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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신부(神婦) 1부


“네 이름이 나왔다.”
 족장이 말했다. 족장의 푸르고 어두운 눈은 나를 곧은 일직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내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 착오가 있으셨던 거겠지요.”
“신이 결정하는 일에 착오는 없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내달에 성혼한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곧 소사린과 성혼합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소사린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
“족장!”
비명 같은 고함 소리가 폐부를 찢고 튀어나왔다. 어디 선가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수복할 수 없습니다.”
반항적으로 족장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뭐라고. 당신들이 내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네가 수복하든, 수복하지 못하든 너는 신부(神婦)가 된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내 앞으로 여자들이 들이닥쳤다. 신녀였다.
“놔! 놔라!”
힘껏 반항했지만 여러 명이 내 팔과 다리를 잡아오자 뿌리칠 수가 없었다. 연약한 여자들이지만 힘을 합쳐 달려들자 제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밧줄에 묶여 바닥을 뒹굴었다.
눈앞이 새빨개지도록 분했다. 모든 치아가 뿌드득 갈리도록 분했다. 지저분한 먼지위로 족장의 발이 보였다.
 “당신이 무엇인데 내게 이럽니까?”
목소리가 부르르 떨려서 나왔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 내게 이럴 자격이 없습니다. 어머니를 버리고 저를 버리고 갓 태어난 수라킨을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내게 어머니는 있지만, 아버지는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 없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네가 나를 증오하는 것은 네 개인적인 은원이다.”
족장은 감정 없이 말했다.
“그것은 우리 둘의 사적인 감정이다. 스스로를 가리켜 아비 없이 태어났다 하니 그렇다고 해두자. 너의 존재는 내게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네가 무엇이라 생각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신이 너를 점지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소사린과 결혼합니다.”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짭짤한 맛이 혀끝에 베이는 것을 보니 입술이 터진 모양이다. 족장의 입가에 처음으로 표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생겼다.
그것은 냉소였다.
“아사신. 어리석구나. 좀 더 똑똑할 줄 알았는데.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족장의 등 뒤에서 건장한 남자가 들어오더니, 나를 짐짝처럼 어깨에 들쳐 멨다.
“놔! 이거 놓지 못해?”
무쇠와 같은 남자의 등을 세게 두들겼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같은 남자임에도 너무도 차이나는 나의 빈약한 사지가 치욕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집 주변에 잔뜩 몰려들어 있었다. 그들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들짐승처럼 끌려나온 나를 구경했다. 그 중에는 내달에 나의 아내가 되기로 약속한 소사린도 끼어있었다. 광견처럼 발광하던 내 손에 힘이 빠졌다.
“소사린······.”
부끄러웠다.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소사린이 보고 있었다. 내가 신부가 되는 것을 소사린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크고 붉은 눈동자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눈물이 자신을 동정하는 것인지 나를 동정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이런 식.
 삶은 늘 눈앞에서 행복을 앗아갔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항상 그래왔지 않았던가. 나는 신을 향해 외치고 신은 내 이생을 마음대로 난도질 하고.
반항해도 소용없고, 기도해도 소용없다면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두고 보자.
너는 항상 그런 식이었으니 이번에도 나를 용서 없이 밟아대겠지. 내 뼈가 마디마디 으스러질 때까지 그 냉정한 발길질을 멈추지 않겠지.
전부다 짓밟아 보려무나―.

스스로를 자조하는 웃음이 세어 나왔다. 남자는 나를 신궁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거기는 신에게 선택받은 여인의 궁. 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신부가 되기 위해 머무는 곳이었다.
그곳에 남자인 내가 발을 들이고 있었다.




1




어느 부족이나 그 기원은 하늘에서 선인이 내려와 사람 처녀와 교합하였다거나, 짐승이 인간에게 자신의 아이를 내어주었다거나 하는 설화가 있기 마련이다.
그는 그들의 족장을 신과 동일시하여 부족민의 절대적인 충성을 다지기 위함이다. 그 신화가 진짜인지는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진실의 여부를 잣대질 하지도 못할 만큼 뼈저리게 부족민의 뇌리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신화는 부족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였고 신화의 부정은 그들의 문화와 역사의 부정과 마찬가지다.

삶은 언제나 척박하다.
 봄과 가을은 너무도 짧고, 목을 죄어오는 여름과 살을 에는 겨울은 너무도 빨리 찾아온다. 괴로운 순간을 이겨내기 위해서 그들은 기도한다. 열정적이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들은 신의 현신을 원했다. 무형의 대답 없는 기도보다 손에 거머쥐고 호소할 수 있는 뼈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를 원했다.
그래서 신은 인간과 동침하기 시작했다. 신과 동침한 처녀는 아이를 낳았고, 아이는 족장이 되었다. 족장이 된 아이는 다시 여인을 택하여 동침하고, 또 아이를 낳고 아이는 신부를 택한다.
 그것은 행사가 되고 축제가 되고 전통이 되었다.
 족장은 지배자이자 살아있는 신이었다. 그는 성인이 되면 성혼하여 아내를 맞이하고, 그와는 별도로 신탁을 받아 신부를 결정한다. 그것은 오래전 족장의 조상 중에 신의 피가 섞였음을 다시 한 번 재현하는 의식이었다.
신부의 아들은 다른 아들들을 젖히고 족장의 자리를 계승했다.

아사신은 신부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미는 열네 살 되던 해에 신탁에 의해 족장의 신부가 되었다. 그녀는 첫 출산 때 죽은 아이를 낳았고, 두 번째 출산으로 아사신을 낳았다. 복중(腹)의 미처 독소가 빠져나가기도 전에 잉태해서인지 아사신은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다.
 아사신을 낳기 위해 그의 어미는 지독한 난통을 겪으며 사흘을 몸을 틀었는데 나자마자 최고신녀로부터 세 살을 못 넘길 거라는 진단을 받았다.
 곧 죽을 아이니 이름도 지어줄 필요 없다는 냉정한 족장의 말에 네 살까지 이름 없이 살다가 다섯 살이 되어서야 아사신이라는 이름을 지음 받았다. 아사신의 등에는 그 피의 진함을 증명하는 검은 날개가 솟아있었지만 족장은 병약한 아들 따위는 필요 없었던 것이다.
 아사신. 고대신어로 까마귀를 뜻하는 이름은 족장이 얼마나 병약한 아들을 마음에 안 들어 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까마귀란 죽은 자의 혼을 물고 저승으로 가는 새였다. 반은 이승에 있고 반은 저승에 사는 새로 까마귀는 신의 충성스러운 심부름꾼이었다.
아사신의 이름은 족장이 병약한 자신의 아들을 빗대어 너는 까마귀라고 빈정거리는 의미였다.
 또한 그 안에는 너는 살아있는 신. 족장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신부는 한 달에 한번 반드시 족장과 동침해야 했다. 건강한 아들을 출산하지 못했던 아사신의 어미는 다시 족장과 아이를 가졌으나, 세 번째 아이는 여자아이였다.
 족장은 크게 진노하였다.
신에게 점지 받은 여자가 제대로 된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했던 것이다.
 족장의 아내들은 신이 그녀를 버렸음이 분명하다고 이간질했고, 매수된 신관들도 그녀가 불길하다고 속삭였다. 세 번의 임신을 했지만 그녀는 단 하나의 제대로 된 후계자도 족장에게 주지 못했다.
그녀는 버려졌다.
 가장 볕이 들지 않는 외딴곳에 위치한 누추한 움막에 그녀와 그녀의 어린 아이들은 함께 버려졌다.
어린나이에 세 명의 아이를 낳고 몸이 상할 대로 상한 그녀는 일족에게서도 버림받았고, 허름한 움막에서 제대로 먹지 못해 병이 들었다. 그녀는 버려진 그 해도 넘기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그때 아사신의 나이는 겨우 열 살.
열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남겨진 것은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어미의 시체와 네 살배기 여동생. 그 추운겨울을 헤쳐 나갈 땔감도, 음식도 부족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잊었다.
 족장의 아내들은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암투를 벌이느라 잊었고, 그녀의 친정은 버림받은 여자하나 때문에 족장의 눈 밖에 날까 그녀를 잊었다. 사람들은 차츰 그녀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잊었고 곧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아사신은 어떻게 그 해를 견뎌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신부의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족장의 오른편에 앉아서 후계자 수업을 받기는커녕 가장 낮은 곳을 기며 다른 아이들보다 배는 약해빠진 몸으로 구걸을 해야 했다. 마을 처녀들이 불쌍하다고 가축의 사료를 던져주면 그것을 먹었고, 숲에서 나물을 캐다 생으로도 씹어 먹었다.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위대한 신의 족장. 원망하고 저주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남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독하게 씁쓸한 회한뿐.
그의 유일한 소망은 소사린을 아내로 맞이하고, 어린 여동생 수라킨을 결혼시켜 줄만큼 지참금을 모으는 것뿐이었다.
 아사신은 전사가 되지 못했고, 전사가 되지 못한 남자는 하위계급이었다. 그들은 평생 많은 돈을 벌수도 없고 다른 남자들에게 비웃음을 당해야 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사신은 손재주가 좋아서 나무를 깎아 생필품이나 공예품을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 그거 하나면 적어도 소사린을 굶기지는 않아도 되는 것이다. 신의 직계혈족은 결혼하기 위해서는 족장의 허혼이 있어야 했으므로 아사신은 10년 만에 궁을 찾았다. 이미 아버지는 족장이 아니었다. 그는 일선에서 물러나 족장의 직분을 보조하는 역할로 빠져있었다.
자신의 이복동생.
쓰레기 더미에서 살기위해 몸부림칠 때 높은 곳에 서서 사람들의 찬양을 받던 남자.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기분 나쁘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자신을 내려다보던 남자.
 같은 아비를 두었음에도 마르고 빈약한 자신과는 달리 강하고 큰 남자.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이 오만한 얼굴.
야스카산. 그가 족장이 되어있었다.
아직도 죽지 않았냐는 듯 눈썹을 치켜뜨며 성혼을 허락한다고 말하던 젊은 족장. 자존심이 상했지만 아사신은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족장이 자신들의 결혼을 허혼했다는 것. 그뿐이었다.
 비축해둔 돈으로 폐허 같은 집을 수리하고 친정에서 받을 지참금의 절반을 저금하고 절반은 신혼생활을 위해 남겨두자고 소사린과 짰던 계획들. 그 앞날에 대한 무궁무진한 기대와 행복은 목전에서 산산이 깨어졌다.
신탁이 내려왔다.
새로운 젊은 족장의 신부가 점지되었다.
 신탁에 쓰인 것은 단 한 줄의 이름.
전족장의 버림받은 아들 아사신의 이름이었다.



 “이것을 두르십시오.”
늙은 신녀가 부드러운 붉은 천을 건넸다. 척 보기에도 상당히 고가였다.
 “아무것도 두르지 않겠습니다. 여자가 아닙니다.”
아사신은 겹겹이 쌓인 혼례복을 보고 진저리를 쳤다. 그것은 여성의 혼례복이었다. 얼마 전에 소사린과의 결혼식을 위해 자신이 직접 제단하기도 했었다. 결이 고운 붉은 아마포에는 금박으로 고대신어가 가득 쓰여 있었다.
 쓴 미소가 올라왔다. 소사린을 위해 제단 했던 옷은 이것에 비하면 천도 문양도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입으셔야 합니다.”
“입지 않겠습니다.”
신녀는 입술을 한일자로 다물고 거만하게 손짓했다. 그러자 허드렛일을 하는 건장한 신녀들이 들어왔다. 그녀들에게서는 밧줄로 묶어서라도 옷을 입히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보였다.
결국 아사신은 한숨을 쉬며 결국 혼례복을 받아들어야만 했다. 반항해봤자 자기 손해라는 것은 지난 일주일간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아사신은 모든 절차를 거부했다.
 향유로 씻기는 것을 거부했고, 신부의 증표를 몸에 새기는 것을 거부했고, 남편이 될 족장을 위해 속을 깨끗이 한다는 그 모든 행위도 거부했다.
결과는 무참한 패배였다. 신녀들은 식사를 주지 않았고 아사신이 힘을 못 쓰게 되면 그 틈을 타 거부한 모든 의식을 해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푸석푸석한 머리채는 매일매일 정성을 들여 기름으로 씻겼고, 마르고 가무스레한 몸은 향유를 부어 촉촉하게 관리되었다. 첫날밤 족장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손톱과 발톱이 다듬어졌고 한번 새기면 한 달은 간다는 검은 물로 손등에다 그림을 그렸다.
아사신은 이 모든 의식의 준비가 참을 수 없이 답답했다. 피할 방도가 없어 반 포기 상태가 되긴 했지만 마음까지 따라가 주는 것은 아니었다. 소사린이 자신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괴로웠다.
 어째서 나였냐고 신에게 따져 물기도 하고 분통도 터트렸다. 어째서 어머니에 이어 자신까지도 신부의 굴레를 씌우는 거냐고 맹렬하고 신랄한 저주를 퍼부었다. 늘 그랬듯이 신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절망하고, 화내고, 포기했다가, 울었다가 다시 절망하기를 수차례. 아직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신부의 혼례 날이 다가왔다.



술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혀를 내밀어 술을 받아 마셨다. 술에는 기분을 좋게 하는 마라꽃잎 가루가 잔뜩 뿌려져 있었다.
 신녀들은 광장에서 북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남자들은 웃통을 벗어던지고 원시적인 고양감에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 댔다. 혈기를 참지 못하는 어린것들은 족장의 허락도 없이 서로 엉겨 붙어 주먹을 휘둘렀다. 신부와 족장이 성혼하는 밤은 그들에게 신이 다가왔음을 재현하는 의식. 그들의 피에 신의 피가 섞였음을 대외적으로 선포하고, 그들의 단일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만월의 밤.
의식은 족장이 황금의자에 앉으면서 시작된다.
광장에는 거대한 횃불을 불을 밝히고, 얼큰하게 취한 남자들이 칼춤을 추었다. 피를 찾아 코를 벌름대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짐승이었다. 남자들은 신나게 먹고 마시고 싸움을 하며 흥분했다.
족장이 마을의 장로들과 전대 족장의 호위를 받으며 광장의 중앙 탑에 올라섰다. 탑 위에는 금을 부어 만든 의자가 붉은 호랑이 가죽위에 놓여있었고 그 주변에 신녀들이 입에서 불을 뿜으며 거대한 북을 울렸다.
족장은 그들의 신. 잔인한 전사.
 길고 세심한 근육으로 덮인 사지와 옅은 갈색의 피부가 횃불아래 붉게 번들거렸다.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은 보석이 박힌 머리끈으로 성기게 묶여 어깨로 흘러내렸고, 벌거벗은 가슴에는 황금으로 연결된 긴 목걸이만이 장식되어있다.
아슬아슬하게 국부를 가린 천은 미처 그의 훌륭한 물건을 모두 가리지 못하고 천위로 불룩하게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음탕한 여인들은 얼굴에 홍조를 지우지 못한 채 족장의 물건을 힐끔힐끔 곁눈질 하며 그날의 신부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남자들이 그들끼리 어울려서 파괴본능에 따라 실컷 주먹질을 하고 나면, 본능은 좀 더 은밀하고 원시적인 태고의 것으로 바뀌어 간다.
 신녀들의 북소리가 정점에 오르면, 어느새 그들의 자신의 앞섶을 자랑스럽게 부풀리고, 뒤에서 남자들을 구경하던 여자들 무리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간다. 그날만큼은 어떤 여자든 내숭을 떨며 남자를 거부하지 않고 자신들의 다리를 활짝 벌리고 그들을 맞이한다.
난교(亂交).
북소리가 들리는 곳이면 여자와 남자가 교미하는 뱀처럼 뒤엉켜 난잡하게 서로의 혀를 핥고 빨고 사타구니를 주물럭거리고 있다. 오늘만큼은 신의 도움으로 절대 임신이 되지 않는 안전한 날이다. 여자들은 평소의 자신을 잊고 북소리에 몸을 맡긴다. 어린 처녀애부터 나이든 중년까지 모두 온몸을 붉게 물들이고 쾌락에 몸을 떤다. 신부의 의식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어떤 더러운 짓도 용서 받는 날이다. 사람들은 이 축제를 철저하게 즐겼다.
미성년 자녀들은 집에 열쇠를 걸어 잠그고 절대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창밖을 바라보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북소리까지는 아무리 귓구멍을 틀어막아도 막을 수 없다. 부모가 집을 비운사이 형제자매끼리 얽혀서 그 미숙한 육체로 서로를 갈구하기도 한다.
그 쾌락의 시간에는 남자와 여자만이 붙어먹지 않는다. 남자와 남자가 붙어먹고, 여자와 여자가 붙어먹는다.
그들은 강한 전사의 정액을 받으면 그들의 강한 전사의 혼이 자신에게로 들어온다고 믿었다. 이제 막 성인식을 지난 어린 청년들은 바위처럼 거대한 전사들을 유혹하며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휘저어 넣으며 삽입을 재촉한다.
전사들은 청년들의 재촉에 힘입어, 자신들의 두터운 물건을 힘차게 발기한다. 거대한 전사들의 남근은 청년들의 연약한 구멍을 빠르게 파고들어 그 음습한 동굴 안에서 극상의 쾌락을 선물 받는다.
빠른 속도로 청년들의 구멍을 정복하던 전사들의 남근에서 마침내 정액이 분출되면 청년들은 아픔에 떨면서도 그 액을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다리를 꼭 다물어 자신의 몸 안에 섞이도록 용을 쓴다. 쉬지 않고 터지는 쾌락의 물결!

둥 둥 둥 둥 ----

신녀들의 북소리가 점차 빨라진다. 그녀들은 정염에 못 이겨 스스로 옷을 벗는다. 족장의 손이 그녀들의 젖가슴을 음탕하게 문지른다.
 축제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신녀들의 가슴을 빨던 족장이 뒤에 서있던 신관에게 눈짓을 하자 제물이 대령된다. 끌려온 것은 두려움에 눈을 번들거리는 이방인이다.
 그들에게 있어 이방인은 소나 돼지와 같다. 어떻게 죽여도 좋은 고기 덩어리일 뿐이다. 그는 오늘을 위해 오래전에 미리 잡아들인 것으로, 정점에 달한 이 축제의 산 제물로 바쳐질 것이다.
 족장이 건장한 몸을 일으켰다.
 신녀들이 그의 구릿빛 가슴에 달려있는 황금 목걸이를 잡아 뜯자 날카롭게 휘어진 기다란 단검이 뽑혀 나왔다.
 남자들은 환호했다. 그들은 가여운 산제물의 뼈가 부서지고 그 안에서 뜨겁게 박동하는 심장이 꺼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죽여라-
-죽여라-
-그의 심장을 갈라라-
-우리 신에게 심장을 바쳐라-
소리 없는 아우성이 파도처럼 터져나간다. 여자고 남자고 한 마리 짐승일 뿐이다. 술에 섞어 마신 마라꽃잎 가루가 그들의 머릿속에 잠식하여 희락의 고통과 쾌락의 절정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둥 둥 둥 둥 ----

신녀들의 혼신을 담은 북소리가 더욱 크게 퍼져나간다.
 아사신은 귀를 막았다. 그 북소리는 있는지도 몰랐던 자신안의 짐승을 끌어내고 있었다.
 ‘싫다.’
이것은 어머니가 오래전에 격은 의식. 지금 자신을 위해 이 의식이 또다시 거행되고 있다.
‘싫다! 싫다! 신부가 되고 싶지 않다.’
아사신은 충혈 된 눈을 들어 밖을 내다보았다. 이복동생이자 족장인 야스카산이 산제물의 갈비뼈를 즐거운 표정으로 가르고 있었다. 보고 싶지 않다고 거부하는 머릿속과 달리 두 눈은 그 장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새빨간 피가 튀어 오르고, 내장이 갈라지는 것이 똑똑히 보인다. 가슴에 구멍이 난 사내가 힘없이 눈을 뜨고 기절하자 그사이로 족장의 손이 망설임 없이 파고든다. 찌걱거리며 살이 갈라지는 소리가 아사신에게까지 들려온다. 족장이 더운 숨을 내뿜으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린다.
얼마나 그 육체를 헤집었을까. 드디어 족장의 손에 아직도 움직이는 심장이 뽑혀 나왔다. 조각난 뼈가 투둑,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흩어졌다.
불현듯 족장의 시퍼렇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자신의 눈동자와 마주친 느낌이 들었다.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지만 아사신은 똑똑히 보고야 말았다.
그 눈에 일렁이는진한 정액의 냄새-
명백한 발정-
아사신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무서웠다.
신의 핏줄을 가장 진하게 이은 남자는 자신이 아니라 야스카산이다.
 우리 신은 공포의 대상. 피와 살육의 수호신. 산제물의 가슴을 갈라 그 심장을 파먹는 것을 좋아한다.
 ‘파 먹힐 거야······.’
아사신은 벌벌 떨리는 몸을 웅크렸다.
‘나를 잡아먹을 거야. 나는 잡아먹힐 거야.’
식은땀까지 흘리며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아사신을 본 신녀들이 당황해서 다가왔다. 왜 그러냐고 어디가 아픈 거냐고 묻는 말에도 아사신은 대답할 수 없었다.
 멀리서 이제 서서히 사그라지는 북소리가 곧 아사신의 첫날밤이 다가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오래전 옛날.
 사람들은 태양을 숭상하며 노래를 불렀다. 믿고 의지할 우리의 지도자를 보내달라고 목청을 높여 하늘에 기도했다. 정성으로 백 일을 구하고, 산 제물을 바치자 하늘에서 번개를 타고 그들의 신이 내려옴에, 그 얼굴이 너무도 아름다워 태양을 바로보지 못하는 것처럼 감히 쳐다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다.
 신은 그들에게 자신의 핏줄을 남겨주기로 결심하여 처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택하여 동침하였고, 열 달 후 건강한 사내아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그가 장성하여 첫 번째 족장이 되었다.
 족장은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며 증거로 새까만 날개를 달고 태어났다. 족장은 두 명의 아내를 거느렸으나 그녀들의 자식 중 아무도 족장과 같이 검은 날개를 달고 태어난 자는 없었다.
족장은 아내들의 부정을 의심하여 두 명의 아내를 모두 참수하였다. 또다시 아내를 맞이하였으나 그녀의 아들도 날개 없이 태어났다. 이상을 느낀 족장은 신이 내려왔던 성산으로 가서 일주일간 단식하며 기도하였다.
 족장이 산에 가 있는 동안 마을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귀신이 날뛰는지라 사람들은 어서 그들의 신이 돌아오기를 빌며 감히 집밖으로 나서지 못했다.
일주일 만에 하산한 족장은 신탁을 얻어왔고, 신탁에 따라 마을의 한 젊은이를 자신의 신부로 맞이하였다.
최초의 신부는 남성이었다.
 남성의 몸으로도 신부는 임신했다. 신의 권능은 척박한 불모의 땅에 생명을 잉태시켰다. 열 달이지나 신부가 건강한 아들을 낳아보니 등에 아비의 것보다 작은 날개가 달려있었다.
 그것이 천 년 전의 이야기.
세월이 흐를수록 신의 피는 연해져 더 이상 날개달린 아이들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아주 가끔 그들이 신성한 피를 잇는다는 증거로 등에 작은 날개를 달고 태어나는 아이들도 종종 있었다.
아사신은 자신의 거추장스러운 붉은 혼례복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끌었다. 몸에 부드럽게 감겨 와서 기분이 좋지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상당히 요란한 이 혼례복은 평상시에는 거의 잊고 있던 자신의 날개깃에 스쳐 더욱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물을 마십시오. 이것이 신부의 초야를 도와줄 것 입니다.”
아사신은 그 물을 받아 마셨다.
“이제 당신의 이마에 검은 물로 신어(神語)를 쓰겠습니다. 이 신어는 족장의 이마에도 새겨질 것입니다. 이로서 당신의 육체는 족장과 신에게 동시에 사랑받으실 것입니다.”
아사신은 얌전히 얼굴을 내맡겼지만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신부. 이리로 오십시오.”
신녀들의 손이 창백한 아사신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사신은 이제 어떤 일이 닥칠지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몇 번이고 신부의 의식에 대해 말씀해 주었었다.
-아사신. 나는 신부가 되어서 붉은 혼례복을 입고, 붉은 너울을 머리에 두르고 신녀들에게 이끌려 방을 나갔단다. 사실 긴장과 공포로 쓰러지기 일보직전 이었지. 신녀들이 나를 은은한 노란빛의 조명이 흐르는 방으로 데려갔어. 거기에 앉아있으려니 그렇게 크게 울리던 북소리가 점점 잦아드는 것을 느꼈단다. 그 북소리는 정말 커서 깊은 내궁 안까지 내장이 들썩거릴 만큼 시끄러웠거든.
 사실 나는 그때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족장을 모셔야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 난 겨우 열네 살이었단다. 그러나 적통 후계자가 없던 것을 염려한 신관들이 무리하게 나와 족장님과의 결혼식을 추진했지. 원래는 2년 정도 더 기다려야 했지만 말야.
후후 언젠가 너도 신부를 맞이하겠지? 아가. 신부를 맞이하게 되면 너희 아버지처럼은 절대 그러면 안 돼. 그이는 그날 고주망태가 되어서는 무서워서 벌벌 떠는 나를 그만······. 아차! 넌 아직 미성년자니까 여기까지만 하자꾸나.-
그렇게 말씀하시며 어머니는 부끄러워하며 미소 지으셨다.
나중에 족장에게서 버림받아 정신이 돌기 시작했을 때는 아사신이 아무리 그만하라고 외쳐도 절대 듣지 않고 그 뒤의 내용까지 모두 말해주었다. 아사신은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정말 싫었다. 아무리 나는 신부를 맞을 수 없을 거라고 말해도 어머니는 알아듣지 못했다.
 ‘어머니 보세요. 결국 저는 신부를 맞이할 수 없잖아요.’
아사신은 쓰게 미소 지었다.
‘왜냐면 제가 신부가 되었거든요.’
“이리 드십시오.”
멍하니 딴생각을 하던 아사신은 어느새 초야를 치르기 위한 방 앞에 도착해버렸다.
 “그럼 신부. 편히 쉬십시오.”
신녀들이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숙여 물러나자 아사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편히 쉬라니. 어떻게 편히 쉬라는 거냐.
순간적으로 도망칠까, 생각했지만 족장의 전사들이 이 궁 주변에 쫙 깔려 있음이 뻔했다. 전 족장 그의 아비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모를 리 없다.
‘능구렁이 같은 놈.’
아사신은 이를 갈았다.

푹신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자 마음이 편해졌다. 요 며칠간 극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서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려고 눈을 감으면 소사린과 수라킨의 모습이 지나가고, 매끼 식사가 들어올 때마다 얼마나 더 지나면 혼인식이 치러질지 계산하게 되었다.
차라리 결전의 순간이 되자 마음은 더 편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아사신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
거짓말이다.
 두려움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들뜨고 있다.
 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내 안에서 신부가 눈뜨고 있다.
아사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을 가리고 있는 너울을 끄집어내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나는 여자가 아니다.’
그것은 최후의 도루. 질질 끌려온 운명에의 항거.
북소리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아사신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아사신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야스카산이 삐딱하게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야스카산 ······아니, 족장.”
“아사신.”
대답하는 야스카산의 목소리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눈빛으로 노려보는 아사신에게 야스카산이 미소를 피워 올리며 다가갔다. 미소는 달콤했지만, 아사신을 쳐다보는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아사신. 신부.”
“날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족장.”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부른다 해도, 야스카산에게만큼은 듣기 싫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질투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정당한 후계자의 권리가 박탈된, 날 때부터 패자로 태어난 자의 열등감이 신부라고 불리는 순간 불꽃처럼 터졌다.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과거 따위 이미 오래전에 떨쳐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뭐라고 말하건 간에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야스카산이 자신을 신부라고 부르는 순간 산산이 깨어졌다. 과거는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기억을 날로 끄집어내고 있었다.
아사신은 야스카산을 곁눈질했다. 그의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와 성심을 다해 빚어놓은 듯한 몸매를 보았다. 그 옛날 신이 처음으로 그들에게 다가 왔을 때 이런 모습이 아니었나, 상상하게 되는 아름다운 얼굴과 땅위를 단단히 받치고 선 두 다리도 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칭송해마지않는 훌륭한 족장의 모습이었다.
야스카산의 모든 것이 아사신의 열등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신부. 왜 그러지?”
아사신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노려보고 있잖아. 내가 두려우냐.”
희롱 당한다- 라는 것을 알아도 아사신은 떨리는 몸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신의 피를 이었노라 쥐꼬리만 한 자존심을 세워보려 하지만 야스카산의 무자비한 눈동자 앞에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불량한 한량처럼 빈정대던 야스카산의 얼굴이 갑자기 구겨졌다. 야스카산은 눈을 내리뜨고 무섭게 물었다.
“누가 너를 건드렸느냐.”
“······네?”
아사신은 어리둥절했다. 야스카산이 구석에 처박아져있는 너울을 집어 들었다.
 “누가 감히 내 신부의 얼굴을 나보다 먼저 보았느냐.”
그제야 야스카산의 말을 이해한 아사신이 떨리는 손으로 야스카산의 손에서 너울을 받아들었다.
“족장.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제가 그런 것입니다.”
야스카산이 설핏 웃었다.
“내신부의 성격이 보통은 아닌 모양이로군.”
“신부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너를 신부라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를까?”
“아사신. 아사신이란 이름이면 족합니다.”
야스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지간히도 내 신부가 되기 싫은 모양이로구나.”
“족장.”
공기가 급속도로 굳기 시작했다. 작은 신방에 그 큰 몸으로 버티고 선 것만으로도 지나치게 의식되는데, 작정하고 냉기를 날리자 아사신의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는 내달에 결혼하기로 했었지.”
“······그렇습니다.”
“그래. 너와 혼인하기로 한 계집은 분명히······.”
야스카산의 눈동자가 기억을 헤집는 듯 휘어졌다.
“기억이 나는군. 진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계집. 소사린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아사신은 눈을 사납게 치떴다. 야스카산은 분명히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것도 다분히 의도적으로.
막 따지려고 입을 여는 순간 야스카산이 어깨를 잡아왔다.
 “그래. 멀쩡한 사내놈을 잡아다 신부랍시고 같은 거 달린 사내놈한테 뒤를 헤집히게 생겼으니 기분이 상하겠지.”
“무슨, 헉!”
야스카산은 부드러운 혼례복 위로 아사신의 중심을 거머쥐었다.
“정말 멀쩡하게 붙어있군. 신부의 아들로 태어나고도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기에 뭔가 하자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멀쩡하잖아?”
야스카산이 비아냥 거렸다.
“그만, 그만.”
아사신은 식은땀을 흘리며 마구잡이로 중요한 물건을 쥐고 흔드는 야스카산의 손목을 잡았다. 너무 아파서 그가 쏘아대는 가시 돋친 말들도 들리지 않았다.
“흥- 재미없군.”
마침내 야스카산이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손을 떼자, 아사신은 침대에 엎어져서 둥그렇게 몸을 말았다. 어린 시절 동네 구걸을 하다 깡패들에게 얻어맞았을 때도 이런 아픔은 격어보지 못했었다.
 “옷을 벗어라.”
야스카산이 냉정하게 명령했다. 금방 전에 내 신부 운운 할 때의 거짓된 달콤함 따위 한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사신의 통증으로 인해 멍해진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옷을······?”
“꾸물대지 마라. 옷을 벗으라고 말했다.”
어- 하고 멍하니 중얼거리는 사이에 혼례복이 우악스럽게 벗겨져 나갔다. 뒤늦게 당황해서 옷자락을 쥐어보지만 손가락 사이로 그 부드러운 천 조각은 너무 쉽게 빠져 나가버렸다. 첫날밤의 그 짓, 만을 위해 만들어진 옷은 한 번 손짓한 것만으로도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아사신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신녀들은 속옷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어머니 앞에서도 나체가 되 본적이 없었다. 아무리 같은 남자끼리라도 부끄러웠다. 특히 야스카산처럼 비교도 되지 않는 멋진 전사의 몸 앞에서는······.
“싫어도 할 수 없어. 나는 금방 살육을 하고 왔어. 피가 아직 끓고 있단 말이다. 마라 꽃잎이 들어간 술도 잔뜩 마셨어. 내 물건이 박고 싶다고 아까부터 불끈거린단 말이지.”
야스카산은 히죽 웃었다. 그 비열해 보이는 웃음은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아사신은 잠시 남의 일인 양 생각했다.

 그러나 더 이상 딴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음순간 아사신은 침대에 머리를 박고 엎어졌다.
“나도 내키지는 않지만 말이다. 오늘밤 내가 박을 수 있는 구멍은 너뿐이거든. 그게 관례고 관습이라니 나도 어쩔 수 없지. 기대하겠다, 아사신. 나는 무척 정력적인 남자니까 나를 만족시키려면 제법 힘들 거다.”
아사신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어느새 벌거벗은 자신의 몸 위로 야스카산이 올라타더니 위에서 찍어 눌렀다.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얼굴이 처 박혀 있어 나오는 것은 읍읍 거리는 한심한 소리뿐이었다. 방안에는 사냥감을 몰 때와 비슷한 긴박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만······.”
야스카산의 손이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 얼굴을 쳐들었다.
“무슨 짓을!!”
믿을 수 없는 곳에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남자끼리 어디로 하는지 모르고 있었나?”
야스카산은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형편없는 어린애잖아. 네가 잘하는 건 대체 무엇이지? 설마 여자한테 물건을 세워본 적도 없는 건 아니겠지?”
아사신이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기회는 있었었지만 소사린을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참았었다. 결혼을 허락받고, 날짜만 기다리던 동안에도 초야를 위해 지켜주고 싶었었다.
“네 약혼녀한테도 안 써보다니. 어리석구나. 여자란 따먹을 수 있을 때 따먹어 두는 게 좋아.”
야스카산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뻔히 보이는군. 첫날밤에 서로의 순결을 바치겠노라는 웃기지도 않은 순정의 맹세를 하고 싶었나본데 말이다.”
갑자기 야스카산이 아사신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아사신은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의 품안으로 질질 끌려갔다.
“안됐구나. 아사신. 힘들게 지켜낸 네 순결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 이복남동생의 물건아래 짓밟히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것도 앞쪽이 아닌 뒤쪽을 말이지. 네 운명의 별은 너를 버린 모양이다.”
“아······.”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사신의 눈가에 눈물이 어렸다. 그 모습을 본 야스카산이 혀를 찼다.
“나와의 잠자리에서 감히 다른 사람을 생각하다니.”
자기가 헤집어낸 기억이면서 아사신을 보고 화를 낸다.
“헉-!”
억지로 돌아간 입술에 두툼한 혀가 파고들었다. 순간 소사린과의 달콤했던 입맞춤이 생각났지만 그런 아름다운 추억 따위는 금세 날아가 버렸다. 야스카산의 혀는 살아있는 또 다른 객체처럼 아사신의 입안을 유린했다. 치열을 더듬으며 입천장을 간질였다가 터트릴 듯 자신의 혀를 압박하는 그의 입맞춤에 아사신은 침음을 흘렸다.
야스카산은 실처럼 이어진 타액을 긴 혀로 핥아먹었다. 붉은 혀가 창백하게 질린 청년의 혀와 입술을 동시에 핥아 내리는 모습은 지독하게 색정적이었다.
야스카산은 품안의 남자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자신의 괴롭힘으로 인해 아사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손을 내려 이복형의 빈약한 사타구니를 더듬자, 아사신의 몸이 펄쩍 뛰어올랐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몸을 다시 침대위에 엎드리게 하고 메마른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빙글빙글 돌렸다.
“하읍! 으···윽···.”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들렸다. 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을 뒤지자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향유병이 손에 걸려들었다. 향유를 듬뿍 손가락에 묻히고 구멍을 파고들자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깊숙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아사신의 몸이 불쌍하리만치 덜덜 떨렸다.
 “하지···마······.”
여자와는 명확히 다른 몸은 성난 남근을 품어줄 곳 따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야스카산은 요구하고 있었다.
 그 몸속에 자신을 품으라고.
아니 그것은 요구 따위가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뒤틀리는 몸을 강제로 내리누르고 손가락이 들어와 길을 열었다. 그런 곳에 타인의 손가락이 들어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아사신의 얼굴이 더욱더 새하얗게 질렸다. 야스카산의 두터운 허벅지가 자신의 다리사이로 강제로 밀고 들어왔다.
야스카산은 성기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까 아사신을 조롱하느라 박아준다 운운했었지만 과연 이런 마른 남자를 상대로 물건을 세울 수 있을지 의심했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에게 매달려 아픔에 겨워 울면서 사정하는 모습에 그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물건이 발기했다.
‘거짓말이다. 무슨 변명을 늘어놓는 거냐 야스카산. 너는 아사신과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부터 그에게 발정하지 않았느냐’
야스카산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제물의 심장을 뽑아낼 때 마주쳐버린 겁에 질린 회색눈동자. 그 눈을 봐버린 순간부터 너는 아사신의 구멍에 네 물건을 집어넣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했으면서!
‘그래. 처녀지임에 틀림없을 그 곳을 정복하고 싶었지.’
야스카산은 인정했다. 청년은 손가락을 뒤로 물고 울고 있었다. .
“울지 마라.”
거칠거칠한 혀가 부어오르기 시작한 눈가를 싹싹 핥아 올리자 아사신은 통증을 느꼈다.
“더 심한 짓도 해야 하는데 벌써부터 그렇게 울면 어쩌자는 거냐.”
동그랗게 떠지는 회색 눈동자. 그 눈에 스쳐 지나가는 확연한 공포.
 “아······!”
야스카산은 사정 보지 않고 파고들었다. 작고 여린 구멍으로 무시무시하리만큼 큰 성기의 머리 부분을 집어넣었다. 향유를 발라 촉촉하게 젖은 구멍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아!”
아사신의 두 팔이 이불 위를 기어 다녔다. 엎드린 자세로 넓게 벌어진 다리를 바르작거렸다. 자신보다 몇 배나 크고 단단한 야스카산의 육체에 갇혀 필사적으로 도망가기 위해 사지를 움직였다.
그러나,
“흐윽!”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사신의 구멍이 한계까지 벌어졌다. 그 사이로 아프도록 발기한 성기가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히악!”
야스카산의 성기가 끝까지 들어가자 아사신은 괴상한 신음을 내지르며 사지를 바르르 떨었다. 내장이 밀려올라 가고, 육체가 가벼운 충격 상태에 빠졌다. 야스카산은 단단히 허리를 붙잡고 서서히 깊이 묻혀있는 그것을 뒤로 후진시켰다. 내벽의 연약한 살이 그 움직임에 맞춰 딸려 나왔다.
“아···!”
흉측하리만큼 두터운 것이 내벽을 쓸고 나갈 때마다 육중한 아픔이 전신을 달린다. 입술을 깨물고 버둥거렸지만 단단히 붙잡은 손이 허락하지 않았다. 야스카산은 하체는 밀어붙이고 상체는 내려서 등에 맞닿게 했다.
 마치 개들의 교접과도 같은 행위의 난잡함.
야스카산의 성난 물건이 거칠게 맥박 쳤다. 그 두근거림은 연결된 곳을 통해 적나라하게 아사신에게도 전해졌다.
 야스카산이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크르륵 거렸다.
“얼굴이 보고 싶다.”
“무슨···허억!”
아사신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 치뜨인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야스카산이 힘으로 아사신의 몸을 돌려버린 것이다.
연결된 내벽의 살이 휘말려 돌아가며 야스카산의 샅을 빈틈없이 조이며 회전하자, 야스카산의 입에서 처음으로 희미한 쾌감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런 건···안 돼······.”
아사신의 얼굴은 눈물 투성이었다.
 “남자와···동생과···.”
야스카산의 격렬한 허리 짓에 중간 중간 말이 끊어졌다. 찢어발기듯 벌어진 하체에 둔통이 달렸다.
“다리 벌려.”
야스카산은 아사신이 무어라고 떠들건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아사신의 구멍을 파헤치는 일에만 집중한다. 우악스러운 손이 이미 벌려질 대로 벌려진 아사신의 다리를 더욱 힘차게 밀어 붙였다.
 “그만···그마안······.”
정신없이 휘젓는 아사신의 손끝에 거칠거칠한 야스카산의 머리카락이 만져졌다. 아사신은 그것이 구원 줄이라도 되는 양 힘껏 잡아당겼다. 야스카산은 머리가 뽑혀나가는 아픔에 눈을 찌푸렸지만 아사신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었다.
“흐······.”
인내할 수 있는 고통의 한계가 다가온 아사신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빳빳하게 발기된 야스카산의 남근은 지칠 줄을 모른다. 최고의 전사. 최강의 육체를 가진 야스카산의 정력은 처음으로 남과 몸을 겹치는 아사신에게는 독이었다.
찌걱- 찌걱-
신성한 초야를 위한 방에 엉덩이가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끈적한 향유가 그 소리를 더 크게 만들었다. 아사신은 그것이 향유가 만들어내는 소리임을 알면서도 마치 자신의 몸에서 여자처럼 흘러나온 애액이 만들어내는 소리 같아 너무도 부끄러웠다. 가랑이 깨를 더듬는 야스카산의 손가락이 미치도록 기분 나빴다.
땀방울이 가슴으로 후두득 떨어졌다.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고, 몸은 야스카산의 땀방울로 젖었다. 미온한 조명이 육체를 비추자 육체는 부드럽게 빛났다.
아사신은 어서 이 순간이 끝나기만 빌며 질끈 눈을 감았다. 아프다는 감각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가슴을 진탕 문지르는 손을 참아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 짓은 한 번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야스카산에게 제대로 된 후계자를 만들어낼 때까지 계속 될 일이었다. 자신 같은 반푼이가 아니라 정통하고 제대로 된 후계자를 말이다. 다리를 벌리고 남성을 받아들여서 그 정액을 취하는 짓을 아들을 낳을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어머니와 같은 일이 자신에게도 벌어질 것이다. 그 사실이 육체의 고통보다 아사신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
 참담한 눈물이 흘렀다. 나이어린 남자의 품에 안겨 다리사이에는 남근을 꼽고 울고 있는 자신이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크흣, 좋군.”
귓전에서 토해지는 소리에 부운 눈을 힘겹게 뜨자 자신의 육체에 열중해있는 야스카산이 보였다. 어둡게 물든 푸른 눈동자가 진한 쾌감에 젖어있었다. 경멸하듯이 바라보지도, 대놓고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 눈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통째 씹어 먹고 싶은 듯 끓어오르는 정념이었다.
“느껴져? 네가 빨아들이고 있어. 네 구멍으로 말이다.”
아사신은 귀를 막고 싶었지만 몸이 심하게 흔들리느라 잘 되지 않았다.
“전사도 못된 네가 이렇게 훌륭할 줄은 미처 몰랐구나. 이런 구멍을 가진 주제에 여자랑 혼인하려 하다니.”
‘그만! 더 이상 나를 비참하게 하지 마!’
아사신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히익- 히익-, 괴롭게 신음했다.
“제발···그만, 그만······.”
“크윽!”
야스카산의 움직임이 점점 더 빨라지나 했더니 갑자기 멈추었다. 살집을 쥐어뜯던 손이 엉덩이를 더욱 크게 벌려 트렸다.
“아--!!”
몸 안에 미끈거리는 무언가가 퍼져나갔다. 충혈 된 내벽의 살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사신은 끝났다는 것을 알아챘다. 너덜너덜해진 정신과 육체는 과도한 노동에 항변하며 휴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최고다. 최고의 구멍이다.”
야스카산이 허리에 잡아끌자 아사신은 줄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안겼다. 야스카산의 심장소리가 맨가슴을 통해 전해졌다.
 야스카산은 마지막으로 힘차게 한 번 더 물건을 들이박았다. 몹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밖으로 빼내자 푸륵,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부어오른 항문에서 약간의 피가 향유와 정액에 뒤섞여 흘러내렸다. 아사신의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켰다.
“기절했군.”
야스카산은 자신의 품에 맥없이 매달려있는 아사신을 보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아직 자신의 물건은 만족하지 않았다. 금방 사정했음에도 자신을 묻어줄 구멍을 찾아 움찔거리며 넘쳐나는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놈을 상대로 한 번 더 할 수도 없고.”
야스카산은 인상을 구겼다. 기절한 놈을 붙들고 하면 욕망은 채워져도 기분은 나빠진다. 그것은 꼭 시간(屍姦)을 하는 기분이다. 할 수 없이 늘어지는 아사신을 침대에다 내팽개치고 옷을 입었다.
 대신할 여자는 많았다. 오늘은 어떤 여자도 임신하지 않는 날. 생명을 관장하는 큰곰자리의 별은 이날 오직 신부에게만 능력을 행사한다.
밖으로 나가자 세 명의 신녀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린 채 서 있었다. 야스카산은 대충 어려보이는 여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오늘은 다른 사람과 동침하실 수 없습니다.”
가장 나이든 신녀가 말했지만 야스카산은 코웃음을 쳤다.
“너만 입 다물면 되는 거다. 걱정하지 마라. 임신시키지 않는다. 아니 임신시키지 못하는 거지.”
야스카산에게 손목을 잡힌 신녀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의 가슴에 처박혔다. 신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야스카산에게서는 아직 짙은 정액냄새와 함께 정사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안에 있는 걸 처리해라. 좀 다친 모양이다.”
신녀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히고 뒷걸음질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쓸모없는 것 같으니. 저렇게 약해빠져서야 그 짓거리용으로도 쓸 수가 없겠군.’
야스카산은 어린신녀를 고쳐 안고 속으로 혀를 차며 비어있는 방을 향해 걸어갔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남자들은 다가올 겨울을 위해 열심히 사냥을 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가져온 사냥감의 가죽을 벗겨서 옷이나 신발을 만들고 비싼 것은 팔았다.
 남자가 없는 집은 겨울을 나기가 힘들었다. 남자는 음식을 가져다주고, 돈을 벌어다 주고, 다른 남자들의 위협에서 여자를 지켜주는 존재였다.
 여자는 짐이었다. 딸은 낳으면 시집보낼 때 드는 지참금부터 생각이 나는 존재였다. 남편이 딸만 낳는 아내를 내치는 것은 흉이 아니었다. 딸은 살림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쳐진 아내는 친정으로 돌아가거나, 친정에서도 받아주지 않으면 혼자 쓸쓸하게 살아야 했다. 그나마 사정이 좋은 남자는 쫓겨난 아내를 돌봐주기도 하지만 태반이 그렇지 못했다.
그녀들의 유일한 희망은 누군가 자신을 첩으로 삼아주는 것 뿐.
전사는 언제나 모자랐다. 있어도, 있어도 모자란 것이 전사였다. 남자로 태어났어도 전사가 되지 못하면 평생 돈과는 인연이 없이 살아야만 했다. 가난한 남자는 지참금을 받아서 결혼하는 게 아니라 외려 지참금을 주고 여자를 사와야 했다. 그나마도 초혼의 젊은 여자가 아니라 쫓겨난 경험이 있거나, 혼기를 놓친 노처녀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남자들에 비하면 아사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소사린은 젊고, 아름다웠으며 아무와도 결혼한 전적이 없는 여자였다. 윤이 나는 밤색 머리카락은 구불구불하게 물결치며 허리에 닿았고 순진한 눈동자는 선하고 상냥했다.
소사린은 어릴 때부터의 친구로 유일하게 자신을 신부의 아들이 아닌 아사신으로 봐주는 사람이었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사신을 위해 글을 가르쳐 주고, 사냥할 도구를 마련하지 못하는 아사신을 위해 몰래 무기를 집어다 준 것도 소사린이었다. 그들은 늘 붙어있었고 함께 자랐으며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사랑을 느꼈다.
 어린 시절의 친구가 이성으로 다가오게 된 것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치마를 입게 됐을 때 부터였나- 아니면 신나게 물장구를 치며 놀다가 젖어버린 옷 사이로 봉긋 솟아오른 가슴을 보았을 때부터일까-
 아사신에게 있어 소사린은 동생 수라킨과 같은 존재였다. 한없이 보호해주고 싶고 세상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존재였다. 그들은 완전하게 서로를 믿고 있었다.
 첫 번째 입맞춤은 소사린의 주도였다.
나이가 들자 자연스럽게 결혼이야기가 나오게 되었고, 아사신은 소사린을 다른 남자에게 줄 마음이 없었다. 소사린의 아비에게 소사린과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말했을 때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딸만 일곱이나 되던 소사린의 아비는 쉽게 허혼했고, 덧붙여서 냉정하게 지참금은 30겔피와 사슴가죽 열장뿐이라고 말했다. 30겔피면 한 달 생활비로도 빠듯한 액수였다. 하지만 아사신은 상관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지참금을 내야 할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신전에서 길일을 받고, 족장에게 결혼을 승낙받자 드디어 소사린이 아내가 된다는 실감이 들었다.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자꾸만 웃는 아사신의 입에 소사린이 기습적으로 입을 맞춘 것은 그때였다.
 아사신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소사린은 발갛게 볼에 홍조를 띄우고 말했다.
 “너 나와 결혼해도 후회하지 않겠니?”
“무슨 소리야 소사린. 네가 나와 결혼해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운인데.”
아사신은 놀랐다. 그녀가 설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네가 나와 결혼하고 후회하지 않을까 걱정돼. 알다시피 나는 전사도 아니고······.”
-버림받은 족장의 아들이니까-
라는 말은 입 속으로 삼켰다. 사람들이 신부의 몸에서 났음에도 허약하고 쓸모없는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지 알고 있었다.
“사랑해 소사린. 그런 말은 다신 하지 말아줘. 네가 떠날까 두려워.”
소사린을 꼭 끌어안고 머리에 코를 묻자 은은한 꽃 내음이 났다.
 “네 날개······.”
“응?”
소사린이 중얼거렸다.
“가끔 꿈을 꿔. 네 날개가 하늘을 가릴 만큼 크고 강하게 자라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날아가지 말라고 울면서 뛰어가. 그래도 넌 날아가 버려. 내가 잡을 수 없는······ 태양에게로 날아가 버려. 혼자 남은 나는 계속 울다가······. 울다가 잠에서 깨. 그런 꿈을 꾸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소사린.”
아사신은 미소 지었다. 깃털하나 움직이지도 못하는 날개를 무서워하는 소사린이 사랑스러웠다.
 “바보. 너를 두고 내가 어딜 날아가니? 우리는 곧 결혼할거고, 같이 살게 될 거야. 나는 너를 위해 음식을 구해오고, 너는 나를 위해 옷을 만들어 줄 거야.”
“옷 만드는 건 네가 나보다 나으면서······.”
드디어 소사린이 웃었다.
“그래도 네가 만들어준 옷을 입을래.”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주홍색으로 불타는 노을이 그들의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았다. 다정한 소사린의 밤빛 머리카락이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너를 보내준 것만이 신이 내게 허락한 유일한 행복이야.’
아사신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리는 결혼한다.’
소사린이 목덜미에 두 손을 감아오며 두 번째 입맞춤을 시도했다. 달콤함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아사신은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방에 난 모든 창에 발을 내려 집을 어두침침하게 만들었다. 수라킨이 아무리 방문을 두드리며 얼굴이라도 보여 달라고 외쳐도 철저하게 무시했다.
 소사린이 종종 방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파혼한 여자들이 걸치는 칙칙한 망토로 전신을 감싸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늦은 밤에 몰래 다녀가곤 했다.
 소사린은 수라킨처럼 방문을 두드리진 않았지만 굳게 닫힌 문 앞에 서서 하염없이 아사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 다정하고 애절해서 아사신은 무너져 버리려는 자신을 몇 번이고 추슬러야 했다.
 그러나 아사신은 소사린의 부름에 대답할 수 없었다. 밤이 되면 그날의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자신을 좀먹고 있었다.
거침없이 중심을 잡아오던 남자의 손.
유륜을 긁어내리며 비명을 즐기던 남자의 눈.
뒤가 꿰뚫리는 아픔에 허망한 손짓을 해보지만 그마저도 곧 단단한 가슴에 강제로 끌어 모아진다.
그곳이 비명을 지르고 뜨거운 눈물이 떨어진다.
자존심이 뭉개지고, 자괴감이 온몸을 기어 다닌다.
처절하게 지배당한 기억이 아사신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사신은 야스카산을 증오했다. 그 증오의 대상이 올바르지 않다 해도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신탁을 받은 신관도 증오했고 신탁을 내린 신도 증오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자기 스스로를 증오했다.
 신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면서 족장이 되지 못하고 전사도 되지 못하더니 이제는 이복동생과 붙어먹다니.
그래- 그 남자의 말이 맞았다.
 남자를 향해 엉덩이를 흔드는 구멍을 가진 주제에 소사린과 혼인하려 했다니 분수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날의 북소리가 들려온다. 신부가 몸속을 긁어내리는 남자의 성기에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신부는 자신이었다.
아사신은 불면의 고통에 몸서리치며 침대 속으로 한없이 침잠했다. 다음날 눈을 뜨면 이 모든 것이 한바탕 진절머리 나는 악몽이었기를 바라면서······.



“야스카산.”
사냥터로 향하던 야스카산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어머니 민네가 서 있었다.
 “어머니.”
“야스카산. 사냥을 가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오늘은 곰을 잡아올 테니 기대하십시오. 우리 신의 제단에 곰의 머리를 통째로 바치겠습니다.”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웃는 아들의 얼굴은 요사스러울 만큼 아름다웠다. 얼마 전 신부의 의식 날을 기점으로 남성미가 물씬 풍겼다.
 “요즘 사냥이 너무 잦으십니다. 당신의 육체는 신성한 것. 무리하지 마십시오. 혹시 다칠까 두렵습니다.”
“어머니.”
야스카산은 미소 지었다. 어머니란 존재는 나이가 들수록 걱정만 는다더니.
“신부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미소 짓던 야스카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신부? 그와 저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만.”
그러나 어머니의 날카로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족장이 신부를 맞고 난 뒤로 인상이 흉흉하고 심성이 거칠어져서 사냥으로 꼭 피를 보고서야 진정이 된다고.”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내가 피를 보고야 진정이 된다고 하니 그자의 목을 따 곰의 머리대신 그자의 머리를 바쳐야겠습니다. 우리 신도 그 편을 더 흡족해 하시겠군요.”
야스카산의 눈동자가 사납게 빛났다. 안 그래도 살기어린 푸른 눈이 작정하고 전의를 불태우자 공기가 얼어붙었다.
민네마저 이글거리는 야스카산의 눈동자 앞에서는 핏기가 가실 지경이었다. 평상시에는 잊고 있던 사실, 아들이 신의 피를 이어받았음을 온 몸으로 실감했다.
“화내지 말아요, 야스카산. 당신이 괜찮다고 하니 이 어미는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너무 바깥으로 나다니지 마십시오. 주인이 자주 자신의 땅을 비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민네가 한걸음 물러나며 태도를 공손히 하자, 야스카산도 친어미를 상대로 더 이상 화를 낼 수는 없었는지 찡그렸던 인상을 폈다.
“알겠습니다. 어머니의 충고 잊지 않겠습니다.”
민네가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서자 야스카산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그의 전사들이 자신을 따라 나왔다.
“타스가. 오늘은 곰을 사냥한다. 활과 창을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족장.”
그의 충실한 오른팔 타스가는 주인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재빨리 무기를 챙겨왔다. 태양이 새겨진 검 집을 건네받고서야 야스카산의 미간이 조금 펴졌다.
기본적으로 족장은 사냥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사냥을 할 필요가 없었다. 부족민은 그들이 잡아온 것의 열중 하나를 세금으로 족장에게 바쳐야 했다. 전족장이 부족을 다스릴 때는 여섯 중 하나를 바쳐야 했지만 야스카산은 여섯에서 열개로 부담을 줄여주었다.
 그의 전사들은 용맹하고 땅에는 짐승들이 많았다.
 사람들의 부담을 줄여주고, 쫓겨난 여자들이나 장애가 있는 자들에게 무료로 의식(衣食)을 나누어 주고도 야스카산은 부유했다. 마라꽃을 파는 것으로도 창고는 충분히 차고 넘쳤다. 야스카산이 사냥을 하는 것은 순전히 즐기는 목적이었다.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산을 타 넘었다.
 곰을 잡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곰이 좋아하는 벌레 유충에 마비 약을 발라놓고 기다리는 것과 굴 안에 들어있는 곰을 강제로 끄집어내는 방법이 있었다. 첫 번째 방법은 돌 밑에 유충을 먹는 것이 곰뿐만이 아니라는 것과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이 단점이었고 두 번째 방법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야스카산은 주로 후자를 이용했다.
먼저 곰이 있을법한 동굴로 몰려가 몇 발의 화살을 쏜다. 상처 입은 곰은 화가 나서 밖으로 뛰쳐나오면 재빨리 창과 활을 쏴서 곰의 전투력을 반감시킨다. 그 후에는 직접 칼로 멱을 따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상처를 입혀놓았다 해도 곰을 상대로는 방심할 수 없다. 적어도 세 명 이상이 달려 들여야 아무도 다치지 않고 잡을 수 있지만 야스카산은 늘 이 모든 작업을 혼자 해치웠다.
 단련된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울부짖는 곰의 눈에 화살을 박아 넣고, 더운피가 뿜어져 나오는 동맥을 한 번에 잘라낼 때면 전사들은 그가 과연 부족 최고의 전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날도 야스카산은 성공적으로 곰의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 발정기를 맞이해 사나울대로 사나워진 곰이 갈고리처럼 휘어진 새까만 발톱을 야스카산을 향해 휘둘렀을 때는 그의 용맹성을 알고 있는 전사들도 그만 움찔하고 몸을 경직시켰을 정도였다.
그러나 야스카산은 목이 반쯤 잘려 둔해빠진 곰의 손바닥에 얻어맞을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재빨리 곰의 등으로 몸을 피한 후 목에 꽂은 칼을 더욱 힘차게 내리그었다. 크득, 하고 목뼈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곰이 그 육중한 몸을 바닥에 쿵하고 떨어뜨리자 전사들이 다가와 일제히 까마귀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그것은 죽은 곰의 혼을 위로하기 위한 것으로, 혼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새. 까마귀가 곰의 혼을 잘 물고 큰곰자리별에게로 가주기를 비는 의식이었다.
 “이것의 가죽을 벗겨라.”
야스카산이 명하자 전사들은 즉각 곰의 가죽과 살을 분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공동으로 잡은 사냥감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나누어 가졌다. 순식간에 곰은 먹을 수 없는 내장과 뼈만 남았다. 피 냄새를 맡고 승냥이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야스카산은 곰의 머리와 심장을 가졌다. 이로서 신의 제단을 장식한 제물이 마련되었다.
 “비가 올 것 같습니다.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타스가가 신중하게 말했다. 야스카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미간은 찌푸려진 상태였다.
보통 살생을 하고나면 기분이 어느 정도 풀렸지만 오늘은 다르다. 여전히 짜증이 솟구쳤다. 사냥을 나오기 전에 어머니와의 대화 때문이었다.
 “······신부 따위와.”
“족장?”
타스가가 쳐다보자 야스카산은 입을 다물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돌아가자.”

그들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마을의 분위기는 극도로 어수선했다. 사람들은 야스카산을 보자 급하게 달려왔다.
“족장! 지금 바산이 쳐들어왔습니다.”
“바산이?”
야스카산은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이르다. 가장 최근의 공격이 3개월도 지나지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어서.”
타스가의 말에 야스카산은 아직도 피에 젖어 뜨끈뜨끈한 칼을 다시 검 집에서 꺼냈다.
 “우리 신은 아무래도 곰의 모가지 따위로는 만족스럽지 못하신 모양이다. 친히 제물을 보내주시는구나.”
피가 뚝뚝 떨어지는 부대자루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야스카산이 외쳤다.
“가자! 가서 신의 제단에 건방진 이방인들의 심장을 바치자!”
“우와아아아!”
야스카산의 부름에 전사들이 환호했다. 족장의 등장만으로도 허둥대던 사람들의 눈빛이 투지로 끓어올랐다. 야스카산은 애마위로 훌쩍 뛰어 올라탔다. 흑마는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말굽을 울렸다.
“흥, 지치지도 않고 달려드는군.”
“이번에도 마라 꽃을 노리고 오는 거겠지요?”
타스가의 말에 야스카산은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마라 꽃은 신의 축복. 신의 선물.
 그들의 땅 한 켠 신의 뒷마당에는 마라 꽃이 핀다.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 땅을 걷자 태양에 닿은 땅이 괴로워하며 피를 흘렸다고 전해진다. 피 흘린 자국에선 새빨간 꽃잎과 새하얀 술을 가진 꽃이 피었고, 사람들이 그 꽃의 향기를 맡자 용기가 솟았다. 그들이 기뻐하며 그 잎을 따다 말려서 태우자 기분이 급격히 좋아지고 정력이 증가하였으며 정신이 몽롱하여 꿈과 현실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신의 선물이라 여겼다.
마라 꽃은 그들의 땅에서만 자랐고, 다른 부족에서 아무리 훔치려 해도 옮겨 심는 즉시 말라죽어버렸기 때문에 마라 꽃은 부족 간의 협상이나 물물 교환 때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꽃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지게 진행되었고, 마라 꽃의 활용도는 더욱 다양해졌다.
꽃을 곱게 빻아서 물에 100대 1로 희석시키면 통증이 확연히 완화된다는 것을 알고 되었고, 상처가 심한부위에 즙을 바르면 상처의 악화를 막아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푸른 꼬리 살모사의 독에 섞어 복용하면 잠자는 것처럼 조용히 죽을 수도 있었고, 통째로 태워 재를 반년 간 땅에다 묵히면 시체 방부처리에도 효과가 좋았다.
마라 꽃은 이처럼 다방면에 요긴하게 쓰이는 꽃이었지만, 치명적인 한 가지 결점이 있었다.
그것은 목숨을 앗아가는 중독성.
 처음에 사람들은 마라 꽃이 주는 향락에 심취하여 마구잡이로 꽃을 복용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살아있는 시체처럼 되어 말도 생각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고, 마라 꽃을 하루라도 복용하지 못하면 미쳐 날뛰게 되었다.
 그제야 꽃의 이중성에 대해 알게 된 족장은 꽃을 마구잡이로 재배하는 것을 금지했고, 신전에다 관리를 일임하였다. 그 뒤로 사람들은 꽃이 필요해지면 신전으로 찾아가서 필요한 만큼만을 처방받을 수 있었다.
마라 꽃은 비쌌다. 다른 부족 사람들은 꽃의 가격이 눈물 나게 비싸다하여 눈물 꽃이라고도 불렀다.
 족장은 앉아서 그들이 바쳐오는 황금으로 돈을 벌었다. 마라 꽃에 눈이 먼 이방인들이 쳐들어와도 두렵지 않았다. 신의 비호를 받는 전사들은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족장의 전사들은 타고난 싸움꾼.
이방인들의 해골을 밟고 피를 흩뿌리고 언제나 승리해왔다.

“타스가. 너는 돌아가서 신부를 보호해라.”
“예에엣?”
타스가는 저도 모르게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말꼬리를 올렸다.
“족장. 신부는 안전한 마을에 있지 않습니까. 저는 족장을 도와 싸움터에 나가는 것이······.”
“아니, 내 말에 따르는 것이 좋다. 타스가.”
야스카산은 타스가의 말을 간단하게 부정하고는 말을 타고 달려 나가 버렸다.
“족장······.”
뒤에 남겨진 타스가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사신은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에 눈을 뜨자 정신이 멍했다. 더 자고 싶었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범상치 않았다.
“오빠! 문 열어줘! 바산족이 쳐들어왔대!”
‘바산족······.’
그들은 잊을 만하면 쳐들어오는 이방인들이었다.
 “오빠아!”
수라킨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아사신은 다시 이불속으로 몸을 끌어내렸다. 그들은 마라 꽃을 노리는 많은 이웃부족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족장과 전사들은 언제나 그들을 물리쳐왔다. 신경쓸만한 일이 아니었다.
다시 새근거리며 잠의 세계로 빠져들던 아사신은 갑자기 쾅, 지축을 울리는 소리에 퍼뜩 놀라 몸을 일으켰다.
“무슨!”
문짝이 갈기갈기 부서져있었다. 두껍고 견고한 나무가 완전히 박살 난 사이로 거대한 사내가 몸을 들이밀었다.
 “누구···누구 십니까?”
아사신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남자는 아사신을 무미건조하게 쳐다보았다. 아사신은 남자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아사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울부짖는 어머니를 끌고 가던 전사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전족장의 오른팔이었고, 지금은 야스카산의 오른팔이 된 남자인,
“타스가······?”
“그렇습니다. 신부.”
타스가는 문을 부수면서 묻은 먼지를 대충 털어내며 대답했다.
“무슨 일로 이런 짓을 했습니까?”
“족장이 당신께 저를 보냈습니다.”
아사신은 어이가 없었다.
“바산이 쳐들어오는 이 와중에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도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만 명에 따랐습니다. 그런데 와보니 당신의 방문은 굳게 닫혀있고, 수라킨이 앞에서 울고 있더군요.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걱정 되어 실례를 범했습니다.”
걱정을 했다는 사람의 목소리치고 지나치게 냉정했다.
 두 남자가 서로를 멀뚱히 바라만보는 사이 수라킨이 방안으로 쳐들어왔다. 그녀는 그야말로 쳐들어왔다는 설명 외에는 불가능한 몸짓이었다.
“아사신!”
“수···수라킨!”
수라킨은 타스가를 확 밀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방심하고 있던 타스가는 ‘윽’ 소리와 함께 박살난 문짝위로 화려하게 자빠졌다. 수라킨은 누가 발 밑에서 뒹굴던 말던 전혀 신경쓰지 않고 아사신의 등짝을 멋지게 후려갈겼다.
 “바보 같으니라고.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수···수···수라킨···.”
아사신은 타스가보다 수라킨이 더 무서웠다.
 “뭘 그리 잘했다고 방구석에 처박혀있어! 아니지, 잘못한건 또 뭐야. 없잖아? 남자신부가 됐다는 게 죽을죄라도 진거야? 엉? 그 정도면 인물 훤칠하고 돈도 잘 버는 신랑 만났구만 왜 재수 없게 질질 짜고 있냐고오~. 진짜 밤마다 시끄러워서 원. 동내창피해서 원. 그럴 시간에 밭이라도 경작하면 먹을 거라도 튀어나오지. 질질 짜면 밥이 나와 돈이 나와. 남자가 그리 패기가 없어서 어디다 써먹어? 이런 정신머리로 잘도 소사린언니를 아내로 맞으려고 했겠다. 동생 된 입장으로서 참 기도 안 차네~.”
그야말로 청산유수. 아픈 데를 쿡쿡도 아니고 퍽퍽 찔러대는 수라킨에게 아사신이 식은땀을 흘리며 매달렸다.
“그만해라 수라킨. 남 보기 부끄럽구나.”
“웃기시네.”
수라킨은 공격대상을 바꿨다.
“저 남자도 나가서 다른 말 못해. 부끄럽게 열네 살 계집애한테 떠밀려서 바닥에 대자로 뻗은 주제에. 이봐, 당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거야? 그럴 거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붕붕 흔드는 타스가였다.
 “그리고 멀쩡한 문짝은 왜 부수고 지랄이야? 당신이 물어줄 거야? 우리 집은 가난하다고. 신부를 데려갔으면서 지참금은 왜 안 가져와? 당신네 족장이 신부 지참금을 떼먹을 만큼 사정이 안 좋았어? 족장은 지참금을 떼먹고, 그 부하는 문짝을 부숴대니 아주 가관이군 그래. 이제 뭘 또 부술 거야? 엉? 말해! 말해보라고!”
수라킨의 거의 숨도 쉬지 않고 쪼아대는 말소리에 아사신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를 만류하기 위해 손을 내저었다. 열네 살이지만 열일곱살정도로 보일만큼 발육이 좋은 수라킨이 엎어져있는 커다란 남자위에 다리를 쩍 벌리고 서서 다다다 쏘아붙이는 장면은 오빠 된 입장에서 상당히 보기 좋지 않았다.
 “하핫-.”
갑자기 타스가가 웃었다.
 “하하하, 정말 많이 자랐구나. 수라킨.”
믿을 수 없게도 돌처럼 무표정했던 타스가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수라킨은 저양반이 돌았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고, 아사신도 눈을 크게 떴다.
“당신 날 알아?”
수라킨이 눈썹을 치켜뜨며 묻자 슬그머니 타스가는 웃음을 지웠다. 모를 리가 없다. 아사신과 수라킨 남매는 유명했다.
 10년 전의 그 기억은 아주 선명했다. 작고 왜소한 그들의 어미를 질질 끌고 가자 눈알이 뽑아져 나갈 것처럼 울어대던 어린 여자애. 그 여자애가 수라킨이었다.
그들의 상당히 인상 깊은 첫 만남에 대해 말해줄 필요성을 못 느낀 타스가가 다시 침묵하자, 수라킨은 아사신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2주 만에 다시 만난 그녀의 오빠는 아주 마르고 창백해져서 금방이라도 땅속으로 꺼질 것처럼 탈진해보였다.
“잠은?”
짧은 질문이었지만 아사신은 알아들었다.
“거의······.”
“먹었어?”
“조금······.”
“그런 것 같군.”
수라킨은 잔뜩 쌓인 채로 썩어가는 음식물을 바라보았다.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는 아사신을 위해 묽은 죽이나 부드러운 고기를 얇게 저며 방문 앞에 놔두고 다음날 아침에 확인해보면 없어지곤 했었다. 적어도 굶지는 않는 구나- 하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지금 꼴을 보아하니 거의 먹지 않은 듯 했다.
“당신.”
수라킨의 가늘고 긴 눈동자가 힐끗 자신을 향하자 타스가는 저도 모르게 몸이 빳빳해졌다.
 “마라꽃잎 좀 가지고 있어?”
“마라···꽃잎?”
수라킨은 너 돈 좀 가진 거 있냐? 하고 골목길에서 어린애들에게 시비 거는 깡패처럼 말했다.
“그래. 저 화상덩어리 좀 먹어서 재우게.”
졸지에 화상덩어리가 된 아사신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만류했으나 이미 그녀는 타스가로부터 강제적으로 마라 잎을 착취하고 있었다.
“흠. 희석 액이군. 마셔.”
저 시커멓고 커다란 사내한테서 저렇게 당당하다니.
아사신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수라킨이 건네는 마라 꽃 희석 액을 입가로 가져갔다.
 가끔 생각하지만 수라킨이 남자로 태어났으면 분명히 후계자가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빼다 박은 외모에 성격까지 흡사한 자신과는 달리 수라킨은 강하고 냉정하면서도 고집을 부릴 때는 성정이 불과 같았다.
 제대로 먹지 못해 여자들보다 한 뼘 정도만 큰 자신에 비해 수라킨은 동년배의 소년들을 앞지를 만큼 성장속도가 빨랐다. 푸른빛이 일렁거리는 검은 눈동자는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피를 베어 문 것처럼 새빨간 입술은 얇고 길었다.
 정말이지 그녀가 남자로만 태어났더라도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사신은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냈다. 벌써 몇 번째 맴도는 생각인지 몰랐다. 2주간의 밤과 낮을 충분히 자신은 괴로워했다. 그만 수라킨을 위해서도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했다. 그러려면 이 희석 액을 받아 마시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야지······.
“다 마셨어?”
어느새 수라킨이 머리맡으로 다가와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다정한 누이동생은 평상시엔 땍땍거리기 일쑤에 오빠를 오빠로 봐주지 않고 권력을 휘두르지만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는 반드시 숙여주었다.
“나는 괜찮아 수라킨. 이제 한 숨 자고 일어나면 한결 좋아질 거야.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오빠.”
수라킨은 다정하게 웃어주는 그녀의 오라비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자신감이 부족하고 내성적이던 그녀의 오빠는 신부가 되어 남자와 초야를 치르더니 미묘하게 분위기가 변해있었다.
창백한 피부, 마른 몸, 우울한 눈동자는 그대로였지만 그 회색 눈동자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감돌았고 가무스레한 피부는 깊숙한 곳에서부터 윤을 냈다.
“오빠 이쁘다.”
수라킨은 아사신의 손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가능하다면 아사신의 반려자가 되어 이 심성이 여린 사람을 보호해 주고 싶었다. 그런 것을 소사린이 새언니가 된다기에 양보한 것이었다.
 소사린과 아사신의 결혼은 괜찮았다. 소사린이 그의 옆에서 단단한 기둥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 사랑은 옆에서 보기에 무언가 질서정연한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느낌이었다. 마치 알에서 병아리가 태어나고,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는 것과 같이 자연적으로 일어나야할 일이 일어난다는 순리. 그것과 닮아있었다.
 그래서 양보할 수 있었다. 소사린과 아사신의 결혼은 빼앗긴다는 느낌보다 더욱 친밀한 가족이 된다는 느낌이 강했다. 아사신이 자신과 소사린을 거의 평등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빠른 수라킨은 알고 있었다. 나쁜 마음이었지만, 소사린이 그것을 마음 아파하는 것을 보면서 약간은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돌아왔더니 사랑해마지않는 오빠가 짐승처럼 끌려갔다고 했다. 신부가 되었다고 했다.
수라킨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때 자신은 욕심쟁이 따미 할멈 네에서 소처럼 일하고 있었다. 귀가 어두운 할멈은 아사신이 신전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기에 당연히 수라킨에게도 전해주지 않았다. 사랑하는 오빠가 억지로 끌려가는 동안 자신은 게으른 나귀를 재촉하고만 있었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수라킨을 기다리는 것은 난장판으로 뒹군 흔적과 망연자실하게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소사린.
수라킨은 침착한 성격이었다. 울고 소리 지른다고 해서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엎질러진 물은 땅에 스며들어 버리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그 사건. 어머니가 울부짖으며 끌려가던 그 장면.
 자신이 남자로 태어나지 못해서 벌어진 모든 비극.
그 사건이 다시 재현된 것이었다.
 어린아이에 불과했을 때에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여전히 어리지만 그때처럼 일방적으로 얻어맞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결과는 같은 것이다. 눈앞에서 행복이 깨어지고 소중한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것이 수라킨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더욱더 화가 나는 것은 초야를 치른 아사신 모습이었다. 몹시 불편한 듯 신녀에게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온 그는 완전 세상 끝난 것 같은 얼굴을 하더니 방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울고 화내고 빌어도 보고 신경질도 내보고 회유하고 협박하고··· 그러다 안 되면 분통을 터트리며 저주를 해보기도 하고.
그래도 아사신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자신만의 고치 속에 꽁꽁 숨어서 울고만 있었다. 온 집안에 울음소리가 귀신처럼 떠돌았다.
 뭘 그리 잘못했다고 저렇게 망가져야 하는 건지. 그 남자에게 안긴 게 그렇게 창피하고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지. 어차피 벌어진 일이잖은가. 적극적으로 이 상황을 돌파할 생각을 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 말하면 분명 아사신은 허물어질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이다. -난 너와 달라. 그렇게 강하지 못하단다.- 라는 어이없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수라킨은 여린 오빠의 이마에 살짝 입 맞추었다. 어느새 아사신은 예쁜 회색눈동자를 꼭 감은 채 새근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약효가 잘 듣는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이름이 뭐죠?”
수라킨은 격식을 차리고 말했다. 타스가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어느새 보통 때의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타스가···라고 한다.”
타스가의 눈빛은 흥미진진한 사냥감을 앞에 두었을 때처럼 반짝 거렸다. 눈앞의 소녀는 만개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내면에 지니고 있었다. 언뜻 보면 소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길고 날렵한 눈매와 냉정해 보이는 얇은 입술이 족장 야스카산과 상당히 흡사했다. 무엇보다 소녀의 검고 푸른 눈동자속의 불타오르는 영혼은 족장과 소녀가 같은 영혼의 편린을 이어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오빠도 잠들었으니 밖으로 나가도록 해요. 그동안 많이 괴로웠으니까 쉬도록 해줘야겠어요.”
“그러지.”
둘은 거실로 나왔다. 수라킨은 간만에 찾아온 제대로 된 손님을 위해 신경질을 내면서도 차를 준비했고, 타스가는 수라킨이 정성껏 우려낸 찻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노련한 전사답게 날렵하게 옆에 놓인 화분에 찻물을 버렸다. 물론 수라킨은 눈치 채지 못했다.
차를 마시지 못하게 되자 타스가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전사였다. 전사에게는 훌륭한 말솜씨는 필요하지 않은 덕목이었다.
수라킨 역시 타스가를 상대로는 별로 할 말이 없는 듯 얌전히 자신이 끓여낸 찻물을 맛보고 있었다. 차를 마시는 그녀의 표정은 그다지 좋아보이진 않았다.
“맛이···독특하네요.”
“조금 그렇군.”
둘은 동시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타스가는 속으로 아사신이 식사를 거의 하지 않은 것은 이것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번에는 침략이 잦군요.”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양을 지켜보던 수라킨이 말을 이었다.
“나도 그것이 의아하다. 점점 주기가 짧아지는 느낌이야.”
“누가 그러던데 이번에는 꽤 마을가까이까지 다가왔다던데요.”
“걱정마라. 족장과 전사들이 지켜줄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 오지 못한다.”
“기분이 안 좋아요. 그들은 정말 마라 꽃만을 노리고 오는 걸까요?”
“무슨 말이지?”
수라킨의 기다란 눈매가 가늘게 좁아졌다. 그녀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먹고살기 바쁜 가난한 계집애에 불과해요. 무지는 죄라더니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드나 봐요. 뭐라고 정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그들은 다른 것을 노리고 있다고 내 육감이 말하고 있어요.”
“육감······이라니. 너 설마 신성력을 이어받은 거냐?”
놀라서 소리치는 타스가에게 수라킨은 웃음을 터트렸다.
“신성력같이 거창한건 아니에요. 그냥 이건 여자의 느낌···이라고 해둬요.”
웃음은 쓸쓸한 미소로 이어졌다.
“그래요. 아무 근거 없는 그냥 느낌이에요. 신성력을 이어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신성력- 신의 피가 섞인 자들에게 선천적으로 나타나는 신성한 신의 권능을 말한다. 그것은 예지몽이나 차원을 탈피하는 능력. 기우를 다스리거나 사람의 마음까지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 능력의 가감에 따라 얼마나 신의 피에 가까운지 알 수 있었다.
 수백 년간 그런 대단한 신성능력자는 나타난 적이 없었다. 천여 년을 내려온 신의 피도 이제는 묽어질 때가 된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요.”
수라킨이 다시 말을 이었다.
“10년 전에 엄마를 끌고 간 건 당신이었나요?”
“······기억력이 좋구나.”
타스가는 왠지 아까 마시던 그 떨떠름한 차가 필요해지는 기분이었다.
“잘생긴 남자는 다 기억해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 수라킨은 다시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뱉어냈다. 소사린이 타주는 대로 똑같이 따라했는데 대체 왜 이럴까.
“사람들이 돌아오는군.”
타스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족장의 부하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원을 요청하러 온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말과 마을수비대를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뭐?”
타스가의 예상보다 사태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나도 가겠다.”
“안됩니다. 타스가. 족장은 당신이 신부의 곁에 꼭 붙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신부는 얌전하게 자신의 집에서 잠들어있다. 가겠다.”
“저는 족장의 말을 전할 뿐입니다. 그럼.”
그 말만 하고 그들은 말을 달려 가버렸다. 족장을 보낼 때와 마찬가지로 타스가는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불행한 타스가는 결국 얌전히 무기를 집어넣고 다시 수라킨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차라리 전장에서 바산족한테 죽도록 얻어맞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별로 할 말이 없는 두 사람은 아사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탈 때마다 실패하는 차를 마시면서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족장이 돌아온 것은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하늘에 별이 총총히 뜰 때 즈음에야 돌아온 그는 몇 군데 찰과상을 입었고, 오른쪽 어깨에서는 찢긴 듯한 상처가 나 있었다. 늘 거의 상처 없이 돌아오곤 했던 족장의 모습에 타스가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족장.”
“타스가. 수고가 많았다.”
야스카산은 불만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타스가를 보고 미소 지었다. 이 과묵한 사내한테 적이 쳐들어왔는데 안전한 마을에서 멀쩡한 사내놈을 보호하고 있어야 한다는 명령이 상당히 괴로웠음을 야스카산은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법 힘들었나 보군요.”
“그래. 침략 주기도 짧아지고, 아무래도 이상하다.”
족장의 예리한 푸른 눈이 진하고 깊어졌다.
“야스카산. 돌아왔구나.”
“아버지.”
야스카산의 아버지. 족장 바르바칸이 다가왔다.
“의논을 좀 해야겠구나. 이리 오너라 야스카산.”
그들은 함께 신전의 깊숙이 있는 신의 밀실로 들어갔다. 그곳은 신의 피가 흐르는 자들만을 위한 방으로 신의 피가 흐르지 않는 자는 아주 짧은 시간도 견딜 수 없었다.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르게 되고, 피가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얼굴에 피가 잔뜩 몰리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신성한 족장들만을 위한 완벽한 밀실이었다.
야스카산이 두꺼운 돌문을 움직여 닫자 적막한 고요가 그들을 덮쳤다.
“바산들이 알았나 봅니다.”
“신부를 새로 정한지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당연히 알았겠지.”
바르바칸는 곰 가죽이 깔린 의자에 깊숙이 앉았다.
 “아버지의 신부에게도 있었던 일입니까?”
야스카산의 질문에 바르바칸은 싱긋 웃었다.
 “그래. 그것들은 늘 신부를 정하면 그렇게 쳐들어온다. 그런다고 해서 자신들의 몫이 되지는 않는데 말이다.”
“이번에는 배후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배후세력?”
바르바칸의 눈썹이 휘어져 올라갔다.
“네. 그들이 타고 온 말은 이 근방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들을 짓밟아버린 이후 그들이 해오던 공격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습니다. 무기는 더욱 날카로웠고, 긴 창을 사용했습니다.”
“긴 창?”
“네. 우리가 말을 달려 짓밟으려 하자 창을 내세워 말의 진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더군요. 덕분에 조금 더 힘들었습니다.”
“네 말은 누군가 바산을 돕고 있다?”
“그 곳에서 팔시아대륙 인을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바르바칸도 조금 놀랐다.
“팔시아대륙 인들이 말이냐? 그들과 우리는 다시는 서로 상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모르지요. 그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는.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금발벽안의 남자가 그들의 족장과 함께 있었습니다.”
“흥미롭구나.”
바르바칸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팔시아 대륙인들을 끌어들였다면 내 직접 그것들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
바르바칸은 굳은 의지를 드러내 보이며, 자신의 건장한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비록 정식 족장의 자리는 야스카산에게 넘겨주었지만 그는 아직 건재했다. 시커먼 머리카락에는 단 한 올의 새치도 없었고 짙은 갈색피부는 세월이 세월의 흔적이 더해졌음에도 아직 젊고 건강했다. 야스카산에게서 터질 듯한 젊음과 지나치게 들끓는 혈기를 제하고 시간의 채찍 그들은 쌍둥이처럼 닮았을 것이다.
그들에게서 정확하게 틀린 점은 바르바칸의 짙푸른 눈동자는 검은색으로 보일만큼 어두웠고, 야스카산의 것은 냉랭하고 한없이 맑은 바다 빛이었다. 다만 그 바다는 그 안에 폭발하는 화산을 숨겨두고 있어 피를 탐할 때는 새파란 불꽃이 타오르곤 했다.
“나도 신부의 제도를 좋아하지 않지만 야스카산. 그렇다고 해서 그 존재는 감히 쫓겨난 것들이 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버지.”
“신부를 안은 날···느꼈느냐?”
바르바칸이 무엇을 묻는지 야스카산을 알고 있었다.
신부를 맞이하던 날-.
황금의자에 앉는 순간. 신관이 이마에 그려준 신어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느낌. 시야가 더욱 선명해지고 머리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코는 피를 찾아 벌름거리고, 마음은 들뜨며 마라 꽃이 들어간 술은 지독하게 몸을 데웠다.
제물의 심장을 갈랐을 때 봐버린 신부의 얼굴.
내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
-그래. 네가 거기에 있었구나.-
낮은 웃음소리가 자신의 속에서 울려 퍼졌다.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마라 꽃이 안겨주는 환상에 취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몸은 말하고 있었다.
저것을 달라고-
저것을 원한다고-
저기 너를 위해- 너만을 위해 준비된 신부에게 달려가자고-
당장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듯한 육욕의 늪. 냉정한척 하고 있었지만 신부의 얼굴을 본 순간 그 여린 몸을 껴안고 뒹굴고 싶었다. 평소의 자신은 어디 갔는지, 어떤 여자와 해도 상체와 하체가 완벽하게 뜨거워지지 못했던 자신은 어디 갔는지 스스로도 어이없을 만큼 발정해 버렸다.
자신의 내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는 절대 명령. 신부를 찾아 몸을 열라고 명령하는 목소리.
 그래서 힘없이 굴복했다. 그것은 떨떠름하면서도, 기분 좋은 복종이었다.
예전에 아사신을 본 적이 있었다. 얼마나 못났기에 신부의 아들로 태어나고도 내쳐졌는지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속으로 비웃었었다.
 여자들같이 비쩍 마른 몸에 건강하지 못한 피부. 자신을 볼 때마다 놀란 토끼같이 움츠러드는 눈동자. 무엇하나 부족의 남자로서 사내로서 부족하기 그지없는 녀석이었다.
그러나 그 몸······.
자신이 비웃었던 그 몸은 부족함이 없었다.
남자를 안아본 경험은 있었다. 남자들은 강한 전사와 교합하면 그 혼의 일부분을 나눌 수 있다고 믿었다. 야스카산은 그들의 족장이었고, 최강의 전사였다. 원한다면 누구와도 잘 수 있었다.
 그는 여름에는 잘 달아오르지 않는 남자를 안았고 겨울에는 푹신하고 풍만한 여자를 안았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자신의 머리까지 지배하진 못했다.
아사신은 달랐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명령대로 꾸물꾸물 손가를 옷으로 가져가는 그 짧은 시간도 참지 못했다. 막 살육을 마친 몸은 아사신의 육체를 보자 기뻐서 침을 흘렸다. 손가락을 쑤셔 넣고, 돌리고, 괴롭혔다.
입으로는 재미있다는 듯 협박하고 조롱하고 있었지만 손가락은 다가올 향락에 대한 기대감으로 떨리고 있었다. 아무와도 몸을 섞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자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기뻐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부어터진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밀어붙이고 그 안에 강제로 혀를 집어넣었다. 그 곳에서 흐르는 타액은 마치 마라꽃잎을 통으로 부어서 만든 듯 향기로웠다. 벌벌 떨고 있는 아사신의 사타구니를 그러쥐자 여린 몸이 움찔거렸다. 그 느낌이 참을 수 없이 기분이 좋았다.
점점 마음이 들뜨고 성기에 힘이 들어갔다. 그를 상대로는 제대로 세울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다리 사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울고 있는 아사신의 엉덩이를 한 번에 꿰뚫는 자신이 있었다.
경직하며 도망가려는 그 몸을 자신의 품 안에 가두고,
앞으로 뒤로 점점 빠르게 그 속에 자신을 집어넣으며 이빨로 목 뒤를 물어뜯었었다.
 순수한 쾌감으로 머릿속은 완전히 비워졌고 순결한 신부를 마구잡이로 누르고 아무도 만진 적 없는 몸을 유린했다. 고환 두 쪽까지 그 속에 처넣을 듯 엉덩이를 벌렸다. 구슬처럼 떨어지는 눈물까지도 홀린 듯이 핥아 먹었다. 이복동생에게 당한다는 그 같잖은 자존심을 깨부수는 데에는 희열까지 느껴졌다. 음탕한 말을 귓가에 흘리자 귀를 막는 시늉을 하는 것도 즐거웠다. 더욱 빠르게 박아대자 너무도 손쉽게 귓가를 배회하던 손가락이 미끄러져 내렸다.
마침내 그 극락의 쾌감을 선사하는 아사신의 동굴 속에 정액을 힘차게 분출하자마자 아사신이 기절해 버린것은 정말로 아쉬웠다. 그리고 동시에 당황했다.
아직 자신의 것은 더운김을 내뿜으며 저기에 다시 자신을 묻어달라며 화를 내고 있었다. 평상시의 자신이라면 분명 상대가 기절했던 말던 깨워서 다시 그 안을 박아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창백하게 내리깐 속눈썹에 아롱진 물방울 때문이었을까.
정사를 나누면서 물어 뜯겨 터질 대로 터진 입술 때문이었을까.
두 볼에 길게 나있는 것은 눈물자국.

왠지 다시 안을 맛이 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 대기하고 있던 신녀들에게 아사신을 처리하라 지시하고 그 중하나를 들쳐안고, 비어있는 방으로 들어가 또다시 미친듯이 해버렸다. 정말 자신이 짐승인지 인간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로 해댔다.
그러나 아까의 쾌감은 다시 찾아와주지 않았다. 미처 풀지못한 욕정에 의해 물건은 세웠어도, 자신이 묻힐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듯한 성기는 아까 맛 본 아사신의 육체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신녀를 안을수록 화가 났고, 자꾸만 비교되는 육체에 기분이 나빠졌었다.
 결국 지쳐 기절하다시피 잠든 신녀를 두고 방으로 나왔을때는 이미 아사신은 돌아간 후였다. 그는 정신이 들자마자 집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던 모양이었다.
결론적으로 그 결심은 잘 한 것이었다. 야스카산은 그가 이곳에 아직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 기절을 했던 말았던 간에 다시 해댔을 거니까-

생각에 빠져있는 야스카산에게 바르바칸이 말했다.
“그래. 신부를 안은 그날. 나 역시 느꼈다. 그분의 강림을···.”
“목소리··· 내부에서 웅웅거리는 목소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다. 신부는 신에게 예비된 사람. 그것이 남자건 여자건 극상의 쾌락을 선사한다. 신의 피가 흐르는 우리에게 받쳐지기 위해 처음부터 태어난 사람. 신은 그날 우리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다시 와 신부와 살을 섞는 것이다.”
“그랬군요.”
야스카산은 기분이 나빴다. 반쯤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신이고 신부는 그를 위해 마련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육체를 사용해서 정사를 가진다는 것은 기분이 나빴다.
 하물며 그 육체를 공용으로 사용했음에야-
야스카산의 미간에 미미한 주름이 생기자 바르바칸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야스카산?”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저 이야기 하십시오.”
“그래.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추이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구나. 신부를 좀 더 보호해야 겠다. 적어도 후계자를 낳아줄 때까지는 빼앗겨서는 곤란하다.”
“이번에는 타스가를 붙여두었습니다. 거처를 옮기도록 지시할까요?”
“흐음- 타스가라면 믿을 만 하지. 거처는 옮기도록 하는게 좋겠다. 궁과 가까운 곳에 훌륭한 집을 마련해라. 우리가 자주 확인해 볼 수 있는 곳이 좋겠다.”
“알겠습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그들은 밀실을 나왔다.

 “아사신······.”
잠에서 깨어난 아사신은 자신이 꿈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했다. 눈 앞에는 그동안 눈에띄게 수척해진 소사린이 앉아 있었다.
“소사린.”
아사신은 미소지었다. 이제는 어느정도 마음의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떠나보낼 준비도-

“네가 앓는동안··· 나도 많이 아팠어.”
“···미안.”
“네 잘못이 아니야. 사과하지 마.”
“소사린···.”
그녀는 언제나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하다. 따스한 그녀의 손을 잡고 있으려니 그 날 밤 자신의 손을 우악스럽게 그머쥐던 그 크고 무자비한 손의 기억마저 희미해지는 것만 같다.
“소사린. 이건······.”
아사신은 눈을 부릅떴다. 그믐달처럼 미소짓는 그녀의 눈가에 나있는것은 분명한 멍자국- 희미해져서 그 흔적은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았지만, 분명 그녀의 하얀 피부가 푸르게 변색되어 있었다.
자신의 손을 피해 급히 머리카락으로 가려보려 했지만 아사신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미소지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털어 놓았다.
“아버지가··· 괜찮아. 기분이 좀 안좋으셨나봐.”
“소사린······.”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 그녀의 욕심많은 아비가 그녀를 폭행한 모양이다.
 파혼당한 여자는 값어치가 떨어진다. 그녀는 남자신부와 파혼당했고 그런 그녀를 사람들은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아비가 많은 지참금을 쥐어주고 그녀를 좋은가문에 보낼 수도 있겠지만 아사신이 격어본 바로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평판이 엉망이 된 지금, 옳거니 하고 오히려 지참금을 받아와야 하는 남자한테 보내버릴지도 모른다. 남의 이목이 많으니까 아마 지금의 호기심의 눈길이 어느정도 가신후의 일이겠지만 말이다.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의 심장이 욱씬- 하고 아파온다. 자신은 이래나 저래나 소사린에게 폐만 끼치는 존재인 것이다.
 “미안···미안해··· 소사린.”
“자꾸 그러면 나 간다? 사과하지 말라니깐~.”
삐진듯한 말을 하지만 어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너무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위로하듯 속삭여왔다.
아아- 그녀와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아직도 자신은 이렇게 그녀를 원하고 있는데-
깨어져버린 꿈에 대한 미련 따위, 이제는 접어야 하는데도 자신은 여전히 허망하게 산산 조각난 과거의 거울을 끼워 맞춰 보며 상상만 하고 있다.
-이래선 안 돼. 힘을 내야지.-
아사신은 소사린 몰래 눈물을 닦았다.
“뭐 좀 먹을래? 가벼운 야채 죽을 끓여왔어.”
아사신은 생긋 웃어보였다.
“그래. 네가 끓인 거라니 먹어야겠다. 수라킨이 만든 건 솔직히 먹기 괴로웠거든.”
“후후- 그건 그렇지?”
“사실 그래.”
“다들었다.”
아사신과 소사린이 연출하던 밝고 화사한 분위기는 부숴진 문짝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고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내는 수라킨과 타스가 때문에 깨어졌다. 수라킨이 자신의 음식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이 강한지 -그녀는 절대 자신의 음식을 모독한 사람을 살려두지 않는다.- 아는 아사신은 올라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입꼬리를 억지로 밀어 올렸다.
“어머 수라킨~ 식사는 멀었니?”
“늦었어.”
소사린의 노력은 씨도 안먹혔다.
“타스가. 아직 안갔어요?”
아사신이 얼빠진 목소리로 질문을 한 것은 한참 뒤의 이야기였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식탁 앞에서 다들 말이 없었다.
꿀을 바른 빵에 딱 먹기 좋게 따끈하게 데워진 염소젖이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먹는 사람이 없었다.
“족장이··· 여기 계속 있으라고 그랬다고요?”
“네.”
지나치게 간결명료하다.
“왜요. 오빠가 도망이라도 칠까봐서요?”
수라킨은 빈정거렸고.
“족장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지참금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신부를 데려가 놓고선 짐꾼하나 던져주고 끝내는 걸로 봐선···.”
짐꾼취급하는 소사린이었다.
그 가운데서 타스가는 무미건조한 표정 뒤로 식은땀 한 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도 이런것 따위 원하지 않았다. 드디어 족장이 돌아와서 해방이라고 생각했는데 밤에 다시 자신을 부른 족장과 전족장은 자신에게 계속 야스카산의 집에서 죽치고 있으라고 말했다.
 기가 막혀 항변하려는 -그 속에는 절대 예의 그 대화 없이 마시는 썩은 찻물을 다시는 들이킬 수 없다는 굳은 의지가 표현되어 있었다.- 타스가를 너만 믿는다. 라는 한 마디로 간단하게 제압한 족장과 전 족장이었다.
“문은··· 제가 고쳐놓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수라킨이 뾰족하게 소리쳤다. 그나마 이 다 허물어져가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단단하던 문짝이었다. 이 남자는 첫만남에선 엄마를 질질 끌고 가더니, 두 번째 만남에선 문짝을 부셔놓았다. 별로 오래 보고 싶지 않은 남자였지만, 그녀로서도 족장의 명을 거역할 순 없는 일이었고 그 화풀이는 고스란히 불행한 타스가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왠지 닮은 듯한 세 개의 얼굴이 동시에 턱에 손을 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며 한마디씩 하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공포스러웠다.
-정말로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지참금을 지불하라고 말하겠어!-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며 굳게 결심하는 타스가였다.


*                *                *


맑고 청아한 가을하늘이 이어졌다. 따사로운 햇살과 부드러운 미풍. 밭에는 보리와 밀이 수확되고 있었고, 사냥터에서는 여름내 잘 먹어 토실토실 살이 오른 짐승들이 뛰어 놀았다. 혼자 사는 여자들도 작은 새나 토끼 같은 비교적 손쉬운 짐승들의 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풍요로운 계절이 시작되었지만 이 아름다운 계절은 곧 끝이 난다. 겨울이 오기 전에 얼른 과일과 고기를 말려서 창고를 채워두고, 보리를 사들여야 한다. 겨울이 오래되면 나중에는 돈이 있어도 먹거리를 살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사신과 수라킨의 집에서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수라킨은 왜 타스가가 문짝을 고쳐놓자 마자, 강제 이사를 가야하는 거냐고 화를 냈고 타스가도 뒤에서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수라킨에게 얼마나 쪼였는지 그는 다음날이 되자마자 적당한 나무를 골라 직접 도끼질을 해서 썰고 깎고 문양까지 조각해서 이틀 만에 개선장국처럼 문짝을 들고 돌아왔던 것이다.
 타스가는 직접 문을 해 넣고는 마치 사냥터에서 맨손으로 곰이라도 때려잡은 듯한 으쓱함을 보여, 수라킨에게 자기가 부순거 자기가 매꾸는게 당연한거지! 라는 말을 들어야만 했다. 그래도 그의 어딘가 모르게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은 저녁내내 가시질 않다가 잠시 족장에게 다녀와서 이사하라는 명을 전달할때는 아주 기가 팍 죽어 있었다.
하달받은 집은 족장의 신궁과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는 훌륭한 집이었다. 전에 살던 비바람이 치는날은 고스란히 그 추위를 느껴야만 했던 집에 비하면, 아니 굳이 그 집과 비교하지 않아도 몹시 잘 지어진 훌륭한 집이었다. 회칠한 안벽에는 장인이 새겨 넣은 아름다운 문양도 그려져 있었고 백향목의 목재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아사신은 고집을 부렸다. 내가 왜 그런 집으로 이사 가야 하느냐고, 타스가를 통해 싫다는 의지표명을 분명히 했다. 소사린의 집과 예전보다 가까워진다는 점 외에는 좋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전족장과 그의 아내들, 그 기억하기 싫은 첫날밤을 가져간 야스카산이 가까워지는 것은 절대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평소에도 그 길을 지나갈 일이 있으면 뺑 둘러서 돌아가곤 했었다. 문짝이 떨어진 집에 사는 한이 있어도 그리로는 이사 가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아사신이 고집을 부리며 짐도 싸지 않자, 타스가는 결국 설득에 실패하고 족장에게 다시 가서 아사신의 뜻을 전해야만 했다. 아사신이 고집을 피운다는 말을 전해들은 야스카산은 인상을 쓰고 다시 명했다.
“족장의 명령이니 복종하라고 일러라.”
타스가는 다시 돌아와 야스카산의 말을 그대로 전했으나 아사신은 고집불통이었다.
 또다시 중간에서 난처해진 타스가가 야스카산에게 돌아가 아사신의 의사를 전하자 이번에는 직접 야스카산이 아사신을 찾아갔다. 바산족의 일만이 아니라 신부가 이런 마을 외곽의 허름한 곳에서 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는 울창한 숲이 햇빛을 가리고 골목골목 혼자 사는 여자나 남자들이 즐비해있는 허름한 거리를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보통 신부는 신궁에서 족장과 함께 살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면 그 근처에 집을 구해 산다. 신부는 후계자를 낳아줄 중요한 몸이자, 족장의 아내들보다 서열이 높아 대외적으로 부족의 안주인 노릇을 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이런 곳에 마치 버려진 것처럼 외따로 떨어져 산다는 것은 야스카산으로서는 자신의 명성을 실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야스카산이 그 집에 도착했을 때 아사신은 조용히 식탁에 앉아서 직접 차를 끓이고 있었다.
 “오셨군요. 족장.”
그 속이야 어떻든, 천연덕스럽게 야스카산을 맞이하는 아사신이었다.
“나는 이사를 가라고 일렀을 텐데.”
“싫습니다.”
야스카산이 음산하게 노려보며 말하자, 아사신은 생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평소였으면 생각도 못할 일이었지만, 이곳은 자신의 집이었고, 아사신으로서도 어느 정도 악에 받쳐 있었다.
둘의 눈동자가 공중에서 불꽃을 튀겼다. 냉정하고 싸늘한 야스카산의 새파란 눈동자와 아사신의 회색 눈동자는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노려볼 뿐이었다. 지켜보던 타스가는 슬그머니 뒤로 엉덩이를 내빼다 수라킨에게 들켜 머쓱해졌다.
 “이 집을 부숴줄까?”
“그러시던가요. 위대한 족장께서 하시고자 하는데, 제가 반대한다고 집을 안부수시겠습니까?”
명백한 비아냥이었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말이 많아졌구나. 아사신··· 기세도 아주 좋아졌고···.”
인상을 쓰고 있던 야스카산은 조금 웃었다. 초야를 치르던 때의 그가 벌벌 떨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 쥐던 모습이 지금 다소곳하게 의자에 앉아 비아냥대는 모습에 겹쳐보였다.
야스카산이 설핏 웃으며 턱을 쓰다듬자, 아사신은 그가 말하는 저번에 봤을 때- 가 무엇을 말하는지 기억해내고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그때는 서로가 정신이 없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아사신은 기가 죽지는 않았다. 비록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 정신이 없었지. 특히나는 그랬지 아사신. 네 몸속에 들어간 뒤로는 기억이 드문드문 끊길 만큼 기분이 좋았거든. 특히나······.”
야스카산이 갑자기 아사신의 얼굴을 잡아 위로 치켜들었다. 흡뜨인 회색눈동자위의 새까만 동공이 퍼뜩 놀라 크게 확장되며 그 속에 야스카산의 얼굴이 담겼다.
“네 입술 말이다. 지금은 이렇게 미운 소리를 내뱉지만, 혀를 섞을때는 저도 모르게 내 혀에 반응해서 혀를 돌리더군. 얼마나 달콤했던지 그렇게 맛이 좋은 줄 알았더라면 그 전에 덮쳐서 맛보는 건데 하고 후회했을 정도였다.”
아사신은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수라킨이 듣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야스카산은 별로 힘주지 않고 아사신의 저항을 관망하다, 이번에는 허리를 붙잡아 왔다. 아사신이 헉 하고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네 허리···말이지. 알고 있나? 너는 허리와 등줄기가 약하더구나. 내가 정신없이 네 속에 박아 넣다가 여기···를 만지면 말이지.”
야스카산의 커다란 손이 아사신의 허리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사신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 처럼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네 그것은 아프다고 제발 그만해달라고 외치면서도 조금씩 기운을 얻어서 일어나더군. 알고 있었어? 자신의 약점을······.”
“그만 하십시오.”
“왜? 자신의 몸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으니 알려주려는 것뿐인데.”
아사신이 고개를 들자 문 뒤에서 타스가와 수라킨이 벌게진 얼굴로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황급히 뒤로 숨는 것이 보였다.
“미성년자 앞에서 그런 음담패설을 늘어놓으실 작정이십니까?”
“물론. 네가 계속해서 고집을 부린다면, 광장 한 가운데서 범해주지.”
아사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왜 이제와서 챙기는 척을 하는 겁니까? 언제부터 당신네들한테 신부가 그리 중요했습니까? 어머니는 그렇게 쉽게 내쳐놓고서 이제는 중요한척 챙겨주니 고맙기 그지없군요.”
“당연하다. 그녀는 제대로 된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했다.”
아사신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치뜨였다.
제대로 된 후계자-
자신이 제대로 된 족장의 후계자는 못 된다는 것을 아사신도 이미 들을 만큼 들어서 알고 있었다. 철이 들기 전부터 사람들은 자신만 보면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던가.
알고 있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신부의 아들이라는 같잖은 자존심 따위 한조각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며 애써 태연한 척 해왔다. 그렇다고 한들 아프지 않은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 말을 이 남자한테서만은 듣고싶지 않았다.
아사신의 청명한 회색눈동자에 촉촉한 물기가 스미기 시작했다.
 “결정해라. 이 집을 부수고 그래도 가지 않겠다면 마을에서 네 몸속에 박아줄테니 어디 계속 고집을 피워 보려무나.”
냉소를 지으며 싸늘하게 협박하는 이 남자가 너무도 미웠다.
알고 있다. 어차피 족장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거.. 아무 힘도없는 주제에 이렇게 고집부려봐야 결국 족장의 뜻대로 된다는거 따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힘껏 반항했으나 결국 그렇게 내쳐지는 것을 보지 않았더냐-
그래도 한번 고집을 부려보고 싶었다.
 추억이랄것 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이 집은 열살때부터 자신이 보살펴 온 집이었다. 버려져서 곰팡이냄세가 풀풀날리던 이 집을 반쯤 정신이 나간 엄마와 구석구석 닦고, 쓸어서 이만큼 만들어 놓았다. 하나도 좋은 일 따위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강제로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만해 오빠. 우리 이사가자.”
어느새 다가온 수라킨이 떨리는 아사신의 얼굴을 자신의 품에 묻었다.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가 자신의 이복오라비인 야스카산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녀에게도 야스카산은 그닥 탐탁지 않은 존재였다.
 야스카산 역시 자신의 이복여동생을 냉막하게 노려보았다. 투지가 들끓는 눈동자의··· 소년 같은 소녀의 기백하나만큼은 인정해줄 만 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아버지의 눈동자를 빼다 박은 듯 했다.
아마도 그녀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자신은 족장이 되지 못했으리라- 라고 야스카산은 생각했다.

잠시 후 아사신이 수라킨의 품에서 얼굴을 땠을 때는 이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침착하게 야스카산을 향해 예를 표한 후 말했다.
“알겠습니다 족장. 족장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오늘 내로 모든 짐을 챙겨 이사할 테니, 족장께서는 더 이상 저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선을 긋고 있군-
야스카산은 생각했다.
그 큰 회색 눈동자에 이슬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초야의 그 뜨거웠던 순간이 화끈하게 되살아나버려서 조금 즐거워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수라킨이 잠시 막아주는 새 어느덧 냉랭하기 짝이 없는 재미없는 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왠지 자꾸 눈썹이 치켜올라가는게 인상이 구겨졌다. 자신의 뜻대로 이사를 나간다고 하는데 왜 기분이 더 상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았다. 다음부터는 이따위 시시한 일로 왈가왈부하게 하지 마라.”
야스카산은 그렇게 말하고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음지에서 슬금슬금 말라빠진 여자들이 기어 나오는 것을 보자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집으로 돌아온 야스카산은 자꾸만 늘어만 가는 짜증을 상쇄시키기 위해, 사냥을 떠날 테니 채비를 하라고 일렀다.
 그의 기분이 몹시 나쁜 것을 눈치 챈 전사들과 시종들은 급히 그의 활과 칼을 준비하고 활동하기 편한 간소한 복장으로 그를 갈아입혀 주었다.
“오늘은 멧돼지를 잡겠다.”
“알겠습니다. 족장.”
충실한 그의 전사들은 절대 거역이라는 말을 모른다. 아니 전사들뿐만 아니라 비단 그의 부족 사람들이라면 그에게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무리한 말을 한다 해도, 아무리 타당하지 않은 명령을 내린다 해도 그들은 인상을 조금 쓰고, 그 의도를 조심스레 물어보고 만족스러울만한 답이 돌아가지 않는다 해도 자신을 믿고 그것에 따라줄 것이다.
 그들은 그만큼 자신을 믿고 따라준다. 그들의 족장은 늘 자신들을 지켜주었고, 번성시켰고,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믿음은 천 년 전부터 뿌리내려온 것이었다. 족장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아사신은 이사를 가라는 아주 손쉬운 명령을 거부했다. 자신이 다가간 것만으로도 어깨를 움츠리고 무서워하는 기색을 역력히 보였으면서도 그 입술은 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신기해서일까 아니면 특별한 이유 없이 불복해서일까, 자꾸만 신경이 거슬린다. 그의 작고 누추한 오두막집으로 계속 시선이 향해버린다.
 “기분이 안 좋으니 얼른 떠나도록 하자.”
막 그들이 숲을 향해 떠나려는 순간, 야스카산은 아버지 바르바칸이 그를 급히 찾는다고 신녀가 전한 소식에 사냥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신의 밀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밀실에서?”
뭔가 상당히 중요한 일인가 보다라고 야스카산은 생각했다.
 밀실은 족장이 그의 직계의 피를 이은 사람들과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할 때만 이용되는 장소였다.
야스카산은 서둘러 밀실로 향했다. 두꺼운 돌문을 열어젖히자 그곳에 바르바칸이 의자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너라. 야스카산.”
“하실 말씀은 무엇입니까 아버지?”
분명 중요한 일때문에 자신을 불렀을테지만, 사냥 계획이 허위로 돌아간 지금 야스카산은 기분이 상당히 나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예전에 네가 바산들과 싸울때 금발벽안의 남자를 봤다고 했었지?”
“네. 보았습니다.”
분명 바산이 침략해왔을때, 그들의 족장과 어깨를 나란히 한 남자를 보았었다. 검은 두건을 눌러쓰고 있었지만 이질적인 새하얀 피부와 금색 머리카락, 이 근방에서는 볼 수 없는 하늘처럼 새파란 눈동자는 야스카산의 예리한 두눈을 비켜가지 못했다.
“그들이 연락해왔다.”
“예?”
야스카산은 조금 놀랐다.
“그들은 우리의 짐작대로 팔시아 대륙인이 맞았다. 바산을 도운것도 순순히 인정하더군. 그들이 바산을 도운것은 우리의 마라꽃 때문이었다.”
“하-!”
야스카산의 눈동자가 짙푸르게 타올랐다. 마라꽃은 그들부족만을 위해 신이 내려준 축복의 꽃. 다른부족인들이 노리는것조차 웃기고 황당한 일이거늘, 감히 팔시아 대륙놈들이 그 꽃을 노리다니. 천부당 만부당한 말이었다.
“그놈을 잡아다 목을치죠.”
“야스카산. 나는 일단 그들과 밤에 만나기로 결정했다.”
“팔시아 대륙인들과 왜 만나려고 하십니까. 이야기를 들을 것도 없습니다.”
바르바칸의 눈이 나무라듯이 야스카산을 쳐다보았다.
“너는 너무 젊구나. 야스카산. 아무리 열아홉 살이라고 해도 너무 혈기왕성하다. 좀 머리를 식히거라. 일단 이야기를 들어본 다음에 목을 쳐도 늦지 않다.”
아버지의 질책에 흥분으로 이글거리던 야스카산의 눈동자가 평상시의 차가운 색으로 가라앉았다. 어릴 때부터 후계자로 자라 다른 동년배의 사내들보다 훨씬 훌륭한 몸과 냉정한 판단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자신이지만, 가끔 이렇게 아버지의 질타를 들으면 다시 열아홉 먹은 남자애가 돼버리곤 한다.
 자신이 아직 멀었음을 그는 인정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오늘 밤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야스카산이 금세 냉정을 되찾자, 바르바칸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 나이대의 남자들이란 자신의 잘못과 과오를 스스로 인정하기보다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것을 낫다고 생각하는 법이다. 하지만 야스카산은 달랐다. 그는 늘 자신을 돌이켜 보고, 아버지인 자신과 비교해서 모자라는 점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남자였다. 몇 년 만 더 지나면 그는 자신의 조언 따위는 필요 없는 그야말로 훌륭한 신의 대변인으로 자라날 것이다!
-역시 야스카산을 족장으로 세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약해빠진 신부의 아들 따위. 그렇게 쫓아내고 평생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대로만 태어났더라면 야스카산 대신 그놈이 족장이 되었겠지만, 그놈은 태어날 때부터 약해빠진 놈이었다. 그 등에 검은 날개가 돋아있지 않았다면 자신의 핏줄을 이었노라 는 사실까지도 부인하고픈 놈이었다.
 그에 반해 야스카산은 어떠한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는듯한 그 늠름한 자태. 아직은 자신과 족장의 직분을 나누고 있었지만 이제 슬슬 손을 떼도 좋겠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열여섯 살에 성인식을 치루고, 열일곱 살에 너무도 간단히 전사의 의식을 통과했다. 의식을 치룰 생각도 하지 않는 저 아사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바르바칸은 만족스런 웃음을 만면에 띠고 말했다.
“좋다. 오늘 밤 나와 동행하자.”
그리고 그들은 그날의 회의를 마치고 밀실을 빠져나왔다.

밤-
그들의 주신 태양이 물러가고, 달의 여신이 그녀의 긴 옷자락으로 세상을 덮어나갔다.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속이었지만, 야스카산과 바르바칸의 뛰어난 시력은 땅위를 기어가는 네발달린 짐승과, 하늘위를 날아가는 날짐승의 작은 움직임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마을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그들 태양족과 바산족이 만나는 경계의 숲. 세명의 뛰어난 전사를 대동하고 있었지만 무척 위험을 감행한 외출이었다.
“여깁니다.”
그들은 숲의 어두침침한 그늘속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오는 것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남자는 새까만 두건으로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남자는 손짓으로 그들을 불러들였고, 야스카산은 호위하는 자신의 전사들에게 여기서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전사들은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뒤에 남았다.
남자를 따라 조금 더 깊숙하게 숲 속으로 들어가서야 주변에는 그들 셋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게 되었고, 그것을 확인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를 왜 부른것이냐. 팔시아 대륙의 남자.”
바르바칸이 말했다.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소르데라 왕국의 힐레멘사 트루가 라고 합니다. 힐레멘이라고 부르십시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던 우리에겐 상관이 없다. 너는 팔시아 대륙의 사람. 너의 이야기가 영양가가 없다고 생각되면 너의 목을 칠 것이다.”
자신을 힐레멘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빙긋 웃었다. 선정적인 붉은 입술이 수려한 곡선을 그렸다.
“그건 곤란합니다. 저도 목숨은 하나라서 말이지요. 제 동료들이 사방에 포진해 있답니다.”
힐레멘이 손짓을 하자 저 멀리서 반짝하고 차가운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화살촉이 반사된 빛이라는 것을 알아챈 야스카산이 말했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자. 말해라 우리를 불러낸 이유를.”
“아시다시피, 우리가 바산족을 도와준 이유는 마라꽃잎 때문이었습니다. 마라꽃잎이 팔시아 대륙에 수출되고 있다는 건 알고 계셨습니까?”
“···전혀 몰랐다.”
“네. 태양족에서 타 부족에게 수출하는 그 얼마 안 되는 양 중에서 또 아주 약간의 물건이 팔시아 대륙으로 팔려나갑니다. 꽃 한 송이 당 금 한 덩어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정말 입이 떡 벌어지게 비싸게 팔리죠. 잘 아시겠지만 마라꽃잎은 효능이 상당히 뛰어납니다. 팔시아 대륙에도 그런 비슷한 효과를 가진 식물들이 제배 되긴 하지만 그 무엇도 마라꽃잎을 능가하진 못합니다. 정말 훌륭한 식물이더군요. 연구를 해보려고 해도 그 꽃은 이 땅이 아니면 자라지 않는다면서요?”
바르바칸은 대충 돌아가는 이야기를 알 것 같았다.
마라꽃은 탐이 나지만, 그것 때문에 전쟁을 하자니 넘어야할 난관도 너무 많고, 명분도 부족하다. 뭐니뭐니해도 두 대륙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넘어갈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공략하기 힘이드니, 사이가 좋지않은 바산족을 이용해서 좀 더 손쉽게 마라꽃을 가져갈 생각이었나 보다.
 “그래서 바산을 도와주었느냐?”
“네. 그렇습니다. 우리 왕의 명령으로 이 대륙으로 들어온지는 저희도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왕?”
야스카산이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아-! 쉽게말해 부족을 여러개 합친곳의 족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기능은 이 함마 대륙의 부족들과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세금을 내고, 왕은 그의 아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죠. 정복 전쟁도 하고 말입니다.”
“네 이야기는 흥미롭구나.”
바르바칸은 턱을 쓰다듬었다. 무언가 생각할때 턱을 쓰다듬는 것은 바르바칸과 야스카산의 공통된 버릇이었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직접 우리와 마라꽃을 거래하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우리 왕은 그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그 꽃을 사들이는데 왕실의 재정이 바닥나버릴 테니까요.”
“우리는 굳이 너희와 거래하지 않아도 부유하다. 너희는 우리에게 돈말고 무엇을 줄 수 있느냐?”
야스카산의 질문에 힐레멘은 또다시 방긋 웃었다. 이 남자는 아무래도 웃는 것이 습관인 듯 했다.
“저희의 책과 저희의 문화를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살펴본 바로는 함마 대륙과 팔시아 대륙이 서로를 적대시 하는 동안 두 대륙은 확연히 다르게 성장했습니다. 함마 대륙인들은 여전히 신을 충실히 섬기고, 자연과 친화적으로 지내왔으며, 다른 부족들과 거의 다투지도 않더군요. 반면 팔시아 대륙인들은 조금 다르게 발전했습니다. 원래 우리 두 대륙이 사이가 틀어진 것은 고대의 팔시아 대륙인들이 함마 대륙인들의 땅을 통째로 넘봤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신을 모시고 같은 문화를 가졌던 우리들이 이렇게 갈라지게 된 것은 그 때문이죠. 팔시아 대륙인들은 여전히 그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서로 침략하고 공격하고 짓밟으면서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음침하지요. 전쟁과 시련이 자꾸만 닥쳐올수록 우리는 발전했습니다. 아마 문화적으로는 우리 팔시아 대륙이 좀 더 앞선다고 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다음 말을 위해 숨을 골랐다.
“위대한 두 족장이시여. 이 평화가 언제까지 갈 것 같습니까? 우리 두 대륙이 서로를 침범하지 말자고 약속한 것은 이미 수백 년 전의 이야기 입니다. 팔시아 대륙인들은 욕심이 많습니다. 함마 대륙인들의 본성이 남의 땅을 짓밟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가는 민족성을 띄지만, 팔시아 대륙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적을 알아야 적에 대해 대비하는 법입니다. 문화의 교류는 다음세대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는 달변가였다. 야스카산과 바르바칸은 점점 마음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너는 너희의 왕이 상당히 신임하는 자겠구나. 아름다운 외모에 말에 힘이 실렸으니 마음을 움직인다.”
“감사합니다.”
힐레멘은 오른손을 심장에 대는 족장에 대한 예를 보이며 칭찬에 겸손하게 대응했다.
“너는 우리에게 너희의 문화를 전파하고 우리는 너희에게 우리의 마라 꽃을 수출한다니 그다지 나쁘지 않은 조건이구나.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먼 훗날 너희 팔시아 대륙의 후손들이 이 땅을 침범하려 들 때, 네가 건넨 정보를 초석으로 우리가 그들을 대비할 수 있게 되어있다면 너는 결국 미래의 후손들을 배신하게 되는 꼴이지 않느냐. 전혀 죄책감은 없느냐?”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또 다른 방법을 찾겠지요.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이고, 나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관심 있는 것은 우리왕의 명령을 제가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느냐는 것뿐입니다.”
바르바칸은 힐레멘의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다 호탕하게 웃었다.
“네 동료들을 불러라. 너희는 우리와 함께 돌아간다. 너희를 손님으로서 모실 것이다.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상 목숨을 위협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위대하신 족장. 우리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힐레멘은 두건을 벗으며 기쁘게 웃어보였다. 선천적으로 옅은 갈색피부를 띄는 함마 대륙인들과는 태생부터가 틀린 새하얀 피부가 밤의 어둠속에서도 너무도 잘 보였다.
“내려가자. 나의 전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힐레멘과 그의 동료들이 짐을 챙겨서 숲에서 걸어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전사들이 움찔하고 놀랐으나, 곧 뒤이어 그들의 족장이 나오자 침착하게 예를 표했다.
그들을 앞세워 마을로 돌아가며 야스카산이 작게 말했다.
“만약 그가 거짓말을 한다거나 우리가 원하는 만큼 쓸모 있지 않다면 어쩌겠습니까?”
바르바칸이 대답했다.
“사지를 말에 묶어 조각조각 찢어죽이겠다. 그들의 왕에게는 저 빙글빙글 웃어대는 머리를 보내고, 심장은 우리 신의 제단에 바칠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바르바칸의 얼굴은 왕년의 위대한 족장의 냉혹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2



마을은 온통 술렁이고 있었다.
 어느날 아침 일어났더니 너무도 당당하게 팔시아 대륙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인들은 깜짝 놀라 들고있던 농기구를 떨어트리고, 성격급한 남자들은 칼을 들고 달려나가기도 했다.
 “멈추어라. 그는 내가 데리고 온 우리의 손님이다. 경거망동 하지말고 그를 손님으로 대접해라.”
바르바칸이 앞으로 나서서 그를 정식으로 소개하고야, 사람들의 동요가 멎었다. 그 모습을 힐레멘은 신기한듯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이 신기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 건강한 피부색과, 짙은 머리색과 눈빛을 띄고 있었다. 여자고 남자고 덩치가 좋았고, 예리한 눈빛과 밝은 혈색을 지녔다. 그들중 아무도 힐레멘과 같이 탈색된듯한 새하얀 피부와 눈부신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보자마자 칼을 빼들고 비명을 지르던 사람들이 족장의 말한마디에 자신을 더이상 적이라고 여기지 않고 손님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족장의 말이 얼만큼의 무게와 신뢰를 가지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재미있는 곳이군요. 여긴.”
바산족의 족장도 상당히 신뢰를 받고 있었지만 이 곳 태양족만큼 그것이 강하지는 못했다. 이곳 사람들은 바르바칸이나 야스카산이 지나가면 마치 그들이 신이라도 되는 듯, 존경과 경애의 눈빛을 보내곤 했다.
 “무엇보다 족장의 신임을 얻어서 얼른 마라꽃을 수출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힐레멘은 늘 버릇처럼 달고 있는 미소를 또다시 진하게 입가에 그리며 즐거운 듯이 웃었다. 여기는 정말 재미있는 곳이었다.

“팔시아 대륙인?”
“응. 신기하지 않아? 족장이 데리고 왔대.”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아사신에게 수라킨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생기 있게 흩날렸다.
“나 처음 봤어. 내 머리색만큼 밝은 머리카락 말이야. 사람들이 괴상하다고 내 은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질해서 나는 내 머리카락이 세상에서 제일 특이한 색인줄 알았잖아. 근데 그 남자의 머리카락은 금실로 짠 것처럼 빛나는 금발이었어. 눈 색은 족장의 것 보다 연한 하늘색이고 피부는 소사린 언니만큼 뽀얗고 하얗더라. 정말 정말 신기하더라고.”
“수라킨.”
평상시에는 자기 나이보다 열 살은 많은 것처럼 행동하면서,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열네 살 어린애다.
 아사신은 미소를 지으며 신나서 이야기 하는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팔시아 대륙인을 본 것이 퍽이나 신기한 듯 끊임없이 재잘 거렸다.
그와는 반대되게 타스가는 몹시 침울해 보였다. 그는 따끈따끈한 죽을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수라킨의 수다를 듣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는 지금 몹시 불편했다.
그는 이렇게 큰 마을의 일을 자신이 몰랐다는 것이 무척 서운했다. 열여섯 살 때 성인식을 치룬 이후 바르바칸을 모시고, 그 후론 야스카산을 모시며 그는 당당한 족장의 전사. 족장의 오른팔로 성장했고, 그들은 늘 타스가와 부족의 대소사를 의논해왔다.
 그가 모르는 중대사안은 하나도 있을 수 없었고, 그가 참견하지 못하는 일은 오직 족장이 그들의 혈족에게만 출입이 허락되는 밀실로 들어갈 때 뿐이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났더니 팔시아 사람들이 당당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언제나 타스가- 타스가- 하고 찾던 족장이 이런 중요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의논 한마디 요청해오지 않았다. 어쩐지 이제 더이상 자신이 필요없어져서 신부의 보호는 핑계고 좌천되버린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드는 타스가였다.
뿐만아니라 일어나서 팔시아 대륙인이 마을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수라킨은 그들을 보러 뛰어나가더니 그 뒤로는 계속 그 남자들의 이야기만 해대고 있다.
 그것도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깨작깨작 먹는둥 마는둥 하다 수라킨으로부터 뒷통수를 가격당하며 그럴바엔 먹지 말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안그래도남들은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 재롱에 시간가는 줄 모르는데 서른 넷 먹도록 연애한번 제대로 못해본 타스가는 이번 겨울이 왠지 더욱 힘들 것만 같아서 저도 모르게 한숨만 늘었다.

아사신은 간만에 마을 외출을 결심했다. 어제 이사를 하느라 2주간 울기만 하고 돌보지 않았던 몸이 몹시 피로했지만, 수라킨이 떠들어 대던 하늘을 담은 눈동자와 금실을 녹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궁금하기도 했고, 이제는 좀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얼굴을 가리는 두건을 두르고, 눈에 띄지 않는 어두운 복장의 옷으로 갈아입고서야 마을에 나온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유명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그 사람 주변에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그 중앙에서 처음 보는 악기를 들고 유려한 손동작으로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남자의 손에 들린 악기는 세모나게 휘어진 한 몸뚱이에 중간은 텅 비어있고, 그 빈 공간에 여러 개의 많은 줄이 쳐져 있었다. 한손에 들기에는 조금 무거워 보이는 그것을 남자는 손쉽게 다리에 받치고, 부드럽게 줄을 뜯었다.
남자가 줄을 뜯을 때마다 한없이 부드러워서 공기 중에 녹아내릴 것만 같은 음율이 그 손에서 터져 나와 사방으로 번졌다. 사람들은 스르륵 눈을 감거나 옆 사람에게 기대어 그 천상의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이윽고 남자는 그 붉고 화려한 입술을 열어 자신이 연주하는 악기의 소리만큼이나 곱고 아름다운 목청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영광의 날은 언제 오나요. 우리 형제들은 꼭 죽은 것만 같습니다.
진동하는 피비린내. 까마귀가 우리 엄마한테 말을 걸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나도 그 들판에 나가야 할까요?
영광의 날은 언제 오나요. 우리 형제들은 꼭 죽은 것만 같습니다..-

아름다운 음율과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가사의 내용은 어딘가 섬뜩했다. 속삭이는 듯이 되내이는 후렴구가 마치 주술과 같아 기분 나빴다.
 아사신은 그 청아한 목소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부드럽게 반음을 내려 끝을 장식한 후 노래를 멈추었고 사람들은 꿈에서 깬 듯,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음악이었습니다.”
“멋있었어요.”
“언젠가 다시 연주해주세요.”
사람들이 남자를 향해 박수를 치며 환성을 보냈다. 남자는 다정한 미소를 띄고, 오른손을 심장에 얹어놓는 그들식의 예를 표해 그 답례에 보답했다.
아사신은 과연 그 남자가 수라킨이 말한 것과 같이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음을 보았다. 남자는 마치 어느 젊은 신의 현신인양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러나 아사신은 왠지 그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기가 어려웠다. 아름다운 악기로 그런 섬뜩한 노래를 부른 것도 그러했고, 너무 방긋방긋 웃고 있는 입가도 마음에 들지만은 않았다. 하기야 웃는 얼굴이 찡그린 얼굴보다 보기가 좋긴 하지만, 왠지 저 남자의 미소는 화를 내고 통곡을 해야 할 때도 저러고 있을 것만 같은··· 위화감이 드는 표정이었다.
-그래. 마치 웃다가 박제된 것 같군.-
적절한 표현이라고 아사신은 생각했다.
남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사를 받다가 곧 신녀가 다가와 귓속말을 전하자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돌아서 신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사람들은 모두 해산하였다.
 “아사신. 너도 그 남자를 보러 왔구나?”
“소사린.”
어느새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사신을 발견한 소사린이 다가왔다.
“그 남자가 와서 한 가지 좋은 점이 있구나. 네가 밖으로 나오다니.”
“하하-. 그 남자가 아니더라도 오늘쯤 나오려고 했어.”
아사신은 머쓱해져서 말했다.
“별 일 없으면 나랑 같이 가서 다보 아저씨네 가서 차를 얻어마시자.”
소사린의 생각에 아사신은 좋은 생각이라며 따라 나섰다. 다보 아저씨는 소사린의 먼 친척 되는 남자로, 소사린의 친구인 아사신을 좋게 봐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긴 천으로 칭칭 몸을 감싼 아사신을 알아 볼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들은 뒷골목으로 돌아갔다. 신부가 과거의 약혼녀와 함께 있는 것은 역시 보기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다보 아저씨의 집에 들어가자 언제나 들려오는 캉캉- 거리는 소리가 기분이 좋았다. 다보 아저씨는 대장장이였다. 그는 질 좋은 무기와 농기구를 만들 줄 아는 장인이었다.
“아저씨. 저 왔어요.”
소사린이 눌러쓴 두건을 들추며 문으로 들어서자 다보는 예의 그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만면에 띄우고 팔을 활짝 벌려보였다. 그러나 그 미소는 그녀의 바로 뒤로 아사신이 들어오자 순간 주춤했다.
“신부! 어째서 여기에...”
“다보 아저씨?”
아사신은 갑자기 당황하는 다보가 이상했다.
“신부··· 오시면 오신다고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이런 누추한 곳에······.”
“다보 아저씨. 왜 그러세요. 아사신이에요.”
아사신은 당황해서 외쳤다.
“저 아사신이에요. 얼마전에 여기서 소사린과 결혼하게 되었다고 축하해달라고 들렀었잖아요.”
“신부!!”
다보는 눈에띄게 당황해서 입가로 손을 가져갔다.
“그···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신부입니다.”
“네. 저는 신부입니다. 그리고 아사신입니다. 아저씨네 집에서 맛있는 차를 자주 타먹던 아사신입니다!”
아사신은 분했다. 갑자기 자신에게 경어를 쓰는 다보를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신부가 되셨잖아요?”
다보는 도리어 아사신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해왔다.
“아사신. 당신은 신부가 되셨어요. 신의 아내로 선출되었고, 족장의 씨를 그 안에 품으셨습니다. 이제 그 씨가 잉태되어 당신은 족장의 피를 이어받는 새로운 후계자를 우리에게 낳아주실 것입니다. 어찌 그런 소중한 분을 제가 홀대하겠습니까?”
아사신은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의 얼굴이 푸르딩딩하게 질려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온몸의 피가 아우성을 치며 얼굴에서 발끝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다보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신분과 의무에 대해 확실히 일깨워주고 있었다.

“아사신···.”
소사린이 다가와 아사신의 어깨를 꽉 붙잡아주었다. 아사신의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내가··· 그 남자의 씨를 이 배에 품어야 한다고?-

잊고 있던 사실-
자신은 임신이 가능하다-
남자의 몸으로 임신이 가능한 신부가 된 것이다-

“헉··· 허억···.”
“아사신!!”
들켰다-!
들켜 버렸다-!!
소사린이 보는 앞에서 까발려져버렸다. 내가 남자의 물건을 이 속에 품었다는 수치스러운 사실을, 그 사실을 소사린이 듣고야 말았다.

아사신은 빳빳하게 굳어서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소사린이 깜짝 놀라 다보에게 뜨거운 물을 가져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놀라서 자신의 손발을 주물러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아사신은 정신적인 타격이 너무 커서 아무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족장의 씨를 그 안에 품으셨습니다. 이제 그 씨가 잉태되어 당신은 족장의 피를 이어받는 새로운 후계자를 우리에게 낳아주실 것입니다.-

“흐- 하아-”
아사신은 심호흡을 했다. 어쩜 그렇게 새까맣게 잊어버릴수가 있었을까. 자신은 얼마나 바보스러운가. 메말랐던 눈동자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수척한 뺨에서 턱으로 긴 궤적을 그리고 지나간다.
신부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않느냐-
소사린도 알고 있는 사실인데, 왜 이제와서 충격받는 거냐. 바보같은 아사신.
남자와 잠자리를 하고, 그 씨를 태(胎)안에 품어 신의 피를 보존하는 것이 네 의무인지 몰랐단 말이냐?
바보같은 아사신! 천치같은 아사신! 머저리같은 아사신!

“아사신. 아사신 괜찮아?”
소사린이 손으로 부채질을 해주며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여인은 이미 자신으로 인해 너무 많이 아팠다. 더 이상 걱정을 끼쳐서는 안된다.
아사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가까스로 미소지었다.
“이제 괜찮아···.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신부.. 제가 무언가 실례되는 말이라도 했습니까?”
다보가 그 큰 덩치를 주체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젊은시절 전족장을 따라 전장을 누비고, 이방인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전적을 가진 그가 불안해하며 두 손을 앞으로 깍지낀 모습은 몹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가여워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보 아저씨. 난 이만 집으로 갈께요.”
“신부···.”
더 이상 저 가여운 남자를 괴롭히지 말아야겠다고 아사신은 생각했다.
각오해야할 일이었다. 이제 자신은 더이상 신부의 버려진 아들 아사신이 아니었다. 족장의 신부. 신의 신부 아사신인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예전처럼 봐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 자리를 빌어서 알게 되었다. 소사린과 수라킨 외에는 이제 정말 그 누구도 자신에게서 신부를 찾지 않는 자는 없는 것이다.

다보의 집을 나선 아사신은 소사린의 눈을 피해 깊숙히 눌러쓴 두건 사이로 잠깐 울었다. 이것이 신부 아닌 아사신으로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                *                *


“너희 나라에 대해 설명해라.”
야스카산은 의자에 깊숙히 앉으면서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야스카산의 그 박력이 넘치는 짙푸른 눈동자 앞에서도 전혀 움츠러드는 기색없이 여전히 그 화려한 얼굴에 빙글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아름다운 족장.”
“모든것을 말해 보거라.”
“하하- 그럼 교류가 끊어진 뒤의 팔시아 대륙에 대해서부터 말씀 드리죠. 우리 팔시아 대륙의 역사는 전쟁과 전쟁의 역사로 이루어져 있지요. 아시다시피 우리 두 대륙이 갈린것도 팔시아 대륙인들의 욕심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나도 알고있다. 너희 파렴치한들은 가만히있는 우리 함마대륙을 잘근잘근 씹어 먹으려 들었지.”
“그렇습니다. 잘 알고 계시군요.”
힐레멘은 진하게 미소를 띄웠다.

두 대륙의 이야기-

팔시아 대륙은 그들이 살고있는 함마 대륙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대륙이었다. 오래 전 그들의 언어와 문화가 같아 모두가 형제처럼 지내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지 오래 였다.

그들의 기원은 같았다. 먼 태초에 이 세상이 처음 생겼을 때 태양과 달이 합궁하여 태양이 달의 밭에 그 씨를 뿌리자 달은 보름 만에 배가 불러 알들을 낳았다.
첫 번째 알에서는 아비를 닮은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태양의 모습을 빼다 박은 듯, 금색머리카락과 금색피부를 지닌 아름다운 남자였다.
두 번째 알에서는 여자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달을 닮아, 검은 머리카락에 그늘진 피부를 지닌 지닌 아름다운 처녀였다.
세 번째 알에서는 다리가 셋 달린 까마귀가 튀어나왔다. 까마귀는 땅에 사는 인간과 하늘에 사는 신들의 중간에서 그들의 대변인이 되고 종이 되어 주었다.
 태양의 아들과, 달의 딸은 번성했다. 그들은 씨는 세상을 뒤덮었다. 태양과 달은 그 모습을 보고 몹시 기뻤다. 다른 신들도 그들의 아들과 딸이 세상의 어느 동물보다 현명하고 아름다움에 깊이 감명 받았다.

하나의 큰 땅이 있었다. 그 땅에서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태양을 닮은 사람들과 달을 닮은 사람들은 모두 함께 어우러져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태양을 닮은 사람들이 달을 닮은 사람들과 자신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흰 피부와 밝은 눈과 머리카락이 우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었고, 달을 닮아 어두운 색을 지닌 무리의 사람들을 깔보고 무시하기 시작했다.
태양을 닮은 사람들은 달을 닮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땅까지 갖고 싶어졌다. 당연히 달을 닮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땅을 고수하기 위해 반발했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숱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달을 닮은 사람들이 체력적으로 우세했으나, 밝은 피부의 사람들은 너무도 집요했다. 전쟁은 점점 길어졌고, 사람들은 죽어 나갔다.

전사-

강한 전사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전사를 만들기 위해 아이들을 낳았고, 아이들은 싸우다 죽기위해 태어났다.
 10년 20년 30년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 무려 50년이 지났다. 그래도 그들은 아무도 포기하지 않고 대지에 그 피를 뿌리고 있었다.
 이러다간 어느 한쪽이 멸망하기 전까진 끝이 없겠구나- 라고 생각한 신들은 그들을 갈라놓기로 결정했다.
붙어있던 하나의 땅을 손으로 맞잡고 두 동강으로 쪼개놓자 대지은 용트림하며 지진과 용암을 분출하며 자신의 몸을 찢어놓는 신에게 노성을 질렀다. 그러나 신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바다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대륙의 사이에 물고를 틀어놓았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쟁을 할 때만큼 죽어나갔다. 신은 감히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아이들은 필요 없다고 화를 내었고 그들의 태반을 쓸어버리고서야 그 진노한 권능의 역사를 멈추어 주었다.
터전이 바다로 가라앉고, 새로운 섬이 바다에서 튀어나오고, 밀물이 육지를 범람했다. 그것은 생지옥이었다.
비로소 사람들은 제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된 것이다.
 끊임없던 전쟁은 종결되었다. 함마 대륙의 스물세개의 큰 부족과 팔시아 대륙의 열아홉개의 큰 부족의 부족장들이 나와 신앞에 다시는 이런일이 없을것이라 굳게 맹세했고 그들은 그후 서로에게 상관하지 않기로 결심 하였다.
그들은 한때 같은 땅을 밟았었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었지만 이제 그 모든 시간을 잊고, 세상에 다시없는 원수가 되어버렸다.
자신의 아이들의 잔인함에 질려버린 하늘의 태양과 달은 더이상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 후로 자신들이 머무는 거취를 온화한 함마 대륙으로 결정했다. 팔시아 대륙에는 더이상 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미신인지 아닌지는 저도 알수가 없죠.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이야기 니까요.”
“미신이 아니다. 그것은 정말로 있었던 이야기다.”
야스카산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팔시아 대륙의 남자는 믿지 못할 것이다. 이해할 생각도 안할 것이다. 그들로부터 신은 이미 등을 돌렸다. 아무리 말해줘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두죠. 전쟁이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요.”
힐레멘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 두 대륙의 사이가 나빠진 이후로 팔시아 대륙인들은 그 성질머리를 못이겨 마구 전쟁을 일으켜 댔습니다. 약육강식-. 정확하게 그 법칙에 의해 움직였죠. 누가 더 큰 땅을 따먹느냐, 누가 더 아름다운 여인을 차지했느냐, 누가 더 훌륭한 보석을 소유했느냐··· 같은 것들로 싸웠습니다. 작은부족이 큰 부족에게 먹히고, 먹힌 부족은 반란을 일으키고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죠.
 그러다보니 할 수 없이 기술도 발전했습니다. 더 빨리 사람을 죽이는 방법, 밤에 조용히 찾아가서 정적을 암살하는 수법이 발전했죠. 신이 떠난 이후로 그들 나름대로 아마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을 쳤던 결과인지도 몰라요.”
“신이 떠난것은 너희들이 자초한 일이었지. 그 후로 신은 우리의 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맞는 말입니다. 어쨌든 그건 조상들의 이야기. 저는 모르는 이야기 입니다. 외려 저는 신이 떠나서 잘됬다고 생각해요. 대신 우리는 마법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까요.”
“마법?”
“대단한 건 아니에요.”
힐레멘은 빙긋 웃었다.
“사실 마법의 발견은 그 역사가 이백년도 안 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그 효과가 미미(微微)해요. 마법을 다루는 것도 서툴고요.”
“신력을 사용하는 것을 말하느냐?”
“아니요. 신력과는 조금 다릅니다. 신력은 신관들이 신에대한 믿음이 강할때 그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환자를 치유한다거나··· 하는 것 말입니다. 제가 알기론 이 함마 대륙에도 신성력은 거의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만···.”
“맞다. 신력은 굳이 필요치 않는다.”
“아마도 신은 그래서 우리에게 마법을 주셨는지도 모르죠. 그 능력을 대신하라고.”
힐레멘은 후후- 하고 웃었다.
사실 그런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것은 두 대륙다 거의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전쟁같은데서 쓰이기엔 턱없이 모자라는 능력이지요.”
그들의 모든 능력에 대한 관점은 그놈의 전쟁이나 살육에 대한 것이 아니면 별달리 인정받지 못하는 모양이라고 야스카산은 생각했다. 자신도 피를 즐기는 남자다보니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저 팔시아 대륙인들처럼 싸우지 못해 안달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비웃었다.
-자신들의 근원인 신으로부터 버림받고, 어떻게든 그 빈자리를 매꾸려고 안간힘을 쓰나보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왕에대해 말해보거라.”
힐레멘은 눈을 가늘게 모았다. 아무래도 이 거칠고 아름다운 남자는 정복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왕은 말씀드렸다시피, 이런 부족들이 여러개를 모아놓은 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땅이나 인구수를 보면 이정도면 충분히 하나의 국가라고도 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다른것은 그들은 귀족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는 대충 장로들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하는 역활은 비슷한 것 같으니까요.
귀족이란 왕이 되지 못한 왕의 형제들이기도 하고, 대대로 오랫동안 왕에게 충성을 바친 사람들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역시 자신의 지위를 세습합니다. 영토가 넓어지면서 다양한 제도들이 생깁니다. 기사단이 생기고, 벼슬이 생기고, 노예도 생기고, 피 지배층이 생기면 당연히 지배층이 생깁니다. 피 지배층이 반란을 일으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하룻밤새 바뀌기도 하고, 법이 세분화 되어 구속도 강해집니다. 구속은 말로는 백성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건 지배층을 위한 것이지요. 자신들이 가진 땅과 여자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그 각인은 대대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에게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법에 따라 자신의 나라에서 옹기종이 모여살고 그들이 사는 땅이 국가인 것이지요.”
힐레멘이 설명을 마치자, 야스카산이 자신을 깊게 묻었던 의자에서 조금 일어났다. 그의 형형한 푸른 눈이 요사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왕이고 말이지?”
“그렇지요. 그것이 왕입니다. 아름다우신 족장.”
야스카산이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왜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아름답다는 말은 여인에게나 하려무나.”
“우리나라에서는 아름다운 남자를 남자가 안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여기서도 그러하다. 다만 너희들과는 목적이 좀 다르지······.”
“아- 놀랍군요. 바산족과 함께 있을 때는 잘 몰랐었습니다.”
야스카산은 피식 웃었다.
“더욱 놀라운 것을 알려줄까? 지금 나의 신부는 남자다.”
“신부?”
야스카산이 요염한 미소를 피워 올리자, 그의 등 뒤에서 화사한 꽃이 일제히 만개하여 일제히 그 향을 뿜어내는 듯 진한 색기가 흘렀다. 힐레멘은 그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 팔에 돋아난 소름을 저도 모르게 쓸어내렸다.
 저 아름다운 남자는 강하다.
라고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마음을 홀리는 남자의 나른한 눈빛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정신을 놓는 순간 숨겨놓았던 가시가 튀어나와 자신의 눈을 찔러버릴 것을 눈치빠른 힐레멘은 알고 있었다.
“그래. 너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모양인데, 우리 부족은 신의 아내를 선출한다. 그것이 신부. 나와 합궁하여 내 씨를 세상에 이어줄 사람이다.”
“제가 아무리 이 곳 생리를 모른다지만 남자가 임신한다는 것은 금시초문입니다.”
“우매하구나 힐레멘. 그것이 신의 권능. 너희가 등돌린 신의 위대함이다. 나의 신부는 임신할 수 있다.”
힐레멘은 웃었다.
“그렇다고 쳐도, 왜 굳이 남자를 뽑는 것입니까? 이해가 안 가는 군요.”
“우리가 뽑는것이 아니다. 신이 결정하는 것이지. 신은 처음부터 신부를 점지하여, 그 생명을 태어나게 한다. 우리가 필요하다고 아무리 울고 불고 빈다해도, 신이 결정하지 않으면 절대 그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아. 그 어떤 여자가 나와 합방하여 아이를 낳는다 해도, 그 아이들은 신이 선택한 복중(腹中)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니 족장이 될 수 없다. 신이 선택하여 고른 선택받은 사람만이 내 씨를 잉태하여, 족장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당신도 신부의 아이입니까?”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힐레멘이 묻자, 야스카산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흠-. 아무래도 내가 너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군. 좀 더 왕국의 이야기를 들려다오. 너는 이곳에 마라꽃을 얻기위해 오지 않았느냐. 너희 왕국의 왕은 어떻게 백성들을 다스리지? 나는 궁금한 것이 많다. 내 호기심을 채워주지 않으면 네 팔을 잘라버릴테다.”
야스카산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갈색 피부아래 하얗게 빛나는 치아가 위협적으로 번들거렸다.
“너희가 왕을 가졌다면, 이 함마 대륙에서 나 역시 왕이 되지 못할것은 없겠지. 자 힐레멘. 내게 이야기를 더 들려주려무나.”
힐레멘은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신이 이야기를 할수록 눈앞의 남자의 눈동자는 호기심에 점점 더 눈빛을 빛내왔고, 그 미소는 점점 더 진해져만 갔다.

