “…….” 젠장. 늬들도 짐싸고 싶냐? -------------------------------------------------------------------------- 드디어 올립니다. 많이 늦었죠? 조금있다가 몇개 더 올릴게요. Level 7. 재회(再會). (22) -end- 다크 스타와 데스티니 블레이드가 사라진 직후, 우리는 국왕NPC로부터 이벤트 아이템 ‘약속의 증표’를 받을 수 있었다. 증표의 모양새는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구슬로, 철저하게 일인일습득의 법칙을 따랐다. 남에게 양도해도 도로 본래주인에게 돌아왔던 것이다. 어쩐지 죽어도 드롭 되지 않을 것만 같다. 확언을 못하는 이유는 우리 중에 살신성인의 자세를 지닌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듀얼은 백날 죽어도 아이템 드롭되는 일이 없으니 PK를 당해야 확인이 가능한데, 어느 누가 미쳤다고 제 목숨을 내주겠는가? 협조 없인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실험인 게다. 쩝, 안젤라와 튜아미스를 상대로 실험해볼걸 그랬나? 이거 은근히 후회가 밀려드네. “와, 정말 끝이구나!!” 로크마가 기운차게 외치고 만면에 신난다는 웃음을 그려넣었다. 곧 이벤트 상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냥 들뜨나보다. 나는 시원섭섭하게 그를 보다가 증표로 시선을 깔았다. 가벼운 손짓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수정구. 푸르스름하고 영롱한 빛깔의 크리스탈에 비춰지는 내 모습은, 굴곡이 져 상당히 우습게도 보였다. 노력의 산물. 내 힘으로 성취한 결과물이기에 그것을 보는 시선엔 애틋함이 녹아있었다. 유나도, 이토록 노력하여 가까이에 두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나저나 놀랐어. 그 유명한 푸어 섀도우가 널 좋아했을 줄이야. 상당히 인기 좋다, 너?” “……그 말은 꺼내지 않기로 했잖아.” “에에, 그랬었나? 미안 미안.” 다가와서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를 뱉어내더니,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손사래를 치는 네이. 전혀 미안해하는 얼굴이 아니잖아, 이여자야! “으에, 이거 놔! 장난이었어!” “시끄러!” 레네트와 주디스에게 팔을 하나씩 잡혀 멀어지는 네이를 쏘아보다가 세비치드에게 물었다. “다시, 만날 수는 없겠죠?” 그는 섭섭하다는 형색으로 고개를 몇 번 까닥거렸다. “아마도 말입니다. 오늘 저희도 겨우 시간을 내서 모인 것이어서,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장담은 못하겠군요. 거기다 대부분이 직장인이라 시간 맞추는 것도 용이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덧붙이며 허리를 숙이려하는 세비치드를 급히 말렸다. 주변사정이 따라주지 않는 것뿐이지 세비치드에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니잖은가. 그러니 그런 사소한거 가지고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구요.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내 제지에 허리를 펴고 세비치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8층에서 한 말을 상기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했다. 약간은 굳은 듯하면서도 강인한 면이 엿보이는 면안. 그의 의지에 찬 태도는 내 대답 여하에 따라 여차하면 PK합세도 불가하겠다는 기세였다. 나는 빙긋이 웃었다. 가슴 한켠이 훈훈해지는 느낌이다. 만난지 하루도 안 된 이에게 받는 두터운 신뢰감. 화청 형, 민식 형에게 신뢰를 바란다는 것은 결코 실현 불가능한 것일 테지. 그 둘을 트럭 채 실어다줘도 세비치드 한사람과 견줄 수는 없을 듯 하다. “글쎄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로그아웃해 세이나를 달래주고는 싶지만 그러지 못하겠네요. 아직 처리해야할 일이 남아있으니까요.” “저희가 도와드릴 수는 없습니까?” “아뇨. 괜찮아요. 혼자로도 끄떡없으니까요!”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세비치드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은근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세비치드는 말했다, 어쩌면 재회할 날이 찾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되면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 되는 거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하지만 이들에게까지 PK의 꼬리표를 달게 하는 것은 싫은걸. 나는 이들과는 즐거웠던 기억 그대로만을 추억으로 남기고 싶으니까. 이후 세비치드 일행은 우리에게 작별을 고하고 로그아웃 했다. 레네트는 성호에게 자신의 연락처를 남겼고, 네이와 로크마는 가기 싫다고 뻐기다가 다른 이에게 몇 대 맞고 풀이 죽어 결국 접속을 끊었다. 안혁은 은현의 복수 운운했다가 모두의 가시 돋친 시선이 꽂히자 자신의 의지를 굽혀야했다. 가족이 나선다는데 그저 타인에 지나지 않는 녀석이 나대는 것은 우스운 일인 것이다. 세비치드와 주디스는 오늘 이벤트에 대한 보답이라며 각각 하나씩의 아티펙트(Artifact)를 내게 주고 사라졌다. INT와 DEX를 10포인트 가량 올려주고 마법 저항력을 증가시켜주는 프로텍트 링(Protect Ring)과, 이동속도, 체력, 마나의 회복속도를 높여주는 라이징 아뮬렛(Rising Amulet)이었다. 레어 이상의 아이템인지라 너무 부담되어 사양했지만, 그러면 나중에 돌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곧장 로그아웃한 둘 덕에 어쩔 수없이 보관하게 되었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 나는 옆에 서있는 성호와 세영에게 말했다. “너희들 먼저 이벤트 협회에 가라. 나는 나중에 갈 거니깐 기다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고.” “진짜 할 작정이냐?” 성호가 미간을 미약하게 찡그렸다. 나는 주먹으로 녀석의 어깨를 약하게 쳐주고 히죽 웃었다. “물론. 난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악해질 수 있다고.” “혼자보다 여럿이 낫지 않아?” “아니. 오히려 신경 쓰여서 될 것도 안돼. 그럴 바엔 차라리 혼자 다니는 게 나아.” 장비를 점검하며 시큰둥하게 답하자 성호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세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급할 때 사용해. 뇌신(雷神)의 단검이니 유용할 거야.” 그렇게 말하더니 단검이 달려있는 벨트를 풀어 내 허리에 메어준다. 불현듯 유나가 현자의 로브를 입혀주던 때가 떠올랐다. 비록 웃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세영에게서 유나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었다. 이는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조급해진 마음을 잔잔한 바다처럼 가라앉히는데 크게 기여했다. 평정심을 되찾은 나는 세영에게 진심된 어조로 답했다. “고맙다.” 세영의 얼굴에 미약하나마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곧 일섬으로 솟아 사라지는 세영과 성호를 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유나가 그랬듯이 네게도 웃는 것이 어울려.” 내가 갈망하는 것은 단 한가지였을 뿐이다. “우우…….” 나는 울고 있었다. 두렵다. 홀로 남겨진 것이 두려웠다……. 몹이라도 나오면 어쩌지? 아무도 올라오지 않는 거야? 혼자라는 외로움과 전신을 짓누르는 서늘한 공포. 한 차례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쉰 목소리로 비명한다. “누가 나 좀 구해주세요!” 구해주세요! 주세요―. 세요―. 요, 요, 요오……. 통로를 타고 섬뜩하게 울리는 외침. 내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낯선 육성이 귓전에 맴돈다. 마치 유령의 웃음소리 같다는 착각이 인다. 횃불의 입김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기괴하게 일그러져 불꽃이 일렁일 때마다 소름끼치게 꿈틀거렸다. 그것은 흡사, 앞에 놓여진 먹이가 공포에 몸서리치는 것을 음미하며 쭉 찢어진 입으로 웃음 짓는 악마처럼 보였다. 등골에 소름이 끼친다. 당장이라도 로그아웃해서 이 악마의 소굴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어이! 거기 누구 있어? “아……!” 멀리서부터 공명해오는 아득한 목소리. 일순간에 굳어있던 얼굴이 꽃이 개화하듯 활짝 펴졌다. 유저! 유저다! 저러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유저밖에 없다고! 탁하고 우울한 시커먼 먹구름이 소진되고 금광의 태양이 솟아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절박한 상황에서 기적처럼 들려온 음성은, 비록 듣기 거북한 쉰 목소리라도 내게 희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만면 가득히 밝은 미소를 띠며 아이처럼 폴짝 폴짝 뛰었다. “여기에요, 여기! 여기 조난자가 있어요! 저 좀 살려줘요!!” 손을 나팔 모양으로 모아 입에 대고 힘껏 외쳤다.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쳤으니 저편의 유저들이 듣지 못할 이유는 없어! -지금 위험한 상황인가요? 근처에 몹이라도 있어요?! 어조에 다급함이 녹아 있었는지 저쪽에서도 황급히 되물어왔다. 이쪽 근처에 몹은 없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아직’이라는 불확실성 전제가 붙지만……. 언제 어디서 몹이 출현할지 모르기에, 대비하자는 취미에서 캐스팅을 하면서 회답해주었다. “있는 건 저 하나뿐이에요!” 대답 후 1분이 지나자 저편에서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며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나타냈다. 열 세명. 철저한 준비를 하고 왔음을 보여주듯 하나같이 중장갑의 유저들이었다. 심지어 성직자와 마법사들조차 하드 레더(Hard Leather)를 착용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위용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그제야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내 앞에, 왼쪽 눈 밑에 점이 있고 자주색 커트머리를 한 여성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뻗어왔다. “괜찮나요?” 그리고 뺨을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 것이었다. 나는 괜스레 가슴이 찡해져 눈시울을 붉히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너무도 마음씨가 고운 여성이야……. 여성은 산뜻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맞잡아 나를 일으켜주었다. 자식을 챙겨주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상(像)이어서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 한다. 나에게도 이런 어머니가 존재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옷매무새까지 바로잡아주는 여성에게 한없는 선망의 눈길을 보냈다. 이에 여성은 그저 미소로 답해줄 따름이었다. 그때 우람한 체격에 걸맞은 플레이트 아머(Plate Armor)를 착용한, 뺨에 십자 모양의 흉터가 깊게 파여 있는 남성 유저가 다가왔다. 잠간 그를 올려다본 나는, 그 산 같은 체구에 눌리듯 위축되어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옆에 있던 여성이 내 등을 가볍게 쓸어주자 떨리던 가슴을 펼 수 있었다. 사내는 무안한지 헛기침을 두어 번 번 하고 기복 없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되었나.” 흉계를 꾸미는 악당같이 음산한 목소리였다. 저기에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허연 입김을 토해내며 ‘I`m your fa'……. “…….” 아앗, 내가 무슨 생각을! 좌우로 도리질치고 머뭇머뭇 입술을 떼었다. 당시의 생지옥을 떠오른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비명과 낭자하는 육편(肉片). 변변찮은 저항조차 못해보고 죽음의 강을 건너간 수많은 유저들……. 나는 얼음물에 몸을 담근 것마냥 크게 몸서리치며 쥐어짜듯이 말했다. “모, 모두가, 주, 죽었어요……!” “뭐……!” 순식간에 일대를 장악하는 적막감. 일약 전방의 유저들 전부가 충격 받은 얼굴이 되었다. 나는 힐끔 여성의 눈치를 살피다가 푸욱 고개를 숙였다. 그녀마저도 얼이나가 있었던 것이다. “그, 그러니까, 전부 죽었다는 겁니까?” 속에 하드레더를 껴입은 중년의 마법사가 확인질문을 던졌다. 씁쓸함에 작은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여준다. “하, 그들의 파티는 최고였건만 전멸, 씩이나 당했단 말인가!” 말하기가 힘든 듯 숨을 한번 삼키고 쓰게 말하는 성직자. “자네는 유일한 생존자일 테니 묻지. 그들을 전멸시킨 유저들의 생김새를 알고 있나?” 뒤이어 흰색 망토를 걸친 기사가 분노한 형색으로 주먹을 강하게 쥔다. 나는 소리 없이 고개를 저었다. 유저‘들’이란 복수표현은 옳지 못했던 것이다. “유저들이 아니에요. 단 한명, ‘그’에 의해 전멸되었어요……. 전 잊지 못해요. 당시 전신에 엄습해왔던, 싸늘한 죽음의 공포를…….” 양쪽 어깨를 감싸고 가늘게 떤다. 착잡한 심정. 말로 이루어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몇몇의 유저가 침묵한 채 날 위로해주었다. 말이 없는 것은, 그들도 적잖은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한명이라고?!” “어, 어이, 지금 장난으로 말하는 거지? 장난이라고 해!” 한 유저가 흥분한 나머지 내 멱살을 꽉 그러쥐고 윽박지른다. 곧 다른 이들의 만류로 멱살을 놓았지만 모두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었다. 나는 겁에 질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 모르셨어요?” “아아. 연락수단이 있어야 하지.” “메시지 기능은 어떻게 하시고…….” “메시지는 무슨 놈의 메시지! 친구등록을 해야 보낼 거 아닙니까. 연락 두절상태에서 모습도 내비치지 않아 실컷 가슴앓이만 했어요. 나이트메어 그 인간, 다음에 만날 적엔 반드시 등록시켜놓고 메시지 테러를 해버릴 겁니다.” 중년 마법사의 너스레에, 아하하하, 하고 모두의 바보같은 웃음소리가 허공을 메웠다. 나도 그들과 더불어 웃다가 낯빛을 죽였다. 한순간에 어색하게 들떴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침몰했다. 그리고 유저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된다. 그저 입만 닫았을 뿐인데도, 그들은 자연스레 내게 할 말이 있음을 눈치 채고 침묵하는 것이다. 나는 잠깐 눈을 감고 방금 전의 대화를 곱씹었다. 나이트메어. 중년 마법사는 그 이름을 꺼냈고, 그 한마디는 모든 것을 결정시켰다. 감았던 눈을 작게 뜨고 입술을 떼었다. “그의 모습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가라앉은 눈으로 좌중을 훑어보았다.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마른 침을 넘기고 있다. 나는 알게 모르게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암적색 로브. 묵색의 검. 그, 그는 헬 마스터 였어요……!” “……!?” 소리없는 경악성이 터졌다. 개중에서 침착성을 잃지 않는 유저도 있었으나 겨우 둘이었을 뿐이다. 나머지는 예외없이 눈을 부릅뜨거나 입을 떡 벌린 채로 말을 잊지 못하였다. “그놈 어디에 있어!?” 그러다가 너나 할 거 없이 한꺼번에 일심단결하여 고함치는 유저들. 나는 13층으로 올라가는 통로 깊숙이를 가리켰다. “올라갔어요.” 그리고 강조하듯 덧붙였다. “아직 10분이 안되었으니까, 지금 쫓아가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거예요!” “천천히 뒤따라오게!” 생각해 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그 한마디만 남겨두고 무작정 발을 옮기는 유저들. 안 그래도 여기 남아있을 작정이니 내 걱정일랑 하지 말고 댁들 신변이나 잘 간수하라고. 빠르게 멀어지는 유저들의 뒷모습을 가늘게 직시하며 싸늘한 냉소를 머금었다. 에에, 올라가는 것까지 뭐라고 하지는 않겠는데……. “방향이 틀렸어.” 헬 마스터는 이미 올라갔다 내려와서 지금 이 자리에 서있으니까 말이야. 중얼거림을 듣지 못하고 여전히 전진의 전진을 거듭하는 그들을 보면서 등에 메달아 망토로 감춰두었던 드래곤 슬레이어를 빼들었다. 흐흐,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어. 때마침 등장해주지 않았더라면 지겨워서 로그아웃 했을지도 모르지. 그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화려한 선물을 주마. 마다하지 말라고! 씩 웃으며 여태껏 홀드 시켜놓았던 기술을 풀어놓았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두껍게 감싸안으며 세차게 타오르는 불꽃. 오른쪽 발을 강하게 내딛으며 주저 없이 검을 뻗는다. 엘리트(Elite) 헬 스킬(Hell Skill) 레벨 텐(Level Ten) 헬 브레스(Hell Breath)!! 쿠아악! 통로를 가득 메운 화염이 거세게 휘몰아치며 앞서나가던 유저들의 그림자를 한부분도 빠트리지 않고 집어삼켰다. ------------------------------------------------------------------------- 잠시 후에 또 올리겠습니다아---------. Level 7. 재회(再會). (23) -end- 작은 실수를 해버렸군요. 챕터 완결 표시를 잘못 해버렸습니다. 아랫부분이 다음챕터 중간부분에 끼워져 있더군요. (왜 그리로 이동되었을까..) 아무튼 그부분 다시 올립니다. (전처럼 챕터를 번갈아가면서 올리는 게 아니라 다행으로 여겨진다는...) 나는 50명에 해당하는 유저들을 모조리 처리한 뒤 접속을 끊었다. 시간이 새벽 3시를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벤트야 일단 증표를 얻었으니 언제 이벤트 협회를 찾아가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로그아웃 하고 곧장 은현의 방으로 가려했는데 그럴 필요성이 사라졌다. 은현이 침대 옆에 쭈그리고 앉아 훌쩍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은 내가 일어났다는 것을 용케 알아내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빨갛게 충혈된 눈과 퉁퉁 부어오른 눈가. 은현이 얼마나 울었는지를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바보 같은 녀석……. 나까지 울고 싶어지잖아……. 어미 잃은 강아지마냥 처연한 모습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은현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유약해보였다. 마치 살짝 손을 대어도 쨍하고 금이 나갈 것 같은 유리성처럼……. 과거 은현의 이러한 모습을 단 한번도 목도한 적이 없었기에 더욱 보호본능이 자극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달싹이는 은현을 끌어안았다. 가녀린 체구가 품안으로 들어온다. 은현을 안은 채 작게 흐느꼈다. 세상의 검은색에 물들지 않은 순백의 아이에게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미안하다. 미안해……. 이말 밖에 해줄 말이 없었다. 녀석을 위로해줄 좀 더 좋은 말이 있음에도, 나는 미안해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역시 내 생각대로, 성에서 이러한 은현의 모습을 떠올렸다간 참지 못하고 즉시 로그아웃 했을 것이다. “오빠…….” 잠긴 목소리로 날 부르는 은현. 팔을 풀고 눈높이를 맞춰 똑바로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어디서 그 많은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은현의 눈 끝엔 이슬이 고여 있다. 나는 울 듯한 미소로 답하며 은현을 일으켜 세웠다. 오랜 시간 쭈그린 자세를 유지해왔는지, 은현은 다리를 절며 힘겹게 일어서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도리질한다. 눈물…… 닦는 걸까. “나 졸려요. 오빠 방에서 자도 되나요?” 퉁퉁 부은 눈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았지만 밝게 웃으며 말하는 은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번에 태도를 바꾸는 게 현실적이지 못하더라도, 음울한 분위기는 은현에겐 알맞지 않았다. 어이없긴 하지만 우는 것보다 웃는 것이 나은 것이다. 은현은 폴짝 뛰어 침대에 올라간 뒤 이불속을 파고 들어갔다. “노래라도 불러줘?” “아니에요. 너무 우는 바람에 피곤해서 금방 잠들 테니까…… 요오…….” 말을 잇다가 가는 손을 입에 대고 긴 하품을 하는 은현. 눈을 감고 즐겁게 말한다. “잘 자요, 오빠.” 그렇게 시간이 한참은 늦은 취침인사를 하고 새액새액 고른 숨을 뱉어내는 여동생. “그래. 좋은 꿈 꿔라.” 침대 끝에 걸터앉아 약간은 상기되어 있는 은현의 뽀얀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세 깊은 잠에 푹 빠져 버렸는지, 간지러운 듯 배실배실 웃으면서도 깨어날 기미를 좀처럼 내보이지 않았다. 나는 희미하게 미소했다. 녀석이 깨어나지 않도록 물기가 남아있는 눈가를 옷소매로 조심스럽게 닦아내었다. 이불을 어깨까지 가지런히 덮어주고 의자를 가져와 옆에 앉았다. 그리고 조용한 시선으로 은현을 내려다본다. 자연스레 한 가지 추억이 눈앞에 그러졌다. 아마 내가 13살 때였을 거다. 배경은 우울한 장대비가 주륵주륵 쏟아지는 날로 기억한다. 요란스러운 천둥번개가 치고 열어달라는 듯 창문을 두드리는 빗줄기. 그날도 오늘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었다. 발단은 마찬가지로 지극히 사소한 말실수에서 빗어진 것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주체가 은현이 아닌 나라는 점이다. 새하얗게 번쩍이던 번개를 이어 천둥이 세상을 장악할 때마다 비명을 질러대는 12살의 은현에게 심한 짜증을 느낀 나는 동생의 기를 죽이는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었다. -그만 소리 질러!! 얼마나 짜증나는 줄 알아?! 아마 내 성격은 오래 전부터 뒤틀려있던 것 같다. -하, 하지만……. -시끄러! 만화 보는데 방해 말고 밖으로 나가버려! -우, 우우……. 내 외치에 눈물을 삼키던 은현은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다시 만화에 한눈팔려 있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고, 그로부터 30분 뒤 만화가 끝났을 때 그제야 녀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2층집에 살던 때라서 급히 위층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녀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내 말에 따라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 나는 반쯤 미쳐서 집밖으로 뛰어나왔고 담벼락 아래 쭈그리고 앉아 홀딱 젖어있는 은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아, 그 처량하던 모습은 지금까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훌쩍거리며 구석에 앉아 비를 맞고 있는 어린 소녀. 정말 나도 쏟아지는 비처럼 눈물을 흘리며 울어버렸다. 그날 은현은 심각한 고열을 동반한 감기에 시달려 병원으로 이송되었었다. 나는 아버지께 구타당하다 명치를 얻어맞고 기절하는 바람에 은현과 같은 병실에 누웠다는 씁쓸한 기억도 남아있다. 지금껏 울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해맑은 미소를 띠며 곤히 잠들어 있는 은현. 나는 굳게 다짐했다. 앞으로 이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은, 누구든 간에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그것이 동생을 지켜주는 오빠 된 도리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니까. Level 8. 교차(交叉). 오늘도, 어김없이 학교에 왔다. 약간 달라진 것이라고는 평소와는 달리 매우 일찍 등교한 정도랄까…….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가까스로 왔다보니 도착하자마자 어깨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쑥 빠져버렸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위태롭기 그지없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지금 반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교실에 홀로 있는 한명이 날 바라보는 듯도 하지만, 내 상태가 약이라도 한 것 마냥 몽롱한 상태여서 모른 체했다. “후우―.” 가벼운 심호흡으로 흔들리는 시야를 다잡고 창가에 있는 내 책상으로 다가간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6시가 조금 넘은 이른 시간. 밖에는 어스름한 새벽안개가 희미하게 끼어있다. 잠자는 은현을 넋을 놓고 보고 있다보니 알게 모르게 3시간이 훌쩍 넘어갔기 때문이다. 뭐, 어차피 밤을 샌 거 3시간 일찍 온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학교는 제 2의 집으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니까. 문제라면 이 시각에 집에서 한번 잠을 잤다간 학교에 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정도? 그럴 바엔 차라리 학교에서 자고 말지. 은현에겐 같이 못 가게 되어서 미안하지만 말이다. 올려져있는 책들을 창가 쪽으로 옮기는 것으로서 간단한 책상정리를 마치고 텅 빈 책상 위에 상체를 기대었다. 당장에 눈이 풀리며 어둠이 몰아닥친다. 그리고 그때. “안녕, 류현군? 오늘은 일찍 왔네?” 맑은 미성을 가진 누군가가 인사를 해왔다. 어리둥절해 하면서 몸을 일으켜 멍하게 앞을 응시한다. 같은 반 여학생이 웃는 얼굴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안녕, 정수희.” “응, 안녕. 대답해주지 않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어.” 내 대답에 휴우, 하고 숨을 내쉬며 수희는 작게 미소 지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무리 피곤한 상태라 해도……. “……대답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에에, 그런 건가?” 그렇게 말하며 안심이라도 한 것처럼 가슴을 쓸어내린 수희는 다시 웃었다. “…….” 멍한 시선으로 수희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나는 수희와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다. 2학년이 되어 같은 반이 됐을 뿐, 예전에 한 사건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스쳐지나가며 몇 마디 나눈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예전의 한 사건이라 함은 작년 가을 때 있었던 것으로, 도심 한복판에서 그녀에게 치근덕거리는 떨거지들을 밟아버리는 작은 사고였다. 그때는 수희인지도 모르고 지나치다가 양아치 한명과 어깨를 부딪치는 바람에 마찰이 생겨 대판 싸운 거 밖에 없다. 그때 정말 피터지게 치고 박고한 것으로 기억된다. 아무리 솜 주먹인 여섯이었을지라도 물량에서 열세니 나까지 피 보게 되더군. 그리고 수희가 내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그 이후부터 수희와 말하는 시간이 부쩍 늘어난 것 같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아는 척도 해오고, 가끔 점심시간마다 짤막한 대화를 나누는 등,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가 2학년에 같은 반이 되면서 대화시간이 좀더 늘어났다. 수희는 학교 내에서도 중심적인 학생이었다. 외모도 세영과 비견될 만큼 뛰어났고, 리더십이라든지 대인관계도 유연하여 인기가 많았다. 자연히 수희의 주변에는 항상 인파가 몰렸기에 어디 내놔도 힘들게 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뭐, 학교 회장이라는(3학년은 대입고사 때문에 회장선거에 출마하지 않는다) 직책 때문에 언제나 분주해서 나와는 그리 마주치지 못했지만, 오늘은 사소한 우연 같은 게 작용한 모양이다. “으응. 하나만 물어봐도 되지?” “지금 졸려서 쓰러질 지경이니까 간단한 거라면 충분히.” “귀찮게 해서 미안. 저기, 이번 주말에 약속 같은 거, 있어……?” 말하기가 힘들기라도 하는 듯 수희는 말끝을 흐렸다. 애꿎은 손을 쓰다듬는 등, 머뭇머뭇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러니까, 토요일에……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 그녀의 물음에 난 멀뚱한 시선으로 수희를 바라보았다. 이거 데이트 신청, 그런 거 비스무리한 거 아냐? 말을 하면서 얼굴에 홍화(紅花)를 피운 채 힐끗거리는 수희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내 이해범주 밖의 일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지연누나 외의 여자가 나한테 이런 데이트 신청을 해올 줄이야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모든 여자가 날 좋아한다는 생각도 자주 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막상 닥치고 나니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 아니다. 그게 아닐 수도 있어. 수희가 뭐가 아쉽다고 나 같은 놈에게 데이트 신청 같은 것을 하겠냐? 그녀에겐 귀중한 주말을 나와 단둘이 보낼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아마도 영화를 혼자보기엔 썰렁해서 누군가를 데리고 갈 생각이었을 테지. 마침 교실에 나밖에 없어서 그게 내가 되어버린 것이고. 후훗, 바로 이것이었군. 그런 거면 솔직하게 말하지 뭘 그리 축약해서 말한다니. 놀아달라고 떼쓰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나? 그래, 그래. 그럼 둘이서만 가기에도 좀 썰렁한 감이 없잖아 있으니까 애들 더 모아서 가자꾸나. 아아~ 난 너무 눈치가 빨라서 탈이라니깐.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술을 떼었다. “알았어. 보러 가자.” “정말?” 이 말에 밝게 얼굴을 피던 그녀, 수희는. “응. 그리고 다른 애들도 같이. 성호랑 학진이랑 은주랑 찬석이랑…….” “에에?” 이어지는 내 말에 멍한 표정을 짓는다. 같이 갈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그럼 누굴 데려가야 하지? “응, 그러니까……. 그들과 같이, 가자는 거야?” “둘이서 놀러 다니기엔 썰렁하잖아. 여럿이 함께 노는 게 훨씬 낫지. 영화 다보고 딴 데 놀러가자.” 이에 다시 희망인지 두려움인지 복잡하게 뒤섞인 얼굴로 수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둘, 이서?” “아니지. 모두 같이라니까.” “하아―.” 수희는 어딘가 나사가 풀린 형색으로 상체를 축 늘어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다. 여럿은 싫다는 거냐?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니지만……. 어쩐지 나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져서.” 수희는 고개를 희미하게 저어보이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내 옆자리에 앉아버리는데……. 하아, 이제는 아예 자리를 잡는구나. 무슨 할말이 그렇게나 많은 거야? 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거든? 제발 잠 좀 자게 내버려둬라……. 그녀는 날 쳐다보며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조용하게 물어왔다. “엘리멘탈 가드 한다고 했지?” “아아.” “혹시, 어제 던젼 이벤트에 참가하지 않았었니?” 이 질문에 어찌된 영문에서인지는 몰라도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수희도 엘-가드를 하기는 한다. 하지만 누구들처럼 미친 듯이 하지는 않는다. 여기저기 배우러 다니느라 시간이 부족한데다가, 수희의 집안(이 집안도 부유층이다. 어쩌다 가봤는데 동양풍의 으리으리한 기와집이더라)이 꽤나 엄격해서 그녀가 게임을 즐길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자기 입으로 푸념을 했으니 사실임에 틀림없는 일. 때문에 수희는 가끔 시간이 날 때면, 비록 한 시간이라도 넷룸으로 달려가 엘-가드에 접속해서 학교 친구들과 같이 플레이하고 다녔다. 한 시간이면 엘-가드에선 곧 열 시간이니 충분히 놀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마련되는 것이다. 거기다 수희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친구등록을 해놓아서 접속하기만 하면 즉시 반겨주니 혼자서 플레이할 걱정도 없었다. 아, 물론 나는 등록시켜놓지를 않아서 엘-가드에선 단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접속시간이 짧은 수희가 내게 이벤트에 참가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이는 어딘가에서 나와 닮은 사람을 보고 물어보는 것으로밖에 해석이 안 된다. 어제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으니 사실대로 대답하기에는 상당히 찝찝할 수밖에 없었다. 수희가 날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째? 나는 사실을 조작하여 그녀에게 답했다. “참가야 했지. 도중에 입구에 있던 어비스 나이트들한테 막혀서 포기했지만. 그건 왜 물어?” “아니. 학교 오기 전에 잠깐 엘-가드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는데, 누가 ‘헬 마스터의 PK 대현장’이라고 동영상을 올려놓았더라. 설명글에는 ‘던젼 이벤트 도중 열사의 사성에서’라고 하기에 동영상을 유심히 살펴보니 헬 마스터라는 사람이 너랑 좀 닮아서 말이야. 네가 포기했다고 말했으니까 너는 아닐 테지만. 비슷해서 혹시나 하고 물어봤던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 부드럽게 웃으며 하는 수희에 말에 가슴 한구석이 뜨끔해버렸다. 누가 찍어서 올린 거지? 거참 할 짓 더럽게 없는 유저들만 있었나 보네. 당사자의 동의 없이 찍는 것은 사생활 침해인 거 몰라? 그거 몰카라고! 고소해 버릴 테다! 분노감에 주먹을 꾹 쥐고 칠판을 노려보니 수희가 흠칫한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꾹 쥐었던 주먹을 슬쩍 풀었다. 그와 함께 안도의 숨을 내쉬는 수희. 그러나 내 행동 때문에 얼마간 수희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고,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다. “이야아, 이게 누구신가? 류현 아니신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나 이른 시각에 행차하셨나, 그래?” 갑자기 교실 문 쪽에서 어색한 정적을 깨는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녀석이 등교한 모양이다. 거참, 놈이 언제부터 이렇게나 이른 시간에 등교를 하기 시작했지? 1학년 때는 나랑 같이 간당간당하게 등교한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어, 수희잖아? 이여~ 좋은 아침이다!” “안녕, 학진군!” 밝은 목소리로 기운차게 대답한 수희는 생긋 웃음 지었다. 그나저나 새로운 문제에 봉착해버렸군. 저놈이 온 이상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더 잠자기가 힘들어질 텐데……. 학진은 수희에게 인사말을 전하고는 가방을 자기 자리에 던져놓고 이쪽으로 돌아왔다. 난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구태여 도로 와주는 수고를 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방금 들어오면서 보니까 둘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설마 사랑의 밀담을 하다가 나에게 걸려서― 악!” 웃기지도 않는 말을 늘어놓는 학진. 발을 지그시 밟아 비비며 씩 웃어보였다. 네놈이 아침부터 맞아야 하루가 상쾌해지는 스타일일 줄은 몰랐다. 아예 죽여 달라고 고사를 지내지 그러냐? “아프잖아!” 그럼 너는 아프지 말라고 사람을 때리겠냐? 벌레라도 쫒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엄살을 피우는 학진을 내쫒았다. “나 지금 기분이 상당히 저조하니까 건들지 마라.” “뭐야, 사내자식 주제에 그날인거냐?” “또 지랄맞은 소리 지껄인다. 개소리 작작하고 네놈 자리로 꺼져.” “야, 그런 상스러운 말은 하는 게 아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상대의 가슴에 커다란 못을 박는다고.” 욕설이 섞인 말에 학진은 상처받은 얼굴로 ‘흑흑~’ 흐느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1년 전에 먹은 깨죽이 넘어올 것 같은 역겨움이 위를 강타해버린다. 마음 같아선 당장 일어나 교복이 찢어질 때까지 구타해버리고 싶지만 정말 피곤해서 참았다. 아, 생각해보니 저놈은 맞을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군. 어제 수영장으로 내뺐더랬지? “좀더 많은 못을 박아주길 원한다면 계속 말해라.” “너무한다. 왜 나한테만 그러냐.” 다시 상처받은 얼굴로 ‘흑흑~’ 흐느끼는 시늉을 하는 학진. 미간을 짓눌러 밀려오는 두통을 없애고 놈을 한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기분 더럽다고 했잖아.” “넌 잠을 못자면 신경이 날카로워 지는구나? 신기한 체질이네. 나는 안 그런데.” “야,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야. 네놈이 하도 두루뭉술해서 못 느끼는 거라고. 잠을 못자면 신경이 곤두서는 게 당연한 반응인데……. 모르겠냐?” 내 말에 ‘응?’ 하고 머리를 갸우뚱거리는 학진. 네놈을 가르치려 한 내가 미친놈이다. 나는 학진의 존재를 눈앞에서 지워버리고 수희를 쳐다보았다. 나와 학진이 대화하느라 소외되어버린 수희.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작게 웃어보이곤 자신의 손목시계로 시선을 옮기더니 탄성을 지른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됐네. 나 바빠서 먼저 나가볼게. 나중에 다시 봐.” 수희는 나와 학진에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고 다급하게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직까지 선생님들도 오지 않은 시각인데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흠흠, 학생회장은 그래도 바쁘다는 것일까? 뭐, 얼마 뒤면 축제도 시작되니 바쁠 만도 하겠네. 수희가 사라지자 나는 책상에 엎드려서 팔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하게 학진을 불렀다. “김학진.” “왜 부르시나요?” 퉁명스레 대답하는 녀석. 나는 엎드린 채로 힐끗 학진의 얼굴을 보고 짧게 말했다. “토요일에 시간 비워.” “왜?” “애들이랑 영화 보러 갈 거니깐.” “오오, 정말이냐? 누구누구 가는데?” “그건 나중에 정하자. 나 지금 굉장히 졸리거든. 그리고 기대해라.” 그때가 되면 뜨거운 주먹이 네 얼굴을 예쁘게 다져줄 테니까. 그것을 알 턱이 없는 학진은 ‘선물이라도 주려고?'라고 물어왔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놈들에겐 쓰디쓴 선물이 될 것이라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다. 컨디션만 좋았다면 당장이라도 선물을 줄 아량도 있다만, 지금은 모든 신경을 끄기로 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는 게 우선 아니겠는가? 몸과 마음이 튼튼해야 뭘 해도 잘 되는 법이지. 나는 실실 쪼개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학진을 힐끗 보다가 책상 위에 엎드리고 눈을 감았다. 웃는 것도 잠시일 것이니 마음껏 웃어두라고! 참았던 잠이 질풍처럼 몰려오며 날 잠식해갔다. -------------------------------------------------------------- 유후~ 드디어 나왔습니다. 초안에서 잡았던 엘-가드 히로인! 수희야아~ 난 네가 좋아아~ (은현이는 더 좋아한다) -------------------------------------------------------------- 챕터 예고. 어김없이 엘리멘탈 가드에 얼굴도장을 찍는 한류현. 가끔은 혼자 사냥하러 가는 것도 좋을 거라는 생각에 홀로 '재생의 숲'에 들어선다. 트롤 : 크르르! 마주치는 트롤 무리! 솟아라, 헬 스키일~! 한류현 :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간다. 싸워라, 악마여!! 즐겨라, 피를! 세영이 접속하고 허기진 배를 채울겸, 뛰어난 맛으로 유명한 에타이의 고급레스토랑으로 향하는 류현과 세영. ??? : 여어, 합석해도 괜찮을까? 세영의 미모에 홀려 대담무쌍히 접근하는 한 유저. 류현에게 얻어맞고 다른 테이블을 박살낸다. 조폭 : 이 새끼! 뭐하는 짓이야!? 아시아에서 나비의 날개짓이 아메리카에선 토네이도로 변모한다! 카오스 이론! 세영 : 이런 곳은 싫어. 나갈래. 토요일. 영화를 보기 위해 모이는 류현과 친구들. 한국으로 오는 퓨어 섀도우. 한류현 : 너, 너!! 샤미라 : 당신! 설마? 운명적인 교차(交叉)!! 그리고 고백! 세영 : 언니. 류현을 포기해주면 안돼? 가슴 뭉클한 러브 스토리! ...가 될것인가?! 챕터 8, 교차(交叉). Level 8. 교차(交叉). (2) 조금은 습한 바람이 불어온다. 세상의 숨결을 담고 만물을 포용하는 자연의 손길에 이끌려 흔들리는 머릿결. 흑발이 잔잔하게 물결칠 때마다 어둠이 흩어지고 다시 한곳으로 모여든다. 세영은 흩어지는 흑발을 모아묵고 교복치마를 쓸어 내 옆에 앉았다. 옥상 구성에 놓여있는 벤치. 나와 세영은 대화를 통한 트러블 해소를 위해 이곳으로 왔다. 점심시간 옥상을 장악하고 있던 일단의 무리는 내 간곡한 부탁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졌다. 진윤이 있었기 때문에 주먹한번 쥐어주는 것으로 자리를 피해준 것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약간의 마찰을 감수했어야 할 터다. 뭐, 지금은 그를 필두로 문에 달라붙어 이쪽을 감시하는 듯도 하지만 굳이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아 모른 체 해버렸다.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고 크게 한번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바람과 함께 희미한 향수냄새가 실려왔다. 그리운 냄새…… 였던 걸까. 코끝이 찡해진다. 세영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무심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살짝 고개를 틀어 말하는 것이었다. “할말, 있지 않아?” 무뚝뚝한 표정은, 어쩐지 나로하여금 놀림 받는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그녀의 태도가 꼭 ‘너 참 감상적이구나. 하릴없이 사람 불러서 하늘 구경이나 하고’이라는 뜻을 표명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어차피 시간 끄는 것은 내 체질이 아니니 소원대로 빨리빨리 끝내주마. 나는 바로 앞에서 눈이 마주친 그녀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만 말해. 어제처럼 ‘그럴 것 같아서’라는 말로 어물쩍 넘어갈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애매한 대답이면 확답을 받아낼 때까지, 그게 언제가 되었든 계속해서 붙잡고 있을 테니까.” 내 사소한 버릇이나 싫어하는 것은 유나만이 제대로 알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지기인 찬석들도 날 정확하게 파악해내지 못했다. 뭐, 그렇게만 보이는 거라서 장담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언제 한번 ‘멀티 캐릭터(Multi Character)', 그러니까 다중인격이라고 정의를 내린 것을 보면 내 예상이 맞을 듯도 한데……. 아무튼 만난지 반년도 안 된 세영이 그들보다 나를 잘 알고 있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옷이 하나하나 벗겨져 알몸으로 구경당하는 기분이 유쾌할 리가 없었다. 세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럴 것 같아서.” 순간 울컥하여 따귀를 날릴 뻔한 걸 간신히 참아내고 세영을 노려보았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대답이라 하냐고! “장난하고 싶은 기분 아니니까, 제대로 말해. 심심해서 너와 노닥거리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오만상 뒤집어쓰고 말했음에도 세영은 변함없이 일관된 표정으로 날 바라볼 뿐이다. “그럴 것 같아서. 그것 밖에 해줄 말이 없어.”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세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언제까지 그딴 말만 지껄일 거냐!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어?” 고개를 숙이면 닿을 만큼 얼굴이 가까워진 그녀에게 윽박지르다, 어쩌면 결코 봐서는 안 되었을 그것을 스쳐보고 일순간 멍해져 말을 잇지 못하였다. 금색 체인에 이어져 가슴에 닿아있는 목걸이. 어머니가 주셨던, 그리고 내가 유나에게 걸어주었던 타원형의 청옥(靑玉 : 사파이어)이 박힌 펜던트……! “그거……!”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멍 시선으로 펜던트만을 바라보며 청옥의 마력에 이끌리듯 손을 뻗었다. 별빛처럼 희게 반짝이는 금색 체인에 손끝이 닿는다. 접촉에 의해 자연스레 밀려오는 사물의 잔념. 하이얀 순수의 상징이 소복이 쌓여가는 도심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형형색색의 트리(Tree) 불빛이 도심을 밝히고 은은한 크리스마스 노래가 모두에게 마음의 선물을 전하는 25일의 깊은 저녁. 나는 공원 중앙에 위치한, 다양한 장식품으로 치장되어 눈이 쌓여가는 커다란 수목 앞에서 유나에게 펜던트를 선물했다. 아버지께서 프러포즈하며 어머니께 드리고, 어머니께서 같은 용도로 사용하라며 내게 쥐어주신 펜던트를. -이게 뭐야? 고개를 갸웃하며 포장된 상자를 보는 유나에게, 나는 쑥스러워 볼을 긁적이다 대답했다. -에에, 시간은 많이 늦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 이랄까? 본래의 용도에서 한참은 벗어난 말이었지만,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유나가 목걸이를 받고 환하게 미소 지어주기만 한다면 답례는 그것으로 된 것이었으니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녀가 언제나 웃어주었으면 하는 한가지뿐이었다. -아! 목걸이네? 그런데 이거, 진짜 사파이어 같은데……. 유난히 안목이 좋았던 유나는 약간의 의심 섞인 눈길로 나를 흘겨보았다. 그 의도를 알아 챈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 비싼 거 아냐. 아, 좀 비싸던가? 자세한 설명은 못해주지만, 아무튼 불손한 루트를 통해 얻은 하자있는 물건은 아니니까 안심해. 의혹을 떨쳐내지 못하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응, 고마워. 나, 류현이 널 믿으니까. 이거 지금 걸어봐도 되니? -원한다면. -그럼 네가 걸어주면 안될까? 그렇게 말해놓고 등을 돌려 체크무늬 목도리를 풀던 그녀. 나는 펜던트를 받아 목에 걸어주면서 그때서야 유나의 목이 희고 가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목에 흠집이라도 날까 노심초사하며 펜던트의 체인을 잇고 손을 떼었다. 그리고 몸을 빙글 돌려 눈망울을 반짝이는 그녀를 보고 거짓 없는 감상을 토로했다. -잘, 어울리네. -헤에, 정말? 너무 고마워, 류현! 그래, 불길할 정도로 너무도 잘 어울렸다. -우응……. 나는 선물 준비 못했는데, 어쩌지……? 밝은 표정으로 나를 끌어안았다가 곤란하다는 듯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던 유나. 나는 시무룩하게 펜던트를 응시하는 유나에게 목도리를 메어주며 고개를 저었다. -한번만 웃어줄래? 내 요상한 요구에 말똥말똥 쳐다보기만 하던 유나는 반문하지 않고 싱긋 웃었다. 비록 억지웃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어색한 느낌을 엿볼 수 없던 자연스러운 미소. 나는 그 미소를, 나아가 그녀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 찰나간 떠오른 옛 추억에 얇다란 체인을 살며시 쥐었다. “놔!” 그 순간 세영의 앙칼진 외침이 귀를 관통하고 손목에 묵지간 느낌이 전해졌다. 팔이 펜던트를 잡은 그대로 밀려나간다. 세영이 일어나면서 거칠게 팔을 쳐낸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펜던트의 체인이 끊어지게 되었다. “아…….” 멍청한 시선으로 끊어져 흘러내리는 펜던트를 보다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싸늘한 기운을 머금고 노려보는 눈동자. 햇빛에 반사되어 눈에서 반짝이는 것은, 눈물…… 일까? 세영은 그길로 내게서 펜던트를 빼앗고는 두 손에 담아 가슴으로 소중히 끌어당겼다. 그리고 살포시 눈을 감았다 뜨고 날 쏘아보았다. “형편없는 남자.” 증오가 담긴 시선과 음성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예고도 없이 갈증이 난다. 뭔가 세영에게 말해주려 입을 달싹였지만 밖으로 나오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노려보던 세영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걸어가다 돌연 멈춰 섰다. 그리고 나를 등진 상태에서 억누른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내가 무슨 말을 해주길 원해? 누군가가 널 안다는 게 그렇게 기분 나빠? 그게, 멱살까지 쥐어가며 소리칠 정도로 기분 상하는 일이야? 나도 내 자신이 어떻게 네 습관을 알고 있는지 몰라. 그렇기 때문에 확실한 답안을 내줄 수 없어. 그런데도 모르는 사실을 진술하라고 강요당하는 기분, ……하는 누군가에게 미움 받는 기분 너 따윈 이해 못해. 언제나 참으려고 노력해왔지만 이제는 한계다. 마지막으로 말할게. 미안해. 너와 알게 되서 미안해. 앞으로, 앞으로는 너와 대화하지 않아.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될지도 모르니까.” 그녀가 멈췄던 발을 움직이며 시계에서 멀어져간다. 그와 동시에 두렵고 애절한, 산란한 마음의 편안함도 사라진 견딜 수 없는 상실감이 발아래에서부터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나는……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 기다려!” 멍청이라고 놀리듯이 소슬하게 불어오는 바람. 무디어진 감각을 일깨우는, 계절에 맞지 않은 찬바람을 맞고 퍼뜩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향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나도 알지 못한다. 그저, 여기서 그녀를 보내면…… 영원히 멀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였을까. “어째서 ‘기다려’인 거지? 아직도 볼일이 남아있어?” 빙글, 돌아선 그녀가 감정 없이 메마른 눈길을 내게 고정시킨다. “아……” 얼어붙은 표정을 마주했다. 한순간 ‘나’라는 존재가 ‘나’가 아닌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목까지 치밀어 올랐던 단어 한 덩어리가 덩달아 얼어버린다. 하려던 말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게 된다. 확실히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좀 더 중요한, 훨씬 소중한 무언가를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것은 내 마음안의 깊은 곳으로, 닿아선 안 되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같이 어둡고 쓸쓸한 곳으로 잠겨버렸다. “…….” 안 그래도 여름답지 않게 싸늘하던 분위기는, 내가 우물거리는 동안 급격한 하강곡선을 그리며 가라앉아갔다. 눈동자와 눈동자를 마주치며 나와 세영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쇳덩이를 얹어놓은 무거운 침묵. 그녀가 가슴으로 늘어진 끈 리본을 쥐며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유나.” “……?” 단단하게 굳어진 정적을 깨트리는 돌연한 종지부는, 세영의 의미모를 말로서 마침표가 찍히게 되었다. “유나라는 이름으로 날 부르는 것, 이번 한번만 허락할게.” 저편에 있는 그녀가 조용히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였다. 내게 주어진 슬픔, 분노, 기쁨 등의 개별적인 모든 감정이 이 한때에 집중된다. “유나…….”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머릿속 한가득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안에 그리운 이름을 담아보았다. 그러자 이때까지의 격렬하던 마음의 울렁임이 미칠 것만 같은 애절함으로 바뀌어간다. 눈에, 눈물이 아롱졌다. “응.” 그것은 나의 속삭임에 대한 그녀의 대답인 걸까. 슬픔을 삼키듯 약간은 쉬고 잠긴 목소리는 그렇게 답해주었다. ‘왜?’라고 생각했다. 나는 세영이 자신을 유나라 부르라고 한 의도를 알지 못한다. 내 시선이 향하는 곳에 서있는 세영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돌아섰다. “내려갈게.” 갑자기 무거워진 눈이 감긴다. ‘그 여성이, 돼보고 싶었어.’ 그녀가 하려던 말. 세영의 마음을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환상처럼 향수냄새를 동반한 바람이 부는 옥상엔, 나만이 오도카니 남아 있었다. --------------------------------------------------------------------------- 옥상문에 달라붙어 이를 지켜보고 있던 진윤. 진윤 : 좋지 않은데. 작가 : ....? 진윤 : 이런 전개는 좋지 않아!! 작가 : 어째서? 진윤 : 그냥... 작가 : 이런 쓰앙... --------------------------------------------------------------------------- 급히 휘갈긴 글 -_-; 수정은 타임 리미트에 의한 강제 패스(Pass)... 어떻게 손을 볼 수 없을 만큼 뒤죽박죽이므로 이대로 보관... 갈대로 가라지 -_-; --------------------------------------------------------------------------- 또한 늦어서 죄송합니다. 에, 그러니까 변명을 하자면... 류현 : 방학이라고 놀다가 못쓴거겠지, 저 인간. 예! 바로 저겁니다아! 류현 : 화이트 앨범을 필두로한 갖가지 미연시 게임에 중독된 이 한심함이 하늘을 찌르는 오만방자한 인간아... ' ')오, 늘리는 기술이 상당한데... 류현 : 훗, 내가 좀 잘 늘리지...가 아니라니까! 흥분은 몸에 그다지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던데... 아무튼 내일도 모레도 성실연재를... 하아.. 건실한 인간이 되어보고 싶어.... 류현 : 네녀석의 로망이냐? 훗, 가지가지 하는군. 저걸 그냥... *오타 및 어색한 문장 지적은 무조건 환영입니다. 틀리건 맞건 관계 없습니다. 틀린 단어 발견시 즉시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INPORMATION. ============================================================ *엘레멘탈 가드 *Elemental Guard. First Story. *Author : El Vice. *Write Start Date : 2003. 2. 12. *E-Mail : edna2@hanmail.net (비평 환영합니다. 격려 메일은 더욱 환영합니다. 답장, 반드시 갑니다. 대신, 되도록 '욕'은 자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Level 8. 교차(交叉). (3) 하교 후. 어제의 일에 대한 사과라며 학교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으로 끌고 가려던 친구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피자 세 판이면 몰라도 햄버거 두개로 내 화를 삭이기엔 무리가 따랐던 것이다. 흥흥. 내 마음이 얼마나 연약한지 알아? 병약한 미소년이 나라고! 뭐, 저렇게 소리쳤지만 솔직히 찔리기는 하더라. 마음이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병약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던 것이다. 나를 끌고 가던 그들 또한 태진이 놈이 개과천선했다는 말을 믿겠다는 눈치였으니 할 말은 다한 거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토요일 날의 영화 건에 대해 그들과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결과 전원이 함께 가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인원은 총 여섯 명. 이제는 항상 붙어 다니는 찬석과 은주. 함께 가는 것이 가슴 깊이서부터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태진. 점심시간에 다른 놈들과 마찬가지로 허리꺾기를 당한 학진. 유일하게 무사한 허리를 간직할 수 있었던 성호. ……그리고 세영이었다. 방과(放課)시간 즈음 나는 그녀에게 솔직한 의미의 사과를 건넸다. 세영의 말대로, ‘나’를 잘 알고 있다 해서 멱살까지 잡으며 화낼 일은 아니었다. 거기다, 그리 완전하게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본인도 이유를 모르겠다는데 제대로 된 대답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예전과 변함없이 서먹서먹한 관계는 여전하지만 그녀는 내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에 얼마나 고마움을 느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는 것에 대한 씁쓸함도 남아있다. “뭐, 후회해봐야 변하는 과거는 없는 거잖아. 현실을 즐기며 살아야지.” 조금 무책임한 중얼거림을 흘려보고 방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한창 밖에서 놀고 있을, 어쩌면 동아리 부원들과 함께 엘-가드에 접속해 놀고 있을 은현일 떠올렸다. “평소보다 늦게 올 거라 했던가.” 아침에, 은현은 나에게 오늘 동아리 모임이 있어서 조금 늦을 거라 말했었다. 달마다 그래왔듯이 7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터다. 그리곤 외치겠지. -오빠! 배고파요! 뭐, 날 식모로 보았던 녀석이니 내 경우엔 필연으로 겪어야할 비극인가. 그때쯤 되어서 잠시 동안 로그아웃 상태로 있어야겠다. 오거든 '밥' 차려야 할테니까. 자, 그럼 모든 근심걱정 훌훌 털어버리고 남은 3시간동안 즐겁운 추억을 남겨보자고! [엘리멘탈 가드에 접속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이제는 고정된 일과가 되어버린 엘-가드 접속. 황금동상이 보인다. 노점을 열어 목청을 높이고 있는 캐러밴도 보인다. 함께 사냥하기 위해 파티원을 모집하는 유저들도 있고 듀얼을 하는 이들도 있다. 하늘은 눈부시게 맑은 빛을 띠었다. 언제나 터질 듯한 생명력이 맥동하는 제 1의 도시 사베티움. 이제 여기와도 바이바이다.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당분간 이곳에 올 이유는 없다. 이번에 사베티움을 찾은 이유는 열사의 사성에 가기 위함이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나는 사베티움의 시끌시끌한 중앙광장에 접속되자마자 워프 룸으로 달려가 트렌으로 이동했다. 어쨌든 푹푹 찌는 날씨는 사양이고 또한 트렌에 볼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트렌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이벤트 협회였다. 던젼 이벤트를 클리어 했으니 그에 합당한 받는 것은 필연의 이치다. 나는 하릴없어서 목숨 걸고 성을 돌파한 게 아니니까. 여전히 던젼 이벤트의 등록이 가능한 시기여서 협회는 어제와 다를 바 없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뭐, 지금의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등록을 위해 온 것이고 나는 상품을 받으러 온 것이니까. 접수처와 신고처가 구분되어 있는 만큼 기다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벽면을 따라 유유히 걸으며 구석의 창구로 다가갔다. 유저들이 시선이 느껴진다. 그들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쑥덕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이벤트 완료를 알리는 신고처로 가는 이유가 궁금한 것 같은데……. 훗, 이미 다녀왔으니까 이리로 가는 게 아니겠는가. “약속의 증표입니다.” 창구에 당도하여 가방에서 선홍색의 수정구를 꺼내 NPC에게 넘겼다. 정말 웃기게도 어제 나를 찼었던 그 NPC양과 한 치의 오차 없이 동일하게 생겼다. 얘들은 하루아침에 직장을 갈아 치우나? 그녀는 수정을 살피다가 안경을 눌러쓰고 그것을 도로 내게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어떠한 퀘스트 클리어 아이템도 아니네요. 다음에 다시 찾아주세요.” “앙?” 이러니 내 입에서 요상한 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약속의 증표가 보통 수정으로 바뀐다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그거 약속의 증표 맞다고! “다시 확인해줘요! 정말로 약속의 증표 맞으니까!” 처절하기까지 한 울부짖음에 다시 구슬을 살피던 NPC양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것은 아이템 데이터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증표는 ‘청색’이지, ‘선홍색’이 아닙니다. “그, 그런!” 둔기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뇌리를 때렸다. 뒤이어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에 뒤덮여버렸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풀린 눈으로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새로운 퀘스트를 원하신다면 접수처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NPC양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참담한 현실로 빠져나온 나는 다급히 가방을 뒤졌다. 유저들이 키득 우슨 것은 무시해버렸다. 내겐 그들을 신경 쓸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약속의 증표가 아니면 나는 그야말로 개짓한 것이다다. 고생을 돈 주고 산거나 다름없다. 지금까지의 퀘스트 클리어 아이템은 완료일로부터 1년이 지나도 효력을 잃지 않았다. 때문에 일단 퀘스트를 완료하면 한없이 느긋해지는 게 가능했다. 몇 년간 이어져온 방침이고 예고 없이 바꿨다간 유저들로부터 한에 사무친 원성을 들어야 할 테니, 갑작스럽게 그를 변화시킬 미르트도 아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변수에 의하여 ‘설마’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워낙 파격적인 조건인데다가 50명으로 인원수도 한정되어있으니, 즉시 클리어 신고를 하지 않으면 그 기회가 다른 유저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 이례가 없던 이벤트였으니만큼, 하룻밤 새에 클리어 아이템이 고작 수집품으로 전락해 버릴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안돼! 그럴 순 없어! 내가 이걸 어떻게 얻은 건데!?” 산전수전 겪어가면서 퍼부은 노력과 교환한 아이템이었다. 뼈저린 노력을 헛되이 날려먹게 되는 건 절대 사양이라고! 가방 속에는 온갖 아이템들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전부가 몹과 유저들을 죽이고 드롭 된 것의 일부로, 돈 꽤나 나오는 것들만 수거해온 아이템이다. 한가득 묵직한 무게에 떼돈 벌거라는 생각으로 흐뭇해하던 것이 몇 분전이었건만, 이제는 저주의 대상으로 밖에 비치지 않는다. 건물 나가거든 당장 매각하던가 결단을 내려야지 원. 낑낑대며 가방과 씨름하기를 몇 분. 이윽고 청색의 수정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래, 기억났다. 확실히 청색이었지. 그걸 이제야 기억해 내다니. 나도 참 바보로군. 흐으, 아무튼 찾게 되서 다행이다. 못 찾았더라면 화병으로 인해 분명 명줄이 짧아졌을 테니까. 휴우, 안도하고 얼결에 굴러 떨어진 몇 개의 아이템을 주섬주섬 수거하다가, 문득 발치에 굴러와 있는 선홍색 구슬을 보았다. 그리고 증표와 함께 한손에 하나씩 들었다. 어떻게 착각했나 싶을 정도로 확연한 차이점들이 보인다. 아, 뭐― 착각한 것은 단순히 수정이 하나밖에 없을 거라 간주하는 바람에 빗어진 일이지만. 쩝, 조금만 생각해봤으면 이런 엉뚱한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역시 선홍색과 청색으로 역시 색깔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선홍색 구슬의 중앙에는, 약속의 증표엔 없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가느다란 백선(白線)으로 연결된 마법진이. 그 마법진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이었다. 드래곤을 사냥할 때 손수 만들었던, 열두 개의 모서리가 있는 봉인진의 축소형이었으니까! 아아, 봉인진을 보자니 기억이 난다. 이 아이템…… 듀얼 랠리 때, 우승 상품으로 받은 거였지, 아마? 원체 여러모로 이상한 아이템이어서 여태껏 옷 깊숙이 처박고 다니다 어제 성에서 가방 속에 넣어놨던 것 같다. 버리지 않을 게 용할 정도로군. 나는 싱겁게 웃으며 선홍색 수정을 품안에 집어넣고 기억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보았다. 달아오른 분위기를 더욱 고취시키는 웅장한 사운드. 다채로운 색종이가 바람에 안겨 흩날리고, 솟아오른 폭죽이 터져 하늘에 흰 뭉게구름을 형성하던 폐회식. 유저들은 최종결승전의 허무함을 잊고 지축을 진동시키는 환호성을 내질렀었다. 폐회식 이전의 최종 결승전은, 놈의 무모하리만치의 굉장한 오만으로 수많은 유저들의 가슴 벅찬 기대를 깨부순 채 막을 내렸다. 놈은 듀얼 초장부터 ‘나는 잘났다’로 일축되는 자기자랑을 늘어놓던 중증의 나르시시즘 환자였다. 더불어 생기다만 주제에 ‘쿨 가이(Cool Guy)'라는 짜증나는 별칭을 붙여, 나로하여금 무한한 살인충동을 치밀게 만든 밥맛없는 작자이기도 했다. 놈은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하하하! 비록 내 최대의 적수인 레드 크로스를 네 녀석이 쓰러트렸다지만 내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강자의 넓은 도량으로 다섯 수 양보해주도록 하지! 자, 와라― 으악! 그러다가 부아가 치민 나에 의해, 모든 유저의 짜증과 분노를 담은 ‘분노 필살 킥’을 가슴통에 얻어맞아 그대로 장외패한 것이다. 그것은 듀얼이 시작되고 채 1분이 안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리고 듀얼 랠리 역사상 최고의 단시간 듀얼로 기록되고, 여전히 화를 삭이지 못한 유저들이 그를 향해 저주의식을 행했다는 후문이 돌았다. 모르긴 몰라도 제대로 된 게임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하는 일마다 재앙이 겹칠 테니 말이다. 물론 저주를 건 이들의 평균보다 정신력이 높으면 무사태평이다, 그러나 저주의식을 행한 유저들이 트리플 마스터급의 세이지들이었다는 소문을 감안하면 성공확률은 100%였다. 검사의 정신력은 마법사와는 현격한 차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대회 마지막 경기가 끝이 나고 고대해 마지않던 수상식. 3등에게까지 몇 개의 옵션이 달린 메달을 수여하고 로그(LOEG)는 나를 따로 불렀다. 그가 날 부르는 이유쯤은 생각하나마나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베일에 싸인 우승상품을 주기 위함일 터였다. 4강까지 탈락한 유저들끼리의 재듀얼에서 2위를 거머쥔 샤프와, 3위를 한 반대편 콜로세움의 스피릿 스피어(Spirit Spear) 바르카는 각각 미스릴 검과 유니크급 스킬 북을 받고 비무장에서 퇴장했다. 나는 백만이 넘는 유저들의 부러움과 질시가 담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로그에게 걸어갔다. 그가 내 오른쪽 허리춤을 힐끗 보았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있는 자리다. ------------------------------------------------------------------------- 이건... 좀 황당하군요... 9시 20분쯤에 올리려고 글쓰기 창에 복사시켜놓고 한번 훑어보다가.. 몇번 수정해줬더니 2장이 3장으로 불어버린.. 으음.. 이런 경우는 처음이로군요 -_-; *다짐했던 시간보다 1시간 30분 경과. *차차 오차를 줄여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오타 및 어색한 문장 지적은 무조건 환영입니다. 틀리건 맞건 관계 없습니다. 틀린 단어 발견시 즉시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INPORMATION. ============================================================ *엘레멘탈 가드 *Elemental Guard. First Story. *Author : El Vice. *Write Start Date : 2003. 2. 12. *E-Mail : edna2@hanmail.net (비평 환영합니다. 격려 메일은 더욱 환영합니다. 답장, 반드시 갑니다. 대신, 되도록 '욕'은 자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Level 8. 교차(交叉). (4) 나는 백만이 넘는 유저들의 부러움과 질시가 담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로그에게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서자 로그는 내 오른쪽 허리춤을 힐끗 흘겨본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있는 자리다. 보통 유저가 보았다면 단순한 호기심이려니 생각하고 넘어갔을 터다. 그러나 지금 상대는 운영자, 그중에서도 최고 운영자 로그였다. 만약 그가 드래곤 슬레이어를 알아보았다면 내 정체 도한 자연적으로 파악 될 것이었다. 천으로 감아둔 드래곤 슬레이어를 슬쩍 뒤로 숨기고, 시선을 돌려 모르는 척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로그가 빙긋이 웃더니 가볍게 목례한다. 힐끗 그것을 본 나로서는 굉장히 불안하게만 느껴지는 모션이었다. 로그는 검신이 달구어진 듯 빨갛고, 가드(Guard : 손잡이의 윗부분)부분이 불타는 모양으로 화려하게 생긴 ‘태양의 검’을 뽑아 높게 들어올렸다. 설마 저것으로 내 목을 날릴 작정은 아니겠지? 나는 왼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검이 어깨에 가볍게 닿았다. 그리고 속삭이듯 작게 말하는 로그. -드래곤 슬레이어, 입니까. 순간 몸이 움찔 놀랐다. 역시 운영자라는 명함은 그냥 가지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것인가? 한눈에 숨겨놓은 드래곤 슬레이어를 간파하는 그다. 또 내 정체는 부수적으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드래곤 슬레이어는 일단 나 혼자만이 지니고 있는 아이템이니.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비무장 위를 살펴보았다. 로그를 보좌하며 양옆으로 서있는 운영자 여섯만이 남아있다. 뭐, 저들도 당연히 나를 알아봤을 테니 부정은 하나마나한 짓거리일 뿐이다. 눈매를 좁게 하여 운영자들의 뒤편을 보았다. 살포시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각각 두터운 금색 망토, 선홍빛 수정구가 올려진 작은 금색 쿠션, 월계관을 들고 있는 세 명의 미녀. 아아, 차림새 또한 가릴 곳만 가린 인도풍의 망사 옷이어서 무척이나 아름답다.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녀들을 보다가 은근한 걱정이 밀려들어 안색을 죽였다. 저 여자들 혹시 유저? 로그는 내 심중을 눈치 챈 것인지, 안도하라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쪽의 대화는 유저들에게 들리지 않습니다. 또한 이들은 운영자와 NPC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그건 그렇고, 용살검을 가지고 계시면서 어째서 사용하지 않으신 겁니까, 카르마씨? 헬 마스터의 역량에 용살검이 더해진다면 우승쯤은 우습게 했을 텐데요. 그렇게 말하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로그. 그의 말에 한시름 놓은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고개 숙인 자세를 유지했다. 어찌되었든 유저들의 눈에는 이것이 ‘수상식’으로 보여야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쉽게 우승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는 적당히 왜곡된 이유고, 뭇매(집단 구타) 맞을 까봐, 가 본초 이유랄까요. 저같이 약한 유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구요. 시선이 바닥에 닿아있어 잘은 모르겠지만, 하는 말로 보아 아마 고개를 갸웃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카르마씨,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째서 드래곤 슬레이어를 사용할 시 유저들에게 맞지 않아선 안 되지요? 이때 나는, 로그가 세상의 무서움을 모르는 순진한 어른인줄로만 알았다. 이 질문이 다 뭔가? 그는 나와 유저들 간의 골이 심각하게 깊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우승을 축하합니다, 섀도우 나이트 다크니스’라는 확성된 로그의 말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늘어진 눈초리로 그를 흘겨보다가, 이쪽으로 다가와 어깨에 금빛 망토를 메어주는 미녀NPC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미소로 답하고 조용히 뒤쪽으로 물러났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요? 제가 헬 마스터라는 사실을 유저들이 알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잖습니까! -가만히 놔두지 않으면 그들이 어쩐답니까. 듀얼 랠리 규칙 제 3번, 유저가 지켜야할 사항에서 두 번째 조항. ‘원활한 경기 진행에 물의를 주는 행동은 자제한다. 어길시 일주일간 계정 블록.’은 말로만 있는 게 아닙니다만. 로그 이사람,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어! 월계관을 씌워주고 뺨에 입을 맞춘 뒤 물러나는 다른 미녀NPC에게도 목례했다. -저기, 혹시 그런 걸 모든 유저들이 꼼꼼하게 읽어볼 거라는 낙천적인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죠? -물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둔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뭔데요? -선수 외(外) 대기실 및 경기장 진입 불가. -……!! 로그 딴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을 들은 나는 머릿속에 거대한 종이 연속적으로 울리는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아니! 대기실만 일반유저 출입 불가가 아니었단 말이야?! -그런 건 미리미리 말해줘야 할 거 아냐! -죄송합니다. 앞으로 시정하지요. 뭐라고 쏘아붙이려던 나는, 대번에 고개를 숙여 잘못을 시인하는 로그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세상의 무서움을 모른다는 말 전부 취소하겠다. 불리한 상황을 무마시키는 능글맞은 태도와 말문을 막는 언사, 알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로그는 세상사는 법을 이미 터득한 상태라고! 하지만 미연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하더라도, 나는 마음 놓고 드래곤 슬레이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 완전한 타인만 있다면 괜찮지만 나와 면식이 있는 이들도 출전 혹은 구경을 하는 것이다. 그들 앞에서 드래곤 슬레이어 들고 칼춤을 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진하여 ‘고생’으로 직결되는 열차를 타는 꼴인데 내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는가? 절대 싫다. 나는 이를 로그에게 말했고, 그는 흐음 콧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산을 넘으니 이번엔 바다가 나온 건가요. -……돌려 말하지 맙시다. -한 가지 문제를 풀었더니 다시 새로운 문제에 봉착한 꼴이로군요. -뭐, 그런 거죠. 쯧, 그렇게 말하면 될 것 가지고 뭘 번거롭게 말하는가, 그래. 잠깐의 대화를 마친 나와 로그는 본래의 관심사였던 수상식으로 주의를 돌렸다. -시네네양, ‘그것’을 들고 이리로 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마이 로드(My Lord). 푹신한 쿠션을 두 손으로 받친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내 앞으로 사뿐사뿐 걸어오는 세 번째 미녀NPC, 시네네. 아아~ 어쩜 저리 이름까지도 예쁠까? -이름이 참 좋지요? 제가 온라인에서 즐겨 쓰는 닉네임입니다. -……. 오, 맙소사. 여자 이름을 즐겨 쓰는 남자라니! 아아~ 저딴 변태의 이름을 받은 미녀NPC가 너무 불쌍해! -------------------------------------------------------------------------- 흐흐흐... 일부러 여기서 끊어버린 -_-; 절단아님! ...... ...일까나...? 뭐 -_-; 이미 많은 분들께서 '선홍색 수정구'의 정체 대해 알고 계신듯 싶으니... 아니라고 봐야겠죠! 흥흥~ 라라라라랄~ [퍽퍽퍽!!] 아악! 돌팔매질은 그만!! *설문조사 중입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설문 내역은 밑에서 확인해주세요^^ *오타 및 어색한 문장 지적은 무조건 환영입니다. 틀리건 맞건 관계 없습니다. 틀린 단어 발견시 즉시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INFORMATION. ============================================================ *엘레멘탈 가드 *Elemental Guard. First Story. *Author : El Vice. *Write Start Date : 2003. 2. 12. *E-Mail : edna2@hanmail.net ============================================================ 연재중인 장소 ============================================================ 삼룡넷 : http://3dargon.net 북박스 : http://www.bookbox21.com 유조아 : http://ujoa.com ============================================================ 소설 링크(펌 금지) ============================================================ 주소 : http://3dragon.net/ezboard/ezboard.cgi?db=k070 링크 해가실때 어디어디서 해갑니다, 등으로 코멘트 남겨주세요. ============================================================ Level 8. 교차(交叉). (5) 하지만 미연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하더라도, 내가 드래곤 슬레이어를 마음껏 사용하는 것에는 여전히 문제가 남아있었다. 완전한 타인만 있다면 괜찮지만 나와 면식이 있는 이들도 출전 혹은 구경을 하러온 듀얼 랠리다. 그들 앞에서 드래곤 슬레이어 들고 칼춤을 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진하여 ‘고생’으로 직결되는 열차를 타는 꼴인데 내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는가? 말도 안 되는 거지. 나는 이를 로그에게 말했고, 그는 흐음 콧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산을 넘으니 이번엔 바다가 나온 건가요. -……돌려 말하지 맙시다. -한 가지 문제를 풀었더니 다시 새로운 문제에 봉착한 꼴이로군요. -뭐, 그런 거죠. 쯧, 그렇게 말하면 되지 뭘 번거롭게 말하는가, 그래. 잠깐의 대화를 마친 나와 로그는 본래의 관심사였던 수상식으로 주의를 돌렸다. -시네네양. ‘그것’을 가지고 이리로 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마이 로드(My Lord). 푹신한 쿠션을 두 손으로 받친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내 앞으로 사뿐사뿐 걸어오는 세 번째 미녀NPC, 시네네. 아아~ 어쩜 저리 생김새만큼이나 이름까지도 귀여울까? -이름이 참 좋지요? 제가 온라인에서 즐겨 쓰는 닉네임입니다. -……. 오, 맙소사. 여자 이름을 즐겨 쓰는 남자라니! 아아~ 저딴 변태의 이름을 받은 미녀NPC가 너무 불쌍해! 로그는 미녀NPC가 옆에 서자 작게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받으십시오. 받으라고 해도 정체불명의 아이템을 덥석 가져갈 수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우승 상품인데 신경이 쓰이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뭔데요? 멀뚱히 서서 쿠션 위에 올려진 선홍색 수정을 가리켰다. 로그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가볍게 손짓하여 수정구를 허공으로 띄웠다. 아이템보다 저 스킬이 더 탐나는 것은 왜일는지……. -엘리멘탈 가드. 그중에서도 프로얀입니다. 더 이상의 부연설명이 덧붙여지지 않은 간단한 대답. 장난하는 건가? 그것만으로 아이템 옵션을 어떻게 알라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뭐냔 말입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라구요. 이거 정말 신용할만한 아이템인가요? 미스릴 검보다 좋은 거 확실하죠? -음……. 갑자기 심각해져선 느릿한 동작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침음하는 로그다. 뭐, 뭐야, 그런 신용가지 않는 반응은? 눈까지 지그시 감고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그는 이내 모든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것들은 모두가 엘리트 아이템의 위력을 능가―. 거기까지 들은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비명 같은 외침을 내질렀다. -엘리트 아이템보다 더 강하다구요?! -할지도 모릅니다, 일단은. -……. ……지금 잠시, 이 인간을 세계에서 소거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 ‘일단’은 또 뭡니까? 몇 번 심호흡을 하여 솟아오른 화를 삭였다. 로그는 수정을 무작정 내게 넘기고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엘-가드의 최강자에게 영원한 영광을!’이라는 그의 외침에 반응하여 뜨거운 박수갈채를 터트리는 유저들. 나는 형식상으로 사방면에 허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하고, 로그가 넘겨준 검을 받아 한손으로 높게 치켜들었다. -판 대륙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합니다! -우오오오! 미친 듯이 열광하는 유저들의 열기가 용솟음치며 콜로세움을 뒤덮는다. 그리고 지연누나들에게서 받은 ‘우승 축하해’등의 따뜻한 축하 메시지에 대한 답장을 보내주고 로그의 망토를 슬쩍 잡아당겼다. 다른 운영자들에게 몇 개의 지시를 내리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태양의 검을 챙겼다. 그리고 나를 자신의 옆에 세워놓고 계속해서 폐회식을 이어나갔다. 이후 1시간의 폐회식. NPC들의 각종 공연과(빌어먹게도 나까지 노래를 불러야했다) 마지막에 필수적으로 거친 유강현 사장의 폐회사. 그리고 사장은 나를 향하여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는 ‘부탁하네’라는 말만을 남기고 도망치듯 퇴장했다. 이유는 캐물으려던 나는, 그가 바람처럼 사라지자 하는 수없이 목적을 접어야 했다. 사장이 사라지고 유저들과 함께하며 듀얼 랠리의 좌절과 환희를 보여주었던 스크린이 이윽고 빛을 잃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마침내 상반기 듀얼 랠리의 삼일 간 대장정의 막이 내린 것이다. 경쾌한 노래가 허공에 메아리치고 대회 운영진들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콜로세움을 나서는 유저들. 뭐, 재접속하면 콜로세움 밖의 대로에서 스타트되기 때문에 과반수의 유저들은 로그아웃을 택했지만 말이다. 페스티벌은 대회가 끝나고도 4일간 남아있게 된다. 그 기간동안 유저들은 마음껏 축제를 즐기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대회에 참전하지 못한 예전엔 눈물지으며 은현과 도시를 배회했지만, 이번엔 한껏 들뜬 기분을 만끽하며 축제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는 지연누나가 있고, 둘째로는 듀얼 랠리 우승, 셋째로는 다양한 볼거리가 많은 최적의 데이트 코스였으니까. 이젠 즐기는 일만 남은 것이다. 뭐, 지금은 노는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좀 전에 로그의 시간을 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래서 일행들에겐 먼저 가라고 일러두고 회의를 위해 잠시 종적을 감춘 그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그덕분에 홀로 콜로세움에 서있는 생경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감상은 기분 더럽다 정도면 되려나? 크디큰 콜로세움에서 홀로 궁상떠는 것은 사람이 할만한 게 못되었던 것이다. 나는 10분정도 기다리다가 끝끝내 지루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무장에 올랐다. 그리고 원을 풀 요량으로 죽어라 드래곤 슬레이어를 휘두른다. 물 흐르듯 잔잔하고 부드러운 유검(柔劍). 느리나 난폭한 힘이 실린 중검(重劍). 바람을 지르는 쾌검(快劍).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고, 또한 전보다도 위력이 증강된 것 같아 의아하기도 했지만, 기분 탓이려니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그러는 와중에 로그가 무거운 분위기를 이끌고 내 앞에 나타났다. 워프 마법이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봄이 가능했다. 어째 몰골이 해쓱해진 것 같다고 물어보려는데 어두운 안색의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자리를 옮기지요. 동의할 시간, 고개를 끄덕일 새도 없었다. 인식하고 예, 대답하려 했을 때는, 이미 장소가 사방이 콱콱 막힌 밀폐공간으로 뒤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가운데에 사각 테이블과, 그것을 사이에 두고 대칭되게 배치되어 있는 의자 두개가 전부인 공간이었다. 대번에 경찰서의 취조실이 떠오르는 것은 내 상상력의 한계일까? 아니겠지, 설마. 난 자백할 게 없는 선량한 유저라고! 그렇게 자기위안을 해보지만 그럼에도 싹트는 불안감. 나는 머리를 괴고 뭔가 생각하는 모습으로 앉아있는 로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이곳은……? -아.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난 로그가 작은 소리를 내며 빙긋 웃었다. 하지만 영 부자연스러운 미소였기에 안심보단 걱정이 먼저 앞섰다. -일단 허락받지 않고 이동한 것에 대하여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아, 음……. 괜찮아요. 알면 됐어요, 라고 말하려다가 말을 바꾸었다. 그랬다가 취조실이 고문실로 변하면 어떡해? 로그는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곤 내게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의자에 앉자 그는 말을 이었다. -우승상품에 얽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모르셨겠지만 판 대륙에는 7가지의 엘리멘탈 가드가 존재합니다. 어라, 엘리멘탈 가드? 그런 게 있었어? 나는 조금 놀란 얼굴로 질문했다. -게임이름은 그거 때문에 정해진 겁니까? -아닙니다. 엘리멘탈 가드는 상용화 이후에 만들어진 아이템이지요. 재밌게도 게임이름과 동일하더군요. 일단 목록에 있는 것을 알려드리자면, 바람(風)의 ‘위냔’, 불(火)의 ‘프로얀’, 물(水)의 ‘기니스’, 땅(地)의 ‘테라’, 빛(光)의 ‘샤이닝’, 어둠(暗)의 ‘가데인’. 혼돈(無)의 ‘뮤트’입니다. 언제 만들어놓은 것일까. 엘-가드 플레이 6년 동안 한번도 접해본 적 없는 아이템들이었다. 더불어 상용화 이후에 만들어졌다면 필시 패치 내용을 유저들에게 공지했을 텐데? -많기도 하군요. 유저들은 전부 알고 있는 건가요? 로그는 깍지 낀 손을 풀고 없이 진실을 털어놓았다. -유저들 사이에선 카르마씨가 최초입니다. -엑? 적어도 정보제공정도는 해주는 게 회사의 도리일 텐데요? 로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미르트는 실수한 것이다. 사소한 것이면 잠수함 패치 업(유저들 몰래 하는 패치)도 눈감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우승상품으로까지 나도는 아이템을 추가시켜놓고 입 싹 씻고 있는 것은 유저들로부터 큰 원성을 듣게 된다. 게다가 곧 게시판에도 우승상품에 대한 정보공개요청이 쇄도할 텐데 그때 가서 뭐라고 답하려고? 로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테이블 위에 커피가 담긴 두개의 찻잔이 나타난다. 나는 소리죽여 감탄했다. 오오, 역시 운영자! 엘-가드의 신다운 놀라운 창조의 능력! ―까지는 좋지만 커피는 마시지 앉기 때문에 체리파르페로 교체해줄 것을 요구했다. 공짜로 마시는 주제에 조금 건방진 모습이려나? 그래도 싫은 걸 어쩌라고. 어쨌든 군말 없이 커피에서 파르페로 바꿔준 로그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빨대를 물었다. 그는 우아한 자태로 커피를 음미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희도 이 엘리멘탈 가드의 존재를 안 것은 1주일 전에 프로얀을 얻게 되면서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행방이 묘연합니다. 이 말에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어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잠깐. ‘저희도’라니요? 엘-가드를 운영해나가는 사람이 모르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렇게 말해놓고 기분 상했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하여 눈치를 살폈다. 다행이 로그는 그런 기색 없이 웃는 얼굴로 성실하게 답변해주었다. -엘-가드는 미르트에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 잘라! 잘라! 마구마구 잘라~~ Level 8. 교차(交叉). (6) -엘-가드는 미르트에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나는 정말로 로그가 말장난을 하는 게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봐야했다. 아무리 전문적인 프로그래밍 지식이 없더라도, 보편적인 지식수준이라는 게 있다. 게임 개발과 관리를 어디서 하는지는 누구나 아는 상식중의 상식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농담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우선 굳이 이런 곳까지 와서 노닥거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하물며 눈앞의 상대는 언제나 시간에 차이는 운영자. 도저히 금쪽같은 시간을 의미 없이 낭비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미르트가 아니라면 누가 만든다는 겁니까? 누군가가 만들어놓고 쉬쉬하는 거 아닌가요? 그가 진심이라면 틀림없이 이에 대한 대답을 해줄 것이라 믿었다. 더불어 만에 하나 대답이 없다면 운영자고 뭐고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고작 잡담 따위로 아까운 시간 날리는 것은 영 달갑지 않은 것이다. -불가합니다. 미르트 내에서 크레이트(Create)된 것이라면 기록이 남아있어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런 내역을 찾을 수 없더군요. 바람대로 로그는 커피 잔을 내려두고 두 손을 가지런하게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내 앞에 하나의 파란색 반투명한 창이 뜬다. 아이템 인포메이션 윈도우. 아이템의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는 창이다. 타인을 볼 수 없을 텐데 어떻게 한거지? 잠시 궁금증이 생겼지만, 운영자이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결론을 짓고 창을 살폈다. 이름 : 프로얀 오브 엘레멘탈 가드(Proyan of elemental guard). 등급 : Unknown. 타입 : Unknown. 내구도 : Unknown / Unknown 제한 : Unknown. 기본 가중 : Unknown. 추가 옵션 : Unknown. 설명 : No Data. -이게 뭐야? 정보가 텅 비어있어? 당황하여 급히 창 너머의 로그를 찾았다. 고개를 틀어 놀란 토끼 눈으로 응시하는 나를 발견한 로그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는 커피를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멘탈 가드는 그 자체에 락(Lock)이 걸려있습니다. 때문에 모든 정보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지요. -뭐라고? 락 걸린 아이템이라니?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정보가 없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또한 있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모든 아이템은 아무리 비밀이 많은 것이라 해도 최소한의 설명이 첨부되기 마련이다. 하물며 감정 전의 아이템도 ‘감정되지 않았습니다’ 정도의 멘트 정도는 적혀있었다. 이것처럼 모조리 베일에 쌓인 아이템은 전례가 없었다. 프로얀을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고 자세히 들여다본다. 중앙에 희미한 선으로 열두개의 모서리를 이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본적이 있는 것이었다. 그린 드래곤을 사냥할 때 직접 그렸던 봉인진이 아닌가! 한껏 구부렸던 허리를 펴고 말했다. -봉인상태, 입니까.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요? 중앙의 마법진은 틀림없이 봉인진이니 말입니다. 거의 녹아버린 파르페를 한번에 비워버리고 잔을 옆으로 밀어두었다. 로그도 같이 잔을 옆으로 밀어놓고, 손을 깍지 껴 턱을 괸다. 그리고 건조한, 감정 없는 눈으로 날 직시한다. 나는 식은 눈동자로 그를 마주보다가 어느 순간에 입을 열었다. -제게 이러한 말을 해준 이유가 뭐죠? 로그가 빙그레 웃는다. 하지만, 눈빛은 살이 에일 듯이 날카롭다. -엘-가드의 비밀을 풀고 수거해오는데 가장 적합한 분이 카르마씨였기 때문입니다.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은, 정확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궁금증과 하고 싶은 말이 목을 꽉 메었다. 나는 빳빳하게 긴장한 채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말인 즉, 제 우승을 확신했다는 말인가요? -하하, 그럴 리가요. 제가 운영자라고는 하지만 전지전능한 신은 아닙니다. 미래를 보는 일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래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우승 상품을 기밀에 붙인 것 아니겠습니까. 너스레를 떠는 그이지만, 어디에서도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적당한 인물이 아니라면 엘-가드는 없다, 인가요? 하지만 제가 대회에 불참 했다던가 도중에 탈락하고 우승자가 평범한 유저였다며 어쩔 참이었나요? 그러면 로그의 계획은 거품으로 산화했을 텐데요. 