야스카산의 질문은 새벽이 찾아와 밖이 희끄무레해졌을 때야 중지되었다. 힐레멘은 기진맥진해져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야스카산의 상태 또한 별로 좋지 않았다.
“아아 요새는 자꾸만 일이 생겼으니까 말이지······.”
왠지 체력적으로는 그닥 힘들지 않아도 정신적으로는 피로한 요즘이었다.
“들어가서 자야겠다. 점심 무렵에 깨워라.”
시종에게 하달하고 방으로 곧장 들어가려는 야스카산에게 우물쭈물하며 시종이 말했다.
“안에 가리시네가 있습니다. 족장.”
야스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 방에는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했잖나. 왜 내 명을 어겼지?”
“그게··· 워낙 막무가내라서···.”
“화내지 말아요 야스카산. 내가 멋대로 들어온 것입니다.”
자신의 어깨를 부드러운 손길이 휘감아 오는 것을 느끼고, 야스카산은 뒤를 돌아보았다.
“···가리시네.”
자신의 아내 가리시네였다.
“야스카산. 밤새 당신을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으시더군요. 어디에 있었나요?”
책망하듯 마주쳐오는 푸른 눈동자가 요염했다.
가리시네는 야스카산의 자신의 사촌누이였다. 피가 연해서 밀실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하지만, 아름다운 푸른눈은 물려받았다. 족장이 되기 위해선 최소한 한명 이상의 아내를 거느려야 했고, 아버지의 명으로 성인식과 동시에 가리시네와 결혼했었다.
 “내가 어디에 있던 그건 내 마음이다.”
“여전히 얄미운 말만 하시는군요.”
가르스네는 미소를 지었다. 원망하는 말투와는 달리 그녀의 입술은 미소짓고 있었다. 그녀의 둥그런 배가 아니면, 임신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나는 피곤하다.”
“저와 함께 잠들어요. 야스카산.”
백치미가 흐르는 미소를 지으며 희고 부드러운 손으로 야스카산의 드러난 가슴을 애무하듯 미끄러트리는 장면은 넋을 잃을만큼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난 누구와도 같이 내 방에서 자지 않는다.”
“전 당신의 아이를 가졌어요. 다정하게 대해주세요. 무서워요.”
야스카산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게 누구의 아이인지는 태어나보면 알겠지.”
“야스카산!!”
가리시네가 소리질렀다.
“어떻게 그런말을··· 난 처녀였어요. 당신말고 그 누가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된단 말입니까?”
“누가 내 아이가 아니라고 했나? 나는 그저 낳아보면 안다고 했다. 나는 피곤하다. 더이상 나를 괴롭히지 마라.”
가리시네의 아름다운 푸른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뒤에서 숨죽여 지켜보고 있던 시종은 족장이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에게 저렇게 혹독하게 대하는 남편이 또 있을까···.
“신부가 이사해 왔더군요.”
한참을 숨을 고르던 가리시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스카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 여자가 임신을 하더니 실현가능성이 없는 포부가 생긴 모양이었다. 신부를 맞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투정을 부리더니, 신부와 합방을 하고 나선 노골적으로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고, 방에 틀어박혀있었다. 그녀가 거기서 굶어죽던 말던 상관하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 나와서 설치자 그때 방문을 잠궈 버렸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신부가 신의 옆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뭐가 잘못됐다는 거냐?”
가리시네는 평소의 애교 있는 얼굴로 돌아가 배시시 웃었다.
“아니오. 어찌 제가 족장의 명에 의문을 표하겠습니까. 다만 신부를 가까이 불러들였으니 그에게도 합당한 직책을 주어야지요.”
“합당한 직책?”
“네. 원래 신부란 우리의 안주인이 아니겠습니까? 신전의 대소사를 관리하거나 홀로사는 노인들과 여자들, 다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그의 책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명분을 얻어서 옆에 두고 괴롭히고 싶다는 거군.-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이는 가리시네의 얼굴을 바라보며 야스카산은 생각했다.
“그에게 생각을 물어보겠다. 알다시피 이번 신부는 좀 성정이 약한것 같으니까.”
“들었습니다. 고작 첫날밤을 치룬 일로 2주간이나 집밖으로 두문불출 했다더군요.”
가리시네가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그렇게 허약해빠져서야 꼭 자기 같은 후계자나 남겨주지 않을까 겁이 납니다. 어디 임신이나 제대로 해내겠습니까?”
가리시네의 말에 야스카산은 그녀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다시피 한 왼쪽 팔을 쳐냈다.
“말조심해라. 가리시네. 네가 지금 욕보이는 것은 내 후계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냐. 나는 네가 임신했다고 해서 봐주지 않는다.”
야스카산은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그 배에 품은 것은 앞으로 영원히 족장이 되지 못하고 부족의 한 사람으로 인생을 끝내게 될 뿐이다. 내 신부가 배에 품게 될 것과 처음부터 태생이 다른 것이다. 네 그 가벼운 입을 조심해라.”
“야스카산···.”
가리시네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것은 당연한 말이었다. 비록 그녀가 야스카산도 신부의 아들이 아니니 자신의 아이에게도 기회가 있지 않겠냐고 살며시 작은 희망을 품고 있다고는 해도 그것이 신이 정해놓은 법칙이었다.
 족장의 피는 신부에게로-
신부는 족장과 신의 아이를 품는다-
특별히 신부의 아들이 허악하다거나 병신으로 태어나지 않는 한 -그러나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신의 혈족은 신부를 통해서만 이어지는 것이다.
“명심해라. 네가 나의 아내이자 사촌 누이라서 어느 정도 까불어도 봐주고는 있지만, 나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나대는 자들을 제일 싫어한다.”
“네. 야스카산.”
가리시네가 떨리는 손을 들어 심장에 가져다대어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아름다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살기를 불태우던 야스카산은 그제야 마음을 진정시켰다. 왠지 기분이 상당히 나빴다. 조금 아내를 상대로 도가 지나치게 화를 내버렸다는 자각은 있었다. 이정도의 살기는 맹수를 때려잡을때나 필요한 정도다. 임신한 여인이 펄쩍 뛰며 도망가버린것도 이해가 갔다.
“어쨌든 나 혼자만의 잠자리는 확보 되었군.”
야스카산은 부드러운 침상에 깊이 몸을 뉘였다.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갈 만큼 화를 내버린것은 반성하고 있었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그 덕분에 짧은시간안에 귀찮은 가리시네를 처리하고 혼자 잠들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야스카산은 서서히 곯아 떨어졌다. 창을 통해 밝은 햇살이 슬며시 그 발을 들이밀고 있었다.

“신녀가 왔어.”
수라킨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신녀가?”
아사신은 조금 인상을 찌푸리고 방 밖으로 나갔다. 과연 수라킨의 말대로 신녀가 흰 가운을 두르고 그를 찾아와 있었다.
“무슨일이십니까?”
 “족장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무엇입니까?”
족장이라는 말만 들으면 자동적으로 미간이 구겨지는 아사신이었다.
“족장께서는 신부의 직책을 이행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라 하셨습니다.”
“신부의 직책?”
수라킨이 옆에서 참견했다.
“네. 우리 신과 족장의 아내로서 아프고 병든 곳을 다니며 그들을 돌보는 것은 오래전부터 신부가 해오던 일이었습니다. 부득이하게 신부께서 신부의 의식을 치루신 후 몸이 성치 않는다 하여 미뤄왔지만 이제 다시 건강해지셨으니 그러한 직책을 수행할 생각이 있으신지 여쭤보라 하셨습니다.”
수라킨은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힘든사람들을 돌보며 몸을 움직이다 보면 아사신도 좀 더 기운을 차릴지도 모른다.
사실 수라킨은 아사신 몰래 그가 일할 만한 곳을 알아보고 있었다. 지참금 타령을 타스가한테 몇 번 했더니 새로 이사한 집에는 곡물 창고와 돈이 든 서랍, 옷이 가득한 창고와 같이 필요한 모든 것이 가득 차 있었다. 한마디로 수라킨도 아사신도 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다른 돈 많은 집 아가씨처럼 수라킨도 이제 노새처럼 밭을 갈 필요 없이 집에서 수나 놓고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그토록 원하던 삶이 막상 자신에게 다가오자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꼭 아사신을 팔아다가 장만한 부귀영화라는 기분이 들어서 수라킨은 그 예쁜 옷들을 건드리기도 싫었다.
거의 매일을 일하면서 살아온 수라킨에게 이 갑자기 다가온 풍족한 생활은 뭔가 몸에 맞지 않은 옷이라도 입은양 답답하고 왠지 불안했던 것이다.
 그것은 아사신도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종종 밤에 몰래 집을 나가 예전에 살던 곳을 둘러보고 온다는 것을 수라킨은 알고 있었다.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기운을 북돋아주기위해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자신의 가게나 밭에 신부를 쓴다는 것을 다들 꺼림찍해 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아사신이 손으로 만든 조각상같은 것을 소사린네의 만물상에 팔아달라 부탁할 수도 없었다. 소사린이 아사신과 파혼했다는 것 때문에 소사린의 평판은 안그래도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더 곤란하게 만들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잘됬네. 마땅히 할 일도 없었는데 그렇게 하도록 해 오빠.”
아사신은 내키지 않는듯 시무룩해져 있었다. 수라킨은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런 의무는 족장의 아내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이었다. 아직 자신이 어렸을때 족장의 아내들과 자신의 어머니가 함께 골목을 누비거나 신전을 청소하거나 하던 모습을 아사신은 기억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일 족장의 아내 가리시네에게 가십시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신녀는 공손히 예를 표하고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사신의 얼굴은 착잡했다.
“어차피 살아야 하니까······.”
“응? 뭐라고 그랬어 오빠?”
“아무것도 아니야.”
아사신은 쓸쓸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살아야 한다. 죽지 못하니까 살아야 하는 거다. 자살은 신의 노여움을 사는 행위. 전사로서 전장에서 죽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지만 자신은 전사가 아니니 이렇게 미미한 목숨을 끝까지 이어가야 하리라.
지겹고도 지겨운 인생을······.

“이게 뭔가요?”
다음날 아침 궁으로 가서 가리시네를 만난 아사신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의 손에는 낡은 빗자루 하나가 들려있었다.
“이번 신부는 머리가 좀 멍청한가 보군요. 보면 모르세요? 빗자루랍니다.”
가리시네가 쌀쌀맞게 말했다.
“그걸 들고가서 저 외딴 곳부터 쓸기 시작하세요. 예전에 신부가 살던 그 거리 말입니다. 낮에도 으침하고 쓰레기가 곳곳에 굴러다니니 영 기분나쁜 곳이더군요. 신부의 직분을 다하기로 하셨으니 그 빗자루로 거리를 쓰는 것 부터 시작하세요.”
아사시는 고개를 들어 가리시네의 새파란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계단 위에 서서 빗자루만 던져주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슴속에 조금 울컥- 하고 화가 치밀다가 곧 사그라 들었다. 족장은 그가 가리시네의 명을 듣기를 바랄 것이다. 그를 자극해서 다시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일은 사양이다.
“알겠습니다.”
아사신은 망설이지 않고 궁을 나섰다.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홀대하던 족장의 여자들을. 어차피 신부란 족장의 아내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아사신은 빗자루를 움켜쥐고 한숨을 쉬었다.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2주간 집에서 울며 지내는 동안 안그래도 허약한 몸이 더욱 나빠진 것 같았다.
 “신부! 그것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타스가가 뛰어왔다. 그는 아사신의 손에들린 빗자루를 보자 안색을 흐렸다.
“뒷골목을 청소하라는군요.”
아사신이 미소를 지으며 빗자루를 들어보였다.
 “기가 막히는군요. 어째서 신부께서 이런일을 해야 합니까.”
“어쨌든 시키니까 해야죠. 그만 갑시다.”
아사신이 아무렇지 않은듯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자 타스가도 급히 그 뒤를 따랐다. 아사신을 본 사람들은 두문불출하던 신부가 밖으로 나다니자 신기한듯 고개를 길게 빼고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아사신은 조금 어깨를 움츠리고, 두건을 깊이 눌러썼다. 좀 더 당당하고 싶었지만 역시 그들의 관심은 아직 부담스러웠다.
“신부···.”
타스가는 왠지 억울한 얼굴로 뒤 따라와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아사신은 속으로 조금 웃었다. 저 남자에 대한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아무래도 좋아할 수 없었는데 보기보다 사람이 좋다. 저 우락부락한 얼굴 뒤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따스한 마음이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아사신은 뒷골목에 쌓인 낙엽과 오물을 쓸기 시작했다.

“뭘하고 있다고?”
“가리시네님의 말대로 빗자루로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리시네는 붉은 연지를 입술에 찍다말고 유리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꺄르르 웃었다.
“바보같이 시키는대로 하고 있다니, 어지간히 자존심도 없는 놈이구나. 하긴 그렇게 못났으니 신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면서 족장이 아닌 신부가 되었지. 그걸 다 쓸거든 내일은 거렁뱅이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빗질을 하라고 일러라.”
신녀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방을 나갔다.
-바보같은 것.-
가리시네는 자신의 구불거리는 긴 머리를 풀어헤쳤다. 작고 요염한 얼굴 주변으로 새까만 머리채가 흘러내리자 자신의 자랑거리인 푸른 눈동자가 한층 더 화사하게 빛을 발했다.
-몸단장 같은데 신경 쓸 겨를을 주지 말아야지. 더럽고 지저분한 곳만 다니게 해야지. 나는 아들을 야스카산에게 안겨주고, 더욱 아름다워 질거야. 그래서 그이의 마음을 사로잡아야지.-
가리시네는 히죽 웃었다. 아까 본 야스카산의 모습이 생각났다.
-전혀 남자답지 못한 몸매에 키도 작고 위축되 있는 모습이었지. 야스카산과 형제지간이라고는 차마 믿기 힘들만큼 닮지 않았어. 회갈색 머리카락에 눈색도 족장의 것과는 전혀다른 회색 눈동자. 등에 날개가 솟아있어서 족장이 할 수 없이 자신의 아들이라 인정했다지만, 그 외에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잖아? 그 무엇하나 야스카산의 마음을 휘어잡을 매력따윈 보이지 않아.-
가리시네는 빗을 잡고 만족스럽게 자신의 풍성한 머리채를 빗어내렸다.
-하지만 그래도 그 피부하나는 인정해 줄 만 했지. 아무리 노력해도 잘 하얗게 되지 않는데 여인네들보다 피부가 희고 창백하더군. 어릴때는 자주 앓았다더니 그것 때문인가? 얼굴은 어땠지? 얼굴은··· 평범하게 생겼는데도 이상하게 눈을 떼기가 힘들었어.-
거기까지 생각한 가리시네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봤자 달릴거 다 달린 사내새끼야. 야스카산이 가끔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기는 하지만, 그가 자청해서 자려고 한 적은 없다는거 알고있어.-
가리시네는 다시 거울속의 자신에게 황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야스카산은 내 남자야. 아직은 아무에게도 그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내가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이 후계자가 될만큼 똑똑하고 건강하다면 그도 나를 받아들여 줄거야. 아아- 그러려면 얼른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가리시네는 자신의 부풀어오른 배를 우울하게 처다보았다. 다른 임산부들에 비해 배가 많이 튀어나오진 않았지만 가리시네는 자신의 배를 볼때마다 속상했다. 임신한 이후로는 야스카산이 안아주지 않아서 더욱 그러했다.
-야스카산과의 잠자리는 정말 황홀해.-
그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인 몸을 온 몸을 벌려 껴안으면 그는 익숙하게 가리시네의 몸을 주무르곤 했다. 굳은살이 박힌 손바닥이 연약한 피부를 미끄러져 내릴때면 가리시네는 아픔과 함께 곧 찾아올 쾌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야스카산의 그 크고 훌륭한 것이 자신의 몸 안으로 밀려 들어 올때면 감당하기 힘들어 약한 비명을 질러야 했지만, 그 비명은 곧 쾌감의 비음으로 변하곤 했다.
다른 남자와 자본 적이 없어서 비교할 대상이 없긴 하지만 그녀는 어릴때부터 족장의 마음을 얻기위한 많은 공부를 해야했었다. 그녀가 시집왔을때 몸은 처녀였지만, 머릿속은 창녀의 그것과 진배없었다. 그가 자신의 순결을 가져갔을 때부터 그녀는 야스카산이 누구보다 멋진 남자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 황홀했던 감각이 잠시 살아나 그녀는 몸을 파르르 짧게 털었다.
 -얼른 아이를 낳아야겠어.-
가리시네는 다시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수라킨.”
아사신이 고개를 들자, 눈이 활활 타오르는 수라킨이 팔짱을 끼고 있는것을 볼 수 있었다.
“가리시네가 시키더군.”
“가리시네?”
“족장의 아내의 이름이야. 그리고 우리의 사촌이기도 하고...”
수라킨은 코웃음을 쳤다.
“왜 그여자가 시키는데로 이러고 있어? 그 여자가 무서워서?”
“응.”
아사신이 수긍하자 수라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사신을 노려보았다.
“그 여자 뒤에있는 족장이 무서워. 족장은 그 여자에게 나에 관한 일을 맡긴 모양이야. 그러니까 그 여자의 말이 족장의 말인 셈이지. 내가 하기 싫다고 했다간 그 여자는 낱낱히 족장에게 일러바칠거고... 그러면 또 족장이 내게 찾아오지 않을거란 보장이 없잖아? 난 그게 싫어. 차라리 돼지우리에서 똥통을 치워야 한다고 해도 그 편이 훨씬 나아.”
단호하게 말하는 아사신의 뒤에서 수라킨을 머리를 짚었다. 아사신의 족장에 대한 반감은 생각보다 더 깊은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족장의 딸이지만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쳐지지 않았던가. 아사신만큼 자신역시 족장과 그들의 가족에 대한 반감은 깊었다.
그러나 자신과 아사신의 가장 틀린 점이라면 자신은 거기서 끝난다는 점이다.
 버림받았고, 내쳐졌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미 태어난 것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잘못한게 없으니 고개숙일 이유도 없다. 그들은 이미 자신과는 남남이다. 그들은 나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켜주고, 나는 그들에게 나의 세금을 바친다. 그걸로 계산은 끝난거다. 나도 그들에게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고, 그들도 그렇게 나를 잊고 살아주면 된다. 우리는 남이니까.
 그것이 수라킨의 사고방식 이었다.
그러나 아사신은 달랐다. 그는 늘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이 좀 더 건강하게 태어났더라면 어머니가 그렇게 쫓겨나지 않았을텐데, 수라킨을 좀 더 풍족하게 키울 수 있었을텐데, 시오사라가 그렇게 죽지 않았을 텐데- 와 같은 무수한 죄책감에 둘러쌓여 이십여년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안그래도 반감과 콤플렉스가 깊을대로 깊은데 거기다 강제로 신부가 되어버렸으니 그 원망과 자존심은 끝이 없게 골이 파여버린 것이다.
 수라킨에게는 아사신의 깊은 원망과 자격지심의 고랑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 했다.
-평생 살맞대고 살아야 하는 남자랑 저렇게 안좋아서야...-
수라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리 그 신부의 이름이 적힌 신탁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었더라면 아사신에게도 자신에게도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신부가 되면 족장을 구워삶아서 엄마와 족장을 이간질 시킨 그 아내년들과 신전의 잡것들을 전부 몰아낼텐데···.-
수라킨은 입맛을 다시며, 아사신이 들었다가는 깜짝 놀랄 생각을 태연하게 했다.
“이리 줘 봐.”
수라킨은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할 거야. 내 일이야.”
아사신은 고집스럽게 빗자루를 꼭 쥐고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좀 줘봐.”
“싫어. 내가 할거야.”
“아 글쎄 좀 줘보라잖아!!”
수라킨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사신은 깜짝 놀라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누가 뺐는데? 하도 못하니까 그런다. 오빠가 쓴 곳 좀 봐바. 쓰나 마나 매한가지잖아. 어이 아줌마! 거기! 그래 당신. 빗자루 두 개 좀 꺼내봐요. 잠시 빌려 씁시다. 그리고 거기 타스가!”
벽 뒤에서 수라킨이 눈에 불을 키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도망친 타스가가 펄쩍 뛰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덩치도 좀 큰게 거기 숨으면 안보여? 신부가 개고생 하고 자빠져있는데 뭐하는 거야? 나와서 거들어.”
“수···수라킨··· 예쁜말 고운말을 좀···.”
“웃기시네.”
수라킨은 코웃음을 치고 마을의 여자가 가져다 준 빗자루를 두 손에 번쩍 들었다.
“성녀처럼 차려입고 마을 한가운데서 고민상담이나 하고 자빠져있을 줄 알았더니 빗자루 들고 여기서 동네청소나 하고 있는걸 봤는데 고운말이 잘도 나오겠다. 타스가아아!!!”
“나··· 나간다.”
타스가가 뻘쭘하게 벽 뒤에서 걸어나왔다. 얼굴에 똥 밟았다 라고 쓰여 있었다.
“당신은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쓸어. 나는 저기서부터 쓸테니까. 오빠는 보고 배워. 건강도 안좋은데 무리하지 말고. 시작하자!”
수라킨의 기운찬 외침과 함께 타스가와 아사신은 조용하고 신속하게 빗자루를 놀리기 시작했다. 쓱싹쓱싹 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골목을 가득 매웠다.

가리시네는 매우 즐거웠다. 신부는 자신의 명령을 매우 착실하게 따라주고 있었다.
“저가 나보다 한 수 아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게지.”
피부에 문대면 달콤한 향내가 나는 헤리파파나무 잎사귀를 목에 문지르며 가리시네는 미소를 지었다.
“어제는 연고자가 없는 늙은 노인들의 집마다 들려서 청소를 하고, 몸을 닦아주라 했으니, 오늘은 무엇을 시킬까? 저번처럼 말의 뒷구멍을 닦아주라고 시킬까?  못쓰는 밭을 갈아엎으라고 시킬까? 후후후후-.”
“심성을 곱게써야지 아기씨가 잘 자란다. 가리시네.”
“어머, 어머님!”
가리시네는 잎사귀를 문대다 말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야스카산의 어머니 민네가 서 있었다.
 “기척이라도 주시지. 놀랐습니다.”
얼굴에 걸려있던 꿍꿍이가 많아보이는 미소를 싹 지우고 가리시네는 공손히 예를 표했다.
“많이 놀랐느냐?”
“애 떨어질 뻔 했어요~.”
가리시네가 귀염성있는 얼굴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맞잡았다. 어느새 생글거리는 미소가 얼굴에 돌아와있었다.
“요즘 신부가 네 덕에 무척 바쁜가 보더구나.”
“제가 야스카산에게 허락을 얻어서 그에게 소일 거리를 주었습니다.”
가리시네는 천연덕스럽게 소일거리라고 말했다.
“소일 거리란게 아까 네가 혼자 중얼거리던 땡볕에 돌을 골라내게 하고, 말을 방목해놓은 곳에서 오물을 치우게 하고, 더러운 골목을 쓸게 하는 것이냐?”
가리시네는 입술을 샐쭉거렸다.
“저는 그가 못한다고 말하면 다른 일을 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더군요. 그렇다면 의외로 적성이 맞는다는 것 아니겠어요? 힘들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시는거죠?”
마치 나비의 날개를 잡아떼며 -왜 그러면 안 되죠?- 라고 묻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만 같다고 민네는 생각했다.
“너무 구박하지 말거라. 신부는 우리 신의 혈족을 낳아줄 고귀한 몸이다.”
-그 신의 혈족은 내 몸을 빌어서 태어나게 될 겁니다.-
가리시네는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남자의 몸으로 신부가 되었으니 표시는 안내도 많이 속으로는 저어하고 있을거다. 네가 족장의 아내로는 선배격이니 잘 다독여 주어라. 밖에서 하는일만 주지말고 이 궁안에서 할 수 있는 손쉬운 일도 마련해주거라. 알겠느냐?”
“네. 어머님.”
가리시네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고 여긴 민네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가리시네가 아주 어릴때부터 그녀의 모습을 보아왔다. 콧대가 세고, 고집불통인 면이 있긴 하지만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근본은 착한 아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번에도 역시 자신의 말에 저렇게 예의바르게 수긍하지 않는가.
“그럼 내 뜻을 전했으니 이만 가도록 하마. 귀한 아기씨를 가졌으니 몸도 마음도 바르게 사용해야한다.”
이번에도 가리시네는 조용히 몸을 낮추어 민네의 말에 수긍하는 척 했으나, 눈동자는 불타고 있었다.
-신부라고 확실히 특별대우를 해주시는군. 예전에 내가 내 시녀 주제엔 야스카산을 꼬드겨 잠자리를 같이 한 계집애를 매질할때는 아무말도 안하시더니.-
가리시네는 조용히 일어나서 그녀의 시종을 불렀다.
“신부에게 가서 전하거라. 오늘은 밖에서 일하지 않아도 좋으니, 내게로 와서 내 일을 도우라고.”
“알겠습니다.”
시종이 물러나자 가리시네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민네는 이 궁 안에서 할 수 있는 손쉬운 일을 주라고 했으니 자신은 그녀의 말에 따를 작정이었다.

 아사신은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했다.
“직접 와서 거들라고 했다고?”
“타스가. 당신이 보기에 그 가리시네란 여자 어떤 여자에요? 이 땡볕에 밖에서 무거운 돌을 고르라고 한 것부터가 아주 근본이 못되먹은 년 같지만...”
수라킨의 물음에 타스가는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여자다.”
“그것 뿐?”
타스가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거 외엔 잘···.”
“어이구 화상. 저걸 어떤 여자가 데리고 살까, 물어본 내 잘못이지.”
수라킨은 혀를 찼다.
“그만해 수라킨. 타스가가 민망해하잖아. 어른한테 그러는거 아니야.”
타스가는 전혀 민망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아사신이 감싸주니까 그냥 묻어가자고 생각했다. 요 며칠 수라킨과 지내면서 그녀가 아사신에게만큼은 몹시 약하다는 걸 깨닫고서 알게 된 생활의 지혜였다.
“젠장. 팔자 좀 피나 했더니 말 똥 치우고, 밭에서 자갈 골라내고...”
수라킨은 이죽거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얼마전까지 느꼈던 아사신을 팔아다 세간살이를 장만한 것 같다는 꺼림직함 따위는 온종일 밭에서 흙먼지 뒤집어써가며 돌 골라내다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공짜가 어딨어 공짜가. 어째서 예전보다 몸이 더 힘들어 진거냐고!-
수라킨의 가무잡잡한 이마에 혈관이 툭툭 돋아나는 것을 타스가는 두려운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꼭 저러고 나면 나한테 화풀이 하던데······.-
“어쨌든, 난 잠시 다녀올게. 궁에서 시키는 일이면 별로 큰 일은 아닐거야.”
아사신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수라킨에게 미소를 지어보이고 집을 나섰다. 미소를 짓고있던 얼굴은 집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굳어져서 곧 사라져버렸다.
-바라지도 않던 자리에 지들 멋대로 앉혀놓고 괴롭히기까지 하는군.-
아사신은 한숨을 쉬었다.

아사신이 궁에 도착했을때, 가리시네는 자신의 방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방 한 구석에 작게 마련된 신소에는 금칠을 한 작은 신의 석상과 태양을 뜻하는 흰돌과 달을 뜻하는 검은돌이 나란히 놓여있었고, 그 앞에서 가리시네가 조심스럽게 부푼 배를 구부리며 절을 하고 있었다.
 아사신은 뒤에 서서 잠자코 기다렸다. 시종이 다가와 그녀에게 아사신이 왔음을 고하려고 했지만, 아사신은 고개를 저어 그것을 저지했다. 열과 성을 다해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기도를 올리는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아름다웠기 때문에 계속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풍성하게 구불치는 흑단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허리를 넘어서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고, 분명 열심히 관리했을 새하얀 피부는 눈꽃처럼 고왔다. 얇고 나풀거리는 하얀 옷자락 사이로 나와있는 길고 가느다란 팔과 옷 자락에 감춰졌지만 임신으로 인해 풍만해진 가슴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보고 싶어질만큼 아름다웠다. 부풀어오른 작은 배는 새생명을 잉태했다는 증거. 아사신의 눈에는 그 불룩 튀어나온 배도 예쁘게만 보였다.
그녀가 자신에게 요 며칠 심한 노동을 시키긴 했지만, 자신도 남자다 보니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정성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자 그간의 화가 다 삮아지는 느낌이었다.
“신부. 언제 오셨어요?”
기도를 마친 가리시네는 무심코 고개를 들다 자신을 쳐다보는 아사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방금전까지 열심히 아사신이 임신을 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빌었던지라 무심결에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방금 왔습니다. 기도 드리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방해하기 싫어서 기다렸습니다.”
아사신은 엷은 미소를 띄고 말했다.
 “흠. 다음부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바쁜사람이니까 얼른 신부와의 용건을 끝내고 싶거든요.”
가리시네의 표정은 평상시의 약간 사람을 깔보는 듯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시킬 일이 있다 들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아사신의 말을 들은 척 만척 하며,  가리시네는 보석이 박힌 머리띠로 자신의 숱많은 머리카락을 한데 묶었다. 치렁치렁 늘어지는 머리카락이 뒤로 묶여 올라가자 작고 새하얀 얼굴이 도드라져 보이며 비웃는 듯한 미소가 나타났다. 자신의 화사한 얼굴과 아사신의 메마른 얼굴을 거울속에 동시에 비춰보던 가리시네는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신부. 제가 요즘 몸이 안좋습니다. 임신한 후로 뭘 먹어도 더부룩하고, 속이 미식거려 몹시 고통스럽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신부께서는 음식을 잘하신다 더군요. 신부께서 직접 저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주시면 제가 그것을 먹고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해주시겠어요?”
아사신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으나, 특별한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알겠노라 수락했다.
“무엇이 드시고 싶으십니까? 원하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닭죽을 먹고 싶습니다.”
가리시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붉은 입술을 더욱 위쪽으로 끌어올렸다.
“닭죽이요? 알겠습니다.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집에서 만들어오겠습니다.”
아사신은 그녀의 미소에 저도 모르게 방긋 웃으며 화답해주었다.
“기다리겠습니다··· 신부.”
아사신은 생각보다 쉬운 부탁이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는 이마에 혈관을 서너개쯤 새기고 앉아있는 수라킨과 이미 한차례 쪼인듯한 타스가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수라킨은 아사신이 방긋 웃으며 집안으로 들어오자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아니. 부탁받은건 따로 있어. 가리시네가 내가 만든 닭죽이 먹고 싶대.”
“겨우 그것뿐?”
수라킨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으나, 아사신은 곧 흥얼거리며 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남매는 육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고기반찬은 자주 식탁에 오르지 않았지만, 오늘은 마침 타스가가 사온 닭고기가 있었다.
 그것을 뜨거운 물에 익힌 다음 잘게 찢어 끓는 죽 속에 비벼넣고 소금으로 연하게 간을하자 요리는 금방 완성되었다.
“혼자 먹을거니까 이정도만 가져가도 될거야. 너랑 타스가 둘이서 나머지를 먹어. 그럼 난 다녀올게.”
아사신은 기분이 좋아져서 요리를 들고 식지않도록 조심하며 얼른 가리시네에게로 향했다. 서둘러 계단을 뛰어올라가 그녀의 방앞에 서자 시종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안으로 안내했다.
“가리시네. 여기 만들어왔습니다.”
급하게 달려와서 따끈따끈한 김이 아직 모락모락 올라오는 죽을 건네자 가리시네는 누워서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한스푼 떠서 조용히 입가로 가져가 살짝 혀끝만 내밀어 맛을 보았다. 그러더니 곧 미간을 찡그리고 아사신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왜 그러십니까? 입에 안 맞으십니까?”
“신부. 참으로 기가 막히는군요.”
“예?”
아사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리시네는 불쾌하다는듯이 탁소리가 나게 그릇을 내려놓았다.
“이 냄새는 정말 끔찍하군요. 닭의 성별이 무엇입니까? 제 뱃속의 아이가 진저리를 내며 싫어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사온 신선한 닭이다. 무슨 냄새가 난다는 것인지 아사신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저... 타스가가 아침에 옆집에서 사온것이니··· 암탉입니다만···.”
“정말 불쾌하군요.”
가리시네는 파르르 치를 떨었다.
“당신은 정말 욕심많은 사람이로군요. 뻔뻔하게 남자의 몸으로 신부의 자리에 오르더니 이제 후계자 욕심이 생겼습니까? 족장의 아이를 임신한 나는 아무고기나 먹지 않습니다. 저는 족장에게 훌륭한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어요. 피와 살로 만들어진 것은 반드시 그 수컷을 잡아먹고, 민물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그것은 족장에게 보탬이 되도록 훌륭한 전사를 낳아주고자 하는 부족민 모두의 바램이지 않습니까? 하물며 민간여자들도 아이를 임신하면 전사가 될 남아를 낳기를 희망하여 그리하는데, 어째서 당신은 내게 암컷 냄새가 진동을 하는 고기를 권하는 것입니까? 나는 그거나 먹고 딸이나 낳으라는 겁니까?”
아사신은 당황해서 어쩔줄을 몰랐다.
 “가리시네.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닭고기를 팔때 누가 수탉을 팝니까. 수탉은 아시다시피 여러마리를 동시에 키울수가 없습니다. 죽을때까지 서로 싸워대니까요. 보통 한마리나 두마리밖에 키우지 않습니다. 그런것을 제가 어떻게 달라고 하겠습니까. 저는 몰랐습니다.”
아사신이 공손하게 두 손을 가슴으로 모으고 변명했으나, 가리시네는 코웃음을 쳤다.
“하! 당신은 지금 나를 능멸하시는 군요. 이 내가. 바르바칸의 조카딸이며, 야스카산의 아내이자 그의 첫번째 자식을 수태한 이 내가 감히 수탉 한 마리를 구해 먹지 못할만큼 미천한 존재라는 말씀이십니까? 일반 남자들도 아내가 임신하면 첫 아이에게만큼은 반드시 수컷의 고기를 구해 먹입니다. 그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르신다는 당신의 진위를 저는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불을 켜고 득달같이 쪼아대는 그녀의 말에, 아사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야스카산의 얼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야스카산이··· 가리시네가 저렇게 화를 내면··· 야스카산이 내게 와서 고의로 그랬다고 화를 낼거야.-
아사신의 등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정말로 야스카산과 만나는 것이 무섭고 싫었다.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리겠습니까? 저는 정말로 몰랐던 사실이나 가리시네. 당신이 그렇게 화를 내니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리시겠습니까?”
요근래 밖에서 노동을 하느라 창백한 얼굴이 더 한층 창백해져서 꼭 쓰러질것만 같은 아사신을 바라보는 가리시네의 눈동자에 희미한 희열의 불꽃이 일렁였다.
“그럼 제 앞에서 직접 수탉을 잡아 그것을 요리해 주십시오. 저는 당신이 나를 위해 만든 요리를 반드시 먹고야 말겠어요. 당신이 수탉을 사오는 것이 그리도 힘들다 하니, 제가 재료를 준비하지요.”
가리시네가 손가락을 튕겨 딱 하는 소리를 내자, 밖에서 준비하고 있던 듯, 그녀의 시녀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아사신은 그들이 들고 들어오는 물건들을 눈을 흡뜨고 지켜보았다. 시녀들은 불을 지필 수 있는 도구와 그릇 같은 기본적인 취사 도구와 함께, 살아있는 닭을 한마리 안고 들어왔다.
“···이건···.”
“네. 살아있는 수탉입니다. 그 칼을 드십시오. 당신이 그 닭의 모가지를 치고 심장을 꺼내어 나의 제단에 바쳐서 내가 아들을 순산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기꺼이 당신의 실수를 덮어두겠습니다.”
시녀가 억지로 아사신의 손에 칼을 쥐어주었다. 아사신의 안색이 급속하게 질려갔다.
“저는 이런걸···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걸 저더러 믿으라는 겁니까? 당신은 남자로 태어나서! 그것도 족장과 신부의 정통한 핏줄을 이었으면서도 후계자는 커녕 전사도 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한들 남자가 되가지고 닭 모가지 하나 칼로 썰어낼 수 없다는 말을 저는 못믿겠습니다. 그것이 제게 요리를 해주기 싫어서 만들어낸 핑계라고 믿어버릴지도 몰라요. 허!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신부!”
가리시네는 소리를 질렀다.
“그 칼로 닭의 모가지를 단칼에 치는 겁니다. 하세요! 어서 하세요!”
아사신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칼을 잡았다. 숱한 짐승의 생명을 빼앗아 왔음이 분명한 그 피먹은 칼날이 자신의 손 위에서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녀가 닭을 내밀었다. 닭은 날개를 퍼덕거리며 온  몸으로 반항하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닭의 모가지를 건내받아, 돌판에 올려놓고 그 위로 칼날을 들이대어보았다. 갑자기 닭의 시커먼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치자 놀라서 움찔하고 한 발 물러설뻔 했다.
-해야되··· 할 수 있어.-
침을 꿀꺽 삼키고 닭을 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한 칼에 하는 거야. 한 칼에···.-
아사신은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다시 내리꽂았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힘이 빠져버렸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힘이 약했는지 칼은 닭의 모가지를 반쯤 통과하다 말았고, 닭은 홰를 치듯 발톱과 날개를 사정없이 퍼덕여서 아사신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났다.
“끼악!”
가까이 있던 시녀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도망쳤다. 목이 반쯤 대롱거리는 닭이 사방에 피를 흩뿌리며 도망다니고 있었다. 닭이 내지르는 소름끼치도록 쇄된 비명소리가 온 방안에 울려퍼졌다.
아사신은 정면으로 피를 뒤집어쓰고 새하얗게 탈색된 채 부들부들 떨었다. 눈에 닭 피가 들어갔는지 따가웠지만 닦아낼수가 없었다.
“바보같으니라고!”
뒤에서 가리시네가 소리쳤다.
“결국 너는 사내새끼도 못되는 구나! 전사도 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남자도 되지 못한 반푼짜리로구나! 그렇게 새하얗게 질려서 벌벌 떨어대는 네 모습이 지금 얼마나 우스운지 알긴 하느냐? 남자에게 안겨서 다리를 벌리고 그걸 네 속에 끼워넣으니 좋아서 죽겠더냐? 그래서 여자라도 되 버린 모양이지? 지금 네 꼴을 봐라. 닭 피를 뒤집어쓰고 처량맞게 거기 서 있으니 아주 꼴 좋구나. 분명 여자를 안아본 적도 없는 쑥맥이겠지. 어쩜 그렇게 못나고 바보같을까. 내가 네 어미라면 너를 낳고 아주 속이 상해 목이라도 매달았겠다.”
가리시네는 멈추지 않고 계속 외쳤다.
“닭하나 잡아 죽이지 못하는 아사신. 그렇게 허약해빠진 너를 어디다 쓸까? 족장의 씨앗을 받아다 네 메마른 불모지에 뿌리면 거기서 싹이 돋을까? 네 꼴을 보니 그렇다 한들 꼭 너같은걸 낳아서 네 어미처럼 되겠구나. 네 어미처럼 버림받고 미쳐버려라!”
가리시네는 저주를 퍼부었다. 웃고있는 그녀의 눈동자는10여년전 자신의 어머니를 내쫓던 족장의 아내들의 그것과 똑같았다.
아사신은 눈가가 뜨거웠다. 이렇듯 불시에 과거의 연결고리가 타인에 의해 억지로 끌어올려지면, 누더기같이 조각조각 이어붙여놓은 마음이 방어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댄다.
 자신이 바보같은 것은 스스로도 알고있다. 계집애처럼 닭 모가지 하나 제대로 내려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눈물이 났지만 여기서 울 수는 없었다. 저렇게 신랄하게 자신을 매도하는 가리시네 앞에서 울 수는 없었다.
 스스로도 지긋지긋했다. 언제까지나 과거에 매어있는 스스로가 너무도 지긋지긋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아사신...-

목이 졸려왔다.
어머니가 자신의 작은 몸 위에 올라타고 목을 졸라오던 그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수라킨의 비명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어설프게 만들어진 신소에 검은돌과 흰돌이 피에 젖어 번들거렸다. 어머니의 뜨거운 피가 자신의 얼굴에 흩뿌려져 얼굴에서 김이 솟아올랐다.

-널 낳지 말아야 했어. 넌 실패작이야···.-
자신의 얼굴과 꼭 닮은 어머니의 얼굴이 귓가에 다가와 소근거렸다.
-다시 낳아야 해. 너는 실패작이야···.-

 아사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에 들어간 피를 거칠게 닦아내고, 핏발 선 눈으로 가리시네를 응시했다.
“네. 저는 당신이 원하는 음식을 만들지 못하겠습니다. 얼마든지 비웃으세요. 제 음식이 목적이 아니라 저를 모욕하는 것이 당신의 용무였군요. 용무가 끝났으면 이만 가도 되겠습니까?”
푸드득 거리며 사방을 해집고 다니던 닭이 시종의 손아래 덜렁거리던 목이 비틀려 끽 하는 단발마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쩍 벌어진 닭의 부리는 조각조각 깨져있었다. 그 처참하게 죽은 모습이 마치 자신을 보는 듯해 아사신은 소름이 돋았다.
“언젠가 흘려들었던 소문이 맞군요. 신부의 아들은 짐승을 피가 무서워서 사냥도 못한다는 그 소문이 진짜일줄은 몰랐습니다. 별 생각없이 찔러본 건데 적중하다니 정말 즐겁군요. 가버리세요. 당신이 만든 음식을 먹었다간 꼭 당신같은 아들을 낳을까 두려워서 못먹겠습니다.”
가리시네는 얌전히 옆에 놓여있던 아사신이 만들어온 닭죽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릇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아직도 김이 올라오는 죽이 사방에 흩어졌다. 아사신은 그 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그럼. 이만···.”
아사신은 침착하게 한손을 가슴에 얹어 예를 표했다. 가리시네는 그 뒷 모습을 오만하게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아사신··· 같이 죽자···.-
어머니가 피가 철철 흐르는 손목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쥐며 등에 매달렸다.
-같이 죽자. 실패했어···. 너는 실패작이야···.-
-닥쳐요. 어머니···.-

아사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피갑칠을 하고, 터벅터벅 걸어나오는 아사신을 사람들이 깜짝 놀라 쳐다보고 있었다
“오빠!”
수라킨이 궁 앞에 서서 당황한 낯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빠! 대체 무슨!”
“신부!”
타스가와 수라킨이 서둘러 다가와 피에젖은 아사신의 몸위에 자신의 겉옷을 걸쳐주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분노와 당황, 호기심이 차례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볼일은 끝냈어. 이만 집에 가서 쉬고싶어.”
“오빠···.”
수라킨이 울음섞인 목소리로 아사신을 불렀지만 아사신은 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비참했다.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사라지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 그 저주받은 기억은 다시 한번 어둠속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그 진득한 손을 뻗고 있었다.
영원히 봉해놓고 떠올리기 싫은 그 기억들로부터 숨고 싶었다.

 돌아앉은 모성.
미쳐버린 모성.
거부당한 자신의 존재이유.

그날-
 자신의 어미가 잘못 낳아버린 아들을 저주하며 미쳐버린 날.
 아사신은 평생 복구가 불가능한 상처를 가슴에 새겨야만 했다.


*                *                *


본격적인 가을을 알리는 비가 쏟아져내렸다. 날씨는 어젯밤부터 쏟아내린 비로 제법 쌀쌀해 졌고, 비가 오는 동안 가리시네는 아사신을 괴롭히지 않았다.
 “재수없는 년.”
수라킨이 아사신으로부터 일의 전말을 듣고 나서 한 말은 딱 저 한 마디였다. 그리고 아사신에게도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언제까지 그럴거야?”
그 말만 하고 수라킨은 밖으로 나가버렸고, 타스가는 영문을 몰라 화가 난 듯한 수라킨의 뒷모습만 쳐다보았다.
“수라킨이 한 말이 무슨 뜻이죠?”
“글쎄요···.”
아사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웃는 모습은 정말로 쓰고 괴로워 보여 타스가는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비는 이틀을 연달아 내리고야 그쳤다.
 비가 온 다음날의 세상은 공기가 더욱 청명해지고, 더러운 때가 씻겨내려간다는 좋은점도 있지만, 제법 많이 내렸던 이번 비로 인해 어딘가의 토사가 무너져 내렸는지 붉은흙탕물이 마을로 흘러들어왔고, 그 양은 꽤 많았다. 그 더러운 것을 잠자코 지켜보던 가리시네는 비가 그치자마자 아사신에게 그것을 치우라는 명을 내렸고, 아사신과 타스가는 그 더러운 진흙을 손수 치워야 했다. 수라킨은 그 날 이후 식사때를 제외하고는 보기가 힘들었던 터라 둘이서만 그 작업을 해야 했다.
“타스가. 미안해요. 그냥 들어가서 쉬어요.”
질퍽질퍽한 진흙더미를 손으로 쓸어 담아야 하는 기분 나쁜 작업을 아무런 말 없이 도와주는 타스가가 아사신은 새삼 고마웠다.
 첫만남이 일단 너무 강렬했고, 족장의 오른팔이라는 직책 때문에 처음에는 그를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았었지만, 타스가는 알면 알수록 착한사람 이었고, 아사신은 점점 그가 좋아졌다.
 아사신은 티는 잘 내지 못했지만, 사실은 늘 타인의 온기를 그리워 하고 있었다. 어릴때의 괴로운 기억과, 이십년간 쌓이고 굳어온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진 마음은 쉽게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는 타인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 애가 타면서도 다가오지 못하게 스스로 밀어내 버리는 모순을 늘 범하면서 살아야 했다.
 남이 자신으로 인해 행복해하거나, 즐거워 하거나 하는 일이 아사신의 인생에선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고, 반대로 남이 자신에게 행복한 감정을 심어주는 일도 수라킨과 소사린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었다.
아사신은 외로웠지만 티를 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커왔고, 그런 척 이라도 하지 않으면 누더기같은 마음을 더 이상 지속시킬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온 타인을 쉽게 밀어낼 줄 몰르는 사람이었다. 온기를 찾는 음지의 새싹처럼 겨우 찾아온 햇살의 따스한 한 자락을 놓치기 싫은 마음은 남이 상처를 주어도, 면전에서 배신 해도 한결같이 그 햇살을 향해 고개를 쳐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잔인해서 아사신의 그런 소극적인 부분을 계집애 같다고 놀리고, 조롱해왔다. 수없이 상처받아온 아사신은 점점 더 고독해졌고, 자신과 타인사이의 고랑을 매일매일 더 깊이 긋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아사신도 타스가에 대해서만큼은 다시 한번 그 마음의 좁은 문을 열고만 싶었다. 아사신은 그가 천성적으로 너무도 착하고 정직한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가끔은 수라킨이 타스가를 면박주고, 자신이 수라킨을 나무라는 이 관계가 오랫동안 유지되길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말똥을 치워야 했을때도, 돌자갈을 골라내야 했을때도, 그리고 지금처럼 만지기도 기분나쁜 진흙을 바구니에 담는 지루한 작업도 타스가는 군말 한 마디 없이 아사신을 도와주는 것이다.
 “신부. 이쪽은 제가 할테니 저 쪽부터 해서 숲 안쪽으로 들어가십시오.”
타스가의 말에 아사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구니와 채를 들고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을안쪽에 넓게 포진해있는 부분을 타스가가 맡아주기로 했으니, 아사신은 그보다는 좀 더 쉬운 쪽을 맡은 편이었다.
아사신은 일에 열중하기로 마음먹고 흘러내린 소매를 다시 접어올렸다. 하늘이 다시 흐려지는게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비가 오면 다시 토사물이 마을로 쏟아질지 몰라.-
이 더러운 흙더미를 따라가면 그 근원지가 나올거란 생각에 아사신은 질퍽한 흙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조금씩 숨이 가빠 올 무렵에야 아사신은 흙이 폭삭 무너져내린 작은 둔턱에 도달 할 수 있었다. 상당히 나이가 많아 보이는 큰 나무 두그루가 번개를 맞아 쪼개져서 죽어있었다. 그 충격으로 버팀목 역활을 하던 다른 나무들이 쓰러지면서 옆에 있던 작은 나무들도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도미노처럼 토사와 함께 무너져 내린 모양이었다.
-나중에 타스가와 함께와서 나무들을 똑바로 심어주고, 죽은 나무는 잘라내야 겠군.-
아사신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일단 자신의 힘으로도 할 수 있는 뿌리가 드러난 어린 묘목들을 바로 세워주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더러워진 자신의 옷과 얼굴이 나무를 껴안고 씨름하는 동안 완전히 흙투성이가 되어버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렇게 비내리고 바람부는 날은 나무 심기에는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내버려두면 아직 어린 나무들은 뿌리가 말라버릴 것이다.
아사신은 나무 뿌리의 배 정도 되는 구덩이를 손으로 열심히 파서 자잘한 잔뿌리도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무를 심었다. 구덩이가 너무 깊으면 무거운 흙에 어린 뿌리가 압사해버리고, 너무 얕게 파면 나중에 뿌리가 지상으로 올라와 버리므로 세밀하게 눈썰미를 발휘하여 구덩이를 파야 했다.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흙이 덜 무너진 곳에 나무를 심고, 발로 꾹꾹 밟아 흙을 견고히 하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즐거웠다. 처량맞게 뿌리채 뽑혀서, 진흙속에 뒹구는 모습은 말못하는 식물이라도 보기에 안타까웠던 것이다.
 아사신은 열심히 나무를 심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지?”
라고 음산한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사신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분명 아무도 없던 그 곳에는 야스카산이 시퍼런 눈을 빛내며 음침하게 서 있었다.
“조··· 족장.”
당황해서 말을 더듬어 버렸다. 급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으나, 야스카산은 상관하지 않고 재차 물었다.
“여기서 뭘 하느냐고 물었다.”
“이곳의 토사가 무너지며 흙탕물이 마을 안쪽으로 유출되었습니다.”
야스카산은 오만하게 고개를 뒤로 젖히고 턱을 쓰다듬었다.
“그것은 나도 알고 있다. 내가 묻고 싶은건 네가 왜 그러고 있냐는 것이다.”
“가리시네가··· 시켰습니다.”
“가리시네가?”
“···그렇습니다.”
아사신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아사신은 야스카산과 이렇게 둘이서만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정말 반갑지 않았다. 저번에는 그래도 타스가와 수라킨이 옆에 있어주었지만, 이번에는 혼자다. 그것도 마을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말이다. 아사신은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왜 가리시네가 시킨다고 그대로 행하고 있는거지? 이런일은 신부가 할 것이 아니다.”
-당신이 가리시네에게 권한을 줬으니 그녀가 그러는 거겠지.-
아사신은 속으로 짜증을 냈다.
 “가리시네가 제게 시키는 것은 제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족장께서는 상관하지 마십시오.”
야스카산은 입술 끄트머리를 야비하게 한쪽으로 치켜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충분히 할 수 있다니, 그럼 얼마전에 닭을 죽이지 못한 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가?”
아사신은 옷자락을 세게 비틀어 쥐었다. 이곳의 지도자는 야스카산이다. 그가 자신의 안방에서 일어난 일을 모를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장소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얼굴이 희게 질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날의 수치와 모욕이 마치 방금인양 생생히 떠올랐다.
“···그것은···족장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아사신을 보며 야스카산이 혀를 찼다.
“너는 자존심도 없는가? 신부가 되었으면 좀 더 당당하게 가리시네를 대하란 말이다. 근본적으로 그녀는 여인이고, 너는 사내다. 왜 그렇게 죽어지내는 거냐?”
아사신은 고개를 더욱 아래로 수그렸다. 드러난 목덜미에 빗방울이 하나 둘씩 터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야스카산은 계속 말을 이었다.
 “짐승 한 마리 못해서 너보다 지위가 낮은 여인에게 그런 수모를 당했다니, 정말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도 그렇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당당하게 네 변명도 못하는 건가? 말해보거라 아사신. 내가 무서워서 그러느냐?”
야스카산의 말에 쭉 수그리고 있던 아사신이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얼굴과는 달리 입술은 얼마나 잘근잘근 씹어댔는지 새빨갛게 피가 몰려 있었다.
“왜 내게 상관하는 겁니까?”
아사신은 자신의 손목을 꽉 잡았다. 안그랬다가는 야스카산에게 삿대질이라도 할 것 같았다.
“왜 당신이 나를 이해하느니 못하느니 왈가왈부 하는 것입니까?”
점점 목소리가 흔들렸다. 맞잡은 손목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내가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몸을 열어줘야 하니까 우습게 보입니까? 아니 그전에 이미 우습게 봤겠지요. 나를 제치고 위대한 족장이 되신 야스카산. 그런 당신 눈엔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
아사신의 회색 눈동자에 설움이 가득찼다.
 “신의 대변인. 위대한 족장나으리. 내가 아무리 바보 천치에, 남자답지 못하다 해도 당신은 내게 아무런 제제를 가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몸을 섞은것은 하나의 의식이었을 뿐. 우리는 부부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이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사내가 사내를 사랑할 수도 없지요. 그러니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신경쓰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또 당신과 나는 합방 해야 할 것이고, 그것으로 당신은 하룻밤 유희이자 신성한 의무를 다한 것이고, 나에게는 하룻밤의 지옥이 될 것입니다.”
똑- 하고 눈물 한 방울이 아사신의 새하얗게 질린 창백한 뺨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그 눈물의 궤적을 야스카산은 말 없이 바라보았다.
 톡- 하고 작게 대지를 적시던 빗방울이 서서히 굵어지기 시작했고, 아사신의 얇은 옷자락도 젖어들기 시작했다.
“네. 저는 짐승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얼간이 입니다. 이미 당신의 아내가 저를 충분히 욕보였으니, 더 이상 말 안하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 돌아가십시오. 자신이 바보인 것을 아는 바보를 비웃는 것은 더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가십시오. 나는 내 할 일을 하겠습니다.”
아사신은 흘러내린 눈물을 아무렇게나 소매로 문질렀다. 그 바람에 더러운 흙탕물이 마구잡이로 얼굴에 번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설움이 북돋아 올랐다. 소사린이 보고 싶었다.

 다시 자신의 일에 열중하기로 하고 뒤 돌아 앉아 어린 묘목의 가지를 정리하던 아사신은 갑자기 다가온 뜨거운 숨결에 깜짝 앉은자리에서 튀어올랐다.
“족장!!!”
차가운 공기에 소름이 돋은 팔뚝을 크고 뜨거운 손가락이 한 손에 휘어잡아온다. 그 감촉은 마치 불에대인 것 처럼 화끈하다. 그만큼 야스카산의 몸은 뜨거웠다.
“아사신···.”
야스카산은 부들부들 떨고있는 여린 몸을 뒤에서 부터 붙잡아 꼼짝달싹 못하게 압박했다. 몹시 놀랐는지 발이 미끄러진 아사신의 작은 육체가 가슴에 딱 맞게 안겨왔다.
 “노···놓아 주십시오···.”
“아까의 기백은 다 어디로 갔지? 기세좋게 소리치더니 내가 다가오니 겁이라도 나는건가?”
불쌍할 정도로 떨고있는 육체를 안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낮게 웃으며 목덜미를 어루만지자 소름이 돋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무서워서 이렇게 꼼짝도 못하는 주제에 아까는 감히 내게 따지듯이 말을 했겠다?
“왜 상관하느냐고? 당연한 것 아니냐. 너는 내 신부. 나는 네 주인이다. 네 몸도 마음도 처음부터 내게 속한 것. 내 것을 내가 관리한다는데 왜 네가 뭐라하는 거지?”
그 말에 아사신은 치를 떨었다. 몸도 마음도 자신의 것이라고 조롱하듯 말하는 남자가 너무도 미웠다.
“웃기지 마십시오!”
어디서 그런힘이 났는지 아사신이 야스카산을 세게 밀쳤다. 미끄러운 진흙때문에 뒤로 밀려난 야스카산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 아사신을 노려보았다.
“굉장한 자신감이시군요! 몸을 가졌더니 마음도 탐이 나던가요? 그 마음. 가진 다음엔 멋대로 상처내고 짓이기며 가지고 놀다 결국에는 쓰레기통에 가차없이 던져버리겠지! 하!”
아사신은 코웃음을 쳤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자신의 몸에 닿기도 전에 화로 인해 증발해 버릴 것 같았다.
“정말로 오만하기 이를데 없는 분이시군요. 네에, 제가 미처 몰라봤습니다. 마음껏 가져가십시오. 이미 몸도 드렸는데, 마음 주는게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마음도 드릴테니 어디 멋대로 해보십시오! 우리의 위대한 족장 야스카산이시여.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짐이 마땅하지요. 그렇고 말고요!”
아사신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것은 과장된 정중함이었다. 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이 아까 야스카산이 아사신에게 보여주었던 비웃음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내게 그런식으로 말하지 마라. 나는 너의 주인이다. 감히 누구 앞에서 그 주둥아리를 놀리는지 다시 생각하는게 좋을거다 아사신.”
야스카산이 목소리를 내려깔고 이빨 사이로 내뱉듯이 말했다.
 “왜요? 왜 제가 틀린말 했습니까? 당신이 제 주인이라면서요? 저는 그것을 수긍했을 뿐입니다. 인정했을 뿐입니다. 당신의 의지대로 행해 준다는데 왜 화를 내십니까. 신부란 족장이 마음대로 쓰라고 신이 갖다 준 장난감 아닙니까?”
야스카산의 여유롭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혔다.
 아사신은 오른손을 심장에 대는 완벽한 예까지 표하며 그를 찬양하고 있었다. 그러나 행동과는 달리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고, 어조는 히스테릭하게 변해갔다.
“멀쩡하게 약혼녀까지 있는 남자. 하룻밤 새 질질 끌고와서 신부랍시고 제물을 안겨주고, 새집을 안겨주면 계산은 끝난거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아무 양심에 꺼리낄 것이 없겠지요! 하다못해 제게는 파혼을 요구할 권리도 없었습니다. 남자가 남자에게 억지로 안겨야 하는데, 그걸 거부할 권리도 없었단 말입니다! 그것은···그것은 당신네들이 내게 요구한것은 혼인을 빙자한 강간이었습니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내렸다. 신부가 된 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채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설움과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자신만큼 가슴 아파하는 소사린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고, 병신같은 오빠를 둔 덕에 어릴때부터 노동에 치여 살아야 했던 수라킨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진심. 자신의 갈 곳 없는 설움이 이 모든 원인제공자인 야스카산에게로 쏟아졌다.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자신과의 혼인따위 바라지 않는다는 것. 그 역시 피해자라면 피해자라는 것. 다만 그는 아무것도 잃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이 강제 신부의식으로 인해 소사린을 잃고, 외면하고 싶었던 과거에 다시 발목을 붙잡혔던 대신 그는 아무것도 내 주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잃을것도 없었다. 그것이 아사신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너는 도를 지나쳤다.”
마침내 야스카산은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며 음산하게 속삭였다. 그 얼굴에는 그가 늘 짓곤하던 비웃음도 찾아 볼 수 없었다.그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아사신도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이리 와라. 지금이라면 용서해 주겠다.”
“싫습니다.”
아사신은 고집스럽게 말하고 뒤로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야스카산의 어금니에서 뿌드득- 하고 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 오라고 했다.”
“저는 싫다고 했습니다.”
둘은 잠시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대치했다. 야스카산의 푸른 눈동자는 이젠 숫제 활활 타오르는 듯 했다. 그와는 반대로 불타오르던 아사신의 눈동자는 이제야 잠시 나갔던 이성이 돌아왔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창백해져 갔다.
야스카산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이리 와라.”
“···저도 두 번 말하기 싫습니다.”
아사신은 아집을 부렸다. 아까까지 족장의 앞에서 소리 지르고, 비아냥 댈때의 용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지고싶지 않았다. 자신의 열등감을 뭉쳐놓은 듯한 저 남자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을 들키기 싫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일 뿐.
용기는 그것이 타올랐던 속도만큼이나 급속하게 사그라들었고, 아사신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뿜어내는 살기를 아무런 여과없이 맛봐야만 했다. 오기를 부렸던 만큼 야스카산의 거침없는 푸른눈을 마주 쏘아 주었지만, 자신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산속의 온도는 점점 떨어져만 가고, 아사신은 일을 하느라 겉옷을 집에 벗어두고 왔다. 얇고 하늘거리는 천으로는 이 빗줄기를 막아낼 수가 없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아니, 떨리는 몸은 이 차가운 비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앞에 흉폭하게 버티고 서서 검은 오오라를 피워올리는 저 남자 때문이었다. 용기가 사라진 자리에 공포가 밀려들어 다리를 땅에 옭아매었다. 백수의 왕 호랑이 앞에서 자신의 이빨도 크고 단단하다 자랑질한 토끼의 심정이었다. 야스카산의 분노한 얼굴을 아사신은 오로지 오기로 마주 보았다.
 그래서,

“아사신!!!”
하고 야스카산이 고함을 질렀을때, 아사신은 숨도 못 쉴 만큼 공포에 질려버렸다. 정말로 머리카락이 쭈삣 설 정도로 무서운 사자후였다.
 아사신의 몸이 번개라도 맞은 듯 한차례 부르르 떨렸고, 그제서야 붙어있던 다리를 겨우 뗄 수 있었다. 야스카산이 성큼성큼 자신을 향해 다가오며 손을 뻗고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 아사신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죽는다.-

아사신은등을 돌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돌뿌리에 다리가 채여 신발이 날아가도 상관하지 않았다. 차가운 이성과 숨가쁜 본능이 경고해왔다. 자신은 잠시 미쳤던 것이다!
“허억! 허억!”
숨가쁘게 달리던 아사신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가 심장이 멎을 뻔 했다. 야스카산이 자신의 뒤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그 눈은 마치 들소 사냥을 나갔을 때처럼 살기로 번들번들 빛이 났다.
-날 죽일거야!-
무서웠다. 아사신은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공포는 비쩍마른 다리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맨발이 드러난 나무뿌리에 긁혀 찢겨 나가고, 길이 나지 않는 숲속의 잔가지들이 얼굴을 스치며 피를 튀겼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뒤에서 뛰어오는 남자의 육중하지만 결코 느리지 않은 발걸음이 자신을 바짝 쫓고 있었다. 그 손에 잡히면 절대 한 대 맞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 뻔했다.
“큭! 흐읏!”
절로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순수한 공포의 눈물이었다. 급격한 경사로를 반쯤 구르듯이 내달렸다. 흙탕물이 튀어오르고, 빗물에 다리가 미끄러졌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아사신은 왜 하필 이 순간에 자신의 자제력이 무너져내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정도의 도발이야 늘 있어왔던 일이지 않는가.
추격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아사신은 죽을힘을 다해 달렸기 때문에 발 빠르고 강인한 야스카산도 쉽게 쫓아오진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인듯 원체 체력도 바닥이거니와, 아사신은 비를 맞으며 뜀박질 하는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자신의 다리가 점점 풀리는 것을 느꼈다. 호흡이 급격히 가팔라지고, 뜨거운 남자의 입김이 자신의 목덜미에 닿을듯 말듯 했다. 남자는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지만 귓가를 때리는 빗소리 때문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옷자락을 스칠듯 말듯한 그의 손만이 너무도 신경쓰였다.
생각따위 할 수 없었다. 공포가 머릿속을 마비시켰다. 이제는 자신이 달아나는 이유가 그 때문인지, 아니면 그에게 잡히는 것이 무서워서 달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되버렸다.
미친듯이 뛰고 굴렀다. 야스카산은 이대로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점점 속도를 내고 있었다. 그의 손 끝이 자신의 젖은 머리카락을 간발의 차로 스쳐지나갔다.
공포로 부옇게 젖은 눈동자가 질끈 감기는 순간,

아사신은 자신의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왜 이렇게 몸이 가볍지? 하는 짧은 의문을 잠시 가졌으나, 공중에 떠올랐던 몸은 곧장 하강하기 시작했고, 곧 아사신은 자신의 몸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사신!!!”
야스카산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손이 거의 한 뼘 차이로 허공을 움켜쥐고 있었다.

-왜 나를 저렇게 아픈듯이 부를까···.-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야스카산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얼굴은 절로 웃음이 나올만큼 괴상했다.

 아사신은 잠시 의문을 가졌지만 곧 잊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다는 것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아무 상관없이 느껴졌다. 방금전까지 야스카산의 손에 잡히면 죽을것 같이 도망다녔던 것이 신기할 만큼 그 짧은 순간 아사신은 생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있었다.

-난 죽는건가? 더 이상 살아나가지 않아도 되는건가? 그런가? 그래도 되는 거구나···.-

아사신은 미소를 지었다. 다보 아저씨는 사람이 죽을때는 주마등과 같이 태어난순간부터 죽는 순간의 기억이 지나간다고 했는데 그런 것은 없었다. 다만 곧 찾아와줄 죽음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뿐이었다.
 이 마지막 순간에 보게 되는 것이 야스카산의 야차같은 얼굴이라는 것이 조금 아쉬웠을 뿐이었다.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는 소사린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불평같은거 늘어놓을 시간따위 자신에게는 없었다.

뒤통수에 날카로운 고통을 느끼는 순간, 칠흑같은 암흑이 찾아왔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항상 겨울은 춥고 힘든 계절이었지만, 올 해 겨울은 유난히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하며 아사신은 얼어붙은 손발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따스한 입김은 발치로 가기도 전에 공중에서 차갑게 식어 버렸기 때문에 별로 소용이 없었다.
 “춥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아사신은 중얼거렸다. 마치 춥다고 말하기만 하면 든든한 남자 어른이 따스한 장작불을 가져다주고, 배고프다고 이야기하면 먹을것을 가져다 줄 것 처럼···.
아사신은 다시 한번 호오- 하고 입김을 불어보았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으려니 자꾸만 눈이 주변에 쌓여서 더 추운것 같았다.
“오래 기다렸어?”
“소사린!”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아사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니. 별로 안 기다렸어!”
소사린은 아사신의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친구였다. 부족내에서도 제법 위치가 있는 아비를 둔 소사린은 자신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그녀는 상냥하고, 밝고, 사랑스러웠으며 자신에게 몹시 잘해주었다. 그런 그녀가 아사신은 정말 좋았다.
“여기 들고왔어. 조용히 들고 나가. 난 곧 아버지가 돌아오실테니까 집에 있어야해.”
소사린이 가져다 준 것은 간단한 덫이었다. 그것은 작은 새를 잡을 때 쓰는 것으로, 새들이 지나다닐 만 한 곳에 가느다란 끈을 묶어 올가미를 장치하여 막대위에 새가 앉았을때 발을 묶어 잡는 올무였다. 봄이나 여름같이 강에 물고기 많을 때는 통발이를 사용해 자주 물고기를 낚았지만, 겨울에는 얼어붙은 강을 떠나 모두 어디론가 떠나버렸는지 피래미 한마리 보이지 않았고, 비축해둔 얼마 안 돼는 말린 과일과, 육포는 예상보다 일찍 떨어져 버렸다. 아직 겨울은 한참이나 남았고, 굶어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이렇게 덫을 놓아 새라도 잡아보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자꾸 주면 내가 미안해서······.”
아사신은 말을 흐렸다. 전에 소사린이 가져다 준 덫은 걸려든 새를 잡다가 놓치는 바람에 그만 당황하여 깔고 앉아버렸다. 부서진 덫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사신에게 소사린이 괜찮다며 새로운 것을 주겠다고 이리로 데려온 것이다.
 “어차피 팔리지도 않는데 뭘··· 내가 몇 번 빼내가도 모르잖아? 괜찮으니까 어서 가봐.”
그렇다. 보통 남자들은 그런 간단한 덫 따위 자신이 직접 만들어서 사용했다. 아사신도 만드는 방법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 작고 어린 손으로 열심히 만들어서 설치해 보아도 역시 어딘가 어설펐는지 새들은 걸려들었다가도 쉽게 도망가 버리는 것이었다.
어차피 팔리지도 않아서 창고에서 자리만 축내고 있는 물건이라지만, 그래도 소사린이 몰래 아사신에게 넘겨준 걸 그 아비가 알면 소사린을 매질 할 것이다. 그녀의 아비는 일곱 명이나 되는 딸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막내딸로 태어난 소사린을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틈만 나면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서 그녀를 괴롭혀댔다.
그것을 알고 있는 아사신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괜찮아. 모른대도? 이만 가 봐. 이러다 진짜 들키겠어.”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
아사신은 소사린이 조심조심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말로는 괜찮다 걱정마라 했지만 집안으로 들어가는 소사린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굳어있었다.
-왜 저렇게 작고 예쁜 소사린을 때리는 걸까?-
누구에게나 상냥한 소사린. 착하고 예의바른 소사린. 동네꼬마들이 자신을 뒤따라오며 놀려댈 때면 득달같이 달려 나와 자신을 감싸주는 강인한 소사린.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한 소사린은 아사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아. 아니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어머니지.-
아사신은 생각을 정정했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너무너무 나약하고, 울기만 할 줄 아는 어머니지만 그래도 아사신은 어머니가 좋았다.
 -얼른 덫을 놓고 어머니에게 가봐야겠다. 내가 오래 안보이면 불안해하시니까···.-

아사신의 어머니 헤로나킨은 족장에게서 버림받은 여자였다. 버림받은 이유는 제대로 된 후계자를 낳지 못했다는 것.
 연이은 출산은 아직 어렸던 그녀의 몸을 망가뜨렸고, 족장의 아내들과 신관들은 그녀의 몸에선 더 이상 후계자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족장에게 속삭였다.
 족장은 세번째 임신을 할 때까지 유예기간을 주었다. 적어도 세번째 아이는 제대로 된 아이를 낳으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헤로나킨은 세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그 아이가 열달을 채울동안 늘 두려움에 벌벌 떨고 살았다.
세번째 아이는 모두의 관심속에 태어났다. 헤로나킨은 아사신을 낳을 때 만큼 난산을 격었고, 아이가 자신의 다리사이를 빠져나가자마자 산파에게 아이의 성별을 물었다. 산파는 차마 그런 그녀에게 셋째 아이가 여아라고 말해 줄 수가 없었다. 결국 갓 출산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아이의 성별을 확인한 그녀는 그대로 기절해서 삼일 간 깨어나지 않았다.
족장은 수라킨이 네살이 되던 해에 그녀를 버렸다. 왜 바로 버리지 않고 사년을 기다렸는지는 몰라도, 아마 그는 헤로나킨을 어느정도는 책임지고 싶어했던 것 같았다. 물론 그 뜻은 그의 성질급한 아내들의 온갖 방해공작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헤로나킨은 남매와 함께 아무런 원조도 받지 못하고 쫓겨났다.
 그녀의 이웃도, 친구도, 친정도 그녀를 거두어주지 않았다.
 열 다섯살 미성숙한 몸으로 첫 출산을 한 후, 아내들의 모략과 질시에 시달려온 그녀는 남편의 냉대와 신부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압력속에 바싹 마른 꽃처럼 시들어 있었다.
 한 때 빛나는 젊음이 살아 숨쉬던 은빛 눈동자는 칙칙한 회색으로 변질되었고, 희고 곱던 피부는 돌에 낀 이끼마냥 늘 땀에 젖어 축축하고 검게 착색되었다.

버려진 헤로나킨은 아사신에게 집착했다. 그녀의 세 아이 중에서 제대로 된 아이는 아사신 뿐이라고 생각했다.
죽은 아이, 계집아이, 그리고 아사신. 그 등에 훌륭하게 신의 핏줄을 이었음을 증명하는 검은 날개가 돋아있는 아사신. 그녀의 머릿속에는 족장이 아사신이란 이름을 지어주었을때 그 뜻 속에 빈정거림도 함께 심어 주었음은 까맣게 지워지고 없었다.

 -검은 까마귀 아사신. 신의 심부름꾼. 너는 절대 신의 현신이자 그 핏줄의 증거인 족장이 되지 못하리라- 라는 아버지의 냉소가 담긴 이름.
 족장과 신부의 아들에게 지어줄 수 있는 이름은 절대로 아니었다.

아사신은 어머니가 가여웠다. 그리고 동시에 지긋지긋했다.
 언제까지고 과거에 매달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어떨 때는 증오스럽기까지 했다.
그녀는 갓 태어난 수라킨을 돌보지 않아서, 여섯 살이던 아사신이 강제로 어머니의 젖을 물려주어야 했고, 기저귀를 빨아야 했다. 아사신의 어린 손은 습진으로 인해 피고름이 터졌다.
쫓겨난 후에는 그녀의 친정어머니가 몰래 그곳으로 찾아와 매달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었지만 그걸로는 생활하기에 택도 없이 모자랐다. 적어도 쫓겨나기 전에는 부족하나마 먹을것과 입을것이 주어졌었지만, 이제는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웠다.
그래도 가을에는 괜찮은 편이었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자 미리 먹을것을 마련해 두지 못했던 아사신의 집은 먹는 날과 굶는 날이 비등할 정도로 가난해졌다. 아사신이 잡아오던 작은 새나 물고기 같은 것도 별달리 예전처럼 성과가 좋지 못했다. 아사신은 어머니가 점점 말라가는 것이 너무 걱정되었다.
덫을 집 주변에 설치하고 들어가자 어머니는 과연 자다 깨서 아사신을 찾으며 울고 있었다.
“아사신! 아사신!”
“네! 저 여'끍楮&#65533;!”
벌컥 문을 젖히고 들어가자 어머니가 앙상한 팔을 뻗어오며 울부짖었다.
“아사신! 자꾸 어딜가는 거니? 응? 내 새끼. 내 새끼···.”
요근래 들어 꿈을 꾸고 나면 발작을 일으키는 어머니는 또 머리맡에 있는 물건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진 모양이었다. 그녀의 발치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수라킨의 이마가 깨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
아사신은 한숨을 쉬며 수라킨을 안아 들었다. 수라킨의 무표정한 얼굴은 자신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뭐라도 잡아와야지요. 그래야 수라킨이랑 어머니가 먹을 게 생기잖아요? 제가 안 보인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에 어머니는 표독스럽게 수라킨을 노려보았다.
“그런 건 갖다 버리려무나. 저걸 내다버리면 우리 둘이 먹을 것이 여유가 생기겠지.”
“어머니··· 그런 말은 하지 말랬잖아요······.”
아사신은 미간을 찡그렸다. 예전에는 그래도 수라킨 앞에서는 저렇게 대놓고 말하지 않았는데 요즘들어 그녀는 부쩍 상태가 이상해졌다. 어머니는 수라킨을 잠시 쏘아보다 지쳤는지 다시 이불속으로 야윈 몸을 뉘였다.
“피곤하구나······.”
“쉬세요. 혹시 오늘 새라도 잡혀 준다면 고기를 먹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때 깨워드릴게요.”
아사신의 말에 그녀는 퀭한 눈동자를 잠시 데굴데굴 굴리다 곧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한 아사신은 한숨을 쉬며 수라킨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눈이 오고 있었다.
“수라킨 안추워?”
수라킨은 고개를 흔들었다. 짧고 푸석푸석한 그녀의 은색머리카락이 가무잡잡한 이마 위로 물결쳤다.
 눈이 오는게 신기한지 아무것도 담지 않는 검푸른 눈동자에 희마히게 빛이 반짝였다. 아사신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수라킨. 너무 이쁘다. 이렇게 이뻐서 나중에 오빠가 어떻게 널 시집보내지? 네가 시집가면 서운해서 어쩌지?”
발그레한 볼을 꼬집으며 놀리듯이 말하자 수라킨이 말간 눈을 들어 아사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랑 결혼할거야. 시집 안가.”
아사신은 후후- 하고 웃었다.
“정말? 정말 시집 안가? 나중에 딴 말하기 없기다?”
“응. 안가. 내가 오빠 아기 낳아줄게.”
수라킨은 네살짜리 치곤 비교적 정확하고 분명하게 말을 했다. 그녀는 다른 아이들처럼 입에서 나오는데로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그 의미를 분명히 아는 단어만을 골라서 말하는 아이였다.
아사신은 수라킨의 새파란 눈동자가 아무런 흔들림없이 똑바로 자신을 응시해오자 약간 당황했다. 수라킨은 아직 어린애면서도 자신의 뜻을 피력할때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 눈동자를 자신과 눈을 맞추며 단언하듯이 말하는 수라킨을 아사신은 조금 시선을 피했다.
 “그래그래. 나중에 딴 말이나 하지 마~.”
아사신은 해설피 웃으며 그녀를 고쳐안았다. 수라킨은 자세가 불편한지 몸을 비틀었다.
“···새······.”
“응?”
“저기 새···있어.”
수라킨이 가르키는 방향에는 아까 아사신이 설치해놓은 덫에 걸린 이름모를 새 한마리가 날개를 푸드득 거리고 있었다.
“기다려 수라킨! 오늘은 고기를 먹겠다.”
아사신은 신이나서 수라킨을 내려놓고 망을 준비하고 다가갔다. 새는 사람이 다가오자 어쩔줄 몰라하며 더 힘차게 날개짓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사신이 만들었던 조잡한 덫과는 달리 이번 것은 튼튼했던 것이다.
성공적으로 새를 망에 가두자 작은 가슴이 두근두근해졌다. 잠시 새의 검은 눈망울과 눈이 마주치자 심장 한 켠이 뜨끔 했지만, 어머니와 수라킨에게 고기를 먹게 해주고 싶었기에 마음을 굳게 먹었다.
“오빠 다보 아저씨한테 다녀올게. 기다려 수라킨.”
“응 오빠···.”
다보 아저씨는 소사린의 친척으로 아사신에게 잘 대해주는 마을에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마침 그는 집에 있어서 아사신을 반겨 주었다.
“다보 아저씨! 저 새를 잡았어요!”
아사신은 신이 나서 말했다.
“오! 새를 잡아왔구나. 제법 큰 티치새구나. 이 녀석은 비계가 많아서 잘 날지 못하지. 기다려. 곧 잡아주마.”
다보는 새가 든 망을 대충 짊어지고, 밖으로 나갔다. 곧 둔탁한 것이 나무통에 부딪히는 소리와 새가 작게 짹- 하고 우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고, 곧 다보가 돌아왔다.
“대충 살을 발라 놨으니, 집에 가서 소금에 구워 먹으면 된다. 그리고 이건 내가 주는 선물.”
아사신은 육포가 든 주머니를 받아들고 멍하니 다보를 올려다보았다.
“겨울은 길단다, 아사신. 많이 어려워지면 내게도 찾아오고 그래라. 너보단 내가 사정이 낫겠지.”
“······감사합니다.”
아사신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가가 뜨거웠다. 다보가 건내 준 선물은 이 겨울을 나는데 정말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아사신은 고기와 육포를 들고 다보의 집을 나섰다. 먹을 것을 손에 쥔 그의 발걸음은 날듯이 가벼웠다.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열 살이나 먹었는데 아직 이런 간단한 것도 못 죽이다니···. 쯧쯧. 저러니까 신부의 아들이면서 버려졌지.”

“어머니! 수라킨! 먹을 것을······.”
아사신은 신나서 문을 열다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머니가 수라킨의 목을 사정없이 조르고 있었다.
 “어··· 어머니!!”
아사신은 고기를 내팽개치고, 정신없이 달려가 어머니의 손을 잡아뜯었다. 수라킨은 이미 반쯤 정신을 잃고,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수라킨! 수라킨 정신 차려!”
미친 듯이 뺨을 때리자, 쿨럭 거리는 기침소리를 내며 수라킨이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허옇게 까뒤집어진 눈동자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수라킨······. 괘··· 괜찮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수라킨을 안아들자 뒤에서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그런 걸 왜 돌보는 거야! 그 몹쓸 것이 너랑 결혼하겠다고 하잖니, 그 년은 미친 게야! 미쳤어! 미쳤어!”
미친건 당신이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아사신은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정말로 자신의 어머니는 이미 미쳐 버린 것 같았다. 소리를 질러대는 그녀로부터 등을 돌리고 창백한 수라킨을 안아들었다.
 -나 때문에···.-
눈물이 떨어져 수라킨의 이마에 떨어졌다.
-내가. 내가 못나서···.-
이마에 떨어진 눈물방울은 수라킨의 이마를 미끄러져 눈가에 닿았다. 말라서 눈꼽이 끼인 눈이 촉촉하게 젖자 수라킨은 움찔하고 몸을 움직였다.
“수라킨! 정신이 드니?”
수라킨이 지독히 쉬어터진 목소리로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압력에 의해 튀어나왔던 눈은 핏줄이 터져 시뻘겋게 충혈 돼 있었다.
“···오빠···.”
“수라킨!”
아사신은 수라킨을 꼭 껴안았다. 이제야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조금만 늦었어도 영원히 수라킨을 잃을 뻔했음이 온 몸으로 실감났다. 호흡이 가빠지고,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모이며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너무도 무서웠다.
-어머니와 같이 두어선 안 되겠어.-
아사신은 생각했다.
 이번으로 어머니가 수라킨을 헤치려고 한 건 세 번째였다. 아이를 질질 끌고 가 강물에 빠트렸던 것이 여름의 일이었고,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밤에 발가벗기고 내쫓았던 것은 얼마 전이었다. 또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곤 장담 할 수 없다. 수라킨은 이제 겨우 네 살배기 여자아이고, 어머니는 마르고 병들긴 했지만 어른이다. 처음부터 상대가 될 리가 없다.
-그럼 어디다 둬야하지.-
문제는 수라킨을 어머니와 떨어트려 놓으려면 그녀를 어딘가 피신 시켜야하는데 그럴만한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눈 딱 감고, 아버지한테······.-
거기까지 생각한 아사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 남자한테 수라킨을 부탁할 수는 없는 없다. 그 남자는 수라킨이 자신을 전혀 닮지 않았다며 핏줄마저 부정하려 들지 않았던가. 수라킨의 새파란 눈동자와 아직 어려서 잘 드러나진 않지만 그녀의 입매나 골격이 얼마나 그 남자와 닮았는지는 생판 남이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임에도, 그 남자는 대놓고 수라킨을 부정했었다. 아마 자신에게도 이 날개가 없었다면 수라킨과 같은 말을 들었을 것이다.
“흐으- 흐으으-”
뒤에서 억눌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머니가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내가 미쳐 가나봐······.”
“어머니······.”
“아사신··· 아사신···.”
어머니는 작게 움츠러들어 동그랗게 몸을 말고 구석에 숨었다. 온 집안에 가득한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를 따라 구석으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내가 내 자식을 죽이려 들다니······. 나는 미친 걸까? 응?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내 배로 낳은 아이를 죽이려고 그랬어. 내가···내가···.”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아사신에게 아무런 감흥을 줄 수 없었다. 꼭 지독하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선보이는 것 같았다.
 “아사신··· 이리 와서 엄마를 안아다오. 응?”
어머니가 두 팔을 자신을 향해 내밀자, 아사신은 수라킨을 내려놓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질질끌며 억지로 그녀에게 가서 안겼다. 그녀는 이렇게 발작하듯 분노를 표출하고 나면 두려움에 떠는 아사신을 껴안고 있기를 좋아했다. 그녀의 두 손이 자신의 등을 헤매며 날개의 튀어나온 부분을 만지작 거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사신은 그런 포옹이 별로 기분 좋지는 않았다.
“아사신. 미안···. 미안해···.”
어머니는 아사신을 껴안고 작게 흐느끼다 곧 다시 잠이 들었고, 아사신은 그녀가 '팁&#65533; 않도록 조심하며 이불을 들고와 그 말라 비틀어진 몸 위에 덮어주었다. 새근새근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이 집에서 운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노동이 가능한 사람은 자신 뿐이었는데, 자신은 아직 열 살 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몸도 건강하지 못하고, 육체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서툴기 짝이없다. 그것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수라킨. 많이 아프니?”
어느새 수라킨이 비틀거리며 기어와 아사신의 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점점 목이 부어오르는 것이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였다. 아마 본인은 엄청나게 목구멍이 쑤셔오고 있을 것이다.
 “아니. 안 아파.”
아사신은 믿지 않았다. 자신이 걱정할까봐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찢어지고 갈라지는 목소리가 이렇게 분명한데도 억지로 말을 해서 자신은 괜찮다고 하는 것이다.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수라킨. 사랑한다.-
아사신은 그런 그녀의 뒷통수를 어루만지며 계속 울었다.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다.
 창 밖에 눈이 내리는 것이 마치 꿈인 양 아련하기만 했다.


소사린의 할머니가 산다는 그 낡은 창고같은 집은 아사신네가 사는 집보다 더 끔찍해 보였다. 아사신은 한 밤중에 무너져내려서 압사하지나 않을까 걱정되는 움막같은 집 앞에서 수라킨을 꼭 껴안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뭐해? 들어와.”
소사린이 어서 들어오라는 듯 손짓을 해도, 아사신은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무슨 쓰레기 창고 같다.
“여기··· 사람 살아?”
“당연하지! 아, 할머니 저기 오신다.”
소사린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달려나갔다. 저 멀리서 머리를 가닥가닥 땋아내린 체격이 건장한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어린 수라킨을 힘차게 들어올렸다. 수라킨이 비명을 질렀다.
“수라킨!!”
깜짝놀란 아사신이 놀라서 뛰어가려는 찰나, 소사린은 정말 밝고 맑은 목소리로 아이처럼 웃었다.
 “할머니이이!!”
“내 새끼 소사린!”
아사신은 흠칫 놀랐다. 그 체격이 좋아보이는 남자가 내는 목소리는 울퉁불퉁 하긴 했지만 분명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노인의······.
“할머니. 말씀드렸던 제 친구 아사신이랑, 동생 수라킨이에요.”
소사린의 말에 노인은 새까만 눈을 들어 아사신을 바라 보았다. 그 시선에 아사신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 노인은 아사신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노인의 눈은 마치 매와같이 날카롭고, 웅덩이 처럼 깊었으며 주름이 자글자글한 그 눈매에는 무시하지 못할 세월의 때가 묻어 있었다.
 “그래. 신부의 아이들이구나. 네가 아주 어릴때 본 적이 있단다.”
아사신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부모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말들을 이제 외울 수도 있었다.
고개를 돌린체 시선을 외면하던 아사신은 갑자기 큰 손이 뻗어와 자신을 번쩍 치켜들자, 비명을 질렀다. 시야가 순식간에 높아지고, 꽉 껴안긴 몸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노인은 버둥거리는 아사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 녀석 겁먹지 마라. 그냥 한번 안아보려는 것뿐이다. 원 바동거리기는.”
아사신은 자신의 작은 몸을 꼭 안아오는 노인의 푸근한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두근두근하는 심장소리가 귓전에 울려 퍼졌다.
 “아······.”
아사신은 바보같은 소리를 내고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수라킨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뒤뚱뒤뚱 걸어왔고, 소사린은 옆에서 예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반갑구나. 네가 아사신이지? 수라킨에게 말 많이 들었다. 나는 시오사라라고 한단다. 수라킨의 외할미지.”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미소지시는 주름진 입가는 수라킨의 미소와 너무도 닮아있어서 아사신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시오사라의 집 안은 적어도 집 바깥보다는 훌륭했다. 아니 그 정도면 상당히 훌륭했다. 바깥의 뼈대가 드러나 보이는 풍화된 벽은 안쪽으로는 완벽하게 보수가 되어 바람 한 점 들이 새지 않았고, 검은 곰 가죽이 깔린 바닥은 따스했다. 짐승의 뼈에 그림을 그려서 장식해 놓은 벽면은 약간 무서웠지만 이 정도라면 수라킨이 생활하기에 상당히 훌륭한 집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사신은 신기한 듯 집안을 두리번거렸다.
“우리 할머니가 다 잡으신 거야.”
소사린은 약간 뻐기듯이 말했다.
“이 곰 가죽이랑, 저 들소 뼈랑 이런걸 다 말야?”
아사신은 놀랐다. 여자가 잡을 수 있을만한 짐승들이 아니다. 여자들이 사냥에 동참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이런 큰 동물은 남자들도 여럿이 뭉쳐 다니며 잡아야 하는 것이다. 아사신의 휘둥그레진 눈을 본 시오사라는 웃으며 소사린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콩 박았다.
“소사린의 말을 다 믿지는 마라. 이 들소 뼈는 12년 전에 소떼몰이를 할 때 잡은 거란다.”
“······몰이?”
시오사라는 설명했다.
“우리가 들소를 사냥할때는 활이나 칼로 잡는게 아니란다. 뭐 그렇게 잡을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건 그런 식으로 잡은건 아니야. 우리는 우두머리를 노리지. 우두머리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고립시키고, 겁을 주고, 위협을 해서 궁지에 몰아넣는 거야. 그녀석은 곧 우리에게 쫓기게 되고 우두머리가 도망치면 다른 들소들도 그녀석을 따라가게 된단다. 녀석들을 가파른 절벽같은데로 몰고 가서 우리는 그저 슬쩍 비키기만 하면 되. 그건 꽤 위험한 일이라서 발이 빠르고, 행동력이 있는 남자가 보통 그 일을 하지. 12년 전엔 내가 했단다. 정말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이었어. 조금만 느렸어도 그놈들과 함께 절벽을 굴러야 하거든. 내가 비키자 들소들은 자신들의 속도를 이기지 못해 절벽으로 떨어져 버렸고, 우리는 내려가서 다치거나 죽어있는 들소를 그냥 건져오기만 하면 됬단다.”
시오사라는 빙긋 웃었다.
“이놈은 그때의 우두머리였어. 그 사냥 후론 몸이 안좋아져서 그런 경험을 다시 할 순 없었지만 아주 짜릿했던 순간이었어. 아사신. 너도 오년쯤 지나면 그런 사냥에 나갈 수 있을거다.”
눈을 빛내며 듣던 아사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전 그런 사냥을 할 수 없을 거예요. 할머니. 저는······.”
말끝을 흐리는 아사신을 시오사라는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그녀의 가슴은 크고 넓어서 아사신의 작은 얼굴따위는 푹 묻힐 수 있었다.
“아사신. 태어나는 아이에겐 잘못이 없단다. 죄를 짓는 건 어른들이야. 태어나는 아이의 머리색깔이 밝다거나, 눈 색이 아비와 틀리다거나, 혹은 약하게 태어났다고 그 아이를 잘못 태어났다느니 기대에 뒤떨어진다느니 하고 비방하는 건 잘못된 어른들이 하는 말이야. 그런 귀가 썩을 것 같은 말은 네 가슴에 담지도 마라.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났고, 큰곰의 별이 너를 세상에 보냈으니 그건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야.”
노인의 큰 손이 아사신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자 아사신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찼다.
-아니에요 할머니. 그런 건 아니에요. 내가 잘못한 거에요. 내가··· 내가 제대로 태어나기만 했어도······.-
아사신은 시오사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왜 울지?”
-슬프니까······.-
아사신은 정신없이 울며 속으로 생각했다. 왠지 아까보다 더 서러운 것 같았다.
“울지 마라.”
-울지 않을 수 없어. 너무 슬픈걸.-
따스한 손가락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사신은 갑자기 숨이 넘어갈 것 처럼 설움이 복받쳐 와 그 따스한 손의 온기에 얼굴을 기댔다. 언제나 바래오던 크고 듬직한 어른 남자의 손이었다. 손에 닿는 온기에 마음을 빼앗겨 정신없이 얼굴을 비볐다.
“할머니······.”
“······머리를 심하게 다쳤나 보군.”
“할머니 죽지 마세요.”
아사신은 중얼거리며 눈물에 젖은 손바닥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손가락이 흠칫 하고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죽지 마세요······.-
아사신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누군가 자신의 얼굴을 세게 쥐고 흔들고 있었지만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짙고 편안한 어둠이 찾아왔다.



수라킨의 얼굴은 점점 밝아졌다.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아사신 자신도 집에 있는 것 보다 시오사라 할머니의 집에 있는 편이 더 좋았다. 그녀의 집은 사람이 없을 때에도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고, 그녀가 집에 있으면 밤에도 태양이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수라킨과 아사신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별자리의 전설과, 오래된 동요와, 소사린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사린의 엄마 이름도 소사린이야. 그건 오래된 강의 여신의 이름이란다. 나는 남편이 딸 둘만 남겨두고 죽어버려서 아들이 없단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혼자 살고 있지. 그래도 괜찮아. 적어도 딸 둘은 얻었잖아? 재혼하라는 제의도 몇 번 들어왔지만 별로 관심이 없었어. 내 딸들이 새로운 계부와 함께 살면 괴롭고 힘들 거란 걸 알고 있었거든. 내 샛별들. 언제나 그 애들이 행복하길 바랐단다. 내 목숨 따위 그 애들을 위해서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했어.”
시오사라의 얼굴이 쓸쓸해졌다.
“소사린이 그 남자랑 결혼하도록 허락한 게 내 가장 큰 실수였다. 그 남자는 소사린을 열렬히 사랑했고, 지참금 따위 필요 없으니 무조건 결혼만 시켜달라고 사정 했었지. 소사린도 그 남자를 사랑했고··· 난 둘의 손을 끈으로 묶어주면서 영원히 사랑하라고 영원히 함께하라고 축복해 주었다. 젠장- 그때 끈을 잘라버리는 건데.”
시오사라는 주먹을 불끈쥐고 욕설을 내뱉었다.
“소사린이 세번째 딸을 낳았을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어. 적어도 네번째는 아들을 낳아줄거라 믿는다고 슬슬 협박을 해오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둘은 사랑하고 있었거든. 네번째도 딸이 태어나자 첩을 들이더군. 그 첩이 애가 안생기는 체질이란걸 안 건 소사린이 다섯째를 낳았을 때였어. 쉴세없이 아이를 낳아야 한 소사린은 몹시 힘들어했지만 그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여섯째를 임신시키더구나. 첩을 내쫓고, 술을 마시고, 어린 아이들을 때리기 시작했지. 여섯째까지 딸이 태어나자 막 출산해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소사린까지 때렸어. 나는 화를냈지. 내 손녀들과 소사린을 돌려달라고 말했지만 문전박대 당했다. 그 독한놈은 결국 일곱번째 아이를 임신시켰고, 그게 소사린이었지.”
시오사라의 오래되고 낡은 눈이 고통에 물들었다.
“내 눈의 빛. 내 두 개의 샛별들은 나를 영원한 고통속에 던져두고 나보다 일찍 죽어버렸어. 소사린의 언니는 병에들어 죽고, 소사린은 불행으로 죽어버렸지. 그녀는 그 남자를 죽도록 사랑해서 죽어버렸어. 그 남자가 자꾸만 데려오는 여자들과 자신이 그 남자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속에 말라죽어 버렸어. 이렇게 그 애를 사랑하는 나를 두고 말이지.”
-알아요. 알 수 있어요.-
아사신은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녀도 그렇게 말라죽어가고 있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사랑. 내 생명. 나도 따라죽고 싶었지만 내가 죽으면 소사린이 남긴 사랑스러운 일곱 무지개들은 어떻게 하겠니. 아아- 너는 이런 감정 절대 알지 말아라. 아사신. 이렇게 고통스러울 바엔 차라리 죽고싶은 이 감정은 평생 모르는게 좋아. 난 너무 아팠고 지금도 많이 아프단다. 나에겐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어.”
“할머니······.”
아사신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는 시오사라의 눈은 눈물에 젖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눈물은 고통의 눈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떠나보내고도 끈질기게 살아남아야만 했던 시오사라의 아픔의 눈물이었다.
“난 시간이 얼마없어. 새로운 봄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겨울은 너무 길지. 신전에 가서 기도했단다. 적어도 소사린이 좋은 집에 시집가는 그 날까지만이라도 살게 해달라고. 난 죽을 수 없다고. 소사린의 비정한 아비는 새로운 여자를 집안에 들였고, 그래도 옛 아내의 정을 생각해서 처음에는 좋은 집에 시집가던 소사린의 언니들은 이제 점점 낮은 가문의 남자에게 보내지고 있어. 그 남자는 지참금을 아까워하고 있지. 적어도 내가 살아있어야 소사린이 팔려가는 꼴은 피하지 않겠니. 난 아직 죽을 수 없단다.”
“죽지 마세요! 할머니 죽지 마세요!”
아사신이 외쳤다. 그는 시오사라가 죽는다는 상상을 하는 것 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만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아사신은 그녀가 너무 좋았다. 뺨에 흐르는 눈물을 시오사라가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늙고 거친 손에 아사신의 뜨거운 눈물이 맺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사람은 언젠간 죽는단다. 내 혼은 까마귀가 물어가 주겠지. 사랑스러운 아사신. 너는 착한 아이야. 내 눈은 정확해. 나는 네 아비처럼 네가 망아지처럼 튼튼한지, 눈빛은 푸른지, 성별은 남자아인지 보지 않는단다. 내가 보는것은 너의 영혼. 네 가슴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영과 혼. 그 두가지만을 보지. 너는 아주 맑고 밝은 영혼을 가지고 있단다. 나의 귀여운 검은 까마귀 아사신.”
아사신은 시오사라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가슴속이 뜨거웠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아픔과 고통과 죄책감이 아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영영 누군가가 자신의 곁을 떠난다는 상상만으로도 숨도 못쉬게 가슴을 누군가 쥐어짜는 이런 감정은 정말로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수라킨. 예쁘구나.”
소사린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수라킨은 노란색 옷을 입고, 머리에는 노란색 화관을 쓰고 있었다.
 이 곳에 온 한달 간 살이 통통하게 오른 수라킨은 몰라보게 예뻐졌다. 퍼석퍼석하던 은빛 머리카락은 어린아이 특유의 부드러럽고 가는 머리카락으로 변모했고, 냉랭하게 감정이 죽어있던 검푸른 눈동자는 예전보다는 훨씬 감정의 기복을 나타나게 되었다.
“어디서 꽃을 가져오셨어요?”
이렇게 화사한 꽃을 본지 오래된 아사신이 신기한 표정으로 수라킨의 화관을 매만졌다. 꽃은 싱싱했다.
“저 멀리까지 좀 다녀왔다. 사슴을 잡았거든.”
시오사라는 피곤한 듯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정말 힘이 들었던지 그녀의 어조는 축 처져 있었다.
“내가 좀 더 힘이 있었으면 그놈의 뿔을 가지고 거기서 작은 제사라도 지냈을테지만 너무 힘들어서 그냥 와버렸단다. 까마귀 울음소리를 내는것도 피곤해서 대충 하고 와버렸어. 그놈의 영혼이 큰곰자리 별에게로 잘 갔을지 모르겠다.”
사슴의 뿔은 대지의 초목과 함께 자라서 빠졌다가 다시 자란다. 그것은 생명의 순환, 우주의 원동력인 소멸과 재생의 반복을 의미한다. 그것을 사냥하여 그 피와 살을 즐기고, 뿔은 신에게 바친 후 갈아마시는 것은 함마 사람들의 전통의식이었다.
그리고 그 의식을 하지 않고 집으로 왔다는 것은 시오사라의 몸이 얼마나 안좋은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어디까지 가셨길래 그러세요?”
소사린이 걱정이 되는지 물었다.
“저 멀리 바산족과의 경계부분까지 갔다왔단다. 하하 이럴때 족장의 전사에게 걸리면 벌을 받을텐데. 운이 좋았는지 안 들켰단다.”
“바산······!”
소사린은 어이가 없었다.
 바산족은 그들과 인접해있는 부족이었다. 보통 함마 대륙의 사람들은 팔시아 대륙의 사람들에 비해 훨씬 평화로운 민족성을 띄고,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이라 타부족 인들과 다투는 일이 많지 않았다.
 물론 그 중에서도 사나운 사람들은 있기 마련인지라 종종 타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있기는 했다. 그 중에서도 바산족은 특히 사나운 사람들로, 일년에 한번은 꼬박꼬박 침략해 오는 상당히 난폭한 사람들인 것이다. 특히 겨울처럼 먹을것이 없는 시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예민해져 있다. 만약 바산족과 마주치기라도 했다간······.
거기까지 상상한 소사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도 성치 않은데, 제발 그런데는 가지 마세요. 제가 창고에서 먹을 것을 훔쳐 오겠어요.”
소사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외쳤다.
 “너 그러다 걸리면 너희 아버지한테 맞는다?”
시오사라는 손녀의 진심어린 걱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렸다. 소사린은 더욱 화가 나서 시오사라를 쏘아보았다.
“아무리 먹을게 없어도 그러면 안되요. 제가 얻어터지더라도 가져다 드리겠어요. 부탁해요 할머니.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네?”
시오사라는 다정하게 미소지으며 소사린을 안아주었다. 소사린은 그녀의 가슴에 안겨서 툴툴 거렸지만 곧 얌전해졌다.
오히려 충격받은 것은 아사신이었다. 아사신은 시오사라가 먹을 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사냥을 다니는지는 몰랐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었는데도 몰랐었다.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곳이 아니면 어머니의 손에서 안전하게 수라킨을 놔둘 곳이 없으니까 그렇게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아이라지만 당당한 하나의 입(口)이다. 시간이 되면 먹을것을 재깍재깍 넣어줘야 하는 입인 것이다.
 아사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걱정마라 수라킨. 나는 안죽어. 난 절대로 안죽어. 네가 시집갈 때까진 난 못죽어.”
시오사라는 수라킨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녀의 손이 일정한 리듬을 타고 부드럽게 움직이자 소사린의 움직임도 잦아들었다. 늙은 여자의 입에서 별다른 박자가 없는 무미건조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자장가로, 태양신과 달의 여신에 대한 구애와 사랑과 인류의 번성에 대한 이야기 였다.
아사신은 수라킨을 껴안고 조용히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그녀의 노래를 감상했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최고의 가수의 목소리보다 아름다웠다. 듣고 있으면 가슴 한 켠이 아릿해지는 삶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녀의 말과 행동에는 어머니의 집착과는 다른 순수한 애정이 있었고, 아버지의 냉대와는 다른 사랑이 있었다. 아사신은 이 늙은 여자가 정말로 좋았다.

눈에서 툭-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시오사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녀의 주검은 차디찬 눈밭위에 형편없이 나자빠져 있었다. 새까만 눈에는 눈물이 얼어붙어 있었고, 반쯤 벌어진 입은 그녀가 마지막에 질렀을 공포의 외마디 비명이 묻어 있었다.
“여기서 사냥을 하다니 미쳤군.”
족장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의 시체를 치워라. 바산족과 싸우다 죽었으니 전사로서 죽은 것이다. 그녀의 영혼은 큰곰자리 별아래 빛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시오사라의 몸을 들것에 누이고 얼어붙어있는 소사린과 아사신을 지나쳐갔다.
 “소사린.”
아사신은 걱정이 되어 소사린의 손을 잡아주었다. 소사린의 시선은 시오사라가 누워있던 곳 근처에 피어난 샛노란 야생화에 들러붙어 있었다. 푸른 것은 죄다 말라죽어 버린 이 땅위에 피어난 그 꽃은 철에 맞지않게 너무도 선명하게 노랗고 푸르러서 기묘한 느낌이 들게했다.
-가지 말라고 했잖아···!-
소사린은 이를 악물었다.
“괜찮아? 응?”
소사린은 아사신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할머니!! 할머니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에요?”
시오사라의 주검을 들고 가던 전사 중의 한 명이 그녀를 돌아보고 말했다.
“신전에서 그녀의 시신을 장례치를 것이다. 너는 집에 가서 쉬고 있거라. 그녀의 친척들이 모여서 마지막 의식을 치를  것이다.”
“저도 가겠어요.”
소사린은 굳은 의지를 내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붉은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지만, 표정은 다부져보였다.
“굳이 보고 싶다면 말리지 않으마.”
전사는 흘깃 소사린을 쳐다보더니 곧 걸음을 빨리해 가 버렸다.
“아사신! 준비해서 가자!”
“···그래!”
아사신은 잠시 망설였지만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 서둘러 대답했다. 신전에 가게 되면 아버지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시오사라의 장례식을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얼른 집으로 돌아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몸을 서둘러 닦고, 머리를 차분하게 빗은 후, 신전으로 달려갔다.
열심히 서둘렀지만 그들이 신전에 도착 했을때는 이미 신녀들의 기도가 시작된 후였다.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는 불에 태워 연기에 날려 보내고, 뼈는 곱게 빻아 돌무덤을 만들어 그 안에 넣어두고 언젠가 바람을 타고 흩어지길 기다린다. 사랑했던 육친을 기억하고 싶어서 땅에 파묻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언젠가 육체의 부활을 위해 사체를 그대로 땅에 묻는 팔시아 대륙인의 풍습이고, 함마 사람들은 시체가 썩으면서 풍기는 악취나 벌레같은 것들을 역겨워하고, 육신의 부활을 믿지 않기때문에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전사들의 경우는 신전에서 키우는 신성한 까마귀를 잡아 그 피로 목욕을 시키고, 향유를 부어 비릿한 피냄새를 없앤다음 신녀들이 기도를 올리는 것이 추가된다. 그들은 그들의 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다 전사한 것이니, 그에 합당한 예를 갖추어주는 것이다.
아사신과 소사린이 신전에 도착 했을때는 신녀들이 모여 그의 영혼이 큰곰자리 별에게로 돌아가 윤회의 기둥속에 무사히 들어가길 빌고 있을 때 였다.
크게 부릅떴던 눈과, 무섭게 벌려졌던 입은 평상시의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고, 하얀 예복으로 갈아 입혀진 그녀의 시신은 꼭 잠이 든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아사신과 소사린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내새끼들 이리온··· 하고 말해 줄것만 같아 아사신은 마음이 아팠다.
··· 그와 동시에 진한 죄책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알고 있었다. 수라킨이 부담이 된다는 것. 생판 남인 자신에게 시오사라가 이렇게까지 해 줄 이유는 없다는 것. 아무리 체격이 건장해 보여도 그녀는 늙은 여인의 몸이었다. 혼자 살아남기만도 벅찬 것이다.
그것을 외면한 것은 자신이었다. 알면서 보려하지 않았다. 그래야 자신이 편하니까. 그래야 수라킨이 안전하니까- 그렇게 외면해 버렸다.
 -나는 이렇게도 이기적인 인간이었구나.-
양심이 아파왔다. 시오사라가 저렇게 된 것을 알았을때 자신이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수라킨의 거처 문제.
 자신은 알고 있었으면서, 소사린은 몰라도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함구해 버렸다.
시오사라가 바산족의 경계에서 사냥을 종종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 혼자 사냥을 하는 것은 힘이 든다. 혼자서 겨울을 나는것만도 빠듯한 것이다.
그 힘든 겨울날에 군식구까지 늘었다. 사냥감이 부족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시오사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녀는 그곳에 갔다올때마다 노란 야생화를 꺾어와 수라킨에게 화관을 만들어주거나, 귀에 꽂아주곤 했었고 수라킨은 자신이 그녀의 집을 방문할때마다 그 꽃을 자랑해오곤 했던 것이다.
 충분히 말릴 수 있었지만 외면해버렸다. 자신을 위해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아사신의 마음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너는 아주 맑고 밝은 영혼을 가지고 있단다. 나의 귀여운 검은 까마귀 아사신······.-
속삭여주던 시오사라의 목소리.
-틀렸어요. 제 영혼은 맑지 않아요. 이렇게 이기적이고 못된 아이인걸요.-
아사신은 신녀들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흐느껴 울었다. 소사린은 자신의 할머니를 위해 아사신이 울어준다고 생각했는지 다정하게 손을 잡아 주었지만 아사신은 자신의 이기적인 감정 때문에 울었다. 시오사라에게 너무도 죄스러워서 울었다.
소사린도 그런 아사신의 손을 꼭 잡은 채 울고 있었다. 소사린은 그녀의 장례식이 너무도 초라한 것이 마음이 아팠다.
 시오사라의 오래된 지인들은 이미 거의 세상을 떠났고, 살아있는 친척들 역시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은 무척 적었다. 그녀가 살아온 세월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행렬이었다.

“족장!”
“족장··· 오셨습니까.”
“바르바칸. 위대한 수장(首長).”
갑자기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사람들이 흥분하여 서로 수근대기 시작했다. 바르바칸과 그의 후계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로 확 쏠렸다.
아사신은 흐느끼다 말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강한 존재감의 남자는 꺼리낌 없이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아사신을 스치고선 가장 높은 자리로 걸어갔다.
 “아사신······.”
소사린이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껴안아 왔다. 그러나 아사신은 이미 남자와 남자의 아들에게 시선을 사로잡힌 후였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나타난 두 남자의 존재는 신성한 슬픔으로 가득하던 신전을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넘치는 곳으로 만들어버렸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시선을 빼앗긴채 존경과 외경심을 담아 살아있는 신의 혈족에게 찬사를 보냈고, 그들의 존경어린 시선을 받는 족장과 후계자의 표정은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아사신은 족장이자 아버지를 곁눈질로 살금살금 훔쳐 보았다.
남자는 기억속의 모습과 똑같았다. 여전히 지나치게 당당하고, 크고, 건장했으며 그 옆에는 그 남자의 축소판처럼 생긴 사내아이가 냉랭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남자보다 좀 더 색이 밝은 푸른눈동자와 어둠처럼 검은 머리결. 건강해 보이는 연한 갈색피부와 훤칠한 키. 분명 몇년 지나지 않아 그 남자와 흡사한 모습으로 자라게 될 사내아이. 어머니가 저주하듯 부르짖던 그 이름의 주인공임이 틀림없을 아이.
-저 아이가 야스카산······.-
아사신은 뚫어져라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시선을 느꼈는지 아사신을 흘낏 바라보았다가 곧 시선을 돌렸다. 마치 그 눈동자가 너 따윈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는 듯해 아사신은 순간 숨을 못 쉴 만큼 긴장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족장이 손을 들고 말했다.
“식을 계속하라. 나는 그녀의 삶에 존경을 보낸다.”
“족장···!”
사람들은 감탄의 눈초리로 그들의 족장을 바라보았다. 일개 노인이 죽었을뿐인데, 그것도 족장의 명을 어기고 금지구역에서 사냥을 하다죽었는데 족장은 그녀의 삶을 존경한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상당한 일이었다.
“식을 계속하라.”
족장은 더 이상 말하기 귀찮다는 얼굴이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다시 식을 이행했다.
향초가 타오르고, 신녀들이 서둘러 시오사라의 몸 위로 향등을 흔들었다. 금박을 입힌 새장안에서 까마귀가 시끄럽고 우짖었다. 그 소리에 아사신은 귀가 아팠다.
절로 찌그러지는 인상을 억지로 펴고 있으려니 머리까지 아파오는 느낌이었다. 지독하게 쉰 소리로 울고있는 까마귀 소리와, 너무 진한 향등과 향초의 냄새가 싫었다.
 -참아야 되. 여기서 나가면 소사린이 혼자 남아.-
아사신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가누며 생각했다. 자신의 두통이 향등때문인지 아니면 저 남자 때문인지 스스로도 햇갈렸다.
신녀들이 그녀의 시신을 불에 태우기 전에 마지막으로 망자와의 인사할 시간을 주었다. 그녀의 몇 안 되는 친구들이 다가가 그녀의 마른 손에 입술을 대거나 가벼운 포옹을 하기 시작했다. 그 줄의 맨 끝에 서면서 아사신은 다시 한번 족장이 있는 쪽을 훔쳐보았다가 다음 순간 족장과 눈이 마주쳐버려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바보처럼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야스카산이 물었다.
“저 아이가 신부의 아들입니까?”
“그렇다. 저 아이가 신부의 아들이자 적통한 후계자였다.”
족장은 냉랭하게 대답했다.
야스카산은 물건의 품질을 평가하는 눈으로 아사신을 훑어 보았다. 분명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봐도 옆에 서 있는 계집애랑 비슷할만큼 작다. 피부는 지나치게 하얘서 어머니가 바르는 분이라도 뒤집어 쓴 듯 했다. 잿빛 머리카락도, 회색 눈동자도 전혀 아버지 족장과 닮은 점이 없었다.
“정말 우리와 닮지 않았군요.”
“등에 날개가 있지. 그것만이 저 아이의 핏줄이 우리와 닿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족장은 혀를 차며 말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깜짝놀라 토끼처럼 잔뜩 움츠러드는 모습이 볼썽사나웠다.
-신경 쓸만한 존재가 아니군.-
야스카산은 곧 흥미를 잃었다. 그는 어서 이 지루한 의식이 끝나기를 빌었다.
신녀들의 기도소리가 서서히 잦아 들었다.


*                *                *


“···아버지?”
눈을 뜨자 마자 보인것은 건장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몹시 눈에 익은 그 얼굴은 분명 아버지의 것이었다.
아사신은 이것이 꿈의 연장 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할머니 다음엔 아버지인가? 대체 너 무슨 꿈을 꾼거냐.”
아사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야스카산?”
꿈이 아닌가- 라고 느낀 순간 엄청난 고통이 뒷통수에 작렬했다.
“흐악!!”
아사신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바닥을 뒹굴었다. 동공이 확장되고, 핏줄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그런 고통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새까매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온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정신차려라! 이봐! 정신을 놓으면 안되!”
야스카산이 자신의 뺨을 고개가 완전히 돌아갈 만큼 호되게 갈겼다. 안 그래도 빠개지는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만···그만···아파···.”
나중에는 머리보다 엊어 맞은 뺨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왔다. 새파래진 얼굴로 그만 하라고 사정하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력이 멎었다. 얻어맞은 얼굴이 시큰시큰 아려왔다. 극심한 두통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지만, 여전히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아사신은 온통 두 개로 보이는 사물을 바로 보기 위해 눈을 찌푸렸다. 귀에서 붕붕거리는 이명이 들려오고, 시야는 뿌옇게 흐려져서 보였다. 구토감이 치밀어 오르고, 온몸의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 한마디로 정말 다시 기절하고 싶을 만큼 아프고 힘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야스카산이 이번에는 어깨를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머리의 두통은 멎었어도, 구토감이 심해졌기 때문에 아사신은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그만해. 그만 하라고······.”
“이제 정신이 돌아오나?”
아사신은 야스카산을 노려보며 내뱉듯이 말했다.
“정신은··· 당신이 흔들지만 않으면 괜찮아 질 겁니다. 그만 좀 흔드십시오. 아파 죽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괜찮은가 보군.”
야스카산은 쉽게 물러났다. 아사신은 투덜거리며 이곳이 어딘지 인지하려고 애썼다. 왜 자신의 머리위에 야스카산의 얼굴이 있는지 이해가 안갔다.
“···놔 주십시오. 이 자세는 불편합니다.”
아사신은 야스카산의 감겨오는 팔을 손으로 밀었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고, 꼭 맞닿아 있는 피부의 감촉은 차가운 습기로 인해 아주 불쾌했다.
 “으······.”
잠시 몸에 힘을 주었다고 다시 몸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꿈쩍도 하지 않고 자신의 허리를 안고 있는 야스카산의 팔을 몇 번 밀었더니 구토감이 상승했다.
“비켜 주세요. 불편합니다.”
애를 쓰던 아사신은 하는 수 없이 사정했다.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자신이 야스카산의 무릎에 얌전한 아기처럼 누워있다는 것은 정녕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눈을 살짝 치켜뜨기만 해도 시퍼런 안광이 곧바로 쏟아지는 것은 더더욱 사양이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마을에선 꽤 떨어진 곳.”
아사신은 인상을 썼다.
“그런 대답은 저도 하겠군요. 제가 말하는 건 정확한 위치입니다.”
“그건 나도 몰라. 너를 쫓아 달려오다보니 여기였어.”
“쫓아··· ? 왜···?  아!”
순식간에 기억이 돌아왔다. 안개가 낀 듯 멍했던 머리속이 확 밝아졌다.
 그랬었다. 자신은 야스카산에게 쫓기다 절벽에서 떨어졌던 것이다. 떨어지던 순간에 생각했던 모든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사신은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했다. 얼핏 느끼기에도 분명 까마득한 낭떠러지 였었다.
“···죽지 않았군요······ .”
“죽길 바랬나?”
야스카산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아니오··· . 그런것은 아닙니다만··· 분명 죽을거라고 생각 했습니다. 꽤 높았거든요. 거기··· .”
“운이 좋았다. 모서리 부분이 튀어나온 곳이 있어서 넌 거기 떨어진거지. 약간의 뇌진탕만 제외하곤 다른 부위는 상태가 좋더군. 어디 부러지거나 까진 곳도 없어.”
“다른··· 부위?”
아사신은 흠칫 놀라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왜 지금까지 몰랐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도 야스카산도 얇은 모피 한 장 아래서 벌거벗고 있었던 것이다.
 눈치 채는 순간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노···놓아 주십시오.”
아사신은 허둥지둥 야스카산의 품에서 내려오려고 용을 썼다. 갑자기 온몸의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느낌이었다. 이 남자와 나체로 껴안고 있다니 정말 심장에 좋지 않다.
“왜 그러지? 옷은 완전히 젖어서 입고 있을 수가 없다. 그냥 이러고 있어라.”
야스카산은 아사신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더욱 세게 허리를 감아왔다. 자신의 엉덩이 깨에 야스카산의 물컹한 그것이 닿자 아사신은 식겁했다.
 “시··· 싫습니다. 놓아 주세요. 놓아 주세요.”
아사신의 어조는 이제 애원조로 가고 있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이 남자의 바위 같은 팔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끙끙 거리며 자신의 팔을 밀었다가 버둥거렸다가 힘들어서 헉헉 거리다 구토감이 이는지 웩웩 거리는 아사신을 한참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야스카산이 아사신의 맨 엉덩이를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깜짝 놀란 아사신의 몸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그만 좀 해라! 옷은 마르려면 한참 멀었고, 여기는 불을 피울 도구가 없다. 비가 그치면 어떻게든 너를 데리고 돌아갈 테니 가만히 좀 있어라.”
야스카산은 짜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 지만······.”
아사신은 눈만 치켜떠 야스카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기겁을 하고 다시 내리깔았다.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이 남자는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에 내가 그를 비아냥대고, 화나게 만들어서 쫓고 쫓기게 되었다는 건 알고나 있는건가?
 게다가 우리들이 이미 한번 몸을 섞었고, 이렇게 맨몸으로 껴안고 있을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란 것도 기억이나 하고 있을런지 모르겠다.
 아니 기억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걸 신경 쓸 남자가 아니다. 분명 나만큼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나 혼자만 이렇게 그날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끙끙 상처를 싸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남자는 그저 하룻밤 정사에 불과하다고 여기는데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아사신은 얌전해졌다. 자신이 아무리 용을 써도 그 팔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자신이 안겨있다는 사실에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이고 싶지 않았다. 어른스럽게, 나 역시 이제 당신따위 아무렇지도 않다고 뻐기고 싶었다.
아사신이 조용히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자, 야스카산의 팔이 더욱 강하게 허리를 움켜잡아왔다. 차가운 빗방울은 점점 거세게 휘몰아치며 동굴 안 까지 비바람이 들이 닥쳤다. 단련된 야스카산의 질긴 피부위에도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으니 아사신은 굉장히 추웠다. 얇은 사슴가죽 한 장 으로 두 사람의 벗은 몸을 가리기엔 택도 없었다.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야스카산의 품에 파고 들게 되어 아사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둘은 한참을 그렇게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붙어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나자 마구 휘몰아치던 바람은 조금씩 가라앉았지만 비는 아까보다 더 힘차게 쏟아졌고, 검은 먹구름이 해를 가려버렸기 때문에 주변은 너무도 어두워 지금이 저녁인지, 밤인지, 새벽인지 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아사신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의외로 야스카산의 두터운 손이 자신의 몸을 든든하게 지탱해 주어 편했기 때문에 피곤에 쌓인 육체는 슬금슬금 수마에 빠져 들고 있었다.
 뜨끈뜨근한 넓직한 가슴에 머뭇머뭇 이마를 맞대고, 온몸의 쓸데없는 지방이란 한 군데도 보이지 않는 육체에 두 팔을 감았다. 방금전까지는 놓아달라고 발버둥을 쳤던 주제에 이제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손을 깍지끼고 달라붙어 있으려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너무도 피곤하고 졸렸다.
야스카산이 말을 걸어온 것은 그때였다.
“너 상당히 온도가 높군.”
몽롱한 꿈의 세계에 빠져들던 아사신은 깜짝 놀라 눈을 반짝 떴다.
“예?”
“너 말이다. 꼭 어린아이 같아. 뜨겁다. 아니···.”
야스카산은 갑자기 깨달은 거라도 있는 듯 아사신의 벗은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사신은 당황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열이 나는군. 온도가 높은게 아니라 열이 나는 거였어.”
“···엣···.”
그러고보니 졸린게 아니라 기력이 다해 이렇게 노곤했던 것이었나? 야스카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의 이마를 짚어보는 아사신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길래 왜 갑자기 달아났던 거냐. 얌전히 내 손을 잡고 마을로 돌아갔으면 지금쯤 이렇게 열이 끓어오르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아사신은 순간 욱했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왜 따라왔습니까? 제가 어디가서 자빠지던, 구르던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째서 상관이 없다는 거지? 넌 내 신부다.”
“아까 하던 대화를 계속 하자는 건가요? 우리는 부부도 뭣도 아닙니다. 그저 의식에 의해 묶여있는 부부를 흉내낸 씨받이에 불과합니다. 제 말이 틀린가요?”
“하! 씨받이? 감히 신성한 우리의 의식을 씨받이라고 표현하다니. 네가 미쳤구나.”
“네. 미쳤습니다. 이렇게 당신과 홀딱 벗고 껴안고 있자니 참으로 팔딱뛰고 미치겠습니다.”
아사신은 또다시 빈정대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수라킨의 어조를 따라하고 있었다. 그동안 아무한테도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한번 둑이 터지듯 이 남자한테 터뜨려 버리자,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야스카산이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너를 그 빗물속에 어깨에 매고 낭떠러지를 기어 올라온 건 실수였군. 감사의 말은 고사하고 우리의 신성한 혼인의식을 씨받이라 표현하는 신성모독까지 저지르다니.”
“···저를 매고 올라왔다고요?”
아사신은 조금 찔렸다.
 “그렇다. 빗길이 심하게 미끄러워 정신을 잃은 너를 데리고 돌아가기엔 위험하다고 판단해 이리로 들어온 거지.”
그 말 대로라면, 정말로 생명을 구해준 것이다.
 아사신은 조금 미안해졌다. 그러나 마음은 미안해도, 쌓인게 많은 아사신의 입은 마음과는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거 대단히 감사하군요. 그것도 제가 신부이기 때문입니까? 그런 호의따위 필요한적도 원한적도 없습니다! 정신을 잃은 상태의 저를 데리고 그런 친절을 배풀어봤자, 원한적도 없는 친절에 대한 감사를 표시할 이유는 없겠지요.”
야스카산은 아사신을 이젠 거의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데구르르 흘렀다.
“결론은 쫓아간 내가 잘못했다는 거군?”
“뭐···  일단은 그렇지요.”
새침한척 말해보았지만 야스카산의 다리에 닿아있는 등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그가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다.
-아아! 왜 또 그런말을 해버렸을까!-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 아사신은 속으로는 벌벌 떨면서 끝까지 도도한 척 눈을 치켜떴다. 이러다 아까 죽을뻔 했으면서도 오기가 생기는 건 할 수 없었다.

야스카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자고 신은 자신에게 이런 신부를 내려주신 것일까. 같은 남자라는 점만해도 충분히 기가막힐 노릇인데, 이 성격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모르겠다.
벌벌 떠는가 싶으면 어느새 앞에서 고집을 부리고 있다. 쫓아가서 혼내주려고 하면 도망을 치다 저 혼자서 벼랑에서 떨어져 버린다.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그 절벽을 비바람이 치는 가운데 낑낑대며 들쳐엎고 올라와 살려놓으니, 왜 살렸냐고 신경질을 부린다.
 남자인 주제에 여자보다 더 까다로운 성격이 아닌가!
야스카산은 할 수 없이 자신이 조금 굽히고 들어가기로 했다. 사실 처음부터 그 성격을 건드린건 자신이 먼저였으니까···.
“좋아.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그만하고 얌전히 이 비가 그치길 기다리자. 너와의 대화는 나를 조금 지치게 하는구나.”
야스카산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아사신도 고집을 부릴수만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족장. 저야말로 족장께 대든것··· 죄송합니다.”
둘은 다시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아사신의 몸에서 열이나고 있었기에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몸을 더욱 세게 끌어당겨 자신의 몸 속에 가두었다. 처음엔 움찔하던 아사신도 곧 그것이 자신을 위한 행위인지 눈치채고 얌전히 파묻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야스카산은 문득 자신의 손에 감겨든 아사신의 육체가 무척이나 부드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거칠거칠한 자신의 손바닥아래 놓인 허리는 생각보다 나긋나긋해서 맞닿는 감촉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때도 이런 느낌이었던가?-
야스카산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 밤. 그 의식의 밤은 어떠했지?

내부의 목소리가 명령하기 시작하자 스스로의 의지력으로 버틸 수 없을만큼 그 몸에 혹했었지.
옷을 빼앗듯이 벗겨내고,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희롱했었지.
얼른 집어넣고 흔들고 싶은 욕망에 별다른 애무같은건 하지 못했었다. 그저 얼른 거기에 향유를 부어넣고 그 속에 자신을 묻고 흔드는데 바빴을 뿐-.
-이런···느낌이었던가?-
분명 허리를 쓸어올렸을때, 이 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바르르 떨었었다. 그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사를 가니 못가니 하며 실랑이를 벌일때도, 그 부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아사신을 굴복시키지 않았던가.
야스카산은 은근슬쩍 손끝으로 아사신의 부드러운 허리를 쓸어보았다. 분명했다. 이 느낌. 그 의식의 밤에 수없이 더듬없던 부드러운 살갗의 느낌이 손 끝에서 생생하게 되살아 난다.

아사신이 몸의 이상을 느낀 듯 흘깃 눈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야스카산은 왜 그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마주봐 주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사신은 곧 자신의 착각이라고 여겼는지, 다시 얼굴을 파묻었고, 야스카산은 그 모습에 슬그머니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슬슬 몸살기가 퍼지는지 병든 닭마냥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아사신의 허리살을 야스카산은 점점 대범하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밋밋한 굴곡을 따라 손바닥을 뱀처럼 교묘하게 움직였다가 다음 순간 사슴모피에 가려진 허벅지 속으로 살며시 미끄러트린다. 허리보다 더 탄탄한 강도를 자랑하면서도, 여전히 부드럽고 매끈한 감촉의 허벅지가 한 손에 들어온다. 살며시 손에 쥐고 주물렀다 놓는순간 탄력있게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살성의 느낌이 무척이나 좋았다.
흘깃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사신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지고 있었다.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이 뭔가 항의를 하고 싶은데 자신의 지례짐작은 아닌지 고민하는 모양이다.
야스카산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방금 그것은 그저 손이 잘못 미끄러진 것 뿐이라는 표정을 하고, 슬그머니 손을 끄집어 냈다. 따스한 온기와 부드럽고 촉촉한 속살을 맛 보았던 손가락은 나가기 싫다고 아우성쳤지만, 곧바로 자신이 정복할 새로운 영역으로 마수를 뻗쳤다.
 “어깨가 상당히 차다.”
야스카산은 중얼거리며 얌전히 놓여있는 아사신의 어깨를 주물럭거렸다. 차가운 어깨를 따끈한 큰 손이 덮어오자 아사신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니. 이대로 있다 병이 깊어지면 널 데리고 갈때 내가 힘이든다.”
야스카산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며, 벗은 어깨를 조물락 거렸다. 아사신은 기분 나쁜듯 인상을 구기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야스카산은 내가 뭘? 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한참을 노려보던 아사신은 어느정도 야스카산의 말이 맞다고 여겼는지, 다시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어느정도 허락도 받았겠다, 야스카산은 거칠 것이 없었다. 서슴없이 딱딱한 어깨와, 그 어깨와 연결된 목덜미와 쇄골을 문질러댔다. 연약한 피부가 굳은살이 박힌 손바닥과 마찰하여, 붉게 상기되었다.
-역시 이 몸은 ······.-
야스카산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신부의 의식때도 느꼈던 점이지만, 정말 이 육체는 마치 처음부터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몸 같다.
 약간 메마른 듯 보이지만 만져보면 촉촉하게 감겨오는 흰 살갗의 느낌. 배어물면 작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입을 벌려 자신의 내부를 모두 내어주는 입술. 그 다리 사이에 붙어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물건을 놀리듯이 살짝 거머쥐면 허벅지를 부들부들 떨면서도 지금 그렇게 문질러대는 행위가 기분이 좋다는 듯 슬며시 고개를 들었었다.

 거기다 엉덩이 사이를 힘주어 벌려야만 겨우 그 모습을 드러내는 그곳- 의 느낌은 정말이지······.

정말로 자신을 위해 신이 처음부터 어미의 태 속에서 성심을 다해 제단하고 만들어 놓은 듯한 육체이지 않는가.
슬쩍 모포에 덮여있는 아사신의 하반신을 바라본 야스카산은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꿀꺽 삼켰다. 그 아래 감춰져있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 곳을, 지금 당장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슬금슬금 고개를 쳐들었다.
-어차피 저 몸의 주인은 나다. 허락을 구할 이유는 없지.-
그렇게 결심한 야스카산은 얌전히 주물러주던 어깨에서 손을떼고, 점점 아래로 이동해갔다. 뼈가 느껴지는 작은 어깨를 만지는 느낌도 좋았지만, 역시 그 곳보다는 좀 더 은밀한 곳의 속살을 만지고 싶어 안달이 났다.
머뭇머뭇 눈치를 보며 쇄골 주변을 배회하던 손이 어느순간 확 가슴으로 미끄러진다. 아사신이 깜짝 놀라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뭐···뭐하는···!”
당황하여 모피를 끌어당겨 보지만, 야스카산이 좀 더 빨랐다. 모피가 그 빈약한 가슴을 덮기 전에 이미 그의 손가락은 아사신의 벌거벗은 가슴 위에 달린 작은 유두를 애무하고 있었다.
“족장!”
아사신이 새파랗게 질려서 외쳤다. 이 남자는 대체 자신한테 무엇을 하려 드는 거지? 경고음이 머리 속에 울려 퍼졌다. 이성보다 먼저 본능이 지금 상황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아사신.”
야스카산이 비릿하게 웃었다.
“가슴이··· 차갑다. 독감이 될지도 몰라. 내가 마사지를 해주지.”
야스카산은 쉬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음란함이 철철 흐르는 목소리에 아사신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마사지···라니. 싫습니다.”
“괜찮아. 내가 해주고 싶은 거니까···.”
미약하게 저항하는 손을 부드럽지만 강하게 밀쳐내며 여전히 가슴을 더듬어온다. 그 손길에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아사신은 핏기가 가셨다. 자신의 가슴에서 일어나는 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발버둥치는 사이 모피는 끌어내려져 비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고, 뜨겁고 진한 손가락이 자신의 빈약한 가슴팍을 무시무시하게 더듬어 댔다.
 아무것도 없는··· 볼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 창백하기만 한 가슴 위에 놓인 유두와 유륜이 야스카산의 손가락에 스쳐 새빨갛게 충혈되었다.
아사신은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괘···괜찮습니다. 저는···저는··· 이러지 않으···셔도···.”
“아니. 내가 괜찮지 않아.”
어느새 야스카산의 목소리는 속삭이고 있었다. 아까까지 차갑기만 했던 공기가 야스카산의 성적인 흥분에 따라 점점 변하고 있었다. 점점 더 야릇하게 흘러가는 기류 속에 짐승처럼 숨을 몰아 쉬는 야스카산의 존재는 공포였다.
불안하게 두 눈을 좌우로 굴리던 아사신은 자신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야스카산의 눈과 공중에서 부딪히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야스카산의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는 듯 했다.
-무슨 마사지란 말인가···!!-
다섯 살짜리 아이 라도 그런 변명은 믿지 않을 거다!
온몸의 신경이 일제히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 긴박감속에, 점점 강하고 진하게 눌러오는 성인 남성의 끈질긴 손가락. 그 손길 아래 제멋대로 희롱 당하는 것은 예민하게 부풀어오른 작고 볼품없는 자신의 가슴.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기류는 어린아이라도···, 그것의 성별이 사내라면 발기 시켜 버릴 만큼 긴장감이 철철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아사신은 믿고 싶었다. 이것이 그냥 마사지이고, 차가워진 자신의 육체를 조금 어루만져줄 뿐이라고··· 그런 친절일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아니 믿지 않으면 안되었다.
-설마 그 때처럼···.-
상상만해도 오싹해지는 그 경험. 근 한달 여 전에 일어났던 그 고통뿐이던 밤의 기억. 자신을 2주일간이나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악몽과 자괴감의 소용돌이 속으로 처넣었던 그 기억의 순간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겨우 잊고 있었는데, 어째서?!!-
아사신은 둥글게 몸을 움츠렸다. 어느새 허리까지 더듬어 대는 크고 긴 손가락으로 부터 그렇게 자신을 보호하고 싶었다. 한 손을 내려 떨어질락 말락한 모피의 끄트머리를 안간힘을 써서 움켜잡았다. 야스카산의 손은 너무 거칠게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어대서 그의 무릎에 누워있는 자신의 몸까지 파도를 탄 조각배마냥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망가야 해.-
아사신은 결심했다. 정말로 무서웠다.
신부가 된 이상, 족장과 한 달마다 잠자리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신부가 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던가. 미치고 나서는 거의 매일을 빠짐없이 신부였던 자신, 후계자를 낳았던 자신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던가. 거의 자포자기 식이긴 했지만 처음부터 각오는 되어 있었다.
다만 지식을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체험하는 것 사이에는 아사신으로서는 알지 못했던 엄청난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아무리 각오를 했었다 해도, 닥치기 전에는 전혀 모를 수 밖에 없는 일도 세상에는 존재하는 법이다.
남자가, 같은 남자에게 다리를 벌려주고 그 씨를 몸안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저주받을 밤 이전의 어리숙한 숫총각이던 아사신으로서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끔찍한 경험이었다.

지독한 상실감, 들끓는 열등감, 자신의 나약함과 운명에 대한 저주가 한데 휘몰아치며 춤을 추던 그 밤.

 하룻밤 만으로, 그 단 하룻밤만으로 남자로서의 자존심과 해묵은 상처가 다시 뒤집어졌었다. 그만큼 그저 알고만 있던것과, 실제로 체험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 였다. 그리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피하고 싶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2주 후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수라킨과 농담을 하고, 소사린을 다시 만나고, 타스가와 함께 사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이제 나는 다 컸으니까, 더 이상 그런 경험이 내겐 힘들지 않다고, 더 이상 내겐 상처가 아니라고 툭툭 털고 일어나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그 화상같은 자국은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 시뻘건 속살을 내보이며 피를 줄줄 흘리는 것이다.
다시 그와 밤을 보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런식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

“흐윽. 그··· 그만!”
아사신은 자신의 가슴위로 이제 엎어질듯 가까이 다가온 야스카산의 얼굴을 힘차게 밀었다. 힘을 쓰자 내장이 다시 뒤틀리며 구토감이 일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제발··· 제발 그만해 주십시오.”
길게 내밀어진 야스카산의 붉은 혀가 공중에서 싸악 핥는 시늉을 했고, 그것은 순간적으로 몸을 옆으로 비튼 아사신의 젖꼭지가 있던 곳을 간발의 차로 스쳐지나갔다.
 야스카산은 아쉬운 듯 입을 다셨다. 그 부풀어오르고, 발갛게 익은 유두를 먹고 싶었는데······.
아사신은 그 표정을 이를 악물고 쳐다보았다.
 “너는 몸이 차다.”
야스카산은 아직 이것이 다정한 마사지인척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듣는 아사신도 말하는 자신도 믿지 못할 내용을 허리가 빠질만큼 색정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닙니다. 마사지는 더 이상 괜찮습니다!”
아사신은 모피자락을 꼭 잡았다. 야스카산이 은근슬쩍 그것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것이 떨어지면 정말로 자신의 모든 치부가 다 보이게 된다. 온몸의 근육에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
“흐억!”
안그래도 긴장으로 굳어있던 아사신의 몸은 완전히 돌이 되었다. 착각할 수 없는 감각- 자신의 엉덩이 아래 눌려있던 야스카산의 성기가 묽은 액체를 흘리며 점점 단단해져 간다. 노골적으로 허리를 흔들어 엉덩이 사이를 누르는 그 물건의 감촉은 지나치게 생생했다.
-당한다. 이대로 있다간 분명히 당한다.-
아사신은 결심했다. 이렇게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결심은 빨랐고, 행동은 더더욱 빨랐다.

 “아사신!!”
야스카산이 당황해하며 자신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사신은 멈추지 않았다. 손에 모피자락이 쥐어지자마자 벌떡 일어나 달렸다. 밖에서 얼어죽는 한이 있어도,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제기랄. 아사신!!”
야스카산은 곧바로 아사신의 뒤를 쫓았다. 반쯤 발기된 그의 성기가 차가운 공기에 닿아 조금 움츠러들었다. 꽤나 보기흉한 장면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하반신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아사신의 뒤를 쫓았다.
-또 놓칠것 같으냐?-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바보스러움을 비웃었다. 저 바보는 아까 자신을 피한것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둘 사이의 간격은 겨우 한 뼘 차이였다.
 “히윽! 힉! 힉!”
숨이 일정한 간격으로 빨라졌다. 아니 빨라진 것이 아니라 장애를 일으켰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도, 속으로는 충격이 상당했는지, 머리가 팽그르르 돌고, 속에서 신물이 넘어왔다. 어디선가 번개가 치며, 나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잡히면···안돼···.-
아사신은 필사적으로 뛰었다. 걸음이 엉키고, 시야가 어지러워도 달렸다. 빗줄기에 얻어맞은 온 몸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쉬고 싶었지만 쉴 수 없었다. 자신의 뒤에서 남자가 따라오고 있을 것이다. 더 빨리 달려야만 했다.
 쏴아- 하고 쏟아지는 빗소리가 청각을 어지럽혔다. 얼마나 남자가 따라왔는지 알고 싶었지만 뒤돌아 볼 수는 없었다. 돌아보는 순간 잡힐 것만 같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질주하던 아사신은 젖은 돌을 밟고 순간 휘청였다. 당황하여 빠르게 중심을 잡았으나 이미 늦었다.
 “헉!!”
세상이 한바퀴 빙그르르 뒤집혔다. 어리둥절해서 좌우로 눈을 굴려보고서야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어나려고 용을 써보았지만 몸은 머리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고 푸들푸들 떨기만 했다.
절망에 빠져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있는 아사신의 앞에 야스카산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는 웃고 있었다. 마치 앞으로 도살하게 될 사냥감의 모가지를 거머쥔 사냥꾼처럼, 승리를 눈앞에 둔 정복자처럼··· 그는 웃고 있었다.
“미련하구나 아사신.”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나체를 힘들이지 않고 안아올렸다. 비에 젖은 미성숙한 사내의 살결이 반들거렸다. 얌전히 죽어버린 자신의 성기가 그 육체를 만지는 것 만으로도 다시 흥분한다.
“하지···마.”
아사신이 중얼거렸다. 야스카산은 그가 말하는 것은 듣지 않고, 그 입술에만 주목했다. 보라빛으로 질려가는 입술이 꿀이라도 바른듯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마른 육체를 얼싸안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츕- 하는 소리와 함께 한입에 입술을 삼켰다가 내뱉었다. 여기선 더 이상 진도를 나갈수가 없다. 아사신의 약한 몸은 이미 펄펄 끓고 있었다. 서둘러 동굴안으로 다시 돌아갔다.
“좀 추울거야.”
야스카산은 아사신이 들고 나가는 바람에 푹 젖어버린 사슴모피를 탈탈 털어 바닥에 깔았다. 그나마 젖지 않은 유일한 것이었는데···. 라고 생각하자 아까웠다. 그 하는 모양을 본 아사신은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말아주세요. 제발 족장. 제가 잘못 했습니다. 제발···.”
아집을 부린 대가가 이렇게 돌아오는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도 괴로웠다.
“잘못을 빌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아사신.”
야스카산은 웃었다. 그 웃음은 앞으로 다가올 정사의 시간에 대한 기대감으로 차 있었다.
 “제발··· 제발···.”
아사신은 울었다. 차가운 볼 위를 뜨거운 눈물이 지나가자 불에 지져지는 것만 같다.