순수한 궁금증을 말했을 뿐인데 작게 감탄하는 로그. -역시 생각이 깊으시군요. 저희 또한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두었습니다. 카르마씨가 우승한 지금은 필요 없는 계획이지만, 만약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직접 랭커분들을 찾아뵐 생각이었습니다. -랭커라면……, 역시 데스티니 블레이드입니까? 당연하게 그가 떠오르는 것은 내 상상의 한계 뿐만은 아니리라.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거대한 계곡’인 것이다. 감히 다른 이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험준한 계곡. 로그는 하라는 대답은 않고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핀 손바닥을 위로 향하도록 팔을 움직였다. 마술처럼 그의 손바닥 위에 둥글게 말린 두루마리가 나타난다. 허공에 떠 천천히 회전하던 그것은, 샤프가 주먹을 쥠과 동시에 내 바로 앞으로 전송되었다. 나는 두루마리를 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Contact List’라는 제목으로 글이 시작되고 있다. 접촉명단, 인가. 리스트까지 뽑아두고 철저하시군. 리스트에 기재되어있는 이름은 스무 개였다. 나는 명단을 죽 훑어보다가 화등잔처럼 눈을 크게 떴다. 필로니드(이 인간은 의외였다), 비비안, 루하프, 데블 순으로 올라오며 명단의 첫머리에 적혀있는 것은 ‘카르마’, 즉 내 유저네임이었던 것이다. 로그는 놀란 내 모습을 보았는지 경쾌한 음색으로 설명에 임했다. -‘데블’씨도 생각해 봤지만 결국 열외 되었습니다. 드래곤 스프린터를 푸신 카르마씨가 첫 타깃 된 것이죠. 열자리 수 덧셈과 다섯자리 수 곱셈 중 뭐가 더 어려울지는 쉽게 판단할 수 있으실 겁니다. 회사는 소소한 것을 여러 개 알아낸 데블씨보단 큰 것을 알아낸 카르마씨를 좀 더 신뢰하고 있어요. 하지만 카르마씨가 거절하시면 하는 수없이 데블씨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겠지요. 이해는 했다. 그래, 이해는 했는데 대체 ‘데블’은 뭐야? 설마하니 그 작자의 이름을 줄인 것? -그렇습니다. 본인은 유저네임으로 불리기 싫다고 하더군요. 마침 발음도 비슷하기에 ‘데블(Devil)'이라고 운영자들은 부르지요. 개인적으로 차라리 카르마님께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말해놓고 재밌는 듯 하하, 웃는 로그.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시는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게슴츠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유저면 몰라도 로그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 묘하게 화난다. 저 여유를 뛰어넘고 능글맞음을 초월하여, 다시 여유로운 태도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억장이 뒤집히려한다. 때문에 입 밖으로 나가는 말도 상당히 퉁명스럽게 변했다. -일개 유저보단 미르트가 직접 나서는 게 간단하리라 봅니다만? 그는 두루마리를 회수하고 좌우로 검지를 까닥였다. -유저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희 쪽에 엘-가드의 데이터 접근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프로텍트(Protect)가 걸려있어 데이터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죠. 총력을 기울여 보호필드를 해제하고 있지만, 알아낸 것은 이름과 함께 일곱 개가 있다는 것뿐 조금의 진전도 없는 상태입니다. 때문에 카르마씨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저 먼 나라 이야기하는 태도하고는……. 자사의 문제인데 저리 행동해도 되는 거야?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까지 으쓱이는 그를 질렸다는 낯으로 흘겨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하고 자세를 바로잡는다. -아무런 단서 없이 그런 갈 푼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에요. 누구보다 잘 알고계실 텐데요? 더불어, 그 과정에서 생기는 위험은 어떻게 감수하라는 겁니까? 만약 레드 드래곤이라도 잡아야한다면 일은 실현불가능으로 치닫는다고요. -하하하, 저희가 그런 거 하나 생각해두지 않았을 것처럼 보이십니까? 엘-가드에 어떠한 능력이 달려있는지 모릅니다. 그저 구슬일 수도 있고, 엄청난 증폭으로 손짓한번에 세계를 날려버리는 파괴력을 낼 수도 있습니다. 일단 그럴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요지는요? -엘-가드의 수거과정에서 있을 변수를 대비하여…….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긴장하여 떨리는 눈동자로 그의 입술만을 주시했다. 대, 대비하여, 그 다음은 뭐지? 로그는 이런 날 재미있다는 듯이 보며 눈웃음 짓다가, 이내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 자르기도 이정도면 극악이렷다 -_-... 더하다간 죽겠어! 샤이닝 핑거~ [펑] 불타오른다아아~ 버어닝~! Level 8. 교차(交叉). (7) -스킬 북을 드리겠습니다. 기껏 기다렸더니 들려온 말은 상당히 의외의 것이었다. 은근히 ‘엘리트 아이템 풀 셋’이라든지, ‘올 스테이터스 999’를 바라지 않았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솔직히 스킬 북은 생각조차 못했다. 지금 등장한 것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이 엘리트 급이 아닌가? 설마 그 위에 또 있다는 걸까? 번외 등급으로 존재하는 드래곤처럼 말이다. -엘리트 스킬로도 드래곤 잡기가 벅찬데 무슨 스킬 북이요? 차라리 엘리트 아이템 세트(Set)를 줘요! 실 스톤도 백 개 덤으로! 그래! 이거면 그깟 드래곤이 대수일까 보냐! 데스티니 블레이드도 눌러버릴 수 있다! 생각만으로도 몸이 뜨겁게 달구어지는 희열을 느끼는데, 로그는 비웃듯 피식 웃으며 냉수(冷水)를 넘어선 빙수(氷水)를 끼얹는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시는 군요, 카르마씨.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밸런스는 유지되어야 합니다. 엘리트 아이템도 몇 개 발견되지 않은 판에 엘리트 아이템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닌다 생각해 보세요. 유저들이 대번에 의심부터 할 겁니다. 미르트와 연줄이 닿은 부정캐릭터라고 말입니다. 이는 미르트는 물론이거니와 카르마씨 자신에게도 누가 되는 사항입니다. 반박할 거리가 없는 인과(因果)가 확실한 말. 내심 실망하여 고개를 숙인다. 쳇, 엘리트 풀 셋이라도 맞춰주면 바로 눈이 뒤집혀줄 요량도 있는데 말이지. -제가 드리려는 스킬은 엘리트를 넘어선 오버 엘리트(Over Elite)급입니다. 대(對) 드래곤용 스킬이지요. 간부회의에서 이것도 불가라고 외쳐대다가, 수거한 엘-가드를 날름 먹어버릴 가능성도 있다는 안건이 나와 겨우겨우 넘어간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반박할 거리가 없는 말이 그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온다. 우읏, 이 사람들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어! 불안한 마음에 로그를 경계하길 잠시. 눈알을 굴리며 ‘오버 엘리트’라는 말을 되새겨보고, 모든 천근같은 걱정 훌훌 털어버린 밝은 모습으로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무려 오버 엘리트다. 엘리트를 초월하여 대 드래곤용이라고까지 일컬어진! 이건 헬 스킬과 비교해 볼 때, 어느 정도의 위력을 낼지 짐작조차 가질 않았다. 드래곤, 한방에 보내버릴 수 있을까나? 그럼 이것으로도 충분한데. 가지각색으로 변하는 표정을 즐기듯 보던 로그는 말을 이었다. -스킬과 엘-가드는 교환입니다. 만약 카르마씨가 나머지 여섯 개의 엘-가드를 전부 수거해 오신다면, 우승상품과 합쳐 스킬을 고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끔 해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의뢰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실패하신다면 엘-가드와 스킬을 회수합니다. 우승상품에 대한 대가로는 미스릴검 두 자루와 5백만 렌스가 지급됩니다. 하지만 반환하지 않으실 경우엔, 계정 삭제와 더불어 영영 재가입할 수 없게끔 조치하겠습니다. 그 순간 들려온 로그의 말은 벼락이 되어 사정없이 머리를 때렸다. 마침 여차하면 모조리 갖고 잠수하려던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뜨끔한 나는 버럭 소리 질렀다. -그거 영구 블록보다 더한 거잖아! 게임에 접속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영구 블록과 별반 차이가 없다. 허나 영구 블록은 최대 세 달의 블록 후면 재가입이 허용되기에(접속은 여전히 불가하다), 다시 엘-가드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다짐이 전제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가입 차단은 엘-가드에서 완전히 떠나라는 말이었다. 자신의 지문과 음성, 홍채가 시스템에서 차단된 이상 재가입은 물론 중복가입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남의 것을 도용해서 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니 어쩔 수없이 게임을 접어야만 했다. 총 아홉 번의 블록이나, 해킹범 등의 악질 유저가 아니라면 잘 내려지지 않는 처벌인데…… 이걸 단 한번에 내려버리겠다니! 정말 너무하잖아! 잔뜩 얼굴을 구기고 로그를 째렸지만, 그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소리 지르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만큼 저희에게 이번 일은 중요하고, 또한 긴박하니까요. 만약 엘-가드가 외부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서버 해킹(Hacking)을 의미합니다. 보안이 뚫린 상태에서 게임을 이어나갈 수 없어요. 정말 해커의 소행이라면 미르트는 몇 달이고 게임운행을 정지시켜 프로텍트를 강화할 것입니다.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라도 기간은 짧아져야만 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런 것이다. 그는 엘-가드의 운영자임과 동시에 미르트의 간부이니 자사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길게 분명하다. 그들에게 이번 사태는 최악의 손실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능성은 희박하다 보지만 새옹지마가 인생사 아니던가? 최악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그들도 급할 수밖에 없는 게다. 점점 사무적이 되어가는 로그에게 씁쓸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해킹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텐데요. 왜, 과거 기자회견 때 엘-가드의 인공지능은 예측 불가라면서요? 그러니 ‘마더리(Motherly)’에서 자의로 크레이트했을 수도 있다구요. 그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 아닌가요? 순간 로그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내가 엘-가드의 메인 시스템 마더리를 언급했기 때문일 것이다. 뭐, 중학생 때 견학 갔다가 우연히 주워들었다는 것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되겠지. 마더리에서 모든 정보가 처리된다고 했었지, 아마? 로그는 정색하고 말을 받았다. -마더리에서 만들어진 거라면 문제가 더 심각해지게 됩니다. 마더리가 미르트의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되니까요. 그렇게 되면 어떠한 문제가 발생해도 해결할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의식을 가진 마더리가 강제적으로 시스템 엑세스 루트를 차단시키기라도 하면 프로그램 수정이 불가능해지니 말입니다. 그런 경우, 저희로서는 그저 넋 놓고 지켜보는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파워를 내려버리면? -전원을 넣지 않은 상태에서 프로그램 수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더구나 다음번에 파워를 넣어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뿐입니다. 그것은 임시방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제가 수락할 경우에만 이루어지는 것이겠죠? -물론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대답하기 어려우시면 나중이라도 괜찮습니다. 잠깐 턱을 괴었다. 탐내지 않고 제때 반환하기만 한다면 나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실패해도 우승상품은 준다했으니. 한번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최근 흥미 있던 것이 얼마 있지 않던 만큼 이런 걸로 기분전환 해보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 뭐, 오히려 귀찮아질 거라 생각은 하지만― 오버 엘리트 스킬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그럼 마지막으로 남겨진 문제는……. -의뢰라고 하셨지요? 그럼 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아야겠군요. 급하다고 했으니 무기한은 당연히 아닐 거고. -내년 6월 이전까지로 하겠습니다. 제가 드리는 스킬 북은 400레벨부터 익힐 수 있도록 제한 걸려있으니 말입니다. 본초 유저들의 수준이 오른 2년 후에나 나왔어야할 스킬이니만큼 따르는 제한도 높아요. 카르마씨가 현재 397레벨이니 400레벨, 그리고 모든 스킬을 마스터하는 데까지의 시간을 포함한 겁니다. 지금이 7월 말이니 대략 잡아보면 1년인 셈이다. 급하다고 해서 빠듯하게 줄줄 알았는데 넉넉하군. -좋아요. 수락하지요. 완전하게 결심이 굳은 말에 로그는 빙긋이 웃으며 미르트의 인장이 찍힌 계약서를 내밀었다. 구두약속은 한쪽이 입 싹 닦으면 끝이니, 이런 것을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내용엔 지금까지 로그가 한 말이 빠짐없이 적혀있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안주면 노예’, ‘실은 거짓말이었음’등의 사기 글귀는 기입되어있지 않다. 확실한 계약서다. 꼼꼼하게 구석까지 살펴보고 서명한 뒤, 다시 한번 확인하여 만족한 웃음을 띠고 로그에게 계약서를 넘겼다. -카르마씨께는 계약서의 내용을 그대로 복사해서 발송해드리겠습니다. 게임 안에선 증거인멸이 되니 말입니다. 만약 계약서를 분실할 경우 당사자에게 가는 피해는 일체 책임지지 않습니다. 게임에서 백날 계약서를 나눠가져 봐야, 내가 가진 계약서는 저쪽에서 삭제하면 그만이었다. 이런 건 현실 쪽으로 이어지는 게 확실한 방편이다. -오늘부터 한달 이내로 편지가 오지 않을 경우 계약은 없던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그리고 보내실 때 반드시 확인증 넣어서 보내세요. 누구라도 미르트의 것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게. -물론입니다. 응당 필요한 것이지요. 그와 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서로 손을 마주잡아 악수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스킬 북에 대해서 대화하도록 하죠. -일단 카르마씨에게 걸맞은 화속성입니다. 그리고 스킬 북 이름은……. -------------------------------------------------------------------------- 류현 : 야! 너 이러다 정말 죽을지도 몰라! 작가 : 나도 몰라 이것아! 쓰다보니 자르게 된 걸 어쩌라고! 류현 : 명복을 빈다! 작가 : 도망가지 마! -------------------------------------------------------------------------- 로그.. 저인간 상당히 대책 안서는 인간이군요.. 아무리 급해도 그래도 그렇지 덥석 오버 엘리트 스킬을 -_-... 저거 하나만으로도 밸런스가 깨져버려! --------------------------------------------------------------------------- 서비스 페이지. 인물설정. 랭커 편. Rank; No. 1 - 데스티니 블레이드. Level : 알려진바 없음. 클래스 : 소드 엠페러. 주 스킬 : 엘리트급의 카오스 스킬. 실명 : 일리스티나 케트신 -> 티나 유저네임 : 준 (타인에겐 이 이름으로 불리기 싫어한다. 운영자들은 그녀를 ‘데블[Devil]’이라 한다) 길드 : 데스티니 제로. 탑 랭크에서도 1, 2위를 왔다갔다한다. ‘엑시큐서너executioner’들의 강함을 지님. 인원은 적으나 유저 하나하나가 일당백, 혹은 일기당천이어서 단연 독보적이다.(과장 좀 섞임) 나이 : 22세 성별 : 여자. 외모 : 백인. 그럭저럭 생김. 금발. 금색눈. 국적 : 영국인(꽤나 돈 있는 집안일 것으로 추정) 성격 : 제법 성깔있다. 평소에는 조용하다가도 일터지면 돌변하는 스타일. 키 : 165Cm 몸무게 : 50Kg (이건 별로 필요 없으려나) 특이사항 : 말수가 적다. 목소리가 중성적이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대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싫어한다(대인 공포증?). 검은색을 좋아하는 어둠의 자식. 가족사항 : 중상류층이다. 외동딸. 부모님 계심. 주변관계 : 현실세계, 가상세계 모두 친구가 적다. 말수가 적으니 당연. 류현을 라이벌로 생각한다 -> 싫어한다로 직결. Rank; No. 2 - 다크 스타. Level : 405. 클래스 : 블러드 마스터. 주 스킬 : 엘리트급의 스피리트 스킬(최근에 획득. 아직 3레벨까지밖에 익히지 못함). 실명 : 케레챠 와나슨 유저네임 : 필로니드 길드 : 디비젼 클랜(Division Clan). 제법 이름 날리는 길드이나 이후 데스티니 제로에 의해 강제해체(기습 길드전 패배. 길드전보다 사냥이 어울릴 듯)된다. 성별 : 남자. 나이 : 32세. 외모 : 헬스 다녀서 제법 탄탄한 몸을 지님. 조금 못생김[…]. 주름살 많음. 짧은 턱수염이 있다. 주제에 염색해서 헤어는 알록달록. 국적 : 러시아인 성격 : ‘개’다. 다혈질이며 마음에 안 들면 힘부터 쓰려는 경향이 짙다. 적을 잘 만든다. 현실에서는 용케 평정을 유지함. 키 : 170Cm 몸무게 : 60Kg 특이사항 : 준과 만만치 않을 만큼 검은색을 즐김. 정신분열증이 있어 가끔 미친다. 허나 현실에선 가족의 존재로 제정신을 유지하는 중. 악당 스타일. ‘크하하’, ‘큭큭’ 웃는 것을 선호. 가족사항 : 운 좋게 결혼했음. 5살난 귀여운 아들이 있다(어떻게 나왔는지 굉장히 궁금하다). 주변관계 : 류현에게 PK당하여 극도로 저주한다. 류현의 집요한 공격으로 게임 접게 된다.(불쌍하게도...) 이외에도 23명이 더 있으나 -_-... 너무 많아서 패스..(다 등장시킬 것도 아닌데 괜히 설정잡았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Level 8. 교차(交叉). (8) “루인 스킬 북(Ruin Skill Book), 이라고 했었나?”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파멸이라……. 너무 거창한 이름이잖아. 루인 스킬이 어떠한 것인지는 모른다. 우선 400레벨이 되어야만 로그가 부탁한 것을 이행하는데 발판이 다져지는 셈이다. 그전까지는 그저 레벨 업에만 충실해져야 했다. 로브 속에서 책을 꺼내 가는 눈매로 직시했다. 보통 스킬 북들이 교과서만한 크기였는데 비하여 이것은 고작 손바닥마한 크기다. 거기다 단순하게 가죽표지위에 스킬 이름만 써놓았던 것들과는 달리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오버 엘리트랍시고 티내는 걸까? 보관하는데 편해서 좋기는 하다만 막상 새로운 스타일의 스킬 북을 접하니 기분이 묘하다. 영 스킬 북처럼 보이지 않는다, 랄까. 프로얀을 보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엘-가드가 봉인된 상태라는 것이다. 봉인진의 존재가 그 의견을 뒷받침해주니 반박의 여지 또한 없다. 실 스톤도 없이 무슨 수로 봉인진이 유지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엘-가드에 뭔가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정말 정체가 뭘까? 이 엘레멘탈 가드. 하아, 그보다 나머지 것들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거야? 일단 오버 엘리트 스킬의 메리트에 꿀떡 넘어가 수락하기는 했지만서도……. 찾지 못하면 일장춘몽으로 전락해버리는 꼴이잖아. 도로 회수해간다고 했으니까. 뭐, 아직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먼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는 건 너무 바보 같은 짓인가? 에이, 아무렴 어때. 때 되면 다 알아서 되겠지. 지금은 레벱 업에 신경 쓸 때잖아. 또한 아직까지 편지도 오지 않았고. 1주일 정도 남았으니까 좀 더 기다려봐야겠다. 루인 스킬 북을 도로 품속에 갈무리하고 기지개를 켰다. 시원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한 번 더 프로얀과 스킬 북을 확인해보고 떨어져있는 아이템들을 마저 회수했다. 그렇게나 치웠는데 아직도 제법 많은 수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저거 어째 문 아트만(Moon Atman : 달의 영혼. 귀걸이로서 INT, MEN +10)같이 생겼다?” “얼레? 윈드 암릿(Wind Armlet : 바람의 팔찌. AGL +7, 헤이스트)이잖아?” “저것은…….” 가방을 뒤질 때부터 날 주시해왔던 유저들은, 가방 속으로 사라지는 각각의 아이템들의 실체를 꿰뚫어보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힐끔 살펴보고 히죽 웃었다. 그들의 시선은 두 가지로 분류가 가능했다. ‘고수다!’ 경외심이 가득한 눈을 가진 이들과. ‘보물창고다!’ 탐욕에 먹혀 희번덕거리는 눈을 가진 이들. 이거나 저거나 영 성가신 상황이었다. 전자에 해당하는 유저들은 뭐하나 얻어 보겠다는 심산으로 들러붙을 게 뻔하고, 후자에 해당하는 유저들은 아이템을 노리고 접근할 게 분명한 까닭이다. 아무래도 볼일 끝나는 즉시 자리를 떠야할 것 같은데……. 약속의 증표를 찾음으로서 의기소침에서 벗어난 나는 당당히 가슴을 펴고 NPC양에게 증포를 내밀었다. 만약 이것마저 증표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주저 없이 게임 접어버린다. 수정을 받아든 그녀는 재차 안경을 고쳐 쓰고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던젼 이벤트의 클리어 아이템, 약속의 증표로군요. 열 번째로 통과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는 그녀. 즈응―. 선반 위에 ‘디바인 스킬(Divine Skill)'이란 이름의 책 한권이 나타난다. 성직자 전용 유니크 스킬이었다. 뭐, 딱히 해당 클래스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관련 없는 계열의 스킬끼리는 플러스요소가 없으니 성직자 전용이라 불리는 것이다. “오호라.” 휘파람을 불어보고 책을 펴들었다. 해독불능의 지렁이 문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때마침 필요한 스킬이었는데 잘된 일이다. 이제 은현도 세인트가 될 때가 된 것이다. 만년 프리스트로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전에 레어 스킬을 구해 비숍이 되어야겠지만 그쯤은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유니크 스킬이지. 언제나 수량 부족에 시달리니. 어쨌든 유니크 스킬도 구했겠다, 이참에 세인트로 전직이나 시켜줘야겠다. 편지 오면 로그의 의뢰도 같이 이행하면서. 어차피 가족이니 숨길게 뭐가 있겠나. “아, 그러고 보니 스킬 북인지 뭔지 확인 불가의 요상한 책 한권도 뱅크(Bank)에 보관되어 있었나?” 동생 녀석 전직시켜줄 것을 생각하니 문득 다른 부분에까지 생각이 닿는다. 뱅크는 의미그대로 은행, 즉 보관소의 개념이다. 다른 게 있다면 돈뿐만이 아니라 아이템도 보관해준다는 점이다. 개인이 아니라 기관의 관리이기 때문에 도둑맞은 염려도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저들은 되도록이면 아이템을 은행에 맡기려하지 않았다. 렌스야 이자가 붙으니 상관없지만, 아이템은 아까운 돈만 축내는 탓이다. 나중에 찾을 때 보관기일 만큼에 해당하는 보관료를 지불해야하는데 그게 만만치가 않은 것이다. 일주일만 맡겨도 700렌스는 가볍게 깨지니 애용할 턱이 없지. 이 또한 하나만을 맡겼을 경우에다. 유저들이 달랑 하나만 맡길 리가 있겠는가? 아무리 적어도 네다섯 개는 맡겨놓는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지불해야하는 돈도 배로 늘어나고야 만다. 이 때문에 유저들은 각자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아이템만을 맡기고, 되도록 다른 것들은 개인의 선에서 처리하는 실세였다. 뭐, 그건 어쨌든 잔머리없는 유저들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고, 나같이 잔머리가 뛰어난 이들은 무리 없이 애용하는 중이다. 자, 생각을 해보자. 내 수중에 목걸이가 세 개 있다. 나는 그것을 뱅크에 맡길 생각이다. 각자 따로 맡기면 세배의 보관료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이때 이 세 개를 하나로 인식하게끔 만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하나에 해당하는 보관료만 내면 그만인 셈이다. 보관료는 아이템 개수와 기일에 비례하여 계산되니까. 때문에 여러 개를 하나로 만들기만 하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문제. 무슨 수로 여러 개를 하나로 만드느냐? 이에 대한 대답은 통쾌하고도 간단명료하다. 가방이나 상자는 그냥 있는 아이템이 아닌 것이다! 모두모두 한데모아 가방채로 맡겨버리면 그만이었다. 속에 아무리 많은 아이템이 들어있다 한들 결국엔 가방 하나만 아이템으로 인식되는 거라고. 정말 기상천외한 방법이 아닌가? 나는 몇 개의 아이템을 그런 방법으로 뱅크에 넣어두었다. 드래곤 스케일, 드래곤 티, 용도 불명의 거부감 느껴지는 검은 책이 그것! 비늘과 어금니가 미스릴에 버금가는 강도를 자랑하는 제련아이템이어서 일부러 보관시킨 것이다. 저택에 갖다놓았다간 화청 그 인간이 슬쩍해갈 것이 뻔하니까. “흥, 내가 미쳤냐? 그 귀한 것을 눈뜨고 빼앗기게?” 내 성격상으로 거저 주는 것은 절대 무리지. 그나저나 생각난 김에 그 책이나 빼올 겸 뱅크에 다녀오는 것도 괜찮겠는걸. 그 책이 뭔지 한번 알아봐야겠어. 스킬 북을 가방 속에 갈무리해두고 스테이터스까지 확인해본 나는 만면 한가득 만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약속대로 모든 능력치가 50포인트 상승해 있었던 것이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동자를 불태웠다. 데스티니 블레이드! 조금만 기라리라고. 400레벨 되는 즉시 루인 스킬을 익혀 박살내줄 테니까! 머리 쪽의 나사가 빠진 행색으로 멀거니 서있던 유저들. 작아졌던 소동이 다시 커지기 시작한다. 내가 스킬 북을 받았기 때문이다. “스킬 북? 어째서 스킬 북이냐?” “스킬 북이 상품인 이벤트는 근래에 없었던 걸로 기억하―.” 잠깐 묘한 정적이 흐른다. 그리고 잠시 후, 유저들은 협회가 한차례 뒤흔들릴 정도의 고함을 토해냈다. “던젼 이벤트!!” 훗, 이제야 알아채다니. 오늘은 상당히 머리가 굳은 유저들만 모여 있는 걸까나? 유저들은 탐욕이 가득한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다. 낮게 가라앉아 일말의 소음 없이 조용한 분위기는 마치 폭풍전야를 방불케 한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는 조금 긴장한 상태. 나는 슬그머니 망토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포켓에서 반지 크기의 아이템 두개를 꺼냈다. “프로텍트 링이다! 해븐 아이(Heaven Eye)는 덤으로!” “우와아앗―!” 힘껏 외치며 인파의 중앙으로 아이템을 던지자 뜨거운 함성을 폭발시키며 그쪽으로 밀려가는 유저들. 마나 +10%, LUK +10포인트의 옵션이 달린 해븐 아이와, 세비치드가 빌려준 프로텍트링이 유니크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이 뒤집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허나 말했다시피 내가 미쳤는가, 그 귀한 것들을 뿌리고 있게? 하물며 프로텍트 링이 내 소유가 아님에야 함부로 다룰 이유가 없는 거다, 구석으로 유유히 발걸음을 옮기며 안을 살폈다. 건물 중심부에서 연속적으로 빛의 구가 떠오른다. 수많은 유저들에게 어쩔 수없이 밟혀죽는 걸까, 아니면 PK를 당하는 걸까? 아무튼 영문도 모른 채 봉변당한 유저들, 정말 불쌍하다. 고작 저급의 루비 두개에 의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마나 분노할까? 모르긴 몰라도 한동안 화병으로 드러눕지만 않는다면 다행일 터다. “으아악!” “끄아!” 아직도 아이템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이제는 스킬 남발까지 거침없이 퍼붓는 유저들을 보며 고소를 머금었다. 후후, 그런 의미 없는 배틀로얄, 열심히 해보라고. 최후의 승자마저도 피를 토하며 절규할 싸움이 될 테니까! “하하하하!” 가방을 단단히 둘러매고 유쾌한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로그아웃으로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 된 이벤트 협회를 벗어났다. 재접속하면 중앙광장에서 스타트 될 것이리라. -------------------------------------------------------------------------- 스킬 북 이름 모집합니다. 루인 스킬 대신 멋진 뜻, 혹은 발음을 가진(그래도 뜻은 파괴나 그런 쪽으로 돌아가야합니다) 이름을 알려주세요. 없으면 -_-; 하는 수없이 이걸로 몰고가는 수밖에...[책임감좀 가져!] Level 8. 교차(交叉). (9) “그, 그만둬!” 와장창! 검을 벨 때마다 길드 내부의 것들이 박살난다. 로비의 장식선반장이 내려앉고 장식되었던 도자기들이 추락하여 요란한 소리와 동반하며 깨져나간다. 거실장도 잘려나가, 예의 함께 깨진 선홍빛 와인(Wine)이 융단을 적신다. 이미 로비 안은 아수라장으로 탈바꿈 된 상태. 막아보겠답시고 겁도 없이 나선 이들은 간신히 익스펠 되는 것을 면하고 바닥에 널브러져있으며(다시 말해 스턴), 시선이 닿는 저편에선 몰려나온 유저들이 안절부절 지켜보기만 한다. 흐흐흐, 은근한 웃음소리를 내며, 에라~ 신났다, 더욱 로비를 박살내는 나. 마침 테두리가 황금월계관모양의 전신 거울을 발견하고 오러를 실은 검을 대각선으로 그어 내린다. 슥―. 소리 없이 절단되어 시끄럽게 깨지는 거울. 제법 비싸 보이는데 얼마나 하려나? 에이, 아무렴 어떠랴. 깨지던 녹던 나랑 상관도 없는데.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빨리 길드 마스터 대령시켜!” 검을 느슨하게 늘어트리고,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뜨거운 전우애를 확인하는 유저들을 향해 일갈했다. 그러자 그들이 독살스러운 기운을 사방으로 퍼트린다. “언제 그딴 말을 했냐?! 용건도 말 하지 않아놓고 다짜고짜 검을 휘두른 주제에!” 그러고 보니 길드 내에 들어오자마자 검을 뽑았던 듯도 하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사소한 건 일일이 따지지 말아줬으면 해. 그러면 인생사는 게 고달파지니까. “아, 그랬나? 어쨌든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된 거 아니냐. 자자, 그럼 길드 마스터 데리고 와!” 쓰러져 기우뚱한 테이블을 걷어찼다. 시원한 소리를 내며 조각조가 부서지는 나무판자. 문득, 술 마시고 깽판부리는 주정뱅이가 이럴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한낮의 고주망태, 인사불성의 주정뱅이! 정보길드에 난입하여 무차별 스킬을 날렸다한다! 긴급히 출동한 도시 치안대에 금방 붙잡혀 한 달간 계정이 블록 되었다고! “…….” 얼레, 너무 그럴싸한 전개잖아? 무섭군. 너무 무서워. 한달 계정 블록이라니! 벨벳소파를 베어내려는 자세 그대로 멈추고, 슬그머니 자세를 풀어 잔뜩 움츠러든 유저들에게 천진난만하게 말한다. “내 마음 알지?” “몰라! 그딴 거!” 쳇, 융통성이라고는 깨알만큼도 없는 이들일세.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그러니까 손님이 왔으면 알아서 제꺽제꺽 맞이해야 될 거 아냐? 꼴에 이름 있는 길드랍시고 생색내는 거냐? 이를 갈아대면서도 함부로 공격을 퍼붓지 못하는 길드원들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들이 뭔 잘못이 있겠는가? 잘못이라면 여전히 나타나지 않는 길드 마스터 ‘스타이너’ 녀석의 잘못이지. 자식이 형님이 왔으면 알아서 뫼셔야 할 거 아냐. 어딜 싸돌아다니느라 이런 소동이 벌어졌는데도 잠잠해? 뱅크에서 할일 다 마친 이후 찾은 곳은 ‘인포 길드(Info Guild)’였다. 등급은 높지 않지만 뛰어난 정보 수집율로 유저들에게 신임을 받는 정보길드였다. 내가 하필이면 트렌으로 온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인포 길드는 트렌에 위치한 것이다. 스타이너의 실명은 서민주로 동갑내기 중학교 동창이다. 당시 다른 학교 쓸어버리는데 힘을 보태주었던 주먹친구이기도하다 민주가 이끌고 있는 인포 길드는 나와 어느 정도의 연이 닿아있다. 내 지원금 아래 창설된 길드였으니까. 그러니까, 중3학년 강제전학직전에, 녀석의 부탁에 따라 나는 길드 창설에 관한 자금을 모조리 대주었었다. 어지간한 중소길드는 충분히 만들 만한 금액이었다. 반대로 내 피 같은 돈은 그만큼 뜯겨나간 것이 되고……. 여하튼 길드스톤만 없다뿐이지, 한마디로 인포길드는 내 길드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물론 예전에 지원금에 이자까지 붙여 싹싹 뜯은 기점으로 그런 관계는 청산되었지만.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시끄러워―, 켁!? 폭격이라도 맞았냐? 로비 왜 저래!” 그때 경악에 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자동적으로 일동의 시선이 2층 계단으로 이동된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로비를 가리키며 눈을 부릅뜬 한 청년. 나는 그가 누군지를 떠올리고 반갑게 두 손을 흔들었다. “야호! 민주! 형님 오셨다!” 깜찍 발랄한 외침에 나를 돌아보고 화들짝 놀라는 민주. 다른 의미로 눈을 크게 뜨고 만면에 반가움을 표했다. “우와아, 류현이잖아? 살아있었냐?! 정말 오랜만이야! 반가워! ―라고 할줄 알았냐, 이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이딴 행패를 부려?! 아주 쑥대밭을 만들어 노셨어! 치안대에 넘겨버린다!” 녀석은 성큼성큼 걸어와 코앞에서 씩씩거렸다. 나는 예상치 못한 냉대에 한껏 상처받은 얼굴로 흐느끼며 구석의 유저들을 가리켰다. “흑흑, 나는 피해자야……. 로비를 부슨 것은 네 부하들이라고! 억울해!” “정말이냐?” “응!”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크게 끄덕여보이자, 민주는 대번에 안색을 죽이고 유저들을 노려보았다. “너희들! 우대고객을 어떻게 대하는 거냐아!!” 삿대질까지 겻들이고 침을 튀기는 민주를 옆에서 바라보며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대체 내 연기력의 한계는 어디란 말인가! 길드원들은 날 향해 이를 갈다가, 억울함을 이루어 말할 데가 없는 얼굴로 민주에게 항변했다. “억울한 건 우리야, 마스터! 저놈이 불문곡직하고 검부터 휘둘렀다고! 오히려 이쪽 피해가 막중해! 주변에 쓰러져있는 녀석들 안보여? 눈이 있으면 확인 좀 해!” “헤에……?” 그들의 가슴 절절한 호소에 민주는 재차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으음…….” 그리고 그제야 상황이해를 했던지 무겁게 침음하고 도끼눈으로 내 육신을 사정없이 도끼질한다. “이렇다고 하는군, 친구. 어떻게 생각하시나?” 웃고 있지만 푸들푸들 경련하고 힘줄이 돋아난 안면은 녀석의 분노를 충분히 대변해주는 것이었다. 이거, 자칫 잘못했다간 치안대에 넘겨질 신세를 면할 수 없겠는걸. 블록으로 접속을 못해 우울증이 걸려버린 처량한 모습.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마운트 고글을 바라보며 훌쩍이는 나를 떠올려보고, 망설임 없이 케이프(Cape : 소매 없는 로브) 속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민주는 내가 폭탄이라도 꺼내려 한다고 생각했는지 흠칫 뒷걸음질 쳤지만, 이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침을 흘려야만 했다. 다름이 아니라 꺼낸 것이 ‘플래티넘 링(Platinum Ring)'이라는 유니크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말없이 민주의 손목을 끌어당겨 백금 반지를 꼭 쥐어주었다. 한순간 그의 눈동자에 온갖 희락과 광기가 엿보인 것은 착각이었을까? 모를 일이었다. “이야아~ 마침 로비 인테리어를 다른 테마로 꾸며 볼까 했는데 잘되었어! 길드의 수고를 덜어주기까지 하다니! 정말 고마워! 유용하게 쓰겠네, 친구!” “별말씀을.” 불만투성이의 태도를 반전시켜 사근사근해지다 못해 비굴하기까지 한 녀석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새삼 재물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러니 돈의 힘이 무섭다는 말이 나도는 거지. 내 어깨에 묻은 먼지까지 탈탈 털어주는 길드 마스터의 모습에 인포 길드 유저들은 애처로운 규탄을 터트렸다. “마스터어~!” 이후, 길드원들에게 로비 정리를 맡긴 민주는 나를 3층의 귀빈실에 응접했다. 미리 밝힌바 내가 우대고객이기 때문이다. 나야 무리 없이 대화만 가능한 곳이면 어디라도 괜찮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조용한 귀빈실이 낫지 않겠는가. 사내놈과 분위기 타령하는 건 굉장히 짜증나는 일이지만. -------------------------------------------------------------------------- 스타이너 캐릭터 만들어 주신분 ;ㅅ; (너무 오래된.. 예전에 등장하고 싶은 사람 모집할 때..가.. 3월 중순이었군요 -_-;; 그때 계약 엘-가드 맺었는데.. 난 지금까지 뭐한 것이란 말인가...) 감사해용 ;ㅅ; 그리고 미안해용 ;ㅅ; 캐릭터 관계와 성격을 바꿔버렸어용 ;ㅅ; 흑흑----- 나는 자연스럽게 실내를 둘러보았다. 금으로 장식된 타일 벽난로, 화려하고 값진 문설주, 석고로 세공된 예술적인 천장의 데코레이션이 눈부시다. 벽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의사 가셰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고풍스러운 이태리 가구도 보인다. 벽을 장식한 태피스트리는 장식품 이상의 훌륭한 효과를 내고, 밖을 내려다볼 수 있는 창문의 격자는 직선과 곡선을 함께 사용하여 훨씬 은은하고 부드러운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역시 귀빈실이라고 해야 할까, 보통의 응접실과는 다른 고급스러움이 맴돌고 있었다. 인테리어에 많은 돈을 투자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일 것이다. 정보 길드는 고객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을 중요시하기에 길드 내부 인테리어에 신경을 쏟는 추세라지만……. 이건 확실히 무리했는데. 돈 많이 벌었다고 자랑하는 거냐? 주위를 꼼꼼히 둘러보고 민주에게 물었다. “테마는 중세 귀족집의 방, 이냐?” “안목이 대단하네. 확실하게 맞췄어. 맞춘 건 네가 처음이다. 괜찮아 보이냐?” 벽장에서 비스킷바구니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 찻잔을 꺼내는 민주. 나는 녀석이 하는 짓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아, 물론. 조금 부족한 면이 있어 이 예술가의 혼이 불타는 중이지만.” “예술가는 얼어 죽을. 보나마나 엽기적인 것만 떠올렸을 테지.” “네가 진정한 미를 몰라. 시체의 미학이 얼마나 멋있는데? 목 없는 시체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맞물려 자아내는 그로테스크함. 끝내주는군.” 찡긋 윙크하며 엄지손가락을 들자 그는 인상을 쓰고 으르렁거린다. “너희 집에다 고양이 시체 걸어놓는다.” “정중히 사양하마.” “그러니까 남의 집에 시체 놓자는 말은 하지 말라고.” 투덜대며 차를 따르는 민주. 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을 받아 앞에 내려놓고 녀석에게 물었다. “노력하지. 그런 그렇고, 다른 녀석들 소식은 알고 있냐?” 민주는 소파에 앉아 주변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글쎄. 요즘 연락이 없는 상태니까. 서로가 연락했다간 다시 주먹을 쥐게 될지도 모르니 기피하는 거겠지. 아마 네가 강제 전학 당한 뒤부터였을 걸? 이러나저러나 넌 헤드(Head)였고, 머리를 잃은 우리들은 도무지 싸우는데 흥미를 느끼지 못했거든. 뭐, 몇 명은 고등학교 진학 후 다시 활동하는 듯도 하지만. 작년 미르고에 괴물하나가 서식하고 있다는 소문 외엔 들은 게 없으니 너도 조용히 지내는 것 같고.” “많이, 조사했네.” 민주는 애환이 담긴 작은 미소를 띠며 찻잔을 입에 대었다. 나는 잔을 코밑으로 가져와 숨을 삼켰다. 그윽한 향이 풍긴다. “내 분야였잖아, 정보 수집은.” 그랬었지…….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학교 시절, 정보 수집은 녀석이 담당이었다. 그 외에도 머리 쓰는 일은 전부 민주가 도맡아 했다. 그래, 녀석에겐 차라리 머리 쓰는 게 어울렸다. 정보길드를 택한 것도 그것의 연장선에 있는 거겠지. 자신의 적성대로 길을 잡은 걸까. 잘된 일이었다. 그럼 나도 내 할일을 찾아볼까. 잔을 내려놓고 민주를 똑바로 직시했다. 녀석은 잔을 왼쪽으로 밀어놓고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그럼 의뢰하마.” 그렇게 말하고 품속에서 ‘프로얀’을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Level 10. 교차. “뭐야……, 이건?” 엘-가드 프로얀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는 민주다. 역시 알지 못하는군. 이상할 것도 없었다. 이것을 알아보면 로그는 물론이거니와 나도 따로 고생할 필요가 없을 테지만, 운영자도 모르는 것을 녀석이 알 턱은 없는 것이다. “실 스톤이냐?” 확실히 크기나 색이 씰 스톤과 동일하기는 하다. 하지만 씰 스톤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지. 그저 씰 스톤이면 오죽 좋겠냐. 나는 대답하지 않고 프로얀을 갈무리했다. 민주가 재촉하듯 묻는다. “뭐냐니까?” “정 궁금하면 정보를 사.” “집어치워라.” 여유롭게 홍차를 즐기며 눈웃음 짓고 하는 대답에, 민주는 당장 궁금증을 접었다. 사고 싶을 정도로 궁금하지 않다는 걸까? 들으면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정보가 될 텐데 말이다. 고작 돈 몇 푼 아껴보자고 거금을 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짓을 한 그를 보고 작게 혀를 찼다. 이후 잠깐 동안의 티타임을 갖고 자세를 갖춘 우리. 녀석의 얼굴을 살피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보가 필요 와서 왔다.” “무슨 일로 왔……, 먼저 대답하지 마!” 질문을 앞서서 냉큼 뱉어낸 대답에, 민주는 도끼눈이 되어 버럭 소리 지른다. 질문을 예상하고 미리 대답하는 건 신기하지 않나? 히죽 웃어주고 녀석의 턱을 살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고.” “어려운 의뢰, 보다 미리 대답하지 말라니까!” “쩝. 네가 워낙 단순해서 그런다고.”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야!!” 괜히 열 받아서 빨개진 얼굴로 씩씩대는 민주. 한번만 더했다간 당장 내쫓을 기세였다. 표독스러운 시선을 피하고 휘파람을 불며 바구니에 담겨있는 쿠키에 손을 뻗었다. 민주는 딴청부리듯 쿠키 먹는 것에만 열중해 있는 나를 뜨겁게 노려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상당한 기운 실려 있는 도전적인 말이었다. “뭘 의뢰하려고? 엉뚱한 거면 곧장 축객당할 줄 알아라!” “야, 장난 좀 쳤기로서니 간만에 만난 친구에게 그토록 가시 돋친 태도는 좋지 않다고. 더구나 난 우대고객! 이 이상의 무례함은 길드의 명성을 갉아먹는데 일조할 수 있음을 명심해.” 하지만 가만히 들어줄 나도 아니다. 민주는, 우대고객까지 거들먹거리며 일침을 가하자 정색하며 비굴한 미소를 흘렸다. ------------------------------------------------------------------------------- 컥! 엄청 짧네요 =ㅅ=;; 그, 그래도 어쩔수 없어요 =ㅅ=; 쓸 시간이 없었으니 =ㅅ=;; 으흠.. 제피로스 테일즈... 어여 쓰고 싶네요 =ㅅ=;; 엘-가 빨리 완결내야지... (이봐! 마법검은? 퀘스트는? 엘 바이스는?!!!!) 몰라! ******요청이 있어서 올립니다. ******줄거리 엘레멘탈 가드의 세계에서 PK를 자행하며 헬 마스터로 군림하던 그였지만 몇 개월간 정체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서 서서히 잊혀져간다. 그러던 어느 날, 이름만 알려진 드래곤을 사냥하여 다시금 엘-가드에 위명을 떨친다. 그리고 드래곤 슬레이어를 획득함으로서 더 강해지는 그. 그러던 도중 진윤의 호출. 방과후 그에게 찾아간 류현은 한가지 부탁을 받는다. 길드전 참전 요청이었다. 귀가한 그는 홈페이지에 올라온 동영상을 확인하고 게임에 접속하여 진윤과 약속한 트렌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그 트렌에 도착하기 전에 들었던 친동생의 갑작스러운 고백으로 심란스러워하다 마음을 굳게 잡는다. 이후의 길드전. 류현은 길드전에서 유나와 닮은 세영을 보고 경악하나, 세영은 그를 차갑게 대할 뿐이다. 다음날. 일전에 공지한대로 전학생이 오고, 그 전학생이 세영인 바람에 류현은 재차 경악한다. 몇 달 뒤의 듀얼 랠리. 막강한 라이벌 샤프를 만나고 첫 게임오버를 통해 류현은 한층 더 강해지게 된다. 몇 주 뒤 난생처음 감동적인 생일잔치를 류현은 그때부터 세영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다. 던젼 이벤트에 참가한 류현은 처음 보는 유저들과 파티를 맺어 열사의 사성으로 떠난다. 성 안에서 나이트메어의 이벤트 방해로 분노한 류현은 예전으로 돌아가 잔인하게 유저들을 학살한다. 그리고 데스티니 블레이드를 만난다. 다음날 학교에서 수희와의 대화를 통해 약속을 잡는 류현. 점심시간 세영과 대화를 나누고 씁쓸하게 집으로 돌아와 게임에 접속한다. 이벤트 협회에 찾아가 이벤트 상품을 받으며 듀얼 랠리 이후의 일을 회상해본 그는 정보 길드를 찾아가 몇 가지 의뢰를 한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 친구? 내 친히 안마해 드리오리다.” 저절로 한 쪽 벽면에 시선이 닿는다. 의사 가셰의 초상화. “요즘 돈이 없어서 그런데 저거나 좀 줘라.” 그리고 초상화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말하자 민주가 당장 이를 가는 것이었다. 장난에 의한 농담이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조금 심하게 요구했다는 생각은 든다. 어쨌든 현실은 물론이거니와 게임 내에서도 최고의 가격대를 구가하는 예술품이 아니던가. 유니크 스킬쯤은 너끈하게 살 수 있는 가치이니 민주의 저러한 반응도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대답 대신 서슬 같은 한기를 내뿜는 눈길로 날 난도질하는 민주를 보고, 머리를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조금 과한 요구였나? 농담은 아니었어. 미안해.” “농담이었으면 죽이려했다……가 아니라니까! 헷갈리게끔 교묘하게 말 섞지 말란 말이야!” 민주는 거침없이 말을 잇다가 버럭 성을 내었다. 용케 알아챘군. 증거 자료 마련해두려고 레코딩하고 있었는데. 조금만 더 자연스러웠으면 그대로 걸려들었을 것임을 생각하니 가슴이 쓰려왔지만, 후회하기엔 이미 계획이 무산된 상태여서 체념하고 앞쪽에 있는 도자기를 가리켰다. 물론 실상으로는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노리고 있다. 다음에 기회 보다가 다시 찔러야지. “그럼 저거라도 줘라.” “뭐, 저 정도면 충분히.” 민주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아쉽다는 얼굴은 하고 있지만, 미련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제길, 그리 손해보는 것은 아닌가보다. 길드 수리비의 거스름돈에 해당하는 금액만큼, 반드시 받아 챙기고 말리라! “저것도 추가.” 옆에 있는 도자기까지 추가시켰다. 그러자 민주는 뭔가 알았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이를 간다. “이런 치사한 자식……. 방금 네놈의 목적을 알아버렸다. 은근히 거스름돈을 원하는 거냐? 예나 지금이나 그 짜증나는 스타일은 여전하네.” “훗.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어리바리 한 건 여전하군. 너다워서 좋기는 하다만.” 나는 지지 않고 히죽거리며 놈의 말을 되받아쳤다. 민주는 인상 쓴 행색으로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욕이냐?” “이런, 이런. 호의에서 출발한 칭찬을 그런 식으로 곡해하면 곤란하지. 너다워서 어울린다고 했는데 어째서 욕이 되냐?” 둘둘 말린 채로 가운데에 금색 실이 묶여있는 그것은 계약서였다. 어떻게 품안에 있는 종이가 구겨지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민주는 이상할 거 없다는 듯 자연스러운 모양새로 계약서를 폈다. 예전, 로그가 주었던 계약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계약서다. 찍힌 인장이 미르트의 로고가 아니라 인포 길드의 마크인 점만 차치한다면. 민주는 종이에 몇 글자 끼적거리며 말했다. “그럼 꼴값 떠는 상대에게 ‘웃기고 있네’라고 말하는 것도 순수한 의미의 칭찬이냐? 세상에는 반어표현이라는 게 있다고. 아무튼 잡단은 그만두고 일에 대한 거나 말해봐. 나는 누구처럼 한가하지 않으니까.” 그 뒤 다 적었는지 펜과 함께 계약서를 스윽 밀어 넘기고 턱을 괸다. 나는 펜을 돌리며 계약서를 훑어보았다. 길드 이름 인포 길드, 길드마스터 스타이너, 계약자 스타이너, 의뢰내역 은 공란이고, 의뢰자에는 내 유저네임인가. 날짜는 2087년 8월 28일 오늘 맞고……. 의뢰자 란에 ‘카르마’를 기입하고 펜 뚜껑을 닫았다. 동의합니다― 라든지, 의뢰 수행 기간은 대화를 통해 잡아야 할 테니 비워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내일까지!’ 하고 으름장을 놓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하루아침에 우대 고객에서 불량 고객으로 전락하게 될 테니 자제했다. 그나저나 모르겠다. 누가 저 녀석 보다 한가하다는 것일까? 으음, 의문이로다. “음. 네게 비교당한 누군가가 심히 불쌍할 따름이다. 자체로도 한가함을 표명하는 녀석보다 더한 놈이라니…….” “얌마! 너를 가리키는 거야!” 그때 영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계약서를 도로 넘겨주는 날 보고, 민주가 흥분하여 삿대질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 왜이래, 이거. 나도 바쁜 몸이라고. 지금은 바쁜 시간 쪼개서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을 뿐이고. 너, 고마워해야 해.” “그러니까 그런 황송 망극한 짓거리는 해주지 않아도 되거든?” 펜을 잡은 민주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거의 차오른 것 같다. 두 번만 더하고 그만 접어야겠는데. “좋아, 좋아. 잡담은 이만하자. 친구 녀석 푸념 들어주는 시간은 이정도면 되겠지.” “적반하장도 유만분수지! 내가 할말이라고 그건!” “흥분은 몸에 해롭다네.” “내가 안하게 생겼냐?!” ‘이건 뭐야!?’라고 외치곤 계약서를 갈기갈기 찢더니, ‘크오오!’ 테이블을 쾅 내리치고 ‘우리얍!’ 뒤집어엎는 기광을 부리는 민주, 까지는 아니었지만……, 거참 시끄러운 자실일세. 중학교 때만해도 말수가 적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나? 고등학교 진학하고 나서 친구를 잘못사귄 게 분명해. “너 때문이야아!” 글쎄 시끄럽다니까. 귀찮다는 얼굴이 되어 눈썹을 찡그리고 녀석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럼 의뢰하마. 타깃은 데스티니 제로(Destiny Zero). 의뢰사항은 앞으로 있을 그들의 행적.” 진지한 어조로 의뢰를 한다. 여전히 가슴을 들썩이며 씩씩거리던 그는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턱을 괴며 무서운 속도로 얼굴을 굳힌다. “다시 말해봐. 타깃이 어디라고?” 영 모르겠다는 민주의 태도에, 나는 한자 한자를 각인시키듯, 또박또박 확실하게 말했다. “데스티니 제로, 라고 했어.” 그 말 한마디가 결빙주문이었는지 한순간에 쩡 얼어버리는 민주.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딱 잘라 거절했다. “불가.” “어째서?” 민주는 대뜸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미친 거야? 그들에게 관심 갖는 짓은 명백한 자살행위라고! 데스티니 제로의 뒷조사를 했다가 살아남은 길드는 한군데도 없었어!” 이 녀석, 뭔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하고 있다. 내 말의 뜻은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뭐, 데스티니 제로가 언급되었으니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운명을 없애다, 라는 뜻의 데스티니 제로(Destiny Zero). 누구나 보면 데스티니 제로를 운명을 이겨내는 것이라는 유창한 뜻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본래의 데스티니 제로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운명을 죽이다’, 즉 누군가를 죽여 하나의 운명을 없앤다는 섬뜩한 뜻이었다. 이면 속에 숨겨진 이중의 뜻을 지닌 것이 데스티니 제로인 것이다. 데스티니 제로는 데블이 이끄는 명실상부한 엘-가드 최강의 길드다. 길드원들 개개인이 트리플 마스터라는 속설이 나돌 정도이고, 은연중에 엘-가드의 중심이 되어 있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특히 데블을 보좌하는 열명의 ‘엑시큐서너(executioner)’들의 막강함은 대단하다. 예전 데스티니 제로의 정보를 캐내려했던 길드 랭크 6위의 ‘글로리 길드(Glory Guild)'를 엑시큐서너 열명이 몰락시켰다는 일화는 아직까지도 유명한 것이었다. 평소엔 조용하다가도 한번 움직였다하면 유저 수십 명은 우습게 죽어나가니, 민주가 재고 없이 거부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나는 검지를 흔들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건 나도 아는데, 내가 뒷조사하라고 했냐? 단지 행적을 알아보라고 했을 뿐이야. 그리고―” “똑같잖아! 인포 길드 말아먹을 일 있냐?! 절대 안돼!” 말허리를 자르고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홱 돌리는 민주에게 작은 짜증을 느꼈다. 글쎄 인포 길드엔 하등의 피해가 안가는 거라니까 그러네. “끝까지 들어. 네가 말한 것과 내가 말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표면상에 드러난 데스티니 제로의 정보를 원하는 것이니까. 깊게 파고들어갈 일이 아니라는 거지. 그저 그들이 움직였다는 것만을 알려주면 된다고.” 그제야 민주는 안심하고 뻣뻣하게 뭉쳤던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내게 물었다. “그 정도는 신경만 쓰면 너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거 아냐?” “그렇기는 한데 내겐 그것에 신경 쓸 시간적 여유가 없거든. 말했잖아. 나 바쁜 몸이라고.” 나는 나지막하게 투덜거렸다. 민주는 절대 믿지 못하겠다는 듯 기가 차다는 모습으로 혀를 찬다. ================================= 이야 =ㅅ=!! 오늘 많이도 썼네요 =ㅅ=!! 8장? 9장 =ㅅ=? 오호 9장 썼군요 =ㅅ=;; 오호호홋!! 하루만에 9장을 썼어! 썼다고! 이럴수가아!! (어제 쓴거까지 합하면 13장 ) 저, 그런데요. 저도 정말 연참해보고 싶거든요? 그런데 =ㅅ=;; 기회가 안되네요 =ㅅ=; 이제 수능도 얼마 안남았는데 컴터만 하고 있다고 =ㅅ=; 어머니께서 계속 구박하셔요 ㅠ.ㅠ 오늘 하루는 그래도 공부하는 척이라고 해봐야겠습니다. 13장 올리려면 20분은 족히 걸리니까(오타검사 한번 하고 올리는 본인)... 그랬다간 더욱 욕을 먹다 못해 바로 컴퓨터 정지령이 내려질지도 모릅니다 =ㅅ=;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소를 위해 대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오늘만 참으시길.. 아아 ... 계속 끄라고 구박하시네요 ㅠ.ㅠ 흐으윽 ㅠ.ㅠ 흐으윽 ㅠ.ㅠ 흐으윽 ㅠ.ㅠ 빨리 안꺼?! [알았어요! 끄면 될거 아니에요!] Level 10. 교차. (3) “하! 농담 아니었어?” “속고만 살았냐? 바쁜 이유는 그다지 말해줄 게 못되니 넘어가자.” 사실은 앞으로 바쁘게 될 예정이지만 그런 건 말해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공연히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서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 또한 이렇게 말함으로서 호소력도 갖게 만들고 말이다. 민주가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말했다. “그럼 이번엔 이쪽에서 질문. 이건 일 밖의 개인적인 질문임을 미리 시사해둔다. 괜찮지?”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지고 살았냐. 그냥 하면 하는 거지.” 정말이지 민주는 변한 것 같다. 허락이 다 뭔가, 예전에 이런 것 없이 내키는 대로 묻고 답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들도 그에 관해선 별다른 불쾌함이나 짜증을 표색하지 않고 그러려니 넘어갔는데 말이다. 내 경우엔 아직까지 그 버릇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고. “하하, 그랬었지. 그럼 물을게. 어째서 데스티니 제로의 정보를 원하는 거야?” 민주는 그렇게 말하며 눈에서 광채를 뿜어댔다. 녀석의 술수를 간파하는 것은 그 행동으로 충분했다. 정보를 날로 먹을 생각이라 이거지? 네 얼굴을 봐서라도 절대 무료 제공 같은 손해 보는 짓은 못하겠다. “입으로만 말하면 쓰나.” “이런 제기랄……. 약삭빠른 놈!” 공은 공이요, 사는 사인 법이다. 자리가 공석이니 만큼 이런 것들도 거래를 해줘야 예의가 아닐까라고 말하고 싶다. 뭐,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가끔은 공석과 사석을 따지고 싶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우연찮게 ‘그 때’가 지금이 된 것이고. 조금 조작된 성향이 짙기는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내가 사심 없다 생각하면 그걸로 그만인 것을. 돈주머니에서 큼지막한 사파이어 하나를 꺼내는 민주를 보고, 음흉한 미소를 출렁거렸다. 민주는 심히 질렸다는 표정으로 날 노려보다가 두 눈 꽉 감고 보석을 던진다. 결국엔 줄 거면서 마지못해 준다는 행동 따윈 하지 말라고! 그래도, 고품질의 사파이어여서 저절로 입이 찢어지려한다. 흐흐흐, 오늘 하루는 이걸로 흥청망청 놀아보자! 민주가 대답할 것을 종용했다. 나는 돈주머니에 보석을 넣어두었다. “데스티니 블레이드가 다크스타에게 선전포고를 했어.” “뭐? 언제?” 그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불어 펜을 들어 계약서 뒷면에 몇 자 기입하고 열렬한 자세로 청취에 임한다. 여간 귀가 솔깃해진 게 아닌 모양이다. 쯧, 수업시간에 지금의 반 정도만 되어봐라. 전교 1등은 따 놓은 당상일 게다. “민주 학생. 듣는 자세가 되어 있군요” 녀석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침을 튀겼다. “시대 지난 개그는 집어치우고 똑바로 대답이나 해. 언제야?” “개그인 걸 알아보았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난 성공한 거다.” “묻는 거에 대답이나 하라니까!!” 쳇, 이대로 째버릴까 보다. 괜한 말을 꺼냈다고 후회 막심해 하면서도 나는 꼬박꼬박 대답했다. “어제.” “어제였냐? 그거 너만 알고 있는 거야?” 정보에서 가장 중요하다 보는 것은 정확성과 시간이다. 시간이 오래 지난 정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때문에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정보길드에게 있어선 신속이 관건이었다. 신속하게 나서서 인포 길드원들이 유저들에게, ‘다크 스타와 데스티니 블레이드가 싸운다는 소문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니 정보길드를 찾아가 알아보자’라고 소문만 내주면 길드는 앉아서 돈을 벌수 있으니까. 모르는 사람이 많아야 돈이 더 들어오는 만큼 ‘빨라야 산다!’라는 좌우명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다. “아니. 안젤라, 튜아미스도 알고 있어.” 정확히는 아홉 명이 더 있지만 말하지 않았다. 너무 많으면 정보료가 싸지는 법이니 말이다. 이정도 거짓말은 필수적인 요소다. “안젤라와 튜아미스도 있었어?! 세상에나! 어디서 들은 거야?” “열사의 사성.” “너도 던젼 이벤트 참가했었냐? 아니, 이게 아니군. 아무튼 어째서?” “머저리 같은 다크 스타가 데스티니 블레이드에게 대놓고 욕했거든.” 열심히 손을 놀리며 글자를 적어나가던 민주가 어이없어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날 황당하게 쳐다보면 어쩌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그 머저리냐? “그거 정말 머저리네. 데스티니 블레이드가 어떤 유저인데 대놓고 욕을 한데? 디비젼 클랜(Division Clan)은 끝이로군. 누울 자리 봐가며 발을 뻗어야 할 거 아냐. 그럼 넌 어쩔 거냐? 그런 정보를 원한 걸 보면 뭔가 할 듯도 한데.” “하긴 뭘 해. 고래싸움에 끼어들었다간 내 연약한 새우등은 남아나질 않는다고. 나 같은 저렙 유저는 그냥 손가락 빨며 구경하는 수밖에.” “저렙 유저가 유니크 아이템을 길드 수리비로 줄 거라는 생각은 못하겠는데.” “모든 유저가 그런 것은 아니지. 항상 통념에서 벗어나는 이는 있기 마련이라고.” “그렇게까지 말하면 나도 할 말은 없고…….” 내가 데스티니 제로의 행적을 원하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그들이 움직이는 날이 디비젼 클랜의 마지막으로 기록될 터이니 팝콘 먹으며 구경할 생각이다. 그보다 더 깊게 파고 들어가자면 다크 스타를 게임 접도록 만든다는 것이 목적이랄까. 그 인간이랑 같은 게임을 한다는 자체가 내게는 치욕이다. 길드간의 마찰로 인하여 일어날 일이니 운영자 측에서도 아무 말 못하리라. 여기에 몰래 끼어들어 그 머저리만 처리하고 유유히 빠져나오면 그만이었다. 모든 내용을 기입했는지, 펜을 내려놓고 오른쪽 어깨를 붕붕 돌리고 있는 민주에게 지금까지 참아왔던 것에 대해 물었다. “어쩌자고 계약서 뒷면에다 낙서를 해? 그렇게 생각이 없냐?” “아아, 급해서 말이지. 그리고 뭐, 계약서쯤이야 남아도니 다시 하나 만들면 되는 거고 말이야.” “그래. 그럼 그래라…….” 민주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둘둘 말린 새 계약서를 꺼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게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의뢰를 하는 쪽은 나이고 민주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니, 계약서를 재작성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였다. 다시 하나의 계약서를 작성했다. 의뢰 완료 기한은 오늘부터 일주일 이내로 하고 서로 동의하였다. 그러자 두장이 되는 계약서. 새로 생긴 것을 챙기고 다른 한 가지를 더 추가시키려하는데, 갑자기 민주가 손바닥을 척 내미는 것이었다.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까닥거리는 민주의 손을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였다. “어쩌라는 거냐?” “착수금 및 정보료.” “으음…….” 언제나 그런 것이다. 정보를 원하면서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그게 악당이지. 나같이 정직하고 순진한 유저에겐 사기란 있을 수 없는 단어! ―이기는 한데 조금 찔리긴 한다. 나는 다시 프로얀을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민주는 프로얀을 곁눈질로 훔쳐보다가 인상을 일그러트린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돈 계산은 확실히 하자. 이런 싸구려 아이템은 절대 안돼.” 아무래도 착각한 듯싶다. “이것도 의뢰거든? 시답잖은 걱정은 하지 마. 나도 돈 계산은 확실히 해.” 그러니 거스름돈은 확실하게 챙겨갈 거라고. 초상화를 눈여겨두고, 씩 웃으며 가슴포켓에서 한 쌍의 귀고리를 꺼냈다. 그리고 바로 앞가지 밀어주자 눈을 부릅뜨고 쓰러지려하는 민주. “아쿠아 서클! 그것도 한 쌍?!” 나는 열화와도 같은 반응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Aqua Circle. 이어링에 달려 있는 보석이 굳어있는 물방울 같아 보이는 이것은, 유니크에서도 상급으로 취급되는 아이템이다. 한 쌍이 모여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각각으로도 충분히 유니크 아이템이 될 자격이 있었다. CON, MEN, INT +4 인데, 한 쌍을 착용할 시엔 올 스테이터스 +5로 뛰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희귀해서 좀처럼 한 쌍이 이루어지지 않아 보너스 수치를 받은 이는 전무하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 아마도 말이다. 유저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뿐 실상으로는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 내 경우엔 어제 PK에서 나머지 하나를 얻는 바람에 한 쌍을 이룰 수 있었다. 솔직히 내가 쓰고 싶지만 민주에 대한 선물이기도 하고, 또한……. 볼을 긁적이며 겸연쩍게 웃자 민주는 믿을 수 없다는 모양새가 되어 몇 번이고 제 눈을 비볐다. “정말 이런 걸 의뢰비로 주는 거냐?” “물론이지. 왜, 꿈처럼 느껴지냐? 한대 쳐줘?” “아하하……. 아니, 거절할게. 유니크 아이템을 하루 만에 세 개나 얻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런 걸 덥석 내주다니, 너 엄청난 갑부였구나? 하긴, 길드 창설금 대줄 때부터 예상은 했다만.” 전부터 착각을 심하게 하고 있는 민주다. 이정도면 가히 망상증이리라. 나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녀석의 반응을 구경했다. “아직 좋아하긴 이르지. 의뢰를 수행하지 못했을 경우엔 그보다 더한 것을 위약금으로 내놓아야 하니깐. 거기다 한 가지 의뢰가 더 있어.” “어억!” 이제야 눈치를 챘는지 거품을 물고 기절하려하는 민주다. 내가 노린 것이 이것이다. 길드 규약에 의거하여, 어떠한 길드라도 의뢰완료를 실패했을 경우 의뢰금의 세배에 달하는 위약금을 물어여했다. 지불 않고 도주하면 사기거래가 적용되어 한달 블록과 동시에 모든 아이템을 몰수해 신고자에게 전한다. 사기 같은 것은 뿌리 채 뽑으려하는 미르트여서 제재가 가혹한 것이다. 덕분에 베타테스트 시절 성행하던 사기가 지금은 고개를 숙인 상태고 말이다. 물론 이를 노리고 허위신고를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허위신고임이 밝혀질 시엔 모함 죄가 추가되어 영구블록이어서 지금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내가 아쿠아 루프를 준 이유는 위약금을 뜯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를 좀 더 분발하게 만들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렇게 하면 녀석도 최선을 다해 정보를 수집하겠지. 정신적인 압박감을 주는 것은 조금 미안하지만 말이다. 지금은 일단 밝히지 않을 생각이다. 단시간 공황에 빠져있던 민주는 가슴에 손을 얹고 천천히 쓸어내렸다. “두 번째 의뢰는 뭐야? 그 싸구려 수정구로 뭘 하려고?” 이제는 갈대로 가자는 것인지, 그는 퉁명스러운 눈초리로 프로얀을 노려보며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프로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민주에게 말해도 되나 모르겠다. 일단은 나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했는데 말이다. ‘소문이 퍼지면 곤란해집니다. 이번 일은 반드시 함구해 주십시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만에 하나 엘-가드에 대한 소문이 퍼진다면, 유저들은 자신들의 개인정보가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어디서 나왔든 개발사도 어쩌지 못하는 아이템이니 말이다. 거기다 소문은 와전되고 과장되기 마련. 만약 해커의 소행으로까지 왜곡될 경우, 파동은 걷잡을 수 없게 커지고 만다. 일차로 게임에 대한 불신이 아우성칠 것이고, 이차로 유저 수가 줄어들어 미르트에 엄청난 타격이 가게 될 터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면 이 의뢰는 성사시킬 수 없다. 합당한 이유를 듣고 자익에 손해가 없다고 판단될 시에만 의뢰를 받는 것이 정보길드이니. 어쌔신 길드 등은 돈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어려워도 일단 부딪혀보지만, 힘이 약한 정보길드는 피해가 오는 의뢰는 일찌감치 거부하는 게다. 타 길드와 마찰을 빚었을 때 대적할 힘이 그들에겐 없으니까. 그래서 정보길드는 확실한 의뢰 설명을 요구한다. 아무리 친구여도 민주는 길드 마스터이니 충분한 설명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든다. 설명을 곁들이지 않고는 의뢰할 수 없다. 막무가내로 밀고 나가면 할 수야 있겠지만, 그럴 시엔 민주 쪽에서 먼저 거부한다. 이러나저러나 요행은 바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모르니까 적당히 줄여서 한번 찔러나 볼까? 나는 손에 쥔 선홍빛의 프로얀을 보다가 마음을 굳히고, 테이블 위로 프로얀을 굴려 민주에게 넘겼다. “그런 아이템 어디서 본 적 있냐?” 프로얀을 받고는 멀뚱히 그것과 나를 번갈아 살핀다. “도구점 같은 곳에 가면 사방에 널렸잖아. 10렌스도 안하는 아이템을 왜 나한테서 찾아? 달라는 거냐? 정 필요하다면 무료로 줄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하더니 히죽거리며 콧대를 세운다. 아아, 정말 예전엔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게임이 놈을 망쳐놨어. 이젠 한도를 넘어서, 우리 길드에는 많은 아이템이 있네, 돈이 많네, 같잖은 자랑을 늘어놓는 민주. 진력나는 모습에 한숨쉬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하는 건 정보가 나타나지 않는 아이템을 말하는 거다.” “아이템 정보? 정보가 없는 아이템 같은 게 어디 있어?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라.” 이럴 때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네 녀석이 지금 성의 없이 던졌다 받았다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아이템이란다. ------------------------------------------------------------------------- 흐흐흐 ㅠ.ㅠ)b 9장의 비축분 흐흐흐 ㅠ.ㅠ)b (너무 기쁨) 으흐흐흐흐 ㅠ.ㅠ)b 으흐흐흐흐 ㅠ.ㅠ)b 으흐흐흐흐 ㅠ.ㅠ)b 이대로 잠수마공이다앗!!! (꼬르르륵) ================================================================================ http://j2k.naver.com/j2k_frame.php/korean/www006.upp.so-net.ne.jp/handa-m/loli_check/pc1_qa01_index.html 누르세요 =ㅅ=... 모든 답안을 하시고, 제일 마지막 부분의 '왼쪽' 버튼 클릭. (번역하는데 시간이 꽤 걸립니다.) 참고로 =ㅅ=; 본인은 =ㅅ=; 로리타도가 10 (가장 높습니다).. 나왔습니다 =ㅅ=; (하아... 나 왜이래 정말 =ㅅ=;;;) [ 로리타도 ]:10  당신은 훌륭한 「진성 로리타 증후군」의 환자입니다. 그것도 지금의 정신의학에서는 불치의 병으로 되어 있는 강렬한 로리타입니다. 일생 , 이 병을 질질 끌어 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신을 이해하는 상냥하고도 아름다운 로리타와 둘러싸 만날 수 있으면 (비유하고 그것이 몇 년간의 사랑이어도 ) , 그것은 그래서 후회하고가 없는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둘러싸 만날 수 없는 것이면 , 소녀 탤런트들이나 소녀 인형에게 넣는 일도 선택사항의 하나지요. 자신의 마음에 드는 미소녀 탤런트를 찾아내 닌펫트에 대한 자신이 흘러넘치는 정열을 부딪쳐 주세요. 소녀 인형도 꽤 다양한 종류가 나와 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찾아 봐 주세요. 궁극의 소녀사랑은 인형사랑이라고 삽택용언도 말하고 있는 정도이기 때문에 , 빠져 있는 가치는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 본인의 마음이 충실감으로 채워진다면 , 이러한 삶의 방법도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40센치의 소녀 인형에게 이름을 붙여 말을 거는 남자. 그 모습은 기분 나쁜 것일지도 알려지지 않습니다만 , 나에게는 , 슬프지도 순수해 매우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입니다.  덧붙여 잘못해도 , 거리의 로리타에 손을 대어 범죄자가 되지 않게 해 주세요. 그것은 최악의 선택입니다. 정말로 닌펫트를 사랑한다면 , 그녀의 마음과 육체를 손상시키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다만 , 당신의 행운을 빕니다. Level 10. 교차. (4) “사물은 보되, 본질은 꿰뚫지 못하매.” 무슨 불도의 교리에서나 나올 법한 문구를 웅얼거리는 나를 어이 없이 쳐다보는 민주다. “사이비 교라도 들었냐?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아이템 정보 보라는 거다, 무식한 자식아. 전만 해도 눈치 좋더니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 “쳇, 그럴 수도 있는 거야.” 민주는 유난히 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손끝으로 허공을 누르는 시늉을 했다. 보이진 않지만 메뉴를 불러오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이템 정보는 확인 되지 않을 터다. 미르트에서 따로 처리를 해두었는지 아이템 정보 창 자체가 뜨지 않기 때문이다. 유저들이 엘-가드라는 이름을 발견할 시엔 이런 아이템이 있었냐며 회사를 추궁할 것이고, 그랬다간 침묵의 죄가 있는 미르트로선 곤란해질 게 분명하니 말이다. 하지만 프로얀에만 한정된 것이어서 그다지 효과는 없을 것이라 본다. 민주는 몇 번이고 허공을 눌러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녀석의 얼굴은 짜증과 의아함을 동시에 표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안가 포기했는지 팔을 내리며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짓는 그. “이거 왜 이러냐? 아이템 창이 안 떠!”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원래가 그런 거니까 기겁은 하지 마라.” “원래가 그런 거라니? 말이 돼?” “보고서도 모르겠냐?” 툭 쏘아붙이고 창턱으로 다가가 앉는다. 건너편 건물 창가에 서있는 여성 유저를 보다가, 길가로 시선을 내렸다. 사베티움 만큼은 아니지만, 대로엔 제법 많은 인파가 오고가고 있다. 무리를 이루어 웃는 낯으로 대화를 나누는 이들도 있고, 친구들과 나란히 걸어가는 은현도……. “얼레?” 이건 무슨 상황이지? 창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바로 앞을 지나치는 동생을 크게 부른다. “여어, 거기 예쁜이~.” “어머머? 나?” 그러자 정작 봐야할 이는 안보고 주변의 여성들만 얼굴을 붉히며 날 쳐다본다. 주제를 알아라, 이것들아! 아니, 그보다도 남자들은 궁금해서 쳐다본 거 맞지? 그게 아니면 모조리 살해해 버릴 테다. 은현의 친구들 중 과반수가 안면이 있는 이들이었다. 예전 듀얼 랠리 기간에 은현의 소개르 만나 같이 어울렸던 여학생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안혁도 함께 있었다. 어제부터 의기소침해 있는 걸 보아하니 아직 은현의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만 용서해줄 때도 되었건만……. 나를 알아본 여학생들에 의해, 은현도 시선을 이쪽으로 돌리고 반갑게 외쳤다. “와아~ 오빠다! 거기서 뭐하는 거예요?” “그러는 너야말로 여기서 뭐하는 거냐?” 원칙상으로 이런 사기적인 만남은 이루어 질 수 없다. 무심코 내다본 창 밖으로 친동생이 지나갈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이정도면 우연보다는 가히 필연이라고 봐야 정상인 셈이다. 뭐, 무엇 때문에 필연인지 모르겠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친구들과 모이기로 한 곳이 이곳이거든요. 한명이 필드에 있는 바람에 여기서 한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었어요.” 요는, 내가 밖을 보는 타이밍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마주치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로군. 기가 막힌 만남인 걸, 이거. 그럼 이제 나, 저 녀석한테 끌려 다녀야 하는 거 아냐? “……너무 한다고 그건.” 가끔은 나 혼자 놀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그래도, 이왕 만남 김에 할 말이나 모두 해둬야겠다. 추가사항은 나중에 메시지로 보내면 되겠지. “언제 들어올 거야?” “에에, 늦지 않게 들어갈게요.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일찍 귀가하겠습니다~.” 양손을 흔들며 발랄하게 외치는 은현을 보고, 쿡쿡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 봐도 질리지 않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다. 유나가 없는 현재를 지탱해주는 진정한 나무는 은현이 아닐까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이제 내 곁에는 지연 누나가 있으니. “누구랑 웃고 떠드는 거야? 나도 좀 끼어들자.” 그때 민주가 옆을 비집고 들어와 창문 밖으로 빠끔히 머리를 내민다. 하지만……. “야야, 너무 좁잖아! 좀 빠져라!” 말해두자면 귀빈실의 창문은 사람하나 드나들 정도의 크기뿐이 되지 않은 것이다. 내 볼멘 불평에 민주는 자신의 위치적 우세를 앞세워 버럭 성을 내었다. “여긴 내 집이나 마찬가지야!! 비키려면 네가 비켜야지, 뻔뻔스러운 놈아!” “이런 상식 없는 자식! ‘고객을 왕 같이!’라는 계명은 어디다 팔아먹은 거냐! 서로 밀고 당기고 난장판이 벌어졌다. 창문은 통째로 뜯겨나갈 듯 덜덜거리고 흉부가 죄이며 숨이 부족해진다. “민주 오빠?” 서로 몸부림치며 더욱 강도가 강해지는 고통의 나락으로 빠져드는데, 어느 순간 은현을 발견한 민주가 그대로 경직되는 것이었다. 이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의아해하다가 불현듯 떠오른 과거에 충분히 납득해버렸다. 민주가 은현에게 대역죄인으로 낙인찍힌 까닭이다. 은현이 소중히 아끼던 곰돌이 인형을 찢은 천고의 원수인데 어련하랴.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인 중학교 2학년 시절, 말 수는 적지만 어린 나이의 혈기는 나 못지않던 민주가 집에 놀러왔던 일이 있었다. 당시 커다란 마당을 낀 단독주택에 살던 때라 친구들과 모여 곧잘 놀기도 했는데, 그때 무슨 괴이한 현상인지 모두가 사정상 흩어지고 민주만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은현만이 남아 있는 고요한 집에 들어와 도중에 사온 과자로 허기를 때우고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도중 일은 터지고야 말았으니……. 이틀이 멀다하고 놀러온 민주인지라, 녀석은 은현과도 거리낌 없이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거기다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상당히 웃긴 일이지만, 민주는 좋아하는 이에겐 유난히도 장난치길 좋아하는 특이한 놈이었다. 은현이 대책 없이 착했기에 망정이지, 남에겐 했다간 따귀 맞아도 할 말 없을 짓들을 서슴없이 자행했던 것이다. 뭐,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거니와 뻔한 것들이니 예는 들지 않겠다만……, 정도가 위험해서 그때마다 내게 두드려 맞았다는 것은 확실히 명시해 둘 수 있겠다. 더 이상 내 무위를 감당해낼 수 없었던 것인지 육탄공격은 하지 않았지만 그게 문제가 되었다. 하필이면 은현이 꼭 끌어안은 곰돌이 인형을 표적으로 삼을 건 뭐란 말인가. 타인의 인형과의 접촉은 가족에게만 한정시켜 둔다고 엄포를 놓은 상태였다. 그 와중에 민주가 금기를 어기고 손을 대니, 은현은 나름대로 인형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기고 당기는 과정에서 탄성의 임계점을 돌파하게 된 불쌍한 곰돌이. 아아, 내가 나서서 중재해주기만 했더라면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관조한 내가 나쁜 놈이지. 고작 실로 묶인 부위가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당연지사 인형은 봉합된 각 부위에서 소름 끼치는 음향과 함께 부욱 뜯겨져 나갔다. 그 후 괴기스럽게 양팔이 사라진 인형을 본 은현은 분노하였고, 결국 그 화를 감내하지 못한 민주는 첫사랑과 그렇게 헤어지는 비참함을 겪어야 했다. ================================== 오홋.. 비축분이 제법 모였군요. [십단위는 넘어간답니다!] 이걸 어느 때에 폭발시켜야 잘했다는 소리를 들을까나.. 좀더 모으고 10연참을 시도해봐? 에이, 주제에 무슨 10연참이냐.... (10연참은... 30장에서 50장 사이가 되야만 가능 =ㅅ=;) 끄으으~ 만들어도 탈이요, 만들지 않아도 탈이로구나!! 덧. 다음 화에 이 지루한 장면은 넘어가게 됩니다. 덧2. 쓰는 사람이 다 짜증나는 판에 독자분들이 얼마나 지루해 할지를 생각하니 은근히 미안해지네요. 죄송합니다~ 앞으로 적당히 '늘리도록' 할게요~ [진전이 없잖아!] Level 10. 교차. (5) “벼, 별로 보고 싶지가 않아졌어……. 역시 고객을 왕 같이 모셔야 하는 것이야!” “그다지 그래줄 필요는 없는데. 네가 주인이라면서 끼어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말을 바꾸려 드시나?” 민주는 몸을 비틀어 빠지려고 갖은 애를 썼다. 하지만 이 기회를 내가 놓칠까 보냐! 같이 몸을 비틀어 녀석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놓고, 단검으로 목을 얕게 그었다. 로그아웃으로 현 상황을 타개할 수도 있으니 미연에 손을 써둔 것이다. 공격하면 페널티가 적용되어 쌍방이 로그아웃 불가가 되니까. 히죽 히죽 웃으며, 낭패감이 물들어있는 친구의 얼굴로 향해있는 시선을 동생에게로 돌렸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찬바람 풀풀 날리는 모습의 은현. 안에서는 증오심이 용암처럼 들끓고 있으리라. “난 죽었다…….” 그래, 넌 죽었어. 참담하게 고개를 푹 꺾으며, 절망감이 진득하게 섞인 어조로 중얼거리는 민주에게 음산한 미소를 보낸다. 앞으로 벌어질 상황이 은근히 기대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요리될까나, 민주? 맞아 죽을까, 아니면 찔려 죽을까? 나는 민주의 귀에 입을 대고 은근하게 말했다. “참고로 은현은 곰돌이 토막사건을 잊지 않고 있어. 똑같이 해줄 거라고 벼르고 있지. 명복을 빈다네.” “그딴 건 말하지 않아도 돼!” 역정을 내는 민주. 휘파람을 불며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하늘만 쳐다보았다. 하아, 날씨 좋다. 밑에서는 은현이 뭔가 던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시력을 돋워 자세하게 살펴보니 모진 돌멩이다. 외양부터 흉흉한데다 크기도 큼직한 것이, 직통으로 맞는 사람은 그대로 골로 갈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시간 끌 필요 없이 즉결 사살이라는 것일까? 나는 민주를 더욱 구석으로 몰아넣고 은현이 쉽게 돌팔매질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너무 착한 오빠라니까, 나는. “이런 썩을 놈!” 어디선가 민주 목소리를 닮은 개소리가 들려왔지만 간단히 무시했다. 왈왈거리는 소리 따위는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듣고 있을 필요성은 없는 것이다. “으, 은현아! 살려줘! 미안해! Sorry! 한때의 치기어린 장난이었을 뿐이잖아!” 두 손을 모아 비굴하게 싹싹 문지르는 민주. 은현은 한마디로 일축하며 팔을 뒤로 젖혔다. “시끄러워요!” 오오, 좋아! 복수할 때의 동정심은 불필요한 감정인 게야! 그딴 건 제쳐두고 인정사정없이 던져! 요 몇 년 동안 칼을 갈며 벼르던 상대잖아! 이러한 마음이 전달된 것일까, 은현은 복수심을 활활 불태우며 힘껏 팔을 내뻗었다. 작용을 받아 무서운 속도로 뻗어오는 돌. 날아온다. 날아온다. 내 쪽으로……. 퍽! “으헉!” 정확히 오른쪽 눈에 직격되는 돌멩이. 어, 어째서 내가……! “아, 아! 저, 전 이만 가볼게요! 재밌게 노세요, 오빠!” 쭈뼛쭈뼛 그렇게 말하고는 후다닥 달아나는 은현을, 눈물이 스미는 눈으로 하염없이 쳐다보기만 하였다. “푸하하! 친구의 불행을 행복으로 삼은 놈의 말로이니라!” “…….” 나는 말없이 통증이 느껴지는 눈두덩을 어루만지며 통탄했다. 오늘은 맞는 팔자가 되는 게냐! 지금은 그것을 미리 암시하는 것이고? 매우 좋지 않아……. “그보다 이거 어찌된 아이템이야? 도무지 창이 안 열려!” 민주는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날달걀을 건네주며 화제를 전환했다. 사실 이런 것은 재접속 한번이면 직방으로 나을 상처다. 팔다리가 끊어져도 재시작하면 떡 붙어있는 판에, 이까짓 정도의 멍쯤은 대수로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멍든 부위를 마사지해주면 재접속의 번거로움 없이 멍이 사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냥 무시하는 게 가장 간편한 방안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미지’라는 것이 있고, 또한 던젼 같은 곳에서 이런 사소한 것으로 재접속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달걀을 굴려 눈을 문질러보고 심드렁히 대꾸했다. “계약서 꺼내. 이게 의뢰니까.” 이 말에 모르겠다는 모색이 되어 고개만 갸웃거리는 민주였다. 나는 뱅크에 들러 프로얀과 위냔을 맡겨두고, 즐거운 마음으로 허밍하며 서문의 초보자 존으로 향하는 중이다.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볍고 억제를 해도 얼굴에는 자꾸 웃음꽃이 피어났다. 뜻하지 않은 히죽임에 주위의 시선이 이상해졌지만 괘념치 않고 내 갈 길만 갔다. 그러니까 10여분 전, 인포 길드에서 ‘바람의 위냔’을 얻을 수 있었다. 이유는 적당히 둘러서 ‘이벤트인데 이런 것을 일곱 개 모아야 한다. 다른 아이템과의 차별을 두기 위해 정보가 감춰진 것이다. 이것은 아니지만 다른 것들은 정보가 보이되 Unknown으로 도배되어 있다’까지 설명하자, 민주가 갑자기 생각났다면서 위냔을 꺼내어 넘겨준 것이다. 잡상인이 대단한 아티펙트라고 하여 샀다가 사기임을 알고 통곡했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깨끗하게 무시하고 위냔만을 빼앗아 챙겼다. 그리고 위냔을 잡는 그 순간의 쾌감과 기쁨은 말로 이루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태진이 유나로 보일 것 같았던 기분이었다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되려나 모르겠다. 민주는 내 설명을 그다지 못미더워하는 눈치였지만 어찌어찌 계약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한 가지 정보를 얻었다. 이런 종류의 아이템을 동일 수법으로 사기당하고 절규했다는 블러드 길드의 마스터에 대한 것이었다. 밑에 녀석들이 쌤통이라며 고소해하던 것을 캐물어 들었다나? 이후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도 알아봐 달라 부탁한 뒤, 로비에서 날 발견하고 후다닥 가구들을 몸으로 가리는 유저들을 지나쳐 길드를 나섰다. 거스름돈 챙기지 못한 게 못내 아쉽지만, 대신 위냔을 얻은 것으로 위안삼고 있다. 정말이지 운이 좋았다는 표현 외엔 달리 말할 게 없다. “초보나 한 명 거들어줘 볼까.” 현재시간 RT 4시 15분. 5시간 정도 돕다가 적절한 아이템이나 하나 주고 재생의 숲으로 이동할 생각이다. 빨리 400레벨이 되어 루인 스킬을 익혀야하는 마당에 거드름 피울 수 없는 노릇이니까. “오늘도 여성 유저, 일까나.” 도중에 무기점과 도구점을 들려 초보 유저에게 줄 아이템을 장만해두고 초보자 존에 들어서서 적당한 유저를 물색해 본다. 잔디가 무성한 벌판 위에서 베이직급 몬스터 ‘고블린’과 옥신각신하는 초보자들. 이곳보다 난이도가 좀 더 높은 저편의 숲에선 무리를 지은 유저들과 몹들의 전투가 한창이다. 되도록이면 여성으로 할 생각이다. 음흉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쪽으로는 차라리 여성이 낫기 때문이다. 가끔가다 여우들이 걸리기는 해도 남자들에 비하면 무난한 게다. 대체가 열이면 팔, 구가 뒤통수를 차려드는데 도울 마음이 생기면 그게 성인군자다. 처음에는 그래도 믿고, 더불어 대하기가 편하기도 해서 남자들만 집중적으로 도왔다. 그런데 이 잡것들이 툭하면 등 뒤에서 살심을 품어대는 것에는 진정으로 질려버렸다. 인심써서 도와주는 이의 아이템을 노리는 패륜을 저지르는 게 말이나 될법한 소리인가! 지금껏 도운 23명의 남자들 중, 무려 21명이 뒤치기 하다가 도리어 죽어나간 것이다. 반대로 여성들의 경우엔 40명 중 겨우 서넛만이 익스펠 되었으니, 내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도 응당의 귀결이었다. “오호, 꽤 열심히 인데?” 초보인 척 고블린을 잡아가며 곁눈질로 주위를 훔쳐보길 어언 한 시간. 어느 순간 나타나 사냥에 나선 유저를 유심히 살펴보다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칼질을 하는 그리 크지 않은 키의 한 소녀. 하지만 형편없이 어설픈 포즈로 보건데 의심의 여지없는 명백한 초보자다. 보통 몇 주라도 한 유저라면 엉성해도 저리 엉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저 소녀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는 셈이었다. “제대로 걸렸는데.” 타 게임의 경험조차 없는 유저 같다. 오령이 없어도 너무 없다. 구경하는 사람이 답답해 미칠 정도인데 오죽하랴. 대부분 치고 빠지기 마련이건만 뭐 저리 미련하게 달려드는 것인지……. “꺅!” 오, 이제는 제발에 걸려 넘어지기까지 한다. 대단한 스텝을 익혔는걸. ---------------------------------------------------------------------------- 후후후훗... 후후후후후훗!! [퍽!] 에, 늦어서 죄송합니다. 비축분이 줄어가는군요 ㅜ.ㅡ [여태껏 안썼습니다.] 크흐흑! 제피로스 테일즈 쓰냐구요 =ㅅ=;; 이거 쓰는 게 왜이리 즐겁습니까 =ㅅ=ㅋ 벌써 23장 썼습니다 =ㅅ=!! 우하하! 엘-가 완결 내기 전까지는 안올릴테다!! 심심해서 만들어본 표지들 =ㅅ=;; 허탈하게 웃어주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는 소녀에게 공격을 가하는 고블린을 재빨리 처단했다. 아무리 서러워도 그렇지 포기해서야 쓰나. “조심해야죠.” 검을 회수하고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저는 눈물을 닦아내고 빨개진 눈동자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뭐랄까, 가까이에서 보니 제법 귀여운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눈에 확 띠는 미모는 아니지만 수수한 귀여움을 지닌 유저였다. 뭐, 그렇다고 시커먼 속내를 가진 것은 아니다. 나는 연하 취향이 아니니까. “누구세요……?” 호의를 거부하고 자력으로 일어선 소녀는 명백한 경계의 빛을 나타냈다. 대체로 여성 유저들은 일단 조심하고 보자는 주의이니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기분이 상하는 것은 도리가 없다. 도와주고 대가로 받는 것이 냉대라니. 너무하잖아, 이거. “그냥 지나가던 착한 오빠, 정도로만 생각해주면 안 될는지요.” “절대로요.” 언제 울었냐는 듯이 단호하게 양팔을 교차시키는 소녀. 나는 나지막하게 한숨쉬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엘-가드는 언제부터 시작했나요?” 그녀는 주변을 곁눈질로 둘러보았다. 도움이라도 요청하는 걸까? 그렇게 의심이 많아서야 뭘 할 수 있겠냐. “이틀 전부터 시작했는데요.” “그 외에 게임 경력은요? RPG류 말하는 겁니다.” “콘솔용으로 두어 개……. 아니, 그보다 제가 왜 대답해야하는 거죠? 그런 질문은 왜 하는 거구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대답하다가 미간을 찡그리고 나를 쏘아본다. “저도 초보인데 파티 맺고 함께 사냥하자고요. 혼자 하는 것보다 나을 거라 보거든요.”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게 초보인데 왜 하필 저인가요? 그리고 죄송하지만 이미 일행이 있어서요! 반 친구들이 도와준다고 했거든요. 곧 올 시간이어서 여기서 떠날 수 없어요.” 그 의도가 뻔히 보이는 변명이었다. 어느 곳에서나 시간이 없어서라는 말은 흔히 쓰이는 변명 아닌가. 소녀는 내가 속내를 들여다보듯 물끄러미 쳐다보자 주춤거리며 한보 물러났다. 나는 빙그레 미소를 띠며 손목을 잡아챘다. 미안하지만 이쪽은 한번 잡은 목표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향이 있거든. 언제 다른 유저를 찾고 있어? “썩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이니 무효처리 하겠습니다.” “이, 이거 놔요!” 유저는 손을 뿌리치려 팔을 비틀었지만, 고작해야 레벨 2짜리가 390대 레벨의 힘을 능가할 수 있겠는가! 손목을 으스러져라 강하게 쥐어주자 소녀는 신음하며 몸부림을 수그렸다. “그러지 말고 갑시다. 책임지고 키워드리죠.” “예? 피, 필요 없어…… 아앗―! 이건 납치야!” 하하, 납치라도 해서 키워주고 싶거든. 이대로 포기하기엔 이미 날려먹은 한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절대 못 물러나겠어. 무작정 팔을 끌자 말을 끊고 고음의 고함을 치는 소녀. 나는 가기 싫어 발버둥치는 그녀를 질질 끌어 맞은편의 숲으로 향하며, 하늘을 향해 왼손을 내뻗쳤다. “즐거운 모험이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 웃어요!” “전혀 즐겁지 않아!” 정의감에 불타는 ‘기사 나으리’가 없는 것인지 멍하게 서서 구경만 할 뿐 나서지 않는 유저들. 묘한 정적마저 흐르는 초보자 존에는 소녀의 악에 받친 외침이 공명하고 있었다. “벨 때는 팔을 빨리 휘둘러!” “몸이 너무 뻣뻣해! 통나무처럼 멀거니 서서 뭐하는 것이냐! 그래선 효과적인 공방을 기대할 수 없어!” “발은 멈추지 말고 지속적으로 움직여! 빠른 대처가 가능하도록!” 필사의 각오로 노말 급 몹 오크(Orc)와 대적중인 ‘아드리엘’에게 충고하며 자세를 하나하나 교정시켜주었다. 분명 오크는 이제 10레벨인 아드리엘이 상대하기엔 많이 벅찬 몹임에 틀림없다. 노말 급이니 적어도 50레벨은 되어야 무난한 처리가 가능한 것이다. 혼자서는 결코 불가능한 도전인 게다. 하지만 근처에 강한 서포터가 있다면 말이 틀려진다. 특히 그 서포터가 나라면 최고 레어 급 몹까지 사냥이 가능하다. 다만 한 마리당 사냥 시간이 급격히 늘어날 테지만. 현재 오크를 처리하는 방식은, 내가 어느 정도의 체력을 줄여놓고 아드리엘이 마무리 짓는 식이었다. 더불어 그녀에게 가는 공격은 내가 모조리 막아냈다. 3레벨이었던 당시엔 미쳤냐고 윽박지르던 아드리엘이었지만, 총 여섯 마리의 오크를 사냥하기까지 단 한대도 맞지 않아 이제는 자신감이 붙은 모습이었다. 소극적이던 공격은 점차 적극적이 되어 이제는 마음 놓고 치명타를 노리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뭐, 그래봐야 ‘처음에 비하면’이라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갓 걸음마를 뗀 아기가 걸어봐야 얼마나 걷겠느냔 말이다. “시작한지 삼일도 안 된 사람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말아요! 아니, 그보다도 왜 반말이에요? 언제 봤다고!” 드디어 10분간 잡고 낑낑대던 오크를 허리를 베어 쓰러트린 아드리엘. 그녀는 내가 선물한 카타나에 묻은 녹색 피를 털어내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서서히 사라지는 오크의 육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크로부터 드롭 된 아이템을 수거한 뒤, 눈앞의 유저에게 척 내밀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연출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요.” “여기서 연출할 게 뭐가 있어요?” “이 세상엔 가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미지의 현상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초월적 존재의 요구에 의해 종종 이런 일이 발생하기도 하지요.” “그런 소설 같은 일이 발생할 리 없잖아! 난 캐릭터가 아니라 어엿한 인간이에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선언하듯 자랑스럽게 외친다. 나는 ‘훗’ 코웃음을 쳐주고, 절대 감각을 풀어 새로운 타깃을 물색했다. 요지경 세상인데 그런 일이 발생하지 말라는 법도 없잖은가. “세상은 신이 만든 영화일 수도 있어요. 개인 하나하나에 심혈을 쏟은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 말입니다.” “오호, 유신론자일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데요.” 