 야스카산은 아사신이 아무리 애원한다 해도 들어줄 생각따위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다. 큰곰자리 별이 신부의 운명을 그 손에 쥐어서 이 세상에 보내준 자신의 아내다. 남편이 아내를 가지는데, 무슨 꺼리낄 것이 있단 말인가.
 야스카산은 긴장으로인해 거의 경련수준으로 떨고있는 아사신의 흰 손목을 가볍게 그러쥐고 머리위로 옭아맸다. 아사신의 눈에서 후두득 눈물이 떨어졌다.
“울지마라. 아프지 않게 해주마.”
전혀 아사신에게는 위로가 안되는 말을 중얼거리며 야스카산은 혈관이 뻗어나와 아플만큼 발기된 자신의 성기를 서둘러 야스카산의 엉덩이에 부볐다. 차가운 엉덩이에 뜨거운 자신의 것이 맞닿자 아사신이 질끈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어딜 감히!-
마음에 안들었다. 자신과의 정사를 무슨 고문이라도 받는듯이 행동하는 아사신이 괴씸했다. 자신과의··· 위대한 족장과의 잠자리를 감히 누가 거부한단 말인가! 아사신은 전사도 못된 남자. 그런 주제에 최고 전사의 정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거부하다니 괴씸하기 짝이 없었다.
 야스카산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씹고있는 아사신의 입을 억지로 벌렸다. 붉은 혀와 하얀 치아가 보인다. 그 속에 자신의 것을 집어 통째로 집어 넣으면 참으로 기분이 좋을 것만 같았다.
-아직은 아니다.-
야스카산은 냉정하게 그 욕구를 이겨내고, 길게 혀를 내밀어 그 속을 탐하였다. 아까 밖으로 뛰쳐나가느라 힘들었는지, 아직도 격한 숨을 토해내는 그 입안은 적당한 온도와 따스한 습기를 지니고 야스카산의 혀와 입술을 반겼다.

츕- 하고 서로의 타액이 빨리는 소리가 동굴안에 번졌다.
 본격적인 행위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흐으- 하고 아사신이 괴로운 신음소리를 냈다. 안그래도 숨이 막혀오는데, 야스카산의 입술은 낙지처럼 들러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한다. 호흡곤란으로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두터운 혀가 입천장을 더듬고, 입술을 흡입하고, 굳어있는 혀 아래로 들어가 무시무시하게 해집는다.
한참을 들러붙어있던 야스카산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너무 흡족해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어서 아사신은 저도 모르게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 겨우 숨을 골라 그것을 억눌렀다.
“이러지 마십시오. 제발··· 정말 당신을 미워할 거 같습니다.”
“언제는 좋아한 것 처럼 말하는구나. 네가 나를, 혹은 내가 너를 좋아할 일은 평생이 지나도 없을 것이다.”
야스카산은 차갑게 웃었다. 언제 그런 열정적인 입맞춤을 나누었냐는 듯, 그 표정은 언제나의 오만방자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잠시··· 당신이 나를 절벽에서 구해준 것을 알았을때, 당신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거 고맙군.”
울분에 차 비명처럼 토해내는 아사신의 말에도 야스카산은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좋게 생각하든, 나쁘게 생각하든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야스카산은 도로 고개를 숙이고, 아까부터 먹고 싶었던 유두를 입술로 더듬었다. 아사신은 신음을 삼켰다. 아까 야스카산이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 가장 얇은 살갗이 벗겨지고 부르튼 유두가 몹시 쓰라렸다. 그 아픔에 화가 치밀었다.
“젠장··· 젠장··· 끝까지 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거야!”
“용서하지 않으면 어쩔거지? 나는 바르바칸의 아들이자 위대한 신의 혈족. 어리석은 내 신부. 네가 날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단다.”
야스카산은 웃었다. 저런 오만불손한 말투도 지금은 충분히 용서해줄 수 있었다. 그만큼 이 빈약한 육체가 주는 쾌락은 환상적이었다. 어떤 사냥도, 어떤 여자도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지 못했었다.
-이제야 왜 그 오랜 세월동안 신부란 제도가 지켜져 왔는지 알 것 같군.-
과연 그 어떤 남자라도 이런 기쁨을 주는 육체를 포기하기 싫을 것이다.
“너는 신부다. 나의 아내 아사신. 내가 원하면 너는 언제든 여기로 나를 받아 들여야만 한다.”
야스카산의 손가락이 허공을 헤매는 여린 다리를 벌리고, 그 속으로 파고들어 가장 연하고 가장 깊은 그 곳을 눌렀다. 아사신은 발작이라도 하듯 몸을 뒤틀었다.
“제발··· 제대로 의식을 갖추고, 한달이 되는 날 나를 맞으러 오십시오. 그것이 법도입니다.”
“나는 너희의 지배자. 내가 원하는 날이 법도에 맞는 날이다.”
냉랭하게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야스카산의 말에 아사신은 절망했다. 마지막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이 남자는 정말 여기서 자신을 안을 생각인 것이다.
아사신은 그만 입을 다물기로 했다. 더이상 비참해 지기 싫었다. 어떤 방법도 소용없다면 마음껏 이 남자를 증오라도 해야겠다. 마음대로··· 어차피 한 번 버렸던 몸이다. 두 번째라고 달라질 건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생각만이었다.

“흐······ 흐아···아···.”
그 두터운 손가락이 구멍을 헤집는 순간 아사신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었다. 저주도, 미움도, 두려움도, 원망도 이 순간 저 단 한 개의 손가락 앞에 산산히 부서져내린다.
“크으. 조이는 구나.”
야스카산이 귓가에 대고 황홀한듯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두 개, 또 세 개로 불어났다.
 이 곳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는 물건이 없었다. 그들이 몸을 섞은건 한 달 전이다. 아무 준비도 없이 몸도 성치않은 아사신의 작디작은 비부를 저렇게 열어젖히는 것은 지독한 짓이었다.
“싫어! 싫어!”
야스카산은 몸부림 치는 아사신의 육체를 억눌렀다. 땀이 흘렀다. 공기가 데워지고, 심장이 박동쳤다.
 “제길!”
야스카산은 짧게 욕을 하고 아사신의 목구멍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몸부림치는 입술을 잔인하게 벌리고, 타액으로 손가락을 축축하게 적셔 다시 아래의 구멍에 처넣었다.
 반 강제로 벌어지는 구멍은 억지로 억지로 남자의 성기가 드나들 만큼의 공간을 내놓았다. 그 작은 비부가 조금씩 벌어지는 모습을 야스카산은 곁눈질로 훑어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그 밤. 제대로 풀지 못한 욕망을 엄한 여자에게 풀어야 했던 그 밤의 기억. 더 원한다고 소리치는 내부의 목소리. 그 욕구가 쌓이고 쌓여, 사냥을 다니며 피를 보고 흥분을 잠재워야 했던 날들. 그때는 인정하기 싫었었다. 자신이 남자의 뒷구멍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 빈약한 청년의 다리사이로 기어들어갈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야스카산은 천천히 허리를 앞으로 들이밀었다. 손가락으로 틈을 벌려 구멍을 최대한 잡아벌렸다. 아직도 좁기만 한 그곳은 야스카산의 성기를 받아들이지 못해 한참을 애 먹였지만, 집요한 야스카산이 결국에는 승리했다.
 동시에 아사신의 눈이 찢어질듯 흡뜨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잠깐 공황이 일어났다.

“아···아···!”
-신부가···!-
“흐···아···.”
-신부가 된다. 신부가 눈을 뜬다. 또 다시 그 밤처럼, 그 날 처럼. 신부가 되 버린다!-

아사신은 번개가 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신이 분노한듯 했다. 자신의 신부가 자신이 없는 곳에서 이렇게 마구잡이로 유린당하는 것에 마치 분노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야스카산도 번개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보란듯이 자신의 물건을 아사신의 뱃 속에 더욱 깊이 집어넣었다.
 그는 웃었다. 크게 웃고 싶었다. 이제 당신은 방해하지 못한다고, 우리의 이마에 신어가 없는 이상 당신은 방해하지 못한다고, 큰 소리로 웃고 싶었다.
-이건 나를 위한 몸이지.-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하얀 어깨를 깨물며 속삭였다.
-자아, 나를 즐겁게 해다오 아사신.-
찌걱찌걱 하는 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진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빗방울이 둘의 얼굴에 튄다. 음란한 행위가 펼쳐지는 하반신의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만큼 지독하게 색정적-. 남자의 성기가 남자의 동굴을 파헤치며, 아래에서 대롱거리는 자신의 고환 두 쪽까지 집어넣으려는 듯 힘차게 들이 박혀온다.
“안돼···. 이건 옳지 않아. 옳지 않아!”
아사신은 정신없이 외쳤다. 이러면 안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번개가 칠 때마다 어두침침한 주변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그 빛은 마치 그들의 난잡한 행위를 보고싶어 하는 누군가의 비틀린 욕망의 시선같아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점점 야스카산의 허리짓이 과격해졌다. 결합된 그 곳에서는 그의 빠른 속도에 비벼진 타액과 애액이 서로 섞여서 부글거리는 거품이 되어 흘러내렸다. 작고 빈약한 흰 육체위에 올라타 미친듯이 허리짓을 헤대는 야스카산의 짙은 몸은 연약한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맹호의 그것과 같다.
 실제로 아사신은 잡아먹히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등을 손으로 때려도 꿈쩍없는 야스카산의 육체는 무쇠와 같았다. 너무도 절망스러웠다. 갈 데 없이 흔들리는 하얀 두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걸어놓고 다시 밀고 들어오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되게 깊숙히 성기가 내부를 공격했다.
“흐으으··· 으흐으으···.”
아사신은 엉엉 울었다. 다섯살박이 아이처럼 소리내어 울었다. 야스카산은 다정하게 눈물을 혀로 핥아 주고, 손으로 닦아주었으나, 그 아래쪽으로는 빙글빙글 허리를 돌리며 구멍을 파헤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흐으, 제길··· 좋아. 제길. 제기랄!”
야스카산은 욕을 했다. 이 남자의 육체가 너무나 좋았다. 이 속살에 파묻혀 하다가 죽어도 좋을만큼 좋았다. 싫다고 몸부림치는 상체와 달리, 자신의 정액을 게걸스럽게 짜내는 하체는 요물이었다.
“크윽!”
한계가 다가온 야스카산은 정신없이 아사신의 목줄기를 물어 뜯었다. 푸른 동맥과 정맥이 비치는 흰 목은 엉망이 된 목 아래와 달리 너무도 순결해서 참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이 육체 곳곳에 자신의 정액과 성기가 이미 범했다고 표시하고 싶었다.
“아! 아아!”
아사신은 비명을 질렀다. 아래와 위에서 동시에 물어뜯기고, 잡아넣어지는 느낌은 실로 끔찍했다.
“크--.”
그렇게 물린채 얼마나 지났을까. 마지막으로 아사신의 항문에 자신의 것을 들이박은 남자는 잘게 부르르 떨더니, 그 속에 자신의 정액을 힘차게 내뿜었다. 그 감각은 연결된 곳을 타고 아사신에게도 전해져 아사신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론 야스카산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떨림이었다.
“내 신부.”
야스카산은 달콤하게 속삭이고 그가 잔뜩 표시해 놓은 육체 위로 엎어졌다. 한 손은 집요하게 부풀어 오른 유두를 긁어대고, 한 손은 상처가 터져 피가 흐르는 입술을 더듬으며 그는 진하게 웃었다.
아사신은 드디어 그의 성기가 빠져나가자, 끅끅대는 울음을 삼키고, 조심조심 탈진한 남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손을 내려, 자신의 엉덩이께로 기어들어가게 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지 않으려고 해도 비참하고 속이 상해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야스카산은 미소를 지으며 그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래도 눈물은 멈추지 않고 눈물샘이 고장난 듯 쏟아져 내렸다. 아사신의 손가락이 과도한 성교로 부풀어오른 항문속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그가 남긴 정액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용서하지 않아. 절대··· 절대로 용서하지 못해.-
“흐··· 흐으······.”
가슴이 돌이라도 얹어놓은 듯 먹먹하다. 결국 끝까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 남자는 해버렸다. 아무리 애원해도 들어주지 않고, 아무리 울어도 무시해버린다. 도망가면 잡아오고, 화를내면 비웃는다.
“쉬- 울지 마라 아사신. 필요한 게 있느냐? 원하는 건 없어? 응? 아사신 말해봐라. 응?”
야스카산이 귓가에 속삭이며 부드럽게 입 맞추어도, 아사신은 울기만 했다. 미끌미끌한 정액이 손바닥에 후득 쏟아졌다. 그 감촉이 너무도 서러워 도저히 눈물을 멈출수가 없었다.
-증오해··· 정말로 증오해···.-
아사신은 정액이 대충 빠져나왔다고 느끼자 다리를 둥글게 말고, 힘없이 돌아누워 서럽게 흐느꼈다. 왠지 당황한 듯한 야스카산이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 울지 말라고 속삭여주었지만 아사신의 울음은 그칠줄을 몰랐다.
비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타스가는 입을 떡 벌리고 완전히 젖어버린 야스카산과, 정신을 잃고 사슴 가죽에 돌돌 말린채 야스카산에게 안겨 돌아온 아사신을 바라 보았다.
 “족장. 어떻게······.”
조금만 더 늦게 돌아왔으면, 본격적으로 수색조를 만들어 샅샅이 뒤지고 다닐 뻔 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점심나절에 사라졌던 아사신이 야스카산과 돌아온 것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자정 무렵 이였다.
야스카산은 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신부를 데려가라. 감기에 걸렸다.”
급하게 타스가가 신부를 안아들었다. 안그래도 허여멀건한 신부의 몸은 색소라고는 남아있지도 않은 듯, 새하얗게 질려 아래로 축 늘어졌다. 대체 어디서 뭘하다 왔는지 옷은 찢어져있었고, 입술은 터졌으며, 온 몸에 푸르고 붉은 멍이 들어 있었다.
“오빠-!”
소식을 듣고 달려나온 수라킨이 깜짝 놀라 다가왔다. 정신을 잃은데다 엉망진창이 되어 돌아왔으니 놀랄만도 하다.
“걱정 마라. 그는 잠이 든 것 뿐이다.”
야스카산이 말했다. 수라킨은 야스카산의 눈을 마주보며 그 속에 들어있는 진의를 파헤치려 했다. 왜 이 늦은 시간까지 둘이서 숲 속에 틀어박혀 있었는지, 어째서 아사신이 이렇게 되었는지 의문점이 상당히 많았다.
 야스카산은 그 날카로운 눈동자를 마주 쏘아 주었다. 아무리 수라킨이 기가 세고, 예리한 감각을 가졌다고는 해도 그래봤자 그녀는 열 네살짜리 소녀였다.
타스가가 아사신을 안고 서둘러 사라지자 수라킨도 따라서 사라졌고,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서서히 흩어졌다. 신부는 잠시 행방불명이 되었었지만, 족장이 데리고 돌아왔고, 그걸로 된 거다.
 야스카산은 자신의 호위대에게 물었다.
“어째서 이 시간까지 수색조를 보내지 않았지? 내가 그를 데리고 오긴 했지만, 이런 비오는 날, 신부가 사라졌는데 방치하다니 너희답지 않다.”
“그것은 족장. 이방인 남자가 족장과 신부가 함께 있는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사는 급히 변명했다. 야스카산의 푸른눈이 날카롭게 희번뜩 거렸다.
“힐레멘 그 자가?”
“네. 이방인이 하는 말이라 믿기가 뭣했는데, 바르바칸 께서 그렇다면 되었다고 하셔서······.”
“아버지가···.”
야스카산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오빠. 정신차려봐. 응? 괜찮아?”
수라킨은 타스가와 함께 끙끙 거리며 그를 침대에 눕힌 후, 완전히 젖어 철썩 몸에 들러붙은 옷을 아예 칼로 찢어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너무 더러워지고, 찢어진 곳이 많아, 다시 쓸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옷이 찢겨나갈수록 둘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지독하게 괴롭힘을 당했는지, 피딱지가 맺혀진 유두와 유륜.
 무시무시한 힘으로 내리누른 흔적이 선명한 팔목 안쪽의 멍과 허벅지의 손자국.
 집요하게 잘근잘근 씹어놓은 목덜미와 가슴으로 이어지는 이빨자국은 너무도 격렬했을 그 장면을 연상스켜 수라킨의 얼굴은 한순간 벌겋게 달아올랐다.
차마 속옷까지 벗겨낼 수는 없었던 수라킨은 뒤를 부탁한다는 짤막한 말을 남기고 나가버렸고, 마찬가지로 시뻘개진 얼굴을 한 타스가는 불행히도 혼자남아 아사신의 뒤처리를 해야 했다.
“이래서 늦으셨던 거군.”
-아무리 그래도 너무 혹사시키셨잖아. 기절할 정도로 해대다니 아직 젊어서 그런가···. 정력이 심하게 좋으시구나 족장은······.-
사실 야스카산이 한 건 딱 한 번 이었고, 아사신의 상태가 나쁜것은 절벽에서 떨어진 후유증 때문이었지만 타스가는 그렇게 마음대로 오해를 한 채 슬금슬금 아사신의 속옷을 벗겼다. 질척하게 젖은 속옷은 온통 멍 자국으로 얼룩덜룩한 허벅지와 골반에 걸쳐 잘 벗겨지지 않았지만 힘주어 끌어내리자 끌려 내려졌다.
“······허······.”
타스가는 헛웃음을 지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부위도 상당히 열정적인 자국이 남아있다고 생각했지만. 속옷에 가려져있던 부분은 더 심각했다.
엉덩이 골 사이의 살은 어찌나 세게 잡아벌렸는지, 붉게 살갗이 벗겨져 있었고, 힘없이 늘어진 성기는 까칠한 것에 긁혔는지 피가 묻어있었다. 거기다가 그 좁은 계곡 사이의 항문에서는 소량의 피와 함께 그 정체가 의심이 가는 느릇한 액체가 조금씩 안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에도 참혹할만큼 부어있어서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너무하군. 이렇게 될 때까지 해대다니···.”
타스가는 서둘러 깨끗한 물을 데워 왔다. 수라킨이 밖에서 어떻냐고 물어보았지만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끔찍히도 위하는 그녀 오빠의 상태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따스한 물을 얇고 부드러운 천에 적셔서 살금살금 항문안으로 진입시켰다. 정신을 잃은 아사신이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자, 타스가는 좀 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깊이 손가락을 진입시켰다.
남자랑 해 본 적은 몇 번 있었다. 타스가는 뛰어난 전사였고, 뛰어난 전사의 정액을 받으면 그 용맹한 혼이 자신에게도 옮겨온다고 믿는 나어린 청년들은 가끔 그에게 자신과 하룻밤을 같이 자자고 요구해 오곤 했었다.
약간의 거부감도 있었지만 그런 미신을 믿음으로서 진짜로 그들이 용맹스러워 진다면 못해줄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타스가는 여러번 남자들과 몸을 섞었고, 그 뒤처리를 해준 적도 있었다. 적어도 이렇게 배려없이 몸을 섞는 짓을 한 적은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족장을 만나면 제대로 한 소리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타스가는 깊숙한 곳으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으······.”
아사신은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리고 몸부림을 쳤다.
 -조금만 더···.-
타스가는 조바심이 났다.
 신부의 육체. 족장만이 만질 수 있고, 족장의 물건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비밀의 동굴에 자신의 손가락이 -아무리 필요한 과정이라고는 해도-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꺼림칙 했다.
“응··· 싫어···.”
아사신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로 싫고 무서운듯 고개르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신부. 곧 다 됩니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가고, 입에서 단내가 났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는 것이,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숫처녀의 몸을 희롱하는 괴한이 된 느낌이었다.
-아니, 내가 이런 기분 느낄 필요가 없지.-
타스가는 피가 몰리는 얼굴을 힘차게 한 번 내저은 후, 이번엔 약간 세게 안쪽을 빙글 돌리며 내벽을 긁었다. 그러자 안에서 말라있던 정액이 찌걱- 하는 망측한 소리와 함께,
“하···응!!”
하는 감미로운 신음소리가 아사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명백한 교성이었다.
타스가는 깜짝 놀라 그대로 얼어 붙었다. 아사신의 속눈썹이 뜨일 듯 말듯 파르르 떨리고, 하얀 나신은 이불에 휘감기며 비틀어 졌다. 다리가 쫙 펴지고, 발가락이 오그라드는 그 모습에서 자신이 무엇을 건드린건지 알아버린 타스가는 벌떡 일어나 손가락을 빼냈다.
“제···제길!”
신부의 말랑한 내부를 더듬었던 손가락이 따끈따끈하게 열이 오른것만 같았다. 어느 새 자신의 앞섬이 자랑스레 부풀어 오른 것을 보고, 타스가는 머리를 싸맸다. 누구보다 뛰어난 족장의 보좌관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그의 신부에게 욕정을 느끼다니···!
타스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보지 않은채 굉장한 속도로 아사신의 육체를 닦아냈다. 정신을 잃은 몸을 마구잡이로 굴리고 던져가며 온몸의 상처를 벅벅 닦아내고, 처박듯이 이불안으로 밀어넣자 마자, 쉥하니 바람처럼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수라킨이 -어라, 벌써 다했어요?- 하고 물어왔지만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른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바지 안에서 부풀대로 부풀어 올라, 마구 자기 주장을 하고 있는 앞을 가리고 집으로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처량하게 느껴졌다.




아사신은 꼬박 하룻동안 기절한채 일어나지 못했고, 정신이 든 후에도 일주일 간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수라킨과 소사린이 저번처럼 문을 부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할 무렵에야 그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그들은 2주간 드러누웠던 첫 경험때 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아사신도 익숙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사신은 예전과 똑같은 생활을 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마자, 다시 가리시네를 찾아가서 새로운 일을 받아왔고 드러누운 동안 수라킨이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온 집안을 청소했으며, 소사린을 만나 자신은 괜찮다고 안심시켰다.
그는 열심히 일했다. 먹고 살 걱정이 없어진 지금에 와서도 예전처럼, 아니 예전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가리시네는 버려진 노인들이 사는 외떨어진 곳으로 가서 그들을 돌보라고 말했다. 수라킨은 그 말에 거의 이성을 잃고 날뛰었지만 아사신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그 말을 따랐다. 욕창이 생긴 노인들의 등을 닦아주고, 팔 다리가 마비된 그들의 사지를 주물러주고, 먹거리가 떨어져 굶고있는 자들을 위해 죽을 끓였다.

아사신이 앓아누웠던 일주일간, 야스카산은 갑자기 전쟁을 하겠다고 선포했다.
평화를 사랑하고, 자신의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만 싸워왔던 전사들은 갑작스런 전쟁 선언에 어리둥절해 했지만, 늘 그래왔듯이 그들은 야스카산의 말에는 절대 복종했다.
 야스카산은 몹시 바빴다. 그는 옆에 힐레멘을 대동하고 바르바칸과 싸워야 했고, 늙어빠진 장로들도 설득해야 했으며, 신전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도 간간히 올려야 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를 만큼 바빴다.
그 바쁜 와중에 아사신의 집에도 들렸다. 수라킨이 잠든 틈을 타, 타스가를 앞세우고 숨듯이 아사신의 집 안으로 들어간 그는 굳게 닫힌 방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돌아갔다.
 타스가가 왜 그러냐고, 한 번 불러보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아무말 하지 않고 한참을 그저 서 있기만 했다.
 단 한 번 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절대 찾아오지 않았다.
바르바칸과의 싸움은 지루했다. 바르바칸은 남의 땅을 침략하는 것에 상당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비록 족장의 자리는 야스카산에게 물려주었지만, 그 역시 어느정도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고, 일단은 야스카산의 아버지 였다. 품위있게 설득과 권유를 하던 야스카산도 나중에는 소리를 지르고 회의 도중 뛰쳐나와 버렸고, 그 후 몇 일간 부자는 상당히 불편한 침묵을 지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은 냉정한 아버지인 바르바칸에게도 적용됬던 듯, 결국 손을 든 것은 바르바칸이었다. 그는 몹시 기분 나쁜 어조로 딱 한 마디만 했다.
“네가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도와주마.”
그 항복 선언에, 야스카산은 의외로 기뻐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감사합니다- 라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사실 요새 그를 보고있으면 어딘가 정신이 빠진 것만 같았다. 힐레멘과 음침한 구석에서 쑥덕 거리다가도, 한 순간 멍한 눈빛으로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곤 했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야스카산의 그런 모습에 자신들의 족장이 어딘가 아픈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늘 긴장과 오만함이 흐르던 얼굴이 순간 순간 얼이 빠져서 멍청하게 변하는 모습은 보는 입장에서도 상당히 괴로웠다. 어느날 밤, 갑자기 아무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나가더니 새벽녁에야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뒤로는 더욱 그랬다.
야스카산은 거의 매일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고, 하루에 한번은 사냥을 나갔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냈다. 그의 호위대와 가족들은 그러한 그의 변화을 이해하지 못해서 당황해 했다.

날씨는 정말 좋았다.
 한참을 퍼부어댄 후라 비는 더이상 오지 않았고, 공기는 훈훈했으며, 예년과 달리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아직 겨울이 다가오려면 한참은 남은 것 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아름답고 화창해서 소풍가기 딱 좋은 날씨였다.
그런 좋은 날의 아침. 아사신은 음지의 구석진 방에서 한 노인의 오물을 닦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구역질 나는 일이었다. 늙은이 특유의 야릇한 냄새와, 병자 특유의 냄새, 그리고 오물과 더러운 쓰레기가 함께 썩어가며 일제히 풍기는 집 안에서 그 모든 것을 생산해내는 노인을 돌보는 것은 사실 힘들었다.
그렇게 혼자 살게 된 노인들은 자식이 없거나 버려진 사람들이었고, 돌봐 줄 사람이 없는 노인들은 서로서로 기대서 살아가다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가 없게되면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아들이 없음을 한탄했고, 남자들은 그들이 전사로서 일찍 죽지 못함을 한탄했다. 그 작은 마을은 언제나 미처 죽지 못했음을 한탄하는 소리가 흐르고 죽음의 음침한 그림자가 늘 거하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신부가 나타났다.

오랜 세월동안 그들에게는 신부가 없었다. 아사신의 어머니는 제대로 신부의 역활을 수행하지 못한채 죽어버렸고, 그 후로 한참이나 신은 새로운 신부를 내려주지 않았다. 족장의 아내들은 늘상 육아라던가, 건강이라던가 하는 문제로 그들을 방치했고, 족장들 또한 그런 패배자처럼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아왔다.
 그래서 그들 또한 신부가 나타났다는 말에 특별한 의의를 두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몇 번 둘러보고 말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사신은 달랐다. 그는 발 벗고 나서서, 노인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먹거리를 챙겨주었고,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며, 몸을 닦아주었다. 그 스스로의 몸도 별달리 좋아보이지 않는데도, 그는 그의 여동생과 호위무사를 데리고 일일이 발로 걸어다니며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던 것이다.
 노인과 병자들은 감동받았다. 사실 그 세명이서 해봤자 얼마나 하겠는가. 특별히 큰 도움은 안되더라도, 적어도 관심받고 있다는 느낌과, 족장의 신부가 몸소 와줬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게다가 신부의 호위무사와, 신부의 여동생이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며 싸우는 것을 듣는것도 상당히 재미있었다. 신부의 동생인 수라킨이라는 아이는 나이 답지 않은 괄괄함과, 남자같은 당당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여장부 기질이 상당한 아이였다. 그녀가 옆에 오기만 해도, 정오의 햇살이 쏟아지는 것 처럼 싱싱하고 활기찬 느낌이 온 몸에 퍼졌다.

아사신은 노인의 등에 습진이 생기지 않도록 깨끗하게 소독해 준 후, 곧바로 그 노인이 힘들게 일궜음이 분명한 꽃밭을 돌보기로 마음 먹었다.
몸에 문질러 향을 나게 해주는 효과가 있어 여인들이 즐겨찾는 헤리파파 나무의 묘목이 저번 비로 인해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고, 미처 꽃잎을 피워보지도 못한 아름다운 꽃들도 꺽어지거나, 통째로 뽑혀서 구석에 나뒹굴고 있었다. 혼자 하기에는 좀 일감이 많았지만 수라킨에겐 빨래를 시켜 놓았기 때문에 자신이 해야만 했다.
수라킨은 -아사신의 말에 투덜거리면서도- 빨래를 빨러가면서, 타스가도 끌고갔다. 수라킨의 말로는 타스가는 힘이 좋아서 한번만 쭉 짜도 따로 건조시킬 필요없이 빳빳하게 마른대나···.
“이런······. 죄다 죽어버렸군.”
아사신은 혀를 차며 서둘러 흙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바람에 날려 어디선가 굴러온 돌무더기도 산떠미였다. 낫을 들어 잡초를 캐내고, 돌을 고르고, 죽은 나뭇가지를 쳐내는 일은 힘들었지만 보람있었다. 아사신에게는 다른 남자들처럼 사냥터에서 생명을 빼앗는 재능이 있는게 아니라, 생명을 돌보는 재능이 있었다.
 그 재능이 비록 사는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거기 나무들도 돌봐야 하는데······.-
아사신은 자신이 족장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 원인제공을 한 그 흙더미가 부숴져 내린 곳의 죽어가던 나무들을 생각했다. 다시 한 번 가보려고 마음은 먹고 있었지만, 도저히 다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나무들만 생각하면 자연스런 연상작용으로 야스카산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러면 그 밤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이다.
 -어차피 늦었을거야.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
아사신은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고 도로 일에 집중했다. 그렇게 해야만 그 무서운 기억속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는다. 잊는거다. 그냥 이렇게 잊으면 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힘줄이 돋아날 만큼 세게 낫을 바닥에 꽂았다. 무서운 속도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생각을 없애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빈혈이 일어나는 육체를 저주하며 미친듯이 몸을 사용했다.
 다시 끌려가들어가 버리기 전에,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죽은 나무와 씨름하는 아사신의 등 뒤에서 문득 낯선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일 하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당신이 신부인가요?”
아사신은 고개를 들었다. 이 곳에서 자신이 신부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있다면 그들이겠지.
“···팔시아 대륙에서 오신 분이군요.”
남자는 예쁘게 미소지었다. 밝은 금발이 이 눅룩한 음지속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네. 힐레멘 트루가라고 합니다. 소르데라 에서 왔습니다.”
밝고 명랑하게 자신의 소개를 한 남자는 아사신의 표정을 살피고는 덧붙였다.
“별로 관심이 없는 표정이시군요. 하하, 제가 방해를 했나요?”
아사신은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표가 났던가?
“조금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간은 당신이 제게 온 이유가 의심스럽기도 하고요. 저는 팔시아 대륙인들에 대한 뿌리깊은 고정관념이 있거든요.”
힐레멘은 생긋 웃었다. 늘상 짓고있는 버릇같은 미소가 아니라 정말 드물게 웃는 진심으로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자신들의 족장의 말에 아무도 자신에게 반발하는 말이나,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앞에서 짓지 않았다. 물론 뒤에서는 수근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별로 족장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거군.-
힐레멘은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했다.
“하하- 당신은 족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군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요? 난 신부입니다. 그분의 말은 절대적입니다. 나는 그분을 좋,아 합니다.”
솔직히 마지막 말은 정말 하기가 힘들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보았거든요.”
“무얼 말입니까?”
힐레멘은 또다시 빙긋 웃었다.
“그 비오던 밤에 말입니다. 당신과 족장이 숲 속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말이지요. 아니 정확하게는 도망치고 쫓아가던 모습이라고 할까요?”
아사신은 뒷통수가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 모습을누가 봤으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그··· 그런···.”
당황해서 말을 더듬어 버렸다.
힐레멘은 괜찮다는 듯 두 손을 들어보이며, 곤란한듯 웃었다.
“괜찮습니다. 누구에게 말 할 생각은 없습니다.”
바르바칸에게는 이미 말했지만 그건 빼기로 했다. 말했다간 저 파랗게 질린 얼굴은 정말로 산산이 부숴져내릴 것 처럼 위태로왔다.
“누가··· 봤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사신은 주저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현기증이 일어났다. 그 흉하고 흉한 꼴을 누가 봤다니. 생각만 해도 정신이 피폐해진다.
“하하, 저도 보려고 해서 본 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보게 되었지요. 사실은 당신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때 족장의 얼굴을 당신도 봤어야 하는데~ 하긴 그때 당신은 떨어진 후였으니 무리였겠죠? 아주 인상깊었답니다.”
남자는 떠벌떠벌 말을 이었다.
“사실은 저도 도와주려고 했었지만 말이지요. 길을 잃었기 때문에 곤란했거든요. 근데 워낙 그때 족장의 모습이 무시무시해서 괜히 나서기 싫어지지 뭐에요. 한참을 웅크리고 있으려니 동굴안으로 들어갔던 당신이 어째서인지 홀딱 벗고 튀어나오더군요. 곧이어 족장도 홀딱 벗고 튀어나오고 말이지요. 상당히 긴장감 넘치는 장면이었습니다. 두 분 다 벗은 몸이 예쁘더군요. 하하, 눈이즐거웠습니다.”
아사신은 흔들리는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 눈에는 누구에게라도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아사신으로서는 상당히 드문-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힐레멘은 웃는 얼굴로 그 눈동자를 바라보다 갑자기 목소리를 내리깔고 진지하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맹세합니다.”
“우리 신의 제단 앞에서도 맹세할 수 있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아사신이 물었다.
“물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무신론자였고, 둘째로 이미 바르바칸에게 말했지만 그는 엄숙하게 손을 들어 맹세했다. 정말 당황했는지 아사신은 그가 다른 대륙 사람이라는 것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쨌든 맹세의 효과는 있었다. 아사신은 그가 맹세하고야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고 비실비실 일어났다.
“···흉한 꼴을 보여드렸군요.”
“아닙니다. 의외로 신부란 귀여운 존재군요.”
힐레멘은 방긋 웃었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놀리지 마십시오.”
“하하, 진심입니다.”
“당신의 그 예쁜 미소만큼이나 믿음이 안갑니다.”
아사신은 이 남자에게 잘 보여야하는 입장이라는 것도 잊고 냉랭하게 말했다.
스스로도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었다. 허여멀건한 피부에, 탁하고 칙칙한 회색눈동자와, 잿빛 머리카락. 키는 작지는 않았지만 크지도 않았고, 이목구비는 평이했다. 그런 별달리 뛰어나지도 쳐지지도 않는 조건에 늘 움츠러든, 어두운 이미지가 더해지자 솔직히 보기 좋고 잘생긴 얼굴이라고 말할수는 없었다.
이 남자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여긴 아사신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에 힐레멘은 또다시 진심으로 웃었다.
“오늘 이걸 다 할 생각이십니까?”
“네, 되도록이면 그럴 생각입니다.”
힐레멘은 두 말 않고 팔을 걷어 부쳤다.
“뭐··· 하는 거지요?”
“저도 도와드리지요. 가끔은 이렇게 자연을 벗삼아서 일을 하는 것도 좋지요. 아까까지 그 김빠지게 생긴 늙은이들하고 족장이 으르렁 거리는 걸 보고 왔더니 머리가 다 아프군요.”
곳곳에서 풍기는 악취로 인해 머리라면 여기가 더 아플 것 같았지만 힐레멘은 그렇게 말했다.
“···족장이··· 싸워요?”
아사신이 아닌 척 하며 귀를 세웠다.
 “네에~ 싸우더군요. 아주 성격 더러운거 제대로 보이던데요? 어떻게 그런 놈하고 살 맞대고 살아요. 저라면 이미 도망갔어요.”
힐레멘이 그 모습에 은근슬쩍 나쁜 말을 하자, 아사신이 아주 좋아했다.
“저런. 족장도 피곤하겠군요. 이상하군요 정말. 족장의 말에 따르는 건 당연한 건데 말입니다.”
아사신은 굉장히 좋아하는 얼굴로 야스카산의 편을 들어 주었다. 힐레멘은 재미있었다. 저렇게 거짓말 못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아주 사방에서 얻어 터지더군요. 그는 흩어져있는 이 대륙을 통합하고 싶어해요. 그렇게 바람을 넣은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상당히 힘들거 같더군요. 바르바칸은 편 들어 주면서 교묘하게 허를 찔러대고, 장로들은 주먹만 안휘둘렀지, 하긴 솜방망이를 휘두른다고 맞을 사람도 아니지만. 아주 대놓고 갈구던데요? 연속으로 얻어맞고 아침도 거르고 쓸쓸하게 퇴장했답니다.”
힐레멘이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말하자 아사신은 히죽 미소지었다.
···곧 자신의 표정을 깨닫고 깨끗하게 지웠지만 말이다.
“정말 안됬군요.”
-말이랑 표정이랑 따로 놀고 있습니다만.-
힐레멘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아 그나저나 정말 놀랐습니다. 진짜 신부라는 제도가 있다니 말입니다.”
“당신네 대륙에는 이런 비슷한 제도가 없나요?”
“바산족만 해도 없던걸요. 뭐 족장의 아내를 고르는데는 나름대로 법칙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이방인인 저로서는 잘 모르겠더군요. 그들과 지낸지는 얼마 안되었거든요. 아닌것 같은 느낌이 들자마자 낼름 말을 갈아탔습니다. 후후.”
빙긋 웃으면서 자신의 배신 행위에 대해 말하는 남자의 얼굴엔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 아사신은 약간 어이가 없었다.
“잘도 당신을 받아들였군요 족장이. 바산들과 같이 있던 팔시아 대륙인을 보자마자 잡아 죽이지 않다니 말이지요.”
힐리멘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 말을 받았다.
“뭐, 지금은 저도 약간 후회중입니다. 어찌나 밤마다 저를 못살게 구는지 몰라요. 정말 너무 정렬적인 남자더군요 족장은.”
“밤마다? 못살게? 아···!”
아사신은 얼굴을 붉혔다.
-그 후안무치의 짐승같은 놈은 이젠 이방인 한테까지 손을 뻗히나 보군.-
아사신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고 흥분했다.
“네. 맞습니다 당신의 짐작이. 처음 저한테 그런 걸 요구했을 땐 저로서도 상당히 당황스러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는 다른 대륙 사람이었으니까요. 결국 날이 새는걸 보고야 저를 풀어주었고, 그 다음날은 너무 힘들고 지쳐서 쓰러져 버렸어요. 저도 체력에 자신이 있는 편인데 그 남자와 함께 밤 새 입을 사용해야 했더니 무척 지치더군요.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일은 하룻밤으로 끝이 아니었어요!”
“엣!”
아사신은 얼굴이 빨개져서 당황하여 볼을 감쌌다.
“설마··· 지금까지 계속?”
힐레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얼굴에는 비장미가 넘쳤다.
“사실 그래서 저는 괴로웠습니다. 네 정말로 괴로웠어요. 그래서 당신을 만나보고 싶었습니요.”
갑자기 그의 표정이 몹시 애틋해졌다. 어딘가 아련해보이기까지 했다.
“아아 그랬군요! 그랬군요!”
아사신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힐레멘의 손을 덥썩 잡았다. 이 남자는 자신과 공통점이 있다고 느낀 것이다.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 공통점 말이다. 아무리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수라킨과 소사린이라고 해도 절대 격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그런 공통점 말이다!
남자는 침을 튀겼다.
“네! 맞습니다. 바로 그거였습니다. 어찌나 밤마다 저를 불러들여서 팔시아 대륙에 대해 아는대로 불라고 협박해대는지 저는 밤이면 밤마다 그의 침소에 기어들어가서, 나불나불 떠들 수 밖에 없답니다. 정말 입아파 죽겠어요.”
힐레멘은 아사신의 손 안에 잡힌 자신의 손을 문질거리며 애교섞은 목소리를 냈다.
 아사신의 얼굴이 무척 딱딱해졌다. 자신을 놀려먹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급속하게 기분이 나빠져서 잡힌 손을 팩 뿌리쳤지만, 남자는 놓치지 않았다. 외려 더욱 느끼하게 문지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이···!”
기가 막혀서 째려보자 예쁜 눈동자를 위로 올리며, 무지무지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한참을 노려보고 있자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면서 -때릴거에요?- 라고 묻는듯한 얼굴을 했다.
왠지 김이 빠졌다.
“···관둡시다. 제가 먼저 오해한 거니까.”
“헤헷.”
힐레멘은 아사신이 한숨을 푹 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하자 평소의 싱글거리는 얼굴로 돌아와 드디어 손을 놓아주었다. 아사신은 그 얼굴을 잠시 노려보다 픽 하고 웃어버렸다. 왠지 화도 안났다.
그런 흉한 모습을 들킨 남자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웃음이 씁쓸해졌다.
“아 왜 그렇게 썩은미소를 짓고 있어요? 그런 미소따위 차라리 짓지 마세요~ 이쁜 얼굴이 망가져요.”
하고많은 단어중에 썩은미소라는 단어를 선택해서 그 뒤의 말을 망치는 힐레멘이었다.
“···안이뻐요.”
“이뻐요.”
“안이뻐요.”
“이뻐요!”
“안이쁘다니깐!”
“이뻐요!!”
무슨 앵무새랑 대화하는 것 같았다.
 “···진짜 관둡시다. 얼른 저리 가요. 난 내 할 일을 하겠어요.”
“그럼 나도 내 할 일을 하지요.”
힐레멘은 아사신의 옆으로 가서 철썩 들러붙었다.
“···방해되요.”
“안되요.”
“방해되요!”
“안되요!!”
왠지 아까의 이뻐요, 안이뻐요의 반복이었다. 아사신은 화가 났다. 자신을 우습게 보기 때문에 저렇게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귀엽다느니 예쁘다느니 하는 말들 전혀 기쁘지 않다.
 “왜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굴어요? 내가 그렇게 쉬워 보입니까? 나한테 캐낼거라도 있나 보군요. 족장에 대해 뭐 궁금한게 있나요? 알지도 못하지만 혹여라도 아는 게 있다면 몽땅 이야기해 줄테니 있으면 빨리 물어보고 얼른 가버려요!”
“궁금한건 정말 많습니다. 알아내야 할 것도 많고요.”
역시 이 남자는 자신에게서 뭔가 정보를 캐내기 위해 접근한 모양이다. 기분이 확 나빠졌다.
“뭡니까! 빨리 물어보세요.”
아사신이 허락하자 힐레멘은 냉큼 헤헤 거리는 얼굴로 물었다.
“응- 그럼 먼저 좋아하는 색깔은?”
잠시 침묵이 흐르고,
“···특별히 없습니다만···.”
왜 이런걸 묻는지 몰라서 아사신은 순간 당황했다. 당연히 족장에 대해 물어올 줄 알았다.
“앗. 그렇게 쉽게 대답할수가··· 좋아요. 그럼 좋아하는 음식은 뭐에요? 선호하는 이성 이상형은? 혹은 동성 이상형은? 에 기왕이면 이성보다 동성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단. 즐겨찾는 장소는? 특별히 혐오하는 것은? 좋아하는 동물은? 취미는? 특기는? 음악은? 에 또···.”
“자···잠깐!”
아사신이 창백해져서 손사래를 쳤다.
“무슨 질문이 그렇습니까? 저한테 물어보고 싶은건 정말 그런 겁니까?”
“아아- 오해를 하시나 본데, 전 당신과 족장과의 베갯머리송사 같은 거엔 관심 없습니다.”
“무···! 배···! 그···.”
아사신의 창백했던 얼굴이 이번엔 빨개졌다. 베갯머리송사 같은 적나라한 단어를 들으면 꼭 자신이 그의 아내 취급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요상해진다.
물론 좋은 의미로의 요상함은 절대 아니었다. 그것은 온 몸을 벅벅 긁고 싶어지는 종류의 요상함이었다.
“···어쨌든 좋아요. 왭니까?”
아사신의 말에 힐레멘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고, 집게손가락 두개를 마주대고 빙글빙글 돌리는 무서운 행동을 했다. 온 몸이 비비 꼬이고, 새초롬하게 발로 땅을 푹푹 찼다.
그 모습이 보기에 상당히 괴로워서 순간 아사신은 저것이 새로운 종류의 저주의식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왜냐면~ 나는 질투심이 많은 남자에요. 당신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있었던 이야기 따위 들어버리면 가슴이 너무 아플 거에요~.”
아사신은 이제야 이 남자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이놈은 미친놈이었다.
-도망가자···.-
아사신은 힐레멘이 아이 몰라요~ 다 알면서~ 같은 정말 알아먹지 못 할 말을 중얼대며,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부끄럽다는 듯이 두 손으로 가리는 틈을 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 때,
“여기서 뭐해?”
“수라킨!!”
수라킨의 삐딱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사신은 너무너무 기뻤다. 저 미친놈을 때어놓고 도망칠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너무 기쁜 나머지 해맑게 웃으며 수라킨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타스가와 수라킨은 순간 움찔했다. 살아생전 해맑다는 단어와 아사신을 연결시키는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해 봤다. 수라킨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왜 그래? 누구야 저 남자는? 아니 팔시아 대륙인 아냐?”
“응. 게다가 미쳤어.”
아사신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둘 사이에 팔을 벌리고 서서 자신의 귀여운 여동생이 저 미친놈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방어했다. 비록 키 차이도 얼마 안 나고, 늠름하기로는 자신보다 더 늠름한 아이였지만, 그래도 자신에게는 아직 어리고 보호해줘야만 하는 귀여운 여동생인 것이다. 미친놈 따위에게 물리게 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 어리고 귀여운 여동생은 오빠의 호의를 무시한 채 어깨로 떠밀어버리고 앞으로 나갔지만 말이다.
수라킨은 성큼성큼 남자에게 다가가 그 빙글거리는 예쁜 얼굴을 스스럼없이 올려다보았다. 힐레멘의 하늘색 눈동자와 수라킨의 검푸른 눈동자가 부딪혔다.
“가까이서 보니까 정말 하얗네요.”
“하하. 그렇지요? 이 대륙에 있으니 정말 제가 너무 하얘서 눈에 많이 뜨이더라고요. 어딜 가든 사람들이 알아본다니까요. 유명인사가 된 기분이에요.”
수라킨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서, 무례하게 말을 건네도 그는 화내지 않았다.
 “정말 예쁘게 생긴 분이네요. 남잔데도 이렇게 예쁘게 생긴 사람은 족장 말고는 처음 봐요.”
“음. 그 사람 정말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어요. 순간순간 불끈불끈해 버려서 큰일 날 만큼 무시무시한 얼굴이에요.”
“앗! 불끈불끈하면 곤란해요. 불륜이거든요.”
“응~ 하지만 저는 역시 그 얼굴보다는 아사신의 얼굴이 더 맘에 드니까 괜찮아요. 참을 수 있답니다.”
“하긴, 우리 오빠 얼굴도 눈에 띄진 않지만 상당히 매력적이죠? 그 맘 이해해요.”
어느새 의기투합한 그들은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었다. 아사신은 벙쪘다. 타스가도 벙쪘다.
“그래도 역시 불륜은 곤란해요. 우리 오빠 직업은 신부거든요.”
“아아. 그건 저로서도 상당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 제가 좀 더 빨리 이곳에 오지 않았는지 정말로 후회가 됩니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분이 이미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버렸다니···. 너무도 안타까워요.”
“수라킨···.”
아사신이 수라킨을 불렀을 때는 이미 서로의 고충은 전부 이해한다는 식으로, 서로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을 때였다. 수라킨이 아사신의 부름에 고개를 들어 그 찢어진 눈으로 슥- 아사신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아사신이 움찔해서 뒤로 한발자국 물러서자 수라킨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오빠. 이 분 맘에 들어. 집에서 식사를 대접하자.”
“수··· 수라킨··· 그건 좀···.”
아사신은 온몸에서 그놈은 제정신이 아니야! 라는 오오라를 뿜었지만, 수라킨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왜? 싫어?”
수라킨이 얼굴을 찌푸리고, 협박하듯이 목소리를 낮추자 아사신과 타스가는 조용히 한 마음 한 뜻으로 단결되었다.
“···그래, 초대하자.”



집 밖에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소사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씹은 얼굴로 한 발자국 떨어져서 타스가와 아사신이 걸어오고 있었고, 그 앞에는 수라킨과 이방인 남자가 즐겁게 떠들면서 날아갈 듯 걸어오고 있었다.
그 대화 내용이란 것은 또 어찌나 당황스러운지 얼굴 이쁜 남자는 다 죽어야 해! 하고 수라킨이 주먹을 휘두르며 말하면 이방인 남자가, 아 그럼 저도 죽이실 건가요? 하고 풀 죽은 목소리를 내고, 그럼 다시 수라킨이 마치 아량을 배푸는 듯 너는 용서해 줄게~ 라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죽이 맞아 잘 놀고 있었다.
“어머, 뜻밖의 손님이 왔네.”
소사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아사신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소사린! 오래 기다렸어? 그냥 들어가 있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책망하는 목소리에 소사린이 다시 한 번 웃었다. 소사린의 웃음을 본 아사신도 덩달아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사랑하는 여자의 앞에 선 남자들 특유의 다정함과 배려가 넘치고 있었다.
“너 오는 거 보고 싶었어. 얼른 들어가 식사 아직 이지?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응!”
소사린이 물어본 건 아사신에게 이었는데, 대답은 수라킨이 했다. 먹는 것을 향한 그녀의 욕구는 강했다.

 식탁은 한 사람이 더 끼자 제법 좁았다. 이럴 때만큼은 넓은 집으로 이사해서 다행이라고 아사신은 생각했다.
“자, 먹자~.”
“아아 이럴 때마다 왜 나는 남자가 아니라서 소사린 언니와 결혼할 수 없는지 안타까워!”
수라킨은 황홀한 눈빛으로 식탁에 펼쳐지는 마법 같은 요리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꿀을 발라 통째로 구워낸 오리고기, 고소한 염소젖, 혀에 닿으면 부드럽게 녹아 없어질 것만 같은 계란찜, 막 구워낸 빵, 싱싱한 야채, 얇고 작아 한 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의 훈제된 닭고기.
모두 동시에 달려들어 그 맛있는 음식들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디.”
갑자기 조용히 있던 힐레멘이 중얼거렸다.
“응?”
먹는데 정신이 팔려있던 수라킨이 눈만 돌려 물었다. 힐레멘은 벌떡 일어났다.
“진정한 레이디! 이럴 수가, 당신이야말로 나의 레이디가 되실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뭐?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네?”
당황한 소사린의 손을 힐레멘이 덥썩 잡았다.
“그렇습니다. 이제껏 제가 만들어왔던 레이디들은 모두 가짜였습니다. 진정한 레이디. 아아 왜 저는 지금껏 당신같은 여성을 만나지 못했을까요? 왜 이 대륙에서 당신을 발견한 것일까요. 당신이야말로 저의 레이디 이십니다! 저의 레이디가, 아니 여왕이 되어 주십시오 소사린!”
레이디가 뭔지는 몰라도 별로 안하고 싶었던 소사린은 아사신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고, 아사신은 야차처럼 일어나 소사린에게서 힐레멘을 떼어놓았다.
“떨어져! 소사린에게서 떨어져! 뭐하는 짓이야 지금!”
힐레멘이 눈만 힐끗 돌려 아사신을 쳐다보았다.
“질투하십니까?”
“···질투한다. 그러니까 떨어져.”
힐레멘에게만큼은 마음껏 노려본다던가, 음산하게 중얼거린다던가― 하는 행위가 가능해진 아사신이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아, 물론 아무리 이 여성이 아름답다 해도, 나의 아사신. 당신만 하지는 못합니다. 제게는 당신뿐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저는 당신의 민들레, 당신은 나의 달, 제가 경솔했습니다. 질투해주실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졸지에 소사린을 질투하게 된 아사신이 당황해서 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너 때문에 소사린을 질투한다는 게 아니라 나는···!”
“쉿. 그만~.”
힐레멘은 동그랗게 벌어진 아사신의 입술에 전등석화의 속도록 손가락을 꾹 눌렀다. 조금 심하게 눌렀다. 코까지 들렸다.
“아니 나는··· 헙!”
“아무 말 마세요. 다 알아요.”
넌 아무것도 몰라!!
라는 눈빛으로 사람들이 외치고 있었지만 힐레멘은 이미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버렸다.
“정말 냉정한 당신~ 내 맘을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직 날 믿지 못하는군요. 아아 정말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당신에게 빠져 버렸는데, 당신은 내게 눈처럼 냉담하기만 하군요. 오늘 밤 나는 홀로 쓸쓸히 오른손과 함께 당신을 밑거름 삼아 보내야 하는 건가요? 아무리 혼자 두근두근 벌떡벌떡 해봤자 외롭기만 한걸요~.”
그 말에 그런 경험이 있는 타스가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다 움찔했다. 수라킨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만! 여기 미성년자도 있는 거 몰라요?!!”
“아냐. 상관 말어~ 난 없다 셈 쳐도 좋아~.”
그 말에, 수라킨이 태평하게 대꾸했다.
 아사신은 드디어 폭발했다.
“잔말 말고 입 닫고 밥 먹어!!”
쾅- 하고 탁자를 내리친 그는 스스로도 자신의 폭발에 놀랐는지 얼굴이 벌개져서 와구와구 입안으로 음식을 집어넣었다.
-어떻게 입 닫고 밥을 넣지?-
하는 고민을 하는 둔중한 타스가만을 제외하고 모두들 신속하게 밥을 먹기 시작했고, 그 날의 다사다난했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 갔다.
그날 밤 아사신의 방에서는 이 가는 소리가 요란했다고 전해진다.

다음날도 아사신과 수라킨과 타스가는 노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내려갔다. 아사신은 자신이 어제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것에 아직도 약간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때 힐레멘이 나타났다.
“어~이. 어젠 잘들 주무셨나요?”
“당신!!”
아사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긴 또 왜 왔습니까! 족장을 도와 바쁘다고 사람들이 그러던데, 어떻게 여길 온 거죠?”
“능력 있는 남자의 사교의 조건에는 반드시 참석해야할 의무를 가진 모임에서 어떻게 요령 좋게 빠져나오면서도 나가는 사람이나 남는 사람이나 서로 기분 안상하고 만면에 미소 짓고 잘 가시오 잘 있으오 하고 헤어지는 것에 대한 조건도 들어가지요. 즉- 땡땡이 입니다.”
한마디로 간출이자면 그냥 몰래 빠져나왔다- 는 것인데, 그걸 저렇게 길게 말한다. 아사신은 포기했다.
 “어제 잘 못 잔거에요? 피부가 거칠군요.”
힐레멘은 자못 안쓰럽다는 듯이, 아사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사신은 그 손길을 탁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제 건강에 관심 가져 주실 이유는 없습니다.”
“아사신······.”
힐레멘의 목소리는 슬픔에 젖었다. 아사신은 움찔했다.
“어제 제 진심에 대해선 확실히 말씀 드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모르시겠나요? 아아 매정하고 얄미운 사람. 얼마나 더 말을 해야 당신은 제 진심을 알아줄까요? 네?”
“아! 너무 슬프군요.”
어느새 수라킨이 다가와 턱을 쓰다듬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오빠는 의외로 일편단심이라 서요. 소사린언니에 대한 마음을 돌리려면 꽤 힘들 거예요.”
“어쩜~ 매정하신 분~.”
힐레멘의 눈동자가 촉촉이 젖었다.
 “아니 정말 너희들은···.”
“아! 그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세요. 당신의 소사린에 대한 사랑은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더 이상 변명하지 마세요.”
변명!
힐레멘은 변명이란 단어를 썼다. 아사신은 눈이 돌아갔다.
“이봐! 당신 말야!”
“쉿!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매정하고 가혹한 양반 같으니라고. 저 돈 좀 벌고, 얼굴 좀 되고, 체력도 좀 되고 정력은 말 할 것도 없이 매일매일 울끈 불끈 이랍니다. 취미와 특기로 노래와 시도 쓰니 어디 가서 낭만적이지 못한 연인이란 소리는 안 듣습니다. 게다가 머리도 좋아요. 하지만 당신은 저의 그런 모든 장점들을 알아주려고도 하지 않는군요. 나는 첫눈에 반해버렸는데~.”
힐레멘은 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아사신은 그런 힐레멘을 잠시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삽을 집어 들고, 예리한 눈빛을 보냈다.
힐레멘이 움찔- 하고 아사신을 바라보자, 아사신은 잠시 눈만 활활 타오르더니 곧 한숨을 푹 내쉬고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그리곤 땅을 팠다.
한마디 하면 두 마디 하고, 대꾸하면, 열 마디하고, 질려서 가만있으면 혼자 떠들어댄다. 계속 계속 계속 계속 말한다.
방도가 없었다. 무시가 상책이었다.
그렇게 단 하루 만에 힐레멘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한 아사신은 땅을 팠다.
아사신이 반응이 없자 흘깃 그런 아사신을 쳐다본 힐레멘은 곧 헤헤 거리며 옆에 앉아 같이 땅을 팠다. 넘어진 꽃나무들을 다시 심고 가꾸려면 일꾼은 많을수록 좋았다. 아사신은 그냥 두고 보기로 결정했다.
힐레멘은 미친놈은 힘이 세다는 이론이 완벽한 정론임을 입증하는 산증인이었다.
 그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돌을 나르고, 고랑을 파고, 자갈을 골랐다. 어른 하나 만큼 무거운 발효된 퇴비를 어깨에 메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을 봤을 땐 타스가도 놀란 눈치였다. 그 예쁘고 화려한 얼굴에, 호리호리하고 말라 보이는 몸매를 했으면서, 큰 바위도 아무렇지 않게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모습은 실로 어울리지 않았다.
“정말 힘 세 다아······.”
수라킨이 질린 어조로 말했다.
“하하, 남자는 힘. 그 중에서도 허리힘. 다양한 밤의 기술을 위한 운동으로 다져진 허리 근육과 근육을 감싼 인대의 힘. 정말 중요합니다. 수라킨. 나중에 결혼할 때가 되면 반드시 이 정도는 들어 올리는 남자랑 하세요.”
“명심할게요.”
수라킨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아사신은 자신의 작고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미친놈의 마수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하자 장이 다 꼬이는 느낌이었다.
“아니야 수라킨! 남자는 그런 것 보다 여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아껴주는지, 책임감은 강한지,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로서의 그릇은 어떠한지를 보는 거야!”
아사신은 열심히 자신만의 사랑 개론을 펼쳤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서도 씨도 안 먹혔다.
두 사람은 두 주먹 불끈 쥐고 소리치는 아사신을 동떨어져서 쳐다보다 동시에 고개를 획하니 돌려버렸다.
 “······.”
아사신은 또다시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바라보다 삽을 들었다. 남아도는 분노를 모두 모아 내려치니 땅이 푹푹 잘 파였다. 그러고도 남아도는 힘을 모두 배로 끌어 모아 소리를 빽 질렀다.
“놀지 말고 일해!”
등 뒤에서 욕구 불만인가 봐요~ 신랑이 부실한가봐~ 같은 소리가 소근 소근 들려왔지만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더 이상 들었다간 만수무강에 지장이 많을 것만 같았다.
고랑을 갈고, 나무를 매고, 부러진 가지를 자르고, 돌을 나르고, 퇴비를 뿌리고 하는 모든 작업이 힐레멘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도와준 덕분에 금방 끝났다.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아까처럼 꼴사납게 바닥을 굴러다니는 꽃나무는 없었다. 망가진 울타리와 담도 대충이나마 정리가 되었다.
“그나저나 아름다운 손이 망가져버렸군요.”
아사신은 어느새 자신의 흙투성이가 된 손을 자못 안쓰럽다는 듯이 문지르는 힐레멘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손을 세게 털어 뿌리치자, 상처받은 표정으로 쳐다봐온다. 그러더니 곧 다시 손을 뻗어 자신의 손을 붙잡는다. 다시 한 번 세게 뿌리치려 했으나 이번엔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이봐요. 힐레멘,”
“네! 말하세요!”
자신의 이름이 불려 지자 금세 또 싱글벙글 해져선 냉큼 대답한다.
 “이성적으로···당신이 나한테 반했다느니 하는 거 지독하게 기분 나쁜 농담으로 생각할 테니까, 이제 더 이상 우리 안 만났으면 좋겠어요. 어제 오늘 도와준 건 감사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 따라다니는 거 기분이 좋진 않아요.”
힐레멘은 말끄러미 아사신의 회색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아사신은 계속 말했다.
“남자가 남자한테 진심으로 반할 수 있을 리도 없거니와, 나는 그런 농담, 싫어합니다. 그런 농담 기분 나쁩니다. 놀리려는 의도인거 잘 알고 있어요. 사람들이 남자로서 신부가 되어버린 나를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는 알고 있고요. 당신까지 그렇게 나서서 여자취급 할 필요는 없어요.”
단숨에 말을 이은 아사신은 약간 긴장하고 힐레멘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아사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농담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그게 농담이 아니고 뭐란 말이죠?”
“아사신······.”
아사신은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힐레멘은 고개를 숙였다. 그 입가에 늘 걸려있던 미소가 사라진 얼굴은 낯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믿지 않겠다는 거군요.”
“···아니오. 적어도 그런 농담만은 하지 말아주세요.”
“농담. 제가 지금 이 생면부지의 대륙에 힘들게 온 게 당신과 농담이나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까?”
“그건······.”
아사신은 말을 흐렸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진심이라고 믿을 수도 없었다.
“당신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농담이니, 놀리느니 하고 생각해 버리는군요. 그런 사람 앞에서 제 진심 따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겠군요. 알겠습니다. 아사신.”
힐레멘은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뒤돌다 가버렸다. 아사신은 깜짝 놀랐다. 저렇게 화낼 줄은 몰랐다.
“힐레멘, 잠시만! 거기서요!”
순식간에 긴 다리를 이용해서 멀어져 가버린 힐레멘의 등 뒤에서 아사신이 아무리 불러도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이야~ 냉정하게도 가버리네~.”
뒤에서 수라킨이 그렇게 말하며 다가왔지만 아사신은 듣지 못했다. 상처 입혀 버렸다- 그 사실이 양심을 쿡쿡 찔러왔다.
아사신은 남에게 상처 입히는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소심한 남자였다. 자신이 상처받아왔고,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 때문에 남이 상처 받으면 자신이 더욱 아파한다. 아까 힐레멘이 문질러주던 손이 죄책감으로 저릿저릿해왔다.
“내일부턴 안 오겠군요.”
타스가가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아사신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응시하다 고개를 숙이고 조용하게 말했다.
“···집에 가요.”

사실 아사신이 그렇게 가슴 아파할 이유는 조금도, 요만큼도 없었다. 정확히 다음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밝고 맑게 하하하 웃으며 힐레멘이 뛰어왔기 때문이다. 아사신은 어젯밤에 어떻게 사과해야할지 고민하느라 검게 변색된 눈가를 주무르며 힐레멘을 화난 얼굴로 노려보았다.
“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아 오해하지 마세요. 어젠 저도 정말 화가 났었답니다.”
힐레멘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하지만 어제 그렇게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당신이 제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는 게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때 대답하지 않은 게 막 돌아와선 후회가 되는 게···. 사랑스런 당신이 저를 불러주었는데 제가 그렇게 화내고 돌아가 버렸으니, 당신의 기분이 얼마나 상했을지··· 정말 괴로웠어요. 거기다가,”
힐레멘은 덥석 손을 잡아왔다. 아사신은 움찔 했으나, 어제의 기억 때문에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제가 어떻게 당신을 계속 안보고 있을 수 있겠어요~. 사랑스런 아사신. 귀여운 아사신. 전 그렇게 못합니다. 어제의 저를 용서해 주세요. 생각해보니 보자마자 그런 말을 한 건 당신 입장에선 받아들이지 못할 이야기였는지도 몰라요. 난 이기적이었어요. 용서해줘요 아사신!”
하고 격렬하게 열변의 끝을 맺은 힐레멘이 한쪽 무릎을 극적으로 꿇었다. 저 뒤에서 수라킨이 미친 듯이 팔을 북북 긁는 것이 보였다. 타스가의 얼굴은 완전히 누렇게 떠버렸다.
아사신이 당황해서 급히 말했다.
“···용서··· 할 것도 없어요. 저도 잘못한 걸요. 그러니 무릎 일으키세요. 누가 볼까 겁나요.”
“아, 이 아름다운 심성. 더더욱 반하겠습니다.”
힐레멘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아사신은 더더욱 반한다니 그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계속 당신 주변을 맴돌아도 될까요?”
“······.”
“크흑- 역시 당신은 저를 믿지 못한다는 건가요? 제가 아무리 진심을 말해줘도, 보여줘도 안 된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오늘 다시 한 번 당신께 나의 가슴이라도 열어젖혀서 당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이 분명한 심장을 보여드리기라도 해야 하나요?”
“아니··· 알았어요. 알았어요. 좋아요. 뜻대로 하세요.”
결국 아사신이 졌다. 그대로 뒀다간 진짜 가슴이라도 가를 낌새였기에, 아사신은 할 수 없이 반쯤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가 자신을 따라다닌 것을 허락해버렸다. 방긋방긋 웃으며 힐레멘이 꼭 껴안아 오면서 활짝 웃음 짓자, 뒤에서 수라킨이 박수를 쳤다. 그녀는 이미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그때부터 힐레멘은 마음 놓고 아사신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자신만 보면 -저기 신부가 간다!- 하고 수근 대던 사람들은 이젠 자신과 힐레멘이 서로 아옹다옹하며 지나갈 때마다 -저기 신부와 이방인이 간다!- 라고 수근 거렸다. 아사신으로서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 전혀 반갑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서든 눈에 띄는 힐레멘으로 인해 좀 더 자신이 드러나는 것에 솔직히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힐레멘은 어디든 따라다녔다. 종종 급하게 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아사신과 함께 보냈다. 매일같이 노인들의 거처로 가는 아사신을 따라와서 그 화사한 얼굴에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고, 설거지든 빨래든 가리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었다.
아사신으로서는 그가 이렇게 따라다니는 것이 영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미 내치기엔 늦어버렸다.
 사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힐레멘은 함께 있으면 즐거운 남자였다.
이곳에서는 너무도 튀는 그 아름다운 얼굴에 빙글빙글 웃음을 짓고 다가와, 아무리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려도 알뜰하게 자신을 보살펴 준다. 밥을 먹지 않으면 어서 먹으라고 챙겨주고, 땅바닥에 앉아 쉴라치면 옷에 먼지가 묻을까봐 손수건을 깔고 그 위에만 앉힌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을 만큼 스스럼없이 대해온다.
 신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면서 신부가 되었다는 사실에 열등감을 느끼는 아사신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주목을 받는 것을 무척 싫어했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신부를 보고 싶어 했다. 가리시네의 명을 이행하자면 어쩔 수 없이 큰 길을 걸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럴때면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무척 불편해하는 아사신을 살짝 자신의 뒤로 숨겨주어서 그 모든 시선을 받아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말주변이 좋았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조잘조잘 잘도 떠들어대며 수라킨과 함께 타스가를 놀리는 것을 보는 건 즐거웠다.

아사신은 스스로도 자신이 재미없는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약간은 우유부단하고 수줍은 성격에, 나약한 정신상태. 특별히 볼 것 없는 외모와 육체. 신부가 되기 전까진 가난하긴 또 무지하니 가난했었다.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도 없고, 교우관계도 빈약해서 주변에서 친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손에도 채 못 꼽았다.
 늘 정에 굶주려있었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몰라 사람을 다룰 줄도 몰랐다. 누군가 다가오려는 낌새가 보이면 속으로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주제에 겉으로는 우물쭈물 거리다 놓쳐버리게 된다.
때문에 이런 즐겁고 빛나는 남자가 다가와 좋아 한다 사랑한다 말해주며 다정하게 대해주자 마음이 마구 흔들리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믿지는 않는다. 첫눈에 사내가 사내에게 반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남자와의 관계에서 무슨 결실이 있고, 무슨 진심이 있단 말인가. 그런 말 따위 믿을 수 없다. 그저 질이 나쁜 농담일 뿐이다.
 그렇게 느끼는 한편 그래도 이 남자는 함께 있으면 즐겁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진심이 무엇이던 간에  마땅히 떨구어 낼 이유도 없고, 그러니까 그런 기분 나쁜 농담은 어느 정도 흘려 들으며 곁에 있을 수 있는 거다.
하지만 가끔 이 남자도 방긋방긋 웃어대는 얼굴과는 다르게 속은 좀 꼬였다는 걸 느낄때는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름다운 숙녀 분을 자신의 레이디로 삼습니다.”
어느 날 수라킨이 레이디가 무엇인지 묻자 힐레멘이 말했다.
“그 숙녀 분은 나만의 여왕님이 되는 거죠. 그 왜 기사끼리 싸운다거나 할 때 말입니다. 우리들은 레이디의 이름을 걸고, 그녀의 명예를 함께 걸고 싸우는 것이지요. 내가 지면 나의 레이디의 명예도 함께 추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혈기왕성한 기사들은 죽을 때까지 싸우기도 합니다. 자신의 레이디를 위해서 말입니다.”
“대단히 불합리한 제도군.”
다 들은 수라킨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들은 왜 스스로의 명예를 남의 남자의 손에 내맞기는 건가요? 이해가 안가요. 왜 남자가 졌다고 자신의 명예까지 추락하는 거죠?”
수라킨의 지적은 아사신으로서는 몹시 뼈아픈 것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돌의 무게가 갑자기 열배는 무거워 진 것 같았다.
“하하. 수라킨. 어느 나라든, 어느 대륙이든 약자는 살기가 힘든 곳입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약한 존재지요. 애도 낳아야 하고, 남편이 벌어다 준 생활비로 살림도 살아야 하고 운이 나쁘면 시부모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더 운이 나쁘면 시누이도 모시고 살아야 하죠. 이곳도 비슷하지요? 여자는 재산으로 치는 경향이 많아요. 남성이 권력을 잡고, 여성은 그 아래에서 남성을 받들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녀들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어요. 그녀들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입니다. 강자의 보호를 받는 존재지요. 나의 보호자가 더 강하다. 나는 이런 남자를 내 남자로 두었다. 그것을 과시하고픈 것은 당연한 것이랍니다.”
수라킨은 힐레멘의 말에 침묵했다. 그녀의 성숙한 얼굴이 순간 제 나이인 열네 살 소녀의 얼굴로 돌아갔다.
 그 얼굴에 쓰인 것은 이해가 안 간다, 말도 안 돼- 와 같은 이런 부당함 들에 대한 솔직한 의문 이었다.
힐레멘은 웃었다.
“생각해 봐요. 어차피 세상은 불합리한 곳입니다.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곳이죠. 먼데서 찾을 것도 없어요. 자신들의 모습을 보세요. 가장 고귀한 피의 혈족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알고 있겠지요. 수라킨.”
그 말에 타스가가 발끈했지만, 수라킨은 조용히 팔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강자는 더 가지려하고, 약자는 강자들의 틈에서 연못 위의 부평초 같은 자신의 입지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는 법입니다. 당신들은 가장 강한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여자들의 텃세에 휘말려서 이렇게 된 거지요.”
“···당신 말이 맞습니다. 힐레멘.”
아사신이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맞는 말인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듣고 있기는 괴롭군요.”
힐레멘이 아사신을 쳐다보았다. 그 아름다운 푸른 눈에는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아사신은 잠시 그 눈을 바라보다 그냥 자리를 피해버렸다.

보통의 경우 힐레멘이 아사신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은 없었다. 아니, 거의 완벽하게 아사신에게 맞춰주고 있었다. 수라킨과 타스가도 놀랄 만큼 그의 시중을 잘 들었고, 아사신이 말하기도 전에 아사신이 불편해하는지, 배는 고픈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를 알아 맞혔다. 타스가는 사실 아사신이 거리를 걸을 때 불편해 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거 알고 있었느냐고 수라킨에게 쪼르르 달려가 말했다가 설마 아직도 몰랐냐는 차가운 냉대를 받아서 시무룩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힐레멘은 아름다웠다. 옆에 함께 서기만 해도 밝은 태양과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신화. 사람은 달과 태양의 자손이라는 신화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 그는 정오의 태양을 한 아름 끌고 내려와 지상에 빛으로 빚어놓은 수려한 조상(彫像)과 같았다.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고만 있어도 달콤한 꿀을 입안에 머금은 것처럼 뇌가 흐물흐물 해져 버린다. 미인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함께 있고 싶다고 달콤하게 속삭이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와 있으면 눈이 즐겁고 절로 호감이 간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함께 있으면 어느새 힐레멘의 화사하고 아름다운 외모와, 수려한 말주변에 압도당해버린다. 그렇게 예쁜 사람이 자신을 두고 아름답다고 칭찬해줘도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다. 자격지심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을 갖고 논다는 생각까지 들어버리는 것이다.
얼마전에 조심스럽게 소사린에게 그 남자의 진의를 모르겠다고 상의하자, 소사린은 예쁜 붉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적어도 너를 좋아하는 건 사실인 것 같아 아사신···.- 이라고 말해 다시 한 번 아사신을 의문에 빠트렸다.
소사린의 말에도, 수라킨이 힐레멘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도, 그 남자는 아직 거북했다. 그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좋아한다. 첫눈에 반했다- 와 같은 믿기지 않는 말을 하며, 자꾸만 옆에 엉겨 붙는다. 그런 농담은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떨구어 낼 마음도 별로 없다.

거기까지 생각한 아사신은 한숨을 푹 쉬었다. 머리를 굴려봐야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옆에서 무를 깎다, 타스가가 부르는 소리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가는 힐레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하고 의문이 가득담긴 눈초리로 노려보자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뒤로 꺾어 눈을 마주쳐온다. 화려한 미소가 조금 더 진해지고 애정 어린 눈빛이 쏟아졌다. 한참을 눈싸움을 하듯 쳐다보자 고개를 갸웃하며 입모양으로< 왜요?>하고 물어온다.
아사신은 고개를 돌렸다. 저런 얼굴로 쳐다봐오면 안 그래도 헷갈리는 마음이 더욱 헷갈려 버린다.
“여기다 두면 될까요?”
힐레멘이 다시 다가왔다. 손에는 오래된 쇠솥이 들려있었다. 적어도 20 인분의 식사는 지을 수 있을 만큼 큰 솥을 혼자 들고 있는 것을 보고 괴물 같은 힘에 혀를 내둘렀다.
“응. 그러면 되요. 거기다 둬요.”
아무 말 없는 아사신 대신 수라킨이 건성으로 말하고, 죽이 끓고 있는 곳으로 총총히 가버렸다. 아사신은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다가 힐레멘이 주춤주춤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그를 도와주러 다가갔다.
“무거워요. 조심해요 힐레멘. 도와줄게요.”
힐레멘은 싱긋 웃었다.
“그럼 이 위쪽을 잡아주세요. 안 그러면 한꺼번에 흘러 넘쳐 버리니까.”
아사신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 힐레멘이 바닥에 내려놓는 무거운 냄비를 받쳐주었다.
 그런데,
“헉!”
생각보다 많이 무거웠다. 순간 몸이 왼쪽으로 확 틀어지면서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무게중심을 내리던 힐레멘이 급히 다시 거두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엉겁결에 손을 들어버리자 힘을 잃은 다리가 순식간에 미끄러져버렸고, 몸이 크게 휘청였다.
 아사신은 순간적으로 -저 무거운 냄비에 깔리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곧 다가올 사고에 대비해 몸을 둥글게 말았다.
“오빠!”
“신부!”
쿵-- 하는 육중한 소리에 놀라 타스가와 수라킨이 달려왔다.
한참을 누워서 벌벌 떨고 있던 아사신은 꼭 감았던 눈을 살포시 떴다. 분명 저 무거운 것에 짓눌려 어디 한 군데 부러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데도 아픈곳 이 없었다. 아니, 지나치게 멀쩡했다.
 자신의 몸 위에 느껴지는 무거운 존재감을 제외하곤 말이다. 가슴께에 곱실거리는 화려한 금발이 넘실대고 있었다.
“힐···레멘?”
“후우······.”
아사신의 위에서 방패가 되어준 힐레멘이 고개를 들었다. 아사신은 자신의 눈 바로 아래에서 금빛 고수머리에 쌓인 아름다운 얼굴이 고개를 들자 당황했다.
“금방 정말 위험했던 거 알아요?”
“에···.”
아사신은 서툴게 이도저도 아닌 말을 했다.
공중에 붕 떠버린 쇠솥을 무식하게 자신의 팔로 막아낸 힐레멘은 무거운 솥에 얻어맞은 부분이 몹시 아픈지 미간을 찡그렸다.
 “아아, 팔을 삐었나 본데요?”
“괜찮아요? 그러기에 왜 그랬어요.”
힐레멘이 신음을 흘리자 아사신은 당황하여 그의 아래 깔려있던 자신의 몸을 빼냈다. 타스가가 다가와 팔을 잡고 부축해주었다. 그러나 아사신의 큰 움직임에 힐레멘이 신음성을 내자, 아사신은 타스가를 옆으로 물리고 힐레멘의 어깨를 잡았다.
“많이 아파요 힐레멘?”
아사신은 몸을 움츠리고 아픔을 참아내려고 애쓰는 힐레멘을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정말로 많이 아픈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힐레멘······.”
“괜찮아요 아사신. 당신이 안 다쳤으니 됐어요.”
힐레멘은 식은땀을 흘리는 와중에도 빙긋 미소 지으며 아사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사신은 차마 이번만큼은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그 손길을 얌전히 받아야 했다. 그의 눈동자가 진심어린 걱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사신의 볼을 살짝 손끝으로 잡아 늘리며 힐레멘이 웃었다.
그때,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지?”

라는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힐레멘의 손을 사납게 뿌리쳤다.
아사신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보기도 전에 이 음산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족장!”
타스가가 낯빛이 변해 달려왔다. 힐레멘이 신부의 하체 쪽에 쓰러질듯 걸쳐져서 얼굴에 손을 대는 장면을 족장이 봐버렸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야스카산은 타스가는 쳐다보지도 않고 분노로 활활 불타오르며 아사신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너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물었다 아사신.”
“족장. 나는···그러니까···.”
아사신은 당황해서 손을 빼려고 노력했으나 야스카산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빼내려는 아사신의 팔을 잡아끌어 자신의 옆에 세웠다. 야스카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아사신은 숨이 막혔다.
“이건 사고였습니다.”
창백해진 타스가가 그들 옆에 서서 말했다.
 “저 이방인이 신부가 사고당할 뻔 한 것을 몸으로 막아주신 겁니다. 오해 마십시오. 족장.”
타스가의 말에 야스카산은 그들이 누워있던 근처에 널브러진 큰 쇠솥과 냄비를 바라보았다. 상황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분노가 사그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부턴 화살이 날아와도 네 몸으로 막아라. 아사신.”
야스카산은 잇새로 내뱉듯이 말했다.
 “다른 남자의 몸 아래 깔리다니. 신부 주제에 부끄러운 줄 알아라.”
“족장!”
아사신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몸 아래 깔린다니 대체··· 대체 무슨 상상을 하시는 겁니까! 그는 내 대신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무슨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으십니까!”
“나는 사건정황에는 관심 없다. 내가 관심 있는 건 내 신부가 다른 남자의 품 안에 안겨있었다는 것  뿐이다.”
“기가 막히는군요!”
아사신은 붙잡힌 팔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당신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힐레멘은 나를 대신해 상처를 입었어요. 당신이 내게 화내는 것은 내가 신부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 신부를 보호해준 힐fp멘에게 상을 내리진 못할망정, 다음부턴 몸으로 맞으라니요. 비키십시오. 나는 힐레멘의 상처를 보겠습니다.”
아사신이 다시 야스카산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자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팔을 자기 쪽으로 확 당겼다. 야스카산의 품에 안긴 자세가 된 아사신이 낮은 소리로 욕을 하며 그 손을 떼어내려고 버둥거렸다. 보다 못한 힐레멘이 상체를 구부리고 다가왔다.
 “아사신. 저는 괜찮습니다. 족장의 오해를 풀어주십시오.”
야스카산의 눈이 희번뜩 거렸다.
“아사신? 힐레멘? 언제부터 너희가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 거지? 그러고 보니 이건 그냥 보통 일이 아닌 모양이로군.”
“젠···그만 하십시오 족장! 대체 무슨 오해를 하시는 겁니까!”
아사신은 신경질을 내며 자신의 팔목을 그러쥔 야스카산의 손가락에 손톱을 세웠다. 그러나 야스카산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무시하고 있었다. 그는 오직 힐레멘의 하얗게 질린 얼굴만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힐레멘은 눈이 마주치자 아파서 온통 식은땀을 흘리는 상황에서도 빙긋 하고 웃어보였다. 야스카산의 눈썹이 위로 치뜨였다.
“감히······.”
“족장!”
막 야스카산이 뭉게뭉게 살기를 피워 올리며 힐레멘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타스가가 야스카산을 불렀다. 야스카산이 돌아보자, 타스가가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신녀가 옵니다. 족장.”
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타스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두 명의 늙은 신녀가 헐레벌떡 뛰어 오고 있었다.
“여기 있었군요. 족장, 신부. 찾았습니다.”
그녀들이 끼어드는 바람에 힐레멘을 흠신 두들겨 패 줄 기회를 놓친 야스카산이 잠시 주춤하자, 눈치 빠른 수라킨이 얼른 둘 사이에 끼어들며 사납게 야스카산을 밀쳐냈다. 야스카산의 것과 닮은 길고 푸른 눈동자를 한껏 치뜨고 노려보자 야스카산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이···!”
“앗!”
아사신은 저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힘줄이 도드라진 긴 팔이 수라킨의 머리위로 치솟았다. 타스가가 낯빛이 변해 그 둘 사이를 중재하러 달려왔으나, 당사자인 수라킨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재빨리 신녀에게 다가서며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아. 무슨 일이신가요?”
신녀들은 그들을 찾아 힘들게 돌아다녔던 모양인지 숨을 몰아쉬느라, 금방까지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긴박한 공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나이가 더 들어보이는 신녀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여기 두 분다 있으신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와보는 건데 말입니다. 족장. 우리의 새 신부가 신부의 의식을 마친지 벌써 한 달이 넘었습니다. 다음 합방까지 너무 늦어지고 있어서 저희가 이렇게 와서 얼른 합방을 하라고 권하려고 온 것입니다. 언제쯤 다시 합방하시겠습니까?”
신녀들의 말에 반갑게 웃으며 달려온 수라킨은 그대로 굳었고, 그 뒤에 야스카산에게 여전히 팔목이 잡힌 채인 아사신은 하얗게 질렸다.
야스카산만이 살기를 누그러뜨리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일이라면 이미 너희들이 걱정 할 필요는 없다.”
“네?”
신녀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반문했다. 야스카산은 미소를 더욱 짙게 피워 올렸다.
“우리는, 아니 나와 나의 신부는 이미 합궁을 했다. 안 그래도 한 달 마다 합궁 의식을 올리는데 있어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그대들이 걱정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걱정마라. 나의 신부는 얼마 전에 내 씨를 충분히 머금었으니까···.”
“족장!”
아사신의 얼굴이 시뻘개져서 붙잡힌 팔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야스카산은 그런 아사신의 반응에 끄덕하지 않았다.
“하, 하지만 족장. 신부와 합궁을 할 때는 보통의 다른 여인을 품듯이 하시면 안 됩니다. 신성한 신어를 신부와 족장의 이마에 새긴 후에야 비로소 그 의식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만!”
야스카산이 말을 잘랐다.
“신어를 새겼든, 안 새겼든 중요한 것은 내가 신부와 얼마 전에 합궁을 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마라. 너희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신부에게 그 짓을 했다는 것뿐이잖아.”
적나라한 표현에 신녀의 얼굴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그리고 신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사신의 얼굴은 시뻘겋게 불타올랐다.
-왜 이런.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이 자식은!-
아사신은 속으로 욕을 했다. 수라킨과 타스가 쪽으로는 차마 눈도 돌리지 못했다. 자신의 바로 앞에 서있는 힐레멘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러가라. 나중에 따로 불러 추후 지시를 내리겠다.”
야스카산이 귀찮다는 듯 팔을 한번 휘 젓자, 신녀들은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급히 물러났다.
신녀가 물러난 자리에는 얼굴이 벌게진 수라킨과 아사신과 타스가와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과 아픔에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아사신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힐레멘이 남았다.
“당신은 정말 부끄러움도 없습니까?”
아사신이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
“무얼 말이냐?”
“몰라서 묻습니까? 이 사람이 많은 곳에서 그 씨···짓···같은 그런······.”
“너와 나는 부부사이다. 나는 족장이고 너는 내 신부지 않느냐? 그런데 뭐가 거리낄 것이 있다는 거지?”
말을 더듬는 아사신을 한심한 듯 내려다보며 야스카산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 말에 아사신은 고개를 번쩍 들고 야스카산을 노려보았다. 눈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다.
“당신은 몰라도 나는 그런 게 싫습니다. 나는 싫다고요! 나는 싫단 말입니다!”
비명처럼 싫다는 말을 내지른 아사신은 있는 힘을 다해 야스카산에게 잡혀있는 팔을 휘둘렀다. 세게 두어 번 탈탈 털자 겨우 팔을 빼낼 수 있었다.
“···너 지금 내 신부가 된 것이 싫다고 말하는 건가?”
야스카산이 무시무시한 어조로 말했다. 아사신은 기가 막혔다. 이 남자의 과대망상은 대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
“아니 왜 또 이야기가 그렇게 전개되는 겁니까? 물론 나는 신부가 되는 것은 싫···.”
거기까지 말한 아사신은 거의 잡아먹을 듯이 흉흉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야스카산의 시선에 침을 꼴깍 삼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다고 언제 말했습니까? 혼자 추측하지 마십시오.···족장.”
“······.”
“······.”
뒤에서 수라킨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야스카산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에 설핏 웃음기가 서렸다. 아사신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뻔 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 외면했다.
“너는 거짓말이 서툴다.”
야스카산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며 쿡쿡 웃었다. 옆에서 힐레멘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스카산은 잠시 그렇게 웃더니 고개를 돌려 힐레멘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좋다.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가 주도록 하지. 너는 나를 따라와라. 의논할 것이 있다.”
“알겠습니다.”
힐레멘이 동의하자 야스카산은 사나운 눈초리로 주변에 늘어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 눈초리에 쏘인 사람들은 흠칫 놀라며 서둘러 흩어졌다.
 “괜찮겠어요 힐레멘? 먼저 치료를 받는 게 낫지 않을까요?”
수라킨이 다가와 팔을 움켜쥐고 있는 힐레멘에게 말했다. 야스카산은 흘깃 그런 힐레멘과 수라킨을 바라보다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먼저 신전에 가서 치료를 받아라. 어쩔 수 없군. 저녁에 다시 찾겠다.”
“네, 족장.”
힐레멘이 빙긋 웃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아픔이 덜한지 한결 얼굴빛이 밝아져있었다. 그 예쁜 얼굴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노려본 야스카산이 등을 돌리고 걸어갔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왜 신부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걸까···.-
힐레멘이 아사신의 주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우연히 그들이 거기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간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난 거지?-
스스로도이해할 수 없는 감정.
 분명히 자신의 오해였다. 조금만 눈을 옆으로 돌렸어도 그것이 사고였음을 알 수 있었을 거다.
 그렇지만 그 모습을. 둘이 서로 포개져서 다정하게 얼굴을 만지는 모습을 봐버린 순간 머릿속에 이성이 끊어졌다. 머릿속이 시커멓게 변하고 음습한 분노만이 타올랐다.
평상시에 라면 그런 실수 하지 않았을 거다. 완전히 얼어붙어서 우물쭈물하는 아사신을, 그렇게 윽박지르지는 않았을 거다. 그 이방인이 막아준 것이 가리시네였으면 아사신의 말대로 큰 상을 내렸을 것이다. 다음부턴 화살이 날아와도 몸으로 막으란 말 따위 하지 않았을 거다.
“하! 바람난 아내를 닦달하는 남편의 꼴이군.”
헛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중얼거린 야스카산은 순간 얼굴을 구겼다. 왠지 절대 말해선 안 되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버린 느낌이었다. 열 한 살때 산에 갔다가 곰과 마주쳤던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미묘한 감정이 등 뒤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손에 땀이 차고, 머리가 순간 하얗게 변했다.

“족장.”
완전히 기분이 잡쳐져서, 얼굴을 구기고 있는 야스카산의 뒤로 타스가가 머뭇머뭇 따라왔다. 야스카산은 살얼음이 펄펄 날리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따라왔지 타스가?”
“아 그게 말입니다.”
타스가는 뒷머리를 북북 긁었다.
 “좀···사람이 없는 곳에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말씀 드릴게···있거든요.”
“여기서 말해라.”
야스카산은 딱 잘라 말했다. 조금 머릿속이 복잡하긴 하지만 할 일은 해야 한다. 지금부터 근방의 경비대를 순찰하러 갈 생각이었다. 시간을 뺐기고 싶지 않았다.
 “그게···또 좀 사적인 일이라서 말입니다.”
“······.”
머뭇거리면서도 계속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옆에 항상 있을 때는 무슨 말을 하던 일절 반문이 없던 남자가 저렇게 말하자, 조금 호기심이 일었다.
“좋다. 따라와라.”
야스카산은 타스가를 데리고 어두침침한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주변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충 흙을 털어내고 바위 위에 앉자 타스가도 머뭇머뭇 따라와 옆에 앉았다.
“이제 말해라.”
야스카산이 별 일 아닐시엔 가만두지 않겠다는 오오라를 뿜어내자, 타스가는 잠시 주춤하더니, 시뻘게진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기 말입니다. 그 아까 신녀에게도 말했던···합방 말입니다. 그거 좀···조심하면 안 될까요?”
“뭐라고?”
야스카산은 귀를 의심했다.
 “네가 지금 감히 나의 잠자리 생활까지 관섭하겠다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타스가.”
“헛!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아닙니다!”
타스가는 손사래를 쳤다. 아무래도 차근차근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비오는 날 말입니다. 신부의 옷을 갈아입히고 닦아주었는데 말입니다. 상처가···나있더군요. 그게 꽤나 상태가 안 좋아서 말입니다.”
야스카산은 침묵했다. 그 상처들은 자신에게 쫓기면서 생긴 상처들이다.
 타스가는 땀을 뻘뻘 흘렸다.
“불가피하게 그···손목이나···허벅지 같은 곳에 멍 자국 같은걸 봐버렸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어디 높은데서 떨어졌다거나 심하게 굴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좀···하룻밤 정사의 흔적치고 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실제로 아사신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맨 땅에 굴러다녔었다. 그러나 야스카산은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왠지 변명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말입니다. 그···그···곳 말입니다.”
“······.”
“그···알고 있지요? 거기 말입니다. 그···.”
“······어디 말이냐 타스가.”
한참을 땀만 흘리며 그··· 라고만 하고 있는 타스가에게 조금 짜증이 난 야스카산이 묻자 타스가는 고개를 획 돌리고 엄한 곳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우락부락한 갈색얼굴이 새빨개져서 조금 웃겼다.
“···그게···그러니까.”
“빨리 말해라. 나는 시간이 없다.”
야스카산의 짜증어린 목소리에 타스가는 그만 소리를 빽 질렀다.
“그···에잇! 그 부위 말입니다! 신부가 족장을 받아들이는 거기요 거기! 아 정말 제가 이런 말까진 안하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야스카산은 벌떡 일어나 갑자기 큰 소리를 내는 타스가를 황당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겁니까? 신부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을 낳아줄 존재란 말입니다. 아무리 사적으로는 족장의 부인이 된다지만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사이는 찢어지고···그··· 사이에선 피가 나오고···그···것도 모자라서 뒤처리도 제대로 안 해주셔서 그···것도 나오고······.”
차마 제대로 그 부위와 명칭에 대한 정확한 단어를 말하지 못하고 그것이라고 표현하는 타스가의 얼굴은 정말 보고 있기 불쌍할 만큼 벌겋게 익었다.
그렇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무리···족장. 한창때라곤 하지만 말입니다. 너무 하고 싶은 대로 막 하는 거 아닙니까? 신부를 지금까지 같이 굴렀던 남자들과 비교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여자와 비교해도 안 됩니다. 전사가 못 된 남자의 육체를 그렇게 마구잡이로 해버리면 상처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남자의 그···곳은 원래 그런 의도로 사용하는 곳이 아닙니다. 기술이 필요하다- 이말 입니다.”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야스카산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팔짱을 끼고 앞으로 상체를 숙였다.
타스가는 계속 말했다.
“거기다 기절한 걸 보니 별로 좋지도 않았던 모양이더군요. 맞습니까?”
“······.”
야스카산은 묵묵히 침묵했다.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대답이었다. 그런 질문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는 오오라가 뭉게뭉게 등 뒤로 솟구쳤다.
실제로 아사신은 자신과의 두 번의 성교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쾌감을 느낀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럴 거 같더라니······.-
야스카산이 대답이 없자, 타스가는 대충 짐작하며 말을 이었다.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그렇게 해버리면 신부는 도망가 버릴 겁니다. 아무 여자나 남자한테 그런다면 그건 또 상관없지만 상대는 신부입니다. 제발···조금만 배려하고 조금만 더 준비를 해 주십시오.”
“···뭘 어떻게 하는 거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야스카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타스가는 기뻐하며 말했다.
“뭘 말입니까?”
“···그··· 준비라는 거 말이다. 어떻게 하는 거지?”
“······.”
“······.”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설마 모르셨던 겁니까?”
“모른다. 내가 어떻게 안다는 거냐? 그런 거 아무데서도 들은 적 없다.”
야스카산의 짜증 섞인 대답에 타스가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이 남자. 현존하는 가장 우수한 신의 혈족이자, 위대한 지배자이자 바르바칸의 하나뿐인 후계자라고 불리는 이 남자는······.

그래봐야 아직 10대 였던 것이다!

열아홉 살이라서 10대라고 보기에는 살짝 아슬아슬하기는 하지만, -외모는 더더욱 10대에 맞지 않지만.- 어쨌든 10대는 10대였다. 상대에 대한 배려라던가, 사랑으로 안아준다거나, 쾌감을 교류하기보다- 자신의 욕망이 가리키는 대로 그저 넣을 곳만 있으면 내키는 대로 하는 것 밖에 모르는 10대인 것이다.
 팔자에도 없는 성교육을 -그것도 저 야스카산을 상대로- 하게 된 타스가는 머리를 싸맸다.
“···정말 모를 줄은 몰랐습니다. 남자들과도 몇 번 몸을 섞지 않았습니까···.”
“그들을 안은 것과 신부를 안은 것과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들 중 누구도 그것에 대해 나에게 말을 한 사람도 없었다.”
야스카산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인상이 별로 좋지 않다. 자신의 무지에 대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겠죠. 감히 누가 족장에게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들로서는 족장이 하룻밤 정사의 상대로 자신을 선택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것이다. 하기 전 준비고, 뒤처리고 모두 자기들이 알아서 했을 거다. 족장이 마구잡이로 때리면서 관계를 강요했다 해도 그 누가 뭐라 하겠는가. 안 봐도 뻔했다.
“족장. 잘 들으세요.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
상당히 어두침침한 분위기를 잡으며 침묵을 지키는 주제에 듣기 싫다는 말은 하지 않는 야스카산이었다.
“신부는 당신과 오래오래 살 맞대고 살아야 합니다. 한 달마다 합방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그렇게 겁먹게 해가지곤 서로에게 좋을 일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아니 모르시겠지만 남자의 육체는 남자를 받아들이는데 무리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에 맞는 사전 준비도 필요합니다.”
흘깃 눈을 들어 야스카산을 쳐다보자 그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타스가는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하기 전에 말입니다. 신부의 거기··· 를 미리 손가락으로······하는··· 겁니다.”
“뭐라고?”
타스가는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굴렀다. 남편 앞에서 아내의 비부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그러니까···하기 전에 말입니다. 신부의 거기··· 에다가 말입니다 ···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잘 안 들린다. 다시 말해라.”
타스가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정말 이런 대화. 야스카산과 하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하나씩 늘여가면서 구···구··· 구멍을 넓히는 겁니다!”
“손가락?”
야스카산이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물론 넣기 전에 손가락으로 넓혀주었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좀 더 하란 말입니다 좀 더!”
그 뒤에 이어지는 -보나마나 대충 몇 번 집어넣고 빙빙 돌려서 억지로 벌려놓은 다음 마구잡이로 집어넣었을 거 아닙니까!- 라는 말은 생략했다.
“그 비오는 날에 대체 어디서 윤활제 같은 건 구하셨습니까? 아마 안 그러셨을 것 같지만 말입니다··· 적어도 그렇다면 물이나 침으로 적셔놓기라도 하셨어야죠. 제대로 흥분도 시켜놓지 않아서 완전 긴장된 상태의 몸에 쑤셔 박으면 넣는 쪽에서는 좋겠지만 받는 쪽에서는 얼마나 무리가 가겠습니까. 족장.”
타스가는 발을 쿵쿵 굴려가며 흥분했다.
“상대가 여자라도 그렇게 했다간 상처를 입습니다. 신부도 남자입니다. 느끼는 부위는 같다, 이 말 입니다. 족장도 남자니까 어디를 어떻게 해줘야 느끼는지 알잖습니까. 그런데 그 가장 민감한 부위를 마구 손톱으로 긁어놓으셨더군요.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강간인줄 알았겠습니다.”
“······.”
야스카산은 다시 침묵했다. 솔직히 두 번째 관계는 꼭 집어 강간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모호했다. 하기 싫다고 도망가는걸 잡아와서 해댔지 않는가.
“그리고 안쪽에는 남자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넣어지는 쪽도 쾌감을 충분히 나눌 수 있다는 겁니다. 아··· 아시겠습니까?”
“아사신에게는 없다면?”
야스카산의 물음에 타스가는 잘라 말했다.
“아닙니다. 확실히 있습니다. 절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요.”
타스가는 더 이상 대화를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정말 이런 낯뜨거운 대화.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야스카산이 몸을 일으켰다.
“좋다. 네 말은 잘 알겠다. 기억해 두지.”
“감사합니다. 족장!”
타스가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무시무시한 대화가 드디어 끝난 것이다. 슬금슬금 뒤로 몸을 빼면서 한 손을 심장에 대고 예를 표했다. 지금까지는 조용히 자신의 말을 들어주었지만 지금 저 표정으로 보아선 얼른 빠지는 게 좋을 거라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다.
“그럼 전 이만 신부에게로 가보겠습니다.”
야스카산은 거북한 얼굴로 슬금슬금 물러가는 타스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심기에 단단히 거슬린 듯 표정이 묘했다.
“······타스가.”
“······네?”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던 타스가가 움찔했다. 야스카산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느릿하게 말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잘 안다는 것은··· 네가 직접 신부의 모든 곳을 씻겼다는 거겠지?”
“그, 그것은!”
타스가는 몹시 뒤가 구린 표정을 지었다.
 -그건 당신이 제대로 돌봐주지 않아서 그런 거잖습니까!-
“흐음. 그러니까··· 네가···신부의 피가 흐르는 거기···를 치료해 주었다는 거로군?”
“그···그렇긴 합니다만!”
야스카산의 얼굴은 평상시의 오만방자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여전히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다른 한 손은 가볍게 허리를 얹었다.
 “게다가 아사신에게 그 부위가 있는지 없는지는 어떻게 알지? 응 타스가?”
야스카산의 물음에 불쌍한 타스가는 서있는 모습 그대로 얼음으로 화했다. 쩌적-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불가피하게 치료를 하다 보니 말입니다···.”
“치료라··· 그 치료 어떤 방법으로 했을까···. 내게···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으면 한다.”
진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촉촉하고 달콤한 목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야스카산의 모습은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의 그것도 벌떡 일으켜 세울 만큼 색기가 흘러 넘쳤다.
 그러나 최근 들어 별로 운이 좋지 못한 불행한 남자 타스가는 벌떡 세우는 건 고사하고 식은땀만 뻘뻘 흘리며 야스카산이 저벅저벅 한 걸음씩 다가오는 것을 두려운 얼굴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곧 이어 뭔가를 타작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음은 말 할 것도 없었다.


*                *                *


-싫어······.-
입으로는 싫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기분이 좋았다.
-싫다니까, 그만해.-
애교를 부리듯이 머리를 부비작 거렸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듣고 있으면 함께 기분이좋아지는 아름다운 웃음소리 였다.
-응··· 그만.-
장난스럽게 간질여오던 손가락이 좀 더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다. 허리를 맴돌던 손가락이 다리의 갈라진 사이로 기어들어오고,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던 손가락은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 좋아.-
아사신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온몸의 털이란 털은 모두 바짝 솟아서 파르르 떨렸다.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야릇한 감각이 몸에 불을 지폈다.
손가락이 유두를 꼬집듯이 잡고 들어올리더니 세게 비틀었다. 유두가 팽팽하게 긴장되며 단단해졌다. 아픔과 쾌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어쩔줄을 몰라 온 몸이 배배 꼬였다.
-아··· 응··· 좋아. 좋아.-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며 그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가만 반복했다. 저지를 해야할지, 더 해달라고 졸라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다리사이의 손가락은 애타는 중심을 잡아주지 않고 교묘하게 주변의 연한 살만 지분거린다. 절로 호흡이 가빠지고, 엉덩이가 들떴다. 반복적인 리듬을 타고 허리를 앞으로 밀어 붙였다. 웃음소리가 멀어져 간다.
 아까웠다!
그 소리가 멀어져가고, 그 손길이 멀어져 가는 것이 미치도록 아까웠다. 막 고개를 든 육욕의 불길이 피를 데우며 몸 속에서 아우성쳤다.
손을 내밀어 그것의 모가지를 움켜쥐었다. 도망가려는 얼굴을 잡아서는 다짜고짜 입술을 밀어붙였다. 서툴기 그지없는 입맞춤.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어 그것의 입술을 핥았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주춤하던 그것의 손이 곧바로 벌려진 옷사이로 다시 들어와 유두와 가슴을 한꺼번에 움켜잡았다.
“하으···.”
콧소리를 내며 그것의 머리카락을 잡아끌었다. 입술에 느껴지는 그것의 입 꼬리가 빙긋 올라가 있었다. 촉촉한 마찰음을 내며 그것의 혀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츄압- 하는 달콤한 소리가 입 속에서 울렸다. 자발적으로 다리를 벌리고 그것의 몸을 침대로 끌어들였다. 여유롭게 웃고 있던 그것의 목구멍에서 드디어 괴로운 신음소리가 울렸다.

“후- 나로서는 이런 초대가 기쁘기 그지없지만 말입니다.”
“···으응.”
“이 모습. 수라킨이 봤다간 저는 죽을지도 모릅니다.”
수라킨?
 아사신은 눈꺼풀을 바르르 떨었다. 무언가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온 몸을 기분 좋게 감싸고 있던 열기가 서서히 가시면서 나른한 감각이 무뎌졌다.
 “그나저나··· 정말 부드러운 속살인데요? 죽을 때 죽더라도 좀 더 만져도 될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입술을 맞댄 체 힐레멘의 반질반질한 얼굴이 빙긋 웃고 있었다.

···아사신은 핏기가 싹 가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히! 너는··· 너는 히!!”
“아니 또 그런 반응을 보이시면 상처 입습니다~.”
“히,히,히, 힐레메에엔!!!”
예의고 나발이고 손으로 삿대질 하며 고함을 지르는 아사신을 보며 힐레멘은 히죽 웃었다. 예쁜 장미빛 볼이 발그레 달아올라 있고, 붉은 입술이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그 입술에 젖은 것이 자신의 침이라는 것을 깨달은 아사신은 괴성을 지르며 침대에서 굴러 떨어 졌다.
“으··· 으악! 이건 꿈이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정말··· 상처받는다니까요 아사신.”
전혀 상처받아 보이지 않는 얼굴로 힐레멘이 말했다.
 “괜히 말을 걸었군요. 저는 그냥 수라킨이 식사 다 됬으니 불러 오라기에 부르러 온 죄밖에 없습니다. 뭐··· 물론 잘 자고 있는 사람 살짝 조물딱 거린 건 인정하지만, 키스를 시작한건 당신이었어요. 아사신.”
아사신은 꽤액! 하고 괴상한 비명을 지르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탁자와 부딪혀서 다시 끼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풀쩍 뛰어 올랐다.
온 방안을 굴러다니면서 고함을 지르는 아사신을 힐레멘은 두 손을 뺨에 대고 부끄러워요~ 라고 말하는 듯한 포즈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얼른 나와! 음식 식어~.”
밖에서 수라킨이 신경질 부리는 소리가 들렸다. 힐레멘이 빙긋 웃었다.
“들었죠? 수라킨을 좀 더 기다리게 했다간 오늘 밤 식사는 우리들의 육고기가 될 거에요. 얼른 나가요 아사신.”
“···으··· 꿈일 거야. 꿈일 거야.”
“자꾸 그러면 나 상처받는 다고요? 얼른 나가요.”
그러나 아사신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계속 꿈일거야만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힐레멘은 약간 인상을 썼다.
“나 정말 상처받는다니까요? 내가 만진 게 그렇게 싫었어요?”
“그래! 싫었어!”
아사신은 고함을 빽 질렀다. 힐레멘은 고개를 갸웃 했다.
“이상하다. 당신 분명히 아까는 거기도 조금 세우고 허리 짓을 했잖아요? 기분이 나빴을 리가 없···.”
“으악!!”
아사신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는 고개를 붕붕 저으며 비명을 질렀다.
“몰랐어!! 그냥 꿈인 줄 알았다고! 남자가···남자한테···.”
오한으로 몸을 부르르 떠는 아사신의 옆에서 힐레멘은 생각했다.
-남자로서 남자에게 시집가서 신부가 된 사람이 당신입니다만······.-
“흐음. 그래도 당신 정말 아름다웠어요. 솔직히 족장이 부러워지더군요. 그 감촉하며··· 입술··· 정말 훌륭했습니다. 아사신. 유두를 부들부들하고, 거기는 맨질맨질 한 게 아주 손에 착착 감기는 것이······.”
“끄아악!! 그마안!!”
“아 좀 시끄러워 죽겠네! 당장 나와서 밥 안 먹어?!!”
경기를 일으키며 비명을 질러대는 아사신앞에 수라킨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국자를 휘두르며 화를 냈다. 남매가 동시에 꽥꽥 소리를 질러대자 힐레멘은 두통이 생길 것만 같았다.
“밥 먹어! 밥! 밥! 내가 직접 만들었다고!! 오빠가 안 일어나서 내가 해야 했잖아!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왜 소리는 쨍알쨍알 질러대는 거야?!! 밥 먹어! 먹어! 밥 먹어!!”
귀를 쟁쟁 울리는 밥 먹어- 소리를 꽥 지른 수라킨이 들어왔을 때와 같이 나갈 때도 문을 쾅! 하고 닫고 나가버렸다.
 남겨진 두 남자는 침묵했다.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수라킨이 밥을 했다고······.”
“···정말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입니다. 수라킨이 밥을 했습니다.”
“···왜 안 말렸어요?”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타스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구나······.”
힐레멘과 입 맞췄다는 쇼크가 순식간에 가셔버리는 강렬한 한 방이었다. 힐레멘과 아사신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타스가를 미친 듯이 부러워하며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치직- 하고 아직도 불타고 있는 무언가의 사체토막을 아사신이 들어올렸다. 옆에서 힐레멘이 짠맛과 단맛이 동시에 느껴지는 스프를 뜨고 있었다.
“···먹자.”
“······응.”
두 남자는 아까보다 더 타스가가 부러워졌다.
“누구든 남기면 이 집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야.”
수라킨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수라킨이 남자로 태어났으면 분명 족장이 되었을 거야.’
저 강단 있는 태도. 한결같은 의지. 자신의 뜻에 불복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까지. 완벽한 족장감이라고 생각하며 이상한 곳에서 감탄하는 아사신이었다.
그때,
 끼익- 하는 음침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세 사람은 식사를 하다말고 동시에 돌아보았다.
 “어? 식사 중이었나요?”
거기에는 어디서 심하게 굴렀는지 상처투성이가 된 타스가가 멀뚱멀뚱 눈을 굴리며 서 있었다.
 힐레멘이 환하게 웃었다.
“타스가! 왔군요!”
아사신도 질세라 외쳤다.
“타스가! 어서 와요!”
“에?”
타스가는 머리에서 흙을 털어내다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 두 남자가 심하게 반기는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뭔가 잘못 들어온 것 같···.’
“후후 타스가. 돌아 왔군요.”
구 뒤에서 수라킨이 삐딱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고기로 추정되는 숯 덩어리가 아직도 매캐한 연기를 피워 올리며 접시에 놓여 있었다. 접시에 놓여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먹으라는 의미.
그제야 상황을 짐작한 타스가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족장에게 얻어맞고 돌아왔더니 이번에는 수라킨의 요리라니! 이 무슨 끔찍한 일인가!
‘이 남매들은 진짜!’
남자고 여자고 족장의 피를 이었다는 이 신의 혈족들은 하나같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
하나는 상대를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주의자에, 하나는 흰 새벽을 더 하얗게 만들어 놓지 않나, 마지막 하나는 먹으면 죽을 것 같은 요리를 만들어놓고 먹으라고 시시때때로 강요한다. -타스가는 먹어도 안 죽을 것 같으니까 실험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다사다난했던 하루의 대미를 수라킨의 요리로 장식하게 된 불행한 남자 타스가는 슬픔의 눈물을 좔좔 흘리며 번뜩이는 수라킨의 눈빛아래 힘없이 식탁에 앉아야만 했다.

본격적인 겨울로 들어가기 전, 하늘은 마지막 축복이라도 내려 주려는지 며칠 째 따스하고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아사신은 그동안 늘 생각만 했던 일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이사 왔던 순간부터 늘 벼르고 벼르던 일로 그동안 벌어졌던 여러 가지 일로인해 쭉 미뤄왔던 앞마당에 텃밭을 만드는 일이었다.
“예전 집에 살 때부터 정원이나 텃밭을 가꾸는 게 꿈이었어.”
라는 한 마디로 수라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낑낑거리며 황토를 갈아엎더니 색이 짙고 질 좋은 흙을 어디선가 퍼와 서는 닭 똥 퇴비를 섞어 토양에 뿌렸다.
그걸 로도 모자랐는지 음식 쓰레기를 대량으로 구해다가 땅에다 묻고 썩히는 바람에 한 며칠 뒤늦은 날 파리 기승에 수라킨은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원래는 항아리에서 발효시킨 다음 파묻기 때문에 파리에 시달릴 필요가 없었지만 그것을 몰랐던 아사신은 나중에 수라킨의 잔소리에 한참을 시달려야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둔덕을 쌓고 이랑을 파서 물의 흐름을 좋게 하고, 곧 불어 닥칠 차가운 겨울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돌담도 만들었다.
식물을 키울 환경이 조성되자마자 이번에는 응달에서 죽어가는 겨울 꽃나무나 덩굴나무 같은 것들을 잔뜩 파오더니 예쁘게 심는다고 설쳐댔다. 그런 출신성분도 모호한 것들 아무리 정성 들여 봐야 예쁘게 크기는 글렀다고 수라킨이 타박을 줬지만 아사신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때부터 였다. 처음에는 종종 도와주던 수라킨은 곧 무언가를 재배한다는 것에 -특히 먹지도 못한다는 것에- 금방 실증을 느꼈고, 타스가는 처음부터 재배라는 것과는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애써 파내온 모종이 그의 손에 닿자마자 말라죽어버리는 것을 몇 번 지켜본 아사신은 타스가를 사정없이 내쫓아 버렸다. 덕분에 할 일이라곤 하루 종일 아사신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것뿐인 타스가는 커다란 덩치를 최대한 작게 쪼그린 채 매일 집에서 빈둥대야 했고, 불가항력으로 매일 수라킨에게 쪼여야만 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모종을 심는 작업은 아사신 혼자 해야 했는데 안그래도 약한 몸이 조금 무거운 묘목이라도 들어 올릴라 치면 옆으로 휘청 휘청하게 되서 지켜보는 사람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거 좀 들다가 넘어져도 안죽는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아사신이 말은 오빠라면 사족을 못 쓰는 수라킨은 이나, 족장으로 부터 직접 신부를 보호하라는 명을 받고 있는 타스가한테는 소용이 없었다.
 “저러다 나중에 병나지.”
지금도 어디서 휘감는 재주 외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덩굴나무를 하나 구해 와서는 히히덕거리며 땅을 파고 있지 않는가. 안색은 허옇게 질린 주제에 말이다.
그 모습을 창밖으로 쳐다보며 수라킨은 한숨을 지었다.
 수라킨이 한숨을 쉬며 창가에 몸을 기대자 옆에서 타스가도 한숨을 쉬며 탁자에 고개를 묻었다.
“저것 좀 보라고. 저렇게 헐벗고 뭘 하는 거야 진짜.”
“그러게 말이야. 물 같은 건 나중에 줘도 된다고.”
“그 전에, 이제 곧 겨울인데 왜 지금 화단 같은걸 만든다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럴 거면 좀 제대로 입고하던가.”
수라킨의 중얼거림에 타스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위복인지 아사신은 가리시네의 괴롭힘 덕분에 오히려 몸이 좋아지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 정도 고생 안 해본 건 아니지만 풍부한 식사와 알맞은 휴식이 제공되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뼈마디가 드러나 보이던 곳에는 딱 보기 좋을 만큼 살이 올랐고, 피부색은 늦가을 햇볕에 그을린 덕분인지 더 이상 예전처럼 심하게 허여멀건 하지도 않았다.
 키도 조금 자란 것 같았다. 올 초와 비교했을 때 분명히 한 뼘 정도 더 자랐다.
 지금까지 너무 가난해서 제대로 영양 섭취가 안됬던 것을 보완이라도 하는 건지, 아니면 뒤늦게 성장기라도 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아사신의 육체가 조금이나마 건강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는 수라킨이었다.
지금 그녀의 오빠는 어깨를 넘어서는 머리카락을 대충 묶어서 반듯한 얼굴을 내놓은 채, 얇은 겉옷 한 벌만 입고 비지땀을 쏟고 있었다. 평범하게 생긴 청년이 열심히 일을 하는, 아무 색다를 것이 없는 광경이었다.
분명 그러할진대······.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다.
팔에 힘을 줄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겉옷이 미끄러지며 드러나는 하얀 어깨와 목덜미··· .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 땀 한 방울이 또르르 굴러가다 코끝에서 똑 하고 떨어지면 저도 모르게 그 궤적을 눈으로 쫓게 된다.
더운지 파닥파닥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입술을 살짝 핥는 모습에 생침이 절로 넘어가고···.
쪼그리고 앉아 삽질을 하느라 하의를 걷어붙이기라도 하면 늘씬하고 마른 다리가 화끈하게 드러나 버리는 것이다.
타스가는 그 다리의 곡선을 눈으로 훑다 으윽- 하는 신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수그렸다.

아사신의 얼굴은 거의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화사하다던가 아름답다거나 하는 형용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조금 태웠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피부는 허여멀건 했고, 그림자가 진회색 눈동자는 공허했다.
 그의 인상은 여전히 병약해 보이는 보통 청년- 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를 오래 알아온 사람들은 아사신의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눈을 떼기가 힘든···쓸쓸함이 서린 얼굴과, 음침한 분위기가 흐르는 눈동자. 부드러운 입술이 잠깐이나마 미소를 지으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만져 보고 싶어진다.
그 속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여 지는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새벽이 찾아오는 것처럼. 물이 흐르는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그렇게 살금살금 아사신은 변하고 있었다.
수라킨도, 타스가도 그다지 환영하고 싶지 않은 변화였다.
“제발 뭐라도 걸쳐라 제발.”
겨울에도 파릇파릇한 색깔을 자랑하는 얼리 덩굴나무를 담벼락에 붙여준답시고 팔을 번쩍번쩍 들 때마다 겨드랑이 안쪽까지 훤하게 드러났다. 수라킨은 못마땅한 얼굴이 한층 더 찌푸려졌다.
저 멀리서 힐레멘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사시이이인~ 보고 싶었어요오오~~.”
안그래도 길고 낭창낭창해서 보기 힘든 팔을 칠렐레 팔렐레 휘두르며 뛰어온다. 요 며칠 분위기가 어수선하더니 저도 바빴는지 통 보지 못했었다.
“아. 힐레멘. 또, 왔군요.”
또- 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조금 강하게 말을 끄는 아사신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힐레멘이 하하하 웃으며 옆에 와서 쪼그리고 앉았다.
“뭐하세요? 뭔가 심는 중인가요?”
“네. 이 녀석은 겨울에도 꿋꿋하게 살아남는 녀석이에요. 상태는 조금 안 좋아지지만··· 저 멀리 응달에서 말라 죽어가고 있기에 퍼왔어요. 관리해주고 싶어서요.”
“흐응 그렇구나~.”
힐레멘은 관심을 가지고 아사신이 심는 덩굴나무를 바라보았다. 희고 마른 손이 검은 흙을 토닥토닥 두드리고 있었다.
“나 한동안 자주 못 올 겁니다.”
힐레멘이 불쑥 말했다.
“그래요?”
아사신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덩굴이 꼬이면서 자신의 발을 휘감으려 하고 있었다. 얼른 벽에다 붙여놓아야만 했다.
“네. 아사신. 족장을 따라 전쟁터에 갑니다.”
“전장? 아아···저번에 말하던 그 건 인가요? 그렇군요.”
아사신은 흥미를 잃었다. 족장이 전쟁에 나가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었다. 아사신은 전사도 아니니까 그런데 나갈 수도 없고, 야스카산이 거기서 다친다고 해도 별로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되면 조금은 고소할 것 같다.
“조금은 걱정해주세요. 진짜 상처받는다고요~.”
힐레멘이 약간 슬픈 미소를 띠고 말했지만 아사신은 무시했다.
“아 물론 걱정하고 있어요. 표현을 안 할 뿐이에요.”
“제가 말했던가요? 아사신은 거짓말이 서툴다고.”
“···진짜라니까요.”
아사신이 쏘아보자 힐레멘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뭐, 좋아요. 실은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
그제야 하던 일을 멈춘 아사신이 힐레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 죽을지도 모르니까 마지막 부탁이다 생각하고 들어줘요.”
“···뭔데요?”
별로 듣고 싶지 않다- 라는 표정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 아사신을 보며 힐레멘이 옅게 웃었다.
 그 미소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입술··· 만지게 해줘요.”
“···입술?”
“네. 입술.”
아사신은 얼굴을 찡그렸다. 얼마 전에 이 남자와 키스해버린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왜요?”
“에이. 그런 건 묻지 말아요. 그냥 만지게만 해줘요. 네?”
“······싫은 데요?”
“죽을지도 모른다니깐~.”
“당신은 죽여도 안 죽을 거 같아요.”
아사신의 말에 힐레멘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정말 밝고 맑아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타스가와 수라킨이 중얼거렸다.
“쟤네 뭐하는 거야?”
“글쎄···. 얼굴을 만지려는 것 같은데?”
“그러게. 타스가 좀 가서 알아봐.”
“싫다. 밖은 춥다.”
“그러지 말고 좀 나가봐~. 궁금하단 말야. 무슨 대화하는지.”
“아니 그렇게 궁금하면 네가 나가라 수라킨. ···그리고 잠깐. 왜 반말하지?”
“···눈치 챈 거야? 그냥 반말하자아~. 별로 신경도 안 쓰잖아 어차피.”
“신경 쓰인다! 신경 쓰인단 말이다! 너랑 나랑 나이차이가 얼만데 어디서 반말이야 어디서!”
“···째째하긴······.”
“이, 이 녀석! 작게 말하면 안 들리는 줄 알아!!”

수라킨과 타스가가 그렇게 아옹다옹하는 사이 힐레멘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유유자적 아사신의 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직 만지라는 말 안했는데···.”
“상관없어요.”
‘그럼 왜 물어본 거야!’
아사신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힐레멘의 손은 크고 길었다. 그 누구와는 다르게 절대 우악스럽지 않은 미끈한 손가락이 아사신의 얼굴을 감싸고 살그머니 미끄러졌다. 그 감촉에 아사신은 눈만 굴려서 좌우를 살폈다. 누가 있나 없나 살피는 것이었다. 어째 최근 두 번의 만남이 모두 뒤에서 소리 없이 다가와 놀래키던 야스카산 때문에 반사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불안해하는 아사신과 다르게 힐레멘은 아무 거리낌없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아사신의 동그란 눈동자가 가운데로 몰리고 웃, 하는 짧은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힐레멘이 웃었다.
“그렇게 싫어요?”
“···조금···.”
“입··· 벌려 봐요.”
“입은 왜··· 아!”
말을 하느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힐레멘의 손가락이 파고 들었다.
-입술이라고 했잖아. 입술!-
입 안에 든 손가락 때문에 눈으로 항의하는 아사신에게 힐레멘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입술이라고 했으니까 그 안쪽도 포함되는 겁니다? 나는 겉면만 만진다고 말 안했어요?”
-그런 억지가 어딨어!-
라고 역시 속으로만 투덜거리는 아사신이었다. 어차피 손가락은 들어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얼른 만지다가 빼라고 생각하고 꾹 참기로 했다.
힐레멘의 손가락은 가볍게 입천장을 문지르다 혀를 살짝 잡아당겼다. 느릿느릿 혀를 문지르며 그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을 즐겼다. 아사신은 조금 아파서 미간을 찡그렸다.
힐레멘이 볼을 발그레 물들이고 물었다.
“여기서 키스했다가는 화내겠죠?”
시퍼렇게 날을 세워 노려보자 웃으며 농담입니다- 라고 말하며 빙긋 웃는다. 슬금슬금 손가락을 움직여 치열을 훑다가 어금니 안쪽까지 들어오길래 힘을 주어 꽉 깨물자 -아파요~-라고 징징대며 빠져나간다.
“···이런 거 만지면 좋아요?”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선심이나 써요.”
“당신은 죽는대도 입만 둥둥 떠서 돌아올 것 같아.”
“너무해요 아사신. 정말 죽을지도 모를 곳을 가는 거라니까요? 족장이 내가 죽든 말든 신경이나 써줄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왜 굳이 힐레멘을 데려간다는 거지?
“왜 당신을 데려가는 거죠? 당신 전사였나요?”
“날 여기 내버려두면 안심이 안된다나 뭐라나··· 어쨌든 두고 갈 수 없으니까 데리고는 가지만 몸조심은 알아서 하라고 협박했어요. 내가 뭘 어쨌기에 날 그렇게 미워하나 몰라. 힘이 조금 세지만 그것 외엔 아무런 재주도 없는데 안심이 안 된다니. 그 무서운 델 그런 이유로 데려가겠다니 어이가 없지 않아요? 나 무서워요 아사시인~.”
종알종알 시어머니 욕하는 며느리마냥 투덜대던 힐레멘이 눈을 새초롬하게 올려 뜨면서 엉겨 붙어 왔지만, 아사신은 익숙한 몸짓으로 탈탈 털어냈다. 왠지 그 얼굴이 즐거워 보인다.
“흐음~ 그렇다는 것은 한동안 보기 싫은 두 남자가 안 보인다는 거잖아.”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사신은 몹시 개운한 표정으로 대충 땅을 꾹꾹 밟아 주고는 총총 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뒤에서 힐레멘이 -보기 싫은 두 남자라니! 하나는 야스카산이고 다른 하나는 누굴 말하는 겁니까아아~- 하고 절규하고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야스카산은 자신과 몹시 닮은 얼굴을 한··· 강팍한 인상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사내역시 야스카산의 투지가 끓어오르는 눈동자를 무겁게 마주쳐오고 있었다.
“아버지.”
야스카산의 음성은 싸늘했다.
“이미 제 뜻을 따르겠다고 하셨습니다.”
“바산을 치겠다는 네 뜻에는 따를 수 없다.”
“우리의 오랜 우환거리입니다.”
“우리의 형제였다.”
야스카산은 비릿하게 웃었다.
“과거의 핏줄에 연연해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당신께서 말입니다.”
야스카산의 말에는 그가 오래전 자신의 적통의 후계자를 내쫓았음을 내포하고 있었다. 바르바칸의 안광이 더욱 형형해졌다.
“적어도 죽이지는 않았다.”
“이미 버린 것은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우리의 형제였다.”
“지금은 아닙니다.”
바르바칸의 말에 한 마디도 지지 않으며 야스카산도 진한 살기를 피워 올렸다. 건장한 가슴을 더욱 앞으로 내밀고, 고개에 힘을 주고 아래로 눈을 내리깔자 그 살벌한 기에 바르바칸은 자신이 밀리는 것을 느꼈다.
 어둠의 가장 깊은 곳에서 건져 올린 듯한 검고 긴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무쇠와 같이 단련된 긴 사지에는 구석구석 긴장감이 넘쳐흐른다. 어느 젊은 신의 현신인양 아름다운 얼굴에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비장미를 띄고 노려보는 모습은 전 족장이자 그의 아비인 자신도 감히 대적할 수 없을 만큼 위압적이다.
“왜 바산족을 처음으로 정했지?”
“그들은 걸림돌입니다. 우리의 오랜 근심거리였습니다. 한때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누었지만 스스로 그 손을 놔버린 자들입니다. 이불속의 돌멩이처럼, 너무 자라버린 손톱처럼 신경을 거슬리게 만듭니다. 언젠가는 없애 버려야할 것들입니다.”
바르바칸은 신음을 토했다. 오만한 아들의 혈기왕성함이 두려웠다. 그는 너무도 자신만만하다. 인내할 줄 모르고, 선대의 결정에 수복할 줄도 모른다. 자신의 이치에 맞지 않으면 망치로 두들겨펴서 자신의 형태에 맞게 고치려 든다.
“최후의 최후까지 남겨둘 수는 없는거냐? 왜 갑자기 다른 부족을 집어삼킨다는 거냐. 너는 팔시아 인들처럼 되고 싶은 것이냐?”
“제 감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그래서 팔시아 대륙인을 이곳에 들인 것이 아닙니까? 언젠가 그들은 다시 옵니다. 욕심 많은 팔시아 인들은 언젠가 분명히 옵니다. 그들은 하나로 통일되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언젠가는 강력한 하나가 되겠지요. 지금은 서로를 집어삼키기 위해 소화도 안 되는 땅을 삼켰다 뱉었다 반복하며 아까운 피를 흘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뜻을 이룰 겁니다.
 그리고 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탐욕스런 이방인들이 이 땅을 그냥 둘까요? 당장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일어날 일입니다. 내 감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내 아들. 나는 너를 믿는다. 그러나 바산족이 왜 그 첫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지는 나는 모르겠구나. 정녕 너는 그들을 쓸어버릴 작정인 거냐?”
바르바칸의 말에 야스카산은 조금 혈기를 누그러뜨리고 사정조로 이야기 했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위대한 족장. 당신은 바산족을 없애버리기를 꺼려하고 있지요. 그러나 나는. 그러기 싫습니다. 오래 전 그들이 우리 형제였다는 이유로 살려두기엔 우리가 지불한 핏값이 아깝습니다. 그들은 계속 침범하겠지요. 우리가 멸하지 않는 이상 계속 찾아오겠지요.
기억하십니까? 오래전 경계선에서 사냥하던 늙은 여인. 당신께서 직접 제거했던 그 여인 말입니다.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여인은 비록 명을 어겼습니다만, 우리 부족의 딸이었습니다. 바산족의 경비병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을때 저는 아버지께서 그녀를 구해줄 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바산들이 보기 전에 여인을 활로 쏘아 죽여 버렸습니다.
 저는 당황했습니다. 왜 우리의 보호자인 당신의 활시위가 우리 부족 여인에게 향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그들과 싸우기 싫어 손쉽게 입막음이 가능한 그 여인을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떤 사소한 계기라도, 전쟁을 일으킬만한 일은 피하고 싶으셨던 거겠지요. 그것들은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누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버지.”
야스카산은 호소하는 몸짓을 해보였다. 그는 바르바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묵은 죄의식과 갈등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과거의 잔재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어야 마땅한 그림자입니다. 쓸어버립시다. 없애버립시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않습니까. 그 고약한 것들 때문에 우리 형제의 피를 흘릴 이유는 없습니다.”
바르바칸은 깊은 신음을 토해냈다. 진한 한숨 속에 그의 고뇌가 묻어있었다.
바르바칸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아 챈 야스카산은 화사하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바르바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볍게 힘주어 밀어내는 것만으로 고집 센 황소처럼 버티던 발걸음이 뒤로 밀려났다. 야스카산은 빙긋 웃어보였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바르바칸은 아직 결심이 서지 않았지만 아들은 그가 잡을 세도 없이 멀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바르바칸을 뒤로 한 채 야스카산은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갑자기 튀어나와 방해하는 바르바칸 때문에 시간을 지체했다.
전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는 광장에는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챙겨 들고 모여 있었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야스카산이 가장 아끼는 다섯 수장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달과 돌과 바람. 햇와 달의 전사들로 하나같이 시꺼멓고 우람 했으며 눈동자는 맹금류의 그것과 같았다.
그들은 흥분하고 있었다. 기억하는 한 다른 부족을 먼저 치러가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늘 바산족의 침입에 화가 났음에도 절대로 먼저 치고 들어가지 않겠다는 바르바칸의 명을 얌전히 따라야만 했던 전사들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흥분과 살기가 뒤섞여 기묘한 열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태양의 신어를 이마와 볼에 그리고, 무사귀환을 바라는 가족들이 기도로 제를 올렸을 무기를 손에 들고 그들은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사냥을 떠나기 전의 가벼운 살기가 공기를 데우고 있었다.

야스카산은 까마귀 깃털이 장식된 머리띠를 이마에 두르며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그의 등장과 동시에 순식간에 그 많은 사람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들의 주인. 살아있는 신의 핏줄이 나타난 것이다.
야스카산은 두 손을 들었다. 이미 시선이 미치는 곳의 모든 이가 야스카산을 주목하고 있었지만 그가 손을 든 순간 공기조차 그에게로 끌려가는 것 같았다. 전사들의 눈이 야스카산의 손을 따라 이동했다.
“나의 전사들. 우리 신의 축복받은 아들들.”
야스카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힘이 있었다.
“내 뜻에 따라 오늘 우리는 우리의 오랜 적. 바산을 멸하러 간다. 그들은 우리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바산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어왔다. 우리 어머니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협하는 그들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내버려두었다.”
야스카산의 낮은 목소리가 낮게 낮게 울려 퍼졌다. 그의 말은 마치 주술과 같았다. 사람들은 표현할 수 없는 힘의 속박에 걸려 야스카산에게서 시선을 땔 수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이 우리 땅을 침범함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도 오만하다. 나와 함께가자 나의 전사들. 그들이 취한 우리의 피만큼 그들에게서 취하자. 그들을 쓸어버리자. 그들의 식량과 보석과 여자를 취하자. 나는 너희들에게 바산족의 땅과 여자를 통째로 주겠다. 너희 마음대로 그것들의 피를 취하라. 우리가 받아온 긴 수난의 세월은 그 보상을 필요로 한다. 가자! 가서 싸우자!”

우와아아아---!!!

전사들은 동시에 함성을 질렀다. 그 함성은 온 산아에 메아리쳤다. 그들의 영혼은 야스카산의 선언에 깊이 감화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우리들의 젊은 족장.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
사람들은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다. 연설은 짧았지만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 야스카산의 목소리가 미치는 곳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은 흥분했다. 그들은 그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야스카산은 자신의 전사들의 용맹한 울부짖음에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좌중을 둘러보던 그의 예리한 안광이 어느 한 지점에 가서 박혔다.
거기에는 자신의 지시에 따라 끌려나온 힐레멘과 역시 힐레멘에게 끌려나온 아사신이 서 있었다. 아사신은 새하얀 얼굴을 한 채 전사들의 고함소리를 피해 귀를 막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시선이 야스카산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 공중에서 마주쳤다. 당황한 듯 서둘러 얼굴을 돌렸지만 야스카산은 그 시선의 끝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샅샅이-
 샅샅이 그 가느다란 육체를 쳐다보았다.
 노려보았다. 핥듯이 훑어보았다.
힐레멘의 등 뒤로 자신의 몸을 얼른 숨겨보지만 이미 늦었다. 시선에 사로잡혀 버렸다. 타는 듯한 안광이 전신을 핥는다.
“왜 그래요 아사신?”
힐레멘이 바르르 떨리는 아사신의 몸을 부축하며 의문을 표했지만 아사신은 대답할 수 없었다. 말 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에 육감을 곤두섰다. 심장에 털이 난 듯 간질간질 했다.
야스카산은 멀리서 그 광경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기묘한 빛을 발했다.
-저것을 취하자.-
-이기고 돌아오면 저것을 취하자.-
-그래. 그러자. 저 육체를 취하자꾸나. 야스카산.-
속에서 키득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스카산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미끈한 입술을 축축이 적시고 들어가는 선홍빛의 혀는 어지러울 만큼 색정적이었다.
“달과 돌과 바람의 전사들이 먼저 출발한다. 나머지는 후방에서 내 지시를 따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족장.”
야스카산은 진심으로 즐거워졌다.

파괴와 살육이 시작될 것이다.



3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은 시체. 시체. 시체의 산이었다.
땅은 더 이상의 피는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피를 흡수하지 않았고 굳어버린 피 위에는 날 파리가 윙윙대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죽고 나서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부패할 뿐이다. 썩은내를 풍기고, 속에 든 오물을 몸 밖으로 흘려보내며 살아있는 자들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 뿐이다.
 고운 피부도, 아름다운 얼굴도, 종래에는 죽음의 공포 아래 구겨지고 짓이겨진 채 살고 싶다고 울부짖으며 생의 끝자락을 잡겠다고 발버둥 치게 되지. 죽음에 아름다움 따위는 없다.
힐레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칼을 다잡았다. 상반신을 드러낸 아름다운 여성이 양각으로 새겨진 손잡이가 진득한 피에 얼룩져 몹시 더러웠다.
무심하게 그것을 바라보다 빙긋 웃어보였다. 한참동안 칼을 휘두르느라 늘 자신의 얼굴위에 떠올라있던 미소를 잊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아름다운 죽음이 없다면 아름다운 살인자도 없다. 죽은피를 뒤집어쓰고 함께 시취(屍臭)를 풍기는 자신의 모습도 여기 널브러진 수많은 시체들과 별다를 게 없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힐레멘은 지독한 피로를 느꼈다.
아직도 어디선가 피와 불꽃이 돌에 맞아 튕겨 오르고 있었다. 지독하게 피로했다. 역한 피비린내와 아직 그 질긴 숨을 다하지 못한 채 단발마의 고통 속에 흐느끼는 반 주검들의 신음소리가 코와 귀를 고문하고 있었다.

 바산은 강했다.

그들은 국왕의 직속 군대만큼이나 강했다. 자신의 땅을 침범한 이방인들에게 분노의 칼날을 휘두르며 포효했다. 스스로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힐레멘의 칼 아래 죽음을 각오하고 몸을 던져올 때는 등골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십오일 십오야를 전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평화롭던 대지에는 피와 불꽃과 비명. 죽음과 공포와 혼돈 만이 존재했다.
바산족들은 단 한 번도 그들이 역습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듯 아무런 준비도 하고 있지 않았다.
 야스카산의 명령은 단 한 마디 였다. 그는 앞으로 닥쳐올 재난을 상상도 못한 채 한가롭게 제 일을 하는 바산족을 바라보며 무감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려두지 마라.”
그리고 살육이 시작되었다.

달도 뜨지 않던 어느 밤 시작된 싸움은 보름달이 핏빛으로 물들 때 즈음에야 끝이났다. 그 기간동안 이어지는 것은 오로지 도륙. 도륙. 도륙.
살을 베고, 뼈를 우그러뜨리고, 머리를 짓이기고, 피를 흩뿌리며 힐레멘은 얼마나 싸웠는지 모른다. 한동안 고기따위 죽어도 먹기 싫을 만큼 인간을 도륙했다. 스스로가 인간 백정이 된 기분이었다.
힐레멘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 앉았다. 과도한 노동에 시달린 육체가 비명을 지르며 휴식을 반겼다. 전신에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주저앉고 보니 주변에는 피거품을 주르르 뱉어내는, 자신이 방금 배어 넘긴 남자들의 시체 한 가운데였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깨끗한 곳으로 옮기기엔 몸이 너무 아프다. -그리고 깨끗한 곳을 찾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려던 힐레멘은 그냥 그대로 앉아있기로 결정했다. 힘들었다. 피비린내와 아직 그 질긴 숨이 다하지 못하고 단발마의 고통에 흐느끼는 반주검들의 신음소리가 코와 귀를 고문하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군.”
피가 말라붙지 않은 풀잎사귀를 한 잎 꺽어 질겅질겅 씹으며 힐레멘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눈을 까뒤집은 시체의 산 너머로 아름다운 주홍빛 노을이 하늘을 불태우고 있었다. 죽은 아들의 시체를 껴안고 시를 지었다는 어느 여인의 설화처럼 왠지 노래가 부르고 싶었다.
“어이- 힐레멘-.”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힐레멘에게 누군가 손짓을 했다. 힐레멘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족장의 전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용건이 있으면 앞에 와서 말을 하라고~. 왜 사람을 오라가라 하고 난리람.”
투덜거리며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말 그대로 심각하게 무거운 엉덩이였다. 온 몸이 아래로 축축 늘어졌다.
“족장이 부른다. 바산의 궁으로 가라.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거다.”
붉은 머리를 종종 내려땋은 전사는 자신의 말만 전하고 숲으로 도망친 잔당을 쫓아 달려갔다. 힐레멘은 입술을 삐죽였다.
 “내 섬세한 외모는 정말이지 이런 육체 노동에 어울리지 않는단 말야. 족장이야 머리속이고 몸이고 꼭 저처럼 우락부락하지만 난 다르단 말이지. 여기까지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고왔으면 손가락 까딱 안하게 만들어주던가. 그것도 아니면 적어도 목숨은 보존하게 해줘야지. 대체 몇 번이나 죽을뻔 한거야 진짜. 망토도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버렸잖아. 나중에 아사신한테 기워달라고 해야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저주와 신음소리를 들으며 콧노래를 흥얼대는 힐레멘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 적이었다. 단숨에 계단을 뛰어오르자 안에서 삭막한 얼굴을 한 야스카산이 튀어나왔다.
 “이리와라 힐레멘.”
“성격 급해 진짜. 좀 살살 잡아요. 멍 들겠습니다.”
힐레멘의 투덜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야스카산은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야스카산의 궁과 아주 흡사한 형태를 지닌 바산족의 궁은 내부구조도 상당히 흡사했다.
 신기하다는 듯이 두리번거리는 힐레멘을 야스카산이 눈만 돌려 흘겨보았다.
“이 안까지 들어온 적은 없었나보군.”
“네. 바산족은 의심이 많았거든요. 거의 손님대접해주지도 않았어요. 눈초리는 엄청 살벌해가지고 저를 쳐다보는 시선은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지요. 이 더러운 팔시아 대륙의 개새끼~. 라고 말이죠.”
힐레멘은 방글방글 웃었다.
야스카산은 아무런 말 없이 힐레멘을 앞으로 밀었다. 갑자기 밀린 바람에 발이 꼬여 살짝 넘어질뻔한 힐레멘이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거기에는 여러명의 젊은 남자가 있었다.
야스카산이 말했다.
“이 중에 어느놈이지?”
“네?”
“이 중에 바산의 후계자가 있다. 어느 놈인지 알아보겠지 너라면.”
그제야 힐레멘은 자신을 여기로 부른 야스카산의 뜻을 수 있었다. 바닥에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잘린 여자와 혀와 눈이 뽑혀나간 남자. 사지가 하나씩 뽑혀나간 어린아이들과 목이 없는 시체 서너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고문을 했군.-
힐레멘은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도 후계자가 누군지 말해주지 않았어.-
“그냥 다 죽여 버려요. 그럼 힘들게 알아낼 필요 없잖아요?”
힐레멘이 방긋 웃으며 말하자 뒤에서 손톱이 모두 제거된 노인이 피거품을 물며 소리 질렀다.
“너! 너 힐레멘! 감히 네가! 돌봐준 우리 은혜도 잊고 거기 가서 붙었구나! 이 박쥐같은 놈. 더러운 팔시아 대륙 놈이!”
힐레멘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 모습이 꼭 -봐요. 아까 내 말 그대로죠?- 하고 말하는 듯 했다.
“나로서도 그러고 싶지만 혹시라도 후계자가 숲으로 도망갔다면 곤란하다. 그러면 나는 그의 목과 몸이 분리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기 전까지 절대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몹시 신경 쓰이는 일이다.”
“흐응~.”
힐레멘은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천진한 푸른 눈과 화사한 금발머리가 그 고개 짓을 따라 예쁘게 기울어졌다.
“걱정 마세요 족장. 후계자는 여기 있어요. 저기서 사색이 되어 벌벌 떠는 녹색 눈의 청년입니다. 아- 방금 오줌을 지렸군요. 그래요. 그 남자에요.”
“힐레멘!!!!”
노인은 경기를 일으켰다. 야스카산은 그 모든 장면을 삭막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입가에 살짝 걸린 미소가 아니라면 그가 이 모든 상황을 탐탁찮게 여기고 있다고 오해할 만한 모습이었다. 이 모든 살육과 고통을 그 자신이 일으켰음에도 말이다.
 스릉- 하는 등골이 싸늘해지는 마찰음을 내며 칼을 뽑아든 야스카산이 벌벌 떨고 있는 청년의 앞으로 다가갔다. 청년은 손이 묶여있는 와중에도 엉덩이짓을 해서 도망가려다 그만 자신의 오줌에 미끄러져버렸다. 옆에서 힐레멘이 한숨을 내쉬었다.
“잘도 이런 놈을 내세우고 ···하다니 .”
야스카산은 입술을 즈려물고 말했다. 덕분에 뒷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사···살려줘!”
불쌍한 청년은 벌벌 떨면서 뒷걸음질 쳤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오줌과 피로 얼룩진 바닥 위를 필사적으로 구르는 그의 모습은 약간 우스웠다.
“금방 뭐라고 그랬습니까. 족장?”
힐레멘이 다가오려고 하자 야스카산이 차갑게 명령했다.
“넌 나가있어라. 이방인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나가라.”
더 이상 말을 붙여볼 수도 없을 만큼 냉정하게 잘라내는 야스카산 앞에서 힐레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싸늘한 살기를 피워 올리는 야스카산과 벌벌 떨고 있는 바산족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몸짓을 해보이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힐레멘이 사라지자 야스카산은 천천히 청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청년은 필사적인 얼굴로 야스카산의 얼굴을 마주보았다가 그 눈 속에 어지러이 부유하는 광기를 읽고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수그렸다.
“감히 이런 놈을 앞세워서 신부를 탈취하려고 했구나. 바산의 족장아.”
야스카산은 빈정거렸다.
“그래. 신부의 배에 저놈의 씨앗이 자라면 너희의 잃어버린 권위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나 보지? 잃어버린 혈족의 정당성을 되찾고 싶었느냐? 버러지 같은 것들아. 너희는 오늘 내 손에 멸망할 것이다.”
가볍게 칼을 붕붕 돌리며 조롱하는 야스카산의 모습에, 오히려 공포 속에서 겨우 자긍심을 되찾은 듯 남자는 의연한 얼굴을 해보였다.
 “핏줄의 타당성은 우리에게 있다. 지금 네가 앉아있는 자리는 원래 우리에게 돌아왔어야 할 자리야! 그건 원래 내 자리였다고!”
남자는 악을 썼다. 자신의 호위전사들이 살짝 동요하는 것을 알아 챈 야스카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가볍게 칼을 휘둘렀다. 스겅- 하는 소름돋는 소리가 울리고-

“으악!!!”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칼날에 맞물려 팔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다 자신의 팔이 저 멀리서 꿈틀대는 것을 보자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해버렸다. 살아남은 바산족들이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야스카산! 저주 받을 놈!”
노인은 피가 흐르는 손으로 야스카산을 가리켰다.
“네 아비가 우리를 건드리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신이 금지한 일이다. 형제가 형제를 살인하는 것은 금지된 일이다. 우리 바산은 신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면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나갔던 것이다. 그 적통의 후계자가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 야스카산. 저주 받아라! 저주 받아라 야스카산!!!”
노인의 얼굴은 무시무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죽음을 불사한 어떠한 의지가 도사리고 있었다.
“내 후계자를 병신으로 만들었구나. 불쌍한 내 아들. 원래는 네 자리였던 곳을 신부의 아들도 아닌 놈에게 빼앗기고 이제는 그 발아래 스러져버린 내 아들. 아아 신이여. 당신이 존재하신다면 저놈을 저주하소서! 저 놈에게 이 세상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주소서. 차라리 죽고 싶게 만드소서!”
노인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야스카산이 그 목을 칼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노인의 비쩍말라 뼈에 거죽만 뒤집어 씌워놓은 듯한 머리통이 허공을 날았다. 아직 입을 오물거리며 무어라 저주의 말을 내뱉던 목은 멀어져가는 자신의 몸통아리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피가 솟구쳤다.
야스카산은 냉랭하게 말했다.
“신은 존재한다.”
“족장!”
전사들이 서둘러 다가와 그의 얼굴에 튄 피를 닦아주었다. 그러나 이미 분수처럼 치솟는 피에 야스카산의 몸은 흠뻑 젖어있었다. 야스카산은 자신의 몸을 닦아주는 전사들 사이로 빛을 잃어가는 노인의 눈을 마주치며 빙긋 웃었다.
‘내가 바로 신이니까.’
야스카산의 몸에서 피범벅이 된 옷을 벗겨내던 전사들은 한기를 느꼈다. 그들의 앞에 존재하는 것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생물이 아닌 것만 같았다.
 “돌아간다. 채비를 해라.”
“남은 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전사들이 곤란한 얼굴로 묻자 야스카산은 빠르게 걸어 나가며 냉랭하게 말했다.
“죽여라.”