아드리엘은 군말 없이 ‘오크의 뿔’을 가방 속에 챙겨 넣고, 카타나에 묻어있는 초록빛 체액을 말끔하게 닦아내었다. 그러자 햇볕을 받아 시린 은광을 번쩍이는 검신. 눈이 시큼하여 시선을 떼고 말을 이었다. “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 세상이 미지의 존재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말이라구요.” “그런 말을 하는 자체가 그다지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는걸요.” “하하, 이것이 제게 주어진 대사일지도 모르죠.” “하아―, 어련하시겠어요. 전 누구처럼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해서 이해하기가 힘드네요.” 그러면서 한심스럽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가만히 나를 응시한다. 어서 사냥이나 계속하자는 재촉하는 눈초리였다. 두 시간 전만 해도 가겠다며 악을 써대더니, 이제는 반대로 재촉인가? 정말 제멋대로인 여자. 뭐, 그런 활기찬 태도가 마음에 드는 것이지만 말이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서, 아드리엘의 얼굴에 튄 오크의 체액을 소매로 닦아주었다. “레벨은 몇이나 되요?” 슬쩍 쳐다보면 쉽게 알아낼 수 있기야 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아드리엘의 감상이었다. 한순간에 상승한 레벨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한 것이다. 아드리엘은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말을 받았다. “17이 되었네요. 두 시간도 안 되어 14업이나 하게 되니 기분이 묘한 걸요. 꼬박 이틀 동안 달랑 1업 한 걸 생각하면 허무함도 느껴지고요. 그리고 조금 지치기도 하네요.” 아직 스킬 북을 얻지 못한 상태여서 전투는 육탄전의 양상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사냥 속도는 느려지고, 그 과정이 많아지면서 피곤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육체는 아니더라도 정신적인 피로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아드리엘에게 오크가 주는 경험치가 모조리 갔다면 비단 30레벨도 꿈은 아니다. 하지만 데미지를 내가 더 많이 주었기에, 기여도에 의하여 내가 받는 경험치가 두 배는 더 많았다. 물론 내 경우엔 필요 경험치가 워낙 높아서 이런 경험치는 호수에 물 붓는 격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트렌의 서문 초보자 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이다. A급 사냥터 ‘재생의 숲’의 어귀인데, 오크가 주를 이루어 리젠되기에 ‘오크 밭’으로 통하는 곳이기도 하다. 뭐, 초보자들이 오기에는 두말할 나위 없는 자살 장소인 것이 정론이지만, 내가 있는 이상 저레벨 유저에겐 최고의 사냥터로 돌변하는 것이다. “아직도 억지로 끌려온 것에 회의같은 것이 느껴지나요?” “아, 별로……. 내 의지가 묵살되어 화나기는 하지만 어쨌든 고마워요.”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이는 아드리엘. 초반에 ‘싫어! 갈 거야! 미쳤어!’의 삼박자를 연발한 걸 떠올려보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겠다. “한 시간 뒤면 친구 분들 온다고 했었죠?” “정확히는 8분이 추가되어야 하죠.” 하는 행동으로 봐서 그저 빠져나가기 위해 급조한 변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싫다는 것을 억지로 잡아끌어 이리로 데려오고 제일 먼저 들은 말이 세 시간 후면 가야한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때쯤에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나? “그래, 재미는 있나요?” 아드리엘은 이런 종류의 게임은 엘-가드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소문은 들어봤지만 자신은 RPG 체질이 아니어서 언제나 PC용 아케이드 게임만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친구들의 회유, 협박,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가입한 것이고. 하지만 RPG 경력이라고는 콘솔용 게임 두어 개가 전부인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 뭐겠는가. 전투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 효과적인지를 모르니, 죽이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더 많을 수밖에. 또한 그 과정에서 게임이 질리기 시작했으니 레벨 업이 지지부진이 되는 게 당연하다. 그나마 지금은 나 덕분에 할만 해졌다고 대답하지만 말이다. 몰래 엘-가드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도 적극 협조해 준다고 했으니 차차 푹 빠져들 것이라 생각한다. 가상 현실 게임은 특히나 중독성이 강한 분야이니까. “아, 한 마리 나타났군요. 남은 시간 동안 25~30이 되도록 분발합시다!” 감각을 곤두세우는데 어느 순간 갑작스레 잡히는 기척.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몹이 리젠 된 것이리라. 즉시 기척이 잡히는 방향으로 앞장섰고, 아드리엘은 내 뒤를 바짝 쫓으며 질문했다. “대체 그런 거 어떻게 아는 거예요? 레벨 높아지만 자연히 익히게 되나요?” “글쎄요. 레벨보단 운이 절실하다고 생각되어지는군요.” 버그를 찾는 것은 말 그대로 운이 좋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의도적으로 찾는다고 발견되는 종류가 아닌 것이다. 내가 신고한 버그도 우연찮은 기회에 발견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마 상용화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의 나는 160레벨이었다. 그리고 높은 난이도의 던젼에 도전하여 스릴을 느끼는 걸 즐겼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 유니크 몹을 만나는 바람에 도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하필이면 장거리 공격이 가능한 녀석이어서 도망치다가 로그아웃까지 감행하기에 이르는데, 접속을 끊는 순간에 데미지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뿐일 뿐 로그아웃은 무사히 되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후 던젼 입구에서 재접속하여 필드에서 노닐다가 이 버그를 발견했다. 체력이 줄지 않는 버그였다. 아니, 정확히는 데미지는 받되 체력이 금방 회복되는 게 아닌가. 어쨌든 나는 이에 신이 나서 몹들을 작살냈고, 그로인해 얼마간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으니, 레벨 업을 해도 Max HP 수치만 상승할 뿐 실제 체력은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레벨은 계속 높아지고 더 강한 몹이 요구되는 판에 이는 시로 커다란 장애로 작용했다. 고정 수치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줄었다가 다시 차는 것이어서 유니크 몹에게 자칫 잘못 맞았다간 일격에 익스펠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엔 이러한 위험을 떠안고는 절대 성장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근래에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내용을 바꿔 미르트에 신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버그임이 판명되어 포상으로 절대 감각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한 가지의 버그를 가지고 단물까지 쪽쪽 빨아먹은 셈이다. 뭐, 어쨌든 하고자 하는 말은, 버그는 레벨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아드리엘은 고개를 갸웃하며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운이요?” “네, 운이요. 한 가지 조건이 충당되어야 가능하거든요.” 물론 버그 신고 시 절대 감각만을 준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그런가요.” 이정도 말하면 조건이 궁금해지기도 하련만, 이 소녀에게 관심 밖의 일인지 시큰둥한 태도를 일관할 뿐이었다. --------------------------------------------------------------------------- 유후~ 두비두비~ [퍽!] 얼마 가지 않아서 홀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오크 한 놈과 마주칠 수 있었다. 건방지게 글레이브를 어깨에 걸친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를 짜증이 밀려온다. 지금 어느 면전에서 폼 잡고 돌아다녀? “저거 어쩐지 화나네요.” 아드리엘도 나와 같은 이유 모를 불쾌감을 느꼈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카타나를 고쳐 잡는다. 그리고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발검하지 않은 채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런 약골 몹의 경우(실제적으로는 그렇게 약한 것이 아니지만) 검으로 공격하면 일격에 뻗어버리는 탓이다. 마침내 이쪽을 발견한 오크도 괴성을 질러대며 맹렬하게 짓쳐온다. 앞으로 내세운 글레이브에 사나운 살의가 엿보였다. 나는 아드리엘의 어깨에 손을 올려 두드려주었다가 곧장 몸을 날렸다. 묘한 짜증까지 치민 상태여서 그 기세는 누가 봐도 실로 흉흉하다할 정도의 그것이었다. -취잇! 언제 들어도 기분 잡치는 목소리로 짖어대며 글레이브를 세차게 뻗는 오크. 미미하게 녹이 슬어있는 슴베가 어느새 코앞까지 당도하고 있다. 고개를 트는 것으로 기교 없이 단순한 공격을 피해내며, 동시에 글레이브의 창대를 휘감아 잡아챘다. “이런 흉물스러운 무기는 압수다.” 가라앉은 표정에 조소를 머금으며 글레이브를 옆구리에 끼고 힘차게 잡아당겼다. 오크의 몸이 힘을 이기고 못하고 앞으로 휘청거린다. 그러나 곧 중심을 잡고 글레이브를 제 쪽으로 당기는 아둔한 생명체. 짙게 웃음 지으며 손을 풀어 글레이브를 놓았다. -꾸에에! 제 힘을 못 이기고 뒤로 자빠져 돌부리에 뒤통수를 박는 오크를 보고 대소하였다. 오크는 피가 줄줄 흐르는 뒤통수를 감싸 안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글레이브는 바닥에 뉘여 있는 상태다. 박투라도 하자는 용의일까? 양 주먹을 쥐고 복서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기가 막히는군.” 기가 차서 ‘하’ 숨을 토해내고, 원을 돌 듯 주변을 배회하며 기회를 노리는 오크를 쳐다보았다. 무기 들고 싸워도 시원찮을 판에 주먹으로 맞대결을 하자고? 네가 정녕 맞아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보구나. “아드리엘. 이놈 스턴 시킬 테니까 그 이후는 알아서 처리하세요.” 시선은 놈에게 고정시킨 채, 멀찍이 떨어져있는 아드리엘에게 당부한다. 박 터지게 두드린 다음 스턴 시킬 작정이다. 주제파악은 해야 할 거 아냐. 오크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도전을 해? 긴장하여 주변만 배회하는 오크를 가소롭게 쳐다보는 와중에 아드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스턴이 뭔데요?” 아아, 김빠지게 만드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Stun’ 정도의 뜻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아? 이건 게임에서 쓰이는 용어이기 이전에 기본적인 영어 단어라고!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심드렁하게 회답했다. “얼마간 움직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럼 진즉부터 그 방법으로 몹을 상대했으면 레벨 업 속도가 더 빨라졌을 텐데요.” “레벨 업은 잘 되기야 하겠지만 그랬다간 실력이 예전 그대로일 뿐이잖습니까. 나중에 혼자 사냥하러 다닐 때 큰 애로사항이 꽃핀다구요. 알겠어요?” 이 초보 돕기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저의 실력을 증강시키는 것에 있다. 달랑 레벨만 올려줄 거라면, 차라리 그 시간 동안 내 레벨이나 올리고 만다. 나는 점차 성장해가는 유저들의 모습에 뿌듯함을 느껴 이 짓을 그치지 않는 것이다. 레벨 업에 중점을 두었으면 애초부터 사지를 부러트려놓고 하지, 무엇 하러 공격하도록 만들었겠는가. 다 실전을 익히게 하여 강해지게끔 만드는 데 의의가 있는 게다. 그러한 이유로 20레벨 후반부터는 아드리엘에게 약간의 공격도 허용할 생각이다. 일단은 막기 쉬운 것부터 내줘야하겠지. 아드리엘은 대답이 없었다. 어쩌면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말이 현재에 중점을 둘 뿐, 미래를 내다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말이다. 나와의 인연이 오늘로 끝나는 이상, 앞으로는 개인적으로 다녀야 할 테니까. 그녀에게서 관심을 끊고, 신중하게 발을 옮기는 오크를 보며 풋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두개의 송곳니가 튀어나온 돼지 머리에 진지함이 드리우니, 이건 코미디를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취익! 잠깐이지만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구멍이 뚫리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쇄도해오는 오크. 사람의 손보다 조금 더 큰 주먹이 내 안면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친다. 강렬한 바람소리가 귀청에 울린다. 나는 입술을 조금 비틀고, 오른손으로 놈의 주먹을 받아 흘리면서 왼손으로 팔굼치를 올려쳤다. 두득! 섬뜩하게 진동하는 뼈의 마찰음. 오크는 일격에 부러진 제 오른팔을 부여잡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꽥꽥거리지 좀 마라. 듣는 사람 기분 잡쳐!” 이미 전의를 상실하여 도주를 시도하는 놈에게 파고들어 옆구리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허리가 움푹 함몰되며 오크의 입에서 녹색 피가 터진다. 부러진 갈비뼈가 장기를 찌른 모양이다. 등 뒤로 돌아들어가 체액을 피해내며, 양 어깨를 잡아당기며 등허리를 무릎으로 격타했다. 허리가 기형적으로 꺾임과 동시에 돼지 멱따는 소리도 함께 고개를 숙인다. 워낙 치명적인 일격이어서 아차 싶었지만, 육체가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봐서 다행히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대로 방치해뒀다간 고통에 의한 체력 저하로 소멸할 것이 뻔한 일! 즉시 아드리엘을 불러 오크의 명줄을 끊어놓고 잠깐 묵념했다. 부디 다음 번 리젠 때는 내게 걸리는 일이 없기를……. 합장을 풀고 아드리엘을 응시하며 예의 쿨 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너무 쉽게 되었네요. 다음번엔 빡빡하게 하겠습니다.” 아드리엘은 이 의미심장한 발언에 숨을 삼키며 침음하였다. “예, 예? 빡빡하게요?” “예. 많이 힘들어질 거예요. 각오 단단히 하시길.” 이번엔 내가 살짝 맛이 가는 바람에 회생불능의 타격을 주었지만, 다음번엔 어림도 없는 소리다. 쉽게 레벨 업을 하면 무슨 소용이랴. 죽을 각오를 하고 전투에 임해야 성장이 빠른 것이다. 사람은 위기에 몰릴수록 의외의 힘을 보여주니까. 위기에 몰릴수록 말이다……. “흐흐흐…….” 나는 한껏 음산한 기운이 담긴 웃음을 흘리며 아드리엘의 머리부터 발까지 죽 훑어보았다. 으흐흐, 각오하라고……. 남은 시간 동안 각박한 세상 속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몸에 새겨넣어줄 테니까. 음습한 기운에 오한이 들었는지, 흠칫 몸을 떨며 어깨를 움츠리는 아드리엘을 잡아끌며 호기롭게 외쳤다. “그럼 가볼까요! 강한 몹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어요!” “나, 나 이쯤에서 빠질래…… 아앗―! 내 의견 좀 들어달란 말야!” “아하하하!” 또다시 질질 끌려가는 형국의 아드리엘. 나는 숲 깊숙이 발을 내딛으며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싫어!!” 가끔은 광인이 되어보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하는 나였다. ------------------------------------------------------------------------- 아, 성실연재... 너무 좋은데 ㅜ.ㅜ 흑흑.. 비축분이 사라져간다!! 끄아아아!! 제피로스 당분간 접어야만 하는 것인가.. 흑흑 ㅜ.ㅜ 제피로스!!!!!!! 으아앙!! 제피로스!!!!!!!!!!!!!!!!!!!!!!! 끄아아아악!! “예, 예? 빡빡하게요?” “예. 많이 힘들어질 거예요. 각오 단단히 하시길.” 이번엔 내가 살짝 맛이 가는 바람에 회생불능의 타격을 주었지만, 다음번엔 어림도 없는 소리다. 쉽게 레벨 업을 하면 무슨 소용이랴. 죽을 각오를 하고 전투에 임해야 성장이 빠른 것이다. 사람은 위기에 몰릴수록 의외의 힘을 보여주니까. 위기에 몰릴수록 말이다……. “흐흐흐…….” 나는 한껏 음산한 기운이 담긴 웃음을 흘리며 아드리엘의 머리부터 발까지 죽 훑어보았다. 으흐흐, 각오하라고……. 남은 시간 동안 각박한 세상 속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몸에 새겨넣어줄 테니까. 음습한 기운에 오한이 들었는지, 흠칫 몸을 떨며 어깨를 움츠리는 아드리엘을 잡아끌며 호기롭게 외쳤다. “그럼 가볼까요! 강한 몹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어요!” “나, 나 이쯤에서 빠질래…… 아앗―! 내 의견 좀 들어달란 말야!” “아하하하!” 결국은 또다시 질질 끌려가는 형국의 아드리엘. 나는 숲 깊숙이 발을 내딛으며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고 그녀는 비명에 찬 탄식을 토해냈다. “정말 싫어!!” 가끔은 광인이 되어보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하는 나였다. 이후 몹들을 사냥하며 다짐한바 공격을 조금씩 흘렸다. 예상대로 내가 가드를 풀 때면 오크의 거친 공격이 아드리엘의 빈틈으로 흘러들었고, 그때마다 그녀는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넘어지기가 일쑤였다. 한번은 그 돌발행동에 의해, 비껴나가야 정상인 공격이 오히려 급소로 향하는 상황이 발생해 내가 오크를 죽여야한 적도 있었다. 그 뒤 물러서지 말고 맞서라며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말이다. 아드리엘은 그게 어지간히도 서러웠는지 ‘나쁜 인간!’ 등으로 외치고 울먹였지만, 정작 도망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날 뿌듯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이 몇 십번은 반복되자 차츰 요령이 붙었는지, 무리한 것만 아니라면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도 하는 등의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종래에는 오크와 맞대결을 펼치기도 하였다. “하아―, 피곤해…….” 막 혼자의 힘만으로 오크를 쓰러트린 아드리엘은 어기적어기적 걸어와 잔디 위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나는 실실 쪼개며 포션 두 병을 건네었다. 시작한지 얼마 되었다고 약속한 한 시간이 다되었기에 이만 사냥을 멈춘 것이다. “겨우 그 정도 가지고 힘들다 소리하면 앞날이 뻔하군요.” “그쪽이 지나치게 강한 거예요. 초보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그렇게 몹들을 주물러 대는 것인지…….” 아드리엘이 포션을 입안에 들이 붇고 빈병을 휙 던지며 투덜댄다. “시간 되었는데 안가보세요?” “아아, 마침 저쪽에 친구들이 보이네요.” 나는 이렇게 아드리엘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여느 때보다 열정을 다해 성장시킨 만큼 바라보는 시선도 남달랐다. 좀 더 가르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해야 할까. 연신 씨근거리면서도 혹독한 고행 속에서 예상을 뒤엎는 좋은 결과를 보여주었기에 그럴런지도 모른다. 적응 속도가 빨라 선생의 입장에서 가리키는 재미가 있었으니 말이다. 최종적으로 아드리엘의 레벨은 38레벨. 약간 위태롭긴 하지만 오크 하나는 혼자 사냥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도 갖춘 상태다. 보통 50레벨이 오크 사냥 적정 레벨임을 감안하면 이는 실로 빠른 성장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나는 27레벨 때 오크를 잡았다. 도망치면서 돌팔매질을 해 뻗게 만들었으니까. 얍삽한 수도 어쨌든 수인데 쓰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는 게다. 아드리엘은 녹초가 된 모습으로 초보자 존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초반에 선물한 카타나도 바닥으로 늘어져 함께 끌려가는 중이었다. 휴식시간도 없이 질리만치 전투만을 이행하는 등, 몸을 혹사시켰으니 저럴 만도 하다. 그래도 금방 회복하여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 다닐 것이라 본다. 피로함은 단지 기분상의 암시효과일 뿐이니까. 엘-가드는 유저의 그저 체력만이 저하될 뿐, 피로라는 개념을 허용하지 않은 게임이니 말이다. 뭐, 정신적인 피로는 있겠지만, 그건 내 알바가 아니다. 한숨자고 일어나면 그만인데 깊게 생각하고 있을 필요성 따윈 없잖아. “그러니까 신경 끄고 내 과제나 수행하자고.” 앞으로 아드리엘과 마주칠 일은 없다. 길가다 만나더라도 아는 척만 할뿐 함께 다니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초보의 비늘을 탈피한 유저는 진즉에 서포트 대상에서 벗어나니 말이다. 그런 이들을 도울 바엔, 내 주변의 이들을 성장시켜주고 만다. 숲과 초보자 존의 경계선에 선다. 네 명의 친구들과 마주쳐 꺅꺅거리기 시작하는 아드리엘을 흐뭇한 행색으로 조용히 응시하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재생의 숲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38의 레벨과,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몸으로 익힌 실전 경험이라면, 무리 없이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레벨도 힘들이지 않고 올릴 수 있겠지. 그럼 즐거운 시간 되라고, 아드리엘. 속으로 욕하고 있을 이 ‘나쁜 인간’은 이만 사라져줄 테니. 나는 한 시간 전 싫다는 것을 ‘납치’하였다가 그녀에게서 들은 말을 상기시키고 피식 웃었다. “이봐요! 그냥 가면 어떡해요?” 스며들 듯 수풀이 무성한 곳으로 잠겨드는 찰나에, 뒤편에서 다급함이 깃든 아드리엘의 음성이 바람을 타고 귓가에 전해졌다. 초보자 존 쪽에서 달려오는 아드리엘의 모습이 비춰진다. 아, 보기 싫어 한시 바삐 자리를 벗어난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인사를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미워하는 거라 여겨 말없이 사라져주려고 했더니만……. 아드리엘이 후다닥 뛰어와 내 망토를 잡고 질질 끄는 것이었다. 케, 켁! 복수인가! “수, 숨막혀! 이거 놓고 말하자고요!” “정말 마지막까지 제멋대로인 남자! 작별인사 할 기회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인사도 안했는데 가려고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복어마냥 양 볼을 북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찢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망토도 놓아준다. 그래, 거기까지는 이해하는데…… 그 후련하면서도 통쾌하다는 얼굴은 뭐야? 결국 복수가 목적이었던 거지? 그렇지? 말은 안했지만 별러왔던 게 분명해! 아드리엘은 내 일그러진 인상에도 아랑곳 않고, 뒤따라 다가온 네 명의 여성 유저에게 매달렸다. “제 친구들이에요. 뭐어, 알려주기도 싫지만, 아는 것이 없어 디테일한 소개는 해드리지 못하겠네요. 헤헤, 미안하게 됐어요.” 무엇보다도 그 ‘알려주기도 싫지만’이라는 부분이 많이 꺼림칙합니다만. 게다가, 은근히 소개하지 말라는 눈치를 주는 이유는 뭐냐! 내 유저네임 알려주지 않았다고 시위하는 것인가!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해서 무시하고 지나칠까하고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래도 구태여 인사하겠다고 와준 사람에게 하는 것치고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고 눈앞의 유저들에게 상체를 살짝 숙여보였다. 그들은 키가 작은 아드리엘과는 달리 늘씬한 체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아드리엘이 동생쯤으로 보일 만큼 성숙해 보이기도 한다. 복장은 어깻죽지에 독수리마크가 수놓아진 검은 타이즈와, 그 위에 튜닉을 걸친 경장 차림. 같은 길드인지 넷 모두가 통일되어 있다. 그 중 한명이 대표로 나서서 허리 숙여 인사하며 입을 연다. “상당한 고레벨이신가 보네요? 3레벨이라고 했던 아드리엘이 이렇듯 40대에 육박하고 있는 보니. 아드리엘 말로는 겨우 세 시간 같이 했을 뿐이라던데, 정말인가요? 거기다 혼자서 엘리트급 몹 사냥이 가능하다는 것도 같이요.” 그렇게 묻는 유저의 표정엔 약간의 호기심과 존경심이 서려있는 상태였다. 남에게 존경받는 것 자체가 어쩐지 우습게도 느껴져 피식, 작은 웃음을 터트리고, 슬쩍 아드리엘을 곁눈질했다. 그새 죄다 폭로했구먼. 빠르기도 하시지. 놀리기라도 하듯 혀를 날름 내미는 그녀를 무시하고 자연스레 고개를 저었다. 엘리트 몹은 엘리트 스킬을 익힌 상태여야만 단신으로 사냥이 가능하다. 유니크 스킬만을 익힌 유저들의 경우엔 다섯이 달려들어야 잡을 수 있는 몹인 것이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다. ‘난 엘리트 스킬 익히고 있다’라고 폭로하는 꼴인데, 내가 정신 나갔다고 일일이 사실을 밝히고 있을까 보냐! 뭐, 아드리엘은 초보 중에서도 생초보라 오랜만에 자랑이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밝히기는 했지만…… 이렇게 입이 가벼운지는 몰랐지. 어찌되었든 부정을 뜻하는 행위에 그녀들은 ‘역시……’하고 낮게 중얼거리며 아드리엘을 흘겨보았다. 의도하지 않은 보복을 가한 셈이다. 이리 됨으로서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된 그녀가 울상을 짓고 있지 않은가. “역시 당신 같은 사람은 딱 질색이야!” “이런~ 나 미움 받는 건가요? 무슨 잘못을 한 게 있다고.” “여린 소녀의 가슴에 무차별적인 못 박기를 했잖아요!” “믿은 사람이 바보지.” 가소롭게 쳐다봐주며 ‘훗’ 비웃자, 욱한 모습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정강이를 걷어차는 아드리엘. 나는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공격을 받았다. 아프면 얼마나 아프다고……. “끄, 끄아!” 이, 이럴수가! 다리가 부러진 것 같다! 내 다리! 내 다리이이이! 치사하게 부츠 앞굽으로 차는 게 세상에 어디 있냐, 이 악독한 여자야! 나는 선물한 것들 중에 티타늄으로 제작된 부츠가 있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앞굽이 뾰족한 금속류 부츠에 풀 파워로 맞아버렸으니 전해지는 고통 또한 어련할까……. 신음하는 나를 보고 아드리엘은 콧방귀를 뀌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걸어가는 것이었다. “이런 인간에게 무슨 고마운 마음을 느껴 작별인사하려 한 내가 바보지.” 아아, 저런 성격인줄도 모르고 속을 긁어댄 내가 바보인 게다. 유저들은 박력 있는 행동을 보여준 아드리엘을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다가 내게 시선을 맞추었다. “호호, 아드리엘을 대신하여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의외인걸요, 아드리엘의 이런 행동은. 꽤 내성적인 성격이라 자기의사표현이 약한 아이거든요.” 저 불타는 콩자반 같은 성격이? 말도 안돼. “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저 애는 소심한 성격이었어요. 그래서 성격을 고쳐주려고 엘-가드에 발을 담도록 만든 거구요. 그러니까 말해 봐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여자의 질문에 나는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어찌 여성 앞에서 오크 창자로 줄넘기를 하고 눈알로 구슬치기를 했다는 걸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텐가.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지 않은 이상 할 수 없는 짓이다. 뭐, 사망한 몹은 삼분 뒤 사라지기 때문에 그리 즐기지는 못했지만……. 그때 아드리엘도 같이 했었더랬지? 실성한 것처럼 ‘꺄하하하’ 웃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정신이 나가서 그랬던 거로구만. 시체가지고 장난치는 광경까지 목도한 판에 대담해지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게야. “꼭 저와 만난 시간 내에 성격이 바뀌었다고는 볼 수 없죠. 저흰 지극히 평범한 방법으로 사냥하고 다닌 것 외에는 한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 전에 발생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전후사정을 따져볼 때 내 영향임이 200% 확실하기는 하다. 하지만 아드리엘은 멀찍이 떨어져 애꿎은 고블린만 작살내고 있으니, 여기서 사실을 아는 것은 나뿐인 것이다. 시치미 뚝 떼고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자 그럴 수도 있다며 수긍하는 그들. 아아, 저들이 순진한 것인지 내 연기력이 뛰어난 것인지 알 방도가 없다. 그녀들은 사정이야 어쨌든 잘된 일이라며 아드리엘의 변화를 반기는 모습을 보였고, 곧 나에게 작별을 고한다. “저희를 대신해 아드리엘을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혹시 다음번에도 해주실 수 있을까요?” “힘들겠군요. 앞으로 만날 일도 없을 뿐더러, 한번 도운 유저는 대상에서 제외되거든요.” “그런가요? 저희보다 레벨이 높으신 것 같아서 부탁드리려 했는데……. 아쉽지만 그건 접어야겠네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드리엘이 빨리 오라고 메시지를 보내네요.” “더불어 ‘그딴 놈이랑 대화하지 말고’라는 문장도 포함되었겠지요.” 시큰둥하게 찌르자 어색한 미소만을 띠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아아, 실로 배은망덕한 유저로구나. 어찌 은혜를 욕으로 갚을 수가 있단 말이더냐! 나는 아드리엘에게로 멀어지는 유저들의 뒷모습을 보며, 재빨리 포션을 마시는 것으로 다리를 고치고(어쩐지 괴물이 되는 기분이었다) 자리를 피했다. 예상컨대, 잠깐이지만 내가 본 아드리엘이라면, ‘응. 그 사람과 줄넘기와 구슬치기 했어’하고 친절하리만치 자세한 동작을 곁들여 설명해줄 게 뻔하니까. 그 외에도 오크머리 족구, 오크치아 공기놀이, 오크손바닥 딱지치기, 오크…… 등등의 사소한 것들도 빠짐없이 고하리라. 흑흑, 기분전환 겸 한 것이 뭔 죄라고……. ―라고는 해도 남들이 볼 때는 워낙에 정상적인 놀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만 있다 보니, 화를 당하지 않으려면 일찌감치 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불어 그러한 이유로 후다닥 튀고 있는 중이다. 아아,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쩌다 내 신세가 도망자 신세로 전락해버렸냐. 그리고 바로 그때, 쩌렁쩌렁한 외침에 숲 전체가 진동하는 느낌을 받았다. 새들이 푸드득 날아오른다. “야이이, 짐승 같은 인간아! 애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아!!” 몰라! 아무것도 안 들려! --------------------------------------------------------------------- 그냥 예전 비축분 거... 조금 수정해서 올립니다. 이번 화를 읽다가 피식 웃기도 했네요... 자기글 보고 웃는 게 우습기는 해도... 그래도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에요. 사람은 웃고 즐기는 데에서 사는 맛을 느낀다는 게 맞는 말인 모양입니다... 하아... 내일이면 77일.. 이 생각하니 다시 암울해지기 시작하네요... 정말 시간이동 마법이라도 있었으면... 수능 바로 다음 날짜로 시간을 돌려버리고 싶은 기분입니다.. 불가능인 걸 알면서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정도로 심란하니 원... 고3.. 아니 모든 수험생분들...! 우리 같이 힘내서 반드시 대학 가요! 그리고 앞으로 대입고사를 치르게 될 학생분들도... 반드시 좋은 결과 있기를 간원합니다.. 30분 정도 걸어 재생의 숲 중앙에 접어든 나는, 지난날의 기억을 모두 청산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사냥에 임하였다. 재생의 숲은 겨울의 숲과는 달리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있는 곳이다. 대신에 풀숲이 넓게 분포하여 있지만 지극히 평범하다는 게 어디인가. 정말 겨울의 숲에서 적은 빛으로 십 단위의 몹들과 전투한 걸 떠올리며 저절로 치가 갈릴 지경이다. 이곳에 주로 리젠되는 몹은 유니크 급의 ‘트롤’. 재생의 숲이라는 이름에 트롤만큼이나 어울리는 몹은 어디에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 심장, 혹은 뇌가 파괴되지 않는 이상 끊임없이 상처가 재생되는 질긴 몹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까다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재생의 숲을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트롤은 무한재생이라는 이점 때문에 다른 유니크 몹들보다 경험치를 더 많이 주는 까닭이다. 타 유니크 몹 세 마리와 롤은 두 마리의 경험치가 같으니, 무엇이 더 효율적인지는 두말할 나위 없이 뻔한 것이리라. 물론 당사자가 트롤쯤은 우습게 사냥할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지만. 뭐, 어쨌든 나야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 별 문제가 없다고. 앞머리를 눈앞으로 늘어트려 얼굴을 감추고 드래곤 슬레이어를 빼들었다. 헬 스킬을 쓸 작정이니 이러한 것은 필수적인 요소다. 이곳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혹시라도 유저들이 맨 얼굴로 헬 스킬과 드래곤 슬레이어를 사용하는 나를 발견하면 곤란해지는 건 이쪽뿐이었다. “이제 슬슬 시작해야하나.” 슬림형 포션을 벨트 바깥쪽 칸에 꽃아 두는 것으로 완전한 채비를 마친 뒤, 먼저 잔디만이 무성한 커다란 공터를 찾았다. 몰아서 한번에 쓸어버릴 작정이니 뛰어다녀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공간 확보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전에도 몇 번 와본 적이 있었는지라 기억을 더듬으며 숲을 배회하자 공터는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운동장 반 정도 크기의 잔디밭이다. 그럼 일단 시급한 조건 하나가 충족되었으니 가장 중요해진 것은 몹이 있어야한다는 것인데……. 거울의 숲처럼 몹이 무더기로 돌아다니지 않는 곳이니 조금 수고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하지만 곧 유니크 몹의 특성을 떠올리고 걱정을 지웠다. 유니크 몹 대부분이 호전적이어서 기척 한 번 내주면 금방 모여드는 것이다. 멀리 흩어져있으면 자리를 옮겨가며 놈들을 불러 모아야겠지만. 이미 근처에는 몹으로 추정되는 열댓 정도의 기척이 곳곳에 산재해있었다. 아마도 내가 이곳을 찾아올 때 기척을 느끼고 같이 따라온 모양이다. 내 수고를 덜어줘서 고맙다고 해줘야 할까? 워밍업으로 가볍게 몸을 풀 수 있는 기회도 함께 준 셈이니까. 목과 어깨를 돌려 몸을 긴장시키고, 어슬렁어슬렁 나타나 주변을 빙 둘러싸는 트롤무리를 가소로운 눈초리로 응시한다. 총 열네 마리. 하나같이 쇠고랑처럼 단단해 보이는 누런 손톱을 세우고 있다. -크르……. 놈들은 내 도전적인 시선에 낮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대화하듯 서로를 돌아보며 으르렁거리다, 별안간 예고도 없이 공격을 감행한다. 트롤의 주무기는 예리한 손톱과 완력. 별로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아무리 내 레벨이 높다한들 자칫 급소를 얻어맞을 시엔 단숨에 이승하직. 허나 나는 네놈들에게 죽어줄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거든! -그와악! 근처의 트롤이 손톱을 세워 제멋대로 휘두르는 공격을 피해주고 오른손을 놈의 등허리부근에 대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세영이 빌려준 뇌심의 단검을 뽑아 척추에 박아 넣는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나다한들 척추가 끊기면 전신이 마비되는 것이 지론이다. 유저라면 일격에 죽을만한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나는 그곳을 기점으로 원을 돌듯 반 회전했다. 이어 고통에 찬 괴성으로 포효하며 무너지는 트롤을 지나쳐 몸을 날린다. 촤아―! 방금 쓰러진 놈의 뒤편에 위치한 트롤의 다리 사이를 슬라이딩으로 빠져나가며 양 발목을 붙잡았다. 육중한 몸무게 덕분에 쓰러지지는 것은 면했지만 일순간 놈의 밸런스가 무너진다. 일순의 틈을 놓치지 않고, 등 뒤로 빠져나와 자세를 잡는 즉시 트롤의 목을 베어넘겼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예리함 때문인지 별 힘도 주지 않았는데도 놈의 머리가 여지없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푸슛. 목의 절단면에서 펌프질되어 솟구치는 파란색의 피. 심의에 걸려서가 아니라 본초부터 트롤 특유의 피 색깔이다. 강산성을 띄고 있는 트롤의 피가 튀기는 곳마다 치직소리를 내며 옅은 연기와 함께 타들어갔다. 미리 알고 피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내 잘생긴 얼굴도 같이 망가질 뻔했다. 지잉―. 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배후로 스쳐지나가는 서늘한 살기! 다음 순간, 다른 트롤의 손톱이 망토서부터 내 등을 깊숙이 꿰뚫는다! 스악! 그러나 놈에겐 안타까운 일일 테지만 고작 망토만을 뚫었을 뿐이다. 나는 등이 꿰뚫리기 직전에 망토를 벗어던진 것이다. 실로 멋지지 않은가? 이 화려한 개인기! 이 정확한 판단력! 캬, 판타스틱한 동작이다. 영화사에선 왜 나 같은 이를 캐스팅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액션스릴러 쪽이면 짭짤한 수입을 보장해 줄 수 있는데. 최근에 나오는 판타지, SF, 전쟁 등의 영화들 대부분이 가상 세계 내에서 촬영되어진다. 게임 내라면 온갖 화려한 효과와 소품이 주어져있으므로, 따로 번거롭게 그래픽작업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게임사와 상호협력 하에 이루어진다. 영화사에서는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으니 이득이고 게임회사 측에서는 돈도 받고 게임 광고효과까지 불러오니, 이야말로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 아니고 뭐겠는가. 거기다 게임 내라면 유저들이 득실거리니만큼 엑스트라로 쓰이는 것도 바로 유저다. 여기서 잘만하면 픽업(Pick Up)되어 일약 대스타가 될 수도 있다. 아, 물론 미남 미녀라는 전제 하에. 나도 미소년인 관계로 이 조건에 부합된다, 이 말씀이지. 하지만 이러한 많은 이득에도 불구하고 미르트에선 한번도 영화 촬영을 허락하지 않았다. 타 게임들과는 달리 완성도와 효과 등이 뛰어나 촬영요청이 쇄도하지만 모두 내치는 실정이었다. 이러니 내가 선택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뽑히지 않을 이유가 없어! 뭐, 최근엔 조짐이 엿보인다. 일단 홈페이지 설문에선 영화 촬영을 허락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투표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현재 집계 상황이라면……. 단 일주일 만에 ‘해야 한다’로 전체 투표수의 98%에 달하는 3천 8백만 표가 몰려있으니 이미 상황종료였다. 이것도 초반이어서 계속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니 역전의 여지가 없다고. ‘해야 한다’에 표를 준 이들은 꿈을 꾸는 소년 소녀인 것일까? 하여튼 요즘 청소년들은 유치하다니깐. 트롤은 펄럭이는 망토에 머리부터 뒤덮인 모습으로 꼴사납게 지면으로 널브려졌다. 둥실둥실한 머리가 잡수라는 듯 내 쪽으로 진상되었다. 어찌 이 귀한 만찬을 물릴 수가 있을쏘냐! 머리를 발로 가벼이 즈려밟고 목을 절단해내었다. 한차례 감전된 듯 전신을 부르르 경련하던 트롤의 시체는, 이내 잠잠해져 파란 피로 지면을 적신다. 그럼 다음 목표는 남은 12마리의 트롤. 물론 추에 검이 박힌 채로 바닥에서 빌빌대고 있는 놈도 포함된 수다. “아아, 사냥이 즐거워지겠어.” 스피드, 힘, 두뇌 모든 면에서 내 쪽이 몇 배는 유리하다. 이러한 판단을 내리자마자 왼쪽에 있는 트롤에게 기습적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놈이 움찔하고 허둥지둥 팔을 들어 드래곤 슬레이어를 막는다. 손톱과 칼날이 두세 번 불꽃을 튀기고, 그 손톱이 허무하게 잘려나가는 일순간에 트롤에게 틈이 생겼다. 기회! 마지막 하나 남은 단검이 트롤의 옆구리 깊숙이에 끝까지 박혀 들어간다. “크르!” 헌데 이놈이 자식이 신음인지 웃음인지 조그마한 소리를 흘리며 히쭉하고 웃는다. 명석한 나는 금방 그 웃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기술로는 결코 날 이길 수 없다는 것 알아채 일부러 틈을 보여 자신을 공격하게 한 것이다. 이쪽의 움직임이 멈춘 그 일순의 순간을 노려 역습을 취하기 위해서. 출중한 재생능력이 있어 가능한, 진정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전법이다. 이런 전술이 트롤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지만 나는 다른 의미에서 놀라버렸다. 하지만 트롤의 재생력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시행한, 연계공격으로 이어지는 공격이었다. 다시 말해 이 놈은 개짓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나는 놈의 오른쪽 어깨가 들썩이는 순간 승부에 종지부를 찍었다. 레어(Rare) 시어 스킬(Shear Skill) 레벨 에잇(Level Eight) 포인트 익스플로드(Point Explode)!! 스킬을 발동시킨 즉시 몸을 숙이고 뒤쪽으로 백 핸드스프링(Back Handspring)하여 트롤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왼쪽 팔뚝이 놈의 손톱에 긁혀 따끔거렸지만 무시할 수 있을만한 경상이다. “크와아악! 와악!” 5미터 정도 물러난 뒤에 그 트롤을 보니 단검이 박혀있는 옆구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아마 몸 안에선 작은 폭발이 연쇄적으로 작열하고 있을 터다. 포인트 익스플로이드는 검의 포인트(뾰족한 부분)에서 강도가 올라가며 30차례 폭발하는 기술이기에. 그리고 마지막 30번째에선 크게 폭발할 테지. 트롤은 고통스러운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악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다가 30번째 폭발이 이루어지는 순간! 파아앙! 하고 전신이 터져버렸다. 역시나 체내의 폭발은 확실한 죽음을 보장했다. 조각조각으로 분쇄된 육편(肉片)이 파란색 피와 더불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잡템들(Useless Item : 상점매각용 아이템이라고 한다). 저런 구두쇠 같으니……. 좀 좋은 것 좀 줄 수는 없는 거냐? 명색이 유니크 몹이라는 것이 말이야, 쯧! 놈들은 내 표독스런 시선에 움찔하며 섣불리 공격을 감행하지 못했다. 나는 놈들을 죽 훑어보고 히죽 양 입술 끝을 말아올렸다. 고작 열네 마리 트롤에게 익스펠 된다면 드래곤 헌터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간다.” 놈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렇게 충고해주고 오른발을 뒤로 빼 지면을 깊숙이 밟았다. 습기를 머금은 지면이 하중을 못 이기고 꾹 함몰된다. 나는 그대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역수로 쥐어 등 뒤로 끌어당기고 몸을 웅크렸다. 엘리트(Elite) 헬 스킬(Hell Skill) 레벨 쓰리(Level Three) 플레어 크래시(Flare Crash)!! 캐스팅이 끝나자 웅크렸던 몸을 순간적으로 펴며 드래곤 슬레이어를 아래서 위로 그어 올렸다. 화악! 검붉게 달아올랐던 드래곤 슬레이어의 검신이 본래의 묵색으로 되돌아오고 전방으로 폭사되는 화염! 강한 중압으로 지면에 고랑을 만들어내며 뻗어가던 화염은 트롤들은 남김없이 삼켜버리고 뒤편의 숲을 쓸었다. 투콱! 거대한 거목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타기 이전에 단어 그대로 부서져버렸다. 그리고 이어 뜨거운 불길이 자작개비들을 모조리 태워버린다. 난폭하게 숲을 쓸어버리던 불길은 몇 초 후 힘을 잃어 소멸했고, 그것의 잔여물인 열풍이 화악하고 불어와 몸을 훑는다. “…….” 전방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45도의 부채꼴모양으로 오십 미터 지점까지의 거목들은 깨끗하게 소멸되었다. 뿌리가 뽑히면서 솎아져 움푹 파인 웅덩이만이 그 자리에 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따름이다. 일대는 열기에 의한 아지랑이 때문에 조금 일그러져도 보였다. 트롤들이 남겼을 아이템들도 쓸렸는지 눈에 비치는 게 하나도 없었다. -------------------------------------------------------------------------- 이거... 머리 식히고 온다고 해놓고선 할 건 다하는 군요... 벌서부터 직업병에 눌리는 걸까요... 쓰지 않으면 뭔가가 허전하니 원... 어쨌든... 오늘 학년 초에 학교에서 나눠주었던 수학 고재를 펴보았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펴본거라 공식들이 낯설게 느껴지더군요. 뭐, 본적도 없으니 당연한 반응일까나... 책장을 빠르게 넘겨보았는데 겉표지만 헐었을 뿐 속은 새것처럼 깨끗하더군요... 심지어 자주하던 낙서조차도 없었습니다. 제 학교 생활의 방탕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여서, 보고 있노라니 굉장히 마음이 쓰리더군요. "지금까지 내가 한 것은 무엇이지?" 이런 생각이 들면서... 뿌옇게 수막이 쌓이는데... 에휴... 어쩐지 서글퍼지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해서 담임 선생님께 상담을 요청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오늘은 차마 내키지 않아 가지 않았지만... 내일은 가봐야겠죠. 곧 2차 수시 시작되고 내일이 모의고사보는 날이니까요... 하아... 수능이라도 310점만 나오면 천추의 여한이 없으련만... (지금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잠깐 공지. 현재 3권은 거의 날리다시피 쓰고 있습니다. 아마 지금까지의 스토리를 떠올려보면 금방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일단은 계속해서 이렇게 써나갈 겁니다. 가뜩이나 심란하고, 더군다나 시간도 빠듯하니까요. 후다닥 쓴 다음 대대적으로 손을 볼 생각입니다. 수정과정에서 추가되고 삭제되는 게 제법 있을 거라 예상됩니다만.. 되도록이면 지금 이 이야기들의 대부분을 살릴 겁니다. 왕창 바꾸면 오히려 득되는 게 없을 듯 하니까... 아, 그리고 책은 10월달 혹은 수능 끝나고나서 출판하기로 했습니다(뭐, 아직 후자에 대해선 출판사 측과 이야기하지 않은 상태입니다만..). 아마 3권 원고가 9월달 이내로 끝난다면 일정은 앞당겨 질 테죠... 아마도... 현재 엘-가드는 4권 완결로 생각중입니다.. 예전처럼 스토리가 질질 늘어질 경우엔 5권이 될 테죠.. 하지만 이제부터 제가 자제하여 확실하게 스토리를 잡을 거예요. 가끔 필요한 부분은 길어질 테지만... 이야긴느 지루하지 않도록 적당선에서 끊겠습니다. 아...그나저나 피곤하네요... 이만 자러가야겠습니다. 내일 모의고사 보니.. 졸지 않으려면 일찍 자두어야 겠지요... 휴... 내일은 푹 쉬어야지... Level 10. 교차. (11) 이번 화를 읽으시기 전에... 원래 10화로 올라갈 부분이 비축분으로 있었습니다. 이번 화도 그 비축분의 일부였었죠. 아마 2장 정도 밀려난것 같은데... 도무지 그부분이 서지질 않네요.. 대략적인 줄거리는 남아있는데.. 어떻게 썼는지는 모르겠어요. 결국 생각나는 이부분을 먼저 쓰게 되었습니다. 