바산의 모든 것은 불타올랐다.
불은 살아있는 것. 살아있지 않은 것을 가리지 않았다. 미처 죽지 못한 자들이 제 몸을 태우는 불 길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한 때 아름다웠던 궁은 허물어져 내리고, 신의 형상을 조각한 동상은 녹아내렸다. 시체는 연기가 되어 흩어졌고 곧 그 잔해는 재가 되어 날아갈 것이다.
“너희는 이 불로 모든 것이 소각되면 돌아오너라.”
“먼저 가시겠습니까?”
“가겠다.”
야스카산은 입술을 핥았다. 예리한 푸른 눈이 번들 거렸다.
“할 일이 있다.”
‘그래. 할 일이 있지.’


*                *                *


아사신은 고개를 저었다. 숨이 막혔다.
 -어머니.-
미처 발음 되지 못한 단어가 입 속에서 죽었다. 아사신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지독한 가위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얼마나 이렇게 꿈도 현실도 아닌 세계에서 생을 위한 사투를 벌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찰나의 순간일수도 있고, 그 시작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같다.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몸 위에 걸터 앉아 있다. 그 무게도 느끼지 못할 만큼 가볍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숨겨두었던 과거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와버린다. 감정이 역류해 버린다.

아사신은 억지로 눈을 맞췄다.
마르고 볼품없는 작은 여자가 무표정하게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 있다. 그냥 작고 마른 여자일 뿐이다. 저항할 수 없었던 어릴 때와 다르게 자신은 이제 완전한 남자로 자랐다. 저항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괴롭다. 힘들다. 숨이 넘어간다.

 -넌 실패작이야.-
어머니의 얼굴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 낳아야 해. 너는 실패작이야.-

아사신은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는 날 사랑했어. 나를 사랑했어. 나를 사랑했어!-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었어. 마지막 순간에는 미쳐서 그러셨던거야. 그러니까 이건 기억하지 않아도 되. 환상이야. 환상일 뿐이야.-
-그러니까 사라져!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손 끝을 움직여보려고 애를 썼다. 죽을만큼 용을 쓰고, 심각한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와중에 온 힘을 그 손끝에 쏟아 발버둥 쳤다. 계속 생각해야 했다. 철철 흘러 넘치는 피가 역겹다. 현실이 아니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코끝을 스치는 피비린내는 끔찍했다.
현실과의 괴리감.
밖에서는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는데, 부엌에서는 수라킨이 무언가를 만드는지 콧노래를 흥얼대며 왔다갔다 하고 있는데.
 자신은 이렇게 과거의 환영에 뒷머리채가 잡힌채 순간순간 생사를 넘나들고 있다. 그 기분은 끔찍했다.

그때,
“오빠. 아직 자고 있어?”
수라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사신은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어머니의 환영은 수라킨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슥 한번 그녀를 쳐다보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아니 왠 땀을 이렇게 흘려?”
수라킨이 다가와 완전히 뻗어버린 아사신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날씨는 장작을 뗄 만큼 추워져 있었다. 그런데 아사신은 얇은 옷 한벌만 입은채 누워서 땀을 흘리고 있으니 이상할 만도 하다.
“수라킨···.”
“응?”
마른수건으로 아사신의 얼굴을 닦아주던 수라킨이 대답했다.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아사신은 진심으로 수라킨에게 감사했다. 수라킨은 농담으로 알아들었는지 별다른 말 없이 그저 땀만 닦아 주었다.
 어째서인지 어머니의 환상은 수라킨을 싫어한다. 아주 가끔 이렇게 아사신의 방으로 찾아와 목을 조르거나 욕설을 하는 어머니의 환상은 수라킨이 함께 있으면 바로 사라져버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그 환상은 수라킨을 싫어했다.
“···밖이 소란스럽네?”
아사신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목이 따끔따끔 거려서 그 짧은 말을 하는 것도 무척 힘이 들었다.
“아아. 족장이 돌아왔나 봐. 그래서 타스가도 마중 나갔어.”
“돌아왔···.”
어디 부러지거나 다친데는 없대?
 -하고 묻고 싶었지만 아사신은 참았다. 수라킨은 야스카산을 무척 싫어했지만 그래도 아사신이 그와 잘 지내길 바라는 눈치였다.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에서, 그것도 살아서는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사이에서 이렇게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아사신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나저나 밖에 많이 소란스럽네.”
수라킨은 점점 소란스러워져 오는 창 밖을 바라보다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족장이···.”
“족장?”
수라킨의 말에 아사신이 상체를 일으키며 반문하는  순간,

 쾅- 하는 엄청난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수라킨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거기에는 피투성이가 된 채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버티고 선 야스카산이 있었다.
“족장!”
수라킨이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족장.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뒤에서 신녀들이 어쩔 줄 몰라하며 매달리는 손길을 귀찮다는 듯이 쳐내며 야스카산은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비켜라.”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방 앞에 서 있는 수라킨을 밀었다.
“무슨 일이시죠?”
수라킨은 그 귀신같은 형상에 놀랐지만 이 무례한 작태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가 바산족과 사투를 벌였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오늘 귀환한 것도 알고 있다. 승리한 것도 들어서 알았다.
 그렇다고 귀환의 날에 온 몸에 피칠갑을 한 채, 씻지도 않고 남의 집에 쳐들어 오란 법은 없다.
수라킨의 눈동자가 불타 올랐다.
“내 신부를 보러 왔다.”
투지를 불태우는 수라킨을 우습다는 듯 내려다보며 야스카산이 말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족장. 그러나 오셨으면 먼저 신의 제단에 적들의 심장을 바치고, 제를 지내고, 옷을 갈아입고 오시지요. 당신에게서 적들의 피 냄새가 납니다. 역겹기 그지없습니다.”
수라킨의 말에 야스카산의 눈동자가 좁게 모였다. 그의 얼굴에는 이것봐라?- 하는 듯한 빛이 서려 있었다.
“이곳은 내 집이다. 내 아내가 있는 집이다. 나는 내 집에 왔을 뿐이다.”
수라킨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내? 내 집?
“여기는 당신의 집이 아닙니다. 여기는 제 오라비 아사신과 제가 사는 집입니다.”
“내가 내려주었다. 네 오라비는 내 아내다. 비켜라.”
야스카산은 수라킨을 세게 밀었다. 나이보다 성숙하고 체격이 좋다고는 하지만 수라킨은 여자였다. 단련된 남자의 아귀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족장의 뒤에서 타스가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자신이 나서서 수라킨을 일으켜세워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는 야스카산은 주저없이 아사신의 방 문 앞에 섰다. 뒤에서 신녀들이 달려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족장. 적어도 신어를 새기게 해주십시요.”
서둘러 달려온 한 명의 신녀가 야스카산의 이마에 신어를 그리려다 얻어맞았다. 신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넘어졌다.
야스카산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신녀들을 둘러 보았다.
“내 신부를 내가 만난다는데 너희들은 왜 방해하는 거냐. 저리 꺼져라. 이번에도 나를 방해했다간 그것이 누구던 간에 목을 분질러주마.”
“족장!”
타스가가 참다 못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지만, 그 뿐이었다. 야스카산의 주변에 타오르는 살기가 그의 말이 진심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산족과 전쟁할 때도 보여주지 않았던 지독한 집념의 살기였다.
야스카산은 발로 문을 차 열었다. 안에는 깜짝 놀란 아사신이 이불을 그러잡고 앉아 있었다.
야스카산은 색욕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웃었다.
 “족장!”
아사신은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으나 다시 튕겨 올라갔다.
 “내려오지 마라.”
“그래도!”
“어차피 다시 올라오게 될 거다. 굳이 내려올 필요가 없다.”
야스카산의 말은 앞으로 벌어질 행위를 암시하고 있었다. 아사신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싫어!”
아사신은 재빨리 몸을 굴렸으나 야스카산이 더 빨랐다. 그는 아사신의 치렁치렁 늘어진 소매자락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내리 눌렀다. 확하고 끼쳐오는 역한 피냄새에 소름이 돋았다.
아사신은 소리를 질렀다.
“무슨 짓입니까 족장!”
“너를 취하러 왔다. 옷을 벗어라 아사신.”
비릿하게 웃으며 말하는 야스카산의 뺨에 아사신은 사정없이 주먹을 날렸다. 퍽- 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야스카산의 얼굴이 돌아갈 만큼의 힘이었다. 여자의 힘과는 처음부터 차이가 있었다.
“발정난 개자식!”
아사신이소리 질렀다.
“그렇게 궁하면 사창가에라도 가버려! 아니 사창가에 갈 필요도 없겠지. 너한테라면 기꺼이 다리를 벌려줄 남자도 여자도 썩을 만큼 많잖아! 그리로 가버려!”
야스카산의 돌아간 얼굴이 천천히 아사신에게로 향했다. 욕망으로 차올랐던 눈빛에는 차갑게 응고된 분노가 서려있었다. 야스카산이 아사신의 손목을 그러잡고 눈 앞까지 끌고 왔다.
 “내가 왜 너를 두고 사창가를 가야 하는지 말해봐라.”
야스카산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 거렸다.
“넌 내 신부야. 언제든 내가 원하면 다리를 벌려야 해.”
“너!”
아사신은 다시 주먹을 날렸으나 가로막혀 버렸다. 가위에 눌린 덕에 체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다. 발길질을 하고 온 몸을 뒤틀어도 야스카산은 놓아주지 않았다.
외려-
 발버둥치는 아사신의 두 손을 머리위로 끌어올리고 그 틈을 타 무방비하게 벌어진 가슴의 옷자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는다. 서슴없이 유두와 가슴살을 한번에 잡아 손바닥 아래서 마음껏 주무른다. 리듬을 타고 움직이는 그 손바닥의 참을 수 없는 감각에 아사신은 울부짖었다.
“제발! 너와 하기 싫어! 놔줘! 남자 따위 너도 관심 없잖아! 놔 달란 말야!”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옷자락을 끌어내렸다. 가슴이, 허리가 드러나고 꼭 다물린 두 다리가 그 사이에 한겹의 속옷만을 남겨둔체 드러났다. 그 역시 야스카산의 거침없는 손길아래 꼭꼭 숨겨두었던 비부를 보이며 힘없이 찢겨나간다.
 그 모습을 보는 야스카산의 눈동자에 다시 욕정이 일렁였다. 아사신은 눈을 크게 흡떴다.
 “그만!”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늘어진 성기를 두 손으로 감싸려 했지만 야스카산이 허락치 않았다. 빠져나가려고 애쓰는 손목을 다시 한번 세게 내리누르며 자신의 다리를 아사신의 다리 사이에 끼워넣었다. 어떻게든 드러난 성기를 가려보려고 애쓰던 아사신의 꼭 다물어진 다리가 명확한 힘 차이에 의해 조금씩 벌어진다.
“하지마. 하지말란 말이야!”
아사신은 수치심을 느꼈다. 이것으로 세번째. 이 남자에게 자신의 맨 몸을 보이는 것이 세번째다. 그러나 도저히 익숙해 질 수 없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하지마아!!!”
“시끄러워!”
야스카산이 아사신의 목줄기에 더운 숨을 내뿜으며 소리 질렀다. 고막 바로 아래서 터지는 외침에 아사신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야수가 소리지르는 것 같다.
“나도 너따위 안고싶지 않으니까 얼른 끝내! 엉덩이를 들어. 넌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받아 들여야 해. 여기로 말이다!”
야스카산의 손가락이 아사신의 엉덩이골 사이로 미끄러져 내렸다. 아사신은 새하얗게 탈색되어갔다. 그의 말이. 그 말들이 지독하게 수치스럽다.
야스카산은 무언가를 찾는 듯 자신의 품을 뒤적 거리더니 사납게 목울대를 울렸다. 무슨 동물같다.
“제길. 밖에 누구 있느냐! 들어와라. 향유를 들고 와라.”
아사신은 창백해졌다. 밖에 수라킨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노를 수치심이 이겼다. 자신과 야스카산이 무슨 짓을 하는지, 그 적나라한 소리를 들려 주기 싫었다.
 아사신은 애원하기 시작했다. 밀어내려고 애쓰던 손을 붙잡아오며 매달렸다.
“밖에 사람들을 물리쳐 주십시요. 제발. 부탁이야. 제발···.”
반말과 존대말을 섞어쓰며 아사신은 호소했다. 그 모습을 흘낏 곁눈으로 바라본 야스카산은 신녀가 고개를 숙이고 조심조심 들어와 향유를 건내자 말했다.
“그럼 오늘 하루 너는 내 뜻대로 하는거다. 더 이상 거부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
“알았어. 알았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이 주변에 두지 마세요. 부탁. 합니다.”
아사신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스카산이 신녀에게 무어라 속삭이자 신녀는 황급히 고개를 수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조금 시끄러웠던 방 밖은 누군가 난동을 피우는가 싶더니 곧 잠잠해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적막이 찾아왔다.
들리는 것은 야스카산과 아사신의 하얗게 질린 호흡소리 뿐.

아사신은 기진맥진하여 늘어졌다. 햇살이 쏟아지는 가운데 반라의 모습으로 침상에 길게 누운 자신과. 그 다리 사이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야스카산의 얼굴은 지나치게 퇴폐적이었다.
색향이 넘실대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야스카산의 얼굴 또한 지나치게 아릅답다.
첫번째 관계에서는 북소리에 달아 올라 아무것도 모른체 그 몸을 받아 들여야 했고, 두 번째 관계에서는 울고 불며 소리지르다 기절해버렸다. 그의 얼굴도. 그 때의 분위기도 전혀 기억 나지 않았다.
아사신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방 안의 공기는 묘했다. 마치 그 동굴의 그 밤처럼. 은은하게 퍼진 공기의 흐름은 몸을 달아오르게 만든다.
“보지··· 마십시오.”
아사신은 몸을 뒤틀었다. 야스카산에 의해 두 손을 머리위로 결박 당하고 맨 살의 가슴과 다리사이를 내보이는 것은 별로 좋지 않았다.

아사신이 그렇게 몸을 뒤트는 사이 야스카산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아사신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 다리 사이가 야스카산의 성기 부분을 마찰 시키고 있다. 스스로는 모르고 하는 행동인 것 같지만 야스카산으로서는 이것이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평소의 저 성격이나 안았을 때의 뻣뻣했던 것을 봐서는 그럴 리 없겠지만···.
 자신의 아래에 깔린 채 온몸을 발갛게 물들이고, 가쁜 숨을 내쉬는 그 육체가···예쁘다고 느껴진다.
남자의 육체에. 그것도 이 비리비리한 육체를··· 안고 싶어 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다.
 바산의 후계자를 죽이고, 시체들을 불태우고, 그들이 살았던 터전을 모두 짓밟아 놓는 와중에도 그를 지배했던 것은 단 하나. 갈증.

어서 이 육체에게 오고 싶다는 생각과 갈증만이 전신을 지배했다.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두 다리를 잡고 위로 치켜 올렸다. 아사신이 목이 졸린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 두 다리와 허리가 공중에 붕 뜨며 야스카산의 얼굴 쪽으로 숨겨진 비부와 성기가 드러났다.
“힉! 무슨짓을!”
아사신이 손을 내려 자신의 다리 사이를 가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야스카산은 눈을 빛내며 그 사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싫어!”
“싫다는 말은 용납하지 않겠다 아사신.”
야스카산은 필사적인 아사신의 말을 잘랐다.
“너는 내 말대로 하겠다고 약속했어.”
아사신은 할 말이 없었다. 두 다리를 마치 기저귀를 채우는 갓난 아기처럼 들어 올리고 불길하고도 음습한 시선을 견뎌내야 했다. 심장이 미친듯이 쿵쾅거리고 비명이 터저나왔다. 야스카산은 한 손을 다리에서 놓고 아사신의 성기를 주물럭 거렸다. 제법 리듬을 타며 부드럽게 만졌으나 한 쪽 다리가 공중에 대롱대롱 들린 불편한 자세의 아사신은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젠장. 왜 서지 않는거야.-
야스카산은 불만스러웠다. 자신이 직접 남자의 성기를 이렇게 애무해 주는데, 아사신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살덩이를 전부 그러잡고 주물럭 거려도 그냥 히익-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낼 뿐이다.
-신부도 남자입니다. 느끼는 부위는 같다, 이 말 입니다.-
문득 야스카산은 타스가의 말을 기억해 냈다.
 -족장도 남자니까 어디를 어떻게 해줘야 느끼는지 알잖습니까.-
야스카산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내렸다. 그는 생각한 것을 실행하는 데는 전혀 망설임이 없는 남자였다.
다음 순간,
아사신은 지금까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크게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야스카산이 아사신의 것을 덥석 문 것이다.
“무슨! 야스카산! 무슨 짓을!!”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죽은 성기를 입 속으로 빨아들였다. 더럽다거나 기분 나쁘다거나 하는 생각따위 조금도 들지 않았다. 타스가의 말에 상처받은 자존심을 오늘은 만회하고 말겠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다시는 아파서 기절시켰다는 말 따위 못하게 해주지.-
야스카산은 오로지 그 일념하에 입을 놀렸다. 가리시네가 자신에게 어떻게 해주었는지를 기억해 내도록 애쓰며 아사신의 것을 애무했다. 살아생전 남자의 것을 자신이 입으로 위로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생각보다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외려 그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비명과 한숨을 짧게 내뱉으며 아사신은 허리를 뒤틀었다.
달아오른 얼굴. 흐트러지고 벌려진 두 다리 사이. 긴장으로 딱딱해진 유두. 아사신은 흥분하고 있었다.
“그마안··· 제발··· 그러지 마십시요. 더러워···.”
허공을 휘젓던 손으로 아사신은 얼굴을 가렸다. 자신의 얼굴이 너무도 부끄럽다는 듯이. 야스카산은 그 모습을 비웃었다. 얼굴을 가리면 뭐하는가. 몸은 완전히 나체가 되어 자신의 몸 아래 이렇게 흐트러져 있는데···.
“느끼는 구나 아사신.”
야스카산은 웃으며 말했다. 아까까지 욕설을 하고 자신의 뺨을 때리던 모습은 간데 없고 이제 처음 격는 쾌락에 어쩔 줄 몰라하는 아사신이 귀여웠다. 붉게 상기된 눈꼬리에 이슬이 맺혀 후드득 떨어졌다.
슬슬 아사신의 성기가 하늘로 치솟는 것을 느낀 야스카산은 향유를 가지고 와 자신의 발기한 것과 아사신의 것에 쏟아 부었다. 자신의 것이 차갑고 미끈한 감각을 반기며 앞으로의 행위에 대한 기대감으로 더욱 크고 굵게 일어섰다.
“아··· 아···.”
아사신은 정신이 없었다. 이런 쾌감은 처음이었다. 스스로를 위로할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저절로 눈이 감기고 혀로 입술을 핥으며 교성을 지르게 된다. 허리가 원초적인 리듬을 타고 흔들렸다.
야스카산은 그 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늘 비틀린 미소나 오만한 냉소만 짓던 얼굴이 부드럽게 완화되며 즐겁게 웃자 무척 아름다웠다. -비록 그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직 이르다 아사신.”
야스카산은 아사신이 화려하게 분출하는 것을 보며 귀엽다는 듯이 말했다. 우유 빛 액체를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흥분하는 모습은 사실 귀여웠다. 이 여린 청년을 흥분 시켜 사정하게 만든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도 무척 마음에 들였다.
 “이젠 내가 즐길 차례지?”
타스가에게 들었던. 남자도 느낄 수 있는 부위가 있다는 그 곳. 야스카산은 그곳을 찾기로 결심했다.
 축 늘어진 아사신의 허리를 잡아 돌렸다. 기운 없이 미끄러지는 육체를 억지로 무릎 꿇렸다. 흰 엉덩이 사이로 자신을 받아들였던 그 곳이 나타났다. 손에 날을 세워 비스듬히 엉덩이의 골 사이를 애무했다. 정액과 향유가 뒤섞인 액체가 느릿하게 타고 흘렀다.
 “응··· 싫어.”
반쯤 넋이 나간 상황에서도 아사신은 야스카산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눈치 챈 모양이었다. 뒤로 손을 돌려 자신의 손길을 막아보려 한다. 그 미미한 저항에 야스카산은 웃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가운데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었다.
“흐억!”
아사신의 육체가 튕겨 올랐다.무릎이 무너져 완전히 바닥에 엎어졌다. 고개를 뒤로 돌려 흐릿한 눈으로 야스카산을 쳐다보았다.
 다시 다물어지려는 다리를 거칠게 옆으로 벌리며 야스카산은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두 개의 손가락은 뜨뜻하게 감싸오는 내부에 기뻐하며 거칠게 유영한다.
 “싫어. 아파···!”
아사신의 눈꼬리에 눈물이 흘러넘쳤다. 뒤로 손을 돌려 아무리 막아보려 해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야스카산은 긴 팔을 올려 아사신의 평평한 가슴을 더듬었다. 마른 가슴팍에 달린 두 개의 유두를 손톱으로 긁으며 자극했다. 아사신이 비명을 질렀다.
-어디지? 어디 있다는 거야. 대체!-
야스카산은 손가락을 더 열심히 움직였다. 가운데 손가락은 위쪽을, 두 번째 손가락은 아래쪽을 더듬었다. 조금씩 빙빙 돌리며 타스가가 말한 부위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분명히 있을거다. 있어야 한다.
“하···.”
아사신은 손가락의 이물질에 기분이 나빠지면서도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두툼하고 긴 갈색의 손가락들이 엉덩이 사이에 꽂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은 정말 싫은 감각이었지만···.
무언가 달랐다.
지난 두 번의 성교와는 무언가가 틀렸다.
특히 그 손가락들이 어느 한 지점을 지날 때면··· 허리가 튕겨 오르는 것을 참느라 혼이 났다.
-안돼. 들켰다간··· 남자의 손가락을 엉덩이에 넣은 채 흥분이라도 했다간···.-
그것은 참을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지켜온 마지막 어떤 것이 무너져 버릴 거다. 그런 일만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야스카산은 집요했다.
참는 것도 한 두 번이었다. 어느 두툼한 부위를 지날 때면 허리가 들뜨고, 약한 비명소리가 나오는 것을 야스카산이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눈치가 빠른 인간이었다.
-여기군.-
야스카산은 웃었다. 집중적으로 그 부위를 공격하자 아사신은 앞으로 기어 도망가는 형상을 취했다. 늘어진 손을 앞으로 올리고 무릎걸음으로 도망가려 했다.
-그렇겐 안되지. 나는 아직 즐기지 못했어.-
혀로 입술을 축이며 야스카산은 이 불쌍한 청년의 반항에 입술을 뒤틀고 웃어보였다. 그 반항이 지독하게 귀여웠다.
따뜻하고 축축한 내부. 엉덩이의 살 속에 파묻히자 강하게 죄어오는 내부의 감각을 원했다. 도망가는 허리를 잡고 다시 한번 앞으로 돌렸다. 역시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사신은 울고 있었다. 눈물과 침에 젖어 붉게 빛나는 얇은 입술을 한입 가득 물고,
안으로 천천히 자신의 물건을 집어넣었다.
 손으로 물건의 끝을 잡고 딱 넣기 좋게 벌어진 구멍 사이로 집어넣었다.
“으윽. 큭!”
아사신은 눈을 감고 완전히 뒤로 늘어졌다. 허벅지를 잡고 들어올려 결합을 깊숙하게 하자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참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분명 아까 손가락으로는 느꼈으면서 크고 건장한 야스카산의 것을 받아들이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야스카산은 허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아사신의 엉덩이 사이로 자신의 것을 모두 집어넣고, 색이 다른 음모와 음모가 휘감기고, 사타구니 사이가 꼭 붙은 그 모습에 지독하게 흥분해 버렸다. 향유에 젖은 음모는 보기만 해도 야한 기분이 들게 했다.
“좋다. 너의 안은··· 최고다 아사신.”
밭은 숨을 내쉬는 입가에서 야스카산이 중얼거리자 아사신은 입술을 일그러트리고 울기 시작했다. 혀를 내밀어 입술과 혀를 싹싹 핥았다. 아사신은 그 감촉이 마치 개와 같다고 느꼈다. 실제로 정성껏 뺨과 입술을 핥아대는 야스카산의 모습은 아사신의 생각과 별반 다를바가 없었다.
 “허억. 헉!”
아사신의 가슴에 자신의 가슴을 딱 붙이고, 음란하게 유두를 비비고 입술을 핥는다. 한번의 사정 후에 죽어있던 아사신의 성기 끝에서 맑은 액체가 다시 분비되고 조금씩 힘을 얻어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 감촉을 맞닿아있는 배로 느끼며 야스카산은 허리를 힘차게 찔러 올렸다.
“크억!”
전혀 색스럽지 못한 신음과 비명이 뒤섞은 소리를 내뱉으며 아사신이 자지러졌다. 허공에 버려진 두 손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휘적거리다 야스카산의 등에 내려앉았다. 야스카산은 그 느낌이 진심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꼭 껴안긴 마른 육체. 물기에 젖어 반짝이는 눈동자. 온통 핥아놓아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술과 턱. 그 모든 것이 좋았다. 이 육체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미친 듯이 즐거웠다.
푹- 하고 살이 파묻히는 소리.
찌걱- 하고 향유를 들이부은 성기가 항문 속에서 마찰되는 소리.
 그 음란하고 음란한 모든 소리가 야스카산을 과도하게 흥분 시키고 있었다.
“아윽!”
자신의 등에 손을 두르고 있던 아사신의 손이 갑자기 강해졌다. 그저 갈 곳이 없어 얹혀 있을 뿐이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헉. 하윽!”
야스카산은 길게 성기를 빼내었다. 푸륵- 하는 민망한 소리와 함께 그것이 빠져나가자 내부의 살이 움찔거리며 긴장을 푼다. 그리고 빠져나가는 속도에 반비례하는 빠른 진입. 진입. 진입.
아사신이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짧은 손톱이 야스카산의 등을 파고 들었다. 퍽퍽 박아오는 야스카산의 성기에 힘없이 흔들리기만 했던 때와는 다르다. 분명히 그 리듬에 동참하고 있었다. 허리가 흔들리며 박아오는 남자의 것을 깊숙히 안으로 인도했다.
-느끼는 건가?-
야스카산은 희열을 느꼈다. 아사신은 자신의 아래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느끼는 거군!-
그렇게 인지한 순간, 쾌감은 배가 되었다.
“헉! 무···무슨! 아!”
아사신은 당황했다.
이 남자와의 관계에서 쾌감을 느낄 거라곤 한 순간도 생각해 본 적 없다. 그것은 아픔과 고통과 인고의 시간일 뿐이었다.
 그런데,
결합된 부분에서부터 시작된 야릇한 감각.
봄날의 한가로운 낮잠처럼, 새벽과 아침의 경계처럼 서서히 찾아온 감각의 향연.
그것을 인지한 순간 아사신은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점점 더 빨라지고 가팔라지는 야스카산의 성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몸에 힘을 주고 저항하였다. 자신의 내부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그것을 막고 싶었다.
“뭐 하는 거냐.”
야스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사신이 힘을 주자 성기를 단단하게 조이는 힘은 강해져, 기분은 좋았지만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좀 전까지 나긋나긋하게 팔 안에서 울고 있을 때와는 느낌이 틀렸다.
 “뭐하는 거냐 아사신.”
야스카산은 팔꿈치로 기어서 도망가려는 아사신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아사신은 안간힘을 다해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덕분에 깊이 삽입되어 있던 자신의 성기가 밖으로 빠져 나왔다. 축축한 살이 한껏 조이며 뒤로 빠지는 감각은 무척 좋았지만 이 상황을 환영하고 싶지는 않았다. 완전히 공기 중에 드러난 검붉은 성기가 혈관을 꿈틀거리며 다시 그 좁고 축축한 곳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화를 냈다.
야스카산은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열심히 도망치는 아사신의 발목을 붙잡고 세게 끌어당겼다.
 “으악!”
다리가 끌려오고 허리가 붕 뜨자 아사신은 깜짝 놀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야스카산의 무릎에 앉은 형상이 되어 버렸다. 야스카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사신의 입술과 턱을 한꺼번에 깨물었다.
“허리를 움직여라 아사신.”
야스카산의 말에 안 그래도 붉게 달아오른 아사신의 얼굴이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만큼 빨갛게 변했다.
“네 스스로 움직여봐라. 너는 오늘 내 말을 듣겠다고 했다.”
“···아.”
아사신은 야스카산의 건장한 가슴팍에 갇힌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게 물들인 모습에 야스카산은 진심으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움직여··· 아사신.”
야스카산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것마저 자극이 되어 돌아온다.
아사신은 최면에 걸린 것 같았다. 엉덩이 입구에 와닿는 남자의 크고 굵은 성기가 꿈틀대며 비벼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내부에 있었던 그것이었다. 머뭇머뭇 허리를 내리자 야스카산의 물건이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야스카산이 이를 드러내며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으르렁 거렸다. 꿈틀대며 구멍이 벌어지고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자신의 성기가 축축하고 좁은 내벽을 환영하며 눈물을 흘렸다.
“······아!”
아사신의 허리가 뒤로 확 재껴졌다. 그 긴장한 신체를 야스카산이 받쳐들며 허리를 들어 결합을 깊숙하게 했다. 혈관이 툭툭 튀어나온 성난 그것이 작고 여린 구멍안으로 계속 드나드는 모습은 보기 불쌍할 정도였다.
아사신은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가 당황스러웠다. 위에 올라타 남자의 성기를 엉덩이 담은 채 미처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한지 야스카산이 허리를 잡고 내리 눌렀다가 다시 들어올렸다. 그 때마다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 감각. 그 감각들!
아사신은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성기가 꼿꼿하게 일어선다. 이 감각은 싫다. 원하지 않는다. 비벼질때마다, 밀고 올라올 때마다 내벽의 주름이 긴장하고 기뻐하며 야스카산을 쥐어짠다. 이런 자신의 모습따위 원하지 않는다. 수치스럽다.
아사신의 유두가 깨물려 살갗이 벗겨졌다. 아사신은 길게 울었다. 비명인지 교성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도저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는 아사신을 보다 못한 야스카산이 다시 그 위로 엎어졌다. 허벅지를 팔뚝에 끼우고 힘차게 박아넣었다. 그 속도와 힘을 이기지 못한 아사신의 상반신이 위로 죽죽 밀려올라갔다.
“하윽!”
“크으-!”
높게 낮게 서로의 신음소리가 교차한다. 비벼지는 감촉에 신음이 터지고, 서로의 호흡이 한데 섞이며 타액이 교환된다.
 아사신은 야스카산의 등에 꼭 매달린채 처음으로 느끼는 쾌락에 빠져 허우적 거렸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내려진 단 하나의 구원처럼 야스카산의 등을 필사적으로 잡아 끌었다.
 야스카산은 손을 아래로 내려 자신이 출입하는 아사신의 항문 입구를 더듬었다. 과도한 움직임에 부풀어 올라 붉게 충혈 된 그곳은 손가락의 자극에 꿈틀하고 크게 움직였다. 그 바람에 조이는 강도가 한층 더 심해져서 야스카산은 신음성을 흘렸다. 좋았다. 너무 좋았다.
“만지지··· 마.”
“싫어.”
“만지지 말···라니까!”
하고 아사신이 정신없이 외쳤으나 야스카산은 계속 그 주변을 지분거렸다.
 푹- 하고 자신의 남근이 잠겨들때마다 향유가 구멍 밖으로 흘러 나왔다. 세게 짓누르면 허리까지 들썩이며 꽉꽉 조여오는 그 움직임이 사랑스러웠다.
야스카산의 손이 아사신의 등으로 들어갔다. 꼬옥 껴안자 땀에 젖은 촉촉한 피부가 자신의 가슴에 찰싹 들러붙어왔다. 유두와 유두가 지분거려지고, 배와 성기가 맞닿았다.
“아흑!!”
갑자기 아사신의 허리가 획 젖혀졌다. 야스카산은 그 격렬한 반응에 놀라서 조금 상체를 들었다.
 아사신은 심하게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비틀고 두 다리로 이불을 해집고 있었다.
 왜 그러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등을 쓰다듬던 야스카산은 문득 손 끝에 걸리는 작은 털뭉치를 느낄 수 있었다.
-뭐지 이건?-
약간 긴 머리카락의 끝자락이 닫는 부분. 견갑골의 끝부분에 걸리는 작은 털뭉치. 그것을 손가락으로 비틀었다.

 그러자,

“히악!”
야스카산은 흠칫 놀랐다.
 두 다리가 공중으로 치솟고, 자지러지는 달콤한 신음소리가 울러퍼진다. 엉덩이의 근육이 일순간 긴장하며 그 속에 담긴 것을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죄었다.
-이건 혹시···.-
“아···아···.”
아사신은당황하여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야스카산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지더니 또 한 번 그것을 비틀었다.
“그만! 허억!”
교성.
 그야말로 달콤한 교성이었다. 아사신이 당황하며 자신의 입을 막았으나 야스카산은 용서하지 않았다. 입을 틀어막은 손을 치우고, 그 붉은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달콤한 교성을 즐겼다. 드나드는 출구에서 쿨쩍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아사신의 성기가 힘차게 발기한다.
“아··· 아··· 아아!”
날개를 비틀자 신음소리는 한층 더 과격해진다. 엉덩이가 움찔거리고 허리가 뒤틀리고 온 세포가 긴장한다. 지독하다. 너무도 지독하다.
-이게 그 날개였군.-
예전에도 벗은 몸을 보았지만 머리카락에 가려서 보이지도 않았었다. 그 만큼 작고 볼품없는 날개였다. 아버지 바르바칸이 아사신의 등에 날개가 있다고 말해주어서 알고 있었지만, 기억도 못할 만큼 초라한 날개였다.
그러나 그 날개는 성감대였다.
 이렇게 자신의 몸 아래서 쾌감을 느끼며 몸부림치는 아사신의 모습. 정신없이 고개를 가로젓는 얼굴을 고정시키고 깊숙히 혀를 섞었다. 위로 치솟아 오른 성기를 한 손에 그러쥐고 손바닥 전체로 문지르자 어린 강아지처럼 끙끙대는 소리를 냈다.
“아윽!”
야스카산의 직접적인 손짓에 아사신의 성기가 두 번째 분출을 했다. 이미 한 번 쥐어짜인 성기에서 느릿한 액체가 튀어 오르고 인상이 찡그러졌다. 야스카산은 앞으로 깊이 집어넣는 동작을 했다. 정확하게 선단의 돌출된 부분이 아사신의 전립선을 마찰해왔다. 아사신은 입을 벌리고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사람의 인체란 너무 느끼면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곧 아사신의 성기가 하얀 액체를 뿜어냈다. 고개를 뒤로 꺽으며 절정으로 치닫는 움직임에 야스카산도 때를 같이 하여 자신의 성기를 깊숙히 밀어넣었다.
보잘것 없는 날개의 깃을 하나씩 어루만지며 어깨를 물었다. 조금 세게 물어 버렸는지 아사신이 윽- 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울컥- 하고 속에서 정액이 분출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야스카산은 마지막으로 세게 두어번 더 구멍을 찔러넣었다. 그리고 아사신의 가슴에 엎어져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쯤 기절한 듯한 아사신이 손이 야스카산의 등에서 주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가득했다.
 야스카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빠져나간 뒤의 모습이 궁금 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주륵- 하고 성기가 향유와 마찰되며 빠져나가자 아사신이 부르르 떨었다. 그것마저 자극이 되어 돌아온다.
머뭇머뭇 구멍에서 빠져 나온 성기는 아직 뻣뻣한 강도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 굵고 긴 것이 한참을 빠져나가자 구멍에서 흰 액체가 줄줄 새어 나왔다. 구멍은 아직도 개폐운동을 하고 있었고, 엉덩이의 회음부를 따라 길게 정액이 떨어져내렸다.
붉게 충혈되어 정액으로 범벅이 된 남성의 뒷구멍이 이렇게 자극적일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야스카산이었다.
 한숨을 쉬며 벗은 어깨와 정액에 얼룩진 밋밋한 배를 어루만지던 야스카산은 벌떡 일어나 시트로 아사신의 몸을 닦아 주었다. 타스가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던 아사신의 치료를 해 주었다는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꼼꼼히- 느릿한 액체를 뱉어내는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자극이 되지 않도록 살살 돌렸다. 처음 해보는 타인의 뒷처리에 낯선 기분이 들었다. 남자든 여자든 자신과 잠자리를 함께 했던 사람들이 아프다고 울부짖거나, 지쳐 잠들어도 다시 깨워서 해대던 예전의 모습과 너무도 틀려졌다고 스스로도 생각하는 야스카산이었다.
아사신의 퉁퉁 부은 눈가에 또 다시 이슬이 맺혀 흘렀다. 야스카산은 그 눈물 조각을 살짝 상체를 기울여 혀로 받아먹었다.
방울방울 떨어져내리는 눈물은 전부 야스카산의 혀에 닿아 짭조름한 여운을 남기고 부서줘내렸다.
“왜 우는 거냐. 울지 마라.”
야스카산이 조금 다급한 심정으로 말했다. 심장이 우릿하게 아팠다.
“울지 마라 아사신. 울지 마라.”
어느새 찾아온 저녁노을이 휘장처럼 늘어지며 침대를 덮었다. 야스카산의 다정하고 서툰 위로의 음성은 그 밤이 끝날 때까지 그치지 않고 들려왔다. 아사신의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말이다···.




*                *                *




아사신은 또 다시 방 안에 틀어 박혔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사린이나 수라킨이 걱정 할 필요 없이 몇 일 만에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끌려 나와야만 했다.

“이게 다 뭐야?”
수라킨이 질린 어조로 말했다. 타스가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게··· 족장이 내리신 거야.”
“이걸 전부 말이에요?”
소사린 역시 질린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호화로운 백호 모피를 쓸어내리다 그 가격을 상상했는지 부르르 떨렸다. 누가 뭐래도 상인의 딸이었다. 이 호랑이 모피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금 귀걸이에 호박 팔찌··· 이건 뭐야. 돈 아냐? 돈은 이미 창고에 그득한데 왜 또 주는 거야! 둘 데 없다고.”
“거기다 산호, 진주에 옥 팔찌. 금박 입힌 비단들. 발찌도 있네. 이것 봐 수라킨. 종도 달렸어.”
소사린의 고운 손가락이 살짝 흔드는 것 만으로도 발찌는 치르르르르- 하고 떨리며 진동을 했다. 팔시아 대륙에서 내궁의 여인들에게 채운다는 발찌를 어디서 구했는지 수라킨은 신기했다.
“이건 도대체 다 무엇이지?”
아사신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족장의 전사들이 다짜고짜 문을 부수고 들어와 질질 끌려 나온 지 반나절만의 일이었다.
“뭐긴 뭐겠어. 갑자기 호강시켜 주려나 봐. 호강을 시키던 말든 다 좋으니까 집은 그만 좀 부수라고 진짜. 문짝 못 부숴서 환장한 귀신이 붙었나. 하나같이 보내는 사람들이 다 왜 저래? 어우 또 고쳐야 하잖아!”
수라킨의 빈정거리는 말에 옆에 앉아있던 애꿎은 타스가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내가 부순 거 아니다.”
“누가 뭐랬어?”
수라킨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자 타스가는 기가 죽어 가만히 쭈그리고 있다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잠깐! 왜 자꾸 나한테 반말해? 엉? 누가 하랬어? 누가 하랬냐고!”
“자꾸 쪼잔하게 굴거야?”
“지금 안쪼잔하게 굴게 생겼··· 이 아니라, 이게 쪼잔한거야? 너랑 나랑 나이 차이가 대체 몇 살인데 쪼잔하다니! 쪼잔하다니!”
“성질머리 하고는···. 누가 시집가 줄지 참 불쌍하다. 어우 시끄러워 저리 좀 가봐.”
“수라킨!!”
두 사람이 아웅다웅 하는 사이 아사신은 귀를 막고 인상을 찡그리다 자신의 앞에 놓인 발찌를 들어 올렸다. 이름도 모를 보석이 잔뜩 붙어있는 금 발찌였다. 수라킨의 말대로 작은 방울이 달려있어 흔들자 치르르 떨며 고운 소리를 냈다.
아사신은 인상을 구겼다.
“이걸··· 나보고 차라고?”
“그렇습니다 신부.”
족장의 전사가 얼른 대답했다.
“그러니까···직접 이것들을 내게 하사 했단 말이지요?”
“네. 신부. 얼마나 좋으세요. 지금 족장의 첫아이를 임신하신 부인 가리시네도 이렇게 아름다운 물건들은 받아보지 못했답니다.”
옆에서 전사의 말을 거들며 신녀가 목걸이며 팔찌며 야스카산이 내린 금은보화를 내밀어 보였다. 신녀의 손 안에서 무기질의 보석들이 차갑게 번쩍거렸다.
 “······예쁘구나 아사신.”
소사린이 옆에서 물끄러미 보석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소사린···.”
“족장이 정말···네게 푹 빠지셨나 봐. 이런 고운 물건들도 내려 주시고······.”
그렇게 말하는 소사린의 얼굴이 바싹 말라보여 아사신은 걱정이 되었다.
“원한다면 가져가. 난 하나도 필요 없어.”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소사린은 입술을 깨물며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어 보였다. 구불구불한 긴 머리카락이 함께 흔들렸다. 그 긴 머리 속에 파묻힌 소사린의 얼굴은 지독하게 외롭고 고독해보였다.
“···소사린.”
“내가 원하는 건 그런게 아닌 거···너도 알잖아.”
-내가 원하는 건 너야.-
아사신은 침묵했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말 한마디가 가슴 한 구석에 와서 박혔다. 어째서 눈치 채지 못했을까. 족장과 잠자리를 함께 한 다음날 늘 달려와 주던 소사린의 마음이 가장 아팠을 터인데. 바보같이 자신만 상처 받은 것처럼, 자신만 괴로운 것처럼 방에 들어가서 꽁꽁 숨어버린 채 그녀의 상처에는 신경 쓰지 못했다.
제일 가슴 아팠을 사람은 소사린일 텐데. 족장과 한 침대에 누웠을 때, 누구보다 말리고 싶었을 사람은 그녀였을 텐데······.
아사신은 말없이 소사린의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빛나는 보석들의 한 가운데 앉아 엷게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은 상처 받은 여인의 얼굴을 한 어린아이 같았다.
 촉촉하게 젖어버린 눈동자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누르자 물기가 배어 나왔다. 그 손가락으로 말라붙은 입술을 덧그리자 조용히 눈을 감는다. 긴 속눈썹에 맺힌 이슬 조각이,
너무도 애달팠다.

야스카산은 아사신이 소사린의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보낸 선물을 받고 지금쯤 감동에 겨워하고 있을 아사신을 찾아왔건만 오자마자 보이는 꼴이 예전 약혼녀랑 놀아나는 작태라니!
 짜증이 일었다. 세게 팔을 잡고 뒤로 확 잡아끌었다.
“뭐 하는 거지?”
아사신은 경직되었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거기에는 잔뜩 인상을 쓴 야스카산이 서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이 사이로 내뱉듯이 말하는 야스카산에게 아사신이 급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정말 지긋지긋했다. 왜 꼭 이럴 때만 뒤에서 나타나는 걸까.
“오랜만이군요.”
“이틀 전에 보았지.”
야스카산은 침대에서- 라는 말은 생략했다.
“못 일어날 정도로 몸이 안 좋다더니 이 짓거리를 하는 걸 보니 다 나은 모양이군.”
“무슨 짓. 말입니까?”
“감히 남편을 두고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이런 짓 말이다!”
야스카산은 잡힌 손목을 더 세게 끌어당겼다. 소사린의 앞에 서 있던 아사신이 엎어질 듯 끌려와 야스카산의 가슴에 처박혔다. 아사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놓아주십시오!”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더 꽉 껴 안겨 완전히 야스카산의 가슴에 밀착하게 되어 버렸다.
아사신은 이를 갈았다. 진심으로 수치스러웠다. 소사린의 앞에서 이런 모습.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쿵쿵 소리가 날 만큼 가슴을 세게 치고 발길질을 했지만 야스카산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런 젠장. 놓으란 말야!”
급기야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내뱉고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 헉헉대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아사신이 한 발 자국 뒤로 물러섰다. 사람들이 모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족장에게 욕을 했어.-
-신부가.-
-신부가 욕을 하다니.-
아사신은 사람들이 수근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상황이 너무도 싫었다. 이틀 만에 다시 나타나 이런 걸레 같은 것들을 선물이랍시고 안겨주는 야스카산이 그 중에서도 제일 싫었다.
“이런 옷이나··· 장신구들은 대체 왜 내리신 겁니까?”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사신이 말했다.
“이런 건··· 가리시네에게나 주십시오. 난 필요 없습니다.”
뒤에서 백호 모피를 쓰다듬고 있던 수라킨이 움찔했다. 야스카산이 인상을 썼다.
“이런 것들이 좋지 않은가?”
“좋아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사신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울컥울컥 치미는 짜증을 마음 놓고 분출하지 못하고 있자니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심호흡을 하며
 “이런 건 여자들이나 좋아하는 겁니다. 상식적으로 남자인 제가 팔찌나 발찌를 받고 좋아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야스카산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남자고 여자고 이런 값비싼 보석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실례로 예전에 안았던 사내에게 금괴를 던져주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것을 혀로 봉사해 주었었다.
 아사신에게도 그만큼 바란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앞으로의 잠자리 생활의 개선을 기대했다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무엇을 줄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말을 해라.”
야스카산의 오만한 말에 아사신은 화가 났다. 대체 누구를 지금 정부취급 하는 건가.
“당신이 주는 것 따위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이 것들을 가지고 전부 제 집에서 나가 주십시오!”
“전부?”
“네, 전부!”
“···나가라고?”
“네, 나가주십시오.”
“······.”
아사신이 문을 가리키며 축객령을 내뱉자 야스카산의 주변에 검은 살기가 뭉실뭉실 솟아올랐다. 타스가가 흠칫 놀라 한 발자국 다가가다 소사린에게 저지당했다. 소사린의 크고 아름다운 눈동자도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었지만 현명한 그녀는 이 상황에서 끼어들었다간 상황이 더 악화 될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사신은 식은 땀을 흘리며 야스카산의 앞에 버티고 섰다. 왠지 이 남자가 자신을 해치지는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한 행동이었다. 왠지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래, 죽이려면 이미 예전에 죽였겠지.-
라고 생각하며 당당하게 허리를 펴려고 노력했다.
 눈을 똑바로 뜨고 고개를 곧추 세우고, 시선을 마주했다. 야스카산의 새파란 눈동자와 아사신의 회색 눈동자가 만나 공중에서 불꽃을 피워 올렸다. 시시각각 상태가 안 좋아지는 야스카산의 얼굴에 타스가와 수라킨, 소사린은 바싹 긴장한 채 얼어 붙어 있었다. 전사들과 신녀들 역시 신부인 아사신의 돌출 행동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당황해 했다.
그때,
“이런 이런, 지금 뭐하는 거지요?”
힐레멘이 빙글빙글 웃으며 들어왔다.
 “우와, 이게 다 뭐래요? 보물 천지 잖아요. 나만 빼놓고 여기 다들 모여서 뭐 하는 거지요? 아! 오랜만이에요 아사신. 몸이 아프다더니 지금은 좋아졌나요?”
아무런 꺼리낌 없이 들어와 아사신과 야스카산의 사이에 끼어드는 힐레멘이었다. 소사린이 긴장이 풀렸는지 의자에 풀썩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힐레멘.”
아사신이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긴장이 풀려 버렸다.
“힐레멘.”
야스카산도 힐레멘의 이름을 불렀다. 힐레멘은 척척 걸어가 야스카산에게서 아사신을 데리고 옆으로 비켜섰다.
“왜 왔지?”
“에- 볼 일이 있어서요.”
“여기서 말이냐?”
“네 족장. 여기서 아사신의 일을 도와주기로 했었어요. 그렇죠 아사신?”
아사신은 당황했다.
“에?”
“에이. 생각해봐요. 아사신이 돌보는 그 집 앞의 정원 말이에요. 그거 제가 도와드리기로 했잖아요.”
“에?”
“봐요. 나 예쁜 겨울 눈꽃 모종을 얻어왔어요. 밖에 놔뒀는데 같이 보러 갈래요?”
“겨울 눈꽃 모종?”
아사신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안 그래도 가지고 싶었던 꽃이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구할 수가 없어서 포기했던 모종이었다. 녹음이 푸르른 계절에는 얌전히 봉오리만 틀고 절대 그 아름다운 꽃잎을 보여주지 않다가 겨울 날 첫눈이 올 즈음 해서야 투명한 흰 꽃을 피워올린다는 귀한 꽃이었다. 그 귀한 것을 구해왔다는데 호기심이 동할 수 밖에 없었다.
아사신이 흥미로워 한다는 것을 알아 챈 힐레멘이 미소를 지으며 살짝 잡아 당기려는 순간, 야스카산이 그 손을 낚아챘다.
“어딜 간다는 거냐?”
낮게 으르렁 거린다.
아사신은 다시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잡힌 손을 뿌리치며 뾰족하게 소리쳤다.
“제 집 마당에 나갑니다. 저는 설마 그것도 못한다는 겁니까?”
“여기 있어라!”
“싫습니다!”
그렇게 소리치고 나가버리는 힐레멘과 아사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야스카산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우와, 이거 정말··· 어디서 구한 거에요?”
아사신은 함성을 질렀다.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한답니다 아사신. 정말 어려웠다는 점만 알아주세요.”
“우와, 우와아.”
차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지 함성을 지르며 눈 꽃 모종에게 다가가는 아사신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힐레멘이었다.
 다음 순간 차가운 손이 다가와 목을 졸라와도 그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뭘 바라는 거냐 힐레멘?”
“말했잖습니까, 그냥 꽃을 구해드린 것뿐이에요.”
야스카산은 으르렁 거렸다.
“저런 풀 쪼가리. 원한다면 얼마든지 나도 구해줄 수 있다.”
“저런 저런. 그런 방법으로는 백날 가도 아사신의 마음을 얻지 못합니다. 족장.”
힐레멘이 손가락을 흔들며 하는 말에 야스카산은 몸을 흠칫 경직 시켰다.
“나는 남자의 마음 따위엔 관심이 없다.”
 “거짓말.”
힐레멘이 작게 중얼거린 소리에 야스카산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뭐라고 그랬지?”
“아! 들으셨나요? 거.짓.말 이라고 했습니다.”
“거짓이 아니다.”
“그럼 저 안에 가득 쌓여있는 선물들은 다 뭔가요? 돈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남아돌아서 아무한테나 휘딱 던져준 건가요? 그러면 저한테도 좀 줘봐요. 나 저런 거 진짜 좋아해요. 반짝거리는 것에 약한 건 여자만이 아니랍니다.”
야스카산은 기분 나쁜 얼굴로 대꾸했다.
“돈이 남아 돈다고 해도 너한테 줄 건 없다.”
“그럼 아사신한테는요?”
힐레멘이 얼굴을 돌렸다. 그 얼굴에는 늘상 떠올라 있던 미소가 싹 가셔 있었다.
 “아사신에게는 왜 저런 것들을 내린 거지요?”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솔직하지 못하십니다.”
도를 지나친 힐레멘의 말에 야스카산이 힐레멘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그리고 멱살을 잡고 끌고 와 늦게 위협했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그 가벼운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지 마라. 네 세치 혀가 네 목을 조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야스카산은 사납게 힐레멘을 뿌리치고 저벅저벅 걸어가 버렸다. 뒤에서 엉거주춤 서 있던 전사와 신녀들이 당황해 하며 그 뒤를 따랐다.
힐레멘은 피가 흐르는 입술을 서둘러 닦았다. 입을 벌리자 주륵- 하고 피가 쏟아졌다. 멀리서 아사신이 야스카산이 갑자기 화가 나 가버린 이유를 모르고 멍하니 서 있었다.




타스가는 무척 마음이 불편했다.
 수라킨은 몹시 신경질 적으로 변했고, 아사신은 쌀쌀 맞기 그지없었으며, 종종 들리는 소사린은 침울했다.
타스가는 도저히 족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찾아와서 온갖 진귀한 보물들을 가득 창고에 쌓아주고 가더니 오늘은 시녀를 내린답시고 어린 여자 애 둘을 데려와 던져주었다. 수라킨이 냉정하게 쫓아내자 불쌍한 여자아이들은 울면서 이대로 돌아가면 혼날 거라고 매달렸다. 수라킨의 신경질에 하는 수 없이 타스가가 그들을 다시 궁에 돌려보내 주어야만 했다.
거기다 족장의 변화는 대체 무슨 방향으로 받아 들어야 할지 모르는 타스가였다.
“또 왔네. 또 왔어.”
수라킨이 창밖을 내다보며 혀를 찼다.
타스가도 깊게 한 숨을 쉬며 밖을 내다보았다. 거기에는 야스카산이 아사신의 앞에서 얼쩡대며 -정말로 얼쩡댄다. 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아사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보검이다.”
이건 대체 어디다 쓰는 물건이냐는 얼굴로 빤히 바라보는 아사신에게 야스카산이 오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건······ 대체 왜 여기 있냐는 겁니다.”
“네게 주겠다. 받아라.”
아사신의 얼굴은 상당히 기묘하게 변했다.
“이걸 준다고요?”
“그렇다. 바산이 가지고 있던 보검이다. 네게 줄 테니 받아라.”
야스카산의 말에 아사신은 탁 소리가 나도록 야스카산의 손을 후려갈겼다.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제게 이것을 주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뭐?”
“제게 이것을 주는 저의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족장!”
아사신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제가 여자로 보이십니까? 금은보화를 내리고 내궁의 여자들이나 차는 발찌를 던져주면 제가 좋아할 줄 알았습니까? 그런데 이젠 쓰지도 못할 검을 내리며 전사가 되지 못한 저를 조롱하시는군요. 대체 당신의 저의가 무엇입니까!”
나는 당신의 여자 같은 게 아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따위, 알고 싶지 않다.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됐습니다! 이제 아무래도 좋습니다.”
아사신은 소리를 지르고 눈가를 아이처럼 문지르며 야스카산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뒤에 남은 야스카산은 화가 난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고 뒤 돌아서서 빠르게 걸어갔다.
“대체 몇 번째야?”
타스가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어보더니 네 개의 손가락을 펴보였다.
“보석을 보내고, 시녀를 보내고, 얼마 전엔 겨울 눈 꽃의 천적인 매미꽃을 가져왔었고··· 오늘은 검을 가져왔군.”
수라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아무 진전이 없는 두 남자를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속이 터질 만큼 답답했다.
 “아 정말 그만 좀 오란 말야. 바쁘지도 않나. 어딜 또 정벌하러 간다고 그러지 않았어?”
“그러게나 말이다···.”
타스가도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스카산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
안 그래도 음산한 사람이 인적이 드문 곳에 슬그머니 서서 아사신이 종종 걸음으로 집과 마당을 다니는 것을 한참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시퍼런 눈동자를 희번뜩 거리며 아사신의 행적을 꿈쩍도 않고 쳐다보다가 어느 순간 튀어나와서는 선물이랍시고 무언가를 잔뜩 안겨 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사신의 반응은 차마 옆에서 지켜보기가 민망 할 정도로 냉정해서 타스가는 저도 모르게 족장이 아사신을 한 대 후려 갈기지나 않는지 걱정해야 했던 것이다. 전장에서 적에게 등을 보인 채 급습 당했을 때 보다 더 박진감 넘치는 생활이었다.
야스카산이 찾아오면 아사신은 소리 지르고, 화를 내고, 발을 굴리며 삿대질을 하더니 오늘은 울어버리기 까지 했다.
 -저 두 사람이 다정한 부부가 되기를 바라는 건 영영 불가능한 걸지도 몰라. 아니, 그 전에 이젠 족장도 포기하고 안 찾아 올지도 몰라.-
타스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엇갈려 멀어지는 두 사람의 거리만큼 넓고 긴 고랑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 했다.

“이젠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다음날 아침 타스가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야스카산이 언제나처럼 서 있는 것을 발견한 타스가는 혀를 내둘렀다. 그는 큰 나무 뒤에 반쯤 몸을 묻고 눈을 번뜩이며 아사신을 훔쳐보고 있었다. 타스가는 자신의 주인이 생각보다 훨씬 끈질긴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잠자코 지켜보고 있으려니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를 일으키는 아사신의 옆에 바싹 붙는다.
“할 말이 있다 아사신.”
“듣기 싫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선물을 갖다 바치며 회유하는 방법은 포기한 것인지 끈덕지게 옆에 늘러 붙었다.
“뭘 하느라고 이야기 할 시간도 없다는 거냐!”
“제가 왜 제 일정까지 알려드려야 하는 겁니까!”
야스카산이 질세라 소리 질렀다.
“너는 내 신부잖아!”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씩씩 거렸다. 만나서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야스카산은 심한 갈증을 느꼈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여보아도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언가 애써 말하고 싶은데, 무언가 아사신에게 이야기 하고 싶은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 크고 부드러운 회색 눈동자만 바라보며 어딘 가로 달아나지 못 하도록 붙잡아 놓고 있을 뿐.
야스카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백 마디의 말이 떠올랐다가도 침잠해버린다. 할 말이 없었다. 폭풍우 속에 흔들리는 잎사귀처럼 가슴이 울렁거리고 속이 답답하다. 그 고요한 눈동자를 바라 보고 있자니 강하고도 강한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져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울분이 솟구쳤다.
 “놔··· 주십시오. 들어가겠습니다.”
“아사신.”
“그러면 된 거 아닙니까? 오늘은 하루종일 방에 콕 박혀서 나오지 않을 테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십시오.”
매몰차게 잡힌 손을 털어 내고 아사신은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뒤에 남은 야스카산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채 그 뒷모습만을 노려볼 뿐이었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뒤에서 타스가가 안됬다는 얼굴로 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도 이런 자신의 모습이 꼴 사납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야스카산은 속으로 욕을 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신의 이런 모습이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 속이 온통 안개가 낀 것 마냥 희뿌옜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 야스카산은 곧 등을 돌리고 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사람들이 수근 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족장.”
타스가가 다가와 야스카산의 뒤에 조용히 섰다.
“타스가.”
“조금··· 다른 선물을 해 봄은 어떻습니까?”
타스가의 말에 야스카산은 코웃음을 날렸다.
“더 이상 저 건방진 것에게 내릴 것은 없다. 무엇을 주든 만족할 줄 모르니 내가 돼지 목에 진주를 걸어 준 꼴이구나.”
“그러니까··· 제 말은 조금 다른 것을 선물해 보면 어떻겠냐는 말입니다.”
타스가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야스카산 때문에 조바심이 일었다. 어쩌면 저리도 어긋나는 두 사람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내려주신 그 많은 진귀한 것들도 좋지만 말입니다. 신부는 그런 것 보다 살아있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살아있는 것?”
야스카산은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매미 꽃을 줬지만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겨울 눈꽃의 천적이니까 그렇죠.-
타스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알고 선물한 건지, 모르고 선물한 건지 몰라도 애지중지하는 꽃의 천적을 받고 좋아할 리가 없지 않은가.
“다른··· 좀 더 희귀한 것을 선물 하는 건 어떨까요?”
“희귀한 것?”
야스카산은 턱을 쓰다듬었다. 타스가의 의견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희귀한 것이라. 희귀한··· 살아있는 것이라···.-
고개를 숙이고 눈만 번뜩이던 그는 곧 생각을 정리했는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좋다 타스가. 내일 다시 오겠으니 아사신에게 어디 가지 말고 나를 기다리라고 일러라.”
“알겠습니다.”
속으로는 대체 저 속에 무슨 생각을 할까 걱정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도 착실하게 대답하는 타스가였다.

야스카산은 싸늘하게 웃었다. 이번 선물은 저 까다로운 아사신도 맘에 들 것이다. 더 이상 그 기고만장한 꼴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수라킨이 멍한 표정으로 야스카산이 손에 들고 있는 생물을 바라보았다. 옆에 서 있는 타스가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건··· 대체··· 무엇입니까?”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는 야스카산을 향해 사납게 발톱을 휘두르는 생물을 가리켰다.
“호랑이도 아닌 것이··· 고양이도 아닌 것이 이상하게 생겼군요.”
“이건 성스러운 짐승(聖獸) 포사다.”
야스카산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 아사신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 대륙에 몇 마리 없는 희귀한 것이다. 마라 꽃잎을 지키는 용도로 신전의 깊숙한 곳에서 번식시키고 있는 녀석이지만 특별히 네게 한 마리 내리겠다. 받아라.”
감히 네게 하사하는 것이니 감사한 마음으로 받들라는 표정의 야스카산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 아사신 이었다. 필요 없다고 말하려는 순간 엉겁결에 날아든 것을 받아버렸다.
“헉!”
약간 큰 고양이만한 사이즈라고 생각했는데 받아보니 상당히 묵직했다. 순간적으로 몸이 확 앞으로 쏠렸다. 급하게 미끄러지는 부드러운 짐승을 고쳐 안자 녀석이 손톱을 세우며 엉겨 붙었다.
-이, 이런 받아버렸다!-
순간 당황하여 다시 내려놓으려고 했지만 녀석은 목 깊숙한 곳에서 고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며 더 세게 앞발에 힘을 주어 떨어지지 않았다.
“너를 잘 따르는 구나.”
야스카산은 아사신이 받아 들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니 저는 받을 생각이··· 헉!”
아사신은 갑자기 발톱을 세워 자신의 가슴에 박아넣는 짐승 때문에 말을 끝내지 못했다. 녀석은 샛노란 눈동자를 희번뜩 거리며 발톱에 힘을 주었다. 그 눈동자가 마치 &#8211;떨어트리면 죽어~- 라고 말하는 듯 해 차마 손을 털어낼 수가 없었다.
 “이번 것은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
아사신과 수라킨과 타스가는 침묵했다. 야스카산은 의기양양해졌다. 계속 찡그려졌던 미간이 펴지며 잘생긴 얼굴이 활짝 웃었다. 왠지 모르게 즐거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살아 있는 것을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네게 어울리지도 않는 보석 따위 내리지 말걸 그랬군 아사신. 내가 직접 내리는 것이니 소중하게 대하도록 해라.”
야스카산은 그 말만 마치고 아주 개운해 보이는 얼굴로 뒤 돌아 가버렸다. 아사신은 순간적으로 야스카산의 뒤통수에다 손에 들린 짐승을 던지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야스카산이 돌아가자 아사신은 난감해졌다. 녀석은 여전히 앞발을 아사신에게 대고 고르릉 거리고 있었다. 긴 회색 털이 아사신의 무릎으로 늘어졌다. 그 긴 털의 끄트머리를 집어 올리며 수라킨이 혀를 찼다.
“좀 더 강하게 거절했어야지. 이제 이걸 어디서 키워?”
그녀의 목소리에는 털 달린 것과 두 발로 걷지 아니하는 것은 절대 집 안에 들일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렇다고 족장이 준 걸 맘대로 내다버릴 수도 없고······.”
아사신은 생각했다.
사실은 족장이 준 게 아니라고 해도 함부로 내다버릴 수는 없었다. 이 짐승은 신성수였다. 팔시아 대륙에는 이미 멸종되었다고 알려지고, 함마 대륙에서는 아주 극소수의 개체만이 살아 남아 있을 뿐이다. 오래 전 신이 함마 대륙과 팔시아 대륙을 갈라놓았을 때 거의 전멸할 뻔한 것을 겨우 번식시켜 마라 꽃을 지키는 용도로만 신전에서 키우는 동물이었다. 달의 환수. 신의 철퇴. 그 값을 측정할 수도 없는 희귀한 고대의 생명체.
그 생물은 지금 아사신의 무릎에 누워 배를 뒤집으며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아사신? 이건 뭐야?”
소사린이 멀리서 다가오다 움찔했다. 어린 아이만한 동물이 아사신의 무릎에서 뒹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굳어있던 그녀는 수라킨이 손짓으로 부르자 조심조심 다가와 아사신의 옆에 앉았다.
“이건 뭐야? 처음 보는 동물이네?”
“족장이 주고 갔어.”
아사신의 말에 소사린은 조금 미간을 찡그렸다.
 “정말 특이하게 생겼는걸? 처음 보는 짐승이야. 이 붉은빛이 감도는 회색 털에 노랗고 커다란 눈··· 두툼한 앞발에 호랑이 처럼 줄무늬가 들어간 것이··· 마치 어린 시절에 들었던 전설의 환수 포사와 같은 모양인걸?”
소사린의 말에 아사신과 수라킨과 타스가는 침묵했다. 소사린은 조심스레 짐승의 털을 쓰다듬더니 그 고운 미간을 조금 더 찌푸렸다.
 “게다가 안쪽 털은 붉고 끝부분은 회색에다가··· 귀 끝은 여우처럼 검고, 눈 아래에는 눈처럼 흰 털이 올라와있고··· 이상하다. 정말로 포사의 설명과 똑···같은······.”
이제는 소사린도 침묵했다.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족장이 내리셨다고?”
“···응.”
“이름은 지었어?”
“아직.”
소사린은 부드럽게 짐승의 귀를 쓰다듬었다. 입술 밖으로 길게 날카롭고 기다란 이빨을 드러낸 환수는 그 손길에 배를 뒤집었다.
“예쁘다. 전설의 환수가 이렇게 귀여울 줄은 몰랐네? 실물로는 처음 봐.”
“나도.”
수라킨이 거들었다.
“······라.”
“응? 뭐라 그랬어 소사린?”
아사신이 질문하자 소사린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사신. 이 녀석 할머니를 닮지 않았어?”
“할머니? 네 외할머니를 말하는 거니?”
아사신은 경악했다. 이렇게 사나운 이빨이 툭 튀어나온 짐승과 다정한 시오사라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소사린?”
“잘 봐봐. 이 녀석의 이 고운 털의 빛깔을. 원래 할머니도 젊었을 적엔 나처럼 검붉은 머리셨어. 나이가 들어서 붉은 회색 머리카락이 되셨지. 꼭 이 녀석의 털처럼 말이야. 그리고 이 눈도 좀 봐 아사신. 할머니의 눈매를 그대로 박아놓은 것만 같지 않니?”
 색깔 외에는 닮은 점 따위 아무것도 없잖아!- 라고 강력하게 생각하는 아사신 이었지만 소사린의 눈물이 글썽한 얼굴을 보자 차마 말 할 수 없었다.
“시오사라··· 시오사라라···.”
입 안에서 그 이름을 굴려보자 짐승이 가늘게 눈을 뜨고 아사신을 쳐다보았다. 아사신은 조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리운 이름으로 부르자 저 징그러운 이빨도, 가늘게 세로로 선 동공도 아까처럼 무섭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조그맣게 입 속에서 되뇌어본 아사신은 결심하고 말했다.
 “그래. 네 이름은 이제부터 시오사라야.”
아사신의 말에 소사린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그 얼굴은 슬퍼 보이기도 했고, 동시에 기뻐 보이기도 했다.
“할머니의 이름으로 불러 줄 거야?”
“응. 네 말을 듣고 보니 닮은 것도 같아.”
“고마워.”
소사린은 고개를 숙이고 아사신의 이마에 고개를 기댔다. 둘은 어린시절 소사린이 매맞고 쫓겨났을 때 마다 그러했듯이 서로에게 서로의 얼굴을 묻고 움직이지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친구. 가장 사랑하는 사람.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었다.
 “족장이 정말 네가 마음에 드나 봐. 정말로 이런 것도 내려주시다니··· 놀랬어 나.”
“그런 게 아니야. 그 사람은······.”
아사신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람은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조금 슬퍼져서 눈을 옆으로 돌리니 불편한 얼굴을 한 타스가가 보였다. 그는 수라킨의 손에 끌려가고 있었다. -분위기상 빠져 주자고.- 하는 수라킨의 말에 -저건 올바르지 않아. 불륜이라구.- 하고 타스가가 대답하는 것을 듣고 아사신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타스가에게 소사린의 존재를 납득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아무에게도 그들 두 사람의 관계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미 다른 남자와 혼인해버린 남자 신부인 자신과, 전 약혼녀인 소사린과의 사랑은 누가 보아도 지탄할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사신은 소사린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원해서 된 신부의 지위도 아니었고, 원해서 헤어져야 했던 것도 아니다. 그 끔찍했던 의식의 날 이후로는 단 한번도 소사린을 딴 마음을 먹고 바라본 적도 없었다.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면 소사린을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비록 살아서는 이 세상에서 맺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 버렸지만,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언제나 소사린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
꼭 자신의 품 안에서 행복할 필요는 없다. 그냥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서도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고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아사신은 족했다.
 비록 아직도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소사린 역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해도 말이다. 어떻게든 시오사라의 소원을 이루어 주고 싶었다.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는 두 연인의 사이에서 시오사라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은 환수가 목을 울리며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이건 진짜 희귀한 겁니다!”
힐레멘은 정색을 했다.
 “성수 포사라니. 내 살아생전 이 녀석을 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게 그럴 수 밖에 없는게 팔시아 대륙에선 이미 멸종했잖아요.”
수라킨이 톡 쏘았다.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오오 이 녀석. 한번 안아봐도 될까요?”
시오사라는 무시무시한 외양과는 다르게 사람에게 순한 편이었기에 아사신은 별 생각 없이 허락했다.
“그래요 그럼. 여기 받아요.”
“내가 포사를 안아보다니.”
힐레멘은 감격해 하며 시오사라를 받아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비명을 지르며 시오사라를 떨어트려야만 했다.
“으악! 이 녀석 무는 겁니까?”
“엣? 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
아사신은 깜짝 놀랐다. 시오사라가 그 큰 입을 덥썩 벌려 힐레멘의 손을 왕 물어버린 것이었다. 별로 세게 문 것 같지도 않은데 피가 주르르 흘렀다. 수라킨이 옆에서 얼굴을 구겼다. 방금 닦아놓은 맨들맨들한 바닥에 피가 번지는 것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녀석! 사람은 물면 안돼!”
아사신은 크게 당황했다. 힐레멘은 피를 보더니 새하얗게 질린채, 옆으로 쓰러지는 동작을 해보이며 엄살을 떨었다.
“이젠 짐승까지 날 박해하는 구나. 어흐흑. 이 동네 와서 좋은 일은 하나도 없어! 전쟁에 끌고 가질 않나, 특이하게 생겼다고 구경하러 오질 않나, 이젠 다치기 까지 하잖아.”
사람들이 구경하는 건 얼굴보다 성격이 특이해서 일 거라고 생각하는 아사신이었다.
 “그보다 그 녀석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거겠지.”
아사신은 이 빈정대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긋지긋한 야스카산이었다.
야스카산은 빙긋 웃었다.
“전설의 환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네게서 뭔가 구린 냄새가 난다는 거겠지 힐레멘.”
야스카산의 말에 힐레멘은 능청스럽게 자신의 냄새를 킁킁 맞아보는 시늉을 했다.
“구린 냄새라니요. 늘 고향에서 가져온 장미농축 액을 살짝 손목에 묻혀두어 언제나 어디서나 꽃 향기를 풍기기로 유명한 저를 두고 그런 말씀을 하다니요. 서운합니다 족장. 저를 싫어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왜곡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잘생긴 남자들은 다 날 싫어한다니깐 진짜~.”
그 뒤로 계속 경쟁의식 느끼나봐~- 하고 종알대는 힐레멘을 제치고 야스카산이 다가왔다. 그는 아사신에게로 어슬렁 어슬렁 돌아가는 시오사라를 보자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너를 잘 따르는가 보구나 아사신.”
“아 네··· 뭐··· 그렇습니다.”
“흐음. 흐음.”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앞에 서서 턱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시오사라가 힐레멘을 문 것이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름은 뭐라고 지었지?”
“시오사라··· 라고 지었습니다.”
“시오사라라. 여자 이름이잖아. 그 녀석은 수컷인데?”
“아는 사람의··· 이름을 땄습니다.”
그 말에 야스카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는 사람? 누구? 여자냐?”
“네, 네에. 여자입니다.”
아사신이 우물쭈물 대답하자 야스카산은 딱딱하게 인상을 쓴 채 가깝게 다가왔다. 그 걸음에 놀라 아사신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지만 소용은 없었다. 그만큼 또 야스카산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손목을 낚아챘다.
“자세하게 설명해라. 그 여자는 누구지? 어디에 살지? 무엇을 하지? 아니 그 전에 결혼은 했느냐?”
아사신은 정말로 당황했다. 무엇부터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그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제 가족으로서······.”
“가족?”
야스카산은 언성을 조금 높였다.
“너한테 내가 모르는 가족이 더 있단 말이냐? 설마 너와 내가 가족사항이 같다는 것은 잊지 않고 있겠지? 거짓말은 하지 마라.”
사람의 말을 거짓말 취급하는 야스카산 때문에 아사신은 슬며시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이것 놓고 이야기 하십시오.”
“대답부터 해라.”
“먼저 놓으십시오.”
야스카산은 순간 울컥 치미는 성질을 감당하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닥치고 내 말에 대답부터 해!”
아사신도 화가 났다. 이 남자와 이야기 하면 늘 이런 식이다.
“이 손 놓으랬잖습니까! 우리의 대화는 늘 이런 식으로 흐르는군요. 당신이 뭔데 관섭 하려 드는 겁니까? 그 여자가 누구건, 결혼을 했건 그게 당신과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확- 하고 손을 뿌리친 아사신이 강경하게 반발하자 이번에는 야스카산이 침묵했다. 속에서 이상한 열기가 들끓었다. 밉살스러운 말만 내뱉는 저 얇은 입술을 한대 후려 갈겨주고 싶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주고 싶기도 했다.
 스스로의 감정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야스카산은 숨을 골랐다.
“대답해라 아사신. 난 그럴 권리가 있다.”
아사신도 숨을 골랐다. 그것은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렇겠죠. 저는 당신의 신부니까. 좋습니다. 시오사라는 어릴 때 알던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이미 죽었어요. 됬습니까?”
“···결혼은 했었던가?”
야스카산은 고집스러웠다.
“이미 노인이었어요. 소사린의 할머니였다구요.”
노인이었다는 말에 풀어지려던 야스카산의 표정이 소사린의 할머니였다는 부분에서 다시 구겨졌다. 그의 얼굴은 딱딱해졌다.
“소사린. 네 약혼녀였던 여자를 말하는 거군. 그 여자의 할머니의 이름을 붙일 만큼 소사린이 좋다는 거냐?”
“네. 당연히 좋습니다. 너무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이름을 붙여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는 제가 힘들 때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 육친의 정을 알게 해준 분이십니다. 그것은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아사신은 이런 대화를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자신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야스카산에 대한 추억 중엔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비루한 옷을 입은 자신의 옆을 당당하게 스쳐 지나가던 모습이나, 모든 이들의 우러름을 받는 가운데 높은 자리에 앉은 그를 참담한 심정으로 쳐다보아야만 했던 추억 뿐이다.
 더는 말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시위로 고개를 돌리고 애꿎은 땅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에이 왜 싸우고 그래요. 이리 와서 같이 차라도 한 잔 합시다. 네?”
힐레멘이 여전히 피를 줄줄 흘리면서 다가와 야스카산의 손을 잡아 끌었다. 탁 소리가 나도록 그 손을 쳐내면서 야스카산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몹시 기분이 나빠 보였다.
“······.”
힐레멘이 간신히 마련한 화해의 제스쳐를 거절할 수 없었던 아사신이 먼저 머뭇머뭇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마치 할 수 없이 들어가 준다는 얼굴로 야스카산이 이어서 들어갔고 마지막으로 힐레멘이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힐레멘은 자신의 앞에 잔뜩 몸을 낮추고 으르렁 거리는 시오사라를 보았다. 시오사라는 금방이라도 튀어올라 힐레멘의 얼굴을 가격할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촘촘하고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고 긴 송곳니가 번들거렸다.
“시오사라! 그러면 안돼!”
아사신이 당황하여 다시 나왔다.
 “시오사라! 이 녀석 이러지 말라니깐!”
시오사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계속 이를 드러내고 위협했다. 그 기세에 힐레멘이 한 걸음 물러서자, 꼬리를 내리고 잠잠해진다. 그러나 힐레멘이 조금만 앞으로 나오려 해도 다시 그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제가 싫은가 보군요.”
힐레멘은 웃으며 손을 들어 항복의 시늉을 해보였다.
“시오사라!”
수라킨이 옆에서 바닥을 탕 구르며 소리질렀다. 시오사라는 수라킨의 엄한 목소리에 고개를 약간 숙였다.
 한결 누그러진 시오사라의 모습에 야스카산은 조금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 녀석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군요.”
수라킨과 아사신의 도움으로 힐레멘도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방으로 들어간 야스카산은 식탁에 앉았다. 타스가는 야스카산의 등뒤에 버티고 섰고, 수라킨이 차를 준비하는 동안 힐레멘과 아사신은 의자에 앉아 그 모양을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아사신은 불편해서 몸을 비틀었다. 하릴없이 식탁의 목 무늬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개미가 한 마리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입김을 후 불었다. 조금 셌던 모양인지, 맞은편에 앉아있던 야스카산에게까지 바람이 날아갔다. 야스카산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왠지 숨결도 거칠어 진 것 같아 아사신은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자주 나가시더군요.”
힐레멘이 입을 열었다.
“다시 나가게 될 거다 힐레멘. 너도 준비를 해두는게 좋을 거다. 같이 가게 될 거니까.”
 “또요?”
힐레멘은 한쪽 입술을 샐쭉하게 내밀었다.
 “왜 제가 남의 나라 싸움터에 또 끌려가야 하는 겁니까? 싫어요. 안갈 거에요.”
“저 번에 보니 칼도 상당히 잘 휘두르던데 무슨 상관이냐. 내가 가라면 가는 거다.”
“아우 진짜!! 난 고향에서도 싸우는 일이라면 무조건 질색하는 사람인데!”
힐레멘이 우거지상을 하며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렸다. 그 모양이 불쌍해 보여서 아사신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 모습이 꼭 &#8211;이 인간 힘이랑 입담 빼곤 쓸데라곤 하나도 없는데 데려가서 어디다 쓰나-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힘내요. 저번에도 무사히 돌아왔잖아요. 이번에도 그럴 거에요.”
“아사신.”
힐레멘이 눈이 그렁그렁해서 돌아보았다.
“그럼 저번처럼 이번에도 살아 돌아올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저번에 했던 거 또 해줘요.”
야스카산이 고개를 슥- 내밀었다. 아사신은 당황했다.
“저, 저번에 했던 거라니 뭘 말하는 거죠?”
“모르는 척 하기는~ 왜 그거 있잖아요. 그.거.”
한 음절씩 끊어 말하며 얼굴을 붉히는 행동에서 진한 오해가 피어 올랐다.
 “아니, 그런 무슨. 아니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군 아사신.”
야스카산이 옆으로 성큼 다가왔다. 아사신은 파랗게 질려버렸다. 분명히 힐레멘이 말하는 것은 저번 바산족과 싸우러 갈 때 마지막 부탁이니 어쩌느니 하면서 다가와 입술을 만지게 해달라고 했던 그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특별히 불순한 의도도 없고, 그저 입술 좀 만져보다 입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봤을 뿐이었다.
그런 것을 저렇게 얼굴을 붉히고 비밀 이야기라도 되는 듯이 말하자 무진장 불순하고 은밀한 어떤 것을 했을 거라는 상상이 되 버리는 것이다!
 야스카산은 완전히 아사신에게 밀착했다. 거친 숨결이 볼에 닿아와 아사신은 잔뜩 긴장해버렸다. 식탁 아래서 다리와 다리가 맞닿아 오고, 어깨와 어깨가 붙었으며 가까이 다가온 숨결이 뒤섞였다.
 의자 끝으로 이동해 앉아도 소용없었다. 그만큼 야스카산이 따라와 다시 철썩 들러붙었다. 아사신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이 남자와 살을 맞대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떠오르는 그 밤의 기억 때문에 기분이 묘해진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체취 때문에 절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조금만 더 있으면 목구멍으로 그 펄떡거리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손가락의 지문도, 거칠어진 숨결도 너무도 생생했다. 동공이 확장되고 피로와 흥분이 차례로 몰려왔다.

그때 갑자기 야스카산이 큰 손을 뻗어왔다. 아사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손을 피한답시고 옆으로 비켜서다 그만 의자가 넘어지면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그 밤의 기억이 뇌리를 스쳐가며 본능적으로 방어 한 것이었다.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어깨를 잡으려다 그대로 굳어버렸고 뒤에서 수라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이··· 것은······.”
모두가 굳어버린 가운데 아사신이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족장. 저도 모르게··· 실례했습니다.”
사과를 해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야스카산의 냉랭하게 가라앉은 눈이 그의 심기가 얼마나 불편한지 대변하고 있었다.
“여기 차들 들어요!”
싸늘한 기후가 감도는 가운데 수라킨이 다급하게 차를 타왔다. 그녀는 거의 찻잎이 풀어지지도 않은 것을 탕 소리가 나도록 세게 식탁에 내려놓았다. 얼마나 세게 내려놓았는지 찻물이 튀어서 식탁에 얼룩졌다. 야스카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 들어요!”
수라킨이 건네는 잔을 야스카산이 탐탁치 않다는 듯이 받아 들었다. 그제야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가 갑자기 눈을 둥그렇게 떴다. 볼이 볼록해지고 얼굴이 붉어졌다.
 “맛이 없으십니까 족장?”
힐레멘이 여유롭게 말했다. 그는 찻잔을 들고 조용히 냄새만 음미하고 있었다. 절대로 마시지는 않았다.
야스카산은 침묵했다. 차마 입안에 든,  도저히 말로 설명이 불가능한 맛을 내는 물을 내뿜을 수가 없었다. 체면불구 하고 내뱉고 싶었지만 모두의 시선이 &#8211;아사신의 시선도- 쏠린 가운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야 입 안에 든 것을 목구멍으로 삼키는데 성공한 야스카산은 주먹으로 입가를 슥슥 훔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만 돌아가겠다.”
“아니, 벌써 가시게요?”
뒤에서 타스가가 서운하다는 얼굴을 했다. 타스가는 신부가 어디론가 도망가버리지 않고, 야스카산과 침착하게 한 식탁에서 차를 마신다는 이 광경이 몹시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그를 일찍 보내고 싶지 않았다.
 “가야한다. 가리시네와 약속이 있다.”
가리시네와 약속이 있으면 그냥 여기 오지말고 바로 가란 말야- 하고 아사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야스카산은 그렇게 말하고도 한참을 밍기적 거리며 찻잔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어차피 마시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시간을 끄는 그 행동에 아사신은 짜증이 났다. 야스카산 때문에 식탁을 떠나지도 못하고 지겨운 몸을 배배 꼬아야만 했다.
참다 못한 수라킨이 말했다.
“족장. 약속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
야스카산은 말을 꺼낸 수라킨을 노려보았다. 수라킨이 움찔하여 &#8211;내가 뭘?- 이란 표정을 지었다.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가보겠다.”
“안녕히가십시오 족장.”
“살펴가세요.”
야스카산이 몸을 일으키자 모두들 뒤따라 일어섰다. 살았다- 라는 표정을 짓고있는 아사신을 슬쩍 한 번 흘겨본 야스카산이 몹시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어우, 왜 또 심기 불편이래.”
그가 밖으로 나가고야 집 안의 공기가 확 누그러졌다.
힐레멘이 목이 마른지 저도 모르게 수라킨의 차를 한 모금 마셨다가 금방 웩웩거리며 바닥에 엎어졌다. 수라킨이 그 위에서 사람이 정성껏 타줬는데 그 따위 반응밖에 못 해!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사신은 야스카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해.-
아사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모르게 오늘의 야스카산은 평소와는 다르다고 느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었다.
“신경 쓰지 말고 자자. 저 사람 이상하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그건 그래.”
수라킨의 말에 아사신은 가볍게 수긍하고 문을 닫았다.

 저 남자가 이상하건 말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                *                *




 밤이 깊었다.
힐레멘은 식사까지 얻어먹은 후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올 무렵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고서야 아사신도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힘든 하루였다. 약간의 한기를 느끼며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창 밖으로 찬바람이 들이치며 윙윙 대는 소리가 울렸다.
 시오사라는 그 소리가 죽어서도 죽지 못한 망령들이 문틈 사이에서 울부짖는 소리라고 했었다. 이미 육신은 불타올라 지상에 없고, 큰곰자리의 윤회의 기둥에 돌아들어가지 못한 그들은 이상에는 발 딛지 못하고, 저승에는 손 뻗지 못한채 산자의 문틈에서 그 온기를 부러워하며 울부짖는다고 했다.
그들을 위로하는 부엉이 울음소리가 그날 따라 구슬펐다. 곧 차가운 북풍이 몰아치고 얼어붙을 듯한 추위가 시작되면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머물지 못하는 망령들은 더욱 더 찢어질 듯한 목소리를 내며 지상을 배회할 것이다. 소나무마저 누렇게 질리는 그때가 되면 어린아이들의 꿈속에서는 악령가 되고, 눈 덮인 계곡에서는 성실한 사냥꾼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마귀가 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영원히 해악을 끼치며 살아가고 산 자를 질시하며 문틈에서 울어 재낄 것이다.
저것은 어머니의 울음소리일까? 저것은 어머니의 원망일까? 언젠가는 그녀도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

아사신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졸음이 밤눈처럼 소리없이 내렸다.




 한참을 무의식 속에서 방황하다 아사신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그는 어머니의 망령과 마주하고 있었다. 부엉이 울음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기 때문인가, 어머니는 아사신의 꿈 속에 찾아와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머니는 목을 조르지도, 울지도, 소리지르지도 않고 있었다. 그녀는 아사신이 좋아하던 모습 그대로 단정한 옷을 입고, 머리를 틀어올리고, 깨끗한 손과 발을 하고 있었다. 피를 흘리지도 않고 있었다.
그곳은 이미 꿈인지, 현실인지 각성할 수도 없을 만큼 깊은 꿈 속. 외면과 내면의 구별도 모호한 곳이었다.

 “어머니.”
아사신이 속삭였다.
“이제 그만 가세요. 왜 제 주위를 맴도는 겁니까.”
어머니는 아사신의 질문에 대답 하지 않았다. 생전에는 늘 괴롭고 찌든 얼굴만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아니 무감각한 얼굴이었다. 표정 없는 얼굴을 한 채 그냥 서 있었다.
주위는 안개가 자욱했고, 그곳에는 땅도 없었고 하늘도 없었다. 공간의 개념이 비틀린 곳에서 아사신은 어머니의 얼굴을 멀리 마주하고 있었다.
“왜 환생의 기둥에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왜 제 주변을 맴도십니까. 왜 평화를 찾지 못하세요.”
아사신은 안타까웠다. 그녀는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했다.
“그만 사라지세요. 이제 그만 오지 마세요.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
당신은 여기 존재하면 안 되는 존재야. 밤도 낮도 구별하지 못하고 이승도 저승도 밟지 못하고 부유하면서 무엇을 원하는 거야.

 아사신의 말에 어머니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녀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사신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려고 했다. 열심히 팔을 뻗으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사신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고 그녀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애써 뻗은 두 팔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신음소리가 입 안에서 맴돌고 고개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제서야 아사신은 자신이 또 다른 가위에 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또 새로운 종류인가?-
아사신은 피식 웃었다.
호흡이 가빠지는 와중에도 웃을 여유가 생겼다. 이제 그녀는 목을 조르지도 화를 내지도 같이 죽자고 속삭이지도 않는데, 그냥 혼자 멀어져 갈 뿐인데 가위에 눌리고 있었다.
“흐읍, 흐읍.”
아사신은 숨을 몰아 쉬었다. 점점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빨라지면서 숨이 꺽꺽 넘어갔다. 점점 몸이 굳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 차려라.”
“으···.”
“정신 차려. 눈을 떠라.”
뺨을 강타하는 손길에 아사신은 희미하게 눈을 떴다. 부옇게 흐려진 시야에 누군가의 얼굴이 잡혔다.
“응··· 누구···.”
아사신은 눈을 비볐다. 그러자 희미한 윤곽이 점점 뚜렷하게 부상하였다.
 “누구······.”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맞추던 아사신이 벌떡 일어났다. 자신의 이마를 쓸어주는 남자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족장!”
“여긴 왜! 아니 그 전에 여기는 어떻게!”
아사신은 횡설수설했다.
“물어볼게 있어서 왔다. 가위에 눌렸나?”
아사신은 서둘러 일어나서 겉옷을 걸쳤다.
“깨워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아니 이 밤중에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묻고 싶은게 있어서 찾아왔다.”
야스카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본능적으로 아사신은 고개를 움츠렸다. 재빨리 곁눈질로 문을 살펴보았지만 굳건히 잠겨있었다.
 대체 어디로 들어왔지?- 라고 생각하며 방안을 둘러보는 아사신의 얼굴을 야스카산이 재빨리 고정시켰다.
“낮에 그 자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네게 물으러 왔다.”
“뭘··· 무엇을요?”
“힐레멘이 했던 말 말이다.”
야스카산이 날카롭게 속삭였다. 그는 팔짱을 끼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아사신은 침대에서 내려오려다 도로 위로 올라가야 했다. 적막한 공기 속에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흘렀다. 절로 생침이 넘어갔다.
 “무엇을 해줬다는 거지 아사신?”
야스카산의 무릎 한 쪽이 침대위로 올라왔다. 아사신은 그 모양을 눈으로 쫓았다. 어스름한 달 그림자를 후광처럼 둘러쓰고 야스카산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내려왔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제대로 듣고 오지 못했다.”
-집요하다!-
아사신은 몹시 찔렸다. 사실 그때 수라킨의 차 덕분에 유야무야 넘어가긴 했지만 언젠가는 다시 물어올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일 거라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된 아사신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대로 말해서는 왠지 안 될 것 같다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다.
 “그냥 별 거 아니었습니다. 그가 제 얼굴을 조금 만졌습니다.”
아사신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해명했다.
“얼굴? 어디를 말이냐?”
야스카산이 설핏 이마를 찌푸리고 재차 물어왔다.
“그냥 입술을··· 만졌습니다.”
그 말에 야스카산은 얼굴을 구기더니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슬며시 피하는 아사신의 턱을 잡고 강하게 고정했다. 아사신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이리저리 허공을 헤매다 야스카산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더 이상 피하지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어떻게 만졌지?”
“그것은 그냥··· 신경 쓰실 만한 일이 아닌··· 헉!”
아사신이 중얼중얼 변명을 늘어놓으려 할 때였다. 야스카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사신의 입술을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무슨!”
아사신은 깜짝 놀라 야스카산의 얼굴을 밀쳤다. 그러나 집요한 입술은 다시 다가와 아사신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입을 다물지 못하도록 턱의 관절을 꽉 누르며 혀가 침범했다. 뒤로 물러서는 순간 다시 혀가 따라왔다.
 입술전체를 혀로 길게 핥았다가 다시 집어 넣었다 가를 반복하는 기술에 아사신은 허리를 바르르 떨었다. 혀의 표면이 혀의 표면을 쓸고, 가슴과 가슴이 딱 들러붙는다.
“그만, 그만.”
아사신은 정신이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왜 그가 갑자기 키스를 하기 시작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또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오싹해져 왔다. 말도 안 된다. 합방을 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필요에 의해 그는 자신을 안을 이유가 없다.
“저리가요! 대체 왜 이러는··· 족장!!”
아사신이 보기에 야스카산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팔을 잡히고 또 다시 가슴에 안겼을 때 아사신은 그만 이빨로 야스카산의 어깨를 콱 물어버렸다. 그제야 정신없이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등을 쓰다듬던 야스카산이 고개를 확 쳐들고 아사신을 바라보았다.
 일그러진 얼굴로 내려보는 그 시선은 데일 듯 뜨거웠다. 아사신은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을 세게 문질러 닦아냈다. 화가 치밀어올라 세게 야스카산을 떠밀었다.
 “왜 이러는 겁니까.”
아사신의 목소리는 냉랭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내부에서 차가운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모두 잘 시간입니다.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오기에는 늦은 시간입니다. 할 말이 있으면 정중하게 낮에 대문으로 찾아오십시오.”
“내 집에 내가 들어오는데 남의 시선이나 허락 따위 구하지 않는다.”
“이 곳은 내 집입니다.”
“내가 내려준 집이다.”
“그렇다면 당장 짐을 싸서 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사신!!”
야스카산이 소리를 질렀다.
“너는 너무 건방지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상대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네 혀를 잘라버리겠다.”
“자르세요. 말리지 않습니다.”
서로 한치도 양보하지 않고 팽팽하게 접점을 벌였다. 야스카산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와 아사신의 중심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사신이 흡,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이 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내게 처음부터 속한 것이다. 내가 원하니까 잔말말고 내 뜻대로 행해라.”
“큭!”
아사신은 떠밀려져 침대에 엎어졌다. 튕기듯 일어나려고 했지만 곧바로 야스카산의 묵직한 육체가 타올랐다.
 여전히 한 손은 아사신의 중심부에 두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플 만큼 세게 쥐고만 있던 것이 어느새 리듬을 타고 슬슬 상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느릿한 움직임에 아사신의 등이 바르르 떨렸다. 다른 한 손이 슬금슬금 내려가 아사신의 상의를 걷어올렸다. 어스름한 빛 속에 피부가 흐리게 빛나고 있었다.
상의가 완전히 벗겨지자 야스카산이 상체를 숙였다. 굳게 닫혀 벌리려 들지 않는 입술을 한웅큼 집어 삼켰다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마른 목덜미를 더듬던 입술은 곧 이어 성급하게 가슴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창백한 공기에 한껏 긴장한 젖꼭지를 허겁지겁 삼켰다. 아사신이 신음을 삼키며 팽팽하게 고개를 뒤로 젖혔다. 드러난 목에 푸른 정맥이 튀어나왔다. 그 만큼 아사신은 긴장하고 있었다.
 투둑- 하고 하의의 단추가 떨어져나가는 소리가 들릴 때 마다,
힘껏 움켜 쥔 손등은 피가 모여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즈려문 입술사이로 비명이 되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문득 아사신은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자신의 몸 위에서 열심히 움직이는 남자의 행위가 왠지 웃겼다. 아무것도 없는 가슴을 빨아보겠다고 힘을 쓰는 일이나, 자신과 똑같이 달린 것을 샅샅이 만지고 훑는 행위가 지독한 희극처럼 여겨졌다. 그 진지한 표정이라니.
아사신은 낮게 조소했다. 야스카산의 혀 끝에서 어느새 솔직하게 쾌락에 반응하게 된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새어나간 웃음은 곧 봇물 터지듯 터져 흘러 흘러넘치는 강둑이 되었다.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 배게를 촉촉하게 적셨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울고 있다니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야스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의 아래에서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아사신을 노려보았다.
“왜 그러지?”
아사신이 대답했다. 울다가 웃다가 하느라 목소리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떻게 신경 쓰지 말라는 거냐. 울음을 그쳐라. 그 짜증나는 웃음 소리도 그만 치워라.”
“크-!”
아사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끈질기게 노력한 덕에 웃음은 사그라들었지만 더 곤란해져 버렸다. 이번에는 큰 소리로 울음이 나와버린 것이다.
“흐읏, 큭-.”
필사적으로 울음을 삼키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손으로 입을 막고 등을 작게 구부렸다. 위에서 야스카산이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적어도 저 남자 앞에서는 더는 꼴불견인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제어가 불가능 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벗은 가슴이 숨을 쉬느라 크게 들썩였다.
그 하는 모양을 지켜보던 야스카산이 크게 한숨을 쉬는 것이 들렸다. 흥이 깨졌는지 아사신이 몸을 움츠리며 옷에 손을 뻗는데도 제지하지 않았다.
“너는 언제나 내 예상을 빗나가는 구나.”
“···당신 역시 제 예상을 빗나가는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 이 상황에서도 꼬박꼬박 받아 치지.-
야스카산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아사신에 대해서만큼은 잘 참아왔노라 생각했던 마음. 마음 한 구석에 박아두었던 가학성이 슬며시 피어 올랐다.
“나를 위해 봉사하라고 만들어진 몸인데,”
희미하게 떨리는 어깨와 등줄기를 한번에 훑었다.
“네 몸은 나를 위해 전혀 개방되지 않는구나. 아사신.”
“크······.”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해도 헐떡이는 소리만이 나와 아사신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야스카산의 얼굴이 내려와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 오늘은 네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으니 내가 양보하마.”
그 말에 아사신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야스카산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웃고 있는 눈동자 속에서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낀 아사신이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야스카산은 턱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입술이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와 낮게 읊조렸다.
“내 것을 그 입에 물어라 아사신. 네 가랑이 사이에서 오늘 내가 쾌락을 찾을 수 없다면 네 입에서 찾겠다. 그 잘난 세치 혀로 내 물건을 애무해라.”
“무슨!”
아사신이 성을 내며 야스카산의 손을 뿌리쳤다. 크게 뜨인 회색 눈동자에 분노가 일렁였다.
감히 남자인 자신에게 남자의 것을 입에 물고 혀로 핥으라고 명하는 것인가?
분노로 주먹을 내뻗는 아사신의 팔을 잡고 야스카산이 비릿하게 웃었다.
 “아니면, 아래의 입으로 나를 먹어 줄 테냐?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네가 원한다면 아까 하던 걸 계속해도 좋다. 다만,”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
“또다시 울거나 웃거나 해서 흥을 깨트려놓는다면 이번에야 말로 너를 그냥 두지 않겠다. 기고만장한 신부야. 그 신부라는 직책이 어디까지 너를 보호해줄지 기대해도 좋을 거다.”
아사신의 눈에 공포가 들어찼다. 아사신은 이 남자가 무섭다고 생각했다. 길고 단단한 팔과 밤의 장막처럼 내려앉은 검은 머리카락이 자신의 몸을 혼을 단단히 감싸고 놓아주지 않았다.
야스카산은 또 한번 웃었다. 천적 앞에 선 작은 포유류처럼 떨고 있는 아사신의 모습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만 했다.

 “아니면, 자신이 없는 거냐 아사신?”




아사신은 입술을 뾰족하게 오므렸다. 사실대로 인정하기에는 오기가 끌어 올랐다. 야스카산은 슬며시 하의를 끄집어 내려 자신의 것을 꺼내었다. 다른 곳은 낮에 본 그대로 정결한 옷차림을 한 채 그 곳만 드러낸 모습이었다.
-성스러운 아버지. 위대한 신의 혈족이 저렇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곁눈질로 흘깃 쳐다보니 그것은 벌써부터 크게 부풀어 올라 자신의 몸체를 자랑스럽게 곧추 세우고 있었다.
 잠시 본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새 집중해서 쳐다본 모양이었다. 야스카산의 것이 시선을 느꼈는지 혈관을 부풀어 올리며 더욱 힘차게 발기했다.
 그 모양을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다 시선을 회피하자, 야스카산이 호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것을 주물럭거렸다.
“왜 그러지 아사신? 자신이 없는 거냐?”
“네. 자신 없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아사신은 순순히 인정했다. 오기고 뭐고 다 사라지고 없었다. 저런 것을 입에 물다니. 자신은 못한다. 아사신의 말에 야스카산은 조금 낭패한 기색을 띄었다.
“그럼 할 수 없지. 이리 와라.”
“싫습니다.”
아사신은 고개를 저었다. 큰 눈에 불안감을 가득 담고 야스카산을 쳐다보았다. 야스카산은 조급해졌다.
“이리 오라잖아. 자신이 없다면 다른 것을 요구하겠다.”
“싫습니다.”
아사신은 계속 고개를 저으며 슬슬 무릎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야스카산은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표정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부딪히다가 벌떡 일어나 아사신의 어깨를 잡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리 와!”
“싫어! 싫다니깐요!”
한동안 그렇게 엎치락 뒤치락 하며 놓으니, 못 놓으니 하며 싸우던 그들은 갑자기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깜짝 놀라 그대로 굳었다.
 밖에서 누군가가 이상을 느꼈는지 쿵쾅거리며 다가왔다.
“오빠! 무슨 일이야? 무슨 소리가 났는데 괜찮아?”
아사신은 숨을 들이마셨다. 수라킨이었다. 어둠 속에서 아사신과 야스카산의 눈이 마주쳤다. 짧은 사이 그들은 암묵의 동의를 했다.
“괜찮아! 그러니까 다른 데로 가봐!”
아사신이 크게 외쳤다. 그러나 아까까지 싸우느라 격해진 숨소리 때문에 말이 이상하게 나갔다. 밖에서 수라킨이 의심이 드는지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정말? 목소리가 이상하잖아. 이 문 좀 열어봐.”
아사신은 마음이 급해졌다.
 “아니야. 진짜 아무것도 아니래두!”
“못 믿겠어. 문 좀 열어봐!”
-젠장!-
거의 반나체가 되어 가슴에는 아까까지 야스카산에게 빨린 흔적이 잔뜩 남은 채 저 문을 열어 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 방에는 야스카산이 있다.
 아사신의 급한 마음을 눈치챘는지 야스카산이 한 쪽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그는 아까까지의 조급함은 잊고 어느새 여유만만한 얼굴이 되었다. 슬금슬금 반쯤 허공에 떠 있는 아사신의 허리를 잡고 뒹굴 굴렸다. 아사신은 수라킨에게 대답하다가 힉- 하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 누웠다. 그 위로 야스카산의 육체가 엉금엉금 기어올라왔다.
 “뭐하는 겁니까?”
“내 말대로 한다고 해라 아사신.”
“뭘 말입니까? 저리 비켜요. 이러다 들키겠어요.”
“난 아무 상관없어. 들켜도 좋아.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거다.”
“무슨······히악!!”
작게 대화하던 아사신이 갑자기 세된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밖에서는 수라킨이 더욱 힘차게 문을 두들겼다.
“자, 내 말대로 한다고 말해라 아사신.”
“힉! 히익!”
야스카산의 거칠거칠한 손바닥이 아사신의 등뼈로 기어들어가 날개를 애무했다. 결이 거친 손바닥에 살갗과 함께 날개가 비벼지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만! 그만!”
“응? 그렇게 하겠다고 말해라 아사신. 어서. 응?”
달콤하게 회유하는 야스카산의 속삭임에 아사신은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성기가 꼿꼿이 서는 것을 느꼈다. 진정으로 빌어먹을 상황이었다.
“오빠 왜 그래? 어서 문 좀 열어봐. 안 그러면 타스가를 깨워서 문을 부술 거야!”
그리고 나즈막하게 -이 둔한 녀석은 어째서 이 난리가 났는데도 안 일어나는 거야?- 하고 수라킨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로 문이라도 부술 기세에 아사신은 소리를 지르고
 “아니야! 그러지마 수라킨!! 꿈, 꿈을 꾼 것 뿐이야!!”
“꿈?”
수라킨이 멈칫했다. 아사신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이 상황의 다급함 때문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이와중에도 더한 자극을 바라며 공중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성기가 미웠다.
“그래 꿈. 너도 알잖아! 내가 종종 꾸는 그 꿈 말이야. 나 지금 기분이 몹시 안 좋아. 그냥 가줘, 부탁이야.”
“음- 그렇단 말이지.”
아사신의 호소에 수라킨의 마음이 흔들린 모양이었다. 그녀가 문 밖에서 갈등하는 사이 아사신은 문 안에서 생으로 비명을 삼키고 있었다. 즈려문 입술 사이로 자꾸만 비음이 흘러나왔다. 야스카산의 큰 손이 혼자 흔들리는 아사신의 성기를 부드럽게 그머쥐더니 가볍게 쥐어짰다.
 “크윽, 윽!”
“좀 더 소리를 내봐. 여동생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아?”
-나쁜 새끼!-
늘 생각하는 거지만 이 비겁한 기회주의자는 이번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사신은 이를 갈면서 소리질렀다.
“정말 괜찮은 거지?”
“절대 괜찮아. 그러니까 그만 들어가서 자!”
“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불러. 잘자.”
그 대화를 끝으로 더 이상은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가는 소리를 확인한 아사신은 불꽃이 이글대는 눈으로 야스카산을 노려보았다.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기회를 잘 포착하지. 족장의 위치에 있다 보면 아무래도 개뼉다귀 같은 장로 놈들도 구워삶아야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야스카산은 아사신이 혼자 불타 오르던 말든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며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그것보다 네 걱정을 하는게 어때?”
“무슨······.”
그리고 아사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야스카산의 입이 내려와 아사신의 성기를 덥석 입에 물어버린 것이다. 비명을 지를뻔한 입을 막으며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따스한 점막이 한껏 들러붙어왔다. 촉촉하게 감싸주고 강하게 흡입한다. 예전에도 야스카산에게 성기를 빨린 적이 있었지만 이것은 당한다고 익숙해지는 일이 아니었다.
“그만! 그만!”
“이제 시작인데 무슨 그런 말을.”
야스카산은 비릿하게 웃었다.
“너도 입에 대라 아사신.”
“시··· 싫···.”
“약속했잖아? 입에 대라.”
속삭이는 야스카산의 목소리는 너무도 낮고 달콤했다. 정수리에서 직접 울리는 듯한 그 목소리의 달콤함에 아사신의 목울대가 꿀꺽 하고 움직였다.
“약속하면··· 오늘 안지 않는 겁니까?”
“그래 약속하지.”
“약속하신 겁니다?”
“알았다니까!”
역정을 내는듯한 목소리에 아사신은 다시 한번 침을 삼키고 눈앞의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 주인의 냉막한 얼굴과는 다르게 너무도 크고 기세 좋게 발기한 그것을 떨리는 손으로 받쳐들었다.

 그것은 크고 검붉었으며 힘차게 맥박하고 있었다. 검은 음모는 성기가 시작되는 부분에 거슬거슬하게 나 있었고 고환까지 탄탄하게 올라붙어있어, 그가 지금 얼마나 흥분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것이 내 몸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자 소름이 돋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남자의 것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핥아라.”
야스카산이 짧게 명령했다. 그는 아래쪽에서 아사신의 것에 혀를 댄 채,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자신이 그의 물건을 입으로 봉사하게 된 것이 못내 즐거운 모양이었다.
-질까 보냐.-
아사신은 이를 악물었다. 하겠다고 했으니 책임을 질 것이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에 힘을 주고, 늘어진 고환까지 단단히 받쳤다. 그 묵직한 질량감에 가슴까지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조심조심 혀를 내 보았다. 정말로 싫다고 발악하는 혀를 몇 번의 시도 끝에야 불뚝불뚝 일어선 물건의 끝에 댈 수 있었다. 이미 기세 좋게 허공을 향해 들고 일어선 그것의 끝부분. 선단의 갈라진 부분에 혀를 대는 데는 성공했지만, 곧 그 미끄러운 감촉에 흠칫 인상을 찡그리고, 다시 혀를 거둬들였다.
 “왜 그러지?”
“미끄럽고 이상합니다.”
“상관없잖아.”
“하지만 뜨거워요. 저는 어떻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혀로 핥아라. 입에 넣고 깊이 빨아라.”
“그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힉!!”
다시 한번 아사신은 자지러졌다. 야스카산의 입이 크게 벌어지며 아사신의 성기를 한 입에 가득 담았다. 그 크고 깊은 입은 평범한 사이즈인 아사신의 것을 거의 한입에 빨아넣었다. 절로 허리가 튕겨올라가고 온 몸이 배배꼬였다. 츕- 츕- 하고 울리는 소리와 가끔 바람 빠지는 민망한 소리가 야스카산의 입 안에서 울렸다.
“하- 아- 그만-!”
“좋으냐? 응 좋은 거냐 아사신?”
“좋··· 아니, 그마안, 싫어···.”
“쳇, 그 입은 말하는 데는 영 재주가 없구나. 내 것을 빨아라 아사신.”
야스카산의 독촉에 아사신은 희미하게 눈을 떴다. 눈 앞에는 끄덕끄덕 흔들리는 야스카산의 것이 보였다. 벌벌 떨리는 입을 열어 다시 한번 혀를 대 보았다. 다행히 아까 보다 혐오스럽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입안에 그 끝을 담아보았다.
 -이상한··· 맛.-
야스카산의 혀가 점점 그 강도를 빨리 하고 있었다. 선단의 끝을 개처럼 낼름낼름 핥아대다가 가볍게 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해왔다. 아사신은 피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와 맨몸으로 부대끼고 있으면 제어할 수 없는 무언가가 피 속에서 들끓는 기분이었다.
“하-아- 좋아.”
저도 모르게 신음이 세어 나왔다. 야스카산의 성기를 입 안에 가득 담아보았다. 미끌거리고 뜨거운 그것을 한 입에 담고 맛있는 것을 먹을 때처럼 빨아보았다. 큰 것을 담느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침이 흘러 그 흉악한 것의 기둥을 타고 미끄러졌다. 그 모습을 아래로 내려다보던 야스카산이 보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엉겨 붙었다. 공기가 달구어졌다. 어느 순간 서로의 성기를 핥던 혀가 서로의 혀에 엉겨 붙어 있었다.
꽉 끌어 안겨지고 세게 부딪혀왔다. 턱을 깨물리고 성기가 한 손에 그러잡혀 터질 듯이 내리눌러졌다.
“제길, 제기랄 아사신!”
“아- 아 좋아.”
혀가 마찰하는 소리가 울렸다.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차례로 빨려 들어갔다. 야스카산의 손이 아사신의 엉덩이를 터트리기라도 할들이 세게 붙잡았다. 빙글빙글 돌리고 세게 잡아당겼다가 놓아버린다. 그 갈라진 틈 사이로 손가락이 기어들어가 항문 입구를 간지럽힌다. 아사신이 비명을 질렀다.
“그만, 약속했어! 당신은 약속했어!”
야스카산은 으르렁거렸다.
“삽입할 테다. 넣어버릴 테야.”
“안돼, 안돼, 당신은··· 당신은 나한테 약속했어.”
“염병할!”
야스카산은 신경질을 내며 손을 거둬들였다. 그러나 손가락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지 자꾸만 그 부근을 서성인다. 작전을 바꾸기로 했는지 조심스럽게 타일렀다. 그러나 목소리에서 조급함이 묻어나왔다.
“삽입하게 해줘. 응? 아사신. 삽입하게 해줘.”
“안돼. 싫어. 싫어. 아- 아응.”
완고한 아사신의 반응에 야스카산은 결국 손을 거두어야만 했다.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촉촉한 내부의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 손가락만 넣겠다. 손가락만. 응?”
“싫······. 아응. 응-.”
“손가락만 넣을게. 더 이상은 아무 짓도 안 한다. 약속한다 아사신.”
“정···말?”
아사신이 열에 들뜬 눈으로 야스카산을 바라보았다. 이미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보였다. 야스카산은 계속 그를 타이르며 교묘하게 항문 주변을 지분거렸다. 입구가 이물질을 반기며 벌름거렸다.
“그래. 손가락만 넣겠어. 약속한다.”
야스카산의 손가락이 회음부를 긁어내리자 아사신이 자지러지며 다리를 바르르 떨었다. 날렵한 허벅지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성기에서 애액이 튀었다. 그는 조금 고민하는 듯 하더니 결국 육욕이 이긴 모양이었다. 아사신은 고개를 살짝 가로 외면하고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 작게 속삭였다.
“그럼··· 그럼 좋아.”
드디어 약속의 말이 떨어지자 야스카산은 싱긋 웃었다. 얼른 넣고 싶었다. 아사신의 입가에 흐른 타액을 꼼꼼하게 손가락에 바르고 인정사정 보지않고 처박았다. 아사신의 허리가 확 휘어지며 억눌린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악! 아파!”
“곧 좋아지게 될 거다.”
벌려진 다리사이에 자리잡은 야스카산이 자신의 성기를 아사신의 사타구니에 비벼올렸다. 그 뜨거운 감촉에 아사신이 흐느꼈다.
“아파··· 아···.”
“조금만 참아라.”
야스카산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갈증이 솟구쳤다. 내부의 살이 야스카산의 손가락을 꽉꽉 조여 오고 있었다. 이 속에 들어간 것이 손가락이 아니라 자신의 성기이기를 간절히 빌었다. 살아 움직이는 내부의 동굴을 손가락이 차례차례 정복해나갔다. 둥글게 비틀어 올리고 깊게 파고들고, 거세게 찔러올린다. 그와 함께 아사신의 몸도 낭창낭창하게 휘었다가 동그랗게 말렸다가 도망가고 싶은지 앞으로 기어가기를 반복했다.
 “좋으냐? 좋은 거냐 아사신?”
“아아, 조··· 너무··· 아! 아아!”
“젠장. 삽입하게 해다오 아사신.”
서로의 성기가 비벼지며 액체가 튀었다. 줄줄 흐르기 시작한 아사신의 정액이 두 기둥 사이에 미끄러지며 차마 듣기 민망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긴 팔을 이용해 손가락으로 내부를 공격하고 성기를 비벼대고 입술을 꼭 붙였다.
 “안돼, 그건 안돼. 약속했어.”
야스카산은 화가 났다. 이렇게까지 완고하게 거부하는 아사신에게 화가 났다. 보복의 의미로 쿡- 하고 한 개의 손가락을 더 박아 넣자 등줄기를 휘면서 자지러진다. 좋아하는 주제에, 이렇게 좋아하는 주제에-!
불뚝불뚝 혈관이 일어선 성기가 더 큰 자극을 바라며 혼자서 움직였다. 그 뜨거운 날것에 노출된 아사신의 성기가 마구 비벼질 때마다 억지로 정액을 쥐어짜이며 울었다.
 서로의 팔이 서로의 팔을 나무줄기처럼 휘어 감고, 허벅지와 허벅지가 맞붙었다. 혀가 치열을 싸악 핥으며 파고 들자 아사신의 혀도 그것을 반가이 맞이했다.
“크으- 윽!”
“아아- 앗-!”
두 사람의 비명소리가 동시에 튀어 오르는 그 순간,
한치의 틈도 없이 맞닿은 둘의 사타구니 사이로 투명한 우유 빛 액체가 터졌다. 그것은 꼭 달라붙은 두개의 기둥을 타고 흘러내려 깨끗한 침대 시트에 점점이 흔적을 남겼다.
꽉 껴안긴 팔에 힘줄이 도드라져 나오고 이사이로 쾌락에 떠는 마지막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어코 아사신의 눈에서는 맑은 이슬 한 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리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쾌감 때문에 흘린 눈물이었다. 야스카산은 그 눈물을 길게 혀를 빼어 전부 핥아 먹었다. 뜨뜻한 액체가 혓바닥 위에서 녹아 내리자 알 수 없는 만족감이 온 몸에 퍼져나갔다.
“흐--.”
아사신은 눈을 감았다. 고개를 가눌 힘조차 없었다. 과도한 노동에 육체가 착착 기운 없이 늘어졌다. 야스카산의 목을 힘껏 붙들고 있던 손이 스르르 풀리며 바닥으로 늘어졌다. 그 모습을 아쉬운 듯 쳐다보던 야스카산이 혀를 쩝쩝 다시며 곱게 침대에 뉘여 주었다.
“응.”
어느새 침대 옆에 놓여있던 마실 물을 자신의 옷자락에 적셔 땀 범벅이 된 아사신의 몸을 닦아주는 야스카산이었다. 과격한 정사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한 육체는 차갑게 적셔진 옷자락이 닿을 때 마다 흠칫 흠칫 떨면서 근육을 긴장시켰다.
“좋았지?”
야스카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아사신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눈을 내리깔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야스카산은 또다시 알 수 없는 뿌듯함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은근 슬쩍 옆에 누우며 벗은 어깨를 주물럭 거렸다. 늘 느끼는 거지만 이 메마른 육체는 살성 하나는 기가 막혀서 주무르고 있으면 슬슬 성기가 서 버린다.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슬금슬금 내려 드러난 가슴위로 미끄러트렸다. 그리고 아까부터 혹사당해 벌겋게 성을 내며 일어선 유두를 손톱으로 살살 긁었다.
“···하지 마세요.”
“하고 싶다.”
“가셔야 합니다. 곧 날이 밝습니다.”
“······.”
그말에는 야스카산도 침묵했다. 그러나 빈정이 상했는지 유두를 긁어내리는 손길이 더욱 거세다. 아사신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육체는 아직도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사신도 어느 정도 원하고 있었다. 그와 살을 섞고 있으면 이성 따위 저만치로 날아가버린다. 입술을 빨리고, 성기를 빨리고, 그 육봉을 몸 안에 꽂아 넣고 있으면 그가 어떤 남자인지, 그가 얼마나 자신을 혐오할지 생각도 못하게 되버린다.
 그러나 그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나면 그것뿐이다. 처음 신부의 의식을 치렀던 그 밤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히 자괴감은 길게 남아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남은 이성을 총동원해 아사신은 힘껏 야스카산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가셔야 합니다. 날이 밝으면 수라킨이 다시 올 겁니다.”
“······알고 있다.”
야스카산은 여전히 아쉬운지 혀를 쩝쩝 다시며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등 뒤에 철썩 들러붙어 만지작대던 남자가 일어서자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느껴져 아사신은 당황했다. 비어버린 자리에 찬바람이 쌩 하고 들이치는 느낌이었다.

야스카산은 차분하게 옷을 걸쳤다. 옷을 걸치는 동안 계속 아사신을 슬쩍슬쩍 바라보았다. 등을 돌리고 몸을 작게 웅크린 모습에서 고집이 보였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몸을 섞고, 그렇게 안아줘도 저 남자는 몸도 마음도 열어주지 않는다. 아무리 안아도 아무리 선물을 갖다 바친다 해도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스카산은 깊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다.”
“가십시오.”
아사신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
야스카산은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자꾸만 뭔가를 두고 오는 느낌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문을 열고 슬쩍 아무도 없는지를 확인한 야스카산이 가볍게 창틀에서 뛰어내렸다. 희뿌옇게 밝아오는 새벽하늘을 보고서야 자신이 얼마나 시간을 지체했는지 알 것 같았다.
-큰일이군. 오늘은 할 일이 많은데.-
마지막으로 크게 한숨을 내 쉰 야스카산은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정말로 오늘 내로는 다시 궁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4




날씨는 점점 싸늘해졌다. 더 이상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포근한 햇살에 잠시 행복한 미소를 짓는 날은 없게 되었다.
 여인들은 나무 밑둥에 사는 벌레를 마지막으로 채집하기 위해 열심히 산을 헤매고 다녔다. 번데기 상태로 겨울을 나는 곤충들은 자신을 보호색으로 잘 위장하고 있어서 채집이 은근히 어려웠다.
 족제비의 터널을 발견하면 그 주변에서 포진하고 있다가 망태기에 씌워서 잡아오기도 했고, 다람쥐의 나무구멍에서는 도토리를 채집했다. 물론 전부 채집해오면 불쌍한 다람쥐는 그 겨울을 굶으면서 견뎌야 하기 때문에 손에 잡히는 단 한 주먹만을 채집했다.

 먹을 것을 미리 구비해두지 않아도 되는 수라킨 네도 마지막 겨울준비에 열을 올렸다.
“아니 왜 이사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또 대청소를 한다는 거야?”
“모르는 말 마. 겨울동안 문 꽉 닫고 지내려면 얼른얼른 구석까지 쌓인 먼지를 다 뽑아내야 해.”
“먼지 쌓을 틈도 없었겠어.”
“잔소리 말라니깐. 타스가는 족장이 내린 시중꾼이잖아. 거기 그것 좀 들어봐.”
“시중꾼이라니! 나는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있는 거야! 여기 이거 말하는 거야? 들까?”
“응. 그거 내 방에다 갖다 놓고 와.”
이런 소란스러움에 아사신은 잠에서 깨어 부스스 일어났다. 따스한 햇살에 눈을 끔뻑이다 새집이 된 머리를 손가락으로 벅벅 긁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많이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매캐한 먼지가 집 안 가득 날아다녀 숨이 턱턱 막혀왔다. 아사신은 한 손으로 코를 움켜쥐고 한 손으로는 손바람으로 먼지를 날리며 말했다.
“윽, 이게 다 뭐야? 수라킨 대체 뭐 하는 거야?”
“일어났어? 어제 잠 잘 못자는 것 같던데 몸은 괜찮아?”
“아······.”
수라킨의 말에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아사신의 얼굴이 갑자기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귀까지 새빨갛게 변한 아사신의 모습에 수라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야!”
아사신은 다급하게 손 사례를 쳤다. 몽롱했던 머리 속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어젯밤의 그 적날했던 행위가 머리 속에서 펑펑 터졌다.
“그래? 그럼 아침 먹기 전에 이것들을 재배열 할거니까 좀 도와줘. 아니다. 힘쓰는 일은 하지 말고 밖에 나가서 소사린 언니 좀 도와줘. 묵은 겨울 옷의 먼지를 털고 있어.”
“소사린 와 있어?”
“응.”
그말만 하고 수라킨은 타스가와 또다시 아웅다웅 하며 저쪽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아사신은 밖으로 어슬렁 어슬렁 걸어나갔다. 과연 밖에는 소사린이 총채를 들고 옷을 탈탈 털고 있었고, 그 옆에는 시오사라가 여유롭게 뒹굴 거리고 있었다.
“아사신!”
“소사린.”
밝게 웃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소사린의 모습에서 일말의 죄책감이 느껴졌다. 어째서 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욱씬하고 아파왔다.
-내가 왜 이러지?-
아사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사린에게로 다가갔다.
 오늘도 소사린은 아름다웠다. 길고 구불구불한 검붉은 머리카락을 비녀로 틀어올려 고정시키고, 수수한 푸른 옷은 풀을 먹여 빳빳하고 정결했다. 옷의 색깔은 그녀의 희고 고운 피부와 잘 어울렸다.
 “늦잠을 잤구나? 어제 악몽을 꾼 모양이라고 수라킨이 말해줘서 일부러 깨우지 않았어.”
“왜 여기서 일하고 있어. 고생이잖아.”
“아니야 전혀 고생스럽지 않아.”
소사린은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어차피 집에 있어봤자 뭐라도 일거리를 만들어서 새어머니가 일을 시킬 거야. 차라리 여기서 일하는 게 편해.”
“그래도···.”
그럴 거면 친구네 집에라도 놀러 가 있거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도 될 것을···.
아사신의 생각을 눈치챈 듯 소사린이 빙그레 웃으며 한걸음 다가왔다.
“걱정하지마. 난 여기가 좋아. 네가 있는 곳이 나한테는 집과 같아.”
“소사린.”
가슴 한켠이 더욱 세게 지끈거려왔다.
 “기왕 나왔으면 이거나 잡아. 혼자서는 역시 힘드네.”
꼬리로 다리사이를 비비며 다니는 시오사라 때문에 걷기가 쉽지 않았지만 소사린의 도움 요청에 아사신은 얼른 옆으로 다가갔다. 그런 아사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오사라는 끙끙대는 소리를 내며 앞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아사신은 무시했다. 어쩌자고 신성수가 이런 데로 굴러들어와서 개 줄에 묶여 허름한 판자때기 집에서 사는지 불쌍했다. 절대 집 안에는 못 들인다는 수라킨의 강경책아래 저렇게 키우고 있지만 불쌍한 건 불쌍한 거였다. 이젠 슬슬 그 아름다운 털도 누렇게 변질되고 저렇게 혀를 내밀고 꼬리를 설레설레 치고 있으니 영락없는 개 한 마리였다.
 “요즘은 그래도 어버지가 너한테 많이 야단 안치시나 봐?”
“응. 새어머니랑 신혼이잖니. 아주 좋아 죽나 봐. 그렇게 부르짖던 아들도 둘이나 낳아줬으니 얼마나 좋겠어.”
소사린은 피식 웃었다.
 “얼마 전에 하삭언니랑 싸웠었어. 언니를 시집 보낼 모양인가 봐. 언니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말야. 어디 이상한 주정뱅이에게 보내려고 했나 봐. 그랬더니 또 하삭언니 성격에 다 두드려 부수고는 좋아하는 남자한테 가버렸다지 뭐야? 그 일로 아주 화가 단단히 나서 집안 우리만 보면 성질을 부려. 요즘 아버지를 보면 진짜 미친 것 같아.”
“혹시 험한 일 당하면 이리로 피난 와 있어.”
소사린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야. 이젠 예전처럼 마구 때리지는 않아. 아버지도 나이가 많잖아. 기력이 쇠할 때도 되셨지. 괜찮아 아사신. 나 이젠 그렇게 약하지 않아.”
붉은 자주빛이 일렁이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사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맞으면 아프다고 말하고 웃어넘기고, 정말로 아프면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그녀를 오랜 시간 지켜봐왔다. 사람을 원망할 줄 모르고, 미워할 줄 모르는 그녀는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인 같았다.
 “넌 정말 착해 소사린. 어쩜 그렇게 착하니?”
“난 그렇게 착하지 않아.”
소사린은 수줍게 미소 지었다.
“아니야. 정말 착해. 인간이라면 이렇게 착할 수가 없을 거야.”
“아사신.”
소사린은 다정하게 아사신의 볼을 쓸어내렸다.
 “난 그렇게 착하지 않아. 진짜야. 네 말처럼 나도 늘 내가 착한 마음, 착한 생각만 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도 힘들어 하고 괴로워하고 질투하는걸.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사악한 마음을 품기도 해.”
“소사린.”
“응.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난 조금 슬퍼져.”
둘은 고개를 숙였다. 최근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면 늘 끝이 슬프게 마무리되는 것 같아 아사신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잠시 이마를 대고 있던 소사린이 방긋 웃으며 이야기 했다.
“자, 어서 이거 털고 빨리 들어가자. 그러지 않았다간 수라킨이 뭐라 그럴 거야. 응?”
“응. 그래. 내가 도와줄게.”
둘은 평소처럼 웃으면서 일을 시작했다. 마음 한켠은 가라앉아 있어도, 살짝 내리깐 그녀의 속눈썹에 빛이 반사된 이슬조각이 하나 걸려 있어도 그들은 모른체했다.
수라킨이 저 멀리서 빨리 하고 들어와요- 하고 외치고 있었다. 그 일상적인 광경에서 아사신은 작은 행복을 느꼈다.




소사린이 돌아가고 집이 말끔히 정리된 것은 밤이 깊은 무렵이었다. 아사신은 완전히 굳어버린 어깨를 툭툭 치며 의자에 길게 누웠다.
 요즘 옆집 아주머니네에 들락거리면서 옷에 무늬를 새로 넣느니, 음식을 배운다느니 부산을 떠는 수라킨이었다. 네가 음식 하다간 초가살림 다 태워먹을 거라고 빈정대던 타스가는 한방 얻어 맞았다. 그러나 아사신으로서는 타스가의 말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니기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오빠 된 입장으로서 입맛이 썼다. 오늘 집을 뒤집어엎은 것도 가구를 재배치하는 것 만으로도 집안이 확 바뀐다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힘든 하루였어.”
“응. 힘든 하루였어. 집안을 전부 새로 들어냈으니까 말이야.”
타스가가 상체를 비틀며 하품을 했다.
“오늘은 집에 가서 자겠습니다. 자꾸 밖으로만 나도니 저희 어머님이 불안해 하셔서요.”
“그렇군요. 그럼 내일 봐요.”
“네 신부. 그럼 내일 아침. ···이 아닌 점심··· 도 아닌··· 음······.”
타스가가 머리 속으로 열심히 어떻게 하면 수라킨이 해주는 음식을 한끼라도 덜 먹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보였다.
“시간되면 되는대로 와요.”
“네, 그럴게요.”
아사신의 말에 그제야 기쁜 표정을 지으며 안도하는 타스가였다. 수라킨이 눈을 뾰족하게 치뜨고 째려보고 있었다.
“그럼 잘 자요.”
“네. 그럼 내일···.”
타스가를 배웅하고, 수라킨이 침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아사신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차를 끓였다.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찬바람이 쌩쌩 불며 창틀을 흔들고 있었다. 장작을 더 떼야 하나- 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며 그냥 숙면을 도와주는 차를 끓여먹기로 결심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은 피곤했는데 정신은 말짱했다. 뜨거운 차를 홀짝이며 식탁에 혼자 앉아있던 아사신은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 밤이 생각났다.
 야스카산이 자신의 창문으로 숨어 들었던 그 밤. 울리고, 괴롭히고, 설득하고, 화를 돋구어오던 그 밤이 생각났다.
-내가 나 같지가 않았어.-
아사신은 고개를 흔들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밤의 달뜬 숨결이 아직도 귓전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나 같지가 않았어.-
아사신은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생각하지 말아야만 했다. 사실은 넣어주길 바랬던 자신을. 그 유혹을 뿌리치느라, 남자를 받아들이고 싶어 허락의 말을 목구멍까지 끌어올리던 자신을,
 생각하지 말아야만 했다.
“그만하자.”
아사신은 차를 내려놓았다. 입맛이 싹 가셔있었다. 달콤한 향을 풍기는 차도 더 이상 숙면에 도움을 줄 것 같지 않았다.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방으로 돌아가려던 아사신은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들어서고 있었다.
-야스카산?-
아사신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야스카산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낯선 방문자는 문을 닫았다.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낯선 이가 얼굴을 감싸고 있던 긴 두건을 머리 뒤로 내려뜨렸다.
“누구?”
아사신은 당황했다. 거기에는 새하얀 얼굴을 한 소사린이 문가에 서 있었다.
 “소사린? 어떻게 지금 여기에.”
“아사신.”
소사린은 떨고 있었다. 아사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입술에서는 창백한 입김이 퍼져 나왔다. 온통 새하얗게 질린 채, 안광만 형형하게 빛내며 서있는 그녀의 모습에 아사신은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야? 무슨 일 있었어?”
“아사신. 아사신”
갑자기 소사린이 무너져내렸다. 아사신은 깜짝 놀라 소사린을 부축해주었다. 비 맞은 작은 새처럼 떨고 있는 그녀가 너무도 안쓰러웠다.
“소사린 무슨 일이야. 혹시 아버지가 또 때린 거야?”
“아사신···.”
소사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자 단정하게 틀어올렸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형편없이 헝클어져있었고, 옷은 군데군데 찢겨있었다. 맞은 것이 분명했다.
아사신은 자신의 무기력함에 울분이 솟구쳤다.
“맞은 거구나 소사린. 너 얻어 맞은 거구나.”
“아사신. 어쩌면 좋니?”
소사린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웠다. 창백한 얼굴이 붉고 푸르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광대뼈부근에는 살이 찢어졌는지 피딱지가 맺혀 있었다.
 “어쩌면 좋니? 어쩌면 좋아?”
“차근차근 이야기 해봐. 내가 도와줄게.”
아사신은 애가 탔다. 그 어떤 경우에도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소사린을 본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자신이 야스카산과 합방하고 돌아온 다음날에도 찾아와 간호해주었던 소사린이 아니었던가.
“날 시집보낼거래. 날 하삭언니대신 시집보낼거랬어. 그 호색한 영감이 하삭언니보다 내가 좋다고 했대. 이미 지참금까지 받아 챙겼어. 날 시집보낼거래. 그 주정뱅이한테 날 시집보낼거래.”
“소사린!”
“어쩌면 좋아? 응? 그 주정뱅이 자식은 이미 아내를 셋이나 죽였다고 새어머니가 와서 말해주었어. 어린 아내들을 돈으로 사와서 매질해 죽였대. 그 영감은 변태라서 여자들을 패면서 관계를 가지는걸 좋아한댔어. 소문이 나서 정상적으로는 아내를 들일수가 없으니 돈으로 사오는 거랬어.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하삭언니를 팔려다가 언니가 애인이랑 나가버리자 대신 나를 팔려고 한다고 그랬어. 지참금까지 받아버렸대. 아아 어쩌면 좋니? 응? 난 어쩌면 좋아?”
소사린은 눈물이 가득한 얼굴을 들어 아사신을 바라보았다. 아사신은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늘 강하고 현명했던 소사린이 이렇게 눈물 투성이가 되어, 이렇게 괴로워하면서 자신을 찾아왔는데.
의지가 되어달라고 찾아와 주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도와줄 수가 없다니. 가슴이 아팠다. 너무도 아팠다.
“내가··· 내가 그 지참금을 돌려주고 그 만큼 너희 아버지에게 드리겠어.”
아사신의 말에 소사린은 왁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마른 손이 자신의 옷자락을 꽉 비틀어 짰다.
 “소용없어. 모르겠니? 아버지는 나를 싫어하고 있는 거야. 내가, 내가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았으니까! 내가, 내가!”

내가 신부의 약혼녀였었으니까!

불꽃처럼 자신의 한을 터트린 소사린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작은 등을 구부리고 입안으로 울음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등에는 그녀가 겪어야만 했던 고통과 인내의 세월이 흘러 넘쳤다. 그녀는 처음으로 아사신의 앞에서 벌거벗은 자신의 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소사린의 눈물 속에서 아사신은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소사린은 숨을 골랐다. 헉헉거리며 바닥에 무너져내린 채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아사신도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용한 밤에 구슬픈 부엉이 울음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아사신은 조용히 생각했다. 소사린이 무너지자 오히려 머리 속이 냉정해졌다.
 -소사린을 죽게 놔둘 수는 없어.-
그 생각만이 머리 속을 떠돌았다.
 원래부터 소사린의 아비는 그녀를 미워했었다. 신부의 약혼녀였다는 것은 그 많은 미움의 이유들 중에 하나의 돌을 더 얹어주는 것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죄책감을 덜어줄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너는 나를 여러 번 위기에서 구해줬었지. 내게 먹을 것을 안겨주고, 내 정신을 보듬어주었어. 이젠 내가 너에게 갚을 차례야.-
아사신은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그녀를 이 위기에서 구해야만 했다. 격렬하게 흐느끼던 소사린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잦아들 무렵 아사신이 말했다.
“도망가자.”
“······.”
“도망가자. 우리 도망가자.”
“···아사신.”
소사린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달빛을 받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귀로는 아사신의 말을 들었으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지금···뭐라고?”
“도망가자. 우리 둘이 달아나버리자.”
“너···미쳤구나?”
소사린이 귀를 쫑긋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가 들었을까 두려운 표정이었다. 아사신은 안절부절 못하는 소사린을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그리고 시선을 피하는 소사린의 얼굴을 자신에게 고정시켰다.
“우리 도망가자 소사린. 우리 둘이서 도망가서 살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너랑 나랑 부부가 되서 살자.”
“아사신. 그럴 수는 없어. 너는 신부야. 너는 족장의···.”
“무슨 상관이야!”
아사신은 벌떡 일어섰다. 손이 잡힌 채인 소사린도 덩달아 일어섰다. 아사신의 눈동자는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회빛 눈동자가 희망에 빛나며 은빛으로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 얼굴이 너무도 아름다워 소사린은 저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아사신은 숨을 골랐다. 움켜쥔 두 손에 힘이 넘쳐흘렀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처음부터 원한적은 한번도 없던 자리야. 내 분수에 맞지않는 자리였어. 아니 차고 넘치는 자리였어. 우리 둘이 도망가자. 응? 우리 둘이서 도망가서 못다한 부부의 연을 맺자.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될 거야. 너는 좋은 어머니가 될 거고. 우리는 결코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 살 수 있을 거야.”
“아아···!”
소사린이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까처럼 통탄의 눈물이 아니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의 눈물이었다.
그러나 다시 무서운 듯 어깨를 움츠리고 낮게 속삭였다.
“족장이 잡으러 오지 않을까?”
“상관없어. 그는 결코 우리를 잡지 못할 거야. 그도 곧 포기할거야. 다시 신탁을 받고 다른 신부를 구하겠지. 나 같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 신부를 구할거야.”
그러나 아사신의 말에도 소사린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야, 쫓아올 거야. 잡으러 올거야.”
“아니래도!”
아사신은 벌컥 화를냈다. 소사린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크게 뜨고 아사신을 쳐다보았다. 아사신은 다시 언성을 낮추고 조용조용히 타일렀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만 다니자. 밤에는 달도 뜨지 않는 곳으로 기어다니자. 우리의 흔적은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거야. 땅 끝으로 가자. 거기서 아이를 낳자. 나는 일을 할게, 너는 날 위해 식사를 차려줘. 나는 네 숨을 맡을게. 너는 내 숨결이 되어줘.”
소사린을 설득하면서 아사신은 자신의 말에 자신이 설득당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가슴이 뜨겁게 맥박 치는 것을 느꼈다.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만 했다. 진작에 이렇게 뛰쳐나왔어야만 했다.
“사랑해 소사린.”
“아사신.”
두 사람은 서로를 강하게 부둥켜 안았다. 어려서 아사신이 비루먹을 때,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할 때, 자신의 뒤에 숨어서 한없이 웅크리고 있던 아이가 아니었다. 이미 소사린의 키를 훌쩍 넘긴 남자가 되어 소사린을 가슴으로 안아줄 수 있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소사린은 울었다. 이미 가망성을 잃어버렸노라. 죽어버렸노라 생각했던 그녀의 사랑이 다시 심장 한 가운데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이렇게 살아있노라. 여기서 너를 기다렸노라- 그렇게 외치며 요동치고 있었다.
“수라킨은··· 수라킨은 어쩌지?”
“수라킨······.”
소사린이 불안하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아사신도 멈칫했다. 수라킨을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열정적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던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침묵만을 지켰다.
그때,
 수라킨의 방문이 삐익- 하는 기분나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안에서 수라킨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유령과 같은 형상으로 걸어 나왔다.
“걱정하지마. 언니 오빤 도망쳐. 난 남아있겠어.”
“수라킨!”
아사신의 앞으로 수라킨이 천천히 걸어왔다. 하얀 가운을 걸친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살아있는 유령 같았다.
“다행히 오늘은 타스가가 없어. 결심이 섰으면 바로 준비해. 나는 괜찮아.”
아사신이 말했다.
“같이 가자. 같이 도망가자 수라킨.”
“같이 도망가면. 나는 짝도 못 만나고 평생 처녀로 살다 죽으라고?”
수라킨이 피식 웃었다.
 “나는 됐어. 나는 여기 있을래. 오빠가 가꿔놓은 화단도 내가 돌봐야지. 나까지 가면 누가 이 긴 겨울에 그것들 뒷치닥거리를 해줄까?”
“족장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가만두지 않으면?”
수라킨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신의 혈족을 처분하는 것엔 아무리 족장도 함부로 대하지 못해. 배우자를 맞이하는 것 까지 일일이 가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 판국에 날 죽인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야. 야스카산놈이 죽이려고 해도 꼬장꼬장한 장로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 테니 걱정하지마. 타스가도 그 동안 봐온 정이 있는데 설마 죽게 내버려두겠어? 거기다 집이 한번에 텅 비면 바로 의심할거야.”
아사신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보단 둘, 둘보다는 셋. 인원이 많아질수록 도망치기에 적합하지 않아. 오빠는 언니를 챙기는 것 만으로도 바쁠 거야. 나는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수라킨.”
아사신은 어른스러운 여동생의 마른 어깨를 꼭 껴안았다. 열 넷. 아직은 어린나이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 해도 어린나이다. 혈육과 떨어지는 것이 무섭지 않을 리가 없다.
“···언젠간, 언젠간 반드시 데리러 올 테니까.”
아사신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하나보단 둘, 둘보다는 셋이 도망 다니기에는 더더욱 불리하다. 남매는 서로를 꼭 껴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소사린이 말했다.
“언제 떠날까?”