뭐, 본래 분량에서 조금 더 늘어났네요.. 아무튼.. 2장의 줄거리를 이야기해 드리자면... 트롤들 죽이고 아이템 날아간 장면까지 썼었죠? 그 다음 장면입니다. 아마 글로 변환하되 연재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헷갈리기 때문에...(전에도 스토리 뒤죽박죽으로 올리는 일이 있었죠? 그거때문에 글 다시 올리고...) 이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겁니다. ### 류현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모습으로 장소를 옮겼다. 몹을 끌어오기 위함이다. 일부러 휘파람을 불고 나뭇가지를 잘라내는 등으로 기척을 내면서, 몹들을 불러모으는 류현. 몹의 수가 10~15마리 정도 되면 공터로 돌아와 헬 스킬로 쓸어버리는 식으로 20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도중 어느 샌가 접속한 세영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와 사냥을 멈추는 류현. 자신의 스태미너가 (제 소설에선 만복도와 동일합니다. 최대수치 100이며, 스태미너가 0이 되면 스킬 사용 불가입니다. 1~10까지는 스킬의 위력이 저하됩니다. 더불어 체력 소모도 커집니다.) 10 미만임을 확인하고, 세영에게 트렌의 옆도시이며 친구들과 자주 들르던 레스토랑에 가있으라 답신한다. 세영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하고 류현은 사냥을 마무리 짓고 아이템을 챙겨 약속장소로 향한다. 그리고 레스토랑에 들어서서 음식을 시키는 류현. 식당 제일 끝쪽의(입구의 카운터에서 대각선으로 가장 끝자리)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 둘.(이때 세영은 류현을 가만히 응시하다 작게 미소짓는다.) 세영은 류현이 스테이크를 주문하자 같은 것으로 시킨다. 제법 잔잔한 음악과 함께 한가로움이 흐르는 식당 안. 알게 모르게 들어온 유저들로 어느샌가 식당안은 조금 산만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주문한 스테이크 정식이 그들의 테이블에 올려진다. 그리고 스테이크를 써는 순간. ### “여어, 합석해도 괜찮을까?” 주문한 스테이크정식이 테이블 위에 올려지고 나이프를 들려할 때 옆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머리를 하고 평범한 인상의 남자가 싱글싱글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비춰진다. 가진 거라곤 가죽 끈을 둘러 등에 매어놓은 폭이 넓은 검과, 성글게 짜여진 낡은 셔츠, 바지, 부츠에 탁한 가죽 갑옷이 전부다. 검쓰고 돈 없는 유저로선 흔한 모습이다. 나는 흘끗 사내에게 눈길을 주고 다시 시선을 음식이 가득한 테이블로 옮겼다. 세영은 눈길 자체를 주지 않고 묵묵히 스테이크를 썰고 있다. “휘유―. 그렇게 쌀쌀맞게 대하지 말라고, 아가씨. 더 매력적으로 보이잖아.” 저…… 느끼한 말을 잘도 내뱉는군. 사내는 휘파람을 한 번 불더니 살랑살랑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의 눈은 세영에게 닿아있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보면 종종 이런 일이 생기기도 한다. 특히 눈에 확 띄는 미녀가 있을 시엔 그 빈도가 늘어난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것이었다. 흔히 말해 작업 들어온다고들 하는데…….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조각낸 스테이크를 입으로 가져다대는 세영에게, 빨간 머리 유저는 아주 친한 사이처럼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부드러운 동작으로 세영의 어깨를 주무른다. “이름이 뭐지?” “…….” “난 오노라고 해.” “…….” “뭐라고 말 좀 해봐. 아니면, 이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었나?” 스윽. 자신을 오노라고 소개한 유저는 음침한 웃음을 얼굴에 걸고 손을 움직였다. 세영의 어깨위에서 배회하던 거칠한 손이 검은 머릿결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 엉덩이에 닿으려 한다. 내 눈이 꿈틀, 경련을 일으켰다. 간만에 맛있는 식사를 즐기려했더니 별 거지같은 놈이 와서는 기분 잡치게 만드네. 맞고 싶으면 때려달라고 말하라고. “꺼져.” 손은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다. 허리춤에서 검집 채로 검을 떼어내 놈의 손목을 쳐올렸다. 한데 ‘퍽!’ 가벼운 소리가 들리리라는 생각과는 달리, ‘빠각!’ 상당히 기운찬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황망한 눈초리로 오노를 보았다. 하하, 저런. 방어력이 대단히 약하시구려. 별로 세게 친 것도 아니었는데……. 난 잘못 없다. “으윽!” 오노는 부러진 왼손을 부여잡고 과장된 신음을 내뱉는 등의 호들갑을 떨며 몸을 뒤로 젖혔다. 팔을 부러트린 것이 쪼오금 미안하긴 해도, 이대로 끝낼 생각은 없었기에 검 끝으로 그의 복부를 찍어 뒤쪽으로 밀쳐냈다. 오노는 재빨리 균형을 잡지 못하고 뒷걸음질치다가 뒤쪽 테이블 위에 똑바로 쓰러졌다. 콰장창! 테이블은 깨끗하게 부서졌다. 나무의 잔해와 뒤섞인 음식들이 바닥을 장식했다. 아, 더해서 한 가지 말해두자면 그 테이블에는 험악한 인상을 한 다섯 명의 유저가 식사 중이었다. 생긴 것만으로는 조폭 저리 가라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 250레벨의 유저. 고작해야 210레벨로 밖에 보이지 않는 오노가 감당해낼 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이 새끼! 뭐하는 짓이야!?” 조폭들의 정겨운 식사를 망쳐버린 오노. 왼쪽 눈에 세로로 깊게 패인 상처가 있는, 나이 삼십대 가량의 유저가 그의 멱살을 그러쥐고 번쩍 들어올렸다. 나는 작게 감탄했다. 오노도 그런대로 덩치가 있는데 그걸 한손으로 가볍게 들어올리다니……. 힘이 장사시군, 아저씨! 오노는 부러지지 않은 오른손으로 남자의 손을 잡고 발버둥쳤다. 가뜩이나 험악한 남자의 면상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콧잔등이라든지 입가라든지 주름지지 않은 곳이 없다. 만약 뒤에서 검은 연기만 피워준다면 악마의 화신이 따로 없을 듯 하다. “새끼! 아주 사시미를 떠주마!” 봐, 조폭 맞네. 요즘 조폭들은 여기저기 수금하러 다니지 않고 게임만 하나봐? 일갈을 터트린 사내는 오노의 면상을 솥뚜껑만한 주먹으로 갈겨버렸다. 뻐억! 끔찍하게 아픈(느끼는 것으로는 그다지 아프지 않을 테지만) 음향이 대기 중으로 번지고, 한대 강하게 후려 맞은 오노는 붕 떠서 다른 테이블을 박살냈다. “뭐야! 어떤 자식이 무단 쓰레기투기를 해?!” “…….” 쓰레기라. 확실히 맞는 표현이기는 한데……. 오늘 이곳에서 조폭들이 친목회라도 갖는 거냐? 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네 명의 얼굴도 만만치 않았다. 어디 한군데는 꼭 흉터가 있었다. 비단 두 테이블만이 아니라 식당 안 모든 남성 유저들의 얼굴은 험악하다. 흉터가 없는 게 어색하게 보일지니 여기다 뭐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당연지사 그곳에서도 소란은 일어났다.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오노는 한 유저에 의해 다른 테이블로 날아갔고, 테이블의 유저들은 오노를 날렸던 테이블 쪽으로 병장기를 들고 치주해가는 것이었다. 싸움이 일어나든 말든 오노는 돌고래가 바다위로 점프하는 것 마냥 근육질의 유저들에 의해 여기저기로 날아다녔다. 그리고 오노가 일말의 테이블의 음식들마저 바닥으로 쏟아버렸을 때, 일대는 대 혼란에 휩싸인 상태였다. “크악! 흉터도 조그만 자식이 설쳐대기는! 적어도 내 흉터만큼은 돼야지!” “어디서 맞고 와서는 잘난 척 하기는!” 조용하던 식당 안은 순식간에 시끄러운 전쟁터로 변모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결코 내 탓은 아니다. 탓이라면 저 전쟁터의 중앙에서 숨 가쁘게 도망치고 있는 오노라는 놈이 원흉이다. “죽어!” “썅! 물지 마!” 쾅! 퍼엉! 에타이의 한 고급 음식점. 음식 맛은 결코 나쁘지 않지만 빌어먹게도 요번에 방문한 손님들의 질은 몹시 떨어졌다. 오늘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제법 성깔 있는 유저들만 자연스럽게 모여들어버린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한가운데서 일어난 난투극은 점점 확산되어 가라앉을 기미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아, 이제는 유저가 음식을 대신하여 활공한다. 인간폭탄일까? 음, 확실히 그런 것 같다. 날아다니는 유저들의 얼굴들이 폭탄과 어깨를 나란히 한 얼굴이니까. 그런데 혹시나 누군가가 오해할까 우려하는 마음에서 한마디 해두겠는데, 나는 결코 이런 부류의 인간이 아니다. 맛있다고 소문 난 식당에 한번 왔다가 우연찮게 난투극이 벌어졌다고 해서, 일부러 그런 말썽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은 터럭만큼도 없다. 나는 원래가 평화를 사랑하는 평화주의자다. “…….” 진짜다. 정말이라니깐? 그런 연유로 구석 쪽에 있는 테이블에 오도카니 앉아 스테이크를 통째로 씹으며 혼전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는 일념 하에. 식당 안의 풍경은 치고받고 물어뜯는 아비규환의 지옥이 따로 없었다. 테이블은 어느새 수직으로 세워져 바리게이트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고, 그 위로 접시 채 날아다니는 갖가지 요리들과 식기들은 폭탄과 총탄을 방불케 했다. 아이고, 저 아까운 것들을……. 음식가지고 장난치면 벌 받는다, 이것들아! 음식도 귀중한 자원이야, 자원! 현재 무사한 테이블은 우리 테이블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가장 구석이어서 여태껏 살아남은 것이다. 세영은 이 소란 속에서도 묵묵히 잘게 자른 스테이크를 입안에 넣어 우물거리고 있었다. 무신경한건지 무관심한건지 모르겠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세영을 경이롭게 봤다는 것 정도. 마지막 조각까지 처리하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세영은 주변을 가라앉은 눈으로 둘러보고 말했다. “이런 곳은 싫어. 나가자.” “…….” 이미 먹을 거 다 먹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너 참 대단하다. 경이로운 눈초리가 질렸다는 눈초리로 변화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세영과 나는 벽 쪽으로 붙어 식당을 나섰다. 도중에 음식이 날아오기도 했지만 가볍게 막아냈다. 개중에 양호한 것이 있으면 먹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먹는다 해서 죽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랴. 레스토랑을 나선 우리는 되도록 빠르게 그곳에서 벗어났다. 폭발음에 이끌려 건물 주변으로 빼곡히 몰려든 유저들 때문에 움직이는 게 힘들었지만 얼마간의 사투 끝에 도망칠 수 있었다. 50명은 넘는 유저가 벌이는 패싸움이다. 곧 도시 치안대의 경비병NPC가 출동할 것이고, 이렇듯 멀리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까지 말려들 우려가 있다. 이런 소란은 엄청난 벌금과 함께 최소 하루 동안은 접속차단을 당해야 했으니 일단 튀고 보는 게 상책이었다. 그냥 로그아웃 하는 방법도 있지만 음식으로 공격해도 공격은 공격이기에 페널티가 걸려 5분간은 로그아웃이 불가능했다. #### 흠... 설정집.. 생각하면 할 수록 울분이 치솟는군요.. 150장... 이거 만드는데만도 몇주를 소모했건만.. 아허... 그리고 제피로스... 그냥 연재할 것을... 힘들게 50장 써놓고서.. 그냥 날려버리다니... 아허... 또한 마법검 에류시아드... 미리미리 수정해서 연재해 놓을 것을... 아악... 젠장... (이제 수능은 다쳤다... 흑...) 허둥지둥 레스토랑을 벗어난 뒤, 곧게 뻗은 관도를 천천히 걸으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내게 손을 잡혀 딸려온 세영은 어떻게 되든 관심 없는 듯 무덤덤한 얼굴로 일관되어 있었다. 자신 때문에 발생한 일임을 알고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억지 이유이긴 하지만, 세영의 외모는 타인의 눈을 대번에 끌 정도로 정점인 것이다. 몰매를 감수하고서라도 접근하는 게 결코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나는 측은한 눈길로 세영을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도 참 성가시겠다.” “……많이.” 생각해보면 세영과 함께 다닐 때면 관례로 착각될 만치 파리들이 들끓었던 것 같다. 용감무쌍을 넘어서 무모함의 극에 다다른 유저들은, 나 혹은 친구들에게 결투를 요구하기도 하고, 뻔뻔한 놈들은 다짜고짜 프러포즈라든지 손목잡고 무작정 끌고 가려 했으며, 소극적이거나 위 경우에서 무시당한 이들은 서슴없이 스토킹을 행하였다. 물론 예상하다시피 각각의 경우는 나에 의해 최소가 스턴, 고문, 몰매, 사망으로 매듭지어졌다. 현실에서 일어났다면 몇 대 패는 것으로 싹수를 잘라냈고. “침묵만하지 말고 직접 싫다고 말하는 건 어떠냐.” 유나는 착하면서도 필요한 때엔 매정해질 수 있는 결단력 있는 소녀였다. 필요 없다고 판단되는 일엔 고집피우지 않고 남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특히 죽지 않는 미소로 인해 헌팅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 후엔 웃으며 상대를 타이르는 것으로 곤란한 상황을 유연하게 타개했다. 나는 이를 상기하고 세영에게 권고하는 것이다. 비록 웃지는 않을지라도 무시하는 것보단 딱 잘라 말해두는 것이 뒤끝이 깔끔한 법이다. 뭐, 상대에 따라선 오히려 거절하는 것에 열 받을지는 몰라도, 그런 유형은 소수에 속하지 않겠는가. 세영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보석 같으나 냉막한 눈동자는, 지금 그녀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다. “네가 있으니까.” “메야?” 이윽고 들려온 대답이 원체 엉뚱해서 떨떠름한 얼굴로 세영을 흘겨보았다. 뭐냐, 내가 네 경호원인 줄 아냐? “외모만 보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싫어. 그들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우물거리고 총총히 거리를 가로질러가는 그녀. 나는 잠시간 가련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재빨리 뒤를 쫒았다. 싫다는 이유보다는 귀찮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데. 반듯하게 다져진 관도 위엔 연인과 함께 말을 타고 유유히 여행하는 유저들이 있는가하면, 노점을 차리고 흥정을 하는 상인, 이성에게 추파를 던지는 남자, 퀘스트 수행을 위해 파티원을 모집하는 이들 등, 많은 유저들이 어우러져 생명력 넘치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하늘은 덧없이 푸르고 내리쬐는 햇볕은 따갑지 않아 불쾌감을 주지도 않았다. 세영은 확연하게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나름대로 현재를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입가에 번진 옅은 미소가 내 추측을 입증해준다. 뭐랄까, 그녀는 지극히 행복해보였다. 굉장히 즐거운 것 같다. “무슨 할말이라도?” 아,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봤나. 대번에 미소를 감추고 가는 눈매로 지그시 응시하는 세영. 나는 겸언 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별로……. 어쩐지 즐거워보여서 신기했을 뿐이거든.” “……그렇게 보여?” “아아.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봐?” 대답 없이 표정을 죽인 채 얼굴을 조심히 어루만지던 세영은, 이내 고개를 희미하게 흔들었다.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입술을 달싹이고 등을 돌리는 것이었다. “……가까이에 있으니까.” 미풍처럼 아련하게 들려오는 음성. 하얀색 깃털을 가진 비둘기들이 푸드득 날갯짓하고, 성당 종탑에서 종이 울리며 은은한 소리를 사방으로 퍼트린다. 세영의 모습에서 이유모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처진 어깨에도 아릿한 쓸쓸함이 보이고 있다. 가슴이 막힌 듯이 갑갑해진다. 도무지 ‘가까이에 있으니까’라는 말의 의미가 해석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캐묻고 싶었지만, 그런 짓은 너무 깊게 참견하는 것 같아 망설이다가 결국 그만두었다. 다만,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돌려버릴 뿐. 나와 세영은 다시 거리를 걸었다. 나나 세영이나 이타의 목적이 있어 에타이를 방문한 것이 아니기에 정확한 목적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더불어 여기에 따로 의견을 묻고 싶은 마음도 없다. 마음가는대로, 발이 닿는 대로 여유롭게 현재를 즐기고 싶다. 간간히 군것질도 해가며 이어지는 에타이 관광. 막 지나친 문제의 레스토랑은 어찌어찌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창 안으로 힐끔 살펴본 레스토랑은 데이터 리턴이라도 했는지, 전투의 작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주인에게 미안했는데 이제 신경 꺼도 되려나? 지금껏 말이 없던 세영도 이를 봤는지, 정복불가능한 철옹성의 철문같이 굳게 닫혀있던 입술을 비로소 열며 숨결을 토해냈다. “그 유저도 붙잡혔을까.” “무사히 도망쳤다면 우리처럼 열심히 싸돌아다니겠지. 헌데 이제껏 마주치지 않은 것을 보니 결국 못 빠져나간 모양이야.” “잘된 일이네…….” 내색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원한은 남아있었나 보다. 그런 작자와 몸이 닿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울화가 치미는 걸까나. 이건 추측이지만, 오노 그자식이 성공적으로 도주했다면, 우리가 에타이를 배회하는 내내 마주치지 못하는 상황은 일어날 수 없다. 일단 세영을 노리는 강인한 집념과 나에 대한 복수심리가 남아있을 것이 뻔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영보단 적겠지만, 나도 유나와 그녀의 곁에서 수많은 남자 유형을 접했고 이제 분간할 정도의 능력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우선 오노같이 몸부터 더듬는 놈들은 마지막까지 끈덕지게 들러붙는 유형이므로 쉽게 마무리될 범주의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내가 있음에야 전력으로 정보를 캐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왜냐! 이 유형에 해당하는 모든 남성 전원이 그러한 까닭이다. 더불어 오노는 더 필사적이 되었으면 되었지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뭐, 결국 논점은 오노는 블록이다, 일까. 어쨌든 놈이 징계에서 풀려난다면 반드시 내 앞에 나타날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다면 이쪽은 귀찮아지지 않으니 오히려 좋은 일이고. “류현.” 레스토랑을 지나 바람 따라 여행하는 여행자가 되어 걸음을 딛는 나와 세영. 오노와 마주치면 어떻게 요리해줄까 고심하다가 문득 속삭이듯 가까이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세영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져 있었다. “잠시만 이러고 있을게.” “이봐……. 어이…….” 조심스레 팔짱을 껴, 머리를 기대오는 세영을 넋 나간 눈으로 응시했다. 그러다가 돌연 어제 이벤트 협회에서의 일이 생각나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성가신 족속들이 널려있었다. 나는 정신 못 차리고 슬금슬금 이쪽으로 기어오는 너구리들을 노려보고 걸음 폭을 크게 변경했다. “지연누나는 잘 들어왔어?” 주변을 향한 관심을 끄기 위해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매미처럼 꼭 붙어있는 세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늘 언니 생각만 하는 구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불어오는 바람에 길가에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나무들이 사아아― 현란한 연회를 열고 있었다. “내가 지켜줘야 할 사람이니까. 각별한 사이인 만큼 누나생각만 나는 수밖에.” 일순간 팔짱을 낀 세영의 팔에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다. 혹시나 하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상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에 고개를 드는 그녀. “언니 오늘 오후에 들어왔어.” “어제가 아니고?” 세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마치 더 이상 말하기 싫은 것처럼 입을 꾹 닫고 머리를 기대는 것이었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로그아웃 하자마자 지연누나에게 전화부터 해야겠는걸. 젠장 -_-;; 완전히 좌절입니다!! 후기도 글을 날려먹냐! 망할 ESC!! 아무튼 간략하게 줄여서 말하자면.. 저 퇴원했습니다. 아직 오른족 목부터 어깻죽지가 찬물에 담근듯 시큰거리기는 해도 학교에 가야하게 때문에.. 그리고 코멘트에 쾌유를 빌어주신 분들과 응원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얼마나 감동했는지 몰라요.. 기운이 나네요^^ 아아, 그러고보면.. 정말이지 가시밭길이네요. 학교 선발 준비하다가 몇일 날려먹은 뒤 탈락.. 다시 글쓰려고 하니 파일 오류로 글 모조리 날려먹고..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고 집필모드로 나가니 교통사고.. 이 다음은 수시준비와 함께 수능준비.. 이야, 굉장한 시나리오로군요.. 다음은 수능, 그리고 대학 원서접수전쟁 -_-; 나, 무사히 출판할 수 있으려나..; 아, 출판 이야기 나와서 하는 말인데요. 책 빠르면 9월 말이나 10월 초, 늦으면 12월[...]에 나올 것 같습니다. 3권 원고 거의 맞춰지면 출간할 생각이거든요. 그래야 한달 간격으로 책이 나오죠. 완결은 4권 확정입니다. 뭐, 제피로스는 대충 8권이 될듯 한데.. 이것도 출판 제의가 들어와야 가능한 일이겠죠? 흠흠.. 이만 줄이겠습니다. 어깨도 아프고 졸리기도 하네요. 그럼 내일 뵈요. 반드시 연재다아아아!! 덧. 전 왜이리 집필 속도가 느린 걸까요.. 하루에 몇편이고 쓰시는 분들 보면 부러워 죽겠습니다. 나한테 비법전수좀 해줘요!!! 덧2. 문장력 좋은 소설 필사나 해볼까요.. 그러면 집필 속도 빨라진다고 하던데.. 에라이..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이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 둘은 어느 샌가 도시를 한바퀴 돌아 중앙의 사거리를 향하여 걷고 있었다. 여전히 세영은 바짝 붙어있는 상태다. 에타이를 벗어나기 전까진 이상태가 유지될 듯하다. 쩝, 이래선 잠시라고 볼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잖아. 이쯤 되면 유저들에게 (비록 조작되었을 지라도) 어떤 사이인지 충분히 인식되었을 텐데 계속 이러고 있을 작정인가? 뜬금없이 왜이래? 귀찮은 것보단 팔이 저려서 이만 떨어지라고 눈치를 주는데도 세영은 도무지도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고 팔을 살짝살짝 흔들어보기도 했으나 무반응이어서 결국 체념해버렸다. 으휴, 될 대로 되라지. 체력뿐이 더 다냐. “유저들…… 달려가고 있어.” “아?” 지친 행색으로 어깨를 늘어트리는데, 세영이 실낱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더불어 팔을 옥죄던 갑갑함도 함께 사라졌다. 그녀의 말대로, 유저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일시 다발적으로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었다. 다급함이 묻어있는 모습이다. 주변 대기가 그네들이 토해낸 숨결에 달아오른 것 같은 착각될 만큼 격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큰 시장에서 느껴지던, 사람의 열기였다. 그리고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들 전부가 하나같이 병장기를 꺼내든 상태라는 것이다. 거기다 ‘아무개한테 메시지 날려!’, ‘이 자식들은 아직도 접속을 안했냐!’ 등등으로 고함지르며 쉴 새 없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길드전인가? 아니다. 척 보기에도 각각의 길드마크가 십인십색(十人十色)이다. 십 단위 이상의 동맹 길드가 뭉쳐서 벌이는 길드전이 있다는 말은 어디서고 들어본 적이 없다. 만일 있다라면 소문이 파다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진즉에 BBS에 대두되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리라. 그게 아니라면, 깜짝 이벤트라도 있는 걸까나? 그럭저럭 가능성이 있는 가정인데……. “그런데 뭐냐고, 저 심각한 얼굴들은.” 멀뚱하게 서서 세영을 마주보다 볼을 긁적였다. 내가 고민할 필요가 있나, 전말을 알고 있는 이는 사방에 널렸는데. 아무나 하나 잡고 캐물으면 금방 나올 답안이 아니겠는가. 나는 때마침 옆을 지나가는 남성 유저의 길목을 가로막고 그를 멈춰 세웠다. “저 어떤―” “이 새끼! 바쁜 사람 붙잡고 뭐하자는 거냐! 네놈은 눈깔도 없냐?! 직접 가서보면 될 거 아냐!” 이것보라고, 형씨. 질문도 안 듣고 대답한 건 높게 사주겠지만 대번에 성낼 것까진 없잖아. “헤헤! 무엇이든 물어만 줍쇼!” 그는 몇 번 더 묻는 말에 버럭 화를 내다가, 결국 익스펠 직전까지 얻어맞고 비굴하게 손을 싹싹 문지르며 간사한 웃음을 흘리는 것이었다. 역시 이 세상에선 주먹보다 효율적인 것이 없는 듯싶다. 나는 포션 값에 정보료를 추가한 금액을 그의 손에 다정히 쥐어주고 방긋 웃었다. 그는 눈언저리를 파르르 떨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도시 중앙에 있는 성당 앞에 발록이 등장했다는 내용입죠! 전무후무한 사건이라 모두가 급히 달려가는 중이었습니다! 또한 사냥 후 이득을 취하기 위해 조력자를 모집하고 있는 것이었습죠!” 발록이라……. 굉장히 위험한 녀석이 나와 버렸는걸. 단편적이나마 상황파악이 되는 설명이었다. 아직 확신은 하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쌩하기 사라지는 남자를 감흥 없이 쳐다보다가, 세영에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에 안색을 죽이고 턱을 매만졌다. 지옥의 화신 발록(Balrog). 놈은 명성만큼이나 영악하고 강한 엘리트 몹이다. 각 게임마다 발록을 다르게 그리고 있지만, 엘-가드에선 불에 뒤덮인 6미터가량의 거인으로 무식하게 큰 주먹과 화편태(火鞭笞 : 화채찍)를 주무기로 사용했다. 거기다 방어력이 어찌나 높은지 어지간한 공격엔 꿈쩍도 하지 않는 괴물단지다. 내가 사냥해본 적이 있으니 자세한 사항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한다. 아마도 현재 열심히 뛰어가고 있는 유저들은 그러한 발록을 사냥할 심산인 듯 하다. 확실히 엘리트 급의 몹은 보통의 유저들이 한 평생 구경 못할 만큼 희귀하기는 하지. 거기다 발록이 주는 경험치와 드롭 아이템은 대단한 메리트를 가지니 무모한 결정을 내리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나약한 유저들에게 당한다면 지옥의 화신이란 칭호가 무색할 것이다. 유니크 스킬을 익힌 트리플 마스터 여럿이 달려들어야 간신히 쓰러트릴 수 있는 것이 발록이었다. 하나 에타이는 하이레벨의 유저가 별로 방문하지 않는 소도시. 트리플 마스터가 있어봐야 극소수일 터이고, 더욱이 그들은 주제파악을 못한 채 혼자 독식하려 주변 사람들과 타협하려들지도 않을 것이다. 겪어보면 결코 단독사냥이 불가능함을 뼈저리게 느끼겠지만, 그 이전은 그들에게 건드리지 말아야할 강자의 프라이드가 있었다. 남의 도움은 허용하지 못하는 일이다. ―라고 몇몇이 말하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 분이니 논외. 그래도 적당히 고생하면 내 것이 되는 몹을 남에게 양도할 만큼 착하지 못한 나이니, 스틸당하기 전에 냉큼 물어둬야겠다. 마침 레벨 업도 해야 하는 형편이니 절대적인 호기였다. “잡아야겠지. 어때, 너도 갈래?” “너만 좋다면.” 변함없이 무뚝뚝한 모양새로 답하는 세영. 그나마 사람 민망해지는 싸늘함이 담기지 않을 것을 큰 발전이라 여겨야하려나……. 의견일치가 되는 대답에 씩 웃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부드럽고 따뜻하다. 서로의 손이 이끌리듯 강하게 맞물리고, 따뜻한 온기가 상처받은 영혼을 달래준다. 나는 전에 없이 전해져오는 푸근함을 느끼며, 늦을세라 잽싸게 중앙을 향해 힘차게 발돋움했다. 성당까지는 몇 분만 달리면 도달하는 거리였다. 하지만 서둘러 도착해 단시간 승부를 내야만 했다. 틀림없이 길드가 있는 유저들은 자신이 속한 길드에 연락을 돌렸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친인에게 메시지를 날려 도움을 요청했을 터다. 곧 연락받은 이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 것이 자명하다. 그런 시끄러운 상황은 절대 사양이다. 트롤의 수십배에 달하는 경험치를 눈앞에서 놓칠까보냐! 세영과 파티를 맺은 뒤 앞머리를 내려 얼굴을 감추고 세영에겐 터번으로 얼굴을 가리도록 했다. 듀얼 랠리 때처럼 얼굴이 알려지면 무진장 심각한 꼴에 처하고 마는 까닭에서다. “단검, 빌려줄 수 있지?” “응.” 몇 시간 전에도 사용한 바가 있는 뇌신의 단검을 허리에 착용하고리고 친구목록 창을 띄워 은현의 접속여부를 확인했다. 세이나라는 유저네임 옆에 노란색으로 Online이라는 글귀가 떠올라 있었다. 아직 로그아웃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성호나 찬석, 진윤들이 접속해있는 게 보였지만 죄다 필요 없는 녀석들이어서 무시하고 창을 내렸다. 그럭저럭 필요한 준비를 마칠 즈음이 되어서 성당에 당도했다. 예상대로 인근은 탐욕에 젖은 눈빛을 반짝이는 유저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하지만 함부로 덤벼들지 않는 것은 익스펠의 두려움이 작용했기 때문이리라. 에타이의 중앙은 사거리가 교차되는 거대한 광장이다. 정중앙엔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져 고귀한 자태를 뽐내는 성당이 있고, 주변을 둘러싸듯 곡선의 화단이 겹겹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 사이사이로 벤치가 놓여 성당과 함께 휴식처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당 앞에 대칭되어 서있는 두개의 기도하는 성모마리아상 사이가 리스타트 지점이다. 지금 발록이 서있는 장소도 바로 그곳이었다.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노린 것이었는지는 파악되지 않으나, 확실한 것은 유저들이 에타이로 접속되는 즉시 영문도 모른 채 봉변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쌍하기도 하지. 멀지만 발록을 볼 수 있는 지점까지 다가가 놈의 주변을 살피고 혀를 찼다. 무리를 지어 공격하고 있지만 변변찮은 타격도 주지 못하고 저승 가는 유저들이 부지기수였다. 또 발록의 뒤에는 쓰러져서 몸을 뒤트는 유저, 먼 앞쪽에는 검을 꼬나 쥔 채 후들후들 양다리를 떠는 유저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간의 상황이 어찌된 것인지 유추해내기엔 충분했다. “로브복장의 유저는 소환사, 상대방은 검사. 둘은 친한 사이로군.” 간단히 도출된 결론에, 세영과 함께 주변의 유저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어째서?’로 해석되는 표정을 지은 채다. 친한 사이라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근처에 유저들이 있는 바람에 그들에게도 설명하는 형편이 되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세영에게 말했다. “듀얼이 공인된 PK인 건 알고 있을 거다. 상대방을 죽여도 정당하니까. 그리고 듀얼의 원인은 크게 두가지 경우로 나뉘어. 원한청산을 인한 신청과 유희용으로. 원한관계에 의거하면 불구대천이 되는데, 마법사에게 충분한 준비시간을 주는 정신 나간 검사는 어디에도 없을 거라 이 말이지. 자칫하면 자신이 죽게 생겼는데 마법이 캐스팅 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대책 없는 미덕을 갖춘 이가 얼마나 될까? 더구나 엘리트 몹이 소환될 정도의 큰 기술을. 그런고로 저 둘은 즐기려고 듀얼은 한 거라 추측이 가능하다. 소환사가 몹을 소환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엘리트 몹이 나타나는 바람에 파토가 나버렸을 가능성이 커. 지금은 뭐, 발록이 역으로 소환주를 제어해 이렇듯 남아있는 것이고. 소환주만 죽이면 저절로 역소환 될 테지만, 현재로서는 지키려 들 테지. 놈은 영악하거든. 모처럼의 즐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거다. 그리고 속박을 깨는데 주력하는 한편 덤벼드는 유저들로 심심풀이를 하고 말이야.” “재미있는 상황이네…….” 세영은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주변 사람들은 작은 탄성을 토해냈다. ‘장난이 아냐, 저 사람’ 등으로 말하는 걸로 봐선 내 말에 순수하게 감탄한 것 같다. 별것도 아닌데 감탄씩이나 한다니. 하지만 좋으면 좋았지 결코 기분이 저조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단한 추리였습니다. 이제야 발록이 어떠한 루트로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알 것 같군요.” 그때, 난데없이 등 뒤에서 흥에 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나 세영이나 동시에 고개를 틀어 뒤쪽을 보았다. 그곳엔 백색 롱코트를 입은 남성이 서있었다. 정돈된 갈색머리와 순한 눈매가 모범적이나, 눈앞에 씌워진 반무테 안경에서 지극히 타산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서글서글한 인상은 다가가는데 거부감이 들지 않게끔 만들었다. 레벨은 300정도. 그리고 그의 뒤로는 동일한 복장의 혼성 유저 열다섯이 서있었다. 길드인 모양이다. “클래스 엠페러 나이트 마쉬라고 합니다. 변변찮은 기사단의 리더지요.” 문득 코트 사이로 드러난 세이버(Saber)에 시선이 닿았다. 보통 평범한 세이버가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봄이 가능했다. 변변찮은이란 수식어는 겸손일 터였다. 길드원으로 보이는 일단의 유저들도 오합지졸이 아닌 절도 있는 위용을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의 쟁점. 성실해져야 산다! 공부도, 연재도 이타의 것들도.. 그치지 말아야만 성공할 수 있다! ㅡ까지는 좋은데 되야 말이죠. 근면성실해지면 성공은 보장되는 셈이지만.. 그게 쉽습니까.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겠지요. 노력도 없이 Good한 결과를 바란다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니... 최선을 다할랍니다! “클래스 엠페러 나이트 마쉬라고 합니다. 변변찮은 기사단의 리더지요.” 문득 코트 사이로 드러난 세이버(Saber)에 시선이 닿았다. 보통 평범한 세이버가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봄이 가능했다. 변변찮은이란 수식어는 겸손일 터였다. 길드원으로 보이는 일단의 유저들도 오합지졸이 아닌 절도 있는 위용을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목적은 발록을 잡기 위함인 것 같은데……. 그건 좀 글쎄올시다로군. “클래스 글레디에이터 카일입니다만…….” 카일은 내가 정체를 숨기고 다닐 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가명이다. 어쩔 때는 이 이름이 본 유저네임으로 여겨질 만큼 자주 사용했다. 클래스도 마찬가지. 아마도 초보들을 돕고 (나중에라도 다시 도움 받으려는 속셈으로) 유저네임을 알려달라는 그들에게 먼 하늘 보듯 퍼트렸던 것이다. 또 다른 선행을 할 때도 이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니까, 카르마가 모든 죄업을 짊어진 악행의 근본이라면, 카일은 선행의 근본으로서 졸지에 ‘초보계의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가 된 상태다. 내가 도움을 준 초보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하루아침에 몇 십 레벨이 상승했으니까. 심심해서 시작한 일이 어느새 이 지경까지 와버렸는지는 장본인인 나조차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눈앞의 사람들이 날 알아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고단자의 반열에 든 자가 초보의 일에 관심 기울일 가능성이 제로거든. 즉, 어디서 한번 들어봤을지언정 관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역시 알지 못하는지 마쉬는 놀란 기색 없이 웃으며 빈손을 펴보였다. 흔히 ‘공격할 의사가 없으니 긴장하지 말라’라는 뜻을 가진 고단자들만의 대화다. 저들의 레벨은 300레벨 정도인 마쉬를 제하고 280 안팎이었다. 제법 난다는 축에 속하는 레벨이나 이쪽은 그보다 더 높다. 끽해봐야 130레벨 정도로 밖에 측정되지 않겠지. 내 생각대로 그는 우월감에 도취된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의 태도에서 상대를 깔보는 비웃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확 PK해버릴까 보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를 가하려 말을 건 것이 아니니까요. 그보다 지식이 상당하시군요. 이렇든 단번에 상황을 이해하시다니 말입니다.” 나는 곁눈질로 발록을 살핀 후에 옅은 미소를 뗬다. 발록이 달려드는 유저들은 차근차근 밟아가며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와 세영일 테지. 유니크 이상 급수의 몹들은 유저의 역량을 파악하는 눈을 지녔다. 약하다면 천천히 괴롭히다 죽이고, 비등하거나 강하다 싶으면 그를 향해 긴장 혹은 초반에 꼬리를 내린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장 고레벨은 397레벨의 유저, 바로 나다.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선 강한 자부터 처리하는 것이 인지상정. 날 의식하는 것이 합당한 이치였다. 그리고, 소환주로부터의 소환을 푸는 즉시 이쪽으로 공격을 감행할 것이리라. 그 순간에 이 자리를 벗어난다면 저들은 일격에 싹쓸이다. 발록의 힘은 더블 마스터 쯤은 우습게 날려버릴 정도의 그것이니까. 뭐, 굳이 기다리지 않더라도 결국엔 괴멸할 테니 따로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꽤 오랫동안 굴러먹었지요.” 방긋거리며 응수한 뒤에 엄지로 뒤쪽이 발록을 가리켰다. 마쉬의 시선이 건너편으로 넘어간다. “잡으러온 거 아닙니까? 이대로 여유부리다간 먹이거리를 탈취당하고 말텐데요.” 채 소환의 속박이 깨지지 않은 듯싶다. 깨졌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나 먼저 쳤을 테니까. 충분히 방비하지 않은 채 이쪽으로 신경을 쏟다간, 소환주가 익스펠되는 즉시 역소환 되어버리는 것이다. 마쉬는 안경을 밀어 쓰고 열다섯의 길드원들에게 몇 가지를 지시한 뒤 나를 똑바로 정시했다. ‘어쩌라고?’하고 조롱하려다가 참았다. “이거, 그런 충고를 듣고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군요.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수습해야 겠습니다.” 자신감에 찬 어조였다. 겨우 그 정도 인원에게 발록이 쓰러져줄 거라는 허무맹랑한 망상을 하고 있단 말인가. 기민하게 움직여 발록과의 거리를 좁히는 그들을 조소가 가득한 면면으로 응시했다. 내 눈엔 위풍당당한 것 보단 빛에 유혹되어 불속으로 비척비척 날아다는 가련한 나방이었다. 하지만 제 발로 가겠다는데 어느 누가 만류할 수 있겠어. 엘리트 몹과 한번이라도 전투해본 적이 있다면 무모하게 자만하지 못하지. 뭐, 입 아파서 충고까지는 해주고 싶지 않은걸. “저기 봐! 아이언 나이츠(Iron Knights)다!” “염병할! 이놈의 길드는 왜 아직도 도착하지 않는 거냐!” 신속하게 스크럼을 짜는 그들을 본 이들이 난데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 탄식 속엔 ‘젠장, 김샜다!’, ‘끝이로군’ 등의 의미가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턱 밑을 쓰다듬으며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강철의 기사단…… 이라고? 암만 떠올려 봐도 생소한 이름인데……. 기동력이나 상위 레벨의 고급 장비들로 미루어보면 꽤나 가한 길드라는 추론이 나오기는 하나, 유저들이 벌써부터 포기의 제스처를 취할 만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상위 30위내의 길드를 빠짐없이 외고 있는 내가 모르는 낯선 길드명임에야 오죽하랴. “음, 아니면 그새 치고 올라온 길드인가?” 그렇게 중얼거려보았지만 곧 생각을 지웠다. 소득 없는 것에 연연하는 것은 시간적 사치였기에, 그저 신흥길드라고만 생각해두었다. 내겐 저들이 죽어나간 이후의 일들이 중요했다. 그럼 이쪽도 나름대로의 ‘준비’라는 것을 해볼까. 헬 브레스는 근방을 깨끗이 밀어버릴 게 뻔하니 제외하고(무엇보다 도시 파괴는 블록이라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도시 원형을 유지하면서 발록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스킬…… 아, 그게 좋겠어. 나는 흉계를 꾸미는 악동처럼 음충맞게 웃으며 곧 떠올린 스킬 캐스팅에 돌입했다. [빼앗겨도 상관없어?] 터번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세영이 메시지로 퉁명스레 물어왔다. [엘리트 몹 잡아본 적 없지?] [그런 것 같아.] 조금 애매모호한 회답에 의아함도 들었으나, 이내 세영이 기억상실증임을 상기하고 의문을 지웠다. 그녀도 어서 기억을 되찾아야 할 텐데 말이다. 나는 세영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엘리트 몹은 보통 유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아. 하기야 가까이에서 본적이 없는 그들이 뭘 알겠냐만……. 어쨌든 엘리트 몹은 엘리트 스킬을 익힌 자만이 여유롭게 사냥할 수 있어. 그 이하의 스킬로는 아무리 해당 유저의 레벨이 높아도 힘겨워 할 수밖에 없지. 유니크와 엘리트의 차이는 크거든. 즉, 결론은 350레벨 정도의 유저 다섯 이상이 모여야 엘리트 몹 하나를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이 돼. 엘-가드에선 스킬과 아이템의 비중이 꽤 크니까. 그러니까 저들이 사냥에 성공할 거라고 걱정하는 것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거지. 이해하겠어?] “응.” 그녀는 입으로 나지막이 대답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후 나와 함께 관조의 위치에서 발록을 구경했다. “아아악!” 캐스팅이 어느 정도 끝나가는 차에, 단말마의 비명이 기관총의 총성처럼 연달아 발포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도 비명은 있었지만 이번 것은 격이 틀렸다. 동물원 우리에서 탈출한 막 잡아온 야생의 맹수를 앞에 두고 혼불부체(魂不附體) 사람들의 비명, 바로 그것이었다. 볼 것도 없이 발록에 의한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아이언 나이츠인지 뭔지 하는 길드의 유저들도 속수무책으로 밀릴 뿐이었다. 이제 자신들의 실수를 뼈로 느낄 수 있을 테지. 예상했던 거라 그다지 관심가지 않아. 그쪽보단 완전히 각성한 발록이 재밌어 보인다고. “시작이로군.” 발록은 날파리들을 쳐내고 잠깐이지만 전력으로 보호했던 소환주에게 복수라도 하듯 사정없이 밟아 비비는 것이었다. 뼈가 산산 조각나는 잔인한 음향이 귓가를 간질이다 금세 유저들의 비명소리에 묻혀 꼬리를 감춘다. 희열이라도 느끼는 양 놈의 눈두덩에서 부풀어 오르는 불길은, 쾌락과 욕망에 지배되어 야릇한 미소를 짓는 창부처럼 몽환적이면서 강인한 고집이 있었다. 진한 불꽃과 함께 지방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풍기고, 발록의 발밑에서 하얀 입자가 자유를 갈망하는 하얀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나풀나풀 새어나왔다. 여지없는 압사(壓死)였다. 그나마 아이언 나이츠가 가까스로 각성된 발록을 막아서고 있지만, 그런 노력도 몇 분 지나지 않아 한줌 모래가 될 터였다. 발록은 그들이 감당해낼 만한 수준을 넘어서는 몹이니까. 놈의 앞에선 한낱 연약한 들꽃에 지나지 않는다. 귀찮은 벌레를 죽이는 양 유저들을 채찍으로 휘감아 치던 발록이 마침내 나를 보며 지독한 투기를 발산했다. -그악! 포효하고 크게 벌어진 입에선, 그것마저 핏빛 같은 붉은색에 물든 수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하지만 고양이가 털을 세우듯 불길을 거세게 불리고 위압적으로 보이려는 구질구질한 행동엔, 나에 대한 두려움과 적대감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놈은 내가 강하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하기사 내가 ‘이 녀석’을 지니고 있다보니 당연한 현상인가. 분명 ‘모든 몹에게 공포 효과’라는 옵션이 더해져 있었지. 나는 오른쪽 허리춤에 단단히 매어놓은 드래곤 슬레이어를 자랑스럽게 쓰다듬으며 조소했다. 그리고 세영에게 넌지시 물었다. “너도 뛸 거냐?” “아니. 난 짐만 될 테니까.” 겸손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세영이 트리플 마스터이고 조력하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긴 하나, 이는 다른 이에게 한해서다. 내가 쓰는 전술은 철저하게 치고 빠지는 개인적 성향이 강한 것이었다. 타이밍이라도 엇갈렸다간 당장에 참혹한 결과가 유발되다보니, 나와 하는 협공은 오히려 공명의 첩경일 뿐이었다. 전학 후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다녔던 세영인지라 내 배틀 스타일을 파악하고 애초에 손을 놓은 것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호흡도 맞출 수 있을 수준이라는 의미가 되지. “서포트는 가능하겠지?” “필요하다면.” 그녀는 망설임없이 응수했다. 그 태도는 거짓 없는 자신감을 표명하고 있다. 허허롭게 비었던 가슴 한부분이 든든하게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온다. 조심해.” 막대한 전력차에 좌절한 아이언 나이츠는 괴멸하다시피 하여 퇴각했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결과다보니 비웃음만 나온다. 또 트리플 마스터가 속속 등장하는 추세였지만 그들은 차마 결단이 서지 않는지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적 틈새를 놓치지 않고 나를 향해 맹렬한 정면공격을 해오는 발록. 유저들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혼비백산하고 근방의 공기가 식으며 지독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뜨겁게 달아오른 투지는 모든 것을 불태울 기세로 계속해서 상승직선을 탄다. “피터지게 싸워보자고, 그럼!” 어제 수시 시험을 봤습니다. 한양대는 특이해서 적성검사가 있네요.. 그거 준비하느라 며칠동안 공부에만 전념했습니다. 결과는.. 아직 예상하지 못하겠지만 그럭저럭 봤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몇문제 못풀었다고 실망하던데 일단 전 전부 다 풀었으니까요.. 푼건지 찍은건지 헷갈릴 지경이지만... 1교시 언어추리였나? 그건 완전히 영어문제더군요. 무슨 영어단어 문제가 전체의 반이나 되던지.. 막바지에 가서 체크가 삑살나는 바람에 답안지를 바꿨는데... 글쎄 마음이 급했는지 61번부터 68번까지(전체로 치면 91번부터 98까지려나.. 헷갈리네..) 답을 밀려쓰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답안지를 바꾸려고 했으나 1분이 남은 상태에서 차마 못하겠더군요. 공정성을 기한답시고 하다가 종치면 그대로 멈춰야하기때문에.. 어쨌든 그일만 빼면 흡족하게 봤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수요일부터 중간고사에 돌입합니다. 오늘 내일은 올리겠지만 이후 4일은 불가입니다. 토요일에 시험이 끝나니까요.. 뭐... 수능공부다 수시공부다 하다보면 또 못쓰는 시간이 많겠지만... 으윽... 설정집도 다시 짜야하고.. 갑갑하네요.. 휴... 글도 서서히 지루해져가고 있어 싫어진다고 독자분들이 말해서 착잡한 심정이고... 에휴... 삼키면 고민 뱉으면 한숨이로군요. 아무튼 내일 다시 뵈요. 보다 질과 양을 늘려 오도록하겠습니다. 즐거운 저녁 되세요. “온다. 조심해.” 막대한 전력 차에 좌절한 아이언 나이츠는 괴멸하다시피 하여 퇴각했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결과다보니 비웃음만 나온다. 또, 트리플 마스터가 속속 등장하는 추세였지만 그들은 차마 결단이 서지 않는지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적 틈새를 놓치지 않고 나를 향해 맹렬한 정면공격을 해오는 발록. 