야스카산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 요 근래에는 아버지도 장로들도 자신을 못살게 굴지 않는다. 자신만 보면 쨍알쨍알 주문사항이 많았던 가리시네도 잠잠하고, 무엇보다 가장 큰 고민거리던 신부도 조금씩 얌전하게 길들여지고 있다.
야스카산은 세수를 하다 말고 히죽 웃었다.
이틀 전 아사신과 보냈던 밤이 생각났다. 자신의 손에 감겨 들던 나긋한 허리가 생각났다. 자신의 것을 애써 삼키던 얇은 입술이 생각났다. 그 입술이 한껏 벌어지며 자신의 성기를 먹어 삼킬 때의 그 감촉이 허리를 자르르 울리게 만들었었다.
야스카산.-
손을 맞잡아오며 애원하던 모습. 딱딱한 뼈의 느낌. 눈물에 젖어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
-젠장.-
야스카산은 물기를 털어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시선을 내려보니 자신의 것이 반쯤 일어서 있었다.
-곤란해. 지금부터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이 꼴을 하고 바르바칸을 만나러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야스카산. 뭐하고 있습니까?”
그때, 문을 열고 가리시네가 들어왔다.
“가리시네.”
야스카산은 미소를 지었다. 딱 좋은 타이밍에 딱 좋은 여자가 들어와준 것이다.
가리시네의 배는 이제 만삭을 앞두고 있는지 제법 부풀어올라 있었다. 그러나 원체 몸이 마르고 호리호리해서 많이 부해보이지는 않았다. 백옥이 박힌 끈으로 땋은 머리를 내려뜨리고, 허리선을 높게 잡아 흘러내리는 형식의 옷을 걸친 그녀의 모습은 임산부란 점을 감안한다 해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야스카산. 오늘 저와 큰곰자리별에게 기도하러 가요.”
“무엇을 위해?”
“저와 제 아이의 건강한 출산을 위해. 저와 기도하러 가요 야스카산.”
가리시네가 다가와 야스카산의 벗은 가슴에 손을 대고 문질렀다. 갈색 젖꼭지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애무하자 야스카산의 표정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단단한 가슴근육이 갈라진 사이로 손을 집어넣던 가리시네가 볼을 붉게 물들였다.
“어머. 야스카산. 흥분했나요?”
“······.”
야스카산은 가리시네가 어디를 쳐다보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새초롬한 푸른 눈동자가 야스카산의 다리사이를 배회했다.
 “야스카산.”
“핥아라 가리시네.”
야스카산이 명령했다. 가리시네는 순순히 무릎을 꿇고 야스카산의 앞섶을 뒤졌다. 육감적으로 생긴 가리시네의 통통한 입술이 둥글게 벌어지며 반쯤 일어선 야스카산의 것을 목구멍 깊숙이 삼켰다. 야스카산의 얼굴이 다시 약간 찡그려졌다.
가리시네의 실력은 최고였다. 예전부터 느껴왔던 것이지만 그녀의 방중술은 남자 여자를 떠나서 야스카산이 잠자리를 같이한 사람들 중 과연 으뜸이었다. 혀와 손을 사용하여 사정을 유도하는 그녀의 실력에 야스카산은 참지않고 바로 사정해버렸다.
-좋아···!-
“칫!”
야스카산은 얼굴을 구겼다. 절정의 순간에 다시 한번 눈 앞에 아사신의 꺾어진 목이 떠올라버렸다. 좋다고 말하면서 허리를 젖히며 울음을 터트리던 녀석의 얼굴이 떠올라버려서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자신의 것을 핥고 있는 것은 가리시네인데, 그러할 지인데.
가리시네는 얌전히 정액을 받아먹었다. 곱게 분을 바른 그녀의 흰 얼굴위로 정액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뿌듯했다. 자신의 애무에 야스카산이 반응하여 흥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심스레 야스카산의 것을 비단에 닦아내고, 다시 옷을 매만져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안도 헹궈내었다. 아주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깨끗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전으로 가자.”
야스카산이 말했다.

신전에 준비된 여러 개의 방 중에 그들은 큰곰자리별을 위한 제단에 올라섰다. 큰곰은 생명을 주관한다. 태양과 달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신중의 하나이다. 그는 생명을 지상에 내보내고, 생명을 앗아간다. 인간이란 존재를 주관하는 가장 큰 틀을 이루는 별자리의 신이다. 큰곰은 여성이고, 큰곰은 자궁이었다.
“가리시네.”
“족장.”
신녀들이 다가왔다. 그녀들은 모두 눈을 자극하지 않는 부드러운 미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가리시네의 친정에서 특별히 가리시네를 위해 예비한 신녀들이었다. 그녀들이 가리시네의 첫 출산을 도울 것이었다.
“큰곰에게 제사를 지내겠다.”
가리시네가 명하자 신녀들이 신속히 다가와 준비를 하였다. 향로가 배달되고, 부드러운 방석이 깔리자 가리시네는 무릎을 꿇었다. 야스카산은 그 옆에 섰다. 그는 신의 혈족. 신의 아들이니 큰곰에게 무릎 꿇을 이유가 없었다. 그가 무릎 꿇을 수 있는 곳은 오직 태양신의 신전에 기도를 올릴 때 뿐이었다.
신녀들이 순산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몽롱한 연기와 뒤섞여 기도문이 낭송되었다.

 아름다운 영혼을 주소서- 건강한 영혼을 주소서- 더럽지 않은 영혼을 주소서- 특별히 예비 된 영혼을 내려주소서-

 짧은 기도가 끝나고 가리시네가 조심조심 허리를 굽혀 절을 하자 기도가 끝났다. 늙은 신녀 하나가 다가와 가리시네를 부축하며 말했다.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 이 모든 것을 아기는 어미로부터 전달 받습니다. 부디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것을 보시고, 착한 일을 행하십시오. 막달이니 미역을 먹어두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이미 먹고있다.”
“늘 말씀 드리지만 모가 난 곳엔 앉지도 마시고, 높거나 낮은 곳은 다니지 마십시오 가리시네. 해산물을 취할 때에는 비늘이 없는 것은 입에 대지도 마시구요. 그리고······.”
야스카산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있기 지루했다.
“먼저 가겠다.”
“아! 저도 그럼 가겠습니다.”
가리시네가 자신을 따라오려고 하자 야스카산이 제지했다.
 “너는 어차피 오지 못한다. 나는 장로들을 보러 가겠다.”
“그러십니까? 그럼 나중에 따로 찾아가겠습니다 야스카산.”
가리시네가 공손하게 예를 표하며 물러서자 야스카산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초조했다. 손이 근질근질했다.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아사신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가리시네의 혀에 흥분하면서도 머리 속은 냉정했다. 아사신이 보고 싶었다. 자신의 손에 흥분하는 그 얄미운 남자의 얼굴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아사신!-
야스카산은 어느새 뛰고 있었다. 무서운 표정을 한 채 뛰어가는 자신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미처 야스카산을 피하지 못한 한 아이가 그의 허리에 부딪혀 나가떨어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가야 했다. 얼른 가야 했다. 그 생각만이 전신을 달렸다.

 -아사신!-
-아사신!-

날듯이 달려와 숨을 고를 세도 없이 문을 쾅쾅 두드렸다. 집에는 아무도 없는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야스카산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누구 없느냐? 나와라! 당장 문을 열어라!”
야스카산은 초조해져서 문을 두드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에서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곧 빼빼마른 소년 같은 여자아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수라킨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족장?”
“아사신을 불러와라. 아니, 내가 들어가서 보겠다.”
“오빠는 지금 없습니다.”
막 수라킨을 밀치고 들어가려던 야스카산이 멈칫했다. 고개를 슥 내밀어 안을 살피자 정말로 사람의 기운은 없었다.
“어디 갔지?”
“글쎄요. 아침도 안 먹고 일찍 나갔어요. 화단을 장식할 새로운 모종을 발견했다고 하던데요. 아마 그것을 채집하러 간 게 아닐까 해요.”
수라킨의 설명에 야스카산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런건 수고스럽게 직접가지말고 자신에게 말하면 캐다 줄 텐데 말이다.
“언제 돌아오지?”
“아마 저녁 먹을 때 정도 되면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저녁.”
야스카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멀었다.
 “타스가는 함께 갔느냐?”
“아니요. 타스가는 어젯밤 자신의 집에 돌아가서 잤습니다. 정오쯤 되면 돌아올 것입니다.”
“알았다.”
야스카산은 잠시 머뭇거리다 돌아섰다. 저녁에 다시 오면 될 것이었다.

하루는 바쁘게 흘렀다. 그는 전사들을 교육시켰고, 바르바칸을 만났고, 장로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했으며, 힐레멘을 만나 학교교육에 대한 진척은 얼마나 있는지 닥달하였다. 힐레멘은 똑똑한 남녀 스무 명씩을 모아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점심때즈음 다시 가리시네를 만나 식사를 했고, 바르바칸과 다시 맞부딪쳤다. 정복하지말고 회유를 하자는 바르바칸의 말에 어떤 방식으로 회유를 하자는 것이냐고 자세한 의견을 제시해달라고 야스카산이 화를 냈다.
 오후에는 옛 바산족의 영토관리를 지시한 장로를 불러 이주정책 시행이 언제쯤 가능한지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명했다. 그러다 다시 가리시네를 만나 하릴없이 한동안 붙잡혀 있다보니 다시 아사신의 집을 찾은 것은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지금쯤은 돌아왔겠지- 하고 생각하며 찾아가자, 수라킨이 화단에 물을 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야스카산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왜 화단을 돌보는 거지? 그것은 아사신이 하는 일이 아니던가?”
“요즘에는 저도 돌보고 있었어요. 가끔 이렇게 오빠가 늦을 때면 저도 화단을 돌보곤 했답니다.”
수라킨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아직도 오지 않았나?”
“네 족장.”
“안에서 기다리겠다.”
야스카산의 말에 수라킨은 선선히 문을 열었다. 야스카산이 들어가자 거기에는 정체불명의 음식들을 앞에 둔 타스가가 끔찍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식사 중이었군.”
“네 족장. 식전이면 드십시오.”
“아니, 먹었다.”
야스카산은 움찔했다. 아직 식전이었지만 절대 먹고싶지 않았다. 저번에 마셨던 한 모금의 인상이 아주 강렬했다.
“아사신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군.”
“네. 그래서 저도 조금 걱정하고 있습니다.”
야스카산도 식탁에 앉았다. 왠지 약간 불안해졌다.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한 바깥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곧 돌아올 것이다.

달이 뜨고, 완전히 세상은 어두컴컴해졌을 무렵에도, 야스카산은 똑같은 자세로 아사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 늦는군.-
타스가가 안절부절 못하며 옆에 서 있었다. 수라킨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외려 침착하지 못하는 타스가를 향해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아, 때 되면 오겠지. 똥마려운 개마냥 그러고 있을 거야? 좀 앉아.”
“늦어. 이렇게 늦게 돌아오시다니. 말 들어보니 아침 댓 바람부터 나갔다면서?”
“살다 보면 늦는날도 있는거고 그런거지. 오빠가 한두 살 먹은 애야? 가만히 기다려봐.”
“그래도······.”
“기다려보래도.”
수라킨의 엄한 한마디에 타스가는 기가 죽어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어제 집으로 돌아가는게 아니었는데.-
이미 늦은 후회였다. 심각하게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않고 의자에 앉아 눈만 희번뜩 거리는 야스카산이 뿜어내는 오오라에 살이 떨려 죽을 지경이었다.
 달이 중점에 떠올랐다. 이제 세상은 완전히 어둠과 고요에 잠기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고, 간간이 개 짖는 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내일은 비가 올 모양인지 달무리가 심하게 지고 있었다. 점점 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이 유리창을 흔들어댔다. 야스카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타스가.”
“네 족장.”
타스가가 얼른 다가왔다.
“전사들을 불러라. 신부에게 돌아오지 못할 일이 생긴 모양이다.”
“네.”
타스가는 급히 뛰어나갔다. 낮까지만 해도 따스한 햇살이 내려쬐이더니 이제는 공기 자체가 습했다. 먹구름에 달이 가려지고 있었다.
-무슨 사고라도 난 건가 보군.-
전사들이 몰려오자 야스카산은 그들을 산으로 들로 풀어놓았다. 화초를 채집하러 갔다 했으니 분명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했을 거라는 생각 하에서였다.
전사들은 야스카산의 지휘 하에 그들의 신부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들의 부산스러움에 잠들려던 사람들도 하나 둘 기어 나와 그들과 함께했다. 신부는 중요한 존재였다. 찾아야만 했다.
“서쪽 숲은 어떤가?”
“여기는 없습니다.”
“바산과의 경계지역은?”
“없습니다.”
“산으로 정찰을 나간 조는 어떻게 되었지?”
“돌아왔습니다만, 성과는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보고에 야스카산은 입술을 깨물었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저 멀리서 횃불을 손에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본 야스카산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자꾸만 심장 한켠이 술렁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욕심 많기로 소문난 다이알이었다. 자식욕심이 많아서 여자를 갈아치우기로 유명한 남자였다. 그런 주제에 돈은 엄청나게 밝혀서 일찍이 대성한 남자였다. 가끔 세금을 떼어먹는 일이 있어 자주 장로들과 싸우곤 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아! 족장!”
다이알이 야스카산을 알아보고 다가와 서둘러 예를 표했다.
 “제 여식이 사라져서 집안 식구들과 함께 찾고 있었습니다.”
“여식이라니. 그대의 여식이 실종되었느냐?”
“네. 그렇습니다. 곧 혼례를 치를 예정인데 실종이 되어버려 신랑쪽 사람들과 함께 찾고 있었습니다. 밤중에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야스카산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신경이 부서져내릴것만 같았다. 예감이. 지독한 예감이 들었다.
“···네 여식의 이름이 무엇이냐.”
다이알이 허리를 굽히며 황송해 하며 대답했다.
 “제 부족한 여식의 이름은 소사린이라고 합니다 족장. 곧 찾아서 들어갈 터이니 소란을 용서해주십시오.”
자신의 뒤에 서있던 타스가가 저도 모르게 헉하는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야스카산은 현기증을 느꼈다. 머리 속에 번개라도 치는 것 같았다.

 심장이, 심장이 너무도 아팠다.

야스카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뒤에서 다이알이 당황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구멍이 말라비틀어진 것처럼 아파와서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족장!”
전사들이 뛰어왔다. 그는 다이알과 자신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불안해 하고 있었다. 야스카산이 말했다.
“신부는 이 근방에 없다. 다시 수색한다.”
“그럼 어디에?”
“말과 개를 준비시켜라.”
야스카산의 눈동자가 사나워졌다. 목소리에 날이 섰다.

“신부를 잡아온다.”




아사신은 좌우를 살피며 걸었다. 한발 한발 내딛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뒤에서 소사린이 조심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어디쯤 왔을까?”
“글쎄, 나도 이렇게 멀리까진 나가본 적이 없어.”
아사신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불안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말을 타고 왔어야 하는 거였나?”
“아니야. 그러면 눈에 띄었을 거야. 그러면 이렇게 멀리 도망오지도 못했을 거야.”
“그건 그래.”
아사신의 말에 소사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다른 부족의 마을이 나타나려면 얼마나 가야 하는 걸까.”
“음. 할머니는 해가 뜨는 방향으로 곧장 가면 친절한 부족이 있다고 말해주었었어. 언젠가 할머니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자신의 마을로 데려가서 하룻밤을 잘 대접한 뒤에 우리 부족의 경계선까지 배웅해주었었다고 그랬었어. 꽤 멀었다고 이야기 했으니··· 한동안 찾기 힘들 것 같아.”
“힘내자 우리.”
“응 아사신.”
소사린이 밝게 웃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입은 옷은 낮에 입었던 그 옷 그대로였다. 길게 발치를 휘감는 치마자락은 이미 찢어서 무릎까지 숭덩 걷어올라가 있었다. 그 미끈하게 드러난 다리를 바라보다 아사신은 고개를 획돌렸다. 얼굴이 붉어져있었다. 소사린이 짖궂게 물었다.
“어디 쳐다봤어?”
“안 봤어.”
“거짓말. 내 다리 쳐다보지 않았어?”
“안봤다니깐!”
아사신이 버럭 신경질을 냈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붉어진 채였다. 소사린이 웃으면서 아사신의 어깨에 매달렸다.
“바보, 봤던 안 봤던 무슨 상관이야. 이제 나는 네건데.”
“소사린···.”
아사신은 고개를 돌려 소사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다정한 검붉은 눈동자가 달빛에 일렁이고 있었다.
“사랑해.”
“나도.”
둘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깊이 입맞추었다. 소사린의 입에서 향긋한 꽃 내가 몰려와 아사신의 숨결과 뒤섞였다. 그 숨결은 따스했다.
-소사린은 따뜻해.-
아사신은 생각했다. 비교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와 입맞추며 서로의 입술을 탐하는 동안 머리속으로는 야스카산의 입술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불꽃같았던 입술. 탐욕스러운 혓바닥. 거친 숨소리. 강요하던 목소리.
-그만.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
아사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 속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내뻗는 남자의 얼굴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자신은 소사린과 도피 중이었다. 사랑하는, 사랑하는 소사린과.
-바보 같은···.-
그러니까, 그 바보 같은 얼굴은 기억하지 않을 거다. 검을 주면서 받으라고 강요하던 오만한 얼굴도, 신성수를 떠맞기면서 미소 짓던 얼굴도. 모두모두 잊어줄 테다.
“아사신 왜 그래?”
소사린이 입술을 떼고 그런 아사신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사신은 격하게 한번 숨을 몰아 쉬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가자.”
소사린은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아사신의 손을 맞잡았다. 둘은 사이 좋게 어두운 숲 속을 걸어 들어갔다.
깊은 밤이었다.
 바람은 점점 거세어져 갔고, 달은 먹구름사이로 숨어버렸다. 낮에도 어두 침침한 숲을 밤에 걸어가려니 정말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었다. 밤의 맹금류가 활개를 치고 날아다니며 구슬프게 울어재꼈다. 그들이 한번 날아간 다음에는 반드시 가엾은 희생물의 비명소리가 뒤따라왔다. 소사린이 가늘게 떨면서 아사신의 옆에 꼭 붙어왔다.
“아사신. 무서워.”
“걱정하지마 소사린. 이 숲만 벗어나면 금방이야.”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조금만 참아. 불을 피울 수가 없으니까 할 수 없어.”
불을 밝히면 숲을 벗어나는 것은 더 쉬울 테지만 그것은 나 여기 있으니 잡으러 오라- 고 광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둘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환할 때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걸었지만 어차피 보이지 않는 마당에 그것까지 챙기기엔 무리였다. 발을 옮길 때마다 파삭파삭 부러지는 소리에 아사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구구구구구-
-치익, 치익.-
새소리.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작은 포유류가 뛰어다니는 소리. 어둠에 잠긴 숲은 살아있었다. 그들의 작은 눈동자가 이 숲의 유일한 이방인인 아사신과 소사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사신.”
소사린이 불안한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찰싹 달라붙었다. 아사신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어디쯤 왔을까?”
“조금 더 가자.”
바람이 윙윙대고 날이 어두울수록 오감이 생생해졌다. 발 밑에서 터지는 낙엽과 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에 신경이 예민해졌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일부로 물이 있는 곳은 다 거쳐서 왔지만 불안했다.
-금방이야. 불안해 하지말자.-
아사신은 희미한 윤곽만 보이는 소사린을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여기로 지나갔습니다.”
등을 구부리고 바람에 쓸린 땅을 쳐다보던 전사가 말했다. 그는 뛰어난 사냥꾼이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부러진 나뭇가지와, 풀이 흐트러진 모양을 관찰하고 있었다.
 “물웅덩이를 건넜군요. 개가 더 이상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있어요.”
타스가가 옆에서 말했다.
 “더 이상의 흔적은 없나?”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횃불을 밝히지 말라는 야스카산의 명 때문에 그들도 아사신을 뒤쫓는데 힘겨워 하고 있었다. 야스카산은 혹여라도 아사신이 횃불의 위치로 자신들을 찾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월등히 많은 인원과 훌륭한 사냥견을 가지고 있어도 바람 때문에 수색이 힘들었다.
“족장! 저기에 이런 것이.”
한 전사가 서둘러 야스카산에게 다가와 붉은 실 뭉텅이 같은 것을 건냈다. 야스카산은 그것을 받아 들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 계집의 머리카락이군.-
“분명히 이 길을 건넜다. 수색을 계속해라. 그리고.”
야스카산은 소사린의 머리카락을 발로 비비며 비틀린 웃음을 지어보였다.

 “신성수 포사 시오사라를 데려오너라.”




“배고프지 않아?”
“응. 조금.”
아사신은 소사린을 푹신푹신한 나뭇잎이 깔려있는 곳에 앉혔다.
 “조금만 더 고생하자.”
아사신도 옆에 털썩 주저앉자 소사린이 어깨를 기대왔다. 두 연인은 서로의 꽁꽁 얼은 손을 호호 불어주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움푹 파인 곳이라 그런지 바람도 많이 불지않아 추위가 한결 덜했다. 밤하늘에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기대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라 가슴 한 켠이 따스해졌다.
“아사신. 날 처음 봤을 때 기억해?”
문득 소사린이 물었다.
“음. 널 처음 봤을 때라면······.”
아사신은 기억을 더듬었지만 잘 기억 나지 않았다. 소사린은 너무 어릴 때부터 옆에 있어주었고, 이제는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람이었다. 따지고보면 수라킨을 알아온 시간이나 소사린을 알아온 시간이나 비등비등한 것이었다.
아사신이 대답을 못하자 소사린이 살포시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말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 너는 신부의 아이라서 늘 사람들의 이목에 집중 당해야 했고, 그래서 나도 너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 그렇게 자꾸 너에 대해 알게 되고 너를 보게 될수록 나는 네가 점점 더 보고 싶어지고 친해지고 싶은 거야. 너는 자주 밖에 나오지 않아서 하루종일 네 집 문 앞에서 기다린 적도 있었어.”
“오로지 나를 보기 위해서 말야?”
아사신의 어이없다는 듯한 말에 소사린이 미소 지으며 뺨에 살짝 입술을 맞추었다.
“그냥 그게 좋았어. 지금생각하면 나는 첫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걸지도 몰라. 다정한 회색 눈의 사내아이한테 그냥 마음을 빼앗겨버렸어. 그래서 용기를 내서 다가간 거야. 나는 소사린이라고. 너랑 친해지고 싶다고.”

-네가 아사신이지?-

문득 오랜 기억 속에 묻혀있던 그 장면이 아사신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너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족장이 죽도록 미웠어. 내게 허락된 행복한 미래를, 단 하나의 기회를 그 남자는 다 가진 주제에 너무 쉽게 빼앗아 버렸으니까. 너마저도 원망스러웠어. 내 가슴속에 이렇게 활활 타오르는 격한 감정이 있을 거라곤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그때는 정말 너까지도 원망스러웠었어. 하지만.”
소사린이 빙그레 웃었다.
“내가 어떻게 너를 미워할 수 있겠니. 네가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내 이기적인 면에 나조차 질려버렸어.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은 너일 텐데, 나는 내 상처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이를 악물었어. 네 앞에서만큼은 티내지 말자고, 예전과 똑같이 대하자고 다짐했었어.”
“소사린.”
“하지만 나도 사람이라 별 수 없더라. 도망가자는 네 말에 이렇게 부모형제 다 버리고 떠나왔잖아. 네게서 안락한 미래와 수라킨까지 포기시키고 말이야.”
“그렇지 않아! 나는 내 의지로 너를 데리고 떠나온거야.”
아사신은 억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나역시도! 나역시도 이렇게 되길 바라고 있었어. 마지막 용기가 필요했던 거야. 그런 남자한테 휘둘리지 말고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만 했어.”
아사신은 소사린을 강하게 껴안았다. 두 사람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맞물렸다.
“너를 내가 죽게 할 것 같아? 불행해지도록 내버려둘 것 같아? 안그래. 절대 그렇지 않아. 너는 행복해야 해. 그것도 내 눈 앞에서 행복해져야 해. 그 빌어먹을 신탁이 내려오기 전까진 모두 가능한 일이었어. 꿈이 아니었단 말이야. 그 날 이후,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지. 이건 그 잘못되버린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는 행위야. 우린 서로 사랑하고, 행복해질 거야.”
아사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소사린은 그 속에서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녀는 불안해졌다. 행복해져야 한다고,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거듭 힘주어 말하는 아사신의 말 속에서 그녀가 읽은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아사신의 혼돈이었다.
소사린은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아사신···.”
“아니야!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소사린!”
아사신은 크게 외쳤다. 잠시 달이 드러나며 아사신의 흰 얼굴을 비추었다. 회색 눈동자에 설움이 가득했다.
 “나는 원해. 너를 원해 소사린. 네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 나를 두렵게 해.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소사린은 잠시 머리 속이 텅 비는 쇼크를 받았다. 그녀의 작은 머리 속에서 모든 혼란이 일시에 멈추었다.
 그녀는 넋을 잃고 소리치는 아사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두 사람을 한가운데 두고 정지되었다. 바람도 일지않고, 부엉이도 울지않고, 날짐승도 뛰지 않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이기적이니까.-
그녀는 아직도 뭐라고 떠들고있는 아사신의 입을 그녀의 입술로 부드럽게 막아버렸다. 메말라서 살짝 터진 입술사이로 자신의 입술을 밀어붙이며 혀를 내밀어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사신이 당황하여 밀어내려고 했지만 끝까지 붙어서 입술을 겹쳤다. 나중에는 아사신도 그녀의 열정에 응해주어 한참을 그렇게 서로의 입술을 탐할 수 있었다.
 한참 후에야 소사린이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떼내었다.
“알았어. 믿고있어 아사신. 꼭 나를 행복하게 해줘야 해?”
빙긋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소사린에게 아사신은 잠시 의아한 얼굴을 지었다가 바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응! 반드시!”




야스카산은 사납게 반항하며 끌려온 듯 더운 김을 뿜어내는 시오사라를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족장! 여기서부터는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타스가가 말했다. 아사신과 소사린은 길이 없는 곳으로 골라 들어갔는지 심하게 좁아지는 나무의 간격은 말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걷는 시간보다 더 걸릴 것 같았다.
 야스카산은 말에서 내렸다. 추적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동쪽 하늘에서 희미한 여명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오사라.”
야스카산은 전사들의 손에서 화를 내며 꼬리를 세우고 있는 신성수에게 다가갔다. 야스카산이 다가감과 함께 이를 드러내며 반항하던 시오사라는 얌전하게 꼬리를 내리고 귀를 쫑긋 세웠다. 야스카산은 미소 지었다.
“많이 컸구나 시오사라. 네 주인이 네게 잘해 주더냐?”
시오사라는 대답대신 야스카산의 발 밑에 엎드려 신발을 핥았다. 처음에 고양이만하던 덩치가 이제는 제법 큰 개만 해져 있었다. 야스카산은 시오사라의 애교에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네게 잘 대해 준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시오사라. 너는 네 주인을 찾을 수 있겠느냐?”
시오사라는 짧게 킁- 하는 소리를 냈다. 노란 두개의 눈이 반들거렸다.
 야스카산은 싱긋 웃었다.
“그렇다면 네 주인에게 우리를 안내해라.”
야스카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오사라가 벌떡 일어섰다. 시오사라의 눈동자는 그 어느 곳도 헤매지 않고 정확하게 숲의 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점점 붉은빛이 진해지는 털을 바람에 나부끼며 긴 주둥이에 잔주름을 세우며 냄새를 맡더니 다음순간 크게 뛰어올랐다.
“시오사라를 쫓아라! 거기에 신부가 있다!”
야스카산이 외쳤다. 전사들이 신속하게 시오사라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사슴을 사냥할 때처럼 소리도 없이 움직였다. 바람이 그들의 발자국 소리를 지우고, 숲의 어둠이 그들의 몸을 덮었다.
전사들이 모두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야스카산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의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색은 다시 밤이 되도록 그다지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간간히 쉬었다 간 흔적이라던가, 무언가를 먹은 흔적을 발견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찾기는 어려웠다. 아침나절 한차례 소나기가 퍼붓자 그것은 더욱 힘들어졌다. 한낮에도 먹구름이 시커멓게 하늘을 뒤덮고있어 저녁처럼 어두웠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은데요?”
타스가가 걱정이 되는지 멀리 내다보면서 말했다. 간밤에 길을 잘못 짚었는지 아사신은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리 가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거 위험한데요.”
타스가의 걱정을 뒤로하고 야스카산은 아무 말 없이 앞장섰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었다.




아사신과 소사린은 끊임없이 걷고 있었다. 여기는 정말 이상한 곳이었다. 가면 갈수록 바람은 거세지고, 추위도 심해졌다. 아직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추워질 날씨가 아닌데도 그러했다. 처음에는 살을 에는듯한 강풍이 몰아치다, 이제는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여긴 어딜까?”
“아무래도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건 아닌 것 같아.”
“하지만 방향은 이곳이 맞아.”
아사신은 미소 지었다.
“일단 올라가보자. 만약 틀린 길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이 곳을 벗어나면 정말로 족장은 우릴 찾아내지 못할 거야.”
 소사린도 미소 지었다.
“그래. 나 역시 너랑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 길이 어떤 길이건 상관없어.”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계속 숲을 헤쳐나갔다. 이 숲은 이상했다. 점점 체감온도는 떨어져만 가는데 나뭇잎은 하나도 빛바랜 것이 없이 푸르고 싱싱했다. 싱싱을 지나쳐 무성하게 뒤덮일 정도였다. 바람과 진눈깨비만 아니라면 여름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바람이 거세져서 점점 눈을 뜨고있기 힘들게 되었다. 아직은 발치에 눈이 쌓인다거나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대로 계속 걸어가다간 언젠가는 눈으로 덮인 빙설원이 펼쳐진다 해도 아사신은 놀라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해가 뜨는지도 지는지도 제대로 몰랐는데 어느새 세상은 깜깜한 밤이었다.
 확실히 여자가 이 불안정한 행로에서 먼저 지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소사린은 몇 번이나 넘어지면서 드러난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괜찮아 소사린? 내가 업어줄까?”
“아니야. 너도 힘들잖아. 내 몸은 내가 가눌 수 있어.”
소사린은 손사례를 치며 밝게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근 이틀을 쉬지 않고 걸어왔던 지라 그녀는 많이 지쳐있었다. 휘청휘청하는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걷는가 싶더니 급기야 털썩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소사린!”
“괜,찮아 아사신.”
소사린은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리를 질질 끌면서 상체를 일으키려고 몇 번 힘을 주다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소사린은 난감한 얼굴을 하고 배시시 웃었다.
“일어나 지지가 않네.”
“이대로 잠시 쉬어가자.”
“그럴까?”
아사신은 물과 먹을 것을 꺼내 소사린에게 건냈다. 소사린은 얌전히 그것을 받아먹었다.
 가만히 나무그늘에 앉아 떨어지는 진눈깨비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스스로의 신세도 잊고, 약간은 감정적이 되어버렸다.
 눈은 좋아하지 않았다. 눈은 차갑고, 차가운 것은 생명이 시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곧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겨울에는 좋은 기억 따위 하나도 없었다. 원래도 굶는 날이 더 많았던 어린시절 이었지만, 겨울은 더욱 혹독했다. 사람들의 인심도 각박해져서 아무도 그들 버려진 모자를 돌보지 않았다. 풀을 캐러 눈밭을 뒤지면서 수라킨에게 죽을 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어머니가 죽은 것도 겨울이었고, 시오사라가 죽은 것도 겨울이었다. 너무도 사랑했던 두 여인을 잃었던 기억은 아직도 뇌리에 고스란히 박혀있다. 하얀 눈밭 위에 나뒹굴던 시오사라의 주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사신은 호오- 하고 입김을 불었다. 진눈깨비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잠시 쉬면서 먹을 것을 취했더니 기운이 다시 났다. 이대로 영원히 이 길을 헤매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소사린이 말했다.
“무슨 소리 안 들려?”
“소리? 아니?”
“이상해. 뭔가 방금 헐떡이는 소리를 들었는데······.”
“착각 이겠지.”
“그런가?”
둘은 가만히 침묵하며 주위에 집중했다. 그러나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이 윙윙대는 소리와, 그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만 가득할 뿐이었다.
 “그만 가자. 역시 여길 얼른 넘어가는 게 좋겠어.”
아사신은 벌떡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소사린도 준비를 했다. 둘의 걸음이 급해졌다. 아사신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소사린이 무언가를 들었다고 말하자 점점 불안해졌다.
 둘은 계속 걸어나갔다. 점점 공기가 차갑게 얼고 있었다.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이번엔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무언가 잘못된 방향으로 왔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제와서 돌아가기엔 늦었다고 생각했다. 돌아가면 혹시라도 족장이 풀었을 수색대와 마주칠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이 숲을 벗어나야만 했다.
그것의 소리는 처음에는 아주 미약했다. 눈에 파묻히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만이 울리는 이 곳에서 그것의 소리는 확실하게 들리고 있었다. 착각할래야 착각할 수가 없었다.
숨을 몰아 쉬는 소리. 게걸스럽게 주시하는 눈동자.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움직임. 눈 위에서 날렵하게 움직이는 두 쌍의 다리.
아사신의 손을 잡은 소사린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아사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둘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급한 움직임으로 서둘러 앞으로만 나아갈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앞으로 나갈수록 그것은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린내 나는 그들의 숨결을 맡을 수 있었다. 그들도 이제는 적의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내며, 한발한발 서두르지 않고 다가오고 있었다.
 “아사신.”
소사린이 떨리는 음성으로 아사신을 불렀다. 아사신은 신중한 눈빛으로 좌우를 살펴보았다. 문득 시오사라가 해줬던 말이 기억났다.
-늑대란 사납고 교활하기 때문에 마주치게 되면 최대한 빨리 도망치는 수밖에 없어. 나도 어렸을 때 늑대에게 공격 당한 적이 있지. 아마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늙은 늑대였던 것 같은데 어리고 손쉬워 보이는 나를 공격한 모양이야.
 나는 재빨리 나무위로 올라갔단다. 놈들은 나무를 타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죽어라 기어올라가서 아버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거든. 거의 반나절을 그렇게 앉아있으려니 나도 죽을 맛이고 늑대녀석도 죽을 맛이었겠지.
 알고있니 아사신? 혹시라도 늑대와 마주치게 되면 절대 늑대의 눈을 바라보아선 안돼. 그것들이 나무위의 사냥감을 어떻게 사냥하는지 알고 있니? 그저 바라볼 뿐이야. 계속 쏘아보는 거지.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아.
 나는 나무위에 꼿꼿하게 앉은채로 움직일수 없게 되어버렸어. 그것들의 눈동자엔 마력이 있어서, 내 혼을 움켜쥐고 놓아주질 않아. 늑대의 눈을 쳐다보게 되면 그대로 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가 없게 되 버려. 다람쥐나 오소리는 그렇게 해서 땅에 떨어지게 된단다. 충분히 도망갈 수 있음에도 도망가지 못하고 그렇게 얼어붙어 있다가 급기야는 굶주린 늑대의 눈앞으로 떨어지게 되는거야. 그러니까 아사신. 혹시라도 늑대와 마주치게 되면 절대로 그들의 눈을 바라보아선 안된단다.-
아사신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었다.
 -늦었어요 할머니. 이미 늦었어요.-
나무에 기어오르는 순간 늑대는 뒤에서 자신들을 덮칠 것이었다. 도망가려고 뛴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사신은 소사린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소사린. 내가 미끼가 되어 도망갈 동안 나무위로 올라가.”
“싫어! 절대로 싫어! 네가 미끼가 되다니!”
소사린은 벌벌 떨리는 음성으로 격하게 말했다. 아사신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내 말 잘 들어봐. 이대로는 우리 둘 다 죽어. 그럴 바엔 하나라도 살아야지. 어서 나무위로 올라가 소사린.”
“차라리 내가 미끼가 되겠어!”
“소사린!”
소사린은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고개를 흔들 때마다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내가 너를 죽이려고 여기까지 데려온 줄 알아? 그럴바엔, 그럴바엔 나 혼자 깨끗하게 죽었어. 너의 마지막이 나 때문이라면 나도 차라리 목숨을 끊겠어.”
“소사린. 이러지 말아.”
아사신은 괴로웠다. 소사린은 이 상황의 다급함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데리고 나온 거야. 알겠니? 난 죽어도 좋아. 나는 너를 살리고 싶은 거야. 응?”
“필요 없어! 너를 죽이고 내가 사는 것 따위, 내가 한순간 이라도 원한 줄 알아? 같이 살지 못한다면 차라리 나도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어.”
아사신의 설득에도 소사린은 완고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둘 다 죽은목숨 이었다. 아사신은 미칠 것만 같았다.
“제발, 나를 봐서라도 살아줘. 응?”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소사린은 끝까지 완고했다. 결국 아사신은 결심을 내려야만 했다. 이대로 둘 다 죽을 수는 없었다.
 “좋아. 그럼 내가 신호를 보내면 뛰는 거야. 알았지? 저 멀리 보이는 것이 동굴이기만을 빌어. 만약 저기까지 뛰어서 저기가 은신처가 되지 못한다면 우린 이 자리에서 오늘 죽는 거야.”
“알았어. 알았어 아사신.”
소사린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떨어진 언덕길위로 작고 거므스름한 무언가가 보였다. 그것이 바위덩어리인지 동굴인지 그 정체는 육안으로 구분이 불가능했다. 둘은 침착한 걸음으로 계속 걸었다. 늑대무리의 으르렁 거리는 위협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들이 걷는 속도만큼 늑대들도 착실하게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사신이 갑자기 외쳤다.
“지금이야, 뛰어!”
“아사신!”
둘은 손을 마주잡고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주춤하던 늑대무리도 그들이 달리기 시작하자 곧 컹컹거리며 뒤쫓기 시작했다.
 “뛰어! 뛰어 소사린!”
“아사신! 아사신!”
둘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비명을 지르며 달렸다. 절로 눈물이 솟았다. 이곳에는 자신들을 보호해줄 아무것도 없었다. 순찰을 도는 족장의 전사도, 도움을 청할 이웃도 없었다. 그들은 나약했다. 얼른 허리춤을 뒤져 칼을 꺼내 잡으며 아사신은 눈을 크게 떴다. 뒤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늑대울음소리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대충 어림잡기에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잡히면 뼈도 못 추리고 갈기갈기 찢길 것이 뻔했다.
 -제발, 제발.-
마음속으로 간절히 염원했다. 제발 저것이 동굴이나 은신처이길 바란다고, 그래서 소사린을 살릴 수 있길 바란다고 간절히 염원했다.
 죽어라 달려가자 그곳은 다행스럽게도 동굴이었다. 절로 욕설을 내뱉을 만큼 다행스러웠다. 서둘러 소사린을 밀어넣고 자신도 들어간 후 주변에 널브러진 돌을 주워들었다.
 “가방에 든 부싯돌로 불을 지펴!”
“아, 알았어!”
소사린이 덜덜 떨면서 부싯돌을 꺼내 딱딱 마주쳤다. 그러나 불을 지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염소기름으로 적셔진 잔가지에 불꽃이 튀며 작은 불씨가 생겼다가 사그라들었다. 소사린의 얼굴에서 비지땀이 흘렀다.
 “소사린!”
“하고있어! 하고있어!”
아사신의 돌팔매질에 늑대가 캐갱 하는 소리를 내며 납작하게 엎드렸다. 나름대로 어릴 때 산에서 토끼나 새를 잡는다고 돌팔매질 연습을 한 것이 아직도 통하는 모양이었다. 비록 그때는 기절을 목적으로 사용했고 지금은 살상을 목적으로 사용하긴 하지만 말이다.
“제발, 오 세상에. 제발 붙어줘.”
소사린의 간절한 외침이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갑자기 소매자락을 물리자 아사신이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칼을 찔러넣었다. 늑대의 절규소리와 함께, 피비린내가 확하고 끼쳤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불타는 노란 눈동자는 한 두개가 아니었다.
 “소사린!!”
“됐어! 됐어 아사신!!”
소사린이 기쁨에 넘쳐 소리질렀다. 어둠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소사린의 손에는 횃불이 들려있었다.
 “이녀석들! 맛 좀 봐라!”
아사신은 횃불을 건네 들고 기세 좋게 흔들었다. 털 꼬슬리는 냄새가 퍼지면서 늑대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캥!-
-캐캥!-
한참을 정신없이 불을 휘두르며 근접전을 방어하고, 돌을 던져 무리를 내쫓았다. 늑대들은 점점 자신들의 열세를 깨달았는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하, 맛이 어떠냐 이 녀석들!”
아사신은 신이 나서 불을 휘둘렀다. 늑대 무리들은 꼬리를 말고 언덕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점점 사라지는 그들의 뒤에서 몇 차례 더 돌을 던지며 아사신이 기세 좋게 외쳤다.
“다신 보지말자! 다음부턴 사람은 공격하지 마라! 알았지?”
허리를 쭉 피고, 팔짱을 낀 자세로 아사신은 기세 등등하게 꼬리를 말아 쥔 늑대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굉장히 뿌듯했다.
 “생각보다 쉽잖아. 별 거 아닌 녀석들이었군.”
“아사신.”
“불만 있으면 조금도 겁낼게 아니었어. 여럿이 몰려오기에 굉장히 강한가 했더니 별것도 없는 것들이 진짜.”
“아사신. 잠시만.”
“하하- 할머니가 이 모습을 봤으면 대견해 하셨을 거야. 그렇지 소사린?”
“아사신.”
“왜 불러 소사린?”
아사신은 소사린을 향해 밝게 웃으며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부터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것은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는 동면준비중인 곰이었다.

“맙소사.”
아사신은 하얗게 얼어붙은 채로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늑대들이 도망간 까닭도 이것이었다. 짐승은 절대로 자신이 이기지 못할 상대에겐 덤비지 않는다.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신이여.”
소사린도 뒷걸음질을 치며 나직하게 신을 불렀다. 그녀의 얼굴에선 혈색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피란 피는 모두 얼굴을 피해 발끝으로 도망간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아사신.”
“소사린.”
두 사람의 손끝이 맞닿았다. 그것을 강하게 움켜잡자 소사린이 더듬더듬 기도문을 읊었다. 어머니나 신녀들이 기도를 할 때 그 기도를 한번도 진심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던 아사신의 귀에도 소사린의 떨리는 목소리는 정확하게 파고 들었다.
 자신에게 신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그 이유로 이렇게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신을 믿고 의지해본 적 없는 아사신이었다. 자신을 지켜 줄 거라고, 생명의 근원을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아무리 신녀들이 말해도 절대 새겨듣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이 위급한 상황에서 인간이 의지할 것은 신 뿐이었다.
“나의 신. 나의 태양. 우리를 지키소서.”
바들바들 떨리는 소사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사신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지켜주세요. 소사린을 지켜주세요.
곰이 다가왔다. 곰은 자신의 두 배는 되 보였다. 빽빽한 붉은 털이 전신을 휘감고 있었고, 검고 작은 눈동자에는 야생이 그대로 드러나있었다. 녀석은 강한 뒷다리를 이용해 두 발로 서서 아사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시초. 거룩한 당신께서 우리를 지키소서.”
둥글고 짧은 귀가 움찔거렸다. 곰이 식식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한발 한발 육중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녀석은 자신의 안식처에 무단으로 들이닥친 침입자들을 결코 용서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사신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곰의 갈고리처럼 휘어진 손톱이 횃불에 반사되어 빛났다.
 “당신의 영광됨이 온 세세에 있나이다. 우리의 주신. 하늘의 빛. 땅의 축복. 우주의 영광. 우리를 구하소서.”
기도문을 외우는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곰의 비린내 나는 숨결이 날아와 아사신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여 주소서. 맞은편에 거룩한 달을 아내로 맞으신 당신. 권세와 영광됨이 당신의 발치에 있나이다.”
거기까지외운 소사린은 더 이상 기도문이 생각나지 않는지 입만 뻐끔거렸다. 곰이 입술을 비틀자 길고 하얀 송곳니가 횃불 아래 선연하게 드러났다. 놈은 엄청나게 커 보였다. 아사신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움될만한 것은 손에 들린 약간의 돌멩이와 단검 한 자루 뿐이었다.
 “젠장, 뛰어 소사린!”
-우어어어어어어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소사린의 손을 낚아채고, 구르듯이 동굴 밖으로 튕겨나가자 뒤에서 곰이 네발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놈은 엄청나게 빨랐다. 그렇게 육중한 몸을 한 주제에 빠르기는 엄청 빨랐다. 놈이 땅을 박차고 오를 때마다 천지가 진동하는 느낌이었다.
 “아사신! 악!”
소사린이 급하게 뛰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아사신은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놈의 거대한 앞발이 지척에 있었다. 피하고 자시고할 시간이 없었다. 그대로 넘어진 소사린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납작하게 엎드렸다.
 -죽는다!-
아사신은 눈을 질끈 감고 곧이어 다가올 고통에 대비했다. 자신이 공격 당하는 동안 소사린이 멀리 도망쳐주길 바랄 뿐이었다. 소사린을 살려야만 했다. 소리를 지르며 반항하는 그녀를 힘껏 내리눌렀다.
“아사신!!!”
소사린의 비명소리, 곰이 포효하는 소리. 그리고 이어질 자신의 뼈가 박살 날 소리.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한참을 눈을 감고 온 몸을 경직 시키고 있던 아사신은 의외로 아무런 타격이 없자 살포시 눈을 떴다. 아사신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과 곰 사이에서 시오사라가 으르렁 대고 있었다.
 “···시오사라?”
“시오사라?”
아사신이 몸을 일으키자 소사린도 벌떡 일어섰다. 둘은 다급하게 뒤로 물러서며 시오사라와 곰을 바라보았다. 시오사라의 노란 눈동자가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온몸의 털을 확 곤두세웠다.
“네가 어떻게.”
아사신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시오사라가 이렇게 적절한 때에 나타나 주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아사신. 얼른 이쪽으로 와.”
소사린이 소맷자락을 끌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서야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시오사라에 대한 걱정이 솟구쳤다. 슬쩍 보기에도 시오사라는 곰에게 상대도 되 보이지 않았다. 은빛과 붉은빛이 감도는 시오사라의 털이 서너 배 가까이 부풀어 올라 덩치가 평소보다 커보이긴 했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소에 비해 커 보인다는 것 뿐이었다. 곰에게 상대할 바가 아니었다. 늘 순하게 내리뜨고 있던 눈동자는 피라도 내뿜을 것처럼 시뻘개졌고, 홍채가 세로로 갈라지며 그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입술을 비집고 자랐고, 그 끝에서 뜨거운 침이 뚝뚝 떨어졌다.
 공격은 곰이 먼저 였다. 놈은 커다란 앞발로 시오사라의 등을 가격했다. 그 공격을 날쌔게 피한 시오사라는 훌쩍 날아올라 곰의 등에 올라탔다. 송곳니를 이용하여 목덜미를 물어뜯자 곰이 노성을 지르며 두발로 일어섰다. 재빨리 등에서 뛰어내린 시오사라가 이번에는 곰의 뒷발을 후려갈겼다. 고양이과 짐승의 주무기인 발톱이 갈고리처럼 곰의 허벅지에 파고들었다. 아무리 질긴 가죽이라고 해도 신성수 포사의 발톱은 당해 낼 수가 없었는지 벌건 속살이 찢어지며 눈 위에 피가 흩날렸다.
-크어어어어!!-
곰이 포효했다. 놈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재빨리 뒤로 물러선 시오사라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겨울잠을 자기위해 비축해둔 육중한 지방이 출렁였다.
“끼앗!”
소사린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곰의 앞발에 얻어맞은 시오사라가 허공을 날아갔다.
“시오사라!”
아사신은 두번 생각할 것 없이 시오사라에게 뛰어갔다. 그러나 미처 가까이 가기도 전에 시오사라에게 저지당하고 멈춰 서야만 했다. 시오사라는 벌떡 일어나 피가 흐르는 입술을 까뒤집으며 으르렁 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시오사···.”
-크왕!-
시오사라는 다시 날아올랐다. 붉은 금빛의 반짝이는 털이 다시 꼿꼿하게 부풀어 올랐다. 재차 뛰어올라 곰의 머리위로 날아올랐으나 곰이 한수 빨랐다. 통나무도 가격 당하면 톳밥처럼 부숴져 내린다고 알려진 앞발이 시오사라의 명치에 작렬했다.
 “시오사라! 맙소사!”
아사신이 다시 일어나 다가갔다. 그러나 시오사라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이번에는 곰에게 붙들렸다. 상처를 입은 맹수는 더욱 사나워져서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아사신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단검을 쥐고 공격을 대비했다. 코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놈의 앞발 한방이면 자신의 두개골이 개박살이 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래도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견뎌야만 했다.
곰은 아사신의 머리를 향해 앞발을 휘두르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오사라가 곰의 등에 달라붙어 살점을 짓씹고 있었다. 곰은 분노했다. 온 천지가 떠나갈 듯 노성을 질렀다. 실제로 곰은 분노하고 있었다. 이 늑대 새끼만한 어린짐승에게 자신이 이렇게 당한다는 것이 치욕적으로 느껴졌다.
곰은 빠르게 두개의 앞발을 다시 휘둘렀다. 미처 질긴 살점에서 이를 빼내지 못한 시오사라가 등뼈를 얻어맞고 눈밭에 나뒹굴었다. 시오사라는 처참한 비명소리를 냈다. 시오사라가 구르는 데로 흰 눈밭에 피웅덩이가 고였다.
“시오사라!”
아사신은 분노했다. 시오사라는 등뼈가 부러졌는지 다신 일어서지 못했다. 눈앞이 벌개질 정도로 화가 났다. 왜 여기 시오사라가 왔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아사신은 칼을 바로잡고 곰에게 달려들었다. 곰 역시 달려오는 아사신을 보고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분노를 풀어줄 좋은 먹이를 만났다는 듯이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달려들었다.
 “제에기라알!!”
아사신은 칼을 잡고 허공을 날아 곰의 코를 찢어놓으려고 했지만 곰이 더 빨랐다. 놈의 앞발이 아사신의 몸통을 갈겼다. 약간 짧았지만 정확했다. 아사신은 허공을 붕 떴다. 정신이 아찔했다. 비켜 맞은 것이 그 정도였으니 정통으로 맞았다면 갈비뼈가 부러졌을 만큼의 충격이었다. 눈밭 위를 한참을 구르다 일어서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를 흔들고 이차로 다가올 공격에 대비해 재빨리 단검을 바로잡았다. 어지러운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눈을 부라렸다. 곰은 순식간에 지척으로 다가왔다. 놈은 다시 두발로 꼿꼿하게 섰다. 시오사라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주인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괴로운 모양이었다. 곰의 발이 다시 허공으로 치솟자 아사신은 칼을 높이 치켜들고 그 품으로 파고들었다. 곰의 품에 안긴 형상이었지만 덕분에 정확하게 곰의 코에 단검을 박아넣을 수 있었다. 더운피가 확하고 끼치며 비린내가 숨이 막히도록 진동했다.
 아사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위로 피가 튀었다. 오랜 세월동안 피를 보면 반사적으로 도지던 현기증에 순간적으로 구토감이 일었지만 참았다. 지금은 먹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먹히느냐 마느냐를 건 싸움이었다. 그런 소소한 반응따위에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잔뜩 손에 힘을 주고 그어내렸다. 두개골이 갈리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죽어도 같이 죽으리라는 독한 결심 하에 한 행동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상하게 곰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사신은 살며시 눈을 떴다. 곰은 자신의 코에 꽂힌 칼을 보며 손을 치켜든 자세 그대로 얼어있었다. 전혀라고 할만큼 반응이 없었다.
 살며시 뒤로 물러나자 잠시후 두어걸음 앞으로 걸어가더니 그대로 쿵 소리를 내며 무겁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사신은 곰의 쓰러진 모습을 보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곰은 등에 여러 개의 칼침을 맞고 죽어있었다. 가장 치명적으로 보이는 것은 목 깊숙이 관통 당한 장검이었다. 몹시 눈에 익은 검이었다. 예전에 바산에게서 취한 보검이랍시고 안겨주던 그 검이었다. 아사신은 창백한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끈적하게 고인 피웅덩이를 밟고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야스카산이었다.




*                *                *




 마을이 온통 수근거렸다.
 사람들은 신부가 그의 전 약혼녀와 함께 도망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워낙에 큰 사건이다 보니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머리 둘만 모였다 하면 모두 그 이야기로 정신이 없었다.
초겨울의 싸늘한 기온과 함께 마을도 차갑게 얼어붙었다. 족장의 전사들은 함구령을 받은 대로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신부의 가족인 수라킨은 거의 매일 이다시피 궁으로 달려가버렸기 때문에 만나기가 요원했다. 소사린의 가족들 역시 집안의 수치로 여기고 쉬쉬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문을 만들었고, 그 소문들은 하루가 다르게 널리 퍼져나가 이제는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야스카산의 심기도 날로 불편해지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차마 직접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하면서 은근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서운 눈초리로 시선을 마주치면 당황하여 쳐다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끈질기게 바라봐 왔다. 그 말없는 독촉에 야스카산은 신경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모든 질문과 독촉에도 아무 말이 없던 야스카산도 어머니 민네의 앞에서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어야만 했다.
“야스카산.”
“어머니.”
막 밖으로 나가려다 걸려버린 야스카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와 이야기 좀 해요 야스카산.”
“나중에 하겠습니다. 지금 좀 바빠서요.”
야스카산은 일부러 성큼성큼 걸었다. 뒤에서 민네가 치마자락을 들고 뛰어와 팔을 부여잡았다.
 “야스카산!”
“바쁩니다.”
“잠시면 됩니다.”
팔을 잡고 매달리는 통에 야스카산도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어머니인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방에서 이야기를 하지요.”
마침내 항복선언을 해보인 아들에게 민네가 웃으며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민네의 방은 소박했다. 족장의 친어머니이면서도 전혀 멋대로 소비하는 일이 없었다. 깨끗하고 정결하게 신어로 기도문을 그려놓은 벽과 신화의 한 장면을 수놓은 깔개가 전부였다. 그녀는 시녀에게 다과를 준비시키고 탁자에 앉아 진지하게 경청할 자세를 취했다.
“제가 물을 것은 신부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야스카산은 빈정대는 어투로 말했다. 요 근래 누구든 눈만 마주치면 듣고싶어 하는 것은 그 망할 신부에 대한 이야기였다.
“신부가 며칠 전 밤에 도망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직접 잡아왔다는 소문도요. 그게 사실인가요?”
“맞습니다.”
민네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것이 설마 사실이리라고는··· 아니 어째서? 그에게 물어보았습니까?”
“아니오. 아직 입니다.”
“제가 그를 만나보아도 좋겠습니까?”
민네의 말에 야스카산은 눈썹을 치켜 떴다. 참으로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어머니. 어머니께서 신부를 만나기엔 장소가 마땅치 않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가 지금 어디에 있길래?”
“신부는 지하감옥에 있습니다.”
“야스카산!”
민네는 비명을 질렀다.
“신부를 감옥에 가두다니. 제정신이십니까? 그는 신의 사람입니다.”
“고로 제 아내이기도 하지요. 아내의 부정을 넘어가 줄만큼 자애로운 남편이 저는 아닙니다.”
민네는 그 말만 하고 벌떡 일어나 나가버리려는 야스카산의 소매를 붙잡았다.
 “만나게 해주세요 야스카산.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그건 제가 말해 드릴 수 있겠군요. 신부는 자신의 옛 약혼녀의 결혼식이 임박하자 놓치기 싫어진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위고 의무고 모두 저버리고 그렇게 도망친 것이지요.”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야스카산은 언성을 높였다. 그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빛을 발했다.
“나는 그를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민네는 자신의 아들이 나가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아들의 눈 속에 번들거리던 그 흉흉한 빛을 본 순간 아무도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야스카산은 아버지의 면담요청도 무시했다. 자꾸만 자신의 오빠를 만나게 해달라는 귀찮은 이복여동생도 깨끗하게 물려버렸다. 무언가 묻고싶은 표정으로 기웃거리는 힐레멘에게는 더 과도한 업무를 주어 내쫓았고, 허락도 없이 방안으로 찾아온 가리시네에게는 발을 배로 차이고 싶지 않으면 다시는 오지 말라고 협박했다. 가리시네가 새하얗게 질려서 도망갔음은 물론이었다.
야스카산은 자신의 상태가 무척이나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스로도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깊은 밤.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그는 등불 하나만 들고 지하로 향했다.
거기에 자신이 감금해둔 신부가 있었다.

 축축한 벽과 곰팡이 냄새. 텁텁한 공기를 폐 속에 집어넣을 때 마다 온 사방에 창궐한 곰팡이의 포자를 들이키는 것 같아 아사신은 무척 기분이 나빴다.
 식사는 타스가가 하루에 두 번 꽤나 정성을 들인 것으로 가져다 주었지만 모조리 남겼다. 갇힌지 사흘이 되었을 때에는 물도 제대로 먹지않아 타스가의 속을 끓였다.
 “이러다간 병이 납니다 신부.”
“소사린을 만나게 해줘.”
아사신의 요구는 한결같았다.
“아 만나고 자시고 하기 전에 일단 몸이 건강해야 하지 않습니까? 신관이 뭐라고 하던가요. 곰에게 당한 상처가 크지는 않지만 앞으로 한동안은 조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잘못했으면 뼈가 박살이 났을 거라고요.”
“소사린을 만나게 해줘.”
“신부. 제 말을 들으십시오. 제가 반드시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네?”
아사신은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었다. 그는 정말로 여기서 굶어죽겠노라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마음이 텅 비어버려 육체가 음식을 취해도 포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야스카산과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부터 자신은 텅 비어 있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짧았던, 그리고 길었던 그 순간이 심장에 각인되어 버렸다.
도망가버린 자신을 뒤쫓으면서 야스카산은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용서할 수 없었을까, 그래서 벌을 주고 싶었을까.
어쩌면 곰에게 당하기 전에 야스카산에게 죽을뻔 했을지도 모르지.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가 바다거품처럼 터져 내렸다.
 배고픔도, 목마름도 다친 곳의 아픔도 그 순간 마주쳤던 야스카산의 얼굴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렸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얼굴. 단죄하러 온 주제에, 결국에는 제 의지대로 붙잡았으면서 그런 얼굴을 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사린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사신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타스가는 사라지고 없었다. 자신의 앞에는 차갑게 식어버린 스프와, 굳어버린 빵이 놓여있었다. 배고프지 않았지만 억지로 빵을 스프에 적셔서 목구멍에 밀어넣자 말라붙은 식도가 거부했다. 빵 조각을 뱉어내며 기침하자 생리적인 눈물이 충혈된 안구를 적시며 흘러나왔다.
“만족하세요 어머니?”
아사신은 시커멓게 죽은 눈동자로 침대 한켠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되길 원하신 건가요? 네? 왜 한번 웃어보지 그러세요. 당신의 못난 아들을 마음껏 비웃어보시지 그러세요.”
유령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무감한 얼굴을 바라보던 아사신이 문득 일어섰다. 그리고 비틀비틀 유령의 앞으로 걸어갔다.
“왜 아무 말도 없나요. 당신은 왜 사라지지 않는 겁니까! 사랑했던 기억만 내가 가질 수 있도록 해주세요. 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당신이 지긋지긋해요. 정말이지 지긋지긋해요. 죽어버렸잖아. 이젠 소멸하여 다시는 나타나지 말란 말이야!”
아사신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며 세게 소리쳤다.
“날 죽여서 데려가고 싶으신가요? 그러면 그렇게 하세요. 이 목숨 따위 내 알 바 아니야. 멋대로 세상에 내보내놓고 당신이 내게 해준 게 뭐야. 수라킨을 상처 입히고, 나를 죽이려고 했잖아! 날 사랑한 게 아니라 족장의 아들을 사랑했겠지.”
아사신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아사신은 어둠 속의 조상처럼 앉아있는 유령을 향해 모든 분노를 쏟아 부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것은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단지 나타나기만 할 뿐인 힘없는 유령에게 휘둘리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원망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인생이라고는 생각한적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절망해본적도 없었다. 자책해본 적도 없었다.
아사신은 분노를 폭발시켰다. 소리지르고 화를 내고 폭언을 껴 얹었다. 그러나 유령은 아사신이 무슨 말을 하든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든 절규와 분노를 그저 가만히 앉아서 듣고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퍼부어대던 아사신이 털썩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씩씩거렸다. 말라붙은 눈꼬리에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손을 적셨다.
 -소사린.-
이 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서 과거에 죽어버린 망령과 함께 앉아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무능력 하게 우는 것 뿐이라니.
 -소사린.-
아사신은 격렬한 기침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기운이 없다고 하더니 팔팔하잖아?”
갑자기 들린 차디찬 목소리에 아사신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족장.”
야스카산은 육중한 감옥 문을 열었다. 여기는 큰 제사를 위해 쓰일 포로를 잡아놓는 곳이었다. 곧 죽을 포로에게 좋은 음식과 좋은 환경을 지불할 필요는 없었다. 옥 안은 지저분하고 축축했으며 포로를 잡아가두는 감옥은 튼튼했다. 야스카산이 힘을 주자 무거운 철문이 신음을 토하며 옆으로 옮겨졌다. 그 사이로 야스카산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아사신의 턱을 잡고 위로 치켜들었다. 마치 가축을 검정하는 듯한 눈초리에 아사신은 몸을 떨었다.
“못 봐주겠군. 시체 같은 면상에 거칠거칠한 턱. 너도 남자라고 수염이 나는 거냐?”
아사신은 야스카산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세게라고는 해도 곤죽이 된 몸에서 제대로 힘이 날리는 없었다.
 “왜 왔습니까.”
“너를 보러 왔다. 네 입에서 진실을 듣고 싶다.”
“당신이 본 것이 진실입니다.”
“요망한 남자야. 내게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겠다는 거냐? 평소에는 시키지도 않은 말을 잘도 나불대더니 왜, 혓바닥이 얼어붙기라도 했나?”
아사신은 독이 오른 눈동자로 야스카산을 노려보았다.
“모든 것을 눈앞에서 보셨으면서 달리 해명이 필요하십니까? 그렇게 머리가 아둔하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야스카산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희미한 조명 아래서도 그것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나를 화나게 하지 마라. 그래봤자 네게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절대 그런 우를 범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비꼬는 솜씨는 여전했다. 아사신의 과장된 몸짓과 말에 야스카산의 분노가 폭발했다. 힘을 주어 아사신의 손목을 꽉 틀어쥐자 신음을 삼키며 바닥에 고꾸라진다.
“오만하기도 하구나. 네가 가진 것이 뭐가 있다고 이렇게 굴지? 내 말 한마디면 네가 아끼고 사랑하는 소사린의 목숨 따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릴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거냐?”
아사신이 눈만 치켜 떠 야스카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네네~ 그럼 제가 이렇게 굴면 안 되는 거였군요. 무릎이라도 꿇고 잘못했다고 빌며 발에 입이라도 맞출까요? 그러면 당신이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저와 소사린을 놓아주겠습니까? 하! 오만한 것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나를 잡아왔고, 그럼 예전처럼 저와 살을 섞으면서 지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구태여 변명을 바라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너는 날 화나게 한다.”
야스카산에 의해 멱살을 잡힌 아사신이 그의 얼굴에 바싹 붙었다.
“너를 보고 있으면 그 나불대는 혀를 잘라버리고 싶어.”
“자르시지요.”
아사신은 숨이 막혔다. 불타는 듯한 푸른 눈에 이렇게 가까이에서 직시 당하자 갑자기 오금이 저려왔다.
“단 한시도 내게 고분고분한적이 없었지. 반발하고 화를 내고 이번엔 도망까지 가다니. 정말이지 죽여버리고 싶다.”
“큿-!”
아사신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야스카산의 협박은 진짜였다. 그의 커다란 손가락이 기어올라와 아사신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숨 막···! 크윽!”
“나는 너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곰에게 죽게 내버려뒀어야 하는 거였나? 너를 발견한 순간 숨이 멎어버리는것만 같았다. 그대로 죽게 내버려둘걸 그랬어. 안 그래?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쯤 좀더 고분고분해진 너를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 그만, 컥!”
귀에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쇠약해진 몸은 잠시의 고문도 견디지 못했다. 붕붕거리는 소음과 야스카산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굉음을 만들어냈다. 야스카산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손가락은 무자비했다.
 정말로 이자의 손에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에야 야스카산이 목을 조르던 손을 떼내었다. 아사신은 메마른 기침을 하며 바닥에 엎어졌다. 그러나 바로 야스카산의 손이 날아와 이번에는 뒷목을 거머쥐고 허공으로 내던졌다. 열흘간의 단식 아닌 단식으로 진이 빠진 아사신의 몸은 반항도 제대로 못하고 침대에 날아가 처박혔다. 결이 좋지 못한 꺼칠꺼칠한 이불에 살이 쓸렸다.
내동댕이쳐진 충격으로 등을 움크리고 신음하는 아사신의 위에 야스카산이 타오르더니 얼굴을 치켜들어 자신의 눈과 마주치게 했다.
“내가 너를 언제까지나 봐주리라곤 생각하지 마라 아사신.”
야스카산의 목소리는 속삭임처럼 낮았지만 소용돌이치는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내뿜는 살기 때문에 아사신은 눈앞이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 여자와 어디까지 갔었느냐.”
“무슨···.”
“말해봐라. 그 여자와 잤나? 응?”
아사신은 겨우 야스카산이 말하는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소사린과 몸을 섞었냐고 묻고 있었다.
 아사신은 분노했다.
“소사린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정숙한 여자입니다.”
“그래, 퍽이나 정숙하셔서 결혼을 앞두고 옛 남자와 도망쳤지.”
말문이 막혀버렸다. 야스카산의 기다란 손가락이 아사신의 얇은 옷 사이로 파고들었다.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나고, 심장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너도 네 어미랑 똑같아.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함부로 나대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겠지. 알고있나? 네 어미역시 신부의 신탁을 받고 도망쳤던 것을. 네 놈들의 피는 똑같아. 음탕하고 간사하다.”
“어머니가?”
아사신은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가 도망을?
 야스카산의 손가락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톱이 자그마한 아사신의 유두를 짓이겼다. 손가락 모양대로 살이 움푹 파이면서 아사신이 신음했다.
“어머니가, 어머니가 그랬을 리 없습니다.”
“그래? 우리의 아버지에게 물어볼까? 네 어미에겐 물어볼 수 없으니 아버지에게 물어봐야 겠군. 아니면 장로들에게 물어볼까?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거다. 네 음란한 어미가 어떻게 남자랑 도망쳤는지 말이다.”
아사신은 어머니를 생각했다.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고 몸부림치던 어머니를, 수라킨을 없애려 들던 미친 모성을. 지금까지 나타나 자신을 저주하는 돌아앉은 여자를.
“왜? 믿기지 않나? 사실 나도 믿기지 않아. 그런 조그마한 여자의 내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도망가 버릴 만큼의 열정이 숨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었거든. 아버지는 분노하셨지. 길길이 날뛰며 모든 전사를 풀어 네 어미를 잡아오라고 하셨었다지. 네 형이 태어났을 때도 다른 놈의 씨앗일지 모르니 불길하다고 쳐다도 보지 않았다고 하더군. 장례식조차 제대로 된 절차 속에 치뤄지지 못했지.”
“어머니가···.”
아사신은 눈물을 흘렸다. 한번도 이해해보려고 한적 없던 어머니의 인생이었다. 자신의 염원을 자식에게 쏟아 붓던 불쌍한 여자라고만 생각했었다. 사랑을 위해 야밤 도주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다.
볼에 긴 궤적을 그리는 그 눈물을 야스카산이 혀로 싹싹 핥았다. 햇빛을 보지 못해 창백한 피부에 거칠거칠한 혀가 쓸리자 몹시 아팠다.
“열 네 살짜리 아내가 제대로 된 후계자를 낳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것마저 아버지의 아내들은 정숙하지 못한 신부에게 저주가 내렸다고 설쳐댔다더군. 자식을 낳을수록 네 어미는 미쳐갔어. 하나도 흡족한자식이 나오지 않았거든. 바로 너같이 말이야.”
“그만!”
아사신은 숨이 막혔다. 야스카산의 말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렀다. 어느새 맨살이 드러난 상반신에 고개를 묻으며 혀로 애무하는 야스카산의 얼굴을 밀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몸부림 치면 칠수록 극도로 약해진 몸은 제압당해갔다. 안 그래도 희박하고 눅눅한 공기 때문에 괴로워하던 아사신의 숨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쌕쌕거리는 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졌다. 야스카산은 용서 없이 손을 움직였다. 모든 살결을 쓰다듬고, 모든 치부를 매만졌다. 머리카락에 입맞추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빨았다. 급하게 그 몸을 집어삼키면서 헝클어진 머리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렸다.
“너를 뽑은 것은 신전의 실수일거야. 너 같은 것 따위······.”
“크윽-.”
아사신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쇄골에 달콤하게 입맞추었다. 울음소리에 맞춰 목젖이 오르락 거리며 떨렸다. 그 진동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손으로 잡고 가볍게 누르자 잔기침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너 따위, 너 같은 것 따위··· 한번도 원한적 없어···.”
이 사내의 맨살은 언제나 자신을 기쁘게 한다. 한없이 안고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것 따위 어떻게 되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그저 힘으로 누르고 윽박질러 껴안고 있어도 상관이 없었는데.
야스카산은 혼란에 빠져 깊이 신음했다. 마음 한켠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토록 붙잡고 싶었던 남자의 몸을 붙잡고 핥고 빨고 먹어도 충족되어지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 괴로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아사신. 아사신.”
야스카산은 열에 들떠 아사신의 몸을 깨물었다. 아사신이 신음하며 도망쳤다. 그 몸짓을 끈질기게 따라잡으며 야스카산은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밤이 깊도록, 새벽이 오도록 아사신의 신음소리와 야스카산의 애타는 목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야스카산이 타스가를 불러 명령했다.
“신부를 자신의 집에 가두어라. 삼엄하게 감시하고, 그 누구의 방문도 허락하지 마라.”




5




 몸과 마음이 얼어붙는 계절이 찾아왔다. 첫눈이 내렸을 때 신녀들은 마을 광장에 모여 올해의 마지막을 무사히 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녀들의 기도소리와 함께 사람들은 본격적인 겨울태세에 돌입하게 된다. 어린 신녀들은 하얀 옷에 붉은 수가 놓인 정갈한 옷을 입고, 태양의 네 번째 따님이신 겨울을 맞이했다. 그녀는 변덕이 심하고, 예민하기 때문에 여자가 아닌 아이들이 서서 그녀를 맞이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지난 겨울에 빚어놓은 술을 꺼내 북쪽에 바치고, 어린 신녀들이 노래했다. 다섯 개의 준비된 신석을 밟고, 바르바칸이 경계령까지 나가서 바람을 주머니에 담아왔다. 그것을 곱게 들고 돌아와 마을 한가운데에 풀어놓으면 그것으로 의식은 완료되는 것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이런 복잡한 의식을 지니는 것은 겨울밖에 없었다. 부디 폭설이나 갑작스런 추위를 일으키지 말아 달라고 마중을 나가 모셔오는 의식이었다.
기도가 끝나고 신녀들이 일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이리저리 얽혔다. 그들의 눈은 기도가 진행되는 동안 족장이 어디 갔는지 눈으로 찾고 있었다.

 작은방은 열기로 가득했다. 첫눈이 내리는 훈훈한 창 밖의 풍경과는 달리 창 안쪽은 습하고 뜨거웠다. 그 속에 두개의 그림자가 뱀처럼 얼기설기 꼬여있었다. 다리와 다리가 꼬이고, 몸통이 뒤틀리고, 서로의 입술이 서로의 혓바닥을 집어삼킬 것처럼 음란하게 움직였다. 햇살도 그 음란함에 피해가고 싶다는 듯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 엉겨 붙어 있는 두 육체의 주인은 아사신과 야스카산이었다.
“윽!”
“기다려.”
아사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만, 그만해.”
“좀 더 엉덩이를 들어라 아사신.”
아사신이 고개를 들어 뒤를 노려보았다. 머리를 처 박힌 채 그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만 하십시오. 모두가 당신을 찾고있을 것입니다.”
“알게 뭐야. 그런 작은 제사는 아버지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족장!”
야스카산은 용서 없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부풀어오른 구멍의 살들이 비명을 질렀다. 정확하게는 아사신이 비명을 질렀다.
“힘듭니다. 힘들어요. 그만해 주세요. 그만. 그만.”
야스카산은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우뚝 솟은 남근을 아사신의 구멍에 집어넣는 일에 집중할 따름이었다. 아사신은 엉덩이가 갈라지며 그것이 들어오는 느낌에 바닥을 기며 흐느꼈다.
야스카산은 사흘째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틀정도는 그래도 밖으로 나가서 족장으로서의 직분을 수행했지만 이틀 전부터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계속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만해 주세요. 제발. 정말로··· 힘이··· 듭니다.”
아사신의 간청에도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속에 넣었다 빼는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관심이 없어보였다. 아사신은 진저리를 쳤다. 마치 동물을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야스카산은 얌전히 상체를 구부리고 자신을 받아들이는 아사신을 보며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벌써 포기하는 거냐 아사신?”
“힘이 없어서 반항할 기운도 없습니다.”
아사신은 정말로 기운이 빠져버린 듯 몸이 흔들리는 대로 움직였다. 야스카산의 눈에 거의 손대지 않은 식사가 보였다.
“또 전혀 먹지 않았군. 너는 굶어죽는게 소원인가 보지?”
“먹고싶지 않습니다.”
아사신의 말에 야스카산은 코웃음을 쳤다. 고꾸라진 채 인형처럼 흔들리는 아사신의 육체를 한 손에 잡고 빙글 돌려버렸다. 아사신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먹기 싫어도 먹어야 될 거다.”
야스카산은 빵을 한입 뜯었다. 그것을 어금니로 몇 번 깨문 후 억지로 입맞춤을 했다. 아사신이 고개를 저으며 격렬하게 반항했다. 입을 열지않으려고 어금니를 깨물었지만, 야스카산이 결합부를 깊숙하게 찔러올리자 신음을 토하며 입을 벌려야만 했다.
 “그만, 그만.”
야스카산의 입술은 무자비했다. 붉고 긴 혀가 내려와 통로를 연결하고 그 사이로 음식물을 밀어넣었다. 아사신은 콜록거리며 그것을 모두 받아먹어야만 했다.
한참을 그렇게 길게 키스하던 야스카산이 입술을 땐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거칠고 강압적으로 시작된 키스는 빵이 1모두 무사히 아사신의 목구멍을 통과하자 더없이 다정하고 달콤하게 변질되었다. 잘 삼켰다고, 기특하다고 말하는 듯 한 같은 키스에 아사신의 것이 조금씩 힘을 얻었다. 그것을 느릿한 눈으로 지켜보던 야스카산이 한 손에 거머쥐고 위아래로 움직였다.
“흐으. 으-!”
“좋으냐 아사신?”
아사신은 눈물을 흘렸다. 또다시 교합이 시작되고 있었다. 내부가 축축해질 정도로 자신의 안에 토정 해놓고도 이 남자는 지칠 줄을 몰랐다. 끊임없이 입술이 빨리고, 끊임없이 아래로 삽입 당했다.
“그만해 주십시오. 제발··· 제발···.”
“가만히 있어라.”
야스카산이 버둥대는 육체를 내리누르며 부드럽게 속살을 공략했다. 뭉툭한 몽둥이가 속살을 쑤시는 감각에 아사신이 길게 몸을 떨었다.
강압적으로 구는 하체와 말과는 달리, 야스카산의 손짓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자못 사랑스럽다는 듯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축축한 입맞춤을 해왔다. 아래쪽에선 붉게 충혈된 입구를 마구잡이로 벌이며 거대한 남근이 드나드는 무시무시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지만 위쪽으로는 그것을 사과하는 듯한 모습이었기에 아사신은 제대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큭. 족장.”
“아사신. 아사신. 내 이름을 불러라.”
“으, 아아-! 아!”
“내 이름을 불러라. 아사신.”
야스카산의 집요한 요구에 아사신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야스카··· 산. 야스카산.”
“아사신!”
둘은 격정적으로 껴안았다. 아사신은 이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무엇을 바라는 건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저 지독한 쾌락 속에 부평초처럼 허공을 부유하는 자신의 의식을 강제로 끌어 잡고, 지독한 의식 너머로 쓰러질 뿐이었다.

저녁이 되었을 때, 야스카산이 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너의 전 약혼녀가 며칠 내로 성혼식을 올린 다더군.”
그 말에 아사신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소사린이? 그 남자와 말입니까?”
야스카산은 다급해 보이는 아사신의 눈빛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천천히 의복을 매만졌다. 너무도 느긋한 손짓에 아사신은 조바심이 났다.
“족장! 대답해 보십시오. 네?”
“야스카산이다.”
“야스카산. 말씀해 주십시오.”
이 다급한 상황에서 굳이 자신의 이름을 정정하는 야스카산의 태도에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아사신은 고분고분하게 말에 따랐다. 그제야 야스카산이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보는 눈동자가 미묘하게 번들거렸다.
“그렇게 그 여자가 중요한가?”
아사신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소중했다. 소사린이 자신에게 소중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야스카산이 재차 물었다.
“소중하냐고 물었다. 아사신.”
“소중합니다.”
“그래?”
야스카산은 겉옷을 걸쳤다. 금으로 만들어진 넓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오팔이 박힌 팔찌의 걸쇠를 채웠다. 허리에 길게 늘어지는 띠를 두르고, 마지막으로 신발을 신은 야스카산이 몸을 펴고 위엄 있는 족장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야스카산이 뒤를 돌아보는 모습에 아사신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여 벌거벗은 몸을 이불에 가렸다.
“그렇다고 하더군. 그녀가 아내를 매질하는 남편에게 시집가게 되었다고들 말이지.”
아사신은 다급해졌다. 허리춤에 시트를 말아서 치부를 가린 채 무릎걸음으로 내려와 야스카산에게 매달렸다.
“족장··· 아니 야스카산. 제발 도와주십시오. 소사린을 그런 남자에게 시집 보내서는 안됩니다.”
“왜?”
야스카산이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보는 눈동자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아사신은 다시 한번 야스카산의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제가 그녀를 꼬드긴 것입니다. 그녀는 도망가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부탁입니다. 제발, 제발 소사린을 그런 남자에게 보내지 말아주세요. 이렇게 엎드려 빕니다.”
아사신은 고개를 수그렸다.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처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야스카산의 발아래 완전히 납작하게 엎드렸다.
 “너는 너를 위해서는 빌지 않더니, 그 여자를 위해서는 비는구나.”
“소사린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 죄가 없다면 벌을 내릴 필요는 없지.”
“소사린을 보호해 주시는 겁니까?”
아사신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고개를 들었다. 야스카산의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여전히 눈은 냉랭했지만 입술이 웃자 아사신의 마음도 한결 놓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사린을 심문해보면 그녀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도망치자고 했습니다. 그런 남자에게 시집가서 얻어맞을 여자가 아니라는 것은 당신도 만나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좋아.”
야스카산은 옷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어내며 말했다.
“그 여자를 만나보지.”
막 방을 나서려는 야스카산의 옷소매를 아사신이 잡고 늘어지며 거듭 강조했다.
“부탁합니다 야스카산. 소사린을 그 남자와 결혼시키지 말아주세요.”
야스카산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고려해보지.”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집을 나와 바로 소사린의 집으로 향했다. 소사린의 가족들이 서둘러 뛰쳐나와 야스카산을 맞이했다.그들의 표정은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야스카산의 방문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마중 나왔다. 그들의 표정에 수심이 가득했다.
안내 받은 곳은 창고와 같았다. 그 곳에 소사린이 가축과 같이 방치되어 있었다.
“족장.”
야스카산을 보자 소사린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를 만나러 오셨나요?”
야스카산은 대답하지 않고 칼자루의 끝으로 소사린의 고개를 치켜올렸다. 소사린은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들었다.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구나.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잘못한 게 없으니 두렵지 않습니다.”
“너는 신부와 달아났다.”
“사랑하기에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잘못이라 한다면 저는 신의 저주를 받고, 내장이 갈기갈기 찢어져 죽어도 좋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큰곰자리별에게 오르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겠습니다.”
“오만하구나.”
야스카산은 받치고 있던 칼자루로 소사린의 뺨을 후려쳤다. 소사린의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아무 말 없이 나가려는 야스카산의 뒤에서 소사린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난 당신이 모르는 비밀을 하나 알고 있어.”
“그게 뭐지?”
야스카산의 질문에 소사린은 그저 후후- 하고 가볍게 웃을 뿐이었다.
“가르쳐드리진 못해요. 당신 말마 따나 나는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 정도 심술은 가지고 갈래요.”
“가소롭구나. 네가 무엇을 알고있건 내게는 분명 하찮은 것이다.”
야스카산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나왔다. 문이 닫히자 안에서 소사린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야스카산은 기분이 나빴다. 밖에서 굽신거리며 야스카산을 기다리던 소사린의 아비에게 말했다.
“신랑측에서는 아직도 결혼 할 의사가 있다 더냐?”
“네, 네에. 그 쪽에서는 족장이 벌을 내리지 않으면 그대로 성혼할 계획에 있다고 연락해왔습니다.”
“그래?”
야스카산은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예정대로 결혼식을 진행해라. 위대한 주신의 피를 잇는 바르바칸의 아들 야스카산이 직접 신랑신부를 축성 하겠다.”




*                *                *




 결혼식은 정오에 시작하여 밤에 끝나는 것이 전통이었다.
 정오의 태양이 가장 타오를 때 신랑은 목욕재계후 어린양을 끌고 신전으로 가 제사를 지낸다. 아내를 맞이하기 전에 하늘의 모든 신과 땅의 모든 신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이는 새로 인연을 맺게 됨을 신들에게 고하는 행위이며, 앞으로 가정을 이루게 됨에 자식 될 영을 점지해놓아 달라 부탁하는 제사였다.
신랑이 제사를 지낼 동안 신부는 집에서 몸을 정갈하게 하고 전날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방석에 올라가 있었다. 그 주변을 신부의 가족과 친인척들이 모여 음식을 즐기며 잡담을 나누었다.
노을이 질 무렵 신랑은 가마를 타고 신부의 집 앞으로 가서 귀신 쫓는 주문을 읊은 뒤 문을 두드리면, 신녀들의 북이 울리고 가볍게 마라 꽃을 탄 술잔이 오가게 된다.
 신부는 붉은 혼례 복을 입고, 붉은 면사포를 머리에 두르고 아비에게 안겨 나왔다. 신부가 친정의 복을 가지고 가면 안되므로 문지방을 넘어 신랑의 옆 가마에 오르기 전까지 철저하게 발을 땅에 디디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신부가 무사히 치렁치렁한 옷을 끌고 가마에 오르면, 가마 꾼들이 결혼식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르며 두 사람을 이고 혼례 장으로 간다. 보통은 신랑의 집에서 결혼식을 모두 치루지만, 이 결혼은 족장이 직접 축성하겠노라 말한 대단히 영광스러운 결혼식이었다.
 가마 꾼들이 마차를 내려놓은 곳은 작은 신전의 후궁 안뜰이었다. 어머니 달의 제단 앞에서 야스카산이 최고 신관의 옷을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는 신부의 아버지나 신관이 하는 역할이지만, 이 결혼은 야스카산이 직접 축성 한다고 했기 때문에 신분이 더 높은 그가 집행하고 있었다.
 야스카산은 신랑 신부의 손을 들어 끈으로 묶은 뒤 기도를 드리고, 칼로 그것을 끊어내었다. 지금까지의 과거는 모두 끊어내고, 부부로서 새롭게 탄생하라는 의미의 의식이었다.
아사신은 멀리 밖에서 울리는 북소리와, 사람들의 환성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옆에서 타스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아사신이 절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야스카산의 지시에 따라 할 수 없이 옆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발치에는 잔뜩 붕대에 감긴 시오사라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듯 끙끙거렸다.
-아사신. 나도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
아사신은 소사린의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내가 남자였으면 아버지도 날 사랑하셨을 거야.-
-넌 사랑스러워.-
-그래도···.-
침울해 하는 소사린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아사신이 말했다.
-그리고 네가 남자면 너 나랑 결혼하지 못하잖아.-
-그렇구나. 남자로 태어났으면 너한테 아기를 낳아주지 못하겠네.-
기억 속의 소사린이 생긋 미소 지었다.
-아사신. 우리 꼭 붙어있자. 어딜 가든 떨어지지 말자. 너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 내가 여자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느끼게 해줘. 한 남자에게 사랑 받고, 그 남자를 닮은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고, 그렇게 늙어가면서 아 여자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다- 라고 느끼게 해줘.-
아사신은 창 밖에서 터지는 화려한 색채의 웃음소리와, 현란한 음악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는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난단다. 아내인 달을 찾아 하루종일 우주를 떠다니다 저녁이 되면 바다에 떨어져 자살하지. 그러고 나면 그 반대편에서 해의 아내 달이 떠오르게 되. 그 둘은 그렇게 평생을 태어나고 죽으면서 서로를 찾는 거란다.-
-그럼 해와 달이 합궁해서 인간이 태어났다는 것은 거짓말 인가요? 그러면 어떻게 아이가 태어나요?-
소사린의 질문에 어머니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소사린. 아주 가끔, 해와 달이 만날 수 있게 되는 때가 온단다. 너도 운이 좋으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도 아직 본 적이 없어. 아주 먼 옛날에는 가끔 일어나곤 했었다던데, 그것을 우리는 해와 달의 합궁이라고 부른단다.-
-달과 해가 만난다고요?-
아사신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낮에 뜨는 해와, 밤에 뜨는 달이 어떻게 만날 수 있다는 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음, 나도 전해들은 말이지만, 그때가 되면 낮에도 밤처럼 새까맣게 되어 천지의 동식물이 밖으로 나다닐 수가 없게 된다고 해. 달과 해가 합방하면 무엇이 태어날지 모르거든. 그들은 우리 인간의 어버이이기도 하지만, 모든 죄와 피를 부르는 귀신들의 어버이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들은 그날이 오면 방문을 꼭 닫고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해. 만약 그러지 않고 밖으로 나다닌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소사린은 어머니의 설명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머니는 그런 소사린의 머리카락을 계속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걱정하지 말려무나. 두 대신(大神)의 합방은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 않는단다. 평생동안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훨씬 많아. 그러니까 너도 걱정하지 말렴.-
아사신은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붉고 푸르게 타오르며 자살하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저 멀리 산을 넘어 쓰러지고 있었다. 훨씬 먼 곳으로 가면 있다는 바다에 몸을 던져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내일 다시 자신의 신부를 찾기 위해서······.-
“오빠.”
수라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뒤로 묶고 있었다.
 “가자. 나갈 시간이야.”
아사신은 천천히 일어섰다. 수라킨의 말대로 나갈 시간이었다.

죽은 시오사라. 죽은 어머니. 죽음은 모든 것을 추하게 만들었다. 시오사라의 주검은 끔찍했었다. 다정했던 눈동자는 동공이 열린 채 굳어있었고, 부드럽고 섬세한 주름으로 이루어져있던 입술은 크게 벌어진 채였다.
적어도 그렇게 쓸쓸한 죽음은 맞지 않았기를, 그렇게 괴로운 모습으로 가지는 않았기를 아사신은 빌었다. 그 진실이 어떻든 그 최후가 생각보다 괴롭지는 않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아프고 괴로운 것은 이미 너무 많이 격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죽음만큼은 평온하게 찾아와주었기를 원했다.

수라킨은 소사린이 잠든 듯이 누워있었다고 했다. 언뜻 봐서는 하얀 눈밭에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누워 잠이 든 것 같아 보였다고. 그래서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이상하게 길어보인다 싶어 자세히 보았을 때에야 그것이 머리카락이 아니라 피가 눈 위에 스며든 것을 알았다고 했다.
아사신도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녀는 그냥 약간의 피만 흘렸을 뿐, 조용히 안식을 맞았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소사린이 죽으면 자신도 죽을 거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멍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소사린의 남편은 소사린이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실족하여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혀서 죽은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결혼 첫날밤부터 얼마나 자신의 아내를 학대했는지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옷과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부분에는 멍과 상흔이 가득했다.
장례식은 검소했다. 까마귀 피로 제를 올린 돌 무더기 위에 소나무를 쌓고, 그 위에 소사린의 시신을 올렸다. 불을 붙이기 직전 신관은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고, 아사신은 그제야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늘진 뺨과, 싸늘하게 식은 입술과, 보라 빛으로 멍든 손톱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뒤에서 사람들이 소문의 주인공들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기에 아사신은 얼른 제단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마음의 준비도 안된 상태거늘 인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아사신은 가볍게 소사린의 입술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안녕 소사린.”

집으로 돌아오자 야스카산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사신은 가만히 야스카산을 응시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입김이 공기 속을 번지며 야스카산의 얼굴을 부옇게 흐렸다.
“장례식에 갔다 왔나?”
“네.”
아사신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야스카산을 제치고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나가기 전에 불을 피워둬서 집 안은 훈훈했다. 바깥의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가 거짓말인양 따스했다. 수라킨이 바로 뒤따라 들어오더니 부산하게 움직였다.
 “아유 춥다. 차를 끓일까? 나 아주머니한테 받아온 새로운 차가 있는데, 그거 마시고 한숨 자는 건 어때? 오늘은 어째 좀 나른한 거 같아. 끓여줄까?”
“아니야. 생각 없어.”
아사신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냥 나 방에 들어가서 좀 잘게. 방해하지 말아줘.”
수라킨은 순순히 뒤로 비켜섰다. 아사신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꼭 닫았다.

 -날 처음 봤을 때 기억해?-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었다.
-내가 어떻게 너를 미워할 수 있겠니.-
차라리 네가 나를 미워하면 좋겠어.
-내가 너를 죽이려고 여기까지 데려온 줄 알아? 그럴 바엔 나 혼자 깨끗하게 죽었어. 너의 마지막이 나 때문이라면 나도 차라리 목숨을 끊겠어.-
너를 살리고 싶었다.
창 밖을 바라보자 저 멀리 연기가 흐릿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저것이 소사린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서 살았음을 증명하는 마지막 흔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아사신은 바닥에 쓰러지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온몸의 힘줄이 모두 끊어진 것처럼 쓰러져 통곡을 했다. 내장이 녹아 내릴 것처럼 울었다. 너무도 눈물이 뜨거운 나머지 마치 살을 태우고 흐르는 듯 했다.
-나의 소사린.-
아사신은 바닥을 기었다. 거친 나무 결을 손톱으로 긁어 내렸다. 나무가시가 손가락에 박혔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우는 것은 눈이 아니었다. 가슴이 울고 있었다. 죽음이란, 경험했다고 해서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몇 번을 겪어도 겪을 때마다 너무도 아팠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아사신은 심장을 움켜쥐었다. 헐떡이는 숨결사이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끅끅 대며 바닥에 머리를 짓이겼다.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소사린은 없었다. 한줌의 재와 한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소사린, 소사린.
너는 내가 멸시당할 때도, 먹을 것이 없어 풀을 뜯을 때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신부가 되었을 때도, 늘 언제나 내 옆에 있어줬지. 힘이 되어 주었지.
 너를 지켜주고 싶었는데,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이토록 무능력해서 너를 죽였구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상실감이 몰려왔다. 아사신은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폐부에서 끓어오르는 고통을 주먹으로 쳤다.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 흘러내려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사랑한다고 수줍게 고백하던 소사린의 얼굴이 눈물에 번지며 흘러내렸다.
 -너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
미안해.
-사랑해 아사신.-
아사신은 바닥에 완전히 쓰러졌다. 차가운 냉기가 살갗을 타고 올라왔다.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살리고 싶어했으면서 결국 가장 사랑하는 연인을 죽게 하다니, 이 못나고 쓸모없는 한심한 육체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엷게 미소 짓는 소사린의 얼굴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시오사라에게 매달려 어리광을 부리는 소녀의 모습도, 한 밤에 강가를 산책하자고 청하던 수줍은 모습도, 길게 내려오는 치마자락을 끌며 부끄러워하던 모습도, 음식을 만들던 모습도, 책을 읽던 모습, 청소를 하던 모습. 그 모든 모습들. 그 모든 소사린이 가슴에서 부숴져 내렸다.
 거짓말처럼, 진정 거짓말처럼 죽었다는 한 마디가 그렇게 생생했던 한 사람의 존재를 모두 지워 버리라 강요하는 것이었다.
-너 없이 나는 어떻게 살라고!-
아사신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꺽꺽 대는 소리만이 목청을 뚫고 튀어나왔을 뿐이었다.
“잘하는 짓이군.”
야스카산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아사신을 일으켜 세웠다. 눈물로 부옇게 흐려진 아사신의 눈가를 거칠게 손가락으로 훔쳤다.
“그 여자가 죽은 게 그렇게 슬퍼? 응? 그렇게 슬픈 거냐고!”
“네가 뭘 알아!”
아사신이 노성을 터트리며 야스카산을 확 떠밀었다. 죽을 것만 같았다. 슬픔으로 죽을 것만 같았다.
“네가 뭘 알아! 너는 소사린이 죽도록 방치했잖아!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는 거야! 그 애가 얼마나 착한 줄 알아? 그 애가 얼마나 가여운지 알아? 모르잖아! 넌 모르잖아!”
“내가 묻는 건 그런 게 아니야!”
야스카산이 다시 아사신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뿌리치려고 해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너한테도 최소한의 자비심이 있다면 날 내버려둬! 그 애가 죽은걸 내가 애도하게 해달란 말이야! 제발, 제발 좀 그만해, 지긋지긋하다고, 제발 날 좀 그만 내버려 둬!”
“제기랄!”
화산처럼 폭발하며 고함을 지르는 아사신의 허리를 야스카산이 꽉 잡아 자신의 품안에 가두었다. 야스카산의 표정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사신은 그 속에서 소리를 지르며 발광했다.
 “저리가! 날 내버려 둬! 내버려 두란 말이야!”
“아사신, 아사신.”
아사신은 몸부림치고 발길질 하고 사납게 깨물었지만, 야스카산은 그것을 묵묵히 참아냈다. 발광하며 주먹을 쓰는 남자를 붙잡는 것은 아무리 야스카산이라고 해도 힘든 일이었다. 야스카산의 입술이 터지고 깨물린 곳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래도 야스카산은 아사신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절대 놔줄 수 없다는 듯이 더욱 더 세차게 껴안아왔다.
“빌어먹을··· 지긋지긋 하다고···.”
아사신은 몸을 늘어뜨렸다. 허어- 하는 통곡성이 무겁게 흘러나왔다. 매일 죽는 태양이 피보라를 하늘에 흩뿌리고 있었다. 그것은 금갈색과 청보라빛과 자홍색으로 물들며 마지막 불씨로 하늘을 태우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해가 완전히 지고 밤의 어둠이 몰려올 때까지 서로를 꼭 껴안고 있었다. 아사신의 몸이 완전히 늘어져 반쯤 기절하듯이 잠들어 버렸을 때 까지 말이다.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아침이 되면 태양은 어김없이 떴고, 밤이 되면 달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밭을 일구고, 사냥을 하고, 땔감을 구했으며, 아이들은 뛰어 놀고, 그 어미들은 잔소리를 했다.
 야스카산은 늘 승리했다.
그리고 그가 돌아오는 곳은 언제나 아사신의 집이었다. 사람들은 신부의 집에 족장이 너무 자주 드나드는 것이 아니나며 곁눈질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야스카산은 피에 젖은 몸을 제대로 닦지도 않은 채 아사신의 집으로 돌아왔고, 그 정복자를 아사신은 늘 말없이 맞아주었다.
아사신은 그날을 기점으로 자신안의 무언가가 끊어져버린 것을 알고 있었다. 소사린의 장례식 날 그렇게 고통스럽게 울고 난 후로는 눈물 한 방울 그녀를 위해 흘리지 않았다. 마치 메마른 심장이 그대로 끈을 놓아버린 것만 같았다.
“왜 반항하지 않지?”
야스카산이 어느날 물었다.
“왜 반항하지 않는 거지?”
“반항하는 편이 좋으십니까?”
아사신은 물었다. 야스카산의 어깨에 두 다리를 얹고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사이로 야스카산의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목소리는 멍하고 냉랭했다.
“도대체 왜 넌!”
야스카산은 답답하다는 듯이 언성을 높이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울컥울컥 치솟는 감정을 입으로 옮기려 해도 도저히 말이 되어 나와 주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젠 무슨 말을 해도 아사신의 상태를 옛날처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인정할 수는 없었다.
“젠장!”
“윽!”
야스카산이 욕설과 함께 힘껏 허리를 움직이자 아사신이 짧게 신음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날씬한 목에 땀 한 방울이 흘렀다.
 “아사신!”
“헉!”
두 남자의 숨소리가 더욱 더 거칠어졌다. 교묘한 허리 짓과 손놀림에 흥분하며 아사신은 야스카산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숨죽인 어둠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았다.

아사신은 말라갔다. 그는 물과 먹을 것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혼자서는 잠도 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어둠이 몰려왔다. 그것은 평강을 찾지 못한 소사린의 영혼이었다. 먹을 것을 앞에 두면 그것들에 입이 달려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넌 먹을 자격이 없다고, 너무도 뻔뻔하다고. 그래도 살고 싶어서 먹고싶은 거냐고.
그래서 아사신은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잠도 잘 수 없었다.
 “오빠, 우리 이러지 말자.”
수라킨이 묽은 죽을 끓여와 아사신의 입가에 대고 흐느꼈다.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마. 이건 내겐 너무 가혹한 벌이야.”
한참을 옆에서 수라킨이 뭐라고 말을 걸어왔지만 모든 말은 귓가에서 바스러져 내렸다.
그렇게 길고 긴 낮을 멍하게 부유하며 인내하다 보면, 문득 시야에 한 남자가 잡혔다. 그는 몹시 못마땅한 얼굴로 아사신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꼬락서니 하고는.”
“······.”
“차라리 자살하지 그래?”
“······.”
“이젠 내 말에 대답도 하기 싫다는 거냐?”
야스카산은 멍하니 앉아있는 아사신의 팔목을 잡고 비틀었다. 아사신이 미약하게 신음성을 냈다.
“그렇게 그 여자를 따라가고 싶으면, 죽어서라도 맺어지고 싶으면 차라리 죽어. 여러 사람 힘들게 하지말고, 차라리 지금 여기서 죽어버려!”
야스카산은 저주를 내뱉었다. 잇새로 낮게 중얼거리는 말에 아사신의 흐리멍텅한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모습을 매섭게 쏘아보던 야스카산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그는 입술 한 쪽을 일그러트리고 고통과 후회가 가득한 눈빛을 했다.
 “제기랄, 아사신 아니야! 그런 게 아니다!”
야스카산의 팔이 숨이 막힐 듯이 강하게 아사신을 조여 왔다.
“거짓말이었다.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네가··· 네가 그러니까···!”
야스카산은 자신의 품에 얌전히 놓인 청년의 마른 몸을 더듬었다. 아득한 상실감이 몰려왔다. 그것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눈을 감은 채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도 같고,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끝도 없는 구덩 속으로 밑도 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한없이 무력하고, 한없이 절망적이었다.
“아사신···.”
야스카산이 한숨을 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붙잡아 왔다. 서투르게 밀어붙여오는 야스카산의 입술에서는 진한 피냄새가 났다. 이 피에 젖은 정복자는 단 한 번도 패배하고 돌아온 적이 없었다. 피냄새는 이제 그의 체취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거기에는 소사린의 붉은 피도 섞여버렸다.
아사신은 꼼짝도 못 할만큼 강하게 끌어안긴 채 자신의 숨결을 들이마시는 야스카산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가 숨결을 들이마실 때마다 생명이 코 끝으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득한 절망이 육신을 덮었다. 멀리 비치는 어둠 속에서 하얗고 앙상한 손 하나가 내려와 그들을 손가락질 했다. 그 눈동자는 분노로 불타는 듯 했다. 시선 앞에 아사신의 양심이 뜨거워졌다. 야스카산의 몸이 무너지듯 덮쳐오자 아사신의 감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소사린이 흐느끼고 있었다.

 꿈은 악몽이었고 악몽은 현실이 되었다. 그의 밤은 숨죽인 어둠이 폭군으로 지배했고 어둠의 백성은 흐느끼는 여자들이었다.
 아사신은 식은땀을 흘렸다. 비통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 나는 너에게 무엇이었니.-
이제 목소리는 내부에서 울리고 있었다. 아무리 귀를 막아도 목소리는 손가락 사이를 타고 뱀처럼 미끄러져 들었다. 육신 안의 혼과 영으로 스며들어 그 속에서 흐느꼈다. 깊은 곳에 존재하는 양심이 아사신의 심장을 쇠줄로 꽁꽁 싸매고 욱죄어왔다.
 -네 마음의 진심은 한조각도 내게 주지 않았어.-
아사신의 눈동자에 다시 눈물이 넘쳤다. 눈물은 멈추는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흘렀다. 너무도 강력한 무언가가 자신의 머리와 심장을 점령하고 놓아주질 않았다. 황량한 가슴 안에 부는 칼날 같은 바람은 아사신의 영혼에 심각한 생채기를 남겨주었다.
 내면의 소리는 새벽까지 아사신을 괴롭히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슬그머니 사라졌다.

아사신은 쇠약해졌다.
물과 먹을 것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모습은 꼭 굶어죽기로 결심한 사람 같았다. 매일을 침대에만 누워 꿈과 현실의 중간으로 침잠하는 모습은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도 답답하게 만들었다.
 아사신의 입에서 맑은 액체가 주르르 흘렀다. 수라킨은 안타까워하며 손에 든 스프를 무릎으로 내려놓았다.
 “이렇게 못 먹어서 어떻게 해?”
그녀는 속이 상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아사신의 입 주변을 닦아주었다. 식도를 통과하자마자 바로 구토해 버리는 바람에 그나마 위장에 넘어가있던 음식물까지 모두 나와버렸다.
 “이렇게 밥도 못 먹고 잠도 못자면 어떻게 해? 요즘도 악몽 자주 꿔?”
수라킨의 못 박힌 손이 위로하듯 다정하게 아사신의 머리를 쓸어왔다. 이젠 일을 하지 않음에도 그녀의 손바닥은 딱딱하기 그지 없었다.
 -악몽은 이미 내 안에 있어···.-
아사신은 완전히 지쳐버렸다. 그는 열 이례를 쉬지도 못하고 싸워온 패잔병 같았다. 수라킨의 얼굴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아사신의 슬픔에 공감하면서도 그의 이런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오빠가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그건 소사린 언니도 원하지 않을 거야.”
아사신은 그녀의 말에 다시 침대로 몸을 깊이 묻었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피로한 몸이 바닥으로 꺼질 듯 했다.
“오늘도 먹지 못했나?”
야스카산이 덜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갑작스런 등장에 수라킨이 벌떡 일어섰다. 병자를 간호하느라 예민해진 그녀는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기척 좀 내고 다녀요. 놀랐잖습니까.”
“그는 뭐라도 먹었나?”
수라킨의 말을 들은 척 만척하며 야스카산이 재차 질문 했다. 수라킨은 발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조용히 대답했다.
“아침에 약간··· 하지만 방금 스프를 먹였더니 다 토해버렸어요.”
수라킨의 말에 야스카산은 혀를 차며 그릇을 들었다.
 “나가봐라.”
“하지만,”
“나가라고 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던지는 단호한 명령에 수라킨은 기분이 상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야스카산의 흔들림 없는 등은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는 의지가 서려있었다. 쫓겨나듯 나가야 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발을 질질 끌며 돌아보자 그 곳에는 아사신의 창백한 얼굴이 유령처럼 떠올라있었다. 점점 작아지는 문틈사이로 야스카산이 아사신의 목을 끌어당겨 깊이 입맞추는 것이 보였다. 사방에서 어둠이 조여 오는 모습에 수라킨은 작게 몸을 떨었다.

 “먹지 못하겠다고?”
야스카산이 이죽거렸다.
 “먹고싶지 않은 거냐, 먹을 수가 없는 거냐.”
“···둘 ···다입니다.”
아사신이 기운 없이 말했다. 며칠씩이나 물과 맑은 스프로 연명해온 터라 안색은 파리했고 눈은 초점이 없었으며 머리카락은 거칠었다. 그러나 유독 야스카산이 씹어놓은 입술만이 붉고 반질반질 윤이 났다.
야스카산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수라킨이 두고 간 스프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냅다 아사신의 입술을 열어 젖히고 그것을 넘기기 시작했다. 식도는 약간의 거부반응을 보였으나 곧 얌전히 음식물을 위장으로 내려보냈다.
 잔기침을 하며 허리를 숙이는 아사신을 보는 야스카산의 시선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또다시 스프를 한 모금 마셨다. 수라킨이 만든 것인데다 아무런 간도 되지 않은 그것은 먹기에 그닥 훌륭한 맛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혀를 고문하는 수준이었다. 그것을 야스카산은 인상한번 찡그리지 않고 입에 삼켰다가 아사신의 입에다 어미 새처럼 부어주었다. 아사신이 힘들게 한 모금씩 넘길 때마다 잘했다는 듯이 야스카산의 혀가 아사신의 혀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이 남자를 구성하는 부분 중에는 부드러운 곳이라곤 하나도 없는지 매끈해야 할 혀마저도 까칠했다. 그 혀에 쓸리자 아사신은 입안이 조금 아팠다.
 “음······.”
야스카산이 길게 신음소리를 냈다. 어느새 스프 한 그릇을 모두 헤치우게 되자 마지막 혀를 섞으면서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입술을 전부 삼키고 깊숙한 곳까지 혀로 애무했다. 턱까지 한번에 입안에 넣고 축축 빨아대자 아사신이 인상을 찌푸렸다. 음식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던 것이 어느새 농밀하고 성적인 것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야스카산의 손바닥이 끌러지기 쉬운 잠옷사이를 파고들자 아사신이 신음소리를 내며 힘겹게 그 손을 쳐냈다.
“이러지 마십시오. 하아··· 절 죽이실 생각입니까?”
“만지기만 하겠다.”
“그만하세요. ···그만!”
“아사신.”
아사신은 고개를 도리질하며 억지로 야스카산을 밀었다. 그러나 야스카산은 멈추지 않았다. 그간 아사신이 병상에 누워 있던 지라 마음껏 만지지 못한 만큼 굶주려있었다. 크게 손을 뻗어 아무것도 없는 가슴을 한 손에 쥐고 주무르자 아사신은 쾌감보다 아픔에 신음했다. 빨판처럼 마르고 거칠어진 피부를 우악스럽게 비벼오는 손길이 무척 아팠다. 어느새 침상위로 반쯤 기어올라 자신의 다리사이에 자리를 잡는 남자를 아사신은 기운 없는 손으로 밀어냈다. 야스카산의 두터운 가슴속으로 그 저항은 힘없이 말려들어갔다.
“안돼··· 그만.”
아사신의 눈가에 물기가 서렸다. 속이 뒤틀려왔다. 침대 아래서, 처마 밑에서 검은 어둠이 길게 손을 내뻗었다. 어둠 속에 불타는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아사신은 심장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흑암의 한가운데 놓인 양심이 비명을 지르며 아사신의 심장을 찔러왔다. 아팠다. 너무도 아팠다.
“욱!”
야스카산의 팔이 복부를 압박하는 순간 아사신은 결국 참지 못하고 구토해버리고 말았다. 방금 삼킨 스프가 위액과 함께 쏟아져 나와 야스카산의 가슴에 뿜어졌다. 야스카산은 한참 좋던 중에 오물을 뒤집어쓰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사신을 바라보았다.
 “크윽, 욱-!”
계속해서 꿀럭꿀럭 토하던 아사신이 괴로운지 허리를 접고 기침하자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등을 두드려 주었다. 흥이 깨져버린 얼굴은 싸늘했지만 등을 두들겨주는 손에는 강팍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한참을 아무것도 없는 위장을 게워내던 아사신은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자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 너부러졌다. 야스카산의 새파란 눈동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싫었나?”
“······오햅니다.”
아사신은 힘들게 말했다. 칼칼해진 목구멍으로 말을 꺼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뭐가 오해라는 거냐. 내 입맞춤을 거부하는 것을? 내 손길에 토해버린 것을?”
“야스카산······.”
아사신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그 곳에 보이는 것은 기묘한 얼굴을 한 야스카산이었다. 진한 그림자 속 눈동자에 서린 것은 분노와 상처였다. 아사신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야스카산.”
“가겠다.”
“야스카산!”
“···내일 다시 오겠다.”
그 말만 하고 야스카산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사신의 탁한 눈동자에 빛이 나타났다. 그것은 예전과 같은 총기의 반짝임이 아니라 혼돈의 빛이었다. 그는 야스카산의 뒷모습을 향해 뻗었던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오물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분명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지독하게 더러울 것이 분명했다.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야스카산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그는 아사신을 찾는 것을 절대로 거르지 않았다. 야스카산이 찾아올 때면 둘 사이에는 긴장이 충돌했다. 야스카산이 들어오는 것을 아사신으로서는 막을 재주가 없었다. 야스카산은 자신이 찾아왔을 때 방문이 굳게 잠겨있는 것을 참지 못했고 결국 잠금 장치를 부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는 거칠 것이 없었다. 낮에도 악몽과 내면의 고통 속에 부평초처럼 흔들리느라 기운이 없는 아사신은 밤에는 그가 쏟아내는 신랄한 말들에 연타로 얻어터져야만 했다.
 야스카산은 아사신이 음식을 잘 삼키지 못하는 것을 자신에 대한 거부의사라고 생각했다.
“굶어죽는 건 추하다. 그렇게 죽고싶으면 차라리 칼을 줄 테니 배라도 갈라라.”
“넌 내게 아들을 하나 낳아주어야 해. 그것이 너의 존재 이유고, 내가 너를 참아내는 단 하나의 이유니까. 그 전까지는 아무리 싫어도 내 옆에서 살아 있어야 할거다.”
“또 토했나? 상관없어. 새로운 음식을 준비하면 되니까. 그러니까 입 밖으로 다시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 인내심은 길지 않아. 나를 화나게 하기 싫으면 그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거다.”
야스카산의 격분할 때마다 아사신도 억지로 음식물을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의 신경은 다시 새파랗게 곤두섰고, 아사신은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밤에는 위통과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열이 들끓는 머리에서는 시원한 사고가 나오지 않았고 식은땀이 흐르는 살갗은 찝찝하고 무더웠다. 겨울의 싸늘한 공기도 아사신의 방 안에서는 텁텁하게 가라앉았다. 그곳은 병자특유의 폐색과 건조함으로 가득했다.
 검은 밤에 흐느끼는 아사신을 감싸주는 것은 야스카산의 팔이었다. 죽은 여자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한 내면에 스스로 잡아 먹힐 지경이 되어버렸을 때 등을 토닥여주고 나지막한 위로의 말을 해주는 것도 야스카산이었다. 그 튼튼한 어깨와 팔에 몸을 기대며 안정을 취할 때면 아사신의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맥박쳤다.
 이제 야스카산은 말이 없어졌다. 비난과 힐난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무슨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길은 예전보다 따스했고, 감아오는 팔은 예전보다 정성이 있었다. 더 이상 유혹의 손길도 뻗치지 않았다. 그것이 아사신은 더 힘들었다. 차라리 마음껏 그가 폭행을 가해주길 바랬다. 마음껏 쥐고 흔들고 제 욕심만 채우기를 바랬다. 싫다고 거부하고 꺼지라고 욕을 하고 싶었다.
대놓고 그를 격하시키고 싸늘하게 냉소하길 바랬다. 입 끝까지 치밀어 오른 욕지기를 살벌하게 뱉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사신은 그러지 못했다. 불현듯 봐버린 그 눈의 상처 때문에 감히 그러지 못했다.
 잠들기 전의 맹렬한 윽박지름과, 잠들고 난 후의 다정함은 아사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밤의 악몽으로부터 안식처를 얻음에도 마음 한 켠은 쓰라리기 그지없었다. 단단한 팔 안에 안겨 멍한 두뇌로 사고를 할라치면 머리보다 먼저 가슴에서 비난하기 시작했다.
 양심은 사정없이 말을 걸었다. 그것과 이야기를 할 때면 아사신은 속절없이 패배해야 했다.
 그것은 미혹의 안개를 걷고 깨끗한 창살을 드리우고 악랄하게 외쳤다.
그는 원수! 소사린을 끌고 간 도살자!
 네가 증오하고 미워하고 복수를 결심해야 하는 남자거늘, 오히려 그 품에 안겨서 안정을 구하다니. 남자 주제에!
그것은 내면 속에서 진득하게 존재하며 야금야금 혼을 먹어치웠다.
아사신은 고통스러웠다. 날이 가고 시간이 흐르고 몸이 조금씩 회복될수록 점점 더 고통스러웠다. 내장을 입으로 꺼내 잘근잘근 물어뜯는 기분이었다.
 그 사실이 아사신의 악몽이었다.
 또한 미치게 만드는 이유였다.
 기묘한 밤에 눈을 뜬 아사신은 한가지 생각에 미쳤다. 이대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잠들지 않고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방도를 생각해야만 했다. 사고가 고장 나기 전에, 이 상태에서 벗어날 체력이 아직 존재할 때에.
어둠 속에 새파랗게 살아있는 죽은 그림자들에게 아사신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비난의 눈길은 그 악랄함을 조용히 완화시켰다.
 부드럽게 자신의 몸을 감싸 안은 야스카산의 팔 안에서 아사신은 눈을 감았다.

아침이 되자 아사신은 야스카산이 자리를 비운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정말로 며칠 만에 제대로 보는 햇빛인지 몰랐다.
 문을 열고 햇빛을 쐬자 자신의 그림자에 우글거리는 어둠이 한발자국 물러서는 것이 느껴졌다.
아사신은 망설임 없이 목표로 향했다. 비록 발걸음은 더디고 며칠 간의 은거생활로 빈혈이 일었지만 그는 정확하게 목표로 찾아갈 수 있었다.
 늦은 정오시간 인지라 집주인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망설임 없이 문을 두드렸다. 곧 안에서 &#8211;누구세요?- 하는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자 그 곳에는 한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서 아사신을 향해 의문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은······.”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아사신은 신속하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해 보인 후 문을 닫았다. 열쇠를 걸어 잠그는 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밤이 되자 아사신의 집에 다시 야스카산이 찾아 들었다. 귀찮게 감겨 드는 가리시네와 그녀의 직속 신녀들에게 둘러싸여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온 후였다. 그들은 첫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위해 야스카산이 해야 할 일들을 줄기차게 떠들어대거나, 가리시네의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도록 신부의 집에는 가지 말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런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보니 야스카산으로서도 보통 짜증이 치솟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늦었군요.”
야스카산이 들어오자 아사신이 말했다. 야스카산은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눈을 힐끗 치켜 떴다.
“웬일이지? 네가 나를 다 반기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아사신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야스카산이 그 얼굴을 보자 더더욱 희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사신의 얼굴을 관찰하던 야스카산의 얼굴이 조금씩 환해졌다. 아사신의 얼굴은 말끔했고, 눈은 울어서 충혈되지 않았으며, 옷차림은 깨끗했다.
 “아사신.”
야스카산이 큰 걸음으로 다가가 아사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메마른 어깨가 가슴 가득 안겨오자 야스카산은 깊숙이 아사신의 머리에 코를 묻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사신은 가만히 야스카산의 어깨에 뺨을 기대왔다. 아사신의 그늘진 광대뼈가 어깨에 닿아오자 야스카산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맥박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식사는 했나?”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네가 기운을 차린 것을 축하하기 위해 음식을 가져오겠다.”
야스카산이 지시를 내리기 위해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아사신은 미소지은 채 담담하게 응시했다.
시중까지 받아가며 즐긴 식사로 분위기는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늘 초췌하고 겁먹은 얼굴을 하고있던 수라킨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돌았고 타스가의 시덥잖은 농담과 시오사라의 어리광속에 간만에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구토하는 답답한 소리도, 먹으라고 윽박지르는 외침도 없는 모두에게 아주 간만에 찾아온 풍요로운 식탁이었다.
 그들은 따스한 차와 말린 건포도를 야식으로 먹었고 밤이 깊자 타스가는 집으로 돌아갔고 수라킨은 침실로 들어갔다. 그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지라 수라킨은 금새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야스카산과 아사신은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서로의 몸을 섞었다.
 야스카산은 먹은 것이 없어 마르고 거칠어진 아사신의 살결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지고 입맞추었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기이한 감정이 심장을 중심으로 뭉클뭉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 감정은 아사신의 살결을 문지르고 입술로 탐할 때마다 더 강력하게 뿜어져 나와 종래에는 심장의 박동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사신.”
야스카산은 깊게 자신의 허리를 내렸다. 벌려진 두 다리 사이에 존재하는 그곳은 열락의 근원지였지만 그 근원은 너무도 섬세하고 약하기 때문에 조심해서 사용해야만 했다.
“아사신.”
“아-!”
아사신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부드럽고 느긋하게 밀고 들어온 야스카산의 성기가 뱃속에서 맥박 쳤다.
 이 광폭한 남자가 지금 얼마나 참고 인내하며 자신을 안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 품에 안겨 한없이 부드럽고 따스한 공기에 휩싸여 있노라니 또다시 모든 것을 잊고싶었다. 이 품에 안겨 모든 것을 망각의 그늘로 묻어버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
아사신은 다시 한번 뱃속 깊이 야스카산을 받아들이며 허공을 응시했다. 이제는 친숙한 어둠이 지붕의 틈세 사이에서 검은 눈을 번뜩이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사신은 저물기 시작하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죽을 때 괴로웠니 소사린?-
입술을 꾹 깨물고 아사신은 등을 돌렸다.
-나를 용서해. 나는 이기적이야.-
아사신은 어제에 있었던 힐레멘과의 대화를 생각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갔을 때 힐레멘은 식사 중이었었다. 갑작스런 방문에도 별로 당황한 빛을 보이지 않고 그는 친절하게 의자와 과자를 준비해주었다. 아사신이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는지 그가 준비한 음식은 모두 삼키기 쉬운 부드러운 것들이었다.
 그 중 하나를 집어 들며 힐레멘이 말했다.
“어쩐 일이에요? 저를 찾아와 줄 줄은 몰랐습니다.”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부탁이요?”
아사신은 힐레멘을 향해 몸을 숙이고 은밀하게 말했다.
 “내게 배를 주세요 힐레멘.”

아사신의 말에 힐레멘은 몹시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건 도망친다는 건가요? 하지만 이젠······.”
힐레멘은 말을 줄였다. 아사신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은 소사린은 이미 죽지 않았냐는 것이리라.
“그래도 난 가야 합니다. 당신한테는 아무 피해가 없도록 하겠어요. 그냥 내가 배를 하나 강탈한 걸로 둘러대면 되요.”
아사신의 단호한 의지가 서린 얼굴에 힐레멘도 슬그머니 입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자못 진중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어째서 입니까?”
힐레멘의 질문에 아사신은 침묵했다. 아사신은 그 질문에 대답할 말을 준비하지 못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대답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사신 자신조차도 모르는 답이었기 때문이었다.
조가비처럼 다물린 그 입을 바라보던 힐레멘은 잠시 후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뭐, 좋습니다. 어차피 상관없겠지요. 좋아요. 당신에게 우리가 타고 온 배를 하나 내드리지요.”
“정말입니까?”
아사신의 굳은 얼굴이 미미하게 풀어졌다. 이렇게 쉽게 수락할 줄은 미처 몰랐었다.
“더 이상 묻지 않으십니까? 제가 왜 가려는지, 그런 것도?”
“말하기 싫잖아요. 상관없어요. 그건 당신 자유에요.”
“힐레멘.”
아사신의 얼굴이 미미하게 물들었다. 힐레멘은 처음으로 자신을 향한 아사신의 얼굴이 부드러운 신뢰의 표정에 감싸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다른 여타의 사람에게는 향하는 것이었지만 자신에게는 한번도 보여주지 않던 표정이었다. 순한 회색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이고, 입술의 곡선이 유려하게 휘어졌다. 아사신은 딱딱한 껍질을 벗은 것처럼 유하고 선해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사신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제야 힐레멘은 시선을 휘어잡는 얼굴에서 가까스로 눈을 떼고 빙긋 웃어보일 수 있었다.
“천만해요. 내일 해가 완전히 저물면 아무도 모르게 해안가로 가세요. 제법 멀긴 하지만 조심해서 나오면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을 거에요. 혹시 누군가에게 들키면 대충 둘러대세요. 간만에 바닷가를 거닐고 싶어졌다고 해도 좋겠지요. 말을 타고 오면 안 되요. 눈에 띄기 쉬우니까요.”
“그 다음엔?”
아사신이 초조하게 말했다.
“그 다음엔 거기 저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팔시아 대륙으로 가도 좋겠지만 차라리 다른 곳으로 가도 좋을 거에요. 사실 그렇게 멀지 않거든요. 자욱한 안개와 아무도 드나들지 않아서 해도를 모르는 것 뿐이지요. 팔시아와 함마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면 혼혈의 후손들도 꽤 많이 살고··· 함마 대륙인의 특징보다 더 특이한 외향을 가진 사람들도 있으니까 오히려 좋을 것 같군요. 안전한 길로 내려간 후에 절벽아래로 돌아가면 제가 준비시켜 둔 사람이 나올 겁니다. 그는 당신의 족장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여차할 때를 대비해서 오래 전부터 준비시켜놓은 사람이지요. 아, 이건 비밀이지만 당신은 내게 빚을 하나 졌으니 상관없겠지요.”
“힐레멘.”
아사신의 얼굴이 부드럽게 펴졌다. 눈동자가 감동으로 물들었다.
“이유도 묻지 않고 나를 도와주는 건가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힐레멘이 웃었다.
“나는 끝까지 도와주지 못하니까, 감사의 인사는 나중으로 미룹시다.”

아사신의 작은 가방에는 약간의 물과 먹을 것이 들어 있었다. 돈은 화폐의 단위가 다를 것을 생각해 챙기지 않았다. 대신 약간의 보석을 챙겨넣었다. 전부 다 두고 가려고 했지만 앞으로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만큼 양심의 가책은 조금 접어두기로 했다.
막 아사신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뒤에서 떨리는 손이 다가와 그 어깨를 잡았다.
“어딜 말도 없이 가는 거야?”
수라킨의 작은 얼굴은 경악과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어딜 가는 거야? 이젠 오빠까지 떠나려는 거야?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야?”
“미안해 수라킨.”
아사신은 고개를 숙였다. 불타는 노을이 창으로 치달으며 아사신의 얼굴을 반은 붉고 반은 검게 물들였다. 수라킨은 그 얼굴을 떨리는 손으로 매만지다 흐느꼈다.
 “왜 나를 두고 떠나려는 거야? 그냥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면 안돼?”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하지만 나는 여기서 살 수 없어. 살수가 없어.”
“그냥 살면 되잖아! 뭐가 그렇게 괴로워!”
아사신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긴 음영이 감싸인 얼굴은 어둠에 잠겼다. 그 얼굴의 표정과 의지를 수라킨으로서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숨만 쉬어! 그렇게 살면 되잖아!”
“숨을 쉴 때마다 나의 죄가 폐를 쑤셔와!”
아사신은 고통스럽게 소리질렀다.
“그렇게 그 애를 보내고도, 살아있는 내가, 나는 참을 수가 없어! 그 애의 몸은 한낱 연기가 되어 사라져버렸는데 나는 멀쩡하게 살아있어 수라킨! 나는, 나는 그걸 참을 수가 없어!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나이가 들어갈 거라는 사실을, 나는 용서할 수가 없어!”
“오빠!”
수라킨은 통탄했다. 그녀는 아픈 심장을 움켜쥐고 분노와 슬픔이 타오르는 눈빛으로 아사신을 쏘아보았다.
“그게 그렇게 용서가 안돼? 그냥 잊고 살면 안돼? 나도 살아! 나도 오빠와 똑같은 아픔 격었잖아. 할머니도, 엄마도, 소사린 언니의 죽음도 나도 모두 격은 일이잖아. 대체 왜 그래? 뭐가 그렇게 용서가 안되고 용납이 안돼?”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아사신은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지키지 못했어. 내가 초래한거야. 그래서 이 모든 일이 발생한 거야. 내가 신부가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적어도 소사린은 죽지 않았을 테지. 너는 이해하지 못해 수라킨.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해···.”
수라킨의 얼굴에 슬픔이 스몄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아사신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버려진 여자와 그 자녀들에게 산다는 것은 언제나 전쟁이었다. 가난은 마음을 강팍하게 만들었고 죽음은 가까웠다.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일 역시 이미 여러 번 있어오지 않았던가. 마음의 생체기 따위 뒤돌아보지 않고 살면 되는 게 아닌가.
 묻어두고, 땅에 깊숙이 묻어두고 그런 일은 없었던 양 스스로를 속이고 사는 것이 무어 그리 힘들고 나쁜 일인가. 산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는가.
늘 이를 악물고 달려온 인생이었다. 짧다면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결코 평온한 인생은 아니었다. 피해의식은 없었다.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렇게 살아갈 뿐이었다. 누구 때문에 잘못됐다고 여겨본 적도 없고, 그것 때문에 불행해져야 할 이유따위도 하등 없었다. 오히려 보란 듯이 잘 될 거라고. 행복해질 거라고. 너희들 도움 없이도 나는 꿋꿋하게 주먹을 쥐고 일어설 거라고 생각하고 다라지게 살아왔었다.
수라킨은 너무도 슬펐다. 사랑하는 오빠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음이 심장이 갈리도록 슬펐다. 누구보다 가까운 혈육이었지만 자신은 그를 이 땅에 못박아둘 디딤돌이 되지 못했다.
 “나로는 안 되는 거야?”
“미안.”
아사신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 방법만이 유일한 자신의 구원이었다.
 “가야 해.”
“오빠.”
아사신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수라킨의 이마에 가벼운 작별의 입맞춤을 했다. 서럽게 울고있는 그녀의 떨리는 이마에 입술을 대자 수라킨은 격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지금은 울고 있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혼자서 꿋꿋하게 헤쳐나갈 것이라고 의심치 않았다. 늘 작고 어려서 자신이 보호해줘야만 했던 여동생은 어느새 저렇게 커 버렸다. 그 사실이 약간은 서운하면서도 고마웠다.
 얼굴을 떼자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수라킨의 얼굴이 보였다. 아사신은 엷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신의 가호를.”

밖으로 나오자 상처가 아문 후로 밖으로 다시 쫓겨난 시오사라가 다가와 끙끙댔다.
“시오사라. 미안. 널 데려갈 수 없겠구나.”
아사신은 무릎을 꿇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아사신은 이 신성수를 아끼고 있었다. 소사린과의 추억이 있는 사랑스러운 녀석이었다.
“내가 없어도 아마 수라킨이 널 잘 돌봐 줄 거야. 음, 아니면 다시 신전에서 널 데려갈지도 모르겠다.”
수라킨이 잘 돌봐 줄 거라고 약속할 수 없는 게 안타까웠지만 뒤이어 신전을 생각해내자 빙긋이 웃을 수 있었다.
뉘엿뉘엿 해가 지는 것을 확인한 아사신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직 땅거미가 깔리려면 멀었지만 좀 더 일찍 가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의심할 것이었다. 모두들 야스카산이 밤이 되면 자신의 집으로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전한 마을을 벗어나 훤히 드러난 경작지를 피해 숲의 골목으로 몸을 숨기고 천천히 걸었다. 간혹 마주치는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미소를 보이며 인사했다. 그러나 그런 여유롭던 모습도 점차 해안가에 가까워지면서 사라졌고 아사신은 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가벼운 산책처럼 보이기 위해 얇게 입고 나왔던 지라 냉기에 닿은 아사신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싸늘한 바다바람이 치고 있었다. 달려갈수록 바다로 떨어지는 해의 모습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하루종일 하늘을 불태우다 종래에는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거대한 태양의 잔해가 온 천지에 깔렸다. 그것은 내일을 위한 죽음이었다. 아사신의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귓가를 스치는 젖은 바람이 웅웅대며 외치고 있었다. 가지마 아사신, 가지마 아사신.
 그것은 찢어진 커튼처럼 연약했지만 줄기차게 공중을 휘저으며 달라붙는 죽은이의 소리였다. 아사신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살고싶지 않았지만 죽고싶지도 않았다. 흐느끼며 달라붙는 그 가녀린 손을 야멸차게 쳐냈다.
 해풍에 밀려온 파도가 만조를 이루는 그것은 가까울수록 깊고 검고 어두웠고, 멀수록 타오르듯 붉었다. 어떻게 저 먼 바다를 건널 생각을 하는지 아찔할 만큼 거대했다. 수많은 목숨이 던져진 곳이고 수없이 해가 몸을 던지는 곳이었다. 이제 그곳은 아사신의 미래가 될 바다였다.
아사신은 이를 악물고 기운 빠진 다리에 채찍질을 했다. 휘청하고 꺾일뻔한 무릎을 가까스로 다잡을 수 있었다.
 저 멀리 한 무리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사냥을 나가는 차림으로 서서 길목을 막고 있었다.
 이 근방에 사냥터가 있던가 생각하던 아사신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벼락에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붉은 문양이 새겨진 웃옷에 곰 가죽으로 된 하의를 걸친 남자의 얼굴이 너무도 익숙했다.
-이럴 수가!-
아사신은 눈을 부릅떴다. 남자도 여기서 아사신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발에 뿌리가 자란 듯 땅에 못 박혀 움직여 지지가 않았다.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남자는 야스카산이었다.

황망한 듯 멈춰 서서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 중에 먼저 행동한 것은 야스카산이었다. 그 얼굴에 당황과 불신의 그림자가 차례로 지나가더니 점차 귀신처럼 흉폭하게 변모했다. 야스카산의 얼굴이 분노로 검게 일그러졌다. 그가 이를 드러내고 노성을 지르자 그 음성이 마치 천둥과 같았다.

 “아사신-!!”

전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아사신의 몸이 번개에 맞은 듯 잘게 떨렸다. 그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 왜 있는지 머리 속에 차례로 의문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여기는 사냥터도 없고 갯벌도 없었다. 연어도 알을 낳으러 돌아오지 않는 곳이었다. 여기에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깎아지는 듯한 벼랑과 거센 파도뿐이었다.
 아사신은 달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다리가 땅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나자 질주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든 전사들의 무서운 표정이 쫓고 있었다. 그들은 소떼를 몰 때처럼 신중하고 서슴이 없었다.
-어떻게···!-
돌에 채여 미끄러질뻔하며 아사신은 구르듯이 달렸다.
-그가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도록 다듬어진 둔덕은 포기해야 했다. 숨가쁜 공포가 밀려왔다. 어디든 피하려고 하는 곳에는 전사들이 있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그들이 다가왔다. 무표정한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불신과 싸늘한 냉소였다. 그들은 아사신이 발악하는 것을 비웃고 있었다.
 아사신은 절벽으로 몰렸다. 눈 아래 짙푸른 파도가 검은 바위에 부서지며 흰 포말을 뱉었다. 뒤에서 발을 굴리며 남자들이 쫓아왔다.
“아사신!”
아사신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귓가에 매달린 수많은 목소리가 낄낄대며 손가락질 했다. 저것 봐, 너를 잡으러 왔어. 너는 잡히고 말 거야.
 “······야스카산.”
-이거였나.-
야스카산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음을 정했다는 것은 이런 의미였나.-
“이리 와라. 지금 돌아오면 벌을 내리지 않겠다.”
야스카산은 손을 내밀었다. 아사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보였다. 앞에는 떨어지면 뼈도 못 추릴 천길 낭떠러지였다. 야스카산이 다가온 만큼 아사신도 뒤로 물러섰다.
 “아사신!”
야스카산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사신의 얼굴은 붉은 노을에 적셔졌음에도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여기서 죽은 연고 없는 귀신들이 아사신의 다리를 잡아 끌었다. 공기 중에 배회하던 그 수없이 많은 하찮은 것들이 아사신의 영혼에 파고들어 멋대로 조정하기 시작했다.
 야스카산은 초조해졌다. 자신의 내민 손과 앞에 선 아사신. 그것은 예전의 사건을 기억 나게 했다. 손 끝을 스쳤던 무력감이 또다시 타올랐다.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이리 오너라. 절대 네게 벌을 주지 않겠다.”
부드럽게 회유하며 손을 내밀어도 그 끝은 아사신에게 닿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신기루와 같았다.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그 영상은 눈앞에 있으되 실체는 결코 네 손엔 잡혀주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사신은 천천히 고개를 수그려 발 밑의 낭떠러지를 바라보았다. 검고 푸르고 붉게 물든 바다는 오래 바라볼수록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마력이 있었다.
 문득 수면 위에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주가 실패로 돌아가고,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질질 끌려가서 비참하게 감금당할 모습을······.
 침대에 누워 어둠 속을 방황하고 먹을 것을 토해내며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그 생활을.
 그것은 눈뜨고 숨만 쉬다 뿐이지 살아서 겪는 지옥이었다.
크게 한번 파도가 치자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내려다보던 아사신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몸이 반쯤 바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사신은 다시 몸을 돌렸다. 야스카산은 아까 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의 얼굴은 초조해보였다.
 -네가 바라는 것이 나의 죽음이었니?-
아사신이 바람에 속삭였다. 파도를 끌고 와 썰물을 일으키는 바람이 불어와 아사신의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흐트리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머리카락사이로 보이는 붉은 파도아래 소사린이 길게 누워있었다.
 -영원히 함께 있자고 해놓고서.-
싸늘하게 식은 푸른 얼굴이 질시의 말을 했다. 아사신은 심장을 움켜쥐었다. 격정과 고통이 맥박을 칠 때마다 함께 뛰었다. 급하게 뒤를 돌아보자 야스카산이 느리고 신중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손이 다가오는 만큼 아사신의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아사신은 생각했다.
 “아사신, 쓸데없는 생각말고 이리 오너라.”
야스카산이 성큼 한걸음 더 다가왔다. 그 걸음은 초조했다. 야스카산이 다가온 만큼 아사신도 뒤로 물러났다. 바로 한 걸음 차이로 뒤는 천길 낭떠러지였다. 조금만 허투르게 움직여도 자신의 몸은 허공으로 날아올라 갈기갈기 찢길 것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무슨 생각?”
아사신은 희미한 비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살고 싶다는 생각? 그 품이 뜨거웠다는 생각? 어떤 생각?
야스카산과의 거리는 가까운 듯 했지만 꽤 멀었다. 그가 전속력으로 달려온다 해도 결코 자신을 잡을 수 없을 것이었다.
 야스카산의 얼굴이 더더욱 굳어졌다. 그의 등과 어깨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본능적으로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아사신!”
야스카산이 한 발 자국 더 앞으로 다가 왔다. 그는 침착함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사신의 눈동자에 희미한 웃음이 감돌았다. 땅을 밟고 있는 발뒤꿈치에서 돌멩이가 투둑 투둑 잘게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사신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미소는 노을의 불타는 색에 번져 처연하고 애처로웠다.
“안녕 야스카산.”
아사신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야스카산으로부터 등을 돌리며 마지막 인사를 건냈다. 더 이상 디딜 곳이 없어진 발이 허공을 짚자 순식간에 몸은 맹렬한 속도로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차갑고 서늘한 바다의 공기가 순식간에 급변하며 귓가를 칼날처럼 예리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사신!!”
야스카산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등 뒤를 따라 붙었다. 그의 뒤에서 전사들이 야스카산을 결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공기를 꿰뚫고 지나와 아사신과 함께 있었다. 따라올 수 없는 주인의 몸을 대신하듯 그 음성은 아사신의 심장에 스며들었다. 아사신은 약간 슬퍼졌다.
 떨어지는 짧은 순간은 영원처럼 정지하고 공간이 사라졌다.
 아버지가 옳았다. 아무리 악을 쓰고 애를 써도 결과는 같지 않은가. 어머니가 죽으라고 목을 조이던 그때에 지체 없이 끝났더라면 모든 일은 얼마나 간편하고 깨끗했을 것인가!
 “놔라!!”
야스카산이 전사들에게 잡혀 악을 쓰고 있었다. 아사신은 한숨을 쉬었다. 저 성격 급한 남자가 조금만 더 천천히 다가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더라면 좀 더 오래 얼굴을 바라보며 인사할 수 있었을 텐데.
낙하하는 거리는 분명히 짧으련만 주마등처럼 밀려오는 기억은 끝이 없었다. 그 기억의 중앙에는 싫든 좋든 늘 야스카산이 있었다.
 처음에 야스카산의 이름은 열등감이었다. 그것은 아사신이 성장함과 함께 자괴감으로 이어졌고 격렬한 반발이 되었다가 신부가 된 후에는 증오가 되었다.
 지금 그 이름은 더할 수 없는 통증이 되어버렸다. 그 통증은 달콤하다기엔 너무도 가시 돋았고, 아프다고 느끼기엔 너무도 깊었다. 이제는 그 이름을 정의할 단어는 하나로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젠 모두 상관없어.-
아사신은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금홍빛에 물든 바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커멓게 보이는 돌들과 물결 치는 파도가 곧 불귀의 객이 되어 산산이 부숴질 아사신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그 품에 기꺼이 안기기를 소망하며 이 모든 고통과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랬다.
갑자기 아사신은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새롭고 낯선 것이었다. 어깨와 등뼈가 산채로 뽑혀나가는 느낌이었다. 아사신은 하얗게 질렸다. 아파서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살이 찢어지고 새 세포가 자라나고 존재하지 않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등뼈가 벌어졌다. 비명을 지를 세도 없이 연속적으로 터지는 고통에 아사신의 영혼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렸다.
아사신은 문득 몸이 공중으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요동 치던 파도는 물러가고, 하늘과 바다의 지평선이 빙글 한바퀴 선회하였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사신은 이 모든 상황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날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날개가 세상을 덮을 만큼 크게 돋아올라 아사신의 몸을 순식간에 갈매기떼과 같은 위치로 부상시켰다. 그것은 묵직했으나 더할 나위 없이 강했다.
 몇 번의 날갯짓만으로 아사신은 자신이 떨어졌던 절벽까지 치솟을 수 있었다. 비명처럼 환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생경한 느낌이었다. 희열이었고, 환상이었다.
 신화 속 태초의 족장과 같이 그의 날개는 검고 컸으며 허공을 박차고 날아오를 만큼 힘이 있었다.
족장의 전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얼이 빠진 모습으로 입을 벌리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중 몇몇은 무릎을 꿇고 비명을 질러댔다. 공포와 외경심이 그들의 눈에 떠올랐다.
그리고 야스카산.
 아사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혼란의 와중에 야스카산만이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있어 보였다. 그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으나 당황하지도 무릎을 꿇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의 날개를 바라보더니 곧 뒤를 쫓아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사신--!!!”
-야스카산.-
아사신은 아래를 굽어보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달리는 남자의 얼굴은 처절했다.
 “아사신!!”
-아사신. 아사신.-
 야스카산은 공포를 느꼈다. 그것은 절대적이고 순수한 공포였다.
 분노도 애증도 공포 앞에 하얗게 표백되어버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한가지는 알 수 있었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너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이제 너희는 영원히 이별할 거라고.
너무도 오래 전에 사용되었던 눈물샘에서 메마르고 메마른, 응축되고 절박한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야스카산은 절규했다. 그 어떤 이유도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진 못했다. 죽을 줄로만 알았던 아사신이 저 높은 곳에 날아오른 기적에 감사했다. 그러나 또다시 어딘 가로 가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사신은 날아올랐다. 가야 했다. 내부에서 힘찬 목소리가 명령했다. 목적지는 몰라도 아사신은 목소리의 명령에 따르기로 했다. 새롭게 돋아난 날개가 인도하고 있었다.
 “아사신!!”
듣기에도 처절할 만큼 겁에 질린 목소리가 시선을 잡았지만 날개는 이미 저 멀리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사신의 고개도 그곳으로 고정되었다. 날개의 의지가 그 곳으로 가고 싶어했다. 천천히 방향을 잡고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허공을 가르는 날개가 화려하게 깃을 칠 때마다 몸이 더 높이 비상했다. 찬연한 태양의 마지막 빛을 느끼며 아사신은 날아가기 시작했다. 높은 곳의 알싸한 바람이 귓가를 즐겁게 살랑이고, 머리를 짓누르던 수많은 잡념들이 새벽안개처럼 사라져버렸다. 아사신은 황홀했다. 신선했다. 의지가 넘쳤다.
 필사적으로 달려오며 고함을 지르는 야스카산의 존재도 더 이상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태어날 때부터 비상하는 법을 배워온 것처럼 날개는 유려하게 움직였다. 강인한 근육과 새로 돋은 깃이 움직일 때마다 아사신은 그들로부터 훌쩍 멀어졌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한 마리 큰 새와 같이 거침없이 비상하는 아사신의 뒤로 차가운 시선이 향했다. 그것은 싸늘했고, 온기가 없었으며 일말의 자비로움도 없었다.
그것은 주저 없이 바람을 갈랐다. 무방비 하게 등을 드러낸 아사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아사신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날개와 연결된 신경이 인두에 지진 듯한 통증에 놀라며 빠르게 수축했다. 곰을 잡을 때나 씀 직한 두꺼운 화살이 여린 깃과 뼈 사이를 관통하고 있었다.
 아사신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중심이 급격하게 흔들리긴 했지만 아직은 날아갈 만 했다. 피가 흐르는 날개에 힘을 주어 퍼덕이자, 핏줄이 터지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와 날개를 관통했다. 아사신은 비명을 질렀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날 수 없게 된 한쪽 날개가 꺾이며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갓 태어난 뼈 사이를 화살촉이 무지막지하게 긁고 있었다.
아사신은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추락하는 그 몸을 야스카산이 구르듯이 달려와 받아 들었다. 그의 얼굴은 식은땀 범벅이었다.
 야스카산의 떨리는 손이 화살에 닿았다. 힘껏 잡고 뽑아내자 그것이 나감과 동시에 날개는 처음의 모양대로 작게 되었다. 검은 솜털로 이루어진 그것은 피투성이였다. 야스카산은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아사신을 껴안았다. 실제로 오랫동안 숨을 쉬지 못한 것처럼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아사신은 꽉 껴안긴 야스카산의 품안에서 실눈을 떴다. 야스카산의 어깨너머로 전사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서서 자신을 미묘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활을 들고 서서 웃지 않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남자는 힐레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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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신부 1부 입니다!

아래는 나름대로 코믹(....)스럽게 연출해본 신부 캐릭터들의 인터뷰 입니다.
 혹시라도 캐릭터들의 이미지에 금이 갈 부작용이 걱정 된다;; 하시면 안 보셔도 무방합니다.








* 캐릭터 인터뷰 start




 * 아사신편

 Amber : (안타까운 얼굴로) 어쩌다가 이런 야오이물에 출현하게 되었는가?
-나도 모르겠다. 왜 내가 여기 이러고 있는 건가? 나는 내가 족장인줄 알았다.
Amber : 족장인줄 알았다니? 나는 분명히 신의 아내라고 알려줬었다.
- 한문이라서 못 알아봤다 (지그시 노려본다.) 나는 그게 족장이란 뜻인 줄 알았다.
Amber : (비웃으며) 언어능력이 형편없다. 그나저나 작품으로 돌아가서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무엇인가?
- (역시 비웃으며) 그게 작품이라고까지 할 수 있나? 그건 그냥 게이물 아닌가? 하하- 화내지 마라. 못생긴 호박에 줄그으니 더 무섭다. 음- 굳이 꼽자면 소사린이랑 호흡 맞출 때였다. 그 여자 보기보다 무진장 까탈스럽다. 팔자에도 없는 성처녀 역할 하고 있자니 열 받아 죽겠다며 줄담배 피우면서 샹그리라스러운 욕하는 게 취미다.
 Amber : 소사린이? 흠, 믿을 수가 없다. 또 다른 건 없었나?
- 아 그리고 야스카산 놈이랑 하드섹스 씬 찍을 때,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그 새끼 진짜 크고 굵다.
Amber : (눈을 빛낸다) 좀 더 자세한 설명 부탁한다.
 -……변태.
Amber : 뭐라고? 내가 왜 변탠가!!!
 -똥꼬에 쑤시는게 변태지 뭐가 변태야.
Amber : 헙! (조용히 패하여 뒤로 돌아간다.)

* 야스카산 편

Amber : (아까의 실패를 거울삼아 느긋하게 나가기로 했다.) 야스카산 반갑다. 사적으로 만나기는 처음이다.
- 안 만나고 싶었다.
Amber : 헙! 왜인가? 내가 당신들 월급 주면서 캐스팅 하는데.
- 남자가 아내라곤 말 안 했다.
Amber : 음 뭐, 어쨌든 다음으로 넘어가자 (불리한건 빨리 넘기려고 든다.) 촬영하면서 뭐 힘들거나 좋았다거나 그런 장면은 없었나?
- (비릿하게 웃으며) 섹스씬에 대한 거 묻고 싶은 건가? 사실대로 말하자면 꽤 좋았다.
Amber : 오오!
- 아사신 그 녀석 하기 전엔 온갖 앙탈과 짜증을 부리면서 막상 시작하면 장난이 아니다. 그 다리 사이를 손가락으로 길들이고, 그 속에 내 남삐-를 박아넣을 때면 좋아서 허벅지 근육이 움찔움찔 튄다. 사정의 오르가즘에 길게 떨며 속에다 쏟아 부으면 곧 그 녀석 남삐- 에서도 꿀럭대며 정삐-를 발사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 남삐- 를 꺼낼라 치면….
Amber : (벌그레) 잠깐잠깐!! 거기까지 오케이 오케이!! 아 부끄라바라.
- 더한 것도 시키면서 뭐가 부끄럽나?
Amber : 둔해빠진것들. 당신이 그러니까 연애를 못하는 거다. 소녀의 순정이란 거다.
- ……..당신 나이가 대체 어딜 봐서 소년가.
Amber : (이성을 잃고) 만 나이로 세아려라 만 나이로!
- 만 나이로 쳐도 소녀라고 하기엔 좀…
Amber : 캬악!! (역시 이성을 상실한다.)

* 소사린 편

Amber : (여자다 만세!!) 소사린 반갑다. 근데 얼굴이 좀 초췌하다?
- 마지막 촬영 때 불길이 너무 세서 얼굴 구웠다. 시버럴.
 Amber : 호오, 입이 생각보다 거칠다.
- 너도 얼굴 그을려 바라. 욕 안나오나.
Amber : 나름대로 은근히 팬도 있다.(단 한명 봤다.) 그런 모습은 대략 좋지 않다.
 - 늑대와 곰을 맨손으로 잡는 새로운 타입의 여전사라고 누가 구라깠나? 늑대를 잡긴 개뿔 잡고, 곰을 잡긴 개뿔잡나? 신발도 주제에 나는데 난 맨날 얻어맞고 개고생하다 결국에는 하늘의 별님이 되었습니다냐? 첫날밤은!! 첫날밤 잡아주기로 했잖아 첫날밤!!
 Amber : 헉! 진정해라! 대신 당신의 인상은 순결하고 성스러운 여성으로 간직 될 것이다.
-난 에로가 좋아! 에로가 좋다고!! 개뼉다귀 같은 신발 (아사신을 뜻하는 듯 하다.) 말고, 테크닉 제로인 야스카산 말고, 이탈리안 머슬맨 같은 남자를 내게 줘!!! 남자!! 남자!!! 우어어어 암!수!암!수! 색즉시공!!!
Amber : 아아 제바아아알!!!! (바닥에 쓰러져 처운다.)

* 힐레멘 편

Amber : …….
-왜 아무 질문이 없나?
Amber :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소소한 것부터 시작할까? 좋아하는 색깔이라던가, 음식이라던가…
- 미쳤나? 당신 왜 이러나?
Amber : 미안하다. 현실을 망각하고 싶었다. 작품에 대해 뭐 할말 없나?
- 한가지만 묻고싶다.
Amber : 뭔가?
- 나는 왜 인기가 없나?
Amber : 그건 나도 좀 이해가 안 간다. 나는 당신 캐릭터 만들 때 정말 인기 대박 많을 거라고 상상하며 만들었다. 그런데 여론은(여론?;;;) 그렇지가 않았다. 슬슬 등장하기 시작할 때부터 죽여주세요, 때려주세요, 미워요 등등이었다.
- 나도 멋진 거 해달라. 나는 야스카산보다 밤일도 잘한다.
소사린 : (지나가다 난입한다.) 거짓말!!
 Amber : (창백) …쟤 좀 누가 치워라.

 * 헤로나킨 편 (아사신 어머니)

Amber : 반갑다 헤로나킨.
- 내 이름 옆에 왜 아사신 어머니라고 부연설명 달았나?
Amber : 안 그러면 아무도 모른다.
- 이런 젠장찌개. 맨날 나오는 게 머리 풀어 헤치고 아사신 죽어라만 헤대니 알 리가 있나. 난 나름대로 인텔리한 여성이다.
Amber : 젊은 나이에 요절한 역할 맞기 아깝지 않나?
- 내 젊은 시절을 다룬 다큐멘터리 나온 대더니 왜 안 나오나? 계약서랑 틀리다. 다음에 변호사 대동하고 만나자!
Amber : (움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외전이라고 한다. 언젠간 나올지도 모른다. 처음엔 구상했는데 귀찮아서 못쓰고 있다. 음, 작품 찍으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  26화 찍을 때 신부사상 내 대사 최고로 길었다. 엔지 열 다섯번은 낸 거 같다. 아 노을이 지면 밤이 되는 거지 거기에 무슨 신이 자살하네 어쩌네 하는 부연설명이 그리 들어가나? 그냥 해 떨어지면 노을이 진다로 알아들어라 잡것아! 하고 싶었다.
Amber : (창백) 인터뷰에 응해줘서 감사하다.

* 수라킨 편

Amber : 주인수 아사신보다 인기가 좋은 수라킨!
- 내가 좀 그렇다.
Amber : 어떤가. 아사신과 연기하기 좋은가?
- 그 자식 쫌생이다. 19화때 금은보화 야스카산한테 필요 없다고 화내는 씬 찍는데 서른번 엔지 냈다. 목소리가 아주 덜덜덜 떨리더라. 나중에 촬영 끝나곤 한 두개 슬쩍 하려다 걸렸었다.
Amber : 그것 참 의외다. 역에서의 그는 상당히 성정이 곧으면서 섬세한 인물을 연기하지 않았던가?
- 그거 보면 참 타고난 배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Amber : 음 그럼 질문을 바꾸겠다. 어떤 장면이 제일 힘들었는가?
 - (단호하게) 그런 것 따윈 없었다. 그냥 내 본연의 특성을 그대로 살려서 연기했다.
 Amber : 실제 성격하고 비슷한가?
- 다들 그렇다고 한다. 타스가는 그래서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Amber : 여론(여론?;;)에서는 당신과 타스가가 잘 되리라고 미는 목소리가 아주 높다. 아사신 야스카산 외 최고로 밀어주는 커플이 아닌가 한다.
- 그건 캐릭터들 중에서 커플로 역일 가능성이 있는 게 우리 둘 뿐이라서 그렇다. 나머지 캐릭터들 들어봐라. 시오사라, 가리시네, 바르바칸, 민네 등등. 누가 있나? 캐릭터의 부족이자 야오이 물로서의 실격이다. 서브커플이 마련되지 않아서 오죽하면 사람들이 일반 커플을 지지하는가?
Amber : (창백) 아주 아픈 데를 콕콕 찔러주는 인터뷰 감사하다.
- 기다려라. 한 가지 질문이 있다.
Amber : 뭔가? 해라.
- 내 첫날밤은 언제 나오나? 참고로 나도 소사린처럼 그녀는 그렇게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같은 신발샛길 같은 엔딩 나오면 밤 길 상당히 조심해라.
Amber : …내 다음부터 당신들 섭외하나 두고 보자.
신부(神婦) 2부 - 完




6




-만약에 사람이 신을 외면하고 산다면 그것은 사람의 종말이다. 사람이 자신의 근본을 모르는 것은 부모를 모르고 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람이라면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
야스카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 넘어가서, 이번에는 신부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신부요?-
야스카산이 질문 했다.
-신부는 무엇입니까?-
-신부는 신의 아내. 선택 받은 여성이다. 그녀의 복중에 태어난 자가 우리의 족장이 된다.-
-그럼 나의 어머니는 신부입니까?-
&#8211;야스카산. 너의 어미는 신부가 아니란다. 신부는 따로 있어. 그녀는 궁에서 살지 않지. 제대로 된 후계자를 놓지 못해서 족장이 내쳐버렸다. 그래서 네가 신부의 아들이 아님에도 족장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거다.-
-그렇군요.-
야스카산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궁금하지 않았기에 더 캐묻고 싶지 않았다. 그는 늘 자신의 이복 형제들과 경쟁하며 자라왔다. 형제들은 강하고 뛰어났다. 늘 그들과 일거수일투족을 비교 당하며 살아야 했다. 족장의 선택 받은 아들이면서도 후계자가 되지 못한다니,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럼 저도 언젠가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겠군요.-
-그렇지. 너도 언젠가는 신부를 맞이하게 될 거다 야스카산. 부디 너의 신부는 우리에게 정통한 피를 잇는 훌륭한 후계자를 낳아주어야 할 텐데 말이다.-

야스카산은 침대 위에 널브러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남자의 잿빛머리카락과 죽은 듯한 안색과 앙상한 팔다리를 무심하게 지나쳤다.
 남자는 아파보였다.
머리 색과 별 차이가 없을 만큼 굳은 회색 빛으로 변한 살갗과 가슴을 칭칭 싸맨 붕대. 남자가 간혹 미간을 찌푸리거나 손가락을 꿈틀대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가 죽었다고 착각할만한 형색이었다.
“······신부.”
야스카산은 피식 웃었다. 잠시 손을 이마에 짚고 끌끌대며 웃던 야스카산은 그 급작스러운 웃음을 멈추었다. 다시 뜨인 푸른 눈동자는 지독하게 피로해보였다.
“신부 따위······.”
야스카산은 천천히 다가가 아사신의 목을 가볍게 눌렀다. 뼈가 드러날 만큼 앙상한 목은 한 손에 잡혔다. 축축한 땀과 서늘한 온도는 닿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빴다. 눈살을 찌푸리며 지긋이 손에 힘을 주자 아사신의 앙다물린 입술이 벌어지며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목젖을 좀 더 압박하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신부는 신의 아내. 선택 받은 여성이다.-
어린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장로의 목소리가 멍하니 울렸다. 신의 아내··· 선택 받은 여성······.
-거짓말.-
야스카산은 열릴 듯 말 듯 괴로워하며 숨을 몰아쉬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 정도로 해서는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곧 죽을 것처럼 숨이 가빴다. 약하고 쓸모없는 육체다.
 “쳇!”
야스카산은 손을 거둬들였다. 젖은 땀이 손가락 끝에 남았다. 물끄러미 그 축축하게 젖은 손끝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왔다. 몇 명의 신관과 신녀들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야스카산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되었다.
 “신부의 상태는 어떻지?”
허리가 굽은 노신관이 대답했다.
“화살이 부러뜨려놓은 날개 뼈는 다행히 잡았지만 고통이 심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 작은 날개에 화살이 명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는 상처가 경미합니다. 다른 곳의 상처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영양실조로 인해 몸이 많이 상한 상태라서 회복이 더딘 것뿐입니다.”
“잘라내면?”
“네?”
야스카산이 불쑥 말했다.
“날개를 아예 잘라내면?”
“족장!”
신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날개는 신성한 증표. 그것을 잘라내다니요. 들어본 적이 없는 말입니다!”
“목숨에 지장이 있을까?”
야스카산은 진지하게 되물었다. 신관은 사색이 되어 주변을 둘러보다 조심스레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등뼈에 붙어있는 기관을 잘라낸다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뼈 채로 들어냄으로써 신경에 어떤 손상을 줄지 모르니까요.”
“그런가?”
“네, 족장. 물소와 충돌하여 등을 다친 뒤로 다시는 걷지 못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흐음.”
무척이나 날개를 자르고 싶었던 듯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야스카산을 보고 신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쨌든 그가 건강하다니 다행이다. 언제쯤 정신을 차릴 수 있지?”
“그것은··· 저희로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족장.”
“알 수 없다는 거군.”
야스카산의 눈동자가 싸늘해졌다. 그 북구의 눈과 같은 시선에 신관과 신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야스카산은 불쾌한 얼굴로 등을 돌렸다.
 “내 인내심은 길지 않다.”
“···네.”
“3일내로 신부의 의식을 회복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책임을 모두 네게 묻겠다.”




의식은 혼돈의 가운데서 침잠하고 있었다. 아사신의 육체는 젖은 나뭇잎처럼 무력했다. 어디선가 시체에 바르는 몰약냄새가 났다. 뜨거운 화염의 냄새도 났다.
“이것은 조각목(木)입니다.”
수없이 생겼다 사라지는 꿈의 편린들 가운데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단단한 나무칼을 든 어린 소년이 보였다.
 “잘 말리고 다듬은 조각목은 못을 박아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합니다. 이것으로 연습하십시오.”
남자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소년은 나무칼을 휘둘렀다. 칼은 그것의 재질이 나무라는 것도 잊을 만큼 무시무시한 굉음을 냈다. 소년의 검고 긴 머리카락이 공중에 흩날렸다. 호흡조차 뜨거운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가운데 소년의 단단한 육체가 눈부시게 빛이 났다. 소년이 흘리는 땀방울의 영롱함은 마치 무지개와 같았다. 신의 젊은 환생처럼 소년은 생기가 넘치고 단단하고 아름다웠다. 아사신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이복동생이자 족장의 유일한 후계자인 야스카산이었다.
열대낫살은 됐을까.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지만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강한 야스카산의 모습에 아사신은 기가 죽었다. 살며시 뒷걸음질쳐 그들의 수련장소에서 비켜나려고 했지만 운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밟아버린 나뭇가지의 소리에 야스카산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타올랐다. 다급하게 달렸지만 그보다 야스카산이 더 빨랐다. 훌쩍 공중을 날아오른 그는 아사신의 등 뒤로 재빨리 다가가 그의 뒷목을 움켜잡았다.
 “너는 누구냐.”
“······.”
“누구길래 여기 있느냐. 아버지가 이 근처는 내가 수련을 할 때 쓸 장소이니 사람들의 출입을 금했다고 들었다. 너는 누구길래 감히 족장의 명을 어겼느냐.”
그 나이에 맞지 않는 위엄과 권위를 가진 냉엄한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아사신은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여기다 대고 나는 원래 너의 자리에 앉았을 사람. 신부의 아들이자 너의 이복형이라고는 도저히 밝힐 수가 없었다.
“야스카산!”
뒤에서 야스카산의 선생이 다가왔다. 그는 야스카산이 아사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자 인상을 찡그렸다.
 “무얼 하고 있습니까. 그런 곳에서.”
“이 자가 우리를 엿보고 있었다.”
“그는 신경 끄고 이리 오십시오. 수업을 계속 합시다.”
“아는 사인가?”
야스카산의 선생은 아사신을 흘깃 바라보고 말했다.
“신부의 아들입니다.”
그 신부의 아들이라는 단어에 함축된 수많은 뜻을 아사신은 알아챘다. 야스카산의 눈동자가 진해졌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 관찰하는 듯한 시선에 아사신은 조금 발끈했다. 야스카산의 가슴을 떠밀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가 아사신이로군.”
“······놔.”
아사신의 말에 야스카산은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다. 약간의 관찰만으로도 흥미가 떨어졌는지 쉽게 놓아주었다. 아사신은 옷을 추스르며 뒷걸음질 쳤다. 공중에서 부딪힌 푸른 눈동자는 족장 바르바칸을 빼다 박은 듯 했다. 그 눈에 응시 당하자 심장이 욱신거렸다.
 -신부와 아이들을 내쫓아라.-
그렇게 말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되살아 났다.
-그들은 더 이상 내 아내와 내 아이들이 아니다.-
“가 봐라. 그리고 더 이상 여기 오지 마라.”
야스카산의 냉정한 축객령에 아사신은 목덜미를 잡혔을 때보다 더욱 치욕스런 기분에 휩싸였다. 붉어진 얼굴을 들자 그들은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앗!”
아사신은 스스로를 저주하고 싶었다. 접싯물이라도 있으면 코를 박고 죽어버리고 싶어졌다. 그들을 곁눈질하며 멍하니 걷다 그만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만 것이었다. 엎어진 등 뒤로 시선이 쏟아졌다. 야스카산의 선생이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아사신은 벌떡 일어나 달렸다. 꿈인데, 분명히 꿈인데도 모든 감각은 마치 지금인양 너무도 생생했다. 달아오른 얼굴도 풀밭을 달리는 다리도 너무도 생생했다. 어느덧 풀밭을 달리는 발은 맨발이 되고 밟히는 곳에는 더 이상 보드라운 풀이 없었다. 거칠고 날카로운 돌이 온 사방에 굴러 다니는 곳을 아사신은 혼자 뛰고 있었다. 그 멀고 긴 길 끝은 영원히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문득 큰 빛이 보였다.
 사람들이 몸을 부딪혀 왔다. 아사신은 이리저리 부딪히는 사람들의 통에서 정신이 없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기쁜 듯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새로운 신의 피를!”
“강력한 새 지도자를!”
“야스카산! 야스카산!”
-야스카산······.-
아사신은 멍하니 저 멀리 중앙 탑 위의 황금의자를 바라보았다. 족장만이 앉을 수 있는 그 의자 위에 야스카산이 당당한 육체를 뽐내며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신녀들의 북소리가 귓가에 작열하듯 타올랐다. 사방에 유향(乳香)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 달콤한 내음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건강한 갈색 피부위에 얹어진 목걸이와 팔찌가 횃불에 반사되며 칼날처럼 희번뜩 거렸다.
 갓 잡은 희생자의 피를 온 몸에 묻히고 짜릿한 표정으로 야스카산이 웃었다. 그는 들끓는 젊은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수사자와 같았다. 오만한 표정으로 아래를 굽어보며 자신의 강함을, 젊음을, 뜨거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뿜어내고 있었다.
 “야스카산!”
“야스카산!”
사람들의 함성이 점점 더 커졌다. 환호와 환희가 광희난무하며 어지러이 돌았다. 세상은 젊고 아름다운 새 지도자를 기쁘게 반기며 찬양하고 있었다. 멍하니 손을 내려놓고 아무 기쁨도 즐거움도 없이 서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었다.
 “소사린.”
“아사신.”
소사린이 다가와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오래된 강의 여신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답게 소사린에게서는 청아한 물 냄새가 났다. 흐르거나 떨어지는 강한 물살이 아니라 항아리에 담겨있는 정제된 고요한 물과 같았다. 그녀의 살갗에서는 여름 오후에 널어놓은 빨래에서 나는 햇살이 느껴졌다. 그녀의 부드러움. 아름다움. 생각이 깊음. 고요함. 사랑스러움.
그 모든 것은 죽고 없었다.
-나의 여신.-
아사신은 서럽게 울었다. 이 빛과 같은 여신을 다시 만날 길은 영원히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햇살과 달빛으로 빚어진 여신은 한줌의 재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햇살도 달빛도 죽음에 불타 연기로 사라지고 남은 것은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과 영원한 고독이었다.
 아사신은 한없이 울며 바닥에 엎드렸다. 머리로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육체는 깨어나주지 않았다. 영원히 이렇게 악몽 속을 헤매게 될까 너무도 두려웠다.
갑자기 아사신은 진하고 쓴 물을 삼켰다. 그것은 머리털이 쭈삣 설 정도로 심하게 쓰고 독한 것이었다. 격렬하게 구토 감이 치밀어 오르며 웩 하고 뱉어내었다. 그러나 곧 다시 그 쓰디쓴 것이 구강을 침범했다.
 아사신은 고통스러웠다. 혀에 그것이 닿자 너무도 쓰고 독해서 혀가 녹을 것만 같았다. 미친듯이 기침을 하고 격렬하게 발버둥쳐도 그것은 들어오기를 멈추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썹을 겨우겨우 들어올리고 흐릿한 초점을 맞추고 자신에게 그 쓴 물을 억지로 먹이는 사람을 노려보려고 애썼다. 갈라지고 터진 목에서 잔뜩 쉬어 빠진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하지··· 마.”
“됐다!”
누군가의 탄성이 들리고 흘러내리려는 머리가 억지로 일으켜 세워졌다. 팽팽 도는 시야를 억지로 고정하려고 애를 쓰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자 흰 옷을 입은 여러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내가 죽어서 천인을 보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누구······.”
“정신이 들었군.”
아사신은 흠칫 몸을 떨었다. 거품이 부글부글 이는 쓴 물의 존재도 한 순간에 잊게 만드는 차갑고 냉랭한 음성이었다. 고개를 살짝 비틀자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남자가 보였다. 목검을 휘두르며 기합을 내지르던 모습과 황금을 부은 의자에 앉아 아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모습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남자는 야스카산이었다.
야스카산은 서슴없이 다가와 거품이 끓는 아사신의 입가를 훔쳤다. 충혈된 붉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도 훔쳤다. 몽롱한 정신으로 그 행동들을 지켜보던 아사신의 눈 앞에 빙그레 웃는 야스카산의 입술이 보였다. 그는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보였다.
“정신이 들었군.”
“뱀 독을 섞어 만든 약입니다. 사경을 헤매는 사람의 혼도 순식간에 지상으로 끌고 온다는 약이지요.”
신관은 &#8211;위험하니까 잘 쓰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라는 말은 슬쩍 흐렸다.
 “모두 나가라. 신부와 나는 할 이야기가 있다.”
야스카산의 명령에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지는 것을 아사신은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마지막 사람이 문을 닫자 어색한 적막이 찾아왔다.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옆에 버티고 서 있는 야스카산 때문에 아사신은 몹시 불안해졌다.
 “그······.”
“닦아라.”
불쑥 야스카산이 내민 손수건에 쓴 물을 뱉으며 아사신이 물었다.
“···몇··· 일이··· 흘렀습니까.”
“닷새.”
야스카산은 짧고 명확하게 대답했다. 입이 깨끗해지자 향이 좋은 차를 건네주었다. 그의 모든 행동은 부드럽고 다정했다. 아사신은 차를 거부하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야스카산의 큰 손은 용납하지 않았다. 머리를 꽉 틀어쥐고 잔을 입술에 부딪혀오는데 마지못해 마실 수 밖에 없었다.
“자면서 소사린의 이름을 부르더군.”
“······.”
물을 뿜을 뻔 했다···.
아사신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정말 애절하게 부르더군. 하긴 그녀의 일 때문에 음식을 거부하다 결국 자살을 하려고 했으니 오죽할까.”
“···자살이 아닙니다.”
“그럼 도망이었던가?”
야스카산은 빙글 웃었다.
“그렇지. 처음엔 도망가려고 했었지. 나로서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너는 분명 도망가려고 했다. 감히 신부의 몸으로, 신성한 신탁을 받은 몸으로 말이다. 내게 아들도 낳아주지 않고 도망가려고 했단 말이지.”
아사신은 침묵했다. 과장된 친절을 보인다 싶더니 이제 비꼬기 시작했다. 심장이 불안으로 두근두근 뛰었다.
“첫번째는 여자와, 두 번째는 혼자 도망쳤지.”
야스카산의 눈동자가 음습하게 빛났다.
“나는 다시는 너를 믿지 않겠다.”
“······.”
아사신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지만 가슴에 바위가 얹혀진 듯한 고통이 엄습하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마르고 건조하여 낙엽처럼 바삭바삭 흩어질 것 같은 입술 위에 야스카산의 시선이 머물렀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 메마른 입술을 덧그리자 아사신은 살짝 몸을 떨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야스카산의 입술에 체온이 상승했다.
야스카산은 아주 약간의 거리를 남겨두고 가만히 정지했다. 창백하고 여윈 얼굴을 잡고 무감각하게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좋아. 대답을 바란 건 아니니까.”
 “야스카산.”
야스카산은 벌떡 일어났다. 그가 멀어지자 아사신은 갑작스러운 추위를 느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네게 묶여있는 일 말고도 할 일이 많다. 한동안 너 때문에 지체된 일을 하느라 바쁠 거다.”
야스카산이 활짝 문을 열자 아사신은 더욱 안절부절 못하게 되었다. 절로 입술이 깨물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하는 야스카산의 등이 너무도 싸늘했다.
“내가 돌아올 동안 건강이 회복되길 신에게 빌어라.”
“야···스카산.”
“너처럼 병약하고 쓸모없고 안하무인의 남자신부를 참아줄 만큼 나는 인내심이 많지 않다.”
아사신은 야스카산을 향해 손을 뻗다 말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야스카산은 문을 닫았다. 투박하고 무거운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밤이 깊었을 무렵 야스카산의 어머니 민네가 찾아왔다. 그녀는 단정하게 머리를 틀어올리고 차분한 색상의 옷을 입고 있었다. 아사신은 침착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신부.”
민네의 음성은 깊고 풍부했으며 산들바람처럼 보드라웠다. 문이 열린 시점부터 잔뜩 긴장해서 털을 곤두세우고 있던 아사신에게 너무도 다정한 눈빛으로 다가왔다. 히끗한 회갈색 머리카락과 잔잔한 주름이 선해보였다. 연한 회색이 도는 초록색 눈동자는 풍부한 모성과 세월의 지혜가 담겨 오래 빚은 술처럼 깊이 있었고 통통하고 혈색 좋은 볼은 다정했다.
“저는 야스카산의 어미인 민네입니다.”
“아······.”
아사신의 눈초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아사신은 자신의 어머니를 내쫓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아사신의 회색 눈이 의심으로 가늘게 좁혀지자 민네가 슬픈듯한 얼굴을 했다.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왜요?”
민네는 다정하게 손을 맞잡아 왔다. 아사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잡힌 손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앓는 동안 거칠고 칙칙하게 착색된 손을 촉촉하고 보드라운 손이 감싸왔다. 민네의 손은 죽은 시오사라 할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지켜야 할 사랑하는 사람을 가진 여인의 애절한 모습을 말이다. 시오사라가 소사린을 바라보던 그 애틋한 갈망이 담긴 얼굴. 그와 똑 같은 표정을 하고 민네는 간절한 시선을 마주쳐왔다.
“신부. 제발 마음을 여세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사신이 사납게 소리쳤다. 민네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흘러 넘치는 아들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아사신을 불편하게 했다. 부드럽게 속박된 손을 차마 내칠 수가 없었다.
 “아사신.”
아사신은 흠칫 놀라 눈을 치켜 떴다. 민네의 얼굴이 너무도 가까이 다가왔다. 호소하는듯한 녹색 눈동자에 아사신은 두려움을 느꼈다.
 “어차피 당신들은 떨어질 수 없어요 신부.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화내지 말아요. 바닷가에서의 일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아사신은 고개를 외면했다.
 “야스카산을 떠나려고··· 했다면서요.”
“이미 끝난 일입니다. 나는 잡혔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실패했고 야스카산에게 잡혀서 돌아와야 했지요.”
민네의 손이 고집스럽게 외면한 아사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당신은 이제 도망갈 수 없어요.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요. 한번 놓쳤던 만큼 더더욱 날카롭게 당신을 주시하겠지요. 하지만 신부. 나는 이 땅에 묶여있는 당신의 육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나는 당신의 영혼을 원해요.”
“영혼이라니. 마음이라도 주라는 말같이 들리는군요.”
“그래요.”
아사신이 표독스럽게 외치자 민네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소리친 아사신도 놀라서 멍하니 민네를 바라보았다. 마음이라니. 제정신인가 그녀는?
“야스카산을 사랑해줘요 아사신.”

“미쳤군요!”
아사신은 화를 내며 세게 손을 밀쳤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손바닥이 아사신에게서 멀어져 갔다. 아사신은 소리쳤다.
“사랑이라니! 정말 기가 막힙니다. 남자끼리 사랑이 가능하기나 합니까? 나도 바라지 않고 그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도 바라고 당신도 바라고 있습니다 신부.”
민네가 애타는 목소리로 아사신의 손을 다시 붙잡아왔다. 아사신은 기를 쓰고 그녀에게서 멀어지려고 애썼다. 그러나 탈수와 빈혈을 빈번히 일으키는 몸으로는 가녀린 여자의 힘도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아사신은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이 빌어먹을 대화를 계속 해야 한다는 것도 짜증이 났다.
“그렇게 제 속마음을 잘 알다니 제가 할말이 없습니다! 당신은, 아니 당신들은 나의 어머니 전대 신부를 밀어내지 않았습니까?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내게는 족장을 사랑하라니, 이 무슨 웃기지도 않은 짓거립니까! 돌아가세요. 나는 당신과 말도 하기 싫습니다.”
“제발···!”
민네는 끈질겼다. 방안을 빙빙 돌며 아사신을 따라다녔다. 그녀에게서는 모종의 집념이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술래잡기를 하던 아사신은 결국 지쳐서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밖에는 야스카산이 풀어놓은 전사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아사신이 주저앉자 민네가 성급히 다가와 그 옆에 앉았다. 그리고 거칠게 숨을 몰아 쉬고있는 아사신의 손을 붙잡고 이마를 조아렸다. 아사신은 어이가 없어서 그것을 내칠 기분도 들지 않았다.
 “제발··· 내 말을 듣고 화내지 말아요 신부.”
“하-!”
아사신은 코웃음을 쉬며 벽에 기댔다. 일단은 숨을 고를 필요성을 느꼈다. 민네가 고개를 들어 다시 눈을 마주치기 시작했다.
“신부는 족장을 사랑해야 합니다.”
“신부는 족장에게 아들을 낳아주어야 하겠지요.”
“둘은 몸과 마음을 하나로 연결해야 합니다.”
“빌어먹을 몸 뿐입니다! 남자와 남자가 사랑을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사랑은 다른 여자와 하겠지요 야스카산은! 그 여자들과 사랑하고 내게서는 저를 닮은 정통한 후계자를 구하겠지요. 나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훌륭한 후계자를 낳지 못하면 그녀처럼 내쳐져서 쓰레기처럼 살아야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게 그 신성한 신부의 역할이 아니던가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신부.”
민네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바르바칸을 사랑했어요. 그리고 헤로나킨. 당신의 어미도 바르바칸을 사랑했어요. 신부는 족장을 사랑합니다 아사신.”
“거짓말!”
아사신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나의 어머니가 어떻게 도망쳤는지 말입니다. 족장을 배신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도주했다지요. 내게 거짓말할 생각은 마십시오.”
“당신은 오해하고 있어요.”
“오해!”
아사신은 사납게 노려보았다.
“돌아가십시오. 당신과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의무는 아들을 낳는 데까지 입니다. 그 이상은 야스카산도 나도 바라지 않습니다.”
“신부······.”
민네가 손을 뻗어 아사신의 웅크린 어깨를 쓰다듬었다. 아사신은 그 손을 밀쳐냈다. 고개도 들지않고 허브적 밀어내는 손은 힘이 없었다. 며칠 만에 깨어난 후 야스카산과 민네에게 시달려야 했던 아사신의 체력은 바닥이었다. 안색이 창백해지고 숨이 벅차 오르는 아사신을 본 민네는 할 수 없이 물러나야 했다.
“그럼 신부. 오늘은 그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들리겠습니다. 그때는 좀 더 서로에게 마음을 터 놓을 수 있었으면 해요.”
“···나가요.”
민네는 조용히 물러갔다. 혼자 남은 아사신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대에 올라갔다. 그리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한참을 울었다.

야스카산은 보름달이 뜰 무렵 다시 돌아왔다. 그에게서는 여전히 피냄새가 났다. 헤어질 때의 모습 그대로 마르고 안색이 나쁜 아사신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마르고 형편없는 몰골이군.”
“······상관없지 않습니까.”
“네게서 아들을 하나 봐야 한다. 그런데 이런 몰골을 해서는 안을 맛도 나지 않는군.”
야스카산은 침소에 기어들면서 투덜거렸다. 아사신은 그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가능한 한 멀리 이동했다. 다행히 넓직한 침대는 두 사람의 간격을 떨어트려 주었다. 야스카산이 짜증을 냈다.
“뭐냐. 내 옆에 오기도 싫다는 거냐?”
“건드리기도 싫지 않으십니까.”
“그렇다고 나를 피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어깻죽지를 잡고 세게 끌어당겼다. 아사신은 한숨을 쉬며 야스카산의 옆으로 끌려갔다. 울컥하고 짜증이 치솟았지만 오늘 밤 내도록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참기로 했다. 멀리 부엉이 소리만이 간간히 울려올 뿐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뻣뻣하게 굳은 남자 둘이서 밍숭맹숭하게 침대에 누워 있자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합방하는 건 한 달에 한번이면 족하지 않습니까.”
“네가 또 도망가기 전에 후사를 봐야지.”
“제가 늘 도망가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요.”
“내가 잡아오지 않았다면 도망갔을 거잖느냐.”
그 대화를 끝으로 다시 둘은 침묵했다. 아사신은 등을 돌려 누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남자는 아예 자신을 자기 방에다 가둬두고 아들을 하나 낳아 줄 때까지 계속 감시할 생각인 것 같았다. 생각만해도 심장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하면···.”
“음?”
“···제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사신이 베개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야스카산의 얼굴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낳을 때까지 이 곳에 갇혀 살아야겠지. 너 같은 거 말고 나를 빼닮은 아들을 낳아줄 때까지 말이다.”
“그렇군요.”
아사신은 조용히 이불에 몸을 숨겼다. 슬픔에 목이 매였다. 야스카산의 말이 칼날이 되어 심장을 찔렀다. 심장은 그렇게 찔리고도 아플 곳이 남아있는지 이번에도 선홍빛 피가 저린 가슴에 흘렸다.
-만약 그런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절머리나는 삶일 것이다.
 여름에도 넉넉치 못할 것이고 겨울에는 말할 것도 없이 혹독할 것이고 영원히 고독한 삶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똑 같은 아이를 기르게 되겠지.
이제는 소사린도 없이, 영원히 아이와 함께 영원한 고독 속을··· 자신과 같은 삶을 살게 될 아이를 기르면서······.

고독 속에-
혼자서-

아사신은 심장을 움켜쥐고 격하게 숨을 몰아 쉬었다. 전력질주를 한 것 마냥 심장이 쿵쾅거렸다. 슬며시 옆 자리를 바라보자 이미 야스카산은 태평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무슨 수를 내야 해.-
아사신은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어떻게!-
믿을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그나마 의지를 했던 힐레멘은 자신을 배신한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야스카산이 그날 그 자리에 그렇게 적절하게 나타날 수 있었을리가없다.
 아사신은 먹먹한 가슴으로 창 밖에 비치는 어스름한 달을 바라보았다. 검은 구름에 반쯤 가려진 채 창백하게 떠 있는 달이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야스카산은 바빴다. 그는 매일매일 밖으로 나돌아다니며 며칠 씩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저번에는 높은 산에 산다는 부족을 쓸었다고 했다. 그 전에는 태양을 주신으로 모시지 않고 삼족오(三足烏)를 섬기는 부족을 쓸어버렸다고 했다. 투항하는 부족은 병합했고 저항하는 자들은 예전 바산을 죽였던 것과 같이 그 생명의 아주 작은 조각도 남기지 않고 불살라버렸다고 했다.
야스카산이 돌아올 때마다 전사들의 손실도 컸다. 사상자와 부상자가 늘었다. 그러나 전사들의 가족들은 서러워 하지 않았다. 야스카산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전사로서 적과 싸우다 죽는 것은 명예로운 죽음이었다. 그들은 족장의 전사로서 온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으니 그 긍지와 자부심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사신.”
야스카산은 반드시 아사신에게 돌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아사신은 야스카산의 방에 구금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날 몇 일을 밖에서 보내건 그가 돌아오는 곳은 아사신의 곁이었다. 돌아온 그에게서는 늘 짙은 혈향이 풍겼다. 이제는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피냄새는 여인들이 바르는 분첩 향보다 더욱 진하게 들러붙어서 아사신의 속을 뒤집어놓곤 했다.
 장로들은 그를 팔시아 사람에 비교했다. 혀를 차며 걱정했다. 적진에서 왼손으로는 적의 목뼈를 분지르고 오른손으로는 칼날을 쑤셔넣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자다가 악몽을 꿀 정도로 그 모습이 흉폭하다고 했다.
“아사신.”
검은 밤이 드리워지면 야스카산은 유령처럼 나타났다. 서늘한 푸른 시선을 아사신에게 고정하고 너덜거리는 팔뚝에선 채 흐르는 피를 닦지 못한 채 정확하게 걸어왔다. 문이 열리고 짙은 피내음이 확 풍기면 아사신은 잠에서 깨어 두려운 얼굴로 야스카산을 맞이해야 했다.
“아사신.”
“···야스카산.”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지방이라고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 마른 육체를 껴안는 야스카산의 손도, 빛이 바랜듯한 머리카락을 헤집는 입술도 침묵에 동조하고 말을 하지 않았다. 야스카산은 더 이상 아사신을 빈정대지 않았고 아사신도 더 이상 야스카산의 화를 돋우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어색하게 누워서 서로의 육체를 껴안고 밤안개와 부엉이 울음소리를 들을 때면, 그 뜨겁고 너른 가슴에 안겨서 아사신은 느닷없이 북받치는 슬픔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너무도 많은 일과 너무도 그릇된 과거는 지금도 자신의 발을 잡고 그 건재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밤에, 악몽의 혼돈에서 깨어 소리 죽여 흐느낄 때면 뒤에서 감아오는 뜨거운 팔이 있었다.
 젖은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져주고, 떨리는 손가락을 맞잡아주고, 동시에 맥박 치는 가슴에 얼굴을 묻게 해주는 남자의 몸에서는 피냄새가 났다. 그 몸에 자신의 차고 마른 몸을 기댈 때면 아사신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내가 이래도 되는 것인지, 이대로 살아있어도 괜찮은 것인지······.
날이 밝으면 간밤에 자상했던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사신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침대 위에 혼자 누워서 늘 똑같고 무력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것은 무의미했으며 이유가 없는 시간들이었다. 아사신의 감정은 점점 기폭이 줄어들어 이제는 악몽을 꿀 때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생각도 별다른 행복도 슬픔마저도 사라져버렸다. 그런 아사신을 볼 때마다 야스카산은 심한 짜증을 느끼는 듯 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보기 싫어하면서도 밖으로 내치진 않았다.
 아사신의 하루는 단조로웠다. 때때로 창 밖으로 수라킨이 들여보내 달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고, 민네가 찾아와 예전처럼 헛소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처음에는 열을 내며 함께 상대하던 아사신도 나중에는 귀를 막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동요되지 않았다. 세상은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그 가운데에는 싸늘하게 식은 심장을 움켜쥔 자신이 있었다.
 “네 뜻대로 될 거라고 생각해?”
가리시네가 표독스럽게 쏘았다.
“남자가 애를 가지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해? 남자 신부가 결국 아이를 놓지 못해 쫓겨났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 지금은 그가 너만 찾으니까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겠지? 천천히 즐기도록 해.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거니까!”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아. 내가 딸을 낳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절대로 네 뜻대론 되지 않겠어. 듣자 하니 네 어미는 아주 음란해서 결혼식 전에 다른 남자랑 도망을 갔다면서? 피는 속이지 못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거구나. 너 같은 놈의 배를 빌어 나오는 것이 그 더러운 피를 잇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까.”
“대답을 좀 해봐! 그 천치 같은 눈깔을 보고 있노라면 속이 다 뒤집어져!”
아무리 흉악한 말을 늘어놓는 가리시네라도 아사신으로서는 그 말을 듣는 낮이 밤보다 참기 쉬웠다.
 밤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시간이었다. 악몽이 찾아오는 시간이었고 묻어두려고 애를 쓰는 과거가 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시간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깰 때면 옆에서 단단히 잡아주는 팔을 느껴야 하는 시간이었고 그것은 아사신의 혼돈 양심 질책을 건드리는 시간들이었다.
아사신은 야스카산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을 내치지 않는 건지, 왜 도망갔던 일에 대한 추궁을 하지 않는 건지, 무슨 생각으로 자기 방에 두는 건지. 당췌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내쳐주길 바랬다. 차라리 때리고 욕하고 굶기길 바랬다.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고 영원히 다른 곳에서 살기를 바랬다. 이런 신부- 정말로 질리고 질린 나머지 그렇게 버려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야스카산은 그러지 않았다. 먹지 않으면 억지로 먹이고, 울고 있으면 화를 냈다. 도망을 가도 포기하지 않았다. 끝까지 집념을 가지고 잡으러 와서 자신을 끌고 돌아왔다.
-그는 혈통을 중요시 여기는 걸까?-
어쩌면 그런지도 모른다. 신부는 누구도 죽일 수 없다. 그 어떠한 경우라도 신의 아내다. 신의 아내를 사람이 손 댈 수는 없다. 죽여서 새로운 신부를 맞이할 수 없다면 붙잡아두고 자신의 아들을 보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만족할만한 아들을 낳아줄 때까지 옆에서 항시 지켜보고 감시하려는 속셈인지도 모른다.
아사신의 멍한 얼굴에 다시 눈물이 흘렀다. 심장에 쌓여있는 묵직한 돌무덤에 또 하나의 큰 돌이 더 얹혀진 기분이었다. 아무런 흐느낌 없이 이제는 슬프지 않아도 눈물은 자동으로 흘렀다. 아사신은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아내다 그 양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아지자 그냥 흐르도록 내버려두었다. 조용히 허공을 노려보며 눈물만 줄줄 흘리던 아사신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눈물에 젖은 회색 빛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입을 크게 벌린 채 좌우를 살피던 아사신은 흠칫 몸을 떨었다. 방금 볼을 미끄러져 흘러내린 눈물이 눈 위로 날아올랐다. 이미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숴졌어야 할 눈물이었다. 그것이 달빛에 영롱하게 빛나며 허공에 떠 있었다.
“······!”
아사신은 두려움에 떨며 뒷걸음질쳤다. 드디어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누구!”
“겁이 많으시네요 아사신.”
이 목소리!
아사신은 냉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속눈썹에 달라붙은 눈물조각을 가볍게 훔쳐주는 손가락의 감촉은 분명히 뜨거웠다. 살아있는 사람의 체온이었다.
“···힐레멘?”
“그래요. 저랍니다.”
“어떻게 여기에, 아니 그전에 어떻게 그런!”
“조그마한 잔재주에 불과하지요.”
힐레멘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사신은 다급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문은 열려있지 않았고 창문 아래에서는 경비병들이 어슬렁거리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을 받은 힐레멘의 육체가 조금씩 허공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찬연한 금빛머리카락과 녹을 듯이 달콤한 흰 피부가 아스라히 떠올랐다.
“진짜 힐레멘이군요.”
“그럼 뭐라고 생각했습니까?”
“내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힐레멘은 아사신의 대답에 소리 내어 웃었다. 아사신이 질겁하고 그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해요!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요.”
“들키면 다시 숨으면 되지요.”
“그 재주··· 대체 당신 정체가 무엇이죠?”
“글쎄요 뭐 같아요?”
“농담할 시간 없어요.”
“만들면 나오는 게 시간이지요.”
“정말이지 당신은······.”
“새삼 반했나요 아사신?”
아사신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을 힐레멘이 가볍게 낚아채어 입술에 대고 소근거렸다.
“너무 많이 야위었군요. 나를 용서해요. 그땐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별로 화가나진 않았어요.”
아사신은 침착하게 말했다. 사실 맞았다. 탈출 시켜 주겠다고 꿈에 부풀려놓고 뒤통수를 때린 남자였지만 그렇게 밉지는 않았다. 아니, 자신은 이 남자를 처음부터 그렇게 신용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나름대로 절박했고, 이 남자 외에는 부탁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매달렸었다. 그래서 진실의 눈을 감아버린 것이었다.
“당신을 그렇게까지 신용하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나는. 그 일 때문에 왔나요? 돌아가요. 나는 상관없으니까.”
아사신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이 남자가 왜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지, 어떻게 모습을 숨길 수 있었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다. 도움을 줄 수도 없는 사람이다. 잠시의 격한 감정으로 인해 육체가 많이 지쳐버렸다. 아사신은 얼른 눕고 싶었다.
“그때는 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아사신.”
“돌아가요. 괜찮으니까.”
“그런 말 하면 가슴이 아파요. 내 사랑.”
“아아- 그래요. 진짜로 괜찮으니까 돌아가주세요. 피곤해요.”
“다시 한번 당신을 도망치게 해준다면 나를 믿겠어요?”
아사신은 베개에 묻었던 얼굴을 일으켰다.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분노가 스며 있었다.
 “당신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요?”
“아사신. 나는 진심이에요.”
“진심? 하-! 이번엔 그래 화살을 무더기로 쏘아주려고 그러나요? 아예 탈출하는걸 잡았다고 족장의 앞에다가 질질 끌고 가지 그래요? 소 돼지 마냥 밧줄을 목에 걸고 그 앞에 끌고 가서 도망가는걸 잡아왔다고 신고하면 얼씨구나 상이 내려올지 누가 알아요?”
“아사신.”
“돌아가요. 난 할 말 없어요.”
아사신은 다시 누웠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귀를 막아버렸다. 힐레멘이 한숨을 쉬는 것이 들렸다.
“내 말··· 이젠 안 믿겠지만 아사신.”
“······.”
“알아주세요. 이번엔 진심입니다. 당신네 부족과 우리 소르데라의 협상은 결렬이에요. 당신네 족장은 우리에게 마라꽃을 재배할 기술을 주지 않아요. 팔시아 대륙에 수출할 수 있는 해상 통로도 독점 시켜주지 않을 겁니다. 오랜 시간 그의 곁에서 그를 위해 일을 하고 그의 비위를 맞추어 어떻게든 협상해보려 했지만 소용없더군요. 오히려 그는 나를 여기에 억류 시킬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대로라면 언제 강제로 결혼이라도 하게 될지 모른다고요?”
“······.”
“내 말 잘 생각해줘요. 당신이 가든 안가든 나는 이 곳을 떠납니다. 그 김에 당신도 데려가겠다는 겁니다. 곧 다시 올게요. 그때까지 잘 생각해보도록 해요. 그럼 몸 건강히 있으세요 아사신.”
이마부근을 살포시 눌러오는 감촉이 느껴졌다. 아사신은 눈을 꼭 감았다. 더 이상 속고싶지 않았다. 자신은 철저하게 혼자였다. 야스카산도 힐레멘도 모두 자신을 이용하기만 할 뿐이었다. 눈을 감고 마음을 닫고 그렇게 살아가야 했다.
아사신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조용히 이불을 걷고 고개를 내밀었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서늘한 커튼이 유령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야스카산이 귀가했다. 늘 그가 돌아올때면 마을은 기쁨에 휩싸였지만 이번에는 조금 분위기가 틀렸다. 그는 혼자 귀환하지 않았다. 그의 잘생긴 준마 위에는 매혹적인 은빛머리카락을 가진 처녀가 앉아있었다. 옅게 그을린 갈색 피부와 우아한 골격이 아름다운 그녀는 야스카산의 품 안에서 당당하게 허리를 세우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민네가 물었다.
“그녀는 누구인가요 야스카산?”
“그녀는 내 아내가 될 여자입니다 어머니.”
“아내?”
장로들이 다가왔다.
“타 부족의 여인 같은데 아내로 삼겠다는 겁니까 족장?”
“이 여자는 마리세족의 처녀로 그들 족장의 유일한 여식입니다. 이 처녀를 내 아내로 삼아 그녀가 아이를 낳으면 혈연이 생기는 것이니 그들은 안심하고 우리에게 귀속될 것입니다.”
“이미 족장이 처 부순 부족은 숱하게 많습니다. 그들로부터 모두 아이를 낳을 생각입니까?”
“물론 그럴 수는 없겠지요.”
야스카산이 딱 잘라 말했다.
“나는 상황을 봐서 혼인할 것입니다. 마리세족은 큰 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싸움을 하다 서로에게 이득보다 실이 더 클 것을 깨닫고 이 처녀를 나에게 보낸 것입니다. 나로서도 피 흘리지 않고 이길 수 있는데 굳이 먼 길을 돌아가기 보다 이쪽이 훨씬 득임을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부족간의 완벽한 병합과 굳은 동맹을 위해 나는 필요하다면 혼인할 생각입니다.”
야스카산의 위엄있는 태도에 장로들은 저들끼리 수근대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수근거렸다. 야스카산이 데려온 처녀는 아름다웠다. 민네의 부드러운 보름달 같은 우아함과 가리시네의 뾰족한 장미 같은 미모와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이제 열 여덟은 되었을까. 풍만한 육체는 터질 듯이 농익어있었고 앳된 젊음이 진주처럼 빛나는 처녀였다.
 그리고 그녀는 야스카산을 사랑하고 있었다.
 야스카산이 장로들 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니는 것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는 그녀의 얼굴은 미래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으로 조용히 불타고 있었다. 길게 흘러내린 시린 달빛 같은 머리카락을 어깨로 쓸어 넘기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곱고 사랑스러웠다.
아사신은 그 모습을 창문을 통해 지켜보았다. 무의식 중에 어깨위로 흘러내린 자신의 탁한 잿빛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아보던 아사신은 흠칫 놀라 일어섰다. 야스카산의 시선이 똑바로 자신을 향해있었다. 그것이 꽤 먼 거리임에도 확실하게 느껴졌다.
아사신은 서둘러 창문을 닫고 침대로 돌아갔다.
 가슴이 뜯어져 나갈 듯이 지끈거렸다.

“하나도 좋아지지 않았군.”
야스카산이 아사신을 만나자마자 한 소리는 그것이었다. 저녁 무렵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눈살을 찌푸리고 다짜고짜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는 차려놓은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나? 아니면 아기처럼 떠먹여줘야 하는 거냐? 너는 정말 나를 지긋지긋하게 만드는구나.”
“그럼 새로 들인 아내한테 가시던가요.”
아사신은 기운 없이 대꾸했다. 야스카산이 눈썹을 비죽이 치켜 세우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으니 내 아내가 아니다.”
“언제 취하든 불평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왜 내가 그래야 하지? 나는 여기 있겠다.”
야스카산의 어조가 날카로워지자 아사신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막 잠이 들려는 찰라 야스카산이 세게 이불을 벗겨냈다. 그리고 아사신의 고개를 번쩍 들리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그리 가야 하는 이유가 뭐냐?”
“······놓으십시오.”
“네가 뭔데 이젠 내 잠자리문제까지 참견하겠다는 거냐!”
“도가 지나쳤다면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아사신이 또박또박 대꾸하자 야스카산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한참을 노려보던 야스카산이 팽개치듯 아사신을 밀쳤다. 아사신은 힘없는 인형처럼 침대 위에 고꾸라졌다. 곧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은 방금 들어간 야스카산이 다시 뛰쳐나오자 깜짝 놀라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들이 야스카산의 뒤를 종종 걸음으로 뒤따르는 소리를 들으며 아사신은 쓰게 웃었다. 그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예측할 수 있었다.
 가슴 한켠이 시큰해졌다.

야스카산은 집에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툭하면 전사들을 이끌고 사라지기 일수였다. 그는 자신이 쓰러트린 부족의 땅을 정돈하는 한편 새로 침략할 땅을 조사하느라 매우 바빴다. 그 바쁜 틈틈이 바르바칸이나 장로들과 싸워야 했고 새로운 아내로 인해 완전히 골이 난 가리시네와 그녀의 전담 신녀들도 상대해야 했다.
 가리시네는 이제 아사신보다 새 아내를 상대하기에 더 바빠 보였다. 그녀는 완전히 아사신에게의 발걸음을 끊고 마리세 처녀에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가리시네가 그녀를 학대한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었다. 결혼식 전까지 완치가 가능하도록 얇은 회초리를 사용해 옷에 가려지는 부위를 때린다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가리시네는 그녀의 날씬한 배와 윤기 흐르는 은빛머리카락을 질투하고 있었다.
 아사신도 마리세 처녀를 보았다. 그녀는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화관을 얹은 듯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고 뜰을 거닐고 있었다. 그녀 부족 고유의 의식인 듯 돌로 만든 목걸이를 하나하나 손으로 세아려가며 나즈막하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야스카산의 무사귀환을 비는 기도인 듯 했다.
 아사신은 그녀의 모습을 한참을 내려다보다 시선을 느낀 여자가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얼른 창문을 닫았다. 진하고 두꺼운 커튼을 치며 아사신은 자신의 작태에 입술을 깨물었다.
 야스카산이 다시 귀환했을 때 이번에도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훌쩍훌쩍 울고 있는 말라빠진 소녀를 허리춤에 달고 돌아왔다. 야스카산은 피를 흘려 싸우는 것 보다 이쪽이 더 득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로들은 야스카산이 새로 데려온 여자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결혼하나로 화평하게 통합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좋다는 쪽으로 생각을 전환한 것이었다. 처음엔 굳이 땅을 확장할 필요가 있냐고 생각하던 장로들도 새로운 보물과 새로운 땅을 갖게 되자 실보다 득이 크다는 것을 깨닫고 어느 정도 야스카산을 지지하게 되었다. 여전히 야스카산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것은 바르바칸뿐으로 그는 새 신붓감을 보더니 얼굴을 구기고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사신.”
야스카산은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그의 얼굴은 어딘가 초조해보였다. 경비병들이 문을 여는 짧은 틈도 참지 못하고 난입하듯이 들이닥쳤을 때 아사신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사신.”
“···야스카산.”
아사신은 창문을 닫았다. 조용히 돌아서서 야스카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새로운 여자를 데려오셨더군요.”
“통합을 위해서 데려온 여자다.”
“알고 있습니다.”
아사신은 커튼을 치고 야스카산을 스쳐지나갔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침대위로 올라갔다. 야스카산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원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왜 제게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정말 알고 있는 거냐?”
야스카산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불에 몸을 묻으려는 아사신의 손목을 부여잡고 획 끌어 올렸다. 포근한 보금자리에서 끌려나온 아사신도 눈살을 찌푸렸다.
“알고 있다잖지 않습니까. 저는 피곤합니다.”
“넌 늘 피곤하잖아.”
“잘 알고 있으시군요. 그럼 놓아주세요. 간밤에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당신이 돌아오는 바람에 시끄러워서 깼고요.”
“내 귀환 때문에 시끄러워서 자지 못했다고?”
야스카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그는 완전히 당황한 것 같았다.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야스카산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나는 ···네게 있어 낮잠이나 방해하는 그런 존재인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억측하지 마십시오.”
야스카산의 말에 아사신은 짜증이 치밀었다. 정말로 지긋지긋했다. 아무리 아프고 기운이 없어도 이 남자는 자신을 괴롭혔다. 소리를 지르게 만들고 화를 돋우게 만들었다. 원래 좋은 관계가 아니었지만 이 방에 갇히고 난 뒤부터는 얼굴만 보면 시비를 걸고 있었다. 차라리 상대하지 않아주면 서로에게 더 좋으련만 그러지도 않았다.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시비 걸고 고함을 지르며 헤어졌다가도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나면 또다시 되풀이되는 시비와 싸움.
아사신을 쏘아보던 야스카산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아사신은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그 눈길을 받아냈다.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몸이었다. 아집과 오기로 똘똘 뭉친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빌어먹을!”
야스카산은 낮게 욕설을 중얼거리더니 아사신을 팽개치고 나가버렸다. 문이 야스카산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르르 떨렸다. 동시에 아사신의 어깨도 떨렸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질수록 아사신의 목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애써 돌아보지 않은 얼굴에는 후회와 화가 혼합되어 일그러졌다.
 아사신은 그 보기흉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낮게 신음했다. 가슴이 너무도 답답하여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야스카산은 아사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혼례준비로 너무도 바빠 보였다. 가리시네는 또다시 들어온 아내 때문에 심각한 우울증증세를 보이며 드러누웠고 막달인데도 전혀 나올 기미가 없는 아이 때문에 그녀의 신녀들도 바빴다. 새로 온 여자는 신전에 딸린 별궁에서 지내게 되었다. 마리세 여자와의 혼인이 끝나는 대로 그녀의 혼인이 진행될 것이었다.
 아사신은 비몽사몽간에 그 모든 소식들을 접할 수 있었다. 창 밖에서 문 밖에서 사람들이 분주히 내달리며 준비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도 들려왔다.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몸이 무거워진 가리시네가 방에서 두문불출하자 마리세 여자는 점차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온 사방에 그녀의 눈부신 은빛머리카락이 반짝이게 되자 오랜 전쟁과 족장의 부재로 무거워진 궁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밝아지기 시작했다.
 마리세 여자는 천성이 선하고 고왔으며 족장의 딸답게 처신이 공의로웠고 행동이 우아했다. 날카로운 장미가시 같은 가리시네나 우울증에 걸린 아사신을 대신해 공석이 되다시피 한 안주인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그녀의 낮고 강단 있는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올 때면 아사신은 귀를 틀어막고 이불속으로 몸을 더 깊이 움츠렸다. 그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어째서 자신에게만은 예리한 칼날처럼 후벼 파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의 아내가 될 미래를 꿈꾸며 그녀의 지아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흘러넘치는 목소리. 궁 안 구석구석 울리는 맑은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사신은 그녀에게 달려들어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조르고 싶어 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스스로에 대한 경악과 환멸 속에 아사신은 혼란에 빠졌다. 이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절로 두 뺨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의 의미도 알 수가 없었다.
 아사신은 혼돈에 쌓여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창밖에 동이 트고 있었다.
결혼식 아침이었다.




*                *                *




 술과 고기. 아름다운 무희들의 춤사위. 타오르는 정오의 햇살을 받은 야스카산의 몸은 눈부시게 반짝였다. 연하게 흩뿌린 금빛가루가 멀리서도 오색찬란하게 빛났다. 꽃을 목에 두른 어린양을 신전에서 잡아다 그 피를 바치고 신전의 고위 신관들과 함께 기도를 올렸다. 사람들은 그 기도의 엄숙함과 열렬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야스카산과 그 무리들은 신부의 처소로 향했다. 이날의 신부는 일가친적없이 홀홀단신으로 이곳에 왔기 때문에 신전의 신녀들이 그녀의 가족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신부가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의 문을 두드리자 헤르사가 신관의 팔에 안겨 나왔다. 무사히 신부를 가마에 올리고 일행은 혼례식장인 신전의 회랑으로 향했다. 이미 신녀들이 북을 울리며 흥을 돋우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결혼식은 신성한 언약이라기보다 하나의 축제였다. 족장과 그의 신부가 펼치는 잔치였다. 마라꽃이 들어간 술이 돌고 무희들이 별빛 같은 미소를 띠고 춤을 추었다. 모두가 노래하고 춤추며 새로이 부부가 될 신랑과 신부를 축하했고 입을 모아 신을 찬미했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모두 갖춘 이 젊은 족장의 빛나는 미래를 축복했다. 그에게 많은 아들과 딸을 내려달라는 기도가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이 마침내 전 족장 바르바칸의 앞에 서고 바르바칸이 축성 받은 예리한 칼날로 둘의 손목을 묶은 끈을 끊어내자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전사들이 발을 구르며 고함을 질렀고 여인들이 북을 치며 춤을 추었다.
 아사신은 창문을 닫았다. 창을 닫는다고 해서 밖의 소란스러움을 모두 차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보이지는 않았다. 한숨을 쉬며 커튼을 꼭꼭 싸매고 기운 없이 이불속을 파고들었다. 요 근래 자신은 한층 더 무기력해 진 것 같았다. 책을 읽다가도 깜박 졸기 일쑤였고 안 그래도 없던 식욕은 더욱 더 떨어져서 이제는 먹는 날 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 밑도 끝도 없는 악몽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제는 그것이 악몽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악몽 속에 있는 것이 마음이 더 편했다. 깨어있으면 아사신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쫑긋 곤두세우고 혹여 라도 문 밖에 발자국이 울릴 때면 그것이 야스카산의 소리가 아닌지 매순간 긴장해야 했고, 헤르사의 음성이 스쳐지나 갈 때에는 주체할 수 없는 아픔에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이 모든 상황은 아사신은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었다. 결단코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었다.
 창밖으로는 아직도 북소리고 요란했다. 축제는 한참을 이어질 모양이었다. 아사신은 불현듯 얼마 전의 불행한 결혼식을 기억해내고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죽음으로 이어진 결혼식. 영원히 볼 수 없게 된 불행한 새 신부. 붉은 면사포를 쓰고 도살장으로 들어간 소사린. 생각해보면 얼마나 자신들은 불행한 연인이었던가. 남자는 다른 남자의 신부가 되고, 여자는 그 남자로 인해 억지 결혼식을 올리고······.
 아사신은 소사린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아무생각도 나지 않았다. 흐려진 시야 속에 부옇게 떠오른 창백한 여인의 얼굴은 장례식 날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웃는다던가. 행복해한다거나 하는 모습은 떠올라주지 않았다. 그것이 아사신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아사신은 조용히 이불안으로 미끄러졌다. 기력이 쇠한 몸이 기뻐하며 안식을 취했다. 눈을 감자 모든 혼돈과 슬픔이 꿈결에 멀어지기 시작했다. 배속의 아이처럼 둥그렇게 몸을 말고 아사신은 끝도 없이 떨어지는 나락 같은 잠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깊은 밤이 되자 북소리도 잦아들고 사람들의 환성도 서서히 흩어졌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흐려지고 바람이 불자 그날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가 궁으로 들어가 버렸고 분위기를 돋우던 광대패들도 내일을 기약하며 주변을 정리했다. 축제는 모레까지 계속될 예정이었다. 이 삼일간 사람들은 모두 일손을 놓고 즐거이 먹고 마시기만 할 뿐이었다.
 간간이 개 짖는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무성해지는 시간이 됐을 무렵 아사신은 섬뜩한 예감에 눈을 번쩍 떴다. 바람이 창틀의 좁은 틈새를 통과하며 스산하게 울고 있었다. 부르르 몸을 떨며 고개를 이불 밖으로 내민 아사신은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는 남자가 서있었다.
 “누···누구!”
아사신은 서둘러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고함을 질러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괴한이 더 빨랐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와 아사신의 입을 막았다. 남자의 품에 뒤에서부터 끌어안긴 아사신은 그의 몸에서 뿜어 오르는 숨 막히는 술 냄새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가 숨을 쉴 때마다 희미한 마라꽃 향기가 맴돌았다.
 “···야스카산?”
아사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틀어쥐고 있는 손을 만졌다. 까칠하게 피부결이 일어선 손은 딱딱하고 두꺼웠다. 분명히 기억에 있는 손이었다. 남자의 정체를 알게되자 두려움이 조금 가셨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이 늦은 시간에 무단으로 여기를 침범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바르바칸이나 야스카산이면 모를까 그 누가 침입하려 해도 충실한 전사들이 버티고 있는 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야스카산. 왜 여기에?”
“그래. 내가 또 잠을 깨웠나?”
야스카산이 훅 하고 숨을 내쉬며 말했다. 뿜어 나오는 술내에 아사신은 코를 막고 뒤돌아섰다. 이 늦은 시간. 신방에 들어가 있어야 마땅한 야스카산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야스카산이 아사신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몸무게를 지탱하자 아사신의 다리가 휘청였다. 그는 고주망태로 취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섬뜩하리만큼 날카로워보였다. 파란 두 눈이 광기에 젖어 아사신의 회색 눈동자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야스카산이 걸음을 걷자 그 힘에 밀려 아사신도 뒷걸음질 쳐야 했다.
 “왜, 왜 여기에 있습니까. 오늘은 당신의 첫날밤이 아닙니까?”
“또 내 잠자리 문제에 간섭하려 드는구나.”
야스카산이 마음이 들지 않는 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아사신은 무릎에 침대가 닿는 것을 깨달았다. 섬뜩한 예감에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무릎에 힘을 주어 버텼으나 위에서 야스카산이 사정없이 내리누르는 데는 견딜 재간이 없었다. 어깨를 감싸 쥔 야스카산의 손을 뜯어내려고 손톱을 세웠지만 끄덕도 하지 않았다. 점차 짓눌려오는 힘에 굴복해 아사신은 결국 침대 끄트머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야스카산은 조금 미쳐보였다. 불거나온 손 마디마디가 움직일 때마다 숨죽인 광기가 스며 나왔다. 푸른 달그림자에 얼굴이 파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초조감이 달린다. 아사신은 초조해져서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을 축축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아사신은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러지 마십시오.”
“이러는 게 뭔데?”
야스카산이 빙긋 웃었다. 눈은 여전히 살벌하게 아사신의 입술에 꽂혀 있으면서 입술만 웃는 모습이 더욱더 공포스러웠다.
“오늘은 당신의 첫날밤입니다. 신방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런 진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야스카산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빙글빙글 웃었다. 아사신은 겁을 먹었지만 티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 끈끈하게 감겨드는 공기가 너무도 기분 나빴다. 이런 분위기는 자신의 어린 아내와 잡으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늘 나를 거절하면서 새삼스럽게 왜 그래. 언제나 늘! 네가 나를 한번이라도 달갑게 맞아 준적이 있나? 응?”
야스카산의 손이 어깨를 지나 점점 목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사신은 표독스럽게 손을 쳐내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이미 자신이 겁을 먹었다는 것을 야스카산이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네 머릿속.”
야스카산의 손이 머리위로 올라왔다. 그가 점점 다가와 자신의 머리통을 감싸는 형국이 되자 더 이상 야스카산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정수리에 뜨거운 숨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날렸다.
 “네 이 작은 머릿속에 들어앉은 것은 그 죽은 여자뿐이지.”
“그렇지 않습···.”
“쉿.”
야스카산의 목소리는 너무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아사신의 말꼬리를 자르며 야스카산이 나직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도 광기에 차보여 아사신은 식은땀이 났다.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아 내 신부. 단 한 번도 내게 자발적으로 안긴 적 없고 나를 맞이해 준적도 없는 고결하고 도도하신 신부님. 이 머리를 터트려서 물에다 넣고 뽀득뽀득 씻은 다음 다시 구겨 넣으면 그 여자를 잊을까? 응?”
“······.”
점점 더 머리를 누르는 손에 힘이 가해졌다. 머리카락이 짓눌리고 살이 일그러졌다. 귓가에서 음습하게 웃는 남자의 목소리가 세포를 전율시켰다. 아사신은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공포가 사라지고 분노가 치밀었다. 오늘 결혼한 주제에, 마치 자신을 부정한 아내 대하듯 하지 않는가.
“놓으십시오!”
아사신은 벌떡 일어섰다. 그 기세에 야스카산도 한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아사신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야스카산의 이런 행동은 부당하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족장. 나는 당신의 아내이고 당신에게 아들을 낳아줄 때까진 죽어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없는 몸입니다.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입니다. 오늘 결혼한건 당신입니다. 내게 당신이 이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군요. 당장 신방으로 돌아가서 새 신부와 주무십시오.”
야스카산은 아사신이 밀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아사신이 쏟아 붙는 말들을 아무 말 없이 들으며 기묘한 시선으로 아사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사신은 할 말이 끝나자 냉정하게 뒤돌아서 몸싸움을 하느라 흐트러진 매무새를 바로 했다. 옷깃을 단정하게 잡고 허리띠를 꽉 졸라매자 조금 마음의 안정이 되었다.
그때,
“무슨!”
아사신은 격하게 몸이 뒤로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두텁고 딱딱한 가슴에 온 몸이 밀착되었다. 당황하여 팔을 휘둘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건장한 팔이 나무줄기처럼 뻗어와 육체를 억압했다. 머리위에서 웃음이 터졌다. 절대로 놓아줄 수 없다는 듯이 욱죄어 오는 팔이 마치 거미줄과 같다. 옷자락을 그머진 손가락 마디사이로 광기와 독점욕이 번들거렸다.
 “야스카산!”
아사신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침대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손은 무자비했다. 속수무책으로 질질 끌려가며 아사신은 저주를 퍼부었다. 검은 구름이 드리워지고 달이 사라졌다. 약하게 창밖으로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천장이, 바닥이, 침대가 어둠속으로 침잠하였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서로의 얼굴과 달뜬 숨소리 뿐······.
아사신은 흐느껴 울었다. 얼굴이 일그러진 남자가 그 눈물을 핥아 먹었다. 뜯겨나갈듯이 옷이 벗겨져 나가고 메마른 육체가 어둠속에 드러났다. 남자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다리를 벌리는 손길은 더욱더 난잡해졌다. 끔찍한 절망과 자신에 대한 회환이 회오리바람처럼 몰아쳤다. 속을 파고드는 이 남자의 성기가 지독하게 아팠다.
아사신은 눈을 감았다.
 이대로 영원히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비는 소나기였는지 금방 그쳤다. 야스카산은 짧게 한숨을 쉬며 마지막 추삽질을 했다. 술기운이 완전히 가신 눈동자에는 그보다 더 끈끈하고 진한 무언가가 스며있었다. 길고 느리게 몸을 빼내자 내부로부터 연결되어있던 성기를 따라 정액이 질게 흘러내렸다.
 “하아······.”
그 감각에 몸을 떨자 아사신의 돌아누운 어깨도 파르르 떨렸다. 야스카산의 손이 어깨를 향해 다가가다 멈칫했다. 아사신이 떠는 것은 추워서가 아니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아사신.”
야스카산의 손이 머뭇머뭇 아사신의 얼굴을 향했다.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곧바로 날아온 서릿발 같은 음성에 제지당했다.
“이제 됐겠지요?”
“뭐가 말이지?”
“이제 됐잖아요!”
아사신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야스카산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아사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뭐가 말이냐.”
“내게 손대지 마십시오!”
“아사신!”
야스카산은 아사신을 향해 다가가던 자신의 손이 매섭게 후려쳐지자 화가 났다. 야스카산은 아사신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울부짖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젠 됐잖아! 그만 돌아가란 말이야! 그만! 그만 가란 말이야!”
“아사신! 읏!”
아사신은 이성을 잃어버렸다. 그 마른 몸에서 무슨 힘이 났는지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런 남자의 주먹 따위 야스카산으로서는 충분히 제압이 가능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아사신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너 지금 누구한테 이러는지 아는 거냐?”
야스카산이 결국 소리를 지르자 아사신이 숨을 몰아쉬며 주먹질을 멈추었다. 그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냐!”
“지금··· 지금···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까?”
자신의 질문에 외려 되묻는 아사신을 향해 야스카산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나는 모르겠다. 네가 내게 안긴 것 때문에 그러느냐? 내 것을 내가 마음껏 취하는 것에 무슨 이유가 있단 말이지? 너는 이미 내게 안긴 적이 많지 않느냐.”
“하-!”
아사신은 기가 막힌 나머지 헛웃음 소리를 냈다. 아무리 돌고 돌아도 똑같이 돌아오는 주제. 똑같이 돌아오는 이야기. 너는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 남자.
 -그래. 당신에게 나는 물건과도 같은 거겠지.-
필요하면 취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내버린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아사신은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두 몸이 겹쳐져 있을 때는 몰랐지만 따로 떨어지게 되자 싸늘한 공기는 벗은 몸에서 온도를 빼앗아갔다. 창밖으로 들리는 빗소리가 조금씩 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쉬고 싶습니다.”
아사신이 조용히 말하자 야스카산도 주변을 둘러보고 대답했다.
“그렇군. 나도 이만 가야겠다. 아무래도 첫날밤이니까 말이지. 새 신부를 혼자 내버려두면 안 되겠지.”
“······.”
야스카산의 말에 아사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얌전히 앉아 이불로 몸을 덮었다. 그 모습을 본 야스카산은 아사신이 진정되었다고 믿었다.
“오늘은 이만 가지만 곧 다시 찾아오겠다. 아사신. 그때도 지금처럼 얌전하고 협조적으로 나와 주면 좋겠구나.”
“······.”
야스카산은 빙그레 웃으며 아사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부쩍 수척해진 볼이 안쓰럽게 패여 있었다. 가볍게 톡톡 두드려준 야스카산은 불을 밝히고 의복을 갖춰 입었다. 언제 격렬한 정사를 나눴냐는 듯이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간 야스카산의 모습은 위엄 있는 족장의 모습이 되었다. 아사신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곧 다시 오마.”
“네······.”
야스카산이 조용히 문을 밀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사들이 얼른 눈치를 채고 문을 열어주었다. 야스카산의 긴 검은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문틈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본 아사신은 문이 닫힘과 동시에 훅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이 끊어지자 설움이 복받치기 시작했다.
“으! 흐으! 으!”
입을 막고 울음을 참아보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너무도 아팠다. 너무도 괴로웠다. 전신의 피가 빠져 온 몸이 말려드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토막 나고 간장이 들끓었다. 아프고 아파서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이젠 싫어···.”
아사신은 시트를 긁었다. 몸이 마음의 아픔을 대신해 비틀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더 이상 싸울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괴로웠다. 너무도 괴로웠다.
“도망치고 싶으신가요?”
아사신은 자신의 어깨를 잡아오는 부드러운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채 구르지도 못하고 뚝뚝 떨어져 베개에 자국을 남겼다. 희미한 윤곽이 환상처럼 드러나기 시작했다.
 “힐레멘.”
“아사신.”
 눈을 깜박이는 짧은 시간 안에 힐레멘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어느새 창을 열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힐레멘이 아사신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입 맞추며 말했다.
“도망치게 해드리겠습니다.”
아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어떻게 되도 좋았다.
 “도망치게 해줘. 괴로워서 죽을 것 같아.”
힐레멘이 미소 지었다. 그의 입가가 잔잔한 주름을 이루며 연하게 곡선을 이루었다. 웃는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보였다.
 “소원을 이루어 드리지요.”
“어떻게?”
아사신은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이 철통같은 경계를 뚫고 어떻게 나간단 말인가. 사라지는 재주가 있는 힐레멘은 몰라도 자신은 불가능하다.
 “걱정 마세요.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

 걱정스러운 아사신의 얼굴에 힐레멘은 장난꾸러기처럼 웃어 보였다. 느린 동작으로 손을 들어 아사신을 향해 휘저었다. 그것은 마치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처럼 복잡해 보이는 동작이었다. 힐레멘은 동작을 꾸준히 반복하며 낮게 읊조렸다.
 “몸. 있지 않는다. 눈. 보지 않는다. 숨소리도 땅 끝까지 지워버려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점하나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진다.”
“뭐에요 그게?”
아사신은 당황했다.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다고 하더니 이상한 말을 하니 불안해졌다.
 “쉿 가만있어 봐요. 나 잘 하지 못해서 힘들단 말이에요.”
힐레멘의 얼굴은 잠시 팔을 휘두른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힘이 든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사신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힐레멘은 조금 더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더니 손을 내려놓았다. 상기된 볼 위로 땀방울이 또르르 흘리면서도 싱긋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였다.
“이제 됐어요. 준비 완료~.”
“됐다니 대체 뭐가···아··· 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던 아사신의 목소리가 튀었다. 크게 뜨인 회색 눈동자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비춰졌다.
“준비 다 됐다고 했잖아요.”
힐레멘이 빙긋 웃으며 반쯤 투명해진 아사신의 손을 잡았다. 힐레멘의 손도 투명해지고 있었다. 아사신은 갑자기 너무도 궁금해졌다.
“당신 정말 정체가 뭐에요?”
아무리 봐도 평범한 사절단은 아닌 것 같다.
 힐레멘이 빙긋 웃었다. 아사신보다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투명해지고 있는 얼굴이 개구쟁이처럼 미소 지었다.
 “내가 말 안했던가요? 본업은 사절단. 부업으로는 마법 나부랭이를 좀 익히고 있지요.”
“마법?”
아사신은 기억을 더듬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버지에게 버림받기 전에는 자신도 제대로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신이 떠난 팔시아 대륙인들은 결국 부정한 것들을 데려와 그들의 새로운 신으로 삼았다고. 그들은 신을 부정하면서 신이 남긴 공기. 물. 나무. 불과 같은 것에 인격을 부여하고 그들을 섬김으로서 그들로부터 힘을 빌려 쓴다고. 그것이 마법이라고.
“하찮은 속임수일 뿐이에요. 곧 새벽이 되겠군요. 서둘러요 아사신.”
“지금 당장요?”
아사신이 당황하여 말했다. 작별인사도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지금 당장?
“무슨 준비가 필요할까요. 아사신.”
“하지만!”
“이제 영원히 보지 못할 거라고 당신 여동생에게 말 할 건가요? 충실한 족장의 부하 타스가에 인사를 고하려고요? 이건 정말 잠깐의 눈 가리게용일 뿐이에요. 시간이 없어요. 이 마법은 오래 지나지 않아 풀립니다. 어서 나가야 해요.”
아사신은 생각에 잠겼다. 푸르스름하게 하늘을 밝히는 새벽빛을 받아 육체는 부옇게 빛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침묵하던 아사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서 가요.”

결정은 늦었으나 행동은 빨랐다. 아사신은 힐레멘의 어깨를 잡고 안간힘을 썼다. 벽에 새겨진 홈이나 문양장식 따위를 밟고 밑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힐레멘. 당신은 왜 가려는 거죠? 꽃을 얻긴 했나요? 이대로 돌아가도 되는 건가요?”
“말소리가 높아요. 아사신. 저 아래서 보초를 서는 친구들한테 안 들리도록 조심해요. 꽃이요? 야스카산은 우리 요구를 수용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던데요? 자칫하면 여기에 영영 눌러앉게 될지도 몰라서 저도 사실 야반도주하는 거랍니다. 하는 김에 당신도 데려가는 거죠. 자 이쪽으로 오세요. 해안가로 갑시다.”
힐레멘이 이끄는 곳은 예전에 아사신이 탈출을 시도했던 곳이었다. 두 사람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아직 밖을 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이동해야 했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달렸다. 비쩍 마른 아사신의 다리가 휘청일 때마다 힐레멘이 강하게 붙잡아 주었다.
“쉿! 가만히!”
앞서 달리던 힐레멘이 갑자기 멈추었다. 둘은 풀숲에 몸을 숨기고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불을 피워놓고 보초를 서는 남자들이 보였다. 아사신의 손에 진땀이 흘렀다. 그들은 곰처럼 민감하고 개처럼 충실한 야스카산의 전사들이었다.
“빠져나갈 수 있을까?”
“걱정 마세요.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으니까. 자, 저 예민한 자들의 귀를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이쪽으로 오세요.”
둘은 손을 꼭 잡고 천천히 이동했다. 면전에다 그들을 두고 움직이자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식은땀이 흘렀다. 불 그림자에 비춰지는 그들은 강철처럼 단단하고 예리해보였다.
둘의 움직임이 더욱 더 신중해졌다. 발아래 흐트러진 마른낙엽과 부러진 잔가지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걸음을 디뎠다. 아사신은 순간 너무도 놀라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다행히 손으로 입을 막아 소리는 세어나가지 않았지만 경직된 몸은 풀릴 줄을 몰랐다. 눈치를 챈 힐레멘이 손을 강하게 붙잡아왔다. 야스카산이 다가오고 있었다.
“족장.”
“족장. 오셨습니까.”
“이상은 없나?”
전사들이 일제히 한손을 가슴에 얹어 예를 표했다. 야스카산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일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아사신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아직 새벽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가 아침마다 보초들을 격려하러 다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일렀다.
 “오늘 순찰은 좀 이르시군요.”
“일찍 잠이 깼다.”
야스카산의 눈동자가 전사들에게로 향하자 힐레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발걸음이 힐레멘의 재촉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스카산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곤란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그의 존재감은 뚜렷했다.
-이쪽으로.-
힐레멘이 아사신의 손을 잡아끌었다. 시선을 야스카산에게 고정하고 발을 내딛던 아사신 발끝에서 나뭇가지가 딱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순간 여유롭게 잡담을 나누던 야스카산과 전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쏠렸다.
 “뭐지?”
한 전사가 무기를 빼어들고 나가려 하자 야스카산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예리한 푸른 눈동자가 야생성을 드러내며 어둠속에서 번뜩였다. 아사신은 그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무릎을 꿇었다. 엉키 성키 늘어진 빈약한 몇 줄기의 나뭇가지들이 방패가 되길 빌었다. 야스카산은 소리가 난 지점까지 다가와 주변을 살폈다. 아직 밤의 마법에 젖어 있는 숲은 검고 음산했다. 야스카산의 매서운 눈빛 앞에서도 숲은 아무런 보여줄 것이 없다는 듯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움직이는 것도 없었고, 소리를 내는 것도 없었다.
 “다람쥐라도 돌아다니나 봅니다.”
한 전사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야스카산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짧게 허공의 냄새를 몇 번 맡았다. 그 바로 아래에는 몇 가닥의 나뭇가지를 방패삼아 숨죽인 채 무릎 꿇고 있는 아사신과 힐레멘이 있었다. 아사신은 야스카산의 신발을 코앞에서 볼 수 있었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허리에 걸린 단검이 철그렁 소리를 내며 머리 위에서 울렸다. 차가운 공기에 숨을 쉴 때마다 흰 김이 피어올랐다가 그의 발치에 닿기 전에 사라졌다. 이 속임수는 아무래도 몸에서 분리되면 효력을 잃는 모양이었다. 숨을 쉬지 않으려고 해도 긴장한 심장이 쿵쿵 울려 호흡을 가쁘게 만들었다.
-들킬 거야.-
아사신은 눈을 감았다. 싫든 좋든 그 많은 밤을 함께 보낸 사이다. 싫든 좋든 서로의 체취정도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야스카산은 찬찬히 주변을 더 둘러본 후 몇 번 더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수고했다. 곧 교대조가 올 것이니 조금만 더 참아라.”
“네 족장.”
야스카산은 망설임 없이 뒤돌아나갔다. 아사신은 그 등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오금이 다 저릴 지경이었다. 의심이 들 때는 계속 파고들지만 일단 결정을 내리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이 야스카산이었다. 평소와 같이 턱을 치켜들고 앞으로 걸어가는 야스카산을 바라보는 아사신의 심정은 착잡했다. 절대로 들킬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사히 피해가자 반대로 기묘한 감정이 속에서 복받쳐왔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남자였다. 아사신은 이번 탈출도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대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리로.-
힐레멘이 슬며시 손을 잡아끌었다. 야스카산이 갔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전사들에게 들키면 말짱 꽝인 것이다. 불빛에 비추인 전사들의 붉은 얼굴은 파르스름한 여명의 빛과 맞물리며 그들을 귀신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되요.-
앞장선 힐레멘이 속삭였다. 보이진 않아도 맞잡은 손 안은 땀투성이였다. 힐레멘도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전사들로부터 멀어지고서야 아사신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어찌나 조심하며 걸었던지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진눈깨비가 날리는군요. 다행입니다. 만약 쏟아지기라도 했다면 발자국이 남았을 테니까요. 저 아래로 갑시다 아사신. 배를 숨겨둔 곳이 있습니다. 서둘러야겠어요. 마법이 풀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힐레멘이 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말대로 아사신은 자신의 손끝이 투명하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미끄러지듯이 내려가자 갑자기 낯설은 음성이 날아왔다.
“힐레멘!”
“이 목소리는 베르쿤이군! 준비는 다됐나?”
깜짝 놀라 허공을 두리번거리는 아사신을 제치고 힐레멘이 반갑게 말했다. 그제야 아사신은 힐레멘의 동료들도 자신처럼 투명술을 둘러썼음을 알아챘다. 이미 상체가 약간씩 드러나기 시작한 자신들에 비해 그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사신은 시선을 어색하게 내리깔아야만 했다. 곧 하늘에서 눈송이가 떨어지며 특정 부위에만 쌓이기 시작했다.
“준비는 다 됐겠지?”
힐레멘이 자신만만하게 웃어보였다.



야스카산은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차가운 바람이 잘생긴 이마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며 창백한 새벽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야스카산 안의 불안도 점점 커져갔다.
-왜지.-
야스카산은 곰곰이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는 불안감이 내부에서 웅웅대고 있었다.
 어젯밤 기분 좋게 아사신을 취했다. 그리고 다시 신방으로 돌아가 누워 자려고 했지만 잘 수가 없었다. 한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마리세여자에게 짜증이 난 야스카산은 결국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순찰을 나와야만 했다. 이유없는 불안감에 혹시라도 자신이 놓친 것은 없는지. 멸문지화를 당한 부족의 생존자가 이곳에 숨어든 건 아닌지 꼼꼼히 살폈다. 모든 것은 정상적이었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철통과 같았으며 그의 전사들은 여전히 충성스러웠다.
-그런데 왜······.-
야스카산의 미간에 잔잔한 주름이 잡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물어뜯고 있었다. 연한 살갗이 찢기며 피가 흘러 혀를 적셔도 알아채지 못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빼먹고 있는 기분이었다. 놓치면 안 되는 것. 절대로 안 되는 것을 놓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해가 돋음과 함께 내부의 목소리는 점점 더 들끓기 시작했다. 새로 태어난 첫 태양의 숨결이 피부에 닿을수록 그 예감은 점점 더 불길하게 타올랐다.
야스카산은 발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걷던 그는 어느 순간 뛰고 있었다. 걸음을 떼기 시작하자 발이 그를 인도했다. 계단을 네 개씩 밟아 오르며 야스카산은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
“족장.”
“문을 열어라.”
야스카산을 본 보초들이 급히 자물쇠를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야스카산은 거의 뛰어들듯이 안으로 돌진했다. 허겁지겁 방안을 훑어본 야스카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희들!”
“네 족장.”
야스카산은 밖에서 안을 내다보는 보초의 멱살을 잡아끌고 면전에다 대고 으르렁거렸다.
“간밤에 자리를 뜬 적이 있나?”
“아니오. 저희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꼼짝도 않고 이곳을 지켰습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이냐.”
야스카산이 보초의 고개를 꺾어 텅 빈 방안을 보게 했다. 주인을 잃은 침실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그···그건 저도 잘······.”
야스카산은 말을 더듬는 보초를 밖으로 밀어버리고 창문을 열었다. 설마하니 벽을 뚫고 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문이 아니라면 여기뿐이었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어젯밤에 확인한 바와 같이 두 명의 경비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이들의 눈을 속이고 아사신이 달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눈살을 찌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야스카산의 눈에 한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새벽에 보았던 해안가 근처의 보초였다.
 “족장! 족장-!”
“뭐지?”
야스카산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사신이 달아난 것을 알아챈 뒤부터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배가, 이상한 배가 가고 있습니다.”
“배?”
야스카산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배가 말이냐.”
“그것이··· 좀 이상합니다. 사람이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데 저절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꽤 큰 배인데 전혀 찾지 못했던 것도 이상합니다.”
“뭐라고?”
야스카산은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불안이 점점 구체적인 형태로 다가오고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벽에 난 틈에 발을 딛고는 한 번에 아래로 뛰어 내렸다. 바닥에 착지하자 무릎이 아팠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야스카산은 갑자기 뛰어내린 자신을 보고 당황한 남자에게 무섭게 다그쳤다.
“배가 떠난지 얼마나 지났지?”
“제가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얼른 뛰어왔으니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창백해져서 대답했다. 거기까지 들은 야스카산은 뛰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머릿속의 눈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그 이상한 배. 아무도 타고 있는 사람이 없는데도 앞으로 나아간다는 배에 아사신이 타고 있다고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족장! 족장 어딜 가세요. 기다리세요!”
야스카산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무섭게 뒤돌아보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한무리의 신녀들이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놔라!”
“안됩니다! 지금 가리시네가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놓지 않으면 네 손목을 치겠다.”
야스카산이 음산하게 으르렁 거리자 신녀는 창백해졌다. 그러나 곧 물러설 수 없다는 얼굴로 더욱 세게 야스카산을 붙잡았다.
“당신의 첫 아이가 태어나려고 하고 있어요. 어젯밤부터 통증이 시작되었지만 새로운 아내와 침실에 드는 당신을 부를 수가 없어서 참고 있었습니다. 제발 족장. 가리시네에게 들러주십시오. 당신의 아이입니다.”
야스카산은 말없이 행동으로 대답했다. 스겅-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야스카산을 붙잡고 늘어지던 신녀의 손가락이 잘려나갔다. 열성을 다해 야스카산을 설득하던 신녀의 얼굴이 한순간 넋이 나갔다.
“나는 경고했다.”
너무도 냉정한 한 마디를 던지고 야스카산은 등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녀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 어디냐.-
-어디에 있느냐.-
-내게로 돌아와라.-
-내게로···.-
-내게로······.-
야스카산의 눈이 시퍼런 칼날처럼 번쩍거렸다. 그것은 빛을 받을 때마다 반사되어 금빛으로 일렁였다. 내부의 명령어가 용솟음쳤다. 새로운 눈이 생긴 것 같았다. 분노가, 분노가 터질듯이 부풀어 올랐다.
“저기 있습니다!”
뒤따라오던 남자가 손가락질했다. 야스카산도 배를 보았다. 그것은 정말로 아무도 타지 않은 배였다. 제법 큰 배인데도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눈을 크게 뜨자 시야가 확대되었다. 시선은 사위(四圍)의 개념을 떠나 곧장 배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희미한 윤곽과 창백한 살결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배 위에 타고 있는 것은 아사신이었다.
“아사신----!!!”
야스카산은 대갈일성(大喝一聲)했다. 그것은 윙윙대는 메아리와 함께 바다위로 빠르게 퍼졌다. 분노가 소용돌이쳤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야스카산이 명령했다.
“활을 쏴라! 배 위로 활을 쏴라!”
전사들이 화살을 조준했다.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는 팔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매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화살이 날아갔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것은 배에 닿기도 전에 어이없이 바다 속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너무 멉니다!”
“제기랄!”
야스카산은 절벽을 구르듯이 뛰어내렸다. 뒤에서 전사들이 고함을 질렀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길이 닦여있긴 했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배를 가져와라! 배를!”
“다른 곳에서 끌어와야 합니다. 족장!”
“그럼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이냐!”
야스카산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전사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뒤따라 뛰어 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야스카산의 속도를 따를 자가 없었다. 힘차게 팔을 휘두를 때마다 야스카산의 날렵한 몸은 물고기와 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절대 놓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사신은 뒤를 돌아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야스카산의 수영실력은 예상외였다. 아니 인간의 범주를 넘어보였다.
“따라와요! 그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이미 거의 마법이 풀려 얼굴을 알아보게 된 힐레멘에게 아사신이 매달렸다. 힐레멘은 침착하게 돛을 조절하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그가 인간이라면 절대 따라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인간이라면 말입니다.”
힐레멘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는 복잡한 얼굴로 또다시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네 공간의 지배자. 이리 나와 내게 손을 내밀어라. 바람. 움직인다. 파도. 물결친다. 요동한다. 달려라. 내가 가는 곳으로 너도 간다.”
힐레멘이 손을 뻗어 파도를 건드리자 파도가 깊은 곳에서부터 화답해왔다. 깊은 심해에 산다는 고래의 울음소리와 같을까. 파도가 거품을 토하더니 구르릉 소리를 울리며 쏜살같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힐레멘!”
“너는 나의 노. 나의 돛. 물결 쳐라.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의 주인은 너.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내 말에만 집중하라.”
아사신은 뱃전에 몸을 기대고 뒤를 돌아보았다. 야스카산과 그들의 거리는 이제 육안으로 봐도 확실히 알만큼 멀어져 있었다. 그들은 안전했다. 야스카산은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아사신---!!!”
야스카산의 목소리가 바람을 뚫고 날아들었다. 그것은 폐부를 찢는 것 같은 처절한 소리였다. 포효하는 목소리에 심장이 끊어질 것처럼 아파왔다.
“아사신---!!!”
-야스카산.-
야스카산······.
아사신은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배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이제 야스카산의 모습은 작은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따라붙어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영원히 따라붙겠다는 듯이 악착같이 귓전을 맴돌았다.
“휴-!”
힐레멘이 지쳤다는 듯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육체가 완벽하고 선명하게 드러났다. 백 명의 노예가 노를 젓는 것처럼 빠르고 부드럽게 배가 질주하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상쾌하게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드디어 탈출했군요. 아사신.”
“그렇군요.”
아사신이 대답했다.
“기쁘지 않나요?”
“안 그럴 이유가 없지요.”
힐레멘이 아사신의 얼굴을 붙잡아왔다. 따사로운 태양빛을 받는 그의 얼굴은 천인처럼 아름다웠다. 다정한 손가락이 아사신의 볼을 스쳤다.

“그런데 왜 울고 있나요 아사신.”




“족장.”
야스카산은 축 늘어져서 돌아왔다. 끝까지 쫓아갈 기세인 것을 전사들이 이러다가 물고기 밥이 되겠다고 우격다짐으로 끌고 온 참이었다. 전사들은 차라리 상어와 싸우는 편이 쉽다고 느낄 정도로 바다 한 가운데서 야스카산과 사투를 벌어야 했다.
“그 배에 누가 타고 있었던 겁니까?”
한 전사가 물었다. 야스카산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바다를 노려보았다. 바다는 잔잔하기만 했다. 새벽은 이미 그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었고 태양은 환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을 칙칙하게 가렸던 눈구름도 해의 등장에 밀려 북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거기에 누가 있었냐고?”
야스카산은 피식 웃었다. 싸늘한 겨울바다에서 건져진 몸은 한기로 인해 미친 듯이 부들거렸다. 아니 떨리는 것은 추워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반드시 되찾고 말겠다.-
틀어진 주먹에 혈관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젖은 머리카락이 차가운 바람에 흩날려 꽁꽁 얼어갔다. 야스카산의 두 눈은 바다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야스카산의 두 눈이 지금 그러했다. 그의 옆에 둘러선 전사들이 긴장할 정도로 야스카산은 분노하고 있었다.

 -반드시······.-




7




자정에 가까운 시각. 희끄무리한 밤안개를 해치고 한 척의 배가 도착했다. 배는 부둣가의 가장 좁고 불편한 자리를 골라 정착했고 거기로부터 여섯 명의 남자들이 내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 망토를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있었다.
 남자들이 안전하게 육지에 착지하자 미리 언질을 받은 듯 한 대의 마차가 다가왔다. 네 마리 말이 끄는 평범한 검은 마차는 아무런 장식도 문양도 없었다. 남자들은 스스럼없이 마차에 올라탔고 마차는 곧 빠른 속도로 부두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밤의 어둠은 마차를 집어삼켰고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여섯 남자들은 침묵을 지켰다. 검은 눈가와 탈력한 표정의 그들은 다들 몹시 지쳐보였다. 그 중 하나는 너무도 지친 나머지 앉아있을 힘도 없다는 듯이 사지에 힘을 쭉 빼고 마차 구석에 처박혀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눈은 몽롱했다.
“우린 어디로 가는 거지요?”
마르고 작은 청년이 침묵 속에서 조그맣게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몸을 누이고 있던 청년이 비틀비틀 일어나 대답했다.
 “우리는 소르데라로 갑니다. 엄청난 강국은 아니지만 착실하게 열강들 사이에서 힘을 키워가는 나라지요.”
아사신의 핼쑥해진 뺨에 미미한 생기가 돌았다. 피부로 다가오는 현실에 옅은 흥분을 느꼈다. 자신은 진실로 탈출한 것이었다. 그 감각은 이제야 현실로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사신은 야스카산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흰 포말사이로 타오르던 푸른 눈동자와 일그러진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보듯 생생했다. 파도를 가르던 강철 같던 두 손과,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까지. 이제 그것들은 다시는 자신을 잡으러 오지 못할 것이다.
팔시아 대륙. 신이 버린 땅. 눈부신 흰 피부와 밝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
신의 가장 가까운 혈족으로 태어나 신이 버린 땅에서 도망와 새로운 삶을 살게 되다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 일인가!
“곧 다와 갑니다.”
아사신의 표정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힐레멘이 어깨를 다독여왔다. 아사신은 잠자코 미소만 지었다.
 마차는 오랜 시간을 달렸다. 지붕이 있는 마차를 탄 것은 처음이었던 아사신은 신기하여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곧 다른 이들처럼 지쳐버렸다. 이국에 대한 흥분도 체력이 저하됨에 따라 사그라들었다. 한참을 신나게 흔들리며 다른 이들처럼 꾸벅꾸벅 졸던 아사신은 마차가 정지하자 선뜩 눈을 떴다. 곧 문이 열리고 사나운 인상의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인상을 찡그리지 않고 있는데도 미간 사이에는 커다란 주름이 잡혀있었고 입술이 뒤틀려있어서 화나 보이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다짜고짜 힐레멘을 지목하며 말했다.
 “힐레멘 투르가. 드디어 돌아왔군.”
남자의 사나운 기색에 힐레멘은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다. 남자는 그런 힐레멘의 모습을 싸늘하게 응시했다.
“아아, 당신이군요. 벌써 우리가 도착했나요?”
“내려라.”
남자는 힐레멘의 물음에 가타부타 말이 없이 다시 나가버렸다. 아사신과 일행들은 으슬으슬한 밤공기를 느끼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새 비라도 내렸던지 흙은 철벅거렸고 차갑고 습한 공기는 폐까지 싸늘하게 만들었다. 일행이 모두 내리자 남자가 아사신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저 피곤해 보이는 놈은 뭐지? 포로라도 잡아온 거냐?”
“그는 제 친구입니다. 저를 도와준 사람이지요.”
힐레멘의 대답에 남자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더 이상 그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아사신을 몇 번 힐끔거린 그는 두터운 허리끈을 조이며 말했다.
“에슐리아님이 기다린다. 먼저 가보도록.”

아사신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약간은 질린 표정으로- 높은 담과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독특한 교차형 지붕을 얹은 건물들은 수십 개의 아치와 기둥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재료로는 하나같이 순백에 가까운 대리석이 사용되어 있었고 벽을 장식한 조상들에는 진주, 청옥, 산호, 벽옥과 같은 보석들이 박혀있어 달빛아래서도 그것들의 영롱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궁을 둘러싼 네 개의 첨탑 주변에는 높고 낮은 궁륭형상의 건축물들이 즐비했으며 이 모든 것들은 화려한 정원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다.
 힐레멘이 뒤에서 어깨를 쿡 하고 찔렀다. 약간의 휴식으로 그는 원기를 회복했는지 평소의 장난스러운 얼굴로 되돌아가 있었다.
 “여기가 왕궁이랍니다. 어때요?”
“······화려하군요.”
아사신은 할 말이 없었다. 공간을 잡아먹는 용도 외에는 특별히 쓰일 데가 없어 보이는 넓은 정원을 지나 아사신과 힐레멘은 궁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탁 트인 복도와 여러 개의 방을 건너자 몹시 화려한 문이 나타났다. 길게 늘어지는 흰 의복의 사람들이 문을 열자 힐레멘이 아사신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며 큰 소리로 외쳤다.
“누님! 제가 돌아왔습니다!”
“힐레멘!”
아사신은 깜짝 놀랐다. 방 안에는 눈이 부시다는 표현도 모자랄 만큼 아름다운 여성이 일어서고 있었다. 벌꿀 같은 머리카락을 구불 치게 늘어뜨리고 루비보다 붉은 눈동자는 화롯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시리게 투명한 피부위로는 작은 점 하나도 허락되지 않았고 풍만한 몸매는 느슨하게 풀어헤쳐진 옷자락 안에서 굴곡을 이루었다.
 지금까지 아사신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여성은 가리시네였다. 비록 자신을 몹시 괴롭히긴 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부로 바뀌게 되었다. 눈앞의 미녀는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차라리 정교하게 빚어진 얼음조상 같았다. 손을 뻗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도 그녀가 하자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힐레멘. 드디어 돌아왔구나.”
“누님.”
“네가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단다. 내 사랑.”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힐레멘은 그 아름다운 여성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여성의 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저자는 누구지?”
“아···!”
힐레멘은 아사신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때까지도 멍하니 여자의 얼굴만 쳐다보던 아사신이 얼굴을 붉힌 채 끌려왔다.
“인사해요 아사신. 여기는 나의 누님이신 에슐리아 투르가랍니다. 누님. 여기는 함마대륙에서 온 아사신입니다. 인사해요.”
“함마에서 오셨다고요?”
힐레멘의 누나라고 소개받은 에슐리아가 품평하듯 아사신을 훑어보았다. 힐레멘에게 향할 때는 강철도 녹일 듯이 달았던 눈빛이 북풍처럼 차가워졌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아사신의 마른 팔다리와 단순한 옷차림. 창백한 안색과 홀쭉한 볼을 스쳤다. 보석 같은 입술이 경멸의 미소를 짓자 아사신은 무안함에 볼이 화끈거렸다.
“네 포로더냐?”
“아닙니다. 아사신은 제가 데려온 거예요. 국빈으로 대해주세요. 누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야 잘 모르니까 말이다. 그럼 네 바로 옆방으로 그가 머물 곳을 마련해두마.”
에슐리아는 아사신에게서 시선을 떼고 힐레멘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아름다운 얼굴이 꽃처럼 만개하며 달콤하게 변했다. 그 과정이 너무도 선연하여 아사신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너무도 아름다웠다. 힐레멘에게서 가장 아름답고 여성적인 부분만을 취해 향유와 얼음으로 빚어낸다면 이렇게 생겼을까. 힐레멘과 꼭 닮았으면서도 천연적인 요사스러움이 충만한 얼굴이었다.
 “나의 시녀가 방을 안내해 줄 것입니다. 먼저 가서 쉬세요. 나는 내 동생과 밀린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아 저···.”
“실리.”
에슐리아가 종을 흔들자 문이 열리며 허리를 숙인 시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사신을 잡아끌었다. 아사신은 불안했지만 힐레멘이 든든하게 웃어주자 주춤주춤 시녀를 따라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큰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아사신이 사라지자 에슐리아는 힐레멘을 잡아끌어 침상에 앉히고 나른한 동작으로 옆으로 누웠다. 도자기처럼 하얀 볼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아까 그 남자가 신부라는 거냐? 생각보다 볼품없구나. 그 제도에 대해 들었을 때 나는 좀 더 아름다운 것을 상상했는데 말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누님.”
힐레멘이 웃으며 답했다. 에슐리아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솔직하게 말하렴. 저 남자는 무엇이지?”
“말했듯이, 그는 나의 친구입니다.”
힐레멘이 에슐리아의 옆에 편히 앉으며 대답했다. 똑같이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과 판에 박은 듯한 얼굴의 남녀가 서로를 다정하게 응시했다.
“내가 그 말을 믿어도 될까?”
“믿으세요. 누님.”
힐레멘이 의심으로 가늘게 좁아진 에슐리아의 눈가에 다정하게 키스했다. 키스를 받은 에슐리아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명심해 힐레멘. 너는 나를 위해 쓰이게 될 거야. 세속적인 감정에 네가 흐트러지는 것을 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다.”

아사신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밤하늘에는 총총하게 빛나는 별들과 만월의 달이 빛나고 있었다. 하늘위의 풍경은 변한 것이 없는데 땅위의 풍경은 너무도 변해있었다. 수많은 기둥들과 탁 트인 복도가 어색했다. 하얀 피부들의 행렬과 밝은 머리카락들도 어색했다. 자신을 신기한 눈으로 응시하는 그들의 시선에는 결코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우리안의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힐레멘이 자신의 땅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탈출의 성공과 새 땅에 대한 흥분으로 고양되었던 감정이 조금씩 불안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의 첫날밤은 아사신을 외롭게 만들었다.
 문득 달그림자 속에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새카만 머리카락과 가을 하늘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삐죽하게 튀어나온 정수리의 잔 머리카락까지 생생했다.
 아사신은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늘 화내거나 찡그렸거나 이죽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환하게 웃어주거나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손바닥은 못이 박혀 거칠었고 피부는 악어가죽처럼 딱딱했다. 훈장처럼 널려있던 수많은 생체기와 흉터들은 아사신을 겁먹게 만들었었다.
-야스카산.-
아사신은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남자의 귀신과도 같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집착으로 얼룩지고 뒤틀린 모습이었다.
 -당신은 나를 잊겠지.-
당신은 나를 잊을 거야. 당신의 아내들과 함께 오래오래 살면서 당신을 닮은 사내아이를 많이 낳을거야. 아니면 새로운 신부를 찾을지도 모르지. 나를 욕할지도 모르지. 신실하지도 정숙하지도 못했던 신부를 두고두고 욕할지도 모르지.
혹은 나를 잊어버릴까? 곧바로 잊어버릴까? 내게 한때 못난 형이 있었는데 그와 과거에 몇 번 동침했었노라··· 그렇게 기억되다 잊혀져버릴까?
알 수가 없다······.
아사신은 고개를 흔들었다.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낯선 곳에서의 첫날밤이 감정을 흩트리고 있었다. 아사신은 이런 감정은 원하지 않았다. 원하고 원하던 탈출이었다. 아무것도 그리워해서는 안 된다. 과거는 영원히 묻을 것이었다.
스산한 밤바람이 얇은 잠옷을 통과하자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아사신은 창문을 닫았다. 더 이상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것은 사절이었다. 침대에 오르자 따스하고 보드라운 시트의 감촉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지독한 피로로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훅 하고 몸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아사신은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눈을 감아야 했다. 언뜻언뜻 희미하게 남자의 형상이 떠올랐지만 질끈 감은 눈 사이로 매몰차게 몰아낼 수 있었다.


첫날의 걱정과는 달리 아사신은 잘 적응할 수 있었다. 팔시아 대륙인들은 함마인들처럼 폐쇄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도 많았고 적응력이 아주 빨랐다. 그들은 싫고 좋음이 확실했고 친절했으며 함마에서 듣던 것처럼 지나치게 호전적이지도 않았다.
아사신은 처음 몇 주를 정신없이 지냈다. 새로운 땅. 새로운 음식.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이야기. 모든 것이 신기했다. 주눅이 들어 방에서 나오기를 꺼려하던 첫 모습은 곧 온대간대 없이 사라졌다. 사람은 어떻게든 적응해나가기 마련이 것이었다. 천을 칭칭 감아서 아래로 늘어뜨리는 희한한 복장에도 익숙해져서 이제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 옷이 어울리냐고 물어본다면 나름대로의 소신도 밝힐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들이 입는 옷은 함마인들보다 무척 색이 밝았고 화려했다. 연체동물에게서 보라색을 추출하고 곤충에서는 주홍을, 식물에게서 노랑, 파랑, 검정등을 추출하여 순하게 혼합하던 함마의 염료기술과 달리 그들은 무엇을 쓰는지 색상이 진하고 강렬하여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또 아사신은 이제 끝을 뾰족하게 쏘아 올리는 듯한 말투에도 익숙해져서 곧잘 흉내도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아사신이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생겼다. 함마대륙 그 어떤 부족을 통틀어보아도 지위가 높다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었다. 여자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먹고 살 걱정이 없는 높은 지위의 여성은 아랫사람을 이끌고 관리할 책임이 있었다. 신부인 자신도 신부의 의무를 받지 않았던가. 족장의 아내라고 해서, 장로의 딸이라고 해서 그 책임은 비켜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의 여자들은 달랐다. 그녀들이 하루 종일 집에 죽치고 앉아서 하는 일이라고는 손톱을 우아하게 기르거나 머리카락을 더욱 윤기 나도록 빗는 일 뿐이었다. 저들끼리 정원에 우르르 모여서는 이번에 새로 맞춘 옷감이 어떻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루 종일 하는 것을 봤을 때는 아사신은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제야 저 크고 화려하기만 한 쓸모없어 보이는 정원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모두 왕이나 궁에 거하는 귀족들의 딸과 첩과 아내들이었다. 아사신은 첩이라는 단어에도 반감을 가졌다. 함마에서는 정식으로 처를 취해 데려올 뿐 첩이라는 제도 자체가 없었다. 모두가 묵인하는 가운데 불륜을 저지르는 행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신부의 의식과 같은 큰 날에는 모두가 흥분해 단체로 성행위를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신의 축제날이란 명분이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날만큼은 신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새 생명을 잉태하지 않는 날이었다.
“그러다 아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 아이는 사생아로서 살아가게 된답니다.”
힐레멘이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어머니는 있으되 아버지가 없는 자식이지요. 혹은 여자에게 남편이 있을 경우 그 남편의 아이로서 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지간히 속이 좋은 남편이어야 가능하겠지요.”
에슐리아는 왕의 첩이었다. 아무런 지위도 혈연도 갖지 않은 미혼의 여성이 왕궁의 가장 좋은 방을 차지하고 밤마다 왕의 부름을 받았다. 아사신은 이곳에 온지 며칠 만에 그녀의 지위를 알 수 있었다. 이곳의 말로는 왕의 첩이었고 함마대륙식으로 표현하자면 창녀였다. 그러나 아사신은 그녀를 감히 창녀라고 경멸할 수가 없었다. 도를 넘어선 아름다움 앞에서는 어떠한 인간의 잣대도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사신은 순수하게 그녀의 아름다움에 탄복하고 또 탄복했다.
“자꾸 누님만 보면 화낼거에요~.”
힐레멘이 볼을 볼록하게 하게 투정을 부렸다.
“당신이 어린앱니까?”
“어차피 나랑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볼 거면 날 봐요. 날.”
힐레멘이 시선을 가로막아 왔다. 아사신은 피식 웃었다.
“당신은 남자잖아요.”
“이런~ 아름다운 것에 남자 여자 차이를 둬서 사랑하나요. 아사신?”
“사랑같은게 아니에요 힐레멘.”
아사신은 힐레멘의 말에 얼굴이 발개져서 부정했다.
“그럼 사랑이 아니고 뭐에요. 그 열정적인 눈빛은. 누님 얼굴이 닳겠습니다.”
“정말로 사랑같은게 아니에요. 그냥 그녀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랬어요.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거워지는군요. 미인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요.”
힐레멘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미인이라면 우리의 귀여운 족장님도 무척이나 미인이었지요.”
아사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대답이 없어요?”
힐레멘이 재촉하자 아사신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렇죠. 그도 무척이나 아름다웠지요.”
“에이, 마지못해서 대답하는 거 같은데?”
 “아니에요. 그는 정말 아름다운 남자였어요.”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을 만큼 빛나던 아름다움이었다. 창공의 태양과도 같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려고 할수록 강렬한 아픔과 눈물만이 남는 남자였다. 달아나도 달아나도 아침이면 다시 뜨는 태양처럼 쫓아왔다. 그가 해라면 아사신은 그림자였다. 해가 존재하는 한 살아서는 몸에서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였다.
 힐레멘이 시선을 부딪혀왔다. 눈동자가 마치 유리구슬 같았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파란 눈이 아사신의 얼굴을 비췄다. 아사신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야스카산은 그냥 당신에게 아름다운 사람일 뿐이었나요?”
“그 이상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도 남자고 저도 남자인데요.”
“그게 당신의 방패막이로군요.”
“네?”
아사신은 말문이 막혔다.
“아닙니다. 언젠간 당신도 깨달을 날이 오겠지요.”
수수께끼와 같은 말만 남기고 힐레멘이 사라졌다. 아사신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아사신이 이해하지 못한 또 한 가지는 힐레멘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힐레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였다. 왕의 정부인 에슐리아에게는 설설 기면서 그 동생인 힐레멘에게는 싸늘하기가 그지없었다. 아니 거의 본체만체 한다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였다.
 “왜 그들은 당신에게 함부로 대하나요?”
하루는 고심하던 아사신이 힐레멘을 불러 물었다. 그러자 힐레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려 질문했다.
“누가 나한테 함부로 대하나요?”
“이 성의 사람들. 다 당신을 홀대하잖아요. 오히려 나한테 하는 게 친절하다고 느낄 정도에요. 아무도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묻거나 인사도 하지 않더군요.”
“하하 그건 말이지요. 아사신.”
힐레멘은 귀엽다는 듯이 아사신의 작은 머리통을 꽉 껴안았다. 아사신은 숨이 막혀 바둥거렸다. 한참만에야 팔을 풀어준 힐레멘은 긴 눈을 가늘게 접고 방긋 웃었다. 그리고는 사춘기 소년처럼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는 비밀스럽게 소곤거렸다.
“내가 태어나서는 안 되는 아이라서 그렇답니다.”
“예?”
아사신은 당황했다. 힐레멘은 낮게 쿡쿡거리며 웃더니 고양이처럼 몸을 쭉 뻗었다. 여기서의 그는 함마땅에 있을 때 보다 훨씬 활기차고 싱싱해보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베일이라도 걷어낸 것 같았다. 힐레멘의 육체는 힘으로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보다 속을 알 수가 없어졌다.
“내게는 태어날 때부터 속박이 걸려있어요.”
“속박?”
“당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신부와 족장이라는 것만으로 당신이 태어나자마자 멋대로 걸린 기대와 같은 말이지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해하지 않아도 되요.”
힐레멘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사신의 볼을 꼬집었다. 이곳에 온 후론 토하는 일 없이 잘 먹어서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볼이 길게 늘어났다.
 “요즘 식성이 좋아졌다더니 보기 좋아졌어요. 이대로라면 내가 처음 봤을 때의 아사신의 모습이 곧 회복되겠는걸요.”
힐레멘의 손가락이 볼을 쓰다듬었다. 차르르 미끄러지는 손가락의 감각이 간지러웠다. 아사신이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리고 쿡쿡 웃었다. 힐레멘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이곳에 온 후로 표정이 밝아졌어요. 아사신.”
“그런가요?”
“이젠 웃기도 하잖아요. 거기서의 당신이 음지에 핀 묘목 같았다면 여기서의 당신은 제약도 족쇄도 떨쳐낸 새끼 새 같아요. 건강해지고 또 아름다워지고 있지요.”
“아름······.”
아사신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름답다는 칭찬은 처음이었다.
 “못 봤어요? 요즘 당신을 보고 궁의 시녀아이들이 저들끼리 속닥거리고 있어요. 이대로라면 조만간 누군가가 나만의 기사가 되어달라고 청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사신은 눈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놀라움이 온 몸에 번졌다. 여자와 성혼을 한다. 여자와 가정을 차린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신부가 아니다. 신이 버린 땅에서 이곳의 여자와 성혼하여 아이를 낳고 살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아사신은 머릿속 일제의 혼란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럼 난 갑니다. 숙녀가 다가왔을 때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아사신.”
힐레멘은 그렇게 놀리더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는 바쁜 남자였다. 혼자 남겨진 아사신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햇빛에 반짝이는 청옥 구슬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상태가 좋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마르고 창백한 얼굴이었다. 결이 가는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했고 회색 눈동자는 지나치게 평범했다. 이곳 남자들도 자신보다는 얼굴이 희었다. 여성이 자신 같이 볼품없는 이방인에게 반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 사람들은 상당히 보이는 것에 집착했다. 가리시네도 여기 여자들에 비하면 겸손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허울을 중요하게 여겼다. 무엇을 입나 무엇을 먹나 무엇을 바르나는 그들의 삶의 질을 측량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그들은 변화를 잘 받아들이고 친절했지만 가식적이었고 적당히 가면도 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아사신으로서는 오히려 대하기가 편했다.
 아사신은 그들은 모두 빈 바구니를 채우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텅 비어버린 마음속의 바구니는 그들이 오래전에 저버린 신의 존재 이외에는 채울 길이 없는데 그들은 그 공간의 부재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엇이든 채워 넣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성공, 허례허식, 복수, 정복, 출세 이 모든 강렬한 인간적이고 격렬한 것들은 그 공간을 채우기 위한 노력들로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남의 땅을 침범하고 더 많은 보물을 끌어 모으려고 일생을 발버둥 쳤다. 함마에도 그런 사람은 있었지만 이토록 강렬하게 그것에 얽매인 사람을 아사신은 알지 못했다.
아사신은 이곳에서 마법사를 만났다. 뛰어난 예술품도 보았다. 그러나 예술은 신을 찬미하지 않았고 여성과 남성의 사랑 이야기만 그려내기에 바빴다. 마술사들은 인간이 신을 저버리고 인간이 그 대처방안으로 찾아낸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존재자체가 타락이었다.
아사신은 신실하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출생에 대한 강렬한 반감의 표출이기도 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는 그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들의 존재를 거부한 적도 허상이라고 비웃은적도 없었다. 아사신은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게 될 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한시라도 그 사실에 대해 의심해 본적이 없었다.
 이곳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신을 부정하고 조롱거리로 삼았으며 심지어는 아사신에게 신이 없다고 선언하듯 말했다. 어째서 신의 존재를 공부한 적도, 알려고 한 적도 없는 그들이 그렇게 장담하는지 아사신으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들은 과감했지만 지나치게 용감했고 성급하게 결론 내렸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 다 이해한다는 듯이 신을 제멋대로 죽이고 살리고 난도질하는 것에 아사신은 식겁했다.
 아사신은 이곳의 왕을 만났다. 왕이라는 사람의 역할에 대해 부족의 족장과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하던 아사신은 충격에 휩싸였다. 높다란 의자에 오래된 버섯처럼 퍼져 앉아있는 남자의 얼굴은 너무도 괴로워 보였다. 바르바칸처럼 믿음직스럽게 보이지도 않았고 야스카산처럼 건장하지도 않았다. 그는 축 늘어진 배와 허옇게 뜬 피부를 지녔고 인상은 짜증스럽게 굳어져 있었다.
“네가 함마대륙에서 온 아사신이라고?”
“그렇습니다.”
아사신은 멀뚱하게 대답했다. 왕은 조금도 관심이 가지 않는 얼굴로 아사신을 바라보다 곧 귀찮은 듯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그나마도 왕의 옆에 서 있던 에슐리아가 그에게 애교를 부리자 그의 관심은 완전히 아사신에게서 떠나버렸다. 그것이 아사신이 만난 왕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저런 자를 믿고 따를 수 있는가!
아사신은 강력한 의문에 휩싸였다. 물소사냥에 내놨다가는 첫 번째로 치어 죽을 거 같이 생긴 남자가 왕이라니! 그 초점 없는 눈동자와 흐물흐물한 육체를 가지고 어떻게 강력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여기는 혈연이 더 중요하답니다.”
아사신의 의문에 힐레멘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의 능력. 그의 자질. 그의 사람됨을 따지는 게 아니라 우리는 그의 배경과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를 더 보지요. 그가 장자인지도 그가 돈이 많은지도 우리의 왕 될 자를 고르는 기준이랍니다.”
신부의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약하다는 이유로 내쫓겼던 아사신은 어이가 없었다. 그의 돈과 그의 부모가 그의 평가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신부의 아들을 족장으로 채택하긴 하지만 그것은 신의 의지가 개입된 문제였다. 이곳은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런 그들이 무슨 근거로 그의 배경만 보고 왕으로 추대한단 말인가.
“궁금한 게 많겠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요. 여긴 그런 식으로 운영되는 곳이니까요.”
힐레멘은 빙긋 웃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사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방인인 자신이 관섭해봤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아사신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힐레멘의 충고를 받아들여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독서를 하거나 몸을 회복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무렵의 아사신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곳에 온 처음에는 급변한 환경에 대한 불안 때문에 잠들지 못했다지만 한동안 나타나지 않던 것이 다시 도진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아사신은 안정되고 있었다. 소사린이 죽은 이후 처음으로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잠이 오질 않았다. 내부로부터 알 수 없는 갈증이 밀려오곤 했다.
종종 불면의 밤을 열병으로 이어지곤 했다. 모두가 잠든 깊은 한밤에도 아사신은 혼자 깨어 앓아야했다. 식은땀이 쏟아지고 열꽃이 피었다. 간지러움이 발끝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한밤의 열병에 괴로워하다 깨어나는 아사신에서 시녀인 실리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의사를 부를까요?”
아사신은 실리의 걱정을 뒤로 물리며 애써 미소 지었다.
 “아니요, 이러다 말겠지요.”
 갑작스러운 변화와 낯선 곳에서의 적응 때문이겠지, 아사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몸은 점점 나빠져만 갔다. 이제는 숫제 앓는 게 아니라 발작을 일으키는 정도였다.
 발작은 환영과 함께 찾아왔다.
 처음 환영이 나타났을 때 아사신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몽롱하고 반쯤은 깨어있는 의식너머로 하얀 여인이 다가와 어깨를 잡아주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아사신은 그것이 실리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여인은 거의 몸을 움직이지 않고 스르르 다가와 차가운 손가락으로 아사신의 뺨을 건드렸다.
-아사신. 아사신.-
-잠꾸러기 아사신.-
-일어나봐. 내가 왔어.-
-소사린······.-
아사신은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 봄볕 같은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행복함과 위로를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사람은 소사린뿐이었다.
 “소사린······.”
아사신은 미소를 띈 채 고개를 들었다. 소사린을 보고 싶었다. 얼마나 그리웠는지 말하고 싶었다. 달콤한 웃음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것은 깨어진 얼굴이었다. 소사린의 얼굴은 피와 흙으로 엉망이었다. 일그러진 눈에는 한과 설움이 가득했다. 핏발선 눈과 마주친 아사신은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소사린의 눈은 증오와 설움으로 가득했다. 고통에 찬 얼굴로 소사린이 입을 열었다. 앞니가 모두 부서지고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하려던 소사린의 눈에서 피가 길게 흘렀다. 소사린의 아름다운 얼굴은 뭉개진 저승화 같았다. 아사신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가까이 다가온 소사린이 작게 소곤거렸다. 어떻게 자신을 두고 이렇게 안온하게 살 수 있느냐고··· 차가운 입김이 아사신의 뺨에 닿았다.
아사신은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가위에 눌린 듯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시취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역겨운 냄새에 속이 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결국 아사신은 밤이 될 때까지 소사린의 망령과 마주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그 어떤 악몽보다 생생하고 고통스러웠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아사신은 내내 공포와 죄책감에 괴로워해야 했다. 그 꿈을 다시 꾸게 되는 것이 너무도 두려워서 잠이 들 수가 없었다. 하얗게 밤을 지새우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방심한 사이 다시 몸은 수마에 잡아먹혔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또 다른 악몽이었다. 그것은 소사린보다 훨씬 지독한 것이었다.
 달이 차오름에 따라 더욱더 강렬한 불길이 내부를 태우고 있었다. 열에 들뜬 몸은 이리저리 침대 위를 방황하며 휘어지고 구부러졌다. 그 가운데로 한 남자가 다가와 힘 있게 다리를 벌리고 그 속으로 들어왔다. 그 행위는 거침이 없었으며 아사신 역시 남자를 밀쳐내지 않았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발기된 것이 들어왔다. 행위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새벽쯤에는 아사신이 먼저 남자의 몸을 정신없이 끌어안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사신은 바지가 축축한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고 기겁을 했다. 몽정을 해버린 것이었다. 실리가 오기 전에 치우기 위해 옷가지를 들고 욕탕으로 뛰쳐나갔다. 허겁지겁 빨래를 담그고 씻기 위해 물을 받던 아사신은 문득 기묘한 것을 발견하고 수면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잔물결 치는 물위에 맑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연한 파편을 그리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흠뻑 젖어 있었다. 한 방울 한 방울 눈물이 샘솟듯이 솟아올라 맑은 소리를 내며 욕탕위로 부서져 내렸다.
“어?”
아사신은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그러나 눈물은 그치지 않고 떨어져 자꾸만 수면위에 파문을 만들어냈다.
 “일어났나요. 아사신?”
밖에서 실리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아사신은 급히 고개를 가로젓고 빨래를 밀어 넣었다.
 “정말 괜찮나요. 아사신?”
실리는 요 근래 아침마다 하얗게 탈색 되어버리는 아사신이 정말로 안 되어 보였는지 몇 번이나 얼굴을 살펴보며 걱정을 했다. 아사신은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밤에 지배당하는 정신은 낮에도 멀쩡하지 못했다. 아사신은 문을 닫고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시간을 소비했다. 육체는 이곳에 있는데 정신은 아직도 함마땅에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정신이 강간당하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소름끼치는 감각이었다. 밤이 오는 것이 두려워졌다.
 “정말로 안색이 좋지 않네요. 아사신.”
“이러다 말거에요. 조금 잠을 못 잤거든요.”
아사신이 아프다는 말에 문병을 온 힐레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사신은 간신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더 이상 자신의 병세에 대한 질문이 나올까봐 두려워진 아사신은 얼른 말을 돌렸다.
“뭐 새로운 소식이 있나요? 어머니가 아프다던 헬리는 어떻게 됐나요? 누님은 건강하신가요?”
“헬리의 어머니는 완쾌했어요. 의사의 약이 좋았던 모양이에요. 누님도 물론 건강하지요. 늘 미모를 유지하려고 갖가지 좋은 것들은 죄다 바르고 마시는데 안건강하고 배기겠어요? 그것보다 좀 더 재밌는 소식이 있어요. 당신을 돌려달라고 족장이 왕에게 정식으로 요청한 모양입니다.”
아사신의 창백한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나를 돌려보낼 건가요?”
“하하-. 그런 일은 없을거에요. 아사신.”
힐레멘이 밝게 웃으며 아사신의 머리를 헝클였다. 아사신은 안심이 되었다.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무서웠다. 힐레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내게 소중한 사람이랍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다시 밤이 되었다. 아사신은 초조하게 땅거미가 깔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힐레멘과 있을 때는 진정되었던 마음도 밤이 다가올수록 다시 불안해져만갔다. 아사신은 밤이 무서웠다. 아무리 자지 않으려고 버텨보아도 지친 육체는 깜박깜박 정신을 놓치기 일쑤였다.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현실은 잠이 들고 환영이 지배하는 세상에 놓여졌다.
-아사신.-
남자가 달콤하게 웃으며 무릎을 잡아 올렸다.
 -야스카산.-
아사신 역시 저항하지 않았다. 기꺼이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두 몸이 얽히고설키며 공기는 흥분으로 팽창되었다. 그리고 밤새도록 계속되는 정사의 시간들.
 나를 안아줘,
 내게 넣어줘,
다가 와 나를 만져줘.
미처 말이 되지 못하는 호소가 호흡이 되어 방안에 널브러지고 쾌락과 고통이 동반하였다. 더운 숨결이 사방을 떠돌았고 젖은 땀이 등을 흘렀다. 진하고 고통스러운 쾌락의 순간이 지나면 광기로 얼룩진 환영과의 정사가 아침햇살 아래 드러났다. 일체의 숨김없이 눈부신 빛의 폭포 아래 드러나는 자신의 수치.
 아침마다 아사신은 몽정으로 더러워진 아랫도리를 보며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고 해가지면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침대 한 구석에다 몸을 움츠리며 아사신은 눈을 감았다.
곧 어둠이 침대를 집어 삼켰다.

궁의 공기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신녀들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발끝으로만 걸어 다녔고, 신관들은 기도실에 처박혀 나오질 않았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가리시네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뺨은 분노로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민네가 가리시네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가리시네는 더욱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첫 아들이었다. 민네로서도 첫 손자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비록 신부의 아들이 아니기에 족장이 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첫 손이 아닌가. 민네는 자신의 아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들은, 야스카산은 최근 너무도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야스카산에 대해 수군거렸다. 그들의 족장은 정신이 나간 것만 같았다. 하루 종일 멍하니 허공을 노려보기가 일쑤였고 가끔은 질풍처럼 노하여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의 눈은 공허했다. 이곳에 그의 영혼은 머무르지 않았다. 첫 번째 장남의 탄생도 그를 이곳에 다시 데려와주지는 못했다.
“제 불쌍한 아들은 이름도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가리시네가 엉엉 울면서 분풀이를 했다.
 “하늘아래 아비가 멀쩡히 살아있거늘 이름도 얻지 못한 것은 이 아이 뿐일 것입니다. 언제까지 나는 내 새끼를 이 아이나 내 아들로 불러야 합니까? 이미 한 달이 다되어 갑니다. 제발 야스카산을 설득해주십시오! 내 아들은 자신의 아비에게 한번 안겨보지도 못했습니다. 어머님!”
“그것은 나도 잘 알고 있으나······.”
민네는 말을 흐렸다. 도저히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가리시네가 이렇게 조르기 전에 이미 몇 번이나 찾아가 보았던 것이다.
 그만 신부는 잊으라고, 새로운 신탁을 내려 받자고 간청을 넣었었지만 야스카산은 요지부동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신 건지······.”
민네는 몰래 한숨을 쉬며 울부짖는 며느리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그녀로서도 해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그 시각 야스카산은 바람이 부는 높은 탑 위에 앉아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아무도 거기에 그가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타스가.”
야스카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건물의 어둠에 쌓여있던 부분에서 타스가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야스카산의 이마 위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싸늘한 겨울바람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준비는 다 되었나?”
“빠짐없이 준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족장.”
타스가는 경건한 자세로 예를 취했다. 그는 신부의 탈출사건으로 마음속 깊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타스가는 그 어떤 전투에서보다 더욱 더 순종적으로 야스카산을 보좌했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힐레멘에게 어떤 사특한 재주가 있었는지 몰라도 그가 설마 이렇게 당당하게 신부까지 데리고 탈출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새 힐레멘이 옆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버렸고 당연하게 생각해버렸다. 그것은 생각을 태만하게 만들었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들에게서 대답은?”
“곧 출발하시면 됩니다.”
“그렇군······.”
야스카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타스가는 야스카산이 명상에 잠기자 다시 뒤로 물러났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야스카산이 문득 침묵을 깼다.
“환영이 보인다. 타스가.”
“네?”
“환영이······.”
야스카산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부턴가 손에 잡힐 듯이 환영이 보인다. 정말로 진짜 같은 환영이라서··· 나는 그것을 잡으려고 애를 쓴다.”
“족장?”
“꿈에서 깨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다.”
야스카산은 타스가의 말을 자르고 계속 이야기 했다. 타스가는 그가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야스카산의 눈동자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단정치 못하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초점 없는 눈동자가 사방을 헤맸다.
 “······나는 환영에 사로잡혀버린다. 이젠 나도 알 수가 없다. 내 앞에는 무엇이 펼쳐져 있는 것일까. 내게 신은 무얼 바라는 걸까. 타스가. 나는 정말로 알 수가 없다.”
야스카산은 주먹을 틀어쥐었다. 멍하던 눈동자에 점점 초점이 돌아왔다. 달그림자에 쌓인 세상을 내려다보며 야스카산은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혼란에 빠져있던 남자는 이제 더 이상 없었다. 그곳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남자가 서 있었다.
한 척의 배가 바다를 가로질렀다. 배는 차가운 안개가 흐리게 낀 바다 위를 조용히 미끄러졌다. 고요는 배가 수면을 가르는 소리마저 집어삼켰다.
이윽고 배가 닿은 곳은 작은 바위섬이었다. 물이끼와 뾰족하게 돋아난 원형 그대로의 돌들이 이곳에는 사람의 손이 닿은 적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야스카산과 전사들은 섬의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곳은 신이 절단한 대륙의 중간지점이었다. 천 년간 공식적인 왕래는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곳이었다. 야스카산은 그러나 아무런 감회도 느끼지 못했다. 중요한건 과거가 아니라 현재였다.
“위대한 족장 야스카산.”
오래전 신의 칼날이 대지를 가르기 전에는 이곳에도 아름다운 문화가 있었노라 증거하는 무너진 사탑에서 팔시아 대륙인들이 야스카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르데라의 대표로 나온 달트는 왕의 조카사위였다. 그는 40대 초반의 남자로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였다. 왕의 조카와 결혼했지만 그것은 정략적인 것이었을 뿐이었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집안에서의 입지가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남편은 여자와 관계할 때는 흥분이 되지 않는 병신이라고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이번 협상에 나온 것도 자의사였다. 왕과 귀족들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그는 여기서 어떻게든 공을 세워야만 했다.
 달트는 야스카산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야만인 남자는 전혀 꿀림이 없었다.
 “우리와 거래를 하겠다고 들었소.”
-야만인 주제에······.-
달트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거래라니. 야만부족과 거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야만인들은 깔고 뭉개는 용도일 뿐이지.-
달트는 야스카산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팔시아인들은 아무리 햇빛에 그을려도 가질 수 없는 매끈하고 연한 갈색피부와 칠흑 같은 검정 머리카락이 매력적이었다. 고도의 꽃과 같은 쌀쌀한 분위기가 남자를 감돌고 있었다.
 -저런 남자한테 내 것을 박아 넣고 흔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달트의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저런 타입의 남자는 흔하지 않았다. 야만인들 주제에 왕과 같이 고귀하고 그러면서도 야생화처럼 생생했다. 기품은 없었지만 그 점이 더 좋았다. 옷을 찢고 입술을 훔치고 팔을 꺾어 침대로 넘어뜨리면 어떻게 저항할까······. 저 허벅지 안쪽의 구멍은 분명 처녀지임에 틀림이 없겠지?
 상상만으로도 군침이 넘어갔다.
“너희들은 우리의 신부를 납치해갔다.”
야스카산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달트는 얼른 말을 받았다.
 “말은 바로 하셔야지요. 족장. 아사신은 우리 사절단을 자의로 따라온 것입니다. 납치라니. 우리는 그런 야만스러운 짓은 하지 않습니다.”
“······.”
야스카산은 물끄러미 달트를 바라보았다. 달트는 야스카산의 푸른 눈과 마주치자 절로 침이 고였다. 미끈하고 날렵한 눈가는 촘촘한 속눈썹으로 뒤덮여 있었다. 냉막한 인상과는 다르게 눈동자는 푸르고 밝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한 쌍의 보석이 감겼다가 나타났다. 달트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 눈이 우는 것을 보고 싶었다.
“원하는 게 뭐지?”
야스카산의 질문에 달트와 수하들은 의미심장하게 웃어보였다. 확실히 야만인은 야만인이었다. 이렇게 협상할 줄을 모르다니. 달트는 상체를 깊숙이 숙이며 미소 지었다.
“꽃을 원합니다. 족장.”
야스카산은 미간을 찌푸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당신의 마라꽃을 바랍니다. 족장.”
“마라꽃······.”
“네. 마라꽃. 그 기적의 꽃 말입니다.”
달트는 흥분했다. 그가 그 꽃을 사용해본 것은 딱 한번이었다. 자주 가는 매음굴의 단골남창이 권해준 것이었다.
 -이것으로 당신을 10년은 젊게 만들어드리지요.-
남창은 달콤하게 미소 지으며 꽃가루를 마시게 했고 그날 달트는 10년이 아니라 20년은 젊어져서 남창을 범하고 또 범할 수 있었다. 온몸의 세포가 젊어진 듯 하고 성욕이 넘쳐났다. 성기는 지칠 줄을 몰랐고 급기야 나중에는 남창이 눈물을 흘리며 그만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사용하게 해달라고 말을 해도 남창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 가격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쌌기 때문에 달트는 한 번의 정사로 두 달 수입을 날려야만 했다. 매음굴에 비축되어있던 마라꽃을 전부 다 사용하자 꽃을 찾아 사방을 수소문 했다. 그러나 수입되는 양은 너무도 극소량이라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그 기적의 꽃은 너무도 귀했던 것이다.
“너희들은 그 꽃의 무서움을 모른다.”
야스카산이 말했다.
“그 꽃은 축복이지만 또한 저주이며 약이자 독이다. 우리의 지혜로도 그 꽃을 다루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너희들은 그 꽃을 다룰 수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달린 문제겠지요 족장.”
달트는 비릿하게 웃었다. 이 남자는 협상을 모르는 촌뜨기였다. 그런 말에 혹해서 아 그렇습니까? 하고 수긍할거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꽃의 씨앗을 주십시오. 우리는 그 꽃의 완전한 독점을 원합니다.”
“마라꽃은 우리 신의 뒷마당에서만 자란다.”
“그럼 그 뒷마당을 내놓던가!”
달트는 소리를 질렀다. 흥분이 일렁였다. 아슬아슬하게 둘러쓰고 있던 가식은 사라지고 없었다. 꽃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자 달트는 벌떡 일어났다. 참을 수가 없었다.
 “야만인들아! 너희의 여왕을 모셔가려면 우리에게 꽃을 지불해야 할 거다!”
“타스가.”
야스카산이 짧게 말했다. 다음순간 달트는 몸이 기우뚱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하늘이 한 바퀴 뒤집어지더니 느리고도 급격하게 땅으로 추락했다.
“어?”
달트는 눈을 깜박였다. 이상했다. 족장의 야만인 중 하나가 무표정하게 칼을 치켜들고 서 있었다. 뒤집어진 하늘과 뒤집어진 자신의 몸이 보였다. 그것은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며 목을 잃어버린 채로 서 있었다.
 “어?”
달트의 눈이 다시 한 번 깜박였다. 곧 소름 끼치는 단발마가 비명이 솟구쳤다. 소르데라의 사절단들이 벌떡 일어났다. 사방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피와 비명소리가 바위섬을 지배했다.
살육의 한가운데서 야스카산은 무심하게 앉아있었다. 그의 전사들이 차례로 저주받을 인간들을 살육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야만인이라 경하하고 신의 아내를 야만인의 여왕이라고 부른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택된 부족이었다. 모든 함마의 부족 중에 가장 세력이 크고 가장 강한 부족이었다. 신과 동침하여 족장을 선별하는 유일한 부족이었다. 그것을 야만적이라고 평하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작은 바위섬은 천 년 전의 일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함마인과 팔시아 인이 학살하고 있었다. 파도가 섬에 부딪혔다 다시 내려갈 때는 붉은 피도 함께 쓸려 내려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섬은 다시 조용해 졌다. 야스카산은 제일 처음 죽은 돼지의 머리통을 잡고 상자에 던져 넣었다. 처음부터 협상이 잘 되리라곤 믿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확실하기 위해 만난 것뿐이었다. 돼지는 아직도 자신의 죽음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과 입을 크게 뜨고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 얼굴에 침을 뱉은 야스카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 머리를 제 나라에 보내라. 우리의 신부를 되찾아오자.”
타스가가 뒤에서 공손하게 상자를 받아들었다. 한 개의 목을 제외한 나머지 시체들을 바다로 굴리며 야스카산은 희미하게 웃었다.
 피가 부르고 있었다.



 대단한 반대가 일어났다. 장로들은 꺾이지 않는 철옹성과 같았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들고 일어나 야스카산을 규탄했다. 신관들도 장로들의 편이었다. 그들은 저주를 두려워했다.
 “그것은 불문율입니다. 족장!”
“우리의 신이 땅을 갈랐습니다. 형제의 살육을 금했습니다.”
“우리가 왜 그런 희생을 해야 합니까, 족장!”
욕설.
모욕.
반대.
비난.
 비난.
 비난들.
야스카산은 이 모든 비난을 묵묵하게 감내해냈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알고 있었다. 장로들은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그들은 조언자이지 지배자는 될 수 없었다. 늘 그래왔듯이 그들은 자신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은 신성이 살아 숨 쉬는 땅이었다. 신과 동침하는 남자가 수태하는 땅이었고 신의 혈족을 숭배하는 땅이었다. 아무도 자신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다만······.-
야스카산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자 그때까지 언성을 높여가며 싸워대던 장로들이 조용해졌다. 그들은 슬슬 야스카산의 눈치를 살폈다.
-다만 아버지는 내가 막을 수 없지.-
바르바칸. 공식적인 족장은 자신이었지만 권위는 아직 아버지에게 남아있었다. 야스카산이 밖에서 사냥을 하고 제사를 올리고 부족을 통합시킨다면 바르바칸은 안에서 사람들을 훈육하고 경계를 강화하고 장로들을 상대했다. 게다가 일부 고지식한 장로들은 아직도 정당한 신부의 아들이 아닌 자신을 그리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야스카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에서 나가버렸다. 그가 성큼 나가버리자 뒤에 나은 장로들이 당황해서 찾는 소리가 들렸지만 깨끗이 무시해주었다.
 예상대로 바르바칸은 신의 밀실에 있었다. 그는 등불도 밝히지 않고 어두운 밀실에 음침하게 앉아 있었다.
 “아버지.”
“야스카산.”
야스카산은 바르바칸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마르고 늙은 손을 잡고 경건하게 입 맞추었다.
 바르바칸이 불쑥 말을 꺼냈다.
“신의 밀실의 원래 용도를 아느냐?”
“족장의 혈족의 비밀이야기나 중대 사안을 의논하기 위한 장소이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
바르바칸이 피식 웃었다. 어스름한 빛 아래서도 그 자조 섞인 웃음은 너무도 잘 보였다.
“우리 위대한 신들은 모두 미쳐버렸지. 한 여자에게, 한 남자에게 말이다. 그것은 우리의 눈을 흐리고 심장의 고동을 제멋대로 주물렀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잘못된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야스카산은 바르바칸의 말을 받아쳤다. 바르바칸이 웃었다. 그는 흙탕물속을 뒹굴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듯 야스카산을 바라보았다.
 “나는 늘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 결과가 이것이지. 지난 세월 나는 미움과 증오로만 나를 지탱해왔어.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그렇게 나를 속이고 살아온 거다. 나의 자랑스런 아들. 위대한 족장 야스카산. 부디 너만은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야스카산은 바르바칸이 처음으로 털어놓는 약한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이런 모습을 기대하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었다. 강하게 호통치고 노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온 것이었다. 네가 무슨 선택을 하던 그것은 잘못되었다는 듯이 이렇게 서글프고 안타까운 눈빛을 하는 남자는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야스카산은 분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이사이로 내뱉듯이 말했다.
“나는 잘못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럴까?”
바르바칸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는 몹시 지쳐보였다.
“일단 신부를 찾아오너라. 그래야 모든 것의 실마리가 풀리겠지.”
“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도 그럴 작정입니다.”
야스카산은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두터운 돌문을 밀며 야스카산은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바르바칸은 묵묵히 명상에 잠겨있었다.
전쟁은 그로부터 사흘 뒤에 시작되었다.