유저들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혼비백산하고 근방의 공기가 식으며 지독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뜨겁게 달아오른 투지는 모든 것을 불태울 기세로 계속해서 상승직선을 탄다. “우선은 뒤로 물러나 있어. 공격받는다 싶으면 바로 피해.” 드래곤 슬레이어를 들었다. 언제나 다를 것이 없이 새하얀 천으로 숨겨진 모습이다. 캐스팅은 끝났다. 드래곤 슬레이어도 준비되었다. 모든 것은 앞으로의 방향이 가를 것이다. 채찍이 번개처럼 뻗쳐오는 것이 느껴졌다. 피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찢겨버릴 것이다. 콰앙! 드래곤 슬레이어와 채찍이 맞부딪힌 지점에서 강렬한 불꽃이 튀기며 폭발이 일어났다. 초감각 덕에 공격을 튕겨내긴 했지만 전류처럼 팔에 흐르는 저릿함은 채찍의 파괴력을 충분히 대변해주고도 남았다. 두발이 닿아있는 지면도 힘에 눌려 움푹 함몰되어 있다. 천은 검게 그을려 너덜너덜하다. 농담이 아니다. 조금만 가드가 늦었다면 당장에 온몸의 뼈가 조각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이 녀석…… 강해졌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발록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강함의 상징이기는 했지만 이건 어딘가가 틀리다. 가장 최근에 발록을 사냥한 것이 작년 늦가을 무렵의 일이다. 당시 레벨은 380이 조금 넘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발록의 공격은 그럭저럭 받을만하고 단조로웠다. 저릿한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지만, 능력치가 크게 오른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는 것은 바보짓이리라. 방어력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것이다. CON이 한껏 오른 현재라면, 놈의 공격은 무마시키고도 어떠한 타격을 받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결과다. “끄어억!” 아슬아슬하게 채찍을 비껴내자, 은근히 끼어들던 유저들이 일격에 쓸려나갔다. 스케일이 큰 전투에서 어부지리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유저들인 모양이다. 끼어들긴 왜 끼어들어서 개죽음 당하는가. “괜찮아?” “아아, 물론.” 힐끗 뒤를 돌아보고 숨을 가다듬었다.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녀가 있는 곳까지 후퇴해 버렸다. 씁쓸함을 느껴 나지막한 한숨을 흘려보내고, 세영이 휘말릴까 걱정하여 신속히 자리를 벗어났다. 발록의 채찍이 살아있는 뱀처럼 교묘하게 요동치며 내 그림자를 잇달아 후려친다. 말미암아 지면에서 광폭한 굉음이 터지고 쩍 갈라지며 무수한 석편을 튀어 올랐다. 마지막 공격을 드래곤 슬레이어로 튕겨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깨가 통채로 뜯겨져나갈 것 같은 아찔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참았다. 무릎이 무너질 것 같았으나 악으로 버텼다. 채 방비를 하기 전에 무리하게 방어해 신체에 악영향을 주었다. 확실히 발록은 예전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위력을 필두로 민첩성, 방어력, 지능 모든 면이 예전을 상회한다. “성장인가…….” 진화 체제라는 것이 있다. 유저들이 잘 모르는 부분으로, 나도 오래전에 한번 밖에 들어본 적이 없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진화 체제라는 것은 유저들을 기준으로 몹의 수준을 자동으로 맞춰주는 시스템이다. 유저가 강해지면 성장이 없는 몹들의 경우 자연히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 차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몹의 수준을 올리게 되는데, 그 수준을 올린다는 것은 데이터 변경이 아니라 레벨 업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몹들도 일정 경험치가 누적되면 레벨 업을 하는 것이다. 만약 그 성장한 몹이 사망하면, 이후부터 일정 지역에 걸쳐 동족 몹들이 강해진 채 리젠되기 시작한다. 유저들이 많이 몰리는 필드의 전반적인 수준이 오르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니까, 작년부터 발록 사냥이 활기를 띠었으니 놈이 강해지는 것도 응당 필연이었다. 주제파악 못하고 덤벼드는 허접들이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이해 할 수 있다. 이해 할 수 있는데……. “너무 꼬이잖아, 이거.” 막막한 현실 앞에서 한탄을 내쉬고 주먹을 틀어쥐었다. 이쪽에서 전력으로 가지 않는다면 결과는 반전되고 만다. 유저들의 뒤치기를 걱정해 내놓고 사용하지 않은 ‘보험’을 사용해야만 했다. 아니, 발록의 공격을 잘만 이용한다면 유저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 ‘잘’이라는 것이 문제지만 레벨 업을 위해서라도 엘리트 몹을 놓칠 수 없는 노릇이다. 어쨌건 궁여지책일지라도 있으면 무조건 사용하고 보는 내가 아닌가. 품안에 있는 아티펙트를 있는 대로 장비했다. 채찍에 닿아 쓰라린 상처처럼 벌어진 천의 틈새로 손을 걸고 좍 찢어버린다. 감춰져있던 묵색의 유려한 몸체가 모습을 드러내며 위용 있는 자태를 자랑한다. 끝장을 보겠어. 쾌속으로 발검하고 발록을 향해 짓쳐든다. 여태껏 잠들어있던 대부분의 위압감이 격동적으로 한순간에 폭사하며 발록을 잠식해 들어간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뿜어내는 존재감은 엘리트 몹에게는 더욱 확실한 공포를 보장했다. 유저들이 모여 있는 곳에선, ‘헬 마스터다!’, ‘드래곤 슬레이어야!’, ‘말도 안 되는!’ 등의 원성에 가까운 술렁임이 한데 뒤섞여 혼란을 빚어냈다. 나는 유저들을 경계하며 발록에게 온 신경을 쏟았다. 헬 스킬은 아직 시기가 아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발동해야만 데미지를 최대화 할 수 있어. 이대로 사용했다간 변변찮은 타격도 주지 못하고 끝날 심산이 컸다. 가드하거나 회피해낼 것이리라. 그래서는 안 된다. 절대 발생해선 안 되는 일이다. 만에 하나 기술 공격이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에타이는 말 그대로 지도에서 증발해버릴 것이다. 이 안에 있는 유저들도 무사할리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내가 죽어버려. 그렇기에 이 최후의 생명줄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어야 했다. 물론, 사용하지 않는다면 내가 사망할 싸움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너무 늦게 올려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글쎄 제 담당자분이 바뀌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깜짝 놀라서 이유를 물어본즉, 출판사 내부사정으로 제 담당자가 바뀌었다는데... 흐으... 다시금 미친 듯이 1, 2권 수정해서 보냈습니다.. 이거 수정하느라 잠도 못잤습니다... 파일 하나당 3, 4일은 잡아먹은 것 같군요... 세심하게 오탈자 잡고.. 어색한 문장 잡고... 여전히 문제는 많겠지만.. 후회하지 않을 만큼 손댔습니다. 어서 3권도 마무리 지어 출판사 측에 넘겨야 겠어요. 어쩐지 제 문체가 변한 것 같은 기분입니다. 뭐랄까.. 좋아진 건지 나빠진 건지 아직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차라리 나아진 듯도 하네요. 구체적인 판단은 여러분이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잠깐의 공백기가 생겨 줄기차게 소설만 읽었습니다. 개미부터 해서 '느낌표'에서 선정한 추천 도서... 모조리 읽었습니다... 역시... 굉장한 문학 작품들이더군요... 전 언제 그렇게 써볼까요.. 평생가도 무리일 것이라 봅니다. 근래에 희안한 일을 겪었습니다. 제대로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유나'의 이미지와 똑같이 닮은 여자를 본 일입니다. 버스타고 가다가 창밖으로 잠깐 본거라 확답을 내리기는 힘들지만, 비슷한 분위기로 느껴졌습니다. 우선적으로 묶지 않은 흑발이 허리까지 내려와있고, 키도 적당히 크고, 얼굴형도 갸름하고. 다른 것이라고는 안경을 쓰고 있던 것이군요. 고등학생으로 보이지도 않았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충 대딩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에, 또... 청바지를 입고 있었군요. 설정 상의 유나는 무릎에 조금 안닿는 스커트를 즐겨 입는데.. 어쨌든 요점은 비슷했다는 겁니다. 사카모토 마야의 Risky & safty Ending Song 을 들으며... 이 노래의 목소리가 세영 테마입니다. 마야씨 목소리 정말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입니다. 멋저요. [감동] -그으으……! 발록은 원한에 사무친 듯 분노와 울분이 혼합된 저음으로 으르렁댔다. 털이 곤두서는 섬뜩함이 등줄기를 무겁게 짓누른다. 내 판단은 어긋났다. 완전히 비껴나 버렸다. 엘리트 몹이 상대의 능력을 파악하는 것은 사실이나, 나를 집중 공격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니다. 놈의 기억엔 내가 남아있는 것이다. 자신을 죽은 불구대천 원수의 모든 정보가 뇌리 깊숙이 각인되어 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야 엑시큐서너(Executioner)와 함께 있는 데스티니 블레이드를 무시할 수 없어! 검은 로브를 푹 눌러쓴 채, 다섯의 데스티니 제로 길드원의 필두에 고고히 서있는 그를 보았다. 아직은 나설 생각은 아닌 것인지 어떠한 자세도 잡지 않은 모습이었다. 엑시큐서너도 전신을 암흑 속에 맡긴 채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주변 유저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할 정도다. 그때, 데스티니 블레이드가 팔을 들어 발록을 가리킨다. 그것은 일단 지켜보겠다는 의미의 단편적인 행위였다. 나는 이를 갈며 시선을 돌렸다. 그를 신경 쓰기에는 발록의 존재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 우선은 이 녀석이 먼저다. 발록의 팔이 휘둘러지고 채찍이 잔상을 남기며 흩어졌다. 방어는 불가능해! 시스템 데이터 산출속도에 앞서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위기감이 느껴질 때, 이미 몸은 옆으로 빠지고 있었다. 파앙! 얼마나 조작기술이 현란한지 바닥을 후려치고 튕겨 오르는 채찍을 어렵사리 막아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손잡이를 붙잡은 양손이 굉장히 아리다. 위험해. 위험해. 피해. 전신의 세포가 발악하며 울부짖는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엄습한다. 1초도 채 안되는 간격으로 울어대는 감각에 현기증마저 날 지경이다. 후련하게 토악질을 해야 간신히 나아질 것 같은 기분. “하아…… 하아…….” 땀방울이 미간을 가로지르며 흘러내렸다. 양 팔뚝이 파르르 경련한다. 나,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잠깐의 여유시간에 숨을 한꺼번에 교환하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아, 막 시작했을 뿐이잖아. 벌써부터 포기하는 것은 의지문제다. 악으로 버티며 지금껏 레벨 다운을 겪어보지 않은 내가 아닌가! 그래. 이대로 무력하게 무너지는 것은 인정하지 못해. 도망치면 도망쳤지 쉽사리 죽어주진 않겠어! 두 번은 없다. 단 한번. 찰나라도 좋으니 그 잠깐의 기회면 돼. 머리를 날려버리면…… 놈도 살 수 없으니까. 발록이 공격에 주력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 드래곤 슬레이어를 위시하여 득달처럼 달려들었다. 그 순간, 발록의 입에서 이 세상 것이라 보기 어려운 포효가 터졌다. 귀청이 찢어지는 고통이 몰려왔다. 다리가 휘청인다. “위험해!” “아……?” 세영의 비명 같은 외침이 있고나서,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체중이 앞으로 쏠리는 느낌이 전신으로 느껴졌다. 가까스로 시야를 다잡을 때는, 굉장한 속도로 뻗어오는 화염에 뒤덮인 운석을 볼 수 있었다. “류현!” 아니다. 운석이라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땅에서 솟아나는 운석이 있다는 말은 어디서고 들어본 경험이 없다. 그것은 발록의 주먹[手]이었다. 쿠아앙―! 처음으로 골이 울린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귓가에 어른거리는 목소리들이 무슨 진동음 마냥 웅웅거리며 시야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전신이 욱신거린다. 육신이 마리아 상을 부수고 성당 벽면에 꼴사납게 처박혔다. 병든 개처럼 늘어지며 가느다란 신음을 내뱉는다. 라이프 수치가 단숨에 곤두박질쳤다. 입안에 신물이 고이고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드림 브레이크가 고통의 정점이라고 생각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우습게도 발록이 펼친 기술에 걸려버렸다. 마비였는지 손가락하나 까닥할 힘이 없게 되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걸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제길. 꼴이 말이 아니군. “일어설 수 있어?” 언제 온 거지, 라는 의문을 가질 겨를도 주어지지 않았다. 세영은 발록의 공격을 피해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고 자리를 피했다. 뇌가 박살나는 듯한 굉음이 귓속에서 진동한다. 아니, 그것 이전에 정신이 멍하다. 지금가지 유저들을 구하기만 해봤지 언제 구해지는 입장에 처해보았나. 상황이 반전된 지금, 새삼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시간이 촉박해 뒷문을 통해 성당 안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세영은 감탄스러울 만치 침착했다. 아니지. 침착하기보다는 냉철하다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몰라. “마비……?” 차디찬 벽에 등이 닿자 아릿한 한기가 뼛골을 스쳤다. 나를 벽에 기대어 앉힌 그녀는, 조그맣게 현 상태를 진단하고 안색을 죽였다. 나는 얼굴을 붉혔다. 급박한 상황을 안전에 두고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오히려 짐이 되어버렸다는 것에 수치심이 느껴졌다.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것도 녹록치가 않았다. 혀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미칠 것만 같다. “너무 독해. 너.” 하하, 멋쩍게 웃어주고 싶었지만― 그런 사소한 반응조차도 불가능하다는 현실에 가슴이 타들어가듯 쓰리다. 울고만 싶어졌다. 바보 같아. 너무도 바보 같아. 무력해. 무력해……. 남들을 비웃기 이전에 편협한 실력만 믿고, 실상은 아무 것도 없으면서 발록을 얕잡아 본 나 자신이 이토록이나 경멸스러울 수가 없었다. 대체 뭘 믿고 자신 있게 나섰단 말인가. “크으……!” “조금만 참아.”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처절한 신음이 자괴감에서 오는 울분인지, 아니면 전신이 으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에서 오는 통성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세영은 내가 여전히 독하게 틀어쥐고 있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빼내 옆에 내려놓았다.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이성이 호소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나긋한 손길에는 도무지 저항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속한 처지가 우습기만 했다. 우습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할 지경이다. 마비의 지속시간은 통상 삼 분 가량이다. 분명 짧다면 짧은 시간일 수도 있으나 발록 앞에서는 1초도 긴 시간이다. 이대로 마비 상태를 방치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세영이 입도 벙긋하지 않은 채 치유에만 몰두해 있는 것이다. ……미리 은현을 부르지 않을 것을 진심으로 반성해본다. 세영은 내 입에 힐링 포션 세병을 들이붓고는 허리춤에 매달린 포켓에서 마비(뿐만 아니라 모든 이상 상태) 회복의 효능이 있는 ‘가이아의 잎사귀’를 입안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잎에서 추출된 즙에 효과가 담기는 것이다. 내가 마비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메뉴에 관련된 활동이라든가(예를 들면 계산이나 메시지) 간신히 혀를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니 그녀가 나대신 씹어주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되는데…… 단지 그뿐이다. 이후의 행동에 대해여 이해해 줄 마음은 조금도 없다. 잎을 대신 씹어주는 행위 자체가 갖는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먹여주다’라는 의미뿐이 없다. 세영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작정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어떠한 방법’이던 간에. 분함이고, 자괴감이고, 자시고도 모조리 머리 뒤편으로 종적을 감췄다. [스, 스톱. 도대체 뭐하려는 속셈이야, 너!]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멈출 것을 종용해 보았으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이해해줘.” 그런 말을 해도 내가…… 이런, 제길! 세영의 얼굴이 비정상정으로 커졌다. 아니, 다가오는 것이다. 입술에 온기가 닿았다. “……!?” 상황만 된다면 미친 듯이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 마지막 한 방울의 즙마저 입안으로 밀어 넣은 그녀가 비로소 입술을 떼었다. 약한 숨소리를 흘리는 그녀의 입술이 유난히도 크게 투영된다. 물기에 젖어 촉촉이 빛나는 입술은 가슴 저리도록 마력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미안해.” 그렇게 말하는 세영의 얼굴은 지독히도 메말라 있었다. 입은 사과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필요한 일을 했을 뿐임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이를 악물었다. 목에 스며든 액체가 무척이나 쓰다. 너무도 써서 괴성을 지르고 싶기까지 하다. 방법이 이것뿐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그렇다한들 이성이다. 그렇다고 각별한 사이도 아니다. 거리낌 없이 입을 맞추기엔 사이에 놓인 벽은 너무도 높고 두껍다. 그럼에도 세영은 시도했다. 머뭇거렸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이해라도 해줄 테지만―, 그녀는 추호의 망설임도 보여주지 않았어. 도무지 일부러 한 것만 같다는 의심을 떨쳐내기 힘들게 되었다. 나는 부축을 받아 일어서며 그녀의 무심함이 깃든 얼굴을 보았다. 그런 짓을 해놓고도 부끄럽지도 않은 것인지 어떠한 감정도 읽어낼 수 없다. 철저한, 무표정가면. 의심이가도 이해하자. 이해해야 된다. 되는 게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다. 안 그러면…… 내가 참지 못해.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온힘을 다해 정리하고 세영의 손목을 잡았다. 그 손 안에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손잡이가 고이 머물러있다. 가는 손목을 쥔 아귀에 힘들 보태었다. 절대, 양보하지 못해, 그런 일 따위……. 그럴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으니까, 가만히 구경하고 있어. 내가 엮어놓은 매듭은 내 손으로 푼다……. “아…….” 세영은 점점 늘어가는 악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검을 떨어트렸다. 그녀의 얼굴은 밀려오는 통증으로 인하여 미미하게 찌푸려진 상태다. 나는 알콜중독자의 팔처럼 푸들푸들 떨리는 손으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주워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세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쩐지 분노가 담겨있는 것만 같다. “넌 아직 몸이―.” “웃기지마! 그녀의 말을 끊고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느낌이 또렷하게 전해져온다. 그래. 이정도 감각이면 돼. 잠시만 버티면, 완전히 회복될 테니까. 콰앙! 굉음을 쏟아내며 벽 모서리가 처참하게 허물어졌다. 단면이 무척이나 깨끗하다. 무너진 곳에서 단면 운운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지만, 분명히 모서리는 날카롭게 날아간 모습이었다. 이정도면 ‘베였다’라는 표현이 차라리 적당할 것이다. 발록의 채찍이 스치고 생겨난 결과물이다. 특유의 판별력으로 내가 성당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챈 듯하다. 다시금 폭음과 함께 찢겨나가는 벽을 가리키며 세영의 눈을 직시했다. “보여? 건물이 박살날 정도다. 네 능력치로는 막아내기도 벅차. 아니, 앞서 공격을 눈으로 따라잡지도 못해. 정수리라도 맞는 날엔 받는 즉시 세상이 두 쪽으로 나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테지. 절대 그 꼴은 못 봐. 네가 무리한 선택을 해가며 나를 회복시켰듯이, 나도 그게 미련한 방법일지라도 널 살려. 절대 빚지고는 못살아. 알아들어?” 아치형의 문이 산산조각으로 무너지며 지축을 울린다. 저편에는 적색의 화염을 불태우는 발록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다. 놈의 발이 지면을 밟을 때마다 나열된 교회의자들이 우우우, 낮은 울음을 흘린다. 세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어. 반드시 이기고 올 테니까. 내겐 결코 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고.” 데스티니 블레이드, 그자를 향한 도전이다. 발록에게 지는 것은 곧 그에게 진다는 말과 동일하다. “아참.” 잊었던 말을 막 상기하기라도 했다는 듯, 나는 세영을 등진 채로 발을 멈췄다. 시선은 정면의 발록에게 꽂혀있다. 입술을 손끝으로 조심히 어루만지며 눈을 감았다. “인정해주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건 키스 고마웠다. 덕분에 정신 차릴 수 있었어.” “그래.” 이건 한참 뒤의 일이지만…… 자신과의 첫키스는 어떠했냐고 물어오는 ‘그녀’에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무진장 썼다고 대답해주었다. 확실히 잎사귀에서 나온 즙은 혀가 얽히는 쾌감은 고사하고 당장 밀어내고픈 충동부터 들게 할 만큼 썼다. 빌어먹을. 엄청난 복선이 깔리고야 말았군요. 흐응, 어떨까나.. 뭐- 이제 엘-가드도 거의 종반부를 향해가고 있으니, 이정도는 괜찮겠지요. 다음 화에서 교차 챕터 완결나구요... 새로운 이름으로 Level 11. Need not to know. 비밀(秘密). 이 시작됩니다. 예전에 제가 예고한 부분 있죠? 그 내용이 다뤄질 거에요. 그리고 챕터 11은 게임 내용 보다 현실 내용의 비중이 커질 것입니다. 왜, 공지에 올렸었잖아요. 복잡하게 쓸 작정이라고.. 과연 뜻대로 될지는 의문이지만ㅡ 최대한으로 꼴 생각입니다. 그럼 See you again... 자아, 이번 챕터는 연참으로 시작해보자아... 분량 만들자아!! Seiko Sawada의 Egaoga Sukidakara를 들으며... 성숙미가 물씬 풍겨나는 음성이네요. 심하면 아줌마 목소리일까.. 아무튼 화청의 여자 '미연'의 테마입니다. “후우…….” 상체를 조금 틀어 성당 안의 제단을 보았다.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쏟아지는 빛은 예수상의 곳곳으로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구슬프도록 애절하며 눈부시도록 찬란한 서광이 예수의 성명을 싣고 내게 쏟아졌다. 그것은 타지의 침입자에 대한 징벌의 허락처럼 나를 어루만져주고 있다. 실상은 그것이 아님에도, 가슴에 쌓이는 미지의 기운은 나에게 이유 모을 자신감을 실어다준다. 마비로부터 벗어나 육신이 자유를 얻는다 맞아. 지금 이 기운, 확실치는 않지만 언제고 한번 경험해 본적이 있다. 듀얼 랠리 폐회식 때…… 로그가 프로얀을 준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해. 그 이후에는 아마도―. 촤라락! 강해졌던 것 같아. 쩌엉―! 이제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의자가 연쇄적으로 폭발하고 유리창도 모조리 깨져나간다. 한 가지 의문인 점은, 뒤편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허물어졌는데도 긁힌 흔적조차 없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예수상이다. 수호자라도 되는 양 당신은 살포시 감은 두 눈으로 나를 굽어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으신다. 환상이 아니다. 예수상의 그는 틀림없이 웃고 있었다. 소리 없이 웃으며 바닥으로 늘어진 채찍을 보았다. 1/3가량이 잘려나간 상태다. 죽기라도 했는지 일말의 움직임조차 없다. 아아, 어쩌면 정말로 죽은 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공격. 지금까지의 정교함. 모든 것이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넘쳤다. 정녕 채찍을 하나의 생명체로서 생각한다면, 그러한 치밀한 동작은 모두 설명이 되지. 맞아. 예전만해도 발록은 이토록 능수능란하게 채찍을 사용하지 못했다. 강함의 근원이, 바로 채찍이었는가. “우스워. 우습다고.” 큭큭 웃으며 드래곤 슬레이어를 부르쥐었다. -쿠어어! 소중한 연인을 잃은 이의 절규처럼 발록은 채찍을 놓지 않은 채 처절하리만치 긴 포효를 내지른다. 나는 냉소하며 발록을 직시했다. 채찍의 존재로 근접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 놈은 채찍을 잃었다. 즉, 장거리 공격을 시도할 어떠한 수단도 없다는 의미다. 평균적인 능력치는 여전히 높을지 몰라도, 발록을 소멸시키는 유일한 통로가 열리게 되었다는 부분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다. 이길 수 있다. 이상 무력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해보자.” 성당 밖에서 조소하고 있을 그자의 코를 짓뭉개기 위해서 하는 도전이라 봐도 좋다. 드래곤 헌터로서의 명예를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라 봐도 좋다. 동기가 무엇이 된다 한들 상관 없다. 손놓고 주저앉는 것은 내 선에서 용납 못해. 세영을 보았다. 그녀는 퉁명스러우나 강한 믿음이 실린 모습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소리 없는 응원이었다. -카아아! 발록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액면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게 된다. “발악인가.” 동요하지 않았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직관하는 모든 것을 진실로 믿어선 안돼. 그저 현재 그대로를 ‘느끼면’ 되는 일이다. 호흡을 멈춘다. 육신 주변으로 일렁이는 흐름이 점차 강렬해져 간다. 쿠구궁. 이유 없이 성당을 유지하고 있는 기둥이 하나 둘 제 모양을 잃었다. 보잘것없는 돌덩이에 지나지 않게 된다. 뭔가가 지나가는 듯, 의자의 잔해물이 일정한 루트를 그리며 완벽하게 부서졌다. 두 팔을 내리고 자세를 낮추었다. 몸은 금방이라도 사방으로 튕겨져 나갈 것만 같이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 감각이 평상시를 초월하여 반응한다. 아아아―. 대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주위를 감싸고 있던 일렁임이 선당 내부 전체를 침식해 들어간다. 건물 자체가 맥동한다. 창유리도 벽도, 의자는 물론 심지어 예수상도, 성당 내부와 그 자체가 우우우, 저음의 울음을 터트렸다. 마치 야채를 썰 듯 몇 십, 몇 백, 몇 천, 도저히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단층이 되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다. 대기가 무거워진다. 찌잉―하는 느낌과 동시에, 어느 한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거기냐.” 발록의 존재가 잡혔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최첨단 레이더라도 된 듯, 모습을 감춘 녀석의 존재감을 순식간에 감지해낸다. 빠르게 발을 구르며 발록이 있는 곳을 향해 쇄도했다. 목표는 세영의 바로 앞. 놈은 세영을 먼저 처리할 심산인 것이다. 놓칠 수 없다. 절대 살려두지 않아. “반드시.” 기필코 죽여 버리겠어. 쾌속으로 이동해 세영을 등 뒤로 끌어당겼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허공에서 반원을 그린다. 도중에 서걱, 육질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손끝에 기묘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크어어엉! 훅하는 열기와 함께 눈 바로 앞에 발록의 얼굴이 나타났다. 옆으로는 장정의 상체보다 더 큰 발록의 주먹이 처박히며 바닥을 처참하게 함몰시킨다. 영원히 꺼질 것 같지 않던 불길이 꺼져들었다. “죽어!” 높이 뛰어올라 발록의 어깨에 올라탄다. 놈이 더욱 거세게 몸부림친다. 나는 어떠한 표정도 띠지 않은 채, 발록의 목줄기에 검을 박아 넣고 비틀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녀석이 죽어주지 않을 것은 나도 명확히 알고 있다. 화륵. 불길이 뭉치며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마치 노을을 받는 바다에서에서 기어 나오기라도 하듯, 발록의 등에서 한 마리의 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켈베로―”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지옥의 충견이 몸을 들이받았다. 터엉! “큭!” 엄청난 힘이다. 장난이 아냐. 가볍게 몇 미터 이상이나 날아가 지면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불평할 시간도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켈베로스가 날렵하게 달려와 몸을 짓누르고 목덜미에 어금니를 박아 넣으려하고 있었다. 제길! 늦어버― -케에엑! 렸다고 이를 악무는 순간, 사방이 번쩍이고 켈베로스가 역한 황 냄새를 확 쏟아내며 저편으로 널브러진다. 배 한가운데 거대한 구멍이 뚫려있는 것을 보니 도무지 살아있을 것 같지 않다. “조심해.” 월화난무(月華亂舞)로 통하는 램펀트 문라이트(Rampant Moonlight)다. 그녀는 머리 높이까지 들어올린, 시린 백색으로 명멸(明滅)하는 검을 회수하고 나를 일으켰다. “구해줘서 고맙다.” “서포트, 부탁했으니까.” “아아, 그랬나.” 오늘……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그녀에게 받는 것 같아 조금 씁쓸해졌다. 보통은 단독으로 발록을 상대했어야 정상인건만…… 번거롭게 만들어버려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니, 앞서 그 도움조차 다시는 받지 못할 것 같아 걱정부터 들기 시작했다. “이거, 가능하겠어?” “장담 못해.” 보이지 않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앞이 붉다. 시각기능에 이상이 온 게 아니다. 주변이, 켈레로스들로 새빨갛게 뒤덮여 있다. 나는 세영과 등을 맞댄 채로 사방에 포진하여 낮게 으르렁대는 켈베로스를 노려보았다. 어림잡아도 그 수는 서른이 넘는다. 더구나 켈베로스는 유니크. 이따위 허무맹랑한 전력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피하는 것도 용하지 않다. 모든 퇴각로를 놈들이 차단하고 있다. 결론은― 싸운다, 인가. -캬아! 바로 앞에서 덮쳐오는 켈베로스의 머리에 뇌신의 단검을 꽂아 넣는다. 놈은 20%확률로 발동된 라이트닝 볼트에 머리가 박살나 그대로 절명했다. 순간, 머리 위쪽에서 끈적한 살의가 느껴진다. 발톱에 의해 목덜미 쪽의 살점이 망토조각을 동반한 채 뜯겨져 나갔다. 아파할 틈도 없다. 으르렁 소리와 동시에 좌우에서 두 마리의 켈베로스가 돌격해온다. 유효 범위 안에서, 하나의 가슴을 꿰뚫고 그대로 그어 내리며 다른 놈의 목까지 베어냈다. 수는 여전히 많다. 이대로는 희망조차 바랄 수 없다. 죽는다. 쓰러지면 그걸로 끝장이다. 바닥에 쓰러진 내 몸을, 이 녀석들은 걸신들린 듯 우적우적 먹어치울게 틀림없어. “괜찮냐?” “버틸만해.” 다시 등을 맞댄다. 그녀가 조금씩 어깨를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그저 게임상의 효과인지, 아니면 실제로 세영이 가진 온기인지 모르겠지만…… 등으로 전해지는 온기는 떨리는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나는 도움 받고 있는 것이다. -크앙! 발록이 명령하듯 부르짖자 모든 켈베로스가 일제히 쇄도해왔다. 그것은 설탕을 향해 몰려오는 개미떼와 조금의 차이가 없다. 충혈 된 두 눈에선 사나운 광기가 번뜩인다. 바로 그때, 검은색의 빛줄기가 수십의 켈베로스를 삼키고 지나갔다. 파워가 얼마나 강한지 발록의 오른팔이 어깻죽지에 걸쳐 완전히 날아갔을 정도다. “말도, 안, 돼.” 소멸이었다. 애초부터 팔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발록의 어깨는 깨끗하게 사라져있었다. 이런 성격을 가진 스킬은 내 기억에 의하면 단 한가지 밖에 없어. 카오스 스킬. 전선으로 난입한 검은 로브의 유저. 그의 이름은 데블(Destiny Blade). 그의 일검에 켈베로스 다섯이 고깃덩이로 변모한다. 유니크 몹을 크리티컬 어택도 아닌 노멀 어택으로 죽이는 것은 처음 접해서 기가 찰 지경이다. 액면 그대로 눈 깜빡할 사이에 스물에 달하는 켈베로스가 사멸했다. 질투에 앞서 순수하게 경탄하고픈 강함이다. 데블은 내게 클레이모어를 겨누며 난데없는 말을 꺼냈다. “시간은 일분. 그 안에 처리 못하면 내가 나선다.” 중저음의 중성적인 목소리로 그가 선포한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발록이리라. 눈썹을 꿈틀대며 물었다. “어째서 나를 도와주는 거지?” “흥미가 생겼으니까.” 돌아온 대답은 상당히 의외의 것이었다. “목표를 향해가는 자가 얼마나 강해질지에 대해서.” “무슨 속셈이지?” 그는 내 질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검을 치우고 켈베로스에게 다가간다. “기다리겠다. 네가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되어질 때, BBS에 도전장을 올리도록. 직접 답변 달아주지.” “너―.” “55초 남았어. 양보는 없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발록에게 질풍노도와 같은 기개로 달려들었다. 열받는 일이지만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 발록을 놓치면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일장춘몽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후회를 배재할 수 있는 선택이 필수적인 요소니까…… 그러니까 발록은 내가 처리해. 콰앙! 멀쩡히 붙어있는 왼 주먹을 피해 발록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전방으로는 위태롭게 삐걱대는 두 다리가 펼쳐져 있다. 즉시 달려 나가, 망설임 없이 발목을 끊어냈다. 보통 검이면 어림도 없는 일이나 드래곤 슬레이어 앞에선 두부와 강철의 경계선은 무의미할 뿐이다. -크이익! 발록은 괴롭게 울부짖어대며 내게서 튀어나가듯 물러선다. 푸화악! 놓치지 않고 재차 달려들자, 놈은 전신의 화염을 거세게 분출하며 사방을 뒤덮었다. 굉장한 기세로 솟구친 불길이 못을 박는 망치머리처럼 강렬하게 육체를 후려친다. 가드를 했음에도 몸은 버티지 못하고 주르륵 미끄러져 벽에 처박혔다. “쿨럭.” 신물이 올라와 턱으로 흘러내렸다. 엘-가드가 성인등급이었다면 올라오는 것은 신물이 아니라 새빨간 피가 되었을 터다. 마지막 하나 남은 포션을 마시고 세영과 데블을 보았다. 데블 혼자 일방적으로 켈베로스를 도륙하고 있다. 굉장한 기량이다. 나로서는 타개할 방법이 없던 국면을, 그는 무리 없이 풀어나가고 있었다. 저절로 입술이 깨물어진다. 라이프가 어느 정도 돌아오고 나는 재차 짓쳐 들어갔다. 무수한 공격이 교환된다. 절대 물러설 수 없어, 데미지를 받으면서도 악착같이 반격했다. -그어어……. 한 번 더 화염을 뿜어내는 것이 마지막 몸부림이었는지, 발록을 덮은 불길은 미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자신조차 뻘건 숨을 내쉬며 경계의 빛을 내비친다.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기에 앞서 데블을 보았다. 켈베로스의 시체 위에 팔짱을 끼고 앉아 느긋하게 구경 중이다. 노골적으로 내 하나하나를 뜯어보는 그 태도는, 내게 무한한 패배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결국 그를 능가하기는커녕 씁쓸한 패배감만 받은 것으로서 결말지어졌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그는 그고 나는 나다. 단번에 뛰어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나는 단지 목표를 정해두고 노력하려 했을 뿐이다. 지금은 무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직은 시기가 아니니까 차근차근 전진하면 되는 일이야. 훅, 숨을 내쉬었다. 날아오는 화구(火球)를 피해내며 발록의 머리 위로 뛰어 올라 드래곤 슬레이어를 끌어당겼다. “제발 부탁하는 바이니 적당히 강해져라, 발록.”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여태껏 아껴두었던 ‘최후의 생명줄’을 끊는다. 안구에 붉은 빛이 번졌다. -엘리트(Elite) 드래곤 슬레이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헬 스킬(Hell Skill) 묵색의 검신이 붉게 달아오르며, -레벨 에잇(Level Eight) 화염에 휩싸인다. -크로스 디바이드(Cross Divide) 십자형의 붉은 벼락이 발록의 머리위로 작렬했다. 아아, 힘들었습니다. 굉장히 노력해서 썼지만 도저히 만족해줄 만한 수준이 못되네요. 생각없이 써내려나가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끝내고 보자는 나태주의가 적용되어 마무리가 좋지 않군요. 아아, 몰라요, 몰라. 너무 졸려요. 하루 종일 쓴 게 달랑 이정도 분량이라니... 나 자신이 스스로도 어이없게 느껴져... 한숨이 다 나오네요. 타자는 느린 게 아닌데.. 왜이리 늦게 쓰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문장이 바로바로 생각나야하는데 늦게 떠올라서 그런가.. 이놈이 잡념.. 확 버리고 싶은데 그것도 안되니.. 나참.. 월요일부터 자율 학습을 시작합니다. 집에오면 11시군요. 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강제적이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군요. 튀면 그대로 부모님께 연락한다는 (정말 선생님께는 죄송하지만 치졸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협박을 해서 어쩔 수가 없네요. 여느 부모님이 그러하시듯, 당신의 자식이 남들 다하는 공부않고 튀었다는 말을 들으면 날벼락이 떨어지기 마련아니겠습니까. 에휴... 30일만 고생해보렵니다. 연재 주기는 2틀에 1화 꼴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아니면 2화라든지..(연참 제외하고) 그럼 다음에 뵈요. Keiko Yoshinari 의 Itsuka Kagayaku를 들으며... 로리틱한 앳된 목소리가 마음에 듭니다. 예전에 엑스트라로 등장했던 '리엘(샤프와 한 대기실에 있던)'의 테마입니다. 次回豫告. Level 11. Need not to know. 비밀(秘密). 류현 : 어디보자. 오늘의 상영작 장르들이…… 멜로, 멜로, 멜로, 멜…… 뭐야 이 영화관……. 세영 : 그거 어제 거야. 정신 나간 류현. 학진 : 자고로 영화관의 묘미는 공포 영화 속에서 싹트는 낭만이다! 류현 : 넌 피가 낭자하는 장면에서 낭만이 느껴지냐? 그렇게 공포 영화를 보고. 성호 : 야야. 저 여자 널 보고 있어. 예정된 만남. 샤미라 : 지연의 아버지가 미르트의 사장이라는 걸 알고 사귀는 거야? 류현 : ……농담하지 마. 복잡한 관계!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베일에 싸인 단서들을 모아라, 류현! Level 11. Need not to know. 비밀(秘密). 1. ‘그 날’로부터 나흘이나 지난 토요일. “야아, 류현! 토요일이라고, 토요일!” 종례가 끝나기 무섭게, 학진이 환의에 찬 함성을 지르며 뛰어온다. 교실을 나서는 학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이곳으로 몰린다. 나는 이마를 짓누르고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유치한 녀석 같으니.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흥분해서 역설하지 말라고. “적당히 해둬, 이 자슥아. 어린애 아니랄까봐 오두방정 떨기는. 어디 가서 친구라고 하지 마라. 동류로 취급받을까 심히 두렵다.” 이미 와있는 성호는 ‘골빈 자식’이라고 중얼거리며 학진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야! 모처럼 미녀와의 나들이인데 설레지 않으면 그게 남자냐? 너 설마하니 ‘그거’야?” ‘그거’가 가리키는 단어가 뭔지는 몰라도 꽤나 성가신 상황을 불러올 거라 생각한다. 예상대로 성호의 이마에서 힘줄이 불거져 나온다. “이 자식이…… 지금 말 다했냐!” “아니! 아직 멀었다! 할말 다하려면 오늘로도 부족해!” 얼굴을 마주대자마자 으르렁대기 시작하는 둘을 보고 미간을 짓눌렀다. 항상 같은 패턴이라 무상감마저 느껴진다. 어쩔 때는 어느 콤비보다 뛰어난 결속력을 보이는 녀석들이 평상시에는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원. 뭐, 그만큼 허울을 터고 지낸다는 단적인 의미일까나. 티격태격하는 둘을 없는 셈치고 찬석을 본다. 그는 지겹다는 얼굴로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찬석의 곁에 있어야할 은주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은주의 가방이 찬석의 손에 쥐어져있으니 먼저 집에 간 것은 아닐 것이다. 잠깐 화장실에라도 다녀오는 모양이다. “은주 어디 갔어?” “손 닦고 온다던데.” 역시. 화장실 갔다는 의미로군. 세영도 함께 나갔으니 같이 간 것이려나. 고개를 끄덕이고 음흉하게 웃으며 녀석의 옆구리를 찔렀다. “흐흐…… 잘돼가냐?” 축약된 문장임에도 무리 없이 이해했는지 찬석은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뭐, 그럭저럭일까.” 그렇게 답하면서도 찢어지려 실룩이는 입술이란……. 최후의 공략에 성공했는가, 18세 박찬석이여! “볼 장 다 보셨나보군.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벌써부터 의사놀이 답습이냐.” “괜찮잖아. 서로 간에 동의도 있었고, 또 미래를 향한 기반을 다지려면 그것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으니까. 우리 같이 살 생각이거든.” 벌써부터 차후 계획이냐. 애는 몇이나 낳을 생각인지는 체면상 묻지 않으마. 하여튼 요즘 것들은 너무 조숙하다니까. “자식. 부럽냐?” 팔꿈치로 쿡 찌르며 실실 쪼개는 찬석에게 순수하게 경탄해버렸다. “에라이, 탄명스러운 인간아. 남들은 청춘을 불사르지 못해 안달이건만 넌 벌써부터 인생에 족쇄를 채우려드냐? 어리석기 그지없구나.” “듣고 보니 명답일세…….” 이제야 알았냐. 잠시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찰하는 자세를 보이던 찬석은, 이내 ‘새됐구나, 내 꽃다운 청춘……’이라 중얼거리며 픽 쓰러졌다. 새우자세로 몸을 웅크린 채 눈물짓는 그를 향해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해본다.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너.” 아무런 맥락 없이 부활하여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찬석. 고개를 갸웃해본다. 어떻게 된 거냐니…… 도대체 뭐가 말인가? 최소한의 의도도 갖추어지지 않은 문장을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찬석도 자신이 실수했음을 알아차렸는지 아차하며 말을 덧붙였다. 작은 목소리다. “발록 말이야. 아무리 동영상을 돌려봐도 네가 고전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어.” 나는 그의 말에 피식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걸 또 찍은 사람이 있단 말이지? 베스트 레코드 샷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로군. 확실히 나 헬 마스터와 관련된 동영상은 시기를 막론하고 그 달의 베스트가 되는 것이다. 창밖으로 씁쓸한 시선을 둔 채 입을 연다. “제대로 봤네. 너무도 고전해서 하마터면 익스펠될 뻔도 했어.” 막판에 크로스 디바이더로 머리부터 사등분되어 놈이 폭사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 순간일 뿐이다. 이전까지 나는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넘겼다. 세영의 헌신적인 도움과 데블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추측이고 나발이고 무조건 나는 죽었다. 발록의 무위(武威)는 그 정도로 대단했다. “정말이냐?” 미심쩍다는 듯 찬석이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온다. 하루 내내 침이 마르도록 논박을 할 것 같던 학진과 설호의 관심도 여기로 쏠린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텅 빈 교실에는 이렇게 네 명뿐이 남아 있지 않다. 작은 한숨을 내쉬어 본다. 그 한숨은 학생들이 없다는 점에서 기인한 안도가 아니라, 나 자신의 한심함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9월. 초록빛이 옅어지는 가을의 문턱. 아직 햇볕은 따갑지만 바람에는 서늘함이 묻어있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날의 일을 잊지 못한 상태다. 입안 가득 느껴지던 세영의 온기와 숨결이 여전히 입술에 물들어 있다. 마치 마약처럼 따라붙는 감각은 심한 갈증과 더불어 ‘한번만 더’를 갈망한다. 지여누나의 입술을 몇 번이고 탐해봤음에도 변한 것은 없는 것 같다. “하아아…….” 스스로 자조적인 기분에 휩싸여 버린다. 타락해가는 기분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키스를 하면서도 욕구불만이 쌓인다니……. 누가 들으면 나더러 무척이나 음란하다고 욕할지도 몰라. 그보다 더욱 한심한 것은 세영을 볼 때마다 우선 입술만을 물끄러미 쳐다본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한심한 짓거리란 말인가. 정작 지연누나는 눈 바이고 다른 여자의 입술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추태란……. “후우…… 에?” 문득,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굉장히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삼인방을 인식할 수 이었다. 생각해보니, 아직 설명해주지 않은 채다. 정말이지 요 근래 들어 정신을 다른 곳에 두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 잠시 그러한 자신을 마음 깊이 반성해본다. “설명하기 앞서 한가지만 물으마. 동영상에 별다른 내용은 없었냐?” “별다르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것?” “한 커플의 적나라한 키스신이라든가…… 그것과 얼추 비슷한 것.” 그들은 괜히 아쉽다는 형색이 되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켈베로스 이후의 장면만 나오던데.” 켈베로스 이후의 장면, 이라고? 어째서? “아, 한 가지 더 있다. 동영상 마지막에 한 글귀가 뜨던걸.” 성호가 생각났다며 무릎을 친다. “음, 대충 널 향한 메시지인 것 같던데. 뭐라더라…… 아, 그래! ‘직관하는 모든 것을 현실이라 이해하지 말라. 비밀을 푸는 열쇠는 근처에 있음을 명심해, 헬 마스터’였나. 무슨 의미인지 알겠냐?” 성호의 말을 들으니 돌연 한 인물이 연상되어졌다. 정확히 켈베로스가 나타난 시점에서 등장했으며 그런 말을 남길 가능성이 농후한 작자가. 아아, 네놈이 올린 것이로군, 데스티니 블레이드. 정말이지 무슨 속셈인 거야, 그 자식. 