 “아사신!”
실리가 급하게 달려와 아사신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사신은 그 급한 기세에 놀랐다. 그들로서는 야만인 취급하는 함마인이라지만 국빈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일개 시녀인 그녀가 아사신을 이렇게 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실리, 무슨 일이지요?”
“큰일 났어요 아사신.”
“아사신!”
그 때 멀리서 힐레멘이 아사신을 불렀다. 그의 얼굴도 짐짓 굳어있었다. 아사신은 불안해졌다.
 “아사신.”
“힐레멘.”
힐레멘은 아사신에게로 성큼 다가와 손을 마주잡았다. 실리를 손짓으로 쫓아 보낸 힐레멘을 보고 직감적으로 아사신은 자신의 고향에 관련된 일임을 깨달았다.
“당신 남편이 쳐들어왔어요.”
이 상황에서도 농담을 잃지 않는 힐레멘이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을 내놓으라는군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아사신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야스카산은 미친것이 틀림없다. 두 대륙이 서로를 침범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협정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시시한 것이라면 이렇게나 오래 계속 될 리가 없다. 인간이란 어차피 뱉은 말의 무게를 지는 족속이 아니다.
 -나를 되찾기 위해?-
아사신의 심장이 쿵쿵 울렸다. 희게 질렸던 얼굴이 이번에는 붉게 달아올랐다. 다리에 힘이 빠져나갔다. 숨이 막혀왔다.
 “어디까지, 그들은 어디까지 와있나요?”
힐레멘은 아사신의 반응을 다시 돌아가게 될까봐 그런 것으로 착각했는지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사신. 우리의 용감한 기사들이 당신을 보호할 테니까요.”
힐레멘의 품에 머리를 기대며 아사신은 눈을 감았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두 대륙의 평화조약 아닌 평화조약은 사실상 끝이 났다. 인간의 아둔함을 보았을 때 천년이란 시간동안 서로를 침범하지 말자는 약조도 오래 지킨 편이었다.
 소르데라의 왕은 야스카산이 잘라 보낸 사신의 머리를 받자 대노하여 전쟁을 선포하였고, 대선 10선과 중선8선, 소선 5선을 수군 450명과 함께 왕비의 사촌동생 루스티아 비제스 집정관에게 내리고 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야스카산은 소르데라의 선전포고에도 특별한 움직임을 지시하지 않았다. 그는 루스티아의 군함이 인근 해역으로 들어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루스티아 사령관이 질풍처럼 달려오자 배 여러 척을 끌고 나가 그들과 대치시켰다.
 야스카산의 전사들과 대치한 팔시아의 병사들은 콧바람을 내뿜으며 그들을 비웃었다.
 “저것인가? 고작 저것들이 그 신의 전사들인가?”
루스티아는 왜 지금까지 함마대륙을 침범하지 않았는지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촘촘히 맞물린 국경을 한 뼘이라도 더 따기 위해 하이에나처럼 싸워댈게 아니라 함마대륙으로 진출했어야 했다. 오래전에 일어났다던 대 지진으로 왕래할 길은 끊어졌다지만 항로로도 멀지도 않은 거리였다. 큰 배를 타면 반나절 안에 당도할 거리인 것이다. 그 짧은 거리를 아무도 도전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함마인들의 배는 작고 낡은 것이었다. 한 대의 큰 배로 승부를 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척의 작은 배들로 이루어진 군함이었다. 빠르게 치고 들어가는 유격식에는 유리할지 모르나 이런 전면전에서는 -그것도 저렇게 낡은 배로- 승산이 낮았다.
“어선이라도 끌고 나왔나 봅니다.”
누군가가 이죽거리자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루스티아는 배의 앞머리로 나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쓸어버려라 소르데라의 용감한 병사들아. 저 미개한 것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그들이 섬기는 신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음을 알려주자!”
우례와 같은 함성이 진동했다. 병사들의 발 구르는 소리와 북소리가 온 사방에 메아리쳤고 사기가 순식간에 솟구쳤다. 그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정복전쟁, 식민지 전쟁이라는 것은 국경을 수비한다거나 외적의 침입에 맞선다는 것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었다. 그것은 영원한 노예착취를 뜻했고 개인적으로 돌아오는 몫도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뜻했다.
루스티아군이 사기를 돋우는 동안 야스카산은 싸늘한 눈빛으로 관망하듯 바다만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아무런 연설도 하지 않았다. 선봉으로 선 타스가가 불안한 눈빛으로 야스카산을 쳐다보았지만 그를 차마 건드릴 수는 없었다. 적들의 발소리가 쿵쿵 바다를 헤집었다. 그 소란으로 배가 뒤집어지지나 않을지 걱정 될 정도였다.
 “족장.”
타스가의 옆에 서 있던 좌군대장이 야스카산을 불렀다. 야스카산은 뒤를 돌아보고 조용히 손짓했다. 선봉장 타스가 및 좌군. 우군대장들이 미리 하달 받은 대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루스티아는 야스카산의 배가 뒤로 이동하자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저 야만인들이 후퇴를 하는구나. 무슨 계략인지 몰라도 쫓아가서 밟아 버려라!”
우아아아아---
루스티아의 병사들이 맹렬하게 추격하기 시작했다. 배 바닥에 묶여있는 노예들도 필사적으로 노를 저었다. 소르데라가 전투에서 지게 되면 빼도 박도 못하게 죽는 것은 자신들인 것이다. 서서히 물러서는 야스카산의 배를 따라 루스티아의 배가 맹렬히 추격해들었다. 쐐기 형으로 늘어선 루스티아의 배는 돌진에 강했다. 그들은 얼마 안가 제일 꽁무니에 붙어 달아나던 한척의 배를 잡을 수 있었고 루스티아는 갈고리를 던져 배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당황한 야스카산의 전사들이 바다로 뛰어들었고 그 모습을 루스티아의 병사들이 큰 소리로 야유했다.
 루스티아의 배는 다시 힘차게 앞으로 돌진했다. 갈고리에 걸렸던 배를 제거하고 나아가느라고 시간이 소진되었다.
 다시 속력을 내어 또 한척을 따라잡은 루스티아는 이번에도 갈고리를 던졌고 그의 병사들과 야스카산의 전사들은 한바탕 육탄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전세가 불리해지자 전사들은 싸움을 포기하고 물로 뛰어들었다.
 “미개한 놈들이 비겁하기까지 하군.”
루스티아는 혀를 찼다.
 처음에는 신이 났던 병사들도 몇 차례나 그런 일이 반복되자 투덜대기 시작했다. 루스티아역시 그들의 비겁함에 화가 났다. 얼른 피를 보고 싶었다. 그의 취미는 반항 못하는 개미들을 물속에 수장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생살을 찌르고 배는 것이었다. 자꾸만 후진하는 야스카산의 배는 점점 더 폭이 좁은 해로를 걷고 있었다. 버려진 몇 척의 배가 통로를 가로막았다. 배들은 낡은 주제에 무겁기까지 했다. 옆으로 치우는 것도 상당히 성가신 작업이었다.
“밀어버려라! 족장 야스카산을 놓치지 마라!”
대형 선봉 선들이 버려진 배를 떠밀자 배는 인근 바위섬에 부딪혀 쩌적 거리는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부서졌다.
“저것들이 무슨 술수를 쓰는 걸까요.”
“글쎄, 무슨 술수를 쓰던 간에 안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루스티아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루스티아는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어떻게 밀어붙여오던 이길 자신이 있긴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예민하게 기척을 살피며 예민하게 기척을 살피며 야스카산과 숨바꼭질을 하던 루스티아는 그래서 야스카산이 정면으로 돌아섰을 때 큰 소리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변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몇 척의 배를 내버려 스스로 손실만 입었을 뿐이었다.
 대적한 야스카산의 군함에서 일제히 화살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루스티아는 침착하게 방패 벽을 세우고 궁병을 소집시켰다. 정해진 신호에 따라 뿔 나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루스티아의 궁병들도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야스카산측에서 쏘는 화살은 루스티아측에게 특별한 손해를 입히지 못했다. 루스티아의 대선은 강철판을 길게 펴서 배의 앞면을 꼼꼼하게 발라놓은 반 철갑선이었다. 웬만한 화살을 가지고는 뚫을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야스카산의 배는 수십 수백 대의 화살이 선체에 박혔다. 전사들은 날아오는 화살을 막는 것만으로도 급급해 보였다.
 “이거야 원, 생각보다 훨씬 쉽지 않은가.”
루스티아는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이것은 나의 경력에도 넣지 못할 정도다.”
 여유만만하게 방어하는 루스티아의 배를 쏘아보며 야스카산은 석궁을 집어 들었다.
 “드디어 처음 시전 하는군요.”
뒤에서 타스가가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야스카산도 대답 없이 빙긋 웃어주었다. 시위를 당기고 목표물을 정하고 한쪽 눈을 감았다. 기분 좋게 활이 휘어지는 소리가 드드드- 울렸다. 팽팽하게 휘어진 시위를 더욱 더 길게 당겼다가 힘껏 놓았다. 그것은 똑바른 일직선으로 날아가 공기를 찢으며 목표물을 명중시켰다. 한발 더, 야스카산은 다시 조준을 했다. 뻥 뚫린 방패사이로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루스티아의 얼굴이 보였다. 방패와 방패를 들고 있던 남자는 가슴이 꿰뚫려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우군대장이 감탄하며 수염을 쓸었다.
 “보통 활의 유효사거리보다 세배는 빠른 것 같군요. 꽤 기대하기는 했지만 실전에서 어떻게 쓰일지 걱정했는데 상당히 효과가 좋습니다.”
야스카산은 우왕좌왕 놀라서 새로운 방패병을 자신의 앞에 세우는 루스티아를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공격해라.”
이미 공격은 시작되고 있었지만 기민한 전사들은 야스카산의 말을 즉각적으로 알아들었다. 일반 궁병의 뒤에서 석궁을 든 병사들이 나타났다. 야스카산의 배는 누선이었다. 궁사수를 위해 설계된 배로 명중률과 사거리 역시 강화된 구조였다. 강철도 뚫는 석궁이 방패 병을 해치우면 일반 궁사수가 일어나 화살을 날려 내부의 적을 쏴 죽였다. 루스티아가 다시 대열을 가다듬으면 다시 석궁사가 일어나 방패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는 전투에서의 대량살상에서 이보다 더 강력할 수 없는 석궁의 유일한 단점인 장전시간을 보완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석궁은 야스카산이 토벌했던 부족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이 문제의 병기 때문에 야스카산도 몹시 고생한 전적이 있었다. 아직 원시적인 단계의 각궁(角弓)과 복합궁의 형태를 한 것을 여러 임사실험을 통해 지금의 형태로 발전시킨 것이었고, 실전에서는 처음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루스티아는 혼란에 빠졌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철판을 뚫는 원거리 무기라니,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또다시 흐트러진 방패 막 사이로 한 남자가 자신을 똑바로 주시하는 것이 보였다. 이 먼 거리에서도 남자가 뿜어내는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령관님, 위험합니다! 방어할 수가 없습니다!”
“방어해라! 어떻게든 방어해라! 적이 이상한 무기를 쓴다! 대오를 정렬해라!”
루스티아는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야스카산의 전사들은 너무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 번의 북이 울릴 때면 석궁이 쏟아졌고 두 번의 북이 울릴 때면 화살이 쏟아졌다. 자신의 병사들은 북소리에 맞춰 난간에서 떨어지고 가슴이 으깨지고 목이 찔려 죽었다. 손 쓸 방도가 없었다.
 “들이 박아라! 평선을 처치해라! 저들의 배를 우리 배에 걸쳐서 올라가서 쓸어버려라!”
루스티아는 희생을 감수하기로 했다. 그는 아래쪽에서 끈질기게 활을 쏘아오는 배들을 쓸어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속력을 내어 쏟아지는 석궁과 화살의 가운데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육중한 배들이 파도를 가르며 앞으로 전진했다. 확실히 석궁은 원거리용 살상무기였다. 일단 배를 맞대고 칼을 겨누게 되면 어떤 양상을 띄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큰 배가 돌격하자 상대적으로 작은 야스카산의 소선들은 그 기세에 옆으로 밀려났다. 야스카산은 자신을 향해 정면으로 다가오는 루스티아를 보고 쓰게 웃었다. 우두머리를 잘못 만나면 꼬리가 고생하는 법이었다.
갑자기 야스카산의 북소리가 빠르고 경쾌한 리듬으로 바뀌었다. 석궁사와 궁사수가 모두 방패를 들고 완전히 배를 감쌌다. 루스티아는 당황했다. 저 자세는 완전히 싸움을 포기한다는 의미인가? 돌진해오는 적선을 보고 아무 대응도 하지 않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루스티아는 문득 기묘한 소리를 들었다. 아직은 들릴 리가 없는 소리가 희미하게 뒤편에서부터 착실히 들려오고 있었다. 악몽을 마주한 남자처럼 루스티아는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서서히 돌렸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흠뻑 젖은 전사들이 하나씩 둘씩 자신의 배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시퍼런 안광을 살벌하게 빛내며 칼날로 배의 몸체를 찍어 오르는 그들의 모습은 전설의 살인귀 피라니아와 같았다.
“저것들을 쳐 죽여라! 배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해라!”
루스티아는 비명처럼 고함을 지르며 배위를 뛰어다녔다. 배는 피와 비명소리로 가득해졌다. 점점 야스카산의 배가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사신과 같았다.
 “죽여라! 죽여라!”
루스티아도 칼을 빼어들고 병사들과 함께 싸우기 시작했다. 직접 마주친 전사들의 모습은 생김새에서부터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얼굴에 그려진 원시적인 문양과 옅은 갈색 피부는 심리적인 공포를 유발시켰다.
 루스티아는 필사적으로 지원을 요청할 방도를 생각했으나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중선과 소선은 이미 전사들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다. 탐욕스러운 개미떼가 음식위로 바글바글 몰려들 듯이 전사들이 배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야스카산의 배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배는 루스티아의 것 보다 상대적으로 작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부딪혀왔다. 쿵 하는 소리가 울리고 방패를 머리위로 치켜든 전사들이 루스티아의 배로 물밀듯이 몰려왔다. 그 모습은 악몽 그 자체였다.
“죽여라! 한 놈도 빠짐없이 죽여라!”
루스티아는 악을 쓰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검술실력은 대단하지 못했다. 한 전사와 칼을 겨누던 그는 곧 수세에 몰렸고 칼이 자신의 손에서 떠난다고 느낀 순간 어느새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검은 얼굴의 전사가 빙긋 웃으며 자신의 뒤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 루스티아는 곧 자신의 목과 몸이 분리되겠구나 싶어 질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암흑이 찾아왔다.
야스카산은 타스가가 적군 사령관을 밧줄로 결박하는 모습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아둔한 것들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생각이란 것을 할 줄 모르는군.”



루스티아가 깨어난 것은 꽤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는 무례하게도 누군가가 자신의 뺨을 때리는 바람에 신음하며 눈을 떠야만 했다.
 한참을 끙끙대던 루스티아는 누군가의 발에 채이고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고 당황하여 일어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의 사지는 완벽하게 결박되어 있었다.
“정신이 드나?”
루스티아는 꼴사납게 바닥 위를 기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까 멀리서 활을 쏜 남자였다. 옅은 갈색 피부. 칠흑같이 검고 무성한 머리카락. 냉랭하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푸른 눈동자. 착각할래야 착각할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족장 야스카산.”
루스티아는 신음했다. 완패였다. 완벽한 완패였다.
“나를 죽일 건가?”
“글쎄······.”
야스카산은 무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충분히 피를 보았다. 나는 더 이상의 무의미한 피는 좋아하지 않는다. 네게는 내가 사명을 하나 주겠다.”
“나는 우리왕의 명령에만 복종한다!”
루스티아는 발끈하여 외쳤다. 야만인의 족장에게서 명령을 듣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들어야 할 거다.”
야스카산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는 아사신이 탈출 한 후 인내심이 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강력한 목적의식은 심지를 굳게 만들었다.
 야스카산의 눈동자는 진한 늪처럼 깊었다. 스릉- 하고 칼날이 칼집을 빠져나오는 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루스티아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야스카산이 자신의 목에다 칼을 겨눈 것이었다. 침을 삼킬 때마다 예리하게 단련된 칼날도 함께 움직여 그의 목에 길게 상처를 입혔다.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만큼은 되었다.
 절로 루스티아의 눈이 야스카산의 눈을 쫓았다. 뱀과 눈이 마주친다면 이런 기분일까. 루스티아는 그가 자신을 진실로 인격체가 아닌 고깃덩어리로 보고 있음을 알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자신의  몸을 살피는 기색이 마치 어디를 어떻게 도륙할까 가늠하는 것만 같았다. 루스티아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젠 들을 준비가 됐겠지?”
“······.”
루스티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야스카산은 그 모습에 흡족한 듯 눈을 가늘게 접으며 미소 지었다. 주름하나 없던 팽팽한 눈가가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이 상황의 절박함도 잊을 만큼 아름다웠다.
 “너는 네 왕에게 돌아가 전해라. 더 큰 피를 부르기 전에 우리의 신부를 돌려달라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후 존재의 이유 따위도 모르게 된 무가치한 것들에겐 더 이상 우리의 신부를 맞길 수 없노라 전했다고 일러라.”
루스티아는 어이가 없었다. 너무도 오만한 말에 정신이 멍할 지경이었다. 그는 팔시아 대륙 땅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무신론자였다. 그들에겐 신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오히려 그들 내에서도 경건하게 태양과 달을 섬기는 사람들을 미개인 취급했었다. 그런데 저 미개인의 족장이 자신을 존재가치도 없는 버러지 취급하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너를 살려주는 이유는 네 왕에게 나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함이니 잘 들어두었다가 그대로 전하도록해라. 나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시에는 오늘과 같은 관대함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야스카산은 칼을 내리쳤다. 칼은 조금의 오차도 허락지 않고 루스티아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밧줄만을 끊어냈다. 이 야만인은 진심으로 자신을 놓아주는 것이었다.
루스티아는 짐짓 속으로 놀랐다. 많지는 않아도 이미 몇 번의 전투 경험이 있는 몸이었다. 그 어디에서도 사로잡은 적장을 살려두는 나라는 없었다. 이용가치가 있으면 살려두었지만 그것은 죽음의 시간이 조금 멀어지는 정도의 의미일 뿐 살려둔다고 볼 수 없었다.
 “네 배는 두고 가라. 네가 부순 우리의 배를 한 척 줄 테니 그 배에 너와 살아남은 병사들을 데려가라. 그러나 노예는 두고 가야 한다.”
그를 묶어서 데려온 전사가 이번에도 그를 끌고 갔다. 루스티아가 도착해보니 반쯤 부서지기 일보 직전의 배에는 몇 안 되는 살아남은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루스티아와 생존자들은 서둘러 본국으로 귀환했다. 당연히 루스티아로서는 이대로 항복할 생각은 없었다. 항해를 하는 동안 그는 이 치욕을 줄 것인지 만을 생각하며 분을 삭였다. 자신을 살려서 돌려보낸 것을 저 야만인이 살면서 가장 후회할 일로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타스가가 야스카산에게 물었다.
“그들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까요?”
“아니.”
야스카산은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나는 그저 한 번의 경고를 했을 뿐이다. 그들이 내 말을 들어줄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저 나는 나의 관대함을 한 번 보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죽일 수 있는 대로 죽여 놓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요.”
“관용은 한번으로 족하지.”
그 말을 끝으로 야스카산은 등을 돌렸고 타스가 역시 더 이상 질문할 수 없었다.
 본국에 도착한 루스티아는 어이가 없었다. 어째 무지하니 느리더라 싶더니 배 밑창에는 모래주머니가 잔뜩 실려 있었던 것이다. 루스티아가 쫓아올 때 퇴로를 막기 위해 일부러 실어놓은 것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루스티아는 집요하게 왕비와 함께 왕을 설득했다. 첫 전투에서의 대패로 인해 상당히 진노한 상태의 왕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성과는 있었다. 루스티아는 전보다 두 배의 전투선을 받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런 비겁한 속임수에 속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하고 내려온 터였다. 과연 야스카산 쪽에서도 이제는 특별히 속이거나 할 생각이 없었는지 당당하게 정면승부를 해왔다. 그들은 낡은 배 대신에 측면에 칼날을 박은 검선으로 상대해왔으며 승리의 수호성좌의 일곱 여신을 돛대에다 화려하게 조각해 넣었다.
 야스카산도 이번에는 사기를 돋우는 것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힘차고 강한 연설은 전사들을 한껏 고양시켰고 전사들은 시키지 않아도 환호성을 지르고 발을 구르며 상대해왔다.
 야스카산의 비장의 무기인 석궁도 이번에도 톡톡히 제 역할을 다 했지만 루스티아는 저번의 일로 꽤나 깨달음이 깊었던 듯 저번보다 작은 배를 이끌고 내려왔다. 숫자로 밀어붙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석궁은 조준하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빨리 움직이는 배를 한 번에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멀찍이 떨어져서 활로 상대하던 배들은 곧 격돌하고 시작했고 야스카산의 전사들과 루스티아의 기사들은 칼을 맞대고 필사의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수적으로는 야스카산쪽이 불리해보였지만 루스티아는 방심할 수가 없었다.
 야스카산의 전사들은 강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전사였다. 일생을 사냥하며 살아온 남자들이었다. 그들의 직업이 농부건, 목공인이건 상관없었다. 말위에 앉아 우아하게 사냥터의 사냥감만 잡거나 길들여진 가축을 도살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달리고 쫓고 기다리고 노리는 것에는 도가 튼 사내들이었다. 언제 어디를 정확하게 찌르면 되는지가 숨 쉬는 것처럼 능통했고 그것을 행동으로 표현함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루스티아는 또다시 자신의 판단실책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그들은 야만민족이 아니었다. 훈련된 기사들에 비해 전혀 빠지는 것이 없는 살벌한 도살자들이었다. 아니, 전투력만으로 보았을 땐 오히려 더 강했다.
 아침부터 시작되었던 전투는 밤이 될 무렵에야 끝이 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이번에도 루스티아의 패배였다. 루스티아는 일이 잘못될 것 같자 빼어난 부하들을 앞세워 꽁무니가 빠져라 본국으로 도망쳐왔다.
왕궁으로 돌아온 루스티아는 곧바로 알현을 요청했으나, 왕은 두 번이나 번번이 폐하고 돌아온 루스티아를 좋게 봐줄 만큼 인자하지가 않았다.
결국 이틀이나 왕궁의 밖에서 시간을 보낸 루스티아가 왕을 알현하게 되었을 때 왕은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다.
“수고했구나. 루스티아 비제스. 야만부족 따위를 상대로 이렇게나 큰 손실을 내게 남기다니, 네가 왕비의 친척만 아니었다면 당장 유배감이다.”
“존경하는 나의 왕이시여!”
루스티아는 팔을 크게 벌리고 외쳤다.
“그들은 결코 야만부족 따위가 아닙니다. 그들은 용맹하고 강한 전사들이었습니다. 배의 크기나 수적인 면에서 우리는 분명 그들보다 우위에 있었습니다만 패배했습니다. 제게 마법사를 내려주십시오!”
“마법사를?”
왕은 코웃음을 쳤다.
 “제정신인 게냐. 마법사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나 있느냐? 마법사 하나를 키우는데 드는 돈이 대체 얼만지나 알고 있나? 거기다 전투에서 실용가능한 마법사는 극히 한정적이다. 그 같잖은 전투에 소중한 마법사를 내어줄 수는 없다. 너는 이제부터 이 일에서 재명이다. 집으로 돌아가서 너의 어리석음을 진심으로 뉘우치도록 해라.”
“하지만···.”
“듣기 싫다!”
왕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나가버렸고 홀로 남은 루스티아는 하는 수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루스티아의 뒤를 이어 왕이 사령관으로 임명한 남자는 루스티아와는 파벌관계에 있었다. 그는 힐레멘 트루가의 누나인 에슐리아 트루가의 뒷배경중의 하나로 이름은 하젠이라고 했다.
 왕은 하젠에게 루스티아의 집으로 가서 그의 전투경험을 들으라고 명했지만 하젠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미개인들을 상대로 철두철미한 준비를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혹은 그가 승리하여 돌아왔을 때 조금이라도 그 공을 파벌싸움중인 루스티아에게 돌리기 싫은 이유도 있었다.-
하젠은 야심만만한 남자였다. 왕비의 친척인 루스티아가 실패한 일을 자신이 해낸다면 그것은 굉장한 성과일 것이었다. 함마 정복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이제 그곳은 금기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권력의 이양을 의미하게 되었다.
 하젠은 루스티아가 두 번째 출전했을 때보다 조금 더 많은 정도의 군함을 이끌고 출전했다. 야스카산은 전투관이 바뀐 것을 기민하게 눈치 챘고, 처음에 썼던 전략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새로 바뀐 사령관도 역시 똑똑하지는 못했는지 루스티아보다도 더 빨리 함정에 걸려들었고 바다로 뛰어내렸던 전사들이 배에 기름을 붓자 불화살을 쏘아 홀랑 태워버렸다. 루스티아보다 운이 없었던 하젠은 살아 돌아오지도 못했다.
일이 이쯤 되자 궁정은 크게 술렁였다. 왕은 다시 루스티아를 불러들였다. 급히 열린 어전회의에서 루스티아는 열렬히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고 그 결과 몇몇의 찬성을 얻어 네 명의 마법사를 데리고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함마대륙 정벌을 위한 네 번째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밤은 고문의 시간이었다. 달이 풍만한 보름으로 향할수록 아사신의 고통은 극대화되었다.
아사신은 자신이 신부라는 사실이 지금만큼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원망을 지나쳐 끔찍하고 지긋지긋했다. 왜 한 달마다 신부의 의식을 거행했는지, 그것이 왜 의식이라고까지 표현되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신부의 육체란 정기적으로 남자를 먹지 않으면 미쳐버리는 모양이었다.
 “제발······.”
아사신의 발가락이 곱고, 손가락은 시트 위를 배회했다.
 “아, 제발!”
 스스로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아사신은 가슴을 짓누르는 옷을 벗어 던졌다. 아니 찢어버렸다. 그 얇고 보드라운 천은 더 이상 안락하고 기분 좋지 않았다. 그것은 억압시키고 몸을 조여 오는 도구였다. 하늘하늘하게 떨어지는 고급 비단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공중에 흩날렸다.
 “제발, 으···!”
성기가 불타듯 뜨거워졌다. 아사신은 울고 싶었다. 아무리 자위를 해도 만족되어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마 말로는 할 수 없는 곳을 채워주기를 몸이 원하고 있었다.
 또 한 번의 사정이 시작되었다. 오늘 밤에만 이미 세 번째였다. 아사신은 허리가 녹는 것만 같은 감각에 부르르 떨었다.
 지독한 열락의 밤을 보내는 것이 벌써 사흘째였다. 그 전까지는 사정을 하면 잠잠해졌던 몸은 이제는 아무리 달래려고 애를 먹어도 말을 듣질 않았다. 자신의 육체에게 배신당하는 기분이었다.

야스카산은 신의 밀실에 앉아있었다. 오로지 정통한 신의 혈족에게만 그 공간을 내어주는 신성한 밀실 안에 헐떡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들릴 리 없는 소리임에도 그것은 확실하고 분명하게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다.
 야스카산의 눈이 허공을 덧그렸다. 보일 리 없는 모습이건만 그의 눈에는 똑똑히 보여 왔다. 침대 위를 기어 다니는 사지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환영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했다.
‘제발······.’
아사신의 길고 날씬한 다리가 속절없이 허공만 휘저었다.
 ‘제발 나에게······.’
넣어줘-
채워줘-
범해줘-
내게 넣어줘-
‘후아···.’
 숨 막히는 헐떡임. 흐트러진 숨소리. 고통에 겨운 신음소리. 갈증에 시달리는 몸.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괴로운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듣고 있었다. 저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걸 수도 없고, 흔들리는 성기를 어루만져줄 수도 없었다. 그것은 모두 환영이었다.
 야스카산은 그 육체의 뜨거움과 연약함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혀에 손가락에 입술에 육체가 반응하는 모든 움직임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 강탈하고 싶었다. 더 갈취하고 싶었다. 빼앗아올 것이 없다면 마지막까지 쥐어짜서 농락하고 싶었다.
‘어째서 너는 이리도 나를 괴롭히는 거냐!’
야스카산은 신음했다. 머리가 아팠다. 아사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무지개의 그림자를 쫓는 기분이었다.
 이토록 자신을 괴롭히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앞에 있었다면 주먹을 써서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유가 뭔지, 무엇을 위해 떠났는지.
 환영속의 아사신은 눈물을 떨구며 시트위로 널브러지고 있었다. 그가 토정한 욕망의 분출물이 시린 달빛을 받아 어스름하게 빛났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시달려 온 듯 이제는 닦을 힘도 없다는 듯이 아사신은 그대로 기절하듯 잠이 들고 있었다. 얼룩진 눈물자국이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아사신.’
야스카산은 환영에게서 눈을 돌렸다. 고통과 미움이 뒤섞인 이 감정을 스스로 무어라 칭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밖에서 타스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족장.”
나갈 시간이었다.

 쾅---
쿠캉---

마법사들의 화염구가 불길을 일으키며 배를 태웠다. 그들은 강력했다. 한 개의 정예 소대만큼의 몫을 혼자서 해치웠다.
“이쪽을 막아라! 불덩이가 날아온다!”
전사들이 신속하게 배에 붙은 불을 껐지만 하나의 불을 채 끄기도 전에 또 다른 불덩이가 날아들었다.
 “물을 부어라! 모래를 가져와라!”
전사들은 칼을 들고 싸우는 것 보다 날아드는 화염구를 막느라 더 급급했다. 우박처럼 날아드는 그 뜨거운 덩어리에 화상을 입은 전사들이 곳곳에서 신음하며 나동그라졌다.
 “이것이 그 마법인가.”
타스가는 혀를 내둘렀다. 그것은 생각보다 강력한 것이었다.
 앞선 전투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함마의 배는 소르데라에 비해 훨씬 두껍고 단단했다. 소나무를 가공하여 만든 터라 경도가 좋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마법구의 파괴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배가 불꽃을 튀기며 타들어갔다.
 자연과의 친화와 신과의 소통, 치유능력 쪽으로 발달한 그들의 신력은 마법의 위력 앞에 제대로 힘을 못 쓰고 있었다.
 “불길을 잡아라! 신녀들은 북을 쳐라! 쉬지 마라! 치유능력자들을 배의 후면에 모집시켜라!”
타스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배위를 뛰어다녔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사특하고 부정한 것. 신이 버린 땅의 사람들이 신성을 대신하여 끌어들인 것. 그것이 마법이라고 배웠다. 원래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알고 지냈던 그것은 너무도 강력했다.
“족장!”
타스가는 야스카산을 바라보았다. 야스카산은 누각에 서서 이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관망하고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견고한 철옹성처럼 자신의 전사들이 다치고 뒹구는데도 흔들림이 없었다.
 “족장!”
야스카산은 눈을 내리떴다. 타스가가 무어라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제대로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웅웅대는 절대명령이 속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신녀들의 북소리에 맞추어 잠재된 신성이 꿈틀거렸다.
수십, 수백 개의 목소리가 찾는 것은 단 하나.
 단 하나의 목적.
 그것은 신부를 찾는 것.
‘아사신!’
야스카산의 눈은 보지 않고도 보고 있었다. 용암처럼 들끓는 세 번째 눈동자가 흉폭하게 내 달렸다. 성난 폭우처럼 바다를 가로지르고 대륙을 횡단하여 눈동자가 외쳤다. 어디 있냐고, 대체 어디 있느냐고 끊임없이 외쳐 불렀다.
 화려한 성문과 산책하는 사람들의 한가로운 모습이 보였다. 유백색의 대리석과 높은 첨탑도 보였다. 시선은 휘휘 돌아 작은 문을 통과했고 복도를 지나쳤으며 바람이 되어 온 방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다 복도 깊숙이 자리한 방 하나를 발견하고 들이닥쳤다.
침대를 휘는 허리가 보였다. 울고 있는 회색 눈동자가 보였다. 신음하는 목소리.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베개를 떠돌았다. 호흡이 팔에 닿아올 만큼 가까웠다. 저절로 벌어지는 두 무릎이 보였다.
 신부가 거기 있었다.
 시선을 눈치 채지도 못한 채, 고통 속에 울고 있는 아사신이 거기에 있었다. 차마 닿을 수 없고 닿지 못하는 그리운 얼굴이!
‘감히!’
야스카산은 가슴이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거기에 누워있는 것은 작고 연약한 육체였다. 자신을 그리워하는 육체였다. 또한 자신을 거부한 육체였다.
 이토록 거부하고 거부하고 거부하는 남자.
보잘것없고, 초라한 남자. 고통을 주는 남자. 미칠 것 같은 갈망을 일깨우는 남자.
예리한 시선은 털을 세우고 이를 드러냈다. 검은 구석에서 그 모습을 훔쳐보는 한 쌍의 눈이 보였다.
 쥐새끼처럼 음지에 몸을 도사리고 앉아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그 모습을 훔쳐보는 한 쌍의 빛나는 눈동자. 붉게 충혈 된 흰 자. 점점 박동하는 심장. 음습한 욕망.
‘네놈이!’
야스카산은 분노했다. 이성이 흐트러지자 시선은 그곳을 떠나 쏜살같이 되돌아왔다. 이마가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시야가 확장되고 사방은 공간의 개념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인격이 갈라지고 있었다. 내부에서 목소리들이 격렬하게 외치고 있었다. 오로지 하나의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야스카산의 손이 뱃머리를 움켜잡았다. 몸속으로 투지가 들끓었다. 타스가는 깜짝 놀랐다. 화염구가 작열하는 배의 측면으로 갑자기 야스카산이 뛰어내린 것이었다. 불길이 치솟았다.
“족장! 족장! 이런 빌어먹을!”
타스가는 서둘러 방패를 짊어지고 야스카산을 향해 달렸다. 공기마저 불태우며 날아오는 화염 덩어리를 방패로 후려치자 후끈한 감각이 손목을 치고 올라왔다. 루스티아의 배가 가까워질수록 그 위력은 점점 더 강해졌다.
“족장! 위험합니다! 이리 오십시오!”
“비켜라!”
야스카산은 타스가의 손을 뿌리치고 타오르는 눈빛으로 루스티아의 배를 노려보았다. 타스가는 답답했다. 투지만으로 적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은 이만 후퇴하고 차후의 작전을 새로 세워야만 했다.
“후퇴해야 합니다!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후퇴 명령을 내려야만 합니······.”
“아사신!!”
야스카산의 몸 주위로 돌풍이 몰아쳤다. 휘몰아치는 용오름이 물을 머금고 달려들었다. 회오리 기둥이 화염구를 집어삼키자 매캐한 연기가 하늘을 가렸다.
타스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전사들은 불 끄는 것을 잊은 채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하늘의 천장까지 닿을 것 같던 물줄기가 화염구를 향해 돌격하더니 불꽃과 함께 산산이 흩어져버린 것이다.
야스카산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타스가에게 명했다.
 “이때다, 배를 돌진해라.”
“아, 아···네!”
뒤늦게야 제정신을 차린 전사들은 화염구의 공격이 없는 틈을 타 재빨리 배를 돌진시켰다. 넋을 놓고 있던 루스티아도 소리를 지르며 전면으로 나섰다. 두 배가 충돌하자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병사들과 전사들이 모두 칼을 빼어들고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죽여라! 마법사들을 보호해라! 우군부대는 나중을 대비해 후면으로 빠져라!”
야스카산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 넘기며 돌진했다.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명백했다. 적군의 가장 큰 전력인 마법사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야스카산의 의도를 알아챈 루스티아는 방어를 집중시켰다. 한참을 떨어진 거리에서도 그는 야스카산이 발광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는 괴력을 지닌 광인 같았다. 그의 손에 걸리면 살아남는 것이 없었다.
“저 야만인을 배라! 저 야만인을 죽여라!”
루스티아는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목이 잘려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을 타 넘고 새로운 시체가 될 남자들이 부나방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야스카산에게 제대로 대적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야스카산의 몸에는 차마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겁에 질린 병사들은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루스티아의 명령에도 병사들은 주춤거리며 야스카산의 주위를 서투르게 포위하고만 있었다.
 둥- 둥- 둥- 둥-
신녀들의 북소리가 신명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은 전사들은 지칠 줄을 몰랐다. 북소리에는 신성력이 깃들어있어 사기를 돋우고 흥분을 고취시켰다. 그러고 반대로 루스티아의 병사들은 그 소리가 커질수록 두려움을 느꼈다. 고대의 어떠함. 미신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원시의 것이 생생하게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법사를 보호해라!”
루스티아는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야스카산은 마법사들과 지척의 거리였다. 시선이 한 곳으로 고정되고 머릿속의 눈이 그 저주받을 것들이 내뿜는 기에 털을 세우고 으르렁 거렸다.
 부정한 것. 더러운 것.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 신성을 거스른 것. 모든 반대되는 것과 사특한 것들의 집합체. 마법사들.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한 가운데에 모인 검은 망토의 무리들 중 가장 더럽고 저주받을 존재가 고개를 들었다. 청명한 비취빛 눈동자는 투명하고 맑았지만 야스카산의 눈에는 늪처럼 검고 어두워보였다. 한치도 보이지 않는 안개를 위장으로 두른 끝없는 늪과 같은 어떠한 것. 사악한 것이 사냥감을 노리듯 살벌하고 지독한 그 무엇.
 야스카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법사야. 진실을 어지럽히는 것. 사실을 왜곡시키는 것. 신이 버린 땅에서 기생하는 것아. 네 힘의 주인을 인정하고 항복해라. 신의 철퇴에 얻어맞기 전에 그 간악한 것을 버려라.”
 “신의 족장.”
 마법사의 입 꼬리가 느슨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의 눈동자는 붉고 진하게 물들었다.
 “오만한 야스카산. 네 신은 이미 나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 힘의 주인은 마력이니 신이 버린 땅에서 새 생명을 얻은 수많은 귀신들이 이름을 얻고 찬양받을 것이다. 신의 권위는 땅으로 추락하고 결국에는 설 곳을 잃겠구나!”
“네 요망한 입을 닥치게 해주마.”
 야스카산은 살기를 피워 올리며 시위하듯 칼을 치켜들었다. 야스카산의 눈동자도 푸른 눈동자가 타오르듯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들의 주변으로 무시무시한 독기가 안개처럼 뿜어 나왔고 감히 그 주변에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기류가 흘렀다.
 마법사의 혀가 신랄하게 움직였다.
 “신은 죽고 인간이 힘에 대적하는 힘을 얻을지니 그 증거가 우리 마법사들이다. 바람, 불어온다. 구름, 몰려든다. 저자를 죽여라. 신성의 이름을 빌린 자들을 모두 없애버려라!”
 마법사들이 알아듣지 못할 만큼 낮은 목소리로 일제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망토를 흩날렸다.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쿠궁 거리는 소리를 내며 한 점을 향해 몰려들었다. 바람은 부지불식간에 강해져 오더니 곧 큰 배가 출렁일 정도로 휘몰아쳤다.
 마법사들의 혀가 뱀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이제는 모두의 목소리가 합해져 노랫소리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음산하고 무도한 소리였다. 자식이 죽은 어미들의 흐느낌과도 같고 해저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 같기도 했다. 전사들은 신음하며 귀를 막았다. 신녀들의 북소리도 마법사들의 노랫소리에 밀려 바람 속에 흩어졌다.
 야스카산의 머리카락이 허공을 나돌았다. 그가 칼을 휘두르는 대로 바람이 비명을 지르며 베여나갔다. 신성력의 본질과도 같은 야스카산의 푸른 기와 마법사들의 검붉은 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법사의 손이 바람을 지휘하자 야스카산의 주변으로 바람은 칼날처럼 휘몰아쳤다. 그것은 야스카산의 옷자락을 찢어발기고 상처를 입혀 피를 보이고야 말았다.
 신의 피를 먹은 바람이 산산이 깨어지며 틈이 생기자 그 사이로 몸을 날린 야스카산이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나오는 노성을 질렀다.
 “나를 방해하면 전부 죽는다!”
야스카산의 소리가 보이지 않는 방패처럼 마법을 갈랐다. 소용돌이치던 먹구름이 일순간에 흩어지고 바람과 물결은 다시 잔잔해졌다. 순간의 쥐죽은 듯한 침묵 사이로 신녀들의 북소리가 둥둥 소리를 내며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독기에 감염됐던 전사들도, 루스티아의 병사들도 모두 넋을 놓아버렸다. 북소리의 둔중한 울림 가운데 야스카산은 서두르지 않고 뚜벅뚜벅 마법사들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마법이 깨져버린 것에 마법사는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뜨고 무방비 상태에 놓였다. 그런 마법사의 볼을 손가락으로 한번 부드럽게 쓸어내린 야스카산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원래 없던 것을 만들어낸 가증한 것아. 네 힘의 본위를 반납하고 먼지로 돌아가라. 그것만이 네 저주받은 영혼을 구하는 길일 것이다.”
 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검은 망토가 무겁게 처졌다.
 검은 피가, 갑판 위로 주르르 흘렀다.
 “마법사가!!”
루스티아는 비명을 질렀다.
 천천히, 마법사가 배에 칼을 꽂고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그가 무너지는 자리는 환한 아침 햇살 아래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검었다. 그림자도 가리지 못할 어둠이 산산이 비꾸러져 내렸다.
야스카산이 잘게 경련하는 마법사의 육체를 짓이겼다. 피는 야스카산의 발치를 피해 진하고 둥글게 퍼져나갔다.
 야스카산은 진심으로 기쁘게 웃어보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루스티아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귀족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패배가 네 명의 마법사까지 동원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것이라 더욱 놀라웠다. 어전회의가 소집되고 귀족들은 앞을 다투어 루스티아 가문을 욕하기 시작했다.
 “야만인들을 상대로 자꾸 패배하기만 하다니 우리 군의 위상이 의심스럽습니다.”
상원귀족들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자 하원귀족들과 지방귀족들도 눈치를 보다 불만을 토해냈다.
“그렇습니다. 마법사를 하나 전투에서 실용 가능하게 키우는데 드는 돈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합니다. 상원귀족의 봉급과 맞먹습니다. 어떨 때는 중앙귀족의 봉급과도 맞먹을 때도 있습니다. 소질 있는 자도 극히 드뭅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키운 마법사들을 넷이나 잃었습니다. 막대한 손실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땅에 떨어진 우리 수군의 사기와 명예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의 연합국들이 잇따른 패전소식에 동요하고 있습니다. 이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까?”
“루스티아님의 집안에서 이번 국고 손실을 보충해주셔야 겠습니다.”
“우리가 왜요? 우린 이번에 가장을 잃었다고요!”
이제는 미망인이 된 비제스 부인이 표독스럽게 외쳤다. 그녀는 여기에 참관인 자격으로 출석해 있었다.
“혼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면 우리에겐 돈이 필요해요. 저는 한 푼도 내어줄 수 없어요!”
“재혼을 하시면 되잖소. 부인. 죽은 남편에 대한 의리 따위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없어져버릴게 아니오.”
“국가영웅의 부인에게 못하는 말이 없군요!”
“도도한척 굴지 마시오! 그 재산. 세금 명목으로 제법 반환해야 할 거니까!”
“우리 남편은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손실은 어쩌라는 겁니까?”
귀족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앙 귀족은 상원귀족에게, 상원귀족은 하원귀족에게, 하원귀족은 지방귀족에게로 책임을 전가시켰다.
 여기저기서 싸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책상을 치는 소리, 고함을 지르는 소리도 갈수록 맹렬해졌다.
 회의실의 숨겨진 틈 사이 아무도 모르는 비밀 방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한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에슐리아의 루비같은 눈동자는 귀족들에 대한 경멸로 가득했다.
 “탁상공론. 책임전가. 이 나라 귀족이란 것들이 할 줄 아는 것의 전부지.”
 쌀쌀맞게 중얼거린 에슐리아는 긴 옷자락을 그러쥐고 바람을 일으키며 방을 나섰다. 들으나 마나한 귀족들의 회의는 더 이상 무가치했다.
그 뒤를 따르며 힐레멘이 말했다.
“생각보다 고전하는 모양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을 해도 안 듣더니 제 스스로를 옭아맨 꼴이지.”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 했습니다.”
“우리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키기엔 차라리 이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아직은요. 무엇보다 아사신의 건강이 요즘 무척 나쁘다더군요.”
 에슐리아는 혀를 찼다.
 “그 남자가 정말 신부긴 한 게냐? 남자를 신부랍시고 데려온 것부터가 나는 영 기분도 나쁘고 꺼림칙하구나.”
 “믿으세요. 누님.”
 힐레멘은 활짝 웃어보였다.
“제가 하는 일에 실수가 있던가요? 누님은 저만 믿고 기다리시면 돼요. 말이 나온 김에 오랜만에 아사신에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알았다.”
에슐리아가 복도 맞은편으로 사라지자 힐레멘은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사라져가는 에슐리아의 등은 완벽하게 곧았고 몹시 딱딱해 보였다. 그 등에 업힌 것은 여성으로서는 지나치게 큰 권욕과 이상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녀의 등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차가운 철벽처럼 단단해지고 있었다.
 에슐리아는 자랑스러운 누나였다. 그 환경을 딛고 여기까지 끌어온 여성이었다.
 힐레멘은 에슐리아에게 복종해야했다. 그리고 그것을 진심으로 바랬다.
잡념에 잠겼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아사신의 방 앞에 도착해있었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려고 하자 잠겨있었다. 몇 번 손잡이를 흔들던 힐레멘은 방의 주인이 열어줄 생각이 없자 브로치를 이용해 쉽게 문을 열었다. 끼이- 하는 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아사신. 자고 있나요?”
 힐레멘이 문을 열자 마른 몸이 이불속으로 숨어드는 것이 보였다.
 “아직 잠자리에 들기엔 이르지 않나요? 우리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미소 지으며 다가가던 힐레멘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그의 눈동자는 바르르 떨리는 이불자락과 그 사이로 삐져나온 손가락을 예리하게 주시했다. 마른 손톱은 영양분이 없어 끝이 갈라지고 깨져있었다.
 ‘건강이 나쁘다는 건 진짠가 보군.’
 “좀···몸이 좋지 않아요!”
 탁하게 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아요? 우리 상당히 오랫동안 보지 못했죠? 얼굴 좀 보여주세요.”
“그냥 많이 아파요. 몸살인거 같아요. 이만 나가줘요. 전 좀 자야겠어요.”
힐레멘의 손이 이불을 잡았다. 힘을 주어 끌어당겨도 놓아주지 않았다. 힐레멘은 부드럽게 몇 번 더 이불을 당겨보았다. 끈질기고도 부드러운 강요에 아사신의 손가락에서도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소년처럼 마른 몸이 드러났다. 눈물이 가득고인 부드러운 회색눈동자가 힐레멘을 올려다보았다.
 “몸이 이상해요.”
“아사신.”
힐레멘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사신은 몹시 말라있었다. 기껏 채워놓은 살이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처럼 다시 빼빼 마르고 볼품이 없어졌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온 듯 두 눈은 검게 변질돼 있었고 피부도 거칠었다.
 그럼에도,
눈을 뗄 수가 없는 기이한 매력이 있었다.
순한 어린 양처럼 뜨거운 눈물을 흘러내리는 회색 눈동자가 깊고 진해졌다.
불거져 나온 유두의 끝은 윤기가 흘렀고 딱딱한 윤곽의 배와 흘러내린 상의로 비밀한 부분으로 가리는 곳은 불길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몸이···.”
힐레멘은 헛기침을 했다.
“몸이 어떻게 안 좋나요?”
 아사신은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흐트러진 무릎과 손이 엉기성기 모여 스스로의 몸을 감싸 안았다.
 무방비한 어린아이처럼, 생기를 잃은 들풀처럼 고개를 수그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몸짓을 했다.
 “달이 떴나요?”
아사신의 중얼거림에 힐레멘은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다. 별빛을 흐리며 달이 산등성이너머로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아사신?”
힐레멘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갔다. 작게 몸을 말고 미세하게 경련하는 등을 축축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냥 보고만 있을 뿐인데도 이상한 분위기에 들떠버렸다.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떨리는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주춤했다.
 아사신은 진해져오는 달빛을 피해 이불 속으로 기어들며 말했다.
“나가요.”
“하지만 아파보이는 데요.”
힐레멘은 저도 모르게 변명조로 중얼거렸다.
 “나가요 힐레멘. 어서, 내가 이성을 잃기 전에!”
 아사신의 등이 급격하게 휘어졌다. 허공에 멈춘 상태였던 힐레멘의 손이 아사신의 등을 감쌌다. 뜨거움. 뜨거운 피부의 온도.
 힐레멘의 숨소리에 습기가 차올랐다. 당황스러울 만큼 온도가 상승했다. 등줄기를 따라 미끄러지는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아사신의 몸이 굳어졌다. 그것을 알아챘음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이렇게 자제력이 없었나 의심이 갈 정도였다. 정신이 혼몽해져왔다.
 “나가요!”
아사신이 한 번 더 세게 소리쳤다. 힐레멘의 얼굴은 갈등과 이성사이에 방황하며 흉하게 일그러졌다. 손 안에 들러붙어오는 살의 감촉과 이성 사이에서 방황하는 얼굴이었다.
 아사신이 노려보는 가운데 힐레멘은 점점 뒷걸음을 치다 그대로 악몽을 피해 도망치는 아이처럼 달려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자 아사신은 참았던 울음을 와락 터트렸다. 몸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었다.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이 몸을 달래줄 사람은 힐레멘이 아니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사람은 야스카산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사신은 고개를 파묻었다. 비참함에 죽어버리고 싶었다.

소르데라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루스티아의 이후로 출전한 귀족들이 연일 패배하여 돌아왔다.
 살아 돌아온 그들은 하나같이 같은 말을 했다.
족장의 눈을 마주하면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족장의 앞에서는 마법사들이 힘을 주지 못한다.
족장은 마치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무섭다-.
날마다 회의는 열렸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나타나주지 않았다.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이미 오래된 불문율을 깨버린 후였다. 그런 만큼 적어도 어느 정도의 성과는 보여야 하는 것이었다. 불문율을 깼음에도 뚜렷한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 이렇게 시시하게 끝내기엔 대외적으로 곤란했다.
 좀 더 많은 마법사들을 데려갈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 왔지만 마법사들은 무척이나 귀한 존재였다. 마법사가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좌우될 정도였다. 이 지지부진한 싸움을 위해 마법사들을 내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느라 힘을 빼는 사이 야스카산은 착착 진군하고 있었다. 싸움의 판도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뱀처럼 하루는 우세했다가 하루는 불리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야스카산의 우세인 쪽이 더 길었다. 정벌전쟁이 이제는 방어전쟁으로 성향이 바뀌고 있었다. 아니, 이미 그들의 해안 경계선은 이미 위험했다.
 전사들은 수중에서도 지상에서와 같이 날렵하게 움직였다. 그들이 쓰는 방법을 따라 소르데라의 병사들 중에 잠수를 잘 하는 사람을 선발하여 물속에서 침투해가도록 하자 야스카산은 바다에 기름을 부어 불을 질러버렸다. 수백 명의 병사들이 불에 타 죽거나 물을 먹고 수장 당했다.
야스카산은 영리했다. 그는 천부적으로 싸우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한번 썼던 전력은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고 적을 도발할 줄 알았으며 자신이 썼던 전법을 그대로 따라하는 둔한 소르데라인들을 마음껏 비웃었다.
 그들의 척후선은 노 젓는 소리도 내지 않고 다녔고, 그들의 전사들은 비명소리 하나 새어나가지 않게 인간을 살해했다.
 전쟁은 생각보다 길어지기 시작했고 귀족들은 슬금슬금 평화조약을 다시 쓰자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연달아 당하는 참패에 분노의 소리를 냈고 동맹국들의 눈치도 쌀쌀하게 변해있었다. 어제의 동맹이 오늘의 적으로 돌아서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었다.
 이 전쟁의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몇몇 중앙귀족들은 왕에게 이제 그만하자고 진언했다. 생각보다 야만족들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마법도 그의 앞에서는 힘을 잃었다. 그들이 그렇게 찾는 신부라는 볼품없는 남자 하나를 돌려보내고 이 전쟁을 끝내자고 간곡하게 진언했다. 그러나 왕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무렵의 왕은 약간 행동이 이상했다. 밤이면 문을 걸어 잠그고 오랜 시간동안 나오지를 않았다. 아무리 밖에서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회의 중에도 시선이 몽롱하고 정신이 없어보였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야스카산은 계속 진군하여 올라왔다. 중간 중간 바다에 이어진 작은 섬들을 기지로 쓰며 그들은 꾸준히 북상했다.
 마침내 소르데라의 수군이 방어하던 가장 최남단의 작은 마을 하나를 빼앗기자 귀족들은 이성을 잃었다.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서 이 전쟁을 끝내자고 입을 모았다. 마라꽃이 있으면 얼마나 부강해질 것인지도 중요했지만 부강해지려면 나라가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소르데라는 그렇게 큰 나라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이웃의 제후들이 이 틈을 타서 내려오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지금은 야만 부족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웃나라의 정세도 시시때때로 바뀌고 있었다.
 “절대 관둘 수는 없습니다.”
에슐리아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여기서 그만둘 거면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웃나라요? 지금 평화조약을 맺으면 외려 꼴이 우스워집니다. 좀 더 싸워야 합니다. 이럴 시간이 있으면 밖에 나가서 그 야만인들을 쳐부술 생각이나 하세요!”
“하지만 레이디 에슐리아.”
“나가요! 반론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에슐리아는 자신의 방에 우르르 몰려온 귀족들을 내쫓고 문을 닫아버렸다. 한쪽만 드러난 하얀 어깨가 분노로 발갛게 물들었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에슐리아는 이를 꼭 깨물었다.
‘어떻게 만든 기횐데.’
길고 둥글게 손질된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에슐리아는 상관하지 않았다. 금을 갈아다 발라 놓은 듯한 머리카락도 마구잡이로 흐트러뜨렸다. 그러고도 분에 못 이겨 발을 한번 쿵하고 굴렀다.
 “진정하세요. 누님.”
침실의 휘장 안에 숨어있던 힐레멘이 나오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너는 분하지도 않느냐!”
“저는 놀라울 따름입니다. 마법사들이 있는데도 패할 줄은 몰랐거든요. 그 후로도 계속 고전을 면치 못할 줄도 말입니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
“진정하세요. 고운 이마가 망가집니다. 주름을 펴기 위해 그 많은 돈을 쓰는데 이런 일로 망가뜨리면 아깝잖아요.”
힐레멘이 빙글 웃으며 에슐리아의 미간을 꼼꼼하게 펴주었다. 에슐리아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걱정 마세요 누님. 마지막 카드는 우리에게 있으니까요.”
힐레멘은 그녀의 앞에 무릎 꿇으며 손등에 입 맞추었다.
 “제가 당신 편인 거 아시잖아요.”
힐레멘의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늘 방긋거리는 얼굴이지만 그 속에 감추어진 진한 고독을 눈치 채지 못할 에슐리아가 아니었다. 에슐리아는 남동생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인형처럼 아름다운 얼굴. 그 얼굴을 쏙 빼닮은 힐레멘. 아름다운 두 남녀가 서로의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 험한 날들도 헤쳐 온 우리잖니.”
“저보다는 누님이 더 고생이 많았지요.”
“이제 곧이다. 이제 곧이야.”
에슐리아는 힐레멘의 얼굴을 감싸고 앞뒤로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힐레멘은 눈을 감고 그 리듬을 느꼈다.
먼 옛날 다정한 누이가 잠들지 못하는 밤에 그래주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8




에슬라 에스트라가 힐레 에스트라를 낳은 것은 그녀가 열세 살 되던 해의 일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녀의 친부로 에슐리아는 자신의 친부에게 강간당했다.
 열두 살의 에슐리아는 임신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자신이 임신한 것도 알지 못했고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 유산시킬 수도 없었다.
 에슐리아의 아버지는 무척 잘생긴 남자였다. 젊은 날에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시나 노래 따위를 하며 여자들에게 빌붙어 살다가 나이가 들자 정착할 곳이 필요해졌고 잘생긴 외모를 이용해 귀족의 딸과 결혼할 결심을 했다. 물론 집도 없는 자신이 제대로 된 귀족집안의 영양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무작정 시골을 돌아다니며 만만한 처녀를 고르기 시작했고 그 결과 작은 유산을 남기고 죽은 시골귀족의 무남독녀와 연애결혼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처녀의 보호자는 아무런 힘이 없는 늙은 유모뿐이었고 근방에선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외모의 남자에게 처녀는 몸도 마음도 잔뜩 내줘버리고는 곧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생활이 원만했을 리는 없었다. 순진한 처녀를 꾀어내 결혼에 성공하자 남자는 본색을 드러냈고 흥청망청 재산을 탕진하기 시작했다. 아내 앞으로 남겨져있던 돈과 영지는 채 5년도 되기 전에 계집질과 노름질을 하느라 모두 날려먹었다. 병약하고 섬세했던 아내는 딸아이를 낳은 후 시름시름 앓다가 곧 죽어버렸다. 남자는 아내를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재산을 손에 넣은 이상 아내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기의 이름은 늙은 유모가 지어주었다. 유모는 아기 어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 아기를 에슬라라고 불렀다. 아기는 아버지를 닮아 고집스러운 턱 선과 붉은 눈동자를 지녔고 어머니를 닮아 우아한 금발과 매력적인 눈매를 지녔다. 어떤 아이는 부모의 못난 부분만을 닮아서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에슬라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부모의 아름다운 부분만을 골라서 태어났다. 근방의 어디에서고 그녀만큼 빛나는 금발과 새빨간 붉은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아무도 없었다.
“넌 우리 에스트라 가문의 보석이야.”
에슬라가 점점 아름답게 자라나자 에슬라의 아버지는 그녀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귀여운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너무 사랑해서 임신시켜 버릴 정도로.

깊은 밤. 곤하게 잠들어있던 에슬라는 문득 이상한 감촉에 눈을 떴다. 그러자 거기에는 자신의 몸 위로 기어 올라온 아버지가 있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에슬라의 도톰한 입술을 아버지는 느릿하게 눌렀다.
“쉿, 우리 아가씨. 아빠가 상을 줄게.”
“상이요?”
에슬라는 부들부들 떨면서 되물었다. 그날 밤의 아버지는 이상했다.
 “그래, 상. 이건 네가 너무 예뻐서 주는 아빠의 상이야.”
아버지의 손가락이 아직 제대로 여물지 못한 에슬라의 봉긋한 가슴을 어루만졌다. 에슬라는 몸을 뒤틀었다. 아버지의 이러는 모습이 이상했다.
 “정말 예쁘구나. 에슬라.”
아버지는 감탄하며 이번에는 에슬라의 부끄러운 곳을 들춰냈다. 낡은 잠옷이 밀려올라가자 에슬라는 불안해졌다.
“이러지···마세요.”
“상이라니까.”
가슴을 밀쳐내는 에슐리아의 통통한 손가락이 단단히 깍지 끼워져 위로 그러 모였다. 단단한 남성이 고개를 치켜들고 에슐리아의 다리사이로 기어들어왔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린 에슬라는 다리사이가 몹시 뜨겁다고 느꼈다. 끼익- 끼익- 낡은 침대가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아직 미성숙한 살을 벌리고 쿵쿵 맥박 치는 거대한 성기가 내부로 들이닥쳤다. 앓는 듯한 숨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꼭 맞잡힌 손가락 사이로 식은땀이 흘렀다. 반복적이고 지루한 동작이 다리 사이에서 일어났다. 하얗게 탈색된 시야에 아버지의 높이 쳐들린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최신 유행의 옷차림을 깔끔하게 입고 있던 아버지였다. 볼썽사납게 엉덩이가 훌렁 벗겨진 채 열심히 앞으로 뒤로 움직이는 모습이 우스웠다.
 끽- 끼익- 끼익-
에슬라는 무서웠다.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입술을 가까스로 깨물었다. 내장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후끈한 열이 둔통과 함께 다리사이를 타고 퍼졌다.
 강하고 깊게 아버지가 에슬라의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몸속이 젖어드는 질척한 감각이 느껴졌다. 한참을 잘게 부르르 몸을 떤 아버지의 하체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여린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오- 에슬라! 에슬라!”
에슬라는 충격에 빠져 천정만 올려다보았다. 끼익거리던 낡은 침대가 움직이는 시끄러운 소리가 드디어 멈췄다. 그녀의 예민한 코가 피비린내를 맞았다. 그것은 자신의 하체에서 흐르고 있었다.
“잘했다. 정말 잘 참는구나.”
무엇을?
에슬라의 작은 머리는 혼란에 빠졌다. 그녀는 이 행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상이 아니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부끄러운 행위’ 였으며, ‘몹시 나쁜’ 것이었다. 그것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행위가 끝나자 아버지는 에슬라의 하체를 닦아주었다. 그는 에슬라의 피를 핥아먹기까지 했다. 첫 남자를 겪었다는 증거를 그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네가 갓난아기였을 때는 이렇게 자주 해주었었단다.”
아버지는 에슬라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어머니가 없던 에슬라는 제대로 된 성교육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늙은 유모도 에슬라의 성교육에 특별히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녀는 조금씩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몸에 비례한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녀가 겪은 첫 번째 성은 이리도 비틀리고 두려운 형태였다.
 아버지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그녀를 찾아왔다. 에슬라의 아래쪽은 염증으로 부어올랐다. 너무도 아파서 용변을 보는데도 피가 나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참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에슬라의 어린아이다운 허벅지와 볼록한 뱃살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아니 집착했다. 그래서 그녀의 배에 점점 더 살이 붙자 무척 기뻐했다. 다른 곳은 점점 더 살이 빠져만 가는데 유달리 배에만 살이 쪘지만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에슬라의 이상을 처음 눈치 챈 것은 늙은 유모였다.
 그녀는 에슬라가 헛구역질을 하며 음식을 먹어내지 못하자 의심하기 시작했고 몇 달 후 동그랗게 부른 배를 보고 서둘러 산파할멈에게로 데려갔다. 할멈은 에슬라의 배를 만져보더니 끌끌 혀를 찼다.
“임신이군. 그것도 이미 6개월은 됐겠어. 어쩔 거야? 산모가 너무 어려서 유산도 못 시켜.”
에슬라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에슬라가 임신한 것을 안 아버지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에슬라가 생리를 시작한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소아성욕 자였다.
에슬라는 자신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그녀와 아이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에슬라는 언덕에서 구르고 돌로 배를 내리치고 유산을 시켜준다는 약도 먹었다. 마을 사람들은 에슬라가 유령처럼 밤중에 언덕을 구르는것을 보고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아이를 죽이려고 했다. 어떻게든 이 더러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죽여야만 했다. 그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는 악착같이 버텨냈다. 그 어린생명은 무척이나 살고 싶어 했다.
 “제발 죽어주렴.”
에슬라는 주문처럼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다른 엄마들이 아이에게 사랑을 속삭일 때 에슐리아는 저주를 내렸다. 죽어줘. 제발 죽어서 나와 줘.
에슬라는 눈을 뜨면 매일을 공포와 싸워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속에 든 것이 사람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끔찍했다. 한때는 총기로 가득했던 그녀의 붉은 눈은 텅 비어 버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작은 마음은 갈가리 찢어지고 파괴당했다. 이것은 ‘잘못된 일’ 정도가 아니었다.
아기는 팔 개월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태어났다. 지독한 난산이었다. 에슬라는 삼일 간 사경을 헤맸다. 비밀스러운 출산이었고 산파할멈 하나만이 출산을 도왔다. 그녀는 열세 살의 나이에 출산을 했다.
 아기와 어미의 아버지는 같았다.
“내게 아들을 낳아주었군!”
에슬라의 아버지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는 에슬라가 태어났을 때와는 정 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끊임없는 유산시도 덕에 채 달수를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아기는 쪼글쪼글하고 굉장히 못생겼었다. 그런데도 그는 예쁘다고 안아주고 달래주며 손수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하마터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할뻔 했던 아기는 힐레라는 이름이 생겼다. 빛나다는 뜻의 고어였다.
 힐레는 에슬라의 동생으로 알려졌다. 사람들은 그가 예전에 건드렸던 여자가 아이를 낳자 떠맡긴 모양이라고 수군거렸다.
그토록 저주하던 생명이었지만 에슬라는 막상 아이가 태어나자 애정을 가질 수 있었다. 태어나기 전에는 죽어달라고 간절히 빌었었지만 막상 아이를 안아보자 빈약한 모성이 움직인 모양이었다. 에슬라는 힐레를 느리지만 조금씩 사랑하게 되었다.
 에슬라는 천성적으로 강인한 성격이었다. 비록 지금은 전락했지만 그녀의 피 속에는 오만하고 도도한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강간과 출산으로 이어지던 채찍 같던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몇 년 만 지나면 결혼 적령기가 다가오는 시기였다. 주변의 처녀들은 모두 단장을 하고 미래의 남편감을 찾기 위해 분주히 물밑작업을 펼치고 있었다.
 그녀들의 지참금. 그녀들의 집안. 그녀들의 외모. 외모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에슬라는 처녀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혹까지 하나 더 붙은 격이었다. 어린 힐레를 두고 시집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전에 아버지가 자신을 놓아줄지도 의문이었다. 그는 에슬라에게 병적으로 집착했다. 젊었을 때 지나치게 방탕하게 놀았던 대가인지 그는 늙을수록 초라해졌다. 매력적인 눈웃음치던 눈가는 추하게 늘어졌고 돈이 떨어지면서 곳곳에 가난이 물들었다. 젊을 때는 귀부인들이 찾아와서 그와 밤을 즐기는 대가를 지불했지만 이제는 그가 대가를 지불해야할 지경이 되었다.
 쓰러져가는 집안에서 이제 내다팔 수 있는 것들은 이제 거의 없었다. 아무도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에슬라가 일을 해야 했다. 그녀는 바느질을 했고 손바닥만 한 경작지를 갈았다.
 늙은 유모도 죽어버리자 아이를 돌보는 몫도 그녀에게 돌아왔다. 밤에는 아버지에게 몸도 내주어야했다. 피로와 가난이 더해질수록 그녀의 가슴은 돌처럼 단단해져갔다. 따스한 봄도 훈훈한 여름도 경작의 가을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은 늘 꽝꽝 얼어붙은 겨울이었다. 아버지에게 몸을 내주는 것도 일상의 하나가 되었다. 더 이상은 분노도 슬픔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인지 더 이상의 임신은 없었다. 아마 너무도 미숙한 몸으로 아이를 낳느라 몸의 어딘가가 망가진 모양이었다.
 임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자 에슬라의 마지막 온기는 철저하게 부서졌다. 시집을 간다 해도 곧 이혼당할 팔자인 것이다. 비밀스럽게 간직하던 마지막 보루가 망가지자 그녀는 더욱 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는 병이 들었다. 그는 간이 나빴다. 눈에는 황달이 끼고 얼굴도 노랗게 올랐다. 복수가 차오는지 배도 나왔다.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가 이번겨울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틀렸다. 아버지는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사람들은 에슬라를 두고 수군거렸다. 한때는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워 누구보다 훌륭한 혼처를 가질 수도 있던 소녀였지만 이제는 노처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모두들 그녀를 보며 혀를 찼다. 에슬라는 그 혀 차는 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힐레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아버지는 힐레를 에슬라를 사랑했던 것처럼 사랑했다. 에슬라는 힐레를 두고 일을 나가기가 걱정스러웠지만 따로 돌봐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애써 스스로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어느 밤. 왠지 잠이 오지 않던 그 이상한 밤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에슬라는 벌떡 일어났다. 조급함에 쫓겨 아이의 방으로 뛰어갔으나 힐레는 보이지 않았고 에슬라는 직감적으로 아버지의 방으로 쫓아들었다.
 여자의 예감이란 때때로 무서울 만큼 정확한 법이었다. 그곳에서 에슬라가 본 것은 반쯤 나체로 엎드려있는 힐레와 아이의 작은 엉덩이 사이에 자신의 성기를 갖다 부치고 있던 아버지였다.
 그녀는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들어 아버지의 머리를 부지깽이로 내리쳤다.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뼈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어 올랐다.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아버지의 몸에 올라타 고함을 지르며 목을 졸랐다. 추악한 병든 몸뚱이를 이성을 잃고 내리찍었다.
마침내 그 몸이 마지막 경련을 하며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때에야 에슐리아는 정신을 차렸다. 땀으로 젖은 시야에 그녀의 여덟 살배기 아들이 친모가 친부를 살해하는 과정을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에슬라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시체가 된 아버지를 텃밭으로 끌고나갔다. 그리고 제대로 풀이 자라지 않는 음지에다가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비료를 온 밭에다 뿌렸다. 시체가 썩는 내를 더러운 비료내로 무마시켜야만 했다.
 집으로 돌아온 에슬라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어머니의 유품을 뒤졌다. 이미 돈 될 만한 것은 팔아 넘긴지 오래였지만 일기장이라던가, 가문의 증표와 같은 것들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트루가 가문이 하원귀족의 친척뻘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에슬라는 무작정 수도로 상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초라한 상경이었다. 그 당시의 에슬라의 모습은 아무리 잘 봐주어도 무지한 시골처녀 이상으로 봐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먹을 것과 숙박비를 마련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두세 명의 남자에게 몸도 팔았다. 그녀가 몸을 파는 동안 힐레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등을 돌리고 귀를 막고 앉아 있어야 했다.
 고생 고생하여 수도에 도착했지만 친척들은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 네 번째로 방문한 친척이 어머니의 이종사촌인 트루가 부인이었다.
어머니의 일기장과 유품을 보여주자 어릴 적 어머니의 소꿉친구였던 부인은 에슐리아를 문전박대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따뜻한 환대를 해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에슐리아를 받아주었다.
“일 년을 주마.”
부인이 말했다.
“일 년 내로 괜찮은 남자를 물어오지 못한다면 넌 다시 네 시골 땅으로 돌아가서 무지랭이처럼 살아야 할 게다.”
“전 임신할 수 없어요.”
에슬라는 공포에 질려 모든 것을 말했다. 힐레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까지도. 다 듣고 난 부인은 냉정하게 말했다.
“넌 좀 더 영악해질 필요가 있어. 세상에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 남자들도 많단다. 나는 남자를 물으라고 했지 신랑감을 물어 오라고 한 게 아니란다. 에슬라.”
부인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하는 일을 말해줄까? 나는 고급 창부란다.”
부인은 에슬라의 모든 것을 못마땅해 했다. 그녀는 전혀 교육받지 못했으며 관리 받지도 못했다. 화창한 햇빛아래 거울 앞에 선 에슬라는 신음을 삼켰다. 거기에는 오랜 시간 일을 해오느라 굵은 뼈대를 지닌 피로하고 푸석푸석해 보이는 노처녀가 서 있었다.
 “아아-!”
에슬라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신음했다.
“너무 못생겼어.”
“천만해.”
부인이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내 눈은 정확해. 네게 가능성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너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거야.”
“트루가 부인.”
“그러려면 출산 후 늘어진 네 허리부터 어떻게 해야겠구나.”
에슬라는 일 년간 미친 듯이 몸을 만들었다. 부인은 그녀의 볼에 돋아난 주근깨를 없애느라 처음 6개월간은 햇빛도 보지 못하게 했다. 소젖에다가 귀한 꿀을 섞어서 얼굴에 발랐고 안마사를 불러서 땅땅해진 근육을 풀어놓았다. 몇 달이 지나자 그녀의 피부는 본래의 백옥같이 하얀 것으로 바뀌었다. 마구잡이로 묶어 올렸던 금발 머리도 화사하게 윤이 났고 붉은 눈동자도 소녀시절처럼 반짝이게 되었다.
그 정도로는 트루가 부인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녀는 매일 밤 그녀를 발가벗기고 그녀의 육체에 늘어지거나 손상된 곳은 없는지 감시했다. 에슐리아가 보기에는 완벽한 곳도 부인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여기도, 여기도, 여기도! 식사를 줄여. 좀 더 운동해라. 도대체 네가 돼진지 사람인지 분간 할 수가 없구나.”
“글자를 배우는 게 이렇게 더뎌서야 언제나 돼야 역사를 공부할 수 있겠니. 살다 살다 너처럼 둔한 것은 처음 본다.”“햇빛을 정면으로 받지 말라고 했잖아! 기껏 만들어놓은 피부에 흠을 지울 생각이냐?”
“하지만 부인.”
“네 아들과 만나는 시간을 더 줄여줄까?”
부인은 싸늘하게 말했다. 에슬라는 이 집에 온 후로 저녁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힐레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것도 그녀가 그날의 숙제를 모두 완벽하게 끝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부인의 말에 에슬라는 입을 다물었다.
에슬라는 무척 바빴다. 몸매를 유지하고 공부를 했으며 그와 동시에 방중술도 익혀야 했다. 그녀의 잠자리 선생 역시 트루가 부인이었다.
부인은 에슬라의 육체를 개화시켰다. 에슬라는 그 전까지 쾌락을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 있어 남과 잔다는 것은 잠깐 다리를 벌려주고 참아내는 것이었다. 자신의 육체가 온 세포가 이토록 환희에 찰 수 있다는 것을 에슬라는 트루가 부인의 손가락을 통해서야 처음 경험할 수 있었다.
 에슬라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자 트루가 부인은 말을 못하는 노예 하나를 붙여 주었다. 노예를 상대로 에슬라는 다양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약속한 일 년이 되자 에슬라는 완벽한 숙녀가 되어 있었다. 도도하고 오만한 붉은 눈동자는 아무 상처도 없는 것처럼 무구했고 살짝 치켜 들린 턱에는 가난의 흔적을 찾을 수가 않았다.
 “골격이 좀 크긴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먹힐 거야. 요 근방에선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타입이니까. 너의 벌어진 어깨는 너를 여왕처럼 보이게 할 게다. 그러니 주눅 따위 들지 말고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걸으렴.”
 트루가 부인이 미소 지었다. 에슬라가 처음 보는 미소였다.
 “이름도 고쳐야겠다. 에슬라라는 이름은 이제 버리렴. 너는 새로 태어난 거야. 에슐리아 트루가로.”
에슐리아가 된 에슬라는 방긋 웃었다. 고개를 반쯤 숙이고 새침하게 미소 짓는 방법은 트루가 부인이 가르쳐준 것이었다.
“일 년. 정말 잘 참았다. 내일 너를 나의 단골손님이었던 빌리치 하원귀족 나리께 보내주마. 그 남자를 만족시키고 다음 약속도 받아와라. 그러면 네 아들과의 시간을 하루 통째로 주마.”
“완벽하게 해보이겠어요.”
에슐리아는 호언장담했다.
빌리치 하원귀족과의 잠자리는 고급 창부로서의 데뷔무대였다. 거기서 에슐리아에게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몹시 만족하여 에슐리아에게서 다음번 약속도 받아냈고 그 대가로 보석도 따로 쥐어주었다. 단 반나절의 시간을 보내 준 대가로 받은 돈은 어마어마했다. 그녀는 자신의 값어치를 알게 되었다.
 성공의 대가는 또 있었다. 에슐리아는 일 년 만에 자신의 아들을 껴안아주고 자장가를 불러줄 수가 있었다. 아들은 자신의 마지막 양심이자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자신이 아들이기에 사랑하는 것인지 사랑해야 한다고 느껴서 사랑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트루가 부인은 에슐리아가 과거에 몸을 팔았던 전적이 있는 것에 분노했다. 그녀는 새빨갛게 생채기가 나도록 에슐리아의 뺨을 때렸다.
“그런 중요한 것을 지금에야 말하다니! 당장 인상착의를 말해. 찾아내서 죽여야겠어.”
“찾아내서 죽인다고요?”
“당연하지. 네 지저분한 과거를 알고 있잖아? 여기로 오는 도중 만난 사람이면 장사치일 것이 아니냐. 나중에 후환이 될지도 모른다. 너는 내 먼 친척으로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남동생의 보호자를 하느라 혼기를 놓친 것뿐이야. 너는 창녀지만 고급이야. 절벽의 꽃처럼 보여야 해. 꽃을 꺾고 싶다면 대가를 치루라는 식으로 오만하게 굴어야 해. 대가가 아무리 크다 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야 해. 돈만 주면 누구나 꺾을 수 있는 꽃은 아무도 흥미를 가지지 않아. 절대로 돈에 궁해보여서는 안 돼. 귀족들은 자신이 잔 여자가 누구와 자는지도 중요하게 보는 법이다.”
“그렇군요.”
에슐리아는 얌전하게 수긍했다. 트루가부인과 함께하는 나날은 매일 배워야하는 것의 연속이었다. 그날도 에슐리아는 새로운 것을 하나 배운 참이었다.
 트루가 부인의 일처리는 완전히 깨끗했다. 에슐리아가 말해준 지명과 인상착의와 간간히 그들이 말한 이야기를 토대로 그녀는 에슐리아가 에슬라였을때 몸을 판 남자들을 모두 찾아내었다. 인상착의가  비슷한 남자들도 찾아내어 어김없이 죽여 버렸다. 부인은 에슐리아에게 그들의 시체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말하며 웃었다.
부인은 에슐리아를 많은 곳에 선보였다. 에슐리아는 부인의 먼 친척으로 소개되었고, 그녀의 과거는 무사히 숨겨졌다. 이 과정에서 대외적인 남동생인 그녀의 아들도 힐레멘으로 이름을 고쳤다. 빛나는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힐레멘은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지만 어머니는 너무 바빴다. 처음에는 일 년만 참고 지내면 예전처럼 지낼 수 있다고 했지만 일 년이 지나도 그녀는 여전히 바빴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욱 바빠지기만 했다.
 어머니는 아름다워졌다. 도도하고 겸손할 줄 몰랐으며 남자 앞에 당당했다. 그녀에게서 시골 노처녀 에슬라의 모습은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었다. 밭을 갈았던 흔적도, 친 아버지에게 강간당했던 상처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재치. 언변. 화려한 미모는 천성적인 것 같았지만 그것은 고도의 훈련덕분이었다.
 그녀의 고객들은 날이 갈수록 신분이 높아졌다. 첫 번째 고객이었던 빌리치 하원귀족은 이제 명함도 내밀지 못하게 되었다. 적어도 상원귀족정도는 되어야 그녀와 차라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고객들은 중앙귀족들이 대다수였고 그 중에는 왕족도 섞여 있었다.
“미안 내 귀여운 힐레. 오늘은 호시오 나리와 뱃놀이 약속이 있단다. 저녁때까진 돌아올 수 있을 거야. 하인들하고 놀고 있으렴.”
“네, 어머니.”
힐레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슐리아가 차비를 하고 나가자 트루가부인은 힐레멘의 뺨을 때렸다. 그녀는 싸늘하게 힐레멘에게 일렀다.
 “다시는 어머니라고 부르지 마라. 그녀는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 에슐리아는 네 누나다.”
힐레멘은 하얗게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냉엄한 부인의 얼굴이 빛을 등지고 서서 문을 닫았다. 서서히 닫히는 문 사이로 힐레멘의 겁에 질린 푸른 눈동자도 검게 물들었다.
 문이 닫히자 힐레멘은 입술을 일그러트리고 가만히 눈물을 흘렸다.
 아홉 살의 나이에 힐레멘은 가슴으로 우는 법을 알게 되었다.

에슐리아는 무료한 얼굴로 사교회장을 둘러보았다. 나른한 정오의 햇살을 맞으며 긴 의자에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벌꿀 같은 머리카락은 그녀의 눈과 똑같은 붉은 비단옷 위로 치렁하게 늘어져있었고 소매가 없는 옷차림 아래로는 당당한 어깨가 드러나 있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자못 따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잘 꾸며진 연기였다. 그녀는 재미있어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무감한 붉은 눈동자가 슬며시 회장의 구석을 훑었다. 거기에는 현숙하고 정숙하다고 소문난 아가씨들이 호들갑스러운 그녀들의 어미닭들과 함께 얌전히 구석에 모여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에슐리아의 시선을 느낀 몇 아가씨들은 쌀쌀한 태도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못난이들 주제에.’
에슐리아는 코웃음을 쳤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어도 다가올 용기도 없는 것들이 질투하는 꼬락서니들 좀 보라지.
 에슐리아는 보란 듯이 술잔을 기울였다. 현숙해 보일 필요 따위 전혀 없었다. 그녀는 어차피 창녀였다.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 있었고 입고 싶은 대로 입을 수 있었다. 어떤 남자와도 이야기 할 수 있었고 원하는 남자 누구와도 잘 수도 있었다. 육체도 정신도 완전히 자유로웠으며 종속이 없었다.
 이미 끝 간 데 없이 떨어져본 그녀였다. 보석과 화려함과 선망. 이것들이 그녀를 지탱시켜주는 원동력이었고 진정으로 그녀가 원하던 삶이었다.
 에슐리아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러자 관능적인 흰 목덜미가 드러나며 남자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 젊은 귀족청년이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손등을 붙잡고 정열적으로 말했다.
“아름다운 에슐리아. 햇살도 당신 앞에선 빛이 바래는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로시오 나리.”
 에슐리아는 전혀 감사하지 않은 어조로 말하며 육감적인 입술 선을 비틀어 올렸다. 촘촘하고 섬세한 입술이 길고 붉은 호선을 그렸다.
 잔챙이들.
 자신의 관심사는 이런 잔챙이들이 아니었다. 지난 3개월간 잔챙이라면 발에 차일 만큼 상대해왔다.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랑밖에 없는 것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사랑같이 어수룩하고 미숙하며 영속성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말로는 그 누가 억만금을 못 퍼주랴. 그녀가 관심 있는 것은 보다 지속적이며 강력한 것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최고의 남자였다.
 올로네스 리스프스, 바로 저 남자와 같은···.
 그녀는 회장 밖을 산책하는 한 남자를 응시했다.
 작달막한 키에 투실투실 살이 찐 몸뚱이. 둔하게 늘어진 얼굴엔 근엄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해보였다. 작고 튀어나온 입술은 불만에 차보였으며 한 쌍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에메랄드처럼 아름다운 녹색이었지만 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누가 보아도 추남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에슐리아에게 그런 것이 하등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녀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았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그녀의 모친이 부친의 외모에 빠져 어떻게 되었는가. 중요한 것은 올로네스 리스프스가 얼마나 잘생겼냐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지위의 사람이냐는 것이었다.
“나를 왕에게 소개해주세요.”
 에슐리아는 트루가부인에게 속삭였다.
“왕의 침실을 노리는 여자는 많아. 한 번 실패하면 다시 기회는 없을지도 몰라. 좀 더 시간을 두고 준비하는 게 좋을 거다.”
부인이 조언했으나 에슐리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리기 싫어요.”
두 사람은 나란히 창밖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비처럼 아름다운 여자들이 저마다 왕의 눈에 뜨이길 바라며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에슐리아는 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부인에게만 들릴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한 선한 여자와 악한 여자가 결혼을 했습니다. 두 여자 다 선하고 훌륭한 남편을 만나 결혼생활을 시작했지요.
 시간이 흘러 선한 여자의 가정은 매일이 단란하고 즐거웠습니다. 다른 악한 여자의 가정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악처를 얻은 선한 남편은 이제 아내보다 더 악질적으로 변하여 매일 그 가정은 불화가 그치는 날이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에슐리아는 여기서 이야기를 멈추고 활짝 웃어보였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대체 무엇일까요? 남자들이여 악처를 얻지 마라? 아니요 내가 보기에 이 오래된 이야기는 여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남자들의 마음까지도 조종할 수 있다고 은밀하게 여자들에게 알려주는 거랍니다.”
 “너처럼 오만한 것은 처음 본다.”
 트루가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게 또 네 매력이지. 좋아, 내가 줄을 대보마. 호키스 나리께 부탁하면 가능할거다. 하지만 에슐리아. 실패하면 또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알고 있겠지?”
에슐리아는 잠자코 미소 지었다. 멀리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있던 왕이 에슐리아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꿈처럼 달콤한 얼굴을 하고 에슐리아는 트루가부인에게 속삭였다.
“두고 보세요 이모님. 내가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나 못 차지하나.”
트루가부인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었다.
 이토록 오만한 보석을 어떤 남자가 거부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에슐리아가 승승장구하는 사이 힐레멘은 공중에 붕 뜬것처럼 살고 있었다.
 트루가부인은 힐레멘을 좋아하지 않았다. 에슐리아가 궁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자 굳이 그 사실을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에슐리아의 과거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힐레멘이었다. 남자는 쓸모가 없었다. 사내아이란 어떻게 클지 모르는 애물단지들이었다. 잘 키우면 훌륭한 조력자가 되어줄지도 모르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처치곤란의 골칫덩어리들 이었다. 여자아이들은 영악하고 남자아이들은 사고를 친다.
 창녀들은 딸을 후계자로 만들어 노후를 보장한다. 자식이 없던 트루가부인은 에슐리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울 생각이었다. 힐레멘이 아들인 이상 그는 후계자와 자신의 노후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 혹이었다.
 게다가 그 기분 나쁜 표정이라니, 늘 우중충한 표정을 한 채 아이다운 매력도 귀염성도 없는 힐레멘을 부인은 싫어했다.
“웃어라.”
트루가부인은 힐레멘을 볼 때마다 싸늘하게 명령했다.
 “어쩌면 그렇게 애다운 구석이 없니. 적어도 이 집을 방문한 손님들에게 환하게 웃어줄 수는 있잖아? 그것 외엔 네가 할 일이 없으니까 적어도 웃고라도 있으렴.”
 힐레멘은 하루 종일 집안을 굴러다니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하인이 하나 있었지만 그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힐레멘은 글을 몰랐기에 대화가 되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멍하니 하루 종일 방바닥만 굴러다니는 것을 보다 못한 트루가 부인은 그에게 가정부겸 선생을 하나 붙여주었다. 그러나 교활한 가정부는 힐레멘이 이 집에서 중요한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금세 파악했고 아이가 더듬더듬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신경을 꺼버렸다. 적당히 시간만 때우고 돈만 받아 가면 그만인 것이었다.
 힐레멘은 하루라는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곳은 고급주택가였다. 아이들이 적은 지역이기도 했지만 창녀의 아들과 굳이 친하게 지내게 해줄 부모도 없었다. 에슐리아와 트루가부인을 만나면 모두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네 왔지만 그들의 속에 깔린 것은 경멸이었다. 힐레멘은 그들에게 있어 그래봤자 창녀의 핏줄일 뿐이었다.
 힐레멘은 독서를 많이 했지만 그것도 곧 바닥이 나고 말았다. 트루가부인의 저택에는 아이가 읽을 만한 책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힐레멘이 하는 일이라고는 방안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그림이나 끼적대는 것뿐이었다. 트루가부인은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고 에슐리아도 교육에는 무지했다.
아마 그에게 특별한 능력이 없었더라면 힐레멘은 계속 그대로의 상태로 방치되었을 것이다.
늦은 저녁 힐레멘은 쇠구슬을 굴리며 놀고 있었다. 무심한 아이의 손아래 쇠구슬은 바닥을 굴러다니다 잠깐의 실수로 침대 아래로 들어가 버렸고 힐레멘은 할 수 없이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바닥이 너무 어두워서 찾을 수가 없잖아.’
 힐레멘은 무심코 환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다음 순간 손가락 끝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놀랍게도 밝은 빛이 침대아래를 환하게 비추이는 것이었다.
 힐레멘은 깜짝 놀라 탄성을 질렀다. 마치 그 부분에만 햇살을 빌려온 듯 아름다운 빛의 조각들이 쇠구슬위로 투명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신이 난 힐레멘은 이 놀라운 장면을 자랑하고 싶었고 밖으로 뛰쳐나가 걸레질 중이던 하녀 하나를 다짜고짜 끌고 왔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끌려온 하녀는 힐레멘이 침대 밑을 보여주자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신기하지? 어두워서 밝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니 이렇게 되었어. 신기하지?”
하녀는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힐레멘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빛을 보며 기뻐했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거기에는 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트루가부인이 있었다. 부인은 힐레멘을 밀치고는 빛이 뿜겨 나오는 침대 밑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장치가 없음에도 거기서는 햇살처럼 밝은 빛이 먼지와 함께 춤추고 있었다.
 트루가부인의 냉랭한 표정위로 놀라움이 번졌다. 그녀는 힐레멘을 돌아보았다.
“마법?”
극히 희귀하게 태어난다는 자연적인 돌연변이 마능력자. 발견 즉시 나라에 보고하여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야 하는 능력자들. 마법사들은 국가 재산차원에서 관리되는 사람들이었다.
 “네가 이랬니?”
부인은 힐레멘의 손을 낚아챘다. 힐레멘은 멍한 얼굴로 부인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이랬느냐고 묻잖아!”
“모르겠어요. 이모님! 모르겠어요!”
 힐레멘은 억지로 웃으려고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러나 눈동자는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밝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니 정말로 밝아졌어요. 그 이상은 저도 몰라요!”
부인의 손이 놓자 힐레멘은 바닥에 미끄러졌다. 힐레멘은 구석으로 기어가 몸을 작게 말았다. 그와 동시에 빛이 사그라졌다.
‘마능력자라······.’
트루가부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모자는 우연히 날아 들어온 선물이었다.
 그것도 아주 큰······.

본궁에 딸린 여러 개의 별궁들 중 가장 크고 칙칙한 건물이 마법사들 전용의 의학당이었다. 사람들은 마법사들을 꺼려하고 무서워했기 때문에 그들이 거하는 곳은 가장 본궁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음습한 곳이었다.
트루가부인은 힐레멘의 손을 잡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커다란 중앙 복도는 부인과 힐레멘의 발자국소리가 뚜벅뚜벅 크게 울리고 있었다.
 회색의 단조로운 기둥들이 끝없이 펼쳐지고 융통성 없이 크기만 한 홀 한 가운데에는 길게 수염을 기른 남자들이 냉랭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고 늘어지는 옷을 입고 있었으며 창백한 낯빛의 소유자들이었다.
 힐레멘은 완전히 분위기에 압도당한 나머지 주눅이 들어 가만히 서 있었다.
“네가 했다는 대로 빛을 불러내보아라.”
힐레멘은 희게 질려 손끝만 내려다보았다. 남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네가 침대 아래를 밝게 만들었었지? 그걸 어서 해보려무나.”
트루가부인이 재촉했다. 그녀의 얼굴은 그린 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할 수 없어.’
힐레멘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안 돼. 되지가 않아.’
주눅이 들어 얼어버린 힐레멘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그들은 불쾌한 얼굴로 트루가 부인을 바라보았다.
 부인은 우는지 웃는지 표정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얼어버린 힐레멘을 다짜고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탁자 아래에다 밀어 넣어 버렸다. 아이는 깜짝 놀라 반항을 했지만 부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트루가부인. 지금 뭐하는 겁니까?”
 한 남자가 짜증스럽게 물었지만 트루가부인은 무시했다. 그녀는 힐레멘의 얼굴을 가까이 당겨 낮게 소곤거렸다.
“알겠니? 찾는 거야. 그날처럼 구슬을 찾는 거야.”
“트루가이모님.”
힐레멘은 불안한 얼굴로 부인의 옷소매에 매달렸으나 그녀는 매몰차게 탁자 보를 끌어내렸다.
그 안은 깜깜했다. 힐레멘은 공포에 질려갔다. 어둡고 좁은 곳은 자신이 내뿜는 숨소리로 가득했다. 두터운 탁자보를 잡아당겼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밖에서 부인이 남자들에게 뭐라고 설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시간을 더 줘보세요··· 어떻게든 아이가 했던 대로······.
‘후우- 후우-.’
힐레멘은 두려움에 질려 빳빳하게 굳어갔다. 창백한 뺨을 스치는 손가락을 느꼈다. 좁은 공간 가득히 다른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어둠속에서 끝도 없이 기어 나왔다.
 현기증이 느껴졌다.

마법사들은 트루가부인과 실랑이를 벌였다. 오랜만에 들어온 재보였기 때문에 기대감이 높았던 만큼 트루가부인의 행동이 몹시 못마땅했다.
마능력자는 선천적으로 타고 난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훈련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고 공부를 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태어나주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보통의 경우 사춘기를 전후하여 능력이 발현되며 그 정도는 모두 틀리다. 알아채지 못할 만큼 미미한 자들도 있고 마능력을 조절하지 못해 폭주해버리는 자들도 있었다. 바로 그 능력을 행해보이지 못하는 경우에는 잘못된 제보일 경우가 많았다.
“부인. 우리는 바쁜 사람들입니다.”
마법사들이란 콧대가 높은 종족이었다. 그들은 평생을 대우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마법에 관련하지 않은 일에는 인내심이 무척 부족했다. 닳아빠진 창녀와 그의 조카에게 할애한 시간이 아까웠다.
 “기다려보세요. 확실합니다. 이 아이는 마능력자에요.”
“이러면 당신을 아이와 함께 내쫓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법사중 하나가 위협하듯 다가왔지만 부인은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도하게 고개를 쳐들고 정면으로 눈을 부딪혀왔다.
 그때,
“저건 뭐지?”
한 늙은 마법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일제의 시선이 마법사의 눈을 따라 움직였다. 거기에는 바닥을 뒹구는 아이의 창백한 손이 있었다.
마법사는 성큼성큼 다가가 보를 들추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탁자 아래로 찬란한 빛 덩어리가 눈이 부시도록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이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힐레멘은 바로 수습마법사가 되었다. 친동생이 마능력자라는 것은 에슐리아의 출세의 대단한 보탬이 되었다. 아무런 배경이 없던 에슐리아에게 마법사라는 배경이 하나 생긴 격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치고 올라갔다. 에슐리아의 작은 두뇌는 모략과 암투에 적합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녀는 점점 더 영리해지고 영악해졌다. 그녀가 친부에게 강간당해 아이를 낳은 전적이 있는 시골 뜨내기라는 것은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권력을 쥐자 그녀는 자신의 성격을 마음껏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신을 천대한 귀족들을 가랑비처럼 살금살금 파멸시켰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근들을 심어놓았다. 왕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던지라 손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뜻을 인내심을 가지고 관철시켜나갔다. 사람들은 에슐리아를 욕을 하면서도 두려워했다.
일 년, 이년···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완전해졌다. 원래도 아름다웠던 에슐리아의 미모는 아낌없는 투자를 퍼부은 덕에 이제는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그녀의 미모에서는 이제 일종의 마력까지 뿜겨 나왔다.
에슐리아는 혀를 차는 소리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 소리를 들으면 끔찍하게 암울했던 과거의 고통이 그녀를 역습해왔다. 죽어가는 아버지를 간호하며 밭을 갈고 물을 깃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틀비틀 항아리를 지고 걸어가는 자신의 뒤로 들려오던 혀 차는 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깊은 악몽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는 악몽을 잊기 위해 악을 쓰고 위로 올라갔다. 그 누가 혀를 차더라도 그 소리에 움찔 놀라지 않기 위해 그녀는 위로,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는 것만큼이나 과거를 닦아내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야금야금 궤계를 꾸미며 천적을 숙청해나갔다.
“트루가이모님. 저를 수렁에서 건져주셨고 저를 먹여주셨고 재워주셨으며 교육시켜주셨지요.”
에슐리아는 깊은 우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째서 내게 이러는 거냐 에슐리아. 나는 너를 딸처럼 여겼다!”
트루가부인은 울부짖었다. 그녀는 에슐리아의 배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에슐리아가 향이 묻어날 것같이 달콤하게 웃어보였다.
“이모님이 그러셨잖아요? 내 지저분한 과거를 알고 있으니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저는 그 말씀을 계속 가슴속에 품고 있었답니다.”
트루가부인은 눈이 크게 흡뜨였다. 에슐리아는 창녀로서 데뷔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수도로 오기 위해 몇 명의 남자에게 몸을 팔았던 에슐리아. 후환을 없애기 위해 자신이 직접 그 남자들을 없애라 명령했었다.
“네가! 감히 네가!”
“그 우물물에 제가 강력한 독을 타놓았어요. 견디기 괴로워지면 언제든지 물을 마시세요. 은혜를 생각해서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독을 풀었답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저를 이해해주세요. 사랑했었습니다. 이모님.”
“에슐리아아아---!!!”
에슐리아는 귀가 먼 하인을 시켜 뚜껑을 덮었다. 두터운 돌 뚜껑의 틈새로 트루가부인의 마지막 절규가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 세월과의 마지막 작별인사였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신비의 효능을 가진 꽃이 소르데라에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오랜 침묵의 땅. 금지의 땅에 관심을 돌렸다. 언뜻 에슐리아는 마라꽃을 가진 태양족에게 내려오는 신부의 제도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녀는 마라꽃보다 그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에슐리아는 왕에게 속삭였다.
“마라꽃을 독점해요. 그깟 야만인들에게서 그 꽃을 우리 빼앗아 와요. 신이 금지한 땅? 그런 게 무슨 소용이지요? 이미 신은 죽은 지 오래지 않나요? 우리의 왕. 사절단을 보내서 저희끼리 잡아먹도록 시켜요. 네?”
왕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에슐리아는 힐레멘을 불러 일렀다.
“신부를 데리고 와라 힐레멘. 마라꽃보다 그것이 더 먼저다.”
“족장의 아내를 말인가요?”
힐레멘이 반문했다. 에슐리아는 보석처럼 눈을 빛내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신부와 아이를 낳음으로서 함마 족장의 계승권을 정당하게 차지하는 거다. 중요한 것은 족장의 아들이라는 것보다 신부의 아들이라는 점이야. 신부다. 신부를 데리고 와라.”
“그리고 저와 혼인시키겠다는 거군요.”
힐레멘이 싱긋 웃었다. 에슐리아와 똑 닮은 얼굴이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에슐리아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힐레멘. 네게 소르데라의 왕위뿐 아니라 함마 족장의 자리도 쥐어주마.”





툭- 투둑--
 어린아이의 손장난 같던 빗소리가 어느새 창틀을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고 있었다.
상념에 빠져있던 에슐리아는 문득 빗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요 며칠 계속 날씨가 흐리더니 봄비가 내리려고 그랬던 모양이었다.
 “참으로 많은 시간이 지났구나.”
에슐리아가 감회에 겨워 힐레멘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들은 너무도 오래간만에 진심으로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무 가진 것도 없던 한 여인과 한 소년이 여기까지 올라왔다. 지금에야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사는 것이 너무도 급하고 강퍅하여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폭풍처럼 헤쳐 온 시간들이었다. 몸뚱이 하나로 치고 올라온 시간들이었다. 수년의 시간이 지나 아이는 청년이 되고 철없던 어린 소녀는 왕의 가장 사랑받는 정부가 되었다.
 에슐리아의 미모 앞에서는 세월도 그 힘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탄력을 잃지 않았고 눈가에는 희미한 주름도 잡히지 않았다. 외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의 흠도 없이, 결점도 없이 정돈되고 다듬어졌다.
 에슐리아에게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오직 그녀의 보석 같은 두 눈동자뿐이었다. 피보다 붉고 루비보다 빛나다는 찬사를 받은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지독한 고독과 과거의 상흔이 피처럼 맺혀있었다. 연적을 밟고 일어서고 은인을 제거하며 스스로 도끼가 되어 이 세월을 살아낸 그녀의 눈동자는 지나간 세월의 무상함을 진득하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힐레멘은 경의를 담아 에슐리아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에슐리아의 흡족한 미소 지었다. 그녀는 아들이 복종의 표시를 할 때면 사냥을 마친 암사자처럼 만족스러워졌다.
그때였다. 갑자기 부산한 발자국 소리가 복도 끝에서부터 달려들었다. 이윽고 누군가가 급하게 문을 쾅쾅 두드렸다.
“에슐리아님! 문 좀 열어 주세요!”
“실리?”
에슐리아가 눈짓을 했다. 힐레멘이 성큼 다가가 문을 열자 그곳에는 아사신의 시중을 들라고 보낸 실리가 급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급히 찾아와 죄송합니다. 하지만 왕께서 갑자기 아사신을 데려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이가?”
에슐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늦은 시간에 말이냐?”
“왜 불렀지?”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급히 찾으시더니 병사들이 아사신을 데려갔어요.”
힐레멘과 에슐리아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 밖으로 달려 나갔다.
 왕의 침소는 무척 깊숙한 곳에 있었다. 여러 개의 함정 같은 문을 열고 들어가야만 왕의 침소를 찾을 수 있었다. 전쟁의 역사가 긴 나라는 건물을 복잡하게 설계하기 마련이다. 최대한 동선을 길게 늘여서 적의 침입이 있을 시에 도망갈 시간을 버는 구조였다. 힐레멘은 마음이 급했다.
 “문을 열어라!”
에슐리아를 젖히고 한걸음에 달려온 힐레멘이 근위병에게 명했다.
 “안됩니다. 왕께서 누가오던 문을 열어주지 말라 하셨습니다.”
 “열어라.”
 한 걸음 늦게 도착한 에슐리아가 힐레멘을 젖히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근위병은 이번에도 꿈쩍 하지 않았다. 에슐리아는 근위병의 행태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 궁에서 자신의 뜻을 감히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감히···.”
“비키세요. 누님.”
 힐레멘은 다시 에슐리아를 밀쳐냈다. 에슐리아는 힐레멘에게 떠밀려 잠시 비틀거렸다. 그녀는 짜증을 내며 항의하려 했지만 힐레멘의 진지한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힐레멘은 손으로 간단한 수인을 맺었다. 그리고 낮고 빠르게 읊조렸다.
“나무는 네 결을 터트린다. 파손되고 손상되어라!”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두터운 나무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미녀의 상반신이 새겨진 문짝이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무슨!”
“비켜!”
힐레멘은 근위병을 밀치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두침침한 방 안의 풍경에 익숙해지자 침대에 엉켜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손을 비틀어서 올라타 있었다. 아래에 깔린 남자는 웃옷이 벗겨진 채 아슬아슬하게 비부만을 가리고 있었고 위에 올라탄 남자는 아래의 남자의 다리를 무릎으로 벌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너무도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느라 힐레멘이 문짝을 부수고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사신.”
힐레멘이 망연하게 아사신의 이름을 불렀다. 왕의 아래에 깔려있던 사람은 바로 아사신이었다. 아사신은 힐레멘을 발견하자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발버둥을 쳤다. 혐오감으로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트린 채 비명처럼 힐레멘만을 외쳐 불렀다.
“힐레멘! 힐레멘!”
“이런···아사신!”
힐레멘이 아사신의 팔을 붙잡고 비대한 배아래 깔린 아사신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자 왕은 아사신의 팔을 붙잡았다.
 “뭐하는 짓이냐 힐레멘!”
 “제 친구에게 뭐하는 짓인지 부터 밝혀주시지요.”
 두 사람은 아사신의 팔을 한쪽씩 잡고 버텼다.
 “그를 나의 첩으로 삼을 거다.”
 왕이 아사신을 잡아당겼다.
 “그렇게는 못할 겁니다. 아사신은 제 친구의 자격으로 왔습니다. 그의 동의는 받고 이러시는 겁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손끝하나 대지 마십시오.”
힐레멘도 아사신을 잡아당겼다. 양쪽에서 잡아당겨지는 바람에 아사신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당연히 그에게 허락을 받았다. 놓아라!”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데요? 당신이 먼저 놓으십시오.”
“감히 나의 침소를 어지럽힌 죄는 네 누이의 얼굴을 봐서 이번 한 번만 참고 넘어가주마. 당장 손을 떼라!”
“싫습니다.”
힐레멘이 다시 아사신을 잡아 당겼다. 중간에서 흔들리느라 아사신의 허리에 감겨진 옷자락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아사신은 얼굴이 벌게져서 옷자락을 끌어당기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놓아주세요!”
“이리 내놔!”
왕이 있는 힘껏 아사신을 당겼다. 힐레멘은 분노했다. 그는 왕에게 끌려가는 아사신을 잡아 자신의 품안에 완력으로 안았다. 완전히 발가벗겨지게 생긴 아사신이 아슬아슬하게 천을 끄집어 당겼다.
 “왜들 그렇게 흥분하세요.”
에슐리아가 날아갈듯 다가왔다. 그녀는 아사신을 빼앗기고 씨근덕거리는 왕의 벗은 가슴에 팔을 감고 꿀 항아리를 통째로 삼킨 듯한 얼굴로 소곤거렸다.
“아사신을 홀대하지 마세요. 꽃을 가지고 협상할 수 있어요. 여자가 부족한가요? 왜 남자에게까지 손대려 하셔요?”
“꽃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왕은 갑자기 에슐리아를 밀쳐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야만인들이 위로 올라오고 있어! 그 야만인들이! 그놈들이 저런 남자 하나를 끈질기게 찾는 이유가 있을 거다! 내놔라 힐레멘!”
“왕!”
힐레멘은 득달같이 왕이 달려들자 기겁을 하고 아사신과 함께 옆으로 굴렀다. 그 바람에 힐레멘의 손이 왕의 얼굴을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밀쳐버렸다.
 에슐리아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힐레멘!”
방안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왕이 얻어맞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을 따라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세상에, 많이 아프셔요? 어서 고개를 이리로 뉘이세요.”
에슐리아는 서둘러 왕의 얼굴을 감싸고 피를 닦아주었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고개를 뉘인 왕이 중얼 거렸다.
“그 남자가 온다.”
“누구 말인가요?”
“족장 야스카산. 그 야만인들의 왕이 온다. 치열하게 싸우고 있지만 놈이 수도방어선을 뚫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마법사들을 더 내려 보내세요.”
왕이 낮게 신음했다. 그의 눈동자는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땅을 식민지로 만들자고 했지 에슐리아. 마라꽃을 독점하자고 했지.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강하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저 남자에게 그렇게 집착한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너는 내게 숨기는 것이 있어. 그렇지?”
“오, 나의 왕. 당신은 그들을 쳐부술 만큼 충분히 강하십니다.”
“저 남자를 보내버리면 끝나는 일이다!”
 왕이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왕의 손가락이 똑바로 아사신을 가리켰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힐레멘이 강경하게 외쳤다. 에슐리아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힐레멘의 뒤에 선 아사신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야스카산이 온다고?’
아사신은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그러나 몸이 부르르 떨려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남자가 온다고?’
갑자기 온 몸에서 격렬한 구토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사신은 고개를 돌리고 속에 든 것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흰 거품과 함께 반쯤 소화된 음식물들이 쏟아져 내렸다.
“아사신?”
“당장 데리고 나가라.”
에슐리아가 힐레멘에게 명했다. 힐레멘은 에슐리아와 왕을 흘깃 쳐다보고 아사신을 부축해 나갔다.
 막 문을 나서려는데 에슐리아가 다시 힐레멘을 불렀다.
 ‘아사신을 넘기지 마라.’
에슐리아의 입모양만으로 말하고 있었다. 힐레멘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아사신을 데리고 나갔다.
 아사신은 발에 힘을 주려고 했지만 제대로 되지가 않았다. 힐레멘이 옆에서 붙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벌써 복도에 고꾸라졌을 것이다.
“누워요.”
겨우 방에 도착하여 침대에 누이자 아사신은 길게 한숨을 토했다. 그러더니 또다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격렬하게 구토하기 시작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이러면 어떡해요. 죽이라도 데워올까요?”
힐레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아사신은 그냥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오. 며칠 전부터 음식내만 맡아도 머리가 아프고 구토감이 치밉니다. 먹을 것은 됐어요.”
“음식내만 맡아도 구토가 인다고요?”
힐레멘이 미심쩍게 물었다. 아사신에게는 섭식장애가 있긴 했지만 음식 냄새만 맡고 구토할 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설마······.’
힐레멘은 조급하게 아사신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마른 손목에서는 특별한 징후를 느낄 수 없었다. 아사신의 윗도리를 위로 끄집어 당겼다. 뼈가 드러나게 마른 몸을 보이는 것이 싫었던 아사신이 반항했지만 힐레멘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설마·····그럴 리가.’
힐레멘은 온 신경을 아사신의 배에 집중시켰다. 갈비뼈가 드러날 만큼 마른 가슴과는 다르게 배에는 살집이 붙어있었다. 보통 사람의 배처럼 보일만큼 그것은 작게 둥근 언덕을 만들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이 잡혔다. 너무도 미세하여 잘못했다간 놓쳐버릴 만큼 미세한 심장의 소리.
“힐레멘 왜 그래요?”
아사신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힐레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왜 그래요? 무슨 큰 병이라도 걸렸나요?”
“아니요 아사신.”
힐레멘은 떨리는 손으로 아사신의 옷자락을 내려주었다. 그는 침착해 지려고 애썼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아사신에게 알려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힐레멘은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은 아이를 가진 것뿐이에요.”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우중충한 하늘 아래로 화살이 무수히 날아올랐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지도 두 달여 째. 줄기차게 싸워왔지만 야스카산의 전사들은 지칠 줄을 몰랐다.
 이 시골 성의 점령은 상당히 중요했다. 소르데라 수도 최대방어선으로 이 성만 점령하면 수도로의 길이 한길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지원병도 아낌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야스카산이 상대해야 하는 마법사들도 더 많아졌다. 성이 침략 당하는 것을 알게 되자 얼마 전부터 위력이 큰 마법사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었다. 야스카산은 보급을 끊기 위해 성의 후면에도 전사들을 배치시켰고 이로서 성을 고립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력은 반으로 갈리게 되어버렸다.
“모래를 퍼 부어라!”
타스가가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 마법사들의 화염구 공격이 연속으로 터지고 있었다. 야스카산의 천막이 화염구에 맞아 불타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힘을 합치기 위해 동쪽 성벽에 모여서 힘이 충족되면 한방씩 날리곤 했다. 이에 야스카산의 전사들은 불화살로 대응했으나 화염구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랐다. 상대적으로 성의 위에서 불을 쏘아대는 것과 아래에서 위로 쏘아 올리는 것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갈고리 밧줄이 성탑을 향해 솟구쳤다. 강한 철사를 꼬아 만든 밧줄을 향해 소르데라 병사들이 칼을 휘둘렀지만 강철이 부딪히며 불꽃만 튀길 뿐 잘려지지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줄이 튼튼하다 해도 그 줄을 잡고 야스카산의 병사들은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마법사들의 화염구에 맞아 꼬치구이 신세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양군은 진도가 나가지 않는 싸움에 휴식의 필요성을 느꼈고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야스카산은 회의를 소집했다.
“날이 밝는 대로 총공격을 시작한다. 외성벽을 타고 올라갈 정예부대를 선발해라. 마법사들은 멀리 있어 내가 일일이 상대하기가 힘들다.”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활을 잘 쏘는 전사들을 뽑아 내 피가 묻은 석궁을 나눠줘라. 외성벽의 가장 가까운 곳에 붙어 서서 마법사들을 향해 석궁을 날려라. 그들은 공격을 위해 외벽에 모여 있다. 생명을 걸고 앞으로 돌진해야 할 것이다.”
말을 마친 야스카산은 칼을 꺼내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팔을 찔렀다.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내리자 그것을 항아리에 가득 담게 했다.
“피를 많이 흘리셨습니다.”
타스가가 걱정스럽게 묻자 야스카산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걱정마라. 이 정도로 큰일 나지는 않는다.”
야스카산들이 회의를 하는 동안 성안의 상황도 위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끊임없는 화염공격에 무척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몸 안의 기를 써서 마력을 운행하는데 지원 병력이 끊어지자 공격을 위해 무리하게 내기를 긁어내게 되었고 이는 지독한 피로로 작용하였다.
 “우리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방위 총지휘관 소랏이 말했다.
 “마력이란 파낼수록 솟아오르는 우물물이 아닙니다. 마법사들의 몸이 말이 아닙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주십시오.”
“지원 병력이 도착할 것이다. 그들은 배를 타고 올 것이다. 발룸지역의 배가 이미 출발했다는 전언이 도착했다. 내일 저녁이면 늦어도 지원병이 도착할 것이다. 버텨라. 내일이 고비다.”
 소랏은 성주의 말에 할 수 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내려갔다. 그러나 내일을 어떻게 버틸지 고민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날이 밝자 다시 양 측에 공격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밤 새 야스카산의 피를 묻힌 석궁을 손에 든 전사들이 전폭적인 엄호아래 외벽을 향해 돌진해왔다. 북소리와 함성소리가 온 땅에 진동했다.
 “쏴라! 우리를 위협하는 야만인들을 밟아버려라!”
 소랏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외벽의 동문 끝에 서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한 전사가 뱀처럼 민첩한 동작으로 성문의 끝에 섰다. 그의 손에는 야스카산의 피로 물든 석궁이 들려있었다. 그는 다섯 전사들의 엄호를 받으며 성벽아래에 설 수 있었다. 그 모습이 소랏의 눈에 띠였다. 그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몇 명의 전사들이 기를 쓰고 성벽에 붙으려고 하고 있었다.
“저놈을 쏴라! 저 놈을!”
소랏의 명에 따라 궁수들이 일제히 벽에 선 전사를 노렸다. 철갑 방패의 틈 사이마다 무수히 화살이 꼽혀들었다.
 “쏴라! 저놈을 쏴라! 저놈을 죽여라!”
“화염구를 쏘아라!”
마법사중 하나가 화염구를 날렸다. 그것은 공기를 불사르며 전사를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전사도 석궁을 날렸다. 살과 화염구가 공중에서 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 소랏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누구도 거대한 화염구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불꽃이 꺼지고 연기가 공중에 흩날렸을 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석궁을 이마에 꼽고 뻣뻣하게 굳어버린 마법사의 모습이었다. 소랏은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석궁은 정확하게 마법사의 미간에 꽂혀있었다.
야스카산이 비릿하게 웃었다.
“총공격하라!!”
타스가의 지휘아래 선발된 궁사들이 일제히 살을 날렸다. 작열하는 화염구와 살이 공중에서 만나 불꽃을 튀겼다.
 “이럴 수가!”
소랏은 비명을 질렀다. 백이면 백. 마법사들의 화염구가 무참하게 깨지고 있었다. 빗발치는 화살에 맞은 마법사들이 픽픽 쓰러졌다. 소랏은 큰 소리로 후퇴를 외쳤다.
 “마법사들을 보호해라! 그들을 안으로 데려가라! 외벽에 붙어라! 뜨거운 물을 끓여라!”
그러나 야스카산쪽이 한 발 빨랐다. 마력이 힘을 잃자 전사들은 방패로 무장하고 민첩하게 성벽을 기어올랐고 일단 외벽 안으로 진입한 뒤에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문을 부숴라!”
전사들은 소뿔처럼 생긴 굵은 나무기둥으로 문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소의 뿔 부근은 강철을 씌우고 그 끝에 칼날을 박아놓아 한 번 그것이 문을 두드릴 때마다 도끼처럼 문이 썰려나갔다.
“문을 보호해라! 절대 열어주지 마라!”
성주는 사색이 되었다. 본래 그는 겁이 많아 전쟁에 나서지도 않으면서 투구를 쓰고 어린갑과 놋경갑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패색이 짙다고 판단한 그는 얼른 가솔들에게 짐을 챙기도록 지시하고 내성벽의 문을 열라 명했다. 해안으로 도망쳤다가 지원병이 오길 기다릴 계획이었다. 그러자 기미를 눈치 챈 성안의 병사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려는 겁니까!”
소랏이 고함을 지르며 성주를 따라왔다.
 “지원군과 함께 오겠다. 저녁까지만 버텨라!”
 “성주!”
소랏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당장 방어가 급급한 마당에 어떻게 저녁까지 버티라는 것인가. 성주의 직속병들도 그를 따라 나가려고 하자 일대의 혼란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이를 저지하는 소랏의 근위대와의 마찰로 성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두 지휘관이 뜻을 합쳐 방어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의 의견만 내세우고 있으니 싸움에서 밀리는 것은 당연했다. 야스카산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고 기세를 몰아 전사들을 돌진시켰다.
 “베라! 베어 넘겨라!”
타스가의 고함소리가 높고 크게 울려 퍼졌다. 야스카산은 화살에 시위를 매기고 일직선으로 팔을 뻗었다. 벽과 창문. 몇 개의 방과 다시 벽을 통과하여 살의 궤도가 일직선으로 수평이 되도록 만들었다. 무시무시한 집중력으로 살의 궤도를 결정지은 야스카산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았다.
 쉬아아아아아악----
살은 손을 떠나기가 무섭게 득달같이 달려 나갔다. 그것은 작게 열린 창틈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달리고 화덕과 부지깽이 사이를 달렸으며 어정어정 서 있는 병사들의 머리사이도 바람처럼 스쳐갔다.
 마침내 화살이 그 행방을 결정지은 것은 소랏의 심장이었다. 그것은 소리도 없이 미끈하고 깨끗하게 소랏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성주의 얼굴위로 피가 튀겼다.
“크억···!”
소랏은 고개를 내렸다. 그의 손이 아직도 깃을 파르르 떨고 있는 화살을 잡았다.
 “이럴 수가······!”
성주는 고함을 지르며 소랏을 떠밀었다. 소랏은 비명도 한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하고 눈을 까뒤집었다.
 “하나 더.”
야스카산은 다시 활시위를 매겼다. 두 번째는 처음보다 더 빨랐다. 살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 성주의 머리를 명중했다.
 성주의 아내가 비명을 질렀다. 지휘관을 잃은 군대는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오래 버텼지만 무너지는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야스카산은 화살을 내려놓으며 여유롭게 명령했다.
“무장하고 있는 것들은 여자고 남자고 상관하지 말고 베어 넘겨라. 그러나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자들은 털 끝 하나 건드리지 말고 보호해주어라.”




9




역사적인 천년조약이 깨어지고 함마대륙과 팔시아 대륙이 다시 형제의 피를 흘린 지도 3개월이 지났다. 늦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시작되었던 전쟁이 이제는 초봄의 기색이 완연한 가운데 그 끝을 드러내게 되었다.
소르데라의 시민들은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소문의 야만인들을 보기 위해 문을 열고 거리고 몰려 나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야스카산과 전사들이 당당하게 성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들에게선 오래 묵은 쇠 냄새와 피 냄새가 났다. 그들은 거무스름한 피부와 짙은 머리색을 가지고 있었고 동물의 털과 새의 깃으로 몸을 치장하고 있었다. 소르데라의 백성들은 숨죽이고 천년만에 벌어진 야만인들의 입성을 지켜보았다.
 “네가 왕이냐?”
 야스카산은 오만불손한 태도로 옥좌에 앉아 왕을 내려다보았다. 왕이라고 짐작되어지는 남자는 바닥에 넙죽 엎드려있었다. 머리위에 빛나는 눈부신 금관이 그를 수치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두려움에 벌벌 떠는 꼴사나운 모습에 야스카산은 곧 흥미를 잃었다. 남자의 옆에 앉아 마찬가지로 부들부들 떠는 여자역시 그의 흥미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야스카산은 자신을 석 달이나 고생시키고 그 결과로 얻어낸 것들이 형편없음에 분노마저 일 지경이었다.
“저 여자는 누구냐?”
야스카산의 시선이 다소곳하게 바닥에 꿇어앉은 한 여인에게 꽂혔다. 눈부시게 흰 피부와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미모의 여성이었다. 야스카산은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지긋이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구불 치는 금발머리. 오뚝한 콧날. 여인은 생각하기도 싫은 남자를 빼다 박아있었다.
“너는 기분 나쁜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구나.”
에슐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비가 내리는 흐릿한 햇살 속에서도 그녀는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야스카산은 눈을 가늘게 떴다.
“힐레멘을 아느냐?”
“제 동생입니다.”
에슐리아는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
 “저도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
“거짓말.”
야스카산은 옥좌에서 내려왔다.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단도를 꺼낸 야스카산은 에슐리아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가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었다.
 칼날의 둔한 면으로 에슐리아의 턱을 치켜들자 피보다 붉은 아름다운 눈동자가 만면에 드러났다. 그러나 야스카산은 그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랜 시간 자신의 이를 갈게 만든 단 하나의 이유만이 존재했다.
“여자야. 나는 지금 극도로 화가 나있는 상태다. 나는 미녀의 피부를 벗기거나 이빨을 뽑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다. 네 혀를 썰어서 회쳐먹기 전에 바른대로 대답하는 것이 좋을 거다. 그들은 어디에 있지?”
“젊은 족장이여.”
목 안 깊숙이 들어오는 칼날에 여린 그녀의 피부가 상처를 입었다. 칼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를 아래로 내려 보며 에슐리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눈앞의 남자는 강하고 미숙했으며 일종의 광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가 장담한 대로 남자는 여자의 피부를 벗기거나 혀를 썰어내는 것에 하등의 거리낌이 없을 것이었다. 마흔의 나이에 가까워진 에슐리아에게는 이 젊은 족장의 미숙하고 정제되지 못한 순수한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저는 아는 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나의 동생과 그의 친구는 수도가 함락되기 며칠 전에 아무도 모르게 성을 빠져나갔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발 앞에 엎드린 마당에 제가 무엇을 위해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에슐리아는 며칠 전 밤에 있었던 아들과의 대화를 기억했다. 그것은 수도최대방어선이 함락되기 며칠 전의 일로 그녀가 어미로서의 겪었던 마지막 밤이었다.
 그녀는 그날 몹시 피곤한 회의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었다. 겁 많은 귀족들은 방어선이 뚫릴지도 모르니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자고 했고 에슐리아는 짜증을 내며 절대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여기서 시시덕거릴 시간에 정황이라도 살피고 오라고 그들을 내쫓았다. 방어선에 나가있는 소랏은 에슐리아의 심복으로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기가 막힌 에슐리아는 소랏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족장의 신성력도 수많은 마법사들 앞에서도 그다지 신통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었다.
 에슐리아는 작은 실패나 두려움 앞에서도 사사건건 민감하게 구는 귀족들의 무능력이 끔찍이도 지겨웠다.
 너무도 피곤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잠은 쉽게 들어주지 않았고 한참을 뒤척이던 에슐리아는 겨우 선잠에 들었다가 갑자기 퍼뜩 눈을 떴다. 아무런 이유가 없었음에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의 목을 태웠다.
 에슐리아는 기시감을 느꼈다. 그것은 오래전 옛날 그녀가 아버지를 살해하던 그 밤과 비슷한 느낌 때문이었다. 실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
 “누님.”
에슐리아는 초를 밝히자 그녀의 아들이 침대 발치에 서 있었다.
 “누님.”
순간적으로 에슐리아는 지금 아들이 무언가 대단한 결심을 했음을 알았다. 남들과 똑같은 모자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아들의 어미였다. 필연적으로 통하는 어떠한 감정에 의해 그녀는 아들이 지금 자신을 떠나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힐레멘······.”
그녀는 마치 아들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자신과 똑같이 아름다운 금빛 고수머리가 촛불에 번져 금실처럼 반짝였다.
“잠시 누님을 떠나야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어디로 말이냐?”
에슐리아는 침착해 지려고 노력했다.
“수도로 오는 길이 공격당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사신을 여기 둘 수는 없습니다.”
 “야만인들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도 인정하마. 그렇지만 그들을 피해 너까지 나가야 할 이유는 없다. 아사신은 안전한 곳에다 숨겨놓았다가 마지막 경우에 넘기면 되는 거다. 네가 여기를 도망칠 필요는 없다.”
힐레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무섭습니다.”
 “웃기지도 않는구나. 힐레멘 트루가!”
 에슐리아는 코웃음을 쳤다. 심장은 빠르게 두방망이질 쳤다.
“뭐가 무섭다는 거냐. 죽음이? 야만인들에게 죽임 당할까봐 두려운 것이냐?”
“아니오.”
힐레멘은 멀리 바깥을 응시했다. 그 얼굴은 고통스러워보였다. 아들은 혼자 그녀가 알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혼자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론을 시행하기 위해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떠나겠노라 통보하고 있었다. 떠나게 해달라고 허락해달라고 말을 했지만 이것은 통보였다.
 에슐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정말로 오랜만에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이 겁을 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당혹스러웠다. 다른 어미들처럼 사랑을 준적도 없었고 그만큼 사랑한다고도 생각해본 적 없던 아들이었다. 그런데도 아들이 날아가려고 하자 그녀는 겁이 났다.
 “나는 잃어버릴 것이 없었습니다.”
힐레멘은 담담하게 아들이 아닌 한 존재로서 에슐리아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나는 잘못 태어난 존재였습니다. 태어나면 안 되는 존재였습니다. 평생 당신의 발을 묶어놓는 족쇄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동생이 아닌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때에는 차라리 이대로 죽어 없어질까 진심으로 고민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유일하게 지우지 못한 과거고 족쇄였으니까요.”
“너는 나의 족쇄가 아니다!”
 에슐리아는 급하게 외쳤다.
 “나는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스물다섯 해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저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한 가지를 해보고 싶어졌을 뿐입니다.”
 “내 곁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냐?”
 “글쎄요.”
 힐레멘은 어느새 자신의 손목을 꽉 틀어쥔 에슐리아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빙그레 웃음 지었다.
 에슐리아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들의 그러한 생각을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했다. 그 편이 더 조종하기 쉬웠으니까. 아들의 죄책감마저 먹이로 이용한 자신은 독사처럼 차가운 어미였다.
 “아마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디로···어디로 가려는 거냐.”
“아사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아마 평원을 넘을 것 같습니다.”
에슐리아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녀는 눈에 불을 키고 표독스럽게 외쳤다.
“나는 너를 낳았고 보호하고 이만큼 길러놓았다. 이제 와서 나를 져버리고 네 좋을 대로 하겠다면 나는 네게 한 푼도 주지 못한다.”
“누님.”
힐레멘은 몹시 아픈 표정을 지었다.
 “나는 돈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뭘 바라는 거냐!”
에슐리아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서서 힐레멘을 쏘아보았다.
 “가지마라. 저 야만인들에게 차라리 아사신을 넘기겠다. 나라가 있어야 왕도 있는 법이지. 네 마음이 흔들린다면 그 근원을 없애주마. 넌 내 말대로 하면 되는 거다.”
“···누님.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에슐리아는 자신이 이성을 차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회유하고 협박하여 사람의 마음을 달래는 것은 그녀의 특기였다. 그러나 지금 그 특기는 아무런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독사같은 어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할 수 없었다. 독사는 새끼를 돌보지 않는 법이다.
 “내게서 떠나려고 하면 네 몸에 걸친 것 하나 없이 빈털터리로 떠나야 할 거다!”
“······.”
“돈도 먹을 것도 없이 이곳을 나가야 할 거다. 그래도 가겠느냐? 우리가 이토록 힘들게 쌓아올린 모든 것을 버리고. 그래도?”
나를 버리고?
힐레멘은 에슐리아의 손등에 깊고 진한 입맞춤을 했다. 그의 맑은 푸른 눈동자는 그녀가 악을 쓰며 소리 지르는 것이 상처받은 고통을 가리기 위한 허세라는 것을 꿰뚫고 있었다.
“제가 없어도 누님은 잘 살 겁니다. 제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누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비단을 두르고 여자들을 호령하고 남자들을 짓밟으며 살아가겠지요. 그게 어울려요 당신에게는.”
힐레멘은 자신이 할 말만 마치고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에슐리아는 심장을 후비는 날카로운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미처 혀에 옮겨지지 못한 수백만 단어와 말들이 송곳이 되어 가슴을 후려치고 있었다.
 에슐리아이기전에 에슬라였고 에슬라이기전에 여자였으며 여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어미였다. 힐레멘에게 모든 것을 쥐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힐레멘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주고 싶었고 그 전에 자신이 갖고 싶었기에 그리한 것들이었다. 오랜 시간 살아남기 위해 전투를 벌여야만 했던 가슴속에 무시하고 살았던 모성이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자신을 저주하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녀는 영원히 그녀의 품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아들이 이날 처음으로 그녀를 거역하고 있었다. 그것이 지독하게도 아팠다.
 눈물 한 방울을 떨구는데에도 온갖 배경과 계산이 필요했던 그녀는 그 밤. 저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리고 아무런 속셈 없이 목 놓아 울고 말았다.
 에슐리아는 물기서린 눈으로 야스카산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네, 나는 진실로 모릅니다. 어디한번 내 동생과 당신의 신부를 찾아보세요. 나도 그들의 생사가 궁금하니까요.”



“나를 여기서 나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힐레멘은 홀린 듯이 아사신을 바라보았다.
 “도망치게 도와주세요. 힐레멘.”
 “어디로요?”
“어디든 좋아요. 그 남자가 오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야 해요.”
아사신은 배를 움켜쥐고 웅크렸다. 시체처럼 창백해진 피부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 남자가 잡으러 와요. 나를 잡으러. 나를 잡으러!”
아사신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주먹을 쥐고 자신의 배를 쿵쿵 치기 시작했다.
 “아사신!”
 힐레멘은 기겁을 하여 아사신을 잡았다. 이성을 상실한 아사신은 괴력을 발휘했다. 그 마른 몸에서 무슨 힘이 났는지 고함을 지르며 힐레멘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그러지 말아요! 제발! 아사신!”
 “으아아아아아!”
아사신은 발버둥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한참을 엎치락뒤치락하며 발작을 일으키던 아사신은 마지막 힘을 짜내 팔을 휘두르더니 곧 힐레멘의 무릎위로 늘어졌다. 두 사람은 헉헉 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용을 썼던지 힐레멘의 얼굴에서도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피하고 싶어요?”
아사신은 눈을 깜빡였다. 거친 호흡이 얼굴에 와 닿아 수증기로 부서져 내렸다. 힐레멘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좋아요. 그럼 내가 당신을 데리고 나가줄게요.”
그것이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아사신은 화롯불을 지키고 앉아 멍하니 저무는 해를 응시했다.
 그들이 머무는 곳은 소르데라 국경수비지역을 벗어난 갈레이 평원 부근이었다. 이 평원을 넘으면 소르데라와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초르난국이 나온다. 말이 평원이지 갈레이 평원은 반 건조지대로 사막이 되는 과정의 곳이었다. 바람은 건조하고 밤에는 추웠으며 낮에는 여름 날씨를 방불케 할 만큼 온도가 올라갔다. 건조된 땅은 푸석푸석한 먼지가 날렸으며 비도 잘 오지 않았다.
 힐레멘은 아사신의 몸 상태를 고려하여 조금 돌아가더라도 숲을 둘러서 걸었지만 이제는 녹엽생물을 찾아보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었다.
 “힘들지요?”
힐레멘이 사막 흙 토끼의 껍질을 벗기며 물었다. 그들은 체력을 아끼기 위해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요. 여기만 건너가면 끝이에요.”
 익숙한 솜씨로 토끼의 힘줄을 제거하고 내장을 떼어낸 힐레멘은 넓적다리를 화롯불에 구웠다. 생살이 타는 역한 비린내가 확 하고 끼쳐오자 아사신은 뱃속이 뒤집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먹어요.”
“···괜찮아요.”
“먹어둬요. 점점 고기가 줄어들고 있으니까요. 사막 흙 토끼가 줄어든다는 건 내일부터 우리가 먹게 될 것이 파충류나 벌레가 될 지도 모른다는 뜻이니까요.”
힐레멘의 말에 아사신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한 토막을 받아들었다. 누린내가 풍기는 고기조각을 억지로 한 입 베어 물자 위장이 요동을 쳤다. 그러나 힐레멘이 힘들게 잡아온 것을 아는 아사신은 꾸역꾸역 고깃덩어리를 삼켰다.
 “먹을 만해요?”
 “네.”
 아사신은 옅게 웃었다.
 밤이 되면 두 사람은 등을 돌린 채 옆으로 누워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 등을 타고 전해져오는 온기만큼이나 서늘한 가슴의 간극이 아사신의 생각을 차분하게 해 주었다. 바람이 차고 몸이 힘들수록  헝클어진 실타래 같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평원은 넓고 둥글었으며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소음도 없었으며 구속도 없었으며 사람도 없었다.
 -우리가 대자연을 보고 경탄하는 것은 그 위대함을 보고 신이 자신의 피조물을 보고 존재를 믿게 하기 위함이란다.-
 오래전에 시오사라가 이야기 해준 것이었다. 아사신은 끝도 없는 평원을 바라보며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한 신에게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 이기심과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운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더운 땅을 행군해야 하는 낮보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아사신은 흙으로부터 올라오는 차가운 기운을 느끼며 배를 감싸 쥐었다. 메마른 불모의 땅에 씨를 받아 잉태된 생명. 야스카산의 후계자. 자신의 안에 생명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아사신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저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아사신은 눈이 시리도록 총총히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이 아이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모든 것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닥쳐왔다. 인생은 아사신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는 방식이었다. 문을 두드리고 허락을 구하며 예비할 시간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밤도둑처럼 담을 뛰어넘어와 강탈하고 요구하고 흔들어놓았었다. 그것은 주변에 커다란 손이 있어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틀로 가두는 느낌이었다.
 아사신은 점점 풍만하게 배를 불리는 달을 보았다. 스스로 정의할 수 없는 신랄한 감정에 아사신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힐레멘의 말이 옳았다. 시간이 갈수록 먹을 것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나마 물만은 충분히 준비해 와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자원을 아끼기 위해 그들은 새벽이슬을 받아먹었다.
 사나흘이 지나자 아사신은 더 이상 고기의 맛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땅을 파서 도마뱀의 알을 구워먹어야 했다.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리고 미끈거렸기 때문에 아사신은 먹다가 토해버리고 말았다.
 황량한 평원에서 그들은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대화를 나누며 걷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처음으로 아사신은 힐레멘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
“내게 왜 화살을 쏘았었지요?”
소나기라도 내리려는지 먹구름이 자욱한 밤이었다.
“내 등의 날개가 돋아났던 그때 왜 내게 화살을 쏘았었나요.”
“그때는 당신이 가면 안됐었으니까.”
힐레멘은 미안했다던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던가 하며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중적이었던 행동을 순순히 인정했다.
 “당신의 위치를 좀 더 정확하게 알아야만 했습니다. 당신이 족장에게 얼마만큼의 효과가 있는지 좀 더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족장에게 신임을 받아야 했고요. 당신의 도망은 나에 대한 믿음을 올려주었고 당신의 위치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변명도 하지 않는군요.”
 아사신은 피식 웃었다. 화도 나지 않았다. 이미 속으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사신이 다시 물었다.
“왜 나를 따라 왔습니까.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힐레멘은 그 질문에만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아사신은 딸랑딸랑 귓전을 간질이는 방울 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녘에 결국 소나기가 내렸는지 뚜껑을 열어놓은 수통에는 빗물이 가득 차 있었다. 아사신은 쨍하고 눈을 직격하는 햇살에 얼굴을 찡그렸다.
 “저길 봐요.”
 아사신보다 먼저 일어난 힐레멘이 멀리 손짓을 해보이며 말했다.
 “상단 행렬이에요.”
달그랑 달그랑- 하는 맑은 방울 소리를 내며 한 무리의 상단이 힐레멘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들은 우락부락하고 대단히 못생긴 말을 타고 있었으며 일곱 필의 말 등에는 저마다 짐 꾸러미가 가득 실려 있었다.
 “이걸 둘러요.”
 힐레멘은 서둘러 아사신의 머리에 두건을 씌웠다. 젖지 않은 흙을 골라 아사신의 드러난 피부에 뿌려서 색이 짙은 피부를 가렸다. 긴 천으로 아사신을 칭칭 감싼 힐레멘은 곧 자신도 두건을 눌러쓰더니 팔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갔다.
“여보시오들-- 소르데라로 가는 길입니까?”
 “여행객들이시오?”
 말에 탄 남자들이 다가왔다. 아사신은 남자들이 다가오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소르데라로 가려고 했는데 거기 수도가 함락되었다는 소문에 할 수 없이 일정을 변경하여 다른 곳부터 들리려고 하고 있지.”
“소르데라 수도가 함락되었다고요?”
“그렇지. 그 작고 아름다운 나라가 야만인들의 발아래 짓밟혔지.”
 힐레멘은 한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당신들은 어디서 왔소?”
“우리는 아르트 사람입니다. 친구를 만나러 소르데라로 가는 와중에 강도를 당해서 먹을 것과 돈을 뺏기고 여기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저런.”
 상인은 혀를 찼다.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더니 보따리를 하나 내밀었다.
“이거 받으시오. 말린 고기와 과일이오. 물은 수통에 있나보니 다행이구려.”
 “정말 감사합니다. 친절한 분들.”
힐레멘은 고기를 꺼내 아사신에게 건네주었다. 몹시 지치고 허기져있던 아사신은 사양하지 않고 받아먹었다. 아사신이 모두 먹은 것을 확인한 힐레멘이 또 하나를 더 건넸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상인이 불쑥 말을 건넸다.
“당신 아내요?”
“아내요?”
아사신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니 아내가 아니면 뭘 그렇게 싸고돌고 그래? 배도 부른걸 보니 애라도 가졌나했지.”
힐레멘은 날카로운 눈으로 아사신을 점검했다. 천으로 칭칭 감아놓았음에도 오랜 방랑생활을 하며 산전수전 다 겪으며 장사를 해온 이 사내는 대번에 아사신의 몸 상태를 알아본 것이었다.
 “이 친구가 간이 안 좋아서 배에 복수가 좀 찼습니다. 건강이 나쁜 친구다 보니 제가 좀 신경을 쓰고 있지요.”
힐레멘의 재치 있는 대답에 남자는 흘깃 아사신의 얼굴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하긴 여자라기엔 뼈대가 너무 크다 했어. 거 좀 잘 먹어야겠어. 뼈다귀에 거죽을 씌워놓은 꼴이구만. 피부도 칙칙하고 말이야.”
 “하하 감사합니다. 신의 축복을···.”
“당신들에게도 신의 축복을.”
상인들은 그대로 말을 재촉하여 길을 떠나버렸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아사신이 물었다.
“팔시아 대륙사람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더니 어째서 신의 축복을 빌어주는 건가요?”
“소수지만 집을 떠나있는 사람들이나 매일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신을 믿고 있어요. 위험한 만큼 매달릴 곳이 필요한 거지요.”
아사신은 힐레멘의 말에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조용히 상인들의 앞날에 신의 축복을 빌어 주었다. 상인들은 지금 그들이 신의 후손에게서 축복을 받았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터벅터벅 멀어져 갔다.
“어째서 무지개는 잡을 수 없을까요.”
힐레멘이 비온 뒤 하늘에 선 작고 희미한 무지개를 보며 말했다.
 “어째서 비가 올 때는 먹구름이 끼는 걸까요.”
“글쎄요.”
아사신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힐레멘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힐레멘.”
 힐레멘은 빙긋 미소 지으며 아사신을 바라보았다. 그 예쁜 푸른 눈동자는 너무도 크고 휑뎅그렁했다.
 “나는 어렸을 때 굉장히 조용한 아이였어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지요.”
“당신이요?”
아사신은 웃을 뻔 했다. 힐레멘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릴 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창밖을 바라보는 일 뿐이었어요. 매일매일 무료하고 멍청하게 바깥을 내다보며 어째서 이 모든 신비로운 일들이 벌어지는지 신기해했어요. 왜 겨울이 되면 나뭇잎이 떨어지는지 왜 봄이 되면 새싹이 돋아나는지. 어째서 이 모든 변화에 사람들은 의구심을 가지지 않는지!”
힐레멘은 팔을 뻗었다. 길고 낭창한 팔이 활짝 펼쳐져 하늘을 가렸다.
 “아 난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궁금했어요. 어렸을 때면 아버지가 무릎에 저를 앉히고 들려주던 방랑시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모든 세상을 직접 격어 보겠노라 결심 했었지요. 누나의 고생에 찌든 얼굴을 바라볼 때면 많은 돈을 벌어다 주고 싶었어요. 누나의 손목에 홍옥과 청옥을 박은 팔찌를 끼워주고 싶었고 빛나는 흰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혀주고 싶었지요. 결국 제가 그렇게 해주기도 전에 누나는 자신이 스스로 비단옷을 찾아 입고 번쩍거리는 보석을 걸쳤지만요.”
아사신은 조용히 경청했다. 힐레멘은 지금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 조심스레 가슴의 문을 열고 한 발 내밀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애정을 가지고 있는 대상은 누님이었습니다. 그녀를 위해 살았고 모든 것을 행했습니다. 어렸을 때 이모님은 저를 보면 늘 웃으라고 강요 했습니다. 웃어라 힐레멘. 웃어라. 네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 웃어라.
내가 웃으면 누님도 웃었습니다. 나는 누님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늘 웃고 살았습니다. 그러자 웃음이 내 얼굴이 되었습니다. 나는 고민할 때도 웃고 있었고 괴로울 때도 웃고 있었고 슬플 때도 웃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생각했지요. 아 이러다 나는 죽을 때도 웃고 있겠구나. 그럼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죽음이 될까. 나의 죽음을 지켜보게 될 사람들도 나처럼 웃고 있을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 사이에는 부쩍 말이 줄어들었다. 체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면서 자연히 말을 아끼게 된 것이다. 친절한 상인이 주고 간 마른육포와 과일이 떨어지자 힐레멘은 다시 사막 흙 토끼나 알 따위를 찾으러 다녔다. 2인분의 영양을 필요로 하는 아사신의 몸은 여행이 길어질수록 확실히 지치기 시작했다. 아이를 가진 탓인지 자꾸만 나른해졌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손발이 부풀어 올라서 걷는 것도 힘들어졌다.
그런 형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떠돌이 르브룩들을 만났을 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되었다. 딸그랑 딸그랑 방울 소리가 요란한 짐마차에는 사람을 가득 태우고 늘 한곳에 정착하는 일 없이 떠돌아다니는 르브룩들은 힐레멘과 아사신을 보더니 마차를 세워주었다.
“이 평원에서 뭐하는 중이시오?”
“아! 다행입니다!”
힐레멘은 손을 앞으로 벌리고 다가갔다.
 “우리는 강도를 당해서 돈도 먹을 것도 없이 여기 버려졌습니다. 신의 축복으로 당신들을 만났습니다. 안 그랬다간 꼼짝없이 굶어죽게 되었을 겁니다. 도와주십시오. 친절한 르브룩인이여.”
“거지꼴이긴 하구만.”
남자는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자신의 뒷자리를 가리켰다.
“당신들이 누군지 모르니까 여자들과 한 마차를 타게 할 수는 없소. 내 뒷자리에 끼어 앉아도 좋다면 타시구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힐레멘은 인사를 하고 아사신을 끌어 올렸다.
 “여기 이거라도 먹고 있어.”
남자는 자연스레 하대를 하며 먹을 것을 던져주었다. 그것은 쪼글쪼글해지긴 했지만 건조되지 않은 과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아사신은 공손히 남자가 주는 음식을 받았다. 비리지 않고 바싹 마르지 않은 제대로 된 음식은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한 입 깨물자 과즙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상당히 굶주려있던 아사신은 허겁지겁 그것들을 먹어치웠다.
 “이 마차는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르브룩한테는 어디까지라는 게 없지. 그냥 발 닿는 데로 갈 뿐이야.”
남자는 말에 채찍질을 하며 말했다.
 “제가 잘못 질문했군요. 어디까지가 아니라 어디를 경유해서 가는 겁니까?”
“그렇다면 나도 대답할 수 있지. 우리는 빌라카로스로 가는 길이야. 곧 빌라카로스의 왕이 50번째 생일을 맞이하거든. 이번에 꽤 성대하게 축제를 벌일 모양인가 봐. 왜, 당신들은 어딜 가는데 그래?”
“우리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다가 아무 마을이나 보이면 내려주세요. 이 평원만 벗어나면 됩니다.”
“그렇군.”
남자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묵묵히 마차를 몰았다.
 밤이 되자 르브룩인들은 마차를 세우고 불을 피운 후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그들은 새로 맞이한 손님들을 궁금해 하며 몰려들었다.
 “잘생기기도 했어라.”
늙은 여인이 힐레멘을 빙글빙글 돌면서 팔찌를 흔들었다.
“이 얼마나 귀하게 생긴 미남자인가. 이런 남자가 오다니 우리 딸들을 가만히 둘 수 없지. 이리 나오려무나.”
여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차에서 여자들이 튀어나왔다.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하고 배를 반쯤 드러낸 옷을 걸친 처녀들은 소고와 구슬달린 뱅글을 하고 통통 뛰어오르듯이 춤을 추었다. 높고 맑은 웃음소리가 방울소리와 함께 현란하게 터져 나왔다.
 “귀한 손님이 오셨구나! 이 손님의 잠자리를 오늘 밤 누가 차지할까?”
한 처녀가 소리 높여 외치자 처녀들은 깔깔거리며 힐레멘의 주위를 맴돌았다. 어느새 남자들도 악기를 꺼내들고 와 피리를 불고 북을 두드렸다. 염소가 방울을 흔들며 뛰쳐나왔고 깃이 잘린 새들이 소리 높여 지저귀었다. 팔찌와 팔찌가 부딪히고 발찌가 짤그랑 거렸으며 길게 늘어지는 베일이 나풀거렸다. 꼬고 땋고 틀어 올려 높이묵인 머리카락들이 횃불에 비추여 살아있는 것처럼 휘날렸다. 여자들은 가슴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그는 내 입술의 미소.”
“그는 내 귀걸이의 찰랑거림.”
“오, 이런 남자와 하룻밤 사랑할 수 있다면!”
 힐레멘은 그녀들의 가운데로 질질 끌려 나갔다. 너무도 당황한지라 미처 싫다고 거절할 틈도 없었다. 아사신은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힐레멘이 당황하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흔들어 놓는 낯선 남자여. 안개처럼 나를 두르고 풀어주지 않네. 굽 달린 잔에다 술을 마셔요. 그러면 당신은 내 사랑. 떠도는 새도 부드러운 바람도 훔쳐가지 못할 내 사랑. 남편이 되어 주겠네.”
엉거주춤 서 있는 힐레멘에게 처녀들이 나비처럼 날아들었다. 그녀들은 정숙하지 못했다. 남자들은 죽기 쉬웠고 자손을 남기기 위해선 한남자만을 위한 정조 따위 지킬 수가 없었다. 경기가 좋지 않을 때에는 창녀가 되어 손님을 받아야 할 때도 있었다.
 “누가 내 마음에 멋대로 들어왔나요. 누가 손을 내미나요. 낯선 남자여. 아침이 오기 전에 내 침대에 누워주세요.”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꿈쩍도 못하는 힐레멘을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들에게 골탕 먹는 남자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아사신은 오랜만에 느끼는 인간다운 행복과 감정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한참을 신나게 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확 잡아끌었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자 짙은 갈색 눈동자의 처녀가 아사신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와 춤춰요.”
 “아니 나는······!”
 그러나 말릴 세도 없이 아사신은 처녀에게 휩싸이고 말았다. 여러 갈레로 머리를 땋아 내린 처녀는 잘랑잘랑 발찌를 흔들며 아사신을 잡고 흔들었다. 남자들은 힐레멘보다 더 엉거주춤한 자세로 여자에게 농락당하는 아사신의 모습에 박장대소를 했다. 여자들이 천을 휘둘러 힐레멘에게 감고 그를 중심으로 어지럽게 돌았다. 힐레멘도 곧 정신을 차리고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그녀들의 춤에 화답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로 깨끗하고 아름다워 나중에 남자들이 함께 여행을 하며 돈을 벌어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뱅글이 부딪히는 소리. 흥겨운 피리소리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춤추고 놀던 사람들은 달이 중천에 뜨자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곧 하나 둘 여자들과 함께 장막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힐레멘은 한참 전에 여자들에게 끌려가버렸는지라 아사신은 자신과 춤추던 처녀와 어색하게 남겨져버렸다. 합승을 허락한 남자는 그가 처녀와 동침할거라 생각했는지 잘 곳을 정해주지 않은 채 사라져버렸기에 아사신은 할 수 없이 모닥불 옆에 자리를 잡았다. 운이 나쁘게도 자청해서 불침번 노릇을 해야 할 모양이었다.
“이름이 뭐에요?”
타닥타닥 불꽃을 튀기는 모닥불을 쑤시며 처녀가 물었다.
 “아사신···이라고 합니다.”
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사신. 까마귀라는 뜻이군요.”
 “그걸 어떻게?”
 아사신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데 떴다. 고대신어가 완전히 사라진 이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아들은 사람은 이 처녀가 처음이었다.
 “우리 모든 르브룩들의 조상은 함마인이랍니다. 대륙이 갈라졌을 때 무슨 이유인지 함마땅에 들어가지 못해서 팔시아 대륙을 떠돌면서 살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지요. 때문에 이 대륙에서 신을 섬기는 몇 안 되는 민족이 되었어요.”
 처녀는 수줍게 웃어보였다.
 “내 이름은 소사린이에요. 옛 강의 여신의 이름이랍니다.”
 처녀가 이름을 말하는 순간 아사신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천진하게 웃음 짓는 처녀의 얼굴위로 순식간에 다른 여인의 얼굴이 겹쳐졌다. 이제는 아문 줄 알았던 상처가 꿀럭꿀럭 소리를 내며 심장위로 터져 흘렀다.
 순진한 작은 얼굴과 영롱한 눈동자. 탐스러운 머리카락. 다정한 말소리. 수줍은 미소.
 순식간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버렸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되돌아보지 않았던 과거가 순식간에 되살아나 그때의 상처를 고스란히 헤집어냈다.
 “아사신. 아사신. 왜 그래요?”
 소사린은 아사신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자 당황해서 물었다. 아사신은 가만히 눈을 감고 눈물이 그치기를 기다렸지만 눈물은 끝도 없이 흘러내려 소사린을 당황하게 했다.
“···아사신.”
어쩔 줄 몰라 하던 소사린은 아사신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고 앞뒤로 흔들어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죽은 연인과 같은 이름의 처녀에게 다정한 위로를 받자 아사신은 점점 감정이 격해져서 그만 눈물을 멈출 수가 없게 되었다.
 “쉬- 괜찮아요. 괜찮아.”
 소사린은 마치 아기에게 하듯이 아사신을 끌어안고 낮고 조용한 노래를 불러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흔들리는 불빛을 조용히 응시했다. 다정한 르브룩 처녀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아스라이 밤하늘을 흘렀다.

 “빨리 걸어라. 빨리-.”
 상인 아크람은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차며 독촉을 했다. 그들이 지금 지나는 곳은 소르데라 국경요새 근방으로 전쟁이 일단락되었다고는 해도 피하고 싶은 지역임은 틀림없었다.
 “전쟁이 나는 바람에 다들 지갑이 얼어붙었어.”
 아크람의 동료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소르데라뿐 아니라 그 주변국들도 모두 상권이 얼었어. 소르데라가 어이없이 무너진 게 대단한 충격 인가봐. 하긴 나도 소르데라가 전쟁에서 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 말이야.”
“우리같이 소소한 장사치들이야 그렇다 쳐도 소르데라와만 거래를 하던 무역업자들은 상세권을 잃게 생겼으니 큰일이야.”
두 사람은 앞으로의 향방을 의논하며 느릿한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멀리서 말이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크람은 고개를 길게 빼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다섯 필의 말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아크람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아아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드는데······.”
“그러게. 국경수비대가 순찰하지 않은 뒤로 도적이 출몰한단 말은 들었지만 설마 아니겠지?”
두 사람이 걱정하고 있는 사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들은 성큼 다가왔다. 그들은 모두 두건이나 망토로 몸을 감싸고 있었고 타고 있는 말은 모두 훌륭한 준마였다.
 “물어볼 것이 있다.”
 아크람들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그들은 보자마자 다짜고짜 하대를 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남자들에게서는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금발에 푸른 눈을 한 키 큰 남자와 잿빛머리의 남자를 찾고 있다. 잿빛머리의 남자는 무척 말랐을 것이다.”
 아크람은 동료와 눈짓을 교환했다. 며칠 전 그들이 보았던 남자들이 기억났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얼마 전에 저희가 황야에서 마주친 남자 중 하나가 푸른 눈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건강이 굉장히 나빠 보이는 남자였습니다.”
“간이 나쁘다고 했었지. 배만 나와 있었거든.”
아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러고 보니.”
“배가 나온 남자라고?”
갑자기 말을 탄 남자의 분위기가 무시무시해졌다. 남자는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남자가 뿜어내는 위압감은 강렬해졌다. 남자의 말이 푸륵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아크람은 황급히 고개를 수그렸다.
 “배가 나왔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농담으로 아이라도 가진 게 아니냐고 했습지요.”
“그들은 어디로 갔지?”
“빌라카로스 쪽으로 갔을 겁니다. 우리가 마주친 곳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거기거든요. 아마도 맞을 겁니다.”
남자는 자신의 일행 중 한명에게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물어보더니 곧 말에 박차를 가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남겨진 아크람과 그의 동료는 그들이 일으킨 흙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쓰며 공손하게 허리를 구부렸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아크람이 고개를 들었다.
“지나갔나?”
“그런 거 같네.”
두 사람은 곁눈질을 하며 슬금슬금 얼굴을 들었다. 남자들은 멀리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가고 있었다.
“그 살기를 느꼈나? 부모님 원수라도 쫓고 있나 했지 뭐야.”
“아무튼 그 재수 없는 남자들에게 행운이나 빌어주자고.”
두 상인은 대화를 마치고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어찌됐던 그들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집이 없는 르브룩인들의 역사는 차별과 고통의 역사였다. 그들은 가난을 입고 마셨으며 의사 없이 병과 싸웠고 남편 없이 아이를 키워야했다. 함마 미개인들이 그들의 조상이었고 그로 인해 이유 없이 강간당하거나 살해당하기도 했다. 경멸의 손가락질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브룩인들에게서는 싱싱한 활기가 넘쳐흘렀다.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들이 그랬던 것처럼 르브룩들은 삶에 대한 강한 열의가 있었고 자신이 처한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서 결코 절망하는 법이 없었다. 기근이 든 곳을 지나게 되면 여자들은 몸을 팔았고 때로는 어린 남자아이들도 몸을 팔아야 했다. 그래도 살아있는 것이 어디냐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먹는 것도 군공하여 돌판에 구운 밀가루 떡을 거의 매일 먹다시피 했으며 그나마도 다른 잡곡을 섞어 양을 부풀린 것이 많았다.
 그들이 예측할 수 없는 앞날에 대처하는 방법은 웃음이었다. 웃음은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오락이었으며 지친 삶과 다친 몸뚱이를 치료해주는 유일한 의사였다.
소사린은 이제 막 열여덟 살 된 처녀로 어머니는 그녀가 열 살 때 몹쓸 병에 걸려 죽었으며 아버지는 모른다고 했다. 첫 경험을 치른 것은 2년 전으로 지독히도 가난한 곳을 지날 때 먹을 것이 없어서 그곳 귀족에게 몸을 팔았어야 했다고 했다. 그들 무리에서 유일한 처녀는 자기 혼자였으므로 처녀를 바치는 대가로 후한 돈을 받을 수 있었고 그 돈으로 그해 겨울을 났다고 했다. 그녀는 르브룩이었고 르브룩은 지나온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아직 아이를 낳은 적은 없지만 언젠가는 좋은 남편을 만나 넷 정도는 낳고 싶다고 수줍은 듯이 고백하였다.
 아사신은 이 처녀가 무척 좋았다. 단순히 소사린과 이름이 같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침햇살처럼 싱그럽게 반짝였고 삶에 대한 강렬한 호기삼과 집착이 있었다. 그녀는 빼어나게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게 해주는 천연적인 강장제와 같았다.
 사실 처녀는 소사린보다 수라킨을 더 닮아 있었다. 때때로 보여주는 강인한 결단력이나 그러면서도 애처럼 귀엽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은 아사신으로 하여금 수라킨을 생각나게 했다.
아사신은 그녀에게 직접 만든 선물을 주었다. 그녀가 이름을 받은 강의 여신 소사린을 조각한 것으로 여신이 아름다운 긴 생머리를 바닥에 늘어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었다. 조각상을 받은 소사린은 무척 기뻐하며 소중하게 간직하겠노라 대답했다.
 간만에 마음의 여유를 찾게 되면서부터 아사신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이 모든 폭풍 같던 일들이 잠시 잠잠해지자 한밤의 도적처럼 아사신의 마음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외로움은 방어도 하지 못한 새에 물밀듯 밀려와 아사신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아사신은 수라킨이 보고 싶었다. 자신의 작은 화단도 보고 싶었다. 신성수 시오사라는 여전히 개 줄에 묶여 밖에서 길러지고 있는지도 궁금했고 타스가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걱정되었다. 타스가는 강인한 전사였고 그렇다면 전쟁에 따라 나왔을 것이다. 전쟁에 나왔다면 다친 곳은 없는지. 가리시네는 아이를 낳았는지. 이웃집 따미 할멈 신경통은 나았는지. 부지런한 다보 아저씨는 밭은 갈았을지.
그리고 야스카산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사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였다. 야스카산을 생각하면 심장이 너무도 답답해져왔다. 아직도 귓가에 배를 뒤쫓던 야스카산의 울부짖음이 이명처럼 울리고 있었다.
“왜 한숨을 쉬고 그래요?”
힐레멘이 옆으로 기어들어오며 물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요.”
“뭐가요?”
“이런 말 하면 우습지만, 다 버리고 온 주제에···두고 온 것들이 보고 싶어졌어요. 수라킨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제가 돌보던 화단은 잘 있을지. 뭐 그런 것들이요.”
“돌아가고 싶습니까?”
아사신은 힐레멘을 똑바로 바라보고 피식 웃었다.
 “설마요. 그럴 리는 없어요.”
여행을 계속할수록 날씨는 건조하고 더워졌다. 아사신은 갈수록 불러오는 배 때문에 곤욕스러웠다. 눈치가 좋은 여자들은 아사신이 배만 올챙이처럼 나왔다고 놀리기도 했다.
 아사신은 자신의 배속에 든 것을 아직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알 수가 없었다. 아이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낳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막상 돌을 주워들고 배를 내리치려다가도 이 아이가 앞으로 태양의 족장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면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사신은 신을 믿고 있었고 자신의 마음대로 다음대의 족장을 해할 수가 없었다. 망설이는 사이에도 배는 점점 불러만 왔다.
아사신이 딱 한 가지 이 아이에게 감사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밤만 되면 발작하듯 일어나던 짐승 같은 성욕은 아이가 자랄수록 점점 감퇴하는 것이었다. 신부가 된 이상 인간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이 필요로 하는 족장의 신성력을 뱃속의 아이가 자랄수록 충당해주고 있었다. 아이가 자랄수록 신성력이 강해지는지 아사신의 발작도 잠잠해졌다.
 그러나 보름의 달밤만은 배속의 아이만으로는 부족했다. 완전히 둥글어진 달빛이 세상을 내리 쬐이면 제어할 수 없는 정욕이 그때처럼 치밀어 올랐다. 달빛은 혈관을 돌고 심장을 파고들어서는 마침내는 뇌를 갉아먹어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본격적인 사막으로 접어들기 전에 발견한 작은 샘터에서 르브룩들은 일찍 장막을 쳤다. 몇몇 건장한 남자들이 검은 염소 털로 된 덮개를 씌우고 버팀목과 밧줄을 세우자 장막이 금방 완성되었다. 그들은 술과 고기를 꺼내고 춤을 추고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삶이 고단한 그들에게는 하루하루를 즐겁게 사는 것이 제일 큰일이었다.
아사신에게도 함께 춤추고 놀자는 권유를 했으나 아사신은 피곤하다고 대답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자러가기 전에 아사신은 처녀들에게 시시한 점괘를 봐주는 일로 먹고사는 점쟁이 할멈에게 들러서는 잠을 푹 잘 수 있게 해준다는 약을 받아 마셨다. 할멈에게 혹시 아이를 지우는 약은 없는지 슬며시 물었다가 남자가 그런 건 알아서 뭐하냐는 핀잔만 잔뜩 얻어먹었다. 아사신을 발견한 소사린이 날듯이 달려와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같이 춤춰요.”
“미안해요. 몸이 좋지 않아요.”
서운해 하는 소사린을 떼어놓고 아사신은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좋은 꿈을 꿀 수 있게 해준다는 할멈의 약은 과연 효과가 있는지 아사신은 금방 잠이 들 수 있었다. 조금씩 발작이 일어나던 몸이 꼬박꼬박 졸음에 쌓여 감각과 정신을 멀리 떨어트려주었다. 멀리서 르브룩 여인들의 높은 웃음소리가 자장가처럼 번져 흘렀다.
 챙챙 거리는 뱅글 소리와 발찌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힐레멘은 우둑하니 서 있었다. 소사린이 처녀들의 가장자리에 서서 높은 목소리로 전통가요를 부르고 있었다. 남자들의 무리가 여자들의 무리와 섞여 현란하게 춤을 추며 돌아가자 힐레멘도 그 사이에 섞여들었다. 자연스럽게 소사린에 접근한 힐레멘은 소사린의 귀에다가 작게 소곤거렸다.
“아사신을 좋아하나요?”
“왜요?”
소사린은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힐레멘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베일 뒤러 손을 넣어 뒷목을 움켜잡고 깊이 눌렀다. 소사린은 목이 졸린 소리를 냈다.
“경고합니다. 아름다운 소사린.”
힐레멘의 목소리는 노래라도 부르듯이 달콤했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처녀들이 기뻐하며 웃었다.
“아사신에게 접근하지 마세요. 당신을 다치게 하기 싫습니다. 그를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예를 들어···얼마 전에 그와 부둥켜안고 있었던 것 말입니다. 아주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목···목을 좀······.”
“내 말 명심해요 소사린.”
힐레멘은 그녀의 목에서 힘을 풀었다. 베일과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뒷목은 새파랗게 멍이 들어 있음이 분명했다. 언제나처럼 방긋 웃으며 르브룩인들을 돌아보는 힐레멘의 얼굴은 평상시와 똑같았다. 소사린은 두려운 표정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아사신은 깊은 잠 속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은 아사신이 보고 싶어 하던 모든 곳을 보여 주었다.
 아사신은 어머니가 화덕에서 빵을 찌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찡그리거나 울고 있지 않았고 미쳐있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사신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몇 안 되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그들이 마을 외곽으로 쫓겨나기 전의 기억이었다. 어머니의 고운 손이 아사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수라킨이 문을 열고 달려와 껑충하게 자라버린 자신의 키를 아사신에게 비교해 보았다.
 ‘이만큼 자랐으니까 곧 오빠를 따라잡을 거야.’
 수라킨이 깔깔 웃으며 치맛자락을 흔들며 다시 뛰쳐나갔다. 봄의 화창한 햇살이 그녀의 등 뒤로 쏟아졌다.
 소사린과의 첫 입맞춤의 순간도 떠올랐다. 아사신은 미소를 지었다.
 ‘내달에 성혼하자.’
‘난 좋은 아내가 될 거야.’
달콤한 소사린의 입술의 감촉을 아사신은 소중하게 음미했다. 이 꿈이 깨고 나면 다시는 못 볼 연인이었다. 아사신은 꿈에서도 그녀가 죽은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것에 암울함이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아사신은 자신의 입술위에 느껴지는 보드라운 감촉이 까끌까끌하고 거친 것으로 바뀌었음을 알았다. 억세고 두꺼운 팔이 불쑥 튀어나와 아사신의 몸을 거미처럼 잡아당겼다. 평평한 가슴이 맞닿고 뜨겁고 축축한 혀가 턱을 벌리고 뛰어 들어왔다. 아사신은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그만.’
아사신은 팔을 떠밀었다. 그러나 힘의 주박은 너무도 완강하여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었다. 야스카산의 팔이 허벅지가 머리카락이 자신의 것과 무분별하게 섞이며 음란하게 탐해들었다.
 아사신은 이제 자신이 밀쳐내는 것인지 끌어안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잇새로 짧은 욕설을 내뱉으며 옷을 벗어던졌다. 천 조각이 달구어진 석쇠처럼 몸을 조여 왔다. 반라가 된 두 사람은 얼굴을 핥고 입술을 먹고 피부를 더듬었다. 탐욕스럽고 음탕하게 서로의 몸을 음미했다. 동물적인 쾌락을 쫓아 아사신은 입을 벌려주고 성기를 마찰시켰다. 흔들리는 두 개의 성기가 잔뜩 부풀어 올라 끄덕대고 있었다.
 ‘어서.’
아사신은 애원했다. 이 남자와 교합할 수 있다면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그 성기에 입이라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서.’
‘아사신.’
야스카산은 신음하며 아사신의 다리를 번쩍 들어올렸다. 꼴사납게 들어 올려 진 엉덩이가 기대감에 바르르 떨었다. 야스카산은 급하게 자리를 잡고 자신의 것을 아사신의 구멍에 맞추었다. 곧 좁은 구멍 속으로 두껍게 발기된 남근이 힘차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사신은 흐릿한 머리를 흔들었다. 엉덩이를 벌리며 자신의 내부로 들어오려고 애쓰는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크으-!’
남자는 제대로 들어가지지가 않자 입술을 깨물며 신음하더니 다시 한 번 허리를 흔들었다. 아사신의 항문이 남근을 삼키기 위해 무리하게 벌어지자 둔통이 하체위로 엄습했다. 이건 뭔가 이상했다. 꿈치고는 지나치게 현실감이 있었다. 아사신은 눈에 초점을 모으려고 애를 썼다.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성기를 밀어 넣고 있는 남자는 힐레멘이었다.
 “힐레멘!”
아사신은 경악하여 몸부림을 쳤다. 그 바람에 겨우 머리 부분이 들어가 있던 힐레멘의 것이 다시 빠져버리고 말았다.
“힐레멘!!”
“아사신!”
아사신은 후다닥 일어났다. 약기운으로 인해 몸이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골반에 천을 감싸 쥐고 죽일 듯이 노려보자 힐레멘도 벌떡 일어나 핏발선 눈동자로 아사신을 노려보았다. 그는 분한 얼굴을 했다.
 “당신이 먼저 유혹했잖아···. 왜 그런 눈을 하는 거야.”
“야스카산인줄 알았단 말이야!”
힐레멘의 질타하는 표정에 아사신이 고함을 질렀다.
 아사신이 대답하자마자 힐레멘의 얼굴이 쇼크로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아사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싸늘하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힐레멘이 고개를 돌리고 하- 하고 어이없는 웃음소리를 내더니 곧장 앞으로 걸어와 아사신의 팔을 엄청난 악력으로 붙잡았다. 아사신이 몸을 빼자 허리를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씨근덕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 남자가 그리운 거야? 그 남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거야? 거 대단한 지조로군!”
“아니야!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야!”
아사신은 고함을 지르며 힐레멘에게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힐레멘의 눈동자는 불타는 듯 했다. 아사신을 강하게 움켜잡고 잇새로 내뱉듯이 말했다. 그의 얼굴에서는 일종의 광기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차디찬 분노로 얼어붙은 얼굴로 소름끼치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의 그 잘나빠진 족장과 신부에 대한 진실을 말해드릴까요?”
“진실?”
아사신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힐레멘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당신들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신의 밀실? 신의 신부? 그 진실한 뜻을 가르쳐드리지요.
 아버지 주신 태양은 자신의 여동생 달을 강간하여 세상을 낳았습니다. 그들의 결합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름답지도 고귀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강간마의 자손입니다.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비틀어지고 왜곡된 신의 그림자를 닮고 그 흉내를 내는 잔상일 뿐입니다. 태양신의 권능과 애욕을 피해 달은 새벽이 밝기 전에 새파랗게 질려서 서쪽 하늘로 도망가 버렸고 영원히 달을 찾을 수 없게 된 해는 그 그림자를 빌어먹게도 인간에게서 취하게 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신부. 당신입니다 아사신.“
힐레멘의 손가락이 똑바로 아사신을 가리켰다. 아사신은 눈을 부릅뜨고 힐레멘을 노려보았다. 힐레멘의 혀는 멈추지 않고 신랄하게 지껄였다.
 “대륙을 두 동강 낸 후로 신들은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지요. 그러나 주신 태양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함마의 한 부족을 선택하여 그 족장을 통해 신부를 취했습니다. 선민의식? 당신들은 주신의 성욕을 풀기 위한 씨받이일 뿐입니다. 족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신의 밀실 따위 신부를 가둬두고 그 독점욕을 야금야금 채우기 위한 공간일 뿐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고요? 그건 당신들의 그 잘나빠진 신이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어미만이 아닙니다 아사신. 모든 신부는 불행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족장과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신은 질투심에 미쳐버렸습니다. 네, 미쳐버렸지요. 그것을 과연 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한낱 독점욕으로 미쳐버린 빌어먹을 귀신이 아닐까요?”
“그만해!!”
아사신은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힐레멘은 멈추지 않았다.
 “당신들은 이루어 질 수 없어! 신은 족장과 신부가 사랑하도록 놔두지 않아! 신은 신부를 원하고 족장은 신부를 사랑하고 신부는 족장을 사랑하게 돼.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정해진 길이야. 당신은 틀릴 줄 알았지. 당신은 완강하게 야스카산을 거부했으니까. 그러나 당신도 마찬가지군. 족장이 신부를 사랑하는 것은 족장이 신의 분신이기 때문이야. 신부도 족장을 사랑하게 되지. 하지만 그들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어. 절대로! 절대로! 야스카산과 당신도 마찬가지야. 절대로 이루어 질 수 없어!”
힐레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사신은 주먹을 날렸다. 온몸의 힘을 실어 강하게 그의 얼굴을 때렸다. 힐레멘의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어두침침한 장막 안은 격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거친 숨을 헐떡였다.
 힐레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머리를 그러잡고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구겨진 얼굴에는 비밀을 털어놓아버린 자 특유의 허탈함과 후회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아사신에게서 손을 놓고 뒷걸음질 쳤다. 아사신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머릿속이 벼락을 맞은 것만 같았다.
 불현듯 모든 의문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아사신은 도무지 알 수가 없던 어머니의 모든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사랑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었다. 후계자를 낳으려고 발악한 것도 그렇게 하면 돌아봐 줄줄 알고 그랬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것 때문에 미친것이 아니었다. 바르바칸을 사랑해서 미쳐버린 것이었다.
 화끈한 인두가 심장위에서 타들어가는 것만 같아 아사신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엉망진창으로 짜부라진 심장이 숫제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릴리 없다-!
 아사신은 이를 까드득 소리가 나도록 깨물었다. 사랑 따위 개나 주라지. 부정당한 마음이 김을 내며 타올랐다. 여기 살아있다고 쿵쿵 소리를 내며 울렸다. 그러나 아사신은 그것을 독하게 외면했다. 이제 와서 그런 것 따위 깨달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사신은 벌떡 일어나 장막을 들추었다. 황량한 평원이 보였다. 멀리 르브룩인들이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떠나야겠어요.”
멍하니 아사신이 중얼거리자 힐레멘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힐레멘은 소사린과 아사신이 다정하게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것을 목격한 순간부터 그녀를 싫어하고 있었다. 소사린과 헤어진다는데 그가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마음이 약한 아사신이 죄책감이건 동정심이건 소사린과 얽히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짐이 별로 없었다. 수통 가득 물을 채우고 르브룩인들이 먹는 음식을 약간 챙겼다. 되도록 부피가 작고 오래 먹을 수 있는 건과나 육포로 챙겼다. 밖에는 먼동이 터오고 있었고 르브룩인들은 모닥불 주위에 모여 음식을 먹고 있었다.
 갑자기 힐레멘이 칼을 빼어들고 나무 수풀 사이로 겨누었다. 아사신은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경계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소사린이 창백한 얼굴로 서서히 일어났다.
 “떠나는 건가요?”
“소사린.”
아사신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잡아주었다. 크고 동그란 소사린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흘렀다. 이 어린 처녀는 아사신을 마음속으로부터 흠모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미안해요. 말할 수 없어요.”
“아사신.”
힐레멘이 눈짓을 했다. 르브룩들이 잠을 자기 위해 이 주변으로 몰려올 터였다.
 “그만 갑시다.”
아사신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만 흘리는 소사린의 손을 마지막으로 힘주어 잡아주고 등을 돌렸다.
 “잠시 만요!”
소사린이 뛰어와 그들을 붙잡았다. 그녀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아사신에게 매달렸다.
“노새를 한 마리 내줄게요. 그걸 타고 가요. 좀 더 가면 이제 정말로 사막이 시작 되요. 걸어가다가는 말라 죽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괜찮아요. 한 마리 정도 없어졌다고 우린 죽지 않아요. 르브룩인걸요.”
소사린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환하게 웃어보이고는 곧 노새를 한 마리 끌고 왔다. 힐레멘과 아사신은 감사의 표시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혹시.”
아사신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이 부근에 신전이 있나요.”
 소사린은 멀리 동쪽을 가리켰다.
 “어릴 때 저쪽에서 달의 신전을 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굉장히 옛날이라 아직 남아 있을 까는 모르겠어요.”
“감사합니다 소사린. 당신에게 신의 축복을.”
 아사신은 소사린의 이마에 가볍게 축복의 키스를 해주었다. 커다란 눈망울이 눈물로 그렁그렁했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척 외면하기가 괴로웠다. 아사신은 진심으로 그녀가 행복하기를 원했다. 소사린의 이름을 가진 처녀가 불행해지는 것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노새의 등에 반쯤 기대듯이 누워 아사신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겼다.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몸에 땀이 축축이 배이면서 나른한 졸음이 엄습해왔다. 약 기운은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힐레멘이 간간히 거는 말소리를 자장가 삼아 아사신은 눈을 감아버렸다. 지독하게 머리가 아팠다.
 녹초가 되어 늘어지듯 잠들어있던 아사신이 눈을 뜬 것은 시끄럽게 캉캉 울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얼마나 잠에 취해있었던지 노새의 잔등은 침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무슨 일이지.’
아사신은 눈을 비비다가 문득 노새가 가만히 멈춰서 있는 것을 까달았다. 머리를 흔들어 어지러운 정신을 다듬자 부옇게 주변 풍경이 보였다. 힐레멘이 웬 남자들과 더불어 칼을 겨누고 있었다. 캉캉 거리는 소리는 그들이 싸우는 소리였다. 아사신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멍하니 다시 눈을 비볐다.
 “힐레멘?”
“정신 차렸으면 피해요!”
힐레멘이 날아오는 칼을 막으며 외쳤다.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힐레멘의 머리 위를 스쳐지나갔다.
 “힐레멘!”
“시간의 파쇄! 칼은 녹이 슨다. 연계를···.”
힐레멘은 마력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남자들의 움직임이 너무도 빨라 수인과 명령어를 제대로 펼칠 수가 없었다. 한 쌍의 빛나는 장검이 자신의 어깨위로 떨어지자 힐레멘은 욕을 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거뭇거뭇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가 능글능글한 시선으로 아사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저놈은 귀족 나부랭이겠고 너는 저놈의 수행 하인이렷다?”
“비켜라. 다치기 전에.”
“다치는 건 우리가 아니라 너겠지!”
“힐레멘!”
아사신은 노새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세 명의 남자가 동시에 힐레멘을 덮치고 있었다. 남자들의 칼날이 무시무시한 빛을 뿜으며 힐레멘에게 겨누어졌다. 남자들은 도적무리로 몰려다니며 장사치들을 노리는 놈들이었다. 그들은 노새를 타고 있는 아사신과 그를 보호하며 걷고 있는 힐레멘을 보고 도망 나온 귀족과 그 부하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보따리에 든 거 순순히 내놔!”
“거기 든 건 육포뿐이니 헛짓거리 하지마라.”
힐레멘이 삐딱하게 뇌까리곤 덤벼들었다. 아사신은 안절부절못하며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다가 허리춤에 꼽혀있는 단검을 뽑아들었다. 네 명의 남자가 정신없이 칼을 부딪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3대1로 잘 싸우고 있지만 이 싸움이 오래되면 기력이 쇠한 힐레멘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아사신은 남자의 뒤로 달려들어서 이를 꽉 깨물고 있는 힘껏 남자의 등에다 칼을 박아 넣었다. 두 번 망설이지 않고 찔러 넣자 날카로운 칼날은 살덩이가 썰리는 감각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남자의 등에 꽂혀들었다. 남자의 몸은 이물질을 경계하며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그는 천천히 뒤로 돌아보았다. 그러자 부들부들 떨면서 손잡이를 잡고 있던 아사신이 흠칫 놀라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어-.”
칼날이 폐를 관통했는지 남자의 입에서 울컥 피가 흘렀다. 그는 자신에게 박혀있는 칼과 아사신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윽고 남자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네······.”
“피해요 아사신!”
칼에 찔린 남자의 동료가 주춤 다가서자 힐레멘이 소리를 질렀다. 남자의 멍한 표정이 곧 극도로 분노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는 등에 박힌 칼을 뽑아내더니 고함을 지르며 아사신에게 덤벼들었다.
 “이런 쥐새끼가!”
아사신은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 안고 옆으로 뛰었으나 남자가 더 빨랐다. 은빛 실선이 눈앞을 스친다고 생각한 순간 허리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사신!”
아사신은 옆구리에서 뜨거운 것이 철철 흐르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찌걱- 하는 소름 돋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칼이 살을 찢어놓고 빠져나갔다.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내렸다.
 “아사신!”
힐레멘의 비명처럼 이름을 불렀다. 갑자기 세상이 느리게 움직였다. 아사신은 자신의 손이 땅을 짚는 모습을 제 삼자가 관찰하듯 느리고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시야가 빙그르르 어지럽게 돌더니 곧 극심한 어지러움이 덮쳐와 아사신은 크게 비틀거렸다. 옆구리에서 흐르는 붉은 피는 손과 옷을 시커멓게 적시고 메마른 대지위로 흘러내렸고 황무지는 그 피를 탐욕스럽게 받아 마셨다.
“히······.”
아사신은 힐레멘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의식이 파르르 신경질적으로 타올랐다가 깜깜해져왔다.
“빌어먹을, 아사신!”
캉캉 거리는 소리가 다시 시끄러워졌다. 아사신은 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몇 번이나 맞이했던 죽음의 순간에 최초로 떠올린 이름이었다. 몇 달 간 입 밖으로 내지도 않은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는 것만 같은 이름이었다.
아사신의 입술은 아주 잠시 벌어졌다가 곧 조용히 다물렸다. 그 입에서 새어나온 소리는 아주 옅은 입김처럼 공중에 부딪혔다가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못하고 낙엽처럼 바스러졌다.



 야스카산은 식사를 하다말고 벌떡 일어났다. 너른 황야위로 기억에 있는 목소리가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가 포말처럼 흩어졌다.
 “족장?”
야스카산이 먼 곳을 뚫어져라 응시하자 두건을 쓴 전사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족장? 왜 그러시는 지요?”
“족장?”
남자들이 야스카산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야스카산은 핏발 선 눈으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황량하고 끝없는 벌판만이 짜증나도록 멀리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야스카산은 눈을 부릅떴다.
“···분명히 들었는데.”
“족장. 무엇을 들었다는 것입니까?”
“분명히···분명히···.”
야스카산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내부의 목소리들이 벌레처럼 바르작거리며 심장을 휘감아 돌았다. 신부가 부르고 있었다. 신부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노라 심장이 아우성을 쳤다.
“나와라-!”
야스카산은 고함을 질렀다. 이 대륙에 온 이후부터는 신성력이 줄어들어 제대로 능력을 운용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답답하여 미칠 것만 같았다.
“나타나! 내 앞에 나타나라!”
“족장! 왜 이러십니까!”
타스가는 야스카산이 화살 맞은 수사자처럼 으르렁대자 몹시 당황하여 그의 허리를 잡았다. 그러나 야스카산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이를 드러내고 공중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놔라! 분명히 들었다! 아사신의 목소리다. 아사신의 목소리다!”
“족장, 제발! 저희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사신---!!!”
육체를 벗어던지고 갈가리 부숴버리고 영혼이 파쇄된다.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이름을 불렀다. 만날 수 없음이. 만질 수 없음이 너무도 깊어 이제는 병이 들 것 같았다. 자신이 외치는 이름이 고함인지 비명인지 절규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흰자의 혈관이 터져 핏발이 서고 온몸의 신경이 단 한 사람을 쫓아 일제히 곤두선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아사신이 자신을 부를 리가 없다. 이 긴 시간동안 고집 세게 불러주지 않던 이름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야스카산이 날뛰는 기세가 더욱 흉흉해지자 타스가는 야스카산이 미친 줄 알고 기겁을 하여 붙잡았다. 야스카산은 한참을 더 그렇게 발악하고 고함을 질렀지만 네 명의 남자가 들러붙어 저지하자 결국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아사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머리를 식혀야만 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야스카산은 수통을 꺼내 머리에 부었다. 미지근하게 달아오른 물이지만 머리를 헹구자 정신이 조금 드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남았지?”
“앞으로 삼일정도 가면 상인들이 말한 빌라카로스가 나옵니다.”
 야스카산이 길잡이 역할로 끌고 온 소르데라의 젊은 기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그는 이 낯선 이방인이 미치지나 않았나 두려운 표정이었다.
“일어나라. 출발한다.”
야스카산은 성큼 말에 올라타 박차를 가했다. 전사들은 강행군 끝에 휴식을 취하기는커녕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야스카산의 말에 두 말 하지 않고 말에 올라탔다.
 집념에 불타는 야스카산의 옆얼굴은 그 어떤 반론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해보였다.



 산들바람처럼 차갑고 시원한 것이 뺨과 콧잔등을 어루만지는 감각에 아사신은 끄응-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떨리는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아사신. 정신이 들어요?”
“으······.”
“아사신. 제발. 정신을 놓지 말아요.”
아사신은 이마를 찡그렸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힐레멘인 것은 알겠는데 눈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어떻게 됐어요?”
아사신의 목소리는 힘없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입을 열 때마다 몹시 힘에 부쳐 보였다. 말을 할 때마다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허리를 움켜쥐고 신음하자 힐레멘이 바로 누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사람들···어떻게···.”
“모두 물리쳤어요. 걱정 말아요 아사신.”
“도와주고 싶었는데···또 짐만 되네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힐레멘의 목소리가 흐트러지며 똑- 하고 뜨거운 것이 뺨 위로 떨어졌다. 아사신은 눈을 깜빡였다.
 “힐레멘. 울어요?”
“······.”
힐레멘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또 한 방울의 눈물이 아사신의 얼굴위로 떨어졌다. 그것은 아사신의 그늘진 눈가에 떨어져서 해쓱한 뺨 위로 흘러내렸다. 그 모습은 아사신이 우는 것처럼 보였다.
 “울어요?”
“안 울어요.”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마구잡이로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었다. 아사신은 아픈 와중에도 피식 웃어버렸다.
 “우는 거 맞잖아요.”
“칫.”
힐레멘이 작게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 아사신은 옆구리에 구멍만 안 뚫렸어도 앞으로 돌아가서 우는 모습을 볼 텐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사신은 상처를 더듬었다.
“나는 분명 칼에 찔렸었는데···.”
손가락으로 칼에 찔린 부위를 더듬자 여러 겹의 천으로 꽉 압박되어 있었다. 힐레멘이 아사신의 손을 강하게 잡아주었다. 아사신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아이는······.”
“아사신.”
“아이, 아이가···.”
아사신은 몸을 일으켰다. 핏기가 하얗게 가신 손가락으로 배를 더듬자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둥근 배가 잡혔다. 아사신은 배를 잡고 웅크렸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이는 괜찮습니다.”
힐레멘이 침착한 손길로 등을 감싸주었다. 아사신은 파리한 얼굴을 들었다. 둥글게 뜨인 회색 눈동자 속에 찍힌 새까만 동공이 조금씩 뚜렷해졌다. 힐레멘의 얼굴은 씁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걱정 말아요. 당신한텐 아무 해도 없게 할 테니까.”
 힐레멘은 아사신을 꼭 껴안고 앞뒤로 몸을 흔들었다. 아사신은 눈가가 뜨뜻해졌다. 알고 싶지 않았던 두 개의 진심이 다짜고짜 눈앞으로 들이밀어진 기분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아이를 보호하고 싶은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아이가 어떻게 되었나 생각을 하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급격한 상실감이 치밀러 올랐다.
 아사신은 배에 대고 있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그러자 규칙적인 박동 소리가 쿵-쿵- 하고 손바닥을 간질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 여행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등에 고개를 댄 힐레멘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하찮을 만큼 작고 기운이 없어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귓전을 맴돌다 바스러져 버릴 만큼 가늘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 여행을 영원히 끝내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아무것도 필요치 않으니. 그냥 당신하고 나하고 영원히 이렇게···떠돌면서 살고 싶어졌습니다.”
 “······.”
아사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힐레멘의 고백은 어설펐다. 어째서 모두들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자신에게 주는 것일까. 소사린도, 수라킨도, 르브룩처녀도 그만큼 돌려줄 수 없는데도 이런 모자란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일까.
 아사신은 그런 사랑은 감당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의 인연으로 인해 얽히고 상처받고 목숨까지 잃었다. 그런 경험은 두 번 다시 알고 싶지 않았다.
어디선가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삭막한 바람이 불어와 아사신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날리었다. 아사신은 공허한 시선을 들었다.
“당신 아이를 낳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당신과 아이의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동쪽 하늘 너머가 막 떠오른 새벽별로 빛났다. 반나절 정도 정신을 잃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사신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여긴 어딜까요.”
 “아사신!”
아사신은 돌아보지 않고 가만히 하늘만 응시했다. 힐레멘은 격하게 숨을 토해내며 아사신의 어깨를 뒤로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아사신은 움쩍도 하지 않았다. 그 완고한 뒷모습은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대답할 수 없다고, 당신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고.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하겠다고······.
“아사신···아사신 나는!”
힐레멘은 서툴고 다급하게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했으나 제대로 입 밖으로 나와 주지 않았다. 무척이나 상처 입은 부위가 아플 텐데도 아사신은 곧게 허리를 펴고 앉아 결코 힐레멘을 돌아보지 않았다.
‘다 알아들었으면서······.’
 아사신을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힐레멘은 고개를 수그렸다. 이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을 격하게 토로해봤자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오히려 그나마 얻어놓은 패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머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힐레멘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입술에서 깊고 쓴 한숨이 세어 나왔다. 그는 보통 때처럼 말하려고 노력하면서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우리가 찾는 신전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진 않았을 거예요. 이대로 계속 가면 빌라카로스가 나올 겁니다.”
“그럼 어서 출발합시다.”
 아사신은 아픈 몸을 부여잡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 뒤를 힐레멘이 따랐다. 의도적으로 대답을 피해버렸지만 힐레멘은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사신은 부상을 당한지 하루가 지나자 몸의 한계를 느낄 수 있었다. 쇄약해진 몸은 오랜 발작과 고루지 못한 영양상태. 임신으로 이어진 연속적인 부담에다가 이번 일로 부상까지 겹쳐지자 극도로 약해졌다. 사실 아사신의 상태는 이런 고된 여행을 지속하기엔 몹시 나빴다. 아사신은 칼을 맞은 이튿날이 되자 탈진해버렸다.
 “안되겠군요. 르브룩들에게 돌아가야겠습니다.”
 “안 돼요. 계속···계속 가야해요.”
 힐레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사신은 신전을 찾아야 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힐레멘은 아사신을 태우고 있는 노새가 기운을 잃을까봐 성심으로 먹이고 돌보았다. 다행히 물은 아직 충분했지만 먹이가 문제였다. 초식짐승인 노새에게 말린 육포 따위를 계속 줄 수가 없었다. 얼마 못 가 노새는 병이 들고 말 것이었다.
힐레멘은 아사신과 노새를 먹이기 위해 자신은 극소량만을 섭취했다.
 사막의 모래바람역시 그들의 여행을 더디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모래바람은 그들의 발자국을 지워주는 고마운 역할도 했지만 동시에 입과 눈으로 사정없이 모래가 들어가고 아사신의 상처 안으로 모래알갱이가 튀어 들어가 상처를 더 곪게 만들었다. 모래는 너무도 곱고 부드러운 입자라 그 작고 가는 것들이 바람에 휩쓸려 입과 옷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걸어도 소사린이 이야기한 신전은 나타날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힐레멘은 르브룩에게 돌아가거나 빌라카로스로 바로 가자고 여러 번 권했지만 아사신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힐레멘이 넌지시 돌아가자고 말할 때면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며 가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거기 가야합니다. 나는···가야 합니다.”
“알았으니 말하지 마요. 데려다 줄 테니.”
힐레멘은 마르고 갈라져서 하얗게 일어난 아사신의 입술에 물을 적셔주었다.
 이 모질고 거친 환경 속에서도 뱃속의 아이는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모태의 건강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지만 아이는 악착같이 버텨주었다.
 아사신은 낮에는 비몽사몽을 헤맸고 밤에는 죽은 듯이 잠들었다.
 사실 아사신도 그렇게까지 신전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신이 버린 이 땅에서 신앙심이 남은 자들이란 천하고 멸시받는 소수민족뿐이었다. 신전이 제대로 건사되고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신전을 찾아 헤매야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신은 그곳에 가야만 했다. 그것이 뜨거운 땡볕이 내려쬐이는 황야를 횡단하며 인식하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상처는 땀과 뒤섞여 고름이 흘렀고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힐레멘은 불로 살균한 칼로 살점을 비틀어 고름을 잡아뜯어냈다. 가장 깨끗한 천으로 죽은피를 꾹꾹 닦아내고 나면 아사신은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기절해있기 마련이었다. 빌라카로스로 가면 제대로 된 치료와 깨끗한 음식과 잠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고 르브룩에게로 돌아가면 따스한 환대를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상처에 바를 무화과즙도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사신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막위의 신기루 같은 신전을 찾아 방황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 결정을 철회할 수가 없었다.
힐레멘은 이 대륙이 아사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사신은 지나치게 힘들어하고 있었고 외적인 고통보다 내적인 고갈로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이 땅에 신성력이 씨가 마른 것과도 연관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밤이 되면 두 사람은 밀랍으로 풀을 먹인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추워지는 날씨와 싸웠다. 옷이란 옷은 전부 껴입고 털이 뻣뻣한 노새를 꽉 부둥켜안고 잠이 들어도 너무도 추워서 이가 딱딱 맞부딪힐 지경이었다.
힐레멘은 자신이 옳은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과연 그 오래된 신전이 아직도 부서지지 않고 버티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다. 황량하고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사막의 한 가운데 두 남자는 서로 다른 상념에 빠졌다.
매일 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고민과 고통에 휩싸여 잠을 청했지만 아사신은 깊게 잠 들 수가 없었다.
 언제나 자신을 지배해온 환상은 더더욱 강해져서 아사신의 영혼과 몸을 분리시켜 놓고 있었다. 아사신은 꿈과 어둠을 끝없이 방황했다. 그것은 밤새 기력이 쑥 빠져버릴 만큼 힘든 경험이었다.
 어느 날 밤 문득 온 몸이 너무도 가벼워진 듯한 신기한 느낌에 벌떡 일어나보자 아사신은 땅의 지배에서 벗어나 높이 튕겨 올랐다. 너른 대지 위를 한 발자국 내딛는 것만으로도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달려 나갈 수 있었다. 휘영청 떠오른 달이 어느 때 보다 가깝게 느껴질 만큼 공중으로 떠오르기도 했다가 끝없는 땅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아사신은 아무런 구속 없이 달려 나갔다. 두 다리는 무희의 그것처럼 스스럼없이 뻗어나갔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 그 목적지는 어디인지 다시 돌아올 수는 있는 건지 따위의 의문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윽고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을 만큼 무거워지자 아사신은 얌전하게 잠이 든 한 남자를 발견하고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다. 그들이 이틀쯤 전에 지나쳐왔던 장소인 말라빠진 우물가에 기대어 야스카산이 얌전히 잠들어있었다.
‘야스카산!’
 아사신은 엉겁결에 이름을 불렀으나 야스카산과 그의 전사들은 아무도 깨지 않았다. 스스로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아사신은 입을 틀어막고 어쩔 줄을 몰라 하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자 살그머니 뒤로 돌았다.
 ‘······.’
아사신은 뒤로 돌아 선 자세에서 그대로 멈추었다. 이 감이 좋은 전사들이 이렇게 수선을 떠는 대도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힐끔 그들을 바라보던 아사신은 자신이 이들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얌전히 누워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사신은 다시 조심스럽게 야스카산에게로 다가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큰 용기가 되어 주었다. 주섬주섬 야스카산의 머리맡에 앉아서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달빛에 야스카산의 얼굴이 반사되어 시리게 빛났다.
 아사신은 이상한 느낌에 감싸였다. 이렇게 잠들어 있는 야스카산은 무섭지 않았다. 그는 아사신이 옆에 와 있는지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잠에서 깰 일도 없었다. 아니 깨어난다 하더라도 아사신을 발견할 리는 없었다.
‘여기서 뭐하는 걸까······.’
 그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두렵다거나 무섭지 않았다. 그것은 어떠한 하나의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성을 불러 일으켰다.
아사신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이렇게 여유롭게 야스카산과 있어본 적이 없었다. 그와 한 공간에 있으면 늘 숨이 막혀오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야만 했다. 그들의 관계는 윽박지르고 소리를 지르고 요구하고 거절당하고 일방적으로 휘둘러지는 관계였다. 단 한 번도 그를 이리도 평안한 마음으로 일방적으로 내려다 본 적은 없었다. 아사신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내 뒤를 쫓아오는 겁니까?’
아사신은 야스카산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물론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내가 영원히 당신을 피한다면 당신은 나를 영원히 뒤쫓을 겁니까?’
아사신은 야스카산의 볼을 콕 찔러보았다. 그것은 아무 자국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야스카산의 볼을 통과해버렸다. 아사신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있어보아야 할 일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어서 정신을 차려서 그들을 피해야만 했다.
그때,
야스카산은 번쩍 눈을 떴다. 그는 마치 처음부터 잠이 든 적 없는 사람처럼 똑바로 아사신을 직시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퍼렇게 못해 검고 깊게 번들거렸다. 아사신은 고함을 질렀다. 야스카산 역시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찾았다!”
전사들이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아사신은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야스카산의 손을 피해 급히 달려 나갔다. 야스카산의 목소리는 희열에 가득 차 있었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으아아아아!!”
 아사신은 육체가 자신을 빨아들이는 것을 느꼈다. 그의 고함소리는 길게 공중을 달렸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확 돌아왔다. 아사신은 비명을 지르며 육체를 일으켜 세웠다. 분열되었던 육체와 영혼은 합해 지며 발작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아사신! 왜 그래요 아사신!”
힐레멘이 깜짝 놀라 옆으로 뛰어왔다. 아사신은 헐떡이며 힐레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한계까지 벌어져 그 안에 나타난 경악과 두려움을 여과 없이 힐레멘에게 보여주었다.
“무슨 일이에요 대체!”
“어서 가요! 그들이 뒤따라오고 있습니다!”
“그들이라니, 누구 말입니까.”
 “야스카산이!”
아사신은 호흡을 골랐다.
 “야스카산이 뒤따라오고 있습니다. 힐레멘. 우리가 얼마 전에 지나왔던 폐허의 우물가! 거기에 그들이 있었습니다.”

 야스카산은 싱긋 웃었다. 전사들은 야스카산의 주위에 모여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본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야스카산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는 곧 싸늘한 냉소로 바뀌었다. 야스카산은 얼음처럼 차갑게 뇌까렸다.
 “찾았다.”
 본격적인 추격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모래사장위로 길게 늘어졌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는 모래, 모래의 산이었다.
 새파란 하늘아래 쏟아지는 강한 햇살을 받은 모래는 희게 빛을 발하며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막- 일체의 푸르름도 생명도 없는 장소.
 살아있는 것은 긴 꼬리를 찰랑찰랑 흔드는 독사와 모래사이를 헤집으며 독을 뿜는 도마뱀. 시체를 파먹는 독수리와 가시 돋친 선인장 뿐.
 먼 과거에는 그곳이 풍요로운 바다였음을 증명하는 깨어지고 바스러진 조개껍질이 아사신의 발밑에서 뽀각 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시 한 번 깨트려졌다. 밟히는 땅은 조금의 습기도 없이 퍼석퍼석한 모래였고 태양은 더더욱 뜨거워졌다.
 낮에는 달구어진 철판 같던 모래밭은 밤이 되면 이번에는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변해버렸다. 늘 고통스러운 여행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의 강도는 점점 더 강해져만 갔고 아사신은 상당히 지쳐버렸다.
 “물······.”
아사신은 노새에 기대어 작게 신음했다. 힐레멘은 수통을 열어 아사신의 입가에 대주었다. 아까운 물이 흐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물을 흘리자 아사신은 혀를 내밀어 받아 마셨다. 깔깔하던 목구멍이 수분으로 적셔지자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하아······.”
가쁘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사신은 눈을 떴다. 걱정하는 힐레멘의 얼굴을 보자 기운 없이 빙긋 웃어주었다. 힐레멘은 툭 내뱉듯이 말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가야 하는 겁니까?”
“그곳에 가면 저도 그 대답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사신은 멀리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을 바라보았다. 자연의 광활함 앞에서 인간사의 모든 것은 하잘것없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무리 하잘 것 없다 해도 그 작은 인연의 애증 하나를 어찌하지 못해 이리 흔들리고 고민하는 것이 또 인간이었다.
 “그곳에 가면 나도 답을 알 것 같아요.”

도적패에게 사고를 당한지 삼일이 지나자 아사신은 이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분 없이 바싹 마른 피부는 자글자글 끓어대는 태양을 감당하기에 지나치게 연약했고 수통의 물도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빌라카로스를 목적지로 잡았더라면 이미 도착했을 시간이건만 신전을 찾느라 허비한 시간 때문에 물이 부족했다.
 발목까지 파이는 모래나 작은 동산만한 구릉으로 이어지는 산, 드러난 피부를 따끔따끔 자극하는 반사열, 그와 비례되게 미친 듯이 떨어지는 밤의 기온.
 건장한 사막의 사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만한 악조건이었다. 충분히 먹지도 못하고 쉴 공간도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힐레멘을 괴롭게 하는 것은 아사신이었다.
“태양이 검어집니다.”
아사신이 헛소리를 시작했다. 최근 그는 기절한 듯이 말 등에 엎드려 있다가 불쑥 고개를 들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아사신이 하는 말은 일관성이 없었고 비현실적인 것 투성이었다.
 “모든 땅에 기는 육축과 하늘을 나는 날짐승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립니다. 새로운 것이 일어섭니다.”
“알았어요. 알았으니 그만해요.”
“그것은 세상을 그림자로 덮습니다. 이미 미치고 부정 탄 것이 세상을 덮습니다. 섞일 수 없는 두 가지가 혼인합니다. 백옥의 여신은 화염에 그슬려 상처를 입었습니다. 상처는 피가 맺히고 딱지가 떨어져 여신에게 흠을 냅니다. 그러나 상처로 인해 더욱 아름다워졌습니다.”
“그분이 말하길 하늘에 달을 취할 수 없으니 내 두 번째 달을 만들어 침대위에 눕히리니. 낮에는 하늘을 쫓고 밤에는 땅에서 취하겠노라.”
힐레멘은 아사신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말들은 힐레멘의 귀에는 죽기 전에 지껄이는 헛소리 같았다. 그것이 아사신이 죽어간다는 징조처럼 느껴져 힐레멘은 고통스러웠다.
 이 상황에서도 아사신이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였다. 제대로 아물지 못하는 상처에서 피를 흘리고 먹은 게 없어 기운이 없어도 아사신은 하나만을 원했다.
 “그 전에 가야합니다.”
 “······.”
“그 전에······.”
사흘째의 정오가 되자 힐레멘은 더 이상 이 무리한 여정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사신의 상태는 심각했다. 힐레멘은 이미 그 신전이 오래전에 풍화되어 무너져 내렸거나 모래 속에 파묻혔음이 틀림없다고 결론 내렸다. 다시 르브룩에게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으니 그는 빌라카로스로 노선을 변경하기로 마음먹었다. 달의 신전이고 뭐고 간에 사람이 살고 봐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대로 여행을 강행했다가는 아사신과 아이가 위험했다.
 때마침 저 멀리 사막의 아지랑이 사이로 흐릿한 인영이 나타났고 힐레멘은 무조건 구원을 요청하기로 마음먹었다. 도적패가 걱정되긴 했지만 어차피 이렇게 탁 트인 공간에서 마주친 이상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도적패라 하더라도 만나야 했다. 그들이 가진 음식과 수통이 필요했다.
 “이보시오들!”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자 남자들이 힐레멘을 바라보았다. 힐레멘은 모래 언덕 위로 올라서며 크게 팔을 휘둘렀다.
“이봐요- 거기 이리 좀 와 보시오.”
남자들은 일정한 속도로 힐레멘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손이라도 흔들어 힐레멘에게 화답해 주지 않았다.
 남자들과의 간격이 좁아질수록 힐레멘은 그들이 모두 다섯 명이고 사막과 황무지를 오가는 상인들의 개량 말을 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단기간 안에 빠른 속도로 어딘가를 간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온통 망토와 두건으로 온 몸을 휘감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힐레멘이 이상을 느꼈다. 그들은 도적패나 상인 비호대라기에는 지나치게 좋은 칼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일정한 속도로 가까워지면서 먹이를 노리는 늑대 때처럼 옆으로 간격을 벌리며 포위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장사치처럼 보이지도 않았으며 국경을 수비하는 경비대로도 보이지 않았다. -힐레멘은 국경수비대의 복장을 잘 알고 있었다.-
힐레멘은 손을 내렸다. 그는 날카롭게 안광을 빛내며 남자들을 응시했다. 자연스럽게 손이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그들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스겅- 칼집과 칼날이 마찰을 일으키며 싸늘한 검신을 드러냈다. 남자들도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흉흉한 살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힐레멘······.”
뒤에서 아사신이 반쯤 눈을 뜨고 힐레멘을 불렀다. 힐레멘은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달아나요 아사신.”
“무슨······. 또 도적패라도 만났습니까?”
“그러면 행운이지요.”
붕붕- 남자들은 머리위로 칼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힐레멘은 선두에 선 한 남자를 응시했다. 온통 검은 천으로 몸을 감싼 남자의 얼굴에서 두건이 벗겨지자 요사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나타났다. 몇 달 사이 남자는 무척 수척해지고 한층 날카로워져있었다. 그에게서는 먹이를 쫓는 육식사냥꾼의 끈질긴 집념이 서려 있었다.
 그 귀기서린 남자는 힐레멘을 노려보며 그림처럼 아름다운 눈썹을 길게 치떴다.
 힐레멘은 퉤 침을 뱉었다. 입맛이 썼다.
“여기서 보는구나. 힐레멘.”
야스카산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피부를 찌르는 듯한 살기를 내뿜는 주제에 말투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듯이 평온하였다.
“저도 여기서 당신을 만나다니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힐레멘도 질세라 유들유들하게 받아넘겼다.
“공사다망 하신 와중에 여기는 무슨 일이신지요? 날씨가 좋아서 소풍이라도 나오신 겁니까?”
“아아- 나는 사냥을 나왔지.”
야스카산은 정말로 자신의 안 뜰의 사냥이라도 나온 듯이 여유롭게 말을 받았다.
 “감히 나의 가장 비싼 성물을 훔쳐간 도둑놈을 사냥하러 나왔지.
“그것 참 어리석은 도둑이군요.”
힐레멘이 유쾌하게 말했다.
“누가 당신 같은 남자의 물건을 감히 도둑질을 했단 말입니까. 혹시 그 성물에게 입이라도 달려서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애원 하고 발이라도 달려서 스스로 그 도둑을 따라나서지는 않았는지요? 아! 아니면 처음부터 당신의 물건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야스카산이 살벌한 미소를 드리웠다.
“여전히 잘난 입이로구나. 내가 그 도적놈의 뱃가죽을 뚫어놓고 모가지를 잘라놓아도 그 입이 그렇게 귀엽게 지껄일 수 있나 두고 보자꾸나.”
천천히, 전사들을 이끌고 야스카산이 모래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힘이 좋고 건장한 발굽이 한 번 땅을 디딜 때 마다 모래가 훅 꺼지며 성큼 다가왔다.
“힐레멘?”
그때 모래언덕의 반대편에 서 있던 아사신이 이상을 느끼고 주섬주섬 위로 올라왔다. 모두의 눈이 일순간 아사신에게로 쏠렸다. 야스카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힐레멘의 얼굴도 확 굳었다.
 아사신은 크게 눈을 흡떴다. 악몽을 마주한 사람처럼 야스카산을 본 아사신의 얼굴이 푸르게 물들었다.
“도망쳐!!”
힐레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사신은 몸을 돌려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친 노새가 푸르륵 투레질을 하며 모래판을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야스카산의 얼굴이 구겨졌다. 힐레멘은 뒤로 살며시 숨기고 있던 손을 꺼내어 수인을 완성시켰다. 그의 입이 빠르게 움직였다.
“힐레멘!”
“시간의 파쇄! 너희의 몸은 돌처럼 단단해진다. 뼈는 봉쇄된다. 근육은 무력하다. 신경은 죽고 피부는 뻣뻣해진다. 서로간의 연계를 박탈해라.”
전사들의 몸이 빳빳하게 굳어졌다. 그들은 칼을 든 자세 그대로 정지했다. 힐레멘은 야스카산과 대화하며 미리 수인을 걸었던 것이었다. 전사들은 유일하게 눈만이 살아 좌우로 데굴데굴 굴렀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여전히 신기한 재주를 부리는구나.”
야스카산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일행 중 야스카산만이 유일하게 힐레멘의 마법에 걸리지 않았다.
 “그래, 네놈도 이 빌어먹을 대륙의 뒤틀어진 사생아였지. 신력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귀신을 불러 모아 만들어낸 마법사야.”
야스카산은 딱딱하게 굳은 말에서 뛰어내렸다. 두 사람은 천천히 서로를 향해 칼끝을 겨누고 다가가기 시작했다. 사박사박 모래위로 고운 발자국 소리가 떨어졌다.
 “네 쥐새끼 같은 근성은 이미 눈치 채고 있었지. 힐레멘 투르가.”
야스카산은 위협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네가 바산에게서 우리의 비밀을 캤다는 건 대충 알고 있었다. 네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에 잠시 처단을 미뤘던 것이 이리도 큰 화근이 될지 그때는 몰랐구나. 오늘 네놈을 죽여 그때의 한을 풀어야겠다.”
“자꾸만 쥐새끼 쥐새끼 하는데 말이지.”
힐레멘 역시 지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공기가 썰려나가며 붕붕 소리를 냈다.
 “날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이왕 비교할 거 좀 다른 거에다 비교해주면 좋겠어. 쥐새끼라니. 그건 내가 당신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거든.”
“건방진 팔시아 대륙 놈이!”
야스카산이 선재공격을 날렸다. 두 개의 칼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겼다. 완력이라면 두 사람 다 지지 않았다.
 힐레멘이 칼날을 사이에 두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우리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겠지. 안 그래?”
야스카산은 눈을 가늘게 뜨고 힐레멘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서 점점 인내심이 사라지고 있었다. 서로에게 칼을 겨눈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야스카산의 눈동자는 아사신이 사라진 모래언덕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왜 도망쳤는지 궁금하지 않아? 응?”
“더러운 입 닫아라.”
“알아서 상상하라고.”
힐레멘은 킥킥 웃었다. 그는 야스카산이 어떻게 하면 흔들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온갖 중상모략과 암투를 중심에서 좌지우지하는 에슐리아의 동생이었다. 심리전에 있어서는 야스카산보다 한 수 위였던 것이다. 야스카산의 칼날이 힐레멘의 어깨를 노리고 날아왔다. 힐레멘은 날쌔게 옆으로 몸을 날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무거웠다. 야스카산의 칼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 하나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상대방을 끝장내고야 말겠다는 무시무시한 투지, 그리고 살의.
 “더 대단한걸 말해줄까?”
“닥쳐!”
“그 뱃속에 든 것은 누구의 씨일까······.”
“힐레멘!!”
야스카산은 노성을 질렀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암전되는 것 같은 강렬하고 순수한 분노로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근육이 불거져 나오고 핏발이 섰다. 야스카산은 있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소르데라인들이 피의 족장이라 부르며 두려워하는 게 무색할 만큼 마구잡이의 솜씨였다.
“네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겠다!”
“어차피 너희는 이루어질 수 없잖아!”
힐레멘도 질세라 고함을 질렀다. 또 한 번 칼이 맞부딪치고 시퍼런 불꽃이 튀겼다.
 “족장과 신부는 이루어질 수 없어. 어차피 너희들은 행복할 수 없다. 결코, 절대로, 영원히!”
“나는 정통한 피가 흐르지 않는다. 내 의지로 원하는 것을 성취한다. 신성한 주박역시 내게 그 효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아사신의 마음도 같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힐레멘이 싸늘하게 이죽거렸다. 야스카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힐레멘의 칼이 야스카산에게로 꽂혀들었다. 모래가 흩날리고 칼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지상을 지글지글 데우는 한낮의 더위도 두 남자의 투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까가가각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리고 모래먼지가 흩날렸다. 야스카산은 능숙했지만 힐레멘의 완력도 만만치 않았다. 비록 그가 몹시 지쳐있는 상태긴 했으나 사력을 다해 부딪혀오는 검은 야스카산도 주춤하게 만들 만큼 위력적이었다.
 발을 끌어 잡는 모래와 비처럼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도 둘을 방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완전히 굳어서 보고만 있어야 하는 전사들의 눈동자도 칼 시위를 따라 흔들렸다.
목을 겨누면 막아 치고 다리를 겨누면 피한다.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완력이 세고 몸이 날쌔다.
야스카산은 상대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평정을 잃었던 머리가 칼을 맞댈수록 싸늘하게 비워졌다. 분노로 검게 타들어갔던 눈동자가 다시 빛을 되찾고 타고난 실력이 발휘되었다.
야스카산은 힐레멘의 움직임을 읽어내고 그에 앞서 한 발 먼저 행동해 들어갔다.
사실, 정직한 실력으로 따지자면 힐레멘은 처음부터 야스카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는 태생이 전사로, 전사로서 길러진 남자였다. 비록 정통한 후계자는 아니지만 최고의 전사 바르바칸의 젊은 시절을 빼다 박은 듯한 그는 뇌가 생각하기 전에 먼저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의 움직임을 단번에 봉쇄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상대의 숨통을 일격에 끝장낼 수 있는지. 팔딱팔딱 살아 숨 쉬는 심장을 멈추게 할 수 있는지.
힐레멘은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그가 검술에도 뛰어난 것도 마능력을 운용하느라 육체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힘이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완력이라면 야스카산도 힐레멘에 지지 않았다.
힐레멘이 사력을 다해 날린 공격을 야스카산이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피해냈다. 온 힘을 실었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힐레멘의 자세가 흔들렸다. 야스카산은 순식간에 기세를 타고 힐레멘을 압박해들 어가기 시작했다. 힐레멘은 서둘러 칼을 바로잡았지만 야스카산이 좀 더 빨랐다. 직선으로 곧게 뻗어온 검 날의 끝이 힐레멘의 배를 뚫고 등으로 삐져나왔다.
 메마른 모래위로 붉은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컥!”
힐레멘과 야스카산이 아주 가깝게 얼굴을 마주했다. 야스카산은 일부러 칼날을 비틀어 잡고 거칠게 위로 뽑아내기 시작했다. 생살이 갈라지며 피가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으······크!”
힐레멘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숙여졌다. 경악으로 인해 크게 뜨여진 푸른 눈동자가 자신의 배에 뚫린 구멍을 보았다. 이 짐승 같은 남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이 무너지는 순간을 포착하여 빈틈없이 칼날을 꽂아 넣었던 것이었다. 우위를 점령했다고 생각하자 야스카산의 태도는 순식간에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뉘여 자신이 잡은 맹수가 죽어가는 모습을 관찰하였다.
 “한 가지만 묻겠다. 어째서 신부가 너와 도망한 거냐.”
“큭.”
힐레멘은 여유만만하게 웃어주려고 했지만 튀어나온 것은 피범벅이 된 신음소리였다. 야스카산은 힐레멘이 바닥에 무릎 꿇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힐레멘은 쏟아져 나오는 피를 바닥에 쏟아내고 야스카산을 올려다보았다.
 “알아서···상상하는 게 어때?”
배에 구멍이 난 와중에도 이죽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 힐레멘이었다.
“나는 시간을 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지간히도···흐으······. 자신이 없나 보구나, 야스카산.”
야스카산은 훅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빠르게 질문했다.
 “네 말인즉슨 마음이라도 통했다는 거냐.”
힐레멘은 물끄러미 고개를 들어 야스카산을 바라보았다. 해를 정면으로 등지고 선 야스카산의 얼굴은 칼칼한 음영에 쌓여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문득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힐레멘은 주먹을 틀어쥐었다.
 살고 싶었다. 삶에 대한 열정이 없었기에 위험한 임무도 아무렇지 않게 자청해왔었다. 살아야만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살아왔었다. 그러나 죽음에 직면하자 갑자기 삶에 대한 열망이 들끓었다. 살고 싶었다. 진심으로 살고 싶어졌다.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죽고 나서가 두려웠다. 이 남자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달려갈 터였다. 이 빌어먹을 사막에 자신의 시체는 모래가 되어 사라지고, 남자는 보란 듯이 그를 가지고 사라질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힐레멘은 찔리지도 않은 심장이 잡아 뜯어지는 것만 같았다.
 “어서 대답해라.”
야스카산이 칼끝으로 힐레멘을 툭툭 건드렸다. 힐레멘은 고개를 수그리고 곧 흘러버릴 것 같은 눈물을 참아냈다. 증오는 슬픔을 이겨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평정을 되찾은 힐레멘은 번쩍 고개를 들어 퉤, 야스카산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야스카산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힐레멘은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죽여라.”
시퍼런 칼날이 힐레멘의 목젖과 목뼈를 동시에 세로로 가르며 깊숙하게 박혀들었다. 힐레멘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힐레멘의 눈동자가 찢어질듯이 벌어졌다. 칼날이 목 안을 파고든 채로 옆으로 움직이자 또독- 뼈가 꺾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승에서도 지껄일 수 없도록 네 모가지를 뜯어 놓았다.”
야스카산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는 앞으로 쓰러지려는 힐레멘을 가볍게 밀치고 붕붕 칼을 휘둘러 힐레멘의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는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힐레멘의 몸뚱이가 천천히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생명이 빠르게 힐레멘의 몸을 빠져나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짧고 급격한 숨이 힐레멘의 목구멍에 걸려 깔딱거렸고 잔기침을 할 때마다 입술 사이로 핏물이 튀었다.
 반쯤 잘려나간 목이 대롱거렸다. 넘어간다는 자각도 없이 쓰러지자 뒤통수에 풍성한 모래가 닿았다.
힐레멘은 그 감촉이 무척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사방이 너무도 뜨겁고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딱 좋을 만큼 따뜻해져 있었다. 한 박자 느리게 손과 다리도 모래위로 쓰러졌다.
 -나는 고민할 때도 웃고 있었고 괴로울 때도 웃고 있었고 슬플 때도 웃고 있었습니다.-
문득 힐레멘은 아사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그것은 무척이나 오래된 일인 것 같았다.
 -아 이러다 나는 죽을 때도 웃고 있겠구나. 그럼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죽음이 될까. 나의 죽음을 지켜보게 될 사람들도 나처럼 웃고 있을 거야.-
힐레멘은 아사신의 얼굴을 기억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아사신이 어떤 표정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가 않았다.
 ‘나는 지금 웃고 있을까?’
엉망이 된 사지가 경직되기 시작하였다.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는 지독한 피로감이 힐레멘을 덮쳤다. 느릿한 미소가 서릴 듯 말듯 힐레멘의 입술에 머물렀다. 남들은 죽음의 순간이 되면 주마등처럼 과거의 일이 빠르게 스쳐간다던데 자신은 이런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얼마나 자신다운 최후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힐레멘은 한 여자를 떠올렸다. 여자는 차가운 성안의 가장 화려한 방에 거하며 두 손 가득 보석을 그러쥐고 앉아있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쭉정이처럼 속이 비어버린 여자였다. 그녀의 내부는 지독하게 황폐하였고 고독이 병으로 굳어져있었다. 힐레멘은 이제 자신이 그 곁을 지켜줄 수 없음이 가슴 아팠다.
‘인사 하고 싶었는데.’
힐레멘은 아사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부러진 목구멍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와 주지 않았다. 제대로 된 사랑한번 해보지 못하고 평생을 남의 손에 좌지우지 되다 결국엔 살해당하는 최후라니, 최악이었다.
 ‘하지만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나는 또 똑같은 선택을 하겠지.’
힐레멘의 흰자가 뒤집어지며 입이 가볍게 벌어졌다. 그 사이로 딱딱하게 굳고 새파랗게 질린 혀가 바르르 떨며 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푸륵- 노새가 흰 거품을 토해내며 앞발을 꺾었다. 갈기를 움켜잡고 몸을 의지하던 아사신은 그 바람에 앞으로 굴러 떨어졌다.
“으-.”
부드러운 모래바닥에 떨어졌는데도 아사신은 배를 잡고 고통에 신음했다. 노새는 바닥에 완전히 드러누우며 발굽을 버르륵 떨었다. 흰자가 뒤집어지며 경련을 지속하는 노새의 모습에서 아사신은 노새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짐승에게 다가간 아사신은 조용히 옆에 꿇어앉아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짐을 나르는 노새로 태어나 사막을 횡단하게 했으니 정말로 녀석으로서는 체력의 한계를 넘어선 일이었다.
“미안하다. 너를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만한 힘이 내게 없구나.”
아사신은 노새의 고통이 어서 끝날 수 있도록 빌어주었다. 그리고는 괴로운 표정으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걷지 않아 아사신은 자신의 상태가 생각보다 몹시 나쁘다는 것을 알았다. 모래는 물귀신처럼 발목을 잡아끌었다. 그것은 종아리뼈까지 얼얼해질 만큼의 고통이었다. 미끄러운 모래 등성이는 단단한 바위산을 오르는 것만큼의 힘을 소진해야만 오를 수 있었다.
 아사신은 뱃속에서 태아가 힘차게 발길질하는 것을 느꼈다. 아이는 전신을 부딪치며 외치고 있었다. 아무런 자의식이 없음에도 아이는 신성력의 결정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자신을 강제로 끌고 가는 모체에게 강한 반감을 표시하며 배를 두들겼다.
 아사신은 이를 악물고 모래 산을 올랐다.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앞으로 나아갈 터였다.
 이것은 마지막 기회였다. 이유도 모르면서 아사신은 거기에 도착하기만 하면 많은 것이 달라지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마지막 희망을 붙잡는 기분으로 아사신은 걷고 또 걸었다. 팔다리는 머리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꾸만 걸음을 지체했다. 욱신거리는 날개가 절로 푸득이고, 떨리는 심장과 흐르는 피가 속삭였다. 마음을 바꿔 그 남자에게 돌아가라고 속삭였다. 조금만 정신을 흩트려도 발이 제멋대로 뒤로 돌아 뛰어가려 하고 있었다. 아사신은 꽈득 이를 깨물었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모래 산을 등반했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육체와 정신의 싸움에서 아사신은 완전히 지쳐있었다. 스스로를 채찍질 하며 걸어가던 아사신은 갑자기 발을 헛디뎌버렸다. 깜짝 놀라 중심을 잡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높은 언덕을 미끄러지면서 순간적으로 목뼈가 부러질까 걱정이 되었지만 기운이 빠진 몸을 둥글게 할 여력이 없었다.
 이윽고 몸이 완전히 멈추어 서자 아사신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땅에서 일어섰다. 온 몸에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숨을 쉬기만 해도 얼마 전 칼에 맞은 옆구리가 쇠뭉치로 얻어맞는 것만 같았다.
 천근같이 무거운 허리를 펴들고 힘든 숨을 가다듬었다.
 아사신은 발을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급격한 경사도를 이루는 지역은 벗어난 모양이었다. 완만하게 아래로 곡선을 그리며 다시 모래사장이 나타났다.
열심히 발을 놀리던 아사신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어딘가 모르게 눈길을 잡아끄는 곳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있는지도 몰랐을 만큼 부서진 담벼락 같은 것이 저만치에 서 있었다.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때가 탄 벽은 심하게 오래되어 몹시 누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게 이상하게 눈길을 끌었다.
 차츰 묘한 감각이 손발을 타고 올랐다. 손톱 끝과 발톱 끝의 세포까지 둔중한 아픔에서 깨어났다. 오래된 맷돌처럼 껄끄럽게 움직이던 심장이 쿵쿵 뛰어올랐다. 피가 술을 마신 것처럼 빠르게 돌았다.
 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모래사장 위로 벽은 신기루처럼 서 있었다. 존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누군가 우연히 잘못 흘리고 간 것처럼 주변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림자의 끝에서부터 살아있는 여신의 날숨이 불어오자 신성력이 촉촉하게 적셔왔다. 가뭄 끝의 단비처럼 온 몸이 해갈되는 기분이었다. 함마 땅에 비하면 무척 적은 양이었지만 지금은 마치 폭포수처럼 느껴졌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이었다. 이곳이 바로 모신이 부르는 장소였다.
-내게로···신부······.-
아사신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푹푹 모래에 묻히는 발을 사납게 끄집어 당겼다. 점점 성소가 가까워질수록 그 초라함과 더러움이 눈에 들어와 가슴이 아파왔다.
한때는 빼곡히 새겨졌을 아름다운 문양은 풍화되어 사라지고, 높은 기둥은 속절없이 바스러져 내렸다. 모신의 영광은 아들들의 손에 의해 쪼개지고 갈라졌으니 남은 것은 한갓 보잘것없는 돌 벽일 뿐이었다. 그나마도 온전치 못하고 군데군데 내려앉고 무너져 내려 터만 남아있는 실정이었다.
아사신은 홀린 듯이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바람이 강해져오는 서쪽으로부터 그녀의 숨결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서······.-
바람에 얹힌 여신의 목소리는 속삭임이었다.
 느닷없이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쿠릉-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새파랗던 하늘의 가장자리로부터 검은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막이 서서히 식고 주변의 색깔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어서······.-
아사신의 눈앞에 칼을 맞고 정신이 혼몽할 때 보았던 꿈과 같은 영상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도적 패에게 당해 비몽사몽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때 보았던 것으로 스스로도 알지 못하고 뱉어낸 말들이었다.
검어진 태양. 섞일 수 없는 두 가지의 혼인. 땅에 기는 육축과 하늘을 나는 날짐승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새로운 것이 일어나는 의식. 모두 해와 달의 합궁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고대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에 뻗쳤다. 낮에 나타난 달이 검은 너울을 둘러쓰고 빛나는 천공의 계단을 밟았다. 강포한 바람이 불어오고 구름이 몰려들었다.
낮이 어둠의 장막을 둘러쓰고 쪼그려 앉자 기식(氣息)있는 모든 것이 두려움에 떨었다. 귀신의 권위가 강성해져 소름끼치는 비명을 내지르며 공중의 권세를 잡았으며, 하늘아래 우거하는 바다와 땅이 이 장엄함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눈 달고 태어난 것이라면 그들의 부모가 한 몸 되는 것을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아사신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신들의 합궁의식이 기억났다. 평생 한번 볼까말까 하다는 두 대 신의 만남. 그 천연적인 신비가 눈앞에 드러나고 있었다.
 -빨리······전에······.-
여신의 속삭임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곧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사신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상처입고 지친 몸은 한 걸음 때는 것이 철근이라도 달린 듯 무거웠지만 지체할 순 없었다. 아사신의 직감은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말하고 있었다. 바람이 발목에 매달리며 가지 말라 흐느끼고 애원했으나 아사신은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온 몸의 시련을 견뎌내었다. 뱃속의 아이가 죽을 듯이 몸을 틀어대도 멈추지 않고 걸어갔다.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애원하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귀를 틀어막아도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왔다. 그것은 바람이 내는 이명일수도 있고 뱃속의 아이가 애원하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갑자기 쉭, 섬뜩한 소리가 나더니 칼 한 자루가 날아와 바닥에 꽂혔다. 아사신은 깜짝 놀라 발을 헛디뎠다. 칼이 꽂힌 자리는 막 발을 내려놓으려던 자리였다. 조금만 빨랐더라도 저 날카로운 검에 발을 꽂힐 뻔 했다. 어찌나 세게 던져졌는지 푹신한 모래에 꽂혔음에도 버르륵 날이 떨릴 정도였다.
손잡이를 장식하는 화려한 술이 바람에 날렸다. 아사신은 그 장식을 알아보았다. 야스카산이 선물이랍시고 들고 왔던 검이었고 자신이 매몰차게 거절했던 검. 바로 바산의 보검이었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나부끼는 남자가 서 있었다. 가라앉은 안광이 제가 던진 칼날보다 더 흉흉했다.
 “어디로 가는 거냐.”
“······야스카산.”
야스카산의 목소리는 늪처럼 진득했다. 그는 성큼성큼 몇 걸음 만에 가까이 다가왔지만 아사신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냥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여전히 쫓기는 입장이었지만 저번에 의식으로 마주했을 때보다 불안하지 않았다. 두려움이란 실제를 마주하면 허무할 만큼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았다.
 아사신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야스카산은 초조해졌다.
“어디로 가려는 거냐.”
“당신을 피해 갑니다.”
아사신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야스카산의 얼굴이 확 굳어져 안 그래도 날카로운 인상이 한층 사나워졌다. 그는 위협하듯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못 간다.”
“갈 겁니다.”
“못 가게 할 거다.”
“당신이 뭐라고 하건 갈 겁니다.”
여전히 담담한 어조였지만 그 속에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아사신은 등을 돌렸다. 바람이 점점 격해지기 시작했다. 모래 먼지로 시야가 희뿌옜다. 아사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뻣뻣한 다리를 움직였다. 바람이 더욱 싸늘하고 아프게 몰아치고 머리 위의 상황은 난리가 났는데 자신의 마음은 삭막하기만 했다.
 “가면 죽는다.”
야스카산이 위협했다. 아사신은 희미하게 웃었다. 죽일 수 없다는 것은 서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한 가지 씁쓸한 것은 변함없이 강압적인 저 남자의 태도였다.
 ‘상관없다.’
 아사신은 고개를 흔들었다. 진심으로 상관없었다. 죽이려면 죽이라지.
 “신전에 가면 네가 살 거라고 누가 그러더냐.”
“내속에 흐르는 피가 그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아사신.”
야스카산은 진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사신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쓴 즙이 올라오는 듯 했다.
“너는 이방인이 염탐해온 정보를 들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말을 전부 믿었나.”
아사신은 그가 간교한 술책을 쓴다고 생각했다. 무시하고 발을 떼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한 줄기 미묘한 망설임이 어른거렸다. 그의 얼굴도 표정도 무섭도록 진지했다.
 결국 아사신은 미심쩍은 듯이 질문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힐레멘은 바산에게서 정보를 빼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바산은 한때 우리의 형제로, 우리의 과거를 희미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더 진실한 것은 모른다. 신의 족장에게만 물려 내려오는 진짜 역사는 모르는 것이다.”
“무슨.”
“잘 들어라 아사신.”
야스카산은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아사신은 갈등을 느꼈다. 이제 그와의 간격은 한 걸음 차이밖에 되지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손을 뻗어 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야스카산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는 단 하나 진실을 말하겠다. 신전으로 가면 죽는다. 너는 여신의 궤계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태양은 달을 범하여 이 세상을 지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느냐. 어째서 달은 태양을 찾아 시간이 흐르면 저 위로 오르는 거냐.”
“그것은······.”
아사신은 말문이 막혔다.
“너는 여신이 과연 신부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나? 자신의 그림자라서? 말도 안 되는 소리. 여신은 신부를 미워한다. 태양을 저주하고 증오하면서도 맞으러 가는 달이나, 달을 취하지 못한다고 인간에게 달라붙어 추잡한 씨를 퍼트리는 태양이나 막상 막하의 가증한 것들이다.
 그래, 신은 질투를 하지. 신의 밀실은 말 그대로 신부를 가둬두기 위한 곳이다. 달의 권위가 태양에 비할 만큼 막강했을 때 그녀의 투기로부터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그런 모신이 너를 도와줄 거라고 믿느냐. 너는 죽는다. 여신은 네 살은 발라먹고 뼈는 불사를 것이다. 태양의 권위가 강하여 눈치를 보고 있으나 완전한 그녀의 공간인 신전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그 즉시 너는 죽는다.”
아사신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벌어졌다. 강한 충격이 후두부를 강타했다. 귓가에서 누군가 이가는 소리가 바득바득 들렸다. 듣지 말고 믿지 말라고 아른거리면서 손을 잡아 뒤로 끌어당기려 했다.
 야스카산의 혀가 신랄하게 움직였다.
“태양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한 달마다 제 욕심을 풀어줄 육체만 있으면 되는 거다. 신부는 그런 존재일 뿐인 거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제 아내일 뿐이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역겨운 사랑 놀음에 파멸로 흘렀는지 모른다.
 저것들이 과연 신일까? 이 세상을 낳고, 사람을 낳고, 날짐승과 들짐승을 만들어 낸 태초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것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고 음부의 귀신보다 고약한 것들이다. 너무도 오랜 시간 애증으로 묶이다 못해 이제 측량도 불가능한 혼돈이 되었다. 나는 입으로는 그들을 찬양하고 속으로는 비웃으며 살았다. 신의 족장? 선택받은 신의 혈족? 이것이 바로 그 빌어먹을 실체다. 이것이 우리 피에 흐르는 미친 신들의 권능이다!”

쿠릉- 쿠르르릉--.

하늘에 뇌전이 감돌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깃발처럼 펄럭이며 태양과 달의 주위를 휘감았다. 태양은 불타는 금환(金環)만을 남기고 달에 가려졌다. 무지갯빛으로 물든 구름이 너울처럼 흩날렸다. 풀무에서 이는 듯한 연기가 어두침침하게 하늘을 가리고 귀신들의 비명소리가 이명처럼 잉잉 울렸다. 남신이 여신을 음탕하게 탐하는 소리가 높고 찢어지는 듯했다. 두 주신이 사라진 지상은 혼탁한 어둠이 넘실거렸다.

 새카맣게 내려앉은 어둠아래 아사신의 얼굴만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서서 손대면 잘게 부서져 내릴 것처럼 얼어붙었다.
“······거짓말.”
아사신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좌우를 살펴보았다. 한 발작. 발이 뒤로 물러나 버석버석한 모래를 짚었다.
“거짓이 아니다.”
“거짓말!”
아사신이 뒤로 물러난 만큼 야스카산이 또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하나가 물러나는 만큼 하나가 다가갔다. 둘 사이는 깨어질 것 같은 긴장감을 유지하며 간격을 지키고 있었다.
 “그럼, 그렇다는 것은······.”
아사신이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해도, 나는 어떻게 해도······.”
“아사신!”
“나는······무슨 짓을 해도 결국에는!”
“그만, 생각하지 마라!”
야스카산이 아사신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사신은 발버둥을 쳤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찼다. 그러나 야스카산은 놓아주지 않았다.
“왜 여기까지 왔는데!”
아사신이 고함을 질렀다. 음성이 불안하게 튀어 올랐다.
 “결국 모든 것이 다 헛고생이었다고 말하는 거냐고!”
“그만해라! 그만하고 나와 돌아가자.”
아사신은 소리 높여 비웃었다. 내부로부터 믿음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이 머리채를 풀어헤치고 휘돌았다.

 -여신이 제 오라비의 여인을 질투하매 꽁꽁 묶어 하늘로 데리고 가 새벽녘에 걸어두고 오라비의 태양빛에 타죽게 만들었다. 산채로 번제물 된 여인이 고통에 울부짖었다. 여신은 이에 그치지 않고 교묘하게 숨어들어 갖은 술수로 여인들의 마음을 희롱하니 그녀들이 영원히 불행 하더라.-

감히 인간이 신의 피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피에 섞인 신의 피는 그들의 광기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 광기를 영원히 다스리며 살아야 하는 것은 이 불행하고 선택받은 사람들의 짐이었다.  달을 그리워하다 바다에 몸을 던져 제 몸에 붙은 불을 스스로 꺼트리는 태양은 그러나 다음날이 되면 정념에 불이 붙어 하늘로 올라 달의 그림자를 쫓았다. 그것은 독초가 자라는 밭이었다. 근원을 잘라낼 수 없다면 영원히 제 몸에 독을 키워야만 했다.
“하하- 결국에 나는 놀아난 거구나. 나는 어째서 여기까지 온 걸까. 신부가 된 때부터 내 인생은 제대로 된 적이 없어. 아니, 그 전에 신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부터가 제대로 되지 않았어!”
“아니다. 너는 잘못된 것이 없다 아사신. 돌아가자, 나와 함께 돌아가자!”
“크······.”
아사신은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귀신들이 비웃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상스럽게 터져 나왔다. 애를 끓이고, 오해하고, 서로를 상처 주는 것은 그것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돌아가면 무엇이 남습니까. 이 빌어먹을 신부의 자리를 영영 계승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종래엔 내 어머니처럼 될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이런 자리. 이런 더러운 사연들이 혼재하는 곳이라니. 나는 평생 저 미친 신들을 두려워하며 살아야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렇게 두지 않겠다!”
야스카산이 질세라 소리를 질렀다. 두 팔 가득 벌려 아사신을 붙잡았다. 힘으로 강하게 구속하려는 팔을 아사신이 힘껏 뿌리치고 고함질렀다.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결국에는 신부가 필요한 거잖아! 차라리 여기서 나를 죽이고 새로운 신탁을 받으면 되잖아! 아니면 이 뱃속에 든 것을 바라기 때문에 그러는 거냐고!”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원하는 건 너란 말이다!”
야스카산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정말로 화가 나서 미칠 것 같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당연하겠지. 당연히 내가 필요하겠지. 나는 신부니까!”
“이런 빌어먹을. 그런 게 아니라잖아. 내가 바라는 건 아사신, 너란 말이다. 이 바보 같은 놈아!”
“그만 좀 해. 결국 같은 말이잖아!”
야스카산은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필사적인 얼굴로 소리 질렀다.
“못 알아듣는 건 너란 말이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신부가 아니라 너를 원하는 거라고!”
아사신은 이 지리멸렬한 대화에 분노가 일었다. 짜증과 화가 치밀어 올라 왈칵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거냐고!”
“······!!”
야스카산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아사신은 좀 더 윽박지르려고 했지만 야스카산이 지나치게 굳어있자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다. 야스카산은 눈만 크게 뜨고 바보처럼 입만 벌리고 서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래······.”
야스카산이 거칠게 머리를 넘겼다. 그는 차마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모르겠는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을 더 망설이더니 결심을 굳힌 듯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말대로다.”
“······.”
이번에는 아사신이 굳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한참 끓어오르던 화가 속에는 부글부글한데 혀가 딱딱해져서 할 말이 없었다.
 야스카산은 바싹 애가 타는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빠르게 말했다.
“네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아이의 아비가 누구든지 상관하지 않겠다. 아이의 안전도 완전하게 보장하겠다. 무슨 짓을 했다고 해도 좋다. 나와 함께 돌아가자.”
아사신은 멍하니 야스카산을 쳐다보았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들 투성이었다. 야스카산이 하는 말은 혼란스러웠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말을 들어버렸다. 아이가 어쨌다는 것인지, 아이의 아비를 누구로 의심한다는 것인지.
 “지금 뭐라고······.”
아사신은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이 정돈되지 않았다.
 야스카산이 뒤로 물러서려는 아사신의 어깨를 잡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너를 원한다는 거다.”

쿠르릉-- 쿠릉--
바람이 사납게 회오리쳤다. 건조한 공기 중에 벼락이 치자 파지직 정전이 일었다.
 굳고 단호한 야스카산의 얼굴을 망연히 응시하던 아사신이 불현듯 입술을 뒤틀어 올리며 싸늘한 비웃음을 지었다. 야스카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원한다고?”
기가 막힌 한숨인지 웃음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뒤틀린 입술 사이에서 삐져나왔다.
“사랑한다고?”
“아사신!”
“뭐야······. 전부 저 빌어먹을 대신들이 남긴 감정의 찌꺼기잖아?”
“그런 게 아니다! 너를 사랑한다지 않느냐!”
“거짓말!”
크게 벌어진 입 안으로 텁텁한 모래가 날아들었다. 퀭하고 마른 눈가에 눈물이 한 두 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모래 먼지로 더러워진 얼굴위로 검은 눈물이 흘렀다.
“우리 신분과 감정이 신들의 그림자를 흉내 낼 뿐인데!”
아사신은 인정사정없이 퍼부었다.
“어떻게, 어떻게 알지? 어떻게 믿지? 우리의 감정이 진짜라고 어떻게 설명하냔 말이야!”
야스카산이 아사신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사신의 목소리는 숨이 겨워서 간헐적으로 끊어지고 중간 중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야스카산의 숨소리 또한 아사신에 못지않고 거칠었다.
 아사신은 자신 속에 잠들어 있던 용암과 같은 화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몰랐다. 늘 순종하고 살았고 너무도 힘들었을 땐 차라리 도망을 택했다. 너무 오래 막아두어 썩어 고인 물이 일시에 터져 흐르자 스스로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아사신은 야스카산을 세게 밀어젖히고는 손가락으로 머리 위를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도 결국 저것들이 남긴 감정의 잔상인건데!”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아!”
야스카산은 쿵쿵 가슴을 두드렸다. 아사신을 둘러싼 깊은 불신의 감정을 어떻게 깨트려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나만 알고 그것이 옳다고 믿으며 다른 가능성은 돌아보려 하지 않았다. 저도 자신을 사랑하는 주제에 이다지도 완곡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미워서, 차라리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미움의 감정보다도 강한 그리움이 여기까지 자신을 끌고 왔다. 증오와 사랑의 지경(地境)위에 한 발씩 담그고 서서 바라보는 상대였다. 그 경계조차 모호하고 경계를 나누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신탁을 다시 받으면 끝날 일이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왜 모르냔 말이야. 어째서 모르냔 말이야! 내가 원하는 건 너란 말이다! 다 떠나고 다 버리면 되겠냐고! 차라리 그런 걸 요구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걸 요구하란 말이다. 너를 포기하는 것 외엔 전부 들어줄 테니!”
바람에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도록 야스카산은 악을 썼다. 애정인지 증오인지 너무도 오래고 깊이 묶은 감정이 폭발하듯 흘러나왔다. 아사신은 거칠게 도리질을 했다.
 “믿을 수 없어.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 그러면,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은 뭐란 말이야. 만약 진짜가 아니라면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거냐고.”
“모든 것을 처음으로 돌리자. 한번만 마음을 열어 볼 수도 있는 거잖아. 이 모든 지독한 것들과 관계없이 우리 둘의 마음만을 생각하면 되는 거잖아!”
아사신은 혼란에 빠졌다. 그는 앞에 버티고 선 야스카산과 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신전을 쳐다보았다. 신전에 눈길이 닿자 달의 기운이 다시 강력하게 뻗쳐왔다. 자신의 피를 다스리는 두 개의 신성력이 부딪혔다. 몸이 반으로 쪼개져 야스카산과 신전을 향해 제각각 달려가려고 했다.
 야스카산을 택하면 주신의 의지대로 된다. 그를 택하지 않으면 모신의 의지대로 된다. 황야를 혼자 떠돌다가는 분명히 죽을 것이다. 어느 쪽이던 간에 자신의 의지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원한다는 야스카산의 말도 믿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저 신들의 의지대로 행해진 결과물 같았다. 처연한 분노가 일어났다.
 아사신은 털썩 주저앉아 고함을 질렀다. 단근질을 당한 것처럼 온 몸으로 고통을 표출했다. 주변에 시끄럽게 몰려들었던 귀신들마저 흩어질 만큼의 포효였다.
야스카산이 그런 아사신을 강하게 껴안았다. 직격으로 귀에 대고 지르는 고함소리를 참았다. 물고 뜯고 때려도 묵묵히 인내했다. 야스카산은 아사신이 신전으로 들어가 버릴까 두려웠다. 오래전에 날개를 펼치고 창공을 날았을 때처럼 두려웠다. 아사신은 누구와도 비류(比類)할 수 없었다. 몸이 아픈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자신의 품 안에서 무너져 내리는 육체가 전율할 만큼 좋았다.
 한참을 발악하던 아사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축 늘어졌다. 야스카산은 힘을 잃은 아사신을 품안에 완전히 끌어안았다. 먼지로 더러워진 머리카락에 고개를 묻고 간헐적으로 떨리는 몸을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내 옆에 있어······.”
“······.”
“이 고통 속에서 나를 건져줘.”
아사신은 눈물을 흘렸다. 힘을 주려고 해도 엉망으로 망가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불꽃처럼 화를 터트린 몸에는 더 이상 응축된 힘이 없었다. 점점 다리와 팔이 축축 늘어졌다.
야스카산은 멍하니 넋을 잃은 채로 눈물만 흘리는 아사신을 강하게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진심이 통하기만을 원했다. 공중을 부유하는 마음을 어떻게든 끄집어 당겨야만 했다.

살벌한 바람이 아프게 몰아쳤다. 두 사람은 한참을 침묵하고 있었다.
 아사신은 멍하니 앞만 응시하고 있었고 야스카산은 같이 침묵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맹렬히 생각하고 있었다.
 아사신은 지나치게 많은 제약들에 둘러싸인 남자였다. 스스로 궤를 씌워놓은 상태였으니 그 궤를 손상시키지 않는 타협안을 내놓기로 마음먹었다.
 야스카산은 침음을 흘렸다. 그로서도 말하기가 힘든 제안이었다.
“한번만 기회를 줘. 만약 내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너를 보내주겠다.”
가만히 눈물만 흘리던 아사신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허물어질듯 희게 질려버린 회색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돌았다.
 “보내 주겠···다고?”
“네가 의심하는대로, 우리의 이 마음이 진짜가 아니라면······. 그때는 아무 조건 없이 보내주겠다.”
“내가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야스카산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사신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질문했다.
 “당신의 아이가 아니라도, 나를 데려가겠다고?”
이번에도 야스카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얼굴은 지독하게 아파보였다. 흐리고 생기가 없던 아사신의 얼굴이 완전히 살아났다. 그는 혼란한 생각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여러 가지 것들이 머릿속에서 부딪혔다.
 “그래도 내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순간적으로 푸른 눈동자에 광기가 서렸다. 야스카산은 눈치 채이기 전에 얼른 눈을 내리깔고 진심이 느껴지도록 노력했다.
“기회를 다오. 나와 함께 돌아간 후에도 내 진심을 느낄 수 없다면 그때는 보내주겠다.”
빈틈없이 밀착된 두 개의 몸이 얇은 옷자락 사이로 쿵쿵 공명했다. 번개에 비치는 창백한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 올렸다.
 “한 번만 기회를 주면, 그래도 우리의 감정이 진짜라고 할 수 없다면. 그때는 보내 줄 테니. 한 번만····· 기회를 한 번만.”
“······그래도 아니라면 어쩌지?”
아사신이 중얼거렸다. 야스카산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잘 벼려진 칼날을 통재로 삼키는 것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대로 우리는 모신과 주신의 의지에 놀아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 스스로도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잖아. 그렇다면 정면으로 부딪혀 답을 알아낼 수도 있는 거다.”
“답을······.”
“그래. 답을.”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답이 나올 때까지 내 곁에 있으면 되는 거다.”
“으······.”
아사신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황망하게 좌우를 살폈다. 자꾸만 도망가려는 그 무의식중의 몸짓을 야스카산이 붙잡았다. 그리고 진심이 통할 수 있도록 강하게, 강하게 마주보았다. 움켜쥔 손목과 끌어안은 가슴과 맞닿은 심장을 통해 진심이 통하기를 빌었다.
 그래서 아사신이 드디어 그 무거운 마음의 장막을 아주 약간 들춰주었을 때,
 “맹세를······ 그 마음이 진심이 아닐 때는 나를 보내준다는 맹세를 해주십시오.”
그만 울컥 눈물이 흘러버리고 말았다.
 “맹세를 해주세요. 그때는 나를 보내주겠다고. 당신 생명을 걸고.”
야스카산의 팔이 꼭 싸매어왔다. 아사신은 뺨에 닿는 축축한 것을 느꼈다. 차갑게 흩날리는 모래먼지 속에서 야스카산의 눈물이 뜨겁게 흘러 인두처럼 와 닿았다. 아사신은 야스카산을 밀쳐내고 소리쳤다.
“맹세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맹세 한다.”
“크읏!”
아사신의 입술이 흉하게 비틀어졌다. 몸과 마음이 따갑고 아팠다. 야스카산의 진심이 채찍처럼 온 몸을 후려갈겼다. 또 다른 가능성이 깃들자 메말랐던 마음이 갑자기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한계까지 끌어 담고 발꿈치로 눌러둔 마음이 누룩처럼 부풀어 올랐다.
 모신의 의지도 아닌, 주신의 의지도 아닌, 자신이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차마 밀어내지도 도망가지도 못한다면 정면으로 부딪혀 답을 알아내는 방법도 있는 것이었다.
“제길, 아사신!”
야스카산은 아사신을 또다시 끌어안았다. 드디어 굳게 닫혀있던 그 마음의 편린을 얻어낸 것이었다. 있는 대로 그러잡아 껴안고 또 껴안아도 모자랐다.
 갑자기 등 뒤에서 우르르 큰 소리가 들렸다. 신전이 허물어져 내렸다. 진작 흙이 되었어야 하는 것을 강제로 붙들어 놓았던 것처럼, 잠깐 사이에 바람에 풍화되어 날아가 버렸다.
 천상의 수금소리에 맞춰 고대의 노래가 완창 되고 화답하듯 땅이 웅웅 공명음을 내었다. 모래가 빗물처럼 퍼부어지고 우레가 하늘을 수놓았다. 귀신이 짧은 권세를 놓고 저 태어난 흑암으로 돌아가면서 신부도 데려가지 못함이 못내 아쉬운지 뒤돌아보았다. 달의 보좌가 태양을 비켜가기 시작하고 달이 흘러간 사이로 구름이 그 자리를 치고 오르자 세상은 완전한 어둠에 감싸였다.
 동시에 여신의 기운도 새벽안개처럼 희끄무레해졌다.
 바람이 모래를 감고 올라가 폭풍을 일으켰다. 보드라운 입자의 모래가 칼날 같은 바람에 소용돌이치며 피부에 부대껴 상처를 냈다.
아사신은 눈을 감았다. 점점 가팔라지는 바람에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야스카산에게 껴안긴 채로 두 팔을 벌려 기꺼이 바람을 받아들였다. 이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숨 쉬는 것도 힘들만큼 피로가 엄습해왔다.
 두 사람은 무방비하게 모래폭풍을 맞았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도 없었다. 그저 지나치게 오랜 기간 떨어져있던 서로의 몸을 더욱 더 확실하게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땅을 전부 들어 엎을 듯한 기세로 몰아치는 폭풍은 얼마 걸리지 않아 두 사람을 집어 삼켰다. 죽음과 탄생이 들개처럼 들이닥치고 그 사이로 힘이 충돌하였다. 땅이 솟구치자 바위가 드러나 터지고 갈라졌다.

 태양도 달도 사라진 지상은 천연의 힘이 주먹을 휘두르며 날뛰었다.

 어디선가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10





언제 야만인들의 칼에 목이 떨어질까, 언제 딸을 내놓으라 요청하고 집에 불을 지를까 전전긍긍하던 소르데라 귀족들은 시간이 흘러도 제제가 가해지지 않자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차에 그들이 그냥 물러간다고 선포하자 깜짝 놀랐다.
야스카산이 빼앗은 것은 딱 자신들이 피해를 입은 만큼과 유가족에게 지급할 위로금 만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척수에 따라 정금을 챙기고 전리품으로는 향유를 조금 챙겼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덮쳤던 것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그들의 땅으로 돌아갔다.
 야스카산은 물러가기 전에 한 마디 말만 남겼다.
“신이 버린 것들아. 너희 생명의 근원이 살아있는 땅을 건들지 마라. 한번만 더 부정한 생각을 한다면 나는 맹세코 너희 땅에 풀 한 포기 살려두지 않겠다.”
물론 소르데라 인들은 그 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아무도 함마를 침략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많은 상처와 고통을 안겨준 전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에슐리아 트루가는 타격이 가장 컸다. 급진파의 은밀한 중심이었던 그녀는 소랏을 비롯해 아끼던 수족들을 잃었으며 그로 인해 신뢰도 잃었다. 그녀가 왕에게 은근한 부추김을 넣었음을 아는 귀족들은 처음 입궁했을 때만큼이나 쌀쌀하게 그녀를 대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손실은 그녀가 친동생 힐레멘 트루가를 잃은 것이었다. 에슐리아에게는 단 하나의 믿을 수 있는 아군이며, 마법에도 뛰어난 두각을 드러내어 차세대 장로 후보였던 힐레멘의 죽음은 그녀로서도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에슐리아가 힐레멘의 소식을 접한 것은 피의 족장 야스카산을 따라 사막으로 갔던 기사를 통해서였다. 그는 혼자서는 시신을 수거하지 못했기에 돌아와서 에슐리아에게 이 사실을 고했고 에슐리아는 당장 그의 시신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기사들이 사막으로 달려 나가 힐레멘의 시신을 관에 담아 돌아왔는데 이미 부패가 시작되고 있어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에슐리아는 시신이 도착하여도 바로 보러가지 않았다. 대신 몰약과 침향의 향료로 시신을 씻기고 정성껏 화장하여 생전의 모습과 똑같이 만들라고 명령했다. 이미 부패되는 중의 시신을 그렇게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그녀가 힐레멘을 만난 것은 다음날의 늦은 저녁이었다. 과연 명령대로 시신은 온갖 보석과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되어 생전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누워있었다.
 “모두 나가라.”
에슐리아가 명했다. 그녀의 명에 따라 시녀들과 시종관들이 일사분란하게 물러갔다. 힐레멘의 시신이 있는 곳은 지하 석실로 장례절차를 치루기 전에 시신을 안치해두는 일종의 분향소였다.
 에슐리아는 뚜벅뚜벅 힐레멘에게로 다가갔다. 백단목으로 짜인 관은 아름다운 조각과 그림으로 한껏 치장된 최고급의 것이었다. 주변에는 꽃이 만발했고 입고 있는 옷은 온갖 보석이 박혀 화려했다.
“결국 이렇게 돌아왔구나.”
에슐리아는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마치 힐레멘이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대화하기 시작했다.
“내 아들로 태어나서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살해당하다니 수치스러운 줄 알아라 힐레멘.”
너른 석실에는 그녀의 목소리만이 탕탕 부딪혀 울렸다. 에슐리아는 성큼성큼 제단위로 올라가 힐레멘의 고개를 확 잡았다. 막 뭐라고 쏘아대기 위해 입을 열던 그녀는 힐레멘의 피부가 너무도 딱딱하고 섬뜩하리만치 차가워서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닫아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시체를 만진 것은 그 오래전 옛날 자신의 친부를 살해했을 때뿐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숫한 사람을 살해했지만 죽이라고 명령만 했지 직접 손을 쓴 적은 없었다.
‘어째 내 손에 만져지는 시체는 모두 피를 섞은 혈육뿐이구나.’
에슐리아는 피식 웃었다. 첫 번째는 아버지, 그 다음은 아들이었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힐레멘의 얼굴을 차분하게 살펴보았다. 오뚝한 콧날과 긴 속눈썹. 곱실거리는 황금빛 머리카락과 그 아래 매끄러운 피부는 생전과 똑같았지만 오묘하게 틀렸다.
 에슐리아는 눈살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기분이 상했다는 듯이 손을 털어냈다.
“이제야 네가 정말로 죽었다는 실감이 나는구나.”
“······.”
“너에게 내가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는지 아느냐?”
“······.”
“바보 같은 놈. 마음은 아무에게도 주지 말라고 했잖니. 어째서 내 말을 새겨듣지 않은 거냐. 그런 남자가 뭐가 그리 좋더냐.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더냐. 꽃이 떨어지듯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시드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그까짓 게 뭐 그리 탐이 나서 목숨까지 버리다니.”
“······.”
“하······!”
어두운 석실을 밝히는 등잔의 기름이 고르지 못했는지 화르륵 불길이 솟았다. 에슐리아는 그 소리에 흠칫 놀라 불안하게 좌우를 살폈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되자 이마를 짚고 의자에 앉았다.
“정말,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두고 내가 무슨 말을 할까.”
에슐리아는 씁쓸하게 뇌까리고는 벌떡 일어나 베일을 둘러썼다. 상복인 흰 베일로 얼굴을 꼼꼼하게 가리고는 마지막으로 힐레멘을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나마 네가 입을 닫고 있으니 사방이 조용하기는 하구나.”
그녀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출구로 향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위로 올라가던 에슐리아는 막 문을 열려다가 순간적으로 주춤했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계단을 내려와 힐레멘이 잠들어 있는 제단을 올랐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힐레멘의 시신위에 고개를 내밀어 짧고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높이 쌓인 제단이 그녀가 몸을 수그리느라 살짝 흔들렸다. 에슐리아는 관 위에서 중심을 잃었다. 떨어지려는 몸의 중심을 잡으려다가 에슐리아는 그만 힐레멘의 얼굴을 붙잡았다. 얼마나 세게 붙들었는지 장의사가 세심하게 붙여놓았던 힐레멘의 목이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아름다운 얼굴은 저 혼자 옆으로 돌아가고 갈라진 목이 썩은 내를 풍기며 속살을 드러냈다.
에슐리아는 당황해서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서둘러 힐레멘의 얼굴을 붙여놓으려고 했지만 한 번 떨어진 목은 다시 붙을 줄을 몰랐다. 외려 손을 댈수록 심하게 망그러지기 시작했다.
 살에 칠해진 화장품이 벗겨져나가고 진득한 썩은 피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에슐리아는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 왁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눈물은 한 번 흐르기 시작하자 멈출 수가 없게 되었다. 철도 들기 전에 우는 법을 잊었었는데 물고가 터지자 평생 분의 눈물을 다 짜내려는 듯 미친 듯이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통에 못 이겨 스스로의 가슴을 꼬집었다. 비싼 화장품으로 빵처럼 희고 보드랍게 가꿔지던 풍만한 유방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힐레멘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가족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어디 마땅히 안치될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시신들이 묻히는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막 전쟁에서 패한 후고 그로 인해 다른 인접국들과의 관계가 미묘했던지라 힐레멘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아주 적었다.
 적으로 완전히 돌아선 사람들은 오겠다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직 눈치를 살피는 사람들은 아프다거나 급작스러운 일이 생겼다는 편지와 함께 화려한 화관을 대신 보내왔다. 에슐리아는 화관은 쓰레기통에 처박고 편지는 소중히 갈무리했다. 그녀는 이러한 물적 증거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용도로 탈바꿈되어 쓰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유일한 독자가 땅에 묻히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에슐리아는 냉랭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흰 베일을 드리우고 오만하게 걸어가는 그녀를 사람들은 과연 못되고 정 없는 여자라고 뒤에서 수근 거렸다.
 ‘나는 아내도, 엄마도, 여자도 되지 못했으니 나쁜 계집년이라도 되어야겠다.’
에슐리아는 등을 꼿꼿하게 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궁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그녀가 있을 곳이었다.



 11




족장의 승전보는 빠르게 전해졌다. 사람들은 몇 개월 만에 돌아온 족장과 전사들을 맞이하러 맨발로 뛰어나갔다. 전사들이 배에서 속속 내려오자 산자의 가족들은 환성을 질렀고, 사자(死者)의 가족들은 조용히 묵도했다. 남자로 태어나 전사로서 죽는 것은 영광이었다. 시신이 수습된 자들은 신전에다 그 유해를 안치해두었다가 나중에 합동 장례를 치르게 될 터였다. 그 영혼은 신성한 까마귀의 등을 타고 하늘에 올라 큰곰자리별 아래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이었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며 맞이한 것은 아사신의 귀환이었다. 그들은 못된 이방인들에게 납치당한 그들의 신부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환호성을 터트렸다. 상태는 지독하게 나빴지만 그 몸에 태기가 있다는 것을 눈치 빠른 여자들은 바로 알아차렸고 그 소문역시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졌다.
 아사신은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로 도착했다. 이즈음 그의 상태는 눈가와 입가에 핏기가 없었으며 툭하면 체온이 떨어졌다. 극심한 영양실조 상태였기 때문에 신녀들은 아사신을 위한 영양가 높은 음식을 만들어내느라 분주해졌다.
 신성력이 응집된 신소에서 아사신은 만 이틀을 보내고야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 눈을 뜨고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몰라서 혼란하고 무서운 얼굴을 했지만 곧 당신은 고향에 돌아왔으며 이방인들에게서 구출되었다고 신녀들이 친절하게 일러주고서야 사태를 파악한 얼굴을 했다.
아사신이 건강이 회복되고 제일 처음 한 일은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신녀들이 그를 야스카산의 옆방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가겠습니다.”
“어디 말씀이세요. 수라킨이 사는 곳 말인가요?”
“아니요. 나는 그 전에 살던 곳으로 가겠습니다.”
신녀들은 식겁하여 아사신을 말리려 들었다. 아사신이 말하는 곳은 그가 신부가 되기 전에 살던 낡은 폐가였다. 거기서 몸조리를 하는 것만은 안 된다고 말렸으나 아사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르바칸과 민네도 아사신을 말리려고 찾아왔다. 민네는 홀몸도 아닌데 몸이 축나니까 굳이 가야한다면 아이를 낳은 후에 가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모두 쓸데없이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지만 바르바칸만은 별 말 없이 아사신을 응시했다.
 아무도 아사신의 고집을 꺾지 못하자 결국 야스카산이 찾아왔다. 야스카산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꼭 거기로 가야겠나.”
“네. 거기서 해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알았다.”
야스카산은 그 즉시 신부의 짐을 싸라고 명령했다. 신녀들은 절대로 안 된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야스카산은 피로한 얼굴로 아사신을 슥 쳐다보았을 뿐 그대로 나가버렸다.
 아사신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눈이 칼칼했다.

 “어째서 사서 고생을 하실까요.”
전담신녀가 짐을 챙기며 중얼거렸다.
“여기 있으면 족장이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고, 사람들이 매일같이 문안을 와서 외롭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고 문안을 오는 게 싫은 거라고 아사신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지금 옛 폐가는 대대적인 공사가 한창이었다. 제발 그대로 두어달라고 극구 사양했으나 신부를 그러한 곳에 둘 수는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안 그래도 낡은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동안 완전히 망가져버려서 돼지우리로도 못 쓸 거라고 신녀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곳에 아이를 가진 신부가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모두 입을 모았다. 아사신으로서는 옛날의 그 모습 그대로를 원했지만 이것마저 거부했다가는 아예 가지도 못하게 될 것 같아 할 수 없이 수긍했다.
마침내 공사가 끝나고 아사신이 입주하는 날이 되었다. 오래전 떠나올 때의 폐가를 생각하던 아사신은 새로 회반죽을 칠해 견고해진 벽과 깔끔한 문양이 수놓인 입구를 보고 움찔 놀랐다. 어느 정도 고친다는 말은 전해 들었지만 이정도면 거의 새로 지은 수준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무슨 소리십니까.”
그를 호위해온 전사가 손 사례를 쳤다.
“신부를 그런데다 모실 수는 없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쉬세요.”
아사신은 한숨을 쉬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하겠지만 안은 더 달라져 있었다.
배열이 고르지 않고 들쑥날쑥해서 겨울이면 비가 들이치던 창틀은 깨끗하게 수리되어 있었고 벽은 환하고 아름다웠다. 찬장은 장인이 만든 것으로 그 안에 든 그릇이나 냄비등도 반짝이는 새것이었다.
 “아무도 오지 마십시오. 혼자 있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신부, 홀몸이 아니십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잘 지냈습니다.”
“태교는 어쩌시려고요.”
“조용하고 편안한 것이 좋다니까요. 그게 제일 좋은 태굡니다.”
“하지만!”
“그만 나가주세요.”
오래 자면 안 된다. 짐승은 수컷만 먹어라. 찬 곳은 피해야한다. 높은 곳에 가지 마라. 무거운 걸 들면 안 된다. 따위의 주의사항을 줄줄이 읊으려던 신녀들은 암탉처럼 우르르 내몰렸다. 아사신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었다.
 “시간을 가져야해.”
신녀들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사신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시간을.”
아사신은 소원하던 대로 완전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곳은 궁의 중심부와 상당히 떨어진 곳으로 주변에 인가도 거의 없었다. 늘 들리는 소리라고는 새가 지저귄다거나 보드라운 미풍이 창틀을 흔드는 정도였다.
강제로 내몰렸음에도 신녀들은 끈질기게 찾아왔다. 아침마다 찾아와 문을 열어 달라고 시끄럽게 구는 대는 장사가 없었다. 최근 잠이 많아진 아사신은 일주일은 꿋꿋하게 견뎠으나 팔일 째 되는 날에는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소리 지르고야 말았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시간을 정해놓고 방문하세요!”
“드디어 우리의 진심을 알아주셨군요. 신부!”
진심이고 나발이고 자고 싶은 아사신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들을 안으로 들였다.
 그날 이후로 신녀들은 당번을 정해서 아사신의 집을 방문했다. 늦잠을 방해받지 않게 된 아사신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점심나절 신녀들이 다녀가고 나면 아사신은 고즈넉한 분위기에 감싸여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며 졸았다. 그것이 아사신이 제일 좋아하는 일과 중의 하나였다.
까무룩 졸다가 일어나면 신녀들이 차려놓은 음식을 먹었다. 온 몸이 나른한 기운에 젖은 상태에서 그저 주어지는 음식을 섭취하고 침대에 눕거나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일은 지친 아사신의 정신에 많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지나치게 많은 생각과 혼란에 점철되었던 두뇌는 조용한 일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일부러 이곳을 고집한 것은 과거와 스스로 마주볼 힘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러기위해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그 고통스러운 추억의 장소로 돌아온 것이었다. 비록 외관은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져버렸지만 바깥 풍경은 그대로였다. 나무숲과 무성한 억새풀. 고르지 못한 돌길.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영원히 고통을 헤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과거의 고통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은 그 고통 속에 잠겨버리게 된다. 그것은 과거에 먹히는 일이다. 아사신은 살기를 원했고 그래서 과거를 직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사신은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고 야스카산은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야스카산의 마음을 믿어보기로 결정했지만 마음속 어딘가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 아사신은 주어진 시간을 보람차게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시간은 천천히 낙막하게 흘렀다. 그 무미건조하고 일상적인 시간은 아사신에게 꼭 필요한 약이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인내한 대가로 아픈 삶을 살다간 소사린을 기억했다. 칼로 가슴을 썰어내는 것 같던 아픔이 이제는 둔중한 통증이 되었다. 피가 철철 흐르던 상처는 시간의 소독 앞에 딱지가 져 떨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아사신은 이제 그녀의 죽음을 곁눈질로나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소사린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불행을 바라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의 행복을 바랬던 소녀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소사린이 죽고 나서 자신을 죽도록 괴롭히는 귀신이 된 것이 이상했다. 심지어 그녀는 절벽위에 섰을 때 어서 오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아사신은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그것 역시 모신의 개입이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사악한 손은 죄책감을 긁어내리고 양심을 부어오르게 만들고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눈을 찔렀던 것이다.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그녀는 죽어서까지 철저하게 이용당했다.
“나를 용서해. 나는 너를 과거로 묻을 거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거야.”
아사신은 부드러운 음영에 감싸인 방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자 산들바람이 불어와 뺨을 간질였다. 그 느낌이 마치 괜찮아- 하고 말을 거는 것 같아 아사신은 울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또 아사신은 어머니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많은 신부들처럼 그녀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고, 많은 족장들처럼 바르바칸도 그 굴레를 벗겨주지 못했다. 그녀는 철저하게 파멸당한 여자였다. 아사신은 아직도 미쳐서 허공을 배회할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한 때 그녀처럼 될까 두려워서 도망만 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아사신은 자신이 그 끔찍한 틀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이 신부의 아들인 동시에 신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전례는 한 번도 없었다. 신성력의 반은 모신에게서, 나머지 반은 주신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그것들이 상충되고 대립하다가 결국에는 격류처럼 날뛰게 되었고, 마지막에야 가까스로 방향을 틀어준 것이었다.
 아마도 주신은 어떻게든 이 지겹고 끈질긴 고리를 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손을 놓을 수도 없으면서 어떠한 결말이 나오든 다른 전환점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이 선택된 것인지도 몰랐다.
아사신은 거기까지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어차피 입체적이고 다면한 신의 뜻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과거는 깨끗하게 세탁된 옷을 옷장에 넣는 것처럼 차곡차곡 정리되어졌다. 아무리 깨끗이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그대로 묻혀두어야 했다. 다시 꺼내서 빨고 또 빨아서 처음처럼 하얗게 될 때까지 빨 생각이었다.
 아사신은 문득 한 남자를 기억했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사람. 자신을 좋아한다고 온 몸을 부딪치며 말하던 남자.
‘힐레멘. 잘 있을까.’
아사신은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유가 없어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는 통에 지금은 어디 있는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강한 사람이니까 틀림없이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자신에게 그렇게 끌렸던 것은 자신 안에 내재된 두 개의 신성력의 탓일 거라고 아사신은 생각했다. 힐레멘은 마법사였고 그것은 신성력이 사라진 대륙에서 그것을 대처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었다. 결국 근원은 신성력이었다. 힐레멘은 자신의 근원에게 이끌린 것이었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아사신은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했음이 미안했다. 그 웃는 얼굴 아래 감춰진 마음은 버려진 아이가 엄마를 찾아 헤매는 것 같은 절박함이 느껴졌었다.
 아사신은 조용히 그의 앞날을 축복했다. 이 축복이 바다를 건너 멀리 그가 있는 곳까지 가기를 바랐다.
 몇몇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아사신을 찾아왔다. 타스가는 집이 몰라보게 바뀐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와중에 자신이 예전에 고쳐놓았던 문짝이 이제는 제일 초라하게 보이는 것에 몹시 낙담했다. 덩치는 산만한 사람이 시무룩해져서 의자에 구겨져 있는 것이 보기 딱했던 아사신은 할 수 없이 바뀐 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이 그 문이라고 말해서 타스가를 기쁘게 해주었다.
 수라킨도 다녀갔다. 그녀는 커다란 개목걸이를 시오사라에게 씌우고는 씩씩대며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주었더니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가 말이야. 하나밖에 없는 오빠라는 게 코빼기도 비추질 않아!”
“수라킨.”
아사신은 너무도 수라킨다운 반응에 웃어버렸다.
 “적어도 인사라도 하러 와야 할 거 아니야! 그렇게 가출해놓고선 완전 사람 애간장을 이렇게 다 녹여놓고선 한 마디 먼저 걸어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심술궂게 인상을 쓰고 뾰족하게 소리치던 수라킨의 눈에 갑자기 글썽 눈물이 맺혔다.
 “배는 이만해져갖고선 뭐가 그렇게 힘들고 용서가 안돼서 이 먼 길을 돌아와? 나 두고 가니까 밥은 넘어갔어? 저 미친 야스카산 놈이 오빠 가출하고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알아? 언제 분풀이 대상으로 목이 떨어질까 진짜 무서웠다고.”
수라킨을 토닥여주던 아사신은 차마 미친 야스카산 놈 부분에서 반박을 제기할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때까지 수다를 떨던 수라킨은 가기 전에 몸보신 음식을 직접 해주겠다고 말해 아사신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아사신의 일상은 평화롭고 조용하게 흘렀다. 손님이 찾아올 때를 제외한 그의 일상은 피리를 구해 와 연주하거나 예전처럼 조각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가볍게 채비를 하고는 천천히 바깥을 거닐곤 했다. 점점 불러오는 배는 갈수록 무거워져 멀리 나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바깥공기를 쐬면 한결 기분이 나아지곤 했기 때문에 아사신은 산책을 좋아했다.
 하루는 아무 생각 없이 외진 길을 걷다가 한 못생기고 쪼그라든 노인이 때 이른 딸기를 파는 것을 보았다. 노인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늘에 앉아 딸기 꼭지를 따고 있었는데 그 검고 주름진 손에 들린 딸기는 아직 빛깔이 제대로 나지도 않는데 몹시 먹음직스러워보였다.
 평소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과일이었는데 아사신은 순간적으로 강렬한 탐식을 느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그 딸기가 먹고 싶었다. 아직 빨갛다기보다 진주홍 빛을 한 그 작은 열매를 입에 넣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무의식중에 주머니를 뒤지던 아사신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돈이 한 푼도 없었던 것이다. 먹을 것은 신녀들이 매일 신선한 것으로 가져다주었고 옷이나 장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사신은 돈이 필요 없었기에 구태여 요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냥 가서 달라고 하면 노인은 깜짝 놀라서 바구니채로 넘길 것이 뻔했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잠시 딸기를 쳐다보던 아사신은 그냥 고개를 흔들며 그날의 아쉬운 산책을 접어야만 했다.
 다음날 아침 신녀들이 올 것을 대비해 간소하게나마 방을 정리하고 환기를 시키려던 아사신은 문이 잘 열리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무거운 것이 밖에 버티고 선 느낌이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던 아사신은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커다란 광주리에 잔뜩 딸기가 쌓여 있었다.
 “이게 대체······.”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어제 딸기장수를 쳐다본 것을 누군가 본 것이 분명했다. 아사신은 얼굴이 발개졌다. 꼭 거지처럼 손가락만 빨던 모습을 들킨 것이 부끄러웠다.
 “어머, 신부. 그건 뭐에요?”
마침 신녀들이 찾아왔다. 그녀들은 아직 제철도 아닌데 탐스럽게 익은 딸기를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더니 허락도 받지 않고 광주리를 들고 부엌으로 가 씻기 시작했다. 아사신은 멍하니 서 있다가 주변을 몇 번 더 살펴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싱그러운 딸기향이 온 집안에 가득했다.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그것은 하루로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열흘 후에는 완전히 질려버려서 그만 좀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멋대로 딸기를 보내오는 모르는 사람에게 그만두라는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아사신은 이번에는 거리로 나가 앵두장수를 실컷 노려보고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아침이 되자 한 광주리나 되는 앵두가 문 앞에 쌓여있었다.
 ‘아하.’
아사신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앵두가 질리면 사과장수를 바라보았고, 사과도 질리면 달걀장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어김없이 다음날이 되면 광주리채로 그것들이 가득 담겨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바구니 안에든 것은 음식만이 아니었다. 어디서 꺾었는지 아름다운 꽃도 함께 들어 있었다.
 아사신은 이 기특한 미행자를 잡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날도 밖으로 나가 떡장수를 쳐다보고 들어왔다. 그즈음 시장상인들 사이에서는 신부가 갑자기 나타나서 아무 이유 없이 노려보고 돌아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아사신은 일찍 잠자리에 드는 척했다. 새벽이 되자 몰래 일어나 문틈으로 바깥을 살폈다. 그러자 저 멀리 수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찌나 민첩하고 동작이 부드러운지 거의 소리도 내지 않았다. 미행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곧 커다란 광주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사신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벌컥 문을 열었다. 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미리 보자기를 씌워두었던 등잔을 앞으로 확 내밀었다. 미행자는 깜짝 놀라 얼굴을 가리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앗!”
아사신이 소리를 질렀다. 미행자는 허둥지둥 주변을 살피다가 늦었음을 직감하고 도망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사신도 재빨랐다. 미행자가 광주리에 걸려 주춤하는 사이 그의 팔을 꽉 틀어잡았다.
 “야스카산!”
아사신에게 잡혀버린 야스카산은 멀찍이 고개를 돌렸다. 시간을 준다고 해놓고는 이렇게 매일같이 살피고 있었던 것을 딱 걸린 것이었다.
 “······.”
“야스카산. 여긴 웬일로······.”
“손을 놔라.”
야스카산이 낮게 말했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듬직하고 오만한 평소의 말투였지만 처해있는 상황은 전혀 그래주지 못했다. 야스카산도 말해놓고 스스로 어색한지 헛기침을 했다. 아사신은 내밀어진 손에서 풀 냄새를 맡았다. 아무래도 광주리에 들어있던 꽃은 그가 직접 꺾은 모양이었다.
 “손을 놔라 아사신.”
야스카산이 다시 한 번 강하게 말했다. 아사신은 스르르 손에서 힘을 뺐다. 길고 날씬한 손가락 사이로 옅은 갈빛의 건장한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살갗이 스치는 감촉에 야스카산의 어깨가 움찔했다. 놓으라고 말한 주제에 손가락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쉬운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손가락이 완전히 끄트머리에 걸렸을 때 아사신이 야스카산의 손을 다시 꽉 잡았다. 야스카산은 흠칫, 몸을 굳히고 아사신을 돌아보았다. 아사신도 자신이 한 행동에 놀라 당황하는 눈치였다. 혹시 실수였나 싶어 야스카산이 팔을 약간 흔들어보았지만 아사신은 그래도 손을 놓지 않았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아사신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사온 음식이···많이 남았습니다.”
“······.”
야스카산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사신이 먼저 다가와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요청한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사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야스카산의 침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아니다!”
야스카산이 엉겁결에 큰 소리를 냈다. 또 다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사신과 야스카산은 서로의 눈을 피한 채 손만 엉거주춤 맞잡고 있었다.
 이윽고 아사신이 천천히 손에 힘을 주어 야스카산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 열려진 문 안으로 야스카산을 느리게 초대하고 있었다.
 야스카산은 아사신의 손길에 이끌려 한 발 한 발 집 안으로 발을 디밀었다. 그 아무 특별할 것 없는 집이 마치 미지의 세계처럼 다가왔다.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등잔에 비친 아사신의 얼굴이 좀 더 가까이, 그리고 확실하게 보였다.
 두 사람은 완전히 문지방을 넘었다. 아사신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옛 어머니의 집 안에 발을 들인 야스카산의 얼굴은 어색하고 낯설었다.
 천천히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두 사람 모두 존재를 잊어버린 광주리 안에서 연보라색 제비꽃이 바람에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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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z오선님의 축전입니다.
 소설 아래에다 개시하는것은 분위기를 흐트를것 같아 고민했지만 너무 재밌어서 안 넣을 수가 없네요. 1달 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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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탁에 네 이름이 나왔다”
학주가 소리쳤다.
“그럴 리가 없어!”
찬영은 동요하고 있었다.
“웃기지 마! 교탁에 왜 내 이름이 있는 건데! 잘못 본 거 아니에요?”
“자오선이 하는 일에 실수란 없.......(시간의 흐름) 많...다.”
“이름이 뭐? 어쩌라구요?”
“네가 수긍을 하던, 하지 않던 넌 ‘주부’가 된다! 그것도 가정주부!”
꽈르릉! 때 마침 먼 곳에서 천둥이 쳤다. 천둥소리에 이어 운동장에 쏟아지는 거센 비 소리가 찬영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주부라니! 주부라니! 별주부전도 코주부도 아닌 주부라니. 주부라 하면 집 안에서 빨래하고 살림하는 그런 ‘주부?’ 고무장갑 안 끼고 빨래, 설거지 하다보면 걸린다는 ‘주부 습진’의 그 주부?
“그래! 넌 지금으로부터 10년 후, 김씨 성을 가진 귀인을 만나 그의 도움을 받아 꽃가마를 타게 된다. 1남 1녀, 애도 씀풍 잘 낳고 잘 산다고 교탁에 나와 있어! 귀인을 만나려거든 동쪽으로 가라!”
주춤주춤 물러나는 찬영의 뒤로 여자들이 들이닥쳤다. 동인녀들이다.
“이거 놔! 이거 안 놔? 당신들 누구야! 어디서 왔어!”
힘도 센 그녀들은 서로 미묘한 눈웃음을 교환하며 은밀히 속삭였다.
“찬영아, 눈화야, 해치지 않아.”
어디선가 둥둥 북소리가 들려왔다. ‘임신수! 임신수!’, ‘씀풍씀풍!’, ‘다공일수! 다공일수!’, ‘리버스! 리버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끔찍한 주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찬영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뭐야! 이게!!! 당신 미쳤어!”
찬영이 결국 참지 못하고 ‘주부(主婦)’라고 쓰여진 두툼한 대본을 집어던졌다. 찬영의 전작,< 맛없는 관계>가 성황리(...)에 완결된지도 벌써 두 달, 자신들을 담보로 교환해온 동인지를 옆구리에 끼고 어딘가로 사라져 소식조차 없던 자오선이 느닷없이 나타나 ‘자오선’S 엔젤!‘을 부르짖으며 찬영과 신주를 호출해 온 것이다. 밀린 개런티를 이제야 줄 마음이 든 것일까 설레며 달려온 두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오선은 두툼한 돈 봉투 대신 손때 묻은 대본 두 뭉치를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뭔데? 이게?”
“너희들의 새 작품 대본이다.”
“웃기지 마! 밀린 개런티나 내 놓으시지!”
“작가님,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무리 전속이라고는 하나 개런티 미지급은 충분한 계약 파기의 요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죠.”
오선에게 달려드는 찬영을 솜씨 좋게 떼어놓으면서 신주가 으름장을 놓았다. 실제 연인 사이인 신주와 찬영은 지난 작품을 계기로 결혼에 골인해 살림집까지 차렸다.
 “한번만 더 날 믿어 줘! 이번 작품은 분명히 히트할 거야! 대박의 감이 느껴지고 있다고!”
저런 식으로 사기를 쳐 잘 나가는 청춘 스타들을 섭외한 후 촬영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연중’이라는 무서운 파산신고를 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미 국내에서는 악명이 높아 신인들조차 오선을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몇 년 전인가는 간도 크게 외국인 연기자를 섭외했다가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엎어버리는 통에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기까지 했다.
[오우! 한쿡 싸람! 노무 무써워요! 팝 안 줘. 머니 안 줘. 무조컨 자라고만 해.] 추적 60분에 나와 울먹이던 외국인 노동자의 피맺힌 절규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믿긴 뭘 믿어! 당신을 믿느니 차라리 사이비 종교를 믿겠다. 신주야, 가자! 낮잠시간 지났어. 지금쯤 영주 깨서 울고 있을 거라고.”
차갑게 등을 돌린 채 멀어져 가는 찬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오선은 절박한 음성으로 한 마디를 내 뱉었다.
“스탑! 저스트 어 모멘트! 이번 작품의 특징은 ‘격한 씬’ 이다!”
찬영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신주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오선을 돌아보았다.

 ...... 오선의 주장대로라면 ‘초특급 스펙터클 판타지 차원이동 매지컬 에로 미스테리어스 신파물’이 될 ‘주부(主婦)’의 줄거리는 이렇다.
평범한(여기서 ‘찬영씨는 평범하지 않아요! 라고 신주가 이의를 제기했으나 개무시)학생이었던 찬영은 어느 날 학교 야자시간에 신들린 학생주임에게 자신의 미래에 대한 선고(신탁)을 받게 된다. 자신의 꿈과는 180도 다른 미래 선고에 반감을 느낀 찬영은 그대로 야자 땡땡이를 쳐 학교를 빠져 나오기 위해 교문을 타넘고 마침 그때 벼락이 내리쳐 찬영의 몸을 관통하게 되는데...... 찬영이 깨어난 곳은 고대 부족 국가. 다짜고짜 신탁이 내려왔다며 학주를 닮은 선(先) 족장이 찬영을 ‘주부(主婦) 아싸신’로 지목하고. 찬영은 동인녀들에게 질질 끌려 현 족장 오스카산(김신주)의 저택에 가정부로 강제 취업을 당하고 마는데... (하략)

 밥하고 청소하며 응응하고 그러다 애 들어서 도망다니다 결국 발각되어 애 낳는 스토리.
 타국가의 스파이 ‘히멘’역은 떠오르는 조연 스타 ‘손석진’이, 아싸신의 동생 ‘구라킨’역은 아역배우 출신 ‘한인우’가, 구라킨과 티격태격하며 사랑에 빠지는 전사 ‘닭스가’역은 청춘스타 ‘강지환’이 맡았다. 그 외 오스카산의 첫 번째 부인 ‘가시네’ 역에 아이돌 가수 ‘지연경’. 히멘의 누이이자 어미인 ‘부술리아’역에 톱탤런트 ‘조찬희’. 아싸신의 첫사랑 ‘게보린’의 조부이자 훗날 아싸신의 애완동물이 되는 시오자라 역(전신에 감지 센서를 달고 골룸처럼 블루 스크린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에 연극배우 ‘김신규’가 캐스팅되었다. 아싸신의 첫사랑 ‘게보린’역은 아직 미정으로 주인‘공’역을 맡은 김신주의 방해공작으로 캐스팅 난항을 겪고 있다.

 초특급 스펙터클 판타지 차원이동 매지컬 에로 미스테리어스 신파물!< 주부(主婦)!>
전작 ‘맛없는 관계(해외 부분 로케 요식업 러브 코메디)’를 넘어서는 해외 올로케 판타지물!
초 호화 캐스팅! 500원(과자 값)의 제작비! 1200원(콜라 값)의 마케팅비가 소요된 대작 중의 대작! ‘지식즐’로 유명한 포털 사이트 ‘네이년’이 후원한 2006년 상반기 화제작!
 2006년 4월 30일! 필름 수퍼마켓 출품작!< 주부(主婦)!>개봉박두!


 - 감독 및 주연 배우 인터뷰 -
 # 제목이 독특하다. 어떻게 짓게 되었나.
오선 : 주부 습진 치료제 광고를 보다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집안 일에 고생하는 주부 동인녀들에게 바친다.
# 차별이다. 주부 습진은 주부만 걸리는 것이 아니거늘. 독신 여성과 독신 남성을 무시하는 발언인가?
오선 : 그럴 의도는 없었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한다. 기획 과정에서 ‘광부’, ‘마부’, ‘매부’, ‘사부’ 등 많은 직업(?)에 관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혹자는 ‘두부’를 밀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나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이 ‘주부’였다. ‘주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뿐이다.
#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다. 전작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오선 : 신림동에 사는 모 작가가 부추겼다. 써주기만 하면 동인지도 빌려주고 둘둘치킨도 시켜준댔다.
 # 흠...;; 누군지 궁금하다. 지면을 통해 밝혀줄 수 없겠나.
오선 : 노코멘트다.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도 자세히는 알고 있지 않다. 그를 소개시켜준 타 작가가 그를 일컬어 ‘M버’라고 불렀다. 신림동에 살고 있다. 더 이상은 인권을 위해 밝힐 수 없다. 거부한다.
# 노코멘트가 아니지 않나. 다 밝히고선 뭐가 인권보혼가.
오선 : 이니셜 처리했다. 당신은 M으로 시작되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가.
# (한숨)... 알았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주연배우에 대한 코멘트를 해 달라. 전작에 이어 같은 주연배우를 쓰고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오선 : 걔들이 싸다.
 # (당황) 연기력에 대한 고려는 하지 않았나?
오선 : 연기력이 무슨 소용인가. 벗는다. 많이. 이거 중요하다. ‘많이 벗는다’고 꼭 굵은 글씨로 강조해달라.
# 알겠다. 아싸신 역을 맡은 배우 조찬영에게 묻겠다. 굳이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있는가.
찬영 : ‘격하게 한다’ 고 했다.
#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전작에서의 소극적 연기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는 팬들이 많았다.
찬영 : 무슨 소리인가. 나름대로 적극적이었다. 기자 니는 옥상에서 해 봤나?
# 못해봤다. 젠장. 하니까 좋았나?
찬영 : 좋았다. 이번엔 동굴에서도 한다. 기대해 달라.
 # 오스카산 역을 맡은 배우 김신주에게 묻겠다. 연인과의 연기가 부담스럽지는 않았는가.
신주 : 전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광공’연기라 아주 즐겁게 연기에 임했다. 색다른 플레이는 생활에 자극이 되어준다.
 # 과연. 리허설도 실제처럼 혼신을 다해 연기했다고 들었다. 둘의 연기에 감동한 감독이 도저히 편집할 부분이 없다며 극장측과 싸우다 감독판 10시간짜리 DVD를 발매하겠다고 선언했다는 게 사실인가.
 신주 :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10시간도 성에 안 찬다. 100시간이면 몰라도.
# 자신감이 대단하다. 어느 정도의 흥행을 예상하는가?
신주, 찬영 (동시에) : 천만이다!  ‘남의 왕자’ 정도는 너끈히 앞지를 것으로 예상한다.
# 흥행 추이를 지켜보겠다. 마지막으로 감독에게 묻겠다. 할 말이 있는가.
오선 : 혼신의 힘을 다해 제작했다. 벌써부터 해외 바이어들의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 관객의 선택을 믿겠다. 홈페이지에서 아들인지 딸인지 맞추면 ‘주부’ 캐릭터 배지도 증정한다. 많이들 봐주시라.


 한편.

 “신의 계곡을 타고 바산 방향으로 가다가 팔시아 국경에서 소사린강 방향으로 꺾는 겁니다. 강 건너 계속 쭈욱 걸어가다보면 우르슬들판이 나올 거거든요? 거기서 반나절만 더 걸어가면 아버지의 대지가 나와요. 거기서 다시 옆으로 틀어 해지는 방향으로 이틀만 걸으면 아라 할머니의 무덤이 나오는데 무덤 근처에서 쉬다가 보름달이 뜰 때까지 기다리는 거에요. 무덤 근처에서 만월에만 피는 전설의 꽃이 있거든요. 그 꽃이 피고 또 지고 나면 작은 열매가 맺히는데 그걸 옛 사람들은 ‘신의 열매’ 라고 불렀대요. 저... 그 열매를 넣어 만든 떡이 먹고 싶어요.”
“......”
“아, 또 생각 난 게 있는데요. 사막 한가운데에서만 자란다는 호아 선인장이랑 대머리 독수리 알찜이랑 식인 도마뱀 구이가...”
“...구이가?”
“... 먹고 싶대요. ‘아기가.’”
“...알겠다. 또 필요한 것은 없느냐.”
“음... 방울뱀 꼬리 튀김과 붉은 전갈 찜도 땡겨요... 아무튼 다녀 오세요. 야스카산.’”

태양족을 통치하는 강력한 수장. 야스카산. 그가 매일 밤 달리는 이유를 전사들은 알까. 방긋 웃으며 아사신이 곧이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냉큼.”

추욱 쳐진 어깨를 하고 야스카산이 밤길을 나선다.
 족장 달려. 빠라빠라빠라밤.


 이국가 요식업 파란만장 스토리!
2006년 하반기! 폭풍이 밀려온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를 능가하는 실감나는 외국인 연기!
 대륙의 아이돌로 떠오른 가수 ‘아사신’의 첫 영화 데뷔작! 연기 천재 ‘야스카산’이 극비리에 연기 변신 감행! 초호화 해외 올 로케이션! 제작비 천억원! ‘반지의 제왕’ 특수 효과팀과 같은 동네 사무실을 쓰는 ‘야매 프로덕션’ 전격 투입! ‘사부’의 작가 ‘M버’가 극본 및 감독을 맡은 초 절정 위험한 ‘잘 멕이는’ 러브 스토리!
< 험난한 관계!>  커밍 쑤운~! 기대하시라!
                                                          <속편에서 계속>(뻥입니다)