적을 속이려거든 아군을 먼저 속여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은 모두가 이 뒷이야기를 위한 전야제에 불과합니다. 즉, 여러분이 이상해하셨던 부분들이나, 잘 이해되지 않은 부분들, 혹은 관심없이 지나치셨던 사건들이 향후 이야기의 단서가 될 것입니다. 대략적인 스토리 라인을 매번 도움주는 친구에게 보여줬더니... 하나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더군요. 뭐, 이해 안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겠지만요. 스토리를 두서없이 적어두었으니 이해하면 이미 범인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 아니겠습니까. 썩 자신할 수 없는 스토리지만... 그래도 최대한으로 잘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언제나 '엘레멘탈 가드'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즐거운 10월 되세요. 미즈이로 OST를 들으며... 음악보다는 게임에 정감이 많이 갑니다. 게임 분위기와 연출, 설정 등 모든 것이 마음에 드네요. 제가 플레이 해본 수십가지의 미연시 중에서 최고의 범주에 드는 드문 게임입니다. 아아, 수능 끝나면 다시 해봐야지... 그가 남겨놓았다던 메시지의 진의가 궁금해진다. 기다려준다는 말의 이유도 파악할 수 없다. 아니. 그것들은 뒤로 제쳐두고서라도 어떻게 그렇게나 빨리 에타이에 도착할 수 있었는지가 가장 궁금하다. 데블, 일찌감치 에타이에 도착해 있었어. 발록이 속박을 푸는 그 순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너무도 공교롭잖은가. 나서지 않고 관조적인 태도를 보이다 도와준 것까지, 처음과 끝 모든 부분이 의문투성이다. 거기다 직관하는 모든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까지 남겼다. 놈이 의도하는 바는 알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앞서 무엇으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라는 것인가. “또 있었다고, 멍청이. Need not to konw, 알 필요 없다는 말.” ……결국 그것이 내 의문에 대한 당신의 답변인가, 데스티니 블레이드. 입술을 깨물고 재차 불꽃을 튀기기 시작하는 학진과 성호에게 물었다.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냐?” 이것에 먼저 대답한 것은 찬석이었다. “없어. 그게 전부야.” 아아, 그렇군. 동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는 찬석이니, 그의 말보다 타당성을 가지는 대답은 어디에도 없을 거라 본다.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학진과 성호의 뒤통수를 때려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뭔가에 집중하려는 차에 잡소리가 끼면 그보다 신경 쓰이는 일은 없는 것이다. 뭐, 문제라면 방금 무슨 생각을 하려고 했는지를 잊어버렸다는 것일 테지. 다툴 때는 언제고 금방 협력하여 ‘타도 한류현! 폭력정권 물러가라!’를 역설하는 둘을 무시한 채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발록 자식, 무진장 강해져 있었어.” 셋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의미이리라. “드래곤 사냥 때도 밀리지 않은 너였어. 비록 힘이 봉인되었따 하더라도 발록 보다 약하지 않은 것이 기정사실이지. 그런데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함은…….” “무진장이라고 말했잖아.” 찬석이 심각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나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쉴 뿐이다. 그때 학진이 성호를 밀어내고 자신의 의견을 열변했다. “무진장이라고는 해도 단번에 강해질 수는 없어. 만약이라는 전제를 붙여 발록이 크게 성장했다 가정해도, 절대 드래곤은 능가 못하지.” 이번엔 성호가 학진의 얼굴을 밀어내며 말을 받는다. “봉인 된 드래곤 보다 발록이 강하다면 누가 발록을 잡으려들겠냐? 약간의 출혈을 감내하고서라도 경험치가 천양지차인 드래곤을 잡고 말지. 사정만 된다면 나부터가 그렇게 할 거다.” “바보 아냐? 위치를 모르는데 드래곤을 무슨 수로 잡으며, 알아내더라도 씰 스톤이 땅파면 나오는 줄 아는 거냐? 개념 없는 자식들.” “자식, 말이 그렇다는 거다!” ‘타도 한류현! 인격비하 웬 말인가!’의 구호를 외쳐대기 시작하는 둘을 짜증어린 모색으로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사실, 둘의 의견은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분명 봉인된 드래곤보다 발록이 강하다면 너도나도 용사냥 가겠다고 혈안이 될 것이 뻔한 현상인 것이다. 이미 제시하였든 준비과정이 문제이긴 하나 그것도 유저들과 협력하면 못할 것도 없다. 일단은 상호간 돕다가 마지막에 배신을 때리든가 하면 The End 아닌가. 하지만 미르트사는 바보가 아니다. 이미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두었을 터다. 즉, 발록은 드래곤을 능가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추측이기는 하나 가능성이 아예 없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발록이― “으앗!” 어느 순간 뺨에 닿는 냉기에 정신이 번쩍 뜨였다. “뭘 골똘히 생각하고 있어? 너답지 않게.” 말이 들려온 뒤쪽에는 은주가 서 있었다. 세영과 수희도 함께다. 어느새 모두 모인 모양이다. “아아, 왔냐…… 까지는 좋은데 나답지 않다는 건 어떤 의미냐. 누구는 생각도 안하고 사는 줄 알아?” “그렇기는 하지만 넋 놓고 생각에 잠겨있는 것도 분명히 드문 일이잖아. 낯선 만큼 너와는 어울리지 않았거든.” 은주는 마지막으로 내게 캔 음료를 건네고 빙긋 웃었다. 아마도 이것을 볼에 댄 듯하다. 하여튼 장난치기 좋아하는 건 여전하군. “저기, 태진군이 보이질 않아. 아직 안 온 거야?” 은주를 흘기는 사이 수희가 주변을 살피며 갸웃한다. 갑자기 사내놈들 쪽으로 저기압전선이 형성된다. 나를 비롯한 남자 넷은 머리를 맞댄 채 의논하기 시작했다. “꼭 데려가야겠냐?” “결사반대. 그놈 데려갔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고.” 나는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버려버려.” “버려버려는 류현이 말한 거냐? 명쾌한 결론이군.” 회의 종결. 결과는 반대표 하나 없는 만장일치인가. 찬석이 대표로 나서, 이쪽을 괴이쩍다는 듯 쳐다보는 세영들에게 변경된 사항을 발표했다. “태진이 자식은 못 간다네.” 물론, 정확히 말해두자면 ‘데려가지 않는다’다. “꼭 감정실린 것 같아.” 미심쩍다는 얼굴로 날카로운 지적을 가하는 수희가 아닌가. 우리의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세영은 변함없이 담담한 모습이고, 은주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그저 웃을 뿐이다. “못 간다는 걸 데려갈 수는 없잖아. 그럼 가보자고.” 그렇게 말해고 앞장서는데 누군가가 목덜미를 잡아챈다. 학진이었다. “잠깐! 미친 거 아니야, 너? 교복차림으로 가자고?”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안 그러면, 알몸으로라도 갈까?” 학진은 출처불명의 요상한 미소를 띠며, ‘역시 부족하군, 류현군’하고 거만한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두주먹 불끈 쥔 채로 꿈꾸듯 역설한다. “영화관이 어디라고 생각하는 겐가! 꿈의 장소! 만남의 장소가 아닌가! 그런 곳에 이런 유치 찬란 개념박살의 교복을 입고 간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 무난한 헌팅을 위해서라도 교복은 결사반대다!” “헌팅 따위 내 알바가 아닌데.” “시끄러워! 사복 아니면 안 갈 테니 그리 아시오!” 성호의 외침에 귀를 비비적거리다 미련 없이 등을 돌린다. “그럼 가지 말던가.” 둘 정도 빠진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냉큼 돌아서 나머지 이들에게 가자는 손짓을 보냈다. 그때, 성호와 학진이 실로 벼락과도 같은 속도로 달려와 내 발을 붙잡고 늘어진다. 제길! 놓으라고! “안돼! 사복 아니면 너도 못갈 줄 알아!” “이미지라는 게 있다고! 교복이면 웃음거리만 될 뿐이야! 디자인이 각별하게 멋진 것도 아니잖냐!” 아아, 이 얼마나 처절한 짓거리란 말인가. “저만큼이나 필사적인데 사정 좀 봐줘라. 불쌍하다.” “그래, 류현. 나도 땀 냄새 밴 교복은 싫은 걸.” 찬석이 안쓰럽다는 얼굴로, 수희는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동의한다. 그 의도가 동정심에서 기인했음이 훤히 보이는 말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세영을 보았다. 그녀는 수희의 말 때문인지 블라우스의 냄새를 맡다 미미하게 미간을 좁힌다. 은주도 아무렴 어때라는 식으로 웃고 있기는 하나 ‘되도록 사복으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시선을 의식하고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하지 않는가. 결국 둘의 의견을 수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2시까지 시네마 월드 건너편의 카페에서 만나자. 늦는 사람은 떼놓고 갈 거니까 늦지 않도록 하고.” “OK!” 가장 신이 나서 외치는 이는 학진과 성호뿐이었다. 하아, 번거롭게 뭐하는 짓이라니…….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후후... 우후후후훗... 2. “안돼요, 안돼, 오빠! 그건 너무 나이 들어 보인다구요. 가을에는 젊고 깔끔해 보이는 심플한 디자인이 좋아요.” “…….” 어울릴 거라 말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고개를 젓는 것은 도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이게 좋을까? 아냐, 아냐. 우응, 이것도 별로고……, 등으로 쉴새없이 중얼거리는 은현을 보며 미간을 짓눌렀다. 이미 방 안은 옷장에서 쏟아진 옷들로 난잡함의 극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모두가 은현의 손이 일궈낸 작품이다. 이것저것 꺼내 몸에 대보고 고개를 저으며 내던지길 반복, 결국 난장판의 양상을 이룩하고야 말았다. 그럼에도 아무래도 좋은 것인지 은현의 얼굴은 나를 옷걸이로 전락시킨 이래로 내내 싱글벙글이다. 물론, 지금은 꿍한 표정이지만 곧 새로운 코디를 짜보고 즐거워할 것이라 장담한다. “헤에, 이거라면 오빠 분위기에 적합할지도 모르겠어요.” 대체 내 분위기가 어떻기에 수시로 바뀌는지가 의문이었으나, 옷가지를 골라 생글거리는 은현을 보고 곧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분위기 문제가 아니라 녀석의 사상 문제였다. 은현은 나를 상대로 인형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투덜거림은 자신의 의도를 감추기 위한 연막에 불과할 터다. 옷을 고르는 내내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만 봐도 짐작 가능하다. 어찌 불평하는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모순적인 면모를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시간을 확인해보고 고개를 저었다. 1시 30분. 절망적인 타임 리미트다. 이대로 가다간 늦어버릴 지도 몰라……. “아무거나 상관없으니까 대충 좀 해줘.” 은현이 단호하게 두 팔을 교차시켰다. “안돼요! 어디서나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에요. 여자를 확 휘어잡으려면 좋은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요.” 그것은 은현의 생각일 뿐이다. “그러니까 말이지요, 동생님. 제가 선이라도 보는 줄 착각하시나 본데…….” 은현은 내 가슴에 흰색 남방셔츠를 대보다가 고개를 기울이고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게 꼭 처음 듣는다는 의아함에 찬 시선이라 머리가 상당히 지끈거렸다. 내 나이가 몇인데 벌써부터 선을 본다는 것인지 원. 오늘 여러 번 한숨쉰다고 생각하며 녀석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터무니 없는 상상 좀 하지마라. 네 오라버니는 영화관에 가는 것뿐이라고.”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울먹이는 은현. “히잉……. 진작 말해줬으면 좋잖아요…….” 일일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보통은 정상적인 상황을 떠올릴 것이라 생각한다. 더구나 은현이 방으로 들이닥쳤을 때 사정을 설명해준 것으로 기억하는데. 생각해보나마나 혼자 들떠서는 설명을 한귀로 흘려버린 거겠지. 엉뚱한 녀석. 은현은 빠른 손놀림으로 옷 한 벌을 품에 안겨주며 새침하게 웃었다. 그것이 반시간은 더 전에 입었던 옷임을 기억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동생의 인형놀이에 휘말려 있던 것이다. 그래도 오빠를 생각해주는 은현의 착한 심성을 가상히 여겨 핀잔을 주는 것까진 참아본다. 재차 사정을 설명해주자 은현은 대번에 결론을 지었다. “데이트네요.”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걸까나. 더욱 기가 막힌 점은, 그 말을 한 직후부터 은현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온다는 것이다. “지연언니를 필두로 세영언니, 은주언니, 거기다 수희라는 언니에 나까지. 오빠 바람둥이!” 이제는 할말까지 잃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다른 예는 억지로 그렇다 쳐도 말이지, 너는 어째서 들어가는 것이야?” “다다익선이라잖아요. 일단 많아야 설득력을 갖춘다니까요.” “억측이라 생각하는데, 그건.” 은현은 헤헤 웃을 뿐이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껴입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같이 가지 않을래? 너라면 모두가 환영일 텐데. 귀여운 동생님은 어딜 가든지 사랑받는다고.” 은현은 내가 옷을 입는 동안 돌렸던 몸을 원위치 시키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말은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방해하기 싫거든요. 그것 이전에 저도 친구들과 같이 게임하기로 선약이 되어 있기도 하고요.” 방해는 무슨……이라 말하려다가 이어지는 말에 입을 닫았다. 선약이 있다는 녀석에게 무리하게 부탁하여 약속을 깨게끔 만들 필요성은 없는 일이다. “이번엔 퀘스트 수행이냐? 아니면 예전과 다름없이 레벨 업?” 은현은 내게 스킬 북을 받은 이후 죽 성장에만 매진해 있다. 나는 사정상 가끔 도와주는 것이 전부이나, 세영과 은주, 찬석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현재 은현은 270레벨에 육박해간다. 레어급인 디바인 스킬도 레벨 3까지 마스터한 상태다. 때문에 은현은 제대로 게임을 즐기지 못하는 그들에게 항상 고마움과 미안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도 충분히 재미있어하니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작은 퀘스트나 해결하면서 놀기로 했어요. 며칠동안 같은 작업만 반복하다보니 식상함도 느껴져서요.” 은현은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바로잡아주며 생긋 미소 짓는다. 확실히 은현은 지루한 것에 그리 오래 붙어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내가 레벨을 중시했다면 녀석은 커뮤니티를 중요시한 것이다. 이전의 레벨 또한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남들과 파티 맺고 다니면서 올라간 것이 전부다. 성직자의 특성상 직접 전선에 참여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만. 나는 은현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은현이 배시시 웃다가 손뼉을 짝 치며 탄성을 터트린다. “아, 맞다. 오빠, 발록 말인데요…….” 또 그 이야기냐. 길거리에도 한창 화젯거리더니……. 하다보면 위험에 처하는 때도 있을 수 있는 거지, 그게 뭐 대수라고 호들갑들인지 모르겠어. 나는 시간을 확인해보고 잘라 말했다. “다녀와서 천천히 이야기 해주마. 지금 누구덕분에 지각할 처지거든.” 은현은 미안해하는 얼굴을 한 채 다른 말없이 나를 배웅했다. “꼭 말해주기에요. 알았죠? 그럼 재밌게 놀다 와요, 오빠!” “집 잘 지키고 있어. 낯선 사람 오면 함부로 문열어주지 말고. 일 생기면 내 휴대폰으로 전화해라.” “네에.” 엘리베이터의 하향 버튼을 누르고 은현에게 당부해둔다. 꼭 말하지 않더라도 제대로 할 아이이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쩐지 한구석이 찝찝해지는 현상은 어쩔 수가 없다. 무인(無人) 상태였는지 32층에 있던 엘리베이터는 금세 17층으로 내려왔다. 은현이 탑승하는 내게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어준다. 문이 닫히기 직전 저녁 먹기 전까지는 들어올 거라 말해두고, 1층에 도착한 즉시 약속장소로 향하였다. 스토리 팍팍 진행합니다아! 3. 가까운 거리를 택시로 이동한다는 것은 영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처한 상황이 급하더라도 변함이 없다. 그래도 요행이 지각을 면했다는 것으로 위안삼아 보지만, 돈 낭비했다는 씁쓸함이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조금은 얇아져버린 지갑을 가슴 절절히 통감하며 영화관 앞 건물 3층의 카페에 들어섰다. 《마음 속 스위치를 눌러 슬픔을 떨쳐버려요. 스쳐가는 바람 온몸으로 느끼고 있어……》 카페에는 그윽한 향과 조화를 이룬 은은한 멜로디가 흐른다. 가득 찬 테이블엔 사람들의 담소가 한창이다. 이것이 평온한 분위기인가. “어서오세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원형 스틸 쟁반을 든 여종업원이 다가와 발랄한 미소로서 맞이한다. 그녀는 스코틀랜드 풍의 체크무늬 서빙복을 입고 있었다. 이 카페의 흥행비결은, 번화가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이점의 작용이 아니라 달마다 바뀌는 코스튬 때문인 것이다. 나는 조용한 시선으로 종업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게 얼굴을 화악 붉히며 머뭇머뭇 입술을 뗀다. “아, 저기 손님……. 연락처, 주시면…….” 눈치를 살피며 연락처를 요구하는 그녀의 얼굴엔 나를 향한 열망이 대단했다…… 는 당연히 내 상상에서만 일어난 일이고……. 실상의 종업원은 상술적인 면모가 짙은 접대용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응접할 뿐이었다. “일행이 있으시죠?” “아, 예. 그렇기는 합니다만…….”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하며 고개를 기울여본다. 종업원은 내게서 궁금증을 읽어냈는지 총총 앞장서며 카페 창가 쪽의 꽤 큰 테이블을 가리킨다. 녀석들이 앉아있었다. 모두 온 상태다. 이거, 결국 기다리게 만들었는걸. “저쪽 테이블 손님 분들께서 인상을 설명해주셨거든요. 상상한대로 시원하면서 단아한 멋이 있으시네요.” “예에…….” 자신의 센스를 유감없이 발휘한 종업원의 등을 향해 소리 없이 투덜거렸다. 곧 죽어도 잘생겼다는 말은 하지 않는군. 전후사정을 따져보면 눈앞의 여종업원은 경력 꽤나 있는 프로페셔널인 것 같다. 객이 몇 십 명이나 오고가는 카페에서 해당 사람을 정확히 집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이다. 더욱이 말로만 전해 들었을 뿐이잖아. 보통의 눈썰미로는 확실히 무리가 있었다. 늦게 온 주제에 티타임을 즐기기도 뭐해서 물 한잔을 부탁하고 일행에게 다가갔다. 제일 먼저 나를 발견한 수희가 반갑게 손을 흔든다. 이미 알고 있으니 그렇게 자신을 부각시킬 필요는 없는데. 가뜩이나 그쪽으로 몰려있는 시선이 더욱 늘어나잖아. “여어, 말 그래도 칼 같은 시간이네. 막 2시 되었어.” 찬석이 경탄하며 눈을 찡긋하고 엄지를 세운다. 나는 마침 종업원이 내미는 냉수 한잔을 들이켜고 큰 숨을 내쉬었다. 어찌어찌 시간은 지킨 모양이……. “1분 늦었어.” 이런 조잔한……. 턱을 괴고 하등의 관심 없이 바깥 풍경만 구경하던 세영이 내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정정했다. 태도가 얼마나 쌀쌀맞던지 등에 식은땀이 맺힐 지경이다. 나를 반겨주던 다른 이들도 할 말을 잃었는지 헛기침만을 연발하고 한술 더 떠 시선까지 회피하는 게 아닌가. 저런 의리 없는 것들……. 아아, 그런데 어쩌냐. 나는 시간을 지켰거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질 수 없는 일이라, 세영의 눈앞으로 손목시계를 들이밀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 손목시계 위성 시간이거든? 즉, 공식시간이라는 말이지. 방금 1분이 지났으니 정각에 온 게 맞아.” 어느덧 입술로 향해있는 시선을 억지로 세영의 눈에 맞췄다. 그녀는 가만히 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둔다. 나는 피식 웃고 입을 열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세영이 작게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가 원한 것은 기다리게 한 부분에 대한 사과였던 것이다. 하여튼 겪으면 겪을수록 재밌는 녀석이다. 나는 괴이쩍다는 듯 나와 세영을 번갈아 살피는 성호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슬슬 나가보자. 티타임을 즐기러 온 것이 아니라 영화보기 위해 모인 거잖아.” “얼씨구. 제일 늦게 온 주제에 말은 잘해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치는 학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사실인지라 아무런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칼을 가는 것이 전부였다. 젠장맞을. 너, 다음번에 1초라면 늦으면 가만 안 둘 거니까 미리 관이나 짜둬. 영화관 앞은 토요일이라는 날짜에 걸맞지 않게 한산했다. 물론 평상시의 토요일에 비해서다. 다른 곳보다는 확연히 많은 인파를 자랑하고 있다. 자아, 그러면 영화를 관람하러 가보실까나. “무슨 영화 볼 건지부터 먼저 결정해.” 은주와 팔짱을 엮은 채 찬석이 말한다. 그 닭살 쏟는 꼴에 눈언저리가 저절로 일그러졌다. 그래도, 주변 이들로부터 은주를 지켜내기 위한 행동이라 이해하여 관심을 끊었다. 도저히 눈꼴 시려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 해서든 지연누나와 함께 왔을 텐데……. 아아, 옆구리가 시려! 나흘 전에 지연누나와 통화했다. 세영의 말대로 그날 오후에 들어왔다고 한다. 전날이 워낙 더워 하루 더 캠핑했다나. 이후의 대화에서 누나는 함께 영화 보러 가자는 내 요청에 안 된다고 답했다. 외국에서 외갓집 사람들이 온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 가족인 세영이 오는데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어딘가 모순적이라 아연해기도 했지만, 장녀여서 그런 것이리라 스스로 납득하여 모처럼의 데이트는 포기했다. 지금 회상해보면 굉장히 후회 막심한 짓거리를 한 것 같다. 친척들을 대동하고서라도 무조건 같이 영화보자고 대쉬했어야 하는 것인데……. 크, 내일이면 5일째 못 만나는 것인가. 집에 찾아가던지 해야지 원. 남들이 알아보지 못할 크기로 작게 한숨쉬고 근처 안내판으로 이동했다. 보고 결정해야함이 마땅한 것 아니겠는가. 무릎정도 높이의 원기둥에 가까이 다가서자, 그 위로 사각형 홀로그램이 크게 펼쳐졌다. “어디보자. 이번 주 상영작 장르가……. 멜로, 멜로, 멜로, 멜……, 뭐야, 이 영화관…….” 우와아, 하고 놀라버린다. 온통 연애물 뿐이라니, 이런 식으로 운영하면 대부분 망하지 않나? 이런 정시나간 영화관 같으니……. 이로고도 용케 철거되지 않고 있군. 갑자기 영화보기가 굉장히 두려워지잖아. 그때 세영이 자연스레 팔짱을 끼며 홀로그램을 가리킨다. “그거 지난 주 장르별 리스트.” 그녀의 손끝이 향해있는 곳에는 정확히 그러한 문구가 적혀있었다. “바보 같아, 류현군.” “…….” ……단순히 조크였을 뿐이라고. 뭔가 참는 얼굴로 그렇게 흘겨볼 것까지는 없잖냐. 사람 민망하게……. 입을 가리고 쿡쿡 웃는 수희와, 아예 대놓고 박장대소하는 사내녀석들. 나는 달아오르는 안면을 손으로 가리고 흠흠 헛기침을 터트렸다. “에에, 류현군 얼굴이 빨개졌어.” “어머나? 철판 마왕님께서 부끄럼을 타시는 걸까나?” 이제는 쐐기까지 박는 수희와 은주. 험험, 누가 철판 마왕이라는 거야……. 얼굴을 슥슥 문지르고 담담한 척 고개를 돌리니 물끄러미 쳐다보는 세영의 얼굴이 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팔짱을 풀고 한발자국 물러나 중얼거렸다. “몸, 뜨거워서 싫어.” 멍하게 얼이 나간 모습으로 황망하게 세영을 본다. 은주가 풋 웃으며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당황하면 체온이 오른다던데. 싫은 창피했던 거구나?” “응, 류현군 역시 민망했던 거야?” 시끄러워……. 이후 우리는 관람할 영화에 대해 열띤 논박을 펼쳤다. 각자의 취향이 가지각색이었던 것이 주 원인이다. 물론, 그 토론에서 잡식성인 나는 빠졌다. 마찬가지로 참여하지 않은 세영과 수희도 옆에 서있다. 그러니까 난잡한 말다툼을 대강 간추려보면 이렇다. “상큼한 러브스토리가 감동적인 멜로야말로 최고의 꽃!” 역시 여자라는 것인가. 은주가 멜로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무슨 걸어다가 변 밟을 소리를! 역시 영화는 화끈한 결투가 난무하는 액션이지!” 찬석은 싸늘하게 노려보는 은주는 안중에도 없는지 침을 튀기며 열변한다. 당분간은 은주 비위맞춰가며 지내야할 것이다. “영화의 최고 정점은 호러라고! 절대 호러! 호러어!” 광기까지 보이며 역설하는 학진 덕분에 대화가 잠시 멈췄을 정도다. “천만에! 코디미야 말로 최고다!” 자체가 코미디의 표상이면서 또 무슨 코미디를 원하는지 성호가 외친다. “판타지를 보지 않고서 영화를 논하지 말라!” 여기에 간접적으로 끼어들어 혼란을 가중시키는 나도 있군. 어쨌든 논의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상태다. 자신의 의견을 조금도 굽히려들지 않으니 끝날 리가 없다. 기약이 없다고 봐야하나. 나는 수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떤 영화 보고 싶어?” “응, 글쎄. 이쪽으로는 별로 취미가 없으니까. 하지만 역시 멜로, 일까…….” 홍조를 띤 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수희가 이해되지 않았으나, 원래 저러려니 생각하고 세영을 뚱하게 쳐다본다. “몸 뜨겁다고 싫다며?” 그녀는 내 팔에 매미처럼 매달려있었다. “귀찮아지는 것도 싫어.” 나를 벌레 쫒는 살충제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때 학진이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호기롭게 외쳐댄다. “자고로 영화관의 묘미는 공포 속에 싹트는 낭만이다아!!” 나는 한심하게 녀석을 보며 물었다. “넌 공포장면에서 낭만이 느껴지냐?” “당연한 거 아냐? 공포감이 조성될 때마다 터지는 여자들의 비명소리! 남성의 본성을 자극하는 그 귀여운 비명!!” ‘귀여운 비명’이라는 부분에서 세 소녀가 학진을 무슨 벌레 보는 듯한 눈초리로 응시한다. 남자 녀석들은 뭔가 공감대를 느꼈는지 한동안 말이 없다. 잠시 뒤 성호와 찬석이 대단히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군……. 역시 최고의 영화는 호러…….” “조, 존경한다, 학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뻔한 것이리라. 동기야 불순하든 말든 어쨌든 쪽이 다수기에 간단히 결정을 짓는다. 지루하기만 하던 말싸움이 끝났다는 것 때문에 내 얼굴은 굉장히 밝아져 있었다. 뭐,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하다 보니 뭔가 음침해지기도 했지만. “호러로 결정이군. 자, 표사러 가자.” 그러자 세 여자가 ‘너마저!’라는 얼굴로 저만치 물러나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아연해져서 고개를 기우뚱하게 기울였다.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저 녀석들? 이번 챕터의 본래 첫부분이었습니다. 내용이 길어지게 되면 이 앞에 쓴 1, 2, 3 중 하나를 원고수정할 때 삭제할 생각입니다. 이제 질질 끄는 것은 저도 질렸어요. 그저 빠르게 전재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하의 그림들은 자율학습 시간에 그린 것입니다. 4. 조용하다. 조그마한 소음도 용납하지 않은 무거운 적막이 이어진다. 금발의 미소녀 캐서린은 어둠이 짙게 깔린 학교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녀의 눈은 무엇인가에 쫒기는 듯 계속해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새카만 암흑이 내려앉은 교정은 캐서린에게 서늘한 공포를 안겨주기 충분하다.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늘상 보아오던 체육관도, 창고도, 경비실도, 운동장도. 달빛은 물론 별조차 삼켜버린 잔인한 공포 아래 모든 사물은 윤곽을 잃었다. 그녀는 마른 침을 삼켰다. 바싹 메마른 목청이 찢어지듯 아프다. 몇 분 전만해도 매혹적으로 빛났을 입술도 부르터 있다. 손바닥은 현 심정을 대변하는 식은땀으로 흥건하다. 심장이 두근거림을 넘어 자못 쿵쾅대기 시작했다. 정지하기 전, 남은 생애의 맥동을 모조리 해보기라도 하려는 듯 심근은 광기에 젖어 요동친다. 캐서린은 들썩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후들거리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딱딱한 구두굽이 지면과 부딪칠 때마다 또각 소리를 낸다. 그것은 제 것이 아닌 다른 이의 발소리처럼 대단히 낯설게만 느껴졌다. 등골이 서늘하다. 누군가의 시선이 꽂힌 듯 뒷골이 민감하게 욱신거린다. 하지만 몇 번이고 뒤돌아봤음에도 뒤편에는 검은색 이외에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두려움이 맹렬하게 치솟는다. 분명 뭔가가 있다. 사람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캐서린은 덜덜 부딪히는 이를 악물어 정신을 바로잡고 어둠을 맹렬히 가로질렀다. 계단을 내려가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사열대를 뒤로한다. 호흡은 가쁘게 순환되고 있었다. 캐서린은 고개를 들어 중앙현관을 보았다. 꺼져있어야 할 현관 전등이 밝게 빛나는 것이 눈에 비춰진다. 마치 그녀를 학교 안으로 유혹하는 듯, 불빛은 요사스러운 검푸른 색을 내뿜고 유리문은 악마의 아가리마냥 좌우로 열려 있었다. 학교에 오기 전 배터리를 충천시켰음에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 핸드라이트를 꾹 쥐어본다. 들어가야 하건만 그녀의 몸은 위험을 감지해 진입을 거부한다. 늦지 않았어. 어서 돌아가. 피부, 근육, 뼈 모든 것이 현재를 거부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녀는 절박했다. 잊고 간 필기 파일을 복사해오지 못하면 내일 시험은 망칠지도 모른다. 선생을 위하여, 부모를 위하여, 그녀의 미래를 위해 이번 최종 테스트는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캐서린은 마음을 굳게 다지고 무겁기만 한 두 다리를 힘겹게 옮겼다. 다리가 저렸다. 현관을 지나 2층에 오른다. 비로 그때, 현관이 소리 없이 닫히고 어디선가 흘러내린 피가 유리를 검붉게 물들였다. 학교를 현실과 단절시키려는 듯, 주변에 짙은 안개가 소리를 죽이고 내려앉는다. 이것을 눈치 채지 못한 캐서린은 자신의 반이 위치한 4층에 오를 뿐이다. 때마침 파앗, 핸드라이트가 켜졌다. 시야가 확보되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진다. 허나 그것은 저주받은 학교의 마지막 배려였을 뿐이다. 마지막 배려……. 끼이익……. 소름끼치는 소음을 토해내며 밀려나는 교실 문을 지나 1분단 앞자리로 향한다. 그때, 스슷하는 소리가 교실 내에 요란히 울린다.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한기가 뼛골까지 침범한다. 있다. 학교에 오는 순간부터 느껴 왔던 시선이 있다. 정확히 뒷골에 닿아 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돌아서며 핸드라이트를 뒷문으로 향했다. 무언가가 빛을 피하듯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캐서린은 보았다. 피가 흥건하고 부패한 검붉은 다리를……. 공포에 질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리도 얼어붙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숨을 몰아쉬며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사방을 살핀다. 핸드라이트에서 뿜어지는 빛 무리가 그녀의 마음과 동화되어 어지럽게 일렁였다. 아니. 어찌 보면 그녀를 향한 조소처럼 현란하여 현재를 즐기는 것 같다. 숨이 막히고 욕지기가 밀려왔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토해내는 그녀의 얼굴은 흥건한 땀에 절어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돌아보던 캐서린은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없다. 어디에도 없다. 사면을 모두 살폈음에도 보이지 않는다. 허상을 본 것이었나? 나약해진 정신이 공포에 눌려 보여준 환상이었어? 다시금 실내를 돌아본 그녀는 안도하여 가슴을 쓸어내리고 데스크 PC를 가동시켰다. 디스켓을 넣고 필기해둔 교과서 파일을 복사한다. 이제 파일을 오픈하고 가상공간에 접속하여 공부에 전념하면 되리라……. 캐서린은 모니터를 덮고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끈적하고 비릿한 악취가 나는 액체가 그녀의 얼굴로 떨어졌다. 어깨에, 옷에, 손에…… 후드득 떨어진다. 케서린은 삐걱대는 고개를 조심스럽게 올렸다. 핸드라이트의 불빛이 천정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끼아아악!” 상영관 여기저기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졌다. 스크린에 비춰지는 살해 장면 보다 골이 찡하게 울리는 비명에 화들짝 놀라고 만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이거. 비명에 더 놀라기나 하고. 한심함에 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양옆에서 서라운드로 울려대는 비명에는 아무리 담력 좋은 사람이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가슴이 몇 배는 묵직해진 것을 느끼며 덧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희와 세영이 바르르 떨며 아기 판다(Panda) 마냥 매달려 있었다. 제길. 하필이면 사이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피곤해져야하다니……. 물론, 따뜻하고 냄새가 좋아서 싫은 기분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더워지는 것은 사절이다. 가뜩이나 재미없어서 지루해 죽겠는데……. “이거 보쇼. 그만 놓지?” “미, 미안…….” 수희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더듬는다. 의외의 연약한 면모를 보여준 세영은, 평상시로 돌아와 일언반구의 말조차 없다. 그 무뚝뚝함을 넘어 뻔뻔스럽기까지 한 태도에 치가 떨릴 정도다. 하아, 그래도 어쩌겠나. 도량이 넓은 내가 참고 넘어가야지. 심드렁하게 코웃음을 쳐주고 앞을 내려다보았다. 몇 줄은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성이, 왼쪽 여성의 귀에 소곤거리며 한참은 앞인 일등석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생각 없이 시선을 돌려 그쪽을 무관심하게 응시했다. 웬 은발의 여성이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 참. 칼라 코팅 기술로 백발도 가능해졌다고는 하지만 저렇게까지 하고 다닐 줄은 미처 몰랐는데. 아니면, 은현처럼 선천적으로 얻은 모발색인가. “…….”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쓸데없는 관심을 쏟는 자신을 발견하고 생각을 멈췄다. 아 뭐,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은가. 누구들처럼 요란하게 염색해서 눈을 고문시키는 것도 아니고. 신경 끄고 시큰둥하게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발렌타인 데이를 하루 앞둔 심야에, 나오미란 이름의 여학생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생각이고 자시고도 없이 분명 ‘원한 많은 괴물덩이’에게 죽을 것이다. 다르다면 죽는 위치와 방법 정도일까. 아니나 다를까, 나오미는 좋아하는 남학생의 사물함에 초콜릿과 편지를 넣고 흐뭇해하다가 다음날 신문기사 1면 감 소재로 전락했다. “……발전이 없잖아.”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뭐가 잘못되기라도 하냐. 하물며 도망칠 생각조차 않는다. 어차피 죽을 설정이라면 조금이라도 좋으니 빡세게 해줄 것이지……. 더 이상 볼 가치를 못 느껴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사상 문제일지는 몰라도 영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남들 다 무섭다고 꺅꺅 비명 지르는 장면에서조차 ‘아, 케첩 흘리네’ 등으로 시큰둥한 판에 어찌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였다. 꿈에서라도 좋으니 내가 저 영화에 출현하면 좋겠군. 그 편이 차라리 재밌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서서히 잠에 빠져드는 차였다. “끼아아악!” “으어억!” 젠장! 늬들이 더 무섭다! 결국 수희와 세영의 비명 때문에 잠이고 뭐고 다 날아가 꼼짝없이 지루한 영화만 관람해야만 한 것이다. 이 자식들, 사실 이거 노리고 빽 비명 지른 거 아냐? 영화가 끝나고 우리는 곧장 근처 정크 푸드점으로 이동했다. 현재는 불갈비 버거 세트를 받아 테이블에 앉아 있는 상태다. 영화의 내용은 예상한 대로 실상 남는 것이 없었다. 배우의 기량과 연출이 조금만 떨어졌더라면 삼류 영화 딱지는 모면치 못했을 터다. 그러니까, 캐서린이란 첫 희생자가 나온 이후 늦은 시각 저주받은 학교에 들어오는 모든 이가 살해당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사건을 책임진 메이플 형사와 세 엑소시스트가 학교에 들어가 저주를 푸는 것이 결말이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서 소멸된 줄 알았던 ‘원한 많은 괴물덩이’가 기괴하게 웃는 것으로 후속편을 예고했지만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자. 앞으로 그딴 영화와는 연을 끊을 생각이다. “으흑! 재밌지 않았냐?” 하지만 학진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재밌다고 난리다. 아아, 당연히 내용상에 근거한 감상은 아닐 것이다. 놈이 무엇에 흥분했을지는 뻔히 보이는 일이지. “은근히 신경 쓰이네…….” 은주는 비명이 예술이었네, 낭만을 절감했네, 끈끈한 공감대를 형성한 학진들을 노려보며 중얼거린다. 뭐가 어쨌든 햄버거 조각을 튀어가며 떠들어대는 모습이란 영 꼴불견인 것이다. 음식점내 객들도 눈치를 주고 있으니 은주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더구나 여자를 귀여운 애완견 정도로 비하시키는 놈들의 말에 주변 분위기도 심상치 않게 변모하였으니, 결국 내가 직접 그들의 산통을 깨트려야만 했다. “빨리 먹고 나가자고.”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고 제멋대로 뻗어있는 세 녀석을 감흥 없이 보다가 햄버거를 배어 먹었다. 새콤한 토마토향과 불갈비의 달콤함이 입안 한가득 퍼진다. 그 때, 2층에서 내려오는 세 남자의 경탄을 듣고 문득 고개를 돌렸다. 이쪽 테이블이 계단 가까이에 있는 탓이다. “캬아, 웃는 거 봤냐? 주변이 확 밝아지더만!” “말이라도 걸어볼 것을 그랬나……. 괜히 후회 되네…….” “아서라, 자식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도 못 들어 봤냐. 그런 미녀가 너 같은 놈 들여다보기나 할까.” “메야! 나보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놈이 할 소리냐, 그게!” “그쯤 해둬라, 자식들아. 실내 매너도 모르는 문외한들…….”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밖으로 나가는 세 남자의 모습엔 자못 아쉬움이 가득해보였다. 실로 오랜만의 연재로군요. 빨리 돌아오고 싶었지만 글을 쓸 시간이 없고, 정작 중요한 것은 써지지가 않는 점입니다. 수능 때문에 전전긍긍하느라 다른 생각이 들어오질 않아요. 일단 모의고사 점수는 나름대로 만족할 만큼 나오고 있지만, 그 점수 가지고는 적당한 대학은 꿈도 꾸지 못하는 지라... 어휴, 답답할 따름입니다... 여러분도 수능 마주치면 제 마음 절감할 겁니다. 반드시 해야되는데 하지 못하는 답답함 말이죠... 정말이지 피가 말리네요... 지금 이 글 쓰는 순간에도 시간은 간다는 점에 있어 다리가 다 후들거릴 지경이니 원.. 주변 녀석들이 '지금은 공부가 우선이지 글이 우선이 아니잖은가. 몇주만 참아라', 라고 말하며 연중을 부르짖고 있지만... 그것도 글쟁이의 입장에선 못할 짓이군요... 어쨌든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이 있기에 저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연중하면 오히려 될 것도 안될 것만 같은 기분이로군요... [한숨] 일단은 자율 학습시간에서 얼만큼을 집필작업에 할애해 글을 써나갈 생각이지만... 펜이 제대로 잡힐 지가 걱정이군요. 노래 들을 기분이 아니라 이번엔 생략.. 빌어먹을 윈도우 Me.. 직접 무덤을 파다니.. 아 열받아!!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밖으로 나가는 세 남자의 모습엔 자못 아쉬움이 가득하다. “저 사람들 왜 저러지?” “내 알 바 아니다.” 별로 관심을 가질 일이 아니라 한귀로 흘려버리고 음식을 먹는 것에만 열중한다. 그것은 비단 나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해당하는 부분인지, 모두 정겹게 웃고 떠들며 식사를 이행할 뿐이다. “다 먹었으면 나가자.” 잠깐의 느긋한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푸드점을 나섰다. “기왕 이렇게 모였는데 넷 룸이나 가는 것이 어떨까하는데.” 목표한 영화를 본 이상, 딱히 이렇게 하자라는 목적을 정한 것이 아니라 걸음은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도중 들려온 학진의 제안은 실로 나른하던 정신을 번쩍 깨워주는 일침이 되었다. 워낙에 집에서만 게임을 해오다보니 넷 룸이라는 곳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태반이 거반 게임 중독에 가까우니 논외로 쳐두더라도, 주안점은 제약이 심하게 가해지는 수희다. 그녀가 빠진다면 넷 룸 행은 물거품인 터다. 여기 모두가 마운트 고글을 소지하고 있는 만큼, 넷 룸에서 하는 게임은 돈 낭비를 초래할 뿐이다. 나는 괜찮겠냐는 시선을 수희에게 보낸다. 그녀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고는, 작은 미소로서 답한다. “괜찮아. 여섯 시까지만 귀가하면 되니까.” 현재 시간 3시 40분. 20분을 귀가 시간으로 제하면 엘-가드로 즐길 수 있는 최대 시간은 10시간. 이정도면 수희에게는 충분하다 못해 넘칠 시간인가. 학진의 제안이 통과되고, 우리는 곧장 근처 넷 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녀석이 최근에 생긴 시설 좋은 곳을 안다하여 조금 더 걷게 되었지만 그럭저럭 봐줄만한 거리다. “어서오세요!” 건물 3층에 위치한 ‘밀레니엄(Millennium)'이란 넷 룸. 카운터를 보고 있는 이는 아르바이트생인 듯한 동안의 예쁘장한 여성이다. 천천히 안을 둘러본다. 사람이 북적이나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는 아니다. 꽤나 공공의식이 제대로 박혀있는 이들인 듯하다. 물론, 딴에는 무심코 스쳐본 것일 테지만 넋을 잃고 세영과 수희에게 고정되어 있는 시선만큼은 영 마땅치가 않다. 실내는 다른 곳에 비하여 제법 크다. 인테리어는 수수하고, 게임 공간과 휴식공간을 구분해둔 부분에선 손님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엿보인다. 비디오 게임을 위한 콘솔(Console)과 두께가 1Cm도 되지 않는 월 비젼(Wall Vision)은, 분명 객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것이리라. 확실히 학진의 말대로 시설이 좋은 곳이다. “일곱 자리 있나요?” 은주가 나서서 필요한 질문을 던진다. 카운터의 여성은 PC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생긋 미소 지었다. “다섯 자리가 비어있네요. 2분 후면 추가로 자리가 날 텐데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 “그쯤이야 잠시 잡담 나누다보면 금방 지나갈 시간인데요, 뭐.” 학진은 과거 세 시간을 기다린 것에 비하면 별거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여성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살며시 고개를 숙인다. 그 틈에 학진이 카운터에 상체를 기대며 여성과 눈을 마주했다. “그래서 그런데요, 누님…….” 돌연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학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누님? 뭐야, 그 은폐된 곳에서나 은밀히 쓰일 듯한 접대용 존칭은……. 녀석은 느끼하다 못해 기름지기까지 한 모습으로 턱을 괸 채 말을 잇는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이름은? 취미는?” ……어째서 하필이면 여기인가 했더니만 결국 그게 목적이었던 게냐. “에에…….” 여성의 웃는 낯 위에 명백한 당혹감이 맺힌다. 나와 공통된 결론을 내린 일행 전부가 허탈한 모색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거기다, ‘방해 말고 저리 가라’라는 의미가 담긴 녀석의 곁눈질에 깊은 한숨까지 보태어 본다. 2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안녕히 가세요!” “예, 예…….” 세 남자가 세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알바생의 전송을 받는 둥 마는 둥하며 넷 룸을 나선다. 복도에서 그들의 대화소리가 흘러들어 귀에 닿는다. -캬아, 그 얼굴 봤냐? 쿨(Cool) 한 분위기가 끝내주더만! -말이라도 걸어볼 것을 그랬나. 괜히 후회 되네……. -아서라, 자식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도 못 들어 봤냐. 그런 미녀가 너 같은 놈을 들여다보기나 할까.’ -메야! 나보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놈이 할 소리냐!’ -그쯤 해둬라, 자식들아. 실내 매너도 모르는 문외한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대화로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모르겠어. 돈을 걷어 요금을 지불한 뒤, 대신으로 받은 일곱 장의 캡슐 승인 카드를 각자에게 나눠주었다. 돈을 걷는 과정에서 빠지겠다고 했다가 얻어맞은 괘씸한 학진에게도 카드를 건네고 일행을 본다. “오베르스로 모여. 서문 쪽에 있는 펍에서 만나자.” “OK!” 기운차게 외치는 일동을 뒤로하고 배정된 커넥트 캡슐(Connect Capsule)로 향하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학진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너는 늦으면 가만 안 둔다. 1초에 PK 한번이니 신속히 움직여.” “어, 어째서!” 나는 당혹이 항변하는 녀석을 무시하고 캡슐 안으로 들어가 누울 뿐이다. 되는 일이 단 하나도 없네요. 어제 광필 모드 들어가서 새벽까지 여섯장 가량을 썼는데.. 글쎄 빌어먹을 윈 미가 다운이 되지 않겠습니까.. (MS.. 너희를 증오한다..) 어제 공지에 올렸었죠? 하드 포맷하고 새로 깔았다고... 그때 깐 OS가 윈 me 인데... 그날 하루는 정말 흡족하게 잘 돌아가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때리지 뭡니까.. (MS의 저주는 항상 이런 식이다...) 그래도.. 한글 2004의 힘을 믿고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한글 2002 부터는 백업 기능이라는 것이 있어서, PC가 비정상적으로 종료되었을 경우, 그때까지의 작업을 스스로 저장하거든요. 그래서 믿었는데.. 믿었는데.. 믿었는.. dog seed 足(속으로만 해석하세요...땀) 윈 Me!! 내 글 돌려줘! 그리고 MS!! 제발 제대로 된 OS 만들란 말이야!! .... 하필이면 윈 Me를 깐 것을 반성해봅니다.. *내일 귀가하면 포맷부터 해야지... *XP... 버벅거리지만 않으면 사랑해주마.. *2003.. XP가 만족시키지 못하면 너를 사랑해